• 최종편집 2025-05-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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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혈압·당뇨병 환자, 이제 집 근처에서 맞춤 진료 가능
    [서울=2025.05.24.] "당뇨·고혈압, 이제 동네의원에서 개인 맞춤형 관리 받으세요"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고혈압과 당뇨병 환자들이 집 근처 동네의원에서 맞춤형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사업은 2025년 5월 기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고혈압·당뇨병을 앓는 환자가 직접 참여 의원에 방문해 신청하면, 1년간 개인별 질환관리계획에 따른 정기적 교육과 상담을 제공받는다. 의사뿐 아니라 케어코디네이터(간호사·영양사)도 함께 참여해 전화나 메신저를 통한 쌍방향 소통으로 환자의 생활습관과 건강상태를 밀착 관리한다. 환자는 전체 서비스 비용 중 교육·상담과 일부 검사료 및 재진 진찰료에 한해 20%만 부담하면 된다. 단, 질병관리청의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사업에 이미 참여한 환자는 중복 신청이 불가능하다. 참여를 원하는 환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누리집이나 ‘The건강보험’ 앱의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 사업 참여의료기관 찾기’ 메뉴를 통해 인근 참여 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해당 의원을 방문해 신청서를 작성하면 등록이 완료된다. 보건복지부는 이 사업을 통해 만성질환 환자의 조기관리와 지역 의료기관의 기능 강화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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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손학규 “김문수 지지”… 유세현장선 ‘이재명 지지’ 말실수 해프닝
    [서울=2025.05.23.] 손학규 “김문수 지지”… 유세 현장선 ‘이재명 지지’ 말실수 소동 2025년 5월 22일, 경기 광명시 철산동 철산로데오거리에서 열린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유세 현장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김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하는 자리에서 “이재명을 도와야겠다”는 말실수를 한 것이다. 손 전 대표는 이날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사람은 김문수뿐”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연설 중 “그래서 이재명 지지를 선언했다”고 외쳐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동시에 의아한 반응이 섞인 5초 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아, 김문수 지지 선언을 했습니다”라고 정정했다. 이 같은 해프닝은 그의 정치 인생에 드리운 ‘철새 정치인’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는 평가다.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 민생당 등 다수 정당을 거치며 당적을 여러 번 변경해왔다. 특히 2020년 총선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후 다시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같은 날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 전 대표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김 후보의 개헌 및 정치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단일화 과정에서 김문수가 승리했다. 이제 대선이 열흘 남았다. 나라를 살리려면 김 후보밖에 없다”며 지지를 재차 강조했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선거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번 해프닝은 단순한 말실수를 넘어, 선거 막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손 전 대표의 잦은 정치 노선 변경과 발언의 신중함 부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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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손흥민,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 품고 귀국…“이제 나는 레전드”
    [서울=2025.05.23.] 손흥민의 첫 메이저 우승, 기다림과 헌신의 이름으로 “오늘만큼은 나도 토트넘의 레전드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22일,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손흥민(33·토트넘 홋스퍼)은 트로피를 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는 15년 유럽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그가 처음으로 맛본 우승의 감격이자, 수많은 좌절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손흥민이 이끄는 토트넘은 2024-25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는 브레넌 존슨의 전반 42분 결승골에 힘입은 토트넘의 완승으로 끝났다. 손흥민은 후반 22분 히샬리송과 교체 투입돼 그라운드를 누볐다. 스프린트 대신 수비 가담과 조직력으로 팀의 리드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토트넘은 이번 시즌 잦은 부상과 부진한 리그 성적(17위)으로 많은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앙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리그보다 유로파리그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고, 그 전략이 적중했다. 손흥민 역시 시즌 중반 발 부상으로 6경기를 결장했으나, 결승전을 앞두고 몸 상태를 끌어올리며 팀을 위해 끝까지 준비해왔다. 손흥민은 201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2019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리버풀에 패했고, 리그컵 두 차례 결승에서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FIFA 푸스카스상, 발롱도르 후보 등 화려한 개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우승 없는 스타'라는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우승 직후 손흥민은 기내에서도 트로피를 안고 귀국했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태극기를 두른 채 환한 미소로 메달을 목에 건 손흥민의 모습은 전 세계 축구팬의 마음을 울렸다. 우승 직후 공개된 영상에서 그는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트로피를 들다가 밀쳐져 생긴 상처”라며 웃음을 지었다. 또한 결승전 직후 손흥민은 관중석에 있던 아버지 손웅정 씨와 뜨겁게 포옹하며 오열했다. 축구인생 전 과정을 함께한 아버지와의 이 장면은 '인내와 헌신의 결실'이란 점에서 큰 울림을 안겼다. 손흥민 이전에도 유럽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한국 선수는 있었다. 차범근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UEFA컵을 두 차례 들어올렸고,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경험이 있다. 하지만 결승전 엔트리에 들지 못한 박지성과 달리, 손흥민은 주장으로 경기에 직접 나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 주장이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을 이끈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또한 이날 우승 세리머니에서 UEFA가 준비한 메달이 부족해 손흥민을 비롯한 몇몇 주축 선수들이 수여받지 못하는 해프닝이 발생했으나, 곧 라커룸에서 메달을 전달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손흥민은 이 장면에서도 특유의 여유와 유머로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토트넘은 5월 26일 프리미어리그 최종전 브라이턴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미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이 경기는 시즌을 마무리하는 축제로 치러질 전망이다. 토트넘 구단은 에드먼턴 그린부터 스타디움까지 우승 퍼레이드를 준비 중이며, 손흥민은 팬들과 기쁨을 나눌 예정이다. 손흥민의 이번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선 상징적 사건이다. '스타는 떠났지만 캡틴은 남았다'는 말처럼, 그는 수많은 이적 제안을 마다하고 토트넘에 남아 헌신했고, 결국 레전드로 기록됐다. 눈앞의 영광보다 팀과의 동행을 택한 그의 선택은 오늘날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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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모국어 밖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다와다 요코, 한국 독자와의 대화
    [서울=2025.05.23.]일본 출신의 세계적 작가 다와다 요코(65)가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2025 세계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참석하여 한국 독자들과의 교류를 마쳤다.이번 방한은 2011년 이후 세 번째로, 대산문화재단과 교보문고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도쿄에서 태어난 다와다 요코는 1979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이주한 후, 일본어와 독일어 두 언어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그녀는 '이중언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모국어와 외국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다.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와다 작가는 “문학은 모국어 밖으로 나가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며, 모어 바깥의 언어적 ‘뒤섞임’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또한, “같은 소리의 단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고방식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며 언어유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의 대표작인 『헌등사』와 『히루코 3부작』(『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 등은 이러한 언어 실험과 경계 넘나들기의 결과물로,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다와다 작가는 AI 번역 기술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번역 정보를 학습하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문장도 늘어나게 된다”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또한, “침묵은 매우 위험하다. 대화하고 수다를 떨지 않으면 모든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의문”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다와다 요코는 19일 교보인문학석강 강연을 시작으로, 20일 서울대 독일어문화권연구소 주최 낭독회, 21일 은행나무 주관 북토크, 22일 민음사 주관 북토크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한국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다.또한, 22일에는 김혜순 시인과 비공개 특별 대담을 진행하였으며, 해당 내용은 다음 달 발간되는 계간 문예지 ‘대산문화’ 여름호에 수록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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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단일화는 해법일까? 보수의 딜레마와 이준석의 계산
    [칼럼] 흔들리는 대선판, ‘단일화’는 해법인가? - 보수의 결집, 중도의 유동, 그리고 이준석 변수 대선 D-11, 변수는 끝나지 않았다 2025년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막판 판세가 요동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일정 기간 5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우세를 유지했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김문수·이준석 두 후보의 지지율 합이 오차범위 내에서 이 후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이재명 리스크와 보수진영의 결집, 그리고 이준석이라는 ‘제3 변수’가 선거판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분열된 보수, 단일화 요구 급증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문수(34%)와 이준석(11%)의 합산 지지율은 이재명 후보(46%)와 불과 1%포인트 차이로 좁혀졌다. 이에 따라 보수 유권자들 사이에선 '이재명 저지'를 위한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이준석 후보는 22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어떤 인사와도 단일화 논의를 하지 않겠다”며 완주 의지를 재확인했다. 보수 결집과 중도 이탈 최근 보수층, 특히 PK지역과 60대 이상 유권자 사이에서 김문수 후보 지지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한 조사에선 PK에서 김 후보가 43%, 이 후보가 36%로 역전되었고, 70대 이상에선 김 후보가 20%포인트 이상 앞서기도 했다. 이는 국민의힘 내부 혼선에도 불구하고 전통 보수 지지층의 전략적 결집 결과로 해석된다. 민주당의 ‘독주’ 흔들림 이재명 후보는 한때 50%를 넘나드는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지만, 최근엔 40% 중반으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부자 몸조심’ 전략이 이슈 주도력을 잃게 만든 데 따른 반사적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이준석 후보는 두 자릿수 지지율로 선거비용 보전 기준선을 넘기며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강경한 이준석, 애매한 김문수 단일화는 수학적으론 의미가 있으나, 정서적·정치적으론 복잡하다. 이준석 지지층의 상당수는 김문수에 대해 비호감이며, 반대로 김문수 지지층 역시 이준석을 배척하고 있어 단일화 시 일부 이탈은 불가피하다. 이재명 후보 역시 보수의 단일화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유세 메시지로 맞서고 있다. 단일화 시나리오'의 유효성 국민의힘은 사전투표 시작일인 5월 28일까지 단일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이준석을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메시지를 내부적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준석이 직접적으로 과거 당내 인사들의 인신공격과 문자 협박 등을 거론하며 거부 입장을 밝힌 이상, 단일화 성사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대선은 단일화가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수치상의 계산이 정서적 지지를 담보하지 못할 때,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킬 수 있다. 유권자들은 단순한 후보 합산이 아닌 ‘정치적 명분’과 ‘비전의 설득력’을 기준으로 최종 선택을 할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바꾸는 선거는 ‘누가 이길까’가 아니라 ‘왜 이겨야 하는가’에 답을 찾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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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美, 주한미군 4500명 철수 검토…괌 중심 인도태평양 재배치 전략
    [서울=2025.05.2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 복귀 이후,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2만8500명 중 4500명을 괌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 내 미군 병력의 약 16%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현지시간 22일 복수의 국방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구상은 아직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는 않았으며, 북한에 대한 정책 옵션의 하나로 비공식 검토가 진행 중인 단계다. 국방부는 관련 질의에 “발표할 내용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피트 응우옌 대변인도 병력 이전에 대한 언급 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이번 주한미군 재배치 검토는 단순한 병력 이동 이상의 전략적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 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실제로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전략 축은 중국군의 대만 침공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군사전문가들은 주한미군 철수 시 한반도 안보 공백이 우려되며,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 미국의 지역 동맹국들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지난달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새뮤얼 퍼파로 인태사령관은 병력 감축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WSJ는 “만일 주한미군 병력을 괌 등 인태 내 타지역에 계속 주둔시키는 방식이라면 이 같은 우려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괌은 중국군의 접근이 어렵고 전략적 위치상 핵심 병력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방안은 국방전략(NDS) 수립 과정에서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 2일 NDS 수립 지시를 내리며, 중국 억제와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주요 지침으로 제시했다. 주한미군의 재배치 여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국의 군사지원 정책 변화 등과 맞물려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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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故 김새론 유작 '기타맨', 마지막 무대에 선 해맑은 얼굴"
    [서울=2025.05.21.] 고(故) 김새론 배우의 유작 영화 '기타맨'이 오는 5월 30일 개봉을 앞두고 언론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공동 연출을 맡은 이선정, 김종면 감독이 참석해 고인을 추억하며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전했다. '기타맨'은 삶의 벼랑 끝에 선 기타리스트 기철이 밴드 '볼케이노'를 만나 음악을 통해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음악 영화다. 극 중 김새론은 키보디스트 유진 역을 맡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역할을 소화했다. 이번 작품은 김새론이 지난해 11월 촬영을 마치고 약 3개월 뒤, 지난 2월 16일 향년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유작으로 남게 됐다. 이선정 감독은 김새론이 자숙 중이던 당시를 회상하며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고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이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더 좋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배우가 이런 작은 독립영화에 진심을 다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는 김새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개봉을 추진했다고 밝혔으며, "편집 중에도 고인의 얼굴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지만, 극장 개봉을 약속했던 그날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촬영 당시 김새론은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차량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으며,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가면 단번에 몰입해 NG 없이 연기를 소화하는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보였다는 후문이. 영화 속 유진이 마지막으로 건네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대사는 관객에게 고인의 목소리처럼 다가오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관객과 평론가들 사이에선 작품 자체에 대한 완성도는 아쉽다는 평이 있지만, 김새론의 순수한 표정과 연기는 관객들에게 진심으로 각인되고 있다. 김새론은 아홉 살 때 영화 '여행자'로 칸 국제영화제에 진출하며 천재 아역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아저씨', '도희야', '이웃사람' 등을 통해 섬세한 연기를 펼쳐 왔다. 그러나 2022년 음주운전 사고로 인해 활동을 중단했고, 이후 복귀작으로 '기타맨'을 선택했다. 이와 함께, 김새론을 모티브로 한 소설 『괜찮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주목받고 있다. 과학기술자 출신의 작가 록키박은 젊은 배우의 죽음과 청년의 삶을 주제로 문학에 도전했고, 아역배우 뉴니와 청년 캐니의 상처를 통해 이 시대의 고독과 생존의 현실을 묘사했다. 뉴니는 무대 위에선 빛났지만 현실에서는 외로웠고, 캐니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캔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틴다. 록키박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들을 문학으로 담고 싶었다"며, 이 소설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불빛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소설 "괜찮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교보문고 등 국내 주요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기타맨'은 단순한 음악 영화가 아닌, 배우 김새론의 마지막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목소리와 얼굴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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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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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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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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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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