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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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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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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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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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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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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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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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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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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1
  • 한베 가족의 비극 : 베트남의 이례적인 사형판결
    최근 베트남에서 이례적인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수는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인이다. 본래 베트남에서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법정 최고형은 마약 관련 범죄, 자국민 살해, 극악의 보이스피싱 범죄에 해당 되는데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에 살해 당한 사람이 한국인이며 살인자 또한 한국인이다. 살인자인 한국인은 지난 3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베트남 현지인 아내를 폭행하고 기르던 개를 죽이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 징역형에 베트남 현지에서의 추방으로 끝날 수 있다. 이에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대피한 베트남 아내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시아버지인 살인자의 부친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이에 살인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일 뒤 베트남에 왔고, 아들의 집에서 아들과 술을 마시며 아내를 잘 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그러나 해당 살인자인 아들은 아버지가 아내 편만 들고 자신을 혼냈다고 생각해 격분해 아버지가 잠든 뒤 흉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인 아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한국인 아버지를 존속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에 베트남에서는 발칵 뒤집혔다. 베트남의 사회적인 통념상, 존속 살해는 아무리 극악의 범죄자라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이건 일반적인 살해 범죄가 아닌 도덕적인 측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선 살인자인 아들은 베트남 공안에 체포되었고, 대상이 외국인 용의자에 피해자 또한 같은 국적의 외국인이었기에 사건 심의 자체도 논란에 휩싸였다. 사법부의 한 편에서는 "외국인이 외국인을 죽인 사건인데 남의 나라 사람을 두고 법정 최고형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나?, 그는 한국에 넘겨 한국 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건은 베트남에서 벌어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이 사건은 존속 살해라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사회적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주장하고 있기에 생각보다 심의가 오래 끌었다. 사건 심의가 복잡하게 끌려 간 배경에는 유교적 사상과 불교적 사상이 남아 있는 베트남의 전통 문화 때문이다. 베트남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매년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은 불교의 여러 기념일 중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을 부란(Vu lan)기념일이라 하는데 우리가 카네이션을 드리는 것과는 달리 부모님에게 장미를 드리고,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날로 아주 각별하고 특별한 날이다. 이러한 전통은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은덕을 베풀며, 아름다운 미덕을 쌓는 도덕, 문화 특징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날은 우리의 어버이날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부란절은 중원절(Tet Trung Nguyen)이라 하여 부모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 날의 유래는 목건(目犍)이라는 보살이 일생에 죄가 많아 저승에서 굶주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효자였던 목건의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어미에게 공양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음력 7월 보름날, 제례를 위해 모인 주승들의 도움으로 결국 어머니를 구했다고 전한다. 이후, 부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목건련처럼 하라고 일렀다. 부란은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해 생겼고 요즘은 부모뿐 아니라 조상에게도 효(孝)를 바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부란 공휴일은 매년 부모님과 조상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존재하게 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자식은 항상 부모가 키워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한 날이 되었다. 부란이 돌아오는 계절이 되면, 많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고아, 독거 노인들을 위해 선물을 주는 방법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이런 일들은 베트남 전통과 도덕문화의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뜻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존속 범죄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것은 이와 같은 베트남의 사회 도덕적인 상황과 무관치 않다. 패륜 범죄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과 더불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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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1
  • 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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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0
  • 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1970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바레인에 대한 주권요구를 포기하게 하고 바레인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5일 바레인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8월 바레인의 샤이크 이사(Shaikh Isa) 국왕은 토후 명칭을 아미르(Amir)로 바꾸고, 1973년 5월 26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 내 급진 좌익 세력들의 침투로 인해 왕정 위협과 혼란이 우려되었고 이사 국왕은 결국 칙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및 사법, 행정 등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레인은 1975년 8월의 국회 해산과 더불어 정당 활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고, 강력한 국왕 중심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레인의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역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나타난다. 알 칼리파 가문은 아라비아 종족 연맹체인 바니 우트바(Bani Utbah)를 계승한 수니파 상인 가문 중 하나로 분류되며 1766년 본거지인 쿠웨이트에서 알 주바라,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카타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안에는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국고를 채울 수 있었고 1783년 알 칼리파 가문은 오만이 지배하고 있던 카타르 동쪽의 바레인 섬을 침공하여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카타르의 침공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인물이 아흐메드 빈 무함마드(Ahmed Bin Muhammad)로 그가 카타르의 1대 국왕으로 알려진 알 하킴(Al Haqim)이다. 하킴이라는 이름은 “정복자 아흐메드”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흐메드 알 파테(Ahmed Al Fat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칼리파 가문이 무력으로 이익을 장악한 것은 이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아흐메드의 통치 이후 바레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이집트의 위협도 존재했고 오만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오만의 식민 통치를 받기도 했다. 1803~1809년의 시기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전락했고 1810년부터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20년 영국이 중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바레인에 이르게 되자 바레인 정부는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식 근대 국가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레인은 부족 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 관련 문제는 종교 법정에서 관할했다. 위원회는 진주 생산과 팜 농장, 어업 등 경제 전반을 관여했으며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1869년부터 192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바레인을 통치한 이사 빈 알리(Isabin Ali)는 바레인의 최장기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부터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하마드 빈 이사(Hamad Bin Isa, 재위 : 1923~1942)는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를 고문으로 두고 사실상 영국이 통치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레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막대한 양의 석유다. 바레인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해 1932년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다. 이후 바레인 경제는 어업과 진주 생산에서 석유 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오일머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현재 바레인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로 나타나고 통치 세력인 수니파는 소수 종파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 되는 의회 해산은 종파 갈등으로 전이되었으며 이후 바레인은 지금까지도 시아파의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시아파 수장 국가인 이란과의 관계도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이란에서 파생된 ‘바레인 해방 이슬람 전선’이 바레인의 지도 세력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대국의 힘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인정받는 것은 중동의 작은 나라 왕실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바레인 왕실은 특히 서구와의 관계 처세에 능숙한 국가다.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탄생지이면서 모범국가인 영국, 미국과 아주 친한, 친 서구 국가이다. 사실 오늘날 바레인 왕국의 탄생은 영국의 힘이나 다름없다. 중동에서 영국이 만든 두 개의 괴뢰 국가가 있는데 하나는 바레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예부터 상인이던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것은 1820년 영국과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1861년에는 영구적인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은 바레인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영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에서 소국(小國)들의 입지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강대한 국가가 탄생하여 자국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바레인 침공을 막아내며 독일 등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26~1957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바레인의 최고행정관(Chief Administrator)을 역임한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 경은 바레인의 민, 형사 사법체계를 만들고 경찰 기능을 구성했으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대중화 된 교육을 도입하는데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레인의 지방분권화와 석유 탐사에도 크게 공헌했다. 당시 중동지역 여학교도 1928년에 처음으로 설립됐고 노예제도 폐지됐다. 전화 도입, 신문 발행, 영화관, 방송국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나타난다. 이어 바레인 왕실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 영국 왕실과도 친밀했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할 때 중동의 군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왕자나 공주들을 보냈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의 결혼식에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아랍의 봄’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2012년 5월엔 윈저성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비공식 오찬에도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한 데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방영이 좌절되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도 영국 서리(Surrey)에 있는 애플가스 컬리지에 진학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리즈 학교(Leys School)에 다녔다. 이후 햄프셔의 엘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68년 졸업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영국군 장교로도 복무한다. 하마드 국왕의 아들인 살마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왕세자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나마에 영국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칼리드 빈 하마드 바레인 외무장관과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이 건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 의지하던 바레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질서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마드 국왕은 영국에서 독립한 다음 해인 1972년 왕세자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대학 학부는 워싱턴D. C. 아메리카 대학 출신으로 알려진다. 미국과의 친분은 중동 내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깊은 관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격화되자 사우디군 1,000여 명이 바레인에 파견되었다. 역시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 역시 50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바레인의 치안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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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0
  • 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하나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차드 분쟁은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초기 남북갈등 시기는 1966~1979년이고 두 번째, 북부 구쿠니파로 알려진 국방장관을 지지하고 있는 종파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하브레파 간의 분쟁은 1980~1987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저항세력반군연합(UFR) 간 분쟁은 1990년~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에게서 탈식민화된 이후 대략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통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에 따른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의 반발 또한 집중되어 민주주의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군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이제까지 조직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으로 인해 국내적 불안정정이 고조되어 반군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지자 반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보코하람과 연합도 불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북부 세력 출신이었던 이드리스 데비가 1990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차드 분쟁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독재 정권이 이어오고 있는 상기의 요인들이 남아 있는 한, 차드 분쟁은 전쟁 수준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차드 내전의 분쟁 전개에 관해서는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과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차드 내전은 종결되는 듯하였으나, 차드의 통일을 달성한 하브레 정권이 독재 탄압 정치를 자행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 하브레의 최측근이자 군사고문인 이드리스 데비가 1989년 수단으로 망명한 이후 1990년 11월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남부 반군 세력의 지원을 얻어 하브레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차드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12월 수도인 은자메나를 공략하여 하브레를 축출하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93년 1월 신(新) 헌법 제정을 위해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정 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3월 국민투표에서 신(新) 헌법안이 승인되는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차드 내전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었다. 1996년 6월에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드리스 데비가 재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이드리스 데비의 구제인민운동(MPS) 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기타 소수 야당과 대연립 내각을 성립하였다. 1998년 5월 이드리스 데비는 남부 지역의 반군(FARF)과 평화협정을 조인하였고, 반군 세력을 합법, 정당화시키는 등 기존의 반군 세력을 정치권,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3년 리비아에 거점을 둔 저항군 반란연합(UFR)이 반란을 재개하고 투쟁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니제르와 리비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여러 반군 세력들이 내전의 잠재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차드 정부 또한 주변국에 거점을 두고 세력을 유지하는 반군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6년 12월 리비아의 변화와 합의를 위한 차드전선(Chadian Front for Change and Accord, FACT)이 리비아 정부의 공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하자 차드 정부는 리비아 국경을 폐쇄하고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드라스 데비의 장기집권이 지속됨에 따라 차드 내에서도 반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점차 증대되었다. 2016년 2월에는 같은 해, 4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에 이드라스 데비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될 수 있는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2016년 5월, 두 차례의 선거를 거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데비 정권과 집권 여당의 주도로 대통령 임기 연장을 주축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로,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왔다. 해당 헌법 개정안은 첫째,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6년 으로 연장하고 둘째, 국무총리제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으며 셋째, 국회의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 등을 명제로 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고 대통령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반군인 공화국 구원을 위한 군사위원회(Military Command Council for the Salvation of the Republic, CCMSR)는 2018년 8월에 차드 영토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 CCMSR은 북부 지역의 군 주둔지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부군과의 충돌이 저 강도 수준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리비아에 주둔하던 UFR 또한 2019년 초 차드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정부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차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이 UFR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였고, 250여 명의 반군이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드 국토행정 공공안보부 장관은 같은 해, 3월에 리비아 접경지역인 북부 지역의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차드의 북부, 동부지역에서는 금광업자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고,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충돌 등이 역시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공동체 간의 충돌로 인해 사회 불안정이 점증하고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광부업자들 간의 충돌은 정부의 지하자원 발굴 및 국가 이익의 배분 등으로 인해 발생해 왔다. 최근에는 CCMSR 반군 또한 연루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의 충돌은 2019년에 현저히 빈번해지게 나타났다. 정착민과 아랍 유목민들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민간인이 소지한 무기를 압류하는 조치를 취한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가 심화되어 5월 16일에는 사망자 12명, 5월 19일에는 사망자 22명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차드 내전에 대한 분석과 저 강도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차드 내전은 1990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저 강도 분쟁의 형태로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8~90년대처럼 대규모 전쟁은 발발하지 않고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반군 세력들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드 분쟁이 저 강도 수준으로 장기화되는 것은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대내적으로는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드에서는 내전에서의 승리, 혹은 쿠데타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어 왔다. 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하브레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권력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드라스 데비는 쿠데타 이후 민주화 정책을 취했으며 남부 지방의 반군들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획득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반군이 여전히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또는 이웃 국가 내부 상황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아 왔다. 차드 분쟁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대외적 요소로는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반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차드의 반군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리비아의 지원 하에 차드 반군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안보적 위기가 닥쳐오고 테러리즘, 공동체 간 분쟁이 격화됨이 심화되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정권 안정을 위해 폭정도 불사하게 되었다. 차드는 보코하람에 의한 테러 위협과 공동체 간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와 같은 새로운 안보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안보 이슈들이 차드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지만 차드 분쟁의 악화 요인이자 전쟁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초, 국제 위기 감시 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보코하람 반군 보고서를 통해 보코하람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이 10만 명 이상임을 밝하기도 하였다. 또한 차드에는 보코하람 위협으로 발생한 난민 7천여 명이 차드로 유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17년 이후 급증한 보코하람에 대해 차드 정부는 다국적군의 연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코하람은 주요 위협 요인이다.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은 국내적 불안 정정을 높임으로 인해 반군 활동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는 차드 북부 지방의 티베스티(Tibesti) 지역과 동부 와다이(Ouaddai) 및 실라(Sila)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실라 및 와다이 지방에서 목축업자와 유목민 간에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범국가적인 우려라고 규정하였으며 2019년 8월에는 해당 지방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공동체 간의 폭력 사태는 차드 정부가 국내의 만성적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차드로 유입된 반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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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9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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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9
  • 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 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 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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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
    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 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 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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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 : 바이든 일가의 조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 내용은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으로 Хантер Байден, увольнение генпрокурора Украины и коррупция в Бурисма (헌터 바이든,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해임과 부리스마의 부패)라는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헌터 바이든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후광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가스회사인 부리스마(Бурисма) 홀딩스의 이사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5년간 부리스마 이사로 일하며 매달 8만 달러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헌터 바이든은 자신이 이사가 된 것이 아버지의 후광이었음을 인정했다.. 헌터 바이든은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분야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말 자체는 트럼프 측이 재기한 부분에서 아버지 덕에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 것이 크게 힘을 받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비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사가 되어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 자체가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이사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인사 비리(Personnel corruption)"이다. 게다가 헌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업한 경험도 없었고, 아버지 조 바이든의 지역구인 델라웨어에서 주 정부 허가를 요구하는 업체의 로비를 하는 등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부리스마 홀딩스 자체가 미국과 절대적인 유착이 있었던 그룹이었기에 조 바이든의 아들인 헌터 바이든이 인사 비리로 인한 이사로 재직이 가능했다.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하고 있는 지역은 러시아의 가스관 "투르크스트림"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들어가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 부분이다. 게다가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해서 공급하는 가스보다 러시아가 가스관으로 보내주는 천연가스가 무려 3,5배가 더 저렴했다. 그러다보니 부리스마 홀딩스가 얻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미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흑해 위기와 돈바스 전쟁 등은 미국의 입김과 이에 반발하는 러시아 간의 간접적인 충돌로 빚어진다. 이렇게 뒤가 구린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검찰에서 이를 수사하려 했다. 그러자 조 바이든은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총장 빅토르 쇼킨을 해임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10억 달러의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고 압력을 넣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자주 독립 국가이자 민주적인 국가였다면 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이 들어올리가 있었겠는가? 이 또한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명백한 내정 간섭이다. 그리고 이 불법적인 내정간섭으로 인해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인 빅토르 쇼킨은 바로 해임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국제법으로 명백한 위헌인 내정간섭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러시아의 돈바스 진입, 소위 저들이 말하는 "침공(Invasion)"이라 떠들면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생비난을 해오고 있다. 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을 압박해 퇴진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바이든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압수 수색이나 특검 등의 수사라곤 전혀 하지 않았는데 무슨 증거가 나오겠는가? 그 외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푸틴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당시 "우크라이나 부패 척결을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이 비판은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쇼킨이 해임되고 난 후, 유리 루첸코가 새 검찰총장이 되어 부리스마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지만 하나 마나한 상황, 그 사이에 부리스마 홀딩스는 증거를 인멸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구린지 갑자기 검찰총장인 유리 루첸코마저 해임됐다. 해임된 사유는 정확히 밝혀진건 아니지만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루돌프 줄리아니와 접촉해 바이든 비리 혐의 증거 자료를 모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서 이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해 내부고발이 터졌다. 누군가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정보 당국의 감사관은 조지프 매과이어 국가 정보국 국장 대행에게 ‘긴급’ 사안이라고 통지했지만 사태가 긴박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회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지프 매과이어가 이 사건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특검이 들어가 수사할 수 있는 기회는 또 날라갔다. 이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100% 신뢰한다고 믿었던 루슬란 랴보샤프카 검찰총장의 주도 하에, 과거 수사의 적절성에 대해 재검토한 결과, 우크라이나 검찰은 헌터 바이든이 해당 사건에 연루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하였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미 사건의 증거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인멸된 상태였다. 이런 사건들로 볼 때 미국의 입김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가들, 경제, 사법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정도까지 본다면 우크라이나를 먹으려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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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7
  • 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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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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