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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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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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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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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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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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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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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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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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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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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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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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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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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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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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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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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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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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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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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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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드론의 폴란드 월경에 대한 나토 조약 제4조의 통산 8번째 발동과 동유럽 최대의 긴장 상태 구축
-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에 나타나는 사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개시된 이후 대치 중인 러시아와 나토 간의 긴장을 최악의 위험 수위로 끌어올린 결과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로 군사 지원하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던 도날드 투스크 총리는 과도하게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드론을 격추하는 과정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개해 유럽 대륙을 놀라게 했다. 물론, 대부분의 러시아 드론은 수십 또는 수백 ㎞를 비행한 이후 격추되지 않고 중간에 추락했다. 만약 해당 드론에 폭발물이나 대량살상용 무기들을 탑재하고 있었다면 엄청난 인명 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나토 전투기까지 긴급 출격해 격추 작전을 벌인 것은 이와 같은 우려 때문이다. NYT의 보도에 의하면 나토의 전투기가 회원국 영공에서 적의 드론을 공격하여 격추시킨 것은 1949년에 나토가 창립된 이후 처음이라 했다. 도날드 투스크는 긴급 각료회의를 연 이후 폴란드 영공이 러시아에 의해 총 19차례 침범을 당했고, 이중 드론 3∼4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대규모적인 도발로 규정했다. 더 나아가 폴란드와 나토는 러시아가 꾸밀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나토에 조약 제4조의 발동을 요청했다. 나토 조약 제4조는 영토에 대한 보존 및 정치적인 독립 이어 안보를 위협 받았던 회원국들이 긴급하게 협의를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일종의 약정문이다. 이에 따라 나토는 지난 10일 북대서양이사회(NAC)에서 러시아 드론의 나토국 침공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논의를 진행했다. 이는 1949년 나토의 창립 이후 조약 제4조가 발동된 것은 7차례 정도인데 이번이 제4조 발동의 8번째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가 드론 공격을 폴란드에 감행했고, 폴란드 뿐만 아니라 동유럽 나토 회원국 전체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개시되었던 2022년 2월 24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나토 국가들인 불가리아, 체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가 공동으로 나토 조약 제4조 발동을 요청했었다. 이는 동유럽 지역인 구소련권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군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니, 해당 지역 국가들은 엄청난 안보 위협을 느꼈었으며 러시아의 드론 및 미사일 오작동으로 날라왔다 해도 그러한 위협으로 인해 제4조 발동을 요청했을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러시아라는 거대한 곰 한 마리가 포효했다고 나토의 강아지 몇 마리가 놀라 지레 겁을 먹고 공동 대응을 요청한 꼴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 이후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 영공을 넘어온 것은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사실, 지난 9월 3일과 7일까지 두 차례 더 있었다. 이를 두고 벨라루스의 파벨 무라베이코(Павел Муравейко) 육군참모총장은 최근에 있던 러시아 드론의 월경 사건 등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드론 공격을 주고받다가 드론을 무력화하는 전자전 대응으로 인해 드론이 항로를 이탈했던 우발적인 사고라 주장했다. 게다가 이러한 우발적인 항로 이탈의 가능성을 폴란드 측에 사전 통보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폴란드 측도 벨라루스의 통보 사실을 확인했다. 이전에도 있었던 별거 아닌 사건으로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 영공을 침범한 것은 러시아 드론 만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의 미사일들과 드론들도 여러 차례 폴란드 영토에 낙하했다. 특히 2022년 11월에 우크라이나가 날아오는 러시아 미사일을 요격하는 과정에서 폴란드 민간인 지역을 오폭하여 타격하는 바람에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당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공동 조사를 통해 러시아가 폴란드를 미사일 공격했다며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그 난리를 쳤지만 조사 결과 우크라이나 요격 미사일의 오폭으로 밝혀져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드론은 또 다른 나토 회원국인 루마니아로 날아가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루마니아는 이렇게까지 오버하면서 난리 친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토 회원국들은 우발적인 사고로 사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되며, 나토 회원국은 러시아의 공격 대상이 아니다는 측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폴란드의 이번 반응은 매우 이례적이다. 드론이 평소보다 폴란드 영토 깊숙이 침투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전보다 더 많이 월경했기 때문으로 이를 두고 러시아의 공격으로 보았던 것이다. 폴란드 매체 TVP는 드론 한 대가 우크라이나와 국경에서 250㎞ 넘게 떨어진 폴란드 중부 므니슈쿠프(Mnishkup)에 추락했다고 했다. 그런데 폴란드 국경을 경계하고 방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러시아의 공격이 폴란드의 방공 시스템을 뜷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폴란드 국내 정치 상황을 덮기 위해 선전용으로 러시아가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자주 이용하는 "북풍"과 매우 유사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정치권에서는 도날드 투스크 총리와 카롤 나브로츠키(Karol Nawrocki) 신임 대통령 사이에는 정치적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다.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폴란드 반공주의 운동사,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조직범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반(反) 우크라이나 노선을 걷고 있는 상태에 있다. 도날드 투스크 총리는 '러시아의 위협', 한국의 소위 '북풍'과 유사한 '러시아풍'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선동하며 대통령과 맞서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투스크는 그 전날인 9일에 벨라루스에서 시작된 러시아-벨라루스의 자파드 합동 군사 훈련을 이유로 벨라루스와의 국경을 폐쇄하기로 했다. 그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끊임없이 이를 러시아의 도발과 공격으로 인식해 대러 공동 전선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나토에서 이같은 전쟁 선동을 그동안 프랑스의 마크롱이 계속 했었는데 요즘 마크롱이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핀치에 몰리게 되니 그 바톤은 폴란드의 투스크가 이어 받은 셈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텔레그램을 통해 폴란드 영토에 있는 목표물을 파괴할 계획은 없다고 주장하며 폴란드 측의 주장에 선을 그었다. 또한 폴란드 국방부와 드론 월경 사건에 대해 협의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합동 진상 조사와 규명에 협조할 의사가 있다고 했지만 폴란드는 이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투스크의 계획적인 선전선동인데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스크의 행동이 오히려 '러시아 드론 월경 사건'을 폴란드 측의 자작극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도 나타났다. 바로 나토 내 방공 체제가 엉망이라는 것인 드러난 것이다. 폴란드의 자체 국가 방공망 및 대공 시스템, 나토 공군 등은 이날 영공을 넘어온 러시아 드론을 몇 대 격추했다 한다. 독일 빌트지에 의하면 25대 중 고작 3대 격추했다고 한다. 이처럼 방공망이 취약하기 때문에 러시아 드론이 나토 국가 상공을 유유자적으로 돌아다녀도 잡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오히려 대대적으로 홍보한 꼴이 되었다. 이날 폴란드 공군은 이와 같은 러시아 드론을 잡기 위해 F-16 전투기까지 출격시켰다. 러시아 드론 하나 잡겠다고 그 비싼 F-16을 출격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더불어 나토 소속의 네덜란드 F-35 전투기까지 긴급 투입되었다. 여기에 이탈리아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독일 패트리엇 방공시스템까지 동원되었다. 그깟 드론 몇 개에 나토의 최첨단 방공망이 총 출동한 것이다. 그렇게 동원해도 격추한 드론이 최대 4대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드론들은 연료가 소진되면서 비행 중에 추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 드론 요격 작전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나토 최첨단 방공망이 총동원 된 성과치고는 매우 머쓱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야로스와프 그로마진스키(Jarosław Gromadziński) 폴란드 육군 중장 또한 유로뉴스의 인터뷰에서 이번 작전이 나토의 역량을 보여준 성공적인 작전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이어 첨단 전투기 및 방공망 등의 투입은 파리를 잡기 위해 대포를 쏜 격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사건 다음 날인 11일에 나토 동맹국에 방공 자산의 추가 배치를 긴급하게 요청했다.이에 트럼프는 10일 폴란드의 나브로츠키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논의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이후 나토 동부 지역의 방공망 강화를 위한 조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스웨덴은 항공기, 네덜란드는 패트리어트 방공시스템과 안티 드론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어 영국과 프랑스, 독일, 체코, 이탈리아, 발트 3국도 곧 지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나 나토 입장에서 볼 때, 이번 드론 월경 사건은 나토가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보복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닌 취약한 방공망을 파악하고 이를 강화하는 측면으로 돌리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와 당장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나섰지만 결국에는 꼬리를 내린 셈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이 사건에 대한 논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더불어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군사적인 대응 요구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동시에 나토 동부 지역의 취약한 방공망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요구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크라이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측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나토가 러시아와 전쟁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최상의 조건으로는 참전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등으로 방공 및 안티 드론 장비들이 추가로 배치되면, 러시아의 공습을 막기 위한 방공 자산을 확보하는 것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젤렌스키도 러시아는 드론으로 폴란드를 침략한 행위 등으로 자신들의 동맹국인 서방 세력들로 하여금 겨울이 오기 전에 우크라이나에게 방공 시스템을 이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는 이러한 러시아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드론 월경은 나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라며 비행금지지역을 설정하고, 집단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지만 하루가 지나면서 집단대응의 주장은 많이 수그러진 상태다. 이는 트럼프의 대응 방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번 사건에 대해 매우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를 침범했다니, 무슨 일인가? 이제부터 시작이다(Russian drones invade Poland. What's going on? It starts now)"라는 글을 올린 이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최종 보스나 마찬가지인 트럼프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몰아가면서 미국과 나토의 참전을 노렸던 자들에게 있어 트럼프의 이와 같은 대응은 실망스런 사건의 전개로 보인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이용해 우크라이나 상황을 알래스카 러시아-미국 정상회담의 이전 적대적인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목표였을 것인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트럼프의 입장으로 볼 때 전혀 전쟁을 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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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드론의 폴란드 월경에 대한 나토 조약 제4조의 통산 8번째 발동과 동유럽 최대의 긴장 상태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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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17세기 크림 칸국의 전성기와 오스만투르크의 후견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던 크림 칸국은 1466년 하츠 게레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중 장남인 누르 데블레트(Nur Devlet)가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받아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다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고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다. 크림 칸국을 구성한 부족들은 주로 몽골-타타르계였지만 이들은 투르크화 된 타타르였다. 우선 같은 타타르 족이었어도 몽골과 직접적인 관계의 타타르와 크림 칸국의 주 세력인 타타르와는 다른 부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누르 데블레트와는 반대로 투르크계 타타르 귀족들이 대부분 지지하던 자는 하츠 게레이의 6남인 멩글리 게레이(Meñli Geray)였다. 멩글리 게레이와 누르 데블레트와의 권력 정쟁으로 인하여 크림 반도 전역이 이들의 세력 다툼으로 번져가면서 불안한 정국을 유지했다. 멩글리 게레이는 자신의 형인 누르 데블레트가 세바스토폴을 떠나 케르치 지역에 순시를 나서자 누르 데블레트의 왕궁 수비대를 진압하고 궁에 들어가 대칸으로 즉위했다. 이에 누르 데블레트는 킵차크의 주력군과 함께 세바스토폴로 돌아와 성을 공격했으나 멩글리의 강한 수성 전으로 인해 고전했다. 그러나 1468년 초, 킵차크 칸국 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해 주력군이 대거 사라이로 퇴각하자 멩글리는 성 밖을 나와 누르 데블레트의 잔여 군대를 공격했다. 누르 데블레트는 멩글리의 군대에 대패하여 킵차크 칸국으로 도주했고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렇게 멩글리는 잠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형인 누르 데블레트는 카프카스에 주둔 중인 킵차크 군을 거느리고 다시 크림 반도에 입성했다. 멩글리는 케르치 해협을 봉쇄하고 누르 데블레트와 킵차크 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누르 데블레트는 케르치를 우회해 헤니체스크(Генічеськ) 지역으로 하여 들어와 비어있는 세바스토폴을 점령했다. 세바스토폴이 함락된 것을 안 멩글리는 급히 회군했지만 이미 누르 데블레트는 세바스토폴 성 밖까지 전초 기지를 만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킵차크 군이 케르치 해협을 건너 멩글리를 추격해오고 있었다. 멩글리는 제노바 식민지였던 카파(Qapa)로 망명했으며 멩글리는 카파의 제노바 인들과 동맹을 맺은 후 1469년 제노바 군의 지원을 받아 흑해를 건너 다시 세바스토폴 앞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멩글리는 1470년 1월, 세바스토폴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하치 게레이가 제노바 군을 방어하던 시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때 크림 군을 도울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누르 데블레트는 킵차크 군을 거느리고 세바스토폴 항구 입구를 봉새했지만 킵차크 군의 주력은 육군이었기 때문에 상륙해 오는 제노바 군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1차 저지선인 항구를 장악한 제노바 군은 이어 성을 향해 공성전을 감행했다. 초반에 누르 데블레트와 킵차크 군은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우세를 보였으나 카파를 거점으로 군대를 최대 15만까지 양성한 제노바 군과 맞서기에는 병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성 내 물자들이 봉쇄되었고 누르 데블레트는 세바스토폴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북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멩글리는 북문으로 진격해 퇴로를 차단하고 탈출하는 킵차크 군을 섬멸한 다음 형인 누르 데블레트를 사로잡았다. 멩글리는 누르 데블레트를 제노바의 감옥에 보내어 가둔 후 다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누르 데블레트는 1471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만투르크로 망명했다. 오스만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는 누르 데블레트를 맞아들여 폰투스의 총독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누르 데블레트가 폰투스의 해군을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메흐메트 2세의 신하들이 누르 데블레트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그를 이스탄불로 불러 올렸다. 한편 멩글리 게레이는 카파의 제노바 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세바스토폴 내의 항구들을 제노바 인들에게 내주고 그들이 장기 조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카파 뿐 아니라 제노바 시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세바스토폴에 몰려들었고 크림 칸국의 경제적인 요소들을 천천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1472년 전반에 걸쳐 제노바 인들이 세바스토폴의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크림 지역의 타타르 상인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타타르 상인들 뿐 아니라 다른 투르크 상인들도 크게 피해를 입게 됨으로써 불만이 고조되었다. 멩글리는 1473년에 베네치아 상인들도 끌어들여 크림 칸국의 상권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상인들은 제노바 상인들과 함께 크림 남쪽 연안과 인근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군사 기지를 세웠다. 그러한 상태에서 크림 칸국은 오랜 시간동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구속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멩글리 게레이는 당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항해 제노바와 테오도로스(Teodoros) 공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러한 부분이 오스만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테오도로스 공국은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과 오스만투르크 사이 오늘날 루마니아 콘스탄차와 도나우 강 삼각주까지 걸쳐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볼 때 오스만투르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국이었다. 이에 대규모의 해군을 도나우 강 하구에 파견한 메흐메트 2세는 육군으로 하여금 왈라키아를 견제하고 그 사이의 테오도로스 공국을 공격했다. 툴체아에 상륙한 오스만 군은 5차례의 전투를 통해 왈라키아와의 교통적 연계성이 있을 확률이 높은 요충지 갈라치를 함락시켰고 이어 콘스탄차를 공략해서 한 달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고 테오도로스 공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마침 크림 칸국에는 1474년 하츠 게레이의 4남이자 멩글리 게레이의 형인 하이데르 게레이(Hayder Gerey)가 얄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규모의 하이데르와 그를 후원하는 베네치아 공국의 함대가 대대적으로 크림 반도를 침공해 각지를 점령하고 세바스토폴을 공격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합류를 방해하기 위해 카파에 60여척의 함대를 포진시키며 도시를 봉쇄했다. 당시 멩글리 게레이는 상권을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강탈당한 타타르와 투르크 상인들의 불만이 팽배하여 이를 파악한 하이데르가 투르크와 타타르의 상권을 돌려주고 독자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공언했고 이들은 성 안에서 대량 소요를 일으켰다. 결국 멩글리의 세력이 약화되고 소요를 일으킨 상인들이 세바스토폴의 성문을 열자 하이데르가 입성하여 성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소요 사태로 인하여 멩글리는 세바스토폴을 탈출하여 옙파토리야(Евпатория)로 도주했다. 한편 오스만투르크는 테오도로스 공국을 멸망시킨 후, 제노바 인들의 도시인 카파를 공격했다. 1474년에서 1475년까지 벌어진 카파 공성전으로 인하여 카파의 제노바 인들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에 제노바 인들은 멩글리에게 사신을 보내 배후에서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이데르에게 밀려나 옙파테리야에 있던 멩글리는 위기에 놓인 카파의 포위를 풀기 위해 육로로 진군해 오스만투르크의 배후를 노렸다. 대칸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멩글리에게 제노바와 카파는 반드시 필요한 동맹국이었다. 카파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미콜라이프(Миколаїв)에 위치한 지역이었으며 옙파토리야를 떠나 카파에 이르기까지 여정은 매우 길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카파에는 물자가 떨어져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결국 오스만 군에게 성벽이 돌파당하며 마침내 함락되었다. 크림 반도를 지나 멩글리가 헤르손에 이르기까지 카파가 함락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차단된 정보의 허점을 이용하여 오스만투르크는 밤새 달려 헤르손을 기습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멩글리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대부분의 멩글리 군대는 전멸하거나 오스만 군의 포로가 되었고 멩글리 또한 오스만 군의 포로가 되었다. 오스만 군은 멩글리와 그의 제장들을 이스탄불로 압송했고 메흐메트 2세는 멩글리를 갈라타 탑에 가두고 자신에게 대항한 것에 대해 정복한 종족들과 국가, 민족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오스만투르크는 이어 크림 칸국까지 공격했고 하이데르와 베네치아 군을 축출했다. 이어 메흐메트 2세는 누르 데블레트를 다시 크림 칸국의 대칸으로 복권시켜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477년 킵차크 칸국의 아흐메드 칸과 그의 사촌 야니베그(Yanibeg)가 크림 칸국을 침공하여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이스탄불로 끌려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멩글리는 칸 자리를 되찾게 해준다면 오스만투르크에 복속하여 앞으로 영원히 술탄의 봉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고 때마침 킵차크 칸국에 멸망한 크림 칸국의 귀족들이 오스만투르크에게 킵차크를 추방하고 멩글리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하면서 1478년 멩글리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기 위해 출정한 오스만 군와 함께 크림 반도에 돌아왔다. 그리고 멩글리는 오스만 군의 도움으로 킵차크 군과 누르 데블레트를 함께 몰아내고 칸 자리를 되찾으면서 크림 칸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글리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한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들이 강력한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러시아 인들과 폴란드 인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더욱 오스만투르크를 염두 해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몽골계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도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크림 칸국의 위상이 오스만투르크 내에서도 매우 높았는데,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와 시몬 몬테피오레(Simon Montefiore)의 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의 왕통이 단절될 경우 제국의 술탄 위를 게라이의 가문이 이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는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러한 사실이 없었지만 그만큼 크림 칸국의 위상이 높았었고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공주가 크림 칸국의 칸과 동맹을 매개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오스만 황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71년 크림 칸국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레믈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약 10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당시 크림 칸국의 약탈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에 속한 동부 지역인 현재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매우 심각한 상태였는데, 크림 군의 노예사냥이 하도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땅을 경작했던 지주들까지 전부 노예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많아 다른 슬라브 인들이 경작하여 본인들의 것으로 삼았고 한동안 드네프르 강 일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공백지가 되다시피 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코사크들이 이 공백 지를 접수한 후에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도주해 온 농노들을 받아들인 후 세력을 키워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대단히 악명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반란이나 소요가 적었던 이유가 노예로 납치되는 것보다는 농노로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로 노예로써 상품 가치가 높은 처녀들이 납치의 주 목적이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납치해도 노역에서 병들어 죽기 쉽다는 이유로 납치하지 않고 살해했다고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해도 1474년부터 1694년까지 매년 평균 2만 명 가까이가 크림 타타르 전사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고 전해지니 당시 농노로 살기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는 상당했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상황이다 보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 입장에서는 국력 성장을 막고 오히려 세금이 줄어 그 영향력이 약화되는 주 요인이기도 했다. 이에 크림 칸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 해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지만 리보니아 전쟁의 실패로 인하여 흑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흑해 북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속국이 멸망하게 되면 크림 반도와 카프카스 동부 지역의 거점을 상실하게 되는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에게 패배하고 러시아와 쿠취크카이나르자(Quchikai)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1783년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이에 오스만투르크는 조약 위반이라며 러시아에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 항의에 다시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하게 된다. 1787년부터 1792년까지 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역시 오스만투르크가 패배했고, 1792년 러시아와 이아시(Iashi)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였으며 추가로 예디산(Yedisan)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하면서 급격히 그 세력이 쇠퇴했다. 그리고 마지막 크림 칸국의 대칸으로 서유럽 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던 샤힌 게레이(Shahin Geray)의 마지막도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1783년 러시아 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이후 감금에서 풀려나 자신이 태어났던 에디르네로 돌아오지만 이어 러시아 군을 끌어 들였다는 죄목으로 인하여 오스만투르크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가 같은 해, 로도스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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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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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17세기 크림 칸국의 전성기와 오스만투르크의 후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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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칸국의 건국과 크림 타타르 대족장 하츠 게레이의 통치기
- 원래 크림 반도는 고대 시대에 그리스 인들의 식민도시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곳에 스키타이가 이동해왔다. 그리고 스키타이 인들은 사르마트 인들에게 패배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크림 반도를 지배했다. 이 지역에는 또한 카프카스 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9세기부터 하자르나 페체네그, 킵차크-쿠만 인 등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흘러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몽골-타타르 인들이 모스크바 공국을 침략하기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 초원 지대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며 키예프 공국과 오랜 시간을 두고 대립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킵차크 칸국이 건국되기 전에도 이 유목민족들을 타타르 인으로 통칭하여 불러 오기도 했다. 그리스 인, 투르크계 알란 인과 기타 페르시아-아리안계 민족, 체르케스 인과 카프카스의 원주민 같은 여러 민족들이 크림 반도에 정착한 기타 투르크계 종족인 훈족, 하자르 족, 페체네그 족, 킵차크-쿠만 족 등 수많은 민족들이 혼혈하여 크림 타타르 인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들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종족은 킵차크-쿠만 인으로 알려진 폴로베츠 인이다. 11~12세기 폴로베츠 인은 볼가 강, 아조프 해,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점차 크림 반도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1241년 몽골-타타르 인이 러시아 남부에 침입하여 약탈하자, 폴로베츠 인과 키예프 공국은 서로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들 연합군들은 몽골군에 패했으며 당시 흑해 연안 북부의 폴로베츠 인 공동체도 몽골-타타르 인들의 공격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이들 폴로베츠 인들은 크림 반도의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고 철저히 은닉하면서 기회를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1244년 크림 반도 역시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에 함락되어, 크림 반도의 초원지대는 킵차크 칸국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시기 크림 반도에는 시린(Sirin), 아르긴(Argin), 바린(Barin) 등과 같은 타타르계 가문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후일 크림 타타르 귀족 계급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타타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는 몽골군에 의해 세워진 국가에 거주하는 모든 투크르계 민족을 통칭 및 지칭하는 명칭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건국된 크림 칸국(Crimean Khanate)은 1430년,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바투의 동생으로 알려진 샤이반(Шибан)의 후손인 하츠 게레이(Hacı Geray)가 세운 국가로 바투의 부친인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왕비이자 바투와 샤이반의 모친인 울리치 게레이(Ulitsy Gearey)가 케레이트 옹칸의 누이인 바르볼트 케레이(Barbolt Gearey)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주치의 결혼이 보르지긴 왕가와 케레이트 가문의 융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1433년 킵차크 칸국의 수도인 사라이에서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당시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울루 무함마드(Ulugh Muhammad)는 칸의 자리에서 추방되어 아들 무스타파(Mustafa)와 함께 도주하게 되었고 이들 부자는 볼가 강을 따라 올라가 킵차크 칸국의 국경을 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부자들은 새로운 칸인 셰이드 아흐마드(Syed Ahmed)에게 굴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볼가 강 상류와 카마 강이 만나는 카잔으로 도주하여 카잔에서 칸을 칭하면서 카잔 칸국을 세웠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은 지배층인 몽골-타타르족과 볼가 불가르 인들의 후예인 추바시 인, 핀-우그르 계의 모르도바 인, 투르크계의 바시키르 인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울루 무함마드는 카잔 지역을 9년간 통치하며 모스크바를 자주 공략하여 약탈하였고 이 외에도 멀리 노브고로드까지 원정을 자주 다니곤 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시 궁정 내부에서 반란이 발생하는 사태를 겪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아들인 무스타파였고 울루 무함마드는 아들에게 피살되었다. 이러한 내부 쿠데타로 인하여 무스타파의 동생 카심은 모스크바 공국으로 도주하게 된다. 이는 울루 무함마드가 막내아들인 카심을 총애했고 그를 다음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스타파는 부친과 카심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고 이는 무스타파가 노브고로드로 원정을 떠났을 때 촉발되었다. 무스타파는 동생인 카심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카심은 이미 모스크바로 도주한 상태였다. 무스타파는 카잔 칸국의 칸이 되면서 모스크바 공국 내에서 벌어진 내전에 관여했고 바실리 2세를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에게 포로로 잡혀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이 내전은 카심이 장님이 된 바실리 2세를 도와 카잔 칸국의 군대를 축출하고 반란 세력들을 모두 처형하면서 바실리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때 바실리 2세를 도운 공으로 카심은 그의 이름을 딴 카시모프라는 도시를 영지로 받고 카시모프 칸국, 혹은 카심 칸국이라는 일종의 모스크바 공국의 인정을 받고 슬라브 인들의 조종을 받는 국가를 건국하게 된다. 15세기 전반기 킵차크 칸국이 대거 붕괴되면서 크림 지역에는 독립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하츠 게레이(Hacı Geray)는 평소 킵차크 칸국에 불만을 가진 투르크 세력들을 규합하여 각 도시에 있던 킵차크 관리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크림 지역의 킵차크 관리들과 총독들은 1244년부터 1449년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1449년 크림 반도의 남쪽 연안과 인근 지역에서 킵차크 총독에 대한 반란이 발생하면서 수도인 사라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함으로 인하여 크림 킵차크 총독은 정부에게 별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군을 증강할 수 있었지만 반란이 발생하자 군대가 킵차크 총독에 모이지 않았다. 그러자 킵차크 총독은 크림 반도 남쪽 연안을 반란 세력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하츠 게레이가 크림 반도 서부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크림 반도 남쪽 연안의 반란군과 합세했다. 그리고 킵차크 정부군이 합류하기 전에 킵차크 총독과 몽골-타타르 세력을 축출하려 하였다. 하츠 게레이는 사라이와 지리적으로 멀다는 이점을 가지고 킵차크 총독의 군대를 드네프르 일대로 추방했고 하츠 게레이는 크림 반도 남쪽 연안의 세바스토폴에서 크림 칸국을 세웠다. 그러나 나라는 세웠지만 하츠 게레이가 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킵차크 칸국의 쿠축 무함마드(Küchük Muhammad, 1435~1459)의 반발이 가장 심했는데 1449년에 독립한 크림 칸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킵차크 칸국의 세력이 약해졌어도 드네프르 강 유역의 각 도시 군들은 여전히 킵차크 칸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封臣國)이었고 이들은 새로 건국된 크림 칸국을 자주 공격했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하츠 게레이는 제대로 된 칸으로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즉위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을 상대로 동맹을 맺었으며 이들 드네프르 강 유역의 소(小) 공국들에 반격까지 가해 드네프르 중류 지역까지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의 군사들이 돈 강을 건너 드네프르 지역의 크림 군을 공격했고 이후에는 크림 반도의 길목인 헤르손(Херсон)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하츠 게레이는 결국 포로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강화해야했다. 얼마 후 킵차크 칸국의 세력이 다시 강대해지고 모스크바의 세력 또한 드네프르 일대로 확장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하츠 게레이를 구원하기 위해 블라디스와프 브레스트 대공이 4만의 정예병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쟁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개입한 국제전이 되었고 하츠 게레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아 드네프르 지역의 킵차크 군을 공격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군과 함께 킵차크 군의 본영인 자포리제(Запоріжжя)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킵차크 군은 패배하여 사라이로 퇴각했고 하츠 게레이는 자포리제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의 호위를 받으며 칸으로 등극했다. 이렇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승인을 받아 칸이 된 하츠 게레이는 모스크바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함께 킵차크 칸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모스크바는 당연히 이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보내왔고 돈 강 평원 전투에서 모스크바-폴란드-크림의 연합군은 킵차크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돈 강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이후 1450년 킵차크 칸국은 크림 지역에 약 10만 대군을 파견했지만 하츠 게레이는 배후의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왕국, 오스만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킵차크 칸국을 고립시켰다. 킵차크 칸국의 10만 군대는 오늘날 크림 서쪽 케르치(Керчь)에서 하츠 게레이의 크림 칸국의 7만 군대에 의해 케르치 해협을 도하하는 도중 상당수 수장되는 패배를 당했다. 당시 이들 중 2만의 몽골-타타르 군이 포로로 잡혀 세바스토폴로 압송되기도 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크림 지역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귀족들의 노예가 되었다. 킵차크 칸국을 토벌한 하츠 게레이는 흑해를 사이로 점차 상인들을 가장해 세력을 확장해오는 제노바 인들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제노바 인들은 드네프르 강 하구와 돈 강 하구, 그리고 카프카스의 서해안에 상업적 거점을 확보하고 킵차크 칸국 및 모스크바와 교역을 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제노바까지 연결하는 항로에 거점을 둘 수 있는 지역을 물색하게 된다. 처음에는 드네프르 강 하구 지역을 항구로 사용하고자 했지만 지형적 특성상 항구를 건설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동반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기항지로 찾은 곳이 크림 칸국의 수도인 세바스토폴이었다. 제노바 인들의 해군은 막강했고 해상 세력에서 베네치아와 사보이, 나폴리와 함께 지중해 지역의 해상 상권을 장악하던 도시 국가였다. 하츠 게레이는 세바스토폴 인근까지 접근하려는 제노바 상인들을 모두 붙잡아 제노바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제노바 또한 해상 군사적 요충지인 세바스토폴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노바는 해군 8만에 400척의 대 선단을 동원하여 크림 반도를 공격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했다. 당시 크림 칸국은 제대로 된 해군과 함대가 없었다. 그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하츠 게레이는 1455년 오스만투르크에 사절을 파견했다. 이미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한 제노바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가 필요했고 하츠 게레이와 크림 군은 세바스토톨의 수성을 위해 상륙전을 봉쇄하기 위해 해변 가에 상당히 많은 양의 포대를 구축했다. 오스만투르크 또한 지중해 해안을 돌아다니는 제노바가 위협적이었고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지 불과 2~3년 밖에 되지 않아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 지역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오스만투르크는 1456년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 선단을 파견하여 유라시아로 연결되는 대륙을 봉쇄했다. 결국 남은 것은 제노바의 함선 400척과 상륙군을 포함한 8만의 대군이었다. 따라서 하츠 게레이는 1차 저지선의 포대로 나가 군을 지휘하게 된다.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하츠 게레이는 오스만투르크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선 방어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제노바 해군은 그 해 7월, 세바스토폴 바다 위에서 나타났고 이어 상륙을 시도했다. 이에 1선의 크림 군은 화포로 응사하여 제노바 군의 상륙을 철저히 방해했다. 이에 제노바는 대규모 함선들을 해안으로 접근시켜 화포로 근접전을 벌였다. 문제는 크림 칸국의 군대가 해안 방어전에 대한 경험이 전무 하다는 것이었다. 함선이 접안할 때까지 1선의 크림 군이 한 방어 행위는 화포를 쏘아 접근을 방해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이러한 약점을 간파한 제노바 군은 함대에서 닺을 내리고 함대의 접안을 시도했으며 포탄 속을 뚫고 상륙에 성공했다. 이어 1선에서 크림 군과 강력한 해병대를 앞세운 제노바 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중앙군이 백병전을 벌이는 사이 좌, 우익의 제노바 해군이 상륙에 성공했고 1선에 방어 군에 대한 포위, 섬멸전을 전개했다. 이에 하츠 게레이는 성 안으로 철수하여 수성 전을 벌이는 전략을 선택했다. 1선의 크림 군의 포대와 진지는 대거 파괴되고 대신 제노바 군의 포대가 들어섰으며 수많은 크림 군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1선 제노바 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전략은 실패했고 두 번째 전략인 수성 전에 나서게 되었다. 크림 칸국 세바스토폴 주민들과 크림 군은 이러한 상황에 맞서 4주 동안 공성전에 맞서 항쟁을 벌였다. 투석기와 화포를 앞세운 제노바 군은 서전의 승리로 기세가 올라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제노바 군은 크림의 수성 전략으로 인하여 성 내 진입에 계속 실패했다. 하츠 게레이는 수성 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모스크바에 구원을 요청했다. 모스크바 입장에서는 크림 칸국이 제노바에게 붕괴되면 드네프르를 따라 키예프에 도달할 것이고 키예프 공후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출정을 결행했다. 우선 페레야슬라블과 체르니코프의 군대가 출정했고 이어 트베리 군과 모스크바 군이 볼가 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남하하여 크림 동쪽 케르치 해안에 도착했다. 페레야슬라블과 체르니코프의 군대는 헤르손에 도착하여 대공은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의 명을 기다리게 된다. 바실리 2세의 도하가 허락되고 페레야슬라블과 체르니코프의 군대가 들어서면서 제노바 군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이어 바실리 2세의 군대가 세바스토폴 동쪽에 진입하자 중앙의 하츠 게레이의 크림 군이 성 밖으로 나와 제노바 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제노바 군은 거의 대부분 궤멸되었고 제노바의 함대는 대부분 파쇄 되거나 크림 군과 러시아 군에게 노획되었다. 이로써 살아 돌아간 제노바 함대는 50여 척에 불과했으나 보스포루스를 봉쇄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 군에게 모두 전몰되었다. 이로써 제노바는 함대를 모두 잃고 지중해에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크림 칸국은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의 도움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독립 국가로써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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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칸국의 건국과 크림 타타르 대족장 하츠 게레이의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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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의 출산 장려 정책의 후유증과 그로 인해 발생한 루마니아의 사회적 현상
- 이전에 언급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그 자체만으로 볼 때 명백한 악행이나 다름없다. 특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당시 루마니아에서 서유럽 방식의 출산 장려 정책이나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 등 인구를 늘리기 위한 다른 대안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우셰스쿠는 편하게 무작정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출산을 강요하는 가장 극단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출생아들에 대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들은 성년이 되었을 때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사회 문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장기적으로 루마니아의 인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도출했다.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직전보다 현재의 루마니아 인구가 더 적은 것이 현실이다. 특히 중국이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집트, 나이지리아와 같이 인구의 질도 나쁘고 부양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수가 많기만 하면 매우 곤란한 부분에 있다. 단, 이 인구의 질은 국가 입장에서 나쁜 것이지 부모 입장에서는 노동력 확충이기 때문에 선진국 아이들과 비교하면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갑작스러운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노동 인구가 늘어나는 효과로 경제성장을 거둔 국가가, 출산 기피에 따른 인구 감소로 인해 평균 수명 증가와 맞물려 급격히 고령화 사회가 되고 국가 역량이 크게 약화된 사례도 많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그런 일례의 국가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다만 중국은 예외로 두고 있다. 중국은 미등록 출생아가 많고 대한민국이나 일본보다는 이질 분자의 수용도가 높다. 그러나 중국도 최근에는 서서히 접어드는 고령화를 걱정하는 추세라고 한다. 차우셰스쿠가 출산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장려하는 정책, 즉 자녀를 두 명선에서 유지하고 적극으로 지원하거나 저소득층 가정은 두 명 이하라도 도와주는 등, 현실에 부합한 인구 증가 방책을 수립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식량의 과도한 수출로 외화를 많이 벌면서도 되려 이것을 산업 발전이나 복지 증진에 쓰지는 않았다. 오로자 본인과 부인인 엘레나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인민궁전의 건설, 본인에 대한 우상화와 세큐라다테를 운영하는 것에 치중했다. 심지어 성인이 된 베이비붐 세대를 제대로 된 노동 인력으로 수용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국가 경제를 증진시키는 차우셰스쿠가 내세웠던 좋은 목적마저도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강제로 출산을 시키는것도 매우 반(反) 인륜적인 행위이지만 인구를 만들어 놓고도 제 스스로 버렸고 방치했기 때문에 노동 인구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부모의 자녀 양육 지원도 매우 소홀했다. 당시 루마니아에서 부모 대부분이 감당할 수 있는 자녀들은 두 명에서 많으면 세 명인데, 자녀를 낳기 전에는 더 낳아봐야 혜택이 없어서, 양육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이 버려지는 아이가 넘쳐났고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인해 불법 낙태가 많았다. 특히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국민에게 자녀를 많이 낳게 유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녀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는 방식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는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법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한 정책이다. 최소한 출산 관리 과정 등 일부만큼은 어떻게든 지원이 필요했음에도 그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극악의 정책이다. 최근 선진국이나 상위권 개발도상국, 중진국에서 이루어지는 저출산은 부모들이 개인을 포기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단순한 양육 자체를 위한 경제력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포기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이는 부모 세대와 다른 현실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이 근본 문제였기 때문에 결국 세대가 교체되어야 해결이 가능하다. 실제로 선진국들 중 출산율이 그나마 높은 영국은 이미 인식이 한 번 바뀌었고 독일, 이탈리아처럼 아직 변화가 진행 중인 국가는 모두 출산율이 낮은 실정에 있다. 이처럼 관리가 되지 않다 보니 루마니아에서는 이 시기에 태어나 버려진 많은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고아원이나 탁아소에서 자랐다. 하지만 이마저도 독신세로 인해 4명 이상 아이를 낳은 집은 세금이 반대로 줄어들어 복지가 발달된 영국, 스웨덴에 비해 예산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수용된 아기들보다 고아원 직원 수가 현저하게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기 침대에 우유병만 매달아 두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고아원의 아이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아기가 정상적으로 크려면 보호자와 어떤 형태이건 신체를 접촉하면서 가까이 지내야 정신적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 심리학의 공통된 의견이다. 예를 들어 아기가 일정 시간 이상 울게 방치하면 신경계에 손상이 올 수 있다. 아기에게는 보호자의 작은 관심조차 후에 큰 결과로 나타난다. 대한민국을 본다면 나름 좋은 복지환경이나 육아환경에도 불구하고 영아들의 정신 건강 안정도가 유의미하게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한국의 육아 방식인 포대기를 이용해 24시간 아기가 산모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밀착 육아의 순기능이라는 연구가존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세대에서 지식이나, 신체, 정신적으로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고, 사이코패스 진단률도 전 세계 어떤 세대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던 것으로 진단되기도 했다. 이는 루마니아 자국 내에서 큰 아이들은 물론이고 타국으로 입양 간 아이들까지 똑같은 상태를 겪었으며 나중에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루마니아 국내와 서방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은 소아 정신 보건 연구와 대학 기초 정신 보건 수업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차우셰스쿠의 출산 장려 정책은 인구 증가 사례와 비례하여 최악의 사례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교과에서조차도 차우셰스쿠의 이름은 빠져 있어도 이 극악의 출산 장려 정책과 그 후유증에 대한 내용은 반드시 언급되고 있다. 그나마 영국의 고급 브랜드 및 상류 문화를 저질스럽게 즐기는 하층민 출신 비행 청소년 집단인 차브(Chav) 족보다는 장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연애 권력 최하층의 삶이 더 나았고, 신생아에 대한 악용하는 사례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차브족에 대한 정책의 경우, 무조건 육아를 해야 지원이 나왔기 때문에 육아를 병행하다 잘못되면 큰 문제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17명의 자녀를 두어 다산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가 고의적으로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믹 필포트와 메어리드 필포트 부부의 사례와 같이 아이를 죽이는 일이 많았었지만 루마니아의 부모들은 최소한 죽이지는 않았다. 한 달 정도 키우고, 보육원에 넣어버리는게 전부였다. 또한 영국의 연애 권력 최하층의 경우 그냥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루마니아 연애 권력 최하층의 경우 지하에 집을 짓는다 해도 국가가 그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으며 소득이 없기 때문에 정책의 대상자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도리어 다른 계층에서 자녀를 확보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어 성 불구자가 아닌 이상 결혼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조차 해당되지 않는 자들의 문제는 영국의 차브족보다 매우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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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의 출산 장려 정책의 후유증과 그로 인해 발생한 루마니아의 사회적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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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대홍수 시대 : 폴란드-리투아니아-코사크 종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 대홍수의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코사크들과 슐라흐타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코사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며 등록 코사크 군으로서 복무해왔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코사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고, 거기에 농노제와 카톨릭 신앙까지 강요하려 하자 결국 오랫동안 쌓여온 분노가 코사크 슐라흐타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야심과 결합하여 이전까지의 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봉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폴란드의 막강한 기병에 맞서 코사크의 약점인 허약한 기병을 보완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코사크와 원수지간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들까지 봉기에 끌어들였다. 1648년 1월 25일 흐멜니츠키는 시치(Січ)가 열리는 장소인 호르티치아 섬을 경비하던 폴란드 군인들을 죽인 이후 시치를 열어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 그 달 말 라다(Козацька рада)에서 헤트만에 선출된 흐멜니츠키는 곧바로 코사크 헤트만 국의 건국과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같은 해 4월 코사크의 봉기 소식이 바르샤바에 전해지자 폴란드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조우티보디(Zoutibodi) 전투에서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군에게 전멸 당했고 코르순(Kordun) 전투에서 다시 격파당하면서 어느 편에 설지 망설이던 코사크들이 대거 흐멜니츠키 편에 가담했다. 그에 맞춰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슐라흐타에 대항해 민란을 일으키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성직자, 귀족, 농민 가리지 않고 폴란드인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사태는 혼돈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코사크를 이용해 연방 남쪽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과 그 종주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도발할 생각이었지만 국왕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며 입법부인 세임의 반대와 어린 아들인 지그문트 카지미에시(Zigmunt Kaimiesi)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코사크들의 대 봉기에 충격을 받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대홍수 사태는 성직자로 있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환속한 그의 동생 얀 2세가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편 흐멜니츠키의 봉기군은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과 합세해 필랴우치(Pilauchi) 전투에서 다시 폴란드 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대도시 리보프를 공략하려던 흐멜니츠키는 자신의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도시 공략을 포기한 후 다른 도시인 자모시치를 공략하던 도중에 브와디스와프 4세의 사망과 얀 2세의 즉위 소식을 전해 들었으며 동시에 얀 2세로부터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것이니 봉기를 중지하라는 편지를 전해 받게 된다. 흐멜니츠키는 이를 받아들여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1648년 성탄절 당일, 키예프에서 흐멜니츠키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고 우크라이나 인들은 해방자의 등장에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게 하여 1649년 1월 키예프 근교 페레야슬라프(Перея́слав)에서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의 지위에 관한 폴란드와 코사크의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2월 흐멜니츠키는 자신을 루스 인들의 유일한 독재관이며 이와 동시에 리보프, 헤움(Heum), 할리치(Halichi)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와 포딜리야(Podilia), 볼히니아 전역의 권력자임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폴란드는 흐멜니츠키가 단순한 코사크의 지도자가 아니라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페레야슬라프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코사크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1649년 여름 즈바라즈(Zbaraz)와 즈보리프(Zboriv)에서 전투를 벌였고 두 전투는 모두 무승부였다. 폴란드와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은 8월 17일 즈보리프 조약을 체결하여 코사크 헤트만 국은 키예프, 브라츨라프(Braclav), 체르니고프 3개 주에서의 완전한 자치와 40,000명의 군대를 보유함과 동시에 헤트만 국의 신료들은 전원 우크라이나 인으로 임명하며 정교회 신자들의 특권 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임까지 승인한 즈보리프 조약이었으나 우크라이나의 카톨릭 신자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길 거부했으며, 카톨릭 신자와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 간의 갈등이 커지자 폴란드는 코사크 헤트만 국을 다시 공격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는 폴란드가 유리한 상황에 놓였는데 1651년 6월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9월 빌라체르크바(Bilacherkba)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다시 승리를 거두자 코사크 헤트만 국은 휴전을 요청하여 9월 28일 빌라체르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결과, 코사크 헤트만 국의 지배는 키예프 주 1개 정도로 축소되었고, 군대의 숫자도 20,000명으로 감축해야 했으며, 조약을 비준할 세임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왕이 자비를 베푼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국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하지만 코사크 세력을 대거 격파하여 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내용의 이 조약은 세임에서 비준되지 못했다. 코사크에게 허용한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 세임이 리베룸 베토(LIBERUM VETO)를 선언한 것인데 흐멜니츠키 또한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에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코사크는 반격을 개시하여 1652년 바티흐(Batih)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레스테치코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의 세력은 강성했고, 그에 반해 코사크 세력은 매우 미약했다. 베레스테치코에서의 대패를 기점으로 코사크 인들의 독립 국가 건국이라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흐멜니츠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같은 동 슬라브 세력인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폴란드 전역을 초토화 시키는 대재앙으로 번지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알렉세이 1세의 참전 결정으로 인해 폴란드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7월 41,000명의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해 벨리(Belli)와 도로고부시(Dorogobusi)를 점령했으며, 이어 대 러시아의 전진기지이자 강력한 요새인 스몰렌스크 공략에 나섰다. 또한 스몰렌스크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오르샤(Otsha)를 점령하고 8월 슈클로프(Shuclov)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셰펠레비체(Szepielewicze)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격파 당했다. 폴란드는 코사크 군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의 병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쟁은 폴란드에게 불리해져 갔다. 러시아 군대의 공세에 버티던 스몰렌스크마저 9월 23일 함락 당하면서 전세는 러시아, 코사크 군의 우세로 기울어졌다. 한편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이 서부 지역으로 진격에 나섰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군대가 므스치슬라프(Mscislav)와 로슬라블(Roslavl)을, 코사크 군이 호멜(Homel)을 함락시키면서 드네프르 강과 드루지나 강 사이의 전 지역이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리보니아-벨라루스 방면에서는 프스코프에서 출발한 러시아 군대가 7월 1일 네벨(Nevel)과 17일 폴로츠크(Polosk), 11월 1일 비쳅스크(Vichepsk) 등 벨라루스의 도시들과 루자(Ruza), 레제크네(Rezekne) 등 폴란드령 리보니아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흐멜니츠키가 지휘하는 코사크 군은 볼히니아 지방으로 밀고 들어가 그 해 연말까지 오스트로흐(Ostroh)와 리우네(Liune) 등을 함락시켰다.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폴란드 동부 전역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국토의 동부 전역이 전화에 내몰리자 폴란드는 함락된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1654년 겨울부터 1655년 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마그나트이자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고, 벨라루스 지방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르샤를 탈환했다. 이어 마힐료프를 포위했으며 폴란드 군이 오흐마티프 전투와 자시키프 전투에서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을 연달아 격파한 것을 기점으로 전쟁은 이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알렉세이 1세는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적인 칙령을 내리면서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규모 공세를 펼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리투아니아 군은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6월 러시아 군대는 슬로님(Slonim)과 클레츠크(Cleczko), 벨리시(Belisi)를 함락시켰다. 1655년 7월 3일 민스크와 체르카시가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군에게 함락되었다. 7월 31일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노(Bilno)가 러시아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 대규모적인 여름 공세의 성공에 힘입어 러시아 병력은 8월 카우나스와 흐로드나까지 점령했으며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군은 여세를 몰아 갈리치아를 공략하여 9월 브레스트 전투에서 폴란드 군을 격파한 후 리보프를 공격하고 루블린에 입성했다. 이 정도로 몰린 상황이면 폴란드가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폴란드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웨덴은 당시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숙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도달하는가 하면 30년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를 보유하는 등 당시의 스웨덴을 스웨덴 제국으로 칭하기도 할 정도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지만,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함께 겪고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종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지원이 끊어졌고, 새로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들이는 세수에도 한계가 있었다. 당시 재정 문제로 인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여기에서 군사적인 성공으로 인해 재정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더불어 바티흐 전투에서 정예군이 제압당하고 한창 러시아-코사크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폴란드는 스웨덴에게 있어 아주 좋은 식민지 감으로 보였다. 한편, 폴란드 바사 왕조는 여전히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얀 2세의 바사 가문은 본래 스웨덴의 귀족 가문으로,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벗어나는 스웨덴 독립 전쟁에서 구스타브 바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가문이었다. 핀란드까지 탈환에 성공했지만 즉위 초창기 구스타프 바사의 신세는 귀족들의 대표자에 불과했고 왕권도 불안정했다. 1529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 귀족 및 성직자들이, 1533년 달라르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는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귀족들은 조용해졌으며 달라르나 지역도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바사 가문이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지그문트 3세였다. 지그문트 3세의 아버지는 구스타브 바사의 차남인 요한 3세로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스웨덴 인이나 다름없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인 카타르치나 야기엘론카(Katarzyna Jagiellonka)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국왕이 될 자격까지 충분했다. 그리하여 1587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는 요한 3세가 1592년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스웨덴과 폴란드의 동군연합을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루터교가 다수를 차지하던 스웨덴을 다시 카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고 하자 카톨릭화 정책에 반발한 숙부 칼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1599년, 지그문트 3세를 폐위시켰다. 폐위당한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며 스웨덴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칼 9세가 사망한 이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 칼 9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3세의 사촌은 당대의 사자왕이라 불리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였다. 결국 지그문트 3세는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으로,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지 못하고 리보니아 전쟁을 통해 차지한 리보니아 지역만 상실하게 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에서 전사한 이후, 딸 크리스티나(Kristina) 여왕을 거쳐 1654년 구스타브 2세의 외 조카 칼 10세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에 오르면서 바사 왕가가 끝나게 된다. 스웨덴에는 팔츠츠바이브뤼켄 왕가(House of Palatinate-Zweibrücken)가 들어섰으나 폴란드의 바사 왕가는 지그문트 3세가 사망하고 그 자식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얀 2세 카지미에시 시대에도 계속해서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다. 폴란드 바사 왕가의 이러한 주장이 불편했던 칼 10세는 폴란드를 제압함으로써 왕위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버리려고 했다. 그 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속력은 형편없었다. 국왕 얀 2세는 폴란드 슐라흐타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뿐더러 그들의 문화였던 사르마티즘을 경시했다. 더구나 그는 전직 예수회 수도자였으며 지역 추기경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수단으로 하여 폴란드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개입하려 했던 얀 2세에 대해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다. 이에 수많은 귀족들을 스웨덴 국왕 칼 10세에게 가담하게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특히 스웨덴 편에 가담한 일부 슐라흐타들은 칼 10세에게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이에 스웨덴 군은 약체화된 폴란드 군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놀란 국왕 얀 2세는 슐레지엔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폴란드와 휴전하고, 곧바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한편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던 야전 헤트만 야누시 라지비우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했다.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하여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2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인 보그스와프 라지비우(Boguslaw Radziwill)가 가지고,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니아이(Kedainiai) 협정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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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대홍수 시대 : 폴란드-리투아니아-코사크 종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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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중, 인도차이나 지역이 문화적으로 후진 지역이 된 이유
- 프랑스는 영국이나 네덜란드보다 매우 늦게 동남아시아에 진출했으나, 그 목표로 선정한 곳은 이들 양국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고 또한 중국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베트남과 이들을 왕래할 수 있는 교두보인 캄보디아였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이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관계로 인해 이후 베트남과 프랑스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더불어 응우옌 왕조가 병합했던 캄보디아도 프랑스가 노리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와 같은 프랑스의 야심을 알게 된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하고 카톨릭 선교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에게 제국주의적 진출의 구실을 준 결과가 되어 1859년에 프랑스 군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과거 참파가 세력을 형성했던 남베트남 지역을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그러한 결과로 인해 비옥한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코친차이나를 영토로 하고, 메콩 강의 항행권(航行權)을 획득했으며, 같은 시기에 캄보디아도 보호국으로 두었다. 이에 따라 사이공을 기지로 하는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의 기초를 다졌으며, 프랑스는 다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 내륙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랑스 탐험대의 탐험 결과 메콩 강에는 콩 폭포(瀑布) 등이 있어 하구에서 상류로 직접 소항(溯航)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음으로 중국에 보다 가까운 지역인 북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본토를 노렸다. 1882년 프랑스는 전에 인정받은 송코이 강 항해가 부자유스럽다는 구실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대해 청(淸)나라는 역사상으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분쟁이 발생해 결국, 1884년 청불전쟁으로 발전했으나 청나라가 패하여 프랑스의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식민지화를 인정해 주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베트남에 인접한 라오스도 또 태국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프랑스는 이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이른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형성하였다. 연방 성립은 1887년에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라오스에 대한 합병은 1893년에 이루어졌다. 예로부터 베트남을 두고 청나라는 ‘화남의 순치(脣齒)’라 불러왔으나, 이 순치를 함락당한 이후부터 프랑스는 중국 화남 지방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노려 광서(廣西), 운남(雲南) 2성(省)에서의 광산 채굴권과 철도부설권을 획득했다. 이후 광저우만(廣州灣)의 조차(租借) 등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의 동남아시아에서 이어지는 해운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식민지화 정책에 따라 인도차이나는 크게 변모하였는데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캄보디아였다. 종래의 중국 영향과는 달리 이것은 식민지주의에서 이루어진 유럽 근대국가와 아시아의 전통적인 자급적 벼농사 국민과의 접촉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받은 경제적 영향도 심각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종래에는 캄보디아의 국왕이 전 국토의 토지 소유자였고 농민은 그 사용권을 가지는 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프랑스의 사유 재산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토지 제도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 프랑스 인이나 캄보디아 인 상류층, 주로 크메르 제국 때부터 이어온 관리들 사이에 대지주가 나타난 반면, 토지 없는 농민 대중이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인구가 조밀한 메콩 강 지역에서는 이농자(離農者)들이 속출하고, 이들은 신 개척지 메콩 삼각주로 이동하여 프랑스인들의 소작농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메콩 삼각주를 일대 곡창으로 개발하여 쌀을 재배하고, 쌀이 인도차이나 전체 수출의 70%를 차지하였으나 그 이윤은 프랑스인 지주나 화교들이 독점하여 농민의 빈곤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남베트남 지역의 식민지적 개발이나 착취에 주력하는 한편, 라오스나 광서, 운남 지역에 대해서는 거의 방임주의(放任主義)를 취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그 밖에 원주민들인 소수민족들에 대하여는 차별대우를 일삼고, 교육을 도외시하여 인도차이나는 문화적으로도 후진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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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중, 인도차이나 지역이 문화적으로 후진 지역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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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과 잉구세이티의 조상, 바이나흐(Вайнахи) 족에 대한 이야기
- 투르크계 오우즈는 돌궐 제국의 톤유쿡에게 패배하여 일부 씨족은 당나라로 들어가 귀순했고 일부는 이란 지역으로 다른 일부는 압바스 왕조에 투항했으며 다른 일부 세력은 우랄 산맥 건너 남하하여 카프카스에 도달했다. 이들은 톤유쿡의 대대적인 공세를 피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톤유쿡은 우랄 일대에서 오우즈(Oguz)를 격파하고 퀼테긴(Qiltegin) 가한의 통치체제를 확고히 했다. 톤유쿡으로 인하여 제2 돌궐제국의 정세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돌궐이 안정을 찾을 무렵, 카프카스 지역으로 도주했던 오우즈의 일부 세력이 카프카스 북동 지방의 초원 지대에 정착했다. 한편 이란 북부의 오우즈(Oguz)의 민족을 구즈(Ghuz)라 하였는데 이를 두고 후일 투르크계 유목민족으로 셀주크투르크 이후에 활약한 유목민족인 오구즈(Oghuz)를 표현한 민족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셀주크 가(家)도 오구즈의 일원인 것으로 볼 때 오구즈는 해체된 오우즈를 승계했다고 보는 것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카프카스에 정착한 오우즈(Oguz)의 일족들은 카프카스에 원주민들을 흡수하여 카프카스 북쪽 지방의 각 부족들을 정복하여 또 다른 초원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을 두고 바이나흐(Bainakh)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이 족으로 알려진 투르크계 오우즈 족이 현지 카프카스의 원주민이라는 뜻의 나흐(Nakh)와 융합되었다 하여 이 민족을 바이나흐라 부르기도 한다는 체첸 출신의 사학가인 K. M 후도레이(К. М. Худолей)의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10세기 아랍 역사 지리서인『세계의 경계(Hududal-Alam)』는 카프카스 오우즈 족을 바흐나히(Bakhnakhi)로 표기하면서 카프카스 북서 지방의 초원 지대에 기거하던 종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바이나흐는 당시만 해도 무슬림에 속하지 않고 카프카스 토착종교에 속한 별도의 기마민족으로 인식했다. Golden, Peter는 투르크계의 계보들을 정리하면서 카프카스 오우즈와 기타 오우즈를 구별했고 오구즈(Oghuz)에게서 셀주크와 오스만 가(家)의 분리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오구즈는 톤유쿡에 의해 해체된 오우즈의 적통을 승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투르크계 민족들을 보면 간략하게나마 체첸인과 같은 혈통인 잉구시인의 사회 모습에 투르크계 문화가 흡수되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험한 카프카스의 자연환경 영향으로 카프카스 지역의 투르크계 사내아이들은 활을 조립하고 창을 만들며 승마를 조기 교육 시키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부족 단위로 돌아가는 사회적인 측면으로 볼 때 각 종족 간의 중재 위원회를 통하여 부족들 사이의 전쟁을 막고 되도록 교역을 통하여 각 종족들을 고르게 성장시켜 카프카스 남쪽과 북쪽의 정착 국가들의 공격에 서로 공조하여 방어했다. 이는 당시 카프카스 부족들이 소수 종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카프카스 각 부족에 속한 씨족들은 사병을 데리고 남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압바스 왕조에 협력하여 비잔틴의 세력을 격퇴하고 북쪽 킵차크-쿠만 족의 침입을 방지하는 등 안보의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751년 이후 압바스의 세력이 약화되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독립 선언한 사만 왕조와 카라한 왕조가 존재했고 북쪽에는 하자르 제국이 붕괴되었다. 킵차크-쿠만은 우랄 지역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카프카스 일대에는 쿠만 족이 침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우즈 인들이 융합이 진행되고 있는 바이나흐 일족들에는 아직 국가를 건국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씨족이 여러 개였어도 부족적인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소규모였기 때문이다. 바이나흐는 쿠만 족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비잔틴 제국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 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그들은 카프카스와 인접하고 있는 국가들 중에서 왜 비잔틴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여러 세력으로 분쇄된 압바스 세력보다는 통일된 국가인 비잔틴 제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바이나흐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우선 자신들의 존속 여부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이나흐는 당시만 해도 자신보다 강한 국가에게 도전하는 호전적인 부족이 아니라 생존을 먼저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나흐는 힘의 부족함을 대담성과 용기, 지혜로 극복하면서 종족을 보전해 나갔는데 그 중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뛰어난 외교성이 오래 존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약에 외교적으로 안 되어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되면 패하더라도 소규모적으로 산악지대를 이동하면서 게릴라 형식의 저항을 했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하여 바이나흐는 20세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한편 9세기에 노브고로드 일대를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을 추진하며 국가 형성을 행하던 루스 왕국은 9세기 말까지 볼가 강 일대를 병합하였고, 10세기에는 남하를 개시하여 드네프르 강 유역, 흑해 연안, 돈 강과 볼가 강 하구의 초원, 일부 왈라키아 등을 병합했다. 또한 카프카스 점령의 거점으로서 스타브로폴(Ставрополь) 중앙부의 테레크 강변의 20여개의 목책 요새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들 슬라브 루스 인들은 테레크 강 동쪽에 거주하는 바이나흐 민족들의 정복을 추진하게 된다. 이와 같이 1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슬라브, 키예프 루스에 의해 발생한 카프카스의 지배를 둘러싼 전쟁을 두고 중세 카프카스 전쟁이라 지칭되고 있다. 당시 키예프 루스는 바이나흐족을 수탈했지만 몽골은 이들에게 자치를 허용했다는 것에서 현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두 계통 간의 친교와 적대가 이루어진 원인도 분석할 수 있었다. 물론 키예프 루스의 시기부터 러시아는 '강자의 압박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는 대의 명분과 더불어 족장들의 아들을 러시아에 인질로 들여서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시키는 주도면밀한 책략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카프카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 수탈을 통해 확실히 그 민족성을 굴복시킴으로써 디소 반항적인 산악민족의 특성을 억제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 이반 4세의 적극적은 보호와 후원을 받았고 1584년에 이반 4세가 죽자, 그의 아들 표트르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포트르를 대신하여 외삼촌인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가 전권을 장악하였으며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에의 복속을 거부하는 다게스탄 타르쿠의 샴칼들을 1593년에 카바르다 족과 연합하여 공격하여 강제로 병합하려 했다. 알렉산드로 자세킨(Alexandro Zasekin) 공작을 총사령관으로한 러시아군 5천 명과 카바르다 족 1만 명의 원정군이 타르쿠로 진격하였으나 러시아와 카프카스 민족 사이에 벌어진 이 최초의 전투에서 러시아 군과 카바르다 족은 3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패를 경험하게 되면서 카프카스의 산악민족들이 무력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러시아는 다게스탄과 체첸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Abbas)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샤는 러시아 군의 후퇴를 요구하게 되면서 패배로 위축 된 러시아 군은 병력을 철수시키고 이 지역은 다시 소강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카프카스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10년 뒤인 1603년, 그루지야는 오스만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루지야는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부흐툴린(Buhtulin)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7천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다게스탄의 타르쿠를 마침내 점령하고 체첸의 그로즈니를 노리게 된다. 하지만 샴칼의 요청을 받은 투르크 군이 러시아 군을 포위하게 되고 러시아는 협상을 요청하여 철수를 약속한다. 러시아 군이 일단 테레크 강까지 철수하자, 타르쿠의 샴칼은 러시아 군을 기습하여 전멸시키게 되면서 카프카스는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을 완전히 격멸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카프카스에 대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던 러시아의 시도는 동쪽의 산악 주민들과 체첸, 다게스탄의 게릴라 활동, 이슬람 제국들인 오스만투르크와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세력에 눌리게 되어 결국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러시아가 다시 카프카스 산맥에 도전하기까지는 1세기가 넘는 기간이 지나야 했다. 이는 카프카스 체첸 인들이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은 이미 10세기부터 가지고 있었고 이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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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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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과 잉구세이티의 조상, 바이나흐(Вайнахи) 족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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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의 최종적인 패배, 동남아시아 정복을 단념한 계기 (하)
- 1288년 초, 장문호의 보급 부대가 반돈에 도착했으나 쩐 하인쯔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보급 부대를 보호해야 할 우마르의 수군은 토곤의 군대에 합류해 버렸기 때문에 빠르게 공격을 받고는 220여 명이 전사했다. 원나라의 수군은 11척의 배를 상실하는 큰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장문호는 서둘러 육지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눅투이(綠水)에 도착했을 때 베트남군의 소형 선박들이 나타나면서 더 강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장문호의 부대는 다시 패하게 되었고 베트남의 수군에게 식량 14,300석을 탈취당할까 두려워 전부 바다에 던져버린 뒤 서둘러 뀐처우(瓊州)로 도주했다. 한편, 장문호가 패배하는 동안에 비공신의 보급 부대는 막 후에처우(惠州)에 들어왔으나 그 순간 만난 폭풍에 결국 표류해 뀐처우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서경(徐慶)이 이끄는 보급 대는 참파(占城)에서 이동했으나 초행이라 헤맸다. 한참 보급대는 헤매다가 결국은 광동(廣東)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로써 장문호의 보급선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비공신의 보급선은 폭풍에 의해 좌초되었다. 이로써 서경의 보급군은 길을 헤매다가 복귀함으로써 전선의 수송로가 전부 증발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 반돈 전투로 인해 원나라 군이 안전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림으로 인해 향후 있을 전투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토곤이 탕롱을 포위하는 동안, 원나라의 장수들은 지시에 따라 점거된 반 끼엡의 방비와 시설 등을 강화하였으나 여러 군데에 지어 놓은 기지들이 매번 베트남군의 기습으로 인해 붕괴되거나 고립되는 일이 빈번했다. 초조해진 토곤은 1288년 2월 10일에 장문호가 이끄는 보급선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자신에게 합류한 우마르에게 장문호의 함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우마르의 별동대는 반욱 강(炆墺江)에서 베트남군의 습격을 당했다. 피해를 감수하고서 어렵게 탑산 일대까지 나아갔으나 이미 패배해 버린 장문호의 함선을 당연히 볼 수 없었고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반 끼엡으로 복귀했다. 퇴각하는 곳에서 우마르의 부대는 인근을 약탈해 4만 석의 식량을 얻었고 또 다른 원나라의 장수 아바키 역시 탑산에서 베트남의 군대와 교전을 치른 이후, 1만 석에서 3만 석 정도의 식량을 약탈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그것으로 많은 수의 원나라 군사들에게 있어 매우 부족했다. 식량이 없어지기 시작하자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회를 잡은 베트남군은 강한 반격을 가해 그 주변 지역의 도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토곤의 군대와 반 끼엡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고 결국 토곤은 탕롱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이후, 아바키를 앞장 세워 길을 연 뒤 반 끼엡으로 퇴각했다. 원나라군이 베트남에 진입한 지 약 4개월이 지나는 1288년 3월 말까지 식량은 부족하고 날씨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풍토병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겨우 점령한 지역을 전부 내주다보니 원나라 군의 주둔지는 반 끼엡과 그 주변지로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원나라 군의 군력을 더 소모시키기 위해 쩐 흥다오는 반간 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전에 사신으로 보냈던 쩐 까오를 다시 보내 청항(請降), 항복을 청한다는 뜻을 보냈다. 이미 지쳐 있었던 토곤은 그 말을 믿고 병력을 요새 안에 주둔시키면서 부서진 시설을 수리하게 했고 쩐 흥다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와 같이 원나라 군이 지쳐 방심하고 있을 때 베트남의 군사들이 다시금 야습을 감행하자 토곤은 이 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분노해 장수 호지아이찬(戶解震)에게 다시 한 번 병력을 모아 공격하고 베트남군의 요새를 불태우며 보이는 생명은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휘하의 장수들은 지금 돌격하면 전부 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분노로 가득한 총사령관을 진정시키고 명령을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반 끼엡 역시 안전한 목책 후방에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베트남 군대의 야습에 수시로 시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탕롱을 공격하던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원나라의 장수들은 모여서 작전을 논의했다. 이 당시 상황을 묘사한 <신원사(新元史)>에는 “군대가 돌아오더라도 버틸 수 없다. 교지에는 지킬 수 있는 요새도 식량도 없었으며 날씨가 더워 식량이 빠르게 상해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얼굴에 병색이 짙은 군대는 결국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원나라가 세 번째로 베트남을 공격한 지 고작 3개월 밖에 안 된 1288년 3월 말, 버티는 것에 한계를 느낀 토곤은 베트남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철군하는 원나라 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우마르와 반섭이 지휘했고 나머지 한 갈래는 토곤이 직접 지휘했다. 원나라 군을 지휘하던 정붕비와 타쿠는 토곤을 호위하며 함선을 타고 해로를 확보하려 했지만 결국은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아 결국 반 끼엡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호위 함대가 없는 우마르의 함대 역시 계속하여 베트남 함대에 의해 요격 당했고 1288년 4월 8일이 되어서야 지아 강(價江)에 들어갈 수 있는 쭉동(竹洞)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함대는 원나라의 함대가 지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버렸고 결국 우마르의 함대는 박당 강(白藤江)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베트남군이 말뚝을 상당수 박아 둔 상태였다. 베트남의 군대는 장껜산(長涇山)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군은 박당 강과 연결된 다른 강에 숨겨두고 우마르의 함대가 진입해 들어오면, 곧바로 오른쪽 측면을 공격한 이후, 연이어 다른 병력이 좌익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1288년 4월 9일 오전, 원나라의 함대는 박당에 진입했고 베트남의 함대가 추격해오는 것을 보았지만 강바닥에 박힌 말뚝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곧바로 베트남의 군대가 사방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령관인 쩐 흥다오는 물론이고 황제인 쩐 인종까지 일군(軍)을 맡아 진격해 왔다. 특히 쩐 왕조의 장수 응우옌 호아이(阮蒯)는 쩐 왕조의 금군이던 타인즉(聖翊)을 지휘하며 원나라의 함선들을 직접 공격했다. 게다가 원나라 함대에 패배해 도주하는 척 하던 배들이 어느새 원나라 해군이 나갈 수 있는 길목과 해로들을 봉쇄하고 있었다. 베트남 군사들은 각 강의 지류에서 일렬로 정렬한 뒤 돌과 화살을 사격했고 동시에 화제에 전소되고 있는 선박들을 보내 원나라의 함선 사이로 보내버렸다. 원나라 군에서는 반섭, 유규, 우마르, 장옥, 석례기(昔例基) 등의 장수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반격을 명령했다. 반섭은 서둘러 병사들을 상륙해 장껜산을 점령, 군대가 휴식할 수 있는 높은 곳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섭의 군대는 산을 확보하기도 전에 반격을 받아 다시 강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박당 강 하구가 썰물인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무모한 작전으로 인해 더 많은 함선들이 파손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말뚝에 막힌 배들은 기습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말뚝의 범위 안에 없는 배들 역시 도주하는 척하던 베트남의 함선들이 해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박당 강 하구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원나라의 장수들은 대부분 퇴각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원나라 군은 사실상 전멸했고 장수 중 장옥은 결국 혼잡한 상황에서 벌어진 원나라 군 내의 폭동으로 인해 사망했고 우마르, 석례기, 반섭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사로 잡히지 않으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며 이천우(李千右)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원나라의 해군은 거의 궤멸되어 6만의 군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수많은 배가 침몰했으며 400척 이상의 전함이 베트남 군대에게 탈취되었다. 우마르는 결국 부상이 심해졌는지 체포되긴 했으나 쩐 성종의 함선으로 옮겨졌고 직급 높은 대장이라 그런지 나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288년 4월 8일, 아바키가 기마병, 나머지는 토곤이 이끄는 군대가 낭산 방향으로 탈출하기 위해 출발했다. 장수 시크투르가 한 갈래 군대를 맡아 서쪽으로 통과하는 통로를 만들 계획이었으나 함네(陷泥)에서 베트남의 군사들에 의해 요격되고 말았으며 결국 소득 없이 토곤에게 되돌아갔다. 4월 11일, 원나라의 군대는 노이방으로 진격했으나 그곳에도 이미 쩐 왕조 군대의 매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나라의 장수 다라키와 유세영은 끝까지 저항하며 길을 열었고 토곤은 겨우 노이방을 탈출했으나 3만의 베트남군이 길목을 막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나라 군은 던키(單紀)를 거쳐 록처우로 향했으나 이어 베트남군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원나라 군은 계속 공격을 받다가 1288년 4월 19일이 되어서야 탈출해 투민으로 빠져나갔다. 아이로는 끌고 간 군대를 운남으로 돌려보냈고 아이우루이치는 남은 군사들을 북쪽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원나라의 3차 침공은 종결되었다. 쩐 흥다오는 베트남 쩐 왕조(陳朝)의 명장으로 본명은 쩐 꾸옥 뚜언(陳國峻, 진국준)으로 쩐 흥다오라는 호칭은 그의 작위인 흥다오브엉(興道王)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그의 한국식 한자 독음은 진흥도(陳興道)이다. 베트남 쩐 왕조의 황제인 태종(太宗)의 조카인데 그 족보가 매우 혼란스럽다. 태종은 지난 왕조의 마지막 여제인 이 왕조 소황과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어, 태종과 그 형의 숙부이자 권신인 쩐 투도는 이미 태종의 형과 혼인했던 이 왕조 소황의 언니를 이혼시키고 태종과 재혼시켰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고 쩐 흥다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쩐 왕조는 이 왕조 소황의 언니와 태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성종(聖宗)이 황위를 이어가는데 이 인물은 쩐 흥다오의 사촌이기도 하고 이부형제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전 세계를 장악하던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구국영웅으로써 그는 사후 시호를 인무(仁武)라 했다. 이후 그는 대왕으로 신격화되어 기일마다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그의 저서에는 <병서요략(兵書要略)>과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등이 있다. 이 책들을 보면 모두 병법서이고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병서요략(兵書要略)>은 몽골의 제2차 침입을 방어할 때 베트남의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과 유인책, 그리고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으로, 이를 쩐 왕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 스스로 적과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 책은 후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베트민과 베트콩의 기본 전략서로 활용되었다. 전투 종족인 베트남 인의 근성은 중세부터 나타나 현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몽골의 침공에게서 일본인들을 구해준 국가 또한 베트남, 그리고 자바 등지에서 벌어진 끈질긴 대몽항쟁이었다. 3차 일본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일본으로 향할 병력을 베트남으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국내에서도 계속된 원정에 반대하는 소요가 일어나고, 카이두 계통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이어 1292년에는 자바가 입공을 거절하고 나섰다. 자바에 상륙한 원나라 군은 역시 쉽게 수도를 점령했으나, 민간의 끈질긴 항쟁 속에 아무 전과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패전 소식이 계속되는 가운데 쿠빌라이는 1294년 사망했다. 배트남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방어해냈다는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 <대월사기(大越史記)>가 편찬되었고 베트남 문자 쯔놈으로 서술되어진 “쯔놈문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지금까지도 베트남에서는 쩐 흥다오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남, 북 가릴 것 없이 쩐 흥다오를 자신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북베트남 입장에서는 미군을 원나라나 청나라 같은 오랑캐로 규정해 그를 본받아 그들을 모두 격파하자는 목적이었고, 남베트남 입장에서도 베트민과 베트콩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형식이었다. 남베트남에서는 자국 화폐의 모델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현재는 베트남 정부가 원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한 하이퐁 박당 강(Bạch Đằng Giang)에 전쟁 승리 유적 공원을 만들어 수많은 하이퐁을 대표하는 역사 관광단지로 조성하였다. 호치민 시에는 쩐 흥다오 거리도 있다. 쩐 왕조에 대한 3차례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자 분노한 쿠빌라이는 토곤이 자신의 부친을 욕되게 했다면서 남방의 양주(扬州)로 추방한 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편 아이로(兒理魯)는 전우인 정붕비(程鵬飛)와 더불어 쿠빌라이의 분노를 피해 도주한 이후 시골로 갔으나 3차 원정 당시 걸린 풍토병으로 인해 심한 감기 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 갔던 원나라 군은 석방되었으나 일부 장수나 장병들은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정착해 거주하기도 했다. 쩐 왕조의 조정 역시, 승자이기는 했으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끊었던 원나라 조정에 대한 공물을 다시 바치며 쿠빌라이를 달래기도 했다. 한편, 살아남은 우마르(烏馬兒)는 쩐 왕조에 있었고 명장이었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았고, 원나라와의 화친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려보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쩐 흥다오는 그가 용맹하면서도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원나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죽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는 귀국할 날짜가 되자 우마르에게 배를 돌려주었으나 함선에 약간의 구멍을 낸 채로 돌려주었고 결국 그 배는 밤새 침몰하여 우마르는 결국 바다 속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당연히 쩐 흥다오는 철수 중이던 토곤에게 서신을 보내 우마르를 배에 태워 돌려보냈으나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토곤의 입장에서는 이미 전쟁에서 패배한 입장인데다 우마르의 배가 이미 바다 속에 침몰했기 때문에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화도 내지 못하고 그냥 넘겼다. 쿠빌라이는 당시 패배가 매우 치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베트남 정복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9년 3월 10일에 성도(成都)의 군대를 통솔하는 유덕록(劉德祿)이 사천(四川) 지역에서 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게 원나라 남서부의 여러 부족들에게서 5,000의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윤허하고 유덕록(劉德錄)을 사령관에 임명한 뒤 사천의 병력 1만 명을 주었다. 3차 원정 당시 해전에서 패배한 기억으로 인해 쿠빌라이는 사천에서 베트남의 북서부 방향으로 진격해 기병의 우수함을 살리고, 최대한 해전을 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던 데다 북방이 안정되지 않았고 특히 원나라와 본격적인 대립을 시작한 카이두(海都)가 급부상함으로서 더 이상 남쪽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베트남 전에서의 패배 충격이 매우 컸기 때문에 1293년에 4차 침공을 계획했다. 당시 바투르(拔都), 영웅으로 불리던 유국걸(劉國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56,570명의 군대와 35만 섬의 식량, 그리고 70만 개의 무기를 포함한 1,000여척의 수송선을 동원하고 베트남의 군대가 다시 집결하지 못하도록 트엉 뜨(上思)의 부족장이었던 황 탄 흐어(皇聖許)가 반란을 일으켜 응처우(雍州)를 공격하도록 하는 전략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그 계획은 쿠빌라이 본인이 사망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남방 원정 자체가 국가 재정을 상당히 낭비하는 수준의 사건인데다 후계자인 올제이투 칸(諤勒哲依圖汗)은 할아버지가 3번이나 실패한 남방 정벌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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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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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의 최종적인 패배, 동남아시아 정복을 단념한 계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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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족의 폴란드-벨라루스-리투아니아 정착의 역사
- 립카 타타르 인들은 14세기 경 리투아니아 공국에 귀부하게 되었던 타타르 집단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을 다하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분봉 받고 폴란드의 기병들로 활약했다. 본 연구에서는 립카 타타르 인들을 줄여 립카 인으로 표기함으로 알리는 바이다. 립카 인들과 비슷하게 폴란드에 기병 공급 등을 담당했던 자포리제 코사크는 폴란드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들 립카 인들은 정부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종교가 같고 문화나 언어도 비슷한 크림 칸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여러 차례 립카 타타르의 반란을 사주하려고 했지만 립카 타타르는 그들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충실하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봉사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이들은 어느 정도 폴란드 인들과 동화되어 카톨릭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나타나는가 한편 상류층은 루테니아 어나 폴란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1588년 4월 8일, 동구권 유럽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외교 협상이 타결되었다. 11세기부터 생성된 폴란드 중세 왕조 이래로 바이킹의 침략 또는 발트 해 지배권을 두고 서로 간에 경쟁 상대라 할 수 있었던 폴란드와 스웨덴이 동맹을 맺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16~17세기에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스웨덴 동맹이다. 처음에는 북방 영토인 리보니아에 대한 이해관계를 원만히 정리하기로 한 외교적인 타협이었으나 이어서 군사 동맹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 이를 두고 이른바 북방 협상이라 표현된 칼마르 동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협상, 그리고 이와 대치하는 러시아-타타르 동맹의 대립을 앞으로 생성될 러시아 동란 시대가 발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새롭게 거론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러시아 동란 시대 이후에 북방 협상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하는 역사가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바사 왕조 지배를 둘러싼 1655년에 발생했던 스웨덴의 침공 때문인데 이러한 동맹은 맺어지고 파기되기를 반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왔다. 하지만 지난 2008년에 폴란드와 스웨덴이 공동으로 대대적인 420주년 행사를 개최했을 만큼 현재 양국의 관계, 특히 발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고려한다면 또 다른 형태로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할 수 있을 듯싶다. 한편 이에 따라 1591년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알려진 지그문트 3세에 의해 립카 인들의 종교나 문화 등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규제 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두 나라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리보니아 전선에 군대를 파병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립카 인들은 전통적으로 투르크-타타르계 무슬림들이었지만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는 지그문트 3세에 있어 북방 지역에 이슬람 세력은 카톨릭에 도전하여 그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로 보여졌었고 이에 따라 카톨릭 개종령을 함께 포고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지그문트 3세는 종교세 부과를 통과시켜 립카 인들이 카톨릭으로 전원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높이는 법령을 추가 공포했다. 이러한 세금이 높아지는 규제로 인하여 간접적인 종교 박해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1594년 폴란드 비슬라 강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여 수많은 자국 이재민들이 발생하자 이들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방편으로 자국민 군인들의 비중을 높였으며 립카 인들은 더 이상 기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남쪽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침략함으로써 립카 인 대신 노가이 타타르 족이나 유럽인 출신 용병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1612년 오늘날 벨라루스 지역에서 립카 인들이 거주하는 벨라루스 지역의 분할을 놓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상호 간의 군사 대치를 벌이게 되었지만 팽팽했던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불과 6년 만에 화의를 맺기로 합의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입장에 의하면 로마노프 왕조가 새로이 건국되어 내정을 확립해야 했으며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더불어 자신들의 남쪽 국경을 위협하고 있는 오스만투르크가 북진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립카 인들에게 있어 상당한 비극이었다. 립카 인들은 리투아니아의 용병으로 기용되어 러시아와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지만 화의가 맺어지자 이들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독일 선제후들은 리투아니아를 돕기 위해 4년 동안 북방 십자군을 포함해 무려 200만을 참전시켰고 이 전쟁에 립카인들도 투입되었다. 립카인들은 90만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한 300여 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는 동구권 카톨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화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정도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비롯한 카톨릭 동맹국들이 함께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립카 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인들과 관계에서 서로 간에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후 질서 재편을 함께 주도했고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투르크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 30만의 원정군을 폴란드 남부 지역에 즉각 파견했을 정도로 친 정부적인 호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현재도 폴란드와 립카 인들은 그러한 동맹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 중에서 서로를 적대시할 정도로 관계가 험악해진 적이 분명 존재했다. 이는 립카 인들의 봉기(The tribe a Lipka revolt)로 폴란드 전역이 내전에 돌입될 위기가 고조되었다. 1615년 5월 10일 이러한 내전 위기에서 그동안 기묘한 관계에 놓였던 오스만투르크와 모든 관계들이 종식되고 전쟁이 발생했고 이와 더불어 서남부 지역에서 합스부르크 왕국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전력상 비슷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합스부르크의 군대가 헝가리 군의 엄호를 받는 집단화된 포병부대를 앞세워 폴란드 군 배후를 강타하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불과 10일도 안되어 가 슐레지엔 지역이 장악되자 당시 바르샤바에서 긴급히 열린 연방 회의에서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그문트 3세(Zygmunt III Waza)가 립카 인을 제외한 노가이 인들이나 크림 타타르 인들에게 우리는 패배했다는 말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립카 인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전선의 30만의 립카 인 전사들이 나가 있었다. 이렇게 소외되고 규제를 강력히 시행한 폴란드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립카 인들은 서서히 그들 내부에서 폴란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1618년 합스부르크 군이 우선 코시체에서 철군을 완료하고 루블린 지역을 공략하자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던 립카 인들로 인하여 전쟁의 승패는 거의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루블린 지역에 살고 있던 립카 인들은 믿었던 폴란드가 배신했다고 분노했지만 이러한 참사를 당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폴란드를 너무 신뢰했던 립카인 스스로에게 있었다. 결국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까지 탄트라 산맥을 근거지로 하여 비교적 넓게 거주하고 있던 립카 인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지역 각지에 연락을 통해 산발된 부족들을 긴급 규합하려고 했다. 이와 더불어 후사르 윙의 립카 인 장교였던 라우아르두(Rauaedu)를 새로운 립카 인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1619년 새로 정권을 교체하여 일어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전 지역에 이와 같은 립카 반란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립카 인들에게 아직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라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자신들의 요구 조건 몇 가지만 수용해준다면 대화의 여지를 남기며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협상 수용에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하여 전체적인 판세를 반전시켜 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지도자인 라우아르두는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폴란드에 항복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타르와 폴란드의 관계사를 살펴보면 항복은 비록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민족 자체를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폴란드 전쟁, 독일 30년 전쟁, 영국-스페인 전쟁도 승자가 패자를 멸망시켜 국토를 병합하거나 식민지로 삼지는 않았었다. 대신 많은 간섭과 착취가 수반되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도 협상을 원하는 립카 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던 것이다. 결국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 개시되어 1620년 폴란드와 립카 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우아르두는 적어도 타타르 족의 명예만은 지켰다라고 말했을 만큼 형식상으로는 민족 대 국가로서 이루어진 하나의 종속 협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정 장소와 형식부터가 립카인들에게 여러 가지 굴욕을 주는 상황으로 진행되었고 립카인의 요구들은 폴란드 정부가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의사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일방적인 항복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협상으로 인하여 1621년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고조되었던 반란의 조짐은 사라졌다. 이어 립카인을 도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러시아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와 립카인들의 협상은 폐기되고 벨라루스에 정착해있던 일부 립카인들이 모스크바에 망명하여 자신들만의 자치 정부를 선포했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립카인들이 정부와 협상에 성공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모스크바 립카 인들을 도울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립카 타타르 인들이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굴복했어도 타타르라는 실체나 정부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립카 이외에도 러시아 외부에 산재한 수많은 타타르 칸국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의 타타르 인들도 그 약한 동질성을 가지고 모스크바에 망명한 립카 인들에게 일일이 도움을 줄 필요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는 불과 9년 전에 폴란드 군이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군대를 진주시켰고 당시의 타타르 칸국들 또한 폴란드 군에 합세하여 모스크바를 침공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에 친러 세력들로 구성된 칸국들이 러시아를 구원하지 않았고 당시 러시아 동란으로 인해 슬라브 민족들이 붕괴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들을 비교하면 타타르 족들 간의 연대성은 그 연결고리가 매우 약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모습과 달리 립카 인들은 생존하려면 철저하게 폴란드의 조치들에 굴복해야 했다. 1620년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 타결 이후 폴란드 군은 혹시나 모를 립카 인들의 반기를 견제하기 위해 동북 폴란드 영토인 비알리스토크, 남동부의 루블린, 자모시치 등, 립카 인들이 주로 거주한 지역들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역대 역사를 보아도 영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사례는 흔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라우아르두도 당황했을 정도로 그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지난 폴란드-립카의 1차 화약 당시 립카 인들에게 매우 가혹한 조건들을 제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립카 인들의 강한 반발들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우선 폴란드 정부가 통치할 수 있는 립카 인들의 거주 지역은 화약 당시 이전의 오스만투르크와 전쟁 때 투르크 족들이 점령하지 못한 루블린 일대로, 그들이 머물고 있던 국토의 40% 정도 밖에 되지 않았었다. 또한 립카 인들이 먼저 폴란드에 반기를 들었다는 명분으로 인해 하루에 4억 즈워티의 폴란드 점령군들 유지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이에 대해 화약 조건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정부와의 교섭위원회는 무조건 폴란드 점령군 최고 슐리흐타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이러한 명목으로 인해 립카는 그저 폴란드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형식상의 독립 종족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탄압에 가까운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연방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고 다른 타타르 세력들과의 외교 협력도 빈번한 편이었다. 게다가 경제 행위도 이루어지면 폴란드 정부에 세금도 냈고 자치적으로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란드 정부는 1차 화약 당시 반기를 획책한 주모자들 200여 명을 감금한 끝에 처형시키고 대부분의 군직을 박탈했으며 자치 군의 장비를 대부분 수거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립카-타타르 군은 거의 해체에 준하는 수준까지 몰락했었다. 이는 마치 이전 스웨덴과의 조약 하에 리보니아에 남겨둔 주둔군처럼 10만 정도의 폴란드 정부군을 협조할 수 있는 군대 정도를 보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에도 일부 묘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폴란드 정부 측이 립카 타타르의 기마병들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와 같은 조치는 폴란드 정부가 립카 인들의 반항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수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1차 화약 협정을 맺을 당시에 폴란드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립카 기마병들을 확보하지 않고 단지 무장만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거의 대부분 군 장비들을 거두어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보병, 포병들의 무기를 수거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의외의 조치였다. 이는 립카의 기마병들이 폴란드 군의 주력 돌격 군으로 남겨 놓겠다는 조치로 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당시의 상황은 물론이지만 이후 발생할 1672년 립카 반란의 진행 과정을 상기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였던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 당시만 해도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후사르 기마병들을 보유했지만 종전 이후 강력한 후사르 기마병들은 그 열세를 인정하여 철저히 축소되어 몰락했었다. 이후 리투아니아 얀 3세 대공이 통합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기병 전력 증강에 나섰지만 아직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그나마 구축한 기병 전력도 직전의 모스크바 침공 전에서 러시아 군의 저항으로 많은 손실을 본 상황이었다. 반면 당시 립카 인들은 다른 타타르 칸국들과의 전력을 비교해 볼 때 몽골-타타르 칸국들에 이은 4위의 기병 전력이었다. 당시 폴란드 최강 기병대인 후사르에 속해 여러 국가들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모스크바에서 패전한 퇴각한 직후 러시아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억류되었으나 대부분 기병들은 급격히 쇠락하고 있을지라도 후사르의 주력 부대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부분 살아남아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조차도 립카의 기병들을 생포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점을 고려한다면 강한 유목 민족 출신의 국가였던 오스만투르크도 분명히 그 용맹성을 가지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립카 인들의 기병 담당 조교인 아불 바기에르(Abul Bagier)는 립카 기병들의 부족민들 보호 의지가 확고한데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력히 반발하자 폴란드 정부는 처음 요구했던 해체 명령을 거두어들이고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에게 대패하고 기병 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폴란드 군이 그것도 판노니아 평원을 지나 오스만투르크와 합스부르크를 공격해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립카의 기병들을 왜 해체하려 했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래서 이와 같은 행태들이 1683년 비엔나를 포위하여 유럽 연합군들을 몰아넣고 3일 동안 공격을 중지시켰던 오스만투르크와 유사한 폴란드 전역의 또 다른 의문점들로 취급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기병들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폴란드와 립카인들이 다시 대립하는 원인이 된다. 오스만투르크의 입장으로 볼 때 비엔나에서 퇴각한 후 다음 목표는 당연히 폴란드였다. 육지에서 전선을 마주하고 전투를 벌인다면 평지의 기병전에서 폴란드 군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도 최강의 포병들을 육성했었고 네덜란드의 포병조련 장교들을 받아들여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15만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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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족의 폴란드-벨라루스-리투아니아 정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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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의 최종적인 패배, 동남아시아 정복을 단념한 계기 (상)
- 1285년 베트남 정복에 실패한 후에도,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는 여전히 베트남 정벌 계획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는지 베트남에 대해 재정복 계획이 만들어졌다. 1285년 8월 21일, 추밀원(樞密院)에서 베트남에 대한 재정복을 제안했고 1286년 2월 중순, 쿠빌라이는 2차 침공 때 참전했던 명장 아리크 콰야에게 베트남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으며 3월 초가 되자 참전 사령관들의 최종 명단이 승인되었다. 3월 중순이 되자, 징병과 동시에 300여 척의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86년 6월경에 남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한족들의 봉기가 벌어졌기 때문에 베트남 정복은 미루어졌다가 결국 1286년 말, 재개되었다. 3차 베트남 원정 때 원나라 군대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은 2차 침공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그대로 이어받았고 부사령관은 이해(李海)가 맡게 되었다. 휘하 제장들을 보면 아이우루이치(奧魯赤), 우마르, 반섭(潘燮), 지엡학메탓(葉黑湄失), 이궤순(李櫃順) 등이었고 1286년 11월에 아바키(阿八尺), 알리, 아이로, 장옥(長玉), 유규, 시크투르(昔都二), 장문호(長文虎), 비공신(丕鞏辰), 도대명(陶大明), 쩐 쩡닷(陳重達), 사우규(謝右閨), 보비성(菩比成) 등이 선정되었는데 대부분 2차 침공 당시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정 준비가 길어지면서 이 해는 1286년 6월 18일에 사망했고 그 자리를 이전에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거두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2차에 걸친 전쟁에서 패배했기에 이를 설욕하기 위해 상당한 수의 군대를 동원했는데 우선 2차 공격 때 참전했던 군대에 장수들의 수가 나오지 않았으나 제국 남부의 강소성(江蘇省), 강서성(江西省), 호광성(湖廣省)에서 몽골인과 한인 병사를 약 7만 명, 항복한 남송군 1천 명, 운남의 군대 6천 명, 해남(海南) 일대에서 1만 5천명, 그 밖에 광서족(廣西族) 군대를 포함해 9만 2천의 병사를 추가 동원했다. 수군의 경우 이전의 전투보다 병력은 더 적었으나 정예병으로 모았다. 700여 척의 신형 함대와 120여 척 해남의 전함을 수군 대장 우마르에게 맡겼으며 이번에는 확실한 보급선 구축을 목적으로 했는지 우마르와 장문호(長文虎)가 함께 17만 석의 식량을 실은 운송선 100척을 함께 지휘하기로 했다. 우마르와 장문호의 함대는 운송선의 호위 및 항구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아 베트남군은 해전에서의 우위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진격 날짜가 다가오자, 쿠빌라이는 제장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자오치(交趾 / 교지)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한편, 베트남에서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도 황제 쩐 인종이 직접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하기로 했고 총사령관은 흥도왕(興道王) 쩐 흥다오가 맡았으며 정군과 지방군, 그리고 민병대까지 모두 32만의 군사를 모았으며 2차례의 공격으로 인해 원나라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는지 감옥의 죄수들까지 자진해서 입대해 전투를 벌이기 위해 독려했다. 이미 2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기 때문에 원나라 군에 대해 경험이 많이 쌓여 있었던 쩐 흥다오는 쩐 인종 앞에서 작전을 수립하며 자신 있게 이번의 적들은 쉽게 붕괴될 것이라 단언했다. 원나라 군의 총사령관 토곤은 2차 침공 당시 항복했던 쩐 익탁(陳益稷)이야말로 안남(安南), 베트남의 통치자이며 그를 귀향시키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다시 침공을 개시했다. 원나라 군대는 3갈래로 분할하여 진격했는데 제1군은 아이로가 이끄는 군으로서 운남에서 출발해 타오 강과 노 강을 따라 이동했고 제2군은 토곤, 아이우루이치, 정붕비(程朋飛) 등이 흠주(钦州)와 염주(廉洲)에서 원나라의 허수아비이자 명분상 안남의 국왕이었던 쩐 익탁을 모시고 베트남의 북동쪽 국경으로 향했으며 제3군은 수군으로서 우마르와 반섭(潘燮)이 500척의 배를 지휘했으며 장문호가 후위에 있었다. 한편, 베트남에서도 대비하고 있었는데 쩐 흥다오는 각지에서 모인 저항군을 나누어 각 장수들에게 분할한 뒤 각지에 배치했다. 쩐 흥다오의 심복 장수인 응우옌 화이(阮蒯)는 3만의 군사를 데리고 낭 강 일대에 주둔했고 1차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레 푸쩐(黎 輔陳)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탄응헤(乂城)에, 쩐 하인쯔(陳慶餘)는 반돈(雲屯), 그리고 쩐 흥다오 자신은 꾸앙옌(廣安)에 주둔했다. 여기에서 쩐 흥다오는 요충지에 군을 배치하는 행보와는 정반대로 적의 보병의 침공을 막기 위해 떠민처우(思明州)와 접해 있는 함사(陷砂), 뜨쭉(徐竹) 기지를 폐쇄하고 장수들은 빈탄(平炭)으로 보냈다. 1287년 12월 18일, 토곤과 아이우루이치는 군을 몰아 떠민(思明)에 집결했다가 12월 25일 마침내 베트남의 국경으로 진입했다. 4일 뒤인 29일에 록처우(鹿州)에 도달한 토곤은 군을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한 갈래는 정붕비와 봇다깝답니(孛多急搭耳)가 1만 명의 한인 군대로서 빈빈(永平)에서 치랑(枝陵)으로 나아갔고 또 하나는 록빈(祿平)에서 손동(山洞)으로 나아갔다. 이들 군대는 각각 2,500명의 병사로 무기와 식량 등을 호송하였다. 한편 운남 일대에서는 아이로, 아타이(阿太), 망쿠다이 등이 이끄는 군대가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보다 훨씬 먼저 베트남 국경으로 진입했고 12월 11일에 박학(白鶴) 일대에 도착했으며 같은 시각, 우마르와 반섭이 이끄는 해군은 함처우(钦州)에서 출발해 베트남의 동북쪽 해안으로 이동했으며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12월 17일 전투선과 수송선을 분리한 뒤 전투선들은 반닌(萬寜) 하구로 이동, 강을 따라 반 끼엡(萬劫)으로 향했다. 원나라 군이 베트남에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베트남의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아이로가 이끄는 군대는 뚜옌꽝(宣光)에 주둔 중이던 쩐 냣두앗이 이끄는 4만 명의 쩐 군사를 상대로 박학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으며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베트남군의 함선 몇 대를 탈취한 이후 그대로 공격하여 장수인 레 따익(黎石)과 하안(河瑛)을 살해했다. 아이로 등이 승전하는 동안 토곤의 군대는 국경의 강을 건너고 있었고 정붕비가 이끄는 한족의 군대는 낭 강과 투 강 방향으로 이동하며 베트남의 군사들과 무려 17번의 교전에서 승리하며 실제로는 아무도 없던 함사(陷砂), 뜨죽(徐竹) 기지를 점령했고 연이어 푸산(浮山)의 베트남군의 기지를 공격했다. 베트남군은 밀림을 이용해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방법과 밀림에 서식하는 독사를 여기저기 풀어 놓고 물게 하는 방식으로 원나라 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 놓인 정붕비의 부대에 원나라의 증원군이 추가되자 결국은 퇴각했다. 아이로와 정붕비의 군대가 베트남군과 조우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토곤의 군대는 다음 이동 예상 지점이던 깔리(可里)까지 별 무리 없이 이동하여 토곤은 베트남군의 근거지인 반 끼엡과 가깝고 방어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찌린(至靈)과 파라이(普徠), 두 산을 점령해 단단한 기지를 세우고자 했다. 1288년 한족으로 구성된 원나라의 군대는 마오라(毛羅) 운하에 도착해 주둔했다. 하지만 탄응애(乂城)를 공격하던 중 베트남의 군대가 반격을 가하게 되고 원나라 군이 성내에 주둔하면서 저항한다는 것을 파악한 정붕비의 군대는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토곤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우마르가 이끄는 해군은 꾸앙옌(廣安)으로 진격했고 다모(多某)에서 베트남의 장군인 쩐 지아(陳加)와 교전을 벌였다. 쩐 지아는 원나라 수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해 원나라의 함선 일부를 전소시키거나 탈취하는 등의 공을 세웠으나 쩐 지아 측 병사들도 수백 명이 전사했기 때문에 결국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베트남으로 들어갈수록 소비되는 식량은 늘어만 갔고 결국 보급이 반강제로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토곤은 장수들에게 베트남의 마을들을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라고 지시했다. 베트남군은 이러힌 원나라의 만행에 분노했지만 어차피 약탈할 갈 것도 없었을 뿐더러 군대를 보존하기 위해 결국 음력 12월 초, 낭 강 일대의 모든 기지를 버린 채 반 끼엡으로 철군했다. 쩐 지아 역시 해상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반섭이 이끄는 해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박당 강(白藤江)을 건너 박장(北江)으로 올라갔다. 쩐 흥다오는 이를 막기 위해 박장에 함대를 배치하긴 했지만 원나라 수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88년 1월 초, 토곤과 정붕비의 부대가 합쳐졌는데 두 강을 지나며 17차례의 전투와 푸산의 방어선을 뚫고 온 정붕비와는 다르게 토곤은 큰 전투 없이 약한 저항군만을 만나며 매우 순조롭게 내려온 상태였다. 원나라 군은 반 끼엡으로 진격했으나 그곳에서 베트남군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수도인 탕롱으로 후퇴한 직후였다. 토곤은 점거한 반 끼엡을 수뇌부로 삼고 그 곳에 2만 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뒤, 계획대로 찌린(Tririn)과 파라이(Parai)에 목책 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어 원나라 군은 토곤이 이끄는 부대와 쩐 냣두앗을 격파한 아이로와 우마르가 이끄는 해군으로 각각 수도 탕롱을 향해 나아갔다. 토곤과 안남국왕으로 임명 되었던 쩐 익탁의 주력 군대가 수도 탕롱 근처에 도달했을 때, 조금 먼 후방에서 베트남 출신의 장군 레 탁(黎唶), 레 안(黎安) 등이 5,000명의 병사로 인해 쩐 익탁의 아들 쩐 득(陳德)을 호위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레 탁의 군대는 탕롱 방향으로 이동 중에서 노이방(內龐) 입구에서 매복하고 있던 따이족(齊族) 출신의 장군인 응우옌 테록(阮世鹿)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레 탁이 이끄는 병사들은 부상을 입었고, 응우옌 테록의 군대가 양쪽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북쪽의 국경일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레 탁과 레 안은 얼마 안 되는 병사만으로 룩남 강(陸南江)을 끼고 도주해야만 했다. 응우예 테록은 곧이어 추격을 실시했고 레 안은 쩐 득을 안고 말을 탔으나 뜻밖에도 말의 체력이 매우 허약해 걸음이 느렸다. 결국 보다 못한 레 탁이 자신의 좋은 말을 쩐 득을 안고 있는 레 안에게 넘겨준 뒤 허약한 말을 자신이 타고 달렸다. 추격 군에게 쫓겨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결국 이들이 호위하던 쩐 득을 포함해 반 호닷(萬戶達), 티엔 호티우(禪戶小), 응우옌 린(阮領), 레 옌(梨燕) 등 약 60여명의 기병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1288년 1월에 야밤을 이용히여 겨우 떠민(思明)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1월 말, 원나라 군은 탕롱에 도착했고 아루크(阿魯克)가 이끌던 운남의 군대는 홍 강 근처에서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와 만났으며 1288년 2월 2일이 되자 원나라 군의 본격적으로 탕롱을 공격했다. 쩐 흥다오는 상비군을 배치했고 성 안의 군대는 돌과 화살을 날리며 저항했다. 원나라 군은 여러 차례 파상 공격을 진행했으나 큰 결실을 얻지 못했다. 쩐 흥다오는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을 십분 활용하여 낮에는 쩐 까오(陳暠) 등을 사신으로 삼아 토곤의 진영으로 보내 여러 차례 화친을 요구했으나 밤에는 몰래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해 원나라 군의 식량과 물자를 전부 전소시킨 뒤 퇴각하기도 했다. 토곤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추격했으나 베트남군은 은폐와 엄폐에 능해 찾아내지 못했다. 한편, 쩐 흥다오가 적의 식량을 전소시키는 작전을 실행하는 동안 원나라 군의 파상 공격을 막고 있던 종친 쩐 냑(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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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의 최종적인 패배, 동남아시아 정복을 단념한 계기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