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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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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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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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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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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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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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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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4월 30일, 히틀러 사망 80주년을 맞이하여
    사망하기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때, 자신이 모스크바 동물원에 전시되거나 유태인이 연출한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걱정들은 4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죽고 그의 시체가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 천장에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자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가 일으킨 대조국전쟁으로 인해 2,700만 명이 넘는 소련인들이 학살당하고 국토가 초토화 되면서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당시 소련군 병사들은 옛 독일령 지역인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지역을 점거했고 현 독일령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등지에서 독일군 포로 및 독일 민간인들에게 똑같이 학살, 약탈, 강간 등으로 보복했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히틀러의 걱정은 단순한 망상은 아니었다. 만약 베를린 공방전 당시 히틀러 부부가 퓌러벙커에서 소련군에게 생포되었다면 당시 악의에 찬 소련군 병사들로부터 조리돌림에 집단 린치를 당했을 확률이 높다. 소련군 장성들이 병사들의 히틀러 부부에 대한 폭행을 극력 제지했다고 해도 그의 연인인 에바 브라운은 처형되지 않았을 지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던 히틀러에게는 무조건 사형을 선고했을 확률이 높다. 이어 프랑스나 영국, 미국 같은 서방 연합국이 베를린을 함락했더라도 결과는 똑같이 서방 연합국 지도부들에 의해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바 브라운의 경우, 복역 중에 결국 석방되었다 하더라도 유럽을 파괴한 전범의 애인은 악녀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 정권의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전쟁을 치루었던 각 서방 국가들의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하며 다른 서방 국가들로의 해외 여행 및 방문을 하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겪었을 가능성도 높다. 다른 형식으로 히틀러에 대한 회고록 편찬 등으로 돈을 벌며 살다가 한 1980년대나 1990년대 즈음에 노환으로 자연사 했을 가능성도 높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점령기 과정에서 벌어진 오라도르쉬르글란 학살 등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범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영국 또한 나치 독일 공군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치 독일군의 공습에 수도 런던이 파괴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소련처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증오가 매우 강했다. 유럽과 거리가 아주 먼 미국 역시 추축국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나치 독일군이 유럽 일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히틀러가 생포되었을 때 히틀러를 처벌해야 할 적국의 지도자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 중 그와 가까운 측근인 하인츠 링에(Heinz Linge), 기사인 에리히 켐프카(Erich Kempka), 그의 비행사인 한스 바우어(Hans Bauer) 등에게 자신의 유해가 적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당시 준비된 독약이 빠르고 확실하게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했다. 히틀러가 아끼던 애완견인 블론디는 한밤 중에 화장실로 끌려와 히틀러의 개 조련사인 토르노브(Tornow) 상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관저 의료진 중 한 사람인 하제(Hasse) 교수가 집게를 이용해 독약 캡슐을 으깨서 먹여 죽었다. 곧이어 히틀러는 블론디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다른 벙커의 사람들을 회의실로 불러서 마지막 환담을 나누었다. 히틀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 없이 손을 내밀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건넸으나 히틀러는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회의를 하고 동거녀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그의 부하들이 히틀러의 시체를 총통 관저 화원으로 가지고 나와 주차 된 자동차에서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뿌려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화장 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태운 게 아니었다. 이는 대충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소실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베를린이 나치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혈투가 벌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자신의 사체를 철저하게 소각할 것을 명령했지만 불을 붙이자마자 연합군 공군의 폭격이 떨어졌기 때문에 모두 벙커로 도주했다고 한다. 더불어 인체의 상당 부분은 물로 되어있어 불로 태우려면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엄청난 고열로 이루어지는 화장도 수십 분씩 소요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화장한 직후 소련군이 쏘아대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하여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 이는 당시 히틀러의 치아가 매우 부실하여 거의 대부분 금속으로 된 의치였다. 따라서 소련군은 히틀러를 진료하던 치과의사의 조수를 찾아내 그의 시신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의 시체는 1년이 지난 1946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체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떠돌며 무려 8차례나 이장되다 결국 1970년대 중반 동독의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했다. 그의 시신은 소련이 관할한 동독의 작센 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 강에 뿌려졌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밝혀진 히틀러의 행방이다. 이후 스탈린은 아직 소식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인 네오나치들에게 속임수를 쓰게 되는데, 히틀러의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 네오나치들이 그 흔적을 찾는데 크게 고생하게 만들었다. 이 때 KGB 요원들도 스탈린에게 라틴 아메리카 일대에서 히틀러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1950년대까지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을 정도로 철저히 보안 유지 및 허위 정보 유포로 히틀러에 대한 상상력을 부추겼다. 2010년 5월 7일에 마침내 러시아에서 옛 소련 의무병들의 증언으로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선전성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을 유포한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당시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 이어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따라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혹은 청산가리 캡슐을 입 안에 넣고 깨무는 동시에 총을 쏘아 확실하게 죽으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러시아 의료진들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다. 과연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을까? 청산가리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4월 30일은 히틀러의 죽음 80주년이다. 이 주기는 매우 특별하기에 네오나치들이 사방에서 준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우크라이나 각 도시들에는 아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네오나치 단체들이 집단으로 운집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운집하는 장소에 러시아의 미사일들이 집중 공격하여 네오나치들을 박멸했음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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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2
  • 오늘 4월 30일, 베트남 전쟁 종식 및 베트남 남북통일 된지 50주년을 맞이하여
    남베트남의 레 민 다오(Lê Minh Đảo) 준장이 지휘하는 5,000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인 쑤언록에서 1개 군단, 45,000명 규모의 북베트남 군의 공세를 4월 9일부터 21일까지 무려 15일 동안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사실상 베트남 전쟁의 막판에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다. 당시 북베트남 군을 지휘하던 반 띠엔 중(Văn Tiến Dũng, 1917~2002) 장군은 훗날 회고록에 자신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전투였다며 서술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에서는 이는 일시적인 방편애 불과하고 결국 사이공이 함락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북베트남 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쑤언록의 주변 지역부터 제압 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 당한 레 민 다오의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4월 21일에 쑤언록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다해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그저 남베트남 군이 마지막으로 불태운 전투 밖에 되지 못했다. 이후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전투를 벌이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레 민 다오 준장은 생포되어 포로가 된다. 쑤언록 함락이 확정된 4월 21일 당일에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 1923~ 2001) 대통령은 쑤언록 함락 소식을 듣고 남베트남 지원을 포기한 미국을 맹비난하며 하야를 발표한다. 이는 앞으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킨 후, 25일 남베트남을 탈출해 대만으로 망명했다. 국가의 수장이 국민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이다. 공석이 된 총통직은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1903~1982) 남베트남 부총통이 이어받았다. 쑤언록 함락 소식과 반 티에우 대통령의 하야는 일반 시민들도 동요하게 만들었고 결국 공산화가 눈 앞에 다가왔다 여긴 남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등 제1 세계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마침내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입안했다. 이 작전은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이미 세웠던 철수 작전의 일환이다.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옵션은 다음과 같다. ① 떤선녓 공군 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 민항기로 공중 수송하는 옵션. ② 군용기로 공중 수송 옵션 ③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 수송 옵션 ④ 최종 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 수송 옵션 흔히 프리퀀트 윈드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 작전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최종 탈출 작전인 옵션 4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항으로 구성되었다. 4월 23일, 사이공 떤선녓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군용기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 번에 수용 가능한 베트남인을 총 2,5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그 숫자도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렇개 되자 미군은 사이공에서 발이 묶인 탈출객은 물론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수용된 5,000명이 넘는 탈출객까지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괌이나 웨이크 섬, 요코타 공군기지로 실어 나르는 수 밖에 없었다. 전날인 4월 22일까지 매일 20대의 C-141과 20대의 C-130이 사이공 떤선녓을 왕래하며 탈출객들을 필리핀까지 실어 날랐다. 우선 철수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 편 및 선박 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남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LST 2척을 파견했다. 이들 LST들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으로 출항했다.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을 크게 치르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4월 25일에는 미국 연방항공청이 떤선녓 공군기지의 민항기 운항을 금지했다. 몇몇 민항기 조종사들이 이를 거부하고 비행장에 착륙해 탈출객들을 실어 나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옵션 ①항은 25일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같은 날 미국 대사관을 경비 중이던 미국 해병대 대사관 경비단 소속 해병 18명을 지원하기 위해 미 해병 40명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추가로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1912~1990) 주 남베트남 미국 대사를 호위할 6명의 해병 역시 도착했다.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 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 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④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비 지출이 된다. 4월 27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 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날 28일에는 사이공 동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비엔호아가 함락되었다. 같은 날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총통 역시 취임한 지 1주일 만에 사임하면서 즈엉 반 민(Dương Văn Minh, 1916~2001)이 후임 총통이 되었다. 마침내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외곽에 진입했다. 같은 날 저녁 18시 6분 즈엉 반 민 총통이 총통 선서를 할 때 북베트남으로부터 귀순한 조종사인 응우옌 탄 쭝(Nguyễn Thành Trung)이 지휘하는 북베트남 공군이 남베트남 군으로부터 노획한 A-37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공군 기지를 공습하여 비행기 몇 대를 파괴했다. 활주로를 이륙한 C-130을 향한 북베트남 군의 대공포 사격이 발생했으며 북베트남 군이 발사한 로켓포와 포탄이 산발적으로 공군기지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미국은 C-130의 운항을 일시 중단했다가 20시에 재개했다. 21시에는 미 국방무관 호머 D. 스미스(Homer D. Smith Jr. , 1922~2011) 육군 소장은 지휘통제소에 내일 총 10,000명을 탈출시킬 60대의 C-130이 도착할 것이라 통보하였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 단계인 옵션 ④가 발동했다. 그리하여 떤선녓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 (Landing Zone) 등 작전 입안 당시 사전에 선정되어진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들의 탈출이 개시되었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인원들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게 된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 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 편으로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를 내려 챙기고 탈출 헬기에 오르며 주 베트남 미군의 베트남 전쟁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결짓게 된다. 남베트남의 붕괴 당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포함한 미국의 철수 작전, 그리고 자발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남베트남 국민은 총 138,869명이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장면이 2021년 8월 31일 아프가니스탄의 프리덤스 센티널 작전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정오 경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대통령 궁에 진입해 금성홍기를 게양하고 즈엉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렇게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되면서 완전히 적화되었다. 그리고 올해가 바로 베트남 적화통일 50주년이 되었으며 베트남 현지에서는 엄청난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을 보자. 동북아시아의 위기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주한미군은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전략동반자협정"에 의해 러시아군의 북한군으로 참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북한을 침공했을 시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했을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막대한 무기를 제공하여 북한의 화력을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다 중공 또한 북한을 도울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러시아의 지원 만으로도 북한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2024년 5월을 기준으로 현재 주한미군의 규모는 28,500명이라 한다. 북한군의 위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계속 주한미군을 축소했던 결과가 이러한데 본국으로부터 계속 충원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금 6.25 때와 같은 시기도 아니기에 영웅적인 미군의 희생을 바랄 시대 또한 아니다. 미군 또한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다. 전투에 대한 마음가짐, 무기, 전략 등등 6.25 이후, 75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6.25 때와 같은 미군의 영웅적이고, 순수한 희생을 마냥 바라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당히 싸우다가 몰리게 되면 부산항 등에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재현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한미동맹 어쩌고 하지만 남베트남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2021년에 종식된 아프가니스탄의 민주정권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이들이 부패로 미국의 지원을 까먹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동맹을 버린 것은 맞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는 전쟁이 발생하면 안 되고 외교전으로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 베트남의 적화 통일 50주년 행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날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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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30
  • 복잡한 그리스-마케도니아와의 민족주의, 영토분쟁 이야기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국명문제와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다가 2019년에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는 마케도니아 고대사의 종주권 문제, 역사적 문제까지 함께 동반되고 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이래 그리스와 20년 넘게 이를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그리고 2019년 국명을 마케도니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하여 국명 갈등의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현재에도 북마케도니아에서 발행하는 여러 서적들과 일반 북마케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의 명칭을 제우스, 헤라, 아테나, 아르테미스 등의 그리스식 명칭이 아닌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디아나 등 로마식 명칭으로 표기하거나 부르고 있다. 그 정도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에 국호 문제로 충돌하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보수우파인 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에서 보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다시 선거의 쟁점으로 띄웠다. 사실 고대 시대부터 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족들이 북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현 북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인들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트라키아인들이 지배했었다. 더불어 도리아인을 융합한 마케도니아가 세력이 점차 강력해짐에 따라 트라키아 주민은 이에 굴복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군대 내에서 대다수 기마병을 담당하면서 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80년 이전까지 그리스나 불가리아 학계에서는 트라키아의 계보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트라키아 인이 완전히 정착한 시기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었다. 전체적으로 고고학에 치중되었던 트라키아 연구는 1980년 이후부터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을 통해 본격적인 서지학적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언어적인 부분을 유추한 결과 인도유럽어 종류를 사용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사카 종족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까지 근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언어적 연구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의 주민이라는 것까지 나타났고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을 통해 트라키아 인들이 스키타이와 동일 선상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 언급된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 후일 로마의 타키투스, 요르다네스 등의 기록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사르마트, 훈족에 관한 그들의 유목 생활 기록 등을 볼 때 트라키아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초원 유목 세력과 친연 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 시기 때도 그리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스의 신화 중 캔타우루스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전설은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발칸 지역의 켈트족 중 기마 부족들은 스키타이와 매우 유사하였기에 그들을 캔타우루스의 후예로 여겼을 정도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북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위인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이냐, 현재 슬라브인과 혈통이 섞인 북마케도니아 측 위인이냐의 역사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후 불가르족이 현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슬라브인들을 통치했고 그 슬라브인들이 현 북마케도니아에 밀려 들어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인의 국가가 된다. 게다가 그리스와 혼혈한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이 북마케도니아에 들어와 슬라브인과 혼혈해 버리니 이들은 불가리아 제국, 비잔틴 제국에 교대로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고 19세기에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서 독립하자 북마케도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늦게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와 관계 갖게 된다. 1944년 8월 2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비밀리에 민주연방 마케도니아(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лна Македонија)를 선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1990년 정치 체제가 의원내각제로 이행된 뒤, 1991년 나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으로 바뀌면서 나라가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른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낙후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와 같이 온전한 남슬라브도 아니었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이탈리아계 슬라브인도 아닌 사실상 그리스계 슬라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이 전쟁을 겪은 반면 마케도니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으며 집단서방 또한 마케도니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마케도니아는 매우 안전했고 내전과 더불어 나토의 공습을 받아 피폐해진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에 비해 마케도니아는 내전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립 이후 수차례 마케도니아 병합을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한 것은 터키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누구보다도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에 병합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대립하고 있던 터키 또한 이 부분에서 그리스와 입장이 같았다. 그 이유는 불가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가 잘 나가면 전통의 원수지간인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이 위협 받을 위기에 놓일 수 있고 그리스 또한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트라키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동북부, 동트라키아 지역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삼각으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 분쟁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특히 마케도니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주도한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는 테살로니키와 동트라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해당 영토에 대한 귀속을 요구하여 재판을 걸었던 이력도 있다. 더불어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남슬라브 계열의 마케도니아인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서부의 알바니아계들을 홀대하고 배척했다. 그러면서 민족 및 지역 간 갈등이 증폭되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내전은 그리스가 비록 종교도 다르고 이민족이나 다름없지만 아알바니아계 무장세력들을 부추기고 지원해 일으킨 내전이라 불가리아의 총리였던 시메온 2세가 마케도니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나토군이 들어오면서 알바니아계의 반란은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현재도 상당수의 알바니아인들 북마케도니아 서쪽 변경에 거주하고 코소보 남쪽까지 걸쳐 거주하는 측으로 합의를 보면서 오늘날까지 함께 살고 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할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 북동부의 지방명이자 과거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주장하며 정식 국가로서의 승인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리스 북동부의 해안 지방은 마케도니아 주(州)로서 오랫동안 그리스가 차지해왔다. 알렉산더 역시 그리스계라 믿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라는 단어의 국제 지명도마저 그리스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독립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공화국 측에서 국명 사용을 포기하지 않자 내륙국인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사용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항을 봉쇄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여기에 나토와 EU가 개입하니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항구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결국 2018년 6월 12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조란 자에프 마케도니아 공화국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입장에서는 국민투표도 아닌 여당 총리가 단독으로 결정하여 벌인 일이었기에 야당은 여기에 집중 반발했다. 결국 프레스파 협정(Prespa Agreement)에 서명하면서 이 문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북마케도니아 총선에서도 이 문제는 재언급되었고 이번 대선에서도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제1 야당인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우선 대통령부터 바꾸고 5월 8일에 있을 총선에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세르비아와도 관계를 개선하고 그리스를 비판하여 북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테살로니키가 속해 있는 동트라키아에 대한 영유권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혁신당이 대세를 잡게 된다면 그리스-터키-불가리아를 둘러싼 4개국 간의 영토 분쟁, 그리스와는 역사 논쟁과 국호 문제가 다시 불거져 평지풍파를 일으킨 대단히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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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30
  •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이 로마에 끼친 영향
    당시 갈리아는 갈리아 내부의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이 가장 강력하였는데 세콰니 족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에 호응한 게르만 족의 일파인 수에비 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와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세콰니 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 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세콰니 족의 영토에 그대로 정착했으며 이곳 수확물의 3분의 1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게르만 족들이 새로 갈리아에 이주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세콰니 족조차 게르만 족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끊임없이 게르만 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헬베티 족이 게르만 족에 저항하면서 로마 국경까지 침투하는 등 로마의 입장에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토는 알프스 산맥과 론 강, 그리고 로마 속주와 레누스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 헬베티 족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Orgetorix)는 갈리아 영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러한 제안은 대다수 헬베티족들의 호응을 받게 되었다. 오르게토릭스는 헬베티 족의 지휘를 위임받고 외교를 통해 주변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당시 갈리아를 양분해서 서로 대립했던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 양쪽 모두에게 접근한 오르게토릭스는 하이두이 족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둠노릭스(Dumnorix)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세콰니 족의 유명한 실력자의 아들인 카스티쿠스(Casticus)에게 접근하여 그의 협조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들 갈리아 거대 부족들의 야합은 셋 모두 매우 유명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기득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1차 삼두정치를 연상시키는 야합이었다. 그러나 오르게토릭스는 당시 헬베티 족의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으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둠노릭스는 자신의 형이 가지고 있는 부족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카스티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족장에서 퇴진한 뒤 부족장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서로 야합함으로써 각각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뒤 갈리아 전역을 서로 삼분하여 통치하자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야합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고 헬베티 족의 오르게토릭스가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된다. 오르게토릭스는 그의 재력을 이용하여 재판의 배심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죄를 면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헬베티 족의 족장이 무력을 사용해 오르게토릭스를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자 오르게토릭스는 자결했다. 오르게토릭스가 자결했음에도 헬베티 족들은 그가 처음 제안한 갈리아 침략에 대해서는 호평하였으므로 갈리아로의 이주 계획을 계속 추진한다. 이들이 이주할 준비를 마쳤을 때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만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 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여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는 로마 국경을 통과해야 가능했기 때문에 로마의 입장에서 상당한 근심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로마 삼두정치의 집정관인 카이사르가 이들을 정벌하여 갈리아 전체를 속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다른 두 정치인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전장에서 전공이 적었고 크라수스에 비해서 재력이 부족하여 이들에 비해 이렇다할 내세울 것이 없어 권력의 정점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그의 숙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광으로 집정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었기에 이는 카이사르의 정치 생명에 큰 제약이 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후광이 권력의 정점에 올려놓았지만 정점이 되었을 때 마리우스의 후광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갈리아 원정은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마리우스의 후광을 벗어나고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에게는 매우 절실한 원정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갈리아 원정에 성공하여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고 그러한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많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결국 갈리아 원정의 성공과 속주화는 로마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결국 카이사르의 높아진 인지도에 부담을 느낀 크라수스는 스스로 파르티아 원정을 자처했지만 실패하고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머물면서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의 모든 정치권 세력들을 장악했다.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와 높은 인지도, 강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되었고 이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으로 나타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그의 정치적 1인자가 되는 기본 바탕이 되었고 그 원정으로 인해 임페라토르(Imperator, 황제)의 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로마 역사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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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현재까지 터키 이스탄불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 상태일까?
    이스탄불은 2022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이어진 달러화 강세와 리라화 약세로 인해 터키 내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리라화 약세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2023년 상반기까지 고수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고물가 저금리의 비정통성 경제 정책의 영향이 크다. 이로 인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저하되어 외국인 투자가 상당수 감소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달러를 매각하면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외환보유고가 급감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임 성공 이후, 전 부총리이자 정통적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메흐메트 심셰크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전 골드만삭스의 이사였던 하피제 가예 에르칸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하면서 고물가에 대응하고 정통적 경제 정책으로 회귀할 것으로 기대를 모있다. 고금리는 죄악이라 주장하며 높은 물가에도 불구하고 약 2년 반 동안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온 에르도안은 재임에 성공한 이후 6월부터 금리 인상을 감행하여 2023년 5월까지 8.5%였던 금리를 5회에 걸쳐 35%까지 인상했다. EIU를 비롯한 글로벌 경제기관들은 터키의 기준 금리가 최소 45~50%대에는 진입해야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천정부치로 올랐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파격적인 금리 인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약 2.5~5%p 가량 인상하여 선거 시즌인 3월까지 최대 37.5~40%대를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오늘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42.5%에서 45.0%로 2.5%포인트 인상했다. 국내 수요와 서비스 가격 경직성, 지정학적 위험 등으로 물가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통화긴축의 효과 지연을 고려하면 현재 필요한 긴축 수준에 도달했다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평균 230~250리라 (한화 약 10,130원~11,000원)을 호가하고 있고 이것 저것 산다해도 200리라 (한화 약 8,800원)을 가뿐히 넘기고 있다. 외식 한 번 하면 250리라가 문제가 아니라 터키 차이나 커피도 마셔야 하니 적어도 350~380리라 (한화 약 15,400원~16,700원)은 가볍게 넘겨야 한다. 이 살인적인 물가에 상당수의 터키인들은 길거리 캐밥 하나 (100~150리라, 4,450원~6,600원)을 사고 그마저 감당이 안 되면 40리라 (한화 약 1,760원)짜리 길거리 군옥수수 하나를 사서 끼니를 때운다. 터키 차이도 동네마다 다르긴 한데 탁심이나 이스틱클랄 지역은 70리라 (한화 약 3,080원) 호가하고 술탄아흐멧이나 베이지드 일대에도 싸면 50리라 (한화 2,200원) 정도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올랐다. 아무래도 차값이 미친 모양이다. 아메리카노 커피는 70리라~100리라 (한화 약 3,080원~4,450원)로 한국과 근저한 가격까지 올라왔고 배낭여행자들은 아메리카노와 터키 차이를 후식으로 포기하고 30리라 (한화 약 1,320원)짜리 생수를 사서를 마신다. 요즘 이스탄불은 일반 서민 뿐 아니라 여행객들도 고물가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많은 수혜를 입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터키인데 서민 경제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듯 하다. 이스탄불 서민들이 에르도안의 이상한 경제정책으로 인한 불만이 높은 상황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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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어떻게 같은 무슬림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나?
    알라위파(Alawites)는 시리아에서 주류 이슬람 분파는 아니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내부 권력을 장악한 뒤, 시리아에서만큼은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 12이맘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의 사후 그의 측근이던 이븐 누사이르(ابن نصير)가 후계자를 자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12이맘은 시아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메시아적 사상"을 갖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이러한 사상 자체가 전무한다. 애초부터 선거로 칼리프를 뽑는 것에 찬성했으니 혈통적인 부분은 그다지 중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에게 있어 "메시아적 사상"은 필연이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의 영적 지위와 기능을 알리(Ali)와 그의 혈통에서 비롯된 11명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신의 화신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임무도 표면적으로는 기적으로 보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최후의 11번째 이맘은 그 스스로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12번째 이맘은 873년 무함마드(Muhammad)라는 인물로 그가 4세 때 마흐디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마흐디의 집 지하 저장소로 사라졌다고 한다. 시아파들은 제12대 이맘은 살아있고 언젠가 마흐디(Mahdi)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마흐디(Mahdi)는 시아파에서 세상을 구할 인물인 구세주이며 메시아이자 세상을 심판할 심판자로써의 임무를 갖고 있다 믿는다. 그래서 시아파들은 마흐디가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제12대 이맘 즉 “숨은 이맘(Hidden Imam)”이 예배를 듣고 이 세상의 일을 중재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란의 주류가 되어 있는 시아파는 12이맘파가 주류가 되어 이끌고 있다. 반대로 알라위파(Alawites)는 이븐 누사이르를 10대 이맘의 지명을 받아 그를 칼리프로 내세웠기에 12이맘파의 배척을 받았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12이맘이 아니라 10이맘파라 하여 10명의 혈통적 이맘만을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12이맘파에서 빠져 나온 이븐 누사이르는 사실상 알라위파의 창시자라 볼 수 있으며 알라위파를 경멸하는 여타 무슬림들에게서 '누사이르 파'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알라위파의 창시자인 이븐 누사이르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시아파에서 분파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종파 분리로 인해, 시리아 내전 당시 이란 측의 미적지근한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결과가 되기도 한다. 알라위파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 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1,000년을 넘게 동부 지중해 지역의 소수종파였지만 다른 종파들이 흡수되고 사라짐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던 종파였다. 알라위는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시아파 극단주의 및 암살단파 등의 영향을 받은 매우 복잡 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가 아닌 이븐 누사이르를 숭배한다는 종교적 오해 아닌 오해로 인해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그로 인해 빈곤에 시달려 수백년 넘게 고생했다. 이들의 교리 또한 상당수가 사라지고 변형되어 왔는데 이미 13세기에 들어 주류 이슬람에서는 알라위가 불신자와 다름없는 이단 취급을 받았던 신세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했으나 이후에는 이들이 수니파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자 이슬람 세계를 파멸시킬 전략으로 알라위를 포섭하여 분열시킬 요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맞아들여 자신들을 배척하고 박해한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수니파의 유명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ابن تيمية)는 알라위파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감행했다. 타이미아는 알라위파를 두고 카르마트파나 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라 혹평했다.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알라위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고 했다. 또한 그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으며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고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이미야의 비난은 매우 호전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알라 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다. 타이미야가 살아 있던 14세기 당시 알라위의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기도 하면서 현재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에서 알라위파를 토벌하는 작전에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 세차례 직접 참전했다. 그 결과로 인해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수니파와 맘루크 정권의 박해를 피해 수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시아 12이맘파로 다시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서술된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에게 돌아선 알라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박해했다. 특히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궤멸적 참패를 당하자 보호막이 없어진 알라위파는 박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정체를 숨기고 은거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대가 되면서 알라위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그동안 박해로 인해 많은 수가 줄어 소수에 불과한 데다 이단 취급 받는 것은 여전했고 세력도 미미하다시피한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나 비슷하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던 드루이즈는 적어도 레바논 아미르 국에서 대대로 제후를 배출하여 세를 넓히는 바람에 지배 계층 자리에 있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 이에 비해 알라위는 매우 처지가 열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 데다 대부분 경제력 없는 농노들이었으며 관료로 배출되는 이가 없다보니 대부분 수니파 지주들에게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이에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졌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오스만 제국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에서 차별을 받았고 임금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나아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선봉에 세워 총알받이의 목적으로 빈약한 무장에 무조건 진격을 시도하게 하여 최전방으로 내몰았다. 교육 수준도 매우 처참하여 시리아 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부친이자 전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알라위파로 자신의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지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오스만의 영토였던 시리아에 프랑스가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다르게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있던 1941년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보호 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로 인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를 토대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 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위파는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출세를 위해 대규모로 입대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있다며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알라위파들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고 자신들을 탄압하던 수니파를 매우 증오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는 급격히 서구화 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군사적인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고 군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 통치 이후에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로 성장했기에 이전의 지배자였던 수니파들은 더 이상 알라위파를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상 프랑스가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를 키워준 셈이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당시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은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와 대화를 나눈 바 있었는데 해당 지도자는 알라위파가 과거 3-400년 동안 핍박을 받다가 이렇게 대우를 받다 보니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놓아두면 분명 시리아의 주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된 정당 의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로만 인구 조사 형식으로 나눈다 포고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1970년에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쟁취한 이래 알라위파는 마침내 시리아의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 볼 때 1,000년이 넘게 탄압을 받아 소수종파로 전락하면서 생존을 걱정했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드디어 기득권 주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이어져 2024년까지 늦게서야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라위파는 주위의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된다. 알라위파는 이들에게 테러와 각종 반란 시도에 직면하면서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발생하고 있던 각종 지역 감정들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목적을 내세워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알라위파 요인들과 친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Hama massacre)과 같은 강경정책으로 대처했으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면서 마침내 정식 시아파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한편으로 수니파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수니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정부 공무원 할당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수니파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며, 수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 1,000년 이상 대립해온 수니파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어 기독교와 드루이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 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동맹을 맺고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정책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그러나 알라위에 대항하고자 하는 근본주의 세력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페즈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존재하던 2015년 4월,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 명 중 ⅓이 시리아 내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하는 ISIS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및 알 카에다 세력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 하는 자유 시리아 군은 무능력한 상태라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항상 불안을 달고 살아야 했다. 시리아 내전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함께 반군과 맞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보면 알라위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안하고 잔인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사드 부자의 집권기는 1,000년이 넘는 알라위파의 역사에서 늦게나마 맞이한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에서 축출된 현재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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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28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마지막 마지노선 이스탄불 협상의 실패
    작년 2024년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이 열렸다. 여기에서 '평화 협정(Peace treaty)'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도 이스탄불에서의 협상이 끝난 뒤 별도로 가진 양국 대표의 기자 회견을 통해 전해졌다. 양측의 회견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하루 만에 끝났다. 본래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최종적으로 합의까지 이르기에는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스탄불 회담을 중재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가지 협상 쟁점 중 4가지 부분에 있어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합의가 될 수 있는 4가지 조건은 첫 번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철회하는 것,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세 번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안보 보장, 네 번째,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이다. 물론 타결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돈바스의 독립과 더불어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핵심적인 목표로 내세웠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비무장화와 나치의 세력인 아조프 대대 및 프라비섹토르 세력의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돈바스를 보호하는 조건에 있어 협상 내용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나치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치의 깃발을 앞세워 선동하는 세력들을 거의 제압했다 여겼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오늘 남부 항구도시이자 최대 격전지인 마리우폴의 도심 돈바스 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고 아조프 대대의 근거지였던 마리우폴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CNN 방송도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보도했으며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역 대부분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며 마리우폴 함락을 사실상 인정했다. 터키 언론인 휘리옛과 TRT에 의하면 이스탄불 협상이 이전 4차 만남에서 러시아 협상단이 우크라이나 협상단에게 문서로 정리해 넘긴 제안서에 대한 답변 문서를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협상단은 협상에서 구두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문서로 전달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협상단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레믈린 보좌관은 협상 종료 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지위와 비핵국가 지위의 추구를 확인하는 제안을 문서로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에 의하면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거부하는 것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외국 군사기지와 더불어 외국의 군대 배치 금지 조항이 포함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해주는 EU 국가 및 나토 국가들의 동의 없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제안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국제법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영구적 중립국을 선포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나 비교적 최근의 민스크 협정보다 더 강화된 다국적으로 조약을 비준하여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다비드 아라카미아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대표가 말하기를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 동안 보증했던 국가들이 서명하고 비준하는 국제 조약의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터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참여 가능한 국가들을 안전 보장의 보증 국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들로부터는 이미 참여를 허락을 받았다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할 경우, 보증 국가들은 3일 간의 협의 후 우크라이나에 무기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영공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하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TRT는 협상 중 휴식 시간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논의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관한 국제 조약이라 역설하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조약 및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 받는 것이 서로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차후에 다시 있을 6번째 만남의 쟁점은 모든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휴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푸틴과 젤렌스키가 정상 회담을 가지며 승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으로 방침을 최근에 바꾸었고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와 최고 의회 라다에서의 승인 및 안보 보증 국가 의회의 비준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군이 개전 전날의 위치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안보 협정의 국제적 조약 서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대한 근접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협상이 싸인되지 않으면 군사작전 종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상호 간의 신뢰를 높이고 향후에 협상할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키예프와 체르니코프에 대해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 이 말은 북쪽의 전선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열세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따라서 북쪽 전선은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오늘 러시아 영내에 있는 벨고로드 군수창고 폭발하여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리아 노보스티(РИА Новости) 국영 통신사는 러시아 긴급 구조대 대표 말을 인용해 "벨고로드 인근에서 발생한 군수창고 폭발은 인재"라고 보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열세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의 협상단은 군사활동의 축소가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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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8
  • 매우 심각한 우크라이나 군 손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의 전투에서 죽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하루 평균 전체 부대원의 5%에 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일 간 전투를 치르면, 부대원 절반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전투가 치열했던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에서는 전투 중, 부대의 2~3배의 병력을 잃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은 보통 10~15일간 최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교체된다. 한 부대의 부대원 중 15~20%가 최전선에, 나머지는 2선과 3선 방어선에 주둔하는데, 15일 정도 지나면 순환 배치되는게 현재 상황이다. 이는 러시아군의 맹공으로 인해 최전방 부대원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도의 피곤함과 더불어 옆 동료를 잃은 슬픔과 공포감을 호소한다고 하였다. 이어 새로운 부대로 교대하기 어려운 지역도 있다. 그런 곳 중 하나가 쿠르스크 전선이다. 쿠르스크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포위로 인해 부상병들의 후방 이송마저 어렵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무기 중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는 러시아군의 화염방사기 시스템인 '토스'(TOS, 러시아어로는 TOC)와 항공기에서 투하되는 강력한 위력의 'FAB' 폭탄(대표적인 모델이 ФАБ-250М-46)이다. 이 무기들은 참호 속에 아무리 깊숙히 몸을 숨기고 있어도 피해가기 어렵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의 한 장교는 토스가 공격을 감행하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토스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스의 위력은 부상자도 없이 모두 살상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전폭기가 우크라이나군의 방공망과 휴대용 스팅어 미사일을 우려해 자주 출몰하지는 않고 있지만, FAB 폭탄이 한 번 떨어지면 아무리 단단한 요새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파괴된다고 밝혔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이 전쟁 초기에 하급 지휘관도 전장에서 독자적인 상황 판단 및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수평적 명령 체제를 발동시켜 러시아군을 한동안 제압이 가능했다면서 지난 1년 동안 전쟁 경험이 풍부한 하급 지휘관들이 많이 전사하면서 전투 현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전선에 배치된 대부분 우크라이나군의 전장,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러시아군의 포격을 피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바로 옆 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우크라이나군이 발사한 드론은 바로 이웃의 아군에 의해 격추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개조해 사용하는 민간 드론에는 식별 장치가 부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 저하와 혼란은 극심한 포탄 부족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투 경험이 적은 사병과 장교들의 역량에 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계속되면 병력과 무기 탄약이 부족한 측이 더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몰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 장교들의 통솔과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다면 수없이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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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건 찬성에 대한 '비판'
    작년 2024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G7, 나토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을 찬성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대신, 우크라이나에게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G7에 12개의 신흥국과 주요경제국 및 EU를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금융, 외환 등에 관련된 국제적 위기 대체 시스템의 부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1999년 9월 IMF 연차총회 당시 개최된 G8 재무장관회의에서 G8 국가와 주요 신흥시장국이 참여하는 G20 창설에 합의되면서 창설되었다. 미국 최대, 최악의 금융 위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Crisis) 사태가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참여한 나라들 간에 첨예한 의견 대립이 보이며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한 환율조작 문제까지 생기게 되면서 G20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가기 시작하고 EU내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G20의 역할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라는 핵심 축의 존재와 신흥국가들의 영향력 강화로 인해 현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G8을 대체하는 국제기구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크라이나가 세계적 시장 흐름에 따라 갈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 여력이 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 산업 시설을 시찰해보면 알겠지만 서부 지역은 농업에 치중되어 있고 공단 등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부실한 기계와 공장 설비 등을 보면 이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수십년은 걸릴 것이다. 그것을 미국이나 서방이 무상으로 지원해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가 모두 돈으로 사야 한다. 도로 하나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 아스팔트가 너덜너덜하고 깨져 있는 상태에 차를 타면 수없이 머리와 천장이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나라에 무슨 경제적 역량이 된다고 우크라이나가 G20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현재 G20 구성원들의 인구를 합치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달한다. 또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한 값은 전 세계의 85%에 해당하며, 세계 교역량의 80%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 경제를 대표하는 모임이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몇 개가 있으며 우크라이나로 인해 세계 경제가 영향을 받을 확률은 몇 %나 될까? EU 시찰단이나 미국,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는 국가의 대표들이 우크라이나 내부의 시설을 돌아본 적은 있을까? 한 마디로 전 세계에서 돌아가는 경제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바이든의 이른바 립서비스로 보인다. 그러나 이게 립서비스가 아닌 진정이라면 G20에 대한 모임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고 애당초 그럴꺼면 1인당 GDP 3,500불 수준의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도 포함시키는게 합당하다. G20이 아나라 G40까지 불려도 상관이 없다. 미국의 논리대로라면 이들도 경제가 망한 국가들이니까 충분히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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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 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인더스 강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모체가 되는 강이다. 현재도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각종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인더스 강은 티베트 고원 서부에서 발원하여 총 길이가 2,880~3,180km에 달한다.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아라비아 해로 들어간다. 인더스 강은 모두 19개의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 중 하나로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 3개의 국가들을 통과하고 있다. 인더스 강은 파키스탄이 93%, 인도가 5%, 중국이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폭이 좁고 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강의 지류들이 속한 강 유역은 역사적으로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는 물론, 파키스탄에서 거의 유일한 곡창 지대로 식량 경제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는 지역이다. 20세기에는 운하를 비롯한 많은 관개 시설들이 건설되어 110,000㎢ 이상의 농토에 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강 체계(River System)로 나타나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하고 있다. 그러나 인더스 강 상류가 인도 국토를 통과하여 파키스탄으로 흐르고 있기 때뭄에 1947년에 분리 독립한 이래 인더스 강물의 분배 문제가 양국 간의 큰 현안이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60년 세계은행(World Bank)의 중재로 ‘인더스 유역 조약(Indus Waters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인더스 강의 강물을 양분하게 된다. 이는 세계은행의 중재로 이루어졌지만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인더스 강 수운에 위협을 가한다면 국제법을 위법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된 것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우선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상류의 수량을 인도가 조절하여 자국의 농경지를 위협하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1948년 양국은 인도가 수량을 충분히 공급하는 대신에 파키스탄이 매년 일정 부분의 금액을 인도에 지불한다는 잠정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보다 영구적인 효력을 갖는 협정의 필요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양측은 진전된 절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인도는 인더스 강 지류들의 물길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고 해도 파키스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파키스탄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고 했으나 인도는 이에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 양측은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여기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개발전문가이자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 와 원자력위원회 (AEC) 위원장인 데이비드 릴리엔탈(D. Lilienthal)은 인더스 강 유역을 탐사하며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1951년 세계은행에 갈등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에 세계은행은 릴리엔탈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인더스 강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우선 릴리엔탈과 세계은행은 인더스 강 문제를 기능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나누어서 접근했다. 이는 인더스 강 유역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와 수량 할당과 같은 경제와 직결된 정치적인 접근보다는 인더스 강의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양국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설득 과정에 있어서 운하와 저수 시설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세계은행의 적극적인 자금 지원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써 무려 8년에 걸친 협상을 통해 1960년 9월 19일 파키스탄의 카라치(Karachi)에서 인도 수상 네루(J. Nehru)와 파키스탄 대통령 인 아유브 칸(Ayub Khan)이 서명함으로써 오랜 갈등이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 측의 서명 당사자가 인도의 수장인 대통령이 아니라 수상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더. 인도의 공식적인 대표자는 분명 대통령이고 인도는 대통령 중심제로 정치체가 운영되는 국가다. 수상이 이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은 조약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2016년 9월 인도 연방 최고 법원에 공익형사소송(Public Interest Ligitation)이 재기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따라서 2016년 9월 25일 인도는 당시 세계은행의 조약 중재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파키스탄 다시 마찰을 일으킨다. 당시 인도령 카슈미르 우리(Uri)의 인도군 기지에 대한 파키스탄 무장단체의 습격사건이 발생했고 19명의 인도 군인이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더스 강 수원에 대해 전면 재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두 달 뒤인 11월 15일에는 펀자브(Punjab) 주의 선거 유세에서 모디 총리는 세계은행에 의해 인더스 강의 파키스탄 측 지류인 수트레즈, 베아스, 라비 강물은 인도와 인도 농부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은 농토에 사용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고 했다. 따라서 인더스 강물의 한 방울이라도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해서 펀자브와 잠무‧카슈미르의 인도계 농부들이 사용하게 하겠다고 연설하며 이들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2016년 12월 23일에는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는 모든 지류를 봉쇄하는 계획을 담당할 ‘세계은행 태스크 포스’를 조직했다. 그리고 같은 달인 25일에는 인더스 강 인도 측 상류 지역에 대규모 저수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인도 언론에 보도되면서 인도가 파키스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모든 수원을 인도 측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혹이 재기되었다. 물론 인더스 강 조약의 주요 내용은 인도 측이 인더스 강 동안의 수트레즈(Sutlej), 비아스(Beas), 라비(Ravi) 등 3개 지류를 갖는 것으로 하고 파키스탄은 서안의 체나브(Chenab), 젤룸(Jhelum), 인더스 강 본류(本流)의 관할권을 갖는 것으로 했었다. 물론 이는 인도가 동안의 지류들로부터 약 3,300만 에이커 피트(Acre feet)의 수량을 공급 받고 파키스탄은 약 12,500만 에이커 피트를 공급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인도는 파키스탄의 약 20%의 수량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파키스탄에 있어 큰 헨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인도는 서안의 지류들로부터 최대 약 70만 에이커의 농지의 관개 용수로 사용할 수 있으며 125만 에이커 피트를 초과하지 않는 새로운 저수 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 또한 인도 측은 수력 발전을 위한 160만 에이커 피트를 확보하는 한편 75만 에이커 피트 내의 홍수 방지용 저수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인도의 잠무-카슈미르(Jammu-Kashmir) 주는 충분한 관개 용수 확보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수력 발전 용수가 충분하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된다. 물론 파키스탄 측에서도 일부 지역의 홍수 대비용 댐 건설이 제한되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1988년부터 파키스탄이 좌안 하수 배출 수로(Left Bank Outfall Drain)’를 착공하여 운영함으로써 발생했다. 해당 수로는 약 500km에 달하며, 아라비아해의 영향으로 염분이 많고 관개 용수로 적합하지 않은 오수들을 파키스탄 측의 인더스 강 삼각주 지대를 우회하여 쿠치 대사막을 통해 바다로 흘려 보내려는 목적에 있었다. 이러한 파키스탄 측이 일방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쿠치 대사막이 있는 인도의 구자라트(Gujarat)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이 세계은행이 중재 하에 체결한 조약문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하수 배출 수로가 90% 정도 완성된 2002년 이후 구자라트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에게서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아라비아해 연안의 염전들이 오수로 인헤 오염되었으며 52개 종의 동식물이 피해를 입는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면서 인도 측의 비난을 샀다. 2016년 하수 배출 수로에 대해 세계은행의 중재가 진행되고 있으며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공사는 중지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인도가 잠무-카슈미르에 건설하고 있는 키샨강가(Kishanganga)와 라뜰레(Ratle) 수력 발전소도 양국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었고 2016년 12월 12일 세계은행이 개입하여 공사를 중단시킨 바 있다. 그러던 현재, 잠무-카슈미르의 테러로 이를 인도에서는 파키스탄과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테러단체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인더스 강 강물을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인도 정부 측의 발언은 파키스탄에 대한 위협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에 있다. 이는 인도가 파키스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군사적 방법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의 이러한 차단 의지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부분들이 매우 많은데 양측이 체결한 국제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발생하는 국제 외교적 신뢰도 하락 문제 등은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파키스탄의 수천만 농부들의 생계가 달린 물줄기를 차단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권 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도 있기에 오히려 인도에게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의 경우, 독자적으로 인도의 이러한 시도에 물리적으로 저항하거나 반격하는 것보다는 UN과 국제 중재 재판소, 국제 물 분쟁에 관한 협약 등을 근거로 국제 여론을 조성하면서 이와 인도의 행위에 공동 대응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치인 중 일부는 우방인 중국을 설득하여 티베트에서 인도로 흐르는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을 차단하여 인도 동북부의 농업에 타격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중국 또한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보여 진다. 지난 80년 가까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인더스 강 문제도 장기적으로 긴장과 소강을 반복하는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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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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