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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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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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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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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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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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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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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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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의 퇴진과 훈 마넷 정권에 대한 전망
    2023년 7월 26일, 캄보디아의 훈 센 총리가 만 39년의 집권을 끝내고 퇴진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훈 센은 동남아시아 현대사에 있어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었던 거물급 위인이다. 그는 크메르루주와 폴 포트로 인해 "킬링필드"로 초토화되었던 캄보디아를 현재의 위치까지 일으켜 세운 공로가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훈 센을 평가하자면 명과 암이 확실한 인물이다. 훈 센은 베트남과 가까운 메콩강 일대의 캄퐁참 지역 출신이다. 그 또한 크메르루주 출신으로 중공 베이징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철저히 사상 교육받았다. 그러나 크메르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을 저지르자 그는 점차 크메르루주를 멀리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크메르루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1977년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루주 군대를 양성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와 함께했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과 함께 크메르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고 그는 베트남의 후원을 받아 캄보디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1985년 만 32세의 나이로 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어 현재까지 캄보디아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97년 7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시아누크 왕의 아들이자 원내 1당 주석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1 수상을 축출하고 절대 권력자가 된다. 캄보디아를 철권 통치하게 된 훈 센의 공적은 현재 캄보디아를 있게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킬링필드"로 인해 지식인들이 모두 학살당하고 국가의 인재 풀이 말라 국가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국가가 캄보디아였다. 당시 외신에서는 이러다가 캄보디아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훈 센은 베트남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킬링필드"로 인해 초토화된 캄보디아를 정상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힘을 쏟았다. "킬링필드"의 여파는 엄청났다. 우선 인재들이 없었기 때문에 캄보디아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여파는 킬링필드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훈 센은 캄보디아라는 국가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 각종 정책, 외교, 동남아시아에서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했다. 캄보디아를 현재 그나마 국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훈센 총리가 39년을 집권하면서 해 놓은 그의 최대 공로라 할 수 있다. 훈 센 총리가 아니었으면, 그의 결단에 따라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캄보디아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장기 집권에 따른 부작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결국 농민들은 토지들을 국가 소유로 빼앗겨야 했다.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했다. 훈 센 수상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야당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결과를 낳았다. 2013년 7월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기면서 부정선거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2015년에는 자기 아들 세 명을 당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훈 센 수상의 이 같은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당시에도 차기 권력자는 장남인 훈 마넷이 세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훈 센은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반정부적 글 내용으로 인해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훈 센 수상의 지시로 체포했다. 또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CNRP)의 삼랭시 주석에게 입국 금지 조치했다. 이러한 조치로 2016년 11월 27일에는 유엔 인권기구와 갈등을 빚으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내정불간섭을 약속하지 않으면 유엔 인권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훈 센의 외교 성향은 친중·반미 성향을 띄고 있다. 옆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유용한 우호국인 베트남과도 관계가 깊다. 훈 센의 친중 경향은 장남 훈 마넷에게 세습하기 위해서라는 측면이 지배적이었지만 훈 센 일가의 강건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국 정부의 협력은 필수적인 요소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거의 경제적인 부분으로 볼 때 중국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인 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번에 권력을 승계받은 훈 마넷 역시 친중 행보로 진행하고 있다. 훈 마넷은 최근 베이징에 방문하면서 중국의 당 인사들과 여러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중국 자본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렸다. 캄보디아는 2005년에 석유와 천연 가스매장이 확인되었으며, 상업적인 채굴은 2011년부터 개시가 되었는데 여기에 입찰하는 기업은 모두 중국 기업이다. 그리고 2020년부터는 산유국이 될 전망이지만 상당수의 이익이 중국으로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훈 마넷 시대의 캄보디아는 훈 센 총리 시절과 비교하여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문제는 훈 마넷은 군 경험은 풍부하나 정치 경험이 일천 하여 경제적인 부분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도 없다. 훈 센은 훈 마넷을 차기 권력자로 점찍고 2015년부터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후계자수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뭔가 보여준 것이 없다. 다만 훈 센보다 더 친중에 가까운 인사이기에 아마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이전보다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훈 마넷 정권의 미래는 현상 유지 아니면 훈 센 때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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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7
  • 대만 원주민들의 잔혹사 "우서 학살 사건"
    때는 2011년,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등 메이저 영화제 등에서 한 영화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 영화 이름은 "시디크 발레(Seediq Bale)", 이 영화는 2011년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 자본 합작으로 장장 러닝타임 276분의 시간동안 우서 사건의 비극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제48회 타이완 금마장 영화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워리어스 레인보우"라는 이름으로 1, 2편으로 나누어 국내에도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우서 사건은 어떤 비극을 말하는 것일까?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제 지배의 치하에서 유화적인 정책의 결과물이다. 역사적으로 대만인들은 지속적으로 식민통치를 경험해 왔다. 여기애서 언급되는 대만인들은 오늘했었던 강의에서도 분명히 밝혀두었지만 대만 원주민들을 말하는 것이고 현재 대만을 실효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 한족이다. 이들 또한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구분되고 있고 외성인들의 대부분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 이주해 온 한족들이고 본성인들은 훨씬 이전부터 이주를 진행했던 한족들이 많다. 이러한 본성인들 중에 복건성 민월인과 객가인, 그리고 광동인과 리족, 좡족과 같은 대륙 소수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대만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혈통과 언어가 한족과 다른, 동남아시아 계열인 오스트로네시아계 인종들이다. 그들 대만 원주민들인 대만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을 지배했던 네덜란드나 청나라, 일본, 중국 국민당 모두 다 외래 정부일 뿐이다. 이러한 대만인들이 유일하게 독립국가로 건재했던 왕국은 17~18세기에 존재한 다두 왕국이다. 이 다두 왕국은 비록 청나라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오히려 수만 명의 대만인을 희생시킨 국민당의 철권통치는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 시절이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식민지 시절 일본의 유화 정책의 영향이었다. 일본에 한반도는 식량 및 지하자원 수탈의 대상이자 대륙 침략의 발판이었지만 대만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받은 열도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지는 섬에 북해도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경략을 통해 확장한 영토로 인식했다. 그래서 한반도와는 달리 일본은 대만에 강압적인 통치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이러한 대만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의 실상은 식민지배의 공고화와 더불어 또 다른 차별의 연속이었다. 일본인들은 고산 지대에 사는 대만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여겼다. 원주민들 삶의 터전인 숲의 나무와 천연자원들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대만 원주민이 사는 고산 지역의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내 본토로 실어 날랐으며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서 대만 원주민들이 겪은 일제강점시기는 유화책이라는 일본 정부의 기조 정책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자신들의 산과 계곡, 사냥터를 온전히 지키고 그곳에 들어온 침입자의 목을 베어야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 조상들의 영혼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대만 고산족들은 그러한 전설로 인해 "무지개 다리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당시 14개의 종족으로 분류되는 대만 내 원주민들 중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알려진 시디크 족은 일본인들의 침입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시디크 족 마을 중 마흐푸 마을의 족장이자 침입자의 목을 가장 많이 베어 대만의 최고의 전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모우나 루도는 부족과 함께 산 위에서 숲과 구름과 안개, 비를 이용하여 숲에 몸을 숨기는 게릴라 전을 감행해 아래 계곡을 따라 침입하는 일본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적의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려는 시디크 족의 용맹성은 일본이 동원한 근현대적 무기로 인해 패배가 이어지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터전들도 일본군에 내줘야 했다. 모우나 루도 족장은 본래부터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그의 아끼는 여동생이 일본 경찰관의 부인이 되었으나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게 되면서 자식들과 함께 버려졌던 일이 생기자 모우다 루도는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 10월 9일 모우다 루도는 루산 지역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이 일대를 순찰 돌고 있었던 일본 경관 요시무라가 모나 루다오의 아들 다호 모나의 결혼식에 들려 참석하게 된다. 다호 모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라 요시무라에게 받아 마시기를 권유했으나 요시무라는 짐승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으며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성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호 모나가 계속 잔을 받아 마시기를 권하자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후려쳤고, 이에 결혼식장에서 큰 싸움이 발생해 요시무라는 부상당하게 된다. 그 다음 날 모우다 루도는 일본 측에 사과하기 위해 요시무라에게 포도주를 다시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하게 된다. 10월 27일 우서소학교에는 때마침 육상 경기가 있어 일본인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는데, 모우다 루도는 자신의 아들인 다호 모나가 심각한 폭행을 당했던 당시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학교를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중국 본성인들을 살해했다. 모우나 루도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성냥의 화약 부분을 벗겨 수십 년간 모았다. 시디크 족에 대한 멸시와 폭력, 노동 착취, 차별을 일삼던 일본에 언젠가는 성냥을 모아 화약을 만들었다. 한편 대만총독부는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시디크 족이 거주하는 산간 지대에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항복한 일부 시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시디크 족에 대해 머리를 베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행위를 임시적으로 허용하기도 하였다. 시디크 족도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일본군에 저항했다. 일본이 동원한 군대와 기관총 대포 등 중화기에 좌절하여 시디크 족의 1,200명의 전사 중 644명이 살해되었다. 3주 동안에 이어진 봉기를 벌인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죽기 싫었던 원주민들은 가족 모두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숲 속 큰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항전을 계획할 때 이미 부족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던 모우나 루도도 자결했다. 일본군과 싸웠던 시디크 족은 우서 사건이 끝난 이후 1,600여 명 중 겨우 298명만이 살아 남았다. 1931년 들어 우서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시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4월 25일 일본 측에 넘어간 원주민들에 의해 시디크 족 생존자들이 습격 당해 216명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종차별적 발언에 의해 벌어진 일본군의 잔인한 우서 학살 사건은 이후, 국민당 정권이 대만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통치보다 더 무자비한 학살로도 이어지며 거의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 이런 국민당의 강압적 통치는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은 물론이고 원주민들까지 반대급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그리워했다. 적어도 일본의 지배자들은 유화책을 쓰며 대만인들을 달래는 정책을 행했기 때문에 유화책 없이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국민당보다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는 말이 나오게 되면서 정치, 사회적인 차별 등 일본 식민정치의 폐해들이 잊혀질 정도였다. 2.28 학살사건 이후, 국민당 정권은 나라의 안정을 이유로 본성인과 원주민 수만 명을 학살했다. 결국 국민당 정권으로 잊혀진 우서 사건이 2011년 "시디크 발레(Seediq Bale)" 라는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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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베트남 현재, 보 반 트엉(Vo Van Thuong) 정치국원 겸 서기국 상임비서가 베트남의 새 국가주석 선출 관련
    2023년 지난 3월 2일에 벌어진 임시국회에서 국가 총 서기장 응우옌 푸쫑은 보 반 트엉 후보자를 새로운 국가 주석으로 지명해 발표했고 직후 이루어진 표결에서 참석 의원 488명중 487명이 이에 찬성한으로써 2021~2026년으로 이어지는 전임 응우옌 쑤언푹의 남은 임기 동안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보 반 트엉이 2026년에 국가 주석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응우옌 푸쫑의 뒤를 이어 국가 총 서기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의 장점은 풍부한 정무 경험 뿐 아니라 1970년 생으로 현 나이 52세, 매우 젊은 지도자라는 것에 있다. 2026년에 그가 서기장이 된다면 그는 56세의 나이로 응우옌 푸쫑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다. 정치계에서 전도 유망한 트엉의 경우, 베트남 정권 내에서 개혁의 혁신을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다. 트엉은 배트남 남쪽 호치민 인근의 빈롱성(Vinh Long) 망띳현(Mang Thit) 출신으로 이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 북부 하이즈엉으로 올라와 살았다고 한다. . 부친이 남쪽 일대에서 유명한 남부 전선 게릴라 출신이기에 북을 돌아가 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88년에 다시 호치민으로 내려가 호치민 국립 인문사회과학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전공했으며 철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1999년 생활윤리학 논문으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한 인연으로 그는 1993년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해 이듬해 정식 당원이 된다. 1995년 10월에는 공산 청년 연합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새로 설립된 호치민 시 학생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베트남 학생회 중앙사무국 위원을 겸임하면서 청년 정치인으로 당의 주목을 받게 된다. 2002년 11월 호치민 시 청년동맹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03년 3월 그는 호치민 시 청년동맹 서기였으며 2003년 10월부터 호치민 시 당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까지 이 직책을 맡으면서 호치민에서 자신의 역량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트엉은 호치민 시 12구역 당 위원회 비서로 임명되면서 호치민을 배경으로 한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신의 성장 배경이 호치민이었던터라 그의 성향을 두고 친서방, 혹은 응우옌 푸쫑과 마찬가지로 친미 성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으나 호치민 청년 경제 분야를 맡으며 호치민 내 젊은 기업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이 중에는 화교들이 많았다. 트엉은 실제로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화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미 호치민과 남부 지역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남부 지역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갈 때 트엉이 이들 화교에 대한 권익을 많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친중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노이에 올라가서 상임국장을 하면서도 친중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관계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후 2018년 트엉은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으로 유명한 공산당 중앙선전부장 직위에 오름으로써 하노이 내 정계 실세가 되었다. 게다가 응우옌 쑤언푹과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관계였던 푸쫑에 의해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쑤언푹이 몰락했고 트엉이 쑤언푹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트엉이 베트남 공산당 반부패 중앙운영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에 쑤언푹은 트엉의 견제 및 조사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2021년 2월 5일, 트엉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외교권까지 틀어쥐었다. 2022년 7월과 11월 라오스를 방문하기 위해 두 차례 비엔티안을 방문하여 통룬 시술릿 사무총장 겸 대통령, 라오스 판캄 비파반 총리, 자이솜폰 폼비한 국회의장을 만나 인도차이나 국가들 간의 연대를 확고히 했다. 더불어 양국간 경제 파트너십 협력을 통해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베트남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앞장 서기도 했고 2022년 말 캄보디아를 방문해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고위급 대표단을 만나 향후 있을 외교적 현안에 대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2022년 11월 푸쫑과 함께 중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일정 내 트엉은 중국 내 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중앙위원회 사무국 서기와 대화를 하면서 중국과의 협력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10시, 그는 국가 주석이 되었다. 트엉이 국가 주석과 푸쫑의 후계자로써 향후 전망되는 것은 세 가지다. 1. 부패와의 전쟁 트엉은 올해 2023년 2월 초, 전국 65개 주의 서기들과 가진 회동에서 어떤 나라도 사임을 문화로 삼지 않았다며 응우옌 쑤언푹과 그의 주변 관리들에 대한 부패를 지적해 쑤언푹의 사임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위반, 부패를 저지르는 간부들이 사임을 하게끔 당에서 위법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과 정치 체제를 건설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잘 수행하면서 정치 이념과 도덕이 악화되는 징후에 맞서 단호하게 싸우며 엄격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강조했다. 내부 자체 변환과 더불어 부패, 개인주의, 기회주의, 이기주의, 집단 이익, 관료주의, 국민으로부터의 소외, 어려움에 대한 무감각, 국민의 좌절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동시에 간부와 당원, 특히 수장의 모범적인 역할을 수호하여 당, 국가, 정권에 대한 인민의 신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도록 촉구했다. 이러한 트엉의 주장과 그 성향으로 볼 때, 베트남 공무원들의 부패에 대해 엄격한 잣대가 드리워 질 것으로 예상된다. 2. 베트남 경제특구 관련 트엉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존의 북부, 하노이 중심의 공산당 체제와 달리 호치민과 남부 지역에서 대대적 기반을 배경으로 이 자리까지 온 인물이다. 물론 그가 호치민 청년 서기 시절에 경제특구법 초안을 만들어 일부 온라인 소식통들을 인용하여 의해 99년 동안 외국인들에게 토지를 판매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확대 해석이라며 자세한 언급은 기피되었지만 베트남 남부 지역에 대한 경제 특구로 지정하여 호치민을 제2의 홍콩과 같이 만들겠다고 하는 주장은 그대로인 것으로 보여 진다. 하노이에 비해 호치민은 그 동안 베트남 정부 정책에서 상당히 천시받은 느낌이 강했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 호치민을 비롯한 인근 도서들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경제 특구로 지정하여 급격한 발전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현재 베트남에서 소득 수준 1위를 달리고 있는 빈 즈엉 지역의 개발은 급물살 탈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앞으로의 경제 중심은 하노이에서 호치민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3. 외교 노선의 변화 (친미에서 친중, 친러로) 트엉은 친충, 친러파로 공산주의 정치 성격을 지향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강화로 인한 정치, 외교, 경제적 협력과 러시아와는 경제, 군사적 협력을 중점적으로 둘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국의 양안 문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상황 등이 전방위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겨우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키고 있던 푸쫑 정권은 트엉이 푸쫑의 직무와 관련해 상당 부분의 권력을 이양 받음에 따라 그 동안 친미로 일관했던 정책이 중국과 러시아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대만과의 협력보다는 중국과 관계 강화에 앞장 설 것이며 대만이 향후 위기를 겪더라도 베트남은 이에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이제는 베트남까지 친중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대만은 이제 상당한 위기감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으로도 호치민을 중심으로 중국 기업들이 다수 투자가 강화될 것으로 보여지며 이는 현재 일대일로가 강화되고 있는 캄보디아, 라오스와의 연계로도 이어질 것이다. 즉, 캄보디아의 항구인 시아누크빌과의 연결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서는 대놓고 군사적으로는 중립,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관계 강화가 예상되며 냐짱 일대와 푸꿕 일대를 중심으로 러시아와의 관광업도 활성화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북극항로가 개발되면 동남아시아와 연결되는 물류허브로 베트남의 몇 개 항구를 열어줘 경제적으로 급격히 성장할 토대도 마련할 수 있다. 더불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경제 특구, 그리고 하이퐁, 다낭, 냐짱 쪽의 경제 물류 변동이 크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되며 트엉의 결정으로 인해 조만간 호치민 지하철 건설도 재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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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다가오는 대한민국의 요소수 문제
    지난 2023년 9월 7일 중국이 요소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요소수 시장이 혼란스러워졌다. 2021년 사태 끝에 타국에서도 요소수를 수입해 중국 의존도를 97%에서 60%대까지 끌어내렸지만,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 있어 타국이 밀리게 되자 2022년까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의 비중이 있었지만 2023년에 들어 두 국가에서 수입하는 양이 없어졌다. 실제로 지난 6일부터 12일까지 판매된 요소수의 거래액과 판매량은 지난 주 대비 각각 1700%, 1322%나 증가했다. 이 때문에 중간 유통 업체들이 물량을 갖고 있어 물류 회사들이나 운송 기사들이 요소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요소수는 많이 분들이 아는 것과 같이 주로 농업용, 산업용, 경유(디젤) 차량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요소는 경제성 때문에 2010년대 초부터 중국 내의 석탄으로부터 주로 생산되어 왔다. 그런데 2021년 중국 내 석탄이 부족해지자, 중국 정부가 석탄과 더불어 요소 등 석탄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물질의 생산과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세계적으로 요소 부족 현상이 발생했으며 지난 2021년 요소 수입량의 97%를 중국에 의존하던 우리 한국에서도 요소수 품귀 현상으로 인한 대란이 발생하게 된다. 2008년 유럽 배출가스 기준의 유로4 등급부터 일부 대형 화물차 등 고출력 디젤 엔진에 SCR이 적용되면서 요소수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환경규제에 따라 중, 소형 화물차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현재 출고되는 대부분의 경유(디젤)차량에 있어서 필수화 되었다. 요소수는 요소와 정제수의 혼합으로 이는 만들기 쉽고 한국도 생산 설비가 있는데 문제는 그 원료인 요소에 있다. 요소는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의 화합물로 암모니아는 수소와 질소의 화합물이다. 이산화탄소는 세계 모든 분야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를 포집해 쓰면 된다. 특히 실제로는 천연가스를 태워 얻는 경우가 많다. 질소는 공기를 활성탄에 불어주면 생산되는데 활성탄의 재료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의 화합법과 수소와 질소의 화합법은 거의 정해져 있다. 따라서 문제는 수소 생산의 경제성에 있다. 중국의 석탄은 풍부하고 매우 저렴하고 중국 석탄을 이용한 수소 생산에 전 세계가 의존하고 있다.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전기분해로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그린 수소)과 화석연료로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그레이 수소)이 있다.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탄소를 포집하는 경우인데 이를 블루 수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그레이 수소가 수소 생산량의 99%에 달한다. 이로 인해 수소 경제가 아직은 비환경적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석탄을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보면 중국이 세계 석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전 세계가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2010년을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화순 탄광이 폐쇄되었고, 석탄 생산이 중단되었다. 천연가스를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보자면 이는 유럽이 주로 하는 방식이었고, 유전이나 가스전에 남아 있는 가스를 태워 버리는 유증기(플레어 가스)를 포집해 수소 생산에 활용하자는 방안이 연구 중이지만 천연가스는 주로 러시아에게서 사오기 때문에 제재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석유를 통한 수소 생산으로 볼 때 한국에서 정유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해왔던 방식이다. 이는 나프타 생산 과정에서 수소가 부산물로 나오는데, 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1964년에 삼성이 세웠으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국유화된 한국비료공업이 주로 요소를 생산해 왔으며, 1994년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한국비료공업을 민영화하기로 결정되자 삼성은 창업주인 이병철이 세운 회사이기에 시가의 3배를 주고 사와서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0년 대 들어 중국산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분기 적자 10억 원이 나오는 상황에서 창업주 이병철이 중시했던 사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요소 생산을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결국 2011년에 사업을 접었고 이후 삼성정밀화학은 2015년 롯데에 매각되어 롯데정밀화학으로 회사 명칭이 변경된다. 이 회사는 여전히 한국 최고의 암모니아 수입 및 요소수 생산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2018년 7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녹색성장의 선도국임을 알리기 위해 푸른 하늘 계획(청천계획)을 시작하면서 석탄 생산을 줄이게 되었다. 2020년 5월, 호주와 중국 무역 분쟁으로 중국에 호주산 석탄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2019년을 기준으로 중국은 석탄을 자국에서 38억 톤을 생산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2억톤 수입을 했는데 상당수가 몽골과 러시아이다. 이 중 호주는 3~4천만 톤 가량이며, 다소 비싸지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와 러시아산 석탄으로 물량이 대체되었다. 그래서 202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2030년까지 탄소 배출 감소로 전환하여 2060년 탄소 중립을 약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의 각 성마다 수천만 톤의 생산량을 줄이게 된다. 2021년 여름에는 전 세계가 위드 코로나로 전환함에 따라 제조업 전력이 많이 필요해졌으며 지구 온난화로 인해 냉방 전력도 많이 필요해져 예상보다 석탄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2021년 9월, 중국의 석탄 수입 차선책이었던 아프리카 기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중국은 석탄을 수급하지 못했으며 10월에는 산서성에서 대홍수가 발생해 중국 내의 석탄 채굴장들이 침수당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중국 내에서의 석탄 부족은 전기 생산과 겨울철 가정 난방, 화학 산업 등에 큰 차질을 불러왔다. 게다가 국제 요소 비료 가격이 계속 오르자 중국 업체들이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요소 비료를 수출하면서 요소 재고량도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출입 통관 업무를 총괄하는 해관총서(海关总署)를 통해 2021년 10월 11일, 요소를 포함해 29개 화학 비료 관련 원료 품목들에 대해 검사 절차를 추가하는 규제를 신설했으며 2021년 10월 15일부터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은 중국에게서 97%를 수입한다. 한국이 요소 대란 피해가 큰 것은 SCR 장착 경유(디젤) 차량의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형 화물차에서 주로 적용됐던 SCR 방식이 점진적으로 현대 마이티 등의 중형급, 심지어 2020년식부터 현대 포터, 기아 봉고, 현대 스타렉스(현대 스타리아) 등 소형급 차량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화물운송, 여객운송, 건설, 소방차 등 특수활동 등을 할 경우, 요소수 완충 후 다음 요소수 보충시기가 짧아 화물 운영중단 또는 감소에 따른 물류대란, 여객수송 문제, 각종 산업현장에서의 차량가동 중단 등으로 이어진다. 요소수는 SCR 장착 차량, 특히 산업 현장에서의 대형 상용 차량에 있어서는 경유를 주유할 때 마다 매번 같이 상당량을 넣어줘야 한다. 따라서 기름과 같은 국가적 핵심 필수재에 가까운 존재이다. 한국 기업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2011년 요소의 국내 생산을 중단했고, 이후 요소의 원료가 되는 암모니아도 국내 생산을 중단한 뒤 전량 수입으로 공급 방침을 전환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2021년의 대참사였다. 정부는 중국이 요소 수출을 제한한 직후 요소 공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했으나, 안일한 대응으로 일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피해는 더 컸다. 그리고 관세청에 따르면 2022년 중국 요소 수입액을 67%까지 낮췄으나, 다른 국가에서 수입하는 요소보다 중국산 요소의 가격이 더 저렴한 이유로 다시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요소 수출을 내년 1분기까지 제한시키자 우리는 비축하고 있을지 주목된다. 다원화적인 입장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좋았다면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적대한 이상,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을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여의치 않다고 한다. 정부에 따르면 중국 외 일본이나 베트남에서 수입될 물량을 포함해 현재 국내 차량용 요소와 요소수의 재고는 3개월치라고 하는데 요즘 정부가 하는 일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말이 3개월치라 하지만 실제로는 한 달 분 밖에 없어 여기저기 구걸하고 다녀야 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역대 정권에서 이렇게 신뢰가 바닥인 정권이 있었나 싶다.
    • 칼럼
    • Nova Topos
    2024-02-25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야기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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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5
  • 2001년 9.11 테러, 그 이후 23년, 알 카에다 이야기
    세속적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로 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서로 충돌해 왔다. 서로가 추구하고 있던 가치관과 지향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세속적 성향의 무슬림 계파들의 충돌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지역에 가장 큰 위협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아랍 지역의 모든 공화국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맹주로 군림해왔던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은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시리아, 리비아 등과 아랍연합국가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실제로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는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국가연합을 형성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가 이러한 아랍 민족주의의 성향과 맞지 않아 먼저 이탈하면서 무너졌다. 리비아, 수단 등과는 논의 단계에서 무산되어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들은 샤리아 신정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수십 년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무슬림 형제단 등으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으로 테러 행위를 자행하면서 아랍 민족주의 세력의 탄압에 응답하는 중동의 화약고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후 사다트의 후임자로 당시 부통령이였던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무바라크도 이집트를 통치하는 내내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고수하면서 적어도 이집트 국내에서만큼은 이들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리고 이는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과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들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이 테러의 배후로 이러한 아랍의 독재 국가들을 지목한 것은 아랍 지역과 국제 정세에 무지한 대다수 미국인들을 상대로 무책임한 선동과 언론을 이용하여 이슬람에게 과도한 적개심을 품게했다. 사실 우리 대한민국 국내에서도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인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 등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보도하는 언론이 거의 없었고, 일반인은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더욱 무지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당시 미국은 아랍 민족주의도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동일한 이념과 사상을 가진 자들로 오인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목적은 리디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이집트의 무바라크 모두 알 카에다와 같은 편인 위험한 자들로 판단했다. 그러나 알 카에다가 처음부터 미국과 악연인 관계가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압둘라 아잠, 모두 소련과 싸우기 위해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대화 테이블에도 나란히 앉았던 긴밀한 관계였었다. 이러한 알 카에다가 언제부터 반미,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다국적군과 더불어 이라크를 폭격했고 그로 인해 대다수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기지들이 미군과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터지면서 그 이후부터 알 카에다의 적개심은 미국과 서부 유럽을 비롯한 다국적 국가로 보게 되었다. 이들 원리주의 세력들은 소련이 아닌 미국과 다국적 국가들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 세계에 다양하게 단체들을 설립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곳곳이 테러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폭탄제조법, 검문통과법 등을 익히며 테러를 시도하는 훈련을 했고 이는 큰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위험성을 일찌기 눈치채고 미국과 서방 세계에 경고를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는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리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당시 수장이었다. 두 사람은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서로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1990년대 이후, 제1차 걸프전쟁이 종료된 다음 알 카에다는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고 테러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먼저 1997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가했으며, 이에 빌 클린턴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 카에다의 거점으로 간주되던 아프가니스탄의 훈련기지와 수단의 제약 공장에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가함으로써 미국과 알 카에다의 갈등은 극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수단의 제약 공장과 알 카에다 간에 실제로 어떠한 연결점이 있었는지에 대해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 제약공장이 남수단 쪽의 거의 유일한 제약 공장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남수단 아이들에게 필요한 백신과 의약품에 대한 보급을 끊어버렸다는 비난까지 이어지면서 클린턴 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애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섹스스캔들을 덮기 위한 폭격이라는 음모론까지 나타나면서 클린턴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 카르자이 등이 경고를 했었지만 미국은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이유는 먼저 원리주의자들을 매우 쉽게 보았으며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지원한 무기로 미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대처가 문제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오직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존재했다.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 정부들을 향한 무수히 많은 테러를 저질렀고 여기에 미국과 연관된 몇 건의 테러가 자행되었던 것이었다. 이어 아프리카 소말리아 파병이 모가디슈 전투에서 참담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알 샤바브에게 군사적으로 토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에 대단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알 카에다를 토벌하기에는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내부 국가의 내전에서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일은 그 전까지 계속 있어 왔던 사건이었기 때문에 알 카에다를 초기에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아랍 국가 정부를 지원하여 아랍 국가들이 알아서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매우 소극적인 대응을 했었던 것이다. 이는 제1차 걸프전쟁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사담 후세인이 무조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영토에 다국적군을 단 군대도 배치시키지 않았다. 이는 전쟁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미국의 중산층들이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에 더 이상 투표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빌 클린턴이 물러난 직후, 공화당의 입장에서는 그 다음 대선도 생각해야 했다. 그렇기에 미국의 국내외 사정으로 볼 때 집중해서 알 카에다를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안일한 대처들은 미국에 돌이킬 수 없는 9.11 참사를 불러오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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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4
  • 남중국해의 뜨거운 감자, 베트남과 중국의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 분쟁
    스프래틀리 군도는 남중국해 남쪽 해역에 위치한 약 70여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섬이다. 이 수많은 암초들을 두고 중국과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이 각자 나누어 차지하고 있고, 브루나이까지 포함해 6개 정권이 더 많은 섬이 자신의 영토라고 다투고 있을 정도로 동남아시아 최대 영토 분쟁의 소산이다. 가장 큰 뜨거운 감자는 중국과 베트남이 차지하고 있는 스프래틀리 섬인데 베트남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지역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암초는 동북아시아 국가들과 필리핀 루손 섬으로 향하는 남중국해의 핵심 항로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일대일로의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해상일로를 확보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다. 이곳이 막히면 중국의 해상일로 정책은 육상일대 정책으로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중국은 파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암초를 중국이 쥐고 놓지 않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대륙붕 지형으로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면 막대한 돈이 되는 곳이 되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이 스프래틀리 암초는 지정학적 요충지와 막대한 자원을 획득할 중요한 곳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입장으로 볼 때 이곳의 천연자원은 부차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대일로 중 해상일로의 항로 확보 및 이를 안정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 확보에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곳 암초에 인공섬을 건설하고 있다. 2013년 존슨 남 산호초(Johnson South Reef)에 인공 섬 구조물을 건설했으며 2014년에도 매립 작업이 이어지고 있어 이미 0.1㎢ 정도 매립한 상태다. 또한 피어리 크로스 암초에도 대규모로 매립하여 인공 섬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현재 중국이 이런 방식으로 매립한 섬의 면적은 약 13.5㎢나 되는데, 스프래틀리 군도의 자연 면적, 섬들을 다 합쳐도 2km2도 안 되는 지역의 약 7배에 달하는 수치다. 스프래틀리 섬은 베트남의 입장에서도 해상 최대 요충지이다. 원래 작은 암초에서 베트남이 Su-30 전투기가 착륙할 수 있는 작은 활주로를 건설한 이후, 중국의 끊임없는 견제에 대응하고자 2016년 대규모 매립을 거쳐 공군 레이더 기지, 해군 정박 기지도 완공했다. 이와 같은 매립으로 인해 전장 600m의 섬이 1,400m에 이르고 있으며 일부 지대의 해수면도 최대 5m로 높여서 이 군도에서 베트남이 점유하는 최대의 섬이 되었다. 가장 큰 섬은 대만이 현재 영유 중에 있는 이투 아바(Itu Aba) 섬인데, 면적이 46헥타르이고, 두 번째로 큰 섬은 필리핀이 영유 중인 티투(Thitu) 섬으로 37.2헥타르이다. 이 두 섬을 포함해 10헥타르 이상의 섬은 고작 5개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헥타르로 표기할 경우 0이 나오는 수준의 암초가 대부분으로 사람조차 서 있기 어려운 곳들이다. 스트래틀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은 거의 없다. 이 군도는 육지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으며, 면적이 매우 좁아 농경이 어려운 상태이며, 태풍까지 자주 통과하여 사람의 영구 거주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이 군도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m로, 이 지역도 높은 파도가 몰아치면 휩쓸려 나갈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까지 나와 조업 중에 있던 어민들이 임시 어업기지 겸 정박지 정도로 쓰는 정도다. 최대 자연 지형물인 이투 아바마저도 섬이 아닌 밀물 시 수면 위에 떠 있는 암초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에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스프래틀리 군도 뿐만 아니라 남중국해 군도 전체를 암초로 규정했다. 그러나 스트래틀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정학적으로 남중국해의 핵심 항로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미국과 대만, 일본 등이 중국과 전쟁에 준하는 대립을 하거나 베트남이 중국과 최악의 대립을 벌일 경우, 중국이 자신들의 근해와 스프래틀리 군도 일대를 봉쇄해 버리면, 유럽 지역에서 한국이나 일본, 대만으로 향하는 선박은 기존의 항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외곽과 호주 외곽을 우회하여 통과해야 하는데, 이 경우 운송량의 30%는 영향을 받게 된다. 호주 외곽이라도 우회한다면 운송시간이 15일은 더 늘어나며 동북아시아 최대의 해상 물류 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프래틀리 제도를 두고 베트남과 중국의 영토분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볼 때 스프래틀리는 베트남과 가깝다. 거리로 따지고 보면 베트남보다 오히려 필리핀이 더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필리핀이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기록과 근거가 없다. 물론 정황적으로 볼 때, 루손 섬과 가깝기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일 뿐이다. 기록상 베트남 남부 참파 왕국의 어부들이 이 주변 해역에서 어업 활동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고대 진(秦)나라 시기 이 주변에서 어업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후 원(元)나라 시기에 원나라의 영토에 포함되었고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시기에도 영토에 포함되었으나 지도에만 나오고 관리된 적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동남아시아의 중심 해역에 암초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당시의 함선 사정으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였고, 이를 조사하던 스프래틀리 형제의 이름을 따서 스프래틀리 군도라는 명칭이 생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33년 프랑스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영토에 스프래틀리 군도를 포함시켰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점령하여 일본령 대만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이후 1947년 중화민국 정부가 점령하였으나 국공내전으로 인해 방치되었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주변 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국공내전을 이용하여 베트남이 대부분 석권하였다. 여기에 팔라완 섬을 기점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필리핀과, 보르네오 섬 북안을 차지하고 있어서 군도의 남쪽 섬과 암초들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던 말레이시아도 각자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다시 들어와 베트남 군을 몰아내고 이 군도들을 상당수 접수했다. 베트남은 종전 직후 이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영유권을 강화했으며 이 과정으로 인해 스프래틀리 군도보다 북쪽에 있는 파라셀 군도에서 중국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변국들이 군대를 파병하여 대치 중이며, 간혹 군사적 위기가 발생하곤 하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화약고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제 이 스프래틀리 군도는 앞으로 더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제재하면서 물류가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이 군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태위태한 양안 문제, 이어 서방 및 동구권 국가들과 교역에 매진했던 러시아가 동방 진출 및 교역 강화를 선언하면서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러시아의 본격적인 영향력 확대가 예상되면서 스프래틀리는 더욱 중요한 요충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한 러시아 선박이 동해와 대한해협을 통과해 동남아시아로 나가는데 있어 스프래틀리를 통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롄을 러시아가 공동 항구로 사용한다면 러시아 무역선들이 앞으로 자주 보일 것은 뻔한 일이다. 그 항로를 잡기 위해 러시아도 이 분쟁에 끼어들 가능성도 높아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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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4
  • 태국 정부, 의료용 마리화나 재배 및 소비 합법화와 그에 따른 우려
    태국 정부는 2022년 6월 초 의료용 마리화나 재배와 소비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대마 관련 범죄로 적발될 때 장기간 징역형 또는 사형까지 선고했던 과거의 강경한 태도에서 완전히 돌변했다. 마리화나가 합법화 한 사건을 두고 몇 가지 해외 기자들의 취재 기사들을 읽은 바 있다. 특히 조나단 헤드 BBC 동남아시아 특파원은 21년 전 태국 방콕 인근 방쾅교도소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마약 사범이었던 5명의 사형수들이 총살로 처형되는 집행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당시 5명 중 4명이 마약 밀매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형 당일 발에 채워진 쇠사슬을 끌고 사형이 집행될 건물로 걸어가는 죄수들을 취재했었다. 이들 마약 사범들의 처형은 당시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의 일부였다. 이러한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해 마약 사범 수백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탁신 총리의 마약에 관한 강경책은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당시 메스 암페타민이라 불리는 필로폰과 같은 마약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래서 태국 사회는 이들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 등 범죄자들의 인권 유린을 외면하고 이와 같은 강력한 법 집행을 환호했다. 물론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태국의 이와 같은 강력한 마약 정책을 따라 마약 사범에 대해 강한 철퇴를 휘둘었다. 지난 2016년 집권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이 마약 사범에 대한 강력한 소탕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이미 수십 년간 마약 밀매 등에 사형을 선고하는 등 엄정한 대처를 이어오고 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오랫동안 소량의 마리화나라도 소지하다 적발될 시에는 무거운 처벌을 받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졌던 태국이었다. 이에 지난해 6월 태국 정부가 대마를 합법화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태국 거리의 카페와 노점에서는 모든 종류의 마리화나 제품을 공개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그 옆에서는 강력한 향기를 내뿜는 양귀비 꽃으로 가득 찬 병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번 법 개정을 이끌었던 아누틴 차른비라쿨 태국 공중보건부 장관은 직접 나서서 대마가 가미된 카레 요리를 직접 시식하기도 했다. 차른비라쿨 장관에겐 이번에 합법화된 대마 재배로 인해 새로운 수입 창출을 꿈꾸는 농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제 대마에 관한 한 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 태국의 할머니들은 초록빛 마리화나 음료를 마셔보며 즐거워했다. 마리화나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정부가 무료로 나눠주는 양귀비 묘목 100만 그루를 받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개정된 대마 관련 법을 계기로 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마리화나에 관대한 국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비록 마케팅 및 판매와 관련해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긴 하지만, 이제 마리화나를 원하는 만큼 재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법 개정 촉진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말하길 이제 더 이상 태국에서는 대마초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다른 이유로 투옥될 수는 있다. 일반 대중에게 해를 주는 불법 행위인 공중 장소에서의 마리화나 흡연이나 식품 의약 안전청이 승인하지 않은 마리화나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 등은 여전히 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이제 태국은 대마초를 재배하거나 사용한다고 해서 처벌하지 않는 전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에서 의료용 마리화나의 효과를 경험한 이후 태국의 마리화나 합법화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한 태국의 일부 청년들은 정부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사망하는 가운데 고통을 덜기 위해 마리화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태국 정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게다가 당시 불법이었던 마리화나를 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의학적인 부분에 한해서 마리화나 사용이 자유화되었다는 것에서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보수적인 군부가 이끄는 국가 태국에서 일어난 이 극적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정치적인 부분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차른비라쿨 장관은 지난 2019년 선거에서 마리화나 합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태국 젊은층들의 표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했다. 이 마리화나 합법화 공약은 당의 지지 기반인 태국의 빈곤층 및 북동부 농촌 지역 주민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쌀과 설탕 재배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이었기에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또 젊은 청년들은 새로운 일탈을 꿈꾸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유를 갈망했던 차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화나 합법화를 이루어 낸 차른비라쿨 장관은 6월 초 정치적 근거지인 태국 북동부 부리람 주(州)에서 새로운 마리화나 관련 법안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에게 환호하는 시민들 앞에서 약속을 지켰다고 선포한 것이다. 차른비라쿨 장관은 이번 합법화로 인해 의료적 혜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값이 비싼 서구 의약품을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태국 빈민층이 대마를 재배해 의료적 효과를 누리길 바란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이유로 경제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태국은 첫 3년간 마리화나 관련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약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이뿐만 아니라 특히 마리화나 추출물을 이용한 의료 관광산업을 통해서도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태국 경제부는 대마초를 이용한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클리닉을 방콕에 개업했다. 이미 일부 태국 내 대기업은 마리화나로 거액을 벌어들일 방법을 모색 중에 있다. 신속히 법을 고치고 완전한 자유화를 허용하면서 태국 정부는 혹시라도 이웃 국가들이 이후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더라도 이들보다 먼저 대마 시장을 선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안을 둘러싼 배경에는 3번째 요인이 있다. 이 요인은 군부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면서 그들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인데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마약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재고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허용된 이래 많은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마 과다 흡입으로 50대 한 명이 숨지고 치료를 받는 청소년까지 발생했다. 이제 태국 정부는 대마초 사용과 관련해 추가적인 규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태국 정부는 공식적으론 기호용이 아닌 의료용으로만 대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입장이지만, 어떻게 이 차이점을 구분해 법을 적용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어디서나 대마초를 만나볼 수 있다. 아이스크림에도, 태국의 전통 요리에도, 스무디에도 대마초가 있다. 심지어 마리화나를 먹여 키운 닭고기를 파는 상인도 등장했다. 그에 따라 허가된 판매상에게만 마리화나를 받아 판매해야 하며, 처방전이 있어야 판매할 수 있고, 18세 미만 청소년에겐 판매하지 않아야 한다. 이번 마리화나의 합법화는 태국 정부의 평소답지 않은 과감한 행보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태국 정부가 마리화나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통한 그 동안의 부작용을 고쳐나갈 것인지 등에 대해 동남아시아 이웃 국가들 또한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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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터키가 6.25 전쟁 당시 참전하게 된 계기와 이유
    2023년 터키-시리아 지진으로 인해 우리의 구호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이어지고 있다. 터키하고 한국 은 형제 국가이면서, 혈맹이다. 그리고 터키 앙카라에 가면 한국 사람은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터키군 6.25 참전 추모탑이다. 이 추모탑은 앙카라 중앙역 근처 Kore parkı (한국 공원) 안에 있다. 6.25 혈맹인 터키의 6.25 전쟁 참전 비화 및 터키의 나토 가입 배경에 대해서 언급할까 한다. 터키의 멘데레스는 총리에 집권한 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이뇌뉘의 공화인민당은 아직도 강력했고 그를 견제했기에 그는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정치적 묘수가 필요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동조하여 파병할 것인지에 대해 첨예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뇌뉘는 터키가 아직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파병할 여건이 되지 않으며 굳이 머나먼 동방의 끝에 가서 터키의 젊은 장병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터키나 UN 창립 회원국이면서 국제 평화를 실천할 권리가 있다며 참던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터키의 민심은 참전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앙카라에서는 참전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와 멘데레스에게 미국 대사인 존 호버트가 찾아와 터키를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주겠다며 설득한다. 이 6.25 전쟁으로 인해 터키는 나토에 가입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멘데레스는 미국의 약속을 받자마자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했고 후속부대로 5천여 명을 부산에 입항시켰다. 당시 터키는 소련과 적국이었고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공산당을 축출했기 때문도 있지만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소련에게 카프카스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당시 터키 대국민 정서는 소련이 원수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UN 측의 기록에 의하면 15,000여명이 지속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우 아마 민사부분을 제외한 순수한 군사 부문의 인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3년 간의 전쟁 기간 동안 손실된 병력 보충을 포함해 총 3번 부대 임무 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같이 등장한 군대가 총 3만 정도 되었고 그 규모는 미국, 영국 다음 세 번째였다. 그 중 터키군은 최전선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이 파병되어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확인해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터키군은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966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터키군은 적진으로 돌격해서 북괴군이나 중공군을 상대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다. 과연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의 후예다운 강한 군기와 두려움 없는 돌격은 오히려 북괴군과 중공군이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총포가 날리는데도 무조건 돌격은 어쩌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이런 돌격전은 참전국 중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들이 나온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군부와 이뇌뉘를 비롯한 케말주의자, 야당인 공화인민당 인사들은 전쟁에 귀한 병력을 파견해 쓸데없이 피를 흘리게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멘데레스는 이 한 마디로 불만을 일축했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세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전후 미국은 약속대로 터키가 6.25 전쟁에 적극 참여해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줬다. 멘데레스는 그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이 자본금으로 수십년 동안 외면 받아온 터키 농촌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으며 비로소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약화시키고 절대적인 권력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쿠르드가 우리를 도왔다드니, 병력 대부분이 쿠르드였다드니 하는 근거없는 낭설이 몇 년 사이에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쿠르드족을 일소시키고 난 다음에도 병력이 2만 가까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병력으로 이미 앙카라를 점령하고도 남았을 병력이다. 육박전이나 백병전에 능한 2만의 병력이 육군 중에서 어떤 수준을 자랑하는지 군대 갔다 온 우리 남자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그리고 쿠르드의 원수가 터키인데 지휘관 대부분이 터키인이다면 지휘체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겠는가? 그리고 터키 2대 총리 이스메트 이뇌니는 쿠르드계 출신으로 6.25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다. 만약에 어떤 조건이 있었다면, 수많은 쿠르드 청년들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대단한 조건이 터키 정부와 쿠르드 사이에 있었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 근거를 대야 한다. 그런데 근거도 없이 참전해봤자 일개 소수에 불과한 몇몇 참전 군인의 증언만 듣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중공이나 북한에 세뇌가 된 자들이 분명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왜곡된 주장을 싣는다는 것은 혈맹인 터키를 증오하는 좌익분자들이 작은 소소한 부분을 확대 재생산하여 선전, 선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터키군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1973년 터키 공화국 50주년 되던 해 우리 정부가 이곳 한국 공원에 참전 터키군 추모탑을 만들었고 나도 앙카라에 방문할 때 마다 헌화하고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함을 잊지 않고 있다.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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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미국 최악의 다이옥신 오염 사건, 타임스비치 사건
    작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차 탈선으로 인한 유독성 화학물질의 대량 유출 사고가 발생하였다. 열흘 가까이 지난 지금, 이를 보도한 기자가 체포되어 미국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트위터의 ‘뜨거운 검색어’가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것은 '끔찍한 환경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심지어 언론인들은 '오하이오 판 체르노빌'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보도가 아예 쉬쉬되고 있는데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상세한 언급이 안 되고 있다. 분명 대형사고인데 정부가 나서서 고의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지역 공기와 물이 안전하고 “오염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피했던 지역 주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워싱턴의 안보관과 현실 간의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고 언론 탄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진 날,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간다고 통보를 하고 날아가 우크라이나에 원조 약속까지 하고 왔다. 그는 미국 대통령인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인지 이제는 햇갈릴 지경이다. 일각에서는 이 오하이오 주 열차 탈선 및 유독 가스 유출사고를 두고 과거 50여 년 전에 벌어진 최악의 다이옥신 오염 사건, 타임스비치 사건의 재현이 아닌지를 우려하고 있다. 환경오염 물질 중 다이옥신에 대해서 뉴스를 통해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이옥신이란 인간이 만든 물질 중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독극물이고 주로 석탄과 석유, 담배 등을 태우거나 농약 등의 화학물질을 만드는 공장에서 발생하는데, 청산가리보다 1만 배 이상의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체에 흡수되면 반 영구적으로 축적되어 기형아 출산과 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 다이옥신이 유출되면서 발생하는 환경 재난도 종종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 최악의 사건으로 불리는 것이 미국에서 있었던 타임스비치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임스비치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 스타타임스 신문이 메라맥 강변의 땅을 자사 신문 6개월 구독권과 함께 팔던 것에서 만들어졌다. 마을이 들어섰던 초기에는 주로 여름용 별장이 있는 휴양지 마을로 사용되었으나, 대공황에 이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여름용 별장의 수요가 줄어들게 되자, 주로 저소득층 집안의 사람들이 이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66번 국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는 일부 식품업과 주유소 사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타임스비치는 매년 여름 비포장 도로의 먼지로 인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1년부터 수년동안 도로에 기름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 마을의 마구간이나 실내 경기장, 비포장 도로 등에서 먼지가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을 뿌렸으나 물이 금방 증발해 버리는 탓에 효과가 적었다. 그래서 물 대신 기름을 뿌려 먼지를 막았으며, 이는 대단히 효과적이였다. 그래서 이후로 마을 주민들이 기름을 가져다가 뿌렸는데, 문제는 기름을 팔던 유가 업자들이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하여 옆 마을 베로나의 NEPACCO 농약 공장에서 나온 폐유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먼지를 날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이 때 폐유 속에 들어있던 다이옥신이 도로에 함께 뿌려졌다. 이러한 다이옥신은 다시 토양과 대기, 하천으로 들어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름을 뿌린 이후 하늘을 날던 수십 마리의 참새가 떨어져 죽었고, 개와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도 죽어갔다. 주민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몸에 통증을 느끼거나 폐암에 걸리고, 임산부들은 유산하고 신장암, 후두암, 간질환 환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먼지를 줄이려는 기름 살포는 도로 뿐만이 아니라 목장에서도 이루어져서 1971년 5월, 인근의 모스코바빌이라는 마을의 목장에서도 기름이 뿌려졌는데, 그 후 60마리의 말이 죽고, 목장주인의 딸들이 심한 통증을 겪는 일이 벌어졌다. 인근 제퍼슨 시의 목장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결국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타임스비치나 미주리 주의 여러 목장들에서 의문의 질병이 나타난 원인은 바로 폐유에 있었다. 이 폐유 속에 유독물질인 다이옥신이 다량으로 함유되었던 것이다. 이 폐유들은 러셀 블리스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업체를 통해 뿌려진 것으로 그는 미주리 주의 한 제약 회사와 계약하여 산업 폐기물 처분을 의뢰받고, 여기에서 나온 물질을 폐유에 섞어서 뿌린거였다. 미주리 주의 목장에서 발생한 질병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타임스비치 역시 폐유 속 다이옥신에 의해 오염이 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다이옥신의 위험성이 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다른 규제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 분해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이옥신은 자연에서 분해되지 않고 오래 잔류하며, 맹독성 역시 유지되는 물질이다. 결국 1983년에 미국 연방 환경청은 3,670만 달러를 들여 이 지역의 2만 2천여 주민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고, 마을은 통행을 금지시켰다. 다이옥신에 대해 잘 모르던 시대에 비용을 줄이려던 업자의 행태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해당 지역은 1999년까지 정화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이후 지금은 주립공원이 되었다. 공원 가운데는 피크닉 지역도 갖추고 있고 2012년에 환경보호청 EPA에서 점검하여 방문자나 공원 관리자의 건강을 위협할 요소가 없다고 밝히게 되면서 새롭게 재탄생 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미국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주 경계 지역 또한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다. 탈선 열차에는 원래 보고된 것보다도 더 많은 독성 화학 물질이 들어있다 전해지고 있을 뿐, 각 객차에 도대체 무엇이 실렸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한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가 아닌 자기 나라에 신경 쓸 때인데 뭔 생각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미국 시민들보다 세계 패권이 그리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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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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