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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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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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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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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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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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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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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7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백인들이 세상을 주도한다는 의식과 인종차별에 대한 정당성,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에 대한 논란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용어를 들어본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는 영국의 작가이자 백인우월주의자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1899년에 발표한 시 <백인의 짐 - 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제목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정글북(The Jungle Book)으로 19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유명 작가였다. 1899년 2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참패하여 필리핀에서 물러나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키플링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백인의 짐-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시를 발표했다. 여기서 키플링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아이와 같은 필리핀 원주민들을 미국인이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키플링의 시는 모두 7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은 “백인의 짐을 져라(Take up the White Man's burden)”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키플링은 "야만적인 흑인과 황인종을 개화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고 고되지만, 그들에게서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후세에 원망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강대국 시민들의 희생이 있더라도 약하고 소위 열등한 인종과 민족들을 돕자는 좋은 주장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그런 내용을 생각해보면 가장 능력이 뛰어난 백인종이 못나고 무지한 유색인종을 도와야 한다는 인종차별성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월등하며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며, 이 시를 통해 키플링은 백인이자 대영제국의 국민인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편견과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배경에는 키플링 자신이 대단히 제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징병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컴플렉스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키플링은 그러한 신체적인 한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 풀었다. 원래 아들은 해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시력검사에서 떨어졌고, 이후 육군 장교에 지원했지만 역시 시력검사에서 떨어진다. 키플링은 군대의 인맥을 이용해 아들을 영국 근위 보병 제4연대에 입대시켰지만, 결국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9월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와 같이 아들이 전사하자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키플링은 높으신 분들의 욕심과 무능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이 같다는 내용의 반전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인 <백인의 짐-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시의 비판을 완전히 피하기 어려웠다. 인종차별과 자신의 아들을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든 뒤에 참회하고 반성하는 글을 썼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만든 것이 라고 하였다. 키플링의 경우, 일단 키플링의 아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키플링이 마구잡이로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키플링의 아들도 이를 원했다고 한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때였는데 유럽의 분위기로 볼 때 각 전장의 전황들이 급박하여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엔 엄청난 불이익이 따라오기도 했다. 즉 키플링의 욕심만이 비극의 원인이 아니라 시대적인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게다가 키플링만 이런 비극을 겪은게 아니고 당시에는 전쟁하면 참혹함보다는 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는 것을 더 먼저 떠올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참혹함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전쟁터에 갔다가 죽거나 고생을 하고 돌아온 후, 반전주의에 나서게 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백인의 의무는 당시 제국주의 사상 및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이익 자체가 크지 않았던데다 크더라도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소수의 자본가 등에게만 그 이익이 돌아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대중들과 정치인들은 그 이익으로 인한 욕심에 현혹되고 여기에 이 백인의 의무와 같은 인종차별성 이론이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면서 제국주의가 그 정당성을 얻은 것이다. 다만, 이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여론 조작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되고 더욱 노골적이거나 온건하였을 때 당대 유럽 지식인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여 진다. 그러나 그러한 논조에 동의하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심지어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에서 순수하게 선의로 봉사한 의사와 선교사들 역시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이유로 볼 때 그들의 활동은 식민지 행정이 없이는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활동을 이어간 동기에 의하면 순수하게 평등한 인류애보다는 종교관에 기인한 바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선의의 목적인 사람을 앞에 내세워 식민지배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주거나 심지어 선교사가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편 마크 트웨인은 미국과 스페인 전쟁을 처음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반대하고 미국을 지지했지만 미군이 벌인 학살을 보고 경악하고나서 필리핀 전쟁을 '미국이 저지른 죄악의 상징'이라며 비난했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에서 1923년까지도 출판이 보류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야만적인 백인들을 위한 기도, 백인들의 인종차별 행태가 드러나고 있다는 글로 미국과 키플링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로 인해 키플링은 마크 트웨인을 매우 싫어했으며 <전쟁을 위한 기도>는 지금 나타나도 상당히 급진적이다. 반전, 반(反) 제국주의 성향의 사람들이라면 감명 깊게 볼 수 있지만, 이 때가 20세기 초반이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비판인 것을 고려하면 매우 용기있는 사회적 비판서라 볼 수 있다. <전쟁을 위한 기도>는 삽화와 함께 보는 것이 좋고 심지어 유튜브 등에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책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전쟁 교본(Kriegsfibel)>도 존재하고 있다. 이는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 보다는 참혹함 대신 비평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의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도 백인의 의무라는 사상이 결국 탐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합리성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이와 같이 마크 트웨인과 갈등을 빚었던 키플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하자 상류층의 보수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는건 무고한 젊은이들이라는 반전 사상을 설파하는 시를 쓰며 여생을 보낸다. 결국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에 당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인지 키플링의 작품은 오늘날 <정글북>이 가장 유명하고 그나마 <왕이 된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가 조금 알려졌을 뿐, 무려 400여편에 이르는 그의 소설과 시집 등 서적들은 서구에서도 묻혀진 채 방치되었으며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대놓고 이와 같은 "백인의 의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하지만 메튜 휘게이(Matthew Hughey)의 <백인 구세주> 와 같이 여전히 이데올로성 이론과 더불어 않고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는 잠재적인 우월의식이 팽배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 서술한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함유하고 있어 많은 비판과 논란을 자아냈던 제국주의 문학의 단편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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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제3차 그레이트 게임을 조망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으면 불가능했고 오늘날 서구의 발전, 제국주의도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의 교역은 러시아의 1차 산물이 영국으로 수출되고 영국의 공산품이 러시아로 수입되는 구조였다. 러시아는 체르노젬 일대에서 생산되는 밀을 영국으로 대량 수출하였는데 이는 러시아의 주요 외화 공급원이 되었음은 물론 영국에서 수입하는 식량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영국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밀이 저가에 수입되면서 밀 농장들이 양을 키우는 목양지로 바뀌고 이후 잉여 노동력이 급증하면서 이른바 산업 혁명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었다면 실패했을 것이고 해가 지지않는 대영 제국 또한 없었을 것이며 서구 유럽의 급속한 발전 또한 없었을 것이다. 즉, 17세기부터 서구는 러시아의 자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현재처럼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슬라브와 앵글로색슨은 절친한 우호 관계였지만 이 우호 관계에서 경쟁자로,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반감과 라이벌 의식 등이 동반되어 오늘날까지 서로를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절친한 우호관계에서 오늘날 적대관계가 되기까지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두 나라가 원수 지간이 된 것은 서로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국가적 이해 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러시아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인물, 예카테리나 여제가 있었다. 내기 예카테리아 여제에 일대기와 러시아 영토의 확장, 군수산업의 증대, 그리고 러시아라는 나라의 위상을 세계 열강의 위치까지 끌어 올려 놓은 활약상들을 검토하면서 그 상황에서의 당시 18세기 유럽의 국제 정세도 함께 검토하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의 중심은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한 국가와 경영인들의 자본력 확대와 그로 인해 각 바다를 지배하면서 나타난 식민지의 확보였다. 당시 영국의 라이벌은 네덜란드였고 이들은 모두 해양 세력들로 아시아를 두고 세력을 경쟁했다. 이윽고 영국이 네덜란드를 서서히 제압하면서 해양 세력의 최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육상에서는 몽골 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황혼이 사라지자 서구와의 교역으로 인헤 해상 루트를 개발한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가 예카테리나 여제가 즉위하면서 해상에서 육로로 정책을 변환함에 따라 유라시아 일대 육로의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표트르 대제가 바다로의 진출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예카테리나 여제는 그를 발판으로 육로로 영형력 확대에 공을 들였던 것이다. 그 근거로 예카테리나 여제가 추진한 정복전쟁을 모두 육지에서 벌어졌다. 발트 3국을 합병하고 폴란드를 삼국 분할 한 것도 육지에서 자행된 것이고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도 육지에서 벌어졌다. 이후, 여제는 우랄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노리게 되었고 시베리아 횡단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까지 통치 하에 두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러시아 제국은 슬슬 중앙아시아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쏟을려는 찰나, 적극적인 팽창을 노리던 러시아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팽창에 적극적이던 예카테리나 여제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파벨 1세가 즉위하면서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수동정책으로 다시 바뀐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 때문에 아버지인 표트르 3세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예카테리나 여제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즉, 예카테리나 여제의 진취적인 통치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서유럽에 대한 정치, 군사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인물이었지만 파벨 1세는 서유럽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거부하고 서유럽으로 군대를 파견하면서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면서 그는 동맹국들을 배신하고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파벨 1세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귀족들이 그를 암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차르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세력이 강화되어 유럽을 지배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이전부터 많은 교역을 하던 영국과 동맹을 굳건히 하고 나폴레옹에 맞섰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Continental System)를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비밀리에 거래하다가 적발되자 이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조국 전쟁에서 끝내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을 제압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을 노린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 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페르시아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러시아도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페르시아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까지 내려가 부동항을 확보하여 인도양으로 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양국 팽창주의는 서로 간의 정치, 외교적인 대립을 불러왔고 유라시아 육상의 패자가 되어 위협적으로 성장한 러시아와 전 세계 해상의 패자가 된 영국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신흥 라이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영국, 양국이 정치, 외교, 군사적 대립이 바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가 제프리 브룬(Geoffrey Bruun)에 의해 <19세기 유럽사(Nineteenth Century European Civilization: 1815-1914)>라는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도 했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정치가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한 것은 러시아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이 가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레이트 게임은 작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크게는 흑해 연안에서 극동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양국의 전략적 경쟁이자 정치, 군사, 외교 모든 부분이 총동원된 거대한 냉전이었다. 동유럽에서는 크림 전쟁이 일어났고,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쇠락해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이란 숭고국,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도 인도에 자리잡은 영국과 북쪽에서 늘 남하를 노리고 있는 러시아,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지구 반대편인 동아시아와 캄차카 반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대결하는 등,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이자 라이벌로 변해갔다. 두 나라의 사이, 좁게는 러시아와 영국과 미국, 크게는 슬라브와 앵글로색슨이 현대에도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국가 팽창에 맞물린 정치적, 민족적, 역사적인 자존심 대립이 주효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레이트 게임을 총 3차까지 나누어 보고 있다. 1차는 모두들 알다시피 1813~1907년의 일이고 2차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포함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냉전으로 1945~1991년까지이다. 그리고 3차는 푸틴의 집권 시기인 2000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정확하게는 2022년 2월 24일부터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영국, 미국, 나토 및 동맹국의 체제와 러시아-중공으로 대표되는 BRICS 체제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정치, 군사, 외교까지 걸려 있는 새로운 구도의 보이지 않는 전쟁과 나토가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눈에 보이는 전쟁을 통틀어 제3차 그레이트 게임으로 체제 대립의 상징성을 들어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현재의 러-중과 제3 세계와 미, 영을 비롯한 서구 세력 및 그의 동맹국의 소리 없는 전쟁을 New Cold War 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상징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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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9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필자가 직접 운영하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월 2일)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즉 9월 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2023년은 9월 2일(토요일)과 9월 1일(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월 4일(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2023년 독립기념일은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래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지며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앞세운 혹독한 진압으로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했다.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다.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만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이 프랑스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다. 이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 인정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되고 사이공에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에는 일본 총독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됐다. 이때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일본과 게릴라전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 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군을 배신하며 몰아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을 절대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도 무너졌다.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며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월 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 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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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는 국제 정치, 외교 뿐 아니라 이슬람 종교사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
    아랍의 맹주이자 수니파 이슬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인 이란은 서로 앙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주도 하에 단절됐던 외교 관계를 7년 만에 회복하기로 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수니파와 시아파 진영의 종주국인 양국 관계가 개선되면서 분쟁이 잇따랐던 중동 지역에 화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둘 다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하나 된 이슬람에서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정통 칼리프의 시대 때, 함께 3개 대륙 원정까지 나섰다. 같은 무슬림으로 따지고 보면 아라비아계와 비(非)아라비아계의 정치, 종교와 융합된 내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융합되기 어려운 갈등은 사막 유목 민족의 특성으로 자신들 소속 집단이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과 지독한 폐쇄성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을 창시했을 때 이슬람 안에서는 무함마드를 따랐던 무하지룬(المهاجرون‎)과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쿠라이시 가문에 패배해 추방되었다. 이때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 사건 이후, 메디나에서부터 무함마드를 따르게 되었던 안사르(Ansar) 집단이 서로 대립했다. 당시 무함마드는 양자 간에 형제 관계를 맺어 충돌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후 무함마드가 죽고 후계자, 즉 칼리파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사르는 그들의 대표자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무하지룬에서 칼리파를 세웠고 이 과정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가 안사르 집단을 포용하면서 다행히 큰 충돌로 빚어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3개 대륙을 함께 석권했다. 하지만 이들의 분열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4대 칼리프 무하마드 알리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이었다. 알리가 4대 칼리프가 추대되기 전, 쿠라이시 가문의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를 칼리프를 추대해야 한다고 아랍계가 주장했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직접적인 혈통인 무하마드 알리를 추대해야 한다고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주창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 레반트, 이집트 일대의 무하마드 혈통 파가 알리를 칼리프 추대에 동조했다. 숫자가 적은 아랍계는 칼리프 선거에서 밀려 패배하면서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더구나 알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미망인인 아이샤도 알리를 지지하게 되자 이 대립은 결국 이라크 쿠파로 향하던 알리와 그의 일족들이 카와지리 파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알리의 피살 이후, 알리의 장남인 하산이븐 알리가 칼리파위를 승계하려 했다. 그러나 수완이 뛰어난 무아위야는 거액의 보수를 제시하여 하산의 하야를 권유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분쟁에 지쳐있었던 하산은 무아위야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랍 제국의 권력 쟁탈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후세인 이븐 알리는 계속 저항하며 결국 "카르발라의 비극"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아랍인들이 무하마드의 혈통을 암살했다고 믿게 되었다. 다섯 번째 칼리프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추대되고 우마이야 왕조가 건국되자 이들은 아랍계의 우마이야와 항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이러한 역사는 압바스 제국으로 연결되고 투르크-몽골, 타타르의 지배 등, 중동의 무슬림들은 서로 통합되지 못했다. 이슬람도 칼리파 추대 문제로 인해 아랍계의 수니파와 페르시아계의 시아파로 크게 분열되었다. 무아위야를 추종하는 아랍계 수니파의 수장국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었다. 또 알리를 추종하는 페르시아 시아파의 수장 국은 오늘날 이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칼리파를 두고 선거냐, 세습이냐를 두고 무려 1,300년 이상을 싸워왔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슬람교 교리까지 비화 되어 오늘날까지 왔다. 이슬람의 3자인 사람들은 그깟 칼리파 싸움이 뭐길래 하면서 부질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우선 아랍인들의 기본 문화는 사막 유목문화에서 기인한다. 아라비아반도 자체가 사막화된 지역이 많다 보니 오아시스에 씨족 별로 모여 살았다. 또 해안가 지역의 씨족들은 장사를 통해 먹고 살았다. 따라서 해안가 지역은 상업이 주된 경제였고 아라비아반도 내륙 지역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약간의 농업과 목축업이 주된 경제였다. 그러다 보니 해안가의 아랍인은 사업 수단이 발달했고 상업의 가치와 개방성, 포용성을 두루 갖춘 자들이었다. 다만 내륙의 아랍인은 다소 폐쇄적이며 포악해 약탈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예언자 무하마드 또한 해안가 상업 도시 메카 출신으로 상업 집단의 대상을 따라 사막을 가로질러 멀리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무역하던 집단의 자손이었다. 이처럼 무역하며 쿠라이시 가문은 상당한 양의 재력을 소유한 메카의 지배자 가문이었다. 반면 무하마드는 아라비아 통일 전쟁을 통해 막대한 자금과 부조리한 문화를 가진 내륙의 유목민을 통합했다. 유목민의 잔인성과 포악함으로 약탈을 잘하는 특성을 이용해 이들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아라비아가 통합된 이후, 외부 정복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 아랍인은 해양과 내륙인이 통합되었으나 해양인이 주류가 되어 아랍인을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개방과 포용을 갖춘 민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약점은 문화 수준이 매우 낮고 문맹률도 높았다. 정복한 지역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 또한 매우 부족했다. 당시 정복한 국가들에서 가장 문화적,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자들은 페르시아계와 시리아계, 그리고 이집트계였다. 그들 중 페르시아계의 역량을 실로 막대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 두 차례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그로 인해 문화가 매우 융성했으며 문맹률도 아랍에 비해서 낮고 제국을 통치한 경험과 정치력이 뛰어났다. 그런 페르시아인이 본 아랍인은 야만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줄곧 세습 군왕제도에 익숙한 페르시아인에게 혈통적 세습은 당연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반면 아랍인은 씨족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족장을 선택했기에 이런 정주 국가의 보편적 정치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지배층이었던 아랍인은 페르시아인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에게 전쟁에 패해 나라를 잃었지만, 문화적 소양이 낮은 아랍인들을 무식한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부분들이 1,300년 동안 종파 분쟁이 이어지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때 이란에 팔레비 왕조가 존속했을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좋았었다. 1929년에 두 나라는 공식적 수교와 1960년대부터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이란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친선 관계가 시작되었다. 1968년에는 사우디-이란 간 경계 협정을 맺으며 페르시아만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왕이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에게 세속화 정책을 조언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관계는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이 발생하면서 깨지게 된다. 신정국가가 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단자, 전제군주국가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종교성 시비로 비화 되며 두 나라 관계는 양립 불가능한 상태까지 오게 된다. 2010년대 들어 대이란 경제제재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동참했다.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 정부를,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더 나빠졌다. 2015년 10월 20일, 사우디와 이란 양국이 시리아 사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결국 201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수니파-시아파 갈등으로 빚어진 외교 문제로 인하여 이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7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국교를 회복했다. 이 사건은 국제 정치, 외교뿐 아니라 종교사에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종교적인 문제에도 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란의 순례객이 메카로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교 단절을 이유로 이란인의 메카 순례를 거부했었다. 메카와의 순례길이 재개되면 평생에 한 번이라도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계율로 삼아온 이란의 무슬림들에게 있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될 것이다. 올해 하지에는 이란 시아파들의 순례객들을 7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학부 때 터키-이슬람 문화사를 전공하고 지금까지도 복합적으로 이슬람을 연구했던 필자에게도 매우 뜻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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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 자유주의의 역사와 우리의 자유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저마다 자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에로의 자유’를 의미하는 적극적 자유와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를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문제는 타인을 배려하느냐 여부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이거나, 조폭들이 생각하는 자유가 문제이다. 그것은 적극적 자유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도 아니다. 방종이다. 평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는 이와는 다르다. 소극적 자유는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구속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유이다. 이들이 외치는 자유가 서구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로부터 자유주의가 싹텄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유럽 사회 전체적인 운동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 시대의 주역은 부르주아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생긴 상공업지역을 부르그(bourg)라고 하고,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본주의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의 주된 관심사는 부의 축적이었다. 새로운 인간상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내세와 천국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여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재산과 번영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며 개인이 누리는 재산과 번영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해방을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구 자유주의의 뿌리였다. 그것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며, 그러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절대군주제 타파에 앞장선 시민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법에 입각한 평등을 외쳤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귀족과도 신분적인 차이가 없어야 했다.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러한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그들은 비인간적이며 차별적이었던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하는 근대 서양의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수탈하는 신분 차별을 반대했다. 또 절대군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과 법으로 국가권력을 명확히 제한하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자유방임 경제체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근대의 자유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자본주의를 낳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앞장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 해방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앞에서 살펴본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이다. 최장집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좌우 양쪽 진영에서 부정되었다고 지적한다. 보수파들은 자유를 외치면서도 냉전 반공주의와 동일시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실천하지 않았다. 진보파는 자유주의를 친미적 부르주아 이념으로 경멸했다고 진단했다. 결국 한국에서는 진정한 자유주의가 싹트지 못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국의 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지, 자유주의의 심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유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동일화됐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주의자들은 반자유주의자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이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평등을 무시한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귀족주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 정치인들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고사하고, 사법 권력의 견제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바탕으로 평등과 인권, 관용,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도 존중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도 존중하면서 기회의 평등, 선택의 자유, 공동체의 선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이강인이 탄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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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2-19
  • 현대 카페의 원형이자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카흐베하네(Kahvehane)
    커피는 주로 이슬람권에서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아라비카를 비롯하여 이슬람권의 커피가 유럽 커피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현대 카페의 원형이자 커피 하우스는 카흐베하네(Kahvehane)로 이 카페는 중동을 중심으로 퍼졌는데, 유럽에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1554년 시리아계 아르메니아인인 하킴과 샴스가 개업하였다. 카흐베하네는 터키어로 커피를 뜻하는 단어인 카흐베(Kahve)와 페르시아어로 집을 뜻하는 하네(Hane)의 합성어로 나타난다. 참고로 현대 터키어에 의하면 "커피가게"라는 뜻의 카흐베치(Kahveci) 혹은 책 읽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앗하네(Kıraathane)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카흐베치와 크라앗하네를 찾은 사람들은 커피보단 차를 더 자주 마신다는 점에 있다. 터키어로 아침식사를 뜻하는 카흐발트(Kahvaltı)도 원래는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에서 유래된 단어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침식사를 카흐발트라 하면서도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터키의 전통이다. 카흐베하네는 17세기 무렵부터 이스탄불에서 보편화되었는데, 늘어나는 카흐베하네에 대해 투르크 시민들의 불만이 생겨났다. 1611년에는 이집트의 총독이 카흐베하네에서 반 정부적인 언동이 많다고하여 커피 판매와 더불어 카흐베하네를 금지시켰다가 커피를 좋아하던 술탄 아흐메트 2세의 분노를 사서 총독에서 추방된 사건도 있었다. 특히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특권 계급인 예니체리와 황태후 등의 하렘 출신의 여인들이 무능한 술탄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과 결탁하여 사치와 부패를 이어가던 세력이 바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이슬람 수피들이었다. 카흐베하네는 이러한 수피들의 거점이었다. 동시에 예니체리의 군대 이외의 개인사업으로써 그들의 고(高) 수익원이었다. 당시 이스탄불의 카흐베하네는 대부분 예니체리들이 상권을 쥐고 있었고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을 요구하고 쇄신을 노리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인 카디자델리(Kadizadeli)파가 출현했다. 카디자델리파는 커피와 커피문화, 카흐베하네를 매우 혐오했다. 이들에게 있어 커피와 커피문화는 악마의 음료와 문화였고 카흐베하네는 악마들과 이교도들의 집합소로 여겼다. 그들은 술탄 무라트 4세가 등극했을 때 집권 세력이 되었다. 무라트 4세는 지독한 원리주의자였다. 무라트 4세가 친정하며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해 1633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서 1차 커피 금지령을 내리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라트 4세 본인은 커피 자체는 매우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흐베하네에서 벌어지는 지식인들이 세속적인 정치에 대한 담론과 비난은 매우 싫어했다. 무라트 4세가 지독한 원리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카디자델리파와는 달리 커피는 악마의 음료로 여길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가혹한 금주령, 금연령으로 유명했던 무라트 4세는 커피에 대해서도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을 적용해 약 3만여 명이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무라트 4세 사후에 즉위한 술탄 이브라힘은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뒤이어 옹립된 메흐메트 4세의 시대에는 1651년 태후 쾨셈이 암살되었고 카디자델리파를 후원하던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의 섭정이 시작되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1656년에 지정된 제2차 커피 금지령을 통해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렸다.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은 17세기 후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명문가로 쾨프룰루나 쾨프뤼뤼 등으로도 불린다. 쾨프륄뤼 가문은 본래 알바니아계로 가문 이름은 이 가문의 본관인 알바니아 지방의 '퀴프릴리우(Qyprilliu)'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북마케도니아 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벨레스(Veles)'라고 불리고 있다. 황권이 막강해 귀족 가문이 그다지 득세하지 못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에 무려 6명의 대재상인 사드라잠(Sadrazam)을 배출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1차 커피 금지령과는 달리 규제가 완화되긴 했지만 정치적인 이용은 극대화된 경우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마르세유 등지에서 커피가 보급되는 동안 실로 위대한 세기를 맞이한 프랑스 왕실과 파리는 커피의 유행에서 약간 비켜져 있었다. 비록 스페인을 통해 1615년 코코아와 네덜란드를 통해 1636년에 홍차가 보급되어 파리에서 대유행을 탔지만 커피는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다. 그러던 1669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계획하던 오스만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측근인 뮈테페리카 쉴레이만 아아(Müteferrika Süleyman ağa)를 파리에 보내 루이 14세에게 술탄의 친서를 전달했다. 쉴레이만 아아는 파리에 집을 빌려 터키식으로 꾸미게 된다.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커피를 아낌없이 대접했다. 이는 엄청난 인기로 이어져 신분 차이을 막론하고 파리 시민들이 쉴레이만의 임시 거처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쉴레이만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접대를 받을 때에 루이 14세가 환영식의 소감을 묻자 터키 황궁이 훨씬 호화롭다 답했다. 이때 루이 14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결국 쉴레이만이 전권대사가 아닌 일개 사절에 불과함을 파악한 루이 14세는 그에게 귀국을 명하고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때는 중립을 지키게 된다. 비록 쉴레이만 아아는 당초의 목적인 프랑스와의 동맹 강화에는 실패했지만 커피와 투르크리, 즉 터키 문화에 대한 강한 인상을 프랑스에 남겼다. 사실 루이 14세도 커피를 즐겼기 때문에 커피콩 선물 자체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년 후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 나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한 축으로 합류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예 기병 부대인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의 활약으로 인해 대패했다. 투르크 군의 대부분은 보급품을 놓고 황급히 후퇴했는데, 그 중에는 대량의 커피 포대도 있었다. 이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군과, 신성로마제국의 군대, 오스트리아 군은 전리품인 커피콩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이에 대한 쟁탈전으로 인해 사망자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그만큼 커피 원두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커피콩은 공방전 도중 터키군으로 변장해 내부와 폴란드 원군 측에 소식을 전달한 폴란드 출신의 병사 콜시츠키에게 상당 부분 돌아가게 된다. 콜시츠키는 비엔나에 '파란 병 아래 집'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이미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는 1665년 비엔나에 당도한 오스만투르크 사절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다. 공방전이 벌어지기 4년 전인 1685년에 이미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비엔나에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최초로 초승달 모양의 빵이 만들어져 판매하게 되는데 이 빵이 바로 크로와상(Croissant)이다. 크로와상에 대한 기원설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초승달 문양의 빵을 만들어 투르크에 승리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먹었다는 설이 있다. 또 오스만투르크 제국, 터키에서 만든 빵이 역수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2차 비엔나 공성전 당시 제빵사가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이 땅굴을 파서 오는 걸 알아채고 서둘러 왕에게 보고했다는데 유래도 있다. 이를 막아내 제빵사가 자신의 업적을 이어가기 위해 빵에 오스만투르크의 문장인 초승달 모양을 담아 빵을 구웠다는 설 등이 존재했다. 유럽인들은 이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크로와상을 먹으며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했던 당시의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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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치명적인 인류 최초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을 두고 보면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창궐한 독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스페인에서 생성된 독감이 아니다. 스페인 독감이라 붙여진 이유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상태에서 많은 관련 국가들이 각 정부의 보도검열로 인해 이 독감을 다루지 않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중립국 상태였기 때문에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독감에 대해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로 인해 다른 나라 국민들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 명명된 것이다. 당시에 대부분 스페인 의회와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Alfonso XIII, 1886~1941)까지 감염되었을 정도로 스페인 내에서도 많이 퍼지긴 했지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과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도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만 크게 유행한 것이 아니고 단지 언론 통제가 낮은 스페인이기에 소식이 더 빠르게 전달되었던 것 뿐이다. 결국 스페인은 독감의 발원지가 아니고 오히려 해당 질병에 대한 정보를 세계 각국에 빠르게 전달하는데 있어 큰 공이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오히려 질병 이름 자체가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게 된 것에서 많은 오해를 낳고 있어 명칭에 대한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 발원지에 대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실제 발원지는 미국이나 영국, 중국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 대신 1918년 독감 범유행(Pandemia de gripe de 1918)이나 미국 독감, 시카고 독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미국에서 1918년 초, 최초로 확진자가 나왔으나 일부 연구에 의하면 질병의 특성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16년과 1917년 영국 군대에서 유사한 확진 사례가 보고 되었고, 1917년에는 중국에서 보다 큰 규모의 유사한 감염 사례들이 잇달아 보고되었다. 이와 같이 질병의 기원에 있어서 여러 이견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3일 열병"이라 하였는데 이름처럼 짧은 증상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가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없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최초 확진 기록에 의한 보고는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가 최초로 나타났으며 3월 8일 캔자스 퍽스톤 기지와 3월 11일 미군 각 부대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독감의 출처가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보여지는데 이 또한 미국에서 최초로 보고되었기 때문에 그 기원을 따지자면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발원해 미국으로 건너오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발원해 아메리카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재기하고 있다. 킬 군항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으로 점철되어지는 시점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빠르게 완치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캘리그램(Calligram)의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미국 사업가이자 전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레더릭 트럼프(Frederick Trump, 1869~1918)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한 대표적인 유명인이 되었다. 스페인 독감이 매우 무서운 부분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유행성 질환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과거에는 질병이 냄새로 전파된다거나 피의 균형을 맞추면 병이 완쾌된다는 등의 현대로 보면 비상식적인 생각을 했었다. 방역이나 위생에 대한 개선 의식은 아주 고전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위생에 대한 의학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은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역은 여전히 고전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전파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은 20세기 초, 이미 세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었다. 공중보건에 대한 체제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던 근대화된 유럽과 미주를 비롯한 서구인들이다. 상수도, 하수도와 같은 공중위생시설은 물론이고 비말 전파를 막으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이나 손을 씻어야 감염률이 떨어진다는 정보 등도 이 당시에 이미 충분히 널리 퍼진 상식이었다. 이 때도 마스크 착용은 환자나 의사만이 하는 것이라 인식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보건의 체계가 갖추어 있었어도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다. 당시 세계 인구는 약 17억 명 정도였다. 여기에 감염자는 약 5억 명 정도였고 사망자는 최소 1,700만에서 최대 5,000만에 달했다. 이는 총 감염자의 3~9%,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수가 제대로 추산되지 않은 이유는 진단할 겨를도 없이 야전에서 사망한 군인들과 당뇨, 고혈압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망자를 포함하지 않기도 했다. 이 독감 자체보다 당뇨, 고혈압 등의 기저질환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신체에 합병증이 생겨 세균성 폐렴이 발병해 폐에 물이 차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행정력의 미비, 세계대전 전후에 안정되지 못한 정치적 혼란 등의 이유도 사망자 수를 제대로 집계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또 당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사망자를 추정할 수도 없는 인도나 중국, 러시아와 같은 나라도 존재했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사망했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인 900만 명의 2~5배 정도의 사망자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들은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 섬인 사모아에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30%가 사망했다. 또 알래스카 이누이트 마을 몇 개도 몰살당하는 운명을 겪었다. 그리고 산마리노는 이 질병 하나로 인해 국가가 멸망할 위기까지 갔었으을 정도로 심각했다. 일제 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세계적인 대유행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 독감을 "무오년 독감"이라 불렸으며 1918년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대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 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이는 한반도의 전체 감염자 1.87%, 전체인구의 0.83%에 해당된다. 일제 시대 당시 조선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조선에 재배치되며 스페인 독감이 퍼진 이유다. 당시 그들이 걸린 인플루엔자가 조선에 퍼져 대유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일본 도쿄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시민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를 토대로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는 1919년 스페인 독감을 소재로 한 『유행감모(流行感冒)』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 시애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의 대중교통 탑승을 거부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미착용시 경우에 따라서는 유치장에 며칠 가두기도 했으나 여전히 마스크는 기피대상이 되었다. 특히 사모아 섬의 경우, 스페인 독감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미국 총독 존 마틴 포이어(John Martin Poyer, 1861~1922)가 라디오를 통해 대유행을 전해 듣고 해외 여행객을 전면적으로 입국금지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과 같은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많은 수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치사율이 1.87%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역별 차이는 있었기 때문에 의료체계가 낙후된 지역은 이보다 치사율이 더 높았던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전 세계를 휩쓸며 맹위를 떨쳤던 스페인 독감은 총 3번의 대유행과 몇 차례의 소규모 유행 이후 최초 발병 다음 해인 1919년 4월 때, 대부분 종식되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 왜 종식된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그 당시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의 착용, 무증상 감염과 사전 격리 조치를 취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과 각종 물류 마비 및 대란, 자영업의 고초 등 코로나19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으로 현재 코로나19 유행 상황과 같이 스페인 독감이 언급되는 이유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스페인 독감의 악명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가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독감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라 말한다. 1918~20년에 비해 현대 의학 수준이 매우 발달했던데다 백신도 나오고 있으며 타미플루 같은 치료제도 나왔다. 그러나 그에 비해 1918~20년의 스페인 독감은 백신조차 없었고 타미플루와 같은 치료제도 없었다. 만약 스페인 독감이 현재 재유행한다면 코로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사망자가 속출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정확한 원인이 없이 갑자기 사라졌고 인류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인 독감은 페스트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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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프랑스 이민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
    프랑스 이민자들 문제는 하루 이틀간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역사는 오래된 이민과 식민지 역사로 인해 지금의 인종시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 이민의 역사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다른 유럽 국가의 인구가 3배로 증가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인구는 계속 제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 내에서는 과거 포르투갈이 잘 나갔을 시기에 갑자기 쇠락한 것이 인구 수백만도 안 되는 나라가 아메리카, 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현지인들에게 밀려나게 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도 그와 같은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점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일손이 부족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이민은 결국 국가의 일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초기에 프랑스로 이민을 오기 시작한 나라는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의 이웃 국가였다.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탄광지역에는 폴란드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프랑스 이민은 20세기 들어 더욱 활발해지며 1901년에서 1917년 사이에는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거주지 신청만 하면 이민이 받아들여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18년에는 남자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기 때문에 공장의 일손이 부족해졌다.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해 북아프리카, 인도차이나, 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1917년에서 39년까지 이민국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정치인들의 망명이 급증한 것도 이 시기로 주로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정계의 망명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는 외국인들도 프랑스 시민들과 동등하게 해당되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해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프랑스인과 똑같은 사회 보장의 혜택을 받는다. 외국인도 국가에서 주는 주거 보조금을 받고, 국립 대학교에 무료로 입학할 수 있으며, 병원 비용도 무료 혜택을 받는다. 외국인도 아이가 출생하면 국가에서 주는 아이 양육 수당 보조금을 받기도 한다. 아이 수가 3명 이상이 되면 이 보조금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시스템을 악용하는 외국인도 상당수 존재한다. 쉽게 아이를 낳는 아프리카인들이나 아랍인들이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이들은 오로지 아이 양육 보조금을 받을 목적으로 아이를 3~4명 이상씩 낳기도 한다. 이런 집들을 보면 남편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도 버리며 유유자적으로 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주는 월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바라고 힘들게 일하며 사느니 국가에서 나오는 여러 수당 만으로도 편하게 살 수 있기에 차라리 놀면서 수당 받으며 사는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제가 잘나갔을 때는 모두가 사는게 원만했고 여유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들을 가지고 뭐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제가 점점 폭망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 공무원인 프랑스 교사들 삶의 수준이 60~70년대 노동자의 삶의 수준보다 떨어지고 있는 형편에 놓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현재 대략 8.5%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는데, 200만 명의 실업자들이 미래가 불투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다. 오늘의 프랑스인들의 위치는 이전에 제국주의를 벌이며 식민지를 착취하던 전성기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프랑스 시민들에게 있어 프랑스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외국인들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주로 극우 세력에 속하는 이들은 외국인 때문에 시민들의 취업 전선이 위태롭다 느끼고 있다. 당연히 프랑스 경제가 악화될수록 이런 불만의 소리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르코지의 극우정권이 이들 이민자들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에 제3당인 불복하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가 창당되어 극우정당과 맞서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양극화가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이 연금 개혁법을 강행하고 연금 개혁에 묶여 있는 전국 노조들이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약 70%가 이를 반대하고 있는데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까지 연금 개혁안과 노조들의 파업을 진정시키기 위한 첫 번째 성과를 내놓겠다면서 대책없이 큰 소리나 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6월 29일 낭테르에서 나엘이라는 17세 알제리계 소년이 경찰의 교통검문에 불응하고 도주하다 총격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상점을 약탈, 방화하고 경찰과 소방차를 습격하는 폭동으로 변질되었으며 이제는 프랑스 전국을 넘어 벨기에와 스위스에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곳곳에서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데 6월 30일에만 전국에서 994명이 체포됐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군경찰 249명이 부상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해 화염병과 폭죽을 던졌다. 초등학교와 구청이 불에 탔으며 다른 수많은 도시에서도 밤새 폭죽이 터지고 길거리에 세워놓은 자동차 등에 방화가 이어졌다. 마르세유에서는 폭도 일부가 총기 매장에 쳐들어가 소총 몇 정을 훔쳐가기도 했다. 파리 샤틀레레알에 있는 나이키 매장,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애플스토어 매장 등이 약탈을 당했으며 전국에 있는 대형 식료품 가게들이 잇달아 털리고 있다. 파리 북부 외곽 오베르빌리에 있는 버스 차고지도 공격받아 버스 10여 대가 불에 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이로 인해 파리를 관통하는 대중교통 운영에 일부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마르세유에서 중국인 관광객 41명을 태운 버스가 시위 참가자로 보이는 이들의 투석 공격을 받아 승객 중 일부가 다치는 등, 이국인에 대한 공격도 잇달았다. 마치 1994년 미국 LA의 흑인 폭동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때도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대중교통들이 불탔으며 동양인에 대한 폭력행위들이 다수 발생했다. 아마 LA 폭동 때처럼, 우리 프랑스 거주 한인들도 자체 무장을 하고 이들과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에는 프랑스 폭동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뉴스 메인이 이러한 보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러시아보다 프랑스의 치안이 더 악화되고 있다. 언론은 오늘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일제히 침묵하고 러시아에 대한 페이크 뉴스를 받아 쓰기하며 보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은 홈페이지에 "특히 밤늦은 시간에 상업·공공 시설 기물 파손 및 차량 방화 등 심각한 수준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며 심야 시간에 외출을 삼가는 등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는게 전부다. 거의 치안이 안정적인 러시아에는 특별여행주의보부터 여행 철수권고 단계까지 끌어올려 왕래도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프랑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 중이다. 러시아보다 프랑스 상황이 더 위험한데도 프랑스에 대해 여행경보 제3단계까지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떻게든 러시아를 악마화하고 서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철저히 침묵을 지키며 안전하다고 선전해야 한다. 서구에서 위협받는 국민들의 생명이나 안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프랑스는 저렇게 폭동이 일어나도 안전한 나라, 러시아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어도 푸틴이 국민들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처럼 자유가 없는 위험한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니 나한테 요즘도 "러시아에는 타 도시로 이동하려면 북한처럼 정부에 "통행증"이 있어야 하나요?", "모스크바 가면 '오토 웜비어'처럼 최후를 맞이하나요?, "러시아에 가면 외국인들은 노동 교화형을 받고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나요? 등의 질문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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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7
  • 유럽과 러시아에서 나의 발이 되어 줬던 트렘, 미국에서는 어떨까?
    필자는 유럽이나 러시아에 올 때마다 노면전차인 트램(Tram)을 타는데 한국에서 느낄 수 없는 노면전차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트렘을 타고 출근할 때마다 각종 풍경을 보며 사색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나는 트램덕후로 어떤 도시를 가든 트램이 있다면 반드시 꼭 그 도시의 트램을 타 본다. 유럽과 러시아 각지에 있는 트램, 대륙 건너 미국은 어떨까? 나는 2013년 이후, 현재까지 10년 동안 미국을 가보지 못했다. 2010년에는 에너하임 오렌지카운티에 있었고 시간강사로 뛰었을 때 우리 동네에서 LA 유니온 스테이션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출근해야 했다. 이렇게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 개인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에너하임과 LA를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그냥 지옥과 같았다. 13년 전이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떨까? 달라졌을까? 현대 대중교통의 불모지이자 자동차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은 원래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중교통과 트램의 천국이었다. 각 도시들의 교통망을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트램들들 덕택에 미국 시민들은 현대처럼 대기오염에 찌들며 고통 받는 일도 드물게 도시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에 설립된 내셔널 시티 라인즈(National City Lines), 퍼시픽 시티 라인즈(Pacific City Lines), 그리고 아메리칸 시티 라인즈(American City Lines) 라는 3개의 회사는 1937년부터 각 도시들의 트램 회사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일본의 사철과 같이 노선 확장보다는 부동산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리던 서부의 트램 회사들은 LA의 퍼시픽 일렉트릭을 시작으로 수익성이 낮은 트램 노선들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약 10년 동안 진행되자 이들은 트램 노선들을 폐선하고 버스 노선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수많은 도시들 트램 노선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일부 도시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도 살아 남았지만, 곧 대부분의 트램 노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때 대기업들이 몰래 생산을 방해하여 미국의 대중 교통을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온갖 사보타주(Sabotage)를 감행하게 하면서 전차 스캔들(Great American Streetcar Scandal)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당시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일명 GM),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등의 자동차 관련 회사들은 자동차와 타이어, 정유 등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자신들 회사의 자동차와 버스를 팔아 먹어 이윤을 남기기를 원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미국의 대도시부터 소도시에 이르기까지 850여 개 도시들에 깔려있던 편리한 대중 교통 수단들은 매우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트램을 점차 폐기하는 것으로 서로 합의했고 트램 노선을 폐선한 뒤 새로운 시대의 우수한 교통 수단이라면 버스를 등장시켜 트램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기업들이 트램을 폐쇄한 것은 트램의 단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이윤과 도시들의 기초 인프라를 파괴하여 얻는 이윤을 위해서 행했던 시민들에 대한 만행이었다. 게다가 별다른 대책도 없이 밀어 붙였기 때문에 도시 간의 이동이 매우 불편하게 되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시민들은 개인 자동차를 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폐선된 트램 노선 중 수요가 워낙 많은 노선의 경우 지하철 건설 같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런 계획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트램을 폐선해버렸기 때문에 미국 소도시들의 대중교통은 그야말로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만행으로 인해 여러 대중교통 인프라들이 아직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심지어는 LA 같은 대도시마저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당시 사실 이들 입장에서 대중교통을 없에는 것에 대한 대책이나 대안은 상관이 없었다. 대중교통이 버스로 대체되면 단순히 버스가 잘 팔릴 뿐이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개인 차를 구입하거나 버스를 이용한 대중 교통들이 뒤엉켜 마비가 되면 어찌될지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거대한 만행을 저지르고 차를 팔아 부유해진 제너럴 모터스는 후일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크고 아름다운 차만 만들다가 일본과 독일 등 연비가 좋은 외국계 자동차 제조사들의 공세에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결국 하락세를 걷다가 2008년 금융위기에 제대로 당해 21세기에는 파산 보호 신청을 하여 정부에서 관리를 해줘야 할 정도로 몰락하게 된다. GM의 엄청난 만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미국 소도시들의 대중교통은 트램의 폐선과 때마침 진행된 교외지역(Suburb) 확장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미국 도시들의 인구밀도가 낮아지는 현상까지 합쳐져 사라져 갔고, 도로는 캘리포니아에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보행자보다는 차량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트램 회사들이 직접 진두 지휘한 스프롤 현상이 서부에서 동부로 뻗어나가며 전차 스캔들에 영향 받지 않았던 타 트램 회사들도 붕괴되어 갔고, 그 자리는 연방 정부의 엄중한 감시 하에 다수의 버스 회사들이 차량을 공급하는 대중교통 회사들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도 미국의 도시 구조는 도로 교통과 자동차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대중교통 수익률이 심각하게 저하 되었다. 트램이 떠난 자리를 일부 버스 노선이 대체한 것 말고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별다른 교통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와 같이 미국의 대중교통은 아이젠하워의 고속도로 프로젝트와 제트 에이지의 여파로 인해 점차 효능을 잃어가는 여객철도와 함께 사라져 갔다. 이어 펼쳐지게 된 제트 에이지의 시작과 더불어 도시 간 거리가 멀고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에서는 시내와 시외 할 것 없이 대중교통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시민들의 의식도 자동차의 유무에 따라 신분계층을 파악하는 수단이 되었고 오히려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 즉,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돈 없는 서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중교통 내부에는 범죄에 취약했다. LA나 뉴욕에서 밤늦게 혼자 지하철 타는 행위는 자살 행위라는 것이 바로 그 얘기다. 당시보다 발전되었을 세계 최강국이자 부자나라 미국, 지금은 자유로이 안전하게 대중교통 이용하여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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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7
  • 유럽, BTC 라인에서 안정적으로 가스와 석유를 받으려면 선결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석탄 등 에너지 대금의 루블화 결제 방식에 반발한 유럽은 BTC 라인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BTC 라인에서 안정적으로 가스와 석유를 받으려면 선결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치열한 대립이다. 이 두 나라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은 영토 문제다. 해당 영토는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о-Карабах) 지역이다. 이 지역을 두고 두 나라는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발발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1805년에 카라바흐 칸국을 사실상 점령하게 되면서 불씨가 지펴졌고 현재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치열하게 대립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들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전쟁을 벌인 바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여전히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여전히 대립 중이며 두 나라는 같은 카프카스에 있으면서 외교적으로도 단절했고 국경도 폐쇄됐을 정도로 극악의 사이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2년 전 2020년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전쟁이 벌어졌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다시 무력 충돌이 재개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나는 여러 연구 끝에 이를 "카프카스 위기(Caucasus crisis)"로 정의하고 있다. 카프카스는 이 두 나라 뿐 아니라 터키-아르메니아 문제도 걸려 있고 카프카스 산맥 넘어 체첸-잉구쉬와 다게스탄의 문제, 조지아와 남오세티아 및 압하지아와의 대립도 현재진행형인 곳이기 때문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인류의 화약고(Powder Magazine)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리고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곳 세 곳 중에 한 곳으로 꼽히고 있을 정도로 각 민족들 간의 대립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타스 통신에 의하면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26일에 "아제르바이잔군이 지난 24~25일 사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책임 구역 내로 진입하여 터키제 '바이락타르 TB-2' 무인기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 군부대를 4차례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격화한 상황의 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 아제르바이잔 측에는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고 전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 국방부는 아제르바이잔군이 3월 26일에도 러시아 평화유지군 책임 구역에서 진격을 시도하며 공격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나르고르-카라바흐 공화국 대통령 아라이크 아루튜냔(Араик Арутюнян)은 군사적인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음을 이유로 관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부는 공격 사실을 부인하며, 아르메니아군이 오히려 아제르바이잔군을 상대로 파괴 공작을 벌였다고 주장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전쟁을 벌여 약 6,500명이 사망한 끝에 러시아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으로 전쟁이 마무리됐다. 전쟁의 승리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지역을 장악했으며, 러시아는 양측의 충돌 방지를 위해 5년간 나고르노-카라바흐에 평화 유지군을 배치했었다. 만약 이 지역에서 다시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 BTC 가스관이 위험해질 수 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이기에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민중의 많은 수가 무슬림들이고 범투르크연합의 회원국이기도 하기에 터키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중동, 아랍 국가들도 아제르바이잔을 무슬림들이 많다는 이유로 적극 지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터키와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동, 아랍 국가들이 중립을 선언하고나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의 경우, 러시아와 같은 정교회 국가이다. 그리고 유럽 또한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다. 이들이 아르메니아를 기존처럼 지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BTC 가스관의 안전한 에너지 자원의 수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르메니아를 버리고 아제르바이잔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다. 다만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 지역이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상술한 이유로 인해 원치 않는다. 최대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분쟁을 잠재우면서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수급받길 원하고 있지만 그 또한 불안하기에 우선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유권 다툼 문제는 가장 해결하기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선결해야 할 매우 난이도가 높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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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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