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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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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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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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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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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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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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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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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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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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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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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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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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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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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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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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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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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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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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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살해된지 30주년 되는 날
-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팔레스타인 및 가자지구와 문제에서 휴전과 화의를 이룰 때 늘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는 총리 재임기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증진을 위해 노력하며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협정 당사자들인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와 함께 노벨평화상까지 수상받았다. 사실 노벨평화상의 가치를 높여준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츠하크 라빈이다. 그러나 라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라빈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제거를 지시하고 테러조직을 지원하는 이란을 맹비난했으며, 또한 제1차 인티파다를 강경진압하도록 명령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엄청난 양면성이 있는 인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역사에서 라빈만큼 이스라엘 총리 중에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했는 인물은 전에도, 후에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스라엘 네타냐후의 행태를 본다면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평화 구축 노력과 하마스 집단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대비하여 아랍 측과 유화적인 태도 등으로 볼 때 훨씬 천사 같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제2차 오슬로 협약이 체결된 이후,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 평화 회담 지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후 관용차에 탑승하던 도중 하레디 청년인 이갈 아미르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전부터 유태교 근본주의를 강조하는 극우 강경파가 암살을 목적으로 테러를 벌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었다. 그러나 라빈은 자신과 같은 유태인들을 믿는다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현실은 라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험악했다. 하레디(Haredi)는 극보수주의 유태교 종파를 숭상하는 유태인 집단을 통칭하는 단체를 말한다. 하레디는 일부 종파를 제외하면 대개 폐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은 토종 유태인들이 아니라 아슈케나지 유태인에 속해 있다. 게다가 매우 배타적이고 과격함으로 인해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당시 월간조선에서 근무하던 언론인인 조갑제씨가 라빈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를 마친 뒤 34시간 후에 암살당했다. 뜻하지 않게 조갑제씨가 한 인터뷰는 라빈의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되고 말았으며, 해당 기록은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에 수록되었다. 라빈을 암살했던 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유태인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하레디 소속의 청년이다. 암살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아미르는 정부 수반을 살해한 혐의로 인해 유죄 판결 및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현재도 감옥에서 복역 중에 있으며 아미르는 총리를 암살한 자신의 행동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독방에 가둔 처분은 매우 가혹하며 팔레스타인 수감자들도 이렇게까지 생활하지는 않는다며 아주 적반하장식의 망언을 일삼았다. 게다가 아미르는 같은 종파인 하레디가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독방 수감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생활상의 불편함도 크게 없다고 한다. 감옥 외곽에서 아미르의 이미지는 배신자인 라빈을 죽인 애국자라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이 라빈 살해 사건 직후, 아미르 결혼하겠다는 유태인 여성들의 러브레터와 청혼 신청이 쇄도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아미르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인 여성과 면회를 통해 감옥 안에서 성관계를 맺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라빈을 뻔뻔스럽게 살해하고 감옥 안에서 이같은 최고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웃기지도 않은 대우에 대해 방치하고 있는 것은 네타냐후 정부다. 그러니 네타냐후의 배후 지원설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다. 아미르의 이와 같은 뻔뻔한 태도와 옥중 기행에 대해 당시 정치권은 겉으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네타냐후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이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침묵은 곧 뒤를 봐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라빈의 정치적 반대파인 보수우파 인사들도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을 죽인 그가 저렇게 당당하게 애국자로 여겨지는 행태가 개탄스럽다며 탄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대외적으로 보여지기 위한 정치적인 쇼에 불과했다. 당시 이스라엘 정치권은 자신들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던 이웃 나라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안와르 엘 사다트(Muhammad Anwar es-Sadat, 1918~1981) 대통령이 1981년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신들의 나라 대통령을 스스로 암살하는 것 자체가 후진국이라며 비웃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14년 만에 그 비웃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고, 아랍 국가들로부터 내로남불이라는 국제적인 비웃음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를 비판하고, 또한 스스로 개탄하는 국제적인 쇼(Show)를 벌인 것이다. 라빈 총리의 암살범 이갈 아미르는 지금까지 살아있으며, 여전히 감옥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한편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한 할리드 이슬람불리(Khalid Islambuli)는 재판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자신들의 나라 대통령을 암살하고도 암살범을 살려 두며 최고 대접해주는 자신들보다 더한 나라가 있다며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있는 상태이다. 라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5~6일을 국민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각 관공서들은 조기를 내걸었으며, 유흥업소들도 일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각급 학교들도 임시로 휴교했다. 라빈의 시신은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어 100만여 명이 이곳에 조문을 위해 다녀갔다. 한국에서도 라빈의 무덤을 참배하던 히잡을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울며 안타까워하는 사진이 보도된 바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정치적인 쇼일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는 편이다. 이는 라빈과 아라파트가 체결한 오슬로 협정이 전쟁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의문스러운 협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라빈의 장례식은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유가족들과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John Major) 영국 총리,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찰스 3세, 헬무트 콜(Helmut Kohl) 독일 총리, 로만 헤어초크(Roman Herzog) 독일 대통령,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 장 크레티앵(Jean Chrétien) 캐나다 총리, 이홍구 대한민국 국무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Виктор Черномырдин) 러시아 총리, 폴 키팅(Paul Keating) 호주 총리,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Ghali) UN 사무총장,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대통령, 후세인 1세(Hussein bin Talal) 요르단 국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엄수되었다. 그와 함께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노벨평화상도 공동으로 수상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했으며 이스라엘 하레디들의 테러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끝내 불참했지만 유족들에게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 손녀 노아 벤아르치(Noah Ben-Archi)는 자신을 극진히 아껴준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매우 컸기에 그 안에 복수심마저 자리 잡지 못했다며 눈물의 연설을 했다. 하관식 때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미국 상원의원이 라빈의 관에 형인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의 묘역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기도 했다. 사건 이후 이스라엘 은행에서는 인플레를 대비한 고액권 발행 겸 그의 추모를 위해 500셰켈 지폐를 발행하면서 여기에 라빈의 초상화를 넣으려고 했으나 예상 외로 물가가 매우 안정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자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는데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를 실행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부분인데 네타냐후가 이를 백지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라빈에 암살에 대해 필자는 그 배후에 아랍과 전쟁을 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를 원하는 딥스 & 네오콘, 그리고 네타냐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직전 당시 극우파의 지도적인 정치인인 네타냐후가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주도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고, 그는 라빈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가 시위대의 선두에서 관을 들고 행진하는 등 정국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고한 타인을 죽이거나 해치려는 자에 대한 심판을 허용하는 유태교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의 '추적자 원칙'(Din Rodef)을 적극 옹호하던 인물로, 유태인을 테러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할라카의 심판을 주장하며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라빈 총리 암살 직후 47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그럼 미국은 어떨까? 빌 클린턴 자체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만큼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라빈과 아라파트 사이에 오슬로 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고 2000년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양측의 평화를 이끌어내려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츠하크 라빈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지위 및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겉돌기만 한 협정은 향후, 더 큰 분쟁의 불씨를 야기하는 결과가 되었다. 현 네타냐후가 하는 행위를 보면 라빈이 관뚜껑을 부수고 나와 통곡할 일이다. 그간 그가 노력했던 것이 네타냐후에 의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억지로 갈등을 봉합하려 하지만 라빈과 클린턴처럼 해도 쉽지 않은데 억지로 한다고 되겠는가? 결국 더 크게 터질 불씨는 키우는 셈이다. 현재 11월 4일은 이츠하크 라빈 추모일(Yom Hazikaron leYitzhak Rabin)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현재,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어떠한 추모와, 팔레스타인과 평화 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결국 그저 그런 날로 변해버린 이날은 중동의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씁쓸하게 곱씹고 있는 그런 날이 되었다. 그리고 30주년인 이날따라,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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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의 전도사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살해된지 30주년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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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의 당선과 우간다-인도계 미국인
- 미국의 뉴욕 시장은 시의 공공서비스, 경찰, 소방 등 뉴욕시의 공공기관 및 법률을 집행할 권한을 갖는다. 임기는 4년 중임제이고 연임은 2번까지 가능하지만 재선 임기 종료 4년 후 재도전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2008년에 연임 제한을 2번에서 3번으로 늘리는 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2010년 주민투표를 통해 다시 2연임제로 돌아왔다. 2010년 주민투표 이전에는 3선 시장도 매우 많았는데, 피오렐로 라 과디아(Fiorello La Guardia, 1882~1947), 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obert F. Wagner Jr. 1910~1991), 에드워드 카치(Edward Koch, 1924~2013),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가 3선 시장을 지냈다. 그런데 와그너와 카치는 4선까지 도전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패배해 3선에 머물러야 했다. 미국 최대 도시의 대표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역임한 사람은 이후 고위 공직자로 선출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힘든 직업이라면 별칭이 있을 정도다. 시카고 시장과 마찬가지로 역대 시장 중 괜찮은 평가를 받은 시장이 드문 것으로 악명 높은데 그 중에서 에드워드 카치(Edward Koch, 1924~2013) 정도가 괜찮은 평을 얻었다. 카치는 뛰어난 소통 능력과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3기 임기 때는 조금 평가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가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다. 그는 "뉴욕의 영웅"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또한 퇴임 이후 최악으로 나락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 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가 당선됐다. 이전의 뉴욕 시장의 상당수가 이탈리아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는 좀 특이하다. 그는 우간다와 인도계이고, 종교는 이슬람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 시장에 이슬람계 인사가 당선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 33세로써 100여 년 만의 최연소 시장이다. 미국의 이민 시장이나 이민자 출신들로 채워진 미국 사회로 볼 때 그리 이상한 부분은 아니지만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 민감한 미국으로 볼 때, 이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러나 미국에 늘어나고 있는 인도인들의 숫자와 그들이 미국 사회 중심부로 진출하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는 현재, 필자가 볼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 1899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령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캘리포니아를 개척할 쿨리들이 대거 미국에 들어오면서 인도계 이민자들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도계 쿨리들은 주로 새로운 대륙인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호주 대륙 등에 이주한 중국계와 달리 인도계는 동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등으로 주로 이주했다. 1895년 영국은 케냐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을 창설하였다. 영국은 인구가 200만 명밖에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케냐에 인도인들을 대거 이주시킬 계획으로 동아프리카 보호령에서 루피를 공식 통화로 지정하고 법률 체계를 영국령 인도 제국과 상당 부분 맞추어 놓았다. 영국에서는 케냐 현지 행정을 고아(인도)그 근교 콘칸(Conkan) 지방에서 온 카톨릭 신도 혹은 구자라트 지방 출신 파르시나 자이나교도 상인들에게 맡기고 경찰력이나 군인들은 펀자브인 시크교 신도들로 채웠다. 이미 케냐, 탄자니아의 스와힐리 해안 지대는 영국이 식민화하기 한참 이전 중세시대부터 인도계 상인들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 벵골 지역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약 2,000만 명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인 1896년에서 1901년 사이에 약 32,000명에 달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우간다에 철도를 건설할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이송되었다. 반면 인도계 쿨리인 철도 노동자들은 오늘날 펀자브(파키스탄) 지방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라호르에서 모집되었다. 당시 철도 건설 과정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 및 맹수들의 습격 등으로 트랙 1마일 당 약 4명에 해당하는 2,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철도의 완성 이후 철도 노동자들 중 고향에 재산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가족들을 데려오고 이들은 곧 케냐에 거주하는 친척들과 함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1962년 기준 나이로비의 인구 중 3분의 1이 인도계였으며 케냐 전역에서 농업 이외에 다른 산업 분야의 4분의 3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63년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당시 케냐에 거주하던 인도계 대부분은 현지 국적을 포기하고 영국, 캐나다, 남아공, 호주, 미국 등으로 재 이민하여 오늘날의 인도계 영국인, 인도계 캐나다인, 인도계 미국인, 인도계 호주인,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인구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다. 특히 우간다를 통해 온 인도계 후손이 미국에 정착했고, 이들중 하나가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라 생각된다. 같은 인도계로 이번에 트럼프와 지난 대선에 맞선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와 유명 뮤지션인 니키 미나즈(Nicki Minaj)가 있는데 맘다니와 다른 점은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정착한 인도계와 흑인 사이의 혼혈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이후에 아시아계 이민이 대거 시작되면서 1980년에 인도계들의 숫자는 무려 30만으로 불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80만을 넘어섰고 2000년대에는 그 2배인 160만, 2010년에는 280만, 2020년대에는 440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인도계들의 이민이 많은 것은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영어를 지역 간 의사소통으로 쓰고 있지만 비즈니스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리핀계 미국인들과 같이 영어가 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보다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도계 미국인의 소득과 수입, 교육수준은 아시아계 미국인 중 최고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상류계층 인도인보다 요즘에는 그다지 미국 정부나 기업에서 활용할 인재가 아닌 교육 수준과 문화적 매너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자들이 유입이 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순수 인도계 주민의 수가 처음으로 중국계를 앞지르면서 인구 기준 아시아계 1위로 올라섰다. 현재도 고숙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H1B 취업 비자 신청자의 75%를 인도인이 차지할 정도로 인도계 이민자가 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 고숙련 기술자들일까? 대개 보면 이렇게 들어온 인도인들 대부분이 3D 업계로 가서 일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젊은 층들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힘든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은 미국 MZ 세대들의 빈 자리를 인도인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도계 인구의 증가로 인해 이들의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그런 가운데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가 뉴욕 시장에 당선된 것은 어쩌고 보면 예정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이제 두고 보면 안다. 곧 있으면 LA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3대 대도시의 시장도 죄다 인도계로 바뀔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전에 영국에 총리였던 리시 수낙이 있었던 것만 해도 이를 반증한다. 곧있음 프랑스 대통령, 독일 수상도 인도계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혹시 또 모른다. 미국의 대통령도 인도계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이 모든게 세계적 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를 정복하고 축적했던 서구 열강들의 업보다. 과거 식민지가 되었던 그들이 이제는 서구의 주류가 되면서 역으로 서구를 주무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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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의 당선과 우간다-인도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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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 남명의 한족 국가는 위기에 놓였을 때 새로운 영웅인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탄생되었다. 정성공은 부친 덕택에 매우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비범한 소년이었다. 21세에 남명 정권의 귀족이 되고, 22세에 반청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세에 왕으로 책봉되기 이른다. 그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중국 심장부인 남경(南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정성공은 당시에는 국제화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경호병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 인을 특사로 활용했다. 그의 부대에는 독일인과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대적한 세력은 네덜란드로, 당대 세계 최강의 해양 국가였다. 한편 그가 장성한 뒤인 1644년 명나라는 북경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고, 아버지 정지룡은 3년 뒤인 1647년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성공은 부친의 세력을 물려받아 오히려 청나라에 대항해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남명의 융무제는 정성공을 좋게 보았다. 얼마 안가 정성공에게 충효백(忠孝伯)으로 작위를 올리고 초토대장군이란 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부친인 정지룡의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 정권 잔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게는 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전투를 벌이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 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북쪽에서는 명나라 유신들이 대거 투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할 경우,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 때 정성공은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복건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사용했다. 정성공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을 따를 것인지와 나라를 지킬 것인지, 그리고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삼촌들도 육지에서 승전하기 힘들면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지룡은 마침내 남명 황제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정성공은 해외 무역 및 해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반청운동에 쏟아 부었다. 1659년에는 장강 일대를 따라 난징 일대까지 함락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내 청나라 군의 토벌군과 맞서 연패하면서 주요 점령지들이 함락당하고 고립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성공은 1661년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당시 네덜란드 상관이 점거한 상태였던 대만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서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정성공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총독부와도 알력을 벌이다가 1662년 대대적인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의 망명정부였던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미얀마에서 청나라 군에 사로잡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병사하고 말았다. 정성공의 활약 속에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 역사는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청나라는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바다로 나무 조각 하나 띄울 수 없다는 강경한 해금(海禁)정책을 펴게 됐으며, 이것은 명나라 시대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국의 해상무역을 크게 후퇴시키고 대운하를 중심으로 한 내륙운송 무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성공의 해적 활동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로를 접게 되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 인들이 일본 무역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공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해상 세력은 방향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잠시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였던 오삼계가 일으킨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 세력에 합류하며 복건성 공격에 나서기도 했으나 청나라 군에게 참패했다. 결국 1683년 청나라 군에 의해 대만이 함락되면서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끝내 충절을 지킨 충성스런 장수로 남아 영웅으로 추도되고 있으며, 대만에서도 네덜란드 인을 추방하고 대만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추대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895년 대만을 식민지를 삼은 이후부터 나가사키의 중요한 인물로 다루기도 했다. 정성공이 나가사키 태생이고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자랐다는 부분을 강조해 대만을 처음 정복한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선전시키기도 했다. 중국, 일본, 대만 삼국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영웅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간 정성공 및 정씨 일족 이외에 한족들은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와 각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 자리잡고 화교, 혹은 화인 2세대가 된다. 화교들은 주요 이주 지역인 동남아시아 및 미주 대륙의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인 반면에, 중국에서는 원칙적으로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이중 국적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화교들의 경제력이 막강하여 심지어 한 국가의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다. 화교 배척 운동과 더불어 화교들에게 현지 국적의 취득을 강요하며 거부할 때는 강제 출국이나 재산 몰수와 같은 강경책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교들은 현지 국적을 취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5년 인도네시아와 중국과 인도네시아 이중 국적 문제조약을 체결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쪽 국적만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이중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각종 통계에 의하면 화교들이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33개국에 약 2,200만 명, 미주 32개국에 230만 명, 유럽 24개국에 67만 명, 대양주 15개국에 34만 명, 아프리카 32개국에 10만 명이 각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상당수의 화교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현지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연안 지방에 거주하던 농민과 어민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이 적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생존의 목적으로 해외 여러 나라로 이주했으며, 이는 현대적 의미의 이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현재 전 세계 화교인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여 자본의 규모는 일본 국민총생산(GDP)의 5분의 1 정도에 달하며, 그들의 대부분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의 총 자산은 전 세계 화교 자산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며, 현지 민족 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추산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산업의 50%~80%와 대외무역의 40%정도를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경우, 화교경제는 이미 소규모의 음식점, 세탁소 등의 영세 업종에서 탈피한 지 오래이며, 기존의 금융과 부동산, 유통 등에 기초하여 첨단 기술 분야인 전자와 정보통신, 화학공업, 정밀기기, 강철 등의 산업에서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가를 배출하고 있다. 특히 화교 기업은 정보통신산업을 21세기를 향한 전략산업으로 간주하여 빠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화교의 정보통신 산업의 기원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벨리에서는 하이테크분야에서 벤처기업을 일으켜 사업에 성공한 화교기업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인 컴퓨터 아소시에이즈(CA)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가 자루즈 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비스 Yahoo를 경영하고 있는 창업자 지에리 양이 화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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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 정권 말기, 대만으로 이주한 정성공 및 정씨(鄭氏) 일족과,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화교 2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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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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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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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불거지는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부족 문제
- 드디어 근 3년 동안 기후 변화로 인해 그다지 춥지 않았던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겨울이 올해는 매우 혹독하게 추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타나고 있다. 하리코프 시장인 이고르 테레호프(Игорь Терехов)는 전쟁 3년 만에 가장 힘든 겨울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으며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타격함에 따라 올 겨울은 버티지 쉽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3년 여 동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가장 힘든 겨울은 2022년 말에서 2023년 초라 볼 수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는 러시아의 잦은 에너지 인프라 공격으로 인해 정전 사태기 빗발쳤으며 그로 인해 장기적인 비상 조치가 발령되기도 했다. 이후 두 번의 겨울을 보낸 것은 EU의 지원으로 인해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쟁 이후 가장 최악의 겨울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측으로 인해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정치인들 또한 비슷한 주장을 하기 시작하니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불안감은 짙어지기 시작했다. 젤렌스키 또한 올 겨울 전력 수급에 대한 대안 관련 질문에 모호한 답변을 하면서 불안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전문가들이 올 겨울은 이전보다 모든 상황이 더 최악일 것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요인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강화로 인해 필요 수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직면해 있고,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가스 생산 및 재고가 부족해져 EU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미국은 손을 털었고, EU 또한 자국의 에너지마저 부족한 상황이라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여유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세 번째, 러시아군의 반복된 공습으로 인해 인프라를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었고, 복원할 시간 또한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요인은 러시아군이 개량된 미사일과 드론을 더 많이 동원하여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꾸준히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샤헤드'로 알려진 이란제 드론은 러시아의 제라늄 계열 공격용 드론으로 탈바꿈 한 뒤, 거의 동시에 발사되는 대수들이 과거에는 수십 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수백 대로 늘어났다. 한 번에 최대 500대를 동시에 발사하는 경우도 있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 아무리 방공망이 훌륭하다 해도 공격하는 물량이 많다면 어떻게 하든 뚫리게 되어 있다. AFP 통신에 의하면 러시아의 공습 규모가 지난 9월부터 전반적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공군의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군은 9월에 지난 8월보다 장거리 드론 5,638대와 미사일 185대를 퍼부었고 이는 지난 8월보다 36% 더 급증한 상태였다. 지난 달 9월 7일 밤에는 무려 810대의 드론을 쏟아내어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이에 비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은 여전히 1~2년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여름부터 드론을 요격하는 드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를 믿는 현지 전문가들은 거의 없을 뿐더러 우크라이나가 선전하는 요격용 드론은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개량형 샤헤드 드론을 격추하는 것에도 이전보다 더 떨어졌음 떨어졌지 전혀 나아지지도 않았다. 한낮인데도 수도인 키예프 상공을 러시아 드론이 휘젓고 다니는 것 때문에 도시가 몇 시간 동안 공습 경보가 울리면서 전체적인 시스템이 잠깐 동안 마비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의 여성 기자인 예카테리나 코베르니크(Екатерина Коберник)는 자신의 SNS에 "대통령부터 방위사업청장까지 모든 관계자들이 초가을에는 요격 드론의 양산을 시작할 것이라며 계약 체결을 주장했는데, 정작 생산업체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Усі, від президента до керівника Адміністрації програми оборонних закупівель, наполягали на підписанні контракту, заявляючи, що масове виробництво безпілотників-перехоплювачів розпочнеться на початку осені. Однак виробники це заперечують)."고 주장해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어 러시아 미사일과 드론 성능을 개량시켜 날려 보낸 것도 우크라이나의 대응을 더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영국 FT에 의하면 러시아가 미사일과 드론을 업그레이드 시켜 우크라이나의 겨울철 정전 위협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런던 정보 복원 센터(Centre for Information Resilience)의 자료를 인용하여, 우크라이나의 탄도 미사일 요격률은 지난 8월에 37%였지만 9월에는 6%로 급락했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발사도 이전보다 눈의 띄게 감소했다고 했다. 이에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군사 전문가들은 FT에 러시아가 미국산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을 우회하기 위해 이스칸데르 순항미사일과 킨잘 극초음속 미사일을 종말점에 궤도를 바꿔 요격 자체를 불가능하게 개량했다고 언급했다. 이에 한 우크라이나의 전문가는 이를 두고 러시아 미사일 공격이 진화되었고 개량 발사는 우크라이나의 대처가 불가능하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6월 동안 이어진 러시아군의 공습 상황을 분석한 미 국방부 정보 감찰관의 보고에 의하면,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타격 전술을 변경함으로써 탄도 미사일을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에 에러를 발생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러시아의 미사일이 기존의 탄도 궤적을 따라 날아오는 것이 아닌 궤도를 바꾸어 가며 비행하기 때문이다. 이 보고에 의하면 지난 6월 28일 러시아의 탄도 미사일 7기 중 단 1기만 요격되었으며 7월 9일에는 미사일 13기 중 7기가 격추되거나 억제됐지만 나머지 6기는 제대로 된 정타를 허용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 드론과 미사일 방어에 나선 패트리어트 시스템 또한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일부 손상되었다는 주장이 재기되었다. 당시 시스템을 운용하는 전문 요원들은 큰 부상을 입었으며, 데니스 사쿤(Денніс Сакун) 중령의 경우, 공습 직후 장비를 회수하려다 이어 발사된 재공격으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가스가 부족한 것도 겨울철 에너지 위기론이 생성된 원인 중 하나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초부터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보내는 자국 통과 가스관의 운영을 전면 중단했다. 그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가스 생산 인프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폭격을 감행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가스 생산량은 60% 이상 줄어들었다. 이에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러시아 가스도 끊기면서, 자체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가스 부족 현상이 매우 심화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화력 발전소와 지역 난방에 사용되는 가스조차 부족햊;니, 전력 소비량은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부족해진 우크라이나의 전력 사정은 더욱 악화될 것은 뻔하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 동안 에너지 인프라에 집중적으로 타격한 러시아의 전략이 점점 제대로 먹혀 들어가고 있다. 타격이 가해질 때마다 에너지 시스템은 더 노후화 될 수밖에 없으며 작은 충격에도 가스 유출이 심화된다. 이처럼 취약해진 인프라를 복구할 시간도, 돈도 없으니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보유량은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 겨울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전 3년의 따스한 겨울과 완전한 차이가 있을 추운 겨울이다. 수급 상황이 좋지 않은 에너지 문제에 있어 이제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러시아군이 집중하여 타격하는 대상은 우크라이나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로 나타난다. 에너지 인프라는 기본적으로 발전소를 중심으로 송전망과 배전망, 이어 변전소로 연결되고, 정유 및 주유소, 유류고 등 석유와 가스 저장 시설과 통합 에너지 관리 시스템 등으로 이어진다. 특히 화력 및 수력발전소의 경우, 전력 수급에 따라 생산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에너지 인프라다. 다만 원자력 발전소는 용량 조절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에 대해서는 정보 보호 차원으로 잘 알려지지 않게 되어 있다. 만약 이같은 정보가 유출된다면 우크라이나 심각한 내적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는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 일부가 가동이 완전 중단되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군이 화력발전소와 수력 발전소에 대한 공습이 정기적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정상적으로 돌리는 것도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화력발전소와 수력 발전소에 대해 러시아 공습에 대응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하나 밖에 없다. 소규모 발전 시설을 여러 곳에 설치하고 이를 대량 가동하는 것이다. 이어 시설을 은폐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내내 은폐는 불가능하기에 이는 논외로 쳐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그와 같은 조치가 이어지면 러시아군이 당분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모든 발전소 시설들을 일일히 찾고 파악하여 공습을 감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발전소를 분산하자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의 없던 일이 되다시피 했다. 소형 발전소 건설을 시도했던 우크라이나 업체들은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원이 매우 부족해 시도조차 난해했고 소련 때부터 이어온 관료 사회의 문제점으로 인해 결국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편 러시아는 꾸준히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해 왔지만, 올 겨울 시즌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공습에 나선 것은 10월 초부터라 볼 수 있다. 러시아 드론의 변전소 공격으로 인헤 키예프 전 지역에서 정전 사태가 벌어졌고, 인근 체르니코프 주와 북부 수미 주, 남부 오데사 주에서도 몇일 동안 단전되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그에 따라 피해 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당국과 지역 전력 회사의 정전 및 긴급 복구 계획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쏟아냈다. 대체로 12시간 만에 전기가 한 시간 정도 들어오니, 샤워 및 휴대폰 충전도 못 할 판이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사전 공지로는 오후 8시부터 정전이라고 했는데, 오후 4시부터 전기가 나갔으며 오후 9시부터 정전이라더니, 벌써 전기가 나갔다. 24시간 동안 전기가 안 들어올 것 같다는 등등의 불만이 재기되었다. 이처럼 러시아군의 에너지 기반 시설을 공격함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측이 난감해 하는 부분은 또 있다. 철도에 전력을 공급하는 변전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가 갑자기 멈춰서는 경우이다. 철도 시설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니, 철도 물류가 막혀 버리기에 철도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다. 물론 러시아 공습 목표 중에 하나가 우크라이나군의 철도 물류를 마비시키는 것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불어 10월 초에 시작된 러시아군의 에너지 인프라 공습은 이후 최고 규모의 기록을 계속 경신하기 시작했다. 지난 10월 9일 밤에서 10일 새벽까지 이어진 러시아군의 에너지 인프라 공습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많은 드론과 미사일 공습이 감행했다. 이 날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해 수도 키예프 등 무려 10개 지역에 정전이 발생했다. 키예프 지역의 정전은 2월 이후로 8개월만이라고 했다. 피해는 수도인 키예프가 가장 컸다.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공습에서 멀어져 사실상 피해가 미미했다. 러시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 발전소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이론적으로 볼 때 효과가 낮다. 물론 멀리서 날아온 미사일은 비교적 격추하기가 쉽고, 장거리 드론은 화력발전소와 같은 견고한 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러시아의 이날 공습의 목적은 오로지 키예프와 인근이었다는 점도 한 몫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가스 생산 시설의 파괴도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가 최근 며칠 동안 우크라이나 가스 생산량의 60%를 파괴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내년 3월 말까지 연간 소비량의 약 20%에 해당하는 44억㎥의 가스 수입이 불가피한 상태에 놓였으며 이로 인해 약 19억 유로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발전소와 변전소 외, 주유소 등 에너지 저장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은 그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은 최근 더욱 빈도 수가 높아졌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 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은 의외로 주유소다. 우크라이나는 개전 초기 주유소 등 저장 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이 이어진 이후, 연료 저장 시설을 여러 곳에 분산 배치했지만 우크라이나 전 국토에 그렇게 하기에는 한계에 있어 여전히 고정된 시설이 많다. 따라서 주유소는 여전히 러시아군의 정기적인 공격 목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정유 시설은 러시아보다 규모가 훨씬 적고, 최대 규모의 크레멘추크 정유공장 등 일부 시설들은 이미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주유소 공격과 그로 인해 파괴는 민생과 직결된다는 점에 있다. 군사적 용도의 에너지는 특수 물자 공급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유소를 파괴하는 것이 전선 및 전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떨어진다. 그 때문에 러시아가 주유소 공격을 그동안 거의 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정유 및 주유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을 강화하게 되니 러시아 또한 맞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군의 대응은 우크라이나의 드론이 러시아 석유를 비롯한 기본 인프라 산업에 피해를 끼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으며 올 겨울이 고비가 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잔인한 겨울은 이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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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불거지는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부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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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악의 자연 재해 "홍수",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지역이 홍수와 폭우에 의한 침수 등이 빈번한 이유
- 최근 베트남 중부와 중북부 지역에 폭우와 태풍, 홍수가 빈번해지고 있다. 바로 어제, 오늘 후에(Hue)와 다낭 일대가 폭우와 홍수로 인해 많은 수재민들이 생기고 있다. 최근 중부 지방에 내린 비는 평소보다 최대 6 배나 많은 양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하띤성은 150~400mm, 꽝빈성에서는 400~500mm, 꽝찌성은 800~1500mm, 투어티엔후에성은 1,300~2,000mm, 후에와 다낭시는 1,100mm, 꽝남성은 900~1,200mm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국제 평균적으로 하루 강수량을 180mm를 폭우로 분류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물폭탄이 중부 지역과 북부 지역을 덮친 셈이다. 베트남의 전문가들은 북반구의 한기가 베트남 중부 지역 상공의 열대성 수렴대에 진입하면서 비정상적인 폭우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재 벵골만에서 베트남 중부를 가로 질러 필리핀까지 열대성 수렴대가 분포되어 있고 이 지역들에게서 구름과 뇌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 동풍을 만나면 수증기가 급격히 증가하여 더 많은 비가 발생한다고 했다. 아울러 중부와 북부 지역의 따뜻한 해수 위로 강한 바람이 지나가면서 베트남 동해상에서 열대성 저기압에 이어 태풍이 발생하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실제 지난 10월 6일 이후에는 이 지역들에 2개의 태풍과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된 바 있다. 당시 태풍과 열대성 저기압은 많은 비를 동반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풍 린파가 지나갔을 때 500~700mm 이상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이와 같은 모든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난 7월에 등장한 라니냐(La Niña) 때문이다. 라니냐는 적도 부근 바다에서 무역풍으로 인해 북반구에서는 북서쪽으로, 남반구에선 남서쪽으로 해류가 흐르면서 태평양의 무역풍이 다른 해보다 강해지면 서태평양 적도 부근에는 두꺼운 온수층이 형성되고 동태평양의 온수층은 얕아지게 된다. 이로 인해 동태평양에서의 용승이 강해져 심층수가 더욱 많이 올라오게 되고, 그리하여 동태평양의 차가운 해수가 더욱 냉각되어 1년 중 5개월 이상 동안 해수면 온도가 평소보다 0.5℃ 이상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처럼 라니냐는 엘니뇨의 반대현상이다. 문제는 내년 초까지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더 많은 태풍이 베트남 동해에서 생성되고 더 많은 비가 더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아직 비가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라 경고하고 있다. 11월 첫 주에도 또 다른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어 중부지역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사태는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남부 등을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 달 9월 하노이에는 태풍 '부알로이'로 인해 폭풍과 강우를 동반, 주택 135,000 채 이상이 침수 또는 파손되었고, 26명이 사망했으며 30명 이상의 실종자들이 발생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의 항공편들도 연이어 지연 및 취소되었고, 시내의 오토바이와 택시, 버스 등의 각종 대중교통과 일반 승합차들이 홍수로 인해 갇혀 엄청난 교통 정체를 보였었다. 이 같은 수해가 잇달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베트남의 대부분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대체적으로 인간 활동의 온실가스 배출보다는 자연순환론, 기후변동주기론, 태양활동주기론 등의 요인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2010년, 남극 세종 과학기지의 윤호일 박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는 1950년대~1970년대 사이부터 태양 활동 감소로 이미 소빙하기에 진입했으며, 2000년대의 이상기후는 그런 소빙기와 지구온난화의 충돌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와 같은 태양활동주기론에 더 신빙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가는 베트남으로 해수면 상승의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국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근 베트남의 천연자원환경부의 연구에 의하면 향후 해수면이 100cm 상승했을 때, 메콩 강 삼각주 절반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작년에 발표된 ‘기후 변화 시나리오(Kịch bản biến đổi khí hậu)’에 의하면 해수면 100cm 상승시 메콩 강 삼각주의 47.29%가 영구적으로 침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노이와 북부 항구 도시 하이퐁이 있는 홍 강 삼각주의 경우 13.2%, 호치민 시는 17.15%, 중부해안지역은 1.53%가 침수될 것으로 보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2050년까지 국제적으로 베트남 동해의 해수면이 2050년 24~28cm, 2100년까지 56~77cm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베트남의 해안 평균 해수면 상승은 세계 평균보다 높을 것으로 보이며, 남부 해안 지역의 상승은 북부보다 높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40,577㎢에 걸쳐 펼쳐진 메콩 강 삼각주의 경우, 지난 수십 년 동안 베트남의 농업 및 양식업의 중심이었고 국가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농작물 수출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최근 몇 년간의 나타난 많은 환경 연구보고서는 베트남에서도 가장 많은 2,0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메콩 강 삼각주가 가라앉고 있으며 100년 안에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연구가 반복될수록 침수 시기는 당초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다. 2019년, 기후 과학을 분석하고 보도하는 미국 기반의 비영리 언론 기관인 Climate Central에 의하면 메콩 강 삼각주와 국가 경제 중심지인 호치민 시를 포함한 베트남 남부 대부분이 2050년까지 지속적으로 침수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2100년까지 해수면이 1m 증가해 호치민 시의 약 18%, 메콩 강 삼각주의 약 39%가 침수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호치민시 중심가인 1군의 경우 2030년까지 침수 피해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면서 폭우에 매우 취약해질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호치민은 1990년대부터 도시 전역의 지반 침하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호치민 시의 연간 지반 침하 속도는 연 2∼5㎝로 주변 지역 해수면 상승 속도의 약 2배에 이르고 있다. 또 일부 상업 지구는 매년 7∼8cm씩 가라앉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메콩 강 델타 지역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81.8cm, 48.8cm나 각각 침하했다. 호치민 시가 가라앉는 주요 원인은 본래 취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였고, 과도하게 지하수를 추출했기에 침하 속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 오고 있다. 그로 인해 대표적으로 발생하는 사고가 바로 씽크홀이다. 게다가 호치민이 인구 1,000만이 넘는 대도시이기에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른 지하철 건설 공사, 지속적인 마천루 건립 등이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베트남 최대 식량 생산지역인 메콩 강 삼각주 지방에서 기후 변화 등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과 메콩강 수량 감소로 바닷물 유입이 늘어나면서 염분이 땅에 스며들어 쌀 재배가 어려워지고 있다. 베트남은 날로 인구가 늘어나 올해 상반기에 이미 1억을 돌파했기에 메콩 강이 경지 면적이 줄어들게 되면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릴 것이다. 이번에 홍수가 난 후에나 다낭도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다. 게다가 홍수나 침수가 발생하면 배수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한 상태로 강우가 쏟아질 경우, 오히려 역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 베트남에는 과거부터 늪지대였던 곳이 많고, 자연적으로 늪지대의 물이 모여 호수나 저수지 등이 자연 형성된 곳도 꽤 많다. 이런 곳들은 대개 물이 역류하는 현상이 많이 벌어지며 그로 인한 침수와 홍수는 거의 손 쓸 수 없을 지경이다. 따라서 베트남이 해야 되는 상황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저지대 지역에 면해 있는 강가나 못, 호수, 저수지 등에 제방을 쌓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각 곳에 보와 제방을 축조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배수 시설 공사를 완전 일임하는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많은 나라다. 한국의 이와 같은 기본 모델을 장착시키기 위해 베트남은 자국 홍수와 침수를 대비하기 위해 자국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경주 APEC에서 베트남의 주석인 르엉 끄엉을 만나 이 같은 문제를 협상하고 우리 기술자들을 보내 베트남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첫 번째는 베트남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로 인한 한국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우리 기술을 투자한 인프라로 인해 우리의 역량을 동남아시아 다시 어필 할 수 있다. 중국의 자본에 신음하던 동남아시아 각국이 한국의 수준 높은 기술을 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에게 막대한 자본과 물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지만 우리가 중국가 맞설 수 있고, 숭부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Technology)이다. 세 번째는 미국, 중국, 일본에 치중되어 있는 무역의 다변화를 위한 첫 번째 거점으로 동남아시아가 될 수 있다. 그런 문제로 인해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순서로 정상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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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악의 자연 재해 "홍수", 최근 들어 중부와 북부 지역이 홍수와 폭우에 의한 침수 등이 빈번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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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의 이고르 대공, 슬라브족 최고 여전사 올가 대공 이야기
- 이고르는 941년에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공격을 결정했다. 이고르는 초반 비잔틴에게 계속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이 도시의 교외를 초토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고르의 해상을 통한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유명한 그리스의 불과 크림반도에 정착해 있던 대규모 비잔틴의 전함들에 의해 패배했다. 수륙 양면 공략에 실패한 이고르는 944년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강화를 요청했다. 이 때 맺어진 조약은 911년에 올레그에 의해 맺어진 조약에 비해 키예프 공국에게 훨씬 불리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을 재공격하기 위해 여러 세력들을 지배하에 두어 국력을 회복하려 했으며 그러한 일환으로 이고르는 945년에는 페르시아와 몇몇 지역들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숲 속의 사람들’ 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슬라브계 종족인 드레블리예 족(The Derevlians)이 반란을 일으켰다. 키예프 공국의 지나친 공물 요구에 맞춰 힘겹게 공물을 바치던 그들은 키예프 공국이 두 차례나 비잔틴 제국과 전쟁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키예프 공국의 국력이 피폐해졌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드레블리예 족은 조직적인 반란에 들어갔고 이고리는 946년에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리예 족과 정벌 전을 벌였다. 그러나 드리블리예 족은 산세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이고르의 군대를 기습했고 이고르는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드레블리예 족은 이고르를 매우 가혹한 고문을 시킨 다음 나무에 묶어 놓은 뒤 산 채로 찢어 죽였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드레블리예 족은 독립에 성공하였으며 키예프 공국을 정복하기 위해 군을 정비하고 공세를 강화하게 된다. 올레그와 이고르의 통치는 키예프 공국의 건국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실제로 역사적인 기록에서 언급될 때 언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올레그가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때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올레그가 앞에서 살펴본 바의 방식 그대로 키예프를 점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레그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이웃의 동슬라브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그들로부터 공물 또는 세금을 거두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올레그는 세력이 강성해진 것을 확인하자 907년부터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키예프 공국에 유리한 무역 협정을 맺었다. 이후 즉위한 이고르는 내치에 집중했으며 941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후 이고르의 전사는 슬라브 부족들의 단결을 이끌어 냈고 탈 슬라브 연맹을 선언한 드레블리예 족을 축출하는 것에 세력을 합의했다. 945년 가을 무렵 남편 이고르 대공이 드레블리예 부족에게 살해당하자 올가는 슬픔에 젖을 틈도 없이 남편을 대신해 키예프를 통치해야만 했다. 아들이었던 스비아토슬라프가 매우 어렸기 때문이다. 키예프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올가는 남편에 대한 복수를 해야 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임을 당할 경우 나머지 가족들이 복수하는 행위는 당시에 관례였다. 올가의 복수전을 설명하기 위하여 올가는 어떠한 여인이었고 어떻게 출생했으며 성장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올가는 러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프스코프 주(Pscov, 오블라스트 Oblast)의 비부티(Bibuty) 마을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올가는 어릴 때부터 아주 현명하고 결단력 있는 여자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너무 아름답다보니 사람들은 그녀를 ‘미의 화신’ 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이내 그녀의 미모에 대하여 슬라브 부족 전체에 알려졌다. 어느 날 키예프 공국의 이고르 대공은 사냥을 하다가 올가를 보게 됐다. 그녀에게 반한 이고르 공후는 올가에게 청혼했고 청혼을 받아들인 올가와 이고르 대공은 결혼했다. 그 때 신부인 올가의 나이는 13세였다. 이고르 대공은 신부에게 삼촌의 이름 올레그를 따서 올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올가는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매우 지혜롭고 총명했기 때문에 때때로 국가의 중요한 정사에 관여하기도 했다. 올가는 이고르가 비잔틴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봉쇄를 시작할 때 상당히 많은 지략을 총괄했으며 외교적인 역량으로 인하여 동맹 세력들이 확대된 것을 확인하자 941년에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고르 대공이 해군의 전멸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하자 주력 육군을 거느리고 키예프 공국에 매우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여 안전하게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주변 동유럽 국가들과의 경제적인 협력을 강화하여 무역 협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이고르가 드레블리예 부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했을 때 수도인 키예프를 최종적으로 방어하는 수장의 위치까지 겸하기도 했다. 이러한 올가에 대한 남편 이고르 대공은 상당히 신임했으며 여러 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올가 사이의 아들인 스비아토슬라프를 후계자로 삼았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올가는 아들 스비아토슬라프를 942년 그녀가 52세 되던 해에 낳았다고 전해진다. 이고르 대공을 살해하고 키예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전진했으나 드레블리예 부족에 합세했던 일부 슬라브 부족들은 올가에 의한 대병을 거느리고 공격할까 두려워했다. 이들은 키예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급기야 드레블리예 부족을 배신하고 살 길을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키예프 진군을 포기하고 키예프의 섭정이 된 올가에게 자신들의 공후인 마르(Мал)와 결혼한다면 그들이 관할하는 영토는 더욱 강대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묘수를 찾았다고 생각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올가에게 사신을 보내 마르 공후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보낸 사신의 제안을 듣는 척하던 올가는 그들에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올가는 다음 날 아침에 사신을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자신에게 오라고 말하면서 사신들을 안심시킨 이후 병사들에게 궁전 앞마당에 아주 크고 깊은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했다. 하루가 지난 후 올가는 사람을 보내 드레블리예 사신들을 불러냈다. 올가의 부하들은 걸어서 올지 배를 타고 드레블리예 사신들에게 묻자 드레블리예 사신들은 배를 탄 상태로 궁전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올가의 부하들은 사신들이 탄 배를 들고 키예프로 들어왔고 사신들이 키예프의 궁전으로 들어오자 올가의 부하들은 구덩이에 배를 던져버렸다. 배 안에 있던 드레블리예 사신들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고 올가는 그들을 산 채로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첫 번째 복수를 끝낸 이후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올가는 사신을 통해 마르 공후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대신 드레블리예 부족들 가운데 연로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을 키예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사는 곳으로 갈 때 미리 그들의 풍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사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마르 공후와 결혼한다는 올가의 말을 믿고 마을의 수장들을 키예프로 보냈다. 올가는 키예프에 도착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피로를 풀라며 목욕할 것을 권했고 그들이 목욕탕에 들어가자 올가는 문을 폐쇄하고 목욕탕을 불태워 수장들을 모두 화형에 처했다. 두 번째 복수를 마친 직후 올가는 다시 사신을 보내 자신은 벌써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며 자신을 마중 나오기를 요청했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약 5천 명의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올가를 만나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드레블리예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올가는 남편 이고르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그들에게 술을 먹이고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올가는 그들 모두를 참수했다. 세 번째 복수를 마친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본거지인 코로스텐(Korosten)으로 갔다. 이 때 올가의 복수를 알고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했다. 드레블리예 부족민들이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자 여름 내내 코로스텐 성을 포위하고도 점령하지 못한 올가는 다른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올가는 성을 지키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항복한 사람들은 세금을 내면서 농사짓고 있다며 성을 지키다 굶어죽느니 차라리 세금을 내고 농사짓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세금을 내고 싶었지만 올가의 복수가 두려웠던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복수가 끝났다는 올가의 확답을 듣기를 원했다. 그녀는 복수는 끝났다며 화해를 요청했고 화해의 상징으로 드레블리예 부족들도 각 가정마다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진정으로 복수가 끝났다고 생각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올가의 요구를 들어줬고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보낸 새들의 다리에 유황을 묻힌 끈을 묶고 끈에 불을 붙여 새들을 성으로 돌려보냈다. 성으로 돌아간 새들 때문에 코로스텐 성은 내부에서 화재로 인하여 대혼란으로 이어졌다. 화재를 피해 성 밖으로 나온 부족민들은 올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나머지 부족민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부족민들은 모두 올가의 노예가 되었다. 올가의 복수는 이렇게 하여 끝나고 드레블리예 부족은 이후로도 키예프 공국에서 가장 하층 계급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 제국에 의해 키예프 공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와 같은 노예 생활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두고 러시아 인들은 오랫동안 그녀의 이러한 복수를 칭송하면서 그녀를 ‘지혜로운 러시아 여성’ 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처럼 일단 복수전을 성공시킨 뒤 올가는 드레블리예에 협력한 슬라브 부족들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징세 관을 보내서 세금을 걷게 했는데 각 지역 공통의 세율과 세법을 정해서 징세 관들의 자의적인 징세를 막았으며 징세의 횟수를 한 해에 한 번으로 한정해 드리블리예 부족에 협력했던 기타 슬라브 부족들의 원성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슬라브 부족들의 성공적인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 있어 올가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성취들이 아니었다. 올가의 기독교의 수용은 그동안 다신교를 믿었던 슬라브 인들의 종교적 통합을 위한 정치적인 방편이었다. 올가는 95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의 세례를 받았다. 올가는 자신의 기독교 수용을 계기로 자신의 백성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올가 대공이 언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957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은 일은 거의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올가 공후의 세례가 키예프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대부분의 학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심지어 올가의 아들인 스비아토슬라프 조차도 본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에 부하들이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 생각해 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가 대공의 기독교 세례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편이 많다. 올가 대공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을 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예방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현명하고 슬기로운 올가 대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올가 공후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좀 더 세부적으로 기독교를 알기 위해 올가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키예프 대공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올레그 대공이 비잔틴 제국에 행한 정벌에 대하여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올가 대공을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올가 대공을 만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올가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했다고 한다. 황제는 올가 공후에게 청혼했고 현명한 올가 대공은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황제의 부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황제가 올가의 대부가 되어 직접 세례를 해준다면 그때는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황제는 총대주교와 함께 직접 올가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마친 후 황제는 다시 한 번 올가 대공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올가 대공은 “황제께서는 제 아버지로서 세례를 해주셨고 저를 딸이라고 부르시는데, 딸인 제가 어찌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황제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는 정치적인 면에서 올가 대공의 현명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돌아온 올가 대공은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를 거부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비잔틴 제국 황제의 정치적 권위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이자 올가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교섭 과정에 교황과의 오해가 생겨 성사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서 키예프 공국에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크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내 기독교를 거부하는 부족민들로 인하여 전도를 위해 상주했던 사제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올가는 장성한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대공 지위를 양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가(Ольга)가 대공으로써 직접 통치한 (945~962) 기간 동안 키예프 대공국은 크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각 부족들의 총 지도자 역할을 맡으면서 그들의 단체 이탈을 봉쇄했다 우선 드레블리예 부족에 대한 복수전을 벌인 이후, 동부 우랄일대까지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던 드레블리예 부족의 동맹 세력들을 단계적으로 분할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등 추가 이탈을 봉쇄하기 위하여 여러 혜택들을 주고 이들에 대한 통합을 전개했다. 올가는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위해 찾아온 서부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의 사신들을 적당히 구슬려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만들었고 회유가 되지 않은 남부 슬라브 부족들과 크림 반도 일대의 슬라브 부족들을 토벌 작전을 감행하여 부족민들을 산 채로 묻어 죽이거나 마을에 들어가게 해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면서 잔인하게 제압했다. 이렇게 통합된 슬라브 민족들로 인하여 스비아토슬라프의 정복 전쟁을 용이하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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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의 이고르 대공, 슬라브족 최고 여전사 올가 대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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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진 이야기 : 호주 원주민들과 멜라네시아인들 이주의 역사
- 호주 대륙에 유럽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었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에보리진이다. 또는 Indigenous Australian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고 불리며 간혹 퍼스트 오스트레일리안 (First Australian)이라 부르기도 한다. Indigenous Australian이라는 개념은 다시 에보리진 호주인(Aboriginal Australians)과 토레스 해협 제도에 거주하는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Torres Strait Islanders)으로 분류된다. 최근 호주 원주민들이 '애버리지니'라는 명칭을 선호하지 않음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는 표현이 권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원주민에 대한 배려로 호주 국기를 게양할 때 대부분 원주민기도 함께 게양하고 있다. 호주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s)은 유럽인의 이주 이전부터 호주와 주변 섬에 살았던 원주민이다. 호주 본토의 애버리지니(Aborigine)을 비롯하여 행정구역상 퀸즐랜드의 일부인 토레스 해협 제도의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및 태즈메이니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등이 있으나, 태즈메이니아인은 백인 이주자에 의하여 거의 절멸당하였다. 현재 총인구는 80만 명가량으로 호주 전체 인구의 약 3.3%에 해당하고 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에보리진 호주인과 토레스 해협 원주민들을 합한 호주 원주민 인구는 812,728명이며 이는 호주 인구의 3.2%를 구성했다. 특히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에서는 인구의 30%가 호주 원주민이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비중이 적다. 원래는 250여 개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상당수 언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그래도 칼라라가우야 어나 피찬차차라 어와 같이 널리 사용되는 언어도 존재한다. 이들 언어의 사용자 수를 모두 합치면 5만 명 정도로 호주 내 한국어 사용자 수와 비슷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3/4, 무종교인이 1/4이며 1%만이 전통 종교를 믿고 있다. 퀸즐랜드 북부에서는 파마(Pama)라고 하며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늉아(Nyunga)라고 스스로를 지칭하였는데, 물론 지역차는 있지만 이를 차용하여 파마늉아 어족이란 언어구조학적 단어가 생겼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파마늉아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북부나 태즈메이니아 섬 원주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885년에 출간된 독일의 백과사전 Meyers Lexikon에서는 이들을 흑인으로 분류했고 한동안 이러한 분류가 널리 통용되었으나,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 계열 흑인과는 유전적 특징이 전혀 다르다. 하플로 그룹의 조사 등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독자적인 그룹인 호주 인종인 것으로 여겨진다. 호주 원주민의 조상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공통된 조상들과 유전적인 차이가 적어도 6~7만 년쯤은 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추측하여 보면,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인 예멘의 경류를 따라 남아시아로 진출한 이후 다시 오세아니아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주 길목은 뉴기니 지역을 통과해 호주 대륙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 Y염색체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하플로 그룹 S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7만 년 전에 처음 호주 대륙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주 원주민 사이에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호주의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와 사회 간에는 큰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각기 고유한 문화, 관습, 언어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호주에서 이러한 전통적 집단들은 보다 작은 지역 공동체로 분류되어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정착했을 당시 원주민은 대략 250개의 언어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많은 원주민이 영어를 사용하여 120~145개의 원주민 언어만 남아 있으며 그 중에서 13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멸의 위기에 몰려 있다. 유럽인이 정착했을 당시 원주민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적게는 31만 8,999면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인구 분포는 지금처럼 머리강을 중심으로 하여 호주 동남부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은 유럽인의 정착으로 가장 큰 인구 감소를 당했다. 멜라네시아 인은 자연적으로 금발인 사람이 많은데, 모발 단백질의 돌연변이에 의해 자연 발생 된 것이라고 한다. 멜라네시아인 비율이 94%인 솔로몬 제도에서는 인구의 26% 정도가 금발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백인과 비슷하게 어렸을 때는 밝은 금발을 가지고 있다가 성장하면서 점차 검은색으로 변해 성인이 된 뒤에는 어두운 갈색 머리로 변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멜라네시아 인들은 약 3~5만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한다. 피부가 검지만 흔히 흑인이라 부르는 아프리카의 니그로이드와는 혈통이 전혀 다르다. 멜라네시아인은 태평양 섬 원주민(pacific island) 혹은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이라는 다른 분류로 묶이는, 이와 같은 오래된 인종 분류가 늘 그러하듯이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으며 아직도 유전학적으로 잘 연구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호주 인종(Australoid Race)은 현생 인류의 인종 분류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의 원주민이다. 이들을 두고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s) 인종이라 불린다. 호주 원주민, 멜라네시아 인, 동남아시아의 네그리토, 중부 및 남부 인도인, 일부 동남아시아 인들까지도 포함된다. 다만 20세기 후반 연구가 진행되면서 '-oid' 유형의 포괄적인 인종 분류에 비판적인 학자가 많아졌으며, 오늘날 오스트랄로이드를 비롯한 몽골로이드, 코카소이드, 니그로이드 등 학술적인 용어로는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오스트랄로이드 계열 원주민을 네그리토(Negrito)라고 부른다. 현대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선주민인 오스트랄로이드와 나중에 대만과 인도 등지에서 유입된 민족이 섞여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인도 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이기도 하며, 아리아 인들이 남하하기 이전에 인더스 문명을 세운 만들었던 인종들이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흔히 드라비다 인이 인더스 문명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하플로 그룹을 통한 연구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의 주민들의 유골에서 드라비다 인의 영향이 미미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같은 오스트랄로이드 계통이라도 각기 다양한 환경에서 오랜 세월 문화적으로, 관습적으로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외모, DNA, 언어, 풍습 등이 많이 다르다는 것에 있다. 한 때 대만 섬, 오키나와 제도에서까지 이들이 거주했던 것이 밝혀졌다. 또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동 지역의 교류로 인해 아라비아 반도나 아프리카의 뿔 지역 주민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밝혀졌다. 피부색이 짙고, 콧대가 낮으며, 코가 넓고, 곱슬머리 등 때문에 흑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잦지만 이들이 흑인과 닮은 것은 수렴 진화로 아프리카의 흑인과는 유전적으로 많이 먼 것으로 나타난다. 호주 인종은 코카소이드, 니그로이드, 동아시아인 등 중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인종이다. 이마가 넓고, 팔자 주름이 크며, 안와상융기가 인류 중에서 비교적 큰 편이다. 대부분 흑발 흑안을 가지고 있으나 멜라네시아인은 금발이 많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 동남부 지역을 대영제국의 영토로 선포하고서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이름을 붙인 이후 1788년 시드니를 중심으로 식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인 이주로 인한 피해는 학살 및 그들과 같이 들어온 수두,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었던 에보리진은 인구밀도 높은 동남부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인구가 급감하였고, 또한 이주민과 같이 들어온 성병 감염으로 말미암아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민 초기 315,000~750,000명이던 원주민이 급감한 주 요인은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과 같은 질병이며, 이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한 원주민 수만 전 인구의 50%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전염병과 성병, 그리고 탄압으로 말미암아 1788년과 1900년 사이의 애보리진 인구 90%가 감소했다. 비교적 풍족했던 남부 호주의 에보리진의 경우 대규모 유럽 정착민들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절멸했다. 태즈메이니아 섬은 특히 타격이 컸는데 이주민 정착 초기 2,000~15,000명 수준이었던 에보리진의 인구가 1870년 무렵 거의 사라졌다. 인종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1803~1834년 사이 333명의 에보리진이 학살당한 것도 직접적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매독 등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다수는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태즈메이니아 지역의 에보리진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30년 사이(1803~1833)에 영국 이주자들과 함께 들어온 질병과 인종 탄압, 학살 등으로 인해 인구가 약 5,000~15,000명에서 300명으로 급감하였다. 1896년 이후로 역사학자와 과학자, 인류학자들에 의해 에보리진에 대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트루가니니'라는 여성을 마지막으로 순수혈통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내륙 지방은 원주민이 정착민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여 이민 초기 약 3,000명가량 백인 이주자가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백인 이민자가 살해한 원주민의 수 또한 1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50년대 식민지화가 안정되자 에보리진의 삶도 이주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렵 생활을 하던 원주민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고, 특히 광산 개발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음식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약 1,200여 명의 애보리진이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그 이전까지 에보리진이 군복무를 제한하던 정책을 완화하게 된다. 1920년대에는 에보리진의 인구가 급감하여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으나 1930년대 전염병에 살아남고 면역력을 갖추게 된 원주민들이 다시 출생률이 높아지면서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호주의 에보리진들은 1900년부터 1972년까지 약 70여 년 동안 원주민들의 개화 정책 일환으로 호주 정부와 교회에 의해 정책적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 당했다. 이러한 강제 입양을 당한 당시 에보리진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 부르며, 이들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기도 하여 일부는 법정 소송을 통해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 결정이 내려지는 성과를 얻게 된다.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의 원주민 개화 정책이 이전 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에보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에보리진의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이루어져 태즈메이니아 에보리진 후예들만 약 40여 명이 향후 5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받기로 예정되었다. 2007년 총선 승리로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인 과거사 사죄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 기준 호주의 원주민들은 798,365명으로 호주 인구의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 495,757명은 호주 원주민인 에보리진, 31,407명은 토레스 해협 제도 원주민, 21,206명은 양쪽에 모두 속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오늘날에는 호주의 다른 인종들처럼 뉴 사우스 웨일스 주와 퀸즐랜드 주 등 동부 해안에 가장 많이 거주하며 두 주에서 인구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원주민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노던 테리토리로서, 이곳에서 인구의 약 30%가 원주민이다. 오늘날 원주민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나, 음운, 문법, 어휘 면에서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은 호주 원주민 영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들 상당수는 호주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최하층에 속하여 원주민 집단 내에서는 빈곤과 연관된 여러 사회 문제가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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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진 이야기 : 호주 원주민들과 멜라네시아인들 이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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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필리핀의 공통점 : 공권력의 심각한 부패
- 최근 오성일 글로벌한인병원 원장님이 올리신 캄보디아 비상대책위원회 1차 회의 최종 정리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특히 6번째 항목인 <온라인 범죄 관련자 캄보디아 재입국 금지 강화> 부분에 있어 과연 캄보디아 정부가 이 부분까지 손을 대려 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캄보디아 입국 관련 부분은 전적으로 캄보디아의 주권에 따른 부분이라 한인회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해서 캄보디아 정부나 외교 관련 부서들이 들어줄리 만무하다. 그리고 관련 범죄자 블랙리스트 정보를 캄보디아 정부와 공유한다고 하는데 ‘코리안데스크’ 설치도 거부한 마당에 정말 캄보디아 정부가 블랙리스트 정보를 공유하려 할지도 의구심이 든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필리핀에도 있는데 필리핀에 ‘코리안데스크’가 있지만 숫자가 매우 부족하다. 2025년 8월, 마닐라, 앙헬레스, 울롱가포, 세부, 딸락 등 5개 지역에 총 8개의 코리안 데스크가 공식 출범했지만 데스크 인원은 고작 3명 정도, 데스크가 이전보다 늘어난 만큼 인원이 늘었겠지만 그래봤자 10명 이하일 것이고, 한 5명 정도로 추정된다. 캄보디아 사정을 봤을 때 만약에 된다 해도 3~5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 여행 주의 설정 지역도 범죄 주요 장소인 지역들은 여행 금지로 설정해 놓았고, 나머지는 특별여행제한 지역, 그리고 시아누크빌은 철수권고로 해놓았다. 다행히 완전히 캄보디아 전국을 여행 금지로 설정한 것은 아니라서 이 정도는 그나마 잘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부패한 현지 공권력이다. 범죄 조직이 수시로 상납하고 그 대가로 현지 경찰은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는 것은 다 알려진 얘기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하다. 양국의 공통점은 경찰관의 월급이 적어 상납금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는 것에 있다. 즉, 이는 현지 정부의 개선의지와 관련이 있다. 현지 정부 또한 부패하여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경찰 행정과 업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관심이 없다보니 경찰의 일상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이는 부패로 연결된다. 필리핀의 주요 범죄는 셋업 범죄이지만 캄보디아의 납치도 사실상 필리핀의 셋업 범죄에서 진화된 또 다른 이름의 셋업 범죄다. 현지 경찰이 대대적으로 범죄 단지를 단속했다며 가끔 보도자료를 배포하지만, 이는 보여주기 식이고 잡힌 범죄자들은 보석금만 내면 석방되어 나올 수 있다. 한국에서 데려온 64명 대부분 범죄자들인데 각 범죄단지들의 규모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적어도 3~4,000명이 능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을 다 놓치고 데려온 64명은 꼬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진짜 머리들은 다 놓치고 꼬리들만 잡아서 데려오니 이들이 꼬리 자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같은 범죄를 셋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각 경찰들이 이들 범죄조직의 상층부에게 정보를 흘리고 이들은 사업장을 은밀히 정리한다. 이들이 정리하고 떠난 다음 범죄단지 내부에 들어오면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수사될 자료와 단서들을 찾는 다는 것은 모래에 떨어뜨린 바늘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일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최고위원 요청으로 현지 경찰이 한국인 3명을 구출할 때도 보면 최소 수백명이 머물던 범죄 단지에 고작 한국인 3명만 남아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다. 결국 정보도 별로 없는 자들, 꼬리 자르기에 용이한 자들만 남겨 놓고 도주한 셈이다. 이들을 조사하여 캐네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들 범죄단지를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캄보디아 금융서비스 대기업 후이원(Huione) 그룹의 여러 계열사에 이사로 등재된 훈 토(Hun to)의 경우, 훈 마넷 총리와 사촌 지간이라, 훈 센 가문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들과 연관관계를 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범죄단지도 단속할 때는 범죄자들이 다 빠졌다가 다시 와서 범행하는 식으로 성행할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라오스 국경 지대를 통해 골든 트라이앵글로 들어가 미얀마와 연계해서 같은 방식의 하우스들을 설치하여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캄보디아 뿐 아니라 필리핀도 유사한 부분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있었을 시절, 이와 같은 경찰 부패는 많이 줄어들었었지만 현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 다시 두테르테 대통령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필리핀 경찰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셋업범죄’의 주 원인이다. 경찰은 범죄조직과 적극적으로 결탁해 외국인들의 가방, 호텔방, 사무실 등에 마약, 총기 등을 몰래 넣은 뒤 발견한 척 하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하는 수법에서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고소득 취업 사기, 온라인 도박 등으로 수법이 진화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 봉급을 두배로 올려 방지하고자 했지만 봉봉 마르코스는 이를 원 상태로 돌려놨다. 과거 김미영 팀장 사건도 그러했고, 마약왕 박왕열 사건도 그러했다. 훨씬 이전에는 최세용 일당의 필리핀 5인조 납치 사건도 있었다. 필리핀이든, 캄보디아든, 그들 스스로 내부에서 정화하며 개혁하지 않는 한, 이런 범죄는 근절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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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필리핀의 공통점 : 공권력의 심각한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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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 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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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과 프랑스-태국 전쟁의 전조 현상, 당시 프랑스와 태국의 군사력 비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