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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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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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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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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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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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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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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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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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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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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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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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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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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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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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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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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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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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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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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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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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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 토마호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끼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걸프 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증명한 미사일이다.1969~1972년 사이 미국과 소련이 전략 무기 제한 협정(Strategic Arms Limitation Treaty)을 진행시키면서 그로 인한 탄도탄과 전략 폭격기 전력의 축소를 대비하기 위한 차세대 핵투발 수단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라 할 수 있겠다. 토마호크는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1,500~2,500㎞의 거리를 날아 육지와 해상 목표물을 타격하도록 설계된 순항 미사일이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되었으니 개발 역사는 4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그동안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토마호크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게 음속보다 약간 느린 속도의 아음속 미사일이기에 최첨단 방공 체계가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탐지가 어려우며 비행 중 기동성도 있어 격추가 까다롭다. 토미호크를 요격하려면 충분한 수의 요격 미사일을 갖추고 체계적, 다층적으로 방어 능력 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러시아에도 토마호크와 유사한 형식의 순항 미사일이 존재하는데 이 미사일이 바로 칼리브르(Калибр)다. 타격 용도나 사거리는 토마호크와 비슷하다. 본래 러시아가 수상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음속 대함미사일이라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수상함에서 발사되는 이 미사일은 잠수함에서도 발사된다. 유도 방식은 관성항법과 액티브 레이더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순항속도는 아음속이나 종말단계에서 초음속으로 가속하여 적함을 타격한다. 칼리브르 미사일은 지난 3년 8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시, 잠수함과 함정에서 발사되었었다. 전쟁 초기에 칼리브르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구소련제 S-300 방공 미사일로도 많이 격추되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다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칼리브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칼리브르의 효용도가 떨어진 현재, 주로 탄도미사일과 드론과 연계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타격 성능을 향상시키는 무기 중 하나의 용도로만 쓰여진다. 칼리브르의 속도(마하 0.8)가 토마호크(마하 0.75)보다 약간 빠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토마호크 격추율도 칼리브로 못지 않게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마호크의 최대 변수가 있다. 바로 미사일 자체의 기동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고 방공망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하지만 러시아의 방공군은 소련 시절부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토마호크가 그다지 낯선 미사일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에게는 최신 드론에 대한 대응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련제 S-300 방공 시스템은 토마호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S-300이 칼리브르 미사일을 다수 격추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토마호크 미사일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S-300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로 나타난 S-400 방공시스템이 현재 러시아군 방공 전력의 주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S-400 방공 시스템에게는 토마호크가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보다 더 맞추기 쉬운 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 입장에서 토마호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고, 둘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서부 지역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 주요 군사 목표물 등이 모두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체가 러시아에 위협적이다. 러시아가 토마호크의 모든 타격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서 넓은 영토 곳곳에 다수의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요격 미사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장에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을 단 하나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미사일 하나 당 탄두의 무게가 약 450㎏으로, 에이태큼스(200~300㎏) 미사일의 두 배다. 이어 대형 탄두를 장착하지 못하는 드론과 비교가 될 수없다. 드론은 유류창고나 격납고 같은 목표물 및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가연성 목표물에나 가능하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효과가 매우 극대화 된다. 우크라이나 군도 물론 장거리 드론과 연계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용하면 러시아 후방의 방공 체제의 집중도를 완화시키고,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주로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해군 함정들에게서 발사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발사 장치를 갖춘 함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기에 미국이나 나토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 함정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해당 함정이 흑해에 배치될 경우, 러시아군의 드론이나 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길을 열어줄 지 또한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북해상의 공해에 배치된 항공모함에서 토마호크를 발사할 수 있지만,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격하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토마호크는 전투기나 폭격기가 공중에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서 탈퇴한 이후 이동식 지상 발사대 타이폰(Typhon) 시스템을 2019년에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타이폰 시스템이 지금까지 시험 발사 단계만 진행했었고,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미국이 토마호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때, 지상 발사대와 더불어 타이푼 시스템도 넘겨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입장에서 타이폰 시스템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이 타이폰 시스템은 중국을 상대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자체 타이폰 시스템을 현재 몇 대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이폰의 자체 방어 시스템은 실전에서 적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이폰 시스템은 현재 필리핀에 배치되어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훈련에 정식으로 동원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산된 대수가 얼마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2019년에 시험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현실적으로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타이폰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 적에게 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다. 이에 미 육군은 타이폰 시스템을 전장에서 운용하기에는 매우 거대한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발사관을 수직으로 세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운용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매우 복잡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결국 토마호크가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는 대세를 뒤집지 못한다. 결국 미군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만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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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을 인계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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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 지난 10월 12일 서아프리카의 또 다른 국가 카메룬에서 대선이 있었다. 이 대선에서 지난 11대 대통령이었던 폴 비야(Paul Biya)가 다시 한 번 당선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려 8선이나 대통령을 해먹었고, 현 나이 92세로 세계 최고령 현직 대통령으로 세계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카메룬의 대통령 임기는 7년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등록 제한 규정이 없어 무제한으로 후보 등록이 가능한 셈이다. 총리 재임 중이던 1982년 폴 비야는 대통령의 사임으로 직을 물려받은 이후, 43년째 집권 중이다. 이미 7년 전, 직전 선거에서도 71%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는 야권 후보가 11명이나 난립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거부하고 헌법위원회가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출마가 무산됐다. 사실상 폴 비야에게 대항할 의미 있는 경쟁자가 없어진 셈이다. 폴 비야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선거 유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또 다시 당선되고 난 후, 1933년 2월 생인 그가 사실상 100세까지 현직 대통령 직위를 보장 받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어느 누구라도 사실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지리적으로 사막과 밀림, 고원, 대서양 연안의 해안 지대끼지 다양한 기후 지역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국가 안에 열대지방, 온대지방, 해양성기후에 아열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국가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250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룬에서 100세까지 임기를 거칠 대통령이 출현하는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현 선거 결과 폴 비야 대통령은 승리했고, 내년 202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폴 비야는 1982년 11월 4일에 첫 대통령인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Ahmadou Babatoura Ahidjo, 1924~1989)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의를 발표했기 때문에 총리였던 폴 비야가 1982년 11월 6일에 대통령에 등극했다. 이후 아히조는 1983년 4월에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카메룬은 아프리카 내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가다. 이는 아히조와 비야가 현재까지 카메룬의 국권을 지키며 내실을 든든히 다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1984년 1월 14일에 비야는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서 99.98%라는 경이적인 득표수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이는 북한에서 있을 법한 엄청난 득표율이다. 당연히 부정선거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민주적인 선거기 치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 때부터 폴 비야가 대놓고 권력투쟁에서 아히조를 압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카메룬을 통일시킨 공로를 가진 아히조에 비해 폴 비야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카메룬의 독립에 기여헸단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 폴 비야의 세력이 강해지자 아히조는 위기에 몰려 결국 병을 핑계로 사임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1983년에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아히조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비야는 아히조의 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결국 아히조는 1989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객사한 이후 현재까지도 고국인 카메룬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묻혀 있다. 이후, 1984년 아히조 대통령의 복귀를 노린 쿠데타가 있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1988년 4월 24일에 카메룬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에 집권한 이래,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폴 비야는 다당제와 서구식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저질러 계속 대통령에 재선해 독재자로 변모했고, 2008년에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며 영구 집권을 하게되었다. 이후 나이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통치 능력에서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경제난 속에 각계에서 사임 요구들이 지속되었지만, 비야는 이를 일축하면 독재를 계속했다. 지난 12일에 치뤄진 카메룬 대선은 왕정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집중되어 몰려 있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의 아프리카 정치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30년 이상 집권 중인 현직 대통령의 7명 중 5명이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적도기니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대통령은 현재 나이로 83세로 계속 집권 중이고, 197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이던 숙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뒤 46년 동안 권좌를 수성하고 있으며, 아들을 부통령으로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 Nguesso) 대통령은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해 물러났지만, 반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1997년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현 나이 81세다. 1986년 집권한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두 차례 헌법을 수정하여 3선 제한과 75세 출마 금지 조항을 모두 삭제해 40년 집권 시대를 열었고 현재 나이 81세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내년 1월의 열일 우간다의 대통령 선거에도 재출마를 선언했다.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werki) 대통령은 올해 나이 79세로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일 언급할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또한 앞서 언급한 대통령에 미치지 못하지만 15년을 독재했고, 곧 있을 25일 대선에도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돼, 장기집권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 또한 나이가 83세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 유독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장기 집권자들은 비판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만한 자리와 국가 이권 및 금전적 보상을 두둑히 쥐어주며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 토대를 구축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적 혈연, 그리고 가족 중심의 씨족들과 향토 지역끼리 똘똘 뭉치는 연고주의 등을 이용해 가장 강력한 충성 엘리트 집단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군사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규군과 별개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친위 부대들을 운영해 이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근대 국가 역사는 매우 짧아 완연한 안정세가 필요하다는 점도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서구 열강에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해방자 등으로 포장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심어주고 있다. 이는 북한과도 매우 비슷하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을 독립투사 중 하나로 포장하여 영웅이자 해방자가 되었고, 그가 아니면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민중독재의 정당성을 삼았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후진국과 후진국의 수장들이 독재를 일삼는 정치적 정당성은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2011년 장기 집권 권력자들을 연이어 축출되었던 ‘아랍의 봄’은 사하라 이남으로 번지지 않은 이유가 인종과 종교, 사회 구조들이 이슬람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정치적 민주화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아랍의 봄이 본격화 되던 2011년 UN의 도움으로 수단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남수단의 초대 지도자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 대통령 또한 예정된 선거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참고로 그 또한 올해 나이 74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장기 집권하고 있던 아프리카 권력자들이 간간히 축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가봉에서는 56년 동안 이어졌던 봉고 부자 대통령 시대가 2023년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짐바브웨를 37년 동안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2019)도 2017년 서방이 조작한 색깔혁명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된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었고 수단을 30년 동안 장기 통치한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도 2019년 쿠데타로 추방되어야 했다. 게다가 다른 대륙에 비해 전체 인구 중 젊은 세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가 인터넷과 IT의 발달로 인해 선진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각 국 국민들이 시위를 벌여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하거나 장기 집권이 저지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나 틱톡 같은 영상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예전처럼 철권 통치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도양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지난 주에 벌어진 대선에서 야당 후보 패트릭 에르미니(Patrick Ermini)가 현직 와벨 람칼라완(Wavel Ramkalawan) 대통령을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2024년 마키 살(Macky Sall) 당시 대통령이 예정되어진 대선을 연기하고 장기 집권을 노리는 꼼수를 벌이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아프리카의 갈 길은 멀다. 카메룬의 폴 비야 대통령의 8선째 재선을 보며 카메룬의 미래가 암담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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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희대의 기록을 써내려 가고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 100세까지 임기가 보장된 92세의 현직 대통령의 8선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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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 12세기 초에 편찬된『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최초의 루시 가문이 중심이 된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건국 배경에 대하여 여러 설화와 같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노르만 인과 슬라브 인의 통합 왕조인 류리크 왕조가 남하하였고 남쪽의 키예프를 장악하기까지 많은 통합전쟁이 있었다.『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이른바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했고 대다수의 북방 슬라브 인들과 루시 가문, 슬레비엔 가문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그들만의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설화는 882년 류리크의 한 측근인 올레그가 키예프 지역에서 왕국을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노르만 인들을 초빙해서 통합 왕국을 세웠다는 건국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 당시 ‘루시 가문의 나라(Country family of the Rus)’가 건국된 것은 사실이나 건국설화 중 많은 부분이 각색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로마노프 왕조 시기에 대대적인 사료 재(再)편찬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류리크 왕조와 노르만 인으로 알려진 바랑기아 인들의 설화가 많은 부분에서 각색되어 진다. 당시 12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동슬라브인은 수로가 엮여 있는 요지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공후국들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공후는 6세기 말에 나타난 폴리야닌(Poliyanin) 부족의 한 공후로 알려진 키 쉬체크(Kyi Shchek)와 키 코리브(Kyi Khoryv) 형제들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함께 드네프르 강변에 들어와 성을 축조했고 이들 형제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키의 형제들(Kyi of brothers)” 이라는 뜻의 키예프(Kive)로 전해지고 있다. 동슬라브인들은 아바르 족과 하자르 제국 등 유목민족들과 유목국가들로부터 잦은 공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반면에 다뉴브 강 유역과 비잔틴 제국 가까이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역으로 비잔틴 제국과 발칸 지역을 공격하는 공방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키예프 주변의 동 슬라브인들은 점점 내부 결속력을 다져갔다. 이는 ‘키예프 루시(Kievan Rus)’라는 연맹체의 시작이고 이 연맹체는 9세기 초에 이르러 동슬라브 여러 부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 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 인의 당시 남부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 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훈족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 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잔틴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911년 이후, 올레그는 912년 다시 5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크림 반도의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이고르로 하여금 하자르 제국을 습격하여 하자르의 남동부 영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의 압박에 세력이 약화된 하자르 인들은 칸과 더불어 몇몇 영주들의 지휘 하에 서부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들의 버리고 간 하자르 제국의 영토에는 키예프 공국이 접수하여 관할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하자르 제국의 영역은 대부분 대(大) 모라비아 왕국이나 남부 판노니아 공국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건국되며 슬라브 화되거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자르 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하자르 제국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968년에 보이는데 이후 하자르 족은 판노니아로 밀려들어온 마자르족에게 동화되거나 페체네그, 킵차크 인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2년 크림반도를 공격에 나선 올레그는 북 카프카스 인근까지 육, 해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전에 항복했던 아바르 족과 불가리아 제국의 포로들을 해군을 앞세워 키예프 공국의 남하를 막았다. 이로 인하여 아바르 인들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북 카프카스에는 아바르 족이라 불려지는 민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아바르 인들과 불가리아 포로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13세기부터 몽골 인들의 침입 시기부터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게 된다. 올레그는 바다에서 전투가 익숙하지 않았고 아바르 인과 불가리아 인들의 파상 공세로 인하여 해군으로써 크림반도 상륙에 실패했다. 그러자 육군은 크림반도 입구에까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도륙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약탈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크림반도 입구 지역으로 이주시켜 비잔틴 제국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유도했다. 한편 판노니아 지역의 마자르 족은 키예프 공국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키예프 공국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자 올레그는 913년 초 마자르 족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출정했고 출정 도중 사망했다. 이러한 올레그는 영웅상은 실제 역사와의 연관성은 불명확해보이나 르네 그루쎄 등의 유라시아 유목사학자들은 이러한 올레그에 대해 카프카스의 비잔틴을 공격했던 영웅이라는 북 카프카스 지역의 설화를 일례로 들어 올레그의 영웅상이 실제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Kokovtsov P. S. 는 올레그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을 참칭한 자라고 발표하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와 가까운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Gregoire, H.는 올레그를 슬라브 인이 아닌 다른 민족, 노르만 인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보이며 10세기경 자료들이 상당수가 북유럽과 폴란드의 노르만으로 정의하고 기존의 한자 동맹 출신의 노르만 인들과 분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이들의 언어는 어족부터가 중세 슬라브어와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이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노르만인이 지배층이고 슬라브인이 피지배층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올레그가 913년에 사망하자 루리크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올레그의 손에서 키워진 이고르(Igor)가 후계자가 되었다. 이고르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 문헌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헌과 라틴 문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인생의 절반 정도는 전설적인 올레그에 비하여 이고르는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역사적으로 검증된 보다 실증적인 통치자라고 하겠다. 이고르란 이름은 영어 기준으로 철자가 Igor 로 우크라이나에서는 Igori 라고 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노르만 형식의 이름으로 북유럽의 뛰어난 전사를 Igoru 라고 한다. 이는 아스가르드를 지키던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Tore)를 노르웨이에서 바다의 전사라 하여 Igoru 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알려진 노르웨이 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고르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리며 그를 노르웨이계로 추정했다. 그래서 류리크의 유일한 직계 혈통으로 노르만계가 최초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지위를 승계하게 된 것이다. 이고르는 주변의 투르크계, 슬라브계, 아바르 인을 통합하여 이들 족장의 딸과 연속으로 결혼했다. 이는 혈통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혈족 중심의 왕조를 운영하고자 하는 포석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이고르는 페체네그 등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을 키예프 공국에서 최고위 관료의 칭호 겸 동부 카프카스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칭호인 지기트(Jigit)를 하사했는데 이 지기트는 ‘외로운 늑대’ 혹은 ‘카프카스의 전사’를 뜻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고르는 94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내치를 다지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사신이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나의 기마군대를 기다리라고 하라. 우리의 채찍만 보아도 그들은 땅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그 노예종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미천한 개미처럼 우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은 대(對)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적개감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를 위해 러시아 각 평원의 경우 유목경제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에 대해 소탕하면서 내부의 위협을 방지했는데 하자르 제국의 잔재 세력이 완전히 멸망한 연도가 각 학계의 연구에 따라 갈리고 있다. 특히 헝가리 학계에서는 970년대로 잡는 반면 러시아 자료는 930년대 초반을 소멸 연대로 잡고 있다. 이고르는 일부 정착세력과 옛 로마인들로부터 농업을 장려했다. 특히 서프랑크 제국의 사절들은 농업적인 부분에 있어 생산력 증대에 관한 기술을 전수해 줌으로 인하여 키예프 공국의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동프랑크 제국의 사절에게는 라틴어를 보급 받음으로 인하여 공식 문서를 라틴어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라틴어 문서들은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들로부터 키릴문자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개종을 신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락하여 로마에서 보내진 비토리오(Vitorio)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고르가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카톨릭 관할구가 생성되었고 이후 헝가리 왕국이 세워지면서 헝가리 카톨릭 관할구에 합병된다. 그리고 이고르는 판노니아를 장악한 마자르 족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르 족과 동맹에 이어 발칸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왕국과 연달아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발칸 지역과 마자르의 문화 받아들였고 반면 카프카스 지방과 비잔틴 제국은 자연스럽게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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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기원과 키예프 루스(대공국), 올레그와 이고르 대공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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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세기의 두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나?
-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이 가까스로 성사된 이후, 이번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젤렌스키와 연속으로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한 뒤, 토마호크 장거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결정에 앞서 푸틴 대통령과 소통하여 결정할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두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었고 2시간 30분 동안 두 정치인은 통화를 통해 대화가 매우 유익했음을 나란히 언급했다. 그리고 내주 고위급 회의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고 제의했으며 이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대대적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 소셜에 기재하기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진행될 양국 간의 교역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수 세기 동안의 염원이었던 중동에서 위대한 평화적 해결에 대해 축하를 전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중동에서의 성공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물론 정상회담으로 가기 전에 거쳐야 할 부분은 양국간에 고위급 회의에 있다. 정상회담에 앞서 조율할 사전 작업으로 보면 된다. 트럼프는 이와 같은 사전 고위급 회의에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미국 측 대표단과 함깨 참석할 것이라 설명했다. 아직 회의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기에 이는 더 두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데 이어 어제는 백악관에서 젤렌스키와 만날 예정에 있다. 그는 젤렌스키와의 회담 소식을 확인하며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이어 푸틴 대통령과 나눈 대화,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젤렌스키와 논의하고자 했다. 또한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평화 정착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으며, 전쟁 종식은 미국과 러시아 간의 협력에 대해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줄 것임을 확인해줬다.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만나기 전에 푸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푸틴 대통령이 토마호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트럼프의 의중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나섰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트럼프는 이날 전화 통화에서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졌는지의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유리 우샤코프 보좌관은 이날 기자들에게 러시아 측에서 주도한 두 정상의 대화가 매우 실질적이며 솔직했고, 또한 매우 비밀스러웠다고 브리핑했다. 그는 트럼프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면서 두 정상 간의 만남에 대한 준비를 즉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우샤코프 보좌관의 말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주로 논의되었으며,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를 자세히 전달했다고 했다. 그가 현 상황을 두고 러시아가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고, 키예프 정권은 테러 수단에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으로 볼 때, 정확한 전황을 미국에 전달하고,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이 전황을 바꾸기는 것이 아니라 러-미 관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 노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 경고한 것으로 본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트럼프가 17일 젤렌스키와의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 때 제기한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통화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의 특사로 활동하는 키릴 드미트리예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 직접투자기금(Фонд прямых инвестиций) 대표는 푸틴과 트럼프의 통화가 전 세계에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이라 평가하며, 다음 단계를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드미트리예프는 유럽의 강경한 세력들이 평화 프로세스를 좌절시키려 하고 있지만,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화, 평화, 협력이 승리할 것이라 했다. 트럼프의 공개 내용만으로 볼 때 양국 정상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건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는지, 혹은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 문제가 논의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러시아의 매체들은 양국의 정상이 이번 통화로 인해 전쟁 종식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분석했다. 우선 종전의 돌파구는 푸틴 대통령이 키예프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건들을 철회하는 것이고, 즉각 휴전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가 푸틴의 방식대로 전쟁 종식의 방안을 젤렌스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강요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 둘 중의 하나라 보면 된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것도 아니라면, 결국 트럼프의 긍정적인 메시지는 다분히 전략적,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트럼프는 급한 대로 토마호크의 우크라이나 제공 문제를 주요 관심사에서 제외하여 미국과 러시아 간의 급격히 팽창하는 위기 의식을 제어할 수 있다. 러시아와의 협상이 진전되고 있음을 주장하며,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토마호크 논의를 부다페스트 정상회담 이후로 슬쩍 없는 척 넘길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부다페스트 정상회담 계획은 우크라이나와 EU에 주는 심리적인 압박이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트럼프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대러 강경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늘 친러시아 성향을 보여왔다. 부다페스트에서 러-미 회담이 열린다는 것은 트럼프가 러시아 측으로 기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3일 전만 해도 양국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예정된 백악관 회담에 대해 직접 브리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반격 계획에 대해 논의할 것이며 우리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한 고위 관리는 미국의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진짜 공세에 나설 수도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어떤 무기를 확보하고 계획이 승인되었는지에 달려 있다(Україна може розпочати справжній наступ, і це залежить від того, яку зброю ми отримаємо від Сполучених Штатів і чи буде схвалено цей план)."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반격할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전혀 없었다고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에 그와 같은 반격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이 있었다면 쿠르스크 작전이나 그보다 앞선 하리코프 반격 작전처럼 극비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첫 해인 2022년 가을, 기습적으로 하리코프 탈환 작전을 감행하여 러시아가 장악한 광대한 땅을 수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작전을 극비로 추진한 것이 성공한 주요 요인 중에 하나였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2023년 여름,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공격 정보를 사전에 유출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당국도 자주 이 문제를 반격 작전이 실패한 이유로 제기하고 있다. 당시 주요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작전 계획과 작전 루트를 자세히 보도했고, 이를 파악한 러시아는 3중, 4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진정한 반격이 있다면 이런 내용은 보도하지 않은게 좋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군의 공세 작전에 대해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밝힌 것은 실제로 이를 계획했다기보다 러시아에 대한 전략적 압박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시기적으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제공하는 시점과 비슷하다. 미국은 이를 통해 러시아가 종전 조건을 완화하고 협상에 나서는 것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와 같은 완화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미국과 러시아의 고위급 회담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도출해내고, 부다페스트 정상회담에서 이를 확인하면서 종전의 돌파구를 찾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러시아는 기존에 내세운 협상안을 꾸준히 고수할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목적들인데 이를 완화한다는 것은 전쟁의 목적과 명분,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푸틴 대통령은 정치적인 영향력이 약해지고, 현재 공고히 된 푸틴 대통령의 내부 권력이 흔들릴 수 있다. 전쟁은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마무리 짓는 것은 그보다 10배 이상 더 어렵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 협상에 나서는 이유는 이를 통해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서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이다.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과 민중의 희생, 러시아라고 하는 다극화 내 한 축을 맡고 있는 강대국의 위상과 내실 등을 뛰어넘는 내용을 들어보기는 할 것이다. 그 대신 목표 달성까지 전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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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세기의 두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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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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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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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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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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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 몽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4년 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 된 나라가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여 독립했으며, 그 후 러시아 혁명시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몽골의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처이발상 시기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불교 승려 등은 숙청되어 사라졌다. 공산정권은 몽골의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도입시킴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외몽골은 독립시키고,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해 몽골족은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후 모택동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의 공산 정권은 친(親) 소련주의를 고수하여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흐후 1984년 8월, 26년 동안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 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가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적인 노선을 견지했고, 이는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몽골의 개혁-개방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로부터 출발한다. 1963년 생인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 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알게 되었다. 엘벡도르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뜨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엘벡도르지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 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엘벡도르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으게 된다. 1989년 11월 28일,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 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뜨의 개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Одоо Монгол Улс Перестройка-г зоригтойгоор хөөцөлдөх цаг болжээ. Залуучуудын хийх ёстой зүйл бол үгээр дэмжихээс гадна үйлдлээр дэмжих явдал юм. Бид хүчээ нэгтгэж чадвал зорилгодоо хүрч чадна. Бидний зорилго бол ардчилал, Гласностын нээлттэй сүнс юм. Энэ зорилгоо хэрэгжүүлэхийн тулд ард түмний сайн дурын байгууллага бий болгох хэрэгтэй.)” 오랜 공산 치하에 젖어온 몽골 사회에서 엘벡도르지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워진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 명의 동지가 찾아왔으며,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학습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反) 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붙였다. 마침내 1989년 12월 10일 아침, 그들은 수도 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엘벡도르지는 그 자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 정권 68년만에 생긴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 선수 가리 까스빠로브(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Советскому Союзу следовало продать Монголию Китаю, чтобы преодолеть свои экономические трудности).”고 말했다. 이 체스 선수의 발언은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견해는 물론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의 발단이 된다. 새해가 되어 1990년 1월 2일,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 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이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으로 바트믕흐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월 14일,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월 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칭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침략자로써 아주 치를 떠는 대상이었기에 소비에트 치하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칭기즈칸 탄생 600주년인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칭기즈칸을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反)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Хүний нүүртэй социализм)"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인 몽골인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자인 비치크 문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였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도 재평가하였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별을 지워버린 국기를 흔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시위대는 행진, 데모, 단식투쟁, 교사 파업 및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위대는 몽골 도심, 농촌 전반에서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불러나갔다. 이후 1월과 2월 매주마다 주말 시위가 열렸으며, 수도 울란바토르 뿐 아니라 주도 에르데네트와 다르항, 후브스굴 주 무룽에도 열리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매일 시위를 열자 1990년 3월 4일 몽골 민주 연합(MDU) 및 기타 3개 개혁 조직은 회동을 열어 정부의 회담 참석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시위대는 10만 명까지 불어났다. 1990년 3월 7일 민주연합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공산당의 사임을 촉구하며 10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뒤를 이어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은 시민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3월 11일 정부-시민단체 회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 의장이었던 잠빙 바트뭉흐는 1990년 3월 9일 정치국을 해산하고 의장에 사임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 내에서는 시위대 진압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여 잠빙 바트뭉흐에게 작전 명령을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엄중하게 다루라고 말했다. 이처럼 몽골 민주화 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 날 집회에는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3월 9일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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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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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 미국과 서방은 중동과 아랍을 달래며 끌어 안으려 하는게 아니라 압력을 넣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은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통해 달래어 끌어 안으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제는 중동과 아랍이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의 압력에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미국과 서방이 중동을 폭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스라엘의 과도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의 행태가 오히려 반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트럼프는 가자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기에 이 또한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트럼프 체제에서만 세 번째 휴전이기 때문이다. 중동과 서방의 분쟁은 20세기 이전엔 치열한 종교적 대립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종교적 대립에 이념적 대립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민족적 대립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아랍 종파와 이란계 종파간의 종파대립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편승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하나로 뭉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면 분명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참혹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석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동맹을 맺었어도 서로를 견제했고 신뢰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반미, 반서방, 반이스라엘을 표방했지만 표면적인 것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정반대였다. 에르도안은 표면적으로만 서방과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떠들었지 서방과 중동 사이에서 자국의 실익만을 추구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마찬가지다. 아랍연맹, 동맹이라는 거창하게 선전했지만 그들 또한 가자지구에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그 사이에서 얻을 실익이 무엇인지만 계산했다. 결국 가자를 도운 국가는 이집트 뿐이었다. 하마스는 시리아의 지원이 끊기자 몰래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3년 전에 걸친 전쟁에서 잘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표면적으로 가자 지구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을 거부하고 하마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땅굴을 이용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하마스는 이집트에서 발원한 무슬림형제단의 형제나 마찬가지다.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압제에 반항하는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아흐메드 야신(Ahmed Yassin)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당 및 조직으로 창당한 것이 하마스(Hamas)이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무슬림형제단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이집트는 가자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서로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이 접해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항공은 이집트 아리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에 대비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쌓인 난민 수용 시설을 지었고, 이집트 공군이 가자 지구 상공에서 구호물품을 투하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가자 지구의 환자 수십명이 이집트로 이송되었으며 이집트 공군은 가자지구 북부에 구호품 공중투하 작전을 지속했다. 이집트가 봉쇄 조치를 했음에도 가자 지구를 떠나 이집트에 정착한 팔레스타인 난민이 11만 5,000명을 넘었다. 결국 가자를 도와준 것은 이집트 하나 뿐이었던 셈이다. 앞으로도 가자 지구를 복구하거나 난민들을 보살필 국가는 이집트 하나 뿐 일 것으로 본다. 지난 1948년 영국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기나긴 숙명적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여태까지 테러 전쟁을 분석해본적이 있는데 대개 전력이 열세인 국가나 민족이 할 수 있는 최선, 최후의 저항이다. 물론 테러는 반인륜적 범죄로 용서받을 행위는 아니지만 왜 테러가 발생하는지 원인에 대해 물어보고 질문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3자의 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3자는 그냥 매체에서 보여주는 행위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선악(善惡)을 판단한다.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테러국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어서다. 그러면서 모든 중동 국가들과 아랍인들, 무슬림들은 테러 국가,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왜곡하여 해석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멀리 바다 건너 캄보디아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똑같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제관은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무지하다. 트럼프가 성사시킨 세 번째 휴전 조약.. 이게 얼마나 갈까? 영원히 종식되는 전쟁이 아니기에 언제든 다시 터질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여기에서 멈출 마음이 없다. 이전처럼 가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자를 도우려하는 국가들의 함선 또한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 그 고립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하마스 또한 어떠한 일을 벌이긴 할 것이다. 너무 강한 조치는 그 압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저항을 부르게 되어 있다.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어떠한 사물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 또한 살기 위해 과도한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본능과 심리를 갖고 있으며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나타나는 수많은 저항 운동과 반란, 민란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휴전 조약은 이스라엘이 가자에 진입하려 한다는 뉴스가 나온지 1~2개월만에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 시티 점령에도 실패했고 결국 가자 전체를 이스라엘 지상군이 장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휴전은 미국이 가자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체면을 세워주고, 가자에는 복구와 휴식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내세운 평화 안 중에 이제 한 쳅터가 겨우 정리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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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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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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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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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 세계의 광물 경제는 중동의 석유,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국의 희토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자원들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은 석유 파동 당시, 자원 무기화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중동의 오일쇼크는 당시 등소평이 이를 지켜보면서 자원 무기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개혁 개방을 한 이래 희토류 개발을 적극 장려하게 된다. 이는 풍부한 매장량에 따른 채굴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제 기술과 인프라까지 갖추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이는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데 포함한 정제 설비 및 전력, 수송 인프라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자 정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희토류가 주목받는 이유는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자성적, 발광적 특징과 함께 탁월한 방사선 차폐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계 희토류 생산은 중국이 거의 90% 이상 독점하고 있는데 중국 광산에서 채굴 뿐만 아니라 이를 제품으로 만드는 정제 과정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중국은 1970년대 이후 희토류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거대 경제를 이루고 정제 기술도 이미 미국을 추월해버렸다. 희토류 생산하고 정제하는데 있어 기술 인력과 자본력에서도 다른 나라를 크게 앞서가고 있어서 앞으로도 중국의 희토류 시장 독점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진다. 미국 등이 중국산 희토류 자원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미국 본토의 희토류 광산에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광산에서 채굴된 희토류도 미국 본토의 정제 시설은이 매우 낡고 규모도 적은데다 기술 인력도 부족해 경제성이 떨어져 제품으로 정제는 거의 중국에 위탁해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한동안 생산을 하지 않다 보니 인력이나 기술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뒤쳐진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타국의 희토류 광산 개발도 중국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독점이 단지 중국 광산 만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 채굴, 정제, 유통 등 희토류 산업의 전반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채굴이 중단된 폐광산까지 국가가 직접 재개발에 나서며 자국 내 희토류 공급망을 만들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내 인프라에 있다. 희토류 관련 연구 인력들을 하찮게 여기고 지원금액도 다른 자원에 비해 적게 책정했다. 그 결과, 미국 내 희토류 생산 및 가공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희토류의 수출량을 자유자제로 조이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 때문에 희토류 가격이 다시 폭등하거나 폭락하여 세계 국가들의 애를 먹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희토류 매장량과 정제술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지금 같은 추세로 희토류를 소비해도 적어도 고갈될 때까지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기업들은 대체 소재 연구에 들어갔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고 있지만 이 또한 완전히 성공할지도 의문이다. 전기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1.5 kg의 희토류가 소요되는데, 토요타는 베트남 등 희토류 대체 생산지 확보에 나서는 한편 희토류를 쓰지 않는 신형 배터리를 개발했다. 그러나 베터리의 성능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 full 충전이 오래 걸리고, 베터리는 빨리 닳아 없어지는 사태가 계속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내구성 또한 문제가 되었다. 열이 빨리 받고, 그로 인해 화재 사건 또한 잦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신형 베터리를 전량 회수해 희토류 없이 재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원래 미국은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었지만 환경 오염 문제 때문에 다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희토류 자원 무기화에 맞서 다시 자국의 희토류를 채굴하며 대항하려 하고 있지만 희토류 채굴은 쉽지 않다. 희토류는 채굴 및 가공 과정에서 극악한 환경 오염과 심각한 산업 재해를 야기하고 있다. 정화 비용이나 노동자에 대한 복지 및 보상 등 기업이 사회적, 윤리적인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전기 및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 곳,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공산당 1당 독재의 통제력으로 인해 장기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일관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서 최상이고, 환경 규제 또한 느슨하다. 희토류를 정제하려면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또한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들과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고 있다. 그 이유로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도 발생하는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며 이를 처리하는 인원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하고, 독성 화학물에 대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인명이나 환경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중공이라는 나라의 특성, 이로 인한 희토류 정제는 중진국급 국가 중 가장 땅이 넓고, 환경 존중,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는 중공 만이 오로지 돈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희토류 채굴 및 정제를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환경 단체와 인권 단체들의 압박이 강해 감히 희토류를 정제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더라도 억제하기 매우 쉬운 체제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밀어 붙일 수 있었다. 여기에 아주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인프라, 무엇보다 희토류를 소비하는 산업인 전자와 방산, 배터리 등이 꾸준히 개발되고 있는 한, 희토류는 채굴과 정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희토류 채굴은 인건비가 저렴해야 하고 극심한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을 동반하게 되어 있기에 미국은 무언가 획기적인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희토류 관련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고, 채굴은 미국에서 한다할지라도 정제는 중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미 지질 조사국(USGS)에 따르면 희토류 글로벌 생산량(17만 t)의 70.6%(12만 톤)가 중국산이라고 집계했다. 심지어 미국이 수입한 희토류의 80%가 중국산일 정도로 미국은 희토류에 관해서는 전량 중국에 의지하고 있다. 러시아, 베트남,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도하면서 희토류 시장에 새로 진입했다. 특히 EU는 희토류의 98%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인데, 2023년 3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에 꼭 필요한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의 65% 이상을 한 나라에서 수입 못 하게 하는 핵심 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중국으로부터의 희토류 수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쉽지 않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희토류를 중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하고 있다. 한국 또한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 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 간다. 중국이 싫어 중국과 단절해야 한다면 당장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 자동차 등을 쓸 수 없게 된다. 혐중론자들이 좋아하는 유튜브나 SNS, 릴스 또한 중국산 희토류가 없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데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국내 자동차 업계는 희토류인 ‘디스프로슘’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디스프로슘은 온, 습도에 약해 장기 보관이 어려운 품목으로 재고가 많지 않은데, 재고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 한다. 디스프로슘은 올해 4월, 중국이 자원무기화로 인해 수출을 통제한 7종의 희토류 가운데 하나로, 반영구적으로 자력을 보유한 ‘영구자석’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중국이 거의 전량 생산하는 원료로, 의료 장비부터 전기차 모터, 풍력발전기 터빈 등 자석이 필요한 곳에 모두 쓰인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전기차 모두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 중이다. 중국은 한국 정부가 지난 2023년 지정한 ‘핵심 광물 33종’ 가운데 30종을 핵심 광물이나, 수출 통제 품목으로 지정한 상태라 중국의 움직임이 한국 산업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은 수출액의 24.2%, 이차전지는 10.8%가 감소하는 등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중 혐중해봤자 우리한테만 손해다. 전자 부품, 자동차 부품, 컴퓨터(노트북, 스마트폰 포함) 부품의 기본 원료는 희토류고, 중국이 이걸 무기 삼는다면 대한민국은 방법이 없다. 미국도 중국 희토류 때문에 달리 대안이 없어 난리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어디서 희토류를 구입해 정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처럼 인권 유린, 환경 파괴 등등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매우 유별난 국가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도 꼼짝 못하는데 한국이라고 뭐 다르나? 필자 또한 혐중론자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가야 한다. 전 세계 주력 산업이 점차 친환경으로 갈수록 핵심 광물의 수요 역시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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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