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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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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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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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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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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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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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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와 공화정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
    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는 실질적으로 시민들 대표에 가까웠던 많은 귀족들이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고 여기에 성공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권을 능가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도 여기에 해당했고 아테네에서도 솔론과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로마 국왕의 존재감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지게 되었다.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 정권을 거쳐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 정권이 나타났고 결국 B.C 500년 정도 되었을 때 로마는 왕정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스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정이 형성되었다가 귀족들도 권력을 잃게 되었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 있지만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특유의 파트로누스(Patronus (후원자)의 어원), 클리엔테스(Clientes, 영어 : Client (고객)의 어원)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누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 파트로누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누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떠한 파트로누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누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누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도 지역적 특성이 반드시 정치 체제를 결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로 인해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이 비싼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이후,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 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제외된 로마군은 켈트족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에는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평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 볼 때 절대적이지 않았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 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을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들은 호민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원로원, 집정관, 군단 사령관의 지위에 올라 유력 가문이 되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새로 함께하는 자”라는 의미의 노빌리스(Nobili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Nobl)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귀족은 파트리키(Patrici), 평민은 블레브스(Blebs), 기사계급은 에퀴테스(Eqites)라 불린다. 로마는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에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로마의 지리적인 특성에도 기인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에 있었다. 여기에 테베레 강(Tiberis)까지 끼고 있어 이탈리아를 가로 지를 때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 근처를 거쳐 가야 했다.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해서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나 동맹 제의에 노출되었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거기에 구성원들 대다수가 특정 신앙, 부족, 민족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의 문화적 영향과 라틴 인들과의 접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주변국들에게 배타적이었다. 처음부터 가난한 농촌의 로마였던 시기의 레물루스 왕 시절부터 주변 마을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킴으로서 국가로써 성장했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해 온 경험으로 인해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해결했으니 지리적 요인과 정치 및 사회적인 문제까지 겹쳐 로마인들은 전투 민족으로써 성장했고, 이것은 각 소국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을 벌이는 것이 흔했던 당시 기준으로도 무언가 특이했던 것은 분명했다. 상무 정신과 대단히 보수적인 가부장 문화는 오랜 기간 로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특징을 보통 개방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로마 왕국 시절부터 실제로 로마인들의 대외 정책은 배타성과 개방성이 혼재된 것이었다. 우선 적이 되면 상대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복속 될 때까지 끈질기게 전쟁을 벌이면서 거의 사생결단의 방식으로 나왔다. 우선 로마 사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주적이었던 베이(Bey), 삼니움(Samnium), 볼스키(Bolski) 등을 비롯한 부족국가들과 해마다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교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약탈 및 전쟁을 벌였던 것이 로마인이었다. 물론 로마의 기록들은 상대 국가나 부족들이 로마를 자주 약탈하였으니 로마인들의 전쟁은 타당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로마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일방적인 대외정책을 펼쳤고, 상대 이익에 맞는 적절한 유화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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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3
  • 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1995년 카타르 쿠데타는 1995년 6월 27일 카타르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써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가 타니 가문의 지지 하에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프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5년 쿠데타는 1992년부터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에게 주었던 일부 권한을 아버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사니가 다시 회복하려 했다. 이는 1995년 초부터 부자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1972년 2월 쿠데타를 통해 전 국왕이었던 하마드 빈 알리 알 타니가 이란으로 순방을 간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카타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은 근대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1977년 5월에는 차남이었던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공석이었던 왕세자 자리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칼리파 국왕이 1990년대 이후 차남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넘겨주던 권력 이양을 중지하고 전 석유 및 재무 장관이자 1992년에 하마드 빈 칼리파의 영향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던 압델 라지즈 빈 칼리파 알 타니(Abdelaziz bin Khalifa Al Thani)에게 권력을 다시 넘겨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의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위원회는 슈라 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하마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헌법에 따른 강제적인 왕위 이앙 절차를 마쳤다. 또한 하마드 왕세자는 쿠데타 직후 짧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오늘 일어난 일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단행되어야만 했던 일이고 나는 이를 해야만 했다(What happened today is not pleasant, but it had to happen and I had to do it.)”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해외 외교관들은 쿠데타가 형제 간 왕위계승권 문제 및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영향이라 분석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자신의 아들을 “멍청한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계속해서 카타르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국 카타르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아들 하마드 빈 칼리파는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려고 미국의 로펌회사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1996년 2월에는 전 경제부 장관이었던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의 주도 하에 전 국왕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복권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역으로 시도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미수에 그쳐 실패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같은 전통적인 아랍 지역의 카타르 동맹국들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강제로 퇴위당한 칼리파 빈 하마드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가 2004년 고국인 카타르로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제한 및 여러 가지 검열 정책을 폐지했으며, 여성 활동을 일부 허용했다. 1996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은 1996년 2월 14일 카타르에서 발생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에 대한 폐위 시도이자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나타난다. 카타르 정부는 이 쿠데타 미수를 “아부 알리 작전(Operation Abu Ali)”이라 부르고 있다. 2017~2018년에 발발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언론사인 알 자지라는 1996년 당시 카타르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바레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된다. 1995년 6월 27일,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는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이미르에 스스로 등극하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이 스위스 제네바로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무혈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 격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 위원회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는데 성공한다. 하마드 빈 칼리파의 통치 첫 해에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한 아버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걸프 협력 회의(GCC)가 새로 왕위에 등극한 하마드 빈 킬리파와 자주 충돌하는 것을 이용하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연달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퇴위한 전 아미르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알 타니 가문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역으로 자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 카타르는 1996년의 쿠데타 미수 사태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등 해외 각국의 지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으며 19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일부 익명을 요구한 서방 외교관은 쿠데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2018년에는 2017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알 자지라가 다큐멘터리 보도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며 정식으로 보도했다. 이와 같은 알 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 음모의 핵심이 무장 괴한들이 카타르 왕궁에 진입하여 하마드 빈 칼리파를 납치해 알라이얀 도로에 있는 자택에 연금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납치 작전은 2월 16일 오전 5시로 예정되었으나 발각될 가능성 때문에 급하게 작전 시기를 2월 14일로 앞당겼다. 카타르 정보부에 따르면 이러한 작전 변경은 당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Muhammad bin Zayed Al Nahyan)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정보부는 카타르의 군사 시설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실행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타르 정부는 2월 20일 쿠데타 관련 주동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알 자지라에서는 전 프랑스 육군 사령관인 폴 바릴(Paul Baril)이 아랍에미리트에서 카타르 쿠데타 작전 시행을 요청받아 무기를 받고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외무부 장관인 안와르 가르가시(Anwar Gargash)는 알 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폴 바릴은 아부다비를 방문했던 전 국왕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의 보안요원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내용은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 아랍에미리트라는 선동적인 내용이라 비난했다. 쿠데타의 주동자로 아미르의 사촌이자 전 경제부 장관인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가 지목되었다. 수 년 동안의 망명 생활 끝에 하마드 빈 자심은 1999년 7월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2월, 하마드 빈 자심을 포함한 32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은 내란 음모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에 연루된 85명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석한 피고인들은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나아가 1997년 자국에서 열린 아라비아 경제 회의에서 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이스라엘과 수교국인 이집트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비난했다. 1998년에는 왕이 절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게 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외국으로 유학을 나간 여성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회의도 가지고, 여성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여성 정치가 활동 및 언론 활동까지 전면 허용하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3
  • 바레인의 독립과 헌법 제정의 과정에서 민주화 시기까지
    바레인은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해 온 알 칼리파 가문이 국가의 기초를 만든 후 1971년 영국군의 수에즈 동쪽 지역의 철군과 더불어 족장이었던 이사 이븐 술만 알 칼리파(Isa Ibn Sulman Al Khalifa)의 주도로 독립하면서 왕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바레인 군주에 대한 칭호는 1783~1971년에는 바레인 하킴(Hakim of Bahrain), 독립 이후에는 에미르(Emir)였으며, 2002년 2월 수정 헌법에 따라 국왕(King of Bahrain)으로 바뀌었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바레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원이 장관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레인 헌법에서 30명의 의원은 성인 남자로 제한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은 당연직 의원이 된다. 이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12일 국민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5년에 1973년에 만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1975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으로 통치하였다. 현재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원제 국회를 포함하는 1973년 헌법으로 복귀를 요구한다. 1973년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바레인 최초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30명의 국민의회(The National Assembly of Bahrain) 의원들이 20개의 선거 구역에서 비밀투표, 과반수 적용 안 되는 단순 다수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참정권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이 국민의회의 당연직 구성원들이 됨으로 인해 전체 의원의 수는 44명이 되었다. 24,883명의 등록된 유권자 가운데 19,509명이 투표함으로 인해, 투표율은 78.4%였다. 당시 정당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2개의 강력한 정치 블록인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이 출현하였다. 인민 블록(People's Bloc)을 보자면 도시 지역에서 8명이 선출되었다. 인민 블록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포괄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1965년에 제정된 보안 조치 폐지를 주장하면서, 좌파적이고 아라비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바레인 인민해방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Bahrain, PFLB, 1974~2001)과 바쓰 운동으로 알려진 바레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Bahrain, NLFB)과 제휴하였다. 인민 블록은 알리 카심 라베아(Ali Qasim Rabea), 압둘 하디 칼라프(Abdulhadi Khalaf) 등을 포함하였다. 압둘 라흐만 알 누아이미를 비롯한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 간부들이 점령지인 아라비아 걸프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 1968-1974) 창설에 참가하였고, 1974년 PFLOAG 바레인 부문을 바레인 인민해방전선(PFLB)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다른 하나는 6명의 시아파로 구성된 ‘종교 블록’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시골 선거구 출신으로 교사들과 종교법정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교 블록’은 셰이크 이사 카심(Sheikh Isa Qassim), 셰이크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Abdul Amir al-Jamri),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Sheikh Abdulla Al-Madani), 셰이크 압바스 알 라이스(Sheikh Abbas Al-Rayes), 술래이만 알 무바라크(Suleiman Al-Mubarak), 하산 알 무타우아즈(Hassan Al-Motawwaj)로 구성되었다. 당시 가장 탁월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셰이크 만수르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Mansour Abdul Amir al-Jamri, 1938~2006)가 바레인의 종교 블록을 이끌면서, 817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이 블록은 노동 조합을 지지하고, 음주를 금지하였으며 학교 내에서 남녀 분리, 남성 의사들의 여성 진료 금지 등 전통적인 관습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셰이크 이사 카심이 이 선거에서 1,079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15개 선거구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사 카심은 현재 알 와파크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또 1967년까지 좌파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가 이 ‘종교 블록’에 들어와 771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이념적인 경계가 완고하게 확고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소속으로 알려졌다. 무소속 의원은 정부와 두 블록들,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 사이에서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당시 바레인 노동 운동 지도자들은 수많은 파업을 조직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4년 알 칼리파 정부는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을 제안하였다. 당시 국민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4년 아미르 령(The Amiri decree No. 4 / 1974)으로 1975년 8월 26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으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민 의회를 다시 소집하거나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고, 국가 보안법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이 법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바레인에서 시행되었으며, 정부에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최대 3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국가보안 법정(State Security Courts)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임의적인 체포나 고문을 허용하였다. 인권단체들(Human Rights Watch and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25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위반을 용이하게 하였다. 2001년 하마드 국왕은 이 법을 폐기하고, 헌법을 회복시켰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dam bin Isa al Khalifah) 국왕은 1950년 1월 바레인 남부 지역의 리파(Riffa)에서 선왕인 이사 이븐 살만 알 칼리파(Isa ibn Salman Al Khalifa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99년 3월 38년 동안 통치하였던 이븐 알 칼리파 왕이 타계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왕비 샤이카 사비카 빈트 이브라힘 알 칼리파(Shaikha Sabika bint Ibrahim Al Khalifa)와의 사이에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Al Khalifa) 등 6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파이잘 이븐 하마드 알 칼리파(Faisal ibn Hamad Al Khalifah) 왕자가 2006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의 현 왕실로 1766년 창설되었고 1783년부터 바레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신도가 대부분인 자국민들과 다르게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이러한 종파로 인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바니 우툽(Bani Utub) 연맹의 일원으로, 네지드 사막에 거주하다 17세기 사바흐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이주하게 된다. 다만 얼마 후,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카타르의 북부 주바이라로 이주했다가, 18세기 친척인 사바 왕조의 도움으로 잔드 왕조 치하에 있던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 후로 알 칼리파 가문은 현재까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다. 19세기 오만 제국 및 사우드 왕조가 바레인을 장악하여 축출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과 보호 협정을 맺으며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독립 후,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친선을 맺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의 부친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영국의 보호국을 탈피하여 독립국이 된 1971년에 기존의 호칭인 하킴을 버리고 아미르로 호칭을 변경했다. 하마드 국왕은 2002년 왕이라는 뜻의 말리크로 호칭을 높였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 Khalifa)는 1950년 1월 28일에 출생했으며 현재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그는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1년에 독립한 바레인의 첫 아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아미르 제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아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하마드 국왕은 2020년 말 오랫동안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삼촌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 군주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는 전제 군주이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 및 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같은 시위는 1999년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 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아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고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면서 바레인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과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때 바레인 군경들은 실탄을 발포하여 수도 마나마에 있던 진주 광장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 광장은 폐허로 변하면서 민주화 항쟁은 실패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 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가장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 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민주 항쟁의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광장과 중앙의 진주 탑을 철폐하고, 그 곳에서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시위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 진주 광장은 완전히 말살되어 2017년 알 파루크 교차로로 개조되었고 지금은 광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국왕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000만원)로 대폭 올렸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의 왕실 가문들은 친미 독재에 적응된 인물들이 많았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독재자를 방조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라비아 국가들의 수장들이 그러하듯이 하마드는 억압적인 독재를 자행하면서도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 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 식 반 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리비아를 참조하여 파악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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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2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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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02
  •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
    대선에서 TV 토론이 도입된 것은 후보자들의 철학·정책·가치관·사고력 등을 유권자들이 TV 생방송을 통해 직접 비교·평가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투표로 연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TV 토론 없이 유권자들은 어떤 후보가 과연 대통령의 자격에 적합한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TV 토론을 통해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에게 각자의 정치적 소신과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유권자들의 표심을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그 때문에 대선에서 각각의 후보자들은 TV 토론에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다소 초반에 밀리더라도, TV 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지지율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 TV 토론은 경제 분야, 사회 분야, 정치 분야로 나누어서 모두 3차에 걸쳐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토론 수준은 TV 토론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매우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TV 토론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번 TV 토론은 유권자들의 표심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으로 선두 주자의 지지율을 뒤에 각각의 주자로 서로 갖고 오려는 의도에 묻혀 버렸다. 이러다 보니 각각의 후보들이 판세를 엎을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유권자들의 관심도에 비해 그저 그런 정도에서 TV 토론이 끝나고 말았다. 한 후보는 상대방이 서로 합세해서 공세를 펼치니까 다소 방어적이거나 조심하면서 자세를 낮추는 태도를 보였다. 또 다른 후보는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최소한의 펙트 체크도 하지 않은 채 토론에 참여해서 주어진 원고를 단순히 읽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 다른 후보는 상대방의 말이나 의도를 간판하지 못하고, 중간에 상대방의 말을 자르는 식으로 자신이 옳다는 점만을 부각하면서 비호감도만을 상승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후보는 선명성에 몰입한 나머지 상대방을 추궁하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번 대선에 참여하는 데 만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번 TV 토론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말꼬리 잡기가 난무했으며, 심지어 전 국민이 TV 토론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데도 단연코 해서는 안 될 발언까지도 거리낌 없이 튀어나왔다.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지지율이 낮은 후보자가 지지율이 앞선 후보자를 공격하는 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달리 보면 이것은 토론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자의 권한이 너무 없다 보니 종종 후보자들이 토론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사회자가 너무 토론 진행에 개입하다 보면 편파성 시비가 나올 수 있으니 그럴 바에는 아예 토론 과정에 개입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자의 존재감이 없어지고 사회자는 후보자들의 과도한 발언이나 논점 이탈에 대한 제지 등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자를 전문가로 해서 유권자들을 대신해서 송곳 질문이나 핵심적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하거나, 혹은 사회자와 더불어 전문가가 추가적 질문을 통해 정확하고 문명한 질문을 하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TV 토론 방송도 횟수를 늘리고, 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토론에 익숙하거나 토론하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토론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다 보니, 결국 토론 능력이 언제나 아쉽고, 막상 토론하려다 보니 주어진 시간에 맞추려다 보면 정작 자신이 해야 할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으로 일관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거나 자신의 관념에 얽매여 과거 그대로의 것을 답습하기 마련이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토론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 아니라고 해서 토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토론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토론 방식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다. 이번 대선 토론은 4자 토론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4자 토론 방식보다 양자 토론 방식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은 각각 후보자들의 정책과 비전 등을 비교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4자 토론 방식은 한 후보자들에게 주어진 시간도 양자 토론 방식보다 적어서 후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제시하기 어렵다, 서로 정치적 공방을 벌이더라도 토론에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공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토론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론이 형식적으로 그저 후보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그저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으려는 후보자들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국가지도자로서는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선택보다는 자신의 권력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과거 발언을 지나치게 들추어내고,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기만 하는 사람은 토론의 장을 통해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보다 열세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번 대선 토론에서 주도권 토론이나 답변 시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어떤 질문에 대해 다소 엉뚱한 답변을 의도적으로 하거나, 회피하는 듯한 모습도 드러났다. 이것은 답변을 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현재의 네거티브적 공방에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토론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것은 토론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자연스럽게 각각의 후보자들이 스스로 가이드 라인을 정하면서 유권자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한 표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 토론처럼 진행되는 경우 자유로운 토론 방식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사실 이번 대선 토론에서 각각의 후보자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서로 다른 관점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해결 방안에서는 과거와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토론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방안을 놓고 토론이 전개되었더라면, 그리고 이것으로 정치적 공방을 벌였더라면, 그래도 토론에서 서로 동의하는 점도 있었을 것이고 혐오와 증오만을 불러오는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 난무하다 보니, 각각 후보자들의 주장들은 어차피 상대방의 공약에 대한 검증보다는 상대방 후보자의 인신에 대한 검증을 하려는 의도에 매몰되어 버렸다. 후보자의 인신을 검증하는 것이 이번 대선 토론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에 ‘올인’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토론 수준이 낮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번 대선 토론은 토론 방식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대선 토론의 목적이 유권자들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토론 방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토론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정당한 선택을 위한 토론이라면, 관계기관들은 좀 더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토론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구체적인 토론 방식과 토론 횟수 등은 이번 대선 이후에 전문가들과 논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선거도 아닌 국가의 중대사인 대선에서 토론 방식이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개선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 토론을 통해 토론 방식의 개선은 후보자들의 소신과 정책 방향, 철학과 가치관, 정책수행 능력 등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대선 토론이 후보자들의 관점보다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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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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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EU와 루마니아 경제의 현실, 루마니아의 최대 화두 자원경제 유지
    루마니아는 현재 EU의 일원이자 나토의 회원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활동도 EU와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17년 2월에는 루마니아 에너지관리청인 ANRE에서 에너지 기업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가 2018년 중반부터 흑해에서 천연가스 생산을 시작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루마니아의 흑해 대륙붕 2곳인 미디아, 펠리칸 대륙붕에서 연간 최대 40억㎥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루마니아 당국은 2017년에 미디아-펠리칸 대륙붕에서 첫 해 생산량을 10억㎥로 끌어올렸다. 루마니아는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 생산으로 연간 5억∼6억㎥ 규모에 이르는 수입량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양을 수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 칼라일 인터내셔널의 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본래 동유럽의 최대 산유국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가 석유를 수입으로 바꾸었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루마니아에 있기 때문에 한 때는 석유를 자급하였지만 최근에는 수요가 늘어나 해당 유전에서 추출하는 원유의 양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 외 천연가스 총 생산량의 5%가 루마니아에서 나오고 있다. 기타 산업으로 루마니아는 농업이 발달했다. 전통적으로 밀, 옥수수, 포도, 해바라기씨 등이 세계 생산량 상위 10%에 들어갈 정도로 풍부하다. 더불어 맥주가 물보다 저렴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맥주보다도 포도주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기후가 포도 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포도 생산량이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다. EU의 가입 이후, 경제가 제조업을 위주로 크게 증진되었다. 경제 성장률이 동유럽에서 높은 편으로 동유럽 국가가 그렇듯이 EU의 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더불어 높은 인적 자본에 힘입어 경제 성장이 일구어지고 있는 편이다. IT 분야는 대표 회사들은 적게 나타나지만 다국적 기업들의 진출이 많은 편이다. HP나 마이크로소프트등이 진출해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유럽 데이터 센터가 루마니아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인터넷 속도 순위를 보면 루마니아는 상당히 높은 순위에 랭크되고 있다. 유럽에서 빵을 생산하는 능력이 최상급이라 이름 붙을 정도로 농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평원이 흑토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대표 제품이라 할만한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유럽 시장에서 저가 차량으로 크게 알려진 자동차 제조 기업인 다치아(Dacia)가 있다. 국내에서 알려진 것들은 안티에이징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제로비탈 화장품이 있고, 안티 바이러스 업체인 비트디펜더가 있다. 두 회사 모두 각각 한국에도 지사를 가지고 있다. 비트디펜더의 인지도는 다른 국외 제품 면에서는 떨어지고 있지만, 국내에서 기술 OEM으로 10개 가까운 업체들이 사용 중이어서 실질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외산 보안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측 엔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안티 바이러스 제품은 알약과 하우리, 바이러스 체이서라 볼 수 있으며 자동화 솔루션인 RPA 솔루션 중 현재 독보적인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UI Path 역시 루마니아에서 만들었다. 또한 워드 프레스 테마 제작사 중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Hestia, Zelif lite (프로버전은 Zelle PRO), NEVE 등의 테마를 제작한 유명 테마 제작사인 Themeisle도 루마니아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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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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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1
  • 한베 가족의 비극 : 베트남의 이례적인 사형판결
    최근 베트남에서 이례적인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수는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인이다. 본래 베트남에서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법정 최고형은 마약 관련 범죄, 자국민 살해, 극악의 보이스피싱 범죄에 해당 되는데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에 살해 당한 사람이 한국인이며 살인자 또한 한국인이다. 살인자인 한국인은 지난 3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베트남 현지인 아내를 폭행하고 기르던 개를 죽이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 징역형에 베트남 현지에서의 추방으로 끝날 수 있다. 이에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대피한 베트남 아내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시아버지인 살인자의 부친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이에 살인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일 뒤 베트남에 왔고, 아들의 집에서 아들과 술을 마시며 아내를 잘 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그러나 해당 살인자인 아들은 아버지가 아내 편만 들고 자신을 혼냈다고 생각해 격분해 아버지가 잠든 뒤 흉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인 아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한국인 아버지를 존속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에 베트남에서는 발칵 뒤집혔다. 베트남의 사회적인 통념상, 존속 살해는 아무리 극악의 범죄자라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이건 일반적인 살해 범죄가 아닌 도덕적인 측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선 살인자인 아들은 베트남 공안에 체포되었고, 대상이 외국인 용의자에 피해자 또한 같은 국적의 외국인이었기에 사건 심의 자체도 논란에 휩싸였다. 사법부의 한 편에서는 "외국인이 외국인을 죽인 사건인데 남의 나라 사람을 두고 법정 최고형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나?, 그는 한국에 넘겨 한국 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건은 베트남에서 벌어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이 사건은 존속 살해라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사회적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주장하고 있기에 생각보다 심의가 오래 끌었다. 사건 심의가 복잡하게 끌려 간 배경에는 유교적 사상과 불교적 사상이 남아 있는 베트남의 전통 문화 때문이다. 베트남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매년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은 불교의 여러 기념일 중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을 부란(Vu lan)기념일이라 하는데 우리가 카네이션을 드리는 것과는 달리 부모님에게 장미를 드리고,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날로 아주 각별하고 특별한 날이다. 이러한 전통은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은덕을 베풀며, 아름다운 미덕을 쌓는 도덕, 문화 특징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날은 우리의 어버이날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부란절은 중원절(Tet Trung Nguyen)이라 하여 부모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 날의 유래는 목건(目犍)이라는 보살이 일생에 죄가 많아 저승에서 굶주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효자였던 목건의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어미에게 공양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음력 7월 보름날, 제례를 위해 모인 주승들의 도움으로 결국 어머니를 구했다고 전한다. 이후, 부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목건련처럼 하라고 일렀다. 부란은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해 생겼고 요즘은 부모뿐 아니라 조상에게도 효(孝)를 바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부란 공휴일은 매년 부모님과 조상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존재하게 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자식은 항상 부모가 키워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한 날이 되었다. 부란이 돌아오는 계절이 되면, 많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고아, 독거 노인들을 위해 선물을 주는 방법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이런 일들은 베트남 전통과 도덕문화의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뜻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존속 범죄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것은 이와 같은 베트남의 사회 도덕적인 상황과 무관치 않다. 패륜 범죄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과 더불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31
  • 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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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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