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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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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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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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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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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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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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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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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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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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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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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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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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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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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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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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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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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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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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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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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향수시장의 중심이 된 파리
- B.C 55년 로마가 파리를 정복했을 당시, 파리는 시테 섬에 위치한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파리지(Parisii) 족이라는 갈리아계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해오면서 파리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센 강의 좌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로마인들의 뒤를 이어 프랑크족이 게르만 민족 대이동 때 이곳으로 이주해와 로마인의 센 강 좌안의 마을을 파리(Paris)라는 이름으로 짓고 도시화하여 수도로 정하게 된다. 시간이 1,000년을 흘러 프랑스 앙리 2세(1519~1559)의 재임 동안에 프랑스에서는 향수의 제조와 판매가 중요한 상거래 중 하나였다.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Caterina de' Medici)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 왕가에 시집올 때 본국에서 자신의 전담 향수 판매상을 데려오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이 피렌체 출신의 르네(René)라는 인물이었다. 또한 점술가이자 연금술사인 코스모 뤼지에레오(Cosmo Ruggiereo)도 데려왔는데, 그 역시 그의 여주인인 왕비 카트린을 위해 향수를 만들었다. 당시 르네는 파리의 퐁토샹주(Pont au Change)에 팬시 샵을 오픈했다. 이 팬시 샵은 16세기 말의 파리 사교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 중 하나였다고 한다. 프랑스 역사에서 파리에 자생적 향수 판매상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초로 기록되고 있다. 1179년에서 1223년까지 재임한 필리프 2세는 재임 초반 무렵에 최초의 프랑스 향수 판매상 조합 설립을 가능하게 하는 법률을 입법했다. 그러나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루이 14세의 내각 수반으로 존재하고 있던 17세기까지 향수 판매상은 의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특허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순수한 꽃향 이 외에도 향을 가미한 방향, 여러 가지 성분을 복합한 향들이 널리 유행했었다. 이에 예를 들어 시프르라고 하는 백단나무의 향유인 도취 향유는 요즘도 인기있는 향유로 나타나지만 당시 17~18세기에도 대단한 인기였다. 시프르의 초기 제조 비법은 지금과는 달랐지만 그것을 만드는 성분들은 대개 오크모스 ∙ 사향 ∙ 용연향 ∙ 백단향 ∙ 오리스 ∙ 장미 등이었다. 이 무렵에는 남성용 향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성용 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유행했는데, 당시 나폴레옹은 일주일에 오 드 콜로뉴 반 병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플라스크 병에 든 스페인 산 재스민 향유를 한 달에 60병이나 비웠다. 오스트리아의 황녀와 재혼했을 때 그녀가 나폴레옹의 스페인 산 재스민 향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폴레옹의 이혼하기 전의 왕비 조세핀은 사향과 시벳 등의 강하고 도취적인 향들을 선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조세핀의 드레싱 룸에는 과다할 정도의 많은 향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조세핀이 죽은 뒤에도 조세핀이 기거했던 말메종 아파트에는 향 냄새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1775년 파리의 생토노레 19번지에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며 유행을 앞서가던 ‘코르베유 드 플뢰르’(A la Corbeille de Fleur:꽃바구니)라는 향수 전문점이 오픈했다. 바로 우비강(Jean-Francois Houbigant, 1752~1807)이라고 하는 조향사의 가게였다. 그는 향수와 분, 포마드 이 외에도 향 장갑과 식물 성분의 입술 연지 등을 판매하였는데, 그를 가장 총애했던 고객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프랑스 대혁명도 우비강을 비롯한 다른 향수 판매상들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1900년에 우비강 회사의 페르낭 자발(Fernand Javal)은 최초의 합성 향수인 ‘이데얄(Idéal)을 개발하였고, 1913년에는 최초의 꽃향기 향수인 ‘켈크 플뢰르’(Quelques Fleurs)를 시장에 내놓았다. 초기 프랑스 향수상들 중에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1685년 쾰른에서 태어난 요한 마리아 파리나(Johann-Maria Farina)였다. 그는 아쿠아 미라블리스(Aqua Mirablis), 즉, 기적의 물이라 불리는 오드 콜로뉴를 생산하고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이 제품은 약용적인 특성으로 인기를 끌다가 18세기 후반에 와서는 원기 회복제로도 각광을 받게 된다. 미라블리스 액체는 이탈리아의 수도원에서 훨씬 앞서 개발한 시트러스 향과 비슷한 것이었다. 1766년 파리나가 사망하자 회사는 그의 조카에게 이양되었으며, 그 후 1862년 로제 에 갈레(Roger et Gallet) 회사에게 매각되었다. 요한 마리아 파리나의 오 드 콜로뉴는 독일 전역에 경쟁사들의 유사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인기였다. 게다가 동일한 브랜드를 사용함으로써 시장에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당시 또 하나의 대적할 만한 경쟁 상품은 18세기 후반에 나온 Ferdinand Muhlen의 ‘4711’이다. Ferdinand Muhlen의 4711 제품은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향수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꽃 향유 중에서 이와 같은 풍요기에 등장한 향수는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특별하게 좋아했던 제비꽃과 장미향이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는 1985년에 발표한 향수에 관헤 매혹적인 소설 『향수, 부재:어느 살인자의 이야기(Das Parfum)』에서 주인공 그르누이가 1750년대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향수를 알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단지 기본적인 평범한 향기들만 접해 왔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르누이가 말뜻 그대로 향을 처음 맛본 것 또한 여기(생 제르맹 근교)였다. 축제 행사 때 정원의 샘들은 단순한 라벤더 또는 장미향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또 한번 네롤리, 튜베로즈, 재스민 또는 시너먼 오일 등을 섞어서 사향 냄새가 나는, 여러 가지를 혼합한 값비싼 향들이 밤의 산들바람을 타고 길다랗게 늘어진 리본처럼 마차 뒤로 떠 다녔다. 그는 이미 꽃들에 스며있는, 그릿 시장의 향료 판매대에서 팔고 있는 이러한 성분들에 대해 많이 알았다. 용연향, 영묘향, 파출리 향유, 백단향, 베르가모트 향유, 베티버, 오포파낙스, 벤조인, 호프발삼, 해리향 ∙∙∙∙∙.” 19세기에 이르러 게를랭(Guerlain) ∙ 몰리나르(Molinard) ∙ 로제 에 갈레(Roger & Gallet) 등의 향수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다. 그리고 1911년 폴 푸아레(Paul Poiret)로부터 시작되어 향수의 전설 샤넬로 이어진 디자이너와 향수의 만남을 통해 향수의 디자이너 브랜드 시대가 열리면서 파리는 일약 향수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계 향수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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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향수시장의 중심이 된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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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역 역사 유산들, 방치에 가까한 행태에 대한 비판
- 4년 전 당시에 나는 제주도 선사시대 고고유적, 당시 인종들이 남방계와 북방계의 융합 가능성 재기, 그리고 탐라국 주민들이 어떤 인종에 가까운지, 이들이 혹은 한반도 남부 지방에 인종 변화를 주도적으로 일으키지 않았는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한 달 가까이 머물면서 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주도 남부 해안을 가다가 예래동 해안 지대가 나오고 그 지역은 논짓물을 지나 중문지구로 빠진다. 그리고 그 지역에 하예 환해장성이 있다. 사진 속 그곳이 바로 하예 환해장성이다. 환해장성의 축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 섬을 한 바퀴 돌아 축조한 장성(長城)이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다보면 곳곳에 장성의 흔적이 나타나는데 각 지역의 장성마다 봉수대와 연대가 설치되어 왜구의 노략질을 감시하고 그들의 침입을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바로 환해장성인 것이다. 어떤 곳은 깔끔히 복구도 했지만 사진과 같은 곳은 복구도 뭐도 아닌 그냥 방치다. 만약 표지판을 세우지 않았으면 아무도 이것을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은 무너질대로 무너지고 온갖 잡초와 덩쿨들이 현무암으로 축조된 성돌들을 감싸고 있다. 식물이란, 당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힘과 생명력이 강하여 뿌리가 강해지면 돌담을 감싸게 되고 어떠한 강력한 돌로 지은 건물도 식물의 뿌리를 이기지 못하고 삽시간에 붕괴된다. 지금 사진의 성의 경우, 이대로 몇 년 가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유산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자들이 정말로 제주도의 문화 유산을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 싶다. 이게 경제 선진국이라 하는 대한민국이 자국 유산을 다루는 법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1인당 GDP 5,000불 짜리의 개발도산국도 자국 문화를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이게 뭔지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서 봤을 때 그 부끄러움은 알아본 사람 만의 몫인듯 싶다. 그리고 표지판들이 두어군데 존재하는데 문화재이기 때문에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접촉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방치함으로써 본인들이 오히려 훼손을 하고 있다. 저런 표지판 세우면 뭐하나? 정작 관리하는 자들이 방치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거에 대해 컴플레인을 걸면 100% 나오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예산이 부족해서, 혹은 관리할 인원이 모자라서 등의 말들을 한다. 자기네 고장의 문화 유산을 관리하는데 예산이 부족하다와 인원 모자르다는 얘기가 말이 되는 얘기일까? 문화재 관리 보호 비용은 분명 정부에서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매해 나올 것인데 그 돈은 이런거 관리 안하고 대체 어디다 쓰는 것일까? 대한민국 본토 뿐 아니라 섬 제주도 곳곳을 다니고 있는데 방치와 파괴 등으로 그 유적, 유물의 실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곧잘 발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움과 분노는 삭혀지지 않는다. 춘천 중도 유적 같은 경우는 인위적으로 보여지는 야만적 행위의 파괴지만 방치함과 나태함으로 보여지는 눈 가리고 아옹 식의 행태 또한 발톱을 드러내지 않은 야만적인 행위라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 나라 공무원들의 문화 유산을 대하는 의식 수준이 덮여진 잡초와 잡식물 뿌리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는 것인가? 한심한 세금 먹는 벌레들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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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역 역사 유산들, 방치에 가까한 행태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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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민지 시절, 파키스탄의 분리와 배경
- 161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만의 항구 도시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입성한다. 사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꼴카타에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인도 중남부의 벵골만 항구인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에 세워진 것이 공식적인 영국 동인도회사 1호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영국은 유럽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데 단순히 유럽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이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는 무굴제국이 통치하고 있는 인도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인도의 주도권을 두고 격돌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대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무굴제국 연합군에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파인 현지인 벵골 태수를 임명하면서 남인도의 프랑스 세력 핵심거점인 퐁디셰리(Pondichéry)를 함락시키면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쟁취한다. 세포이 항쟁 이후인 1858년에는 영국이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퇴임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가 영국의 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거대한 힌두 세력에 오랜 기간 동안 눌려 있었던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받던 종파들인 자이나-시크교 비무슬림 세력과 무슬림 세력 간의 종교적인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는 힌두교가 인도 내의 우세 종교가 되어 시크교를 핍박했고 더불어 두 종교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지면서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굴제국이 존립했던 당시에는 자한기르 황제 시절, 시크교 5대 구루인 아르준(Arjun, 1563~1606)이 힌두교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청했다가 순교했을 정도로 상호 간의 연대의식을 가졌었다. 아르준의 순교 사건은 시크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에서 유일하게 구루가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했다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전 국가인 무굴제국의 중심세력인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무굴제국이 무슬림 국가였고 인도 최후의 국가라는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에도 무슬림들이 무굴제국의 기득권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견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도 내 주민들은 비무슬림 세력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이와 같은 소수 무슬림 세력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인도 대륙 전역에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 및 보복 학살이 발생해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종교 간 갈등과 유혈 분쟁을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로나뉘는, 각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별개의 독립을 승인한다. 1947년 8월 14일에 이르러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 강 유역과 동부 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들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을 선언했다. 인도 내에서 이와 같은 종교 갈등에 대해 고민한 마하트마 간디는 통일된 인도의 각 민족 및 종교 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분열을 봉합하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인물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원수 관계로 갈라섰다. 이처럼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융합이 가능해 보였지만 문화,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오히려 인도를 두고 상호 간의 힌두교도인 이웃들과 더 공통점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게다가 인도가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인 요인, 그리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거리가 멀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국가 간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다카 간의 거리는 약 2,000㎞에 달할 정도로 매우 멀다. 특히 파키스탄 독립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인도 총독인 루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으로 인해 매우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무함마드 진나는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인도 수상이 되는 계획을 방해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당시 진나는 공개석상에서 매우 강경하게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인도와 분리론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의 관료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네루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방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한편 진나는 영국령 인도의 총참모부 측에 동, 서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지를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령 인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참모부 측은 꼴카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독립이 어려울 것이며, 꼴까타가 파키스탄의 영토에 포함되면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다 답변하면서 난감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정작 파키스탄 분리독립은 이미 초읽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진나는 문화적 정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를 내세워 서파키스탄의 영토까지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와 같은 파키스탄의 영토확보를 사실상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켜 통합 파키스탄 국가로 독립을 추진하려 한 진나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우산 벵골 무슬림들의 사정을 보자면 이들이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무굴제국의 붕괴 이후 그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졌고 역으로 억압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차별에 대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영국 지배 하에서 벵골의 힌두교인들이 대지주가 되어 그들을 착취했기에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립한 서파키스탄의 수뇌부들은 진나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했기 때문에 상대적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의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했다. 더불어 중간관리직으로는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피난 와 있는 무하지르를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결국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게다가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피부색깔을 두고 인종적으로 비하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은 서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이는 영국 지배 하의 인도에서도 발생하지 않은 문제였기에 불만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인구 자체로 볼 때, 동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는 것에 있다. 독립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로 보면 서파키스탄은 6,000만, 동파키스탄은 6,800만에 달했다. 특히 루이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이 분리되어 있는 기형적인 형태로 볼 때, 25년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는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부 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서파키스탄의 예속을 거부하면서 마운트베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 맞게 되었다. 결국 두 파키스탄은 상호 간의 내전 및 독립 전쟁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분할 되는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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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식민지 시절, 파키스탄의 분리와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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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 지금까지의 서양철학 중 가장 난해한 철학이 있다면, 과연 어떤 철학일까? 필자가 이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당장 떠오르는 철학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년-1831)이다. 누군가 그냥 무턱대고 헤겔 철학이 다들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철학인지 한번 읽어보자는 의도로 헤겔의 저작을 읽어보기 시작했다간 고작 몇 줄 정도만 읽고 곧장 한목소리로 무슨 말인지 몰라 너무 어렵다거나 혹은 이게 무슨 철학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헤겔 철학을 그냥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고, 헤겔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매번 있었던 터라 가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독일어에 능숙한 사람이더라도 헤겔 철학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예외 없이 두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어려운 헤겔 철학이 그대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서양철학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철학자라면 헤겔 철학이 돌파해야 할 거대한 바위산임을 뜻한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 철학을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시작했던 야심에 가득 찬 계획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계획들은 헤겔 철학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만을 이용해서 각자의 철학에 활용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헤겔 철학을 잘 활용한 각자의 철학이 오히려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헤겔 철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헤겔 철학은 당시에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서로 벌였으며, 그 이후로 신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철학, 실용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헤겔주의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과 역사주의에 치중한 결과,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사상(捨象)해버렸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합리적 핵심(der rationale Kern)인 변증법을 취했지만, 그 이후로 독단적 교조화 및 여러 분파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를 중도로 돌리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사회비판이론으로 귀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헤겔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현실의 대안으로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분석철학은 헤겔 철학의 개념론을 언어분석철학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헤겔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용주의는 헤겔 철학에 대한 역사철학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현상학은 독일 현상학보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헤겔 철학의 긍정적인 면을 되살리기에는 근본적으로 헤겔 철학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헤겔 철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귀결되었다. 해석학은 헤겔 철학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헤겔 철학의 논리적 체계보다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만 열어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비록 헤겔이 동양철학에 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 등등에서 헤겔철학과 동양철학의 비교연구도 황행(橫行)하고 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 학문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했으며,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의 계기를 변증법적 사유의 힘으로 필연성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 자신은 이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현재 입장으로 보면, 곳곳에 허점도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영유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이 정도로 실로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분명히 철학사에 영원히 빛날 업적이라 하겠다. 헤겔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덕분에 우리는 헤겔 철학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 유산은 독일에만 한정되어, 독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넘어서 세계적 자산이 되었다. 헤겔 철학에는 그리스 철학, 중세 신비주의, 범신론, 계몽주의, 낭만주의, 정치경제학, 사회계약론, 칸트 철학, 피히테 철학과 셸링 철학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또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법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 등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모든 분야가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특정한 영역에서 몇몇 구절만을 읽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는 없으며, 스스로 미로에 갇힌 채 착종(錯綜)된 모순이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일단 고사(枯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봉착하면서 마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 자신의 서술방식이 사변적인 탓에 야누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고, 분명한 일관성이 다소 없거나, 혹은 헤겔 자신의 오류로 인해 진위여부(眞僞與否)에 관한 논쟁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헤겔 사후 지금까지도 헤겔 철학은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근거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헤겔 철학에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다만 누구든 그럴듯하게 타당하게 보이는 근거로 단지 각자의 주장이 제시되는 선에서 헤겔 철학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종종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회피한 채 어떤 하나의 해석만이 올바르다든가, 문자적 이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사유의 역동성과 역사성보다는 헤겔 철학을 개념의 논리로만 만들고 더욱 추상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더 나아가 헤겔 철학에 대한 핵심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놓고 각자의 관점만을 관철하려는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은 헤겔 철학에 관한 각자의 이해방식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을 거론하면서 진리에 대한 용기와 인간 정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강조했다. 우주의 본질이 인간 정신 앞에서 열리고, 우주의 풍부함과 깊이가 인간 정신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헤겔의 말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한다. 어쩌면 헤겔의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위력을 한껏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 정신을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만한 것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에서 영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면, 과연 그런 것이 인간 정신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헤겔 철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은 바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심지어 헤겔 철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판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헤겔 철학 내부에 한정해서 다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헤겔 철학이 외연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와 같은 비판이 때론 헤겔 철학에 대한 오해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사실상 없다. 그 첩경이 어딘지를 우리가 우선 찾기보다는 헤겔 철학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 천착(穿鑿)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섣부른 얕은 지식으로 헤겔 철학을 좀 공부했다고 떠드는 자들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외면하고 뒤로 숨기 마련이다. 또 헤겔 철학에 대한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헤겔 철학 전체에 관한 이해라도 되듯이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철학을 위한 우회로로 헤겔 철학에 접근하려는 자들도 헤겔 철학에 대한 진지한 숙고보다는 축소된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이해하려는 수준에 그친다. 그들은 모두 과연 헤겔 철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론 수준에서 그저 그렇게 헤겔이 얘기했다는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헤겔 철학은 여전히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헤겔 철학의 비밀을 우리가 완전히 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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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 그 역사적 전개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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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의 마왕(魔王), 알렉산드르 수보로프(Александр Суворов)
-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시기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수보로프(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Суворов)의 외아들로 태어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러시아의 귀족 자제로써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수보로프의 부친인 바실리가 프랑스의 장군이자 기술자였던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 작품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바실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 세계의 전통과 다르게 수보로프를 위험한 군인보다는 보다 안전하고 실무 경험이 풍부한 관리로 성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수보로프는 어린 시절부터 군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군인이 되겠다는 장래를 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수보로프의 관심을 다른 분야로 돌리려고 했지만 결과는 수보로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어 수보로프가 11세가 되던 해,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Абрам П. Ганнибал)이라는 인물이 수보로프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여기에서 바실리의 이야기를 듣고 간니발은 수보로프와 오랫동안 군사에 관해 토의해 본 결과, 바실리에게 아들의 천직은 군인이라 언급했다. 그러자 결국 바실리는 어쩔 수 없이 수보로프가 군대에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여기에서 수보로프 가문에 대해 언급하자면 모스크바에 있는 외조부이자 오룔(Орёл)에서 구베르니야(Губерния)에 이르는 땅의 영주이면서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던 장교인 페도세이 마누코프(Федосей Мануков)였다. 수보로프는 마누코프의 저택에서 주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와 바실리의 직계 조상들은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 귀족 가문의 후예 중 하나였지만 남에게 이와 같은 위세를 보인 적 없었던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들이었다. 수보로프는 본래 완연한 루스 슬라브인이 아닌 아르메니아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누코프가 아르메니아인으로써 표트르 대제의 신임을 받아 발탁되었기 때문에 수보로프에게서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수보로프는 1740년 소년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하여 핀란드에서 스웨덴에 대항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나이는 어렸지만 군인으로써 자질이 충분했고 수보로프는 1741년에 발생한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첫 실전 경험을 하게 된다. 이어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1756~1763)에 참여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로써 이처럼 험난한 전쟁들을 일찍 참여해 실전을 쌓아가며 군인과 장교로써 역량을 채워나갔다. 이처럼 젊은 시절부터 여러 전쟁들을 경험하며 활약하던 수보로프는 이내 33세의 나이로 러시아 역사상 최연소 대령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 된다. 이는 계속되는 전투에 참여하면서 직접 적과 마주하는 등, 용맹성을 보이기도 했고 1개 사단도 맡으면서 부하를 통솔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러시아에서 수보로프에 대한 평가는 어느 시기에서든 뛰어난 전략적 식견을 지닌 위대한 지도자로서 추앙받았다. 수보로프는 러시아 국내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수보로프의 통솔력은 러시아 장병들의 귀감으로 여겨졌다. 전쟁의 외교의 일부가 되었던 시기에 수보로프는 군사적 행동이라는 진정한 전쟁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였다. 수보로프는 간단한 작전을 위대하게 사용하였으며 전장에 있을 때는 일반 병사처럼 검소한 생황을 하였고, 짚단 위에서 몸을 누이고 부족한 급료에도 만족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군사적인 변화를 일구어 내었다. 블라디미르 미르스키(Владимир Мирский)에 의하면 수보로프는 “통신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날 그가 내린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는지에 신경을 썼다. 이러한 명령서들은 아주 조직적이고 기대하지 않았으나 효과적인 영향을 끼쳤다. 수보로프의 명령서의 문체는 신경질적이나 단순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효과적이며 섬광과 같은 영향을 끼쳤다. 수보로프의 공식보고서는 인상적이고 효과적인 문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보로프의 작문은 그의 전술이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말버러 공작의 전술과 다르듯 일반적으로 당대에 통용되는 문체와도 확실히 구별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타인에 대한 풍자는 일생동안 많은 적을 만들었다. 수보로프는 무능한 인간들을 경멸하였으며 장식에 사용될 법한 기사들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수보로프의 빈정거리는 성품은 그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해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수보로프의 군사적 재능은 그 당시에는 러시아 군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군은 1904년에서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와 같이 자기희생적 정신, 인명손실에 대한 경시와 같은 수보로프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보여주고 형성된 유산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드라고미로프(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Драгомиров)는 자신은 수보로프의 훈련방식에 따라 배웠으며, 수보로프야말로 전쟁의 본질과 러시아의 군사력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보로프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수보로프 박물관이 건설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조금 떨어진 곳인 오차코프와 포크샤니에 1907년 수보로프가 폴란드를 상대로 승전했던 승전기념비가 세워졌고, 이후 세바스토폴, 이즈마일, 툴친, 코브린, 노바야라도가, 헤르손, 티마노브카, 심페로폴, 칼리닌그라드, 콘차스코예, 림니크,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 산맥 등 각지에 동상들이 건립되었다. 1942년 7월 29일 구소련 최고 간부회의는 수보로프 훈장을 신설했으며, 이는 압도적인 적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공세를 펼친 이들에게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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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의 마왕(魔王), 알렉산드르 수보로프(Александр Суворо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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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수난 중
- 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수난을 당하고 있다 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있는 푸쉬킨 동상은 머리가 갈색 천으로 덮히고 붉은 테이프로 묶여 "'시인이 앞을 볼 수 없는' 포로가 됐다(Поет став сліпим в’язнем.)." 라고 쓰며 동상 하단에는 붉고 흰색 페이트로 '탈식민지화는 멈출 수 없다(Деколонізацію неможливо зупинити)'는 문구가 우크라이나어로 써있다. 러시아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만들었다며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고 있던 푸쉬킨은 러시아어를 축출하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으로 몰려 그 유산이 파괴되고 있다. 더불어 푸쉬킨 동상의 이같은 행위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에는 우크라이나 북부 하리코프의 시인 광장과 서부 쩨르노브찌(Чернівці)의 드라마 극장 앞에 서 있던 푸쉬킨의 흉상이 당국에 의해 철거된 뒤, '독재자' 스탈린 흉상과 같은 창고에 처박힌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유산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를 헌법상의 유일한 국어로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이중언어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구사자가 전체 인구의 적게는 1/3, 많게는 절반에 이르고 있으나, 2012년 8월에 법률 "국어정책 토대에 관한 법(Закон про засади мовної політики України)"이 통과되기 전까지 러시아어의 지위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에 재정된 우크크라이나의 언어법은 각급 지자체 주민 인구의 1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를 지역어로 선정하여 공공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더불어 이 법을 재정할 당시의 대통령 친러계인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 시대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어 중 핵심적인 언어가 러시아어였고, 이 법을 통하여 지역어가 해당 지역에서 국어인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돨 권한을 잠식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의 입안 및 통과, 시행, 폐지, 폐지 무효화를 둘러싸고 우크라이나는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어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며 시시각각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어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작가 루브코 데레쉬(Рубко Дереш)는 작년 6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잡지 인터뷰에서 '죄와 벌'을 쓴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끼(1821∼1881) 등 러시아 문학을 언급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공범론을 주장하며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러시아 문학은 푸틴의 공범이다. 하나는 국가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이 전쟁의 공범이다.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 пособниця Путіна. Одне пов’язане з імперіалістичними амбіціями Росії як нації, а інше —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бракує індивідуальн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 Співучасниками цієї війни є російська література і релігія, тобто соціальна культур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Ми не можемо мовчати)" 이 단체에 속해 있는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집에서 한 번도 러시아어를 쓰지 않는다면 인정하겠는데 필자의 오랜 우크라이나 경험상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한다.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서툰 우크라이나어 쓰면서 러시아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집에서는 러시아어로 말하면서 러시아어와 글을 금지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를 겪어본 사람이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지 알만한 사람 다 알고 있다. 저 사람들 누군가가 약 올려서 흥분하게 하면 우크라이나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욕지거리 하며 침 튀기며 달려드는 기막힌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도대체 "러시아가 가지는 제국주의적 야망(Імперіалістичні амбіції Росії)"에 러시아 문학과 푸틴의 연관성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같은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러시아 문학에 결여돼 있다(Це пов'язано з тим, що в російській літературі не вистачає особистої гідності, свободи і відповідальності.)"고 하는데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읽어봤음 절대 그런 소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작가라는 타라스 세브첸코(Тарас Шевченко, 1814~1861)의 작품들이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이 결여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 이유는 그가 농노 출신이었고 농노에서 해방된 것도 러시아 친구들이 도와줘서였다. 그는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Кирило-Мефодіївське товариство)이라는 매우 투쟁적이고 과격한 테러집단에 속해있으며 이 불법 단체는 슬라브인들의 단합을 주장해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며 수많은 러시아인들을 살상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가 언급한 "개인의 존엄, 자유 및 책임(Особиста гідність, свобода та відповідальність)이 있을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 현대 작가들이 말하는 "러시아 문학과 종교, 즉 사회 문화는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공범"이라 주장하는 것은 전쟁과 상관없음이 분명한데도 러시아의 문화를 깎아내림으로써 저급한 하위 문화로 전 세계에 인식시켜 러시아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짓밟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일환으로 푸쉬킨 동상에 대한 우크라이나 인들의 공격은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자존감을 높이려 한, 정신승리에 블과한 테러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좋게 말해서 민족주의자지 사실상 무식하고 무도한 자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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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이 우크라이나에서 수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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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 - 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에 대하여 언급해본다.
-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어제는 내가 머물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내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월 2일)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즉 9월 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올해는 9월 2일(토요일)과 9월 1일(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월 4일(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매년 독립기념일은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천천히 쓸 수 있겠지만 오늘부터 4일까지 차례로 언급해 보려 한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레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 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는데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기에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고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하고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으며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들이 프랑스군의 공습에 의해 사망하였고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는데 이 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서 인정을 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게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 되었고 사이공에는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 일본 총독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되면서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일본과 게릴라 전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 군을 배신하여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이게 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들을 절대로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 또한 붕괴되었고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게 되고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월 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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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 - 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에 대하여 언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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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역사 미화를 하는 분들의 마지막 여정
- 결국 과도한 환타지의 역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환상이 깨졌을 때 정해진 곳은 바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이다. 왜냐면 사회적으로 퍽퍽한 삶, 자신들을 이꼴로 몰고 간 것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때부터 적은 자신들이 판단하기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구 세력과 일본이 된다. 서구 세력의 제국주의로 광활한 영역의 대조선의 영토와 활동범위가 줄어들어 한반도로 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런 공통의 적이 미국과 일본이며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 민족 주체를 바로 세우고 자신들의 또 다른 새로운 환타지를 심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결국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지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니 당연히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아집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6.25 사변을 북침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들에게 있어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미국이나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민족 승리 전쟁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현재에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시대 후기, 정조대왕이 개혁에 실패한 이후 순조 시대 때부터 정조가 개혁하고자 하여 선발한 인재들을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천주교 세력 제거를 명분으로 삼아 정략적인 숙청 작업을 개시했다. 정조가 총애하며 귀하게 여겼던 개혁 신료들을 천주학쟁이로 몰아 처형했으며 체제공 선생의 묘가 파묘되고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10여 년 동안 남쪽의 섬 지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와 더불어 흉년과 가뭄, 홍수가 지속되었고 북삼도(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백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화되니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각 민란이 발생해 조선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조정에서는 당쟁이 마무리되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양반이라는 신분을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지배층들이 늘어나 피지배층을 학대하니 그 헐벗은 군중들은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된다. 진주민란, 그리고 19세기 말에 동학 운동의 시발이 되는 고부 민란이 터진 것도 그러한 배경들부터인 것이다. 이 때 헐벗었던 사람들, 특히 북삼도 지역 사람들은 정부의 수탈을 피해 러시아나 만주로 도망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것이 1대 조선족과 1대 고려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나라마저 잃으니 이때 연해주로 건너가서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나라 없는 무국적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책임지지도 않았고 수탈했으며 조선 왕조 내내 차별과 멸시, 그리고 피폐해진 사회 및 혼란기를 겪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며 수탈한 요인보다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한 증오였다. 그런 배경으로 독립군이나 의병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는 등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 우선 조선 정부보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일본 제국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조국은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점점 지쳐갔고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적백내전이 터지며 공산당과 왕당파의 치열한 전쟁이 연해주에도 벌어지자 독립군과 고려인들은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디. 일본군이 러시아 백군인 왕당파를 지원했기 때문에 독립군들이나 당시 고려인 1~2세대들은 볼셰비키 공산당인 적군을 지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볼셰비키와 함께 일본 제국 및 백군과 싸우게 된다. 볼셰비키가 동료가 된 과정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며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다는 공산주의 핵심 사상은 내내 조선 말기부터 차별과 멸시, 수탈을 당해 헐벗은 이들에게 있어 분명히 매력적인 사상이었고 이들에게도 평등이라는 사상이 처음으로 뿌리깊게 내려왔다. 게다가 사적 소유관계를 배척하여 모두가 공산으로 나누어 쓰고 부르주아의 것을 빼앗아 인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줘야 한다는 투쟁적인 선동은 수탈만 당해온 이들에게 복수심과 공격성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어 집단 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직접 타도하고 국가기구를 장악하여 사회 · 경제적 변혁을 추구한다는 달콤한 사상 또한 이들을 쉽게 공산주의에 물들게 했다. 백성들을 이같이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북한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분단의 아픔을 겪게 했으며 6.25 동란으로 수많은 동족들의 피를 뿌린 것에 대해 애초부터 헐벗고 굶주리며 조선 후기 시대의 분란을 다스리지 못한 조선 왕실에 그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확실한 책임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조선론자들은 그와 같은 책임론을 부정하며 모든 원인은 미국과 일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6.25 사변을 미국의 북침으로 규정했고 공산당들은 남조선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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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역사 미화를 하는 분들의 마지막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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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반정부 시위, 발단과 배경
- 최근 2024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는 공식 수치로만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방글라데시 독립 이래 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로 나타난다. 이 시위의 여파는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방글라데시 총리의 사임과 내각 해체까지 유발했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 사태를 일으킨 국제 정세의 입장이 아닌 방글라데시 내부의 입장부터 고려해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것을 두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색깔혁명을 일으켜 친중정권을 붕괴시켰다는 국제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방글라데시에서 오랜 기간 동안 쌓여 있는 부작용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 방글라데시는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는 국가다. CEIC의 데이터를 보면 1991년부터 2020년 사이에 평균 3.94%의 청년 실업률을 보였고 최근 데이터를 보면 2019년에 4.22%, 2020년에는 5.3%로 훌쩍 뛰어 올랐다. 148,460km²의 작은 면적의 영토와 1억 7천만의 인구로 인구 밀집률 세계 상위권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5.3%의 실업률, 게다가 2023년 자료에는 무려 7%까지 치솟았다. 이 정도면 앞으로도 증가할 확률은 더 높다는 것인데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세계 경제에서 떠오르는 별이라고 불렸다. 방글라데시는 지난 20년 동안 연평균 6% 이상 성장했고 2023년에는 세계 32위 경제 대국에까지 올라왔다. 겉으로는 방글라데시가 전체적인 가난의 틀을 벗고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듯 하게 보였다. 방글라데시 GDP는 2022년 7.1%, 2023년 5.8% 증가했다. 20년간 연평균은 6% 이상, 최근 10년간은 연평균 7% 이상 성장했다. 지난 30년 동안 역성장한 적도 없다. 이에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방글라데시 경제가 6.1% 성장해 아시아에서 인도(7.0%)에 이어 두 번째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 같은 성장의 요인은 하시나 정권이 수출 주도 무역에 경제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섬유 산업을 토대로 성장을 이끌어냈다. 방글라데시의 2022~2023 회계 연도 수출의 84.5%, GDP의 13% 이상이 섬유 산업에서 창출됐다 한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에 따르면 2023년 봉제 등 섬유 관련 매출은 사상 최고인 473억8,000만 달러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분배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istribution)’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시나 정권의 수출 위주 성장 전략은 세계적으로 최악에 가까운 부의 불평등을 구축했다. 방글라데시의 집권 세력으로 파키스탄 아와미 무슬림 연맹이자 뱅골계 중심인 후세인 수라와르디(Huseyn Suhrawardy)에 창당된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에 문제가 있다. 이들은 경제 성장이라는 실적을 올리며 콘크리트 체제를 구축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의 경제는 각종 상류층들의 이권 경쟁과 넘쳐 나는 부정부패, 친중이냐, 친인도냐를 두고 벌이는 정치적 양극화 스텐스와 빈부격차의 심화로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더불어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는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1,640만명이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그러면서 부자감세, 서민증세(간접세 증세), 법인세 감세를 강행하면서 서민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다.더불어 정부가 1971년에 발생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할당제 (공직의 약 30% 할당)를 추진하면서 대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시위에 나섰다. 방글라데시는 청년 인구가 매우 많아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로 실업난이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중 많은 이들이 월급은 높지 않지만 안정적인 공직 3,000개를 놓고 경쟁하는데, 많지 않은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직의 1/3을 할당하면 경쟁률이 133:1에서 200:1로 급상승하게 된다. 참고로 방글라데시의 공무원 월급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공무원이 받는 급여는 8,000~20,000 방글라데시 타카로 한화 기준 월 8~2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위직 공무원조차도 한화기준 월 100만 원(100,000 방글라데시 타카)도 못 받는 사람이 허다하기 때문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뇌물과 각종 비리가 횡행했다. 심지어 방글라데시 총리도 월급이 한화 130만 원(130,000 방글라데시 타카) 정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보다 20만원을 못 받는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면 뇌물을 받기 쉽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받은 뇌물로 축재하기 용이하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특유의 왠만하면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는 안정성까지 겹쳐 공무원 경쟁률이 매우 높다. 그런 상황에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할당제를 추진한다는 것은 기득권들이 서민들의 공무원 자격을 줄이고 자기들끼리 날로 먹겠다는 얘기다. 그러니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밀린 숙제 2)에서 필자가 후술하겠지만 원인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군공을 세우거나 독립에 기여한 기득권 층에 있다. 하시나 전 총리의 아버지이자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1972년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직후 공무원 일자리 80%를 참전용사 등에게 할당하는 채용할당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방글라데시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권력을 잡은 기득권으로 세습되다시피 유지되어 왔다. 이 정책으로 본다면 독립유공자 자녀 할당제라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기득권 자녀 할당제인 셈이다. 이들의 부패를 몸소 겪어본 청년들은 이 같은 할당제에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방글라데시 싱크탱크인 정책대화센터(Centre for Policy Dialogue‧CPD)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전체 공무원 수는 120만명 수준이다. 이에 적절하게 공무원 할당에 대한 선정 기준을 세워 잘 분배하면 젊은 층들의 반감은 약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시나 정권과 아와미 연맹은 이 기준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아와미 연맹의 자손들끼리 서로 밀어주는 특혜 논란까지 생기며 상당한 문제가 되었다. 기존 방글라데시 독립운동의 가장 큰 공로자는 방글라데시의 국부이면서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칼레다 지아(Khaleda Zia)의 남편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1936~1981)이다. 그런데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서로 강력한 정적이자 라이벌이며 그 집안까지도 서로 교류를 엄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그래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셰이크 하시나의 경우, 당연히 자신의 부친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만 공무원 자리를 할당해줄 것은 당연하다. 지아우르 라흐만을 도와 독립전쟁을 이끈 사람들의 후손들에게는 공무원자리를 할당해주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아마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러한 할당제 대한 논란을 흘린 것은 지아우르 라흐만 측이고 청년들을 분노케하여 이들을 대리로 내세워 하시나 정권과 아와미 연맹을 축출하려 했던 것 같다. 하시나가 독립유공자를 우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무원직에 자기 사람을 심어 지속적인 권력 유지를 하려는 목적성이 더 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셰이크 하시나가 집권하면서 지아우르 라흐만이 독립전쟁을 이끌은 기록은 방글라데시 교과서에서 크게 축소되었으며 정적인 지아우르 라흐만의 집안을 어떠한 빌미를 내세워서라도 숙청하려 했다. 물론 이것이 칼레다 지아가 집권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독립운동 기록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정치 보복인 부분이라 생각되지만 지아우르 라흐만을 지지하는 방글라데시 내 시킴족, 동부 벵갈인, 몬족, 샨-라흐만 등의 계파들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숙청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여당은 반대하는 청년 시위대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서파키스탄 군에 부역했던 라자카르 민병대에 비유했는데 이는 더 큰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하시나 총리가 결정적으로 하야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할당제 부활을 정당화하며 강행, 추진하려 했다. 여기에 더해 부정선거 의혹이 짙게 나타난 2024년 방글라데시 의회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하시나 총리의 할당제 추진은 반정부 여론을 더욱 촉진시키게 된다. 당시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이와 같은 할당제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하시나 총리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며, 사법부는 정부의 심복에 불과하다 주장했다. 한편 아와미 연맹을 지지하는 대학생 회원 등 할당제를 지지하는 측 친정부 학생들 또한 찬성 시위를 벌였고, 찬반 두 집단이 충돌하면서 벽돌과 몽둥이를 들고 상호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자 경찰이 개입했지만 할당제 찬성 측 학생들보다는 할당제 반대 측 학생들만 강경하게 진압하게 되니 할당제 반대파의 시위는 점차 반정부 & 민주화 요구 시위로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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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반정부 시위, 발단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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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9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 독립기념일 - 우즈베키스탄 독립의 비화, 사상 최악의 목화 비리 사건의 전말
- 오늘 9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 독립기념일이다.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8월 31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결의했고 다음 날인 9월 1일, 독립을 선언했다. 늘 그랬듯 독립기념 행사라던지, 휴일이기에 뭔가 화려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올해는 뭔가 축소된 분위기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즈베키스탄 독립 후, 32년의 성과를 평가한 후 새로운 조기 대선의 성공과 개헌 이후 국민 권익 신장, 경제, 공공, 교육, 외교안보 등 전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 성과를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 전 국민은 32년 전 독립을 이루어 내고 그간의 국가 발전을 선도해온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이후 3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국민의 자유와 권익 신장, 국가 정체성 및 민족 문화, 전통 부활 등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는 독립 주권국가로 큰 발전을 이루어 왔다고 했다. 경제 현대화 및 다변화, 수출잠재력 증대, 중소기업 및 비즈니스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즈베키스탄, 독립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가? 1924년 10월 27일, 러시아령 투르키스탄과 구 부하라 에미르국, 히바 한국의 영역을 합쳐서 SSR 우즈베크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지속적인 행정개편으로 인해 산하의 자치공화국이던 타지크가 1929년에 분리되어 나가 SSR 타지크가 되었으며 1930년 수도를 타슈켄트로 천도하였고 1936년 SSR 러시아 공화국에 속해 있었던 카라칼파크 자치공화국을 얻어 호라즘 지역의 월경지가 해소되었다. 그와 함께 각 민족들의 강제 이주가 시작되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농경지 개발과 중공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던 SSR 우즈베크는 키질쿰 사막으로 인해 농경지 개발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공업화도 SSR 카자흐에 비해 기술적 부재화 현상이 극심해 결국 다른 대체 생산을 염두하게 되었다. 시르다리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의 수로, 그리고 아랄 해로 연결되었지만 내륙국이라는 지정학적 한계는 우즈베키스탄의 경제를 더욱 낙후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서기장인 흐루시초프는 SSR 우즈베크를 시찰하다가 목화수공업을 보게 되었고 이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라는 당의 결정권을 SSR 우즈베크에 수령한다. 1960년대 들어 관개농업을 통한 목화산업을 육성하게 되면서 소련 경제 발전에 대해 과도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소비에트는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획하는 계획경제(Panned economy) 체제였다. 소련 경제는 가장 최상위 모스크바에서부터 최하위 지방까지 오로지 중앙부처인 고스플란(Госплан)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이는 뻬레스뜨로이까 이전까지 소련 경제를 지배하는 가장 큰 원칙이었다. 이와 같은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공업 기반이 전무하던 1930년대 중공업 중심 산업화를 추진할 때나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이 국가가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관리하는 전시경제에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경공업과 서비스업같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간시장이 다양한 소비자들의 수요를 반영하며 성장하던 부분들까지 일괄적으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적용하면서 소비 경제는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생산량 과다 경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당시에 이와 같은 성과 위주의 정책은 우즈베키스탄 같이 농업과 공업이 매우 후진적인 국가에게는 치명적인 한계를 불러온다. 연간 목화 생산량은 계속 높아만 가는데 문제는 우즈베키스탄의 현실에 대규모 목화밭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아랄 해가 작은 내륙 바다이긴 했지만 사실상 염분 농도가 일반 호수보다 짙은 수준이었고 연결되는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두 강에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기 위해 댐을 쌓아버렸다. 아랄 해 주변은 모두 사막이라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에서 유입되는 물로 호수가 유지되었지만 당시 SSR 우즈베크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목화 농사용 관개용수를 확보한다며 댐을 축조해 차단한 것이다. 동시에 길이 1,445km의 카라쿰 운하를 비롯한 여러 관개수로의 건설 역시 두 강의 수량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목화는 상당한 양의 수분을 빨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목화를 재배했던 곳은 타 작물을 재배하는게 불가능하다. 이는 목화가 빨아들이는 수분으로 인해 땅이 메마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정작 목표였던 목화 재배량 자체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다른 SSR에 비해 경쟁력 또한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은 어처구니없게도 1980년대엔 목화 생산량을 뻥튀기하는 방식으로 일부 공산당 간부들이 엄청난 뒷돈을 챙기는 중앙아시아 최악의 부정부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목화 생산량이 늘면 이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추가 예산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를 활용해 SSR 우즈베크의 경제력에 보탬이 되려했던 것이다. 뻥튀기가 들킬 걱정은 적정량의 뇌물로 해결했다. 이와 같은 목화 생산 뻥튀기 보고는 날이 갈수록 그 규모가 커져 1980년대엔 실제 생산량보다 최소 약 50-100만 톤, 최대 300만 톤까지 부풀려진 생산량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생산량 허위 보고를 통해 지급된 추가 예산 역시 약 40억 불에 이르렀고 이처럼 옳지 못하게 취득한 돈이 대개 SSR 우즈베크 국민들을 위해 좋게 쓰일리 없다. 돈은 대부분 SSR 우즈베크 간부들에게 착복되었고, 각종 사치품과 그림을 사들이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SSR 우즈베크 서기장을 20년 넘게 해오던 샤로프 라시도프가 1983년 10월에 자동차 여행 중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사건 진상 조사 차원에서 KGB가 SSR 우즈베크를 방문했고 사고 사건을 조사하다보니 이같은 최악의 비리가 우연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 결과 SSR 우즈베크의 목화 담당 장관은 사형 판결까지 받았고, 나머지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상당히 긴 징역형 판결을 받았다. 물론 당의 처벌이 두려워 자살한 간부들도 몇 명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최악의 비리에 SSR 우즈베크 간부들 내부에서도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목화 생산 증진을 강요하는 소련의 중앙 볼셰비키의 경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발한 인물이 바로 이슬람 카리모프였다. 이에 중앙아시아 최악의 비리 사건에 격노하고 있던 우즈베크 시민들은 이슬람 카리모프를 지지했고 결국 카리모프는 SSR 우즈베크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렇게 얻은 인기로 1989년 소련 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장이 된다. 그러나 SSR 우즈베크는 당시 목화 생산으로 인해 흑토를 제대로 경작하지 못해 경제난에 곧잘 빠지곤 하던 SSR 우크라이나보다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소련 말기 지독한 경제침체는 SSR 우즈베크의 독립을 염원하게 했다. 카리모프는 1990년 3월 24일에 SSR 우즈베크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9월 1일에 독립하면서 1991년 12월 29일에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게 된다. 사상 최악의 목화 비리 사건이 사실상 우즈베키스탄의 독립을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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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9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 독립기념일 - 우즈베키스탄 독립의 비화, 사상 최악의 목화 비리 사건의 전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