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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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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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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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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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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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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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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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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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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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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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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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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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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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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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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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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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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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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한 배경,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
- 아테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실행되었던 국가가 아니었다. 아테네의 중심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이다. 아레오파고스에서는 329명의 위원들을 중심으로 공동통치의 사회를 이룩해냈다. 여기에서 9명의 아르콘(Archon)을 뽑는데 이들이 사실상 아테네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이었다. 이들 9명의 아르콘들은 국가의 위기가 생겼을 때 서로 의견을 통합하곤 했는데 임기가 1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의미없는 직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곤은 그리스어로 "지배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르크(ἀρχ)에서 파생된 분사다. 여기에는 1명만 지칭되는 단수형으로 흔히 여기지는데 ἄρχοντες (아르콘테스)는 여러 명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지배자로 음역될 수 있는데 고대 마케도니아어로는 "의미없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니 1년 밖에 없는 임기에 329명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이 되는 시스템에 대한 비꼬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폐해의 결정적인 부분은 아테네에서 발생한 총체적 난국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와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은 농경지는 일부 지주에게 집중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심각한 경제양극화를 겪는다. 평민들은 소출의 1/6을 지주에게 바쳤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토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은 많은 인구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아티카 일대는 외부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면서 아테네의 빈민층은 크게 증가했다. 빈민들은 토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채무를 갚을 경제력은 애초부터 없었고, 귀족과의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두 계층이 서로 반목하는 상태로 나타난다. 게다가 귀족들끼리도 심각한 내부분열이 존재했다. 당시 9명의 아르콘 중 하나인 메가클레스는 고리 대금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못갚은 시민들을 노예를 부리거나 경지들에 투자하여 자신의 땅으로 만들고 그 영지를 살라미스 해안가까지 늘려갔던 것이다. 이는 즉, 당시 그리스에서 부동산 개념과 투기의 개념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부분이다. B.C 632년 올림푸스 제전에서 우승하고 월계관을 수여받은 킬론은 메가클레스가 이에 시셈하여 그의 땅을 막대한 돈을 주고 사들였으며 졸지에 집을 잃은 킬론의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파고스를 장악하려 했다. 그는 두 지역을 장악하고 참주에 등극하여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던 메가클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메가클레스는 킬론을 제거하기 하기 위해 킬론과 킬론의 친구들을 아크로폴리스 신전으로 끌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 일파들은 중대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는데, 그들은 아테나 신전에 들어와 있었던 킬론 일파에게 복수의 여신들 신전 앞에서 재판받으라고 설득해놓고는 킬론 일당이 아테나 신전에서 복수의 여신 신전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척살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신전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었다. 그 결과로 인해 킬론의 남은 세력들은 메가클레스와 그의 일파를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메가클레스에게 땅과 재산을 잃은 시민들이 킬론의 편을 들어 메가클레스를 비난하는 시위를 일으키는 등 아테네는 중대한 사회적 갈등으로 내흥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솔론이라는 거물이 나타나서 오늘날 아테네의 민주정이라 말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키는데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의 원조가 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에 솔론과 같은 영웅은 과연 탄생할수 있을까?, 그가 누구일까? 누가 킬론이고 누가 메가클레스 같은 자일까? 그 전횡으로 인한 피해는 누가 볼까? 생각과 칼자루는 여러분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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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한 배경,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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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탄자니아에 전수해 심은 작물, 커피와 면화
- 독일은 탕가니카 전 지역의 토질을 정밀 조사하여 농작물의 가장 적절한 재배 가능 지역을 확보하여 새로운 작물을 시험 재배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반강제적인 지도가 이어졌다. 독일 식민 정부는 전문 기술자와 농업 전문가들의 지도를 통해 새로운 수익성 있는 농작물의 재배 방법을 교육시켰다. 탕가니카에서는 우간다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었으며, 백인 정착민들은 노동력의 부족으로 경작 사업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익혀 온 전통적인 농사 방법과 결별하도록 설득 당하게 된다. 원래 아프리카인들은 다량 재배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농작물만을 재배하여 왔기 때문에, 수익성 재배를 시도하는 식민 정부의 정책에 위배되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환금 작물을 재배하려는 의욕을 갖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농사법으로 열심히 경작하여 노동의 대가로 수확을 얻음으로써 수익을 벌어왔으나, 식민 정부가 주민들을 통제하고 규제하자 당국에 대한 불만과 폭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원주민이 처음 재배하게 된 작물은 코코넛으로서, 이미 마피아(Mafia) 섬과 해안 지역에 대단위 코코넛 농장들이 약 10년 동안 조성되었으며, 당국의 농업 전문가들은 생산을 감소시키는 병충해의 예방에 대한 지도를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1902년, 식민지 정부는 영농에 있어서 윤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공동 집단 농장 계획을 세워 공동 경작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영농 장비를 제공하여 유럽식 영농 방법을 원주민에게 소개한다. 1902년, 농업 연구소(Biological and Agricultural Institute)가 우삼바라 산맥의 아마니(Amani)에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낙농업, 목축업, 농경작법 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학적 연구와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와 예멘으로부터 이식하여 심은 것이 바로 탄자니아 커피였다. 탄자니아에서 커피 재배에 관여한 종족은 부코바(Bukoba)의 하야(Haya) 족으로서, 1905년에서부터 1912년 사이에 로부스타(Robusta) 커피를 시험 재배하여 수확이 날로 증가하였다. 한편, 차가(Chagga) 족은 백인 정착민들의 영농을 모범 삼아 고급 양질의 아라비카 커피를 생산하였다. 이와 같이, 수출을 위한 커피를 다량 생산하게 된 하야 족과 차가 족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다. 과거 대상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니암웨지(Nyamwezi) 족은 수쿠마(Sukuma) 족과 함께 땅콩 재배로 생산량의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기타 수익성 품목으로는 고무와 동물 가죽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정부가 고무 농장을 육성 장려하였으며, 야생 수목에서 다른 종류의 고무가 채취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주로 동물의 가죽을 수출하여 국가 경제에 기여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탕가니카에도 큰 변화가 이어진다. 식민 통치 국가가 영국으로 바뀌게 되고, 생산물의 세계 시장 가격이 최하로 떨어져 원주민 농가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새로운 정부는 주민을 돕기 위해, 1922년에 토지 법령을 제정하여 기존의 유럽인 토지를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재분배하였으며, 원주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탕가니카 수출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4년, 커피 경작자들은 킬리만자로 원주민 경작인 협회(Kilimanjaro Native Planters' Association)를 결성하여 커피의 질을 개선시키고 수출 시장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29년부터 1933년까지 4년간 지속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하여 농민들은 타격을 입게 된다. 1933년 이후 정부는, 재차 경작 민들을 돕기 위한 조치를 취하며, 세계 시장 가격의 호전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1892년, 탕가니카 해안 지역에 사이잘 재배의 타당성이 제기되었으나,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충분한 자본금과 노동력의 확보와 대규모의 적절한 경작 농지가 요구되었으며, 사이잘은 경제성이 우수한 작물로 평가되어 수많은 백인 정착민들이 사이잘 경작에 착수하게 된다. 사이잘은 탕가니카 최고의 수출 단일 품목이 되었다. 커피는 케냐의 킬리만자로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소개가 되었는데, 그 지역 아프리카인들이 커피 사용법을 전파하였다. 독일인들은 우삼바라 지역에 플랜테이션 작물로 개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개발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킬리만자로와 부코바(Bukoba) 지역이었으며, 차가(Chagga)족과 하야(Haya)족에 의해 성공적인 재배가 이루어졌다. 독일인들이 오기 전에 해안가에서는 약간의 목화가 재배되고 있었으며, 정부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목화 재배를 장려했지만, 20세기 초반 시장이 번성할 때까지 그 작물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독일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목화 생산을 장려하였다. 1902년부터 몇 년 동안 해안에서의 목화 재배의 증산을 위해 족장들의 독려를 유도하였으며, 목화 회사들을 통해 목화씨를 무료로 공급하고, 그 사용법까지도 가르쳤다. 초기의 파동에도 불구하고 목화 사업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18년에는 목화 밭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인 수중에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령 아프리카는 수익적인 지역이 되지 못했다. 이는 수출 총액은 고작 125만 파운드에 불과했고, 독일로부터의 보조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독일의 식민지 통치는 비판을 받아야 하겠지만, 교육면에서만큼은 독일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그들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정부, 특히 선교 단체들은 1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 수치는 독일의 어떤 다른 식민지에서보다도 높았으며, 전후 영국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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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탄자니아에 전수해 심은 작물, 커피와 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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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칸과 사르타크, 베르케 칸에 이르기까지의 킵차크 한국
- 바투(1207~1255)는 몽골 제국 킵차크 한국의 칸(재위 : 1242~1255)으로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주치 칸의 차남이다. 바투는 주치 칸의 아들들 중에 가장 뛰어난 칸이라고 했으며 몽골의 “가장 훌륭한 칸(The great Khan)” 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바투는 부친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바투가 다스리는 영토는 본래 이르티쉬 강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 악몰린스크(Ackmolinsk), 투르가이(Turgay) 또는 약튜빈스크(Yacktuvinsk), 우랄스크(Ulalsk), 아다지(Adazi), 옛 호라즘 제국의 본토인 히바(Hiba) 지방을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는 제베(Jebe)와 수부타이(Subutai)의 원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포함하게 된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즈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때 바투와 칭기즈칸의 다른 후손들 간의 세력이 정쟁이 발발했다. 오고타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하고 이에 대해 바투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하여 자존심이 상한 바투는 유럽러시아로 돌아가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리게 된다. 그러한 바투는 몽골의 전승에 의하면 매우 강력하고 훌륭한 대칸이라고 하지만, 러시아 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기도 한다. 바투는 1237년에 러시아의 도시 쿠르스크(Cursk), 벨고로드(Belgorod), 랴잔(Ryazan) 등을 함락하여 파괴했고 1238년에는 북방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Krestesky)의 성들을 침략했다. 그리고 1241년 4월 11일 셔요(Seryo) 강 다리 위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의 벨라 4세를 격퇴하기도 했다. 한편 바투는 칭기즈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그가 칭기즈칸의 장손이기 때문인데 혈통적인 부분에서의 논란이 존재했지만 칭기즈칸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받았다는 것과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역대 몽골 제국의 대칸 옹립자로 큰 조력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오고타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오고타이의 아들인 구유크(Guyuk)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분쟁의 발단은 구유크가 1236년 바투의 가을 원정군에 합류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1237년 겨울에는 리아잔(Riazan)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년 말, 1240년 초에는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와 함께 아스(As)인들의 거점인 메게스(Meges)를 점령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도 참여했으며, 1241년 4월 11일 셔요 강 다리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원정의 과정에서 구유크와 바투의 사이가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구유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보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 이를 알게 된 오고타이는 구유크와 몽케에게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Kadan)과 부첵(Bucheck)에게 맡기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사 강과 도나우 강 강변에서 이별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구유크는 전쟁에서의 바투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고 한다. 이러한 비난은 두 인물간의 극명한 갈등을 블러왔다. 이후 구유크는 1241년 가을에 회군을 시작했고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적극적으로 두 인물간의 대립이 점화되었다. 그러나 1246년 구유크는 바투의 반대와 그 외의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극명하게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임박한 상태까지 이르렀으나 같은 해에 구유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의 왕비 소르칵타니(Sorkatani)와 동맹하여 오고타이 계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가 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 바투와 그의 장남 사르타크가 죽었을 때 바투의 형제 베르케(1207~1266)가 킵차크 한국을 계승하였다. 베르케는 몽골과 원나라에 있는 그의 사촌들과 통합하려하지 않았으며 훌라구 칸과는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베르케는 중원의 원나라를 킵차크 한국의 이론적인 상부로 공공연히 인식하였다. 사실 베르케는 그 때까지만 해도 몽골 제국에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립적인 군주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베르케는 서유럽을 공략하는 문제에 관하여 바투와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다. 이는 바투와 그의 형제들과의 알력 다툼도 존재했지만 무엇보다도 바투의 영향력 안에서 정치, 군사적인 부분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가족적인 면에서의 바투는 적어도 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토코(Toko) 칸은 차남이다. 바투 칸의 사망 이후 사르타크(Sartaq, 1223~1256)는 몽골 제국의 서방을 영위했던 킵차크 한국의 제2대 칸(재위 : 1255~1256)으로 즉위했다. 1241년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사라이로 와서 사르타크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는 사르타크의 안다(Anda)이자 바투 칸의 양자가 되기도 했다. 알렉산더 네브스키는 킵차크 한국의 가신으로 임명되었고 이로 인하여 블라디미르의 대공이 되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후일 사르타크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의 양부인 바투는 몽골 전통의 샤머니즘을 믿었다. 이러한 사르타크의 개종에 대해서 여러 가지 구전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구전 중 확실한 것은 거의 없으며 서술로 전해진 부분에 의하면 아르메니아 출신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작가의 서술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사르타크가 루스와 슬라브 인들 사이에서 성장했으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정교회의 세례를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르타크가 교황 이노센트(Inosent) 4세에 의해 전해진 1254년 8월 29일의 로마에서 기록되어 있는 메시지에 의하면 사르타크는 당시에 키예프 대공을 겸임하면서 몽골인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교황은 그러한 소식을 칸이 로마 교황에게 보내진 몽골 측 사절이 된 사제에게서 들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사르타크는 킵차크 한국의 칸으로서의 치세 자체의 연수로써는 단명한 사례에 들어가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지 1년 후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킵차크 한국 내부에 기독교 문화를 이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르타크가 즉위한 지 1년 만인 1256년에 죽었기 때문에 무산되었고 그의 죽음을 두고 아마도 독살되었을 것으로 여러 기록과 논쟁을 기반으로 점철되었다. 그러한 사르타크의 독살설이 나타난 배경은 주치의 3남이자 바투의 동생, 사르타크의 숙부 베르케에 의해 사르타크가 대칸의 지위에 계승되기 전, 잠시 울라크치(Ulakchi)라는 황족이 계승된 바 있었다. 그러나 울라크치가 사르타크의 형제였는지 베르케 칸의 아들이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고증이 이루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이러한 울라크치가 사르타크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울라크치가 사르타크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이유로 인하여 사르타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 중에 있다. 사르타크의 딸 테오도라(Teodora)는 일찍부터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식의 이름을 사용했다. 본명 테오도라는 기독교식 그리스어 이름으로 이미 기독교로 개종되어 있던 옛 키예프 대공국의 영주 및 귀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특히 체르니코프의 대공 벨루제로(Beluzero)와 로스토프 대공인 글레브 바실코비치(Glev Basilkovic)의 아내이기도 했다. 테오도라는 로스토프의 콘스탄티누스가 그녀의 손자였고 그는 알렉산더 네프스키에 의해 한 때 숙청된 첫 조카였다. 그들 킵차크 한국의 칸인 사르타크와 테오도라의 후손은 러시아의 이반 4세와 러시아 귀족의 수많은 가족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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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칸과 사르타크, 베르케 칸에 이르기까지의 킵차크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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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상호 공존한 이슬람과 유대인
-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레콩키스타의 완료 이후 이민족들을 불쌍히 여기며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남편인 페르난도 대공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이민족과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기독교에 비해 이슬람은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단, 후 우마이야 왕조가 그랬던 것처럼 지즈야(Jizya) 명목으로 종교세를 부과하는 것 외에는 그들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지즈야를 부과하는 대상이 바꼈을 뿐, 지즈야는 그대로 유지됐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 이후, 곳곳에서 예루살렘 무슬림 탄압에 대한 보복은 있었지만 기독교와 같이 약속을 어기면서 탄압하지는 않았다. 다만 후 우마이야 왕조가 분열되면서 각 이슬람 토후국들이 생성되었고 이들은 기독교인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며 박해하였지만 타 지역에 그리 심하지 않았다. 레콩키스타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어쩌고 보면 이슬람의 관용 아래 성장한 기독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레콩키스타의 승전군은 그라나다 산 마티아스 거리를 따라 알 함브라 궁전까지 행진했다. 산 마티아스를 지나면 알 카사바까지 연결된 길이 나타나며 알피레로스(Alfareros) 성벽과도 연결되어 있다. House of los Tiros는 1530년~1540년에 지어졌고 알함브라와 연결되어 있다 Alfareros 벽의 일부이며 군사요새로써 기능도 유지했다. Alfareros 벽이 있었던 곳은 los Girones의 집이 있는 곳으로 1492년 알함브라 칙령이 발표된 곳이다. 알람브라 칙령은 1492년 3월 31일 조인된 칙령으로서 유대인의 추방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합작하여 발표한 조약으로 유대인들을 7월 31일까지 추방하도록 했다. 페르난도 대공은 유대인을 극혐했는데 예수를 죽게 한 민족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 유대인들은 8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상황이 초래되면서 유대인들의 세력도 확장되는 한편 로마 제국 시대에 건너온 유대인들은 더욱 부를 누리며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며 우마이야 정부가 특권을 주었고 이들은 이슬람의 통치 체제 아래에도 잘 살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로마 카톨릭 박해가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은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받은 예루살렘 무슬림들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기독교 박해를 방관하거나 과거 자신들이 겪은 박해의 앙갚음을 위해 무슬림들에게 간접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의 이민과 무역 활동을 더욱 장려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으로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이슬람과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왕조의 세력이 기울면서 유대인의 거주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레콩키스타로 인해 이슬람 세력은 점점 붕괴되어 갔고 이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통제 행위는 더욱 높아져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 국가나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카톨릭 신도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개종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문화 차이를 극복할 좋은 방안으로 여겨지면서 많은 가정들이 이를 택하고 부를 그대로 누리는 일종의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결국 왕실과 교회에 의해 그 꼼수가 들키면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왕권 세력은 유대인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 무슬림보다 더 나쁜 민족으로 인식하게 된다. 레킁키스타에 의해 알함브라가 함락됐을 때 무슬림 1.200명의 민병대들은 그라나다 왕과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이들우 전멸했지만 그나마 무슬림 문화가 고결하게 남은 것은 1.200명의 순교한 민병대들 덕택일지도 모른다. 이후 페르난도는 1502년에 1492년 알함브라 칙령으로 무데하르 이슬람교도들에게 부여된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묵살하고 위반하였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모든 이슬람교도들에게 카톨릭으로 개종을 한 콘베르소 모리스코가 되거나 추방하도록 했다. 무어식 건축 양식을 할 줄 알던 무데하르 장인들 같은 일부 이슬람교도들은 잔류했다. 여기서 나타난 콘베르소(Converso)는 중세 스페인 시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무데하르(Mudejar)는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재정복이 끝난 후,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슬람 세력을 말한다. 반면 이슬람에서 강제적으로 기독교에 개종한 사람들을 모리스코(Morisco)라 불렸다. 오늘날 그라나다의 푸에르타 레알 광장은 세파라디(Sefardí)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유대인 지구였다. 세파라디 유대인은 스페인을 기원으로 하는 유대인 그룹으로, 주로 독일계 유대인에 해당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정의되고 있다. 세파라디 유대인은 주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계 유대인들로 여겨지지만, 이란과 같은 중동 나라의 유대인이나 북아프리카계 유대인도 같이 포함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중동의 유대인들은 미즈라흐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되었으나, 이후 다시 돌아와 유대인 관습을 유지하고 있는 종족들이다. 유대교 정통파 중 한 갈래로서, 전체 유대인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유럽, 중동, 남미 등에 많이 거주한다. 그리고 프랑스 유대인의 대부분이 세파라디 유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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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상호 공존한 이슬람과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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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영국령 탕가니카로의 이관과 양국의 대립 및 협정
- 영국 정부는 실제적으로 노예무역이 종료된 당시 그 지역에 더 이상의 흥미가 없었다. 따라서 마디주의자(Madhist) 반란이 수단에서 발생하고 있을 때인 1월, 하르툼에서는 고든 장군(General Gordon)이 살해당하고, 3월에는 러시아 인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이례적으로 심상치 않는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위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세계사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동아프리카보다 훨씬 중요한 북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이와 같은 조짐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들은 결코 독일을 적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글래드스턴(Gladstone) 영국 수상은, 만일 독일이 식민지를 건설할 힘이 있다면, 나는 전적으로 “성공을 빈다.”라며 말할 것이라며 대승적인 차원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독일을 조롱하기 위한 발언이기도 했다. 이에 잔지바르의 술탄과 존 커크는 큰 굴욕을 느꼈으며, 8월에서야 영국의 태도를 깨달은 독일은 잔지바르에 해군 소함대를 파견하여, 우사가라(Usagara), 은구루(Nguru), 우세구아(Useguha), 우카미(Ukami), 위투의 술탄들과 독일이 맺은 조약들을 수락할 것인지, 아니면 잔지바르가 공격당할 것인지의 선택을 술탄에게 강요한다. 술탄은 어쩔 수 없이 그 협약을 인정함으로써, 잔지바르의 합병은 공식적인 부분이 되었다. 다음 문제는, 잔지바르 술탄 영토의 정확한 경계는 어딘가 하는 것이었다. 독일령으로 구성된 어떤 지역에서는 술탄들의 권리를 무시했지만 전적으로 부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지역은 독일의 권리가 있는 영토 사이에 놓여 있는 해안 지역으로서, 그 지역은 해상 교통을 통해서 독일인들과 연락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국은 그 해안을 적절히 감시하는 위원회(1885~1886)를 구성하도록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하였다. 공식적으로 위원회는 주요 섬들과 항구들은 분명히 술탄의 영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결정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 위원회는 술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공정하다거나 대표자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위원회는 내륙을 개방하는 최적의 상업적 기지로서, 몸바사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급송 공문에서 언급하고 있었다. 독일의 권리를 내세우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는, 독일이 전 지역을 점유하는 것이 인정될 것인지, 혹은 영국이 그 일부 지역에서의 권리를 요구할 것인지에 있었다. 존 커크 경은 영국 정부에 보내는 공문에서 영토의 분할을 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는 동안 내륙에서는 협약을 성사시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1884년, 해리 존스턴(Harry Johnston) 경은 킬리만자로 인근 지역에 탐험대를 보내 타베타(Taveta)에 작은 조차지(租借地) 설정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협약을 획득하게 된다. 1885년 매슈즈(Mathews) 장군은 독일이 후에 그 지역의 권리를 주장할 것을 염려하여 킬리만자로에 탐험대를 파견했고,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여러 부족들과 수십 가지의 조약을 맺었다.그리고 며칠 뒤 독일인 율케(Juhlke) 박사가 도착하여 차가(Chagga) 부족을 배신하게 하여 독일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1886년, 영국 탐험대는 타베타 지역에서의 존스턴 협약을 확실히 확약하기 위해 파견된다. 이상과 같은 문제들보다 더 중요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동아프리카에 있어서 윌리엄 매키넌(Willem Mackinnon)경, 제임스 허턴(James Hutton), 맨체스터 상인들과 같은 영국 무역업자들이 관심을 보였으며, 영국령 동아프리카 협회(British East Africa Association)가 동아프리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열강들의 식민지 요구가 매우 광범위해지고 번거롭게 되기 전에 잔지바르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는 1886년 10월의 비스마르크의 결정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집트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를 지원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영국이 2주 이내에 협정에 동의하도록 강요한다. 비스마르크는 동아프리카 전 지역을 점유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결코 피터스 같은 열렬한 식민지 개척자는 아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문제를 두고 영국과 협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1886년 10월, 영국과 독일 두 세력은 영토 분할의 원칙을 협상하여 결정짓게 된다. 잔지바르의 술탄 바르가쉬(Bagash)는 협상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며, 영국과 독일의 합의된 결정에 의해 그의 위상이 결정되는 입장이었다. 이 잔지바르 협정에서 영국은 독일이 해안 전역을 차지할 가능성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동아프리카 분할을 확실히 결정짓지는 못했다. 특히 서쪽의 경계는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식민지 영유권 주장과 반발이 계속되었다. 한편, 솔즈베리(Salisbury)경이 이끌던 영국 정부는, 피할 수만 있다면 동아프리카에서 일을 더 이상 진척시킬 의도는 없었다. 독일과의 협약의 목표는 최소한 동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 독일인들을 포위하여 경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데 있었지만, 솔즈베리 수상은 영국 정부가 분쟁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였기 때문에, 수상은 심지어 에콰토리아(Equatoria)에서 에민 파샤(Emin Pasha)를 구출하기 위한 탐험대를 보내는 데도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윌리엄 매키넌경은 개인적으로 탐험대를 조직해야 했고, 매우 유능한 탐험가 스탠리를 보내 1889년 임무를 완수한다. 이리하여 영국이 관장하는 지역의 발전은 1887년에 발족한 영국령 동아프리카 협회가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 동아프리카 협회 의장(議長) 매키넌에 의해 주도된 협회의 가입자들은 이미 부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동기는 박애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것은 돈벌이가 되는 사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솔즈베리경은 중립을 지키기로 확고히 결심했고, 왕실의 설립 허가서 부여를 거부했다. 그는 대영 제국 동아프리카 회사(Imperial British East Africa Company, IBEA)가 출범한 때인 1888년에는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생긴다. 물론 동아프리카 회사의 설립은 영국의 이익과 그 목적을 설정한 명백한 증거였다. 처음의 목적은 동아프리카 노예무역의 폐지였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이집트를 계속 통치하고, 그 영향력을 아프리카를 종단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 강화되었다. 이집트를 통치한다는 것은 이집트가 의존하고 있는 나일 강의 수원지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1888년 정도에 되어서야 겨우 영국은 그들의 이집트 지배가 항구적인 것이 됨으로 인해 우간다와 동아프리카 전 지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급속히 증가한다. 그리하여 매키넌은 특권을 얻게 되며, 그의 회사는 영국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독일의 영역도 처음에는 한 회사에 의해서 경영되었고, 영국과 마찬가지로 해안 지역에 노력을 집중시켰다. 공식적으로 해안 지역은 그 때까지 잔지바르 술탄의 영역에 속해 있었지만, 영국과 독일 회사는 술탄의 세관 세입을 지속적으로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50년 동안 10마일의 해안 지역을 조차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협정을 두 회사들이 받아들였다. 거의 동시에 독일령에서는 아라비아인 부시리 빈 살림(Bushiri bin Salim)이라는 인물과 지구아(Zigua) 부족의 브와나 헤리(Bwana Heri)가 주동하는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 같은 조치에 저항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반란은 아라비아 인들만의 반란도 아니었고, 독일인이 매우 잔인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침략자들에 대한 해안 지역 주민인 아프리카인, 아라비아인들의 거국적인 저항이었다. 영국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과 협력하였다. 독일 정부 역시 이 상황을 파악하고, 회사의 업무를 접수할 시기가 되었다는 결정을 내렸다. 회사가 거의 모든 해안 도시에서 빌려나는 동안 비스만(Wissmann) 장군은 수단인, 줄루인과 소말리인 등으로 구성된 군대의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1889년에 파견되었다. 12월에 바가모요(Bagamoyo)가 진압되고, 부시리가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 반란은 그 해 내내 계속되었다. 헤리는 그 이듬해 4월에 영국으로 투항했다. 이 반란으로 인해 동아프리카에 있던 모든 유럽인들에게 있어 매우 비참한 시기였다. 그리고 잔지바르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은 반란군의 총공세였다. 영국이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려는 독일 회사를 돕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상당한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경쟁의 대부분은 라무와 위투, 주바(Juba) 사이의 영토, 만다(Manda)와 파테(Pate) 섬들에 대한 이권을 요구했던 북부 지역의 독일 위투 회사(German Witu Company)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국제 위원회에 의해 기각되었지만, 위투는 여전히 분쟁의 잔재로 남아 있었다. 피터스는 어떠한 협정도 우간다를 그의 영역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영국령을 포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영역이 독일령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여러 구실을 대며 출전하지 않다가 에민 파샤(Emin Pasha)를 구원하기 위한 독일 탐험대를 주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스탠리가 에민 파샤의 구출을 위해 이미 떠났으며, 부시리의 반란이 한창 진행 중이고, 위스만은 그의 권한을 인정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영국의 순시선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터스는 1889년 7월에 위투에 도착하여 300명의 일행과 함께 북쪽의 타나를 향해 출발한다. 그로부터 한 달 이후, 영국 회사 역시 빅토리아 호를 탐험하기 위해 후일 귀족 작위를 받은 프레데릭 잭슨(Frederik Jackson)이라는 노련한 사냥꾼을 파견함으로써 응수했다. 잭슨이 먼저 우간다에 도착했지만, 우간다의 정치에 개입되는 것을 금지 시킨 영국 회사의 지시 때문에 잭슨은 탐험 비용에 보탬이 되기 위한 코끼리 사냥을 계속하는 동안 피터스가 도착했다. 그는 우간다를 독일의 보호 아래 두는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1890년 부간다 왕국의 카바카 음왕가(Mwanga)와 왕가(Wanga)의 나봉고 사크와(Nabongo Sakwa)와의 협정을 성사시킨다. 그 후 곧 그는 바가모요로 돌아갔다. 그리고 잭슨이 우간다에 돌아왔을 때 피터스의 행적에 격분했다. 그러나 피터스는 바가모요로 돌아왔을 때, 그가 없는 사이에 우간다를 영국령으로 인정해 버린 독일 정부의 행적에 격분하였다. 1886년과 1890년 분할 협정에 따른 독일령 동아프리카 지역은 잔지바르를 포함하지 못한 것과 루안다와 부룬디를 포함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탄자니아(Tanzania)와 거의 동일하다. 1886년 이후 그 지역의 역사는 5개의 주요시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1907년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정부는 대개 행정과 농업에 있어서 실험적 적응과 수많은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두 번째 시기는 1914년까지 지속되는데, 이때는 아프리카 주민과 운송 수단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국가 발전에 성실한 시도를 보인 시기로 특정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세 번째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였고, 네 번째 시기는 영국 지배 시기였으며, 마지막 다섯 번째 시기는 잔지바르와 협력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노린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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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영국령 탕가니카로의 이관과 양국의 대립 및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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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욕구, 삶과 시대의 분열을 넘어서 통합의 길로
- 한국에서 철학의 과제는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매우 어렵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온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은 철학 연구자들이 한국에서 철학의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비해 일반적으로 이에 따른 구체적 방향성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마치 각자가 화두를 던지기만 했을 뿐, 그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스스로 망각해 버리는 것처럼,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공을 떠도는 공허한 말 잔치만을 낳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된 까닭을 생각해 보면, 각자의 문제의식이 과연 정확하게 한국에서 철학의 과제가 무엇인가에 관해 그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물음 자체에만 함몰된 것은 아니었던가! 한국에서 철학이라고 할 때, 한국의 철학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논의된 모든 철학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는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 철학이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수성에만 고착될 경우는 과잉 민족주의에 편승해 국수적 폐쇄성에 매몰되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서양철학에서 입증된 고유한 개념이나 방법론의 일반적 규준(規準)이 간과되는 데에서 기인한다. 또 임기응변(臨機應變)의 방식으로 동양에도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이 있다고 하거나, 동양철학에 관해 무지한 탓으로 돌리는 것도 철학의 고유한 개방성보다 고식적(姑息的)으로 자기 폐쇄성과 특수성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서구적 논리 이해를 위해 필요한 개방적이면서 진취적 태도가 결핍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역사의식이나 변화 및 분화되어서 발전되는 현실 세계의 구체적 의미와 구조에 대해, 그 방향 설정 문제에 관해, 올바른 비판 및 판단의 기준이 필연적으로 결핍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결핍은 철학이 비판과 논쟁을 상실한 채 제도권에 안주해버리고, 철학사상과 역사 현실의 유기적 관계를 단절한다.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자면, 철학 하기(Philosophieren)의 주체로서 각자는 세계에 대한 자기 위치를 설정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인 철학의 필요성, 즉 삶과 세계의 분열 및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가는 철학의 욕구나 현실적 상황인식에서 그 출발점을 근본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역량이 부족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소용돌이 속에서 그 고유한 명맥을 겨우 이어 왔던 한국 철학이 서구적 합리성의 논리에 종속되어서 자신의 주·객관적 위치 정립에 요구되는 개별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현실 대응 방식을 간과했다. 왜냐하면 한국 자체 내부에서 충분히 숙성되고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독자적 사상 정립이 거듭된 혼란과 갈등의 실타래에 묶여 있는 한, 무엇이 철학적 탐구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아무도 결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고유한 철학사상은 독립적으로 설 자리를 상실해버렸다. 둘째, 분화되고 발전된 현대세계와 분리된 채 관습적 사고에 빠져서 고전에 대한 훈고학적 해석이나 맹신적 복고주의 혹은 사대주의에 얽매인 자기 폐쇄성은 현실 세계에 합당한 자아 가치를 새로이 발굴하거나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산할 수 없다.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오직 경직된 사고에만 젖어 누가 그렇더라고 말하고, 이에 따르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면 한국에서 서양철학은 어떠한가? 서양철학 전공자들에 대해 한국철학 전공자들이 비판하는 대표적인 것은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한국의 고유한 생활방식이나 정신적으로 발현된 창의성 그리고 철학적-종교적 가치관을 그 자체로 소화하기보다 다소 무성의와 주체성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또 서양철학에서 도출된 개념이나 관점으로 한국의 고유한 철학 혹은 종교를 재단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한국의 고유한 철학이나 종교를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 있겠다. 이와 반대로 한 시대와 현실이 반영된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 바로 철학인데, 한국에서 서양철학이 설익은 서구적 합리성과 주지주의적 경향에 안주해버리거나, 다양한 흐름에서 특정한 철학사상의 유입은 서구 중심적인 보편성에만 경도되어 버렸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공통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삶의 지향성을 위한 전통의 수용과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요구된 특수성의 인식이 본질적 측면에서 간과되고 말았다. 이처럼 현실과 분리된 ‘철학 하기’란 공동체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현실 대응과 이에 따른 목표 달성을 등한시하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철학의 역사성에 대한 올바른 자각 없이 특정한 철학 사상이나 학설을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구체적인 현실 대응과 목표 달성을 저해하는 사실로 귀결된다. 온갖 다양한 철학들의 학파 중 기껏해야 한 개 철학분파 정도로 형성되었던 것이 한국에서는 과도하게 수용되어, 마치 무슨 의미 있는 철학적 담론이나 되는 것처럼 유행을 타고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어떤 반론이나 비판적 관점이 제기라도 되면, 토론이나 논의보다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자신의 관점만이 올바른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어떤 철학이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돈벼락이 아닌 한, 철학적 배경과 맥락이 선행되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검토와 비판이 없는 것은 실로 적지 않은 모순과 오류를 스스로 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한국에서 철학이 시대와 삶의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한, 철학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불현듯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냥 기다린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상을 통해 시대와 삶을 포착할 수 없는 철학은 그 당대의 시대정신을 선도적으로 이끌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당대에 무관심 속에 가려져 있었던 철학이 한순간에 외부적 요인으로 부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측면에는 공통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두 측면 중 어느 것이든 어느 지역이든 국가든 어떤 철학이든 사상의 뿌리가 각각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퍼져서 논쟁과 토론을 통해 기록되고 기억되는 장소에서는 언제든지 새로운 철학이 시대와 삶의 부름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아무것도 성취된 것이 없으며,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수두룩한데, 각자는 방향 설정과 대응 방법에서 어떻게 산에 오를지를 산 앞에서 서로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에 대한 욕구는 각자가 끊임없는 사유의 험난한 여정을 체험하면서, 오로지 주체적 사유의 힘이 냉정한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곧바로 직면할 때 비로소 생긴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시대와 삶으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당할 것이고, 우리의 시대와 삶은 분열 속에서 서로 갈라지고 찢어진 채 착종이 되고 모순으로 점철된 현실에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철학적 비판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아무런 검토 없이 무조건 믿는 맹신 및 광적인 탐닉과 사람들을 기만하는 궤변과 사람들을 현혹하는 요설 등등만이 성행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철학적 사유와 철학적 비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할 따름이다. 한국에서 철학 연구자들이 시대와 삶의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체적으로 문제설정과 방향 제시 그리고 현실적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아직 스스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로 모색이 시도되기는 하지만, 구체적 성과보다 일시적으로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문제들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여전히 문제만을 단순히 성찰하는 것은 아무것도 문제해결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확한 진단과 문제의 발생 원인을 먼저 검토하지 않은 채 문제를 위한 문제만을 그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억견(臆見)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가 제시된 해법을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추정되는 방식으로 겉돌기만 하는 장면은 한국에서 철학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표가 부재하다는 의미와 마찬가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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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욕구, 삶과 시대의 분열을 넘어서 통합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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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내에서 러시아어 사용 문제
- 라트비아 내에서의 러시아어 사용 문제와 러시아 학교인 쉬꼴라 폐지 문제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해 서서히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라트비아 여당인 KPV 라트비아 당이 2018~2019년에 불거져 있던 이 문제를 서방의 러시아 제재를 이용하여 다시 재기하기 시작했는데 라트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조화(Sociāldemokrātiskā Partija "Saskaņa")당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저지하고 있다. 사회민주 조화당은 대표적인 친러정당으로 2005년에 창당된 조화 중도(Saskanas Centrs, SC)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조화당은 2009년에 신중앙당, 사회민주당, 국민조화당, 다우가프필스 도시당이 뭉쳐서 정당 연합을 만들고 1년 뒤 4개의 정당이 합당하는 형식으로 하여 단일 정당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라트비아의 동남쪽에 위치한 다우가스필드와 해당 주들을 중심으로 연고를 두고 있으며 조화 중도와는 정당 연합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2014년에 현재의 정당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합집산하게 된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 정당은 라트비아의 사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론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과는 다르게 러시아계 라트비아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다보니 성향이 사회보수주의적인 면이 있다. 대표적인 일례로 본다면 시민결합 파트너 법에 대한 입법안을 거부한 것에 있는데 애초에 이 정당은 러시아의 통합 러시아당, 공정 러시아와 관계를 맺은 것 때문에 연립 정부 구성 협상 대상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원외로 취급시키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과 라트비아 국적을 취득했던 라트비아계 러시아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에 원외로 두기 어려운 정당이라 라트비아 헌법에서 창당 요건에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국회에서 승인한 정당이다. 이들은 2018년 이전 KPV 라트비아 당이 매우 무능했기 때문에 라트비아 국민들의 외면을 당했었고 결국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조화당을 찍느니 차라리 투표를 하지 않겠다면 기권표를 남발하는 바람에 친러 정당인 조화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잠시 권력을 쥐었던 바 있다. 그리고 2018~2019년도에 조화당으로 인해 러시아어 사용과 러시아 학교인 쉬꼴라가 유지되었디만 여전히 러시아 학교와 관련된 문제가 라트비아에선 지금도 남아 있는 실정이다. 조화당의 요청으로 인해 유럽자유연맹은 라트비아에서 러시아어 수업 폐쇄와 관련해 러시아어 수업의 유지를 지지했고 라트비아 러시아인 연합은 유럽 인권 법원에 라트비아 정부의 러시아어 수업 개혁과 관련해 다시 호소했으며 라트비아 내 러시아어 수업과 관련해 유럽 인권 재판소로 소송이 재기되어 결국 인권 재판소는 라트비아계 러시아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쉬꼴라 문제는 라트비아에서 깔끔하게 해결된 것일까? 그러나 전반적인 라트비아인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라트비아는 역사적인 이유와 민족적인 이유로 인해 러시아에 대해서는 반러감정이 강한 편이다. 역사적으로도 소련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 시절에는 라트비아인들이 나치 독일에 부역하다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적도 있다. 게다가 그 자리를 러시아인들로 채웠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해서는 악감정이 대단하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적극적인 반러 정책을 실시하면서 EU와 나토에 가입했다. 거기에다 반러감정으로 인해 나치 독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러시아 측에서도 에스토니아와 함께 라트비아를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련 시절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소련식 아파트들이 대거 건설되었는데 그로 인해 라트비아인들은 단독주택에 거주했었다. 러시아인들은 아파트에 거주했었고 이와 같은 주거 생활의 차이에서 경제적, 민족적 갈등의 싹이 트기도 했다. 게다가 라트비아인들은 인구증가율이 높지 않았기에 아파트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기존에 살고 있던 단독주택에서 거주했지만 러시아인들은 이주민이다 보니 아파트를 배급받아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소련 해체로 인한 혼란을 기점으로 현재는 단독주택에 사는 러시아계 라트비아인과 아파트에 사는 토착 라트비아인도 많아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인근에 학교가 세워졌고 수업의 질도 차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양측의 교육에 대한 교류가 일부 존재했지만 대개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인들을 무식하다 여겨 상대하지 않았다. 물론 라트비아에서도 러시아어를 배우러 유학생들이 러시아에 오는 경우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러시아인 유학생들도 라트비아에 오는 경우도 소수이다. 그러다보니 라트비아 내 러시아 쉬꼴라는 민족 차별 및 교육의 질을 두고도 우열에 따른 차별이 생기면서 대다수의 주민인 라트비아인들은 쉬꼴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어에 대한 거부감도 늘어나 발트 3국 중에서 비교적 교육에 관해서도 반러감정이 강한 국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전체 인구의 ¼을 차지하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의 인근에 살고 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는 정당도 있다보니 이를 제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국민 반러감정과는 별개로 우호적인 면을 가장하여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전으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자신들도 러시아에 침공을 받아 생존권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러시아계 라트비아인들도 러시아 정부를 좋아하지 않게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라트비아는 대러 제재에 동참했고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을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의 라트비아 망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배우 슐판 하마토바가 라트비아로 떠난다고 밝혔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라트비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격하시키면서 국내에서 러시아어 사용 문제와 러시아 학교인 쉬꼴라 폐지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18년 당시에 문제를 재기했을 때는 KPV 라트비아 당이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기에 이 문제가 불식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친러 정당인 조화당이 여당이 되면서 이 문제는 임시 방편으로 어설프게나마 매듭지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불과 4년 전과는 다르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군사작전을 감행했고 라트비아 뿐 아니라 전 유럽이 이를 비난하고 있다. 거기에다 대국민 반러정서로 인해 KPV 라트비아 당은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라트비아 내에서의 러시아어 사용 문제와 러시아 학교인 쉬꼴라 폐지는 조화당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행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에서 러시아어와 러시아 학교가 퇴출될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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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내에서 러시아어 사용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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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독립 과정
- 소련 발트 해 연안의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1990년 9월 6일에 전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소련의 장래를 결정했던 중요한 사건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 애초에 리투아니아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나 예상보다 앞당겨 독립을 실시한 이유는 9월 12일에 소집할 예정이었던 소련 최고 회의에서 리투아니아에 독립에 대한 움직임에 모종의 조치가 생겼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의회는 1990년 선거에서 총 141개의 의석 중에 130석만 확정되었을 뿐, 11석 자체는 미정인 상태로 1990년의 독립 선언은 의회가 완전히 구성되기도 전에 급히 감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련 최고 회의는 9월 12일의 회의에서 최고 회의 의장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등 연방 탈퇴 움직임에 대해 비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안을 심의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은 법적으로 1918년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을 재확인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에 앞서 1990년 5월과 8월, 1940년 소련의 리투아니아 합병과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무효화를 각각 선언함으로써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속한 원인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1991년 8월 말, 소련 최고 회의에서 결정된 연방 이탈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소련 최고 회의는 그 동안 소련 헌법의 미비점인 연방 탈퇴를 법적으로 보완한다는 명분으로 연방 이탈법을 제정했다. 연방 이탈을 공화국 단계와 연방 단계의 두 가지 단계로 나누고 각 과정에 여러 독소조항을 마련하여 사실상 연방 이탈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이와 함께 종래의 국명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삭제했다. 그리고 의회의 심의결과 만장일치로 리투아니아 공화국 변경건이 통과되면서 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고 위원 회의장에 사상 최초로 비(非) 공산당원인 사유디스 지도자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를 선출했다. 그동안 리투아니아의 분리ㆍ독립 운동을 주도해 왔던 공산당 제1 서기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Algirdas Brazauskas)는 그의 점진적인 연방 이탈론이 의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 최고 위원회 의장직에서 탈락하게 된다. 브라자우스카스는 1989년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소련 공산당으로부터의 분리를 주도하는 등, 리투아니아 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난국을 합리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인물로 꼽혔다. 이에 대해 새로 최고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란츠베르기스는 사유디스의 지도자로서 당장 연방으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급진적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브라자우스카스의 생각과는 달리 이와 같은 급진적인 방식은 연방당국과 강한 충돌을 야기했다. 연방당국은 일찍부터 리투아니아 독립의 움직임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시하고 성급한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도 당시로써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막을 별다른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소련 지도부는 리투아니아 문제에 대해 비(非) 군사적 해결 원칙을 거듭 천명한 바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또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립적인 움직임을 저지할 때 국내외적으로 소련의 피해는 엄청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련 내 전 소수 민족에게까지 독립의 기운이 파급되어 소련 전체가 일종의 내란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연방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마저 재기되었다. 따라서 소련 당국으로써는 보다 폭넓은 자치 허용 등으로 회유하는 한편, 굳이 연방으로부터 벗어나려 할 경우 그동안 소련이 제공한 경제적 지원에 대해 배상을 하도록 요구하는 강경책을 썼다. 한편 고르바초프는 리투아니아에 대해 지난 50년간 소련이 제공한 각종 산업 시설 및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대가로 210억 루블(미화 340억 달러)을 배상할 것을 제안한 바 있으나 리투아니아 측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한편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은 이웃 국가인 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로 독립 선언이 잇달아 확산될 것이며, 남부 카프카스 지방 소수 민족들에게도 이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급진주의자들 가운데 연방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급진 개혁파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유리 아파나셰프(Юрий Афанасьев)는 소련 민족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은 연방의 해체와 각 민족 국가들의 국가 연합 뿐이라고 주장했다. 발트 해의 소국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된 소련의 민족 독립 도미노 현상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 공화국 최고 회의 의장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탈소 독립 선언이 결코 연방당국과의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밝히게 된다. 란츠베르기스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대변인 이반 마슬레니코프(Иван Масленников)와 대화를 나누면서 리투아니아의 독립 결정이 원상 복구되지 않는 이상 소련의 강경한 입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어 독립 선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밝혔다. 이반 마슬레니코프는 "소련이 경제 제재 조치 등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 취소를 전제로 한 최후 통첩을 고수할 때는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죽음만이 가능할 뿐" 이라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자체도 완전한 독립이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지도부는 완전한 독립을 전제로 모스크바 측과 과도기 과정의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앞서 소련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탈소 독립 선언을 유보하지 않는 한 강경 대응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이반 마슬레니코프 소련 대통령 대변인이 밝히기도 했다. 결국 바리케이드 사건(The Barricades)이 벌어지며 소련군이 침공했고 이후에 리투아니아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소련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리투아니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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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와 손수건의 원조 크로아티아의 크라바트
- 17세기 독일의 30년 전쟁(1618~1648) 때 카페 왕조의 분파인 앙주 왕조 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크로아티아는 프랑스 왕실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당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목에 붉은 천을 매고 전장에 나서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게 했다. 크로아티아 기병대들은 돌아오기 전장으로 출정할때 연인이나 부인, 어머니로부터 목을 감싸는 옷감을 정표로 받아서 마음의 위안을 삼은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돌아오지 못한 그 누군가의 연인과 남편, 자식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출정하는 가족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빌며 매어주던 붉은 천은 있는 혹시 돌아오지 못하면 전장에서 찾을 수 있는 전사자의 식별 도구이기도 한다. 그러한 크로아티아의 풍습이 넥타이의 유래로 나타나는데 크라바트(Cravate)라 하여 크로아티아의 상징이 되었고 그것은 넥타이가 탄생하게 되는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의 원조는 포칼(Pokal)이라고 하는 B.C 2세기 경에 나타난 로마 병사들의 목에 감는 천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넥타이보다는 다용도 수건이었고 주로 손수건에 이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크라바트도 당시 넥타이이기 이전에 다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손수건이라든지, 식별 넥타이라던지 말이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붉은색 크라바트에 강한 호기심을 보인다. 크라바트에 매료돼 프랑스 친위대 병사들도 착용하도록 지시한다. 크라바트 기원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용병들이 루이 14세에게 충성심을 보이려고 가슴에 장방형으로 둘렀다는 게 첫 번째 견해다. 두 번째는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이나 연인의 무사귀환을 기원한 크로아티아 여성이 감아줬다는 것이다. 천으로 목을 단단히 묶으면 마귀가 몸에 침투하지 못한다는 믿음에서다. 악귀를 쫓아 승리하라는 염원을 담은 일종의 부적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옷에도 변화가 생긴다. 시민들은 활동하기 편한 재킷과 판탈롱 바지를 선호한다. 윗옷 목 부위에 장식 띠를 매는 풍습도 크게 달라진다. 크라바트는 좁고 긴 때로 바뀐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넓은 옷깃에 쉽게 감기 위해서다. 크라바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오늘날 넥타이로 발전한다. 목에 매는 끈이라는 의미로 넥타이라는 이름이 생긴다.이후 모양과 매듭 방식, 색상이 진화하면서 남성 액세서리로 자리 잡는다. 1850년대에는 앞쪽 매듭만 독립시킨 나비 넥타이가 등장한다. 넥타이를 맸을 때 길이가 주먹 4배인 포인 핸드 방식은 1890년께 선보인다. 마부가 말고삐를 다루기 편하도록 고안된 매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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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와 손수건의 원조 크로아티아의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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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랄산맥 광산부자 명문가 스트로가노프
-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의 산업 경제 부분을 담당했던 전형적인 슬라브 족의 가문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문헌에 등장하였고 이들은 그때부터 볼가 강 동부 지역에 대한 개발권을 취득하고 있었다. 물론 다량의 원시 농업 수준이 높아져 농업으로 생산량을 극대화시켰던 가문이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우랄 산맥 서부의 광산을 개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바실리 3세의 명령에 의해서 볼가 강 동부 지역의 지리와 천연자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530년대에 우랄 산맥 일대에 대한 자원 조사를 시도하여 이 지역에 대단위의 금과 은(銀) 및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개발을 건의했고 바실리 3세는 이를 허가하여 많은 죄수와 노예들을 보내 노역을 시켰으며, 후에는 산맥 내 굴에서 사금을 채굴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그러면서 축적한 경제력으로 제법 화려한 궁정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산 개발의 도중에 시비르 칸국의 군사들이 광산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을 습격하여 광산업에 큰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야로슬라블 일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로 시비르 칸국의 타타르 기병들이 광산 노동자들이 사는 우랄 정착촌을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은 것이었다. 기동성이 빠른 타타르 족들의 약탈은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분개한 스트로가노프는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시비르 칸국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여 이에 대한 허가를 받았고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우랄 산맥에 무려 16개의 요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560~1570년 사이에 시비르 타타르 족의 침략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이반 4세에 요청하여 다수의 코사크 인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 코사크 인들은 타타르와 투르크의 혈통들로 매우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들 중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볼가 강 일대를 노략질하던 코사크의 수령이었는데 매우 용맹한 인물이었다.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만나 우랄 산맥 일대를 수비하고 시비르 칸국과 더불어 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한다면 사면 뿐 아니라 코사크 인들에게 시베리아의 영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승낙 했고 그들은 우선 사면 받은 상태에서 우랄 산맥의 요새들에 배치되었다. 코사크 인들이 우랄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쿠춤 칸은 약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우랄 요새 중 하나인 니즈니 타길(Нижний Тагил)을 공격했다. 이는 전폭적인 시비르 군의 러시아 공략이 아니라, 코사크 군의 전투력이 어떤지에 대해 시험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에 예르마크는 불과 2천의 군대를 주둔시켜 시비르 군에 대항했다. 당시 니즈니 타길의 수성전은 예르마크 시베리아 정복의 시발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전투를 예르마크가 승리함으로써 시비르 칸국을 비롯한 시베리아 민족들의 전투력 또한 시험했었기 때문이다. 저비용 고효율적인 전투를 벌이며 정복할 것인지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국운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 할지를 니즈니 타길에서 결정했던 것이다. 그 무렵 볼가 강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코사크 족 무리들 중 1,300여 명이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수장인 예르마크 티모페에비치와 이반 콜트소가 토벌되어 정부에 포로가 되었어도 이들이 이끌던 해적들과는 다른 집단의 해적들이었던 것이다. 우선 우랄 지역은 삼림이 울창하고 볼가 강 지역은 평야들이 많았다. 그러한 지형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었기 때문에 이들 해적들의 약탈이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르마크가 이들을 설득했고 볼가 강의 해적 집단인 모든 코사크 인들이 마침내 예르마크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들 부족의 수장은 로만 그랴노프(Roman Grianov)로 코사크 족 한 분파의 족장인 헤트만(Hetman)의 직위에 있었고, 볼가 강 중류 일대에서 4~5개 부족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 중 이반 콜트소의 종족들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는 노가이(Nogai) 칸국을 공격한 죄목으로 인하여 러시아 왕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그의 부족들은 로만 그랴노프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예르마크와 콜트소는 그랴노프를 설득하여 이교도이자 무슬림인 시비르 칸국과의 전쟁에 동참하면 차르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그랴노프의 코사크 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예르마크에 대해 객관적 사료는 현재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러시아의 민담이나 민요, 민화 등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후대의 사람이 구술로 전해져 오는 내용들이 많아 사료적인 부분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르마크는 러시아를 오늘날 세계 최대 영토의 국가로 만들어준 인물이었고 그의 통솔력과 지도력이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모든 코사크 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며 서로 반목하고 있었던 코사크 인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랴노프는 볼가 강 중류에서 시비르 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했고 포위된 시비르 군과 쿠춤 칸은 간신히 탈출하여 수도인 토볼스크로 도주했다. 이로 인하여 예르마크와 코사크 인들은 타타르 족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578년 말,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에 휘하의 코사크 기병대들의 처우에 대하여 타타르 족에 대한 약탈과 화포, 식량, 화승총을 제공을 조건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코사크 집단이 최소한의 무장과 생존 보장을 위해 내세운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약속이었으며 그러한 스트로가노프와 차르인 이반 4세의 큰 결정이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스트로가노프는 이러한 예르마크의 조건에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물론 상인으로써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째로는 군사 무기에 대해서는 그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둘째로는 이들이 배신하여 역으로 러시아를 공격할 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코사크 인들의 신뢰성이 약했고 그로 인하여 이반 4세의 크레믈린에서는 코사크 인들의 활용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에 수많은 공후들이 반발하고 있었고 특히 코사크 인들의 약탈의 피해를 입은 공후들은 오히려 이들이 러시아에 해가 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르마크가 이와 같은 고민에 자신과 모든 코사크 인들의 혈서를 받아내어 러시아에 대한 충성을 결의하자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직접 이반 4세와 대면하여 마침내 허가를 받아냈다. 스트로가노프는 자신의 가문과 목숨을 담보로 코사크 인들의 무장을 허용한 것이다. 비록 그 준비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예르마크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어렵게나마 이루어냈다. 이러한 그의 시베리아로의 동진은 이반 4세의 허가 하에서 이루어졌으나 젬스키소보루와 같은 각 공후 회의나 두마 각료 회의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상 이반 4세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의 차르라고 해도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은 차르의 권위가 약화될 수 있는 부분이었고 무모한 모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성을 극복하려면 무조건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이 성공해야만 했다. 이는 스트로가노프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실패했을 경우, 가장 먼저 책임을 받게 되어 있고 잘못하면 멸문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대해 무모하게 마구 주장할 예르마크는 아니었다. 그만큼 타타르 족을 철저하게 파악했고 군에 대한 훈련도 거의 완벽했다. 예르마크는 전략도 뛰어났고 신중했으며 모험심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예르마크는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1578년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의 영토인 카멘스크-우랄스키(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를 습격하여 약탈했다. 이는 시비르 타타르 족 군대의 수준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에 기습을 받은 카멘스크-우랄스키(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의 시비르 칸국 요새는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었다. 러시아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명망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영지로 바친 예르마크는 이제 어느 정도 시비르 칸국의 군사들을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중한 인물이었고 각 나라의 정보에도 밝은 유능한 지도자였다. 우선 예르마크는 시비르 타타르 족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주변의 네네츠 족, 한티 족, 만시 족 등의 시베리아 북부 타이가 종족들을 회유했다. 이들에게 공통의 적인 타타르 족을 몰아내고 시베리아 지역의 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이들을 러시아 측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타타르 족의 이간책도 필수적인 전략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정부의 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북방 타이가 원주민들에게 우랄 지역을 통솔하는 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야로슬라블 대공, 블라디미르 대공의 협조 아래 식량들을 직접 지원하며 모피들을 가져가니 타이가 원주민들은 대대적으로 러시아에게 협조하고 지배하고 있던 타타르의 군 기지들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모든 준비가 끝난 예르마크는 코사크 부족의 부족장들 5명을 아타만(Aтаман)으로 삼고 코사크 정예 기병 500여명과 당시 이반 4세가 국책 사업으로 벌이던 리보니아 전쟁 도중에 포로로 잡은 독일기사단의 군사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포로 300여 명을 동원하여 1579년 2월,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을 침공했다. 우랄 산맥 서쪽에 광대한 영지를 확보하며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 일대를 약탈했던 코사크 족은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 동진하여 오늘날 예카테린부르크를 침공하여 단 2시간 만에 예카테린부르크를 장악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에 사절을 보내 이곳 일대에서 모피 무역거래를 할 수 있게 허락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승낙을 받는다. 단 스트로가노프의 윤허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모피 교역으로 군자금을 벌어 시베리아 원정을 지속하라는 것이다.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금도, 병력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이는 젬스키소보루나 두마 회의에서 허가 받은 것이 아닌 이반 4세의 단독 결정이었고 스트로가노프 가문 또한 수많은 공후들의 견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타타르를 제압하고 시베리아를 장악하는데 있어 모든 물자를 현지의 약탈과 교역으로 조달해야 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와 그의 부대에게 현지에서 얻은 물품들을 모두 승전의 대가로 주면서, 당시 우랄 산맥 건너 오비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벌하는 일을 일임했다. 게다가 코사크 군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를 맡기고 군의 통솔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부분의 양면에는 만약에 잘못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성공하면 이반 4세와 스트로가노프의 절대적인 입지 강화와 더불어 이반 4세는 그의 통치권을 완전히 굳히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대신 러시아 정부에서 대포와 식량, 화승총 등 전쟁물자 일체의 보급들을 제공하긴 했지만 전선이 넓어지면서 보급의 현지 조율은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시베리아를 서서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는 서구 열강 제국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고 약탈과 침탈이 아닌 합병정책으로 광대한 시베리아를 확보해나갔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는 달랐는데 이는 시베리아보다 더 강력한 중앙정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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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랄산맥 광산부자 명문가 스트로가노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