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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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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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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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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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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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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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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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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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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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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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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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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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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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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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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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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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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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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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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대립의 역사
- 코사크는 15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동유럽에는 발트 3국과 폴란드에까지 분포했던 군사 집단이다.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코사크의 구성원 출신 국가는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15세기 말 우크라이나의 중앙 지역을 가로지르는 드네프로 강을 중심으로 한 자포리자 지역에서 자포리자 코사크가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16세기에는 돈 강 유역을 중심으로 돈 카자크가 결성되었다. 15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자포리자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으로서 출발하였다. 16세기, 17세기, 18세기에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강화해 나가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모스크바 대공국, 크림 칸국의 세력에 저항해 나갔다. 특히 1648년부터 1657년까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는 자포리자 코사크의 군사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초대 헤트만(Hetman)이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의 성공으로 잠시 동안 카자크 헤트마네트(Hetmanet)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다.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 때부터 코사크는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1649년부터 1764년까지 존재했던 자포리자 카자크 출신 지도자가 카자크 수장국의 수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18세기 말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해산된 뒤에는 쿠반 강 유역에 정착했다. 한편 당시 쿠반 강과 돈 강 지역에 널리 분포하던 민족들은 투르크-슬라브의 혼혈 민족인 브로드니크(Brodnick) 인들이 존재했다. 비록 이들 브로드니크 인들이 언제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 12세기에 돈 강 하류 지역으로 대규모 부락을 이루면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당시 브로드니크 인들은 키예프 루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인들 침공하여 카프카스에서 쿠반 강에 이르기까지 정복하자 이에 카소그 인들은 북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돈 강 유역의 브로드니크 민족과 융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민족 명칭들을 계승하여 카자크(Kазак), 혹은 코사크라고 불렀다. 흐멜니츠키 반란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는 처음 협상과는 달리 결국 러시아로 넘어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상실하고 동시에 곡물을 수출하던 비스와 강 수운 체계가 파괴되면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이 때부터 현재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철천지 원수가 된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이후 크림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남부 지방을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10여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이게 된다. 러시아는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동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왔고, 카톨릭과 기독교와의 이교도인 타타르족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미 정착해 있던 코사크족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다. 이들은 코사크족들의 평등한 공동체 문화가 모스크바 귀족들의 농노제에 대해 크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억압하였으며 코사크족의 공동체에 농노제를 순차적으로 도입시키게 된다. 이러한 조치에서 끝나지 않고, 표트르 대제는 코사크족을 징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험한 노역과 군역을 강제 동원했는데, 요새 건설 등에 동원되었던 코사크족들은 노역을 수행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온 관리들이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으며 폭행 및 폭언도 있었기 때문에 대개 2/3에서 1/6 정도가 노역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반 마제파가 스웨덴 국왕 칼 12세를 믿고 대북방전쟁 당시에 스웨덴 왕국의 편으로 참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는 이와 같은 학정의 배경이 있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통치 아래에 키예프루스의 후손들이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으며 크림 칸국의 침략과 폴란드의 압제로부터 러시아가 해방시켜 주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 반면에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당연히 러시아어를 쓸 일이 없었으며 서구식 민족주의를 배우며 러시아를 완전히 이질적으로 보게 되었다. 가장 러시아의 지배를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 교회라는 동방 카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이미 이 때부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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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대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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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영국은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Gails Milton)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또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7세기 영국에서 동양 무역의 독점과 인도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회사로, 당대 영국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으며 영국이 장기적으로 인도를 지배, 중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을 존재하게 한 회사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칭으로 위대한 동인도 회사(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HEIC)라 불리기도 했다. 가장 처음 설립된 동인도 사는 일명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정부와 런던 상인의 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이에 대항하는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잉글랜드 상인의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가 1708년 설립되었다. 보통 전자를 런던 회사, 후자를 영국 회사라고 부르며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라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 외 강제적인 행위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였으며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정치 권력자 및 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임을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 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들 중 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 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乾隆帝, 재위 : 1735~1796)는 이를 허가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 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동 무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인 공행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찰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 권, 사관임명권, 교전 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新) 동인도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 대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동인도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에게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 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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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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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석유와 가스 시추 성공 사례
- 필자가 있는 터키 하산케이프 지역은 바트만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유전들이 분포해 있다. 비록 터키가 산유국 상위층에 들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는 국가는 아니지만 터키의 상당수 유전이 이곳에 있으며 석유 생산량 꽤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이 지역이 쿠르디스탄 지역,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인데 이 유전과 석유 자원 때문에 터키 정부는 쿠르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유전 얘기하니까 얼마 전 동해 유전 때문에 한창 떠들썩 하길래 예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자료를 찾아봤다. 그런데 울산광역시의 남동쪽에 있는 대륙붕 제6-1광구에 가스전이 발견되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당시 한국석유공사가 1998년 7월 탐사 시추에 성공한 한국 최초의 가스전으로, 채굴 가능한 매장량은 액화천연가스(LNG) 기준 500만톤 정도였다고 했다. 2004년 11월부터 상업 생산을 시작했으며 채굴량은 하루 약 1,000톤이고, 한국가스공사를 통해 우선 경상도에 공급했다. 하루 1,000톤은 전국 LNG 소비량의 약 2%이고 LNG 외에 휘발유성 원유인 초경질원유(컨덴세이트)도 하루 750배럴씩 생산해 국내에 공급했다. 그거 나오기 이전에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었다. 이 유전이 나옴으로써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산유국 지위에 오르게 됐지만 그것도 잠시, 2021년 12월 31일부로 매장량 고갈로 인해 가스 생산이 종료되었다. 잠깐 설랬단 기억이 있지만 그냥 설레고만 말았었다. 이 가스전의 개발로 불과 17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도 산유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LNG 일부를 국내에서 자체 조달할 수 있었다. 2021년 12월 31일 생산 종료까지 17년 동안 천연가스 4,100만 배럴, 초경질유 390만 배럴을 생산하면서 24억 달러 가량의 수입 대체 효과를 냈었다. 물론 이러한 전례가 있었기에 동해에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즉, 여러 사례들을 보았을 때, 천공이 마냥 뻘소리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석유가 실제로 매장돼 있는지 전망하기 위해서는 기반암, 저류층, 덮개암, 트랩 등 4가지 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동해 심해에서 이 같은 요소들을 확인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기본적으로 분지 바닥을 기반암이라고 하고 그 위에 퇴적층이 쌓인다. 여기에 석유가 쌓이려면 배사구조로 구멍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트랩될 수 있는 구조'라고 흔히 언급되고 있다. 더불어 석유는 가볍기 때문에 부력으로 인해 상층로 떠오르게 되는데, 덮개암이 그 위를 덮어 날림을 방지하는 구조다. 심해 해저에서 그런 상황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4가지 구조가 맞아 떨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시추 기술을 세계 정상급이고 이미 중동 유전 개발에 여러 기업들이 참여해서 시추 기술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다. 정부가 영일만 시추를 하게 된다면 시추공 1개 당 1,000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시추공들이 다발로 삽입되면 우리가 석유나 가스 수입한 것보다 더 비싸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이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보고 꽤 장기적인 측면에서 계획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런 장기적인 플렌이 매우 약한 나라다.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 다른 방향의 정책성이 우선 순위가 될 수 있어 꾸준히 이 작업을 한다는게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는 사업에 윤 정권이 앞으로 3년 남았는데 그 3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동해에 쏟아 부으며 유전을 설치해 시추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국정 브리핑을 열고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며 "올해 말 첫 번째 시추공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폴란드 방산 계약 대금이 완납이 된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에 또 많이 퍼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만 벌려 놓고 거둬들인 것 없이 또 다른 투자를 한다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다. 덕분에 석유나 가스 관련하여 주식이 오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어떨까? 여기에 주식을 사들이는 자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시추에서 매장 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재정적 낭비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누구일까? 윤대통령의 임기 끝나면 책임을 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테고 왜 이런 무리한 사업을 계속 추진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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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석유와 가스 시추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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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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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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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사막의 자유로운 영혼, 아랍인과 같지만 다른 의미의 이름인 베두인 이야기
- 베두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아랍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으며, 베두인이 오래전부터 아랍이라고도 불린 것은 많은 비문과 사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꾸란에 나오는〈아랍〉도 사실상 베두인을 정의하는 단어이다. 베두인의 언어는 꾸란의 언어로도, 도시 주민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료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베두인의 것이라는 학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예언자 마호메트는 베두인들이 좀처럼 이슬람 화 되지 않는 종족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메카라는 상업도시에서 태어난 이슬람이 사막에서 이동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에게까지 침투하기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두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평등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슬람의 근본사상인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구절과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메카라는 도시의 정착 문화도 사막의 베두인들과의 연계 선상에서 처음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발생과 그 성격으로 인해 베두인 문화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는 베두인의 부족사회와 관련해서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러한 부족주의를 배제하고 유일신인 알라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지향하는 것이 이슬람이었다. 그 이념은 현재에도 변함없지만, 베두인 사회의 부족주의와 혈연주의가 한 번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에 서술한 평등주의 등과 함께 병존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정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이동 생활은 최근에 급속하게 변화해 오고 있다. 중앙정부가 확립한 토지 제도의 변화와 철도, 자동차, 비행기 등 근대 교통 기관의 도입, 그리고 사회 경제의 진전에 따라 정착 생활자에 대한 노동 수요의 증가 등의 요인들이 겹쳐, 정착 생활에 들어가는 베두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도 차가 낙타를 대신하며 근대적 상품이 사막 깊숙이 전해져 들어가자 현재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아 큰 폭으로 변화해 오고 있다. 베두인들이 유목을 하면서 방목되는 동물은 양, 염소, 소, 당나귀, 낙타, 말, 물소 등으로 분류된다. 유목이라는 경제 환경은 원시적이라는 선입견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는 18~1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한 이후부터 농경민으로 변하면서 현재와 같은 현대 문명을 받아들여 유목에 대한 경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목은 수렵 채집 경제의 연속이 아니라, 농경 다음으로 생겨난 생활 경제 양식이라는 것이 여러 인류학적 자료를 토대로 실증되었으며, 경작이 불가능한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새로운 세련된 생계 경제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에는 급속한 사막화로 인해 농경 지대가 한계에 달해, 상당한 양의 유목 잉여 인구들이 생겨나면서 농경 민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경작이 불가능한 바디야에(Badiyaye)의 가축을 데리고 북상하여 목초지들을 찾아 갔다. 그러한 부분이 베두인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베두인이라는 호칭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높이 자랑할 만한 생활을 하는 용기 있는 사막 민족이라는 의미와 도시의 문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반(半) 정착 생활을 하면서, 목축과 농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바드우(Badu)라고 지칭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싫어하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국가 성립 시기가 매우 늦고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써 국가가 없는 시기가 매우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베두인의 씨족 사회끼리 서로 전쟁이나 상업적인 거래를 하곤 했다. 간혹 어떤 씨족이 강성하게 되어 짧게 왕국이나 제국을 세우는 일은 있었지만 모두 빠른 시기 안에 붕괴되어 버렸다. 그렇게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까지 씨족 사회가 변함없이 지속되다가 이슬람의 성립과 함께 하나의 종교와 국가 아래 통합되고 베두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게 된다. 원래는 부족 제도의 특성에서 오는 분열성이 심하고 그 중심에는 씨족 간 정쟁이 그치지 않아 좀처럼 연합하지 못하는 부족체였다. 이를 두고 이슬람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열 상태의 베두인들을 하나의 지도자 아래 결집시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유목민족으로써 성격이 사납고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무자비했기 때문에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에 가장 중추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 이후 군영 도시의 주요 구성원들이 베두인들이고 외지인들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의탁하더라도 하루에 차 한 잔씩 주며 3일은 무조건 보호해주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 이전의 부족 사회에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이나 개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며 씨족과 가족 등 혈연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베두인들이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기 때문에, 씨족 개개인에게 나타난 모독 현상을 씨족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이는 씨족 개개인이 모여 이룬 씨족의 부족화 현상으로 씨족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모독으로 받아들이면 전체 구성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계통의 부족들은 자신의 조상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베두인의 후손들은 확실하게 가족 소개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 6~7대 조부 이름까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씨족들도 자기 기준으로 4대까지만 외우고 있는데 이 또한 베두인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베두인들은 유목민이지만 모두 유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상인이 되어 중개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로 가서 정착하여 농사짓고 장사를 하여 정주민족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다. 또한 어업에도 종사하여 어부로 사는 베두인들도 있다. 현재는 현대 문명이 들어옴에 따라 베두인들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도시와 마을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고작 5%에 불과하며 반(反) 유목 생활하는 베두인들조차 10%에 불과하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사막화로 인해 유목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유목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베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나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에 이들에게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부여하면서 팔레스타인과 기타 지역에 거주한 베두인-아라비아 인에 비해 매우 우대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도 신생 국가였었고 인구가 적은데 본토 땅에서 3배에 달하는 시나이 지역에는 추정으로만 해도 100~20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와 비슷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사로 자라나는 전투민족인 시나이 지역의 베두인들에 대해 대우가 좋지 못하면 게릴라전 등의 반군이 되거나 본토에 있는 군대를 더 많이 동원하여 전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막 기후이면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도시나 오아시스 마을이 적었기 때문에 군대 및 민간인 거주지로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두인들을 적으로 돌려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의 자치주와 같이 치안을 맡기고 돈이나 생필품까지 지원해면서 최대한의 갈등은 자제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원에 한계를 느낀 이스라엘이 결국 시나이 지역을 포기하고 이집트에게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이제는 이집트에게 큰 장애물로 남아버렸다. 2012년 시나이 반도 지역 베두인과 이집트의 충돌이 더욱 심해져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수감된 동료 석방을 요구하는 등 2012년 2월에는 한국인 관광객 3명이 베두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29시간 만에 석방되었는데 납치에 대한 사건에 대해 사과도 하고 먹을 것을 잘 주는 등, 대우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외국인 납치를 자주 벌이긴 하지만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석방시켜 탈레반과 같은 근본주의적 테러 단체와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서구권에서도 베두인들을 테러집단으로 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요르단에서는 베두인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이주해온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이 더 많지만, 원래 요르단은 건국 자체가 베두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요르단 정계에는 베두인이 많으며 베두인 족장들의 경우 요르단 내에서 고위직이 많기 때문에 국왕과 왕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난다. 베두인으로 이루어진 요르단 군은 아랍권에서 최정예 군대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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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사막의 자유로운 영혼, 아랍인과 같지만 다른 의미의 이름인 베두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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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학박물관 폐관에 대한 비판
- ‘울산 1호 박물관’인 울산대학교 박물관이 폐관된지 5년이나 됐다. 울산대학교 박물관은 울산지역 문화재관련 연구기관으로 1995년 12월 개관했고 울산에 있는 9개 등록박물관 중 제1호라고 했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박물관인데 폐관해버렸다. 대학박물관은 해당 대학에서 연구해 온 그 학교의 학업을 상징하는 곳이다. 대학박물관을 폐관한다는 것은 그간 연구해 놓은 수많은 결과물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전 세계에서 대학 박물관은 목숨 걸고 지키는 판인데 폐관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학자들의 양심과 노고가 살아있는 곳인데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박물관이 보관관리 해 온 5,300여 점 유물 중 3,000여 점이 경주박물관과 부산박물관 등으로 이관되었고, 남은 2,300여점 유물 역시 국립김해박물관 등으로 이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수장고 속에는 76점의 기증 고문서와 1980∼1990년대 반구대암각화 탁본자료, 기모노 등 일본민속유물 등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죄다 어디론가 이관되었다. 유물이라는 것은 굉장히 섬세한 물품이다.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해 우선 발굴되자마자 1차적인 파손이 진행되는 것이 유물이다. 특히 청동의 경우, 땅속 내부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의 영향을 받아 원형 그대로 있다가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어 삭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물관에 유리관이 설치되고 그 안에 유물이 보관되는 이유가 공기 접촉을 차단하고 유리관 안에 실내 온도를 땅 속 온도와 같은 온도로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관을 하게 되면 공기에 노출되면 안 되는 물품이 다시 노출되어 2차 파손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보존을 천박하게 하는 자들이라 그 문화재들이 보존성에 문제가 없는지 모르겠다. 애들 등록금 비싸게 쳐받으며 건물이나 늘릴 생각하지 말고 애초부터 박물관에 지원했음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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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학박물관 폐관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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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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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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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집단서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대 굴욕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은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대국민회의군은 앙카라 인근 사카리아 강까지 몰려온 그리스군을 상대로 장장 21일 동안 밤낮없이 백병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그리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다.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은 민병대에게 패배하여 카프카스 본토로 철수했고 남부전선의 프랑스군도 가지안테프에서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을 힘을 쓰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터키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카리아 전투에서 전 국민과 함께 그리스 침략자와 싸워 이긴 덕택에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집단 서방의 연합군이 몰리는 형세로 접어들었다. 1922년 사기가 오른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몰아붙여 이스탄불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병력과 무기의 우위에 있었던 그리스군이 도리어 열세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터키군은 패퇴하는 그리스군의 장비와 탄약, 포탄을 넉넉하게 노획했고 이를 그리스군에 도로 공세를 퍼부으면서 오히려 그리스군이 수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스탄불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은 전장에서 발을 빼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군부는 터키 의회에 전쟁을 그만 매듭짓자고 요청했고 특사로 이스메트 파샤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의 요구에 따라 터키 의회는 이스메트 파샤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양측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만나 장장 1년 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로잔에서의 회의에서 영국은 터키와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군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리스가 선전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 중 하나가 에디르네와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하고 이즈미르는 터키의 영토로 하며 아나톨리아를 보전시키겠다는 제안을 하여 결정을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이런 회의는 의미가 없다며 초강경 자세로 버텼다. 영국도 그리스에 대한 물자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군에 물자를 대주면서 선전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지만 현실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 계속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지원한 물자는 터키 민병대에게 탈취당하거나 전투에서 노획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적백내전이 평정되면서 국내 사정이 안정된 소련 볼셰비키는 터키 독립 전쟁에 비로소 관여하게 되면서 터키 독립군에게 각종 무기와 탄약, 물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이에 오히려 물량으로 터키가 그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터키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인근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그리스 본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와 왕당파 정권에 여론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연전연패의 소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리스가 또 다시 터키에 정복당하는거 아니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 정파의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는 군부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Georgios II)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스 측은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6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내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 카라아아츠(Karagac)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협박했다. 더불어 이즈미르 본거지를 잃은 그리스 군은 부르사도 터키군에 내주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동트라키아로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동트라키아를 지키기 위해 반격 준비에 나섰고 터키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이스탄불과 동트라키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터키 의회에 최후 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다시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반대했기에 결국 영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렇게하여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터키 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터키군은 동트라키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잔에서의 2중 조약은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패배해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메트 파샤에게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와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세르브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기존의 세르브 조약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걸려 있었다. ① 그리스 왕국 : 스미르니를 위시로 한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을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의 획득 ② 이탈리아 왕국 :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콘야-안탈리야) 할양 ③ 프랑스 공화국 :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 할양 ④ 영국 :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할양 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 동부 (트라브존-에르주룸-반 호수) 할양 ⑥ 쿠르디스탄 자치령 : 아르메니아 영토와 영국령 제외 전역, 쿠르디스탄의 확실한 독립 그러나 더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그리스마저 터키에게 점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반발을 누르고 폐기에 합의했다. 또한 그와 같이 다급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소련은 터키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터키 동부 지역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빠르게 장악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내려와 도시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이에 놀란 아타튀르크 케말은 소련과 카르스에서 만나 협상에 돌입했고 당시에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도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출병하자 소련은 현 아르메니아 땅을 장악하고 동부 지역은 터키가 장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철군하게 된다. 이로써 이라크에서 출병한 영국군은 도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아타튀르크 케말은 영국에 강한 경고를 날리자 영국군은 즉시 이라크로 퇴각했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이렇게 하여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터키는 동트라키아를 선택하고 에게 해의 섬들과 키프로스를 포기함으로써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약속한 쿠르디스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로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과정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대표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집단서방, 영국이 쿠르디스탄은 대표를 보낼 필요 없이 영국이 알아서 독립을 약속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르디스탄은 영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쿠르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쿠르드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어 끝난 상황이었고 터키군이 갑자기 쿠르디스탄 영토에 진주하면서 쿠르디스탄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터키에게 굴복했다. 자신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세에 의존한 민족의 최후였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대의 교훈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민족적 후회가 어떻게 남아있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독립을 약속 받지만 결국 이용당하며 또 다시 팽해지는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20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100주년을 맞이해 터키 동남부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요구하였고 독립에 대한 주민들 찬반투표가 공식적으로 열려지도록 터키 의회에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쿠르드족은 한 번의 기회를 외세에만 의존해 독립을 날려버린 비운의 민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최장기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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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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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의 통합을 방해한 쿠르디스탄 내전(1994~1998년) 이야기
-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가 철저히 다국적군에 의해 폭격을 받아 파괴되면서 이라크의 패배가 확실시 되는 결과를 보고 쿠르드족은 이에 고무되어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봉기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인 아르빌에 미군 고위급 장성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빌 공군 비행장에서 내린 뒤, 당시 이라크 쿠르드족의 수장인 마수드 바르자니(Masoud Barzani)를 만나 1시간여 동안 회담을 하고 악수를 한 뒤, 다시 미군 기지로 돌아갔다. 당시 마수드 바르자니와 회동했던 그 미군 장성은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미국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파월과 바르자니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다. 당시는 비밀 회동이었기 때문에 여러 추측만이 난무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과 쿠르디스탄과 사이가 어떠했으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파월이 쿠르드족을 방문했다는 얘기 또한 미국 내에서도 사실상 군사기밀이었고 이를 아는 것은 쿠르드족 고위 인사들 몇 뿐이었다. 나는 오래 전, 쿠르디스탄 고위 인사들과 만나 몇 차례 얘기 나누고 걸프전 당시,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 몇몇 자료들을 훑어 보면서 알게 된 일이다. 나는 쿠르드어를 모르지만 몇몇 쿠르드인 지인들이 통번역을 통해 도와주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나는 미국과 쿠르드족과의 관계 및 교섭의 역사를 가지고 450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과연 파월과 바르자니가 당시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라크 내에서의 소요 사태를 일으켜 이라크 내 분쟁을 야기하는 것이고 이라크 내 군사력이 분산되어 스스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당시 다국적군은 F-16과 F-18, F-15E 등의 막강한 전폭기와 미국제 M1A1 ,영국제 챌린저 1 전차 등의 당시 기준 화려한 무기들을 보유하고 이를 쏟아 부었지만 전쟁에서의 핵심은 국가 내 분란을 일으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있다. 걸프전이 42일 만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무기와 더불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봉기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국이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쿠르디스탄 장악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세 번째,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단 한 개의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미국은 쿠르디스탄을 지원하긴 했지만 사담 후세인의 손에서 결국 보호하지 못했으며 독립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1994년부터 쿠르디스탄의 내전이 시작되는 원인이 된다. 당시 쿠르드족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민주당(الحزب الديمقراطي الكردستاني)이 큰 계파를 차지했고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대표였다. 그 외에도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 1933~2017)의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이 있었지만 민주당에 비해서는 당시에 세력이 약했다. 그러나 본래 이들은 어느 정도 쿠르디스탄 지역에 양대 산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화해와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르자니가 쿠르디스탄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면 탈라바니는 좌익, 공산주의를 추종했다. 서로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탈라바니는 본래 민주당이었지만 1975년에 탈당하여 애국 동맹을 만들었다. 애국 동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을 표방한 5개의 정당 연합체로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탈라바니는 본인이 민주당에 입당했던 1960년대에 줄곧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탈라바니는 키르쿠크와 실레마니 전선을 지휘하고 마와트, 레잔, 카라다그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와 타슈켄트에서 만나 이같은 문제를 논의한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바르자니와 충돌을 빚었다. 1962년 3월, 탈라바니는 소련제를 무기를 지원받아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샤르바제르 지구를 탈환하게 된다. 바르자니의 허락도 없이 소련제 무기를 가지고 공세를 펼쳤다는 것에서 그는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바르자니와의 이러한 대립에서 탈라바니는 이 때부터 탈당해 새로운 사회주의 동맹 정당을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탈라바니는 1964년 민주당과 결별하고 이라크를 떠나 이란에 들어가 팔레비 왕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탈라바니는 꾸준히 바르자니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쿠르디스탄에 있는 자신이 거느리는 군대에게 소련제 무기를 수입해 보냈다. 결국 그는 바르자니의 진노를 사 쿠르디스탄 민주당과 쿠르디스탄 주민 자격을 박탈당했다. 1970년에 이라크 정부와 쿠르디스탄이 협상 분위기에 돌입하고 이 때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바르자니는 대쿠르디스탄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탈라바니를 다시 민주당에 받아들였고 이 때부터 약 5년 간 민주당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1975년 알제 협정에서 이란이 이라크와의 국경 협정을 조건으로 쿠르디스탄과의 지원 안을 파기했다. 이 협정은 이라크가 샤트 알 아랍 수로와 후제스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불거진 사건인데 이 사건은 후일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을 통로로 계속 소련제 무기를 들여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한 탈라바니와 바르자니의 사이에서 격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탈라바니는 자신을 추종하는 지도층과 갈라서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을 창단했다. 1976년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내에서 쿠르드족 독립을 위한 무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탈라바니는 이란의 사회주의 집단인 MEK와 만나면서 상호 협력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는 다수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 요원들이 MEK와 함께 팔레비 왕가를 뒤엎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한 호메이니와 사회주의 성향의 MEK가 갈라서게 되면서 탈라바니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은 호메이니의 탄압으로 이란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면서 쿠르드 애국동맹은 호메이니의 편을 들게 되고 바르자니 또한 이란에게 붙어 애국 동맹과 함깨 사담 후세인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상황은 걸프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92년에 첫 쿠르디스탄 자치구 선거가 치뤄지고 이 때 민주당은 애국 동맹과 2석 차이로 제1당을 차지하면서 승리한다. 이 때 탈라바니의 애국 동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키르쿠크로 돌아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치구를 따로 인정받고자 후세인을 만나게 된다. 후세인 입장에서는 둘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노렸다. 둘의 통합은 걸프전에서 패배하면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후세인에게 분명 정치적으로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 때 두 세력의 분열을 조장하여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같은 쿠르드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그 힘이 약화될 것이고 이라크 정부는 이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인은 탈라바니와 애국 동맹을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로 인정해버렸다. 여기에서 바르자니는 크게 반발한다. 마침내 1994년 바르자니는 군을 움직여 키르쿠크를 기습하면서 4년 동안의 내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미 여러 전쟁에서 경험이 많은 애국 동맹을 이기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이 4년 간의 내전으로 쿠르드인 약 10만 명이 죽고 180만 명의 난민을 낳았다. 후세인은 이 내전을 지켜보다가 1997년부터 뒤늦게 군사 작전을 지시한다. 이 내전의 여파가 이라크 본국에까지 퍼질 가능성이 있었고 난민이 늘어나면서 이 내전이 서구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집단 서방은 이를 고의적인 분열로 인한 인종청소를 용인했다며 후세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국제적 비난과 이라크 본국에 내전의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 후세인이 진압을 지시한 셈이다.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디스탄 지역 남쪽,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북부로 밀고 들어가 전장을 확장하면서 바르자니의 쿠르드족과도 전투를 벌였는데 아르빌 자치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진압군인 이라크군이 고전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빠른 시간 내에 진압에 성공할 줄 알았던 후세인은 장기전으로 갈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는 걸프전 패배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후세인은 바르자니와 탈라바니를 초청하여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후세인은 쿠르디스탄 통합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으며 당시 지도자인 바르자니의 4년 임기의 통합지도자로 인정하고 4년 후, 탈라바니가 통합지도자가 되는 조건으로 내전을 마무리했다. 이 내전을 보고 집단서방은 이라크 위도 36도 이북, 32도선 이남으로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현재까지도 이 구역을 비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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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의 통합을 방해한 쿠르디스탄 내전(1994~1998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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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불가리아 공기업 민영화로 인해 전기 요금 인상에 반대 시위 촉발, 총리와 내각 사퇴로 이어진 사건
- 보이코 보리소프(Бойко Борисов)는 2005년 11월 8일부터 선거 전까지 소피아의 시장으로 재임했었던 인물이다. 그의 정당이었던 "유럽 발전을 위한 불가리아 시민(GERB)"당이 7월 초에 실시한 2009년 불가리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2009년 7월 27일에 불가리아의 50번째 총리가 되었다. 이들 GERB는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BSP)을 누르고 승리했다. 불가리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GERB가 39.7%의 지지를 얻어 17.72%를 얻은 사회당을 눌렀다. 당시 불가리아는 국제투명성기구에서 EU 회원국들 중 가장 부패한 나라로 꼽힐 정도로 악명 높은 나라였다. 족벌주의가 만연한 데다 기득권 세력의 범죄에 대한 사법처리도 전무한 국가였다. GERB의 성공은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집중적으로 추궁했으며 부패로부터 깨끗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에 크게 주효했다. 세르게이 스타니세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 사회당 총재이자 당시 총리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경기 침체도 사회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개혁을 주제로 당선되었던 보이코 보리소프는 여러 직업을 두루 경험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959년 소방관 아버지와 유치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공인 9단의 태권도 선수로도 활동했고 태권도 불가리아 대표팀 코치도 지냈다. 20대에는 소방관, 경찰을 거쳐 1991년 사설 경호회사를 차리면서 불가리아의 지프코프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보리소프에게 부패와 불가리아 마피아 등 지하 세계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그를 당선시킨 것이었다. 이후 소피아 세르디카 경찰서장을 거쳐 2001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내무부 장관 당시 마약밀매와 범죄 현장을 직접 기습하는 등 대범한 추진력으로 ‘배트맨’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그의 정당이 야당에 비해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연정을 구성해 총리로써 직위를 수행했다. 그는 친서방주의자였고 누구보다 부패척결에 앞장 섰던 인물이지만 침체된 경기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보리소프의 나라 치안과 내정, 그리고 부패 척결에 지대한 공이 있지만 역시 부정부패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고 더불어 서민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력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2013년 2월 15일, 국가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전기 요금을 인상하기로 결정한다. 이와 같은 정책을 결정한 이유는 기존의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5개 수력발전소에서 전력을 뽑아내고 있었지만 대개 시설이 지프코프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시설의 노후화가 심각했다. 이를 보수하기 위해 지프코프 정권 이후, 불가리아 정부는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제는 불가리아의 재정이 이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시메온 총리가 2003년에 민영화 정책을 감행하여 체코국영전력공사(CEZ)와 오스트리아계 전력회사 등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이는 시메온 본인이 차르에서 퇴임한 후, 이집트로 망명하면서 유럽 각국을 전전했었고 특히 미국이나 영국의 민영화 정책에서 영감을 받아 도입한 서구식 민영화 정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012년 유로 내 경제 관련 조사에서 EU 국가 중 가장 먼저 파산할 위험의 국가로 불가리아가 지목되었던 것처럼 불가리아 내 심각한 재정난은 체코국영전력공사(CEZ)와 오스트리아계 전력회사의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이들 회사들은 지난해 7월 전기요금을 13% 포인트 올렸는데, 겨울철 난방비로 전기료가 급증하자 시민들이 분노한 것이다. 17일부터 수도 소피아를 비롯해 전국 5개 도시에서 수만 명이 모여 전기요금 인상과 정부의 부정부패, 경제난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19일 밤에는 소피아 거리 한 가운데서 유혈충돌까지 발생했다. 당시 시위는 1997년 은행의 파산,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고통받던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 내각을 총사퇴하게 했던 사건 이래로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로이터 통신은 이 시위를 취재하면서 불가리아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터뷰한 결과, 자신들이 구하는 일자리는 급료가 200~350달러 정도에 불과한데 전기료는 135달러 넘게 내야 한다고 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이 시위는 필자도 목격한 바 있으며 필자는 2013년 1월부터 소피아 대학에 소속되어 연구교수로 있어 소피아에 거주했다. 이 때 필자 또한 불가리아 사람들의 평균 월급이 약 25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세가 인상되어 외국인인 필자도 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보리소프 총리는 시위가 확산되자 2월 18일 긴축 재정을 이끌어온 시메온 잔코프 재무장관을 해임한 데 이어 19일엔 불가리아 서부 지역 19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해온 체코국영전력공사와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밝혔으나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자 보리소프 총리는 국회에서 더 이상 국회가 국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사임 뜻을 밝히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2월 20일 전격 사퇴했다. 단순한 전기세 인상으로 왜 총리가 사퇴까지 해야 하는지 의아해 하는 한국인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가가 오르고 월급은 그대로이며 받은 월급의 65%가 전기세로 나간다면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게 이상한 것이다. 결국 당시 보리소프 총리의 사퇴로 본래 7월 실시될 예정이었던 총선은 4~5월 열렸고 경제 위기 타개를 공약으로 내건 사회당의 플라멘 올레샤르스끼(Пламен Орешарски)가 총리에 당선되어 불가리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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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불가리아 공기업 민영화로 인해 전기 요금 인상에 반대 시위 촉발, 총리와 내각 사퇴로 이어진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