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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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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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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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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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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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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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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쿠르디스탄과 이스라엘의 관계, 마냥 우호적인가?
    나는 늘 그렇듯이 터키 디야르바크르에서 쿠르드족과 쿠르디스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디야르바크르의 분위기는 반(反) 터키 정서가 여전하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는 디야르바크르이고 쿠르디스탄의 영토는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 로자바 쿠르디스탄으로 나뉘어 있다. 디야르바크르는 북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 디야르바크르를 걸어보면 중심대로인 가지대로에 이스라엘 국기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통 국기라면 어딘가에 내걸거나 하는 것이 원칙인데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밟고 가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 모형이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지저분하게 밟히는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국기는 도처에 팔고 있는데 이스라엘 국기처럼 바닥에 새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쿠르드인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니 10명에서 7명은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배신자(Betrayer)" 라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다음이다. 모두들 쿠르드족이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쿠르드족은 현재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1931년 유태인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의 한 인물이 쿠르디스탄에 잠입했다. 그는 현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디야르바크르를 방문해 쿠르드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비 아랍권 세력들,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과 접촉하여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쿠르드인에게 미국과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이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건국할 것이니 이 건국을 지지해주고 또한 지원해준다면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달라 요청했고 이런 그의 제안에 쿠르드인들은 이 모사드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사드 요원이 바로 모사드 정보기관의 창립 국장인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이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는데 쿠르드인들이 이를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라크의 유태인들은 이란 왕정과 이스라엘 정부,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쿠르디스탄 지역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이라크를 탈출했다. 한편 쿠르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 터키 내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터키의 관심을 소요 사태로 향하게끔 하고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쿠르드인은 17년이 지난 상황에도 이스라엘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따라서 비 아랍권 국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또 다른 비 아랍권인 쿠르드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부터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쿠르드인 무장단체 페쉬메르가를 1970년대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이스라엘군은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파병하여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고 식량과 무기도 지원하면서 그들의 무장 독립 투쟁을 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끝내 돕지 않았다. 무장 독립 투쟁에 식량과 무기 지원하며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를 대신 싸워주면서 이들 국가들의 국력을 낭비하게끔 하는 존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이란(팔라비 왕조)-이스라엘-쿠르드가 삼각 동맹을 맺어 이라크를 견제하여 중동 국가들을 상호 간 혼란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이 나타나 제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신정 정부는 반미와 반 서방, 반 이스라엘주의를 내세우며 이들 동맹에서 이란은 제외되었고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때 호메이니의 탄압을 받던 일부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과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되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체적인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는 반이스라엘 보이콧이 적었으며 북쿠르디스탄에는 이스라엘을 더욱 응원하는 등 오히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제품들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쿠르드인들이 훨씬 이득이었다. 적대국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그와 같은 혼란 기간 동안 중동과의 잇달은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그 사이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승인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나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주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미운 털이 박혀온 쿠르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이미 이스라엘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 요원 수백명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과 이란, 시리아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쿠르드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키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이라크 전쟁에서 결국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타도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아파 민병대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쿠르드인 특수부대를 활용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란 영토내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려 했다. 이 또한 쿠르드인들이 적극 도왔고 사담 후세인이 타도 되었을 때, 최소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에서 이를 거부해 이들 또한 독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전혀 설득하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쿠르디스탄 독립을 반대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게다가 쿠르드족 독립의 운을 띄워주면서 이라크 내 수니ㆍ시아파와의 갈등 및 이란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한꺼번에 노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이었다. 그리고 2019년 터키가 본격적으로 쿠르디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의 침략을 규탄하고 터키와 그 대리인들의 쿠르드족 인종청소에 경고한다(Israel condemns Turkish aggression against Kurdish areas in Syria and warns of ethnic cleansing of Kurds by Turkey and its proxies)."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용감한 쿠르드인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준비가 됐다(Israel is ready to provide humanitarian assistance to brave Kurds)고 했다. 이건 쿠르드인 입장에서는 웃기는 일이다. 쿠르드인이 원하는 것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완전한 쿠르디스탄 공화국을 설립하고 독립하는 일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이라는 단순한 사탕발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쿠르디스탄으로 인해 중동에서 새로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이다. 당시 쿠르드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도와 IS 격파에 나서서 실제 이들 토벌에 공을 세우고 막대한 인원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터키군 군사작전에 불개입을 선언했다. 쿠르드인들은 미국과 서방국가, 이스라엘 등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셈이 되었다. 당시 AFP통신은 "미국 지도자의 쿠르드인 포기는 이스라엘에 깊은 우려를 초래했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이스라엘의 고충 또한 알만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또 다시 쿠르드를 배신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19년 하반기에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박해와 추방으로 고통받았다며 이스라엘에는 쿠르드 출신 유태인들이 많고 중동에서 온건하며 서방 친화적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이 때 이스라엘에게 자치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인과 군사 · 경제 등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명서 정작 팔레스타인의 자치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그 모순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응원했다. 이제는 쿠르드 노동자당인 피케이케이조차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쿠르드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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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 많은 시사점을 준 유로 2020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지난 2020년 유로대회에서 개개인적인 기량은 최상이지만 조직력이 모래알 같던 프랑스 축구는 마침내 한꺼번에 무너졌다. 프랑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2020년 유로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레키프>와 같은 프랑스 언론은 대회 전에 음바페와 올리비에 지루 간에 은근한 신경전부터 시작하여, 앙투안 그리즈만의 롤을 시기질투한 음바페, 숙소 선정 문제 등, 프랑스 대표팀의 모래알과 같은 조직이 조기탈락을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레키프>는 이번 프랑스 대표팀을 선수들이 레옹 도메네크 감독 항명 스캔들을 일으켰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의 프랑스 대표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게 축구 뿐이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훈족의 유럽 침공은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을 일거에 서진시켰다. 이들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은 로마제국 영내에서 불법 이주하여 살게 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용할지 골몰하게 된다.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최악을 달리고 있었는데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지역과 사산 왕조의 침입을 많이 받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개별적인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산 왕조와의 전쟁은 끝이 없었고 로마 제국은 노예 수급이 차단됨에 따라 적잖은 곤란을 겪고 있었던 판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인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로마인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고 이러한 노예들은 군대에서 용병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게르만의 수용 인원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이 로마인보다 오히려 숫자적으로 우위를 보이자 이들은 로마인과 결혼을 통하여 혼혈민들을 로마 미래의 주역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점차 게르만 인들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이용되면서 군에서 게르만 인들의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의 군에서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즉, 로마 군 내에서도 게르만 인들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르만 계통의 민족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자들은 로마의 군 내에서 장교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오히려 로마의 순혈인보다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순혈인인 로마인들을 복종시키게 되면서 군이 거의 게르만 인의 손에 장악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마는 게르만 인들을 학대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힘으로 누르자 게르만 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반기를 들어 각 도시들을 제압했고 심지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로마 영내를 침입하자 이들은 훈족에 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공동의 적인 훈족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화해와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군의 실권자인 서고트 족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게 된다. 게르만 인들에 대한 무조건 적인 관용과 그들을 노예로 활용하려는 인권 유린, 그리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와 비리, 게르만인들에 대한 무시와 야만족이라는 멸시, 그로 인한 안일한 대처 등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제는 민족이나 순혈이라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다문화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점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 축구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고작 축구나 과거의 역사로만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현 시점과 앞으로 다가오는 점점 희미해지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대체하느냐, 혹은 어떻게 더 강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사회와 가정 내부를 보면 서로 마음에 안 들게 되었을 때 그 집단과 집단 안에 소속된 개인을 음해하거나 갈등을 표면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힘든 일 하기 싫다고 노역을 거부하며 화이트칼라를 노리는 젊은이들로 인해 결국의 국가의 근간 산업이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고 앞서 이자스민처럼 정치에도 관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보다는 오로지 동남아시아 인들의 편의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원칙이 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최근에 한동훈씨가 이민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 반복되는 부분에서 어떠한 실책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부분인데 한동훈씨는 그러한 심각성과 역사의 무서움을 여전히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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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7
  • 나토,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 가장 유력한 지정학적 전략의 요충지는 폴란드
    폴란드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고는 러시아의 위협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는, 만일의 위협에 대비해 군의 규모를 기존보다 크게 키우기로 결정했다. 2024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2.5% 수준까지 증액하고 2035년까지 5,240억 즈워티(한화 약 151조 4720억 원)를 투입해 군대를 현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5만 명이었던 정규군은 25만 명으로, 2만 명이었던 향토방위군은 5만 명으로 대폭 확대해 폴란드군을 현재의 2배 정도 규모로 키워서 나토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큰 군대로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국방비도 GDP의 5%까지 증액했다. 팔레스타인이나 아랍 세력과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GDP 대비 국방비가 5.2%이고 역시 북한과 언제든지 군사적 마찰을 상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은 2.43%가량이나 되니 국방비를 5%나 지출하겠다는 것은 거의 전쟁 발발이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나 생각할 만한 수준이기에 폴란드가 대단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과 자국 국민에게 심각한 위협을 끼치지 않는 한, 남의 나라를 침공하지 않으며 미국처럼 전 세계에 대부분의 분쟁에 참견하여 그들의 피로 돈을 벌진 않는다. 다만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삼국분할, 독, 소의 침략 등의 역사가 중근세사에서부터 현대사까지 몰려 있기에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8,000불 정도다. 서유럽에 비해서는 한참 뒤떨어지고 체코 (GDP 27,000불), 슬로베니아 (GDP 29,000불)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고 크로아티아 (GDP 17.600불)와 비슷하며 헝가리 (GDP 19,000불)보다 떨어진다. 게다가 쉥겐 협약에 가입이 되어 있고 쉥겐 협약 국가들 왠만하면 유로 화폐를 쓰고 있지만 폴란드는 자국 통화인 즈워티가 유로 통화를 감당할 수 없기에 체코 통화인 코루나가 사라지고 크로아티아도 자국 통화인 쿠나를 버리고 유로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북반구 동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자국 통화인 즈워티를 쓰고 있다. 이는 여전히 폴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것과는 별도로 강한 군대 육성을 위한 폴란드의 병기 조달 방안 중 하나로 2022년 7월 27일 대한민국과 맺은 K-2 흑표·K-9 자주곡사포·FA-50 구매에 대한 기본 협정의 큰 틀에서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방산계약까지 체결하고 군비 확충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게 속절없이 패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우크라이나가 붕괴되면 다음 차례는 폴란드가 될 것이라는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방산 계약으로 무기를 사들인 것과 별개로 나토와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하는 것도 따로 논의하고 있다. 얀제이 두다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폴란드 팍트(Fakt)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동맹국들이 나토의 동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핵무기 공유의 일환으로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를 결정한다면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Jesteśmy gotowi zaakceptować decyzję naszych sojuszników o rozmieszczeniu broni jądrowej w Polsce w ramach porozumienia o współużytkowaniu broni jądrowej w celu wzmocnienia wschodniej flanki NATO).”고 밝혔다. 두다의 이와 같은 강경 발언은 최근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칼리닌그라드에 군비를 강화하며 나토의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다음 날, 23일의 성명에서 러시아군이 폴란드 내 핵 배치와 관련한 상황들을 분석하고 모니터링 할 것이라면서, 폴란드에 핵무기가 배치될 경우 러시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취할 것이라 경고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 또한 이날 성명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개 국을 지목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들의 지원이 세계 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직접적인 대결 위험을 높이는 심각한 전략적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토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발트 3국 및 폴란드는 이제 서서히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립에서 지정학적 요충지 및 충돌 가능한 유력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기에 폴란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방산 거래를 통해 추가 무기들을 계속 확보할 가능성이 커졌다.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인 브와슈차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계약의 세부 사항으로는 K-2 및 K-9A1의 120mm, 155mm 포탄 및 기관총 탄약, 폴란드군 병사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한 K-2 흑표 전차 패키지가 33억 7천만 달러, K-9A1 자주곡사포 패키지 24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폴란드가 이 대금을 완납했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없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인 S&P는 폴란드의 통화 등급을 A/A-1로 유지하고 있으며 안정적이라 봤지만 폴란드와 EU 사이의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기금 이전이 지연될 경우, 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S&P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폴란드 경제의 중기 성장 전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러 리스크가 큰 곳에 계약을 했다면 철저한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그와 같은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폴란드와 방산계약부터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 할 의지조차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폴란드를 무조건 믿는 것으로 퉁친다면 변동이 심한 동유럽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는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아 우리가 잃는게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매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줄 아래 시퍼런 칼날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상태에서 매우 아슬아슬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매우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단순히 방산 계약 성공에 환호하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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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부남 왕국과 고대 동남아시아 문화
    부남 왕국의 출현 이전에도 이곳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 확실하며, 그것은 다량의 정교한 출토 유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호치민 시 서쪽 껀저(Can Gio)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된 옥 귀걸이와 금귀걸이, 팔찌 등은 B.C 6세기로부터 B.C 1세기 정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세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참족의 영토로 부남과의 연계성이 나타나고 있음이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하여 설화에서 언급되는 소마가 지배하던 곳은 단순히 원시적 단계의 미개 지역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남은 이후기 5세기 초를 전후하여 카운딘야 혈통 계열로 내려오던 왕권을 장군 판시만(Phan Shih Man)이 쿠데타로 차지한 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 영토들이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지배 영역은 동쪽으로 현 베트남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 서쪽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반도, 미얀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해안 지역 대부분을 그 지배 영역하에 둔 것이다. 그러나 부남이 동남아시아 남쪽 해안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고 하여 로마나 아니면 진나라 시대(秦代) 이래 중원 왕조와 같이 넓은 영토의 대제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배의 영역은 부남 왕에게 복종하는 종속국들로 연결되는 범위였을 뿐이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들과 토착 지도자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되는 형태였고 이들은 부남의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고 있는 정도였다. 단지『南齊書』에서 언급한 것 같이 복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료적인 부분을 분석해 볼 때 부남의 권력 중심과 주변부의 지배, 복종 관계를 참조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라 부남은 삼국 가운데 가장 남부에 위치했던 오(吳)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삼국의 항쟁 기간에 교역을 통한 부(富)의 증대 및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오나라도 부남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는 활발했다. 오나라에서 파견된 주응(朱應)과 강태(康泰)는 부남을 거쳐 말레이반도의 몇 개 국가들까지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주응(朱應)은『扶南異物志』, 강태(康泰)는『扶南土俗』과『吳時外國傳』같은 기행문을 책으로 남겼다. 아쉽게도 현재 이 책들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그들의 관찰은 중국의 사료 곳곳에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초기 부남에 대한 중국 사서『南齊書』와『梁書』등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그들에 대한 풍습과 문물을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응(朱應)과 강태(康泰)의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남에서는 재화를 유통하는 수단으로 금과 은이 사용되었다. 남자는 빈부에 따라 비단 천이나 무명천으로 치마처럼 옆으로 감싸 몸을 가리고, 여성은 머리로부터 입는 단벌의 의상을 착용했다고 중국 사서들은 전하고 있다. 각종 금은 그릇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풍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왕은 수 개 층으로 이루어진 궁에 살며, 백성들은 주상 가옥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도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인기 있는 닭싸움이 성했고 돼지싸움도 중요한 유희였다고 한다. 왕은 행차할 때 치장한 코끼리를 타고 왕비를 비롯한 부녀자들도 능히 코끼리를 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물을 파지 않고 한 연못물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며 여러 가지 장례 풍습도 소개되고 있다. 주로 화장을 했으나 강물에 시체를 버리든가 들판에 두어 새가 처리하게 하는 조장 풍속도 있었고 그냥 땅에 매장하는 방식도 있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중국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부남의 형벌 제도라 할 수 있는데『南齊書-蠻東南夷列傳』에는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 만약 송사가 생기면, 달걀만한 금가락지를 끓는 물에 넣어 그것을 꺼내게 하든가 쇳덩어리를 붉게 달구어 손 위에 올려놓고 일곱 보를 가게 하면, 죄 있는 자는 손이 타고 죄 없는 자는 상하지 아니한다. 또, 물속에 들어가게 하면 옳은 자는 가라앉지 아니하고 옳지 않은 자는 즉시 가라앉는다.” 위 사료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옥이 없는 것은 인력이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사형을 적게 판결하고 노역으로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응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즉결처분은 노예 제도가 적절한 처벌로 사용되기도 했을 것이다. 송사가 일어난 경우에 해결 방식은 매우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의 사회 현상으로 볼 때 법 제도와 같은 확실한 중앙 집권에 의지하지 않고 신권(神權)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확실한 판단이 힘들기 마련인 경우, 종교적 신성성과 응보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판결 방식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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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민족주의, 전쟁, 학살 등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범,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법정에서 음독 자결한 이유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는 모스타르 학살을 주도한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11월 29일 최종 판결을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 재판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프랄략에게 죄를 인정하는지를 묻자 “Bull shit (헛소리)! 나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Ja, Praljak, nisam ratni zločinac. Prezirem i odbacujem tvoj sud).”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 액체를 모두 마신 뒤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Ono što sam upravo popio bio je otrov)”라고 소리쳤다. 이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그러자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무엇이 프랄략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 죽음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정에서 자살로 사망한 프랄략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꽤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이 프랄략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그의 외침 자체가 연극 대사와 같았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의 본 직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의 창당 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 방위협의회(HVO,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변모했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민병대가 포위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도시인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무슬림들과 함께 지켜냈다. 하지만 1993년 초,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카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은 이 프랄략의 군대였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하여 완전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모스타르 내, 외부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집단 추방했다. 당시 수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약 1만여 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피해자들에는 세르비아계사람들과 집시도 포함되었다. 프랄략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군 사령관 또한 모두가 거짓말이라 외치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과 같이 프랄략도 이 판결을 거부했다. 종신형을 받은 믈라디치와 다르게 프랄략은 고작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석방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ICTY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형기의 3분의 2을 마친 죄수는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자살을 한 이유로 볼 때 스스로 전쟁 때부터 만든 원칙인 크로아티아 독립과 통합이라는 하나의 대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들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세르비아계에 비해 전쟁 범죄에 대한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판단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것이 이 날 재판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 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 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 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포함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의 판결로 인해 크로아티아계까지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ICTY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재판 중 옥사한 것과 다르게 투지만은 ICTY가 기소를 완성하기 전인 1999년 자연사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었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부로 모시는 투지만 역시 ICTY 법정에 섰어야 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은 투옥되면서 복역 중에 양심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었다. 믈라디치가 판결 이후, 자신은 이미 늙은 사람이라서 이와 같은 판결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들에게 앞으로 남길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이 법원에서 한 절규는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듯 싶다. 믈라디치가 현재 세르비아인들의 영웅인 것과 같이 프랄략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 영웅이자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보스니아 내, 외부의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았고 그를 카톨릭의 성인으로 받드는 분위기까지 감지되었다. 당시 11월 29일 당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지역에서는 프랄략에 대한 추모 미사와 촛불 추념회가 열렸다. 당시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프랄략의 자살이 ICTY의 부당한 판결 결과에 대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지난 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렸던 공식행사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방위한 프랄략 장군의 위업을 평가하는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 군인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Žalosno, ali Praljak je trebao odslužiti kaznu).”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사망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Gospodin Praljak je bio veliki filmaš. Umjesto što je rušio Mostar, trebao je snimiti film o Mostar).”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을 끝으로 ICTY는 껄끄러운 상태에서 끝을 보게 됐다. 당시 선고는 1993년에 설립된 ICTY가 문을 닫기 전에 열었던 마지막 공판이었다. 이는 희대의 자살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 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 바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심리의 민족주의 이념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 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 카톨릭계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아직도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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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법의 목적성, 도덕적 규범의 조례인 성문법과 불문법을 대한민국 법체계에 적용시켜야
    필자가 영국 유학 시절에 <마그나카르타(Great Charter of Freedoms) 대헌장>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것 저것 찾아본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구성하고 있었던 <법학제요(Institutiones)>였다. <법학제요(Institutiones)>의 원문에 의하면 중세 성문법의 기본으로 알려진 "테도르도브락스(Tedordovracx)"라고 알려진 문서 그대로의 법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는 "다수가 결정한 최소한의 도덕적 규범(Quod minimam normam moralem paro per maioris)"으로 되어 있다. 독일의 법학자인 게오르그 엘리네크(Georg Jellinek; 1851~1911)의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논리보다 앞서 로마법에서 이미 최소한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관습이 있고 그것이 인간 생활의 규범이 되어왔다. 관습은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온 한 부족, 씨족의 습관인 것이지 성문에 명시된 부분은 아니다. 다만 전통이라는 부분을 착안하여 만든 다수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룰(Rule) 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관습에는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지만 강제성을 불러올 정도의 무서운 파급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습이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인간적 내면에서 스스로 통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Morality)이다. 그러한 내면의 통제는 선악의 구분을 만들어낸다. 가치의 적합한 체계와 도덕적 행위의 원칙들은 대체로 선을 추구하고 있다. 도덕적 판단은 하나의 행동이 적당한 것인지 아니면 부적당한 것인지 또는 이기적인 것인지 이기적이 아닌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셀리아 그린(Celia Green)에 의하면 그의 저작 에서 영역의 도덕을 주로 부정적인 것과 금지된 것으로 판별하는 특성을 위주로 일종의 "금기론"을 형성했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의 선악을 판별하여 스스로 억제하고 통제하는 행위 자체가 도덕인데 이를 강제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의 목적은 ‘정의(Justice)’이고 도덕의 목적은 선악의 판별이다. 법의 특징은 외면성, 양면성, 타율성, 상대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덕의 특징은 내면성, 편면성, 자율성, 절대성을 중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은 합법적인 여부를 중시하는 것에 반해 도덕은 윤리적인 부분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만 선악이 없고 있는 그대로의 표본을 유지하면서 진실과 허위를 가려낸다. 그것을 성문으로 남기는 것이 성문법인데 대개 이러한 성문법(Statute Law)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법에 근거하여 나타난 판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성문법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영국은 불문법(Unwritten law)과 관습법(Customary law)을 도입했다. 그래서 아주 이례적인 판결이 많고 성문법에 의거한 부분이 아닌 불문법(Unwritten law)과 관습법(Customary law)에 의거해 도덕적인 부분, 반 사회적인 부분에 있어 판결이 가능한 것이다. 고대 로마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성문과 관습을 같이 적용했다. 이러한 적용은 비잔틴 제국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비잔틴 제국의 경우, 혈통이 무의미할 정도로 정통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자손과 부족 출신의 유력자들이 황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로마 성문법이 아니더라도 로마 속주(Provincia)에 속해 있던 이민족 부족의 관습법으로 진실과 허위를 판별하는게 가능했던 것이다. 고대 로마나 영국도 성문법에 큰 허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불문과 관습법을 통해 성문법의 허점을 보완해왔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 한국은 성문법을 너무 고집한 나머지 그 이상의 이성적인 판결을 기대하기 힘들다. 잘못된 판결이 나와 누군가가 억울하게 징역형을 받아도 그것이 성문법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했지만 그 또한 성문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그 성문법을 악의적으로 악용을 한다면 이를 대처해 나갈 방법이 없어 늦게나마 새로운 법을 재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태완이 법"이나 "민식이 법" 같은 부분이 그러한 일례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자꾸 성문법으로 명시해서 법을 만들어 나가면 그에 대해 보완할 장치는 점점 더 약해지기 마련이다. 있는 법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판국에 성문법에 법전을 새기는 자꾸 늘어간다면 이 또한 그에 맞춰 법을 잘 아는 자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와 같이 법을 악용하여 나쁜 짓도 합법적인 것을 가장하여 하게 된다면 그 또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성문법에 법 귀절 한 글자를 더 새기는 것보다 도덕적 민의가 반영된 불문과 관습, 도덕적인 부분이 함께 어우러진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형이 필요한 자에게 성문법으로는 사형을 시킬 수 없는 죄목이지만 도덕적 민의가 반영된 불문과 관습, 도덕적인 부분 특별 법률에 있어 사형을 구형하는 융통성 있는 판결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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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1900~1980)의 독재 통치기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도 나왔을 정도였으며 이웃 나라인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 때로는 군사 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소련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조금이나마 잘 사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는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이후에 나타난 토도르 지프코프(Тодор Живков)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릐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이며 보수적이고 안정된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들인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인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 정권에 순응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전통적인 봉건국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도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진 셈이 되었다. 특히 체르벤코프 시대 때는 그러한 독재 통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그의 시대는 후술할 지프코프의 시대만큼이나 암울한 시대였다. 불가리아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한 사회주의자 체르벤코프는 1900년 9월 6일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 인근의 즐라티차(Златица)에서 탄생했다. 1919년 공산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과 신문 편집에 참여했으며 1923년 불가리아의 쿠데타에 가담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내 석방되어 소련으로 이민 갈 수 있었다. 1925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으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사상에 심취했으며, 이후에는 학교장이 되면서 교수를 겸직하기도 했다. 체르벤코프는 스탈린의 통치 방식을 지지했으며, 박식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지식과 수준급 입담과 재치로 유명세를 탔다. 이를 두고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스파르타크"라는 별명을 지어줬으며 그는 이 필명을 평생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1941년, 불가리아로 귀국해 반(反) 나치와 친(親) 공산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라디오 방송국의 국장이 되어 선전선동을 주로 맡게 되었다. 1944년 체르벤코프는 다시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을 돕다가 전황이 소련군에게 유리해지자 자신의 처남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과업을 돕기 위해 불가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체르벤코프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막내 여동생 엘레나와 결혼하여 처남매부 지간이 됐으며 디미트로프와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좌를 고스란히 승계받을 수 있었다. 체르벤코프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체르벤코프는 1947년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다가 1949년에 부총리가 되었다. 부총리가 된 직후, 불가리아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사망했는데 이 때 불가리아는 임시로 집단적 리더가 되어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가 되었고, 바실 콜라로프(Васил Коларов)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 상황은 1950년 콜라로프가 1년 만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콜라로프의 사망은 체르벤코프와 노선을 달리했기에 자신의 권좌에 굴복하지 않은 콜라로프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재기되었다. 1950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의 완전한 승인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총리와 국가 수반의 직위를 결합해 통합 총리가 되었다. 체르벤코프의 정책은 당시 소련의 정책과 매우 흡사하였고 스탈린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체르벤코프의 통치 시기에는 당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일탈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의한 문화 예술에 대한 독단적 탄압과 고립주의적인 외교 정책이 실행되었다. 이 시기에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는 소련의 스탈린과 유사한 개인 숭배 대상으로 추대했고 스스로도 숭배 대상이 되어 각종 선전선동들을 감행했다. 같은 시기에는 불가리아의 집단화 운동도 함께 시작되면서 농업과 공업의 집단화로 스탈린식 사회집약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체르벤코프는 1951년 초까지 완전한 당 내 규율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여 많은 고위 관리를 포함하여 5명 가운데 1명을 숙청하고 적극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1953년까지 당원 460,000명 가운데 100,000명을 당에서 제명시켰으며 숙청하여 살해했다. 이러한 체르벤코프의 인격 숭배 대상의 모델은 스탈린 양식의 모델과 유사했으며, 소피아의 의과 대학교를 포함해 소피아의 다양한 장소에서 체르벤코프의 이름을 차용한 장소가 대거 생겨났다. 체르벤코프는 개인적으로 현 정세에서 개인숭배를 필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극단적인 형태들을 강력히 반대했다. 1953년까지 불가리아는 서방과 관계를 단절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출입의 90%는 소련과의 연대 및 파트너십과 관련이 있었다. 체르벤코프 내각은 농, 공업의 집단화 비율을 높이려고 협박과 공급 차별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는 불가리아가 민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가 빈곤에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체르벤코프 때 이와 같은 집단화로 인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국유 경작지가 12%에서 61%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1953년 사이의 5개년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농업 부문에선 -0.9%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시기 산업 부문에선 20.7% 성장을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8.4%에 이르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 체르벤코프는 이미 스탈린주의 노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디미타르 디모프의 소설 담배를 출판 허용한 일은 문화 활동에 향한 당의 통제가 약간 완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남아있다. 1953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관계를 재수립하였고, 일부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으며, 기획자들은 소비재 생산 증가 및 상품 가격 인하를 논의했다. 그러자 스탈린주의자들의 방해로 인해 1953년 이후 체르벤코프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1954년에는 당 지도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경제 및 정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줄였으며, 집단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1955년까지 정치범 약 10,000명을 석방하여 자신의 노선을 완전히 탈바꿈했다. 1956년 4월,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이후 불가리아 공산당은 체르벤코프의 권위주의, 불가리아만이 갖고 있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했다. 체르벤코프는 같은 해 직위에서 물러나 지프코프에게 직위를 양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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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 최근에 제기된 차범근 논란을 보며
    역대 한국이 진출한 월드컵에서 1954년 초창기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현재까지 최악의 월드컵이 차범근 감독이 지휘했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그 때 내 기억으론 한국은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조였고 첫 경기 때, 언론에서 멕시코는 해볼만 하다며 피지컬도 비슷하다며 유럽 팀들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고 1승 상대라며 온갖 설레발을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당시 우리는 멕시코를 A매치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1승 상대라며 설레발을 떨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 한국은 세계 축구를 월드컵만 보았던 우물 안의 개구리였고 유럽 리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던 때였다. 지금하고 참 닮은게 언론은 변한게 없다. 현재 카타르 아시안컵도 한국이 62년 만에 당연히 우승할 것으로 언론들이 온갖 설레발을 벌였고 한국하고 일본이 결승에서 만날 것이다, 올해 아시안컵 우승 적기다, 등의 설레발을 떨다가 현재 성적 1승 3무로 아주 어렵게 8강까지 왔다. 나는 참고로 다음날 있을 8강 호주 전이 고비라고 보았다. 다음날 호주 전에서 이기면 결승까지는 무난히 갈 것이고 내일 지면 온갖 창피함을 느끼면서 그 후유증은 말도 못할 것이다. 1998년 당시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를 만나 하석주가 멋진 프리킥으로 선취골을 넣었지만 골 넣은지 2분도 안 되어 백태클로 퇴장당했다. 10명이서 싸우게 된 우리는 결국 멕시코에게 1:3으로 역전패 당했다. 다음 상대는 조 최강 네덜란드, 상대 감독은 거스 히딩크, 우리는 세계 최강 유럽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며 0:5로 졌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월드컵에서 이 정도 스코어 진 적은 없고 유일한 대패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1:4로 진 것이 전부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최고 선수였고, 누구보다 유럽을 잘 아는 차범근 감독이기에 사실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최소한 비기는 것을 생각했었지만 그 생각도 무색하게 최악의 대참패를 당했고 결국 그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은 경질되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경기 도중 경질된 감독이 차범근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월드컵 도중에 경질 당한 한국 감독 또한 그가 유일하다. 이후 감독 대행으로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벨기에 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1:1 무승부로 끝냈다. 이후, 차범근은 승부조작 얘기를 꺼내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차범근은 근거 없는 루머로 축구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여, 5년간 자격정지 징계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클럽 선수로써는 최고였을지 몰라도 국대에서의 차범근은 그저 그랬다. 월드컵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고 독일에서 "차붐"이라 불렸던 그의 월드컵 성적은 후배인 황선홍이나 홍명보, 박지성만도 못했다. 감독으로써의 차범근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요즘 나오는 허정무의 자서전 등의 이야기를 보니 인성으로도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그저 한 때 조금 했던 선수 정도로 기억해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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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 독일과 폴란드의 무역전쟁 이야기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한 폴란드는 20세기 초, 독일과의 북부 실레지아 분쟁이 터지면서 심각해졌다. 북부 실레지아 영토 분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북부 실레지아의 73%를 독일에 귀속시켰으며 25%를 폴란드에 넘겨주고 나머지 2%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넘겨주어 분할된다. 이러한 실레지아 분할 사건은 독일과 폴란드, 양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이는 독일 입장에서 볼 때 당시 폴란드에게 넘어간 25% 지역이 인구의 40%가 넘는 비교적 높은 비율이 거주하면서 북부 실레지아 전체 산업시설의 80%가 위치한 핵심 지역이었기에 독일 측의 불만은 대단했다. 그 중에서 카토비체와 쾨니히스휘테, 루블리니츠 등의 주(州)들은 독일 측의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억울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계가 더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들은 독일 표가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도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농촌 지역은 폴란드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대다수가 독일에 잔류하게 된 것 또한 불만이었다. 이처럼 애매한 주민투표의 결과 때문에 주민투표를 주도한 협상국가들도 양국 국민들과 정부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국제 연맹이 중재에 나섰고 이를 통해 1922년 제네바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자 간의 합의로 겨우 실레지아에 대한 재분할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양국이 모두 만족할 해결책은 아니었다. 1924년 10월 26일,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Zeitung)에서 처음으로 폴란드에 대한 무역 공격을 시사하는 사설이 게재되었다. 해당 사설에 의하면 '폴란드의 무례함을 공격하여 분쇄하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매기고 이를 통해 폴란드에게 매우 "결정적인(Entscheidend)"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수상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는 1924년 11월 비밀리에 폴란드산 물건에 대한 수입 거부 조치 준비를 지시했다. 우선 북부 실레지아의 73%만 차지하게 된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을 무시하고 1925년 1월 6일부터 폴란드의 석탄, 철광석과 강철에 대해 무관세를 철폐하고 수입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폴란드의 국민들이 독일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Władysław Grabski) 폴란드 수상이 독일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독일의 한스 루터(Hans Luther) 수상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 전체를 폴란드가 독일에게 돌려줄 때까지 수입거부와 관세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포즈난의 경우, 이미 독일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인이 더 많이 살았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포즈난 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실레지아 땅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가져간 카토비체 지역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 폴란드에 넘어간 이후 독일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를 오펠른으로 옮겼으니 자신들의 영토의 주도를 침탈한 폴란드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시 폴란드에서는 단 한 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특히 독일이 무역 전쟁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이 명백해지자 폴란드 역시 1925년 5월 독일산 공산품에 대해 대대적인 보복관세를 매겼다. 그러자 독일은 이와 같은 폴란드의 보복을 예상했었다. 1925년 6월 폴란드의 모든 제품에 대해서 최소 50%~최대 200%에 달하는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국가 무역의 40%를 독일에 의존하던 제2 폴란드 공화국은 독일에 반발했으나 독일의 이와 같은 보복 조치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독일은 폴란드가 영국의 차관을 얻는 것까지 막고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1925년 7월이 되자 오히려 수세에 몰린 폴란드는 독일에게 영토 문제에 대한 협상을 할 것이니 무역 전쟁을 철회하자고 제안했지만 독일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의 즉각적인 전체 반환 없이는 일체의 협상도 없다며 이를 완전히 거절했다. 1925년 8월 당시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Reichsbank, 제국은행)의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는 폴란드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약간이라도 늦춘다면, 독일이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며 당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폴란드와의 협상 자체를 중단할 것이며 앞으로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각에 밝혔으며 이는 그대로 승인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폴란드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1926년에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했기 때문에 기타 국제 연맹 국가들을 통해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혹독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동정적이었던 흐름이 생기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제연맹은 독일과 폴란드의 평화적 해결을 주문한다며 시간만 끌게 된다. 국제연맹에서는 대공황 때까지 무역 전쟁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 1929년 9월,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결국 무역 전쟁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독일, 폴란드 둘 다 대공황으로 인한 후폭풍이 상당했기 때문이며 특히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에게 보호무역 조치를 더더욱 강화했고, 이 때문에 양국의 무역량은 바닥을 치게 됐다. 결국 독일과 폴란드는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 더욱 큰 GDP의 하락을 보이게 된다. 특히 독일보다 폴란드가 심각졌기 때문에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총액 GDP는 20.7% 감소했고 실업률은 47%까지 증가했다.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의 세력이 급격히 커졌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카톨릭 중앙당은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독일 내부에서는 폴란드와의 협상 분위기는 더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후 1933년에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비해 폴란드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독일이 재군비도 안 한 상황에서 폴란드와 무역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당시 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한테도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먼저 당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폴란드 국가원수 앞으로 독일-폴란드 간의 무역 전쟁을 해결하자는 전보를 보내고, 이를 받은 피우수트스키가 즉시 폴란드 정부에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1933년 10월 먼저 독일이 최고 200%까지 매겼던 폴란드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고, 폴란드 역시 11월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독일과 폴란드는 상호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부속 조약으로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은 1934년 3월 2일부로 효력을 발휘했고,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무려 9년 2개월만에 해결되었다.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공산품에 대해서는 상호 무관세, 농산물에 대해서는 상호 5%의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폴란드 모두 무역 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단 독일은 끝내 폴란드에게서 요구한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다. 무역 전쟁을 9년이나 지속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 땅에서 사업을 하던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도 무역 전쟁으로 인해 외화 수입이 끊겼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어 1920년대에 시작하려 했던 공업화를 한참 이후로 미루어야 했다. 결국 폴란드는 1933년까지 농업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1939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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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 러시아에 거주한 프랑스 사람들과 프랑스어 및 문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기 때문에 왕정주의자들을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도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된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을 지적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였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에서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모스크바 동쪽 400km)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라면서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다. 이와 같은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던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애국주의적 기운이 귀족들의 모국어 사용을 더욱 고취했고 때로는 이것이 생존의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을 때도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벽보)', '프레사(언론)', '샤름(매혹)', '카발레르(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이 프랑스식 외래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러시아어 안의 영어 차용어 TOP 10. 1) Аэропорт (아에라뽀르트) airport (공항) 2) Журнал (쥬르날) journal (잡지) 3) Газета (가졔따) gazette (신문) 4) Пакет (빠껫) pocket (봉지) 5) Туалет (뚜알롓) toilet (화장실) 6) Паспорт (빠쓰뽀르트) passport (여권) 7) Телефон (뗄레폰) telephone (전화) 8) Адрес (아드레스) address (주소) 9) Туризм (뚜리즘) tourism (관광여행) 10) Багаж (바가쥐) baggage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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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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