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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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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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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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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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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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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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자유주의의 역사와 우리의 자유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저마다 자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에로의 자유’를 의미하는 적극적 자유와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를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문제는 타인을 배려하느냐 여부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이거나, 조폭들이 생각하는 자유가 문제이다. 그것은 적극적 자유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도 아니다. 방종이다. 평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는 이와는 다르다. 소극적 자유는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구속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유이다. 이들이 외치는 자유가 서구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로부터 자유주의가 싹텄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유럽 사회 전체적인 운동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 시대의 주역은 부르주아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생긴 상공업지역을 부르그(bourg)라고 하고,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본주의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의 주된 관심사는 부의 축적이었다. 새로운 인간상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내세와 천국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여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재산과 번영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며 개인이 누리는 재산과 번영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해방을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구 자유주의의 뿌리였다. 그것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며, 그러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절대군주제 타파에 앞장선 시민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법에 입각한 평등을 외쳤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귀족과도 신분적인 차이가 없어야 했다.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러한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그들은 비인간적이며 차별적이었던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하는 근대 서양의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수탈하는 신분 차별을 반대했다. 또 절대군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과 법으로 국가권력을 명확히 제한하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자유방임 경제체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근대의 자유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자본주의를 낳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앞장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 해방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앞에서 살펴본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이다. 최장집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좌우 양쪽 진영에서 부정되었다고 지적한다. 보수파들은 자유를 외치면서도 냉전 반공주의와 동일시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실천하지 않았다. 진보파는 자유주의를 친미적 부르주아 이념으로 경멸했다고 진단했다. 결국 한국에서는 진정한 자유주의가 싹트지 못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국의 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지, 자유주의의 심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유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동일화됐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주의자들은 반자유주의자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이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평등을 무시한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귀족주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 정치인들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고사하고, 사법 권력의 견제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바탕으로 평등과 인권, 관용,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도 존중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도 존중하면서 기회의 평등, 선택의 자유, 공동체의 선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이강인이 탄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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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2-19
  • 현대 카페의 원형이자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카흐베하네(Kahvehane)
    커피는 주로 이슬람권에서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아라비카를 비롯하여 이슬람권의 커피가 유럽 커피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현대 카페의 원형이자 커피 하우스는 카흐베하네(Kahvehane)로 이 카페는 중동을 중심으로 퍼졌는데, 유럽에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1554년 시리아계 아르메니아인인 하킴과 샴스가 개업하였다. 카흐베하네는 터키어로 커피를 뜻하는 단어인 카흐베(Kahve)와 페르시아어로 집을 뜻하는 하네(Hane)의 합성어로 나타난다. 참고로 현대 터키어에 의하면 "커피가게"라는 뜻의 카흐베치(Kahveci) 혹은 책 읽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앗하네(Kıraathane)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카흐베치와 크라앗하네를 찾은 사람들은 커피보단 차를 더 자주 마신다는 점에 있다. 터키어로 아침식사를 뜻하는 카흐발트(Kahvaltı)도 원래는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에서 유래된 단어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침식사를 카흐발트라 하면서도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터키의 전통이다. 카흐베하네는 17세기 무렵부터 이스탄불에서 보편화되었는데, 늘어나는 카흐베하네에 대해 투르크 시민들의 불만이 생겨났다. 1611년에는 이집트의 총독이 카흐베하네에서 반 정부적인 언동이 많다고하여 커피 판매와 더불어 카흐베하네를 금지시켰다가 커피를 좋아하던 술탄 아흐메트 2세의 분노를 사서 총독에서 추방된 사건도 있었다. 특히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특권 계급인 예니체리와 황태후 등의 하렘 출신의 여인들이 무능한 술탄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과 결탁하여 사치와 부패를 이어가던 세력이 바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이슬람 수피들이었다. 카흐베하네는 이러한 수피들의 거점이었다. 동시에 예니체리의 군대 이외의 개인사업으로써 그들의 고(高) 수익원이었다. 당시 이스탄불의 카흐베하네는 대부분 예니체리들이 상권을 쥐고 있었고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을 요구하고 쇄신을 노리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인 카디자델리(Kadizadeli)파가 출현했다. 카디자델리파는 커피와 커피문화, 카흐베하네를 매우 혐오했다. 이들에게 있어 커피와 커피문화는 악마의 음료와 문화였고 카흐베하네는 악마들과 이교도들의 집합소로 여겼다. 그들은 술탄 무라트 4세가 등극했을 때 집권 세력이 되었다. 무라트 4세는 지독한 원리주의자였다. 무라트 4세가 친정하며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해 1633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서 1차 커피 금지령을 내리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라트 4세 본인은 커피 자체는 매우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흐베하네에서 벌어지는 지식인들이 세속적인 정치에 대한 담론과 비난은 매우 싫어했다. 무라트 4세가 지독한 원리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카디자델리파와는 달리 커피는 악마의 음료로 여길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가혹한 금주령, 금연령으로 유명했던 무라트 4세는 커피에 대해서도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을 적용해 약 3만여 명이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무라트 4세 사후에 즉위한 술탄 이브라힘은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뒤이어 옹립된 메흐메트 4세의 시대에는 1651년 태후 쾨셈이 암살되었고 카디자델리파를 후원하던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의 섭정이 시작되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1656년에 지정된 제2차 커피 금지령을 통해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렸다. 쾨프륄뤼 가문(Köprülü ailesi)은 17세기 후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명문가로 쾨프룰루나 쾨프뤼뤼 등으로도 불린다. 쾨프륄뤼 가문은 본래 알바니아계로 가문 이름은 이 가문의 본관인 알바니아 지방의 '퀴프릴리우(Qyprilliu)'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북마케도니아 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벨레스(Veles)'라고 불리고 있다. 황권이 막강해 귀족 가문이 그다지 득세하지 못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에 무려 6명의 대재상인 사드라잠(Sadrazam)을 배출했다. 제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1차 커피 금지령과는 달리 규제가 완화되긴 했지만 정치적인 이용은 극대화된 경우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마르세유 등지에서 커피가 보급되는 동안 실로 위대한 세기를 맞이한 프랑스 왕실과 파리는 커피의 유행에서 약간 비켜져 있었다. 비록 스페인을 통해 1615년 코코아와 네덜란드를 통해 1636년에 홍차가 보급되어 파리에서 대유행을 탔지만 커피는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다. 그러던 1669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계획하던 오스만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측근인 뮈테페리카 쉴레이만 아아(Müteferrika Süleyman ağa)를 파리에 보내 루이 14세에게 술탄의 친서를 전달했다. 쉴레이만 아아는 파리에 집을 빌려 터키식으로 꾸미게 된다.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커피를 아낌없이 대접했다. 이는 엄청난 인기로 이어져 신분 차이을 막론하고 파리 시민들이 쉴레이만의 임시 거처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쉴레이만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접대를 받을 때에 루이 14세가 환영식의 소감을 묻자 터키 황궁이 훨씬 호화롭다 답했다. 이때 루이 14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결국 쉴레이만이 전권대사가 아닌 일개 사절에 불과함을 파악한 루이 14세는 그에게 귀국을 명하고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때는 중립을 지키게 된다. 비록 쉴레이만 아아는 당초의 목적인 프랑스와의 동맹 강화에는 실패했지만 커피와 투르크리, 즉 터키 문화에 대한 강한 인상을 프랑스에 남겼다. 사실 루이 14세도 커피를 즐겼기 때문에 커피콩 선물 자체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년 후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 나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한 축으로 합류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예 기병 부대인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의 활약으로 인해 대패했다. 투르크 군의 대부분은 보급품을 놓고 황급히 후퇴했는데, 그 중에는 대량의 커피 포대도 있었다. 이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군과, 신성로마제국의 군대, 오스트리아 군은 전리품인 커피콩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이에 대한 쟁탈전으로 인해 사망자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그만큼 커피 원두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커피콩은 공방전 도중 터키군으로 변장해 내부와 폴란드 원군 측에 소식을 전달한 폴란드 출신의 병사 콜시츠키에게 상당 부분 돌아가게 된다. 콜시츠키는 비엔나에 '파란 병 아래 집'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이미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는 1665년 비엔나에 당도한 오스만투르크 사절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다. 공방전이 벌어지기 4년 전인 1685년에 이미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비엔나에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최초로 초승달 모양의 빵이 만들어져 판매하게 되는데 이 빵이 바로 크로와상(Croissant)이다. 크로와상에 대한 기원설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초승달 문양의 빵을 만들어 투르크에 승리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먹었다는 설이 있다. 또 오스만투르크 제국, 터키에서 만든 빵이 역수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2차 비엔나 공성전 당시 제빵사가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이 땅굴을 파서 오는 걸 알아채고 서둘러 왕에게 보고했다는데 유래도 있다. 이를 막아내 제빵사가 자신의 업적을 이어가기 위해 빵에 오스만투르크의 문장인 초승달 모양을 담아 빵을 구웠다는 설 등이 존재했다. 유럽인들은 이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크로와상을 먹으며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했던 당시의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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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2-19
  • 치명적인 인류 최초의 팬데믹, 스페인 독감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을 두고 보면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창궐한 독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스페인에서 생성된 독감이 아니다. 스페인 독감이라 붙여진 이유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상태에서 많은 관련 국가들이 각 정부의 보도검열로 인해 이 독감을 다루지 않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중립국 상태였기 때문에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독감에 대해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로 인해 다른 나라 국민들은 스페인 언론을 통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 명명된 것이다. 당시에 대부분 스페인 의회와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Alfonso XIII, 1886~1941)까지 감염되었을 정도로 스페인 내에서도 많이 퍼지긴 했지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과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도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만 크게 유행한 것이 아니고 단지 언론 통제가 낮은 스페인이기에 소식이 더 빠르게 전달되었던 것 뿐이다. 결국 스페인은 독감의 발원지가 아니고 오히려 해당 질병에 대한 정보를 세계 각국에 빠르게 전달하는데 있어 큰 공이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오히려 질병 이름 자체가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게 된 것에서 많은 오해를 낳고 있어 명칭에 대한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 발원지에 대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실제 발원지는 미국이나 영국, 중국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 대신 1918년 독감 범유행(Pandemia de gripe de 1918)이나 미국 독감, 시카고 독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미국에서 1918년 초, 최초로 확진자가 나왔으나 일부 연구에 의하면 질병의 특성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16년과 1917년 영국 군대에서 유사한 확진 사례가 보고 되었고, 1917년에는 중국에서 보다 큰 규모의 유사한 감염 사례들이 잇달아 보고되었다. 이와 같이 질병의 기원에 있어서 여러 이견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3일 열병"이라 하였는데 이름처럼 짧은 증상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가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없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최초 확진 기록에 의한 보고는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가 최초로 나타났으며 3월 8일 캔자스 퍽스톤 기지와 3월 11일 미군 각 부대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독감의 출처가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보여지는데 이 또한 미국에서 최초로 보고되었기 때문에 그 기원을 따지자면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발원해 미국으로 건너오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발원해 아메리카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재기하고 있다. 킬 군항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으로 점철되어지는 시점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빠르게 완치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캘리그램(Calligram)의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미국 사업가이자 전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레더릭 트럼프(Frederick Trump, 1869~1918)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한 대표적인 유명인이 되었다. 스페인 독감이 매우 무서운 부분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유행성 질환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과거에는 질병이 냄새로 전파된다거나 피의 균형을 맞추면 병이 완쾌된다는 등의 현대로 보면 비상식적인 생각을 했었다. 방역이나 위생에 대한 개선 의식은 아주 고전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위생에 대한 의학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은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역은 여전히 고전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병은 걷잡을 수 없이 전파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은 20세기 초, 이미 세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었다. 공중보건에 대한 체제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던 근대화된 유럽과 미주를 비롯한 서구인들이다. 상수도, 하수도와 같은 공중위생시설은 물론이고 비말 전파를 막으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이나 손을 씻어야 감염률이 떨어진다는 정보 등도 이 당시에 이미 충분히 널리 퍼진 상식이었다. 이 때도 마스크 착용은 환자나 의사만이 하는 것이라 인식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보건의 체계가 갖추어 있었어도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이유다. 당시 세계 인구는 약 17억 명 정도였다. 여기에 감염자는 약 5억 명 정도였고 사망자는 최소 1,700만에서 최대 5,000만에 달했다. 이는 총 감염자의 3~9%,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수가 제대로 추산되지 않은 이유는 진단할 겨를도 없이 야전에서 사망한 군인들과 당뇨, 고혈압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망자를 포함하지 않기도 했다. 이 독감 자체보다 당뇨, 고혈압 등의 기저질환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신체에 합병증이 생겨 세균성 폐렴이 발병해 폐에 물이 차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행정력의 미비, 세계대전 전후에 안정되지 못한 정치적 혼란 등의 이유도 사망자 수를 제대로 집계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또 당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사망자를 추정할 수도 없는 인도나 중국, 러시아와 같은 나라도 존재했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사망했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인 900만 명의 2~5배 정도의 사망자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들은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 섬인 사모아에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30%가 사망했다. 또 알래스카 이누이트 마을 몇 개도 몰살당하는 운명을 겪었다. 그리고 산마리노는 이 질병 하나로 인해 국가가 멸망할 위기까지 갔었으을 정도로 심각했다. 일제 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세계적인 대유행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 독감을 "무오년 독감"이라 불렸으며 1918년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대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 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이는 한반도의 전체 감염자 1.87%, 전체인구의 0.83%에 해당된다. 일제 시대 당시 조선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조선에 재배치되며 스페인 독감이 퍼진 이유다. 당시 그들이 걸린 인플루엔자가 조선에 퍼져 대유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일본 도쿄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시민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를 토대로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는 1919년 스페인 독감을 소재로 한 『유행감모(流行感冒)』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 시애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의 대중교통 탑승을 거부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미착용시 경우에 따라서는 유치장에 며칠 가두기도 했으나 여전히 마스크는 기피대상이 되었다. 특히 사모아 섬의 경우, 스페인 독감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미국 총독 존 마틴 포이어(John Martin Poyer, 1861~1922)가 라디오를 통해 대유행을 전해 듣고 해외 여행객을 전면적으로 입국금지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과 같은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많은 수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치사율이 1.87%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역별 차이는 있었기 때문에 의료체계가 낙후된 지역은 이보다 치사율이 더 높았던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전 세계를 휩쓸며 맹위를 떨쳤던 스페인 독감은 총 3번의 대유행과 몇 차례의 소규모 유행 이후 최초 발병 다음 해인 1919년 4월 때, 대부분 종식되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 왜 종식된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그 당시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의 착용, 무증상 감염과 사전 격리 조치를 취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과 각종 물류 마비 및 대란, 자영업의 고초 등 코로나19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으로 현재 코로나19 유행 상황과 같이 스페인 독감이 언급되는 이유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스페인 독감의 악명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가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독감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라 말한다. 1918~20년에 비해 현대 의학 수준이 매우 발달했던데다 백신도 나오고 있으며 타미플루 같은 치료제도 나왔다. 그러나 그에 비해 1918~20년의 스페인 독감은 백신조차 없었고 타미플루와 같은 치료제도 없었다. 만약 스페인 독감이 현재 재유행한다면 코로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사망자가 속출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정확한 원인이 없이 갑자기 사라졌고 인류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인 독감은 페스트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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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프랑스 이민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
    프랑스 이민자들 문제는 하루 이틀간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역사는 오래된 이민과 식민지 역사로 인해 지금의 인종시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 이민의 역사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다른 유럽 국가의 인구가 3배로 증가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인구는 계속 제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 내에서는 과거 포르투갈이 잘 나갔을 시기에 갑자기 쇠락한 것이 인구 수백만도 안 되는 나라가 아메리카, 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현지인들에게 밀려나게 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도 그와 같은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점점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일손이 부족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이민은 결국 국가의 일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초기에 프랑스로 이민을 오기 시작한 나라는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의 이웃 국가였다.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탄광지역에는 폴란드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프랑스 이민은 20세기 들어 더욱 활발해지며 1901년에서 1917년 사이에는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거주지 신청만 하면 이민이 받아들여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18년에는 남자들이 전쟁에 징집되었기 때문에 공장의 일손이 부족해졌다.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해 북아프리카, 인도차이나, 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1917년에서 39년까지 이민국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정치인들의 망명이 급증한 것도 이 시기로 주로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정계의 망명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는 외국인들도 프랑스 시민들과 동등하게 해당되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해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프랑스인과 똑같은 사회 보장의 혜택을 받는다. 외국인도 국가에서 주는 주거 보조금을 받고, 국립 대학교에 무료로 입학할 수 있으며, 병원 비용도 무료 혜택을 받는다. 외국인도 아이가 출생하면 국가에서 주는 아이 양육 수당 보조금을 받기도 한다. 아이 수가 3명 이상이 되면 이 보조금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시스템을 악용하는 외국인도 상당수 존재한다. 쉽게 아이를 낳는 아프리카인들이나 아랍인들이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이들은 오로지 아이 양육 보조금을 받을 목적으로 아이를 3~4명 이상씩 낳기도 한다. 이런 집들을 보면 남편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도 버리며 유유자적으로 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주는 월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바라고 힘들게 일하며 사느니 국가에서 나오는 여러 수당 만으로도 편하게 살 수 있기에 차라리 놀면서 수당 받으며 사는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제가 잘나갔을 때는 모두가 사는게 원만했고 여유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들을 가지고 뭐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제가 점점 폭망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 공무원인 프랑스 교사들 삶의 수준이 60~70년대 노동자의 삶의 수준보다 떨어지고 있는 형편에 놓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현재 대략 8.5%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는데, 200만 명의 실업자들이 미래가 불투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다. 오늘의 프랑스인들의 위치는 이전에 제국주의를 벌이며 식민지를 착취하던 전성기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프랑스 시민들에게 있어 프랑스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외국인들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주로 극우 세력에 속하는 이들은 외국인 때문에 시민들의 취업 전선이 위태롭다 느끼고 있다. 당연히 프랑스 경제가 악화될수록 이런 불만의 소리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르코지의 극우정권이 이들 이민자들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에 제3당인 불복하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가 창당되어 극우정당과 맞서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양극화가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이 연금 개혁법을 강행하고 연금 개혁에 묶여 있는 전국 노조들이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약 70%가 이를 반대하고 있는데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까지 연금 개혁안과 노조들의 파업을 진정시키기 위한 첫 번째 성과를 내놓겠다면서 대책없이 큰 소리나 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6월 29일 낭테르에서 나엘이라는 17세 알제리계 소년이 경찰의 교통검문에 불응하고 도주하다 총격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상점을 약탈, 방화하고 경찰과 소방차를 습격하는 폭동으로 변질되었으며 이제는 프랑스 전국을 넘어 벨기에와 스위스에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곳곳에서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데 6월 30일에만 전국에서 994명이 체포됐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군경찰 249명이 부상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해 화염병과 폭죽을 던졌다. 초등학교와 구청이 불에 탔으며 다른 수많은 도시에서도 밤새 폭죽이 터지고 길거리에 세워놓은 자동차 등에 방화가 이어졌다. 마르세유에서는 폭도 일부가 총기 매장에 쳐들어가 소총 몇 정을 훔쳐가기도 했다. 파리 샤틀레레알에 있는 나이키 매장,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애플스토어 매장 등이 약탈을 당했으며 전국에 있는 대형 식료품 가게들이 잇달아 털리고 있다. 파리 북부 외곽 오베르빌리에 있는 버스 차고지도 공격받아 버스 10여 대가 불에 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이로 인해 파리를 관통하는 대중교통 운영에 일부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마르세유에서 중국인 관광객 41명을 태운 버스가 시위 참가자로 보이는 이들의 투석 공격을 받아 승객 중 일부가 다치는 등, 이국인에 대한 공격도 잇달았다. 마치 1994년 미국 LA의 흑인 폭동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때도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대중교통들이 불탔으며 동양인에 대한 폭력행위들이 다수 발생했다. 아마 LA 폭동 때처럼, 우리 프랑스 거주 한인들도 자체 무장을 하고 이들과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에는 프랑스 폭동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뉴스 메인이 이러한 보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러시아보다 프랑스의 치안이 더 악화되고 있다. 언론은 오늘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일제히 침묵하고 러시아에 대한 페이크 뉴스를 받아 쓰기하며 보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은 홈페이지에 "특히 밤늦은 시간에 상업·공공 시설 기물 파손 및 차량 방화 등 심각한 수준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며 심야 시간에 외출을 삼가는 등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는게 전부다. 거의 치안이 안정적인 러시아에는 특별여행주의보부터 여행 철수권고 단계까지 끌어올려 왕래도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프랑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 중이다. 러시아보다 프랑스 상황이 더 위험한데도 프랑스에 대해 여행경보 제3단계까지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떻게든 러시아를 악마화하고 서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철저히 침묵을 지키며 안전하다고 선전해야 한다. 서구에서 위협받는 국민들의 생명이나 안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프랑스는 저렇게 폭동이 일어나도 안전한 나라, 러시아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어도 푸틴이 국민들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처럼 자유가 없는 위험한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니 나한테 요즘도 "러시아에는 타 도시로 이동하려면 북한처럼 정부에 "통행증"이 있어야 하나요?", "모스크바 가면 '오토 웜비어'처럼 최후를 맞이하나요?, "러시아에 가면 외국인들은 노동 교화형을 받고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나요? 등의 질문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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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7
  • 유럽과 러시아에서 나의 발이 되어 줬던 트렘, 미국에서는 어떨까?
    필자는 유럽이나 러시아에 올 때마다 노면전차인 트램(Tram)을 타는데 한국에서 느낄 수 없는 노면전차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트렘을 타고 출근할 때마다 각종 풍경을 보며 사색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나는 트램덕후로 어떤 도시를 가든 트램이 있다면 반드시 꼭 그 도시의 트램을 타 본다. 유럽과 러시아 각지에 있는 트램, 대륙 건너 미국은 어떨까? 나는 2013년 이후, 현재까지 10년 동안 미국을 가보지 못했다. 2010년에는 에너하임 오렌지카운티에 있었고 시간강사로 뛰었을 때 우리 동네에서 LA 유니온 스테이션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출근해야 했다. 이렇게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 개인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에너하임과 LA를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그냥 지옥과 같았다. 13년 전이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떨까? 달라졌을까? 현대 대중교통의 불모지이자 자동차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은 원래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중교통과 트램의 천국이었다. 각 도시들의 교통망을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트램들들 덕택에 미국 시민들은 현대처럼 대기오염에 찌들며 고통 받는 일도 드물게 도시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에 설립된 내셔널 시티 라인즈(National City Lines), 퍼시픽 시티 라인즈(Pacific City Lines), 그리고 아메리칸 시티 라인즈(American City Lines) 라는 3개의 회사는 1937년부터 각 도시들의 트램 회사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일본의 사철과 같이 노선 확장보다는 부동산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리던 서부의 트램 회사들은 LA의 퍼시픽 일렉트릭을 시작으로 수익성이 낮은 트램 노선들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약 10년 동안 진행되자 이들은 트램 노선들을 폐선하고 버스 노선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수많은 도시들 트램 노선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일부 도시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도 살아 남았지만, 곧 대부분의 트램 노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때 대기업들이 몰래 생산을 방해하여 미국의 대중 교통을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온갖 사보타주(Sabotage)를 감행하게 하면서 전차 스캔들(Great American Streetcar Scandal)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당시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일명 GM),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등의 자동차 관련 회사들은 자동차와 타이어, 정유 등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자신들 회사의 자동차와 버스를 팔아 먹어 이윤을 남기기를 원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미국의 대도시부터 소도시에 이르기까지 850여 개 도시들에 깔려있던 편리한 대중 교통 수단들은 매우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트램을 점차 폐기하는 것으로 서로 합의했고 트램 노선을 폐선한 뒤 새로운 시대의 우수한 교통 수단이라면 버스를 등장시켜 트램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기업들이 트램을 폐쇄한 것은 트램의 단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이윤과 도시들의 기초 인프라를 파괴하여 얻는 이윤을 위해서 행했던 시민들에 대한 만행이었다. 게다가 별다른 대책도 없이 밀어 붙였기 때문에 도시 간의 이동이 매우 불편하게 되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시민들은 개인 자동차를 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폐선된 트램 노선 중 수요가 워낙 많은 노선의 경우 지하철 건설 같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런 계획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트램을 폐선해버렸기 때문에 미국 소도시들의 대중교통은 그야말로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만행으로 인해 여러 대중교통 인프라들이 아직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심지어는 LA 같은 대도시마저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당시 사실 이들 입장에서 대중교통을 없에는 것에 대한 대책이나 대안은 상관이 없었다. 대중교통이 버스로 대체되면 단순히 버스가 잘 팔릴 뿐이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개인 차를 구입하거나 버스를 이용한 대중 교통들이 뒤엉켜 마비가 되면 어찌될지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거대한 만행을 저지르고 차를 팔아 부유해진 제너럴 모터스는 후일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크고 아름다운 차만 만들다가 일본과 독일 등 연비가 좋은 외국계 자동차 제조사들의 공세에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결국 하락세를 걷다가 2008년 금융위기에 제대로 당해 21세기에는 파산 보호 신청을 하여 정부에서 관리를 해줘야 할 정도로 몰락하게 된다. GM의 엄청난 만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미국 소도시들의 대중교통은 트램의 폐선과 때마침 진행된 교외지역(Suburb) 확장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미국 도시들의 인구밀도가 낮아지는 현상까지 합쳐져 사라져 갔고, 도로는 캘리포니아에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보행자보다는 차량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트램 회사들이 직접 진두 지휘한 스프롤 현상이 서부에서 동부로 뻗어나가며 전차 스캔들에 영향 받지 않았던 타 트램 회사들도 붕괴되어 갔고, 그 자리는 연방 정부의 엄중한 감시 하에 다수의 버스 회사들이 차량을 공급하는 대중교통 회사들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도 미국의 도시 구조는 도로 교통과 자동차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대중교통 수익률이 심각하게 저하 되었다. 트램이 떠난 자리를 일부 버스 노선이 대체한 것 말고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별다른 교통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와 같이 미국의 대중교통은 아이젠하워의 고속도로 프로젝트와 제트 에이지의 여파로 인해 점차 효능을 잃어가는 여객철도와 함께 사라져 갔다. 이어 펼쳐지게 된 제트 에이지의 시작과 더불어 도시 간 거리가 멀고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에서는 시내와 시외 할 것 없이 대중교통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시민들의 의식도 자동차의 유무에 따라 신분계층을 파악하는 수단이 되었고 오히려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 즉,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돈 없는 서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중교통 내부에는 범죄에 취약했다. LA나 뉴욕에서 밤늦게 혼자 지하철 타는 행위는 자살 행위라는 것이 바로 그 얘기다. 당시보다 발전되었을 세계 최강국이자 부자나라 미국, 지금은 자유로이 안전하게 대중교통 이용하여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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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7
  • 유럽, BTC 라인에서 안정적으로 가스와 석유를 받으려면 선결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석탄 등 에너지 대금의 루블화 결제 방식에 반발한 유럽은 BTC 라인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BTC 라인에서 안정적으로 가스와 석유를 받으려면 선결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치열한 대립이다. 이 두 나라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은 영토 문제다. 해당 영토는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о-Карабах) 지역이다. 이 지역을 두고 두 나라는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발발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1805년에 카라바흐 칸국을 사실상 점령하게 되면서 불씨가 지펴졌고 현재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치열하게 대립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들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전쟁을 벌인 바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여전히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여전히 대립 중이며 두 나라는 같은 카프카스에 있으면서 외교적으로도 단절했고 국경도 폐쇄됐을 정도로 극악의 사이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2년 전 2020년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전쟁이 벌어졌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다시 무력 충돌이 재개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나는 여러 연구 끝에 이를 "카프카스 위기(Caucasus crisis)"로 정의하고 있다. 카프카스는 이 두 나라 뿐 아니라 터키-아르메니아 문제도 걸려 있고 카프카스 산맥 넘어 체첸-잉구쉬와 다게스탄의 문제, 조지아와 남오세티아 및 압하지아와의 대립도 현재진행형인 곳이기 때문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인류의 화약고(Powder Magazine)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리고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곳 세 곳 중에 한 곳으로 꼽히고 있을 정도로 각 민족들 간의 대립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타스 통신에 의하면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26일에 "아제르바이잔군이 지난 24~25일 사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책임 구역 내로 진입하여 터키제 '바이락타르 TB-2' 무인기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 군부대를 4차례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격화한 상황의 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 아제르바이잔 측에는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고 전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 국방부는 아제르바이잔군이 3월 26일에도 러시아 평화유지군 책임 구역에서 진격을 시도하며 공격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나르고르-카라바흐 공화국 대통령 아라이크 아루튜냔(Араик Арутюнян)은 군사적인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음을 이유로 관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의 국방부는 공격 사실을 부인하며, 아르메니아군이 오히려 아제르바이잔군을 상대로 파괴 공작을 벌였다고 주장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전쟁을 벌여 약 6,500명이 사망한 끝에 러시아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으로 전쟁이 마무리됐다. 전쟁의 승리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지역을 장악했으며, 러시아는 양측의 충돌 방지를 위해 5년간 나고르노-카라바흐에 평화 유지군을 배치했었다. 만약 이 지역에서 다시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 BTC 가스관이 위험해질 수 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이기에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민중의 많은 수가 무슬림들이고 범투르크연합의 회원국이기도 하기에 터키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중동, 아랍 국가들도 아제르바이잔을 무슬림들이 많다는 이유로 적극 지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터키와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동, 아랍 국가들이 중립을 선언하고나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의 경우, 러시아와 같은 정교회 국가이다. 그리고 유럽 또한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다. 이들이 아르메니아를 기존처럼 지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BTC 가스관의 안전한 에너지 자원의 수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르메니아를 버리고 아제르바이잔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다. 다만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 지역이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상술한 이유로 인해 원치 않는다. 최대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분쟁을 잠재우면서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수급받길 원하고 있지만 그 또한 불안하기에 우선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유권 다툼 문제는 가장 해결하기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선결해야 할 매우 난이도가 높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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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라트비아의 독립, 인문 유산과 자연 유산 보호 시위가 기폭제
    1986년 소련 정부는 발트 3국 경제를 개발하는 차원으로 라트비아의 가장 큰 강인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고 리가에 지하철을 놓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이는 파격적인 계획이었는데 때에 따라 환경적인 재앙을 부를 수도 있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지형적으로는 발트 해 연안은 저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해류의 흐름에 따라 홍수도 간혹 발생하던 곳이었다. 다우가바 강 일대는 비옥한 토양이 이루어져 발트 3국 중 가장 곡물생산량이 높은 나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소련이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는 것은 농업적인 부분이 아닌 발트 해 일대와 더불어 최대의 공업지대를 만들겠다는 고르바초프 개혁의 일환이었다. 당시 소련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관심이 덜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같은 대규모 고속도로 체계나 항공 물류 체계를 적극적으로 갖추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소련은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 등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도 매우 인색했다. 따라서 인프라가 개설되는 속도가 매우 지지부진하였고,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단위의 도로망 구축 및 관리가 상당히 부실했다. 그 결과 인해 소련 내 물류 운송은 극도로 비효율적이 되었으며 이는 물자 공급의 지연으로 이어져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이 후일 컴퓨터와 로봇으로 이어질 자동화 기계와 정보 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 산업 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인해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까지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소련 내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취약한 소비재 산업이 국민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 일명 '제2의 경제'가 점점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농업에서는 소련 전체 경작지의 3%에 불과한 개인 소유의 농장에서 생산해 거래되는 작물들이 소련 농업 전체 생산량의 25%를 차지하였으며 육류는 40%를 차지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소련 내에서 약 1,5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암시장에 참여할 정도였다. 사실상 이미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맞이한 침체기를 직시하고 있었다. 1979년부터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군비에 쓰이는 예산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고 추가적인 경제개혁은 성과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지면서 소련이 갖고 있는 기술의 부재 및 부작용에 대해 발트 3국의 국가들은 소련의 건설 사업을 비롯한 여러 기술 사업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우가바 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고 리가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은 제2의 체르노빌과 같은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사고는 그만큼 같은 연방 내의 공화국에서도 소련의 기술에 강한 불신감을 가질 정도로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더불어 1973년에 폴란드 정부의 주도 하에 발트 해 국가들이 “그단스크 협약”이라고 불리는 “발트 해 생물자원의 보호와 어업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Fishing and Conservation of the Living Resources in the Baltic Sea and the Belts)”에 합의한 바 있었다. 1974년에는 수산 자원뿐만 아니라 발트 해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을 포함한 포괄적 성격의 “헬싱키 협약”이라고 불리는 “발트 해 해양 환경 보호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Marine Environment of the Baltic Sea Area)”이 체결되면서 이 체결 조인식에 발트 3국의 인사들이 소련 대표로 참여한 바 있다. 그래서 현지 라트비아인들은 라트비아의 인문 유산과 자연 유산을 파괴하는 계획을 소련이 세우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우선 1986년 7월, 라트비아 발트 해의 작은 항구 도시인 리예파야(Liepaja)에서 노동자 3명이 1974에 지정된 헬싱키 협약과 1975년의 헬싱키 협정을 지지하며 ‘헬싱키-86’(Helsinki-86)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소련에 반대하는 최초의 반공 조직으로 기록되었다. 1974년 헬싱키 협약에 이어 1975년의 헬싱키 협정은 미국, 소련 등 35개 국이 참여해 동서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조약으로, 인권과 기본권 보장, 민족자결권 존중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절에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을 한 이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었다. ‘헬싱키-86’의 구성원은 고작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조직에 라트비아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이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은 군티스 울마네스(Guntis Ulmanis)였다. 군티스 울마네스(Guntis Ulmanis)를 1993년 라트비아 의회에서는 제5대 대통령으로 그를 선출하게 된다. 1986년 12월 26일 라트비아 청년 300명이 수도 리가의 성당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레닌 거리를 지나 소련 점령 시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자유 기념비에 헌화한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가라. 라트비아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했다. 1987년 6월에는 ‘헬싱키-86’이 이끄는 시위에 5,000명의 군중이 참가해 라트비아 민족 가요를 부르며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을 성토하게 된다.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초반에는 이 시위를 저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점점 더 불어나게 되면서 1987년 11월 소련의 지시를 받은 라트비아 지방 당국은 시위대를 적극 저지하게 된다. 라트비아 현지 언론들은 이와 같은 시위대 탄압 소식을 널리 보도하여 리가가 아닌 일개 소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같은 라트비아 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고 1987년 2월 28일 환경 보호회가 전후 라트비아 최초의 시민단체로 결성되어 이를 주도해 나가게 된다. 결국 소련은 건설 자금 부족까지 겹치게 되어 리가 지하철 계획과 댐 건설을 취소했다. 소련에 승리를 거두어 자신감이 생긴 라트비아에서는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 라트비아 독립운동 등 라트비아인 민족주의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거부와 독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1988년 여름에는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이 주도하여 '라트비아 의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며 거의 매일 시위를 벌였다. 마침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체제로 인해 발트 3국 각지에서는 현지 민족주의자들이 현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소비에트 최고회의에 진출했고, 소비에트 최고회의와는 별도로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의회를 결성하면서 저항해 나갔다. 그리고 1988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00여 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리가-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으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 이는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열린 시위였다. 마침내 1990년 5월 4일에 라트비아가 리투아니아에 이어 독립을 선포하면서 공식적으로 라트비아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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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현대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 베트남 전쟁 이후 동맹과 지원, 갈등의 연속인 현대사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과 동맹 및 연합의 방식을 통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결혼 외교로 동군연합을 이루어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생존의 길을 찾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힘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베트남과 한국과 같이 중국과의 국경을 마주하면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다. 동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인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 사이에서는 노골적인 갑을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공을 통해 동아시아만의 특수한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는 현대 국제 정치에서 언급하고 있는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정책이 유럽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대국인 중국에게 편승’(Bandwagon) 하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이 중국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 시대 한국은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통일된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939년 중국에게서 독립한 이래, 분열과 통일을 거듭해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중국으로부터의 외침 역시 적지 않았다. 한국사에서 후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초기를 맞이하던 때 베트남은 독립왕조를 수립했고 1010년에 이공온에 의해 이 왕조가 건국되어 북베트남을 통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가 평화적으로 유지되지 않아 몇 차례에 걸쳐 중국과 큰 분쟁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조공 관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사람들이 ‘북거’(北拒: 북을 막는다) 관계라며 명칭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뒤에는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용인 속에서 베트남의 통일 왕조들은 황제(皇帝)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사대와 자주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외교력과 정치력, 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 인도차이나 지역 내에서는 최강국이었다. 물론 이는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중국의 또 다른 주변국인 캄보디아나 라오스에 비해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고 이들에게 늘 조공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영향력이 쏟아질까 우려하여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조공 체제 안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초 소수 민족인 만주족 정권이었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를 선포했고 떠이선의 농민군이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 군을 격파함으로써 스스로가 중국(中國)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시간이 지나 공산주의 국가가 된 중공과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호치민 사이에는 이념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우호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는 중국의 국공내전 시기(1945~1949)에 돋보였으며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중국 공산당의 남광둥(南廣東)이 이끄는 1연대가 베트남으로 피신하는 등 호치민이 중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이 중공의 적극적인 도움을 준 것을 통해 호치민의 군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1953~1954)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중공이 프랑스군을 이길 수 있도록 베트민에게 무상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보면 베트남이 독립하는데 있어 중공의 도움 덕택에 베트남의 독립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중공으로서는 1953년 한반도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군사적 원조를 베트남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중공의 주위에 위치한 한반도,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모두 미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프랑스의 세력을 봉쇄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불어 호치민으로서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공의 호의적 원조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양국 사이의 우호적 관계는 1954년의 제네바 협의에서부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중공의 도움을 받아 디엔비엔푸에서의 승리한 것을 바탕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중공의 입장은 달랐다. 비록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국내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미루어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행을 위하여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오랜 기간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공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또 다른 인도차이나 국가인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호치민은 중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17도선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의 분단과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인정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고 중공 또한 호치민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하는 것을 승인해야 했다. 그러자 베트남 사람들의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인 베트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을 진행하면서 이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할 때도 북베트남 정부와 중공 정부 사이의 갈등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중국은 1950년대 후반까지도 베트남의 통일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토지개혁과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에 얼룩진 인프라들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공의 원조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일명 베트콩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9년에 가서야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반 정부 세력의 무력투쟁 방침을 승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중공의 사회주의 노선이 변화한 것도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1950년대 중반까지 중공은 베트남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소련과 중공의 동맹이 결렬되고 두 나라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후방에 자신들의 편을 하나라도 만들기 위해 베트남과 라오스에 적극적인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는 중공 후방에 있던 베트남과 라오스에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중공은 국제적으로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하면서 통일 전쟁을 갑자기 지지하게 된다. 이 또한 호치민이 소련이 아닌 중공에 의지하게 만들려는 다분히 계획적인 승인이었다. 더불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 또 다른 사건이 이 시점에서 발생하게 된다. 라오스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61년 5월에 개최된 제네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중공과 북베트남은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대척점에 서서 라오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미국과의 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라오스 문제에 대한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중공과 북베트남은 라오스의 사회주의 애국전선을 지지하면서 소련의 변화된 정책 기류에 항거했다. 그러나 중공과 베트남은 서로 손을 잡았지만 이미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던 관계였다. 중공은 라오스에 대한 북베트남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제어하면서 중공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반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 내의 루트를 확보에 힘썼다. 동시에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연방’ 형성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중공과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베트남과 중공 사이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지만 그 관계성에 있어 아슬아슬했던 관계는 1962년 미국 존 케네디 행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지원 결정으로 수면 아래 잠복했다. 호치민은 1962년 중공을 방문해 대규모 지원을 요청하고, 모택동은 이를 승인했다. 당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실패로 실권을 거의 내려놓고 상하이로 내려가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주은래를 통해 북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강경 정책은 계속되었다. 특히 소련이 이에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조치로 1963년 북베트남한테 채무 상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1964년 소련의 지원이 급감하며 퇴로가 없어진 북베트남은 중공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린든 존슨 행정부에 의한 대규모 파병은 베트남과 중공이 서로 협력하여 미국에 대항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1964년 7월 주은래는 하노이에서 북베트남 및 라오스 애국전선 지도부와 동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서 중공은 동남아시아 인민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피력했다. 한편 중공은 미국이 북진해 올 경우 육군을 파병해서 북베트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공의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고려한다면 린든 존슨 행정부가 예상했던 중공이 베트남 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할 때 대응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지 트라우마가 아니라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실제로 중공의 경우, 미국의 롤백(Rollback) 정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65년부터 고사포 부대와 함께 철도 건설, 도로 보수 등을 위해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북베트남에 파병했다. 1967년에는 약 17만 명의 병력이 북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치안을 담당했고 혹시나 모를 미군의 북침을 대비했다. 물론 이들은 후방을 지원하는 역할도 감행했고, 북베트남 본토를 지켜주는 역할도 했다. 그에 비해 직접 남베트남 및 미군과 마주하여 전투를 벌이는 전선 현장은 북베트남 군인들이 담당했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의 역사학자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의 지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북베트남 군과 함께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중공이 북베트남의 후방과 본토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더불어 미군 또한 중공을 자극시키지 않게 하는 선에서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북베트남 군 본군과 남베트남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중국과 베트남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가까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에 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해 대러 제재를 하게 되자 중공과 협력하여 이에 대항하게 된 것과 아주 유사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고 옐친과 구두로라도 약속했던 나토가 동진을 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에서의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과 국제적으로 움직이는 현황들을 보면서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들어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기록들과 과정들, 그 주변 국가들의 상황 및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관계 등을 예로 보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결국 베트남 전쟁과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요즘 바이든이 젤렌스키를 만나러 키예프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페이크 뉴스라는 견해도 있지만 만났던 안 만났던 상관없다. 어차피 전세 뒤집는건 이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세 뒤집을 수 있는 골든타임은 다 지나갔고 전세 뒤집는 것은 이제 세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첫 번째, 나토군이 직접 참전하는 것이고 두 번째, 핵 무장한 나토 국가가 우크라이나에 핵을 빌려주는 것이며 세 번째, 터키 에르도안 탄핵시켜 몰아내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흑해를 통해 오데사항으로 나토 함대들이 진입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 어느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려 하지 않을테고 피 묻히기 싫을테니 참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두 번째의 경우, 핵을 빌려주는 순간 러시아가 먼저 쏴버리면 끝이다. 세 번째의 경우가 가장 유력한데 에르도안을 극렬히 흔들어서 터키에 색깔 혁명 일으켜 그를 축출하는 것이고 현 대지진에 대한 대처 능력 등, 여러 모로 에르도안에게 좋지 않은 분위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에르도안 그렇게 쉽게 물러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골든타임 다 지나가서 미국이 언제 호흡기 떼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고 프리퀀드 윈드, 사이공 탈출 작전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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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2023년 6월 충돌 사고가 발생한 인도 열차, 무엇이 문제였을까?
    2023년 6월 2일 현지 시각 7시 20분경 인도 오디샤 주 발라소어에서 코로만델 익스프레스 소속 12841번 열차에 딸린 객차 10~12대가 탈선했다. 이 사고로 반대편에서 오던 SMVT 벵갈로르-하우라 수퍼패스트 익스프레스 노선의 WAP7 37334 LP 열차가 탈선해있던 객차와 충돌하면서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오전 8시 30분 기준 사망자는 288명, 부상자는 900명 이상으로 사상자가 1,200명에 육박했으며 주 인도 대한민국 대사관에 따르면 6월 3일 현재 아직까지 보고된 한국인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서 불행 중 다행스러운 사건이다. 힌두스탄 타임스에 의하면 철도 통제실에서 잘못된 신호를 보내서 벌어진 인재(Human error)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현재까지의 예측일 뿐이고 정확한 사고 경위는 아직 조사 중에 있다. 그러나 구조하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사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방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어쩌면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중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구급차로 옮기지 않고 쓰레기 더미처럼 대형 트럭에 싣고 있는 장면이 찍히면서 구조 활동의 열악한 실태가 나타나 전 세계를 경악케 하고 있다. 최소 141명 이상이 사망한 인도 구자라트 다리 붕괴 사고가 일어난지 반년도 안 되어서다. 사망자가 최소 288명으로 2배 이상 더 많은 심각한 참사가 일어났고 잇달은 대참사로 인도 사회에서는 충격에 빠지고 있다. 인도는 열악한 철도 환경으로 인해 과거에도 대형 참사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981년에 다리를 건너던 열차가 벵골 만의 태풍에 휩쓸려 800명 가까운 승객들이 사망한 비하르 탈선 사고가 있었다. 부실한 인프라에 안전불감증, 그리고 부족한 기술력에 더운 기후가 더해져 이러한 철도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가 인도다. 나도 인도를 돌아다니며 그 열악한 실태를 목격한 바 있다. 객차 내 승객들이 만석이 되어도 복도 뿐 아니라 객차 지붕에까지 승객을 받고 있음에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다보니 인도 열차의 경우, 사고 시 그 인명 피해가 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연교차가 크고 특히 40도에 육박하는 습한 여름 날씨에 철로가 손상을 입으면서 객차가 탈선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와 같은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철도부 장관이 사퇴하는 관례 아닌 관례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철도부 장관이 사퇴한다 해도 각종 인프라를 비롯한 정부와 시민들의 인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번 오디샤에서 벌어진 사고는 기존의 낙후되고 노후화된 기차가 아니라 최근 도입한 고속철이었기 때문에 철도 및 제반 시설 안전에 대한 우려가 더 크게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의 맥락들을 이해하려면 우선 인도 철도와 객차, 그리고 그에 대한 인프라 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인도 철도의 절대다수는 Indian Railways 라는 철도부 산하 공기업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Indian Railways로 이전되기 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주로 인도의 자원들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요 무역도시들인 뭄바이와 콜카타 인근부터 철도가 놓였다. 철도 연장으로 볼 때 인도 철도는 68,155km로 세계에서 4번째로 길며 연간 이용객 수로는 11억 5,700만이 이용하며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용객 수가 많다. 다만 인도 철도는 여러모로 낙후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2023년부터 일본의 지원을 받아 고속철도가 개통 되었지만 부족한 인프라 등으로 인해 이번 사고가 야기됐다. 또한 낙후했다 해도 대략 한국의 1980년대 수준으로 적어도 미국 등 아메리카 지역에 비해서 간선 철도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게 특징이다. 뭄바이 등에서는 전철화 비중도 높지만 인도 기차는 대부분 디젤 기관차로, 일부는 아직도 증기기관차가 현역일 정도로 객차 또한 노후화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인도는 철로 또한 세계 각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1,435mm 표준궤가 아닌 독자적인 1,676mm 인디아 광궤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가 독자적인 궤를 채택한 이유로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시절, 철로가 깔린 곳이 사이클론이나 몬순 등 강풍이 심한 뭄바이에서 기후적 특성을 고려해 깔았기 때문이다. 이 궤간은 영국 지배 하, 인도 전역에서 적용되었기 때문에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도 1,676 mm 궤를 사용하여 인도권 국가들과의 궤는 호환성에서 별 문제 없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 시절 간선급이 아닌 사철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궤간이 채택되었다. 이들 모두 인도 독립 이후 모두 국영철도인 Indian Railways로 통합했기에 현재 인도 철도에는 1,000 mm, 762 mm, 610 mm 등의 협궤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철도개혁안으로 이들을 모두 1,676 mm 광궤로 통일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 완료되면 에스토니아-러시아 광궤에 맞춘 것에 이어 협궤에서 광궤로 개궤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 사례가 된다. 장거리 및 교외 노선에서 매일 13,500대 이상의 여객 열차를 운행하고 있으며 2022년을 기준으로 약 90억에 가까운 승객들을 수송했다. 이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송량으로 세계에서 1위에 해당되고 있다. 평범한 급행등급의 열차는100km/h 속도로 운행되며, 일반등급의 열차는 60km/h 내외의 저속으로 운행된다. 그 이유는 제대로 보수조차 하지 않은 철로의 노후화와 지붕에도 앉으며 타고 있는 승객들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운영 중인 가장 빠른 여객 열차는 바라트 익스프레스(Vande Bharat Express)로, 180km/h로 달리는 준 고속열차이다. 필자도 5년 전 인도에 방문했을 때 타 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고의 경우, 노후화 된 철로로 인한 탈선 1차 원인이고 철도 통제실에서 잘못된 신호를 보내서 열차끼리의 혼선을 오게 한 것이 2차 원인이다. 그러나 1차 원인이 없었으면 2차 대형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도의 대형 참사는 열악한 철도 인프라가 만들어 낸 인재(人災)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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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미국 철도에 관한 이야기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뒷목 잡는 일이 상당히 많다. 정말 어이가 없고 이해도 안 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환상이다. 미국하면 선진국이 뭐든지 최고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을 실제로 다니다보면 어떤 것은 한국, 일본보다 시스템이나 시설이 허접한 것도 많고 러시아만도 못한 것도 많다. 특히 지하철이나 화장실은 한국, 일본보다 최고라고 생각할까? 미국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미국은 모든게 최상이나 최고는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추종하는 사람이 있지만 모르면서 추종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특히 미국의 대중교통은 세계 최고의 선진국 치고는 허접함으로 이름이 높다. 이번에 오하이오 주 열차 탈선 사고를 관심 있게 보다가 그 시스템을 하나 하나 분해해 보았다. 현대 미국 철도는 화물 철도를 위주로 발달해 있고 여객 철도는 크게 쇠퇴해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 러시아처럼 철도 여행하기 쉽지 않은 이유이다. 여객 열차는 대부분의 노선에서 하루에 한 편도 보기 힘든 데 반해, 화물열차는 하루 수십 편 단위로 빈번하게 다니고, 한 편성에 화물을 100량씩 운송하는 마일 트레인 위주로 화물 철도를 운행하고 있다. 미국의 철도는 화물 운송 수단으로써 매우 중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202,501km라는 총 연장 거리로 볼 때 미국 내수 운송의 40%를 차지할 정도이다. 또한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있게 만들었던 원인은 물자 운송의 원동력인 철도가 그만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역사도, 철도의 발전과 이용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러한 미국 철도의 역사는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연히 증기 기관차가 주로 운행을 했다. 20세기 이전에는 기술의 한계로 시속 20km도 넘기는 열차를 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촘촘한 철도망으로 보급을 수월히 하였기 때문에 남부에 서서히 우위를 점해 항복시킨 것은 유명하다. 전후에도 이 촘촘한 철도망으로 인해 미국 철도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서부 개척 시대도 철도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수운으로는 물자와 여객을 대량 수송하기에 장소의 제약이 많았다. 마차로는 그 많은 이민자나 화물을 수송하기 어렵고, 당시에는 자동차나 비행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유일한 육상 교통 수단으로서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이 때 중국인 이민자들이 공사 인부들로 많이 들어오면서 초창기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다. 이 시기에 현재의 미국 철도 광역 간선망 노선은 거의 다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례로 1875년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약 7km가 넘는 길이의 장대 터널인 후삭(Hoosac) 터널을 뚫어 개통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철도는 미국이라는 통합성과 정체성을 만들었던 상징적인 의미였다. 상용 항공 노선과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이 없었던 시대에 철도는 로키 산맥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뚫게 되면서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첫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처럼 대륙횡단철도는 주간 교류를 활성화 시키고 미국의 국력을 성장시키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자동차들이 보급되면서 입지가 조금씩 줄어갔다. 그래도 장거리 수송에는 철도가 절대적이었지만, 1950년대에 전국적으로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요 도시 지역에 설치되어있던 노면 전차들이 대체 노선 없이 폐쇄되면서 철도는 점점 자동차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1970년대부터는 항공운송의 발달로 인해 철도는 장거리 여객운송에서 쇠락한다. 철도가 여객 운송에서 우위를 점하는 거리는 500~600km 이하의 중단 거리 수송이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영토가 거대하다보니 그 만큼의 거리는 자동차에 밀리는 것 뿐 아니라 그 이상 거리는 비행기에 밀려 버리게 된 것이다. 철도 외에도 다른 교통 수단이 없었던 업종 내 독점인 상황에서는 사설 철도들이 선순환을 일으켜 확장을 촉진했지만, 자동차와 항공기의 등장 이후에는 오히려 쇠퇴하는 상황이 되었다. 노선망의 규모로 볼 때 타국에 비해 압도적이지만 철도 회사들이 성능 향상을 위한 기술 투자나 고 규격 선로 건설을 꺼리게 되면서 인프라의 발전이 매우 부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일본이나 영국처럼 간선 철도가 사설 철도인 곳이라면 늘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인프라 정비만큼은 국가나 지방 정부에서 지원하거나 아예 이들이 직접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연방 정부나 주 정부 등은 철도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져 공동체 차원의 기반 투자가 매우 적은 편에 있다. 더불어 미국 철도는 전철화율이 매우 낮은편에 속한다. 여객 철도의 경우 북동 간선과 Keystone Corridor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전철화된 간선이 없고, 화물 철도는 디젤 기관차 견인이 거의 대부분이라 화물 수송용 전기 기관차는 거의 없다고 한다. 전철화는 철길을 새로 놓는 것보다 더 큰 비용이 드는 대형 사업이다. 민영 기업 입장에서 엄청난 크기의 미국 영토에 놓인 철도를 모두 전철화하려면 그 비용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에 전철화를 하지 못한 것이다. 여객 철도의 경우 사설 철도 회사 여객 영업을 연방 정부가 대신 맡아서 암트랙(Amtrak)으로 공사화 했다. 여객 노선을 국유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깔린 선로는 화물 철도를 운용하는 사철 소유로 계속 남겨 놓았다. 그래서 잘 나가는 노선을 갑자기 폐쇄한다던가 폐선하는 경우가 많다. 이어 허리케인 등으로 인해 자연 재해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된 이후에도 해당 구간은 계속 운휴가 된다던가 하는 등으로 인해 운영은 쉽지 않은 상태다. 더불어 운영되는 노선 또한 우선권 문제로 인해 여객 열차가 마일 트레인을 기다리느라 지연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철도 여행은 유라시아의 철도여행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다. 이 때문에 폐선된 노선이 대단히 많다. 거기에다 개발이 별로 되지 않은 시골에서는 선로만 걷어낸 노반이 남아있는 것도 모자라 열차가 다니던 시절에 있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폐역 또한 매우 많은데, 폐선된 노선은 물론이고, 화물 열차만 다니게 된 노선을 보면 반드시 과거에 사용되었던 폐역을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열악하다보니 선로 관리가 제대로 될리 없고 매년 탈선 사고는 늘어만 간다. 작년 미국 오하이오 주 탈선 사고는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생긴게 아니다. 열악한 현장에서 나타난 일종의 인재(人災)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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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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