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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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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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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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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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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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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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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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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투갈에게서 전해진 조총과 뎃뽀 정착의 역사
    1543년 시암(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의 배 한 척이 일본 큐슈 남쪽 다네가 섬(種子島)에 표류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인이 일본에 뎃포(鐵砲)를 건네주었다. 그것이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鳥銃)이었다. 조총이 일본에 전해진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1543년 8월 25일,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 섬 서남단 가도쿠라 곶에 표착했다. 당시 상황은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1606년에 쓴 <철포기(鐵砲記)>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으로써 왜구의 수장이었던 왕직(汪直)이 중국 영파(寧波)에서 출항했는데, 승객 중에는 포르투갈 인 2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후 함선은 역풍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큐슈 가고시마 현 다네가 섬에 도착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들은 그 때까지 일본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화승총을 가지고 왔다. 길이는 2~4척(尺)이었고, 가운데는 뚫려 있었으며 아래는 막혀 있었다. 옆의 구멍에 화약을 넣고 작은 총알을 넣으면 바로 발사될 수 있었다. 총을 발사하면 빛이 나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에 모두 귀를 막아야 했다. 이 화총(火銃)은 일본인들이 그 동안 사용했었던 명나라의 총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다. 일본인들은 그 총을 남만뎃포(南蠻鐵砲)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인을 ‘남쪽 오랑캐’라는 의미로 남만이라 불렀다. 일본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 일본에 철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네가 섬의 영주인 시케토키(惠時)와 도키다카(時曉) 부자는 총의 위력에 감탄하며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동시에 제조법과 사용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장인 야이타 기요사다(八板淸定)에게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요사다 장인은 실패했다. 이듬해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에 오자, 기요사다는 그들에게서 다시 제조법을 배웠고, 첫 화승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야이타 기요사다는 ‘사쓰마 뎃포’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총은 머스켓(Musket) 총의 일종으로, 탄약을 앞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오스만투르크가 먼저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는 1475년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신에 강선이 없기 때문에 현대의 총기류처럼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일본은 서양에서 머스켓 총을 전달 받은 지 1년여 만에 자체적으로 기술을 습득하여 제작하게 되었다. 16세기 동아시아에는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먼저 서양과 접촉한 현지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자바의 마타람 왕국, 수마트라의 아체 왕국, 베트남의 레 왕조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지배자들은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교역을 활용해 큰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와 군사 기술을 습득해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연맹체를 강력한 왕권 하의 절대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일본도 서양의 아시아 진출 시기와 동시에 통일체로 형성해 나갔다.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등이 국제 무역 세력을 흡수하고, 조총(鳥銃) 등의 새로운 군사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통일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 새로운 무기는 일본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뎃포(鐵砲)를 처음으로 접한 다네가 섬 영주가 모조품을 만들자, 전국 다이묘들이 서로 경쟁하듯 뎃포 제작에 나섰다. 일부 다이묘들은 뎃포와 그 제작 기술을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독점하려 했다. 일본인들은 꾸준히 조총을 개량했다. 나사를 만들고, 초석을 제조하는 기술을 연구, 개발했다. 정확하게 측정한 화약과 총알을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나무 통에서 화약과 탄환을 꺼내 신속하게 장전, 발사하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은 포르투갈에서 처음 수입했을 때보다 월등히 성능이 우수한 조총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어 각 다이묘들은 대형 화승총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1573~1574년경에는 오뎃포(大鐵砲)라는 긴 조총이 등장해 전투에 적극 활용되었다. 일본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 뎃포 제작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무역과 뎃포 제작의 중심지인 사카이(堺,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국을 지배할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뎃포 부대 육성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3월,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일본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일본도 등을 선조에게 진상했다. 당시의 정황을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전하께서는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고 적기도 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무기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인들과 접촉이 없었던 데다 일본을 통해 무기가 들어왔지만, 선조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선조가 이러한 일본의 신무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중화의 질서에서 변방국이 진상하는 무기를 얕잡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은 그 무기를 시험해 봤어야 했고 시험을 통해 조선의 기술로 1년이면 개발에 성공해 다가올 왜란에서 적극 활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선 조정에서는 유성룡을 제외하고는 그 무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200년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무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조선의 군 수뇌는 조총의 위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초반 전투들에서 참혹하게 궤멸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왜군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따로 개조하여 조선만의 화승총을 만들어 무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대는 효종 시기, 청나라의 요청으로 만주로 출병해 러시아 코사크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해 그 위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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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0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영향력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착취
    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다. 그 후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29
  • 생각보다 강한 필리핀 원주민들의 무력, 스페인 7차례 원정 끝에 정복하다.
    필리핀에는 스페인이 오기 전부터 16세기 초중반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 란타카(Rantaka)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화포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 생산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조직, 포르투갈 등의 서양 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의 함선은 토착 아웃리거(Outriger) 군선들이 존재하고 스페인 측의 기록화에 따르면 이 군선들은 아이언우드 재질이었으며 길이는 10m~30m. 길이가 30m, 폭이 6m 이상인 함선들은 주앙가(Juanga)라 불렸다. 이와 같은 함선들은 첨저 선으로 원양 항해와 소규모 무역선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중동까지 항해했었다고 추정되지만 우선 마다가스카르까지만 항해했던 것으로 문헌에서 발견되었다. 속력은 시속 15노트(knot)에 달했으며 높이가 낮아 군선이 가벼운데다 노가 많이 달려있고 큰 돛까지 달아 일본 세키부네 보다 1.5배~2.5배까지 더 빨랐다. 화살을 막는 방어 자재들을 달았고 승선 인원은 40명~200명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 력이 좋으며 높이가 매우 낮아 여러 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돌아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적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원거리에서 정밀한 타격은 매우 어려웠다. 그로 인해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으로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다. 네덜란드는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면서 결전을 벌였지만 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필리핀의 선회식 화포의 위력의 예라 볼 수 있다. 1780년 전쟁 때도 네덜란드 함선은 필리핀 도독 령과 해전을 벌이다 토착 군선들에게 5번이나 패배했다. 한편 영국 또한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했으며 스페인은 이슬람 계 토착 상업 왕국들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배했다. 스페인은 필리핀 도독 령의 설립 이전에 5번의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 중 몇 번은 해전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 필리핀 도독 령 설립 이전 루손인 용병단의 지원을 받은 남중국해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격퇴 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들도 모두 여기에 당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제국에 편입시킨 후 이들 필리핀 함선들을 해안 방어에 사용하였다. 또한 필리핀 제도는 일본 열도에서 온 왜구들이 동남아시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 지점이기도 했다. 지리상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고, 대만은 청나라 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쇄국 정책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라 접촉하기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무역 등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 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 화교들이 많이 거류하던 팡가시난(Phangasinan)에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도 거류하고 있었다. 실제 후기 왜구들은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활동 무대가 동남아시아, 중국 해역, 한반도까지 기록이 다양한 곳에 드러난다.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다. 일본 본토의 아시가루들의 월 봉급이 1칸 55유이었고 필리핀은 금, 은, 보석을 지급하고 이 외의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화폐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무사 계층들이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용병으로 활동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개개인의 검술 형식에 따라, 전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선호도에 맞춰 검의 모양과 크기를 맞춤 제작하던 전통이 있었던 전문 무사들이었다. 해적 활동 이외에도 각 국가들의 군대는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등에 금전을 지불받고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군사 활동 영역은 동남아시아 최서단, 최남단, 중국 남부 등 동남아시아 전역과 동아시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 왕국의 군사 동원력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있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막탄 섬의 소 영주였던 라푸라푸가 마젤란 200여 명의 스페인 군을 상대로 막탄 섬 방어에 동원한 병력이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 막탄 섬은 매우 작은 섬인데, 세부 왕국 전체의 군사 동원력은 막탄보다 최소 몇 배에서 십 수 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략 센코쿠 시대 다이묘들과 비슷한 병력 동원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전을 더 많이 사용 시 정글에 사는 네그리토 궁수들까지도 추가로 고용할 수 있었다. 각 왕국들의 용병 활동 기록이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전면전 기록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국제 무역 관계로 인해서인지 전면전은 지양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용병업, 해적 활동 이외의 방어전에서는 군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병영 국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상업 왕국인 술루 술탄국의 군사 동원력은 식민통치 말기 기준으로 15만 명이었다. 330여 년간의 인구 증감률을 감안하더라도 일개 지방으로써는 큰 수치이다. 1405년 영락제 당시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는 명나라 수군 도독 정화의 대규모 해상 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확실한 것은 마닐라 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 후 얼마 동안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십 수 년 뒤의 기록을 살펴보면 힌두교 세부 왕국과 마긴다나오(Magindanao) 사이에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바이바이인 문자는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필리핀의 여러 왕국들의 해상 활동도 꾸준하게 발견된다. 150여 년 후, 스페인의 도래 시기에도 상업으로 번성하여 건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필리핀 정복 시도는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바랑가이들은 무기 이 외의 방어구는 각종 재료들을 가공한 갑옷들을 제작했다. 스페인 원정대의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higapeta)의 기록에는 다양한 재료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 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유럽 최고의 스페인 산 강철이 필리핀 갑옷에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거의 가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철이 아닌 가공한 재료들로 제작되어 비를 맞아도 녹슬지 않았다. 대부분은 경 갑옷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 갑옷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온다고 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 썩어서 남아있지 않으며, 경 갑옷은 일부 몇 개 남아있다. 스페인 마젤란 원정대가 왔을 때 모두 오지 원주민인 것처럼 벗은 채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된 기록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다만, 실력 좋은 자신감 있는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이외의 평상시에는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들을 의전 하였다.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의 검은 당시 필리핀과 무역을 하던 일본에서 골동품 유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센다이 지방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유품으로, 이 금 장식이 된 검들은 필리핀에서 센다이 사절단에게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단은 전형적인 토착 양식이고 하단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섬 지역민들은 해적이었기 때문에 해군을 겸한 보병이 군대 그 자체였다. 대개 전투는 바다, 해안, 시가지, 정글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곳도 기병의 효용이 떨어지는 지형의 연속이라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어내도 금세 우거져 버리는 열대 정글의 존재와 화산으로 형성된 산맥들이 균일하지 못한 복잡한 지형이었던 데다 그 안에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인구로 살고 있는 네그리토 전사들의 존재는 기병의 필요성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섬과 섬이 이어져 있지 않고 수많은 섬으로 분할되어 있는 군도 특성상 바다를 천연 교통로로 활용하는 것이 더욱 편했고 대부분은 전쟁도 육로가 아닌 바다로부터 상륙을 통해 공격해왔다. 타국 해안가나 항구를 약탈 할 때도 군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약탈을 마치고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목축 또한 양돈 이외에는 의미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과의 전면전은 방어전인 경우가 많았고 해외 원정을 가는 경우에는 대개 중소규모의 용병 단으로 참전하였다. 애초에 전투의 목적이 돈을 버는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 징집 병이 대부분에다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목적이었던 주변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필리핀 각 중소국가들은 상인, 해적들이 모여 규모가 커져서 제각기 국가화 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경민족 단위에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 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과 그 시작이 다른 해양 민족이었다. 고대부터 필리핀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 지역에 있어 다국적 자본의 교차 지역이면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연유로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 대만인, 류큐인, 자바인, 바자우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왕래했으며 이들이 각 섬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지배층과 피지배층, 노예 간의 인종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지역별로 특정 인종, 문화권이 우세했던 인도차이나 반도와 다르게 필리핀 제도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권의 인종들이 비교적 균일한 숫자로 거주하면서 상업, 전쟁 등으로 경쟁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인도 및 이슬람 계 문화권 출신들이 전후반기 모두 우위를 점하였다. 단적인 예로 크메르 계통 인구의 우세 속에 크메르 계 문자를 사용하던 태국, 중국계 인구의 우세 속에 한자를 사용하던 베트남과는 달리, 필리핀 제도는 인도, 아라비아계의 바이바이인 문자를 사용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페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금, 은, 귀금속 등의 화폐 경제가 발달했으며 다른 금속 화폐들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필리핀의 경제적 구조는 폐쇄성 보다는 개방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자유로운 무역을 했던 것으로 분류된다. 일단 스페인 도래 이전 기준으로도 매우 부유하였고, 스페인의 기록상 마닐라, 부투안 등은 동남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던 곳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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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의과 대학 정원 2000명 고수 정책에 대하여
    오늘 아침엔 딸의 출근길을 도와주었다. Y병원에 가는 길에 딸에게 물었다. “요즘 외래 힘들지 않나?” “수술 스케줄 조정하느라 힘들어!” 수술 일정을 모두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딸이 나에게 묻는다. “아빠! 왜 하필 2,000명이야?” “그러게, 말이다. 대통령실 옆에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런가 봐! 이름이 이천공이래!” 최근에 알았지만 대통령실과 불과 100m 거리에 천공이라는 스님이 살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가 그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비록 비합리적이지만 그의 생각을 국가의 정책으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기는 할 것 같았다. 딸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천공이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딸의 이야기이다. “우리 병원 암환자 중에 삼성병원, 아산병원 모두 다니는 환자도 있어! 그런 것을 개혁해야지 왠 의대 증원 2,000명이야?” 딸은 나와 생각이 같았다. 의대 증원에 관한 정부의 발표 중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서울지역은 증원이 없다. 0이다. 모두 지방대학에 증원했다. 서울지역 대학의 기존 정원은 끝자리 단위가 들쑥날쑥하다. 서울대 135명, 카톨릭대 93명 등이다. 그런데 충북대는 49명에서 200명, 경상대는 76명에서 200명, 대구 카톨릭대는 40명에서 80명으로 증원한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강원대이다. 강원대는 49명에서 132명으로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왜 하필이면 끝자리가 2명일까? 서울지역의 전체 의대 정원의 끝자리가 8이었던 것 같다. 2,000명을 맞추려면 2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말로 2,000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강원대 정원이 132명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합리적인 생각을 근거로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려시대에 묘청이 풍수지리를 근거로 개경에는 기가 다하여 서경으로 궁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역사를 알고 있다. 묘청은 황제 칭호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나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을 권유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와 싸워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나아가서 고려가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인종는 그의 말을 믿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묘청은 간신임이 분명하였다. 사악한 도술과 편 가르기를 일삼아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서경 천도와 관련하여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이 심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묘청의 주장대로 고려가 금나라를 공격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더 일찍 멸망했을 것이다. 물론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1천년 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신채호는 묘청이 김부식에 의하여 패전한 것이 우리나라가 사대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대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몸짓으로 이해한다. AI가 등장하는 시대에 묘청과 천공을 언급하는 것이 허황하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허황하지만은 않다. 묘청의 그림자가 용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 것도 그렇고, 의료 개혁한다고 느닷없이 들고나온 의대 증원 2,000명의 주장도 그렇게 실행에 옮겨질 것 같다. 왜 하필 2,000명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해명조차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천공의 본명은 이병철이었는데 이천공으로 개명한 것으로 나온다. 대통령부부가 천공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이천명을 고집했을까? 아니면 천공이 이천명을 고집했을까? 다른 지방대학교는 정원이 모두 몇십 명 단위인데 강원대 정원만 132명인 것은 너무나 엉뚱하다. 그 모두의 합은 이천명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역술인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있기는 하다. 얼마 전에 탄허스님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탄허스님도 미래를 예측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의 사고에 비해 동양인들의 사고가 운명론에 취약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주역은 자연의 운행에 대한 동양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하지만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인간사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탄허스님도 주역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역을 전혀 알지 못하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천공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천공의 생각이 탄허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대통령부부의 생각은 나와 다를 것이다. 웃고 넘기기에는 비극에 가깝다. 세익스피어는 “지나간 것은 앞으로 닥쳐올 것의 서곡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그는 그 말에 이어 “앞으로 닥쳐올 것은 당신과 나의 실제 행동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우리의 미래가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이다. 역사발전의 추세는 읽어낼 수 있지만,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에는 다소 억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평범한 시민이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국정 책임자의 생각이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너무나 불안하다.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마지막 말이 빛이 난다. 우리의 실제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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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터키의 31일 지방 선거, 에르도안과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울루의 정치 생명이 달렸다.
    터키에는 이번 3월 31일 터키 전국의 지방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유세가 한창 진행 중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이다. 시장 임기는 5년이며 공화인민당의 에크렘 이마모울루(Ekrem Imamoğlu)가 현 시장이다. 5년 전, 2019년에는 이마모울루가 비날리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여당인 정의개발당과 에르도안이 한 달 동안 재검표, 재개표를 실시하는 선거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모을루가 4월 17일 당선이 확정되었는데 여당인 정의개발당 측이 "부정선거가 있었다"며 선관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에르도안은 "국민이 재선거를 원한다"며 선관위를 압박해 선거 결과를 무효로 돌리고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지만 재선거에도 이의 없이 이마모울루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도안이 시민의 손으로 당선된 시장을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여당과 함께 재선거로 뒤집은 것이다. 선관위는 투표함 관리자에 민간인이 포함돼 있어 공무원만 맡아야 한다는 선거법을 어겼다는 이유라는데 아타튀르크 이후, 항상 투표함 관리자에는 민간인이 5~10% 정도 참여할 수 있게끔 아타튀르크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종교와 민족을 넘어서 만든 헌법을 에르도안이 무시하고 선거법을 근거로 딴지를 건 것인데 에르도안이 2017년 개헌을 통해 판, 검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판사, 검사위원회(HSK)의 13명 위원 중 10명을 자기 사람으로 앉혔다. 이 또한 명백한 위헌이다. 아타튀르크 때부터 민주주의를 위하여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삼권분립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야당인 공화인민당 지지자들 뿐 아니라 이스탄불의 시민들이 터키 국기를 들고 선관위의 이스탄불 시장 선거 재선거 결정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었다. 당시 에르도안이 선거 결과에 반발한 이유는 이스탄불이 에르도안에게 매우 특수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인구 1,200만명에 달하는 이스탄불이 터키의 정치, 경제 중심지이며 에르도안 자신이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입지를 키웠고, 이후 정의개발당은 25년간 시장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그 입지가 흔들려서 벌어졌던 터키 민주주의 사상 최악의 만행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나서 5년 후, 이스탄불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은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후보로 내세워 현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Ekrem Imamoğlu)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2023년 대선을 통해 최소 2028년까지 집권을 연장한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에크렘 이마모울루의 ‘정치적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그 이유는 에르도안이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번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행정적인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기에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 이번 시장 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오차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있다. 사실 이마모울루는 2019년 이스탄불 시장으로 어렵게 집권한 이래,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게 없다.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 대처도 제대로 못해 이스탄불의 거리를 폐쇄하는 악재를 만났고 코로나 이후, 이스탄불 도시 경제는 더욱 추락했으며 리라화 폭락도 막지 못했다. 인구 1,600만의 대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 경제 확립인데 도시 경제가 2015년 이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좋지 않다는 것이 체감상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봤을 때, 이스탄불의 물가는 엄청난 수준으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인플레이션 또한 심각하다. 그렇기에 높아진 물가 비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에는 끊임없이 시위도 발생한다. 과연 이스탄불 시민들이 시 경제 추락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이마모울루에 다시 신뢰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정의개발당 시장 때 보다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결국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오히려 정의개발당 집권 시기보다 더 못하게 된 것이다. 5년 전, 당시 수도 앙카라와 관광도시 안탈리아까지 공화인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이곳들은 이전 25년 동안 모두 정의개발당과 이슬람권 진영에서 모두 승리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에르도안은 이번 지방선거에 비장의 카드들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저 임금 인상"안이다. 베다트 이시칸(Vedat Isikhan) 터키 노동부 장관은 2024년 1월 1일부터 월 최저임금을 49%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상된 최저 임금은 17,002 리라(한화 약 745,200원)로 작년 2023년 7월에 인상된 현 최저 임금보다 49%, 2023년 새해 1월 1일보다 100% 인상된 수준이다. 에르도안은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에 짓밟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터키는 현재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지난 2년 동안 최저임금을 연간 두 차례의 인상으로 2배 가까이 인상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여태까지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터키의 물가 상승률은 2023년 10월, 85.51%까지 급등했으며 현재도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리라화 가치는 2024년 현재, 35% 하락해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 이 가운데 정부가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최저 임금 인상 카드를 내세워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3년 5월,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긴축 통화 정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올해 3월 초, 터키 중앙은행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7차 금리 인상을 단행해 기준금리를 연 42.5%로 인상했다. 터키의 통화 당국이 이번 달 지방선거를 앞두고 리라화 하락과 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터키의 중앙은행은 통화 긴축 기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추가 조처를 했다며 상업 대출과 일반 대출의 월별 증가폭 상한을 각각 2.5%와 3.0%에서 모두 2.0%로 낮췄다고 했다. 이어 이와 같은 조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담보 설정과 더불어 대출 증가율에 따른 필요 적립금을 설정하는 등 노력도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중앙은행은 이와 별도로 시중 은행 등 상업 대출 기관에 개별적으로 연락해 외화 구매 한도를 부과하고 3개월 미만의 단기 선물 계약을 피할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경고는 작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 뒤 처음 있는 일이긴 하다. 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작년 5월 대선에서 다시 승리한 이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45.0%까지 끌어올렸는데도 국내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내려진 조치였다. 에르도안은 지난 3월 8일 이스탄불의 한 체육관에서 열린 청소년재단 행사에 나타나 이번 지방 선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선거는 터키 전체의 전환점이라면서 자신에게 이번 선거는 결승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신호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지만 여태까지 에르도안의 행보를 볼 때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이번 지방 선거는 이마모을루 현 시장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일종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다. 이마모을루는 수십 년 만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가장 큰 도전자로 여겨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이번 선거가 변수인 이유다. 만약 이마모을루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에르도안의 집권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작년 터키에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5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마모울루는 낡고 황폐해진 건물을 철거하고 지진에 강한 대체 건물을 짓는 개발 사업을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마모울루의 공화인민당이 다시 약진 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2019년 야권 연합이 에르도안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던 것과 달리, 지난 해 대선 이후 연합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부분이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이번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또 다른 부분은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되고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지방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하다. 특히 이스탄불의 승리는 거의 50%의 확률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0세다. 이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울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여기에 달렸다. 사실상 두 사람의 정치 생명을 건 일종 "러시안롤렛"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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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2002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과 2024년 크로쿠스 시티 홀 테러 사건의 비교 분석
    2002년 러시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 참고로 나는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러시아와 관련이 없었던 때다. 이 사건과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모스크바의 주요 공연장을 대상으로 한 테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범행 주도 세력과 동기, 수법 등에서 전혀 다르다. 두브로프카 인질극은 체첸 반군이라는 분명한 반러시아 조직이 확실한 동기를 갖고 인질극을 벌였지만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그 배후가 누구인지, 왜 그와 같은 테러를 저질렀는지 아직까리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아직 배후가 불분명한 소수의 무장 세력이 건물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혼란을 틈타 도주했다. 더불어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을 통해 볼 때 체첸 테러범들은 인질들에게 어느 정도 편의도 배풀고 잘해준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막무가내식이라는 것에서 다르다. 이는 일종의 사보타주로 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보기관(SBU와 군정보총국·GUR)이 늘 자행해온 저항 수법이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WP)와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CIA가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주도의 '사보타주'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 그 배후에 우크라이나가 있음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아이에스나 이슬람 기타 원리주의자들이 한 것은 맞지만 그들을 누가 사주했는지, 그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파장은 클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러시아의 주요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은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을 경계로 전과 후로 분류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에는 체첸 반군으로 대표되는 북카프카스 지역의 이슬람 반군에 의해 주로 저질러졌다. 그러나 지난 2년 간은 우크라이나 측의 '사보타주'가 대부분이다. 그 수법을 보면, 체첸 반군들은 모스크바 지하철 사건과 같은 자폭테러나 모스크바 극장 사건 및 베슬란 학교 인질극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전시 상태에 있는 우크라이나 측은 주요 시설 폭파나 무력화를 겨냥한 사보타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테러 사건은 2004년 무려 333명이 희생된 베슬란 쉬꼴라(초중등 학교) 인질극이다. 체첸 반군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북카프카스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공화국의 작은 마을 베슬란의 한 쉬꼴라에 난입하여 어린이와 학부모 등 1,100명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 군과 대치했다. 물론 러시아 군은 사흘 만에 이들 체첸 반군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작전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이 186명을 포함해 총 3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2010년 3월에는 출근 시간 대에 모스크바 지하철 역 2곳에서 연쇄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로 인해 41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체첸과 인접한 다게스탄 자치공화국 출신 여성 2명인 블랙 위도우(Чёрные вдовы) 집단이 허리에 차고 있던 폭발물을 터뜨리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로 러시아의 모든 지하철역과 버스터미널, 기차역 등지에서 보안검색대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어 다게스탄의 이슬람 분리 독립 운동 세력은 그 지역에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2011년에는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37명이 사망했다. 러시아 당국은 범인이 북카프카스 출신이라고 밝혔다. 또 201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이 발생해 범인을 포함해 16명이 사망했다. 범인은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우즈베키스탄 소수 민족 출신이며 ISIS 집단에 소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범은 시리아 반군 진영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내 테러 조직인 ISIS-K (호라산) 집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의 범인 집단과 동일한 집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지원하는 세력은 미국, 혹은 우크라이나 정보당국인 것으로 보이는 것, 그 의혹이 여전히 짙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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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2002년 러시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Дубровка) 극장 인질 사건
    지난 22년 전, 2002년 10월 모스크바 두브로프카(Дубровка) 지역에 있는 발레 극장(Театральный центр на Дубровке, 통칭 두브로프카 극장)에서 대형 인질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의 체첸 반군 진압 작전에 의해 거의 궤멸될 위기에 몰린 체첸 무장 세력 수십명이 소련 시대의 뮤지컬 노르드-오스트(Норд-ост)가 공연 중인 극장안으로 난입하여 관객 등 9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진압 부대와 사흘간 대치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건은 현재에도 러시아에서 인질극, 테러 사건의 대명사로 떠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당시 900여 명의 관객들은 뮤지컬을 관람 중이었는데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었으며 배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소련군 군복을 착용한 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밤 9시 15분 두 대의 밴 차량이 극장 앞에 나타났고 그 안에서 무장한 남녀들이 하차하여 극장으로 난입했는데 이들은 15정의 AK 소총과 권총 11정, 수류탄 114개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기의 대부분은 오작동을 피하기 위해 구입한 신제품이었는데 이 무기들을 마련하는 것에만 무려 60,000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뮤지컬 상영 중이었고 갑작스럽게 현대 군복과 검은 옷을 착용한 이들이 배우를 밀치고 무대 가운데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원래 특수효과가 많은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상황을 뮤지컬의 연기의 일부로 여겨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하면서 이 상황 공연 연출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혼란한 와중에 관객들과 배우들은 출입구를 찾으려고 했으나 이미 출구는 그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봉쇄되어 갇히게 된다. 이들은 바로 체첸의 블랙 위도우(Шахидка)라고 불리는 자들과 자신들을 체첸 29사단이라고 소개한 체첸 반란군들이었다. 이들 중 여성이 19명, 남성 22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남성들은 전부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성들은 검은 과부단(Черная вдова группа)이라는 러시아군에게 전사한 체첸군의 미망인들 집단이었는데 모두 검은 니캅을 착용했다. 특히 19명의 여성들은 자폭 테러까지 준비했으며 이들을 지휘한 자는 모프사르 바라예프(Movsar Barayev)라는 자로, 당시 나이 23세였으나 검은 과부단은 주라 바라예바(Зура Бараева)라는 모프사르의 친척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질들에게 휴대폰으로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인질로 잡혀 있음을 알리라고 명령한 이후 극장 30여 곳에 폭탄을 설치했으며 50kg 가량의 폭탄을 2곳에 분산 배치하여 러시아의 스페츠나츠나 오몬이 돌입할 경우 폭발시킬 준비를 하였다. 밤 9시 45분 쯤에 인질극 상황이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밤 10시 15분경 러시아 경찰과 연방 보안국이 장갑차 2대, 경찰차 20대, 소방차와 구급차 5대를 동원하여 극장을 포위하고 보훈 병원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당시 사건 진압 총지휘자는 연방 보안국 부국장 블라디미르 프로니체프(Владимир Фроничев)였으며 당시 체첸 반군은 12살 미만의 어린이 20명과 임산부 등 30여 명의 인질은 자발적으로 석방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최정예 특수부대들인 알파 그룹과 빔펠 그룹 그리고 오몬(OMON)과 지역 내 FSB 대테러부대, 스페츠나츠 등을 급파하여 진압 작전에 대한 대비 태세를 갖추면서 인질 협상을 위해 협상단을 조직했다. 다음날로 넘어간 10월 24일 0시를 기해 체첸의 국회의원 아슬란베크 아스라하노프(Асланбек Асраханов)가 테러범들과 접촉하였고 인질들의 주선 하에 테러범들은 러시아 NTV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에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협상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17명의 인질을 추가 석방하게 된다. 협상단이 구성되고 극장은 러시아 연방군과 러시아 연방보안국 등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협상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이 나왔는데 체첸 내의 모든 포격 및 폭격 중단과 푸틴의 공식적인 체첸전쟁 종료 선언, 그리고 자찌스뜨까(Зачистка)를 중단하라는 내용이다. 자치스뜨까(Зачистка)는 "청소"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이는 체첸 반란군에 가담한 인사 및 그 친척들에 대한 보복을 중단하라는 의미이다. 원래 자치스뜨까(Зачистка)의 목적인 반군 세력의 색출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체첸 잔당과의 교전에서 나타나는 체첸 민간인에 대한 수십 여 명을 무차별 사살 및 거주지들을 방화하는 형태, 그리고 생존자들을 구금하여 갖은 인권유린을 저지르는 등 지극히 잔혹한 형태의 의미가 되었다. 이는 반군 구성원뿐만 아니라 반군의 친척 또는 반군에 협력한다고 의심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그에 대한 시작은 1차 체첸 전쟁이 발생한 옐친 정권 때부터였다. 사실 그러한체첸 전쟁의 발단, 그리고 그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급해 러시아를 흔들게 한 자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었다. 당시 체첸의 배후에는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었고 미국 또한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한 대테러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여기에 탈레반과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체첸 반군을 지렛대로 삼아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금전적인 부분도 아니고 테러범들의 요구 조건 자체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들어주기 어려운 부분이라 새벽 1시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에 대한 첫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우선 무력으로 진압할 것이며 몸값 지불 따위는 없을 것이고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들을 석방한다면 3국으로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새벽 4시까지 계속 인질을 석방하면서 총 100여 명의 인질들이 석방했는데 새벽 4시 극장 판매점 점원이었던 올가 로마노바(Ольга Романова)가 러시아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극장 안으로 난입하다가 경찰로 오인받아 테러범들에게 사살되면서 첫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어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일주일 이내로 체첸에서 러시아 연방군이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24일 새벽 5시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외국인 인질들에게 아침 9시에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어 6시에 러시아 연방 보안국 소령이 어린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극장으로 접근하였으나 체첸 테러범들은 그를 경찰로 오인하고 즉각 사살하였다. 체첸 테러범들은 8시부터 9시까지 미국, 영국, 독일에서 온 76명의 외국인 인질을 각국 외교관에게 직접 석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차질이 빚어져 연기되었다. 10시 체첸 테러범들은 국제 적십자사와 국경없는 의사회에게 대화 주선을 요구하는 한편 언론인이었던 안나 뽈리뜨꼬브스까야(Анна Политковская), 정치인 이리나 하까마다(Ирина Хакамада), 그리고리 야블린스끼(Григорий Явринский)를 협상자로 지목했다. 오후 1시에 체첸의 민요인 백학(Журавли)을 부른 유명 가수 이오시프 코브존(Иосиф Кобзон)과 적십자사 의사들이 극장 내부로 들어가 15분 동안 인질들과 대화한 후 여자 1명과 어린이 3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오후 3시에 코브존은 이리나 하까마다와 함께 다시 극장에 들어가 테러범들에게 인질을 더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테러범들이 이를 거절하여 소득 없이 돌아왔다. 25일 새벽 2시 의사인 레오니트 로살(Леонид Роcаль)이 의약품을 제공 및 인질들의 치료를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1시간 뒤인 새벽 3시 로살은 NTV 기자들을 대동하여 극장 내부로 들어갔고 테러범들은 인터뷰가 방송된다면 어린이 인질들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인터뷰 종료 1시간 후 반란군이 7명의 인질을 추가 석방했으며 이 날 정오에 8명의 어린이들을 적십자 직원들과 함께 석방했지만 이 날 방송된 인터뷰에서 테러범들의 목소리가 보도 되지 않고 자막 처리만 된 것으로 인해 테러범들은 크게 격분하여 더 이상 인질들을 석방하지 않기로 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정부가 이들에게 3국 망명을 제안한 것을 두고 반란군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해 더욱 분노했다. 이어 오후 3시 안나 뽈리뜨꼬브스까야(Анна Политковская)가 극장 안에서 테러리스트와 만남을 가졌다. 테러리스트들은 뽈리뜨꼬브스까야에게 푸틴의 체첸 전쟁 종전 선언, 가시적인 철군 조치를 약속하는 것이 테러범들의 요구 조건이라 전달했다. 이 날 밤 9시 친체첸 인사들이 다수 반란군과 접촉하여 인질 석방을 촉구하였고 인질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생명을 우선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반란군은 추가적인 석방을 거절하였으며 몇몇 러시아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을 극도로 자극하여 포악하게 변하게 하였고 테러범들은 정치인들과 인질을 교환한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밤 11시 30분 정체불명의 남자가 극장 현관을 통해 극장으로 들어갔는데 테러리스트들은 그를 러시아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인질들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이에 흥분한 남성 인질 한 명이 폭탄을 착용하고 있던 여성 테러범에게 달려 들었다가 즉각 사살당했다. 2명을 사살한 테러리스트들은 러시아 지휘본부 측에 전화하여 구급차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부터 테러리스트측은 인질들의 휴대폰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질들을 처형할 것을 언급했고 추가적으로 요구사항 3가지를 늘렸다. 첫 번째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목한 러시아 남부 군관구 대표인 빅토르 카잔체프(Виктор Казанцев) 상장이 극장에 출두할 것, 두 번째, 체첸 내의 친러시아 주요 인물을 극장으로 데려와서 러시아인 인질과 교환, 세 번째, 두브로브카 극장을 빠져나올 안전 통로의 보장이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각료들은 모두 테러범들과 협상은 없으며 26일 새벽을 기해 극장 진입 작전 내용을 하달한다. 마침내 26일 새벽 5시 갑자기 극장의 모든 창문으로 서치라이트가 비쳤다. 새벽 5시 15분 극장의 환기구와 배관을 통해 연기가 들어오자 테러범들과 인질들은 처음에는 불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연기는 화재 연기가 아니었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의 일부는 바로 준비한 방독면을 착용했지만 방독면을 착용하지 못한 테러범들도 많았다. 이어 러시아 군사경찰이 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이 가스는 펜타닐 계통의 마약성 마취제로 흡입하면 정신을 잃고 호흡 기능이 마비되며 질식사 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신제품이었다. 인질 700여 명과 테러리스트 33명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이 5시 35분부터 진압작전이 개시되었고 알파 그룹과 빔펠, 그리고 OMON 병력이 극장 안으로 돌입했다. 이어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으나 체첸 측의 저항은 가스 중독으로 인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교전은 작전 개시 2시간이 지난 오전 7시에 종료되었다.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한 체첸 반군 40명은 전원 사살되었고 인질 700여 명 중 공식적으로 131명이 사망했다. 이 진압 작전에서 러시아군이 인질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가스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분명한 대테러 대응 기조를 내놓으면서 비판에 대한 반박과 함께 정당화했다. 검은 과부단의 대부분이 자폭 테러를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치 못해 발생한 긴급조치였다. 이 인질극의 파장은 컸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최근 오스카 상 7관왕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1번째 첩보 스릴러 영화이자 2020년에 개봉한 테넷(Tenet)의 오프닝 격인 우크라이나 키예프 오페라 극장 테러가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재조명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사건 이후, 테러 행위에 대한 형법을 개정해, "무협상,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테러나 인질극을 통해 더 이상 러시아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이 이 때부터 확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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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코로나 이전의 최악의 팬데믹(Pandemic), 유럽의 페스트(Black Plague) 이야기
    페스트(Pestis)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의해 일어나는 급성 열성 전염병으로 독일어인 'Pest'의 독음이면서 영어로는 'Plague'라고 한다. 영어 단어 Plague 자체가 '전염병'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질병학에서 페스트로 불리는 'Plague' 자체가 전염병을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세 페스트 팬데믹이 매우 참혹하였고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모든 전염병을 통칭하는 상징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흔히 한자로 흑사병(黑死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 자체가 혈관 내부에서 피가 응고되며 신체 말단이 괴사하는 증상이 발현되어 실제로 사후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 페스트라는 이름은 1894년 스위스의 의사 알렉산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과 일본의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는 각각 독립적으로 홍콩에서 페스트 병원체를 분리해내면서 "쥐벼룩이 페스트의 매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르생은 자신을 지원했던 파스퇴르 연구소를 기념해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Pasteurella pestis)라는 학명을 붙였다. 1967년 페스트균이 새로운 속으로 재분류되면서 예르생을 기념해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학명으로 재명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된다. 사망자 수의 추정치로 볼 때 독보적인 1위인 천연두(Smallpox), 인플루엔자(Flu, Grippe)와 더불어 대유행(Pandemic)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던 질병이 페스트다. 그 중에서 천연두는 오래 전에 박멸된지 오래된 질병이지만 페스트는 중세 시대 당시, 유럽에서 검은 사탄의 재림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악명을 떨쳤던 것에 비하면 현재 많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다. 인플루엔자, 흔히 독감이라 불리는 질병도 세계적으로 매년 수십만 명, 심한 경우 100만 명 단위의 인명피해를 내기 때문에 그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질병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에 해당되지 않지만 열대지방 및 아열대 지방을 중심으로 말라리아나 에볼라도 가장 위험한 전염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페스트균의 경우, 현재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부분적으로 분포해 있다. 페스트 균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게 전파되는 질병이다. 역사상 아주 작은 생물에 지나지 않던 벼룩이 모기와 더불어 인류의 치사율이 가장 높은 위험한 생물로 꼽히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페스트 질환의 주요 형태는 가래톳 페스트(Bubonic plague), 패혈증형 페스트(Septicemic plague), 폐렴형 페스트(Pneumonic plague) 등으로 구분된다. 중세 시대에는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인구의 7500만~2억 명 남짓이 인류가 희생되었다. 페스트의 어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틴어 단어인 'Pestis'로 이 단어는 원래 특정 질병이 아니라 전염병을 지칭하는 라틴어의 보통명사로 나타난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공식적으로 특정 질병의 고유명사로 명명이 되었으며 학명으로도 정해졌다. 또한 라틴어 문헌에서도 전염병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와 특정 질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2가지의 문법을 모두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병의 증상을 지칭하는 명칭은 블랙 플라그(Black Plague) 혹은 흑사병(黑死病)으로 알려져 있다. Black Plague라는 단어는 14세기 중기에 급속도로 퍼진 질병의 명칭을 후대에 재지정한 것이고, 14세기 당시에는 Great Pestilence (대 페스트), Great Plague (대 역병), Great Mortality (대 사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병이 진행되면서 전신의 혈액 내에서 혈전이 생성되고 지혈 작용이 적절히 일어나지 않아 출혈이 발생하는 이른바 파종성 혈관 내 응고(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를 유발하여 광범위한 반상 출혈 및 사지와 코 등의 신체 부위에 검은색의 괴사를 일으킨다. 이 때 살이 검붉은 자줏빛으로 썩는 증상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병명이 오역되기도 했다. 당시 이 병을 지칭하던 단어 중에 라틴어로 'Atra Mors'가 있었는데, 'Atra(남성형 : Ater)'는 '검다'라는 뜻이 있으나 또한 '끔찍하다'라는 뜻도 있어 문맥 상, '끔찍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스칸디나비아의 기록자들이 '검은 죽음'이라 오역하였고, 그것이 영어권과 독일어권에 그대로 들어와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페스트의 발병 원인은 페스트균에 의한 것이지만, 주요한 두 가지 유형인 가래톳 페스트와 폐렴형 페스트는 감염 경로가 다르게 나타난다. 가레톳 페스트의 감염 경로는 페스트균을 보균하고 있는 쥐와 그 쥐의 피를 흡혈하는 벼룩에게 물려 감염되면서 나타나고 폐렴형 페스트는 감염 환자들의 기침이나 체액, 혹은 쥐와 같은 감염 동물들의 분뇨나 가래 등이 공기 중에 퍼져 호흡기 질환으로 감염되는 특성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야생의 설치류(齧齒類)인 다람쥐와 쥐, 비버 등의 동물들의 간을 숙주로 한 벼룩에 의해 흡혈되어 생성되는 전염병으로 인식되었으며 사람에 대한 주 감염원으로 지목되는 것은 보통 다람쥐와 마못(Marmot) 등으로부터 벼룩이 감염된 집쥐와 곰쥐 등이다. 이러한 설치류들이 구제되지 않고 페스트균을 다량으로 보균한 채, 대량 번식하면 그때부터 인간에게 큰 위협으로 존재하는 병이기도 하다. 이러한 보균동물이 존재하고 있는 지방에는 풍토병(風土病)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동북부와 중국 대륙의 오지, 몽골 및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은 그 이전에 유행하여 보균동물들이 잔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근 등의 재해가 닥치면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유행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최근에 중국에서 발병하는 사건 또한 있었으며 라틴아메리카 중부에서 북부, 아프리카 중부, 미얀마, 이란,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2000년 이후 10년 사이에 유행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기록을 추가한다면, 2009년 8월에 중국 청해성 장족자치주에서 12명이 폐혈증형 페스트에 감염되었고 이 중에 3명이 사망했으며, 직, 간접적으로 페스트에 접촉한 사람 300여 명을 모두 격리 조치한 바 있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수단 공화국 서부에서는 6년째 흑사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감염된 설치류를 사냥한 고양이가 설치류 자체보다 더욱 위협적인 페스트의 매개체로 꼽히고 있는 등, 현 시대에도 위협적인 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세 유럽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균 감염은 증세가 격심하고 사망률도 높으며,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법정 제1종 전염병인 동시에 검역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다. 환자가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 튀어나온 병원균에 의하여 감염되는 비말감염(飛沫感染), 또는 환자의 분비물 및 배설물이 부착된 물품으로부터 기도감염(氣道感染)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보균동물을 흡혈한 벼룩에 물려서 감염되는 경우가 많다. 병에 걸리면 장기간의 면역을 얻는 것이 드물게 다시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페스트균 감염의 일반적인 증세는 갑자기 오한전율(惡寒戰慄)과 더불어 40℃ 전후의 고열을 내고 현기증과 구토를 하며 의식이 혼미해진다. 페스트의 잠복기는 2~5일이고, 순환기계(循環器系)가 강하게 침해받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몇 가지 유형의 병으로 분류되어지는데, 주된 유형은 선(腺) 페스트와 폐(肺) 페스트의 2가지 병 형태로 구분된다. 발병했을 때 병의 진행속도가 굉장히 빠르며 에볼라조차도 페스트의 진행 속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 놀라운 전파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전염병 중 사람을 가장 단시간에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급성 페스트로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6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치사율도 굉장히 높다. 보통 치사율과 전염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본다면 50~90%에 달하는 흑사병의 치사율은 전염성 못지 않게 굉장히 높은 편에 들어간다. 현대에 들어 간혹 나타나는 흑사병의 치명률은 10%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 이유는 페니실린(Penicillin)과 더불어 항생제와 백신이 발달하고 독시사이클린(Doxycycline) 등의 치료제가 발달해 중세 시대나 중근세 시대처럼 치사율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의료 시스템이 미비한 국가에서는 50%를 넘기기도 한다. 특히 폐렴형 페스트의 경우 90%의 치사율을 기록하는 아직까지도 방심할 수 없는 무서운 병 또한 페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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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태국의 최대 물 축제, 송크란
    태국 축제 송크란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산크란디(Sankrandhi)에서 왔으며 변화 및 이동을 뜻한다. 이는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양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날짜가 매년 바뀌게 되어 있지만, 현재 날짜는 고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전통적으로 송크란은 태국의 설날 정도로 그 의미가 강했지만, 1888년 이후에 이 달력이 폐지되어 4월 1일을 신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설날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편이다. 1940년에는 태양력을 도입하고, 불력을 수정하여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다. 그러나 송크란에서 행해지고 있던 축제에서 몸을 정화하는 습관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또 하나의 설날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주말과 송크란이 겹쳤을 경우는 그 다음 주에 대체 휴일을 성립시켜 휴식을 권장하고 있다. 불상의 정화 등 종교적인 의식도 행해지기는 하지만 불교 축제하고는 관계가 없는 편이다. 이 말인즉, 물을 뿌리는 행사 자체가 불교 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설날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귀향의 시기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 연휴가 되어 도시에 나와 있던 가족이 모두 돌아와 한 가족이 모두 여행을 하는 일도 있는 휴가 개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국내의 교통이나 관광지의 숙박 시설은 송크란 기간만 되면 포화 상태가 된다. 상점이나 사무실도 문을 닫기 때문에, 평일에 활기가 넘치는 곳도 한산하게 바뀌며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는 어김없이 물 축제가 벌어진다. 종교적으로는 각 사찰들의 불상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하며, 불상을 물로 씻고 먼지를 제거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자기 영혼의 청소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이 되면 불탑도 깨끗이 청소를 한다. 가족의 어른은 손에 물을 부어주고 정화를 하며, 상대에게 경의를 나타내는 행동도 하며, 집도 대청소를 하면서 한 해의 시작과 스스로를 다진다. 송크란이 동남아시아에서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에 행해지기 때문에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물을 뿌려 더위를 날려버리는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이 축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까지 물을 뿌리며 서로 즐긴다. 이 경우 특히 물을 끼얹는 곳은 손에만 한정하지 않고 온 몸에 끼얹는 경우도 많다. 물을 끼얹는 행위 자체는 그 뜻을 헤아려 본다면 '경의를 표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승려에게 물을 끼얹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난다 하여 이를 금기시 하고 있다. 이러한 물을 뿌리는 행위에는 물총 등도 사용된다. 집 앞에서는 물을 담은 물통을 두고, 또는 집 앞까지 호스를 연장하여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거나 픽업 트럭에 물통을 싣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뿌리며 즐긴다. 방콕 등 전국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북부의 고도 치앙마이는 가장 화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편이다. 송크란 기간 중에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 취해 음주 상태로 차나 오토바이 등을 운전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주행 중인 차나 오토바이에 물을 뿌려 종종 사고가 일어난다. 때문에 태국에서 1년 중 사고가 가장 많은 날은 송크란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물로 인한 어떠한 피해를 입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에 대해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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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시위와 아웅산 수지의 실패
    미얀마는 현재 쿠데타와 민주화 시위로 내흥을 겪고 있다. 모두가 미얀마 민주화의 성공을 빌고 있으며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끝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미얀마의 상황을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들어보고 숙고한 결과 한 가지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의문은 만약에 민주화가 성공하여 군부가 타도되면 과연 미얀마를 책임질 지도자는 누구이며 향후 미래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이다. 나의 결론은 결국 그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 경험이 전무하거나 국정을 이끌 능력이 어떤지에 대해 검증이 안됐다거나, 혹은 제3세력에 의해 점거되어 또다른 독재의 길로 들어설 확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차후의 지도자로 아웅산 수지를 언급하곤 한다. 수지는 15년간의 가택연금을 포함해 21년간 정치적 억압을 받던 수지가 정치에 참여해 최고직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수지는 2011년 12월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지난해 봄 최고 실권자 자리에 올랐다. 수지의 정치 참여는 군부와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지는 정치를 하는 대가로 군부와의 권력을 분할을 허용한다는 미얀마의 군부 시대에 제정된 헌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 조건을 수락한 결과 군부는 의회 의석 4분의 1을 지니고, 국방과 치안, 국경 업무에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정부에서 군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군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수지는 힘이 없고, 실질적인 권한은 군부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수지가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수지는 군부가 핵심이 되는 이러한 헌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지를 굴복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와도 맞았고 무엇보다 군인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민주화의 상징인 수지가 통수권자 되었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 입장에서는 G2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얀마가 필요했다. 미얀마를 통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은 중국은 인도를 비롯한 서방에 중대한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을 보내 수지를 압박했다. 그러나 수지는 이러한 미국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였다. 작년 1월 시진핑 주석이 미얀마를 방문하여 수지와 만나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항이 중국의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중국과 손을 잡은 수지의 패착이었다. 게다가 로힝야 족 학살과 탄압을 방관하는 등 철저히 서방 세계와 담을 쌓아왔다. 가장 큰 문제는 미얀마 군부의 최고 사령관인 민아웅 훌라잉이 작년 7월 15일 시진핑과의 회담을 통해 송유관 설치에 대한 전권을 이양받고 중국 자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에서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미얀마 군부가 일대일로 구축에 찬성하고 이에 대한 전권을 받아들이면서 착복한 부정행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부패한 군부의 행보를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국 정부가 로힝야의 폭력사태만 비난하고 군부의 쿠데타와 민주화 시위 탄압을 방관, 방조하는 이유 또한 일대일로의 완성과 수호에 있다. 어쩌면 수지는 군부와 중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손에 조정당하는 마리오네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수지에게서 정치적 역량과 지도력을 아예 기대하기 힘들다. 서방 세계와 등지고 중국을 끌어들여 균형외교에 실패했으며 군부 독재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을 위해 어떠한 정책을 실현했는지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단지 잘한건 그동안 폐쇄적인 미얀마를 개방한 것 하나인데 개방 이후의 정책은 군부 독재 시절의 정책과 크게 다를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지의 정치 지도력과 리더십에 의문을 갖고 있다. 그녀는 성공한 지도자인가 실패한 지도자인가? 나는 실패한 지도자로 본다. 군부 때문에, 주변을 둘러싼 강대국들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과정을 겪어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들을 이겨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정말 수지가 확고한 지도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이러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 그게 정치, 외교적인 능력의 잣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민주화의 상징이고 군부 독재와 맞서 투쟁한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민주화 항쟁과 정치 행정 능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은 민주화가 성공하더러도 누가 차기 지도자로 부상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없다면 민주화 이전보다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군부가 재집권하거나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화의 봄을 맞이했지만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얀마는 민주화의 봄을 맞이할 대안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대안 없는 항쟁은 단순한 분노와 불만 표출에 불과할 뿐이고 더 큰 불행을 초래 할 수 있다. 대안이 없는 항쟁에 대한 대가는 우리의 현대사가 이미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미얀마 민주화 운동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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