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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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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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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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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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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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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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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원한을 넘어서
    어제 손자 유아원 하원 시키기 위해 차를 운전했다. 오후 5시 40분까지 유아원에 도착해야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할 때 악운이 겹치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운전 도중에 직진과 우회전이 동시에 가능한 차선에서 앞차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 차선은 대부분 우회전하는 차들이 이용하는 차선이었지만, 그 차는 직진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차량 바로 뒤에 내가 있었다. 당연히 나를 비롯한 여러 차들이 우회전을 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그 차 때문인지, 그 차의 앞에 또 다른 차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횡단보도에 보행 신호등이 켜져서 나는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서 내 차에서 내려서 앞을 살펴보았다. 그 차 앞에는 텅 비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허무한 감성이 솟아올랐다. “그 차만 옆 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해 주었다면, 나를 비롯하여 뒤차들이 우회전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 앞 차량의 운전석을 노크했다. 서서히 내려가는 운전석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운전자는 젊은 여성이었다. 나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채 차분히 나의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그 여성분도 당당하게 말했다. “직진과 우회전이 동시에 가능한 차선이기에 나는 직진을 하기 위해 이 차선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예! 그러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는 내 차로 돌아섰다. 그 짧은 대화는 어떤 감정의 분출도 아니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옆 차선에 있던 어떤 차량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더니 젊어 보이는 운전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운전 중에 운전석에서 내려서 앞 차량에 가서 항의하면, 고발 대상이 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교통법규도 있습니까?” “예! 앞 차량 운전자가 선생님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다고 판단하여 선생님을 고발하면, 선생님은 고발 대상이 됩니다.” “그렇군요. 그런 법규도 있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 젊은이가 어떤 마음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의적인 감정에서 말을 걸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벌어졌던 사건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관계중심적이 세계관을 존중한다. 하지만, 도로에서 벌어진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태도는 관계 중심이기보다 지극히 개인 중심적인 태도였다. 나만의 생각이 앞섰던 것이었다. 나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했던 것이었다. “왜 저 운전자는 자신의 권리만을 앞세울까? 왜 뒤차들의 운행을 배려하지 않았을까?” 지극히 나 위주의 생각이었다. 앞차 운전자의 생각을 내가 어찌 알 수는 있겠는가?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성 운전자는 운전이 서툴러서 차선변경이 어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여성 운전자는 “내 생각만 소중하다”라는 아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판단중지를 해야 했는데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라는 원한의 감정이 내 사고를 지배했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도덕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는 이러한 우화가 등장한다. “어린 양들이 커다란 맹금을 싫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커다란 맹금이 어린 양을 채어 가는 것을 비난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어린 양들은 자기들끼리 맹금은 악하고 자신들은 선하다고 말한다. 사실 맹금은 자신을 본능에 따라 어린 양을 채어 갈 뿐이다. 맹금의 행동에는 어떠한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강한 것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은 약한 것에 대해서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원한과 복수심에서 비롯된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한다. 나의 행동도 어린 양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는 전제를 두고 있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큰 병인지도 모른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병이다. 이러한 생각이 깊이질 때 문화적 제국주의를 초래한다. 반대로 그 여성 운전자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나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껴 나를 고발하였다고 해도 그 운전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의 행동이나 나의 행동에는 차이가 없었다. 두 행동 모두에게 “나는 옳고 너는 바쁘다”라는 원한과 복수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니체는 타인에 대한 동정, 배려 등을 부정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자기 긍정이었다.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 중에는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있다. “고귀한 인간도 역시 불행한 자를 돕기도 하지만, 그것은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넘쳐흐르는 힘이 낳은 충동 때문이다.” 자기 긍정에서 나오는 모든 죄와 벌의 사라짐이 니체가 꿈꾸는 세상이다. 우리 사회는 고소고발이 넘치는 사회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원한과 복수심이 넘쳐흐르는 노예의 도덕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어제의 일로 고발당하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에도 공익제보라는 명목으로 고발당하여 9만원 벌금을 냈었다. 고발이 난무한다고 해서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병든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는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는 잘못된 전제를 앞세운 노예의 도덕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능동적인 힘이 작용하는 사회가 아니고, 반응적인 힘만 작용하는 사회이다. 능동적인 힘은 자신이 주인이 되는 힘이지만, 반응적인 힘은 노예의 정신으로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니체가 강조한 것은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삶이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삶이라고 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나의 반성을 마무리한다. “복수로부터의 인간의 구제. 이것이 내게는 최고 희망에 이르는 교량이자 오랜 폭풍우 뒤에 뜨는 무지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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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9
  • 잘 알려지지 않은 발트 3국의 독립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
    소련은 1939년 나치 독일과 비밀리에 불가침 협약을 맺고, 발트해 연안 독립국가들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진입하여 1940년 연방 산하의 새로운 공화국들로 흡수했다.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해 나눠 가졌다. 이후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독일은 발트 3국을 장악했다. 당시 나치 치하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희생자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하지만 1944년 소련이 다시 발트 지역을 지배했을 때에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소련은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발트 해 연안에서 수십만 명을 강제수용소나 시베리아의 집단 농장,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다. 그로부터 44년 동안 소련에서 각기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소비에트 최고 회의를 중심으로 통제했다. 그로부터 1988년 5월 14일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 앞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에스토니아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노래가 다수 연주되었다. 페스티벌에 참가한 에스토니아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6월에 탈린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축제에 모인 사람들이 탈린 시내에서 자발적으로 이러한 노래들을 불렀다. 1991년 8월 20일에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에 집결했는데, 수도 탈린에 전체 에스토니아 인구의 1/5 이상인 30만 명 가까운 수가 모였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수많은 뮤직 페스티벌이 있는데, 9월에는 이러한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에스토니아 독립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노래 혁명이라 불린다. 이는 소련 치하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1986년부터 1991년에 걸쳐 소련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어간 일련의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일컫는 말이다. 독립의 주요 계기가 된 1988년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laulupidu)에서 차용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사유디스(Sąjūdis)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 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공산당 간부들을 전부 사퇴시키고 1988년 11월에 리투아니아 국기와 국가를 합법화시켰다. 이들은 더 나아가 리투아니아어를 리투아니아 유일의 국어로 선포하고 각종 국가 상징들을 발트 3국 점령 이전 시절로 되돌려 나갔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소련의 해체와 연관성이 깊지만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다른 소련 내 구성국에 비해 독립 열기가 강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다른 구성국들이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한 반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소련이 존속했던 1990년부터 이미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해체 직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각 국가들에서 수많은 독립 요구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발트 3국 민족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가장 빠르게 민족주의자들이 진출한 에스토니아 소비에트는 1988년 11월에 주권 선언을 발표해 점진적으로 소련에서 독립해나가려 했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1990년부터 민족주의자들이 현지 소비에트에 진출해 소련으로부터 독립해나가는 절차를 밟았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는 3국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5월 4일에는 라트비아, 5월 8일에는 에스토니아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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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8
  • 2016년 터키 쿠데타 기도는 어떤 자들의 기획인가? - 下편
    전날 필자는 쿠데타의 명분과 실패의 이유에 대해 연재했다. 오늘은 쿠데타의 배후 세력, 그리고 귈렌과 귈렌주의자 및 미국과의 유착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쿠데타 종결 이후, 265명이 사망하고, 1,400명이 부상당했으며, 쿠데타에 가담하여 체포당한 군인은 2,839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사망자 265명 중, 180여 명은 시민군이었고 1,000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쿠데타의 무력은 정부군이 진압했지만 사실 민주주의를 해치는 쿠데타는 시민들의 손으로 제압한 것이다. 따라서 2017년부터 매년 7월 15일은 터키 민주주의 수호의 날,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쿠데타를 시민들 스스로 막으며 민주주의를 수호한 날이기에 터키 시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컸다 할 수 있겠다. 사실 쿠데타의 주역인 장군 및 제독 34명 중 체포된 인물은 약 20명에 달했다. 잡히지 않은 14명은 해외로 도주했는데 그 중에서 8명은 이웃인 그리스로 도주했다. 그래서 메블류트 차뷰 터키 외무장관이 그리스 정부에게 가능한 빨리 반역자 8명을 터키로 넘겨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들 반역자들은 사태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터키 국경과 가까운 그리스 북부 알렉산드루폴리스 공항에 착륙했으며 불법 입국 혐의로 그리스 경찰에 체포된 뒤 그리스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리스 입장에서는 이들에게 냉담했다. 전 세계가 터키의 쿠데타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인 터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리스야 터키와 관계가 좋지 않지만 터키하고의 충돌은 그리스 입장에서도 부담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 또한, IMF 구제 금융 신청 등으로 인해 국내 상태가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결국 그리스 측에서는 이들의 망명을 기각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터키로 송환되었고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갇혔다. 그러면 나머지 6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들 6명이 미국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 측에 이들에 대한 송환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송환을 거부했고 더구나 이들이 미국에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같은 에르도안의 요구와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 그리고 쿠데타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의혹을 가진 것에는 에르도안의 외교 행보에 있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발생하면서 중동 내에 수많이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살해되고 장기 정권이 종식되면서 각 국가 정권이 붕괴되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과 집단서방이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은 2011년에 터키 내에서도 색깔 혁명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의 주도 세력은 바로 귈렌 운동(Gülen Hareketleri)을 이끌고 있는 정치세력이었다. 귈렌 운동(Gülen Hareketleri)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무함마드 페툴라흐 귈렌(Muhammed Fethullah Gülen)이라는 인물로 터키 동부의 에르주룸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슬림 이맘 출신으로 처음 활동할 때부터 일관되게 케말 아타튀르크 이후 터키 정부가 헌법으로 주창하고 있는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특히 그는 학교 수가 적은 농촌과 개발 수준이 낮은 아나톨리아 동부 및 내륙지방에 저렴한 사립학교와 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슬람에서 비교적 온건한 이슬람화를 주장한 사이드 누르시(Said Nursî)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페툴라흐 귈렌을 추종하는 이들은 귈렌과 함께 사이드 누르시의 사진을 함께 걸어두거나 부착하기도 하는데 그는 귈렌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나 마찬가지였고 귈렌주의의 골자는 누르시 온건파 사상의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귈렌주의의 핵심은 종교 간의 대화와 신앙할 수 있는 양심의 추구를 주장하는 편이다. 따라서 귈렌 운동은 카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불교, 시아파 이슬람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와의 공존과 협력을 추구했고 와하비즘과 같은 강압적인 세속주의를 반대하고 양심적으로 종교를 믿을 것을 주장헸다. 그러나 그러한 성향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였다. 쿠르드족과 친분이 있으며 이들과 대놓고 교류했다. 한 때 에르도안 대통령과 함께 현재 터키의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이끌던 사이였고 친밀한 관계였지만 에르도안의 사생활과 비리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나 터키 정계에서 볼 때, 둘의 연정은 서로 간에 주장하는 것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가 많았고 2011년 아랍의 봄 사태 때 시민 혁명을 지지하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집단서방이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 역설하면서 에르도안과 벌어지게 된다. 그 덕택에 그는 미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해 오바마를 만났고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이 발생하면서 대놓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다. 이는 당시 터키 대선에서 새로이 대통령에 당선된 에르도안의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이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게 되자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를 제재했지만 에르도안은 미국 및 집단서방의 제재를 따르지 않고 러시아와 교역했다. 이에 에르도안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과 집단서방이 지원하고 있는 쿠르드족을 기습하고 IS와도 전투를 벌였다. 당시 귈렌은 미국에서 쿠르드족 대표와 만났고 PKK의 대표인 압둘라 외잘란과 상당수의 서신도 주고 받았다. 당시에 추정하기로는 귈렌과 쿠르드족, 그간 있었던 쿠르드족의 터키 각 지역에서의 대한 테러 공격, 그리고 IS의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의 테러 등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이들과 귈렌의 사이에 모종의 음모가 있지 않느냐 등의 의혹이 불거지게 된다. 물론 귈렌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후, 귈렌은 아예 터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으면서 반에르도안, 반케말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미국에 수많은 귈렌주의자들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반러주의자이다. 주 터키 러시아 대사 안드레이 겐나디예비치 카를로프(Андрéй Геннáдьевич Карлов)는 2016년 12월 19일 밤, 앙카라의 현대 미술 센터에서 주최한 예술 전시회에 참석했다가 경찰관인 메블뤼트 메르트 알튼타쉬(Mevlüt Mert Altıntaş)에게 암살당했다. 알튼타쉬는 1994년생으로 디야르바크르에서 2년 반 동안 경찰에서 근무하던 현직 경찰로 쿠르드족이다. 그는 대표적인 귈렌주의자로 그 해 7월, 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 때는 의도적으로 휴가를 제출함으로써 귈렌과 쿠데타 미수의 연관성을 상기시켰다. 이는 그가 그 때에 맞춰 일부로 휴가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가 귈렌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귈렌주의자들을 공식적인 테러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귈렌주의의 모든 운동과 활동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거 아니냐는 의혹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터키 주재 러시아 대사 암살사건은 푸틴과 에르도안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터키 경찰은 귈렌의 잔당을 체포하는 데 주력했고 12월 21일에 이즈미르에서 귈렌 측의 자금책 혐의로 악야카 중고등교육 종교재단(Akyaka Orta ve Yüksek Eğitim Vakfı)을 수색해 7명을 체포했는데 이 중에는 이 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된 쉴레이만 에르겐의 형제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쿠데타가 종결된 이후였기에 수사의 속도를 더 냈다. 귈렌 연계 단체라는 이유만으로 수천 개 기관이 폐쇄되고, 귈렌 동조자로 분류된 공공부문 직원 70,000명은 실직자가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26,000명이 구금되었다. 이에 대해 TRT에서는 귈렌주의자들은 정부기관에 침투해 점점 세를 불리고, 결국에는 조직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고 주장했으며 정당이나 선거로는 권력을 쥘 수 없으니 비밀조직으로 기관을 장악하려는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이들은 보안유지를 위해 '바이록'이라는 메신저 어플로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바이록은 보안성이 취약해 쿠데타 시도 전부터 터키 당국은 이 앱을 통해 귈렌주의 조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텔레그램으로 죄다 옮겨간 상태라 최근에 이들을 잡는 것 또한 녹록치 않다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쿠데타 배후에 또 다른 의외의 인물이 지목되었다. 그는 미국 총영사관 소속 터키인 직원인 메틴 토푸즈(Metin Tofuz)였다. 토푸즈는 총영사관 통역관 겸 미국 마약단속국(DEA) 업무 보조로 근무했으며, 페토(FETO)라 불리는 귈렌의 테러조직과 연계해 쿠데타를 시도한 검찰, 경찰 수사관들과 수시로 접촉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하고 징역 8년을 선고했다. 토푸즈는 마약단속국 업무의 하나로 터키 내 경찰, 세관 관계자와 접촉했을 뿐 이들이 범죄에 연루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귈렌운동을 했던 이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더불어 미국이 뒤를 봐주고 있는 페툴라흐 귈렌, 그리고 미국 대사관에 귈렌운동의 이력 등으로 볼 때, 그가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귈렌주의자와 쿠데타 가담자 등 대부분은 종신을 언도받았으며 범죄인 인도 형식으로 미국 정부에 귈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국 측은 "증거가 없다면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결국 이 쿠데타 미수 사건은 귈렌주의자들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합작품으로 평소 에르도안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군인들을 선동해 일어난 사건으로 마무리 지어졌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귈렌주의자들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합작품들이 터키 내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쿠데타 미수 사건은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음이 분명한듯 싶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터키의 국민 대다수는 귈렌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도전이자 터키 국가와 국민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실제로 쿠르드와 IS를 움직여 터키를 테러했다. 그리고 귈렌주의자들은 이제 터키 내에서 설자리를 잃어 스스로롤 귈렌주의자라 밝히지 않고 있다. 귈렌주의가 정당하다면 터키 내에서 이를 항변할 수 있을 것이고 집회도 열면서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럼에도 이들을 탄압한다면 전 세계에서는 터키 정부가 문제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은 터키 내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터키 정부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한 미국이나 유럽에서 그러한 운동을 대놓고 하고 있다. 이 또한 미국과 집단 서방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들이다. 귈렌이 떳떳하다면 미국 수사기관에 신변 확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터키에 와서 재판을 받아 증거를 제시하면 무죄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하지 않는가? 그러니 의혹만 커지고 음모론이 난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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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8
  • 일본의 대만 지배기 이야기
    대만은 지금이야 한족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살고 있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중화권에선 큰 관심을 주지 않던 사실상 불모지였다. 대만 섬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대만은 원래 한족이 아닌 대만 원주민들이 중세까지 살던 섬으로, 한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온건 명청 교체기 시기 정성공 때가 거의 최초였다. 물론 직전엔 스페인, 네덜란드 서구 세력의 지배도 잠깐 받았고, 이후 청나라의 지배도 받았지만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대만을 넘겨주면서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여년의 대만일치시기가 도래한다. 이후 대만은 일제 총독부 아래 근대화가 이뤄졌고 역사에서 보듯 애초 독립국이라는 인식이 희박했던 대만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거부감도 타 국가들 대비 덜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다는거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만 민주국이나 타파니 사건(1915년), 우서 사건(1930년) 등 이시기에도 대만독립운동이나 항일 저항은 꾸준히 있었다. 이에 따른 일제의 대만인 학살과 탄압이 존재했다. 통치 초기 첫 5년 동안에 사형된 대만 주민만 3천여 명이었는데, 이는 약탈, 살인은 물론 건물이나 표지를 손상한 자 또는 미수에 그친 사람이라도 범죄자는 사형이라는 악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처음부터 저항하는 세력은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타파니 사건 당시 수백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우서 사건 당시 저항 운동의 중심에 있던 대만 원주민 시디그 족은 일제에 학살당해 2012년 기준으로도 대만에서 겨우 8천 명 정도만 존속되어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일본은 지금도 싫어한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대만도 일제에 의해 징병, 수탈을 당하는데, 이 와중에도 친일 세력은 있었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에게 현지인들 중 일부는 따라가길 요청했다고 한다. 물론 직후 장개석이 들어오자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는 말이 대만에서 유행했다는걸 보면 당시에도 일본이 떠나고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양면적인 시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군인 총독이 주도하는 억압적인 통치를 주로 행한 조선과는 다르게 민간 출신 각료가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통치를 했기 때문에 대만은 일본에 대해 대체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대만과 조선의 역사적 맥락에서 타국의 식민지 지배가 갖는 의미의 차이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만을 중국의 일부가 아닌 별개로 놓고 본다면 대만 섬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전엔 원주민 부족 국가 수준이었고, 유럽인들 중에선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해 1600년대 가서야 네덜란드인들과 스페인인들의 치하에 놓였다.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로서 세운 정씨 왕국이 단명한 이후로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 청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후에 일제가 오고, 그 다음에는 국민정부 때 본토에서 외성인이라는 자들이 건너온 것이다. 즉, 본성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은 수많은 지배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제외하면 외세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대만 입장에서는 일제 시절 역시 그동안 겪어온 식민지 시절 중 하나였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비교 대상이 그동안 거의 없었다보니 최악의 식민을 당한 역사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하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실력양성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 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GHQ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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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7
  • 2016년 터키 쿠데타 기도는 어떤 자들의 기획인가? - 上편
    2016년 터키 쿠데타 기도에 대해서는 上편 - <쿠데타의 명분과 실패의 이유>, 下편 - <어떤 자들의 기획인가?> 두 개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전날인 15일에는 필자가 겪은 2016년 7월 15일 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당일 현지에서 통신한 속보와 각종 자료들을 기초하여 쿠데타 미수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번 칼럼에는 2016년 터키 쿠데타의 원인과 누가 한 짓인지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당시 쿠데타를 기획했던 자들이 주장하는 주요 명분으로는 현 정부의 아이에스에 대한 대(對) 테러 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과도한 쿠르드족에 대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병사의 인력 손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내걸고 이번 쿠데타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은 물론 군부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국제 사회마저 현 정부의 편을 들어 쿠데타를 비난했다. 당시 터키 국민들은 과거부터 이어온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에르도안이 총리가 되었을 당시, 대통령의 군권 장악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대통령이 군권을 장악했고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군부의 정치권에 대한 목소리가 약화되고 있던 것에 대한 불만으로도 보았다. 게다가 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대령급 소장파 장교들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체 군부가 이들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기에 전체적인 동의를 받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당시 이같은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을 두고 공통적으로 무하렘 코제(Muharem Koze) 대령을 지목했다. 다수의 영관급 장교들도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앞서 언급한 "현 정부의 아이에스에 대한 대(對) 테러 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과도한 쿠르드족에 대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병사의 인력 손실에 대한 불만"은 그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에르도안의 독재의 문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하는 이른바 '세속주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정치적인 사안이지 일개 몇몇 군부의 인사들이 쿠데타의 이유로 나서야 하는 명분에 적합치 않다. 에르도안의 독재 문제의 경우, 에르도안이 국민들을 폭압적으로 탄압한 것도 아니고 대다수의 터키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한 것도 아니다. 보통 그러한 억압이 생겼을 경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상을 바로잡자는 명분을 세울 수 있는데 에르도안의 체제 하에서 이러힌 억압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것이 터키 국민들이 당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다. 군대는 대통령 직속 하의 조직이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에르도안의 주장을 2000년대 초에 상당수 국민들이 지지했었다. 이전에 잦은 군부 쿠데타로 인해 터키가 혼란에 빠졌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주장과 조치는 터키 국내의 안정을 불러왔다. 그리고 실제로 에르도안의 집권 후, 2016년 군부 쿠테다 미수를 제외하고는 쿠데타가 없었고 터키 국내의 사회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에르도안 세속주의를 지키지 않는 것 또한 군부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낼 수 있지만 군사적인 행동으로까지의 연결은 분명히 선을 넘는 것이다. 대통령이 세속주의를 지켰던, 그렇지 않았던, 에르도안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만약, 에르도안이 세속주의를 어기고 종교 권위주의로 간다고 한다면 국민들부터 그에 대한 반감으로 시위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국민들보다 먼저 군이 나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를 구할 수 없는 명분이다. 그 또한 터키 국민들이 당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이다. 국민들은 에르도안의 세속주의를 따르지 않는 정치보다 "군부독재"를 더 두려워 했던 것이다. 더불어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반군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변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앞서 게재한 칼럼에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가를 위해 대통령궁을 비운 사실은 몇몇 측근만 알고 있을 뿐, 대다수는 몰랐다."고 적시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에르도안이 대통령궁을 비우고 있었던 사실은 몇몇 측근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때문에 케말주의자와 귈렌주의 이슬람 세력을 정치적으로 타도하기 위한 정적 제거로 에르도안의 조작극이라는 음모론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키 내에서 크게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 반군은 수도인 앙카라와 최대도시인 이스탄불의 장악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당시 인구 8,000만의 터키의 민심은 이스탄불과 앙카라가 가장 컸지만 그렇다고 다른 지역의 동의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은 반군이 간과한 부분이기도 했다. 특히 이즈미르 인근 마르마리스(Marmaris)에서 휴가 중이던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던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바로 비행기에 올라타서 이스탄불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반란군의 공격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양지를 떠난 직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통령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반군들의 실수였다. 사실 반군들이 가지고 있던 F-16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를 찾아내어 2대의 호위기만 있는 상태에서 격추하여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군의 조종사들과 주동자인 무하렘 코제(Muharem Koze) 대령조차도 이를 주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그냥 보내준 것은 그에 대한 생포가 목적이었지 살해가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원수를 살해하면 정국이 혼돈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생포와 달리 암살은 잠재적인 지지자들까지 반기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국민들은 물론, 터키군 내부에서도 군 수뇌부들은 일부 소수 부대를 이끌고 일으킨 쿠데타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이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쿠데타에 맞서 반 쿠데타 시위를 벌였고, 터키 야당들도 이 쿠데타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쿠데타를 반대한 터키 군인들은 기존의 명령 체계를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자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으며 시민들의 소규모 단위로 민병대들을 조직하여 개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총들을 들고 반군에 저항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많았던 이유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Face Time을 통해 몇몇 언론과 차례대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불법으로 일으킨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며 반군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정상적인 지휘 계통으로 군에게 쿠데타 진압을 명령했다. 민과 군의 합동 전략은 소규모 약 3,000명에 불과한 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통신기술과 미디어의 발달도 쿠데타 실패에 큰 역할을 했다. 만약 통신기술과 SNS, 등의 미디어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면 에르도안 대통령과 터키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송국이 장악당했고 인터넷이 끊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NS를 비롯한 통신기술의 발달, 그리고 다른 나라 서버를 우회하여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은 쿠데타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그로 인해 방송국 몇 곳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시민들의 귀를 막고 수뇌부에 혼선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반군 규모 또한 장군 및 제독 34명, 군인 및 군사학교 사관생도들을 모두 합쳐 대략 3,000여 명 정도로 쿠데타에 동원한 병력이 한반도의 9배나 되는 큰 면적의 영토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는 것은 오히려 실패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사관생도와 장군, 제독, 장교들을 제외하고 일개 병사들의 총 병력은 1,000명 미만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력으로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주요 거점을 모두 확보하려다보니 상당한 무리가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정부군과 경찰들은 반군보다 숫자에서 우세에 있었고 게다가 시민들이 조직한 민병대들에 대한 대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교전을 벌이다가 시민들에게 밀려 항복하는 사태까지도 벌어졌는 특히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에서 민병대와 대처하던 반군은 탁심에서 처포위되자마자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게다가 반군은 징집병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쿠데타 지도부와는 달리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가 부족했으며 특히 민병대와의 전투에서 사기 저하와 전투력 감소로 이어져 경찰과 시민들이 진압을 시도하자 그대로 무너졌다. 터키 쿠데타가 5시간 전, 이미 터키의 정보당국인 MIT에 의해 이미 파악되었다는 정보가 나왔다. 터키군 참모본부가 쿠데타 5시간 전 이미 MIT으로부터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했으며 이에 참모본부는 터키군에게 장비 이동에 대한 금지 명령과 기지 폐쇄 명령을 내렸다. 이에 쿠데타 세력은 예정을 앞당겨 급하게 행동에 나섰기 때문에 그 어떤 명분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쿠데타에 가담한 장성급이 100명이 넘는 데도 쿠데타 당일 병력이 크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인데 한 가지 의문점은 이 같은 내용이 에르도안에게 즉각 전달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에르도안의 대책을 강구하여 지시사항을 했었는지도 의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는 쿠데타 이후에 이루어졌었고 이러한 내용들이 MIT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빠른 보고가 이루어져 에르도안의 지시가 있었다면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전에 범인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난지 1시간 후에 대통령에게 알려져 제압을 명령했다는 것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는데 이러한 대처 방법 등등, "쿠데타 에르도안 조작극"이라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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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7
  • 2년 전, 천연가스 수입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는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준 슬로바키아
    현재 천연가스 수입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는 러시아의 요구에 대해 유럽 각국이 반발하는 가운데 EU 회원국인 슬로바키아가 루블화로 결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3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리하르트 술리크(Richard Sulik) 슬로바키아 경제장관은 이날 국영 TV 토론에 출연하여 러시아에 대한 EU의 대응및 제재를 지지하지만 슬로바키아는 러시아 천연가스 없이는 경제적으로 버텨내기 어렵다고 밝혔다. 술리크 장관은 85%에 달하는 자국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지적하면서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필요하다면 루블화를 지불하고서라도 천연가스를 들여와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5월 20일인 다음 천연가스 수입대금 지급일까지는 아직 6주의 시간이 남아있다고 언급하며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술리크 장관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EU의 대응을 여전히 지지하며 EU와 공동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지만 EU의 대응 중 러시아의 자원 봉쇄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응하여 지난달 31일 자국의 천연가스를 루블화로 결제하라는 대통령령에 서명했지만, EU 집행위원회는 계약 위반이자 협박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경제력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서유럽은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1991년부터 민주화가 되어 기본 경제력이 취약한 동유럽은 에너지 수급 문제에 대해서는 서유럽만큼 버틸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 이미 동유럽 국가 중 헝가리, 슬로바키아에 이어 라트비아마저 러시아산 가스 수입시 필요하다면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할 수 있다고 밝힘에 따라 기본 경제력이 취약한 동유럽 나토 국가들에게서 제재의 구멍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슬로바키아의 에두아르드 헤거(Eduard Heger) 총리는 명확한 대안을 찾기 전까지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할 것이며, 천연가스 수입 다변화를 원하지만 당장 시행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리고 슬로바키아는 그 대안을 찾기까지 최소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하였는데 수년이 아니라 수십년이 흘러도 러시아 천연가스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EU 집행 위원회는 러시아산 가스 수입 계약 체결 당시 달러나 유로화로 지불하도록 규정했다면, 이에 따라야 한다고 밝히면서 루블화를 지불하더라도 러시아산 가스를 구입하겠다는 국가들을 설득했지만 EU조차도 이에 뾰족한 대응책이 없다보니 이미 루블화로 지불해서라도 러시아 가스를 사용하겠다는 나라들에 대한 설득이 어려운 실정이다. 참고로 슬로바키아는 가스 수요의 85%를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에두아르드 헤거(Eduard Heger) 총리는 3월 말 유로화로 마지막 가스 지불이 이루어졌고, 다음 결제일은 5월 20일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EU의 러시아 자원 제재와 더불어 새로운 대안을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가스 수요가 증가하는 겨울이 이미 지나고 있지만, 산업계에서는 여전히 많은 양의 가스가 필요하며 가정에 공급되는 에너지 가격의 상승이 우려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언급하게 된다. 에두아르드 헤거(Eduard Heger) 총리의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해 평소 반러적인 행보를 걸어온 슬로바키아의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기도 하였지만 슬로바키아의 자원 부족은 현실이며 장기간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양을 의지해왔기 때문에 올 여름은 어렵게 버틸 수 있지만 9월이 지났을 때, 과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조되어 있는 반러 정서를 고려해서인지 헤거 총리는 러시아의 가스 대금 루블화 결제 요구에 맞서 EU와 함께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며, 러시아가 유로화로 결제하기로 한 계약 조건을 존중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는 말 뿐이었다. 안드레이 스탄치크(Andrej Stancik) 국회의원은 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로 비판을 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성명을 낸 것은 부적절한 일이고, 러시아 지역 언론들이 술리크 장관의 말과 헤거 총리의 말을 인용하기 시작하여 프로파간다를 날리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러면서 영국과 대화를 시작해 북해에서 송출되는 석유와 가스를 연결하여 수입하자는 대안을 내세웠지만 북해 유전에서 채굴되는 원유와 가스는 현재 영국이 독점하여 사용하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다. 노르웨이와 영국의 공식 소식통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 이상이 추출되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경우 노르웨이 북해에서만 290억 배럴의 석유를 공급하고 있으며, 이 중 2778만 입방미터, 약 60%가 2007년 1월 이전에 이미 생산되었다. 영국 소식통들은 다양한 매장량 추정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최대 추정치를 사용하더라도 2010년 말 현재 76%가 회수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결국 슬로바키아는 뚜렷한 에너지 대란에 대한 대안은 없는 셈이다. 이는 과거 로베르트 피초(Robert Fico) 총리는 2015년 5월 러시아 전승 70주년 기념식과 6월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원유 및 가스의 9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현재까지 러시아산 가스와 원유로 국가 경제를 지탱해왔다. 과거 미쿨라시 쥬린다(Mikulasi Dzurinda) 총리 시절처럼 친서방 일변도적인 기조보다는 서방 국가와 러시아 간의 균형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대러 제재 때 EU에 가입해 있어 이를 지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부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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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6
  • 감정적인 배설(Emotional excreted)과 사회 모든 열등의식(Inferiority complex)의 집약화(Epitomization)
    해외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한국에서 보는 최대의 고충은 극과 극의 반응들이다. 특히 현재 상황에서 사람들은 극한 반응들을 쏟아내는데 일종의 말 그대로 감정적인 배설(Emotional excreted)이다. 인터넷 발달과 익명성을 보장하는 여러 사이트들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감정적인 격한 반응들을 쏟아내는데 이게 펜데믹 시기와 그 이전에도 수도 없이 자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하면 악플이고 그러다가 해당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살을 하거나 하면 "뭐 그런걸로 죽나?", "그 사람이 공인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공인이 되지 말지 그랬어?", "나는 다들 비난하기에 그냥 따라한 것 뿐이다." 이런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일종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인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순응했을 뿐이라며 당신 같으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변론등은 오랜 기간 화재로 남았다. 이에 한나 아렌트가 저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멕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감정적인 배설(Emotional excreted)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겉으로 어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분노가 쌓여 넷상으로 표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분노가 넷상으로 표출하는데 그 대상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등의 동기가 있는 갓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감정을 뱉어낸 것 뿐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지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며 깨닫지 못하는 몬스터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결국 감정적인 배설을 하는 자들의 속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불만을 넷상으로 상대에게 표출하며 그로 인한 쾌감을 얻는 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근거가 명확한 논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하고 있는 분풀이, 그 행동이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그 행동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주의와 집단주의로 변모해가며 "내 편이 아니면 적" 이 되는 사회적 양극화(Social polarization)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가 된다. 그 분노는 해외에 나가있거나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자신은 이렇게 음지에서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해외에도 나가고 그러면서 잘 살고 있고 뭔데? 라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토양의 기본적인 것은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을 타인과 비교하여 마주할 때" 나타난다. 인터넷은 마음만 먹으면 익명성을 보장하여 만들 수 있고 어떤 말을 나열하든 그것을 검열을 잘 안하는게 한국이다. 옛날 군사정권 때였으면 문제가 되었을 언사도 지금은 자유롭게 나돌고 있다. 모두 인터넷을 사용하여 각자가 가진 불만을 토로하다보니 그 사이에서도 공감하는 자들이 생기고 그러면서 사이버 집단화(Cyber collectivization)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회 모든 열등의식(Inferiority complex)이 집단화가 되다보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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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6
  • 2016년 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의 재구성
    매년 7월 15일은 터키의 공휴일이다. 터키의 공휴일은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국민공휴일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공휴일이다. 무슬림이 90%가 넘는 터키에서는 종교공휴일의 경우, 민족명절로 지내고 있다. 보통 국민공휴일은 8개로, 총 14일은 지내는데 비해 종교공휴일은 라마단 축일(Ramazan bayramı), 희생절(Kurban Bayramı)로 총 2주를 쇤다. 그러나 2017년부터 7월 15일을 터키 민주주의 수호 기념일(Demokrasi Bayramı)이라 부르며 7월에 없던 공휴일이 추가되어, 총 15일을 쇠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이 공휴일의 유래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사실 이 글을 쓴 필자도 쿠데타로 인해 앙카라에서 갇힐 뻔한 아찔한 사건이었다. 필자가 쿠데타 전날에 겪었던 것부터 이틀에 걸친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때는 2016년 7월 14일, 나는 앙카라에 있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앙카라 시외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마다 검문이 강화되고 일부 도로는 차단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통령인 에르도안은 마침 앙카라에 없었다.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것은 당시 대통령의 측근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후일, 이 쿠데타 미수 사건을 에르도안 대통령의 조작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미스테리한 부분이다. 그런데 14일 오후 4시부터 장갑차와 탱크, 전차들이 앙카라로 진입하는 도로들에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이 보고는 분명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미 2014년 유로마이단과 2009년 체첸에서 전쟁을 겪어본 필자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고 앙카라 대학 유목문화연구소에서 하제테페 대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수들과 회의를 한 결과, 일단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필자는 터키를 나가 상황을 보고 재입국하는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필자는 급히 조지아로 넘어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려 했지만 왠일인지 그날 따라 앙카라 국제공항에서 외국으로 넘어가는 비행기들은 모두 운항이 취소되어 있었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앙카라 오토가르(버스터미널)로 넘어가 버스를 타고 빠져 나가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앙카라에서 조지아 넘어가려면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그러나 버스 표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결국 15일 오전 10시 버스를 타고 앙카라를 탈출했다. 그러면서 학교 측과 계속 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쯤 트라브존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터넷이 차단당했다. 일찌기 터키에서 큰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터키 전역에서 인터넷이 끊긴 적은, 터키에서 인터넷이 도입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트라브존 오토가르 내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대테러요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오토가르 곳곳을 배회하는 것이 보였고 실탄 장착된 소총을 장착하고 오토가르 내 시민들 하나 하나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문을 받고 저녁 7시 50분이 되어서야 국경인 사르프(Sarp)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밤 9시 좀 넘어서 국경에 도착했고 조지아 국경으로 넘어갔다. 필자가 빠져 나간 이후, 정확히 20분 뒤, 사르프의 터키 국경이 폐쇄되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필자는 터키에서 그대로 갇혔을 것인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필자가 겪은 2016년 7월 15일 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이다. 여기에서부터는 당일 현지에서 통신한 속보와 각종 자료들을 기초하고자 한다. 당시 터키 내에서는 밤 9시 경, 앙카라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종의 시가전인데 남쪽 방향 쿠울루(Kuğulu) 공원은 정부군 14사단과 민병대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군인들끼리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서로 총격을 가했다. 반면 먼저 공격을 개시하던 21사단과 35사단이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다리 두 곳을 봉쇄하면서 흑해와 마르마라해 일대를 통제했다. 이것이 2일 천하로 알려진 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의 시작이다. 이어 다수의 장갑차와 전차들이 앙카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타튀르크의 묘인 아느트카비르와 디쉬카프(Dışkapı) 메트로 역 쪽으로 진입을 개시, 이 과정에서 경찰과 군인들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어 35사단은 국영방송국 TRT를 장악하고 터키로 송출되는 모든 방송을 속보로 돌리며 정부에 포고 다음과 같이 포고했다. ① 정부가 새로운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는 동시에 '평화의회'를 구성할 것 ② 평화의회의 구성원은 종교, 인종, 언어를 가리지 않고 선출할 것, 현재 즉시 계엄령을 발령할 것 ③ 터키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들을 인질로 잡고 있음 이같은 포고가 속보로 나간 뒤, 터키 내 송출되는 모든 방송, 라디오, 인터넷이 중단됐다. 한편 이스탄불에서는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의 모든 여객편이 결항 및 취소됐다. 경찰과 군부가 공항 근처서 총격전을 벌였고 결국 공항은 폐쇄됐다. 한편 앙카라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총격전과 폭발음 소리가 진동했다. 그리고 16일 자정에는 정부군의 반격으로 인해 반군이 장악한 TRT 방송국 일부를 폭파했다. 이 사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를 위해 국민들이 거리에 나서 반군에 대한 저항 시위를 호소했다. 그리고 이같은 반란은 군부의 소수 세력이 불법 행위를 시도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 내용은 Face Time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그리고 30분 뒤 이스탄불 중심부인 탁심 광장에서는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반군들 간에 무력 충돌이 생겼다. 이스탄불 시민들은 각자 무장하고 탁심을 통해 골든 혼으로 내려가는 모든 거리를 통제했으며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가 반군들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이어 모든 모스크에서 아잔(기도) 소리가 울려퍼졌다. 보통 아잔은 메카의 시간 대에 맞춰서 울리게 되어 있는데 예배시간이 아닐 때 울리는 아잔은 전통적으로 적이 기습했을 때 위기 상황의 선포 및 시민들에 대한 동원 요구를 의미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한편 콘야에서는 당시 시각의 아잔 이후, 모스크의 미나렛에서 아잔 낭송이 끝나고 "당신이 무슬림이라면 집에 있지 말고 당장 거리로 나오라!" 라는 터키어 육성이 울리기도 했다. 당시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부 지역 이즈미르에서 휴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이스탄불이나 앙카라로 돌아와 정부군을 통솔하려 했지만 양측 모두 공항이 폐쇄되면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각 이스탄불에서는 위스퀴다르에서 루멜리 성곽으로 들어오려는 반군과 시민군들이 충돌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반면 앙카라에서는 정부군과 민병대 연합군이 국영방송 TRT를 반군으로부터 탈환에 성공했고 이에 방송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당시 노동부 장관과 사무원들이 방송국에 들어오면서 사태는 정부군과 민병대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에르도안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항 주변에 지지자들이 공항 내부에 총집결해 대통령을 맞이했다. 탁심 광장에서는 시민들과 대치 중이던 군인 30여 명이 경찰과 정부군에 포위되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이어 정부군은 현지 방송인 CNN Turk의 스튜디오를 점거하고 방송 관계자들을 내보내면서 미국과 유럽으로 나가는 방송 송출을 차단했다. 한편 앙카라에서는 대통령궁과 구 도심으로 진출하려는 반군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와 동시에 터키 국가정보기관 MIT는 드디어 반란이 거의 진압되었음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면서 반군 잔당들을 거리 곳곳에서 소탕 중이라고 알렸다. 이어 16일 오전 4시 30분 에르도안 대통령이 마침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TV 기자회견 진행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통해 터키군 내의 폐단을 깔끔하게 정화할 것이라 했다. 이처럼 이틀, 크게 보면 6시간 동안의 교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쿠데타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쿠데타와 진압 과정에서 265명이 사망했으며 1,40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반군을 지휘한 장군 5명과 대령 29명 등 2,800명이 넘게 체포되면서 쿠데타 미수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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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6
  •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새로운 정적, 현 부다페스트 시장인 게르게이 커라초니(Karacsony Gergely)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총선에서 승리하며 4연임을 확정 지으면서 새삼 주목 받는 인물이 있다. 피데스당이 독주하던 헝가리에 제동을 걸었던 현 부다페스트 시장인 게르게이 커라초니(Karacsony Gergely)이다. 2019년 부다페스트 시장 선거에서 여당 피데스(Fidesz)당 후보는 82%가량 개표가 끝난 상황에서 친 EU 성향의 중도 좌파 후보에게 6% 포인트 이상 뒤처진 득표율을 보이며 사실상 패배했다. 당시 패배는 2010년 집권한 오르반 총리의 첫 주요 선거 패배로 주목받았다. 반(反) 이민 정책과 비판 언론 탄압, 사법부 장악 등으로 일명 ‘동유럽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오르반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대한 유권자들이 반발하여 이를 경고하는 해석과 더불어 46세의 젊은 야권 후보의 신선함까지 더해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는 분석이다. 커라초니는 2019년 9월 초 부다페스트 자유광장에서 진행한 첫 번째 선거 유세에서 기타를 메고 나와 ‘변화의 노래’라는 선거송을 직접 부르며 유세를 시작했다. 젊은 정치인의 기타 연주에 특히 젊은 층들이 환호했다. 커라초니는 여론 조사 연구원 출신으로 2009년 헝가리 녹색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2013년 진정한 녹색 정당을 목적으로 대화당을 창당한 뒤 대표를 맡고 있다. 친유럽연합, 사회민주주의, 페미니즘 확립 등이 당의 근본 목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에 오르반 총리는 시장 선거 당시 야당이 집권한 자치 단체와는 협력을 끊겠다고 위협했지만, 이를 무릅쓰고 커라초니는 11년 차 오르반 총리의 주요 정책을 위협할 정도로 대세가 되었다. 커라초니 시장은 오르반 총리의 친중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이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오르반은 2010년 총리에 집권 한 뒤, 난민 정책에 반대해 반(反) EU 정책을 분명히 밝혔으며 EU의 빈 자리를 친중, 친러 정책으로 채웠고 중국과는 고속철도, 태양광 발전 등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오르반 총리가 2019년부터 중국 정부와 함께 합작하여 추진한 푸단 대학 캠퍼스의 부다페스트 분교 유치 계획은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공공연한 반발을 샀다. 이러한 반발은 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커라초니 시장에게 있어 정치적으로는 오르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였다. 세계 100위권 안에 드는 명문 대학을 유치한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2조원에 이르는 건립 비용 대부분을 헝가리 정부가 대고, 분교 건립 부지가 애초부터 외지의 대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터로 예정되었었다는 사실 등은 반중 여론과 더불어 시내의 우익 보수 세력들의 불만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커라초니 시장은 2020년부터 분교 부지 근처 거리에 반중 메시지를 담은 이름들을 붙이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 홍콩 거리’, ‘위구르 순교자 거리’, ‘달라이 라마 거리’ 등을 붙이면서 오르반과 중국 정부를 자극했다. 이는 하나 같이 중국이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하게 여기는 주제들이기에 중국 정부의 거센 항의가 예상되었다. 커라초니 시장은 푸단 대학 분교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된다면 이들 거리의 이름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헸다. 이어 2021년 5월 5일에는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진행된 푸단 대학 분교 설치 반대 시위를 직접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연설 탁자의 한 쪽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을 풍자하는 ‘곰돌이 푸’ 인형이 놓이기도 했다. 결국 오르반 총리는 반대 시위 일주일 만인 5월 12일 푸단 대학 분교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2022년 5월 총선을 의식해 내렸던 불가피한 조처였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시장으로서 철옹성과 같았던 오르반 총리에게 두 번의 패배를 안긴 커라초니는 2022년 헝가리 총선의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2021년 9월 여론조사에서는 집권당인 피데즈와 야권 연대에 대한 지지도가 각각 48%, 47%로 접전인 상황에 있다. 10년 넘게 오르반 총리의 독주를 지켜봤던 헝가리 야권이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커라초니 시장이 소속된 정당인 대화당의 당세가 크지 않고,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총선은 쉽지 않다. 결국 올해 총선에서 헝가리를 위한 연합의 총리 후보인 페테르 마르키저이(Peter Marki-Zay)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커라초니 시장이 시골 출신이라는 장점이 있어 농민들의 표를 끌어모으는데 유리하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드물게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고, 오르반 정권은 도시 지역의 부족한 득표를 농촌 지역의 높은 지지로 만회해 오기도 했다. 헝가리 사회학자 임레 코바흐는 이를 두고 헝가리는 농촌의 지지가 없으면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더불어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면 안되지만, 정치인들은 의도적으로 이를 이용해 왔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헝가리 농민들의 표로 인해 대세가 충분히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커라초니 시장이 아직 나이도 젊고 무엇보다 수도인 부다페스트 시민들 중, 젊은 층들의 지지까지 얻고 있다. 페테르 마르키저이(Peter Marki-Zay)가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다음 오르반 총리의 대항마는 커라초니 시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미 오르반을 두 번이나 이겼던 오르반 킬러인 커라초니가 다음 총리 선거에서 오르반을 또 다시 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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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4
  • 2023년 4월 5일 러시아의 바흐무트 대부분 점령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테러리스트 검거
    당시 우크라이나와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 공략에 앞장서온 러시아 바그너 그룹은 엊그제 3일 바흐무트 행정 중심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부서진 시 의회 건물로 추정되는 장소에 러시아 국기가 휘날리는 영상도 인터넷에 올라옴으로써 점령을 인증했다. 전통적인 전쟁이나 전투 개념으로 보면, 한 도시의 시 의회와 시청, 그리고 시 중심가 점령은 시청에 점령군의 국기를 게양하여 인증하는 것으로 사실상 끝난다. 그 이후는 잔당들을 소탕하는 작업인데 이 정도면 사실상 시의 90%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의 3일 소식에 의하면 "어젯밤에 '바그너 그룹'이 시청에 깃발을 꽂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어두운 밤의 영상으로는 정확한 게양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우크라이나 주요 언론들이 날이 밝은 뒤 그 곳이 시 의회가 무너진 곳으로 확인했다"며 "대낮에도 여전히 국기가 철거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군인 러시아군이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프리고진이 인터넷에 올린 영상을 통해 "내 뒤에 바흐무트 시청 건물이 있다"며 "우리는 러시아 국기와 '바그너 그룹'의 깃발을 게양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크라이나군은 도시 서쪽으로 밀려났다고 했다. 프리고진은 또 다른 영상을 통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카페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사망한 블로거 '블라들렌 타타르스키'의 이름이 새겨진 러시아 국기를 들고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타타르스키는 러시아 군 수뇌부와 특수군사작전 현장 지휘관들을 신랄하게 비판해왔었다. 따라서 그는 '친(親) 프리고진' 블로거로 분류되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제거 대상 인물 중 하나였다. 마침 폭발사고가 일어난 카페도 프리고진의 소유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안드레이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실장은 러시아 군의 바흐무트 함락에 대한 주장에 "바흐무트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땅"이라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승리'를 주장하는 페이크 뉴스에 휘둘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한다.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 지상군 사령관도 바흐무트 거리로 나온 사진을 올린 뒤, "적은 약해지고 있으며, 더 많은 페이크 뉴스로 바흐무트 공략 실패를 은폐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바흐무트 지역을 방어하는 우크라이나 동부군 측은 외신 인터뷰에서 "어디 화장실 위에 러시아 깃발을 올렸나"라며 이를 반문하면서 "그들은 아무 곳에나 걸레(깃발)를 걸고는 도시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좋을 대로 생각하게 두라"고 비아냥대며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트라나.ua는 서방 종군기자들도 시 의회가 위치한 행정 중심지를 러시아 군이 점령했다며 전하기 시작했다. 바그너 그룹은 바흐무트 기차역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잔적을 소탕함으로써 완전 점령을 노리고 있다고 하였다. 때마침 블라들랜 타타르스키에게 폭발물이 든 흉상을 전달한 폭발 사건 용의자 및 테러리스트가 마침내 검거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26세의 다리야 트레포바라는 인물로 조각 예술가라고 한다. 그녀는 타타르스키의 흉상을 제작해 그의 팬 미팅에서 그에게 선물로 전달했고 주최 자측의 배려에 자리를 잡고 행사를 지켜보다 행사 사회자가 흉상을 설명한 뒤 다시 박스에 넣은 순간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카페에 있던 시민 32명이 다치고 타타르스키는 사망했으며 건물도 크게 파손됐다. 테러리스트인 트레포바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도주하기 위해 해외 거주 중인 남편의 친구 집에 은신하던 중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수사당국의 발표에 의한면 이번 테러 공격은 반 푸틴 야권인사인 나발니가 세운 '반 부패재단'의 도움을 받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에 의해 계획되었음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트레포바는 이 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써 나발니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트레포바는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금된 경력도 확인되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테러 행위이고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연루된 증거가 있다고 했다. 페스코프는 지난 해 다리야 두기나를 자동차 폭발 사건으로 살해하고, 이번 사건 역시 우크라이나 정권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면서 그들은 지난 2014년 돈바스 내전 이후 많은 러시아 인들을 살해한 배후로, 이것이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수행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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