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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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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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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6
  • 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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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6
  • 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5
  • 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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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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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의 태형(Whipping)과 샤리아 법, 그리고 후두드(Hudud), 타지르(Tazir), 끼사스(Qisas)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한 여성이 음주 행위로 인해 샤리아를 위반하여 태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대한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집단 서방에서는 이를 야만적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는 이슬람은 물론 이슬람 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기초적인 자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또한 태형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20세기 초에 사라졌으나 여전히 다수의 무슬림국가에서는 엄연한 형벌의 하나이며 특히 샤리아 형법의 주요한 형벌 수단이었지만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물도 찾기 쉽지 않다. 대개 태형의 경우, 공개 처형과는 달리 비공개로 진행된다. 샤리아 법은 이슬람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꾸란>, <순나>, <이즈마>와 <끼야스>를 법원(法源)으로 하며, 샤리아 형법인 알 우쿠밧(Al-'Uqubat)에 대한 형벌은 후두드(Hudud), 타지르(Tazir), 끼사스(Qisas) 등 크게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후두드(Hudud)는 <꾸란>과 <순나>에 정해진 형벌이며 타지르(Tazir)는 판사가 재량으로 양형을 정할 수 있는 형벌로 대부분의 현대 무슬림국가들은 타지르에 의한 샤리아 형법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 말레이시아의 경우 일반 형법에도 태형이 성범죄와 마약, 총기 범죄 등에 대한 형벌로 규정되어 있다. 이슬람 법의 경우 연방 헌법에 의해 입법권이 각 주 정부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각 주는 대부분 타지르에 의한 샤리아 형법 조례를 제정하여 시행 중에 있다. 특히 성 관련 범죄와 음주 등 계율 위반 행위에 대해 태형을 형벌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법의 기본 법인 종교 사법법을 적용하여 가족, 상속 등 민사 관련 영역만 규율하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없으나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 받은 아체(Aceh) 주의 경우, 자치 법령인 까눈에 도박, 주류 판매 및 음주, 성 관련 범죄와 이슬람 계율 위반 행위에 대해 태형을 부과하고 있다. 일반 형법은 물론 샤리아 법에 있어서 태형에 대해 인권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최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계율을 위반한 여성에 대해 태형을 집행한 사례들이 있어 전 세계적인 비판을 받고 있는 편이다. 반면 무슬림 국가의 정부와 보수적인 무슬림들은 태형은 교육 및 범죄 예방 효과가 크다며 이를 옹호하고 있다. 살인, 강도, 강간, 간통 등 중범죄에 대한 형벌을 담은 후두드(Hudud)가 인권 탄압 논란의 대상에 있다. 후두드 형벌이 참수, 돌 던지기, 손, 발 절단, 태형 등의 방식이다 보니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이를 그대로 적용하는 나라는 소수에 그치고 있다. 후두드를 적용하는 대표적 국가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꼽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동성애를 하다가 적발되면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각종 범죄자에 대한 참수와 절단형은 보통 금요일 정오 예배 전에 집행한다. 최근에는 많이 없어졌지만 불과 10년 전 만 해도 사형을 집행한 후 시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반면교사로 공개하기도 했다. 카타르의 경우 무슬림 여성과 비(非) 무슬림 남성이 간통을 했을 때 사형이 집행될 수 있다. 이란은 후두드를 따르면서 판사가 경중을 따져 적용할 수 있는 수위를 조절한다. 이란은 여전히 많은 사형을 집행하고 있으며 태형, 절단, 강제 실명 등의 형벌을 따르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36개 주 가운데 12개 주가 후두드를 적용하있다. 지난 1983년 샤리아법을 채택한 수단에서는 매년 수백명의 여성이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적용하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수마트라 섬 북쪽 끝 아체 주만 유일하게 샤리아법을 따르게 된다. 아체 주는 주민 500만 명 중 98%가 무슬림이다. 아체 주에서는 성폭력 범죄와 음주, 도박, 간통, 동성애, 혼전 성관계, 공공장소 애정행각 등이 적발되면 공원 등 공개된 장소에서 라탄 회초리로 등을 때린다. 그 동안의 사례를 보면, 아동 성폭행 범은 169대, 동성애는 77대, 음주 40대, 불륜은 17대의 태형이 선고됐다. 아체 주는 현재도 공개 태형을 계속 집행하고 있다. 수형자들도 좁은 감옥에 갇히기 보다 빨리 태형을 집행을 받고 풀려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와 이웃한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도 샤리아 법을 일부 적용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계열인 탈레반은 소련군을 몰아낸 과거 5년의 집권기(1996∼2001) 동안 샤리아 법을 앞세워 사회를 엄격히 통제한 바 있다. 당시에는 노래 부르기와 음악 감상이 금지됐다. 특히 탈레반은 여학생 등교와 취업을 금지했고 공공장소에서는 부르카 착용을 강제하는 등 여성의 삶을 억압했다. 후두드에 따라 도둑의 손을 자르거나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투석형으로 쳐 죽이는 등 공개 처형도 이뤄졌다. 당시 성폭력과 강제 결혼도 횡횡했다. 후두드는 이미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비이슬람 국가 및 세속주의 국가들에서도 저 정도는 아니나 유사한 형벌이 시행되고 있다. 싱가포르도 유사한 형벌을 적용하고 있다. 2015년 1월 9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한 모스크 앞 광장에서 사하로프 인권상(Sakharov Prize) 수상자인 사회운동가 라이프 바다위(Raif Badawi)에 대한 태형이 집행되었다. 바다위는 자신이 개설한 인터넷 공개 토론 웹사이트를 통해 이슬람교와 사우드 왕가를 모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우디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에 26만 달러 벌금형과 함께 태형 1,000대를 선고 받았다. 판결에 따라 태형 중 50번의 채찍질이 행해졌다. 수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이 바다위의 등과 엉덩이에 채찍을 내리치자 광장에는 비명과 울음 소리가 가득했다. 이를 지켜본 국제사회가 이를 강력히 성토하자 사우디 정부는 건강상 이유를 들어 바다위에 대한 나머지 태형 집행을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다. 물론 태형은 이슬람권에서 행해지는 세 가지 형벌 가운데 가장 가벼운 수준인 타지르(Tazir)의 한 종류다. 아랍어로 징계 및 교정을 뜻하는 타지르는 <꾸란>, <하디스>에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범법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판사나 공동체 지도자가 내리는 형벌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 법에서 최고 형벌은 앞서 언급한 후두드(Hudud)이다. 여기에서 배교와 살인, 간음, 도둑질에 대해 참수형과 수족절단형, 투석형 등을 선고하고 있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끼사스(Qisas)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같은 수준의 복수를 하거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타지르는 경범죄 처벌과 유사하여 범죄의 심각성이나 가해자가 뉘우치는 태도에 따라 수위가 결정되며 통상 벌금형과 태형이 수반되고 있다. 태형은 보통 금요일 예배 후에 모스크 앞 등 공개된 장소의 기둥에 처벌 대상자를 묶고 채찍으로 때리는 방식으로 집행된다. 다만 연속적 채찍질로 체벌 대상자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여러 번에 나눠 진행한다. 바다위에 대한 태형을 처음에 50번으로 제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법원이 대표적인 타지르 형벌인 태형을 금지하고 징역형 등으로 대체하라고 일선 법원에 지시했다. 다음 날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이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선고를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반인권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법 제도가 개혁의 길로 접어 들고 있다. 태형 제도를 비판하기 전에 무슬림 국가들의 역사 및 사회 구조와 이슬람 및 이슬람법의 전통, 그리고 국민의 법 감정 등 태형을 둘러싼 환경적 요인을 먼저 이해하여야 하며 샤리아의 기본 원리와 각국의 실정 법을 이슬람 학 뿐만 아니라 법학적인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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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3-31
  • 스페인 제국이 필리핀에 오기 전까지, 필리핀의 역사
    필리핀에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할 시점에 도합 20여 개의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 외에도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수많은 산, 오지, 수천 개의 섬, 정글 등에도 적지 않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속이 없던 인물들인데, 네그리토(Negrito) 원시 부족들 이 외에도 외국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나 탈주자들이 소속 없이 산과 정글, 섬을 떠돌며 생활을 하던 경우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러한 곳에도 여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국가 단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이와 같은 지역들도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흩어져 있는 네그리토 부족 마을들이 강성하여 국가들이 쉽게 이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지역들은 인구도 적지 않아서 거의 10만 단위를 넘어갔다. 이들은 문명과 접촉한 적이 있으면서도 국가를 형성하지 않고 마을 단위를 고집하며 무법 지대에 흩어져 자유롭게 살아갔다. 정복자인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Concistador)들도 이들 정글 전사들의 전투력이 분명히 강하다고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의 기록에도 헤드헌터(Head hunter)라 분명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네그리토 부족들이 이방인에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경우도 용인하며 자유롭게 함께 사는 경우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상업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가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아시아 특유의 봉건제와 노예제가 함께 가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서양사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당시의 필리핀이 복잡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이 접촉한 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정치구조가 복잡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이는 아시아의 계통이 다양한 상인들이 몇 백년간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정착한 것에서 만들어진 질서에 기인한다. 스페인 측 기록에 의하면 평민층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 때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였고 바이바이인(Baybayin) 문자를 무역 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 은, 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다.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스페인 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시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기 때문에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에 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왕국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 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 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 천 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의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같은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 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인 성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 선원, 호위 무사 및 노예 등 이민자들과 외국 문화의 유입, 경제적 호황 등으로 인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산악 지역까지 영토가 포괄되어 몇 만 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 갔다. 이 때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던 독립적인 바랑가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한 국가 내부에서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 된 수도가 있었다는 것 보다,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 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의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 부투안, 술루 등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 만호장, 족장, 호족 등이 아니라 왕으로 불렀다. 사 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차례 있을 정도로 자주 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라자, 라칸 외에도 그 밑에 다투(Datu)라 불리던 영주를 겸한 거상들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다.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 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 재산과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 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는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 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 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 인들은 관료, 지주, 통역사, 항해사, 선주, 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 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 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 년 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이 그러했다. 이어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 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 카인타, 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여러 문화적 계통의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여러 모로 스페인이 오기 이전부터 아시아 내부에서 해양 자유 도시로의 성향이 강했는데, 실제로 본국에서 신분이 낮았던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필리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호황 상태였던 것이다. 필리핀 국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인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 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역사가 다른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와 크게 구별되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거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라카와 같은 무역 중심지에서의 이름 높은 상인이던 국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 관계, 그리고 국제 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 외에도 왕의 자질인 지역 내에서 1. 돈이 많고, 2. 군사력이 강하며 3. 보유한 노예가 많고 4. 정치능력이 뛰어나면서 5. 내정능력이 뛰어난 능력 6. 보유한 영지가 많은 것 7. 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 내의 서로 엇비슷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 번째 일례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 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 계 토착 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 온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명성으로, 기존 세력들은 이슬람 연결망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 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술루 술탄국에는 몇 백 년 동안 재위한 왕이 2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나는 기존 토착 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 번째 일례로는 필리핀 도독령, 스페인의 존재였다. 필리핀인들과 문화, 인종, 종교 등 완전히 다른 스페인 인들이었고 총 5차례 스페인의 공식적인 정복 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직할령과 반대 지역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 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 몇 백 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와 마젤란의 사례와 더불어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이 몇 백 명의 스페인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토착 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 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 선 건조, 아시아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 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 령의 경우,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 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 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 령, 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없으며 각 지역별, 혹은 섬들 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카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의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필리핀은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 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이기 때문에 4개의 큰 섬들이 붙어 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신토(神道)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 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아시아의 큰 종교들이 존재하고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일본과 같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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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포르투갈에게서 전해진 조총과 뎃뽀 정착의 역사
    1543년 시암(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의 배 한 척이 일본 큐슈 남쪽 다네가 섬(種子島)에 표류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인이 일본에 뎃포(鐵砲)를 건네주었다. 그것이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鳥銃)이었다. 조총이 일본에 전해진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1543년 8월 25일,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 섬 서남단 가도쿠라 곶에 표착했다. 당시 상황은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1606년에 쓴 <철포기(鐵砲記)>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으로써 왜구의 수장이었던 왕직(汪直)이 중국 영파(寧波)에서 출항했는데, 승객 중에는 포르투갈 인 2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후 함선은 역풍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큐슈 가고시마 현 다네가 섬에 도착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들은 그 때까지 일본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화승총을 가지고 왔다. 길이는 2~4척(尺)이었고, 가운데는 뚫려 있었으며 아래는 막혀 있었다. 옆의 구멍에 화약을 넣고 작은 총알을 넣으면 바로 발사될 수 있었다. 총을 발사하면 빛이 나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에 모두 귀를 막아야 했다. 이 화총(火銃)은 일본인들이 그 동안 사용했었던 명나라의 총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다. 일본인들은 그 총을 남만뎃포(南蠻鐵砲)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인을 ‘남쪽 오랑캐’라는 의미로 남만이라 불렀다. 일본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 일본에 철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네가 섬의 영주인 시케토키(惠時)와 도키다카(時曉) 부자는 총의 위력에 감탄하며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동시에 제조법과 사용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장인 야이타 기요사다(八板淸定)에게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요사다 장인은 실패했다. 이듬해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에 오자, 기요사다는 그들에게서 다시 제조법을 배웠고, 첫 화승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야이타 기요사다는 ‘사쓰마 뎃포’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총은 머스켓(Musket) 총의 일종으로, 탄약을 앞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오스만투르크가 먼저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는 1475년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신에 강선이 없기 때문에 현대의 총기류처럼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일본은 서양에서 머스켓 총을 전달 받은 지 1년여 만에 자체적으로 기술을 습득하여 제작하게 되었다. 16세기 동아시아에는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먼저 서양과 접촉한 현지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자바의 마타람 왕국, 수마트라의 아체 왕국, 베트남의 레 왕조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지배자들은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교역을 활용해 큰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와 군사 기술을 습득해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연맹체를 강력한 왕권 하의 절대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일본도 서양의 아시아 진출 시기와 동시에 통일체로 형성해 나갔다.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등이 국제 무역 세력을 흡수하고, 조총(鳥銃) 등의 새로운 군사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통일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 새로운 무기는 일본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뎃포(鐵砲)를 처음으로 접한 다네가 섬 영주가 모조품을 만들자, 전국 다이묘들이 서로 경쟁하듯 뎃포 제작에 나섰다. 일부 다이묘들은 뎃포와 그 제작 기술을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독점하려 했다. 일본인들은 꾸준히 조총을 개량했다. 나사를 만들고, 초석을 제조하는 기술을 연구, 개발했다. 정확하게 측정한 화약과 총알을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나무 통에서 화약과 탄환을 꺼내 신속하게 장전, 발사하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은 포르투갈에서 처음 수입했을 때보다 월등히 성능이 우수한 조총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어 각 다이묘들은 대형 화승총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1573~1574년경에는 오뎃포(大鐵砲)라는 긴 조총이 등장해 전투에 적극 활용되었다. 일본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 뎃포 제작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무역과 뎃포 제작의 중심지인 사카이(堺,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국을 지배할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뎃포 부대 육성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3월,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일본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일본도 등을 선조에게 진상했다. 당시의 정황을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전하께서는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고 적기도 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무기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인들과 접촉이 없었던 데다 일본을 통해 무기가 들어왔지만, 선조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선조가 이러한 일본의 신무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중화의 질서에서 변방국이 진상하는 무기를 얕잡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은 그 무기를 시험해 봤어야 했고 시험을 통해 조선의 기술로 1년이면 개발에 성공해 다가올 왜란에서 적극 활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선 조정에서는 유성룡을 제외하고는 그 무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200년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무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조선의 군 수뇌는 조총의 위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초반 전투들에서 참혹하게 궤멸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왜군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따로 개조하여 조선만의 화승총을 만들어 무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대는 효종 시기, 청나라의 요청으로 만주로 출병해 러시아 코사크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해 그 위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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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0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영향력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착취
    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다. 그 후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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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생각보다 강한 필리핀 원주민들의 무력, 스페인 7차례 원정 끝에 정복하다.
    필리핀에는 스페인이 오기 전부터 16세기 초중반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 란타카(Rantaka)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화포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 생산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조직, 포르투갈 등의 서양 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의 함선은 토착 아웃리거(Outriger) 군선들이 존재하고 스페인 측의 기록화에 따르면 이 군선들은 아이언우드 재질이었으며 길이는 10m~30m. 길이가 30m, 폭이 6m 이상인 함선들은 주앙가(Juanga)라 불렸다. 이와 같은 함선들은 첨저 선으로 원양 항해와 소규모 무역선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중동까지 항해했었다고 추정되지만 우선 마다가스카르까지만 항해했던 것으로 문헌에서 발견되었다. 속력은 시속 15노트(knot)에 달했으며 높이가 낮아 군선이 가벼운데다 노가 많이 달려있고 큰 돛까지 달아 일본 세키부네 보다 1.5배~2.5배까지 더 빨랐다. 화살을 막는 방어 자재들을 달았고 승선 인원은 40명~200명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 력이 좋으며 높이가 매우 낮아 여러 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돌아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적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원거리에서 정밀한 타격은 매우 어려웠다. 그로 인해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으로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다. 네덜란드는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면서 결전을 벌였지만 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필리핀의 선회식 화포의 위력의 예라 볼 수 있다. 1780년 전쟁 때도 네덜란드 함선은 필리핀 도독 령과 해전을 벌이다 토착 군선들에게 5번이나 패배했다. 한편 영국 또한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했으며 스페인은 이슬람 계 토착 상업 왕국들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배했다. 스페인은 필리핀 도독 령의 설립 이전에 5번의 원정에서 실패했고 그 중 몇 번은 해전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 필리핀 도독 령 설립 이전 루손인 용병단의 지원을 받은 남중국해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격퇴 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들도 모두 여기에 당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제국에 편입시킨 후 이들 필리핀 함선들을 해안 방어에 사용하였다. 또한 필리핀 제도는 일본 열도에서 온 왜구들이 동남아시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 지점이기도 했다. 지리상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고, 대만은 청나라 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쇄국 정책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라 접촉하기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무역 등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 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 화교들이 많이 거류하던 팡가시난(Phangasinan)에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도 거류하고 있었다. 실제 후기 왜구들은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활동 무대가 동남아시아, 중국 해역, 한반도까지 기록이 다양한 곳에 드러난다.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 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다. 일본 본토의 아시가루들의 월 봉급이 1칸 55유이었고 필리핀은 금, 은, 보석을 지급하고 이 외의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화폐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무사 계층들이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용병으로 활동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개개인의 검술 형식에 따라, 전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선호도에 맞춰 검의 모양과 크기를 맞춤 제작하던 전통이 있었던 전문 무사들이었다. 해적 활동 이외에도 각 국가들의 군대는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등에 금전을 지불받고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군사 활동 영역은 동남아시아 최서단, 최남단, 중국 남부 등 동남아시아 전역과 동아시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 왕국의 군사 동원력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있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막탄 섬의 소 영주였던 라푸라푸가 마젤란 200여 명의 스페인 군을 상대로 막탄 섬 방어에 동원한 병력이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 막탄 섬은 매우 작은 섬인데, 세부 왕국 전체의 군사 동원력은 막탄보다 최소 몇 배에서 십 수 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략 센코쿠 시대 다이묘들과 비슷한 병력 동원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전을 더 많이 사용 시 정글에 사는 네그리토 궁수들까지도 추가로 고용할 수 있었다. 각 왕국들의 용병 활동 기록이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전면전 기록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국제 무역 관계로 인해서인지 전면전은 지양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용병업, 해적 활동 이외의 방어전에서는 군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병영 국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상업 왕국인 술루 술탄국의 군사 동원력은 식민통치 말기 기준으로 15만 명이었다. 330여 년간의 인구 증감률을 감안하더라도 일개 지방으로써는 큰 수치이다. 1405년 영락제 당시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는 명나라 수군 도독 정화의 대규모 해상 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확실한 것은 마닐라 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 후 얼마 동안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십 수 년 뒤의 기록을 살펴보면 힌두교 세부 왕국과 마긴다나오(Magindanao) 사이에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바이바이인 문자는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필리핀의 여러 왕국들의 해상 활동도 꾸준하게 발견된다. 150여 년 후, 스페인의 도래 시기에도 상업으로 번성하여 건재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필리핀 정복 시도는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바랑가이들은 무기 이 외의 방어구는 각종 재료들을 가공한 갑옷들을 제작했다. 스페인 원정대의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higapeta)의 기록에는 다양한 재료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 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유럽 최고의 스페인 산 강철이 필리핀 갑옷에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거의 가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철이 아닌 가공한 재료들로 제작되어 비를 맞아도 녹슬지 않았다. 대부분은 경 갑옷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 갑옷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온다고 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 썩어서 남아있지 않으며, 경 갑옷은 일부 몇 개 남아있다. 스페인 마젤란 원정대가 왔을 때 모두 오지 원주민인 것처럼 벗은 채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된 기록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다만, 실력 좋은 자신감 있는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이외의 평상시에는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들을 의전 하였다.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의 검은 당시 필리핀과 무역을 하던 일본에서 골동품 유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센다이 지방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유품으로, 이 금 장식이 된 검들은 필리핀에서 센다이 사절단에게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단은 전형적인 토착 양식이고 하단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섬 지역민들은 해적이었기 때문에 해군을 겸한 보병이 군대 그 자체였다. 대개 전투는 바다, 해안, 시가지, 정글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곳도 기병의 효용이 떨어지는 지형의 연속이라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어내도 금세 우거져 버리는 열대 정글의 존재와 화산으로 형성된 산맥들이 균일하지 못한 복잡한 지형이었던 데다 그 안에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인구로 살고 있는 네그리토 전사들의 존재는 기병의 필요성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섬과 섬이 이어져 있지 않고 수많은 섬으로 분할되어 있는 군도 특성상 바다를 천연 교통로로 활용하는 것이 더욱 편했고 대부분은 전쟁도 육로가 아닌 바다로부터 상륙을 통해 공격해왔다. 타국 해안가나 항구를 약탈 할 때도 군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약탈을 마치고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목축 또한 양돈 이외에는 의미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과의 전면전은 방어전인 경우가 많았고 해외 원정을 가는 경우에는 대개 중소규모의 용병 단으로 참전하였다. 애초에 전투의 목적이 돈을 버는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 징집 병이 대부분에다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목적이었던 주변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다. 필리핀 각 중소국가들은 상인, 해적들이 모여 규모가 커져서 제각기 국가화 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경민족 단위에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 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과 그 시작이 다른 해양 민족이었다. 고대부터 필리핀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 지역에 있어 다국적 자본의 교차 지역이면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연유로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 대만인, 류큐인, 자바인, 바자우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왕래했으며 이들이 각 섬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지배층과 피지배층, 노예 간의 인종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지역별로 특정 인종, 문화권이 우세했던 인도차이나 반도와 다르게 필리핀 제도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권의 인종들이 비교적 균일한 숫자로 거주하면서 상업, 전쟁 등으로 경쟁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인도 및 이슬람 계 문화권 출신들이 전후반기 모두 우위를 점하였다. 단적인 예로 크메르 계통 인구의 우세 속에 크메르 계 문자를 사용하던 태국, 중국계 인구의 우세 속에 한자를 사용하던 베트남과는 달리, 필리핀 제도는 인도, 아라비아계의 바이바이인 문자를 사용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페인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금, 은, 귀금속 등의 화폐 경제가 발달했으며 다른 금속 화폐들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필리핀의 경제적 구조는 폐쇄성 보다는 개방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자유로운 무역을 했던 것으로 분류된다. 일단 스페인 도래 이전 기준으로도 매우 부유하였고, 스페인의 기록상 마닐라, 부투안 등은 동남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던 곳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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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의과 대학 정원 2000명 고수 정책에 대하여
    오늘 아침엔 딸의 출근길을 도와주었다. Y병원에 가는 길에 딸에게 물었다. “요즘 외래 힘들지 않나?” “수술 스케줄 조정하느라 힘들어!” 수술 일정을 모두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딸이 나에게 묻는다. “아빠! 왜 하필 2,000명이야?” “그러게, 말이다. 대통령실 옆에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런가 봐! 이름이 이천공이래!” 최근에 알았지만 대통령실과 불과 100m 거리에 천공이라는 스님이 살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가 그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비록 비합리적이지만 그의 생각을 국가의 정책으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기는 할 것 같았다. 딸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천공이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딸의 이야기이다. “우리 병원 암환자 중에 삼성병원, 아산병원 모두 다니는 환자도 있어! 그런 것을 개혁해야지 왠 의대 증원 2,000명이야?” 딸은 나와 생각이 같았다. 의대 증원에 관한 정부의 발표 중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서울지역은 증원이 없다. 0이다. 모두 지방대학에 증원했다. 서울지역 대학의 기존 정원은 끝자리 단위가 들쑥날쑥하다. 서울대 135명, 카톨릭대 93명 등이다. 그런데 충북대는 49명에서 200명, 경상대는 76명에서 200명, 대구 카톨릭대는 40명에서 80명으로 증원한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강원대이다. 강원대는 49명에서 132명으로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왜 하필이면 끝자리가 2명일까? 서울지역의 전체 의대 정원의 끝자리가 8이었던 것 같다. 2,000명을 맞추려면 2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말로 2,000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강원대 정원이 132명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합리적인 생각을 근거로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려시대에 묘청이 풍수지리를 근거로 개경에는 기가 다하여 서경으로 궁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역사를 알고 있다. 묘청은 황제 칭호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나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을 권유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와 싸워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나아가서 고려가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인종는 그의 말을 믿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묘청은 간신임이 분명하였다. 사악한 도술과 편 가르기를 일삼아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서경 천도와 관련하여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이 심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묘청의 주장대로 고려가 금나라를 공격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더 일찍 멸망했을 것이다. 물론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1천년 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신채호는 묘청이 김부식에 의하여 패전한 것이 우리나라가 사대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대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몸짓으로 이해한다. AI가 등장하는 시대에 묘청과 천공을 언급하는 것이 허황하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허황하지만은 않다. 묘청의 그림자가 용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 것도 그렇고, 의료 개혁한다고 느닷없이 들고나온 의대 증원 2,000명의 주장도 그렇게 실행에 옮겨질 것 같다. 왜 하필 2,000명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해명조차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천공의 본명은 이병철이었는데 이천공으로 개명한 것으로 나온다. 대통령부부가 천공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이천명을 고집했을까? 아니면 천공이 이천명을 고집했을까? 다른 지방대학교는 정원이 모두 몇십 명 단위인데 강원대 정원만 132명인 것은 너무나 엉뚱하다. 그 모두의 합은 이천명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역술인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있기는 하다. 얼마 전에 탄허스님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탄허스님도 미래를 예측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의 사고에 비해 동양인들의 사고가 운명론에 취약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주역은 자연의 운행에 대한 동양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하지만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인간사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탄허스님도 주역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역을 전혀 알지 못하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천공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천공의 생각이 탄허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대통령부부의 생각은 나와 다를 것이다. 웃고 넘기기에는 비극에 가깝다. 세익스피어는 “지나간 것은 앞으로 닥쳐올 것의 서곡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그는 그 말에 이어 “앞으로 닥쳐올 것은 당신과 나의 실제 행동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우리의 미래가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이다. 역사발전의 추세는 읽어낼 수 있지만,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에는 다소 억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평범한 시민이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국정 책임자의 생각이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너무나 불안하다.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마지막 말이 빛이 난다. 우리의 실제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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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터키의 31일 지방 선거, 에르도안과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울루의 정치 생명이 달렸다.
    터키에는 이번 3월 31일 터키 전국의 지방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유세가 한창 진행 중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이다. 시장 임기는 5년이며 공화인민당의 에크렘 이마모울루(Ekrem Imamoğlu)가 현 시장이다. 5년 전, 2019년에는 이마모울루가 비날리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여당인 정의개발당과 에르도안이 한 달 동안 재검표, 재개표를 실시하는 선거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모을루가 4월 17일 당선이 확정되었는데 여당인 정의개발당 측이 "부정선거가 있었다"며 선관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에르도안은 "국민이 재선거를 원한다"며 선관위를 압박해 선거 결과를 무효로 돌리고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지만 재선거에도 이의 없이 이마모울루의 당선이 확정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도안이 시민의 손으로 당선된 시장을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여당과 함께 재선거로 뒤집은 것이다. 선관위는 투표함 관리자에 민간인이 포함돼 있어 공무원만 맡아야 한다는 선거법을 어겼다는 이유라는데 아타튀르크 이후, 항상 투표함 관리자에는 민간인이 5~10% 정도 참여할 수 있게끔 아타튀르크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타튀르크가 종교와 민족을 넘어서 만든 헌법을 에르도안이 무시하고 선거법을 근거로 딴지를 건 것인데 에르도안이 2017년 개헌을 통해 판, 검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판사, 검사위원회(HSK)의 13명 위원 중 10명을 자기 사람으로 앉혔다. 이 또한 명백한 위헌이다. 아타튀르크 때부터 민주주의를 위하여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삼권분립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야당인 공화인민당 지지자들 뿐 아니라 이스탄불의 시민들이 터키 국기를 들고 선관위의 이스탄불 시장 선거 재선거 결정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었다. 당시 에르도안이 선거 결과에 반발한 이유는 이스탄불이 에르도안에게 매우 특수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인구 1,200만명에 달하는 이스탄불이 터키의 정치, 경제 중심지이며 에르도안 자신이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입지를 키웠고, 이후 정의개발당은 25년간 시장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에 그 입지가 흔들려서 벌어졌던 터키 민주주의 사상 최악의 만행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나서 5년 후, 이스탄불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은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후보로 내세워 현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Ekrem Imamoğlu)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2023년 대선을 통해 최소 2028년까지 집권을 연장한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에크렘 이마모울루의 ‘정치적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그 이유는 에르도안이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번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행정적인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기에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 이번 시장 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오차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있다. 사실 이마모울루는 2019년 이스탄불 시장으로 어렵게 집권한 이래,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게 없다.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 대처도 제대로 못해 이스탄불의 거리를 폐쇄하는 악재를 만났고 코로나 이후, 이스탄불 도시 경제는 더욱 추락했으며 리라화 폭락도 막지 못했다. 인구 1,600만의 대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 경제 확립인데 도시 경제가 2015년 이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좋지 않다는 것이 체감상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봤을 때, 이스탄불의 물가는 엄청난 수준으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인플레이션 또한 심각하다. 그렇기에 높아진 물가 비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이스탄불의 탁심 광장에는 끊임없이 시위도 발생한다. 과연 이스탄불 시민들이 시 경제 추락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이마모울루에 다시 신뢰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정의개발당 시장 때 보다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결국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오히려 정의개발당 집권 시기보다 더 못하게 된 것이다. 5년 전, 당시 수도 앙카라와 관광도시 안탈리아까지 공화인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이곳들은 이전 25년 동안 모두 정의개발당과 이슬람권 진영에서 모두 승리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에르도안은 이번 지방선거에 비장의 카드들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저 임금 인상"안이다. 베다트 이시칸(Vedat Isikhan) 터키 노동부 장관은 2024년 1월 1일부터 월 최저임금을 49%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상된 최저 임금은 17,002 리라(한화 약 745,200원)로 작년 2023년 7월에 인상된 현 최저 임금보다 49%, 2023년 새해 1월 1일보다 100% 인상된 수준이다. 에르도안은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에 짓밟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터키는 현재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지난 2년 동안 최저임금을 연간 두 차례의 인상으로 2배 가까이 인상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여태까지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터키의 물가 상승률은 2023년 10월, 85.51%까지 급등했으며 현재도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리라화 가치는 2024년 현재, 35% 하락해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 이 가운데 정부가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최저 임금 인상 카드를 내세워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3년 5월,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긴축 통화 정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올해 3월 초, 터키 중앙은행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7차 금리 인상을 단행해 기준금리를 연 42.5%로 인상했다. 터키의 통화 당국이 이번 달 지방선거를 앞두고 리라화 하락과 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터키의 중앙은행은 통화 긴축 기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추가 조처를 했다며 상업 대출과 일반 대출의 월별 증가폭 상한을 각각 2.5%와 3.0%에서 모두 2.0%로 낮췄다고 했다. 이어 이와 같은 조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담보 설정과 더불어 대출 증가율에 따른 필요 적립금을 설정하는 등 노력도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중앙은행은 이와 별도로 시중 은행 등 상업 대출 기관에 개별적으로 연락해 외화 구매 한도를 부과하고 3개월 미만의 단기 선물 계약을 피할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경고는 작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 뒤 처음 있는 일이긴 하다. 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작년 5월 대선에서 다시 승리한 이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45.0%까지 끌어올렸는데도 국내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내려진 조치였다. 에르도안은 지난 3월 8일 이스탄불의 한 체육관에서 열린 청소년재단 행사에 나타나 이번 지방 선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선거는 터키 전체의 전환점이라면서 자신에게 이번 선거는 결승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신호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지만 여태까지 에르도안의 행보를 볼 때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이번 지방 선거는 이마모을루 현 시장과 에르도안 대통령의 일종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다. 이마모을루는 수십 년 만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가장 큰 도전자로 여겨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이번 선거가 변수인 이유다. 만약 이마모을루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에르도안의 집권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작년 터키에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5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마모울루는 낡고 황폐해진 건물을 철거하고 지진에 강한 대체 건물을 짓는 개발 사업을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마모울루의 공화인민당이 다시 약진 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2019년 야권 연합이 에르도안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던 것과 달리, 지난 해 대선 이후 연합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부분이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이번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또 다른 부분은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되고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 지방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하다. 특히 이스탄불의 승리는 거의 50%의 확률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0세다. 이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울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여기에 달렸다. 사실상 두 사람의 정치 생명을 건 일종 "러시안롤렛"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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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2002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과 2024년 크로쿠스 시티 홀 테러 사건의 비교 분석
    2002년 러시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 참고로 나는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러시아와 관련이 없었던 때다. 이 사건과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모스크바의 주요 공연장을 대상으로 한 테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범행 주도 세력과 동기, 수법 등에서 전혀 다르다. 두브로프카 인질극은 체첸 반군이라는 분명한 반러시아 조직이 확실한 동기를 갖고 인질극을 벌였지만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그 배후가 누구인지, 왜 그와 같은 테러를 저질렀는지 아직까리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아직 배후가 불분명한 소수의 무장 세력이 건물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혼란을 틈타 도주했다. 더불어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 사건을 통해 볼 때 체첸 테러범들은 인질들에게 어느 정도 편의도 배풀고 잘해준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은 막무가내식이라는 것에서 다르다. 이는 일종의 사보타주로 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보기관(SBU와 군정보총국·GUR)이 늘 자행해온 저항 수법이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WP)와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CIA가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주도의 '사보타주'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 그 배후에 우크라이나가 있음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아이에스나 이슬람 기타 원리주의자들이 한 것은 맞지만 그들을 누가 사주했는지, 그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파장은 클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러시아의 주요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은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을 경계로 전과 후로 분류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에는 체첸 반군으로 대표되는 북카프카스 지역의 이슬람 반군에 의해 주로 저질러졌다. 그러나 지난 2년 간은 우크라이나 측의 '사보타주'가 대부분이다. 그 수법을 보면, 체첸 반군들은 모스크바 지하철 사건과 같은 자폭테러나 모스크바 극장 사건 및 베슬란 학교 인질극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전시 상태에 있는 우크라이나 측은 주요 시설 폭파나 무력화를 겨냥한 사보타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테러 사건은 2004년 무려 333명이 희생된 베슬란 쉬꼴라(초중등 학교) 인질극이다. 체첸 반군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북카프카스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공화국의 작은 마을 베슬란의 한 쉬꼴라에 난입하여 어린이와 학부모 등 1,100명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 군과 대치했다. 물론 러시아 군은 사흘 만에 이들 체첸 반군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작전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이 186명을 포함해 총 3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2010년 3월에는 출근 시간 대에 모스크바 지하철 역 2곳에서 연쇄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로 인해 41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체첸과 인접한 다게스탄 자치공화국 출신 여성 2명인 블랙 위도우(Чёрные вдовы) 집단이 허리에 차고 있던 폭발물을 터뜨리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로 러시아의 모든 지하철역과 버스터미널, 기차역 등지에서 보안검색대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어 다게스탄의 이슬람 분리 독립 운동 세력은 그 지역에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2011년에는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37명이 사망했다. 러시아 당국은 범인이 북카프카스 출신이라고 밝혔다. 또 201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이 발생해 범인을 포함해 16명이 사망했다. 범인은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우즈베키스탄 소수 민족 출신이며 ISIS 집단에 소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범은 시리아 반군 진영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내 테러 조직인 ISIS-K (호라산) 집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크로쿠스 시티 홀 사건의 범인 집단과 동일한 집단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지원하는 세력은 미국, 혹은 우크라이나 정보당국인 것으로 보이는 것, 그 의혹이 여전히 짙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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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2002년 러시아 모스크바 두브로프카(Дубровка) 극장 인질 사건
    지난 22년 전, 2002년 10월 모스크바 두브로프카(Дубровка) 지역에 있는 발레 극장(Театральный центр на Дубровке, 통칭 두브로프카 극장)에서 대형 인질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의 체첸 반군 진압 작전에 의해 거의 궤멸될 위기에 몰린 체첸 무장 세력 수십명이 소련 시대의 뮤지컬 노르드-오스트(Норд-ост)가 공연 중인 극장안으로 난입하여 관객 등 9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진압 부대와 사흘간 대치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건은 현재에도 러시아에서 인질극, 테러 사건의 대명사로 떠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당시 900여 명의 관객들은 뮤지컬을 관람 중이었는데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었으며 배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소련군 군복을 착용한 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밤 9시 15분 두 대의 밴 차량이 극장 앞에 나타났고 그 안에서 무장한 남녀들이 하차하여 극장으로 난입했는데 이들은 15정의 AK 소총과 권총 11정, 수류탄 114개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기의 대부분은 오작동을 피하기 위해 구입한 신제품이었는데 이 무기들을 마련하는 것에만 무려 60,000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뮤지컬 상영 중이었고 갑작스럽게 현대 군복과 검은 옷을 착용한 이들이 배우를 밀치고 무대 가운데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원래 특수효과가 많은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상황을 뮤지컬의 연기의 일부로 여겨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하면서 이 상황 공연 연출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혼란한 와중에 관객들과 배우들은 출입구를 찾으려고 했으나 이미 출구는 그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봉쇄되어 갇히게 된다. 이들은 바로 체첸의 블랙 위도우(Шахидка)라고 불리는 자들과 자신들을 체첸 29사단이라고 소개한 체첸 반란군들이었다. 이들 중 여성이 19명, 남성 22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남성들은 전부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성들은 검은 과부단(Черная вдова группа)이라는 러시아군에게 전사한 체첸군의 미망인들 집단이었는데 모두 검은 니캅을 착용했다. 특히 19명의 여성들은 자폭 테러까지 준비했으며 이들을 지휘한 자는 모프사르 바라예프(Movsar Barayev)라는 자로, 당시 나이 23세였으나 검은 과부단은 주라 바라예바(Зура Бараева)라는 모프사르의 친척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질들에게 휴대폰으로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인질로 잡혀 있음을 알리라고 명령한 이후 극장 30여 곳에 폭탄을 설치했으며 50kg 가량의 폭탄을 2곳에 분산 배치하여 러시아의 스페츠나츠나 오몬이 돌입할 경우 폭발시킬 준비를 하였다. 밤 9시 45분 쯤에 인질극 상황이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밤 10시 15분경 러시아 경찰과 연방 보안국이 장갑차 2대, 경찰차 20대, 소방차와 구급차 5대를 동원하여 극장을 포위하고 보훈 병원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당시 사건 진압 총지휘자는 연방 보안국 부국장 블라디미르 프로니체프(Владимир Фроничев)였으며 당시 체첸 반군은 12살 미만의 어린이 20명과 임산부 등 30여 명의 인질은 자발적으로 석방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최정예 특수부대들인 알파 그룹과 빔펠 그룹 그리고 오몬(OMON)과 지역 내 FSB 대테러부대, 스페츠나츠 등을 급파하여 진압 작전에 대한 대비 태세를 갖추면서 인질 협상을 위해 협상단을 조직했다. 다음날로 넘어간 10월 24일 0시를 기해 체첸의 국회의원 아슬란베크 아스라하노프(Асланбек Асраханов)가 테러범들과 접촉하였고 인질들의 주선 하에 테러범들은 러시아 NTV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에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협상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17명의 인질을 추가 석방하게 된다. 협상단이 구성되고 극장은 러시아 연방군과 러시아 연방보안국 등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협상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이 나왔는데 체첸 내의 모든 포격 및 폭격 중단과 푸틴의 공식적인 체첸전쟁 종료 선언, 그리고 자찌스뜨까(Зачистка)를 중단하라는 내용이다. 자치스뜨까(Зачистка)는 "청소"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이는 체첸 반란군에 가담한 인사 및 그 친척들에 대한 보복을 중단하라는 의미이다. 원래 자치스뜨까(Зачистка)의 목적인 반군 세력의 색출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체첸 잔당과의 교전에서 나타나는 체첸 민간인에 대한 수십 여 명을 무차별 사살 및 거주지들을 방화하는 형태, 그리고 생존자들을 구금하여 갖은 인권유린을 저지르는 등 지극히 잔혹한 형태의 의미가 되었다. 이는 반군 구성원뿐만 아니라 반군의 친척 또는 반군에 협력한다고 의심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그에 대한 시작은 1차 체첸 전쟁이 발생한 옐친 정권 때부터였다. 사실 그러한체첸 전쟁의 발단, 그리고 그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급해 러시아를 흔들게 한 자들은 집단 서방과 미국이었다. 당시 체첸의 배후에는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었고 미국 또한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한 대테러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여기에 탈레반과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체첸 반군을 지렛대로 삼아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금전적인 부분도 아니고 테러범들의 요구 조건 자체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들어주기 어려운 부분이라 새벽 1시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에 대한 첫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우선 무력으로 진압할 것이며 몸값 지불 따위는 없을 것이고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들을 석방한다면 3국으로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새벽 4시까지 계속 인질을 석방하면서 총 100여 명의 인질들이 석방했는데 새벽 4시 극장 판매점 점원이었던 올가 로마노바(Ольга Романова)가 러시아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극장 안으로 난입하다가 경찰로 오인받아 테러범들에게 사살되면서 첫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어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일주일 이내로 체첸에서 러시아 연방군이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24일 새벽 5시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외국인 인질들에게 아침 9시에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어 6시에 러시아 연방 보안국 소령이 어린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극장으로 접근하였으나 체첸 테러범들은 그를 경찰로 오인하고 즉각 사살하였다. 체첸 테러범들은 8시부터 9시까지 미국, 영국, 독일에서 온 76명의 외국인 인질을 각국 외교관에게 직접 석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차질이 빚어져 연기되었다. 10시 체첸 테러범들은 국제 적십자사와 국경없는 의사회에게 대화 주선을 요구하는 한편 언론인이었던 안나 뽈리뜨꼬브스까야(Анна Политковская), 정치인 이리나 하까마다(Ирина Хакамада), 그리고리 야블린스끼(Григорий Явринский)를 협상자로 지목했다. 오후 1시에 체첸의 민요인 백학(Журавли)을 부른 유명 가수 이오시프 코브존(Иосиф Кобзон)과 적십자사 의사들이 극장 내부로 들어가 15분 동안 인질들과 대화한 후 여자 1명과 어린이 3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오후 3시에 코브존은 이리나 하까마다와 함께 다시 극장에 들어가 테러범들에게 인질을 더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테러범들이 이를 거절하여 소득 없이 돌아왔다. 25일 새벽 2시 의사인 레오니트 로살(Леонид Роcаль)이 의약품을 제공 및 인질들의 치료를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1시간 뒤인 새벽 3시 로살은 NTV 기자들을 대동하여 극장 내부로 들어갔고 테러범들은 인터뷰가 방송된다면 어린이 인질들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인터뷰 종료 1시간 후 반란군이 7명의 인질을 추가 석방했으며 이 날 정오에 8명의 어린이들을 적십자 직원들과 함께 석방했지만 이 날 방송된 인터뷰에서 테러범들의 목소리가 보도 되지 않고 자막 처리만 된 것으로 인해 테러범들은 크게 격분하여 더 이상 인질들을 석방하지 않기로 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정부가 이들에게 3국 망명을 제안한 것을 두고 반란군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무시한 것이라 생각해 더욱 분노했다. 이어 오후 3시 안나 뽈리뜨꼬브스까야(Анна Политковская)가 극장 안에서 테러리스트와 만남을 가졌다. 테러리스트들은 뽈리뜨꼬브스까야에게 푸틴의 체첸 전쟁 종전 선언, 가시적인 철군 조치를 약속하는 것이 테러범들의 요구 조건이라 전달했다. 이 날 밤 9시 친체첸 인사들이 다수 반란군과 접촉하여 인질 석방을 촉구하였고 인질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생명을 우선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반란군은 추가적인 석방을 거절하였으며 몇몇 러시아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을 극도로 자극하여 포악하게 변하게 하였고 테러범들은 정치인들과 인질을 교환한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밤 11시 30분 정체불명의 남자가 극장 현관을 통해 극장으로 들어갔는데 테러리스트들은 그를 러시아 경찰이라고 생각하고 인질들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이에 흥분한 남성 인질 한 명이 폭탄을 착용하고 있던 여성 테러범에게 달려 들었다가 즉각 사살당했다. 2명을 사살한 테러리스트들은 러시아 지휘본부 측에 전화하여 구급차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부터 테러리스트측은 인질들의 휴대폰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질들을 처형할 것을 언급했고 추가적으로 요구사항 3가지를 늘렸다. 첫 번째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목한 러시아 남부 군관구 대표인 빅토르 카잔체프(Виктор Казанцев) 상장이 극장에 출두할 것, 두 번째, 체첸 내의 친러시아 주요 인물을 극장으로 데려와서 러시아인 인질과 교환, 세 번째, 두브로브카 극장을 빠져나올 안전 통로의 보장이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각료들은 모두 테러범들과 협상은 없으며 26일 새벽을 기해 극장 진입 작전 내용을 하달한다. 마침내 26일 새벽 5시 갑자기 극장의 모든 창문으로 서치라이트가 비쳤다. 새벽 5시 15분 극장의 환기구와 배관을 통해 연기가 들어오자 테러범들과 인질들은 처음에는 불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연기는 화재 연기가 아니었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의 일부는 바로 준비한 방독면을 착용했지만 방독면을 착용하지 못한 테러범들도 많았다. 이어 러시아 군사경찰이 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이 가스는 펜타닐 계통의 마약성 마취제로 흡입하면 정신을 잃고 호흡 기능이 마비되며 질식사 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신제품이었다. 인질 700여 명과 테러리스트 33명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이 5시 35분부터 진압작전이 개시되었고 알파 그룹과 빔펠, 그리고 OMON 병력이 극장 안으로 돌입했다. 이어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으나 체첸 측의 저항은 가스 중독으로 인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교전은 작전 개시 2시간이 지난 오전 7시에 종료되었다.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한 체첸 반군 40명은 전원 사살되었고 인질 700여 명 중 공식적으로 131명이 사망했다. 이 진압 작전에서 러시아군이 인질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가스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분명한 대테러 대응 기조를 내놓으면서 비판에 대한 반박과 함께 정당화했다. 검은 과부단의 대부분이 자폭 테러를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치 못해 발생한 긴급조치였다. 이 인질극의 파장은 컸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최근 오스카 상 7관왕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1번째 첩보 스릴러 영화이자 2020년에 개봉한 테넷(Tenet)의 오프닝 격인 우크라이나 키예프 오페라 극장 테러가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재조명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사건 이후, 테러 행위에 대한 형법을 개정해, "무협상,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테러나 인질극을 통해 더 이상 러시아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이 이 때부터 확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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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코로나 이전의 최악의 팬데믹(Pandemic), 유럽의 페스트(Black Plague) 이야기
    페스트(Pestis)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의해 일어나는 급성 열성 전염병으로 독일어인 'Pest'의 독음이면서 영어로는 'Plague'라고 한다. 영어 단어 Plague 자체가 '전염병'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질병학에서 페스트로 불리는 'Plague' 자체가 전염병을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세 페스트 팬데믹이 매우 참혹하였고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모든 전염병을 통칭하는 상징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흔히 한자로 흑사병(黑死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 자체가 혈관 내부에서 피가 응고되며 신체 말단이 괴사하는 증상이 발현되어 실제로 사후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 페스트라는 이름은 1894년 스위스의 의사 알렉산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과 일본의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는 각각 독립적으로 홍콩에서 페스트 병원체를 분리해내면서 "쥐벼룩이 페스트의 매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르생은 자신을 지원했던 파스퇴르 연구소를 기념해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Pasteurella pestis)라는 학명을 붙였다. 1967년 페스트균이 새로운 속으로 재분류되면서 예르생을 기념해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학명으로 재명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된다. 사망자 수의 추정치로 볼 때 독보적인 1위인 천연두(Smallpox), 인플루엔자(Flu, Grippe)와 더불어 대유행(Pandemic)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던 질병이 페스트다. 그 중에서 천연두는 오래 전에 박멸된지 오래된 질병이지만 페스트는 중세 시대 당시, 유럽에서 검은 사탄의 재림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악명을 떨쳤던 것에 비하면 현재 많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다. 인플루엔자, 흔히 독감이라 불리는 질병도 세계적으로 매년 수십만 명, 심한 경우 100만 명 단위의 인명피해를 내기 때문에 그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질병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에 해당되지 않지만 열대지방 및 아열대 지방을 중심으로 말라리아나 에볼라도 가장 위험한 전염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페스트균의 경우, 현재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부분적으로 분포해 있다. 페스트 균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게 전파되는 질병이다. 역사상 아주 작은 생물에 지나지 않던 벼룩이 모기와 더불어 인류의 치사율이 가장 높은 위험한 생물로 꼽히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페스트 질환의 주요 형태는 가래톳 페스트(Bubonic plague), 패혈증형 페스트(Septicemic plague), 폐렴형 페스트(Pneumonic plague) 등으로 구분된다. 중세 시대에는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인구의 7500만~2억 명 남짓이 인류가 희생되었다. 페스트의 어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틴어 단어인 'Pestis'로 이 단어는 원래 특정 질병이 아니라 전염병을 지칭하는 라틴어의 보통명사로 나타난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공식적으로 특정 질병의 고유명사로 명명이 되었으며 학명으로도 정해졌다. 또한 라틴어 문헌에서도 전염병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와 특정 질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2가지의 문법을 모두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병의 증상을 지칭하는 명칭은 블랙 플라그(Black Plague) 혹은 흑사병(黑死病)으로 알려져 있다. Black Plague라는 단어는 14세기 중기에 급속도로 퍼진 질병의 명칭을 후대에 재지정한 것이고, 14세기 당시에는 Great Pestilence (대 페스트), Great Plague (대 역병), Great Mortality (대 사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병이 진행되면서 전신의 혈액 내에서 혈전이 생성되고 지혈 작용이 적절히 일어나지 않아 출혈이 발생하는 이른바 파종성 혈관 내 응고(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를 유발하여 광범위한 반상 출혈 및 사지와 코 등의 신체 부위에 검은색의 괴사를 일으킨다. 이 때 살이 검붉은 자줏빛으로 썩는 증상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병명이 오역되기도 했다. 당시 이 병을 지칭하던 단어 중에 라틴어로 'Atra Mors'가 있었는데, 'Atra(남성형 : Ater)'는 '검다'라는 뜻이 있으나 또한 '끔찍하다'라는 뜻도 있어 문맥 상, '끔찍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스칸디나비아의 기록자들이 '검은 죽음'이라 오역하였고, 그것이 영어권과 독일어권에 그대로 들어와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페스트의 발병 원인은 페스트균에 의한 것이지만, 주요한 두 가지 유형인 가래톳 페스트와 폐렴형 페스트는 감염 경로가 다르게 나타난다. 가레톳 페스트의 감염 경로는 페스트균을 보균하고 있는 쥐와 그 쥐의 피를 흡혈하는 벼룩에게 물려 감염되면서 나타나고 폐렴형 페스트는 감염 환자들의 기침이나 체액, 혹은 쥐와 같은 감염 동물들의 분뇨나 가래 등이 공기 중에 퍼져 호흡기 질환으로 감염되는 특성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야생의 설치류(齧齒類)인 다람쥐와 쥐, 비버 등의 동물들의 간을 숙주로 한 벼룩에 의해 흡혈되어 생성되는 전염병으로 인식되었으며 사람에 대한 주 감염원으로 지목되는 것은 보통 다람쥐와 마못(Marmot) 등으로부터 벼룩이 감염된 집쥐와 곰쥐 등이다. 이러한 설치류들이 구제되지 않고 페스트균을 다량으로 보균한 채, 대량 번식하면 그때부터 인간에게 큰 위협으로 존재하는 병이기도 하다. 이러한 보균동물이 존재하고 있는 지방에는 풍토병(風土病)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중국 동북부와 중국 대륙의 오지, 몽골 및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은 그 이전에 유행하여 보균동물들이 잔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근 등의 재해가 닥치면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유행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최근에 중국에서 발병하는 사건 또한 있었으며 라틴아메리카 중부에서 북부, 아프리카 중부, 미얀마, 이란,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2000년 이후 10년 사이에 유행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기록을 추가한다면, 2009년 8월에 중국 청해성 장족자치주에서 12명이 폐혈증형 페스트에 감염되었고 이 중에 3명이 사망했으며, 직, 간접적으로 페스트에 접촉한 사람 300여 명을 모두 격리 조치한 바 있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수단 공화국 서부에서는 6년째 흑사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감염된 설치류를 사냥한 고양이가 설치류 자체보다 더욱 위협적인 페스트의 매개체로 꼽히고 있는 등, 현 시대에도 위협적인 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세 유럽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균 감염은 증세가 격심하고 사망률도 높으며,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법정 제1종 전염병인 동시에 검역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다. 환자가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 튀어나온 병원균에 의하여 감염되는 비말감염(飛沫感染), 또는 환자의 분비물 및 배설물이 부착된 물품으로부터 기도감염(氣道感染)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보균동물을 흡혈한 벼룩에 물려서 감염되는 경우가 많다. 병에 걸리면 장기간의 면역을 얻는 것이 드물게 다시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페스트균 감염의 일반적인 증세는 갑자기 오한전율(惡寒戰慄)과 더불어 40℃ 전후의 고열을 내고 현기증과 구토를 하며 의식이 혼미해진다. 페스트의 잠복기는 2~5일이고, 순환기계(循環器系)가 강하게 침해받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몇 가지 유형의 병으로 분류되어지는데, 주된 유형은 선(腺) 페스트와 폐(肺) 페스트의 2가지 병 형태로 구분된다. 발병했을 때 병의 진행속도가 굉장히 빠르며 에볼라조차도 페스트의 진행 속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 놀라운 전파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전염병 중 사람을 가장 단시간에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급성 페스트로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6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치사율도 굉장히 높다. 보통 치사율과 전염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본다면 50~90%에 달하는 흑사병의 치사율은 전염성 못지 않게 굉장히 높은 편에 들어간다. 현대에 들어 간혹 나타나는 흑사병의 치명률은 10%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 이유는 페니실린(Penicillin)과 더불어 항생제와 백신이 발달하고 독시사이클린(Doxycycline) 등의 치료제가 발달해 중세 시대나 중근세 시대처럼 치사율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의료 시스템이 미비한 국가에서는 50%를 넘기기도 한다. 특히 폐렴형 페스트의 경우 90%의 치사율을 기록하는 아직까지도 방심할 수 없는 무서운 병 또한 페스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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