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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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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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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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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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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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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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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커피의 세계사, 세계의 경제를 뒤흔드는 씨앗 이야기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서 커피 수출로 막대한 이득을 보던 예멘인들은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16세기 후반부터 커피 종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고 수출할 때도 구운 커피콩만을 내주었다. 그러나 1685년 네덜란드가 스리랑카, 실론 섬을 정복하고 식민화 시켰을 당시 현지 무슬림들이 커피나무를 키웠다는 기록이 나타나면서 이미 17세기에 다른 지역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70년대에는 인도의 수피 성인이자 커피계의 문익점으로 알려진 바바 부단(Baba Budan)이 메카 순례 후 경유한 모카에서 7알의 커피 열매를 품에 숨겨와 인도 남서부 해안에서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실론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바바 부단이 해안가에서 재배하기 전에 수피 성인 다다 하야트(Dada Hayat)의 사당 근처에 심었는데 단 한 알만이 싹을 틔웠다. 이 씨앗 한 알이 19세기까지 이어진 티피카(Typica) 계통의 최고급 품종이자 인도 커피의 조상인 올드 칙(Old Chik)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1619년부터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자바에 대한 식민 지배에 나섰던 네덜란드는 1690년부터 예멘 아덴에서 밀수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기후 조건 상 맞지 않아 몇 차례 실패 끝에 1699년에서야 안정적인 재배가 시작되었고 18세기 초엽 자바는 모카에 이어 동남아시아 최대 커피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더 나아가 네덜란드는 1718년부터 라틴아메리카 수리남으로 커피콩을 가지고 들어가 커피 집단 농장을 만들고 재배에 나섰다. 당시 커피 열풍이 불던 프랑스에서 커피를 사재기하기 시작하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프랑스의 사재기로 인해 커피가 부족해졌고, 이에 술탄이 유럽에 커피 수출을 금지하게 되면서 유럽은 때아닌 커피 대란을 겪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는 1713년 네덜란드와 위트레히트 조약을 맺으며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나무를 입수한 것을 바탕으로 1697년에 스페인으로부터 점령한 식민지 생 드망 (현 아이티)에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1715년에 시작한 첫 시도는 10년 만에 실패했지만 1723년 카리브 해의 다른 섬인 마르티니크에서 해군 장교 마티유 드 클리외(Mathieu Francois D'ceus de Clieu)가 티피카 품종을 가지고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다시 아이티와 과달루프 등에 옮겨 심게 되는데 아이티의 경우, 본래 카카오, 사탕수수 재배에 주력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1725년의 허리케인과 1727년의 대지진으로 인해 카카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붕괴하게 되자 커피 농장을 개척해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아이티와 과달루프에서의 티피카 품종 재배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1730년대부터 프랑스의 커피 공급은 안정화되었다.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가 없었기 때문에 모카나 자바로 향하는 노선보다 카리브 해의 식민지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써 아이티의 커피는 운송비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무상 노동력으로 인해 가격 경쟁에서도 아이티산 커피는 저렴한 값을 자랑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기존에 수입처이던 중동에 오히려 커피를 수출하게 되었다. 1750년에 아이티는 전 세계의 커피 중 절반 가량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앞서 언급한 그대로 네덜란드령 기아나인 수리남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던 1722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죄를 짓고 수리남으로 도주한 물루주(Muluju)라는 사람이 기아나에 살고 있는 연인을 만나게 허가해주는 대가로 수리남의 커피나무를 밀수해주는 계약을 통해 기아나에도 커피가 전해지게 된다. 그리고 1727년 수리남의 네덜란드 인들과 기아나의 프랑스 인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자 남쪽 브라질의 포르투갈 인들이 이에 대해 중재에 나서게 된다. 이 때 파견된 포르투갈 인 프란시스코 드 메르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의 부인을 유혹한 후, 작별 선물로 받은 꽃다발에 숨겨진 5그루의 커피 묘목을 브라질에 가지고 들어왔고 이것이 후에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는 브라질에 커피가 들어온 경위라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의 부인에게 금을 비롯해 여러 보석들로 환심을 산 후, 기아나로부터 밀수에 성공해 브라질 해안가에서 재배했다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 재배를 도입하는 과정들이 각종 속임수와 유럽 내의 권모술수로 얼룩진 것과 달리, 인도양에서는 비교적 합법의 형태를 갖추고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 1712년 프랑스의 사절단이 예멘을 방문했을 때, 중이염을 앓고 있던 라시드 왕조의 군주 알 마흐디 무함마드(Al-Mahdi Muhammad)를 이 때 동행했던 의사가 치료해 주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절단은 커피 나무를 청하게 된다. 그러자 알 마흐디 무함마드는 1715년 프랑스 상인 안벨에게 커피 묘목 60그루를 하사하였으며 안벨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막 식민지로 삼았던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부르봉(레위니옹)섬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염분 농도가 높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항해 도중 40그루가 말라죽었다. 나머지 20그루는 마다카스카르에 도착해서 1716년 현지 수도원 정원에 심었는데 그 중에서 단 두 그루만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 둘 중 하나도 말라죽고 남은 한 그루가 열매를 맺으며 부르봉 품종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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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9
  • 게르만 계통 민족들과 켈트족의 동족설은 사실 확인이 되었는가?
    독일 유전과학연구소에서 2004년 할슈타트와 하라인 지역에서 발굴된 켈트 인 유골과 프랑크 족,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 롬바르드 족, 고트 족 등 게르만 계통 유전자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90% 이상의 유사한 유전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구분될 수 있었던 것은 게르만 계통 민족의 언어와 켈트인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인데 이들의 언어가 다른 이유는 켈트인들이 주로 유럽의 고지대에 살았고 게르만계 민족들이 저지대에 살았다. 상대적으로 북독일 지역과 중부 독일 지역, 폴란드 지역은 알프스나 피레네가 위치한 지역과 고도와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사진 자료를 검토해보면 독일 유전과학연구소의 Müller Rosemarie는 Reallexikon der Germanischen Altertumskunde이라는 사전을 만들면서 켈트와 게르만족이 동족일 확률이 높으며 실제 유전자 배양에서 일치된 형태가 많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Katz Solomon는 게르만 족이 노르만 족과 동족이며 스칸디나비아 기원설을 끝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에 할슈타트를 뛰어넘는 고대 유적이나 할슈타트의 켈트-게르만계와 유사성 있는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고 이 역시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동안 유럽 중부 지역 전역에 걸쳐 발견된 게르만계 관련 유물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또한 고(古) 노르만어와 고(古) 게르만어가 동일한 형태의 수사를 가지고 있고 두 언어 모두 스칸디나비아 계통이라는 Hachmann Rolf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가 연구했을 때 이 역시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았다. 할슈타트에는 19세기 게오르그 람자와(Georg Ramsauers)가 발견한 무덤 외에도 청동기 시대 말기(B.C. 900~B.C. 800)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광산 지하도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갱도의 전체 길이는 3,750m, 총면적은 3만 평방 km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넓었다고 하며 이곳에는 몇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롬바르드, 수에비 족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갱도 속에서는 당시 이들이 착용한 의복과 가죽 띠, 소금 덩어리를 파내기 위한 도구 등이 발견되었고 이는 켈트 족이 사용된 유물들과 대략적으로 유사했으며 켈트족처럼 돌무더기 무덤을 가지고 있었고 관이 놓여 있는 형태도 같았다. 이는 거의 같은 민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매장 풍습으로 보았고 추가 발굴을 한 비엔나 과학 아카데미 측도 1892년 보고서를 냈을 때 이를 매우 중시하여 기술했다. B.C. 600년경, 할슈타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라인(Harain)이라는 지역에 새로운 암염광이 개발되면서 할슈타트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라인 지역은 교통이 편리해서 할슈타트보다 교역에 더 적합했고 할슈타트와 하라인 두 지역에서 게르만의 원형으로 보이는 종족들의 유골들이 약 60여구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켈트족과 유전적으로 유사한 켈트인 추정되는 유골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프랑크 족과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이 있었으며 이들은 켈트인과 섞여 살았고 두 종족이 혼혈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할슈타트는 소금 교역지로도 번영을 누렸는데, 기존의 학설과 달리 북쪽 보헤미아에서부터 남쪽 이탈리아 지방까지 이미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로 접어든 상태였다. 이것이 기존 스위스 라텐 지역에서 발굴된 라텐 청동기 문화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럽 최초의 철기 문화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는데 언어적으로도 당시만 해도 게르만계 언어와 켈트계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라인에서 이들의 유골이 섞여 나왔고 연대는 거의 동일 시기인 B.C 800~700년으로 나타났으며 섞여 거주한 것으로 볼 때 의사소통도 그리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덤에 따라 부장품의 종류와 매장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후대 연구자들은 당시 켈트와 게르만 사회가 신분제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종족 계통에 대해 크게 구애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켈트인과 게르만계 민족 모두 황금, 혹은 은제, 청동 장식들이 출토되었고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신분제였지만 종족이나 민족 계통으로 신분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로마 측에서 기록도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갈리아 전쟁기>에서는 카이사르가 사로잡은 베르킨케토릭스 왕을 켈트 족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게르만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중국 사서에서 진개가 고조선 땅을 천리 취한 것과 2천리 취한 것의 기록이 다르듯, 그리고 동호의 땅을 취한 것과 조선의 땅을 취한 것이 다르듯, 서로 상이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도에서 분포도를 보아도 같이 겹쳐 살고 있는 지역이 많다. 비록 카이사르나 플루타르코스가 켈트와 게르만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 생각해서 상반되게 적어도 별 문제 없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기록들, 과학적인 분석, 고고학적인 분석 등을 통하여 둘은 동일 민족, 혹은 켈트의 일파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이 햇갈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 첫째는 무엇으로 두 민족을 구분했으며 함께 섞여 살았기 때문에 통혼이 자유로워 혼혈 계체들이 많이 탄생했으며 이들을 또한 무엇으로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갈려 나갔는가도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물론 이 햇갈리는 부분은 현재 연구 중이기 때문에 본 연구자가 아직은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이런 것을 비공개 블로그에 적고 있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기록 문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카이사르 정복 후에 기록 문화가 나타나지만 그 양도 많지 않아 고고학이나 현대 유전학, 언어학, 민족학, 인류학 등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가 가능한 분야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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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인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한 이유
    인도는 한국보다 상황이 아주 안좋은 국가다. 북으로는 거대한 중국과 영토 분쟁을 하고 있다. 고대 시대부터 중국과 인도는 사이가 의외로 좋았던 편이었다. 영토 분쟁 지역이 겹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고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할 부분들도 많았다. 더불어 서로 간의 영토가 겹치지 않으니 두 나라 사이에 전쟁도 거의 없었다. 중국에 뿌리내린 불교의 원산지가 인도였으며 그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에서 인도를 천축국이라 부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 20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인도가 무굴제국 이후 진정한 통일국가를 만든 일이 없어 중국 같은 큰 나라와 충돌할 만한 상황도 잘 만들어지지 않았고 과거 중국은 현재 영토보다 더 서쪽 영역이 적은 상태였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지역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였기에 서로 직접적으로 상대할 일이 없었던 것도 있다. 19세기 말, 인구 밀도나 국경 개념이 희박했던 지역에 수천 km 떨어진 영국의 외무부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임의로 국경선을 굿게 되면서 인도의 독립 후에 양국의 충돌을 새로이 불러온 셈이 되었다. 마침내 1962년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에서 이른바 인중전쟁으로 불리는 첫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이 전쟁에서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주요한 영토 분쟁지역은 중국이 소유한 카슈미르 일부 지역인 아크사이친, 인도가 소유한 아루나찰 프라데시이다. 물론 중국 측이 소유한 영토가 인도가 소유한 영토보다 여러모로 쓸모없는 영토지만 원래 인도 영토였기에 인도 정부 측에서 중국 정부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2017년 중국과 인도의 완충 국가인 부탄이 국경에 접하고 있는 도클람 지역에 도로를 신설하면서 부탄 측이 크게 반발했고 인도도 역시 중국을 비판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후 국경 지대에 두 나라는 각각 3,000명의 병력들이 대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며 이어 인도군은 중국과 대치 국경지역에 최대 2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중국 측에서는 이에 대응해 군수물자와 수술용 혈액을 티베트 자치구에 집결시키는 등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다가 2020년 6월 16일에는 두 나라 사이에서 물리적인 충돌까지 발생한다. 2015년 이후,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하면서 파키스탄과 미얀마, 스리랑카에 파이프를 박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전통적인 적대국이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핵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인도도 핵을 갖고 있긴 하지만 중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에 인도는 매우 긴장하는 분위기이다. 사실상 종교 때문에 갈라선 인도와 파키스탄은 역사적인 문제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인도는 무굴제국의 통치시기를 이슬람의 강점기로 인정하고 있는데 비해 파키스탄은 전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이기에 무굴제국을 공식적으로 인도를 통치한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카슈미르를 두고 두 나라간의 전쟁 비슷한 충돌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가 2017년 11월에 인도 동부 지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운남성 일대를 동남아시아 일대일로 최대거점으로 육성하고자 잇단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지리적으로 운남성은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미얀마 군부가 중국의 일대일로를 다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나섰다. 중국은 인도양 진출을 위해서 미얀마에 오랜 기간동안 공을 들이고 일대일로 참여를 독려해 왔고 그것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는 거대한 중국 세력으로 인해 동쪽 (미얀마), 서쪽 (파키스탄), 북쪽 (중국)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고립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의 남쪽에는 스리랑카가 있다. 역시 인도와 스리랑카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라족들은 일단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의 주류 민족 타밀족과 인도-아리아와 드라비다로 민족이 갈라지기 때문에 민족 간의 문제가 있어 오래전부터 계속 충돌해오던 관계였다. 게다가 종교도 인도는 힌두교이고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다. 종교적인 부분에서의 마찰도 적지 않다. 스리랑카 내전도 스리랑카에 거주하는 소수 타밀족과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라족과의 분쟁으로 일어난 전쟁이었고 인도도 이 전쟁에서 남부 타밀나두의 타밀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의 편을 들어줘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 이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가 끼어 들어오면서 양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중국이 스리랑카에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함반토반 항구를 임차하고 콜롬보 항구까지 개발에 나서자 인도는 남쪽의 스리랑카까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 빌린 거액의 부채를 갚지 못한 스리랑카는 함반토타 항구 운영권을 99년 동안 중국에 조차해주는 조건으로 넘겼고 중국은 여기에 자국의 군함과 해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완전 포위된 인도는 말 그대로 국가 자체가 백척간두의 믹서기 칼 날 위에 서있은 셈이다. 그래서 인도는 국가 예산의 43%를 국방력 강화로 쓰고 있다. 2020년에 인도와 중국간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인도 측은 러시아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매했다. MiG-29 UPG 버전 21대와 Su-30MKI 12대 총 33대의 러시아 전투기를 긴급 도입했다. 그리고 2021년 4월 28일에 러시아는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인도에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제공했고 인도의 세럼 인스티튜트가 2021년 9월부터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생산하게 되었다. 해군은 호위함, 구축함, 항공모함, 잠수함 가릴 것 없이 러시아제, 혹은 러시아와 합작 개발한 함정들이 존재하며, 공군도 MiG-21이나 Su-27 계열기들을 다수 운용 중이고 Su-57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심지어는 탄도미사일이나 대공 미사일까지 러시아하고 협업 중에 있다. 2021년 11월 14일에 첨단 방공미사일 S-400의 인도 공급이 시작되어 러시아 무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무기들은 자국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 적국인 파키스탄과 중국으로 향해 있다. 한편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 점화된 미국-중국 패권경쟁의 일환이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도-태평양 지역의 대중국 포위망의 주요 국가로서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만큼 인도는 1962년 인중전쟁에서 패배한 전력도 있기 때문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도모하고 있다. 미중간 패권경쟁으로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소비시장이 필요한 미국이 인도를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2016년에 인도와 미국은 Logistics Exchange Memorandum of Agreement 에 서명했고 인도는 미국의 주요 방위 파트너로 선언되었다. 미국은 일본, 인도와 함께 인도양에서 연합훈련을 1992년부터 행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이 수립되었다. 중국과 인도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인도는 미국과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했고 최근 이런 인도와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이 자주 실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는 러시아와 미국, 서방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아주 능숙하게 잘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를 통해 중국의 위협을 외교로 견제하고 미국을 통해 중국과 싸울 수 있는 우방을 확보했다. 그리고 두 나라로부터 무기를 수입함으로써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인도는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K-9 자주포를 수입했다. 그 자주포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위협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인도에게 있어 무기 판매의 주 고객이 되고 있다. 군사적 화력에서 중국에게 밀리는 인도는 러시아와 미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중국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 말그대로 "친러용미", "친미용러"를 자유자재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두 나라 사이에서 인도는 중립이 가능했던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인도는 처음부터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충분히 밝혔다. 현재 러시아와 인도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현재 경제 제재로 인해 달러가 요긴하게 쓰이지 않을 경우, 인도에 와서 달러로 바꾼 다음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인도를 90일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으며 뉴델리와 꼴까타, 뭄바이에는 모스크바 세레메쩨보로 연결되는 직항 노선이 있다. 인도는 분명 안보에서도 한국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다. 경제적 여건도 1인당 GDP 2,000불로 한국보다 더 좋지 않다. 그런데도 이번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가 인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고 혹시나 모를 중국의 배신?에 러시아 입장에서 인도는 보험용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유능한 지도자인 모디 총리의 현명한 결단에 나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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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반 푸틴, 반러 세력의 끔찍한 사보타주가 러시아를 단결시키고 있다.
    러시아의 대선 투표 분위기가 다른 대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 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반푸틴, 반러 세력의 선거 방해, 미국이나 집단 서방의 반푸틴, 반러 세력에 대한 지원,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푸틴의 5번째 연임에 대한 도전 등,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미사일 포탄과 드론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모스크바를 비롯해 러시아 곳곳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붓기, 기표소 방화, 화염병 투척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사보타주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의하면 러시아 대선 투표 첫 날인 15일과 둘째 날 16일에 일부 지역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공공 건물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그러한 소동에 기표소가 방화로 불타게 되었고 각지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가 투척되며 선거 방해 행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선거방해 행위는 러시아 형법 제141조(선거권 행사 또는 선거관리위원회 활동의 방해) 1항과 2항에 의하면 "선거권 행사 또는 국민투표 참가를 방해하거나 비밀투표 위배행위를 하거나 선거관리위원회 또는 국민 투표 실시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한 자는 200,000 루블 이하 또는 18월 이하의 임금 또는 기타 수입에 해당하는 벌금, 또는 1년 이상 2년 이하의 교화, 또는 6월 이하의 구류, 또는 심각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들이 이번 대선에서 계속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2년이 넘도록 진행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와 수감 중에 돌연사한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알려졌다. 전국 각지 기표소에 불을 지른 뒤 이를 휴대폰으로 찍는 할머니가 있었고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뒤 이를 촬영하는 20대 여성, 그리고 화염병 투척 순간을 기록하는 여학생 등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들을 보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아닌 뭔가 신념에 차 있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투표소 방화사건을 본다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학교로 화염병이 날아들었고, 우랄 지역 한티만시 자치구에서는 한 여성이 화염병으로 투표함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15일 첼랴빈스크에서는 80대 여성이 투표소에서 폭죽을 터트렸고, 투표소의 기표소가 불타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는 방화, 기타 인명살상의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로 명백히 테러 행위에 간주된다. 러시아 형법 테러 관련 조항을 보면 205조 1항에는 "권력기관 또는 국제기구의 결정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폭발, 방화, 기타 인명살상의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 막대한 재산적 손해를 초래하는 행위, 또는 기타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발생하게 행위를 행하거나, 위와 같은 목적으로 위와 같은 행위의 협박을 행한 자는 8년 이상 1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선거 방해 공작까지 하여 이와 같은 행위들을 저지른 자들은 두 죄목 모두 합산해 17년 형에 처해질 수 있다. 엘라 핌필로바(Элла Памфилова) 러시아 선관위 위원장이 밝히길 이틀 전, 16일 20개 지역의 29개 투표소에서 조직적인 투표 방해 사건이 발생해 214개 투표함이 훼손됐다면서 투표함의 보안을 강화할 것을 언급했다. 팜필로바 위원장은 투표함에 녹색 액체를 부은 사람은 선거 방해 혐의로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라면서 그들은 돈을 받고 이와 같은 쓰레기 짓을 했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녹색 잉크 테러에서 녹색이 주는 상징성이 존재한다. 지난 달 옥중에서 사망한 나발니는 2017년 괴한으로부터 녹색의 살균제 테러를 당해 실명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 선관위 측은 녹색 잉크로 훼손된 투표함은 봉인한 뒤 새로운 투표함을 설치, 투표를 계속하도록 조치했다. 물론 녹색 잉크로 젖은 투표 용지를 두고 표결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지에 대한 여부는 추후 논의된다. 이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된 뒤 사건을 저지른 이유를 본다면 모스크바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여성은 우크라이나의 정보 기관에 속았다고 진술했다. 즉, 우크라이나의 정보 기관의 사주를 받았다는 직접적인 범인과 증인을 확보한 셈이다. 다른 잉크 테러를 저지르려는 순간 체포된 한 남성은 은행 대출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전화로 받고 이같은 행위를 하게 됐음을 진술했다. 또 다른 여성은 3만 루블을 받는 것으로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모두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이 있고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의 배후에는 미국과 집단 서방이 있다. 이러한 녹색 잉크 테러가 모스크바를 비롯해 보로네시, 로스토프, 카라차이-체르케시야, 크림반도의 심페로폴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당사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으며 형량을 낮추기 위해 불쌍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게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도발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이를 겨냥한 우크라이나 군의 강한 공격이 이어졌다. 헤르손 주 카호프카와 브릴료프카 투표소에는 15일 우크라이나군의 포탄이, 자포로제 지역에선 드론이 날아들어 투표가 중단되었다. 또다른 도시에서는 투표소 인근 쓰레기통에 설치된 즉석 폭발 장치가 폭발했고, 베르단스크에서도 유사한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러시아 국경 도시를 겨냥한 우크라이나 군의 포격도 이어지고 있다. 벨고로드 주 주지사인 뱌체슬라프 글라드코프(Вячеслав Гладков)는 16일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으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고 적시했다. SNS에는 벨고로드에서 포격으로 차량이 파괴되고 화염이 치솟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는 다분히 민간인을 목표로 한 공격이다. 또한 사마라 지역의 정유 공장 2곳도 이 날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더불어 사이버 테러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16일 웹사이트와 도메인 등이 디도스 공격(DDoS)을 받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비필수 온라인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와 같은 사이버 디도스 공격은 특정 서버에 많은 양의 접속을 유발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키는 해킹의 일종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긴급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와 무기를 받기 위해 러시아 대선 기간 테러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면서 대선 투표를 방해하려는 우크라이나의 도발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표 방해를 위한 우크라니아의 도발과 반러 세력 및 나발니 추종자들, 반푸틴 세력의 행위들이 오히려 역풍을 부르고 있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WP)가 15일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거의 매일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받는 벨고로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측의 이번 미사일 공격에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격이 러시아의 사기를 약화시키기는게 아니라 자신들이 희생자이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더욱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겁을 주고 있지만, 자신들은 여기에 꺾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푸틴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고 말하며 오히려 러시아 전체를 단결시키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결국 그러한 결과가 개표를 앞두고 출구조사에서 87.97%의 푸틴 대통령 압승을 불러오고 있다. 이런 수준이면 현재 개표가 진행되고 있지만 80% 이상의 득표는 가볍게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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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못했던 이유
    1996년 핵을 완전히 제거한 우크라이나는 1998년 당시 러시아의 주도로 이란 부셰르(Bushehr) 지방에 핵 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이란이 미국의 적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미국의 심기를 심하게 거스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란의 핵실험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미국의 적국을 돕는 것이니 우크라이나에 경제 원조를 중단한다는 초유의 발표를 하게 된다. 원래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행동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여전히 핵 기술자들이 남아있고 발전소 설계도에 대한 복사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서 포스팅했던 유즈마쉬(Южмаш)와 유즈노예(Южное)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저렴한 전기 공급을 위해 드네프르 강의 수력발전과 테르노필과 지토미르에 설치한 풍력발전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결국 당시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핵 발전소 건축을 허가해달라 요청했고 결국 클린턴과 미 행정부의 허가를 받게 된다. 핵 발전소를 허가해주고도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이를 군사적인 방향으로 전용할 것을 우려하여 미국과 우크라이간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협정 (Agreement for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Ukraine Concerning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까지 맺으며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폴란드 등 옛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립 직후 나토에 서둘러 가입했던 것에 비하여 우크라이나에 나토가 사무소를 차리던 당시인 1997년에는 혹시나 모를 우크라이나의 핵확산 및 유즈마쉬의 기술로 러시아와 연대해 크림반도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실험할 것을 우려하여 나토 가입을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내 나토 가입 여론은 찬성 37%, 반대 28%, 미결정 34%로서 그다지 환영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기에 친러성향이 높았던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해군까지 상시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공공연히 반러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도 우크라이나가 이란 부셰르(Bushehr) 지방에 핵 발전소를 건립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문제로 인해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유의미한 공식 외교관계는 1996년에 양국이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쉽(Strategic Partnership) 하나가 전부였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러시아가 경제적 공황을 심각하게 겪고 있던 암혹기였기에 그다지 큰 위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서 부터였다. 군사행동을 통해서라도 독재국가에 미국적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네오콘이 장악한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의 좋지 않았던 우크라이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인 레오니드 쿠치마도 역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는데 레오니드 쿠치마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이라크에 파병까지 결행하면서 미국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언론인들을 옛 KGB의 방식처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미국의 적이었던 사담 후세인에게 군사장비까지 팔아 먹으며 돈을 챙기는 이중적인 면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적극적인 요청에 결국 우크라이나는 2002년 나토에 대한 가입 의사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고 오렌지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으로 집권한 친서방파 정치인 빅토르 유센코는 NATO 가입 의지를 피력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의 국내 여론은 나토 가입에 대해 점점 더 부정적인 상태였고 반미와 친러 성향이 짙어졌었는데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 및 전쟁과 더불어 금융위기와 같은 실정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가 매우 낮았다는 점과 빅토르 유센코로 대변되는 친서방파가 매우 무능했기 때문에 결국 민심을 잃어 나토 가입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미국은 나름대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게 되지만 2006년 우크라이나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했던 최초의 합동 해상 훈련이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취소되는 등 민심은 여전히 반미 여론이 강했다. 실제로 2012년 부시 대통령 임기 종료 직후 여론 조사기관인 갤럽이 실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미국 리더쉽에 대한 신뢰도는 33%로서 유럽 국가들 중 중하위권에 속하는 수준이었으며 2008~2009년 당시 옛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국가들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와 미국 중 양자택일의 상황이 오면 어느 국가를 선택하겠냐고 문의한 설문조사들에 의하면, 러시아를 버리고 미국을 택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겨우 12%에 불과했으며 미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은 44%로 엄청난 차이를 기록하였다. 우크라이나 함께 나토 가입을 오랜 기간 동안 요구했던 조지아만 하더라도 같은 조사에서 미국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24%,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28%로 비등한 수준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당시 대미 성향이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 인구가 상당히 많은데다 우크라이나인들 중에서 과거 같은 소련인이자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결혼한 사람이 많아서 이들을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지리적인 이유로 인해 상당부분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겹쳐서 반러 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어렵다 판단했다. 나토에 가입하겠다며 의사만 표명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에 있어 상당히 많은 제약 상황이 있었고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음으로 인해 최대한 회피했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우크라이나 친서방파 입장에서는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차례 놓치게 된 것이다. .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손꼽히는 <부쿠레슈티의 나토 정상선언문>이 2008년에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 23조에서 NATO는 조지아,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의 염원을 환영하며, 나토의 외무장관들이 가입 절차의 다음 순서인 멤버쉽 행동 플랜(MAP) 적용 시기를 결정한다고 명시하게 된다. 당시 임기가 끝물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부시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빨리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보다 구체적이며 즉각적인 플렌을 요구했으나 이번에는 러시아에 에너지 교역 및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의 반발을 우려해 반대하는 바람에 최종본과 더불어 가입 만을 약속하는 형태로 수정되고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은 허용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크게 작용했다. 자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우크라이나가 언제든지 나토로 넘어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러시아에 심어진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나토 가입을 최대한 막고자 했고 친서방파의 무능에 지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2010년 선출하여 친러로 선택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다시 한 번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못한 이유이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글을 남긴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신속히 나토(NATO)에 가입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신속히 가입할 수 없었던 원인들을 알아보지도 않고 신속히 가입했어야 한다는 말은 현재 판단해서 내린 "결과론"에 불과하다. 역사라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현황을 보고 당시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을 10~15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랬어야 했다" 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국제관계학적 역사관이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윤 대통령이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주위에 보좌관들이 코칭을 했었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런 오류와 사관이 그대로 표명이 된다는 것은 보좌관들이 대단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기에 주위에 뛰어난 보좌관들이 윤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참 아쉬운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안 한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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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러시아 대선 이후에 바뀔 것들 - 2편
    그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매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왔다. 첫번째, 키예프와 6대 도시를 런던이나 도쿄대공습처럼 엄청난 공세를 퍼부을 수 있었고 미국이 바그다드를 공습한 것처럼 아예 도시를 녹여 버릴 수도 있었다. 러시아도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의 증거가 바로 그로즈니 공습이다. 러시아는 체첸 전쟁 때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완전히 녹여버릴 작정으로 무자비한 공습을 자행했다. 그로즈니 공습에 비하면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비롯한 오데사, 하리코프, 드네프르 페트로브스크, 크리프이 리, 리보프 등 6대 도시들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은 그로즈니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걸프전 당시 이라크 바그다드를 공습했을 때와 최근 이스라엘이 가자를 맹공하여 공습한 것에 비하면 러시아의 대우크라이나 공습은 사실상 미미한 것이다. 두번째, 러시아는 민간인 시설을 왠만하면 공격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주로 노린 곳은 군사 시설과 에너지 시설, 기간 산업, 공단 이런 지역을 노렸지 민간인 지역을 타겟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이는 민간인 지역이든, 군사시설이든, 산업시설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포탄, 미사일을 쏘면서 공습을 자행했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략에 비하면 현 전쟁은 너무 신사적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러시아가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공격을 피한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항복한 우크라이나 병사들과 포로들을 상대적으로 잘 대우해주었다.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포로들의 다리에 총을 쏘는 등, 잔인하게 학대했다. 세번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산업 시설과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가장 기본은 산업 시설과 에너지 시설의 초토화다. 그런데 러시아는 그나마 최소한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만 남기도 때렸다. 그러니까 산업시설이나 에너지 시설 10곳이 있다면 8곳을 때리고 2곳은 일부러 남겨놨다. 우크라이나는 파괴되었어도 남겨진 2곳을 기반으로 폭격 이전보다는 못하지만 몇 곳을 더 지어 확충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어쩌고 굉장히 인도적인데 살아 남은 민간인이 이용하라고 일부러 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학교, 병원 등을 공격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학교든 병원이든 사정을 봐주지 않고 때린 것에 비하면 러시아가 때린 것은 손에 꼽는다. 게다가 공항의 활주로, 기차역 등은 공격대상이다. 지금까지 키예프의 두 국제공항인 보리스필, 줄리아니가 폭격받아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없다. 키예프 중앙역은 확실히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공항은 남아있다. 네번째, 우크라이나의 ATM기가 되주고 있었던 미국과 나토, 집단서방의 지출이 이전만도 못하고 있고 앞으로 손절할 가능성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국방비 지출,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에 퍼준 비용과 무기들이 어마어마하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미국 의회에 올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자 승인한 자금은 미국 총 국방 예산(7,150억 달러)의 약 5.6%인 400억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군사지원에 사용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377억 달러의 추가 지원금 배정을 요청한 상태라고 한다. 이렇게 퍼주고도 전황이 지지부진하다. 나토가 거의 재고를 드러낼 정도로 퍼주는데 이러고도 우크라이나가 승리를 못하면 헛 돈 날린 셈이 되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걸 우크라이나에서 회수하려면 이제는 암담한 상황까지 처하고 있다.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패하여 나라가 완전히 날아가면 미국의 쇠퇴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 전쟁은 과거 100년 전 러일전쟁처럼 영국이 대리전을 일본이 치뤘듯이 나토의 대리전을 우크라이나가 치르고 있는데 이 전쟁이 장기화 되면 될수록 러시아가 유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집트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 가자지구의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 군은 활로를 못 찾고 있고 하마스는 수성에 계속 성공하는 분위기다. 미국 입장에서 한 쪽을 퍼주다가 혈이 막히면 다른 쪽의 분쟁을 이용해 혈을 뚫어주었는데 이제는 우크라이나, 가자 모두 혈이 막히니 이 두 곳의 혈을 뚫어줄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가장 유력한 곳이 동북아시아, 우리한반도다. 북한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 러시아, 중국이 북한과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미국, 일본이 대치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러시아, 중국은 가깝지만 한국, 일본과 달리 미국은 멀다. 러, 중, 북이든 누구든 한 발만 쏴도 미국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은 이걸 미끼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대 미국 태평양 전략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으로 푸틴이 집권할 5기부터는 모든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아브데예브까 함락 이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공격의 템포를 약간 늦추고 있는데 대선이 끝나고 5기 임기가 시작될 때, 이제는 눈치 볼 것 없이 빠른 템포의 공격이 가능해질 수 있다.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가족을 두고 있는 시민이 100만이 넘는데 그동안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자제했던 부분이 선거가 끝나면 한꺼번에 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마 인정사정 보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가자지구 분쟁도 유태계 러시아인들의 표를 얻을만큼 얻었으니 선거가 끝나고 중립이었던 입장을 친하마스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구실로 친하마스로 노선을 확정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푸틴 집권 5기는 지난 집권 1~4기와는 완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더 강해지고 빨라질 것이며 푸틴은 6년의 세월 동안 1~4기에 걸쳐 준비해왔던 것들을 이제는 확실하게 매듭짓고자 총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푸틴의 정권 5기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른 전략으로 임해야 한다. 이제는 이전의 러시아가 아닐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맞춰 발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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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7
  • 러시아 대선 이후에 바뀔 것들 - 1편
    러시아의 북극항로 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소련 시대부터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8~90년대 소련이 경제 파탄으로 인하여 북극항로 개척에 대해 진척이 없다가 고르바초프가 뻬레스뜨로이까 정책을 내세우며 개방을 강조하게 되면서 북극 개발 이야기가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오래 전부터 북극항로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환경적, 비용적 측면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북극 해빙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북극항로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해서 극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항로로 북극항로에는 북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캐나다 해역 북서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항로로 분류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현재 항로보다 운항시간이 10일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낙후한 시베리아로의 운송업이 회복될 수 있고 경제 무역적인 가치도 높아지며 시베리아의 지하자원들이 개발되면서 시베리아의 경제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해서 극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항로로 북극항로에는 북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캐나다 해역 북서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항로로 분류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현재 항로보다 운항시간이 10일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낙후한 시베리아로의 운송업이 회복될 수 있고 경제 무역적인 가치도 높아지며 시베리아의 지하자원들이 개발되면서 시베리아의 경제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재는 국제법상 북극해는 공해이기는 하지만 유빙과 빙산 때문에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야 통행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용료를 지불하고서라도 이용하는 선박이 늘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이용 시기도 길어지고 쇄빙선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 수도 있어서 유망한 분야이기도 하다. 다만 INMARSAT 이용에 제한이 따르다보니 바닷가에서 100해리 이상 떨어져서 운항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러시아는 2025년을 목표로 북동항로(NSR) 위성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위성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통신 기술이나 우주 기술에 관심이 있다면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가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타링크의 경우, 어디까지나 범용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지향하기 때문에 위성 배치 계획으로 본다면 극 지방은 비어 있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동항로와 북서항로의 경우, 경제적인 가치로 인해 수많은 도전과 탐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금은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 지명으로 이름을 남긴 비투스 베링(Vitus Bering, 1681~1741), 윌리엄 배핀(William Baffin, ? ~1622),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50~1611), 드미트리 랍테프( Дмитрия Лаптева, 1701~1771), 빌럼 바렌츠(Willem Barentsz, 1550~1597), 존 프랭클린(John Franklin, 1786~1847) 등의 탐험가들이 항로 개척에 나섰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북극해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귀환하지 못하고 탐험지에 사망했다.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같은 시기의 서인도 제도나 인도 항로 개척에 비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편에 있다. 이에 세계 최초로 북동항로를 완주한 인물은 핀란드에서 태어난 스웨덴 탐험가 닐스 아돌프 에릭 노르덴시욀드(Nils Adolf Erik Nordenskiöld)인데, 1878년에 증기선 베가 호를 타고 스톡홀름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을 건너 1880년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참고로 북서항로의 경우,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1906년에 처음 완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로 북극항로가 유라시아 물류혁명을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우선 거리에 비해 과다한 항행 비용이 문제에 있으며 현재의 단계에서 쇄빙선 운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는데 현재 러시아가 보유한 쇄빙선이 6대이고 그 중에서 북극항로에 투입되는 쇄빙선은 3척에 불과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도 북극항로 쇄빙선 이용 비용은 상당한 문제점으로 남고 있다. 러시아 쇄빙선 업체들은 수에즈 운하와의 경쟁력을 비교하면서 가격 책정에 부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리는 수에즈 항로의 절반 수준이지만 가격 경쟁력을 고민해야 할 수준이기 때문에 그 높은지 비용이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북극항로를 이용해보려 했으나 쇄빙선 가격 문제로 포기한 사례가 있다. 수면이 얊게 언 부빙해가 많은 북극항로는 온난화로 인해 개척된다 해도 유빙해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전히 내빙선 등의 특수 선박이 필요해진다. 또한 온난화가 진행된다 해도 연간 항행 가능 기간은 8개월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연간 4개월은 북극항로 돌파를 위해 쇄빙선, 내빙선 등의 각종 장비와 북극항로 인근에 막대한 비용을 추가하여 건설한 항만, 도시 등의 인프라들이 잠정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현재 북위 66도 이북 지역은 전파가 잘 잡히지 않고 있으며, 온난화로 인해 기존의 북극지역 항구 도시들이 해수면에서 멀어지는 등 북극항로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수에즈 항로에 비해 투자 소요가 엄청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 투자가 요구되는 구간이 수에즈 운하와는 비교가 불가능 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이 큰 고민이다. 이러한 상황이라 업계에 따라서는 북극항로의 가능성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2030년 즈음에는 연중 운행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알렉세이 체쿤코프 극동·북극개발부 장관은 작년에 북극항로 물동량이 3,300만t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자축하면서 현재의 목표는 2030년까지 1억 t이라는 놀라운 물동량에 도달하는 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했다. 올가 스미르노바 극동·북극개발부 고문은 북극해 항로가 남쪽에 위치한 수송로보다 더 환경친화적인 항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북극항로 개발에 있어 화물 운송의 환경안전을 우선 분야로 두고 있고 적절한 종류의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 활용에 집중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러시아는 북극해 항로를 활용하면 수에즈 운하를 통한 항로보다 선박 항행거리를 40%가량 줄일 수 있다고 선전 중이다. 2021년 10월 7일 북극항로와 북극해안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북극함대가 창설될 수 있다고 러시아 해군 관계자가 타스 통신을 통해 언급하기도 했다. 2018년 8월 2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컨테이너 선 벤타 머스크호가 부산항을 출발했고 이들은 8월 22일 블라디보스톡항을 출항하여, 보스토치니 항과 부산항을 거쳐 9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항에 입항하는데 성공하여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푸틴의 5기 정권은 러시아 경제의 진보적 이상향을 위해 북극항로 개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북극 개발이 푸틴 정권의 마지막 승부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북극항로는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인도로 향하는 항로로 부상할 것이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제권이 관계되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정학적, 지리적, 경제적, 미래 산업 발전에서 이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먼저 북극 개발 입찰에 뛰어든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 아시아 최초로 북극 연구 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북극 활동의 포문을 열었으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이르기까지 북극항로에 중점을 둔 국제공동연구 프로그램(INSROP, JANSROP) 등을 기반으로 점차 북극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2000년대 일본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종합 해양 정책 본부가 설치되고 이후 북극 이사회 잠정 옵저버, 정식 옵저버 등의 지위 확보했다. 이후 국가 차원의 북극 정책 수립을 통해 분야별 체계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 다음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을 자국으로 연계가 가능한 중계항구로써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북극항로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국의선적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항구가 되었다. 우리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 북극항로에 있어 동해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각선 정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항은 동남아시아와 러시아를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항 항구다.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부산은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는 셈이다. 이는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지난 리야드와 엑스포 유치를 두고 사활을 걸었을 때 부산은 한류가 아니라 북극항로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중요성, 그로 인한 중개 무역에 대한 이점 등을 전면적으로 내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리야드와 대등하게 표 경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부산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푸틴이 5기 정권 때 북극항로 개척에 올인 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부산은 북극항로의 새로운 요충지이자 중심지로써 경제적 호황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그걸 준비하지 못하면 그 또한 일본에게 뺏길 수 있다. 부산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나마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곳은 일본의 항구들 밖에 없다. 가장 유리한 위치를 갖고 있어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이번에도 일본에게 경쟁에서 질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기회를 제대로 잡아 활용하는 측이 매우 유리해질 것이다. 우리는 제발 현명한 선택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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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7
  • 지난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대해 우려되었던 부분
    당시 시위를 지켜보면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움직임이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운남성 일대를 동남아시아 일대일로 최대거점으로 육성하고자 잇단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지리적으로 운남성은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라오스였고 그 다음이 캄보디아, 미얀마 순이다. 라오스의 경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일대일로를 도입하면서 최근 몇 년간 50여개 수력발전 댐을 메콩강 유역에 추가 건설해왔다. 또한,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하나로 중국 쿤밍에서 싱가포르까지 연결하는 고속철도 사업에 참여했다. 자국 내 구간 고속철도 건설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다. 그 결과 라오스는 현재 채무불이행(Default)의 위험수위에 놓이게 되었고 중국은 라오스에 최대 채권국이 되었다. 2020년 9월 라오스의 외화보유액이 10억 달러(1조1885억원) 이하로 줄어 디폴트 위기에 빠졌으며, 라오스 정부 관계자가 최대 채권국인 중국에 채무조정 가능성과 관련해 상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중국의 경제 식민지가 될 확률이 높아진 셈이다. 라오스 국가부채는 165억 달러(19조 6102억원)로 국내총생산(GDP)의 65%에 달한다고 추정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다. 라오스가 중국에 부채를 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그 부채를 갚기 위해 라오스는 중국에 영토나 관광지 등을 조차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스리랑카의 경우인데 거액의 부채를 갚지 못해 함반토타 항구 운영권을 99년 동안 중국에 넘긴 사례가 그것이다. 스리랑카의 능력으로 그 거액의 부채를 갚는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스리랑카는 항구 운영권 자체를 아예 중국에 넘겨준 셈이 되었다. 캄보디아 역시 대표적인 친중국가로 라오스 다음으로 중국과 일대일로 사업을 함께하면서 부채가 늘어가고 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사이에는 메콩강이 흐르고 중국이 운남성을 기점으로 타이만까지 빠져나가는 수운을 개척하면 동남아시아 자체가 중국에게 생존권까지 먹히는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 게다가 캄보디아 쪽으로 빠져나가는 메콩강과 톤레삽 강의 수운으로 볼 때 프놈펜에서 상당하 물류를 확보하고 시아누크빌 항구를 통해 타이만으로 빠져나가 말레이 해협 통과, 해상 실크로드로 알려진 길목들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쌓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중국이 캄보디아와 FTA에 서명함에 따라 경제관계를 강화해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증대를 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캄보디아 최대 항구 시아누크빌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곳이라 훈 센 총리가 중국인들의 진출을 적극 장려했던 곳이다. 시아누크빌은 건설 현장 대부분이 중국 자본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캄보디아 내 중국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공사장도 중국, 그 현장 인부, 자재도 중국, 그들이 자는 곳도, 먹고 마시고 노는 곳도 모두 중국 자본 업체들이고 중국이 캄보디아에게 일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 외 도움 주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 시아누크빌에 들어와 있는 중국인 규모를 1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참고로 시아누크빌 현지인 인구는 15만 명이다. 특히 중국이 일대일로를 하면서 시아누크빌에 하는 사업은 바로 카지노다. 2016년 당시 13개에 불과하던 시아누크빌 카지노 수는 현재 110개 이상으로 업주가 대부분 중국인이다. 결국 시아누크빌을 비롯한 대다수의 캄보디아 경제를 카지노로 중국이 빨아먹겠다는 심산인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미얀마 군부가 중국의 일대일로를 다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나섰다. 중국은 인도양 진출을 위해서 미얀마에 오랜 기간동안 공을 들이고 일대일로 참여를 독려해 왔고 그것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것이다. 순조롭게 이어오던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이 갑자기 막히게 된 것은 이번에 터진 군부쿠데타와 그로 인한 민주화 시위였다. 현재 중국은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침묵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중국은 겉으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유혈충돌은 피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일대일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중국은 미얀마 군부가 계속 집권하기를 원하고 있다. 군부가 적극 밀어줬기 때문에 이 사업을 하고 있고 군부가 축출된다면 미얀마에 오랜 기간 공을 들였던 중국 정부에게 미얀마 측이 어찌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가 시민들에게 유리한 향방으로 흘러갈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적극 나설 공산이 크다. 가장 최악으로 우려되는 것은 자국 기업과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중국의 인민군이 미얀마에 파견될 가능성이다. 이미 차우퓨 항을 통해 중국과 연결되는 송유관 문제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미얀마는 민주화 시위만큼이나 중국과 미국의 치킨게임도 신경써야 하는 매우 골치 아픈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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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 오늘부터 시작되는 러시아의 대선은 어떻게 봐야 하나?
    2023년 9월 러시아 두마의원 보궐 선거의 결과는 3월 대선 투표율의 '바로미터'로 제시된다는 예상이 있다. 당시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투표율이 20~40%대로 낮아 선거의 정당성 확보에는 실패힌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투표율이 낮은 원인 분석을 놓고 여러 논의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민생 문제가 결과적으로 투표율 저하를 야기했다는 해석도 나타났다. 그러나 러시아 내 부정적 상황이 누적되면 시민의 투표 참여가 오히려 증가할 것이란 전망도 같이 나오고 있다. 오늘 15일부터 사흘간 진행되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 대통령이 당선될 것인가의 여부는 더 이상 논쟁의 가치가 없다. 다만 투표율과 그가 얼마나 득표할 것인가의 정도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 뿐이다. 정작 러시아 대선이 3일 간 치러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특수군사작전이 진행되고 있으며 점령 지역에서도 투표가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전자투표도 도입됐다. 러시아 선관위에 따르면 유권자 수가 러시아 국민 약 1억 1,230만명과 해외 거주 러시아인 약 190만 명이다. 대선 후보는 무소속의 푸틴 대통령 이 외에도 자유민주당의 레오니트 슬루츠키(Леонид Слуцкий), 새로운 사람들(Новые люди) 정당의 블라디슬라프 다반코프(Владислав Даванков), 공산당(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의 니콜라이 하리토노프(Николай Харитонов) 등 여기에 3명이 더 있다. 푸틴 대통령을 제외하고 언급한 3명 외의 나머지 3명은 득표율이 제로에 가깝지만 이 또한 정치 경력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중에 두마 선거 때 이 이력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뭔가 정치 경력에 이름을 남기고 경력 한 줄 채우는 것이 목표인 후보들이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은 3명의 후보들은 참가에 의의를 둘 뿐이다. 여기에서 물론 야당 중 역대 공산당 후보가 주요 경쟁자로 꼽혔지만, 2004년에 이어 두번째 대권에 도전하는 니콜라이 하리토노프(Николай Харитонов) 후보는 당선 가능성은 비록 낮지만 푸틴 대통령의 특수군사작전을 지지하고 있는 인물이기에 정책적으로 별다른 차별성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나이에서 걸림돌이다. 현 나이 75세로 러시아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과 맞서는 후보들의 공약들도 푸틴 대통령과 나아보이는 부분도 없어 아마 압승이 예상되는데 몇 % 참여와 득표를 할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물론 예상은 역대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최다 인원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며 80% 이상의 득표를 할 수 있을까 여부다. 참고로 지난 2018년 러시아 대선 때 푸틴 대통령은 76.69%를 득표하여 80% 이상의 득표에 실패했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사회, 경제 등이 정체하고 있었던 시기이고 2015년 크림 합병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서방 및 나토와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에 따른 애국심 또한 충만한 상황이다. 게다가 2018년에 비해 대통령 후보들의 네임벨류 매우 약한 편이다. 당시에는 공산당의 파벨 그루즈닌(Павел Грудинин),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끼(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 같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니콜라이 하리토노프(Николай Харитонов)를 제외하고 기타 후보들의 네임벨류들이 러시아 전문가인 나 조차도 왜 나왔을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치 경력이 부실하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매우 안정적이다. 나 또한 2015년 이후, 러시아에 있으면서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루블화 가치가 쓰레기 됐을 때의 최악의 상황을 겪은적 있는데 그 때에 비해 오히려 지금의 제재가 더 강화됐지만 흔들리던 2015~2018년에 비해 지금은 그때보다 안정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푸틴 대통령이 80% 이상의 득표율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라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 80% 득표율을 얻는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대 서방과의 대리전에 있어 정국을 누구의 방해와 제지도 받지 않고 무난히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80% 이하의 득표율을 얻는다면 전쟁 수행에 여러 장애 요소들이 등장할 확률이 높아진다. 80~85% 사이가 가장 무난하고 85% 이상을 받으면 아주 최상의 조건이다. 대통령 선거는 러시아에 있어 러시아인들의 선택인 것이고 푸틴은 러시아인의 선택을 재확인 받는 시기이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마나한 선거가 아니다. 러시아인 절대 다수의 신임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쪼개져 또 다른 갈등의 요소를 만드느냐가 여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단결하여 푸틴 대통령에게 몰아주면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고, 그것을 못하면 러시아 혁명 때처럼 끌어내려진다. 이게 러시아의 선거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서방이나 한국의 선거와 다른 점이다. 그에 비해 중국이나 북한은 일반 국민들의 투표나 선거가 없다. 러시아의 또 다른 관건은 푸틴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했을 때 이후에 있다. 집단서방과 반러 세력, 반푸틴 세력들의 사보타주급의 준동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때 단골메뉴급으로 늘 등장하는 것이 "부정선거 및 부정투표" 논란이다. 앞서 집권 4기 때보다 이번 5기 때부터 "부정선거 및 부정투표"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강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집단서방은 반러 세력, 반푸틴 세력들을 이용해 이러한 논란에 계속 불을 지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5기를 자신의 마지막 대통령 임기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집권 4기 시절 헌법 개정을 통해 현 헌법상 불가능한 2024년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고 한 차례 쉰 다음 2030년 대선에 출마하는거 아니냐는 질문에 "내가 100세때까지 이 자리에 있을 것 같나?"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그도 그럴것이 2030년 대선때는 78세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번의 푸틴 대통령의 마지막이라 생각된다. 그렇기에 여러 과제 중 가장 유력한 것이 세 가지인데 첫번째가 옐친이 푸틴에게 권좌를 넘겨줬을 때처럼 정치적 후계자 선별, 두번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마무리와 집단 서방 및 나토와의 대리전에서 러시아를 가장 유리한 상황으로 끌어 올려 다극 세계의 대표 국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 세번째는 북극항로의 완성이다. 이 세 가지의 과제가 푸틴 정권 5기의 핵심이라 볼 수 있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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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 라오스의 국부(國父) 쑤파누봉과 파테트라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는 급격히 혼란해졌다. 라오스의 독립파는 라오이싸라(Lao Issara)라는 공산정당을 만들어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라오이싸라(Lao Issara)는 베트남 공산정권인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맺었다. 프랑스와 라오스 독립파의 전쟁은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1949년 7월 19일 프랑스는 라오스를 독립시켰지만 국방과 외교, 재정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가 여전히 가졌다는 것에서 결국 형식적인 독립에 불과했다. 하지만 친 프랑스 파로 대표된 우익과 좌익 사상을 가진 공산 조직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익의 지도자는 라오스 왕국의 총리가 된 수바나 푸마(Souvanna Phouma, 1901~1984)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쑤파누봉(Souphanouvong, 1909~1995)이었다. 쑤파누봉은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분콩(Bounkhong) 왕자의 세 아들 중 하나였고 왕가의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이복형제들과 달리 평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엄연히 그는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Prince가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쑤파누봉은 프랑스와 베트남에서 교육받았으며, 호치민과 자주 만나 교류하여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붉은 왕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50년 쑤파누봉을 중심으로 라오스의 공산세력이 단합하여 파테트라오가 탄생했다. 쑤파누봉과 파테트라오는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라오스 조약에 의해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독립 이후 내전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라오스 내전으로 불려지는 전쟁이다. 라오스 내전은 파테트라오와 라오스 정부군 간에 일어난 전쟁으로 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렬한 시대적 배경이 존재했다. 이는 라오스 왕국 정부의 파테트라오에 대한 탄압이 원인이 되었다. 파테트라오는 1950년 8월에 결성된 단체로, “조국 라오스”라는 뜻을 가진 공산집단이었다. 파테트라오의 지도자인 쑤파누봉은 라오스 공산 임시 정부를 만들어 스스로 총리를 자임했다. 내전이 발생하자 라오스 북동부를 파테트라오가 장악하면서 왕실과 우파 민족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간의 전투가 크게 벌어진다. 쑤파누봉은 유엔과 미국의 평화 협상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1973년 민족 정치 자문 위원회(NPCC)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1975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자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라오스 국왕이 퇴위하고 수바나 푸마 총리도 사임하여 라오스는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1975년 12월 1일 긴급하게 소집 된 인민대표 민족회의는 라오스 왕국을 폐지하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으며 쑤파누봉이 초대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30년 내전의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통치가 시작했다. 이웃 국가인 베트남에서도 베트남 전쟁이 발생해 라오스도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북베트남군은 전쟁 물자를 라오스를 통과하는 이른바 “호치민 루트”를 통해 전선에 수송하였다. 미군은 라오스의 일부 소수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 전 국토를 폭격하게 된다. 이에 1964년부터 1973년까지 58만 회의 폭격이 이뤄졌고, 200만t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 때까지 폭격과 라오스 내전에 개입했던 사실 등을 부인해서 이 전쟁은 “비밀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현재까지도 폭격으로 인한 불발탄에 끊임없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1986년 이후에는 푸미 봉비치트(Phoumi Vongvichit)가 국가주석 대리가 되면서 쑤파누봉은 권력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1991년 이후에는 봉비치트의 주석 대리인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이 국가 주석이 되며 쑤파누봉은 형식적인 국가 주석의 지위에서도 물러나게 되면서 라오스의 국부(國父)로 남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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