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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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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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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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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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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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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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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그럼에도 한국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존재한다.
    한국에서 철학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물음을 한 번 정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그가 철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한다고 하면, 곧바로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는 답변이 들릴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나름대로 철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까닭을 성실하게 설명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에 호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다 보면 한국에 도대체 철학이 있기나 하는 것인가? 한국인에게 철학은 어떤 것인가? 이런 물음들도 이와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한 여론 조사기관에서 오래전에 발표된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에게 ‘철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을 때, 한국인들은 철학이 점(占)/사주와 관련된 말(약 36%)이라고 응답하거나, 혹은 철학이 어렵고 따분하다(약 23%), 철학이 인생에 대한 말(약 22%)이라고 하고, 철학자(약 19%) 혹은 철학과 관련된 이론/책/명언(약 10%)이라고 답변했다. 또 철학이 심오하고 깊이가 있다(약 8%)거나, 철학이 학문과 관련된 말(약 8%)이라고 하거나, 철학적 관념(약 4%) 혹은 현실과 거리감(약 3%)이거나, 종교와 관련된 말(약 2%)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이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철학에 관한 이미지를 점/사주와 관련된 말이라고 응답한 것은 동양철학(약 21%)에 대한 관심도를 나타낸다. 또 철학이 어렵고, 따분하다는 응답은 형이상학(약 11%), 논리학(약 9%), 인식론(약 3%)에 대한 낮은 관심도를 반영한다. 그런데 학문으로서 철학에 관한 여론조사에서는 철학이 학문으로서 어려운 학문(약 80%)이라고 했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약 77%)이라거나, 철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약 64%)이며, 철학 공부가 윤리의식과 관련이 있다(약 68%)거나, 내 삶에 필요한 학문(약 48%)이라고 답변이 있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윤리학(약 20%)에 대한 관심도가 다른 철학 분야에 비해 높은 까닭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국인들은 가장 훌륭한 철학자로 동양 철학자로 공자(약 57%)를 뽑았으며, 서양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약 49%)를 뽑았다고 한다. 동서양을 통틀어서는 소크라테스(약 24%)가 첫 번째로 선택되었으며, 두 번째로 공자(약 20%)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이 여론조사가 다소 오래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현재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인은 철학의 학문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철학이 어려운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에게 철학이란 실용적이지도 않고, 각자에게 너무도 먼 학문인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지금까지 철학에 관련된 철학책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고 답변한 한국인이 약 74%라고 하고, 1∼2권이라고 답변한 한국인도 약 11%라고 하니 실로 충격적이라고 할 만도 하다. 도서관에 가보아도 솔직히 철학책을 읽은 한국인은 드물다. 독서율이 그다지 높지 않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철학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한국인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될 것이다. 철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철학에는 논쟁이 있다는 점이다. 논쟁이 없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일 것이다. 철학에 논쟁이 있다는 것은 각자가 어떤 문제에 관해 사유한다는 것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의 타당한 논거와 명확한 주장이 있다는 뜻이다. 서로 철학적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질의응답이든 토론이든 특정한 형식에 제약되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근거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스로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날부터 오늘날까지도 철학이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도 한때 철학에 대한 관심사가 폭발적으로 불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바로 시대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한국인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을 했기 때문이다. 즉 시대정신의 화두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다 보면 철학이라는 사상의 보물상자를 누구든 찾기 마련이다. 보물상자에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보물상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지 어떤 방법으로 보물상자를 찾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철학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를 일본인이 철학(哲學)으로 번역한 데에서 유래한다. 이렇게 번역된 까닭은 필로소피아라는 말이 ‘philos’(사랑)와 ‘sophia’(지혜)로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哲學)에서 ‘철’(哲)이라는 한자는 ‘밝다’, ‘총명하다’, ‘알다’, ‘분명하다’는 뜻도 있지만, ‘도리(道里)나 사리에 밝은 사람’을 뜻한다. ‘철인’(哲人)은 바로 이러한 사람을 뜻하며, 보통 ‘현자’(賢者)라고도 부른다. 고대 그리스어의 ‘필로소포스’(φιλοσόφος)는 바로 ‘철학자’를 뜻하는데, 이 말에서 파생된 말이 ‘소피스트’(σοφῐστής)이고, 이 의미는 ‘궤변가’라는 뜻도 되지만, ‘전문가’로서 ‘철학자’라는 뜻도 된다. 그런데 사실 이 ‘철학’이라는 말을 동양철학에 적용해 보면 다소 혼동이 불가피하다. 즉 ‘필로소피아’에 해당하는 학문이란 유학에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는 ‘경학’(經學)이 아니라, 이른바 ‘성리학’에 해당하는 ‘도학’(道學)이라고 해야 한다. ‘도학’은 근본적으로 ‘공맹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에 ‘신유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철학적 논쟁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와 같은 논쟁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도 시기별로 주제별로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필자는 한국에서 철학이 논쟁이 없다는 사실을 종종 느낀다. 필자가 어느 세미나 발표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중심으로 논쟁적으로 다루었더니, 한 참석자가 왜 그렇게 싸우는 것만 다루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적으로 그렇게 진행되어 와서 우리에게 철학을 풍부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논쟁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논쟁은 철학적 사유의 도구이고 수단이다. 또 철학적 논쟁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판단할 수 있고, 자신의 논거를 검증하거나 오류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에서 철학은 여전히 필요하다. 철학적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타당한 논리가 요구된다. 논리가 없는 사람은 그저 개인적 견해에 불과한 것일 뿐, 실로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거나, 억지 주장을 독단적으로 하는 자일 뿐이다. 각자가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막상 따지고 들어가서 자세히 보면 터무니없는 검증되지 않은 사실인 경우도 많다. 도처에 논리가 있지만, 논리를 각자의 논증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 멈추지 말고 각자가 서로 논쟁할 문제라면 기꺼이 논쟁하고, 서로 토론을 할 문제라면 솔직하게 토론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철학에 입문한 자다. 철학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에게 철학은 여전히 어려운 학문으로 인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철학을 누군가는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러나 토론과 논쟁이 부족하다 보니 서로 겉돌거나 단순히 질의·응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철학이 한 철학자의 사상을 텍스트를 통해 이해하는 강의방식으로 전개하다 보니, 이를 주관하는 사람의 권위주의에 의존하게 되거나, 특정한 철학자의 관점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한국의 철학적 현실이다. 철학의 대중화에 기대어 대중의 흥미에 맞추면서 철학이 생산적이지 못하고, 그저 대중의 흥미에 소비되는 방식은 철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아무런 생각을 갖지 못하고 그저 감각적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소비되는 것은 철학적 태도가 전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면 된다. 스스로 답변을 구할 수 없다면 답변을 얻기 위해 스스로 찾아 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어느 정도의 답변을 찾을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더 진행되어야 하니까 조급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진리는 스스로 찾으려는 자의 것이지, 그냥 쉽게 주워 담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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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4
  • 제국주의의 시대 :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시작
    미국 13주가 독립한 이후, 영국이나 프랑스와 노예무역을 하면서 들여온게 아프리카 흑인들이다. 신체적으로 우월하고 힘이 좋으며 지능이 떨어진다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흑인 노예 이야기가 그런데 비단 서구 유럽만의 문제였을까?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이렇게 흑인들에 대한 인종학대 및 차별은 어떻게 생성이 됐을까? 그리고 왜 흑인들 하면 소위 노예라는 인식부터 하게 되었을까? 흑인 노예의 시작은 단연코 로마 제국부터다. 로마 제국이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 시초였다. 특히 아프리카 흑인들은 피부색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에게 천대를 받았는데 운동 능력 또한 뛰어나기 때문에 원형 극장 검투사 노예나, 원로원 귀족들의 소작농노로 고용되기도 했다. 게다가 로마 제국이 카르타고 다음으로 아프리카 대륙 민족에 타격을 준 것은 현재 리비아 땅에 거주하고 있는 누미디아 인들로 이들의 주력도 흑인 기병이었다. 본래 기마 전술에 익숙치 않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격퇴했을 때 누미디아의 기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이들은 말에서 떨어져도 보병으로 격투가 가능했던 용맹한 전투종족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누미디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헬레니즘의 혈통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덕택이었다. 당시 이집트도 용맹한 누미디아를 잡기 힘들었는데 로마가 정벌에 나서자 이집트는 병거와 기마병들을 총동원했고 코끼리 부대까지 대량 동원해 누미디아를 정복해버렸다. 이후, 누미디아 족이 살던 리비아는 로마 제국에 근근히 흑인 노예들을 공급하는 노예 창고로 전락했다. 현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는 흑인 노예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으로 매우 유명했던 곳이고 당시의 흑인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처럼 제대로 인간다운 권리를 얻어보지 못했다. 로마 시대 때는 노예 계층이 4개의 계층으로 분류가 되는데 첫번째가 마케도니아, 그리스계이고 두번째가 수메르계, 유태계였으며 세번째가 게르만계와 켈트계, 그리고 마지막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위의 3개의 계층에 비해 마지막 계층인 흑인들은 가축 취급도 받지 못했다. 특히 공화정~ 제국 초기 시기의 흑인 노예들은 가축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 주인들에게 착취를 당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외면 및 학대를 당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철학자인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Seneca)도 자신의 에쎄이에 Nigrum servi tamquam designata non agnoscitur populo. (흑인 노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라고 표기하기도 했을 정도다. 로마 세계에서 노예의 삶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노예들이 들판, 도시, 소작농노 등의 다양한 하층계열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매일의 삶의 질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모든 것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모든 노예의 주인은 자기가 소유한 노예들의 삶을 규정했으며 그것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가이우스(Gaius : 130-180)의 저술에 의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과도한 폭력은 금지되었고 만일 폭력에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국가가 강제로 노예를 매각할 수 있게 하면서 이전까지 금지된 노예의 결혼과 재산보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면서 노예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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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4
  •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상황
    전쟁이 2년을 넘기면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군부 내 혼란이 잇다르고 있는 상황이다. 젤렌스키는 지난 6월 24일 러시아군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동부 지역 지휘관인 유리 소돌(Юрій Содоль) 연합군 사령관을 안드레이 흐나토프(Андрій Хнатов) 준장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소돌 사령관은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을 경질했던 지난 2월의 군 개편 과정에서 연합군 사령관으로 기용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군 인맥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발탁한 것인데,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4개월만에 현직에서 잘라버렸다. 젤렌스키는 소돌 사령관의 경질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물론 우크라이나 1+1 뉴스에서는 동부 전선의 방어 실패에 따른 문책이라고 분석했지만 러시아 언론에서는 그 분석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이는 잘루즈니 총참모장의 경질 이후, 우크라이나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 중의 하나로 본다. 구소련의 군 출신 지휘관들과 구소련을 겪어보지 못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지휘관들 간의 세대 갈등과, 진영 및 이념 투쟁, 그리고 정계 일부 인사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군부의 편가르기까지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젤렌스키는 지난 5월 20일부로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어 정식 대통령도 아니다. 군부 내에서는 헌법까지 무시해가며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군 통수권을 인정해야 되는지도 군부 내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로 인해 젤렌스키에게 있어 군부 내 지휘 체제를 장악하느냐 마느냐의 또 다른 시험대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지난해 6월 러시아군 지휘 체제를 흔들어 살짝 궁지에 몰게 만들었던 군사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의 군사 반란 미수 사건의 상황을 현 상황과 비교했다. 군부 내 갈등으로 당시 프리고진은 군사령관을 멍청한 작전으로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게라시모프와 쇼이구를 무능한 지휘관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들의 해임을 요구한 프리고진의 언론 플레이와 여기에 동조하는 군사 블로거, 그리고 평소 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부 정치인 등으로 볼 때 러시아의 그때와 아주 유사한 모습이다. 그리고 경질된 소돌 사령관은 개전 초기의 격전지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 저항 부대를 이끌었던 공로를 인정받아 '우크라이나의 영웅'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이어 그는 지난 2월 합동군 사령관에 보임되어 해임되기 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은 현 총참모장 아래, 지상군과 기계화 및 전차군, 로켓 및 포병, 방공군, 육군항공부대 등 4개의 예하부대와 공군, 해군, 공수부대, 특수작전부대, 영토 방위군, 무인 시스템(드론) 부대, 합동군사령부, 병참사령부, 지원군사령부, 통신 및 사이버보안군 사령부, 의무사령부로 구성되고 있다. 이들 중 2019년 12월에 창설된 우크라이나 합동군사령부는 다양한 군사 작전, 나토군과의 종합 군사 훈련이나 해외 평화 유지 임무 수행 등을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이다. 이들은 현재 도네츠크 동부 전선의 일부 지역 방어를 맡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분쟁에 참전했던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군대에 기반란 아조프 연대의 핵심 지휘관인 보그단 크로테비치(Богдан Кротевич) 참모장은 최근 소돌 사령관에 대한 전면적인 비난에 나섰다. 크로테비치 장군은 2022년 마리우폴의 아조프스탈 제철소 방어전 때 소돌 사령관이 수많은 전쟁 범죄들을 저절렀다며 국가 수사국(SBI)에 진정서를 내고 언론을 통해 마구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이 러시아군 정규 지휘관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던 작년 모습과 유사하다. 그리고 비판한 이유도 프리고진이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소돌 사령관이 결사항전을 벌이는 아조프 연대에 무기와 탄약은 추가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무모한 공격 명령을 내려 수많은 군인들을 전사하게 했으며, 마리우폴에는 단 1시간도 머무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에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소속의 한 여성 의원은 러시아군이 도네츠크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을 때 현지 최고 사령관인 소돌이 오데사의 펍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폭로했다. 이와 같이 아조프 연대와 소돌 사령관 간의 충돌의 배경에는 옛 소련군 출신의 지휘관과 2014년 이후 등장한 민족주의자 지휘관들 사이의 세대적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고르 루첸코(Ігор Луценко) 전 최고 라다 의원은 우크라이나군에서 현재 소련군 문화에 익숙한 나이 많은 고위 지휘관과 젊은 세대 사령관들 사이에서 갈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 밝혔다. 그리고 소련군 문화는 강압적이고 폭압적이며 매우 무능한 늙은이라 주장하면서 세대교체를 주장했다. 문제는 이에 따른 군 지휘 체계의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조프 연대가 소돌 사령관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건은 향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과 반발을 초래하며 군부 내의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런데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 내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군 지휘 체제가 한꺼번에 붕괴될 수 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헌법 상 대통령 임기가 종료된 젤렌스키가 군부 내 갈등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작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군사반란이 우크라이나군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크라이나는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게 되면 그 때는 미국 등 나토가 돕고 싶어도 우크라이나 스스로가 급격히 무너질 공산이 크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 아직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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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4
  •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표 산업, 노예(Slave)
    노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가 등장하고, 고대 로마 제국은 아예 노예제 국가였다. 동양에서도 전쟁 포로나 기아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더불어 고대의 전쟁은 전쟁 그 자체가 노예를 양산했고, 종교가 지배한 사회에서는 이교도들을 노예화하고 지배했다. 16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을 상품화하는 노예 무역 시대가 열리게 된다. 16~19세기 사이 4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노예 무역은 그들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 극심한 인종 문제를 양산하게 되었고, 아프리카에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럽인들에 앞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한 것은 이슬람 교도들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무슬림들은 9세기부터 아프리카 동부 잔지바르(Zanzibar) 등을 점령해 1,000년 동안 아프리카인들을 이슬람의 노예로 만들었다. 유럽인들 가운데 처음 노예 무역에 나선 자들은 포르투갈 인들이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1502년 아프리카 동부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협력을 얻어 노예 무역에 나서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보낸 것은 1526년이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식민지에서 파우브라질(Pau-Brasil) 나무에서 염색제를 발견했는데, 이를 채취할 인력을 찾지 못했었다. 더구나 현지 브라질 투피 족은 무계급 사회였고,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식민지의 지배자들이 현지에서 노예를 구했지만, 투피족은 목숨을 걸고 도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포르투갈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인들은 같은 열대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열대 기후에 적응하기 쉬웠고, 더불어 힘이 좋았기 때문에 일을 잘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이 같은 노예 무역에서 재미를 보게 되자 사업을 확대하여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라틴 아메리카로 싣고 갔으며 스페인도 경쟁적으로 노예 무역에 참여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공급한 자들은 아프리카 현지 부족장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콩고 왕국이다. 이 흑인왕국은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전쟁 포로와 피정복민들을 포르투갈에 팔아 넘겨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노예 구매를 독점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도 이 사업에 뛰어 들었지만, 콩고 왕국은 프랑스 선박을 나포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사업을 할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왕국에 합병되면서 노예 무역은 스페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1640년 교황이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서 카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노예 무역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영국 국교회 국가였던 영국이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노예 무역에 뛰어들게 된다. 노예 무역에 관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16세기 이전에 거래된 노예 수는 전체의 3%에 불과했으나, 17세기에 16%로 급증했고, 18세기에 절반이 넘었으며, 19세기에 28.5%를 차지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예 무역에 참여한 국가는 포르트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었다는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400년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보내진 노예는 1,200만 명~1,28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보다 더 많이 추정하는 연구자는 2,000만 명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의 지리학자 토머스 키친(Thomas Kitchin)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1778년 무렵에 영국이 카리브 해에 보낸 노예가 매년 52,000명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매년 13,000명의 노예를 팔았다고 한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18세기 마지막 20년 동안에 정점에 달했는데, 그 때 콩고 왕국에서 내전이 벌어져 전쟁 포로들이 대량으로 아메리카로 이동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인들을 노예로 끌고 간 선박은 매우 열악했다. 좁은 선실에 흑인들을 쌓아두고 가득 실어 항해하는 도중 선채에 전염병이 돌아 사망률도 높았다. 죽은 노예는 바다에 버렸다고 하며 학자들에 따라 수송 과정에 있었던 사망자들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데, 120만~240만명이 대서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아프리카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것은 유럽인들의 탐욕과 더불어 고급화된 삶 속에서 나타난 취향 때문이었다. 특히 설탕의 경우, 인도에서 생산되어 육로로 유럽에 전해졌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를 공격하면서 설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대항해 시기에 유럽인들은 카리브 해와 라틴 아메리카의 열대지역이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사탕수수는 키가 무려 4m나 되는데, 이를 베어 공장에 운반하고 분쇄한 다음 롤링으로 눌러 압측해 즙을 얻는다. 이것을 다시 큰 솥에 오랫동안 정제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엄청난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나무를 많이 베어 와야 한다.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에 대량의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 노동력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탕의 단맛을 알게 된 유럽에서 설탕의 수요는 크게 증가했다. 설탕 산업은 자본주의 발전에 산파 역할을 했음과 동시에 노예 무역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메리카에서 재배한 설탕이 대거 유럽에 수입되면서 영국인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6세기초에 500g에서 17세기에는 2kg, 18세기에는 7kg으로 급증했다. 즉, 유럽인들은 설탕은 귀중품에서 사치품, 생활필수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노예의 피땀으로 일군 설탕이 유럽인들의 입맛을 돋구었던 것이다. 1713년에서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체결된 위트레히트 조약에서 영국은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아시엔토(Asiento)라 불리던 노예 무역 독점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에 영국은 향후 30년 동안 114,000명의 노예를 스페인 식민지였던 포르트베로, 베라크루스 등의 노예시장에 공급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 특권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 양도하는데, 이것이 후에 투기 과열을 초래해 투기 거품 붕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거품 붕괴 사건 이후, 영국인 무역상들은 대서양에서 삼각 무역을 개발했다. 영국에서 만든 총기, 술, 유리제품, 직물을 아프리카 부족에게 팔고, 현지에서 노예를 샀다. 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에 데리고 가 팔아치웠고 설탕과 면화, 담배, 커피 등을 사서 영국으로 들여오면서 영국의 경제는 호황을 맞게 된다. 이러한 노예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포획되었다. 물론 유럽인들이 직접 노예 사냥에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풍토병을 이겨낼 수 있는 약품을 구하지 못해 대륙 깊숙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아프리카의 현지 부족들에게 노예를 잡아 달라 부탁하면 다른 종족의 흑인들을 공격해 잡아 유럽인들에게 팔았던 것이다. 결국 가격은 노예 포획을 부탁했으니 청탁금, 의뢰비까지 현지 부족들이 풍족하게 챙겼던 셈이다. 이에 아프리카의 왕국 또는 부족들은 노예들을 줄줄이 세워 나무 족쇄로 채우고 그들을 해안가로 데려갔으며 해안에는 유럽의 노예 무역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에 도착한 노예들은 나무 우리에 갇히게 된다. 노예들은 길게는 몇 달동안 배가 올때까지 나무 우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들 중 건장한 남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등지로 갈 배가 도착하면 어느 해안 출신인지를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은 다음에 배에 몰아 넣었다. 그리고 노예들을 배에 가득 채워 아메리카로 데려갔다. 그와 같은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되며 이동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예가 죽어 나갔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들에게 노예 주인들은 처음 며칠 간 아무일도 시키지 않고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원기를 회복한 노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들은 설탕 농장에 대부분 끌려갔으며, 면화, 담배, 커피 농장에도 배치되었다. 노예 주들은 초기에 1인당 2~5파운드에 노예를 샀고 되팔 때는 25~35 파운드에 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당시 노예 값이 말 가격의 30분의 1이었다고 전한다. 그 이후 노예 부족현상이 발생하면서 노예 가격은 더더욱 상승했다. 노예들은 보통 새벽 3시부터 일터에 나가 하루에 17시간 동안 온갖 인권 유린 및 착취를 당하며 살인적인 노동에 혹사당하게 된다. 이들 흑인 노예들의 강제 노역이 유럽인들의 입에 맞는 설탕과 담배, 커피를 만들었던 것이다. 흑인 노예 무역이 한창이던 1770년대에 영국의 노예 무역선은 무려 190척이 되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노예를 검은 화물, 설탕을 하얀 화물이라 부르며, 돈벌이를 했다. 그와 같이 온갖 인권 유린 및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착취해 번 돈은 영국의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성공을 촉진하여 오늘날 영국이 강대국이 된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다문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 과거의 식민지였던 인종들이 영국에 몰려들어 영국의 경제권을 형성했고 이들이 조금씩 영국을 잠식하고 있다. 과거 노예 무역과 연관된 역사를 들어내겠다며 일부 기업들이 흑인 등 소수 인종을 위한 재정 지원 계획을 내놨다고 한다. 과거 창립자들이 노예 무역으로 쌓아올린 부와 연관된 기업 운영사에 대한 반성으로 이같은 재정 지원 계획을 했다고 한다. 브리스틀에서는 시위대가 17세기 악명 높은 노예 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 콜스턴은 17세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흑인 노예 80,000명 이상을 수송한 인물로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옥스포드에서는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다이아몬드 채광권을 독점하고 식민지 총리를 지낸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옥스퍼드의 거리에는 '로즈, 다음은 당신 차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런던에 있는 윈스턴 처칠 전 총리 동상에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서가 쓰였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하는 시위대는 처칠 전 총리를 두고 "영국 연방의 식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인종차별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이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이들의 행위들에 불만이 상당하지만 그 또한 과거의 악행에 대한 영국이 뿌린 업보 아니겠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7-13
  • 대당제국과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판
    역대 중국의 왕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조, 제국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당(唐)나라, 대당제국(大唐帝國)을 꼽는다. 청(淸)나라도 위대한 제국이지만 나는 영토 크기 같은 것을 제외하고 당(唐)제국을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보는 것이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정책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씨(李氏) 자체가 유목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이고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에 북량(北凉) 정권을 수립하자 이고는 훨씬 서쪽에 위치한 돈황 지역으로 가서 서량(西凉)을 세웠다 한다. 이고의 시조는 전국시대 진(秦)나라 장군 이신(李信)이며 시황제가 6국을 정복하고 중원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었던 장수이다. 그리고 이신의 4대 손인 이광(李廣)은 한 무제시기에 흉노와 전쟁에 주로 등장하는 명장이다. 이광은 한, 흉노전쟁에서 용맹을 과시하다 패배하여 흉노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현지에서 흉노의 여인과 결혼해 3남을 낳았다. 이후 이광의 자손들은 흉노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후일 단석괴의 선비가 침입함에 따라 북흉노가 패배하여 서방으로 도주하자 이광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영지도 선비의 손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이광의 후예들은 선비와 섞여 살게 되었다. 이고는 농서군의 명문 호족 이감(李弇)의 서손으로, 이창(李昶, 자는 중견(中堅))의 서자 중 막내이다. 조부 이감은 서진 혹은 전연의 양주자사 · 무위장군 · 천수군 태수를 맡아 안세정후(安世亭侯)에 봉해져서 이고의 대까지 세습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흉노와 선비를 거쳐 유목 민족의 씨족장 중에서도 명문가로 뽑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서량의 왕가 가문이기도 하여 이연의 선조들은 대대로 왕손이었다. 다시 정리하여 살펴보면 시작은 한족이었지만 중간에 이광이 흉노의 여인과 결혼하여 혼혈 3형제를 낳았고 그들이 계속 자손을 이어왔다가 선비의 침입으로 인해 선비족과 섞여 살면서 서로 통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연의 선조들이 선비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연의 모친과 수나라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였다. 이연은 수 문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양제의 사촌으로, 당시 가장 세력이 큰 수나라 장수들 중의 하나였다. 이연의 5대조는 북위의 홍농 태수, 4대조와 3대조는 무천(武川)에 정착한 북위의 장수였다. 조부 이호(李虎)는 우문태가 서위,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 8주국(八柱國) 중 한 명으로,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이연은 수나라 황실의 황족이었던 것이다. 수나라도 물론 선비족 출신이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유목 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추었던 제국이었던 것이다. 나는 당나라가 아시아에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국적이나 출신, 신분 등을 따지지 않고 인재라면 누구라도 기용했던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재 등용 정책이라고 본다. 당나라에게 멸망했던 백제의 흑치상지, 고구려의 고사계, 고선지 부자, 고구려를 배신한 연남생도 당나라의 고관이 되었으며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장자인 김인문, 당대의 최고 신동인 최치원 등이 당나라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바다의 왕자 장보고도 무장으로써 당나라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 그리고 당 태종 시대에 계필하력, 설인귀, 이사마 등도 한족이 아닌 돌궐과 거란 출신이고 안록산의 난의 주역인 안록산도 소그드인 출신이었다. 시선(詩仙)으로 알려진 이태백도 키르기스스탄 발라사군에서 출생한 소그드인이었다. 이런 인재들이 당 제국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전무후무한 인재 등용 정책의 시작은 희대의 명군인 당 태종 이세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당나라는 실크로드까지 장악하며 중앙아시아와 멀리 비잔틴 제국까지 그 명성을 드러낸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중국의 최초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탄생한 것도 당나라 때였다. 한나라 때도 없었던 노비 사면과 도성 중앙에 주작대로로 불리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인 주작문가(朱雀門街)를 끼고 왼편에 54방(坊)과 동시(東市)를, 오른편에 또 54방과 서시(西市)를 만들어 총 110개의 방시(坊市)로 이루어진 조방도시(條坊都市)를 세계 최초로 기획한 것도 당 제국이었다. 당나라의 각종 정책은 그 당시 아시아 세계 각종 정책들의 모범이 되었고 각 국가들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자신들 특유의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최초의 모범 국가 역시 당 제국이었던 것이다. 내가 대당제국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위대한 당 제국을 막아내고 이겼던 위대한 역사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 역사에 주목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면 그것을 넘어서 나는 당나라 제도의 장 단점을 연구하며 그런 대당제국이 강대국이 되었던 이유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당 제국이 강대국이 되었던 제도들을 보면 왜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아시아 중세시대 초기에 모든 국가들이 그 제도를 모방하거나 받아들여 자신들의 제도에 접입시켰던 당대 최고의 모범국이 되었는지를 보면 첫째로 그런 대당제국을 이겼던 우리 조상들이 더 위대했음을 밝힐 수 있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한 당 제국 제도들의 장점을 재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어지럽기 그지없다. 인재가 없어 그 인물이 그 인물인 사람을 원치 않은 상황에서 계속 투표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을 보더라도 누굴 찍어야 할지 선뜻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 나물의 그 밥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뭔가 혁신적인 인재가 나와 희망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희망 자체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그리고 죄다 법조계 출신들이 많으니 다른 측의 인재들이 누가 있나 찾아보면 아쉽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는 대당제국의 제도들을 소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재 등용에 있어 차등을 두지 않았던 대당제국은 그런 인재 등용의 발판으로 대제국을 이루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굳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법대 출신 아니더라도, 인재는 찾다보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인재들을 학연, 지연, 혈연을 타파하고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 그 나물의 그 밥이 아닌, 학연, 지연, 혈연으로 등용된 사람이 아닌, 법조계만이 아니고 다른 계통의 인재들, 입으로만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꾼이 아니라 진정한 국민, 국가를 위한 머슴이자 일 잘하며 능력이 뛰어난 인재인 정치인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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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3
  • 중동 전역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아랍화 된 계기
    마왈리(Mawāli)는 Mawla의 복수형으로 종속민을 뜻하며 아랍어로 ‘주인, 보호자’ 를 뜻하는 말이기도 한다. 또 정관사를 붙여서 ‘신(神)’ 을 말할 때도 있으나, 역사상의 용어로는 그 반대로 ‘보호받는 낮은 신분인 자’ 를 뜻하고 있다. 마왈리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해방된 노예의 개종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마왈리의 개념이 정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마르 2세(Umar Ⅱ, 717~720) 때 였는데 가장 먼저 우마르 2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왈리의 처지에 영합하여 아라비아 부족과 아라비아 제국의 통일성을 지속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우마르 2세는 연달아 재정 조치를 취하여 마왈리의 환심을 얻으려고 애썼다. 이들 마왈리들은 본래 이들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베르베르 및 다른 비(非) 아라비아 계 개종자였다. 또한 아라비아 계통이지만 그리스도교도나 유태인들도 이에 해당되었다. 이는 처음부터 그들이 알라를 숭상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왈리는 들은 아라비아 계 무슬림을 우대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비(非) 아라비아 계 무슬림들이 이러한 불만과 시위, 폭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이러한 시위, 폭동, 반란 등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시아파와 비(非) 아라비아 계 무슬림들이 후일 독립하여 자립하는 근거와 명분을 만든 셈이 되었다. 물론 비(非) 아라비아 계가 개종해서 무슬림(이슬람 교도)이 되는 것도 이 무와라트(Muwarat)를 통해서이며, 소위 마왈리 문제는 이러한 비(非) 아라비아 무슬림의 증가에 의해서 일어난 문제였다. 정복지의 비(非) 아라비아 주민의 개종은 무함마드 시대부터 있었는데 이는 아라비아를 통일하자마자 외부로 정복전쟁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본 연구자가 주목했던 부분은 아라비아 부족 간의 긴장과 제국 내의 마왈리 문제였다. 아라비아 부족 간의 긴장은 아라비아 국가의 국력을 약화시켰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라비아인 스스로 제기한 것으로 아라비아인들은 비(非) 아라비아인들을 차별함으로써 아라비아 만의 특권을 그대로 가지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마왈리들의 불만은 시아(Shi‘ah),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 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 칼리프 위를 주장함에 따라 기존의 수니파들이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다. 7세기 말 무슬림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정복지 인구의 대다수가 비(非) 아라비아 계로 분류되면서 이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개혁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 중 하나가 당시 아랍어를 동등하게 수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랍어가 발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아랍어가 꾸란의 언어라는 인식이 보급되어 비(非) 아라비아 계 이슬람 개종자들이었던 마왈리(Mawāli)들이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아랍어가 정복지에 널리 전파되었다. 압바스 왕조가 벌인 정치 운동의 특성들 중의 하나가 그 운동 과정에서 대부분 페르시아 출신이었던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압바스 왕국의 초기 칼리프들이 자신들의 보좌관으로 페르시아인들을 등용했다. 그럼으로 인해 아랍어는 이와 같은 압바스 왕조 정책의 모델이 되어 각 이슬람 국가들에서 마왈리들이 중용되었다. 딤미는 이슬람 법이 다스리는 국가에서 무슬림이 아닌 국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딤미라는 용어는 점령지의 주민 개개인의 삶과 재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의무에 관련한 것으로서 무슬림이 지배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非) 무슬림 공동체 간의 협정으로 결정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말하자면, 딤미는 계약의 백성을 뜻하는 아흘 알 딤마(Ahl al-Dhimma)라는 단어로 나타나며, ‘너그럽게 관용을 받은’ 이라는 뜻의 종파(Tolerated sects)였다. 이들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이어서 일정한 사회적 제약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슬람법에 따라 고율의 인두세 지즈야(Jizya)와 토지세 하라즈(Kharaz)를 납부하며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 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딤미는 죽음을 면한 것에 대한 대가 또는 무슬림이 정복한 영토에 살게 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여겨지는 인두세 납부로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또한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법률에 따라 그들의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무슬림들이 보기에는 이슬람 율법은 그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매우 신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딤미는 시민권과 지역사회 문제에서 많은 제한과 제약을 받았다. 비(非) 무슬림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조건의 대신 세금을 내고 신변을 보호받았다. 그들은 옷과 안장의 유형, 말을 타는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차별적인 규제를 받았으며 이러한 차별의 이유로 딤미는 무슬림보다 열등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가 미미했지만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경제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최고위 공직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이슬람 제국의 정부, 특히 행정 분야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의 가장 하위 계층에는 노예가 존재했다. 중동에서 나타나는 노예 제도는 이슬람이 탄생하기 수세기 전부터 존재했다. 물론 이슬람 사회에서 무슬림은 노예가 될 수 없었지만 노예들은 이슬람교도가 되어도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단점이 존재했다. 이러한 노예 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첩 제도다. 신분 계층의 가장 하위 개념이자 여성과 관련된 부분에서 주인과 노예와의 혼인은 허용되지 않았고 이러한 차별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주인에게 소속되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에 따라 노예 여성의 자식은 그 노예의 남자 소유자가 그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대로 노예가 되었다. 한편 자유로운 신분의 여성과 노예 남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유민이 되었다. 주인에게 아들을 바쳐 팔려갈 수 없게 된 노예 여성은 그 아들의 어머니로 특별한 인증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었을 때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 치하에서 노예무역은 번창한 사업이었다. 대부분의 노예는 승리한 전투나 기습, 원정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정규적인 노예 거래를 통해 사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부유한 아라비아 무슬림들이 수천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도 흔했다. 아라비아 인과 외국인의 융합을 가져온 노예화 과정에서 노예무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시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리프였던 우마르 2세의 당면 과제는 제국의 분열적 요소를 제거하여 제국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만이 많은 마왈리들을 달래어 이들이 적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련의 재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아라비아 군대에 속하여 전투를 벌이는 마왈리에게는 연금을 주었다. 그리고 이슬람의 원칙상 딤미는 새로운 교회나 유대교당을 짓는 것이 금지되며 굴욕적인 차별이 불가피했지만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이해하고 지위를 향상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우마르 2세가 마왈리에 대한 개혁으로 세출은 늘어나고 세입은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인 야지드 2세(Yazid Ⅱ: 720~724)와 히샴(Hisham: 724~743)은 새로운 재정 체제를 마련해야 했다. 이 새로운 재정 체제는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오래 존속되었다. 그것은 이슬람 개종자는 인두세는 내지 않아도 되지만 토지세는 계속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의 새로운 세제에 의하면 토지는 절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며 하라즈를 납부하는 것이 기본 전제라는 것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십일조만 내던 토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또한 증가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종래까지 하라즈만 부담한 딤미들은 인두세도 함께 납부해야 했다. 이슬람 성법(Shari‘a)의 법체계가 된 이 새로운 세제는 과세의 근거 자료로 인구와 재산을 조사해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가진 재정관을 총독과는 별도로 임명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수정과 개혁에서 출발하여 20년에 걸친 히샴의 치세는 재정적으로 다소 의기소침해진 분위기에서 제국을 회복시켰다. 이에 대한 법치의 확립은 북서쪽의 국경이 견고해졌고,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처럼 투르크 부족들의 침입으로 포기되었거나 베르베르 인의 반란이 있었던 마그리브(Magrib)와 같은 영토들에서 무슬림의 지배가 재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군비가 강화되고 재정체계가 더욱 견고해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딤미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 유지가 허용된 이교도들을 의미하고 있다. 본래 이 딤미는 ‘성서의 추종자’인 아흘 알 키탑(Ahl al-Kitab)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성서의 추종자는 본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마호메트 이전에 계시를 받아 신의 계시를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불안전한 ‘경전의 사람들’ 이었다. 또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조로아스터교도(Zoroaster)들인 페르시아 인들에게도 관용을 보여 편의상 딤미의 개념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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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1
  • 러시아의 볼가 강, 러시아 영혼이자 어머니의 의미의 강
    러시아의 볼가 강, 이곳은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영혼" 이라 부르며 상당히 신성시했다. 그 이유는 바로 볼가 강이 불가리아 인들이 살았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가라는 말 자체가 타타르어로 밝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해가 뜨는 동쪽의 강이라는 부분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아마도 비교언어학적으로 "볼가" "밝가" "불가" "밝은" "발칸" 으로 연결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볼가 강은 불가리아 인, 러시아 인들의 강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불가리아는 오늘날 불리는 발칸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불가리아 인들이 제1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고 발칸을 정복했을 때 비로소 발칸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발칸은 불가리아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아시아에서 온 민족들이 볼가 강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서로 간의 전쟁을 통해 부족의 통합을 꾀하게 된다. 이에 대표적인 전쟁이 훈족의 이동이다. 훈족의 이동은 볼가 강 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볼가 강 중류와 카마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속해 있는 유목 민족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특히 불가르 인의 원류로 알려진 서흉노는 5세기 경 우크라이나 일대로 남진하여 일부 훈족의 계파들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100여 년 후, 아바르 인들이 공격해오면서 불가르 인들은 아바르 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오우르 족을 비롯한 투르크 계통(철륵 : 鐵勒)민족들이 돌궐이 성장함과 동시에 서방으로 이동해오면서 불가르 인과 융합되었다. 본 연구자는 불가르 인의 계통을 투르크 계통화가 된 시점이 6세기 중반이라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원류는 서흉노인이라는 것이고 터키 학계에서 주장하는 투르크 계통화가 되었다는 학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국가 조직 단계에 이른 최초의 불가르 족 연합은 온(On) 오우르 족이 주축이 되어갔다. 이들은 6세기 이후 비잔틴, 아르메니아, 시리아 문헌에서 북방 카프카스 종족으로 언급되었고,이러한 연유로 북방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안 지역은 700년 경 ‘온 오우르의 땅(On Patria Onoguria)’이라 불렸다. On Patria Onoguria 명칭은 페르시아에서 나타난 말이다. 당시 7세기의 페르시아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있었고 이슬람 세력화되었기 때문에 비(非) 이슬람 지역인 흑해 북안 지역에는 아직 이슬람에 개종되지 않은 투르크 민족들이 살고 있다 보았다. 630년, 중앙아시아에서 돌궐 제국이 분열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발칸과 동유럽에 흥기하던 아바르 인마저 626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전쟁에 패배했고 630년에 아바르 제국의 왕이 사망하여 국력이 쇠퇴하자, 흑해 북안은 세력 균형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오우르 족의 주도 하에 불가르 인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카프카스 북쪽의 스텝 지방과 볼가 강 연안에서 이주한 민족인 오우르 족은 비잔틴 제국과 경쟁하며 점진적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세력이 비로소 형성되어졌다. 이들을 주도했던 오우르 족의 수장 가문은 두로(Dulo clan)가문이다. 두로 가문(Dulo clan)의 형성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약 670년 경, 볼가 강 일대와 우크라이나 지역, 우랄 산맥 인근 지역 등 광대한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대(大) 불가리아 제국은 쿠브라트 칸이 사망하고 쿠브라트 칸의 아들들이 상속 문제로 대립하면서 해체 될 위기를 맞았다. 이는 쿠브라트 칸이 사망하면서 그 후계자에 관해 어느 누구를 지칭하지 않았고 소수의 지배층인 불가르 족이 다수의 피지배층인 오우르, 사바르, 고트, 훈족의 일부와 슬라브 계통의 민족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 하자르(Kazar) 족이 서진해 오면서 내분으로 기초 질서가 붕괴된 대(大) 불가리아 입장에서는 하자르 족을 격퇴할 수 있는 군사력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도 붕괴의 한 요인이다. 결국 유목민족 특유의 상속문제와 결부된 내부 분열은 국가와 민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지배층이었던 민족이 피지배층으로 신분이 하락하는 현상이 유라시아 세계에 있어 반복되어왔던 것이다. 쿠브라트 칸의 사후 장남인 바트바얀(Batbayan)을 제외한 4명의 아들이 대(大)불가리아 제국을 떠났고 주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오투즈 오우르 족은 북방으로 패주하여 오늘날 이틸 불가르(Itill Bulgar)를 건국하고 주요 세력이 된다. 쿠브라트의 장남인 바트바얀(Batbayan)을 정점으로 한 온 오구르 불가르 족은 하자르 족에 패배하여 예속되었고 카프카스 지방으로 남하하면서 산개된 세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바트바얀의 동생인 아스파르후(Asparukh)는 돈 강 지역으로 북진하면서 정복민이었던 하자르 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충성 맹세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으로 하자르 족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아스파르후는 쿠브라트 칸의 다섯 번째 아들로 형들 4명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했다 한다. 일설에는 아스파르후가 쿠브라트 칸의 직계 아들이 아닌 쿠브라트 첩인 에일라(Eilla)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직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아스파르후는 쿠브라트 칸의 아들이자 장남인 바트바얀을 매우 따랐고 바트바얀은 아스파르후를 자신의 아들 대신 후계자로 낙점하기도 하였다. 장남인 바트바얀이 인정할 정도로 아스파르후는 민족을 통치하는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적으로 하자르 족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아스파르후는 휘하의 불가르 족과 그를 따르는 슬라브 인들을 거느리고 하자르 족에게 투여될 영토 확장에 나선다. 668년부터 679년까지 지속된 11년여 동안의 투나 지역과 발칸 진입 전쟁은 가장 먼저 현재 몰도바와 다뉴브 삼각주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몰도바와 다뉴브 삼각주 지역은 고트 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훈족의 아틸라가 이 영토를 정복한 이래 지배층이 훈족이었으나 훈족의 세력이 약화된 이후에는 고트 족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해 있었다. 일단 고트 족은 375년에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동고트 왕국을 건설했으나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 족은 훈족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다시 부활했고 아바르 인들과 적절한 경쟁 관계를 통하여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370년대 훈족의 대두는 동고트족을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민족으로 바꾸었다. 훈족의 침입에 맞서 당시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배한 뒤 자살했다. 얼마 뒤 에르마나리크의 후계자도 훈족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이는 서고트 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도나우 강 남쪽으로 재이주할 것을 권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트 족은 이탈리아 북부와 서고트 인들을 따라 아프리카 북부로 이동했고 당시 남아 있는 고트 족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아바르 제국 및 훈족과의 교류로 인하여 물려받은 기마 전술이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아스파르후와 불가르 족, 그리고 슬라브 인들은 이들 고트 족을 정복했다. 현재의 몰도바 지역을 발판으로 아바르 제국의 영토인 루마니아 동부 지역으로 진출했고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패배한 아바르 제국은 루마니아 동부 지역을 비교적 쉽게 내주었다. 그리고 헤라클리우스 황제 직후 트라키아 지역을 회복한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민족은 트라키아 족으로 고증되는데 그들은 로마인이 이곳에 등장하기 전부터 발칸 반도의 동편에 거주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로 비정할 만한 형태의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트라키아 인들이 워낙 각지로 흩어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문학 활동을 하였으며 도시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종족들은 비교적 쉽게 그리스에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 이후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로마의 문화에 다시 종속되어 여러 잡다한 문화가 섞이게 되었다. 트라키아 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고, 호전적이며, 문신(文身), 화장(火葬)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니소스 신앙이 성하여 사자(死者)를 위한 무덤(tumuli)이 많이 축조되었으며, 고고학 자료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풍부한 삼림자원 · 광물자원(판가이온 산의 금 · 은)과 기름진 영토는 기원전 7세기 이후 트라키아 연안지방에 대한 그리스 인의 식민 활동을 유발하였다. 트라키아 인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소부족국가의 난립 단계에 머물렀으나 그리스 인에게 있어서는 노예 · 목재의 공급지, 흑해 무역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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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1
  • 티베트 지역의 강족(羌族)에 관하여
    티베트 지역은 정확히 어떠한 민족이 거주했는지 추정에 있으나 강족이 건너와서 티베트 원주민을 정복한 이후, 강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티베트 원주민은 인도 계통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얀마 계통의 민족으로 남방 민족이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후 강족이 티베트에 이주하여 남방 민족이라는 원주민을 정복한 뒤, 티베트는 남방 민족과 강족이 융합한 형태의 민족으로 재탄생되었다. 중국에서는 대대로 티베트와 강족 융합 민족을 서남이(西南夷)족이라 하여 천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44개의 소왕(小王)’ ‘12개의 소방(小邦)’ 등이 존재했다고 하여 강족이 정착하면서 44개의 소왕이 다스리는 지역을 차지했고 12개의 소방 일대에서 조공을 받아 속국으로 삼았다. 강족과 티베트의 연합체 민족은 냐디첸포(Naydichenpo)의 아륭(雅隆)부락을 중심으로 위구르와 사천성 지역과는 다른 독립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티베트에는 아륭 이외에도 양원(羊園, 象雄) · 소비(蘇毘) · 백란(白蘭) · 당항(黨項) · 부도(附圖) · 토곡혼(吐谷渾) 등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7세기 송첸감포(srong-btsan sgam-po, 松贊干布, 617년∼650년)가 티베트 고원과 그 주변의 제 민족을 통합하고 토번 왕국을 세움으로써 티베트에 처음으로 통합된 정치 세력이 출현하였다. 당시 네팔과 당나라에서 각각 공주를 보내 화친을 맺은 것도 토번의 이러한 실력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물론 중국 측의 자료들이 1980년 이전에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나 6~70년대의 문화혁명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리고 현재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자료는 토번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인도와 미얀마, 위구르 측이 주로 티베트와 교류했기 때문에 인도와 미얀마, 투르크 입장에서 서술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이나마 티베트 고대 부족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도했다는 의미가 매우 크다. 강족이 처음으로 티베트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가 월지(月支)와 동호(東胡)를 격파했을 당시 묵특선우가 서역(西域)을 압박하자 대부분의 강족은 묵특선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에 가담하지 않은 강족은 티베트 고원으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강족의 첫 번째 이주이다. 첫 번째로 이주한 강족은 티베트 지역에 자리했고 ‘44개의 소왕(小王)’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라싸 지역까지 점령하여 티베트의 고대 민족들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중원에서 정치적인 사건들이 벌어질 때 마다 강족과 한족이 이주하여 왔는데 이들 티베트에 지배층으로 있던 강족은 이들을 모두 티베트의 주민으로 인정하였다. 이전 강족은 지배층으로 티베트 원주민과 이주해온 강족과 한족을 통치하였는데 이것은 중원에 영향을 적게 받았고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경계를 이루고 서역과는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타림 분지를 건너오는 서역의 대상(大商)들은 북쪽에서 티베트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남쪽에는 오늘날의 네팔,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가 자리하고 있어 그나마 분쟁이 적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영향들로 인하여 티베트의 고대 국가 형성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티베트에 대한 어원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에도 ‘티베트(Tibet)’라는 단어를 지역의 이름인 동시에 민족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의 어원은 현재 서구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전 세계로 보급되었을 뿐, 정작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봇드(bod)’라고 부른다. 이러한 ‘봇드’는 강족의 장족 어원인 ‘버쯔(burz)’ 라는 어원과 같다. 버쯔는 장어(壯语)로 ‘하늘과 마주한 땅에 사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티베트의 어원에 대해서는 ‘척발(拓拔)’이 와전되어 전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명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강족이 티베트에 거주하고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중원과 인도, 서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서역과 교역하고 인도의 여러 나라와 전쟁하면서 그 세력과 차별화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장족은 중국 남부나 베트남 북부에 주거 하는 태국계의 민족으로 광시자치구 중서부나 운남성(云南省) 남서부, 광동성(广东省) 동부 및 귀주성(贵州省) 남부, 호남성(湖南省) 남부에 1,800만이 살고 있는 56개 민족 중 최대의 소수민족으로 언어는 티베트어, 장어(壯语), 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진(秦) 서구(西甌), 락월(駱越), 남월(南越), 복(濮), 료(僚), 리(俚) 등으로 불리었으며 송대(宋代)부터는 당(撞), 동(僮), 중(仲)으로 불렸고 명청 시에 동인(僮人), 양인(良人), 토인(土人)으로 호칭되었다. 신중국 성립 후에 동족(僮族)으로 통일되었지만, 동(僮)에는 ‘아이들’, ‘머슴’, ‘노예’ 등의 차별적인 의미로 인해 1965년에 동(僮)과 발음이 같은 장(壯)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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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1
  • 2023년 7월,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 조기 선거에 대한 상황 정리
    2023년 7월,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향한 길을 열어 줄 조기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조기 대선을 위한 투표소는 해외 39개국 56곳을 포함해 모두 10,784곳에 설치되었고 해외 사전투표는 이미 5일애 마무리 되었다. 9일 오전 8시에 시작한 투표는 오후 8시에 마무리 된다. 우즈베키스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체 유권자 수는 약 1,960만명으로 추산된다. 타스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사전투표 개시일부터 4일 동안 전체 유권자 가운데 376,623명이 투표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우즈베키스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다음날 대선 예비 결과를 발표할 예정에 있다. 우즈베키스탄 선거법 상 대선에서의 승리 요건을 갖추려면 전체 투표율은 33% 이상을 기록해야 하며, 당선 유력 후보자는 50%+1표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50%가 되지 않을 경우, 2위와 마지막 경합을 위해 터키처럼 최종 선거 단계로 들어 갈 수 있다. 앞서 지난 4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현행 5년에서 7년 중임으로 늘리는 내용 등을 담은 개헌 안이 국민투표 참가자 90.21%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조기 대선 방침을 발표했고 그와 같은 배경으로 이루어진 선거라 볼 수 있다. 이번 선거에는 여당인 우즈베키스탄 자유민주당 소속 후보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외에 우즈베키스탄 인민민주당 등 야당 소속 후보 3명도 출마한 상태다. 그러나 야당 후보들 가운데 마땅한 대항마가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낙승을 예상하고 있고 나 또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 선거를 통해 미르지요예프가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는지가 중요하며 이는 4년 후 치뤄질 우즈베키스탄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민주당의 향배를 결정할 수도 있다. 러시아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정치학자 루스탐 부르나셰프(Рустам Бурнашев)는 미르지요예프가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에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그로진(Андрей Грозин) CIS 연구소 중앙아시아 부서장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선호되는 사람이 이미 알려졌고 중요한 것은 현직 대통령이 몇 %의 지지를 받는지, 이전 대선과 비교해 볼 때 투표율이나 득표율 등의 지표들이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상승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말인즉, 야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앞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2021년 10월 대선 당시 투표율은 80.8%였으며, 득표율은 80.1%를 기록했다. 그로진은 또 이번 선거 결과가 우즈베키스탄의 외교 정책 파트너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했다. 그로진은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의 확실한 승리가 외교 정책의 불변성을 보장할 것이다며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이웃 국가들과의 협력은 더욱 확대되고, 서방 국가들이 우즈베키스탄에 압력을 가할 기회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가 친한파인만큼 한국과의 관계가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을 27년 동안 철권 통치했던 이슬람 카리모프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2016년 12월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됐으며, 2021년 10월 재선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올해 65세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이번 조기 대선에서 승리하고 이후 한 번으로 제한된 연임에도 성공한다면 2037년까지 최장 14년을 더 집권할 수 있다. 장기 독재로 가고 있는 미르지요예프, 그가 당선되면 엄청난 친한파 대통령이기에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민주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인데 현지 시간 10일 점심 때쯤이면 결정날 것으로 생각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11
  • 한국 로켓 개발의 역사, 러시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누리호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KSLV 계획에 따라 2022년 개발 완료한 로켓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저궤도 실용 위성 발사용 로켓으로 알려져 있다. 누리호의 발사로 인해 한국은 세계 11번째의 자력 우주 로켓 발사국이 되었으며, 1톤 이상의 실용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킬 수 있는 7개국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누리호의 개발사업은 10여 년 전, 나로호에 투입된 예산 5천억 원의 4배인 2조 원이 투입되는 사업이며 누리호에 사용되는 기술들은 향후 개발할 KSLV-IV의 기술적 기반이 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인 '누리'는 당시 경상대학교 에너지기계공학과 학생인 백승엽 씨가 응모한 명칭으로 대국민 명칭 공모전을 통해 10,287건의 후보 가운데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누리호는 총 3단의 액체 로켓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에는 추력 735 kN의 75톤급 엔진 4개를 클러스터링하여 총 300톤의 추력을, 2단에는 75톤급 엔진 하나를 사용한다. 3단에는 7톤급 엔진 하나를 사용한다. 해당 설계에는 ESA의 우주발사체 아리안 시리즈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1~2단에 추력이 높은, 3단에 추력이 낮은 엔진을 배치하는 구성이 그러하다. 특히 누리호 설계안 중에서는 아리안 시리즈의 상단 엔진인 HM7B를 면허생산하는 안까지 있었으니 어느 정도 설계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도 있는 편이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사용하는 연료의 종류와 고체 부스터의 유무 정도이다. 누리호는 전 엔진이 케로신인 반면, 아리안 1~4는 사산화이질소와 UDMH를 사용하였고 6톤급 엔진에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이용하였다. 탑재체(payload)의 중량이 1톤을 넘는 것을 기준으로 세계 7번째 독자개발 로켓으로 이는 한국의 우주개발 기술력이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중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독자 개발이 한국의 노력도 대단한 성과지만 그 물밑에서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누군가의 도움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는데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해 미국도 도와주지 않았던 우주 개발 사업을 러시아가 부지까지 제공해가며 도와줬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있다.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수장고에 가면 한국 러시아의 우주개발협력을 상징하는 붉은색 돌 하나가 보관되어 있다. 이는 2007년 러시아 연방우주청 장관이 한국-러시아 우주장관 회담을 위해 나로우주센터를 방문했을 때 가져온 ‘기념품 돌’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우주개발 시작점을 알린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센터의 가가린 발사대 아래에서 채석했다고 전해지는 말 그대로 "우정의 돌"이다. 한국의 우주발사체 개발에 대한 역사를 본다면 강대국들의 정치외교적 변혁과 이로 인한 여러 측면의 아이러니들이 얽혀있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70년 가까이 ‘한미동맹’이라는 긴밀한 관계로 지내왔지만, 정작 한국의 우주 로켓 개발에 도움을 준 곳은 러시아 등 과거 미국과 냉전을 벌여왔던 구소련권 국가들이었다. 미국은 1987년 미사일 기술 통제체제(MTCR)를 창설한 이래 미사일 완성품은 물론 관련 기술과 부품의 국가간 거래를 철저히 막아왔다. 동맹국인 한국도 예외없이 이를 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적성국가였던 옛 소련권 국가들이 한국에 우주기술을 사실상 전수해 줄 수 있었던 이유는 1980년대 말에 공산권 체제가 붕괴되고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등의 엄청난 대혼란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로켓 개발의 역사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8년 인천 고잔동 해안에서 한국 최초의 국산 로켓이 시험 발사 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8년엔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차용한 백곰(NHK-1)이 200㎞ 거리를 날았다. 우주를 목표로 한 본격적인 로켓 개발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발족 이후부터로 나타난다. 1993년 발사된 KSR-I(Korean Sounding Rocket-I)이 본격적인 우주개발의 시작이다. 그러나 KSR-I는 1단짜리 과학 로켓에 불과했다. 우주개발용이라는 목표는 있었지만, 실제 우주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고체 연료를 쓴 로켓이었던 KSR-1은 관측용 장비를 탑재하고 최고 고도 39㎞에 77㎞의 거리를 190초 동안 비행했다. 1997년 발사에 성공한 KSR-2는 2단이었지만, 역시 고체 로켓이었다. 추력이 KSR-I의 2배였던 KSR-2는 당시 151㎞ 고도까지 올라가 국내 최초로 우주 X선을 관측했다. 하지만 고체 로켓은 사거리를 제한하는 한국-미국의 미사일 지침으로 인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수 있는 우주 로켓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2002년 발사에 성공한 KSR-3은 1단에 불과했지만, 한국 최초의 액체연료 추진 과학로켓이었다. 추력 13t의 가압식 액체엔진을 달고 고도 43㎞, 거리 80㎞를 비행했다. 이때부터 러시아와 우주기술 협력이 시작됐다. 당시 항공우주연구원은 미국ㆍ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협력을 추진했지만, 러시아 외에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러시아는 국가 핵심 기술을 일부 팔아서라도 외화벌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에는 액체로켓 엔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러시아 켈디시 연구소를 찾아간 한국의 연구원들은 액체 로켓 설계 기술을 자문받고, 또 완성한 13t 엔진을 러시아 니히마시 연구소까지 가지고 가서 연소 실험도 했었다고 한다. KSR-3 다음이 2013년 1월 발사에 성공한 한국형발사체(KSLV-1) 나로호다. 1단엔 러시아에서 들여온 추력 180t의 최신형 안가라 엔진을, 2단엔 고체 킥모터를 달았다. 2007년에는 개발한 터보 펌프를 시험하기 위해 러시아 니히마시 연구소에 가져갔다가 폭발사고가 발생해 현지의 시험설비까지 타버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번 발사에 성공한 한국형발사체(KSLV-2) 누리호의 75t 로켓 엔진은 러시아의 액체로켓을 사실상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ㆍ역공학)한 결과였다. 누리호에 들어간 헬륨탱크는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한 제품이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75t 액체 로켓 엔진 개발에 들어가 3년 여 만인 2018년 11월 누리호 시험 발사체(KSLV-2 TLV)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짧은 기간 동안 독자적인 액체 로켓과 발사체 체계종합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항공우주연구원의 연구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긴 하지만 러시아 우주기술의 기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의 우주 개발의 역사는 사실상 러시아를 빼면 설명할 수 없는데 이러한 협력의 역사마저 부정하고 폄하하려는 어처구니 없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것도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대개 당시 좋지 않은 러시아 경제상 황에서 돈이 아쉬우니까 돈받고 했지 대단한 선심을 베푼 것처럼 했다며 예전에 수교할때 빌린돈도 못 갚아서 구식탱크랑 헬기로 갚은자들이라고 폄하에 나선 것이다. 이런 자들은 엄연히 "불곰사업"으로 국방상호 협력한 역사마저 부정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불곰사업이 없었으면 한국이 자랑하는 K-9 자주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날 세계 6~7위의 국방력을 가진 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업을 하든, 국가 간의 비즈니스에서는 공짜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국가가 도와주면 그걸 공짜로 했겠냐며 애써 폄하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그 어떤 국가도 공짜로 하는건 없다. 6.25 때 미국이나 UN군에 속해 있던 국가들도 자국의 이익이 걸려 있던데다 그 어떠한 국가도 공짜로 우리를 돕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그러한 도움에도 지극히 계산적으로 나온다. 천한 장사치에 노예 근성이 뿌리 깊게 자리 잡으니 그러한 계산적 속성에 불을 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폴란드에게 무기 수출한 것 가지고도 천박하게 나대고 있는데 폴란드가 선진국도 아니고 동유럽에서조차도 자국 경제력이 감당이 안 되는 국가가 한국 무기에 대한 대금을 과연 완납할 수 있을까? 그처럼 국제 관계는 돈놓고 돈먹기, 돈 싸움이기 때문에 공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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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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