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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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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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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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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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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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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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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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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시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에 대해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독립 운동은 서유럽에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문제만큼 오래된, 아주 해묵은 과제다. 카탈루냐의 원주민은 갈리아 인이었고 이후 로마-서고트의 지배를 받으며 서고트인들이 정착했다. 카탈루냐 지역은 대대로 동고트 왕국과 자주 충돌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현 카탈루냐 원주민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고트인이다. 그리고 이 고트인들은 프랑크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프랑크인들과 혼혈하면서 혼합 민족으로써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 카탈루냐 독립 운동의 시작은 유럽 중세 최악의 대전쟁인 독일 30년 전쟁(1618~1648)에서부터 비롯된다. 30년 전쟁 후반대인 1635년에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발발한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스페인 중앙 정부는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한 현 카탈루냐 지방에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했다. 이러한 조치는 펠리페 4세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 공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Gaspar de Guzman, 1587~1645)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올리바레스는 '공평한 과세(Tributación equitativa)'라는 명목으로 지중해 해양 무역을 통해 얻은 카탈루냐의 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국정의 핵심적인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 동안 스페인 제국의 군사 활동에 대해 경제적인 부담은 거의 전적으로 카탈루냐가 책임졌었는데 이는 카탈루냐가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각종 부를 취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올리바레스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바로 잡아 이제는 왕국 전체가 보다 '평등한 군사적 부담(Carga militar igual)'을 할 수 있도록 과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에서도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징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으로만 공평한 과세로 불리워졌지 메마르고 황량한 곳에 그나마 중세 양모 산업으로 부흥했던 카스티야 경제가 스페인 왕실의 지속적인 착취로 인해 몰락하다 보니 그저 착취할 대상을 카탈루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군대는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인 카탈루냐에 주둔하며 물자를 징발했는 이는 말이 징발이지 수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자 카탈루냐 농민들이 중앙 정부에 불만을 품고 164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수확전쟁(Guerra dels Segador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페인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니 자치 정부인 제네랄리타드(Generalitat)를 이끌던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은 이를 기화로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기로 결의했다. 제네랄리타드의 귀족 리더들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니 이에 수긍한 프랑스 군이 카탈루냐로 진주했고 곧 스페인 군과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황은 점차 프랑스와 카탈루냐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카탈루냐 귀족들은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있는 프랑스에게 자신들이 그 때까지 유지해 왔던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당시 프랑스 재상인 리슐리외가 이를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면서 서로 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프랑스 왕정에게 있어 자치권이나 봉건적 귀족들에 대한 특권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프랑스 왕정이 절대왕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장애물이었던 것은 지방의 봉건 영주들이었고 프랑스 왕정은 지방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박탈해 그들을 왕권의 통제 하에 두었다. 이는 왕권을 강화시키고 귀족들을 왕권 아래 중앙으로 결속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갖은 노력과 희생을 치러 왔다. 그와 같은 프랑스 왕국이 카탈루냐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용인해 줄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한편 카탈루냐에 진주한 프랑스 군은 자신들이 카탈루냐를 구원하러 출병해왔던데다 카탈루냐의 중앙 귀족정을 장악하자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의 이와 같은 왕의 절대권력 통제 속에서 카탈루냐 인들은 프랑스의 통치 시스템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보다 훨씬 가혹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인들은 점차 프랑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신들이 한 행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카탈루냐의 귀족 지배층과 농민층이 서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처음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농민들의 이해 관계는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정치 지도자들은 봉기한 농민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반란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더욱 통제되어 돌아가는 것을 본 카탈루냐 농민들은 귀족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카탈루냐 농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카탈루냐를 프랑스에 내주었다가 더 악화되는 사태를 초래한 귀족 지도자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결국 농민들은 점차 귀족 지도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된다. 한편 카탈루냐 인들이 점차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되니 프랑스 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측이 구원을 요청해 구원군을 파견했던 프랑스 군은 크게 실망했고 카탈루냐에서 스페인과 싸우려는 의욕도 상실해갔다. 서서히 프랑스 군은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카탈루냐에서 프랑스 군을 철수시키게 된다. 이어 스페인 중앙군이 바르셀로나를 포위하게 되면서 공성전에 들어갔고 카탈루냐는 결국 스페인 중앙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스페인 전쟁 도중이었기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카탈루냐는 계속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이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인 것이다. 1659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종결되면서 마침내 피레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의해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카탈루냐의 영토 역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면서 카탈루냐는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현재 프랑스의 피레네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 지역이 피레네 조약으로 할양된 카탈루냐의 땅이다. 과거 프랑스에 병합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피레네조리앙탈 지역 역시 카탈루냐어의 사용을 금지당했으며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게 되어 현재는 프랑스어권이 되었다.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둘째 손자 필리프 공작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는 차남 카를 대공을 합당한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망한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은 필리프 공작을 차기 계승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재빨리 필리프를 스페인으로 보내 펠리페 5세로 즉위시켰으나 잉글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이 이에 반발하여 카를 대공을 옹립하게 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Guerra de Sucesión Española)이 발발하게 된다. 한편 카탈루냐-발렌시아 지역은 1640년 카탈루냐 반란의 경험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대공을 지지했다. 이들은 카탈루냐가 주요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참전했다. 카탈루냐-발렌시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그 때까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 받아왔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왕위를 받는다면 계속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반면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부르봉 왕조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면 프랑스 남부 지방처럼 자치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탈루냐어를 금지당하고 중앙정부가 강요하는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11년 카를 대공이 형 요제프 1세가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게 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전황이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카를 6세 한 인물에게 유럽 왕가의 권력이 지나치게 몰리며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열강들이 마음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승인하면서 전쟁은 수습 단계에 들어갔다. 카탈루냐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싸웠다. 하지만 역시 군사력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1714년 9월 11일 마침내 바르셀로나가 함락 당하면서 프랑스-스페인에게 카탈루냐는 넘어가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20
  • 스코틀랜드인의 선조 스코트인(Scots)은 누구인가?
    스코트 인(Scots)은 아일랜드로부터 이주하여 브리타니아에 정착했던 민족으로 그 기원이 오늘날의 스페인으로 생각된다. 스코트 인은 스코틀랜드 인의 선조로 흔히 보고 있는데, 켈트 계 민족의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통 켈트 인이라기보다 아일랜드 게일인과 후에 유입된 게르만 계통의 유트, 데인 인들이 혼합된 혼혈 민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10세기 이후에는 픽트 인도 스코트 인에 동화되면서 서력으로 더 올라갈수록 부족 계통성이 더욱 다양해졌다. 그들이 아일랜드 섬에 상륙하게 된 시기는 B.C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로마의 속주화 되지 않은 이베리아 북부 지역에서 로마인들과 세력 정쟁에서 밀려 기존의 반농반목의 형태를 버리고 스페인 북부의 갈라시아와 칸타브리아 지방 일대에서 어업에 주로 종사하며 배를 다루는 기술을 익힌 것으로 파악된다. 게다가 피레네 지역에 존재하던 이베리아 인과 히스파니아를 지배했던 옛 카르타고 세력, 그리고 로마인들의 북진으로 인하여 그들과의 세력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결국 스페인 북부 지방을 떠나 다수의 부족들이 배를 타고 아일랜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섬의 척박한 지형으로 인해 그들의 경제는 어업활동과 더불어 해적활동으로 인한 약탈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로 인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 해안가에 대한 약탈은 결국 상당수의 스코트 계 부족들이 브리튼 섬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이 된다. 결국 4세기 스코트 계 부족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브리트니아 섬 전체가 로마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무방비 상태가 되자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브리튼 섬으로 넘어 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먼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중부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한 선(先) 주민인 픽트 인에 지배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상황이 반전되기도 하였다. 스코트 인, 픽트 인은 남쪽 콘웰 지역의 브리트니아 인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스페인 북부, 피레네 일대인 바스크 지역에서 이주한 이베리아 인들이 4세기 후반에 상당수가 잉글랜드로 진입함에 따라 브리트니아 원주민들과 통혼함으로 인하여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명확히 구분 짓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러면서 스코트 인, 픽트인 등 켈트계 민족들의 침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브리트니아 인들은 유럽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게르만 계통 민족들에게 원병을 청하게 되는데, 이러한 원병 요청을 받아들인 앵글로 인, 색슨 인, 유트 인, 데인 인, 스베니 인이 잉글랜드에 상륙하게 된다.『앵글로색슨의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색슨 인이 매우 강력하여 그 압박으로 인해 스코트 인이 무력에 굴복하여 북으로 후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픽트 인이 사라진 시기인 10세기에 노르만 족의 잉글랜드 병합에 의거하여 픽트 인이 스코트 인에 동화되어 사라졌고 스코트 인은 결국 잉글랜드 북부를 근거지로 하게 된다. 이러한 스코트 인이라는 명칭은 로마인에 의해 처음으로 불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어떤 게일어 족도 그들이 고대에 라틴어를 제외하고 그들을 스코트 인이라 부른 적이 없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후 특히 400년대에는 그들의 전사들이 하이랜드에서 달 리아타 왕국을 설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왕국의 규모와 영향력은 확대되어, 스코트 인의 명칭은 현재의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지명의 어원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이름에도 Scott은 스코틀랜드 계나 아일랜드 계를 대표하는 영문 이름이 되었다. 이후 스코트 인은 아일랜드 게일 인과 브리타니아 원주민, 픽트 인과 혼혈하여 그들 독자적인 세력권으로 변모해갔다. 이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으며 앵글로색슨도 처음 잉글랜드에 들어왔을 때에는 스코트 인들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브리트니아 인들과 함께 웨일즈의 스코트 인들을 통합하게 된다. 따라서 웨일즈의 켈트 계 스코트 인과 앵글로색슨은 중세 문화 양식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 근세 시대에는 스코틀랜드 왕국과는 다른 형태의 국가로 노르만 왕조나 튜더 왕조에 흡수되는 형태를 보인다. 이후 대다수의 스코트 인들은 중, 근세 스코틀랜드 왕국의 주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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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3-20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갈등의 원인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분리 독립 요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갈등은 벨기에의 언어로 분리된 지역 갈등이나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영어권의 갈등 그리고 스페인의 민족적 지역 갈등에 비하면 그 원인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캐나다의 프랑스어권과 벨기에-네덜란드어권의 민족주의 운동은 언어 차별이 큰 원인 중에 하나였다. 스페인 내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탄압이 원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발호는 1979년 자치권 투표에서 노동당(Labour Party)이 납득할 수 없는 조건을 걸어 투표를 부결시킨 것, 그리고 영국 대처 내각의 집권, 브렉시트로 인한 유로 탈퇴가 촉발하게 된 원인이다. 그 동안 영국 내에소 스코틀랜드 게일어를 배제하는 언어 차별은 존재했지만, 스코틀랜드 측이 이를 빌미로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독립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스코틀랜드에는 주류 민족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달라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19세기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자치운동도 아일랜드 자치 운동 및 독립 투쟁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는 북아일랜드 이주를 통해 정착하는 등 영국에 협조적인 면을 많이 보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해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스코트인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스코틀랜드가 자치권을 얻는 역사적 과정을 보면 순탄치 않았고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 1912~2005) 내각에서 존 메이저(John Majo) 내각으로 정권이 이양되는 과정에서 노동당과 보수연합당(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에 대해 앙금이 많이 쌓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 포스팅은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합병 부터 지금까지의 상황과 독립 운동의 원인에 논해보고자 한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면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지만 법적으로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왕국(Rìoghachd na h-Alba)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까지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과 '스코틀랜드 국왕'을 겸임하던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왕국은 17세기 후반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이라는 혹독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 7년 동안 스코틀랜드는 엄청난 가뭄과 경제난이 겹쳤고 이 와중에 명예 혁명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던 정치 세력인 자코바이트(Jacobite)와의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내전이 장기화 될 기미를 보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된다. 여기서 잉글랜드 왕국이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는 것을 본 스코틀랜드는 국부의 근원이 식민지에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이 식민지를 건설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다리엔 계획(Darien Plan)이다. 당시에 식민지를 세울 만한 곳은 아메리카뿐이었고, 아메리카는 이미 여러 거대 식민 제국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다리엔(Darien)이었는데 이곳은 북미와 남미 사이에 있으면서 태평양과 대서양간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장악만 해도 아메리카를 왕래할 때마다 통행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운하를 건설하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는 상선 등에도 통행세를 물릴 수 있어 재정이 확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가 갖고 있는 기술로 다리엔에 운하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오지 중의 오지라서 원주민도 거의 없었던 곳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전 재산을 끌어 모아 스코트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다리엔 계획의 실패로 인해 재정이 파산한 스코틀랜드 왕국은 1707년 1월 1일을 기해 잉글랜드와 연합법의 제정하게 되면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란 이름의 연합 왕국의 형태로 변경되었다. 이에 기존까지 동군연합으로 구성되었던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연합 왕국 국왕'이라는 하나의 군주, 즉 잉글랜드의 국왕 아래에서 구성된 각각의 지방이 되어 복속되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이렇게 잉글랜드에 합병되어 오늘날 영국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스코트인들이 아일랜드의 자치권 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보고 비교하며 아일랜드가 특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를 보고 있던 영국 정부는 내전 발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시민과 아일랜드 시민을 잉글랜드 시민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한 시민법의 실행은 세계대전 등 내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고 질질 끌리기만 했다. 그러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이 몰락함으로써 스코틀랜드 경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조선과 철강업, 광업 등의 내 중공업이 영국 경제와 함께 처참하게 쇠퇴한다. 이와 같은 중공업의 쇠퇴는 영연방 국가 지원으로 겨우 유지해왔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SNP 소속 의원이 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영국 정치권에는 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영국 정치권에서는 논의 끝에 1979년에는 첫 번째 자치권 이양 투표가 있었으나, 노동당이 총 유권자의 40% 이상 동의 조건이 붙으며 좌절되었다. 이에 SNP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책임을 묻기 위해 하원에서 낸 제임스 캘러헌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전원 동의하게 되면서 찬성 311, 반대 310으로 캘러한을 실각시킨다. 이후 선거에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내각이 집권하였는데 보수연합당 내각 시절에는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요구를 사실상 묵살했다. 또한 대처의 재임기간에 이루어진 대규모 사기업화와 산업 정리로 인해 스코틀랜드 지역의 경제적 몰락은 전체적인 국영기업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마거릿 대처의 임기 말기인 1989년에는 인두세를 영국 내에서 스코틀랜드에 가장 먼저 적용했다. 그러자 그동안 잉글랜드의 지지부진한 대처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여론은 폭발했다. 이후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가 가결됨으로써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노동당은 스코틀랜드가 자치권을 가지게 되면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자들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자들은 이 틈을 이용해 SNP가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노동당 지지자들의 의석을 대부분 가져오는데 성공한다. 2010년대부터 스코틀랜드 의회와 영국 서민원 스코틀랜드 지역구에서 노동당의 의석은 거의 사라지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SNP의 정치인들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각종 여론조사나 스코틀랜드의 경제 자료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스코트인들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게 되면 경기가 오히려 악화될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지지 여론이 많은 이유는 오랫동안 영국 정부가 스코틀랜드의 여론을 무시하고 정책을 집행해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브렉시트에 이은 독립 표결은 스코트인들이 독립하려는 의지를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스코트인들은 140여년의 세월을 거쳐 1998년이 되어서야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지만, 약간 부족했던 노동당의 대처와 영국의 차별 정책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가했던 지나치게 권위적인 보수연합당의 억압, 그리고 이로 인해 여전히 남아있는 영국정부의 정치, 문화적인 배려 부족, 마지막으로 이러한 영국정부의 실정을 비집고 들어온 SNP의 전략이 독립운동의 주요 원인이라 볼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3-19
  • 커피의 세계사, 세계의 경제를 뒤흔드는 씨앗 이야기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서 커피 수출로 막대한 이득을 보던 예멘인들은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16세기 후반부터 커피 종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고 수출할 때도 구운 커피콩만을 내주었다. 그러나 1685년 네덜란드가 스리랑카, 실론 섬을 정복하고 식민화 시켰을 당시 현지 무슬림들이 커피나무를 키웠다는 기록이 나타나면서 이미 17세기에 다른 지역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70년대에는 인도의 수피 성인이자 커피계의 문익점으로 알려진 바바 부단(Baba Budan)이 메카 순례 후 경유한 모카에서 7알의 커피 열매를 품에 숨겨와 인도 남서부 해안에서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실론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바바 부단이 해안가에서 재배하기 전에 수피 성인 다다 하야트(Dada Hayat)의 사당 근처에 심었는데 단 한 알만이 싹을 틔웠다. 이 씨앗 한 알이 19세기까지 이어진 티피카(Typica) 계통의 최고급 품종이자 인도 커피의 조상인 올드 칙(Old Chik)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1619년부터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자바에 대한 식민 지배에 나섰던 네덜란드는 1690년부터 예멘 아덴에서 밀수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기후 조건 상 맞지 않아 몇 차례 실패 끝에 1699년에서야 안정적인 재배가 시작되었고 18세기 초엽 자바는 모카에 이어 동남아시아 최대 커피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더 나아가 네덜란드는 1718년부터 라틴아메리카 수리남으로 커피콩을 가지고 들어가 커피 집단 농장을 만들고 재배에 나섰다. 당시 커피 열풍이 불던 프랑스에서 커피를 사재기하기 시작하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프랑스의 사재기로 인해 커피가 부족해졌고, 이에 술탄이 유럽에 커피 수출을 금지하게 되면서 유럽은 때아닌 커피 대란을 겪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는 1713년 네덜란드와 위트레히트 조약을 맺으며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나무를 입수한 것을 바탕으로 1697년에 스페인으로부터 점령한 식민지 생 드망 (현 아이티)에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1715년에 시작한 첫 시도는 10년 만에 실패했지만 1723년 카리브 해의 다른 섬인 마르티니크에서 해군 장교 마티유 드 클리외(Mathieu Francois D'ceus de Clieu)가 티피카 품종을 가지고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다시 아이티와 과달루프 등에 옮겨 심게 되는데 아이티의 경우, 본래 카카오, 사탕수수 재배에 주력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1725년의 허리케인과 1727년의 대지진으로 인해 카카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붕괴하게 되자 커피 농장을 개척해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아이티와 과달루프에서의 티피카 품종 재배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1730년대부터 프랑스의 커피 공급은 안정화되었다.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가 없었기 때문에 모카나 자바로 향하는 노선보다 카리브 해의 식민지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써 아이티의 커피는 운송비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무상 노동력으로 인해 가격 경쟁에서도 아이티산 커피는 저렴한 값을 자랑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기존에 수입처이던 중동에 오히려 커피를 수출하게 되었다. 1750년에 아이티는 전 세계의 커피 중 절반 가량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앞서 언급한 그대로 네덜란드령 기아나인 수리남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던 1722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죄를 짓고 수리남으로 도주한 물루주(Muluju)라는 사람이 기아나에 살고 있는 연인을 만나게 허가해주는 대가로 수리남의 커피나무를 밀수해주는 계약을 통해 기아나에도 커피가 전해지게 된다. 그리고 1727년 수리남의 네덜란드 인들과 기아나의 프랑스 인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자 남쪽 브라질의 포르투갈 인들이 이에 대해 중재에 나서게 된다. 이 때 파견된 포르투갈 인 프란시스코 드 메르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의 부인을 유혹한 후, 작별 선물로 받은 꽃다발에 숨겨진 5그루의 커피 묘목을 브라질에 가지고 들어왔고 이것이 후에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는 브라질에 커피가 들어온 경위라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의 부인에게 금을 비롯해 여러 보석들로 환심을 산 후, 기아나로부터 밀수에 성공해 브라질 해안가에서 재배했다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 재배를 도입하는 과정들이 각종 속임수와 유럽 내의 권모술수로 얼룩진 것과 달리, 인도양에서는 비교적 합법의 형태를 갖추고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 1712년 프랑스의 사절단이 예멘을 방문했을 때, 중이염을 앓고 있던 라시드 왕조의 군주 알 마흐디 무함마드(Al-Mahdi Muhammad)를 이 때 동행했던 의사가 치료해 주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절단은 커피 나무를 청하게 된다. 그러자 알 마흐디 무함마드는 1715년 프랑스 상인 안벨에게 커피 묘목 60그루를 하사하였으며 안벨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막 식민지로 삼았던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부르봉(레위니옹)섬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염분 농도가 높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항해 도중 40그루가 말라죽었다. 나머지 20그루는 마다카스카르에 도착해서 1716년 현지 수도원 정원에 심었는데 그 중에서 단 두 그루만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 둘 중 하나도 말라죽고 남은 한 그루가 열매를 맺으며 부르봉 품종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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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9
  • 게르만 계통 민족들과 켈트족의 동족설은 사실 확인이 되었는가?
    독일 유전과학연구소에서 2004년 할슈타트와 하라인 지역에서 발굴된 켈트 인 유골과 프랑크 족,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 롬바르드 족, 고트 족 등 게르만 계통 유전자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90% 이상의 유사한 유전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구분될 수 있었던 것은 게르만 계통 민족의 언어와 켈트인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인데 이들의 언어가 다른 이유는 켈트인들이 주로 유럽의 고지대에 살았고 게르만계 민족들이 저지대에 살았다. 상대적으로 북독일 지역과 중부 독일 지역, 폴란드 지역은 알프스나 피레네가 위치한 지역과 고도와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사진 자료를 검토해보면 독일 유전과학연구소의 Müller Rosemarie는 Reallexikon der Germanischen Altertumskunde이라는 사전을 만들면서 켈트와 게르만족이 동족일 확률이 높으며 실제 유전자 배양에서 일치된 형태가 많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Katz Solomon는 게르만 족이 노르만 족과 동족이며 스칸디나비아 기원설을 끝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에 할슈타트를 뛰어넘는 고대 유적이나 할슈타트의 켈트-게르만계와 유사성 있는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고 이 역시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동안 유럽 중부 지역 전역에 걸쳐 발견된 게르만계 관련 유물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또한 고(古) 노르만어와 고(古) 게르만어가 동일한 형태의 수사를 가지고 있고 두 언어 모두 스칸디나비아 계통이라는 Hachmann Rolf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가 연구했을 때 이 역시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았다. 할슈타트에는 19세기 게오르그 람자와(Georg Ramsauers)가 발견한 무덤 외에도 청동기 시대 말기(B.C. 900~B.C. 800)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광산 지하도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갱도의 전체 길이는 3,750m, 총면적은 3만 평방 km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넓었다고 하며 이곳에는 몇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롬바르드, 수에비 족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갱도 속에서는 당시 이들이 착용한 의복과 가죽 띠, 소금 덩어리를 파내기 위한 도구 등이 발견되었고 이는 켈트 족이 사용된 유물들과 대략적으로 유사했으며 켈트족처럼 돌무더기 무덤을 가지고 있었고 관이 놓여 있는 형태도 같았다. 이는 거의 같은 민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매장 풍습으로 보았고 추가 발굴을 한 비엔나 과학 아카데미 측도 1892년 보고서를 냈을 때 이를 매우 중시하여 기술했다. B.C. 600년경, 할슈타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라인(Harain)이라는 지역에 새로운 암염광이 개발되면서 할슈타트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라인 지역은 교통이 편리해서 할슈타트보다 교역에 더 적합했고 할슈타트와 하라인 두 지역에서 게르만의 원형으로 보이는 종족들의 유골들이 약 60여구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켈트족과 유전적으로 유사한 켈트인 추정되는 유골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프랑크 족과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이 있었으며 이들은 켈트인과 섞여 살았고 두 종족이 혼혈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할슈타트는 소금 교역지로도 번영을 누렸는데, 기존의 학설과 달리 북쪽 보헤미아에서부터 남쪽 이탈리아 지방까지 이미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로 접어든 상태였다. 이것이 기존 스위스 라텐 지역에서 발굴된 라텐 청동기 문화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럽 최초의 철기 문화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는데 언어적으로도 당시만 해도 게르만계 언어와 켈트계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라인에서 이들의 유골이 섞여 나왔고 연대는 거의 동일 시기인 B.C 800~700년으로 나타났으며 섞여 거주한 것으로 볼 때 의사소통도 그리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덤에 따라 부장품의 종류와 매장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후대 연구자들은 당시 켈트와 게르만 사회가 신분제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종족 계통에 대해 크게 구애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켈트인과 게르만계 민족 모두 황금, 혹은 은제, 청동 장식들이 출토되었고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신분제였지만 종족이나 민족 계통으로 신분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로마 측에서 기록도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갈리아 전쟁기>에서는 카이사르가 사로잡은 베르킨케토릭스 왕을 켈트 족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게르만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중국 사서에서 진개가 고조선 땅을 천리 취한 것과 2천리 취한 것의 기록이 다르듯, 그리고 동호의 땅을 취한 것과 조선의 땅을 취한 것이 다르듯, 서로 상이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도에서 분포도를 보아도 같이 겹쳐 살고 있는 지역이 많다. 비록 카이사르나 플루타르코스가 켈트와 게르만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 생각해서 상반되게 적어도 별 문제 없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기록들, 과학적인 분석, 고고학적인 분석 등을 통하여 둘은 동일 민족, 혹은 켈트의 일파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이 햇갈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 첫째는 무엇으로 두 민족을 구분했으며 함께 섞여 살았기 때문에 통혼이 자유로워 혼혈 계체들이 많이 탄생했으며 이들을 또한 무엇으로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갈려 나갔는가도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물론 이 햇갈리는 부분은 현재 연구 중이기 때문에 본 연구자가 아직은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이런 것을 비공개 블로그에 적고 있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기록 문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카이사르 정복 후에 기록 문화가 나타나지만 그 양도 많지 않아 고고학이나 현대 유전학, 언어학, 민족학, 인류학 등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연구가 가능한 분야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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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인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한 이유
    인도는 한국보다 상황이 아주 안좋은 국가다. 북으로는 거대한 중국과 영토 분쟁을 하고 있다. 고대 시대부터 중국과 인도는 사이가 의외로 좋았던 편이었다. 영토 분쟁 지역이 겹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고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할 부분들도 많았다. 더불어 서로 간의 영토가 겹치지 않으니 두 나라 사이에 전쟁도 거의 없었다. 중국에 뿌리내린 불교의 원산지가 인도였으며 그 중화사상이 강했던 중국에서 인도를 천축국이라 부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 20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인도가 무굴제국 이후 진정한 통일국가를 만든 일이 없어 중국 같은 큰 나라와 충돌할 만한 상황도 잘 만들어지지 않았고 과거 중국은 현재 영토보다 더 서쪽 영역이 적은 상태였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지역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였기에 서로 직접적으로 상대할 일이 없었던 것도 있다. 19세기 말, 인구 밀도나 국경 개념이 희박했던 지역에 수천 km 떨어진 영국의 외무부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임의로 국경선을 굿게 되면서 인도의 독립 후에 양국의 충돌을 새로이 불러온 셈이 되었다. 마침내 1962년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에서 이른바 인중전쟁으로 불리는 첫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이 전쟁에서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주요한 영토 분쟁지역은 중국이 소유한 카슈미르 일부 지역인 아크사이친, 인도가 소유한 아루나찰 프라데시이다. 물론 중국 측이 소유한 영토가 인도가 소유한 영토보다 여러모로 쓸모없는 영토지만 원래 인도 영토였기에 인도 정부 측에서 중국 정부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2017년 중국과 인도의 완충 국가인 부탄이 국경에 접하고 있는 도클람 지역에 도로를 신설하면서 부탄 측이 크게 반발했고 인도도 역시 중국을 비판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후 국경 지대에 두 나라는 각각 3,000명의 병력들이 대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며 이어 인도군은 중국과 대치 국경지역에 최대 2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중국 측에서는 이에 대응해 군수물자와 수술용 혈액을 티베트 자치구에 집결시키는 등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다가 2020년 6월 16일에는 두 나라 사이에서 물리적인 충돌까지 발생한다. 2015년 이후,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하면서 파키스탄과 미얀마, 스리랑카에 파이프를 박았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전통적인 적대국이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핵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인도도 핵을 갖고 있긴 하지만 중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에 인도는 매우 긴장하는 분위기이다. 사실상 종교 때문에 갈라선 인도와 파키스탄은 역사적인 문제에서도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인도는 무굴제국의 통치시기를 이슬람의 강점기로 인정하고 있는데 비해 파키스탄은 전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이기에 무굴제국을 공식적으로 인도를 통치한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카슈미르를 두고 두 나라간의 전쟁 비슷한 충돌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가 2017년 11월에 인도 동부 지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운남성 일대를 동남아시아 일대일로 최대거점으로 육성하고자 잇단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지리적으로 운남성은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미얀마 군부가 중국의 일대일로를 다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나섰다. 중국은 인도양 진출을 위해서 미얀마에 오랜 기간동안 공을 들이고 일대일로 참여를 독려해 왔고 그것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는 거대한 중국 세력으로 인해 동쪽 (미얀마), 서쪽 (파키스탄), 북쪽 (중국)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고립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의 남쪽에는 스리랑카가 있다. 역시 인도와 스리랑카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라족들은 일단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의 주류 민족 타밀족과 인도-아리아와 드라비다로 민족이 갈라지기 때문에 민족 간의 문제가 있어 오래전부터 계속 충돌해오던 관계였다. 게다가 종교도 인도는 힌두교이고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다. 종교적인 부분에서의 마찰도 적지 않다. 스리랑카 내전도 스리랑카에 거주하는 소수 타밀족과 스리랑카의 주류 민족인 싱할라족과의 분쟁으로 일어난 전쟁이었고 인도도 이 전쟁에서 남부 타밀나두의 타밀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의 편을 들어줘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 이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가 끼어 들어오면서 양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중국이 스리랑카에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함반토반 항구를 임차하고 콜롬보 항구까지 개발에 나서자 인도는 남쪽의 스리랑카까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 빌린 거액의 부채를 갚지 못한 스리랑카는 함반토타 항구 운영권을 99년 동안 중국에 조차해주는 조건으로 넘겼고 중국은 여기에 자국의 군함과 해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완전 포위된 인도는 말 그대로 국가 자체가 백척간두의 믹서기 칼 날 위에 서있은 셈이다. 그래서 인도는 국가 예산의 43%를 국방력 강화로 쓰고 있다. 2020년에 인도와 중국간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인도 측은 러시아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매했다. MiG-29 UPG 버전 21대와 Su-30MKI 12대 총 33대의 러시아 전투기를 긴급 도입했다. 그리고 2021년 4월 28일에 러시아는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인도에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제공했고 인도의 세럼 인스티튜트가 2021년 9월부터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생산하게 되었다. 해군은 호위함, 구축함, 항공모함, 잠수함 가릴 것 없이 러시아제, 혹은 러시아와 합작 개발한 함정들이 존재하며, 공군도 MiG-21이나 Su-27 계열기들을 다수 운용 중이고 Su-57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심지어는 탄도미사일이나 대공 미사일까지 러시아하고 협업 중에 있다. 2021년 11월 14일에 첨단 방공미사일 S-400의 인도 공급이 시작되어 러시아 무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무기들은 자국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 적국인 파키스탄과 중국으로 향해 있다. 한편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 점화된 미국-중국 패권경쟁의 일환이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도-태평양 지역의 대중국 포위망의 주요 국가로서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만큼 인도는 1962년 인중전쟁에서 패배한 전력도 있기 때문에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도모하고 있다. 미중간 패권경쟁으로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소비시장이 필요한 미국이 인도를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2016년에 인도와 미국은 Logistics Exchange Memorandum of Agreement 에 서명했고 인도는 미국의 주요 방위 파트너로 선언되었다. 미국은 일본, 인도와 함께 인도양에서 연합훈련을 1992년부터 행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이 수립되었다. 중국과 인도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인도는 미국과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했고 최근 이런 인도와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이 자주 실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는 러시아와 미국, 서방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아주 능숙하게 잘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를 통해 중국의 위협을 외교로 견제하고 미국을 통해 중국과 싸울 수 있는 우방을 확보했다. 그리고 두 나라로부터 무기를 수입함으로써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인도는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K-9 자주포를 수입했다. 그 자주포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위협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인도에게 있어 무기 판매의 주 고객이 되고 있다. 군사적 화력에서 중국에게 밀리는 인도는 러시아와 미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중국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 말그대로 "친러용미", "친미용러"를 자유자재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두 나라 사이에서 인도는 중립이 가능했던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인도는 처음부터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충분히 밝혔다. 현재 러시아와 인도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현재 경제 제재로 인해 달러가 요긴하게 쓰이지 않을 경우, 인도에 와서 달러로 바꾼 다음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인도를 90일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으며 뉴델리와 꼴까타, 뭄바이에는 모스크바 세레메쩨보로 연결되는 직항 노선이 있다. 인도는 분명 안보에서도 한국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다. 경제적 여건도 1인당 GDP 2,000불로 한국보다 더 좋지 않다. 그런데도 이번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가 인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고 혹시나 모를 중국의 배신?에 러시아 입장에서 인도는 보험용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유능한 지도자인 모디 총리의 현명한 결단에 나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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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반 푸틴, 반러 세력의 끔찍한 사보타주가 러시아를 단결시키고 있다.
    러시아의 대선 투표 분위기가 다른 대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 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반푸틴, 반러 세력의 선거 방해, 미국이나 집단 서방의 반푸틴, 반러 세력에 대한 지원,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푸틴의 5번째 연임에 대한 도전 등,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미사일 포탄과 드론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모스크바를 비롯해 러시아 곳곳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붓기, 기표소 방화, 화염병 투척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사보타주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의하면 러시아 대선 투표 첫 날인 15일과 둘째 날 16일에 일부 지역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공공 건물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그러한 소동에 기표소가 방화로 불타게 되었고 각지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가 투척되며 선거 방해 행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선거방해 행위는 러시아 형법 제141조(선거권 행사 또는 선거관리위원회 활동의 방해) 1항과 2항에 의하면 "선거권 행사 또는 국민투표 참가를 방해하거나 비밀투표 위배행위를 하거나 선거관리위원회 또는 국민 투표 실시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한 자는 200,000 루블 이하 또는 18월 이하의 임금 또는 기타 수입에 해당하는 벌금, 또는 1년 이상 2년 이하의 교화, 또는 6월 이하의 구류, 또는 심각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들이 이번 대선에서 계속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2년이 넘도록 진행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와 수감 중에 돌연사한 알렉세이 나발니의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알려졌다. 전국 각지 기표소에 불을 지른 뒤 이를 휴대폰으로 찍는 할머니가 있었고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뒤 이를 촬영하는 20대 여성, 그리고 화염병 투척 순간을 기록하는 여학생 등 사건을 저지른 당사자들을 보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아닌 뭔가 신념에 차 있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투표소 방화사건을 본다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투표소가 설치된 학교로 화염병이 날아들었고, 우랄 지역 한티만시 자치구에서는 한 여성이 화염병으로 투표함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15일 첼랴빈스크에서는 80대 여성이 투표소에서 폭죽을 터트렸고, 투표소의 기표소가 불타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는 방화, 기타 인명살상의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로 명백히 테러 행위에 간주된다. 러시아 형법 테러 관련 조항을 보면 205조 1항에는 "권력기관 또는 국제기구의 결정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폭발, 방화, 기타 인명살상의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 막대한 재산적 손해를 초래하는 행위, 또는 기타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발생하게 행위를 행하거나, 위와 같은 목적으로 위와 같은 행위의 협박을 행한 자는 8년 이상 1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선거 방해 공작까지 하여 이와 같은 행위들을 저지른 자들은 두 죄목 모두 합산해 17년 형에 처해질 수 있다. 엘라 핌필로바(Элла Памфилова) 러시아 선관위 위원장이 밝히길 이틀 전, 16일 20개 지역의 29개 투표소에서 조직적인 투표 방해 사건이 발생해 214개 투표함이 훼손됐다면서 투표함의 보안을 강화할 것을 언급했다. 팜필로바 위원장은 투표함에 녹색 액체를 부은 사람은 선거 방해 혐의로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라면서 그들은 돈을 받고 이와 같은 쓰레기 짓을 했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녹색 잉크 테러에서 녹색이 주는 상징성이 존재한다. 지난 달 옥중에서 사망한 나발니는 2017년 괴한으로부터 녹색의 살균제 테러를 당해 실명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 선관위 측은 녹색 잉크로 훼손된 투표함은 봉인한 뒤 새로운 투표함을 설치, 투표를 계속하도록 조치했다. 물론 녹색 잉크로 젖은 투표 용지를 두고 표결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지에 대한 여부는 추후 논의된다. 이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된 뒤 사건을 저지른 이유를 본다면 모스크바에서 투표함에 녹색 잉크를 부은 여성은 우크라이나의 정보 기관에 속았다고 진술했다. 즉, 우크라이나의 정보 기관의 사주를 받았다는 직접적인 범인과 증인을 확보한 셈이다. 다른 잉크 테러를 저지르려는 순간 체포된 한 남성은 은행 대출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전화로 받고 이같은 행위를 하게 됐음을 진술했다. 또 다른 여성은 3만 루블을 받는 것으로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모두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이 있고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의 배후에는 미국과 집단 서방이 있다. 이러한 녹색 잉크 테러가 모스크바를 비롯해 보로네시, 로스토프, 카라차이-체르케시야, 크림반도의 심페로폴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당사자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으며 형량을 낮추기 위해 불쌍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게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도발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이를 겨냥한 우크라이나 군의 강한 공격이 이어졌다. 헤르손 주 카호프카와 브릴료프카 투표소에는 15일 우크라이나군의 포탄이, 자포로제 지역에선 드론이 날아들어 투표가 중단되었다. 또다른 도시에서는 투표소 인근 쓰레기통에 설치된 즉석 폭발 장치가 폭발했고, 베르단스크에서도 유사한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러시아 국경 도시를 겨냥한 우크라이나 군의 포격도 이어지고 있다. 벨고로드 주 주지사인 뱌체슬라프 글라드코프(Вячеслав Гладков)는 16일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으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고 적시했다. SNS에는 벨고로드에서 포격으로 차량이 파괴되고 화염이 치솟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는 다분히 민간인을 목표로 한 공격이다. 또한 사마라 지역의 정유 공장 2곳도 이 날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더불어 사이버 테러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16일 웹사이트와 도메인 등이 디도스 공격(DDoS)을 받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비필수 온라인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와 같은 사이버 디도스 공격은 특정 서버에 많은 양의 접속을 유발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키는 해킹의 일종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긴급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와 무기를 받기 위해 러시아 대선 기간 테러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면서 대선 투표를 방해하려는 우크라이나의 도발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표 방해를 위한 우크라니아의 도발과 반러 세력 및 나발니 추종자들, 반푸틴 세력의 행위들이 오히려 역풍을 부르고 있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WP)가 15일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거의 매일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받는 벨고로드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측의 이번 미사일 공격에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격이 러시아의 사기를 약화시키기는게 아니라 자신들이 희생자이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더욱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겁을 주고 있지만, 자신들은 여기에 꺾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푸틴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고 말하며 오히려 러시아 전체를 단결시키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결국 그러한 결과가 개표를 앞두고 출구조사에서 87.97%의 푸틴 대통령 압승을 불러오고 있다. 이런 수준이면 현재 개표가 진행되고 있지만 80% 이상의 득표는 가볍게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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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못했던 이유
    1996년 핵을 완전히 제거한 우크라이나는 1998년 당시 러시아의 주도로 이란 부셰르(Bushehr) 지방에 핵 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이란이 미국의 적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미국의 심기를 심하게 거스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란의 핵실험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미국의 적국을 돕는 것이니 우크라이나에 경제 원조를 중단한다는 초유의 발표를 하게 된다. 원래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행동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여전히 핵 기술자들이 남아있고 발전소 설계도에 대한 복사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서 포스팅했던 유즈마쉬(Южмаш)와 유즈노예(Южное)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저렴한 전기 공급을 위해 드네프르 강의 수력발전과 테르노필과 지토미르에 설치한 풍력발전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결국 당시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핵 발전소 건축을 허가해달라 요청했고 결국 클린턴과 미 행정부의 허가를 받게 된다. 핵 발전소를 허가해주고도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이를 군사적인 방향으로 전용할 것을 우려하여 미국과 우크라이간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협정 (Agreement for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Ukraine Concerning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까지 맺으며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폴란드 등 옛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립 직후 나토에 서둘러 가입했던 것에 비하여 우크라이나에 나토가 사무소를 차리던 당시인 1997년에는 혹시나 모를 우크라이나의 핵확산 및 유즈마쉬의 기술로 러시아와 연대해 크림반도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실험할 것을 우려하여 나토 가입을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내 나토 가입 여론은 찬성 37%, 반대 28%, 미결정 34%로서 그다지 환영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기에 친러성향이 높았던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해군까지 상시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공공연히 반러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도 우크라이나가 이란 부셰르(Bushehr) 지방에 핵 발전소를 건립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문제로 인해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유의미한 공식 외교관계는 1996년에 양국이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쉽(Strategic Partnership) 하나가 전부였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러시아가 경제적 공황을 심각하게 겪고 있던 암혹기였기에 그다지 큰 위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서 부터였다. 군사행동을 통해서라도 독재국가에 미국적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네오콘이 장악한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의 좋지 않았던 우크라이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인 레오니드 쿠치마도 역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는데 레오니드 쿠치마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이라크에 파병까지 결행하면서 미국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언론인들을 옛 KGB의 방식처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미국의 적이었던 사담 후세인에게 군사장비까지 팔아 먹으며 돈을 챙기는 이중적인 면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적극적인 요청에 결국 우크라이나는 2002년 나토에 대한 가입 의사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고 오렌지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으로 집권한 친서방파 정치인 빅토르 유센코는 NATO 가입 의지를 피력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의 국내 여론은 나토 가입에 대해 점점 더 부정적인 상태였고 반미와 친러 성향이 짙어졌었는데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 및 전쟁과 더불어 금융위기와 같은 실정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가 매우 낮았다는 점과 빅토르 유센코로 대변되는 친서방파가 매우 무능했기 때문에 결국 민심을 잃어 나토 가입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미국은 나름대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게 되지만 2006년 우크라이나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했던 최초의 합동 해상 훈련이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취소되는 등 민심은 여전히 반미 여론이 강했다. 실제로 2012년 부시 대통령 임기 종료 직후 여론 조사기관인 갤럽이 실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미국 리더쉽에 대한 신뢰도는 33%로서 유럽 국가들 중 중하위권에 속하는 수준이었으며 2008~2009년 당시 옛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국가들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와 미국 중 양자택일의 상황이 오면 어느 국가를 선택하겠냐고 문의한 설문조사들에 의하면, 러시아를 버리고 미국을 택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겨우 12%에 불과했으며 미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은 44%로 엄청난 차이를 기록하였다. 우크라이나 함께 나토 가입을 오랜 기간 동안 요구했던 조지아만 하더라도 같은 조사에서 미국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24%,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28%로 비등한 수준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당시 대미 성향이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 인구가 상당히 많은데다 우크라이나인들 중에서 과거 같은 소련인이자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결혼한 사람이 많아서 이들을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지리적인 이유로 인해 상당부분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겹쳐서 반러 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어렵다 판단했다. 나토에 가입하겠다며 의사만 표명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에 있어 상당히 많은 제약 상황이 있었고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음으로 인해 최대한 회피했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우크라이나 친서방파 입장에서는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차례 놓치게 된 것이다. .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손꼽히는 <부쿠레슈티의 나토 정상선언문>이 2008년에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 23조에서 NATO는 조지아,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의 염원을 환영하며, 나토의 외무장관들이 가입 절차의 다음 순서인 멤버쉽 행동 플랜(MAP) 적용 시기를 결정한다고 명시하게 된다. 당시 임기가 끝물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부시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빨리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보다 구체적이며 즉각적인 플렌을 요구했으나 이번에는 러시아에 에너지 교역 및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의 반발을 우려해 반대하는 바람에 최종본과 더불어 가입 만을 약속하는 형태로 수정되고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은 허용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크게 작용했다. 자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우크라이나가 언제든지 나토로 넘어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러시아에 심어진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나토 가입을 최대한 막고자 했고 친서방파의 무능에 지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2010년 선출하여 친러로 선택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다시 한 번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못한 이유이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글을 남긴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에 신속히 나토(NATO)에 가입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신속히 가입할 수 없었던 원인들을 알아보지도 않고 신속히 가입했어야 한다는 말은 현재 판단해서 내린 "결과론"에 불과하다. 역사라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현황을 보고 당시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을 10~15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랬어야 했다" 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국제관계학적 역사관이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윤 대통령이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주위에 보좌관들이 코칭을 했었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런 오류와 사관이 그대로 표명이 된다는 것은 보좌관들이 대단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기에 주위에 뛰어난 보좌관들이 윤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참 아쉬운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안 한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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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러시아 대선 이후에 바뀔 것들 - 2편
    그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면서 매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왔다. 첫번째, 키예프와 6대 도시를 런던이나 도쿄대공습처럼 엄청난 공세를 퍼부을 수 있었고 미국이 바그다드를 공습한 것처럼 아예 도시를 녹여 버릴 수도 있었다. 러시아도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의 증거가 바로 그로즈니 공습이다. 러시아는 체첸 전쟁 때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완전히 녹여버릴 작정으로 무자비한 공습을 자행했다. 그로즈니 공습에 비하면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비롯한 오데사, 하리코프, 드네프르 페트로브스크, 크리프이 리, 리보프 등 6대 도시들에 대한 러시아의 공습은 그로즈니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걸프전 당시 이라크 바그다드를 공습했을 때와 최근 이스라엘이 가자를 맹공하여 공습한 것에 비하면 러시아의 대우크라이나 공습은 사실상 미미한 것이다. 두번째, 러시아는 민간인 시설을 왠만하면 공격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주로 노린 곳은 군사 시설과 에너지 시설, 기간 산업, 공단 이런 지역을 노렸지 민간인 지역을 타겟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이는 민간인 지역이든, 군사시설이든, 산업시설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포탄, 미사일을 쏘면서 공습을 자행했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략에 비하면 현 전쟁은 너무 신사적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러시아가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공격을 피한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항복한 우크라이나 병사들과 포로들을 상대적으로 잘 대우해주었다.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포로들의 다리에 총을 쏘는 등, 잔인하게 학대했다. 세번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산업 시설과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가장 기본은 산업 시설과 에너지 시설의 초토화다. 그런데 러시아는 그나마 최소한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만 남기도 때렸다. 그러니까 산업시설이나 에너지 시설 10곳이 있다면 8곳을 때리고 2곳은 일부러 남겨놨다. 우크라이나는 파괴되었어도 남겨진 2곳을 기반으로 폭격 이전보다는 못하지만 몇 곳을 더 지어 확충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어쩌고 굉장히 인도적인데 살아 남은 민간인이 이용하라고 일부러 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학교, 병원 등을 공격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학교든 병원이든 사정을 봐주지 않고 때린 것에 비하면 러시아가 때린 것은 손에 꼽는다. 게다가 공항의 활주로, 기차역 등은 공격대상이다. 지금까지 키예프의 두 국제공항인 보리스필, 줄리아니가 폭격받아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없다. 키예프 중앙역은 확실히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공항은 남아있다. 네번째, 우크라이나의 ATM기가 되주고 있었던 미국과 나토, 집단서방의 지출이 이전만도 못하고 있고 앞으로 손절할 가능성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국방비 지출, 그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에 퍼준 비용과 무기들이 어마어마하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미국 의회에 올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자 승인한 자금은 미국 총 국방 예산(7,150억 달러)의 약 5.6%인 400억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군사지원에 사용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377억 달러의 추가 지원금 배정을 요청한 상태라고 한다. 이렇게 퍼주고도 전황이 지지부진하다. 나토가 거의 재고를 드러낼 정도로 퍼주는데 이러고도 우크라이나가 승리를 못하면 헛 돈 날린 셈이 되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걸 우크라이나에서 회수하려면 이제는 암담한 상황까지 처하고 있다.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패하여 나라가 완전히 날아가면 미국의 쇠퇴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 전쟁은 과거 100년 전 러일전쟁처럼 영국이 대리전을 일본이 치뤘듯이 나토의 대리전을 우크라이나가 치르고 있는데 이 전쟁이 장기화 되면 될수록 러시아가 유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집트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 가자지구의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 군은 활로를 못 찾고 있고 하마스는 수성에 계속 성공하는 분위기다. 미국 입장에서 한 쪽을 퍼주다가 혈이 막히면 다른 쪽의 분쟁을 이용해 혈을 뚫어주었는데 이제는 우크라이나, 가자 모두 혈이 막히니 이 두 곳의 혈을 뚫어줄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가장 유력한 곳이 동북아시아, 우리한반도다. 북한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 러시아, 중국이 북한과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미국, 일본이 대치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러시아, 중국은 가깝지만 한국, 일본과 달리 미국은 멀다. 러, 중, 북이든 누구든 한 발만 쏴도 미국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은 이걸 미끼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대 미국 태평양 전략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으로 푸틴이 집권할 5기부터는 모든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아브데예브까 함락 이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공격의 템포를 약간 늦추고 있는데 대선이 끝나고 5기 임기가 시작될 때, 이제는 눈치 볼 것 없이 빠른 템포의 공격이 가능해질 수 있다.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가족을 두고 있는 시민이 100만이 넘는데 그동안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자제했던 부분이 선거가 끝나면 한꺼번에 분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아마 인정사정 보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가자지구 분쟁도 유태계 러시아인들의 표를 얻을만큼 얻었으니 선거가 끝나고 중립이었던 입장을 친하마스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구실로 친하마스로 노선을 확정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푸틴 집권 5기는 지난 집권 1~4기와는 완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더 강해지고 빨라질 것이며 푸틴은 6년의 세월 동안 1~4기에 걸쳐 준비해왔던 것들을 이제는 확실하게 매듭짓고자 총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푸틴의 정권 5기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른 전략으로 임해야 한다. 이제는 이전의 러시아가 아닐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맞춰 발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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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7
  • 러시아 대선 이후에 바뀔 것들 - 1편
    러시아의 북극항로 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소련 시대부터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8~90년대 소련이 경제 파탄으로 인하여 북극항로 개척에 대해 진척이 없다가 고르바초프가 뻬레스뜨로이까 정책을 내세우며 개방을 강조하게 되면서 북극 개발 이야기가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오래 전부터 북극항로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환경적, 비용적 측면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북극 해빙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북극항로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해서 극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항로로 북극항로에는 북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캐나다 해역 북서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항로로 분류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현재 항로보다 운항시간이 10일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낙후한 시베리아로의 운송업이 회복될 수 있고 경제 무역적인 가치도 높아지며 시베리아의 지하자원들이 개발되면서 시베리아의 경제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해서 극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항로로 북극항로에는 북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캐나다 해역 북서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항로로 분류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현재 항로보다 운항시간이 10일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낙후한 시베리아로의 운송업이 회복될 수 있고 경제 무역적인 가치도 높아지며 시베리아의 지하자원들이 개발되면서 시베리아의 경제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재는 국제법상 북극해는 공해이기는 하지만 유빙과 빙산 때문에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야 통행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용료를 지불하고서라도 이용하는 선박이 늘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이용 시기도 길어지고 쇄빙선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 수도 있어서 유망한 분야이기도 하다. 다만 INMARSAT 이용에 제한이 따르다보니 바닷가에서 100해리 이상 떨어져서 운항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러시아는 2025년을 목표로 북동항로(NSR) 위성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위성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통신 기술이나 우주 기술에 관심이 있다면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가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타링크의 경우, 어디까지나 범용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지향하기 때문에 위성 배치 계획으로 본다면 극 지방은 비어 있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동항로와 북서항로의 경우, 경제적인 가치로 인해 수많은 도전과 탐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금은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 지명으로 이름을 남긴 비투스 베링(Vitus Bering, 1681~1741), 윌리엄 배핀(William Baffin, ? ~1622),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50~1611), 드미트리 랍테프( Дмитрия Лаптева, 1701~1771), 빌럼 바렌츠(Willem Barentsz, 1550~1597), 존 프랭클린(John Franklin, 1786~1847) 등의 탐험가들이 항로 개척에 나섰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북극해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귀환하지 못하고 탐험지에 사망했다.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같은 시기의 서인도 제도나 인도 항로 개척에 비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편에 있다. 이에 세계 최초로 북동항로를 완주한 인물은 핀란드에서 태어난 스웨덴 탐험가 닐스 아돌프 에릭 노르덴시욀드(Nils Adolf Erik Nordenskiöld)인데, 1878년에 증기선 베가 호를 타고 스톡홀름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을 건너 1880년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참고로 북서항로의 경우,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1906년에 처음 완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로 북극항로가 유라시아 물류혁명을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우선 거리에 비해 과다한 항행 비용이 문제에 있으며 현재의 단계에서 쇄빙선 운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는데 현재 러시아가 보유한 쇄빙선이 6대이고 그 중에서 북극항로에 투입되는 쇄빙선은 3척에 불과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도 북극항로 쇄빙선 이용 비용은 상당한 문제점으로 남고 있다. 러시아 쇄빙선 업체들은 수에즈 운하와의 경쟁력을 비교하면서 가격 책정에 부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리는 수에즈 항로의 절반 수준이지만 가격 경쟁력을 고민해야 할 수준이기 때문에 그 높은지 비용이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북극항로를 이용해보려 했으나 쇄빙선 가격 문제로 포기한 사례가 있다. 수면이 얊게 언 부빙해가 많은 북극항로는 온난화로 인해 개척된다 해도 유빙해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전히 내빙선 등의 특수 선박이 필요해진다. 또한 온난화가 진행된다 해도 연간 항행 가능 기간은 8개월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연간 4개월은 북극항로 돌파를 위해 쇄빙선, 내빙선 등의 각종 장비와 북극항로 인근에 막대한 비용을 추가하여 건설한 항만, 도시 등의 인프라들이 잠정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손해가 있을 수 있다. 현재 북위 66도 이북 지역은 전파가 잘 잡히지 않고 있으며, 온난화로 인해 기존의 북극지역 항구 도시들이 해수면에서 멀어지는 등 북극항로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수에즈 항로에 비해 투자 소요가 엄청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 투자가 요구되는 구간이 수에즈 운하와는 비교가 불가능 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이 큰 고민이다. 이러한 상황이라 업계에 따라서는 북극항로의 가능성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2030년 즈음에는 연중 운행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알렉세이 체쿤코프 극동·북극개발부 장관은 작년에 북극항로 물동량이 3,300만t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자축하면서 현재의 목표는 2030년까지 1억 t이라는 놀라운 물동량에 도달하는 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했다. 올가 스미르노바 극동·북극개발부 고문은 북극해 항로가 남쪽에 위치한 수송로보다 더 환경친화적인 항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북극항로 개발에 있어 화물 운송의 환경안전을 우선 분야로 두고 있고 적절한 종류의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 활용에 집중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러시아는 북극해 항로를 활용하면 수에즈 운하를 통한 항로보다 선박 항행거리를 40%가량 줄일 수 있다고 선전 중이다. 2021년 10월 7일 북극항로와 북극해안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북극함대가 창설될 수 있다고 러시아 해군 관계자가 타스 통신을 통해 언급하기도 했다. 2018년 8월 2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컨테이너 선 벤타 머스크호가 부산항을 출발했고 이들은 8월 22일 블라디보스톡항을 출항하여, 보스토치니 항과 부산항을 거쳐 9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항에 입항하는데 성공하여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푸틴의 5기 정권은 러시아 경제의 진보적 이상향을 위해 북극항로 개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북극 개발이 푸틴 정권의 마지막 승부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북극항로는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인도로 향하는 항로로 부상할 것이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제권이 관계되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정학적, 지리적, 경제적, 미래 산업 발전에서 이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먼저 북극 개발 입찰에 뛰어든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 아시아 최초로 북극 연구 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북극 활동의 포문을 열었으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이르기까지 북극항로에 중점을 둔 국제공동연구 프로그램(INSROP, JANSROP) 등을 기반으로 점차 북극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2000년대 일본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종합 해양 정책 본부가 설치되고 이후 북극 이사회 잠정 옵저버, 정식 옵저버 등의 지위 확보했다. 이후 국가 차원의 북극 정책 수립을 통해 분야별 체계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 다음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을 자국으로 연계가 가능한 중계항구로써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북극항로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국의선적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항구가 되었다. 우리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 북극항로에 있어 동해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각선 정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항은 동남아시아와 러시아를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항 항구다.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부산은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는 셈이다. 이는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지난 리야드와 엑스포 유치를 두고 사활을 걸었을 때 부산은 한류가 아니라 북극항로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중요성, 그로 인한 중개 무역에 대한 이점 등을 전면적으로 내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리야드와 대등하게 표 경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부산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푸틴이 5기 정권 때 북극항로 개척에 올인 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부산은 북극항로의 새로운 요충지이자 중심지로써 경제적 호황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그걸 준비하지 못하면 그 또한 일본에게 뺏길 수 있다. 부산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나마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곳은 일본의 항구들 밖에 없다. 가장 유리한 위치를 갖고 있어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이번에도 일본에게 경쟁에서 질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기회를 제대로 잡아 활용하는 측이 매우 유리해질 것이다. 우리는 제발 현명한 선택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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