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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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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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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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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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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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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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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분쟁, 오데르-나이세 강 분쟁이야기
    오데르-나이세 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영토는 피아스트 왕조 이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1138년 폴란드가 분열 시대로 접어들면서 포모제와 실롱스크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12세기 말 포모제는 그리핀(Griffin) 가문의 지배에 놓이며 포메라니아(Pomerania) 공국이 성립되면서 점차 독일화로 변모했고, 실롱스크 공국은 오늘날 체코 지역에 자리잡은 보헤미아 공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1335년 결국 보헤미아 공국에게 완전히 합병되면서 이 지역들은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거쳐 17~18세기 사이 모두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프로이센은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통해 이 지역의 영토들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차기에 있을 영토 분쟁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침공으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립된 폴란드 임시 정부에서는 종전 이후, 독일과의 국경선 재설정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임시 정부 측이 원했던 영토는 동부 프로이센 지역과 오늘날 그단스크로 불리는 단치히, 실레지아 북부, 라우엔부르크(Lauenburg in Pommern. 현 폴란드 렝보르크·Lenbork)를 포함한 포메른 동부 지역 등이었다. 동부 프로이센과 단치히는 전쟁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폴란드 회랑 문제를 일으킨 것이 주 원인으로 향후 벌어질 동독과의 영토 분쟁의 단초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도이고, 북부 실레지아는 독일화되었던 남부 실레지아와는 다르게 폴란드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폴란드의 영토가 되어야 하며, 동부 포메른 일부는 해안선이 짧은 폴란드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망명한 폴란드 임시 정부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으며 비록 나치 독일과 저항하기 위해 영국은 이들 폴란드 임시 정부를 지원하긴 했지만 국경선을 확정 짓는 문제는 다른 얘기였다. 이와 같이 국경 형성을 주도한 것은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다. 폴란드 침공을 통해 정복한 옛 폴란드 동부 영토를 돌려주기 싫었던 스탈린은 대조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1년 10월 동부 프로이센 지역을 슬라브족의 영토로 돌려줄 것을 주장했다. 이어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면 당연히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엄청난 국경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고 이 충돌을 이용해 외교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처칠의 특사로 파견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Anthony Eden, 1897~1977) 역시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스탈린이 제시한 새로운 국경선에 거의 동의하는 수순으로 변해가면서 서서히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한동안 세계 대전의 전황이 격화되면서 더 이상 재기되지 않았던 국경 문제는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승기를 잡은 1943년 무렵부터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이란 테헤란에서 주도된 회담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국경을 오데르 강 근처까지 서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강한 폴란드를 원했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 역시 여기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전쟁이 사실상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진 이후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연합군은 다시 한 번 폴란드의 국경선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전쟁이 종료되어 가면서 서서히 냉전의 기미가 보여지던 시기였고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확대하고 폴란드를 공산화하여 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아 가는 것이 명백해지자 폴란드 공산 정권에 지나치게 영토를 넓혀 줄 필요가 없어졌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방은 종전 이후 유럽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연합국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과 폴란드 당사자도 아니고 엄연히 남의 나라인 연합국이 남의 국경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힘이 센 국가들이 힘이 약한 국가에게 저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횡포였다. 당시 대표적인 국경 문제로 충돌되는 사항으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슈체친을 누구의 영토로 할 것이냐였고 다른 하나는 코트부스(Cottbus) 를 위시로 한 라우지츠(Lausitz) 일대의 나이세 강 서안까지도 폴란드에게 넘겨줄 것이냐의 문제였다. 슈체친은 전통적으로 베를린의 외항이었고 대부분 독일계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폴란드에게 넘겨주게 되면 독일 측의 반발이 격렬하게 전개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나이세 강 서안 지역은 서슬라브 계통의 소르브 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미국과 영국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이긴 하지만 동쪽에 있는 글라처 나이세 강(Glatzer Neiße)을 새로운 국경으로 설정하려고 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와 같은 국경선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도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남쪽 실레지아의 절반은 독일이 그나마 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합군은 오데르-부브르 강(Oder-Bober-Line)으로 국경선을 결정하려고 했으나, 이러한 설정마저도 스탈린은 거부했고, 최종적으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오데르-나이세 강 국경 동부 지방에 살던 독일인들은 모두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갔다는 이야기 등은 일종의 소련이 선전한 내용이었다. 종전 직후에도 최소한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이 여전히 오데르-나이세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은 끝까지 남아있던 독일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이 지역은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으로 인구를 채웠다. 결국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종결되었고 최종적인 합의는 1945년 8월의 포츠담 회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포츠담 회담을 통해 양국의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확정됨에 따라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오데르-나이세 동쪽 동부 프로이센, 서부 프로이센, 포메른, 실레지아 영토가 모두 폴란드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어 오데르-나이세 국경선보다 더 서부에 위치해 있는 항구도시 슈체친도 폴란드에게 할양되었다. 이는 동부 프로이센 및 서부 프로이센 일부 지역을 소련이 칼리닌그라드 주로 편입시켰고 그러다보니 폴란드의 항구가 그단스크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항구 도시 하나 더 할양시키기 위해 스탈린이 폴란드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폴란드 국경은 대체로 오데르 강을 지나고 있지만 바다와 접하는 하구에 이르러서는 독일-폴란드 국경이 오데르 강에서 벗어나서 육지를 지나게 된다. 폴란드의 영토로 새롭게 편입될 옛 독일 영토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계 주민들은 이미 전쟁 말기에 피난을 떠난 사람까지 합쳐 거의 800만 명에 육박했다. 또한 독일 내에서도 나치에 의해 강제로 노예 노동을 하러 끌려온 폴란드인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 때까지 남아있던 독일계 주민들을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서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집단 이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커즌 라인(Curzon Line) 동쪽의 옛 폴란드 영토에서 추방된 폴란드인들을 새로이 할양된 폴란드의 영토로 이주시켜 채우게 된다. 칼리닌그라드를 비롯한 동부 프로이센 북쪽 영토들은 소련에 의해 러시아 공화국과 리투아니아에게 넘겨주면서 완전히 병합되었다.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였던 헬무트 콜이 집권한 이후에도 독일은 동방 정책을 지속해 나갔으며, 1990년 통일 과정에서 옛 영토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통일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옛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였던 기본법 23조의 조항을 폐기하면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은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으로 오늘날 완전히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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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이 아시아 해상항로에 미치는 영향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엔리크 왕자를 주축으로 한 15세기 초중반의 대서양 방면 해외 진출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유럽-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 항로의 개척, 그리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가 이루어진 15세기 말~16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했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고대 이후 동양과 서양이 교역하는 육상 통로였던 육상 실크로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대서양이 아닌 북유럽 일대에서 군소 규모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던 한자 동맹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그 뒤를 이은 후발 주자들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을 끝으로 대항해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은 식민지 장악에 혈안이 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도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중세 아라비아 지역과 중근동 지방 국가들의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이 이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정지되어서 현재에도 전근대적 요소가 남아있게 되는 결정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사실상 유럽을 비롯한 범서구권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한 이슬람권의 경제 및 사회 문화적 격차가 이 때부터 시작되어 점차 가시적으로 눈에 띄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근동의 수장 국가인 오스만투르크 제국도 18~19세기에 갈수록 유럽 권에 뒤쳐져 영토를 잃어갔고, 아랍 권은 20세기 중반 경, 대량의 석유 발견 이전까지 국력이 오랫동안 정체되다가 이후에는 계속 침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요약하자면 지역적으로 한정된 교역만을 이어가거나 서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각 문명권과 대륙 권들이 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하였고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게 된 진정한 의미로서 세계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대륙을 기반으로 한 범서구권 국가들의 직접적인 탄생과 이들의 국제무대 진출은 사실상 대항해시대가 자양분이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래 대항해시대를 뜻하는 Age of discovery를 직역하면 “발견의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이 투영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침략자이자 가해자인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지칭한 명칭일 뿐이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다른 여러 지역의 피해 국가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의 유입일 뿐이라는 점에 있다. 또 이를 번역한 “대항해시대”라는 용어는 일본어 “大航海時代 (だいこうかいじだい, 다이코우카이지다이)”를 중역한 단어이다. 따라서 최근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 등지에서 나타나는 대항해시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비교적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신항로 개척으로 용어를 바꾸고 있는 추세에 있다. 참고로 검인정화 이전 중등과정 국정 사회교과서도 제5차 교육과정 중인 1989년 지리상의 발견을 신항로 발견이라는 용어로 바뀌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오랜 기간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레콩키스타로 불리는 이베리아 카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과정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져 갔다. 하지만 이슬람을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카톨릭의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대항해 시대가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향신료, 특히 후추였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는 유럽의 열강들이 향신료 무역에 참여하여 수요보다 공급이 배로 급증하였기 때문에 향신료 무역이 인기가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대항해 시대를 열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대항해 시대 원양 항해가 막대한 돈과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함에도 한 번 향신료를 가져오면 이러한 고생을 보상 받을만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당시 유럽에서의 향신료는 비싸게 거래되었다. 그리고 이는 국왕,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요소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탐험가들이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향신료는 대항해 시대 자체를 개막하게 만든 기폭제의 역할이었으며, 대항해 시대 중반부터는 개척된 항로를 바탕으로 무역이 과열되어 향신료는 예전의 장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유럽인들의 목표가 생기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과 은, 노예, 설탕과 같은 것들이 향신료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흔히 알려져 있는 학계의 정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성립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막아 버리고 이것이 대항해 시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연대의 순서를 파악해도 이것이 잘못된 통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기존의 인도양-홍해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흡수된 것은 1517년이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것은 1498년이다. 이는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봉쇄하여 맘루크 왕조가 향신료를 유럽에 팔 수 없게 되자 재정적자로 인해 병사들의 급여가 밀려 병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오스만투르크는 기존의 지중해 무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다. 단지 특혜와 관세라는 장, 단점을 파악하게 하는 전략으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주체인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견제한 수준이었다. 통계 자료에서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투르크가 성립한 시기를 전후한 향신료의 가격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이나 그 후나 향신료의 가격 자체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 변화의 폭이 두드러진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의 향신료 가격의 폭등은 맘루크 왕조의 멸망 직전인 1510년대의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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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9
  • 미국의 대륙금주령과 이후, 미국의 음주문화가 보편화된 이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에 첫 발을 디딘 때부터 현재까지의 아메리카는 전 세계적으로 음주문화가 보편된 국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러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물자가 풍부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융화되면서 함께 어울리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크게 만들어 대륙적인 자부심을 뽐냈던 기조가 음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어려운 시기에는 곡물로 발효한 술이나 과실로 발효한 술 등의 소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흑인 노예들에게도 닭고기를 식사로 나눠줬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1700년까지 아메리카 식민지 시민들은 발효된 복숭아 주스와 진한 사과로 증류한 증류주, 그리고 럼주를 마셨다. 이들은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하거나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된 당밀을 증류해 만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아메리카에서 술이라는 것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아메리카 식민지 문화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고 사람들은 바베큐를 구울 때나 간혹 시장이 열리는 날, 그리고 각 주(州)에서 벌어지는 선거 때마다 술 주전자나 술이 든 그릇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시민들에게 공짜 술을 아낌없이 나눠줬고 이에 인색한 후보자는 선거에서 이길 기회가 없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금욕적인 종교 생활로 유명한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청교도들은 알코올을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의 조상들과 신이 주신 자랑스러운 문화적 산물이지만 조심하게 그 문화를 즐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1770년이 되자 아메리카 13개 주(州) 주민들은 식사 때마다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한 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한 잔으로 자신들 인생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이후 아메리카 13개 주(州)가 독립하여 미국이 되었고 미국의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술을 마셨는데, 아기들은 부모들이 럼을 마시고 남은 머그 잔 바닥에 설탕이 많이 든 부분을 마시곤 했다. 신생국이었던 당시 미국인들은 한 사람당 연간 3.5갤런 정도의 알코올을 소비했고 여기서 표기되는 3.5갤런 알코올은 일반적인 술 3.5갤런이 아니라 순수 에탄올 3.5갤런을 뜻한다. 이는 리터 기준 13.24ℓ, 우리 한국과 비교한다면 16.9℃치 소주를 220병 정도 마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음주량을 과시했다.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날 무렵에 평균적인 사람이 80프루프 치 술을 연간 8.75갤런 마신다는 것으로 통계가 잡히는데 현재 소비 수준보다 45%나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을 정도로 미국 초창기 때 음주량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고위층이 주로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종종 술을 마셨는데 대니얼 오크렌트(Daniel Okrent)의 기록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은 농장에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 2대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통령인 존 아담스(John Adams, 1735~1826)는 매일 진한 사과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와인 수집뿐만 아니라 유럽 포도를 수입해서 직접 재배하여 와인을 만드려고도 했다. 그러나 기후와 토지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실패했으나 직접 호밀을 길러 위스키를 만드는 등 대단한 애주가였다. 미국의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은 매일 위스키를 한 파인트씩 마셨고, 미국 육군 사병들은 1782년 이래로 매일 배급의 일환으로 4온스의 위스키를 받았다. 한편 조지 워싱턴 자신은 '강한 주류의 온건한 사용으로 인한 이로운 점은 모든 군대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에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유세하면서 맥주를 돌렸었다. 메사추세츠 지사였던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 1722~1803)는 아예 주류 사업에 관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1800년대가 되자 영국이 노예 제도와 관련됐다면서 미국의 럼주 생산과 당밀 생산에 참여를 중단했고 그리하여 미국 연방 정부는 럼주에 세금을 물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금부과에 럼주의 소비가 줄어드는 도중 중서부 지대에서는 이른바 '옥수수 벨트(Corn Belt)'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부들이 아예 옥수수를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옥수수로 만든 버번 위스키로 인해 1820년대에는 위스키가 25센트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당시 차나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저렴한 가격이었다. 거기에 영국 해군의 준사관 이하에게 희석한 럼주를 매일 지급하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미국 해군과 미국 해안경비대 역시 비싸진 럼 대신 저렴한 버번을 납품 받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면서 위스키의 소비가 폭증하게 된다. 그러한 위스키 소비 경제로 인해 단가가 계속 저렴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증류소가 5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위스키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로 소비되었을까?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주말 동안 마신 술로 인한 숙취로 월요일에 출근을 못했을 때 사장들 본인들부터가 숙취로 인한 결근을 이해해줬을 정도였다하니 소비량이 거의 폭발적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1830년에는 시골 마을에서 종이 오전 11시와 오후 4시마다 울렸는데 그 이유는 럼과 물이 섞인 칵테일인 그로그를 마실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메리어트는 자신의 저서인 에서 “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져도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더라도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 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830년이 되면서 1인당 80프루프 짜리의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 이러한 음주문화의 기조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수정헌법 18조가 나와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주령은 금주를 권유하던 방식이 아니었고 강제로 제재했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로 인해 미국인들이 사회적 불만들이 싹트게 되었고 결국 1933년 2월에 수정헌법 21조가 의회를 통과했다. 같은 해 12월 5일 인준이 완료되어 금주법이 해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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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9
  • 중국계 쿨리들이 세계에 진출한 과정
    1807년 영국에서는 인도주의와 효율성 및 비용의 이유로 흑인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력을 흑인 노예로 충당해왔던 영국의 해외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 대신 데려온 중국이나 인도 출신의 계약 노동자들을 이른바 쿨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선은 중개인과 몇 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일하는 방식이라 노예와는 다르긴 했으나, 쿨리로 이주할 정도면 대개 소작농처럼 가난한 계층이라 계약서를 읽을 줄 몰랐으니 크게 의미가 없었다. 같은 중국인 혹은 인도인 십장 아래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활 요건만 갖춘 채 열악한 조건 하에서 일하는 동안 상당수가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특히 중국인들은 대개 광산업, 부두, 건설, 토목 등에 동원되었다면 인도인들은 고무농장, 사탕수수 농장 플랜테이션 노동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인 쿨리들은 크게 보면 싱가포르 화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 인,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 인, 페라나칸(Peranakan)의 조상들도 이러한 쿨리들이 대부분이다. 동남아시아와 호주에는 인도계와 중국계 모두 이주가 활발하였고 남아프리카의 경우 중국인 쿨리는 드물게 나타나면서 대개 인도인들이 이주하였다. 물론 중국인들도 이주해 요하네스버그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서기도 했다. 아메리카 중 캐나다, 가이아나의 경우 한동안 영국 연방에 속했던 이유로 인해 인도계 이민과 중국계 이민이 모두 활발하게 나타났지만, 영국 연방 소속이 아니었던 멕시코, 미국, 페루, 칠레, 푸에르토리코, 쿠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에는 주로 중국계들이 정착하였다. 그리고 브라질은 주로 일본인 이민을 받았으며 그 사이로 마카오 출신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중국인들도 섞여 들어왔다. 라틴 아메리카에 인도계가 거의 보내지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얼굴이 메스티소와 물라토와 비슷해 도주하면 체포하기 어렵기도 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 색이 뚜렷하여 철저한 카톨릭 신자들인 라틴 아메리카의 백인 농장주들이 들여오기 어렵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특히 멕시코로 건너간 쿨리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당시에 백인과 메스티소 출신 멕시코 인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노예 제도로 돌아가던 농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지도 못하는 영어나 스페인어로 된 사기 계약서에 서명하고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현지 농장주들에게 있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북경 조약 중에는 당시 해외 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 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 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라고 인정했다. 중국인은 노예로 나갈 자유가 있고 이를 위해 중국인을 노예 함선에 태우는 것도 자유라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실상이 드러난 것이 마리아 루즈 호 사건(マリア・ルス号事件)을 들 수 있다.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즈 호가 카야오로 향하던 중에 수리를 위해 요코하마에 기항하자 쿨리 한 명이 도주하여 구해 달라면서 일본 당국에 호소한 사건으로, 일본이 출항을 금지시키고 조사한 결과 이 배의 모든 계약 노동자들이 문맹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음이 드러났다. 더 충격인 것은, 그나마도 납치당해 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참상은 마리아 루스 호 사건으로 실상을 알게 된 청나라 조정이 1874년에서 1880년에 걸쳐 멕시코와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협약을 개정함으로서 개선하게 된다. 미국으로 간 쿨리들은 주로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과 면한 미국 서부 지역에서 일했는데, 계약 기간은 기본적으로 8년이었으나 극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기간을 채우기 전에 사망하는 인원이 전체의 80%에 달했으며 이에 반기를 들거나 고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면 총살당했다. 서부에서 이들은 조니(Jonnies)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혹독한 착취는 기본이었다. 이와 같이 험한 서부에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 (아무런 기회도 없다)는 숙어가 생겼을 정도였다. 백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중국인 마을을 공격하여 학살하는 사건까지 존재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만 세계 각지로 끌려간 중국계 쿨리들이 흑인 노예의 운명을 그대로 이어받지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사업 수완을 살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가까운 동남아시아는 물론 모리셔스, 수리남, 가이아나 같은 대륙 반대편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화교들이 최상류층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19세기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모리셔스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로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을 사기 계약으로 속여 모리셔스에 데려왔다. 인도인 노동자들의 경우 남녀 성비가 3:1 이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처다부제가 이루어진 정도였지만, 중국계의 경우 남녀 이민 성비가 9~99:1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귀국하거나 흑인 여성과 결혼한 뒤 흑인 사회에 동화 되어 버리고, 극소수 부자들만이 현지에서 100대1의 경쟁률을 통과하거나 본국에서 다시 중국인 배우자를 데려오는 형식으로 중국계의 정체성을 유지했기에 중국계는 부자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들의 후예들은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를 자신들의 조상이 건설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홍콩 영화에서 미국의 개척 시대가 나오면 늘 쿨리가 등장하게 되어 있다. 전근대 시대부터 시작된 대륙 횡단 초장거리 철도공사는 그 열악함으로 인해 사상자가 많았던 악명 높은 공사였기 때문에, 철도 침목 하나 놓을 때 마다 쿨리 한 명씩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로 가혹한 노동 환경에 수많은 인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관련 홍콩 영화로는 “황비홍의 서역웅사(黄飛鴻之西域雄師)”가 대표적이다. 희귀하게 철도노동을 하던 쿨리들의 일부가 남북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인천항 부두 등에서 항만 잡부 등으로 들어왔으며, 현재 인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계한테 “쿨리”라고 부르는 행동은 인종차별성 멸칭이 되기 때문에 쿨리라는 어휘는 역사와 관련된 설명 외에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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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8
  •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를 놓고 본다면 20세기 들어 같은 동구권 공산국가였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존재하여 그 유대관계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부분과 이데올로기성 노선이 같을 뿐,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의 관계이다. 폴란드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반러가 아니라 숙적이라고 보는게 좋다. 동유럽에 대해 특유의 호불호가 별로 없던 러시아도 폴란드는 예외일 정도로 아주 싫어한다. 두 나라의 은원 관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은원관계보다 더 깊고 처절하다. 두 나라가 칼리닌그라드 일대를 제외하고 직접적인 육로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그렇지 만약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 러시아는 민족적, 정치적 등등 모든 은원관계로만 볼 때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폴란드를 먼저 공격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서로의 은원관계는 매우 깊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철천지 원수 그 이상이다. 루스 슬라브 시절에 폴란드는 비교적 늦은 11세기에 정식적인 왕조인 피아스트 욍조가 성립되어 강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루스 슬라브의 키예프 공국은 1135년 개혁군주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사망한 후, 대공위 자리를 노리며 각 공후들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는 바람에 국가의 힘은 갈수록 쇠락해져 가고 있었고 그 틈을 타, 루스 슬라브 공동체의 중심은 키예프를 떠나 각 공국들에게 분산되어 혼란의 시대를 거듭하고 있었다. 세력이 막강해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발트 지역에 분산된 루스 슬라브 공국들을 하나씩 점령하여 접수하기 시작했다. 13세기 몽골의 바투와 수부타이가 키예프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키예프와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넘어갔을 것이라는게 동유럽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지만 몽골-타타르보다 더 악랄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인에게 정교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으며 개종하지 않을시, 그 마을과 도시 국가를 공격하여 약탈하거나 살해하고 나무에 매달아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인"이라는 팻말을 붙이기도 했고 러시아 여자들을 강간했으며 세금 걷는 명목으로 재산들을 강제 징수해갔다. 특히 곡물들의 수탈이 대단하여 폴란드의 학살보다 기아로 인해 굶어죽는 루스 슬라브인들이 훨씬 많았을 정도였다. 키예프가 황폐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러시아의 중심은 키예프를 떠나 북쪽인 현 볼가 강 일대로 올라가게 됐으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진다. 이후 폴란드는 피아스트 왕조에서 야기에우워 왕조로 교체되었으며 여전히 강력했다. 그리고 인근 폴란드계인 리투아니아 가문과 독일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은 끊임없이 러시아 영토를 노렸다. 그러던 중, 이반 4세가 사망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극심한 혼란의 시대가 찾아온다. 변변찮은 후계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이 틈을 타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아예 멸종시켜버리기 위해 출격했다. 당시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정복되어 민족 자체가 일명 "제노사이드"를 당할 뻔한 민족적 대위기를 겪게 된다. 러시아 민족과 나라가 지도상에서 지워질 뻔한 위기가 세 번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이반 4세 이후의 대혼란과 폴란드의 강점기였다. 두 번째는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인한 대조국 전쟁이며 세 번째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러시아 최악의 90년대 암혹기가 그것이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폴란드의 강점기였던 것이다. 역사학자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폴란드 강점기 당시 러시아인의 66% 정도가 폴란드의 학살과 기아로 희생되어 당시 200만이던 인구가 겨우 7~80만 정도 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계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정복하여 그들을 말살하려 했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런 폴란드를 물리치고 지독한 폴란드 강점기를 끝낸 가문이 바로 로마노프 가문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러시아 제국이 세워지기까지는 굉장히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했던 것이다. 1580년~1618년에 이르기까지 38년동안 러시아는 내부의 혼란과 영웅 보리스 고두노프의 등장, 폴란드 강점기까지 그야말로 민족이 지도상, 지구상에서 지워질 뻔한 대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대체적으로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학대했던 자들은 폴란드인들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하고 벨라루스 일대를 장악했던 또다른 과거 키예프 소속의 공국들로 이들의 지배층들은 폴란드계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모스크바와 그 일대를 노략질하며 황폐화시키고 보이는 러시아 남자들을 참수했으며 여성들은 강간하고 어린이들은 노예로 만들어 크림 칸국, 멀리 시비르 칸국까지 데려가 노예로 팔았다. 크림 칸국이 노예 무역으로 떼돈 벌기 시작한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역의 폴란드계가 잡아온 러시아 소년 소녀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들이 로마노프 가문과 러시아 공후들에게 패해 각자의 영지들로 돌아갔는데 그들 중 폴란드 본토로 돌아간 자들이 반이고 또 다른 반은 갈라치아 지방이라 불리는 폴란드 남부와 리보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은 갈라치아의 토속민으로 자리잡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점차 변해갔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맹비난하며 돈바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투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도 우크라이나 서부, 갈라치아 일대 출신들이다. 한편 러시아는 로마노프 가문이 폴란드를 밀어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1618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가 되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출범한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폴란드에게 당했던 혹독한 역사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절의 폴란드에 대한 인식은 정교회를 박해, 탄압하는 카톨릭 국가이며 묘사되었으며,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 두 나라는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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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8
  • 니체,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의 현대적 의미
    “니체는 스스로 2백 년이나 시대를 앞서 태어난 선구자의 운명을 한탄한 바 있다.” 한신대 철학과 교수인 윤평중 선생의 글에서 발췌한 대목이다. 나는 이 대목의 출처가 궁금했다. 그래서 쳇GPT에게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 속에 그와 유사한 대목이 있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정동호 선생과 김태현 선생이 번역한 책에서 그와 유사한 대목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윤평중 선생이 인용한 대목처럼 1884년 태어난 니체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을까 궁금했었다. ‘시장의 파리떼’에서처럼 대중의 명성만을 추구하는 배우들이나 위대한 창조 행위에 관심이 없고,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대중을 여전히 시장의 파리떼로 비유하면서 비난했을까? 어쩌면 19세기의 유럽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저들을 너그럽게 대하면 저들은 너에게 멸시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저들은 너의 선행을 은밀한 해코지로 되갚는다.” 이 대목은 타란툴라라는 독거미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반복된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너희야말로 타란툴라요, 숨어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자들이렸다.” 이 말은 대중들은 정의를 앞세우지만, 그 뒤에는 복수심이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니체는 복수심의 광기는 무기력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들의 복수심을 백승영 선생은 분노에 찬 오만과 억눌린 질투로도 번역한다. 아무튼 니체는 대중들의 복수심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고자 했다.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 극복이다.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생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은 오르고자 하며 오르면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한다.“ ”아름다움 속에서조차 전투와 불평등이, 힘과 그 이상의 힘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존재한다.” 이러한 표현 모두가 생의 긍정을 통한 자신의 극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니체의 삶에 대한 긍정과 극복의 길에 있어서 하향평준화는 삶에 대한 긍정의 힘을 좌절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벗들이여. 충고하건대 남을 벌하려는 강한 충동을 갖고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 그들은 강자의 힘을 약화하고 하향 평준화시켜 자신의 무리 일원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력의 광기이다. 이러한 대목은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과도 유사하다. 우리나라만큼 고소 고발이 난무한 사회가 없다고 한다. 정치판의 고소 고발은 난장판과 다름이 없다. 정치판이 그러하니 일상생활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발생한다. 나 역시 최근에 공익제보라는 명목으로 사소한 도로교통 위반을 고발당해 벌금 9만 원을 납부한 경험이 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앙선이 있는 2차선의 도로에서 앞차인 택시가 승객을 내리기 위해 정차한 상황에서 택시를 추월하기 위해 차선을 변경했다. 그 장면이 내 차량을 뒤따르던 오토바이 블랙박스에 찍힌 것이다. 2차선 도로의 옆 차선에선 어떠한 차량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앙선 침범을 위반했다고 고발당했다. 나는 고발 당할 만한가? 나를 고발한 사람은 정의감보다는 자기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어쩌면 니체가 말한 복수심에 불타는 무기력의 광기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또한 ‘잡것에 대하여’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 글이나 갈겨 쓰는 잡것, 그리고 쾌락이나 쫓는 잡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생에 등을 돌린 자라고 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잡것은 다수라는 대중의 힘에 호소하면서 그들과 흥정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오늘날의 우리 정치인들을 연상케 한다. 또한 글 쓰는 잡것들은 피와 삶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글을 통해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글 쓰는 잡것들은 정신을 퇴락시켜 기쁨의 샘인 깨끗한 삶을 더러운 문젯거리로 만들 뿐이라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잡것은 고통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말은 고통이 인간을 성숙시키는 힘으로 보고 있다. 이는 결국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니체는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는 생성의 강물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생성의 강에는 절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은 없고, 지칠 줄 모르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생명은 명령과 복종의 힘의 대결장이고, 그러한 힘의 대결장에서는 순종보다 명령이 더 어렵다고 한다. 명령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험과 위험, 목숨을 건 주사위 놀이, 이런 것들이 더없이 큰 자가 하는 헌신이다.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의 눈길이 있는 곳, 거기에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더 없이 큰 자는 자신의 주인이 되어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자신을 극복한 존재가 참된 사랑을 배풀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자신이 자신에게 주인이 되자고 하는 니체의 사상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적합한 말로 여겨진다. 오늘날 니체처럼 다양하게 해석되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니체로부터 현대 철학의 문이 열린 것은 분명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철학자가 등장했다,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이다. 라캉도 그중 한 명이다. 니체는 ‘이웃 사랑에 대하여’에서 시장의 파리떼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언급한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인간들이 아니고, 이웃에게로 도피하여 그들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이웃에서 멀리 도망가서 진정한 벗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 대목은 라깡의 ‘환상 가로지르기’를 연상케 한다. 라깡은 나의 욕망 타인의 욕망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타자의 욕망에 의해 소외되어 나타나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되찾는 자유로 길을 추구하라고 가르킨다. 이 길은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드가 있는 곳에 내가 도달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이 문장이 바로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환상을 가로지르라고 가르치는 라깡의 명언이다. 이것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고, 그 극복을 위해서 지금의 삶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아모르 파티와 유사하다. 니체가 지금 이 시점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아모르 파티는 강조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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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7
  • 2년 전, 헝가리 총선,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4연임 당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2022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4연임을 확정지었다. 헝가리 총선에서 여당인 오르반 피데스당이 71%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페테르 마르키자이(Péter Márki-Zay), 야당 연합 총리 후보는 패배를 인정했다. 오르반은 이번 승리로 4연임에 성공했다. 오르반은 1998~2000년 총리를 지내고 2010년 총선 승리 이래 연속 3연임에 성공해 12년 연속 집권하면서 EU의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집권 이래 이슬람과 난민, 성소수자 등에 반대했고 사법부를 장악하는 등 EU의 규정들을 위반했다. 결국 EU 지도부는 헝가리에 대한 예산 지원 삭감을 경고했고 오르반은 지난 2월 연설에서 EU가 헝가리에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공동의 길을 계속 갈 수 없다며 EU 탈퇴를 시사했다. 특히 오르반은 푸틴 대통령과의 오랜 친분을 강조해 왔다. 오르반은 승리 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극복해야 했던 반대자 중이자 그를 압박했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칭하기도 있다. 이와 같은 오르반의 배경으로 인해 헝가리는 러시아에 대한 EU 제재에 새로운 구멍이 생길수 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오르반은 우리가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커다란 승리를 거뒀고 이는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보일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승리 자축했다. 오르반은 거대한 규모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서 헝가리 좌파와 EU 관료들, 국제 언론을 모두 적으로 꼽았다. 앞서 헝가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EU 차원의 러시아 제재에 대부분 참여했다. 하지만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은 거부하면서 EU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헝가리 외무부는 지난달 30일 헝가리 좌파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젤렌스키가 헝가리의 내정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이는 헝가리 좌파 세력들이 젤렌스키와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냐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헝가리 극우 세력의 상징 빅토르 오르반은 어떠한 인물일까? 빅토르 오르반은 1963년 5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태어났으며, 부다페스트의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청소년기와 대학생 때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지만 군에서 제대한 이후로는 헝가리 내 공산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으며 이후 서방 세계를 동경하여 자유 노조 등에 대해 공부했다. 1988년 오르반은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인 청년민주동맹(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줄여서 피데스 Fidesz)이 만들어질 때 창립 멤버가 되었다. 더불어 공산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는 <세기의 종언(Szazadveg)>이란 잡지도 창간했다. 그 다음 해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영웅 광장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 당시 수상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유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와 연설로 인해 그는 헝가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서구권에서도 주목받는 인사가 되었다. 이후 피데스가 헝가리 민주 정당이 되면서 오르반은 피데스 당의 당수가 되었다. 피데스는 1990년 치러진 총선에서 국회의 386석 중 21석을 차지했다. 이 시기까지 오르반 빅토르는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선전했지만 1994년 총선에서 20석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자 당의 노선을 중도파 자유주의에서 좀 더 보수주의적인 노선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중도파 당원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998년 총선에서는 피데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148석을 차지하면서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르반 빅토르는 만 35세의 나이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오르반 정부는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면서 내부 경제적으로 연 4%씩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부에서는 나토나 EU 가입 등에 성공하여 최고의 외교적 성과를 올렸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가 확대되었기에 하층민의 불만이 증가했고 이로 인해 치안 또한 악화되면서 내적으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국유 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 부패가 만연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큰 실망을 안겼고 좌파 세력이 아직 강성한 헝가리 내에 우익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당-자유민주연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헝가리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강도높은 긴축을 지속했으나 2008년 상반기에 피데스당이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대학의 부분적 유료화와 무상 의료 서비스의 부분적 유료화 조치를 철폐하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직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중도 좌파 정권의 개혁이 계속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여론 조사에서 피데스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상승하여 60%대를 넘나들게 되었다. 게다가 친서방 자유보수주의 성향이었던 오르반 빅토르의 정치 성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을때가 사회당 2기 집권기였을때인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친서방 자유주의 노선에서 극우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르반은 2009년 연설에서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엘리트들의 사상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면서 그와 피데스당의 정치노선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당은 긴축 대신 경제 성장을 내세우는 공약을 통해 기존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며 52.7%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고 오르반이 다시 총리가 됨에 따라 이 때부터 그의 4연임이 성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이를 규탄하고 EU의 대러시아 제재를 적극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타국에서 무기 지원 할 경우 헝가리 국경을 경유하는 부분에 대해 헝가리 영토와 국민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난민을 거부하기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고 실제로 2016년 시리아 난민이 생겼을 때, 세르비아 국경에 긴 장벽을 쌓고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면 적극 구타하는 등 인권 탄압을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려움에 빠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고 있다. 그러나 오르반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기 지원과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하면서 EU 간에 형성된 대러 제재가 균열이 생길 위기에 놓였다. 특히 헝가리가 가스의 85%, 원유의 60%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대러 제재는 거의 국가 경제를 파탄시킬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러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EU 제재에서 헝가리가 빠져 나가게 되면서 향후 대러 제재의 귀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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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7
  •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와 아자리야 자치공화국 - 下편
    사실상 조지아에게서 독립한 아자리야와 아바시제는 1992년 감사후르디아가 실각하고 대권을 이어받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와 비교적 잘 지냈다. 셰바르드나제는 제1차 조지아 내전으로 얼룩진 국내에서 정식 대통령이 되는 1995년까지 약 3년 동안 서방과 러시아에서 중립 행보를 보였으며 내전은 러시아의 개입과 중재, 그리고 셰바르드나제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는 사실상 독립해버렸고 이는 2008년의 남오세티야 전쟁의 불씨를 낳아버렸다. 이같은 상황을 목도한 아슬란 아바시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내전이 끝났어도 조지아는 독립해버린 3국으로 인해 또 다른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조지아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내전에서 셰바르드나제의 공식 군대로 활약한 마피아 군단이었다. 이들 마피아들 중 므헤드리오니(Mhedrioni)는 조지아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의 상당수가 합류한 준 군사조직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들 준 군사화된 깡패 무리들의 무기들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미제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침 1991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달여 동안 걸프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당시 미국의 무기고에 재고 떨이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아 내전을 연구하던 미헤일 아르바쉬빌리(Mikheil Arbashvili) 교수는 걸프전을 종결한 미군이 므헤드리오니(Mhedrioni)에 상당한 양의 무기를 제공하면서 내전을 부채질했고 초대 대통령인 감사후르디아에 대한 쿠데타를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내전 당시,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한 압하지야, 남오세티아 군대를 약체화된 조지아군은 이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분쟁 지역에 상당수를 민병대와 준군사조직에 위임했는데 문제는 이를 지휘하는 자들이 모두 조지아 마피아와 연결된 부패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므헤드리오니는 조지아 마피아의 두목이었던 자바 이오셀리아니(Jaba Ioseliani)가 설립했다. 여기에 많은 범죄자들이 다수 가입해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수민족으로는 라즈인과 아자리야인까지 다국적 깡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약 1,000명의 정조직원과 10,000명의 준회원들이 있었으며 어디에서 입수되었는지 불분명한 미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불법 휘발유 공급과 마약 거래, 강도, 보호비 갈취로 자금을 마련했다. 결국 이 깡패들로 구성된 준 군사조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감사후르디아를 자살당하게 만들고 셰바르드나제는 대통령이 된다.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는 석유 산업 이권을 얻었지만 해당 지역이 포티를 비롯한 흑해 연안 지역이었던데다 아지리야 국경까지 넘어 세력 판도를 넓히기까지 하니 아바시제는 이들과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자 자바 이오셀리아니의 므헤드리오니 같은 마피아 조직들이 조지아 정치권에서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대통령인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자 이들을 숙청하기로 결심하고 바투미로 날아가 아바시제를 만난다. 아바시제와 화해하면서 조지아 마피아 일당을 함께 토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자리야가 더 큰 자치권의 지위를 인정하고 아자리야에서 아바시제의 권력 유지를 허락했다. 그러나 아바시제가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트빌리시의 조지아 의회에 신당 창당을 건의하면서 셰바르드나제의 조지아 시민 연합(Georgia Citizens' Coalition)과 연정을 요청했고 셰바르드나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 당이 창당된다. 그리고 감사후르디아 때와 다르게 여당의 세가 약한 상태였기에 이들은 서로가 연정했고 결국 1995년 말, 조지아 의회 선거에서도 절대다수의 여당이 된다. 그러나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와의 연정을 깨면서 아바시제와의 약속을 어겼고 2003년까지 약 8년 동안 독재정권을 이끌게 된다. 이어 셰바르드나제가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 폭탄 테러를 당해 암살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마피아들의 테러로 몰아 이들을 숙청했고 때에 맞춰 아바시제는 아자리야 땅에서 마피아들을 축출해버렸다. 셰바르드나제에 대한 트빌리시 의회 청사에서의 폭탄 테러 암살 미수 사건은 정말로 마피아들이 그 같은 테러 행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조지아의 현대 역사가들은 셰바르드나제의 자작극을 의심하고 있다. 마피아들로부터 정치적 위협을 깨고 선제 타격하여 정적을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셰바르드나제와의 관계 악화에도 아바시제가 창건한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은 최대 30개 의석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트빌리시 중앙 당국에 대한 온건한 반대 세력이었지만 의석 수를 더 늘리면 언제든 아바시제를 조지아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할 수가 있다. 그러나 2003년 부정선거로 인해 장미 혁명(Revolution of Roses)이 발발했고 여기에 미헤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가 등장하면서 아바시제와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장미 혁명과 같은 색깔혁명이 발발하면서 2003년 11월 23년에, 아슬란 아바시제는 아자리야에 비상 태세를 발령했다. 이어 아바시제는 조지아 민주주의 재건 연합(Georgia Coalition for Democracy Reconstruction)의 추천으로 2004년 1월 4일 조지아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색깔혁명의 여파는 뒤집을 수 없었고 그는 미헤일 사카슈빌리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결과는 결국 사카슈빌리의 최후통첩으로 연결된다. 이는 모든 아자리야의 지도자에게 조지아 헌법에 따를 것과 군대의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바시제를 마피아 및 셰바르드나제와 내통 및 각종 불법물 관련 밀매 혐의로 조지아 대법원에 기소했다. 그러자 아바시제는 조지아 군대가 침입을 준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아자리야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아자리야의 군대는 아자리야와 조지아의 각 지역들을 연결하는 다리들을 폭파하고 혹시나 모를 조지아 군의 진입을 차단했다. 이와 같은 아자리야 지역의 비상 사태는 같은 해, 5월 4일까지 이어지면서 타 조지아 지역에 사카슈빌리에 대한 반대 집회까지 독촉하는 등, 제2차 조지아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이러한 계엄령은 오히려 아자리야 내에서 역풍을 맞았다. 바투미에서는 조지아와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이는 아바시제의 권력 구도가 축소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아자리야에서 전체적으로 수만 명이 아바시제의 사임을 요구하기 위해 바투미로 향하면서 아바시제의 권력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아자리야 전 지방의 시위대들이 중심 바투비에 입성한 5월 6일, 아바시제의 권력은 붕괴되었다. 이를 기회로 조지아의 특수부대가 바투미와 아바시제의 공관으로 진입하여 친 아바시제 단체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푸틴 대통령의 전갈을 받은 러시아 대사 이고리 이바노프(Игорь Иванов)와 밤새도록 대화했고 이바노프는 아바시제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아바시제는 다음 날, 7일 아침 퇴진을 발표했다. 그리고 8일 새벽 아바시제는 모스크바로 망명하면서 제2차 조지아 내전의 위기는 겨우 무마되었다. 아바시제의 실각과 망명 이후, 바투미에서는 새로운 지방 선거가 발표된다. 자치공화국의 발족을 위해 20인의 가협정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레반 바르샬로미제(Levan Barshalomize)가 가협정 의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아자리야 지역 의회들의 선거는 6월 20일에 열렸고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정당은 30석 중 28석을 획득하며 아자리야 지역 의회에서 압승을 거둔다. 나머지 2석은 사카슈빌리의 이전 협력자들인 공화당원들이 장악하면서 아바시제의 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7월 20일, 아자리야 최고 의회는 레반 바르샬로미제를 자치 공화국 정부의 의장으로 임명하면서 아자리야 독립 공화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자리야 지역 의회와 조지아 중앙 정권, 아자리야인과 조지아인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달랐으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때는 아자리야인들이 러시아를 지지했다. 사카슈빌리가 실각할 때,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국가를 부르며 사카슈빌리의 퇴진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아 입장에서 바투미는 흑해와 같은 바다로 나갈 유일한 창구다. 바투미를 잃는다는 것은 조지아에게 있어 어머어마한 타격이다. 기본적으로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대로 조지아 정부와 국민들은 친서방, 친우크라이나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지아의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친러가 되면서 아자리야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조지아 동부와 아자리야인들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아 제3차 조지아 내전의 불씨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같은 국내 문제로 인해 조지아는 다시 위기 일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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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7
  • 2011년 그리스 정부의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무기로 한 그리스 2차 구제 금융 요구 사건
    2011년 7월부터 그리스 정부와 유로그룹은 2차 구제금융 지원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유로그룹은 채무탕감과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EU 정상들은 유럽 은행들을 비롯한 민간 채권자들과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리스 부채 탕감률을 5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가 갚아야 할 총 채무 3500억유로 중 민간부문 1000억유로가량이 줄어들게 됐다. 대신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나머지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EU는 300억유로의 보증을 제공한다. 또한 EU 정상들은 EFSF를 4400억유로에서 1조유로 수준으로 대폭 확대했다. 재정위기국이 채권을 발행할 때 EFSF가 발행금액의 20~30% 정도 보증을 서는 것과 EFSF 산하에 특수목적기구(SPV)를 설치해 IMF와 중국 등 국부펀드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전화를 걸어 EFSF에 대한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위기에 대비해 역내 은행들이 자본을 내년 6월 말까지 1060억유로 정도 늘리는 은행 자본 확충방안도 나왔다. 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마저도 어려울 경우 유럽재정안정기금인 EFSF가 돕기로 했다. 이와 함께 유로존과 IMF는 그리스의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그리스에 100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날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리스 민간 부채 중 50%를 탕감하며 올해 160%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2020년까지 120%로 낮출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EU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의향서 제출을 통해 각종 개혁조치를 실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스스로 정한 시한과 목표를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합의에 따른 관련 규정 변경에는 최소 2~3개월이 소요된다. EFSF 확충 등 이번 합의 사항은 모든 유로존 국가 의회의 동의를 얻아야 한다. 2012년 3월까지 그리스 332억 유로, 이탈리아 1980억 유로, 스페인 840억 유로 등 국채 만기가 도래하게 된다. EFSF가 빨리 운용 가능한 기금 규모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에는 2011년 10월 EU가 부채의 50%를 탕감해주고 2차 금융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EU의 수장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나치라 비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는 금융 지원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 붙게 되는 긴축 요구 때문이다. 당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그리스 시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공의 골칫거리'라는 문구와 더불어 과거 히틀러 정권을 연상시키는 나치 SS 친위대원의 옷차림을 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는 EU를 상징하는 별과 나치 상징 문양이 함께 그려진 완장도 차고 있다. 그리스 현지 신문 만평도 독일 관리들이 나치 복장을 하거나 긴축정책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 관리들이 나치식 인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시민들은 정부의 임금과 연금 삭감, 증세 등 계속된 긴축정책에 반발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화가 난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고대 유적지를 방문한 독일 관광객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그리스 언론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독일 정부의 간섭이 약 65년 전 히틀러 정권이 그리스에 악행을 저질렀던 경험을 연상시키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2차 그리스 구제금융 패키지에 대해 그리스 국민 과반수가 되려 반대 의사를 표했다. 패키지에 포함된 그리스 국채 상각(헤어컷) 프로그램이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리스인의 58%는 이 긴축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관료들은 반역자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의 지원에 대해서도 50.1%는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48.8%는 자주권 훼손을 우려하는 등 그리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부 지원에 대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다만 그리스가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에 남길 원한다고 답한 이는 72.5%에 달했다. 이에 따른 증세불복 시민운동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운동 일부 공무원까지 참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 운동의 시작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경일 기념행사의 거리행진에서 드러났다. 매년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이 행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한 것을 기념해 열리는 이벤트다. 그러나 2011년의 행사는 시위대의 반발로 차질을 빚었다. 시위대는 낮부터 행진을 막고 카를로스 파풀리아스 대통령, 파노스 베글리티스 국방장관 등을 향해 “반역자”라고 외쳤다. 10월 26일에도 베글리티스 장관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 지역 한 교회를 방문했다가 호된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EU 정상회의가 10월 27일 내놓은 그리스 채권 손실률 상향 등 위기 해법에도 비판은 더 커졌다. 그리스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반발했다. 주민 수가 7만 명인 아테네 광역도의 네아 이오니아 구에서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함께 부과된 신설 재산세를 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당시 이라클리스 고트시스 구청장은 신설된 세금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구민들이 세금 낼 돈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재정난으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증세정책에 반발한 그리스 국민의 불복종 움직임이 산발적이지만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면서 일부 지방 공무원들마저 증세 거부운동에 가담하고 나설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네아 이오니아구 의회도 웹사이트에 세금은 내지 않고 전기요금만 내는 방법을 공지하면서 증세 거부를 부추겼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네아 이오니아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변호사들과 노조, 사회운동가들도 정부의 신설 세금 징수와 수만 명의 공무원을 급료 일부만 지급하면서 정직시키는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기관 건물들이 점거되는가 하면 파업 중인 노조원들의 복귀를 지시하는 긴급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고 국영기업들은 일시휴직 대상이 될 수 있는 공무원 명단 제출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쓰레기 수거 작업원, 제빵사, 택시운전사, 치과의사, 항공관제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발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확산되었다. 당시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 삭감과 이로인한 가계소득 감소, 16%를 넘어선 실업률로 가계의 지출 여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특히 신설된 재산세였다. 2011년 9월 발표된 이 재산세는 올해 말까지 20억 유로를 징수할 것이 계획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 세금을 쉽게 걷기 위해 전기 요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함께 부과했다. 세금을 안 내면 단전될 수 있다는 경고가 포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에 국영 전력회사 근로자들까지 분노하고 나섰다. 이들은 단전을 막겠다고 공언하고 단전된 경우에도 노인이나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게는 다시 전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고지서 인쇄를 막기 위해 관련부서를 점거에까지 나서기도 했다. 변호사들도 가세해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이번주 이 법의 폐기를 당국에 요구했다. 2011년 11월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 정부는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리스가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유로존 탈퇴안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유로존 탈퇴 여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강경한 의지로 풀이된다. 파판드레우 3새 총리는 11월 2일 EU의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그리스가 EU와 유로존 회원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판드레우 3세 총리는 각의에서 국민투표의 딜레마는 구제금융과 유로, 유럽에 대해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현 내각의 불신임 여부와 관련 없다라고 했다. 그리스가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치킨 게임에 나서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주가와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에 빠지고 있었다. 유로존 국가들이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국민투표 강행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리스 총리 관저의 툴카스 대변인도 신임투표에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둬 정부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게서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4일 일 밤 의회에서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여당에서도 반발하는 1명이 탈당해 여당인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의 의석은 과반에서 2석 많은 152석으로 떨어졌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 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조기총선을 요구하면서 총리가 자신을 위해 그리스의 미래와 유럽 내 그리스의 입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왜곡된 딜레마를 안겼다고 비난하는 등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도박에 대해 EU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인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는 그리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제금융안을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이미 불안할 대로 불안해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정은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는 유럽의 노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그리스가 유로존과 국제사회에 진 의무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스 정상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긴급 회동했다. 이번 회담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시행에 따른 금융시장 혼란 등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IMF 총재, EU 관계자, 그리스 대표 등도 배석한다. 회의에서는 유로존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의 국민 투표안 철회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EU 정상회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라면서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EU 합의안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디폴트 선언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유로존은 엄청난 위기에 휩싸일 공산이 커지고 그리스는 말 그대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덩어리를 제외고는 국내외 자산이 모두 압류된다. 다만 그리스 국내 자산은 그리스의 사법 당국이 허가해야 해외 채권자들이 처분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 증시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며 미국이나 아시아 증시의 하락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 주식이나 금융 쪽에 관련된 투자자나 종사자는 그리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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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 홍차무역, 동인도회사와 보스턴 차 사건, 홍차의 수장이 도화선이 된 미국독립전쟁
    현재 홍차를 생산하며 판매하고 있는 동인도회사는 1978년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 사용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고 있는 회사로 회사의 설립시기를 1978년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1600년으로 보고 그 연혁을 계승하고는 있다. 그러나 영업 분야가 홍차의 생산 및 판매에 한정되고 있는 만큼 사실상 다른 회사로 보는 것이 맞다. 이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는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라는 홍차의 제품이 있다. 이 홍차 제품의 경우, 보스턴 차 사건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그래서 제품의 라벨에 당시 보스턴 차 사건을 묘사한 삽화를 삽입했다. 그럼 동인도회사에서도 권장하는 홍차 제품에 나타난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거기에서 유래한 보스턴 차 사건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1755년에 시작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이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막대한 빚더미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서는 프랑스나 아메리카 원주민 등 경쟁자들을 모두 제압하면서 본국에게 따로 의회와 자치를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식민지 아메리카에 의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로 엄청났다. 이에 1764년부터 설탕세와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이 대거 반발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러한 큰 세금부과 정책을 철회했다. 아메리카 13개 주(州) 식민지들은 이 때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자로 입회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소년이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같은 해, 3월 5일 보스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한 반발을 강하게 억누르며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홍차법을 제정하여 이를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중국에서 네덜란드에 밀수로 팔고 영국 및 영국 식민지들에 유통되어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대단한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반면 네덜란드 정부는 홍차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홍차가 같은 가격에 수입된다면 관세를 물지 않는 측이 저렴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홍차 무역에서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는 도중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홍차 무역에 밀리게 되면서 그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자국 동인도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중국과 동인도회사, 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했고 영국시민들과 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민들은 완전히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아메리카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러한 덕택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기존 홍차 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 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불만을 가진 이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를 네덜란드를 통해 밀수하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수입이 끊어지게 되자 이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지식인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의 총독들이 파견되었고 각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통솔할 영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주의 경우,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더욱 부여받았다. 그 이유는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메이플라워호의 출항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들 중에서 후발주자로 들어온 이민자들 중, 귀족이나 의회 상, 하원 의원급 되는 상류층들도 대거 들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에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하고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들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만큼은 달랐다. 이들은 총독이 아닌 영국의회로 직접 건너가 대표단이 참가해서 의사결정을 했을 정도였고 의회에서의 결정문을 직접 가지고 13개 주에 돌아와 포고문을 발표했다. 게다가 13개 주의 영국 총독은 13개 주의 의회에서 투표로 선출했고 영국의회의 재가까지 받아 임명되는 다른 영국 식민지들과 엄청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메리카 13개 주의 식민지에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이 아메리카 대표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독단적인 사건은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체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서 그들에 부여된 자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 이를 무시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과 홍차 밀무역꾼들이 서로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훗날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사뮤엘 애덤였다. 사뮤엘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은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하게 된다. 이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고 홍차가 가득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을 습격했다. 이들 자유의 아들 집단은 100여 명이 총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3척의 배에 탑승했고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얻어냈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상자들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중국 홍차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바다에 뿌려진 홍차의 총 가치는 9,000파운드로, 현재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달하는 수준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국은 1774년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를 해산시켰으며 자치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식민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인들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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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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