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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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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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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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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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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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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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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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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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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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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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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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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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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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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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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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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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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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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국민이 아플 때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정부가 헌법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 말이다.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들었나? 아니었다. 제대로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치료를 못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의료접근성이 높은 나라는 없다. 그러면 저 말의 의미는 무얼까? 응급실을 담당하는 의사 수가 적고, 지방에 근무하는 의사 수가 적어서 국민이 아플 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건가? 그것이 우리의 당면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의대생 숫자 증원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엉뚱하다.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꿰맞추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온 백성이 잘살게 됩니다”라는 말과도 비슷하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 단지 상위 일부 계층만 더 많은 소득을 올릴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부자들의 배만 더 불릴 뿐이다.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의료시스템의 변화 없이 의대생 수를 증가한다고 우리가 겪고 있는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필수 의료에 더 많은 행위별 숫가를 적용해서 의대생들을 필수 의료 분야에 더 많이 지원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모든 것이 돈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들고나온 의대생 숫자를 늘리자는 정책은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꼴이다. 의대생 숫자를 늘려봤자 지금의 행위별 숫가 제도로는 여전히 인기 있는 과에 학생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늘어난 의대생들은 누가 가르치나? 늘어난 의대생 숫자를 교육 시킬 자원은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할까? 그 모든 것이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그 돈을 왜 엉뚱한데 쓰려고 할까? 그 돈으로 필수 의료에 더 많은 지원을 해 줘도 우리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인다. 어쩌면 현행 제도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꼼수가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 생명을 담보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국민 생명을 담보로 현행 공보험이라는 제도의 근간을 흔들려는 태도도 맞지 않는다. 의료 개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가 생각하는 의료 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상급종합병원은 전문의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이 전공의를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상급종합병원이 저임금, 고노동의 전공의 활용해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상급종합병원에 환자가 그렇게 많이 몰리는데, 그 많은 환자를 전공의 도움 없이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있겠는가? 상급종합병원에 환자가 몰리는 것은 환자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지, 의대 증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방의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으나, 서울의 유명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으나 환자는 동일한 의료비를 지불한다. 당신이라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그것이 의대 증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을 중심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중증질환을 제외한 응급환자나 가벼운 질환의 환자를 다른 종합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는 국민의 의식이 문제이지, 상급종합병원의 광고나 홍보에 의해서 국민이 그곳으로 몰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면 공보험 자체를 손봐야 한다. 차등 진료이다. 정부가 그리는 그림이 진정 현행의 공보험 자체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대 증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빌미로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워 공보험을 없애고 사보험을 도입하려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정부의 숨은 의도라면 참으로 현 정부의 남은 3년은 길어도 너무 길다. 여기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모험이 생각났다.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도중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당을 만났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강철로 된 침대를 갖고 있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그 위에 묶어 침대의 길이에 맞게 여행자들의 키를 늘이기도 하고, 다리를 자르기도 하였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그의 침대에 눕혀 그를 똑같은 방법으로 처벌하였다. 지금 의대 중원을 중심으로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아닐까? 의대 중원이라는 침대를 가져다 놓고 모든 것을 그 침대에 맞게 재단하려고 한다. 뉴스를 보니 정부는 전폭적인 국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법과 원칙에 따라 흔들림 없이 대응한다고 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정부가 꿈꾸는 의료 개혁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국민의 냉정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18세기 영국 어느 시민극의 대사가 생각난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법률이란 대체 뭡니까? 당신들의 악행의 도구이자 방패막이 이외에 무엇입니까? 그 법률로 당신들은 남을 처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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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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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한민국 정부에 ‘홍해 보호’ 지원을 요청함에 대한 비판적 견해
-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에도 ‘홍해 보호’ 지원을 요청해서 청해부대 파견을 검토한다는데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명박 정권 때 "아덴 만의 여명" 작전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하긴, 현 정권 인사들이 MB 측 인사들이니 그 사건이 떠오르긴 하겠지만 예멘 후티 군대는 "아덴 만의 여명" 작전 때의 소말리아 해적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군사들이다. 후티는 사실상 예멘의 정규군에 가깝고 나름 최신 무기들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아주 훌륭한 수준은 아니지만 소말리아 해적들의 무기보다는 훌륭하다. 그리고 우리가 나서는 순간 단순히 홍해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수준이 아니다.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등도 사실상 참여를 거부했는데 고스란히 중공, 북괴의 위협에서 우리 전력을 분산시켜 파병해야 할 필요가 있나? 후티를 없애기 위해 예멘 땅 본토 상륙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상륙 작전은 군 피해가 늘어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 선박이 후티에게 공격 받은적 없고 이스라엘에 무역 반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이 공격을 받는 것이지 다른 나라로 가는 선박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티는 오래 전부터 그런 사실을 공표해왔고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선박은 실제로 공격한 바 없다. 다만 이스라엘로 가는 상선만 공격했었다. 그걸 전체 상선을 공격하는 양, 집단 서방은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면서 희망봉을 우회하는 것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우리가 서유럽, 북아프리카 및 터키, 동유럽과 교역하는 선박이면 여태까지 수에즈 운하 넘나들며 잘 교역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후티 군대를 자극해 그들의 표적이 되어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경제가 반 토막 날 것은 자명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혼자 예멘 사태를 해결하기 어려우니 동맹국들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미국이 정말로 세계 최강이자 강대국이라면 왜 동맹국들의 손을 빌리는가? 혼자 해결하면 되는 것을 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은 더 이상 최강이 아닌듯 하다. 미국이 진정한 세계 최강이고 여전히 건재한다면 이번 기회에 입증하면 될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자 무적이라면 스스로 증명하고 입증해야 한다. 동맹국들이 거부하는데 강제로 참전을 독려하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 후티를 반군이라 부르며 폄하하는데 무엇이 무서워서 반군과 싸우는데 동맹국들의 힘이 필요하단 말인가? 진정한 세계 최강의 능력을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 미국은 우리 한반도의 평화와 안녕과 직결되어 있는 국가이니 북한과 중국을 꼼짝 못하게 스스로 해결하는 최강국의 면모를 보여주길 소망한다. 이러한 미국의 전면전은 결코의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군의 역량에 따라 한반도의 안보가 어찌될지 판가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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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한민국 정부에 ‘홍해 보호’ 지원을 요청함에 대한 비판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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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성립과 해상 무역으로 인한 지중해 경제의 성장
- 인문주의적, 르네상스적인 기반 속에는 나침반의 실용화와 지리상의 여러 발견들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점령당하고 난 이후에 오스만투르크의 세도를 피해 인도와 교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하는 직접적인 필요성이 야기되었고, 긴 항로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재정상의 자금도 함께 축적되어지는 동시에, 인문주의, 르네상스적인 새로운 정신 풍토가 조성되어 지리상의 큰 발견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도래 했다. 용감한 항해사의 노력은 종합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영국의 물자 보급의 도움을 입어 두 갈래의 방향으로 항해를 했다. 첫째, 아프리카를 주항하면서 인도 영해에 이르는 항로와 둘째,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에 닿는 항로였다. 그리고 훨씬 뒤에 또 다른 방향, 이를테면 지구 전체를 주항하는 항로가 추가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주항하는 탐색 항해는 포르투갈 출신인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o Diaz)가 1486년에 시도하여 현재의 희망봉에 상륙할 수 있었고, 1497∼1498년에 스페인 출신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포르투갈의 원조를 받아 모든 계획을 실현시키면서 인도의 서쪽 연해인 캘리컷(Calicut)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미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에 이르는 항로 역시 개척되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고, 스페인 정부의 원조를 얻어 1492년, 1493∼1495년, 1498년, 1502∼150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항해를 시도했다. 비록 아시아 영해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새로운 대륙을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한 것은 콜럼버스의 세 번째 항해 시 재정을 부담했던 피렌체 출신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아메리카의 광대한 대륙 발견으로 유럽의 지배 계급들은 새로운 행운과 번영을 멀리서 바라보며 낡은 대륙의 경제적, 사회적인 기존 상태를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투르크의 선박과 실세에 눌려 동방 제국과의 기존의 무역 항로는 어렵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의 해상 무역 선박은 점차적으로 투르크의 상선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지중해의 해상 항로는 대서양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적 구조에 대한 균형에 심각한 변화가 가해진다.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수공업, 특히 견직물과 모직물은 유럽의 상거래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1500년에 들어서면서 약간의 성숙기의 변동은 있었지만 대체로 심각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그 당시 경제적 생활의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던 농업 역시 시대에 후진적인 경작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독일, 폴란드에서는 농촌의 경제적, 사회적 조직을 대토지 소유자인 영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교역과 그 창의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던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무역 활동이 정체되든지 독일 야콥 푸거(Jakob Fugger)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해 가는 형편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적, 상업적 활동 역시 독일 금융계가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제와 제약도 일반적으로 유동적인 자본의 부족으로 느슨해졌다. 이는 무역 확대로 얻어진 이윤의 대부분이 토지에 투입되고, 정치 생활의 불확실로 이탈리아를 통제하기 위한 주둔군의 부정적인 결과는 그와 같은 사업에서 철수하는 반면, 금전을 저축하는 것에 방향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폐 유통의 침체와 중단은 화폐 단위의 현저한 절상을 야기 시켰다. 전제 군주들이 정치 · 군사적 유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던 시대이니만큼 막대한 금전을 조달할 수 있는 소수의 금융업자와 동맹을 맺는 것이 절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상호간에 체결되는 깊은 유대가 그들의 재정적인 최후의 지주였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는 제노바 출신이나 베네치아 출신의 이탈리아 인들도 활약했고, 이탈리아 금융계의 자본이나 전문 지식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전후로 하여 여러 기업들에 적극적으로 가세함으로써 많은 수익을 이탈리아에 주었던 사실은 비교적 정확하다 볼 수 있다. 실상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지난 과거의 번영을 이야기해 주는 화려한 궁전의 많은 부분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것보다는 오히려 16~17세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지리상의 대륙 발견이 추진된 하나의 계기는 오스만투르크의 근동 제압으로 인해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 근동 지방의 상업 기지를 약탈당하고, 무역상의 독점적인 특권을 탈취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상 무역의 독점권 상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중해 무역의 진출을 허용했던 반면, 피사와 리보르노의 항구를 장악한 피렌체(토스카나 공국)에게 해상 무역의 규모를 확장해 갈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리보르노 항은 영국 선박의 기지로 이용되기도 했고, 그 선주들은 포르투갈의 여러 항구와 통상 관계를 유지하면서 1600년대의 동서 중계 무역에 많은 번영을 누리게 했다. 제노바는 15세기 말경 다시금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는 것 이 외에 약간의 식민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여, 오스만투르크에 연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오스만투르크의 보호 하에 동방 무역의 안전을 보장받아 동방 무역의 번창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경유하는 베네치아 중계 무역으로 종래의 향료 무역이 되살아나 베네치아는 향료의 거래량으로는 포르투갈을 능가할 수가 있었고, 서남 독일의 광산업의 번창으로 독일-이탈리아 상호간의 통상은 16세기에 크게 확장되었다. 제노바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서 근동 상업에 크게 세력을 유지해 오면서 모직물 공업을 비롯한 견직물 공업과 유리 공업 등이 번창하는 수출 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제노바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북 ·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17세기 초에 와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 지대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자본은 유럽의 국제 금융 시장으로 흘러가 이탈리아의 금융 활동은 16세기 후반 국내 대도시에 공립 은행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또, 16세기 중엽 제노바의 영향을 받은 인근 도시인 밀라노의 상공업의 번영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심적 주요 도시와 정기적으로 결속하는 공립 우편 제도를 발달시켰다. 16세기와 비교하여 17~18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정치, 경제, 사회생활 전반에 현저한 침체 현상이 일어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 침체의 근본적인 요인으로서는 근대적 번영의 기반이 될 산업 자본가 계급의 성장이 처음부터 단절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북 · 중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전진 지역에서 중세 도시의 국가적 정치 · 경제 체제가 너무나 강하게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의 도시 번영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이에 대신해서 새로운 번영을 일으킬 요소가 구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 사회는 막대한 농지를 농민이 아닌 도시민들이 소유하여 지배적인 소작 제도(Mezzadria)로 운영되고 있어서, 유럽에서 보는 근대 자본주의 발달의 기반인 독립 자영 농민층이 결핍되어 있었다. 더구나 도시 중심의 통제적 식량 보급 정책이나 전쟁과 흉작 등이 악영향으로 작용하여 농작물 상품 생산의 발전이 막혔고, 중 · 소지주의 몰락과 종교 단체와 대 귀족들의 대 농토 소유와 소작 제도로 인한 봉건적인 사회 제도가 다시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낙후 지역이었던 남부 이탈리아에도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 붙어 이득을 취하는 대소작인들의 중간착취로 농촌의 빈곤을 가속화시켰다. 이탈리아에 있어서 근대사는 중세 시기가 막을 열었던 것과는 별 차이가 없는 상태의 역경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중세사가 야만인들의 지배라고 하면 근대사는 외국인들의 패권 장악에 있다. 아무튼 이러 저러한 운명 속에 이탈리아는 매우 큰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자치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정원을 향해 홍수들이 밀려오는 것과 같이, 야만적인 종족들이 내려와서 로마 전통의 흔적 위에서 군주 국가를 세워 나갔다. 반대로, 근대사는 이미 전쟁에 숙달된 군대를 거느리며 민족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알프스 이북의 여러 강대국들이 이탈리아 방면으로 확장해 오면서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그 세력권에 예속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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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성립과 해상 무역으로 인한 지중해 경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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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유물을 파괴하고 유물에 대한 명칭을 짓는 것에 근거가 없는 이유
- 4년 전, 한 스님과의 짧은 시간의 만남과 대담에서 스님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 문화재를 보호해도 모자를 판에 왜 파괴하고 유물에 대한 명칭을 짓는 것이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막 지을까요?" 그러자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애정이 없으니까요" 해외에서 숱한 유물과 발굴 현장, 유적을 보며 연구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분은 비단 능현스님 뿐만이 아니었다. 춘천 중도 유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레고랜드를 지으려 하는 것을 반대하는 분들도 그렇고, 경주 쪽샘 고분 발굴 책임자도 그랬다. 그리고 나를 만난 양심있는 고고학자들과 관계자들 모두가 공통된 질문을 했다. 모두들 고고학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명칭도 짓고 도로를 내고 유흥시설과 아파트를 짓는다며 유적을 함부로 파괴한 것에서 시작된 질문이었다. 애정이 없으면 관심도 없게 된다. 그러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한반도는 단위면적상 땅만 파면 고대 유적과 고대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고대 문화 유적 발굴만으로 세계 5위권 안에 들어가는 국가다.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의 영국과 포르투갈도 땅파면 이 정도로 고대 유적과 고대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우리는 고대 문화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받은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국,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은 A.D 3세기의 켈트 유물, 특히 유리잔 조각만 나와도 국가의 자랑이라고 대서특필이 되며 갖은 호들갑을 떠는데 우리는 깨진 토기도 거름 되라고 뿌리는 형국이니 복에 겨워 터졌다고 봐야 한다. 하다 못해 일본도 5세기 토기 사발 하나 나와도 국보로 소중히 모셔가는데 말이다. 고고학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귀함을 아는 애정이다. 애정이 관심을 부르고 관심이 보존과 복원에 대한 생각과 지식을 부른다. 한국의 고고학자들과 관계자들은 고고학자인 나에게서 뭔가 유럽고고학의 거창하고 해박하며 학술적 용어를 원하고 써먹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겠지만 해박하고 유식한 용어를 배우고 머리에 담기 전에 나는 먼저 가슴으로 담으라고 말하고 싶다. 가슴으로 한반도 역사와 유적, 유물에 애정을 가지는게 먼저라고 말이다. 고고학자들이 최고의 기술과 학술이라고 높이 떠받드는 유럽고고학의 기초도 바로 Affection과 Heart 이기 때문인데 이 나라는 그게 없다. 오히려 대를 이어 장기적으로 꾸준히 발굴하여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도로 묻거나 춘천 중도 유적이나 대전 용계동 유적처럼 파괴하기 바쁘다. 중도 유적도 한국 고고학 혼자서 감당이 어려우면 해외 고고학계에 협력을 요청하여 발굴 및 보존하면 될 것인데 그깟 레고랜드가 대수인가? 한국 관계자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고고 유적 촬영을 요청했지만 허가되지 않았다. 내가 한국보다 훨씬 더 고고학이 발달한 러시아, 터키, 그리고 중앙아시아 고고학 유적 등 수많은 고고학 현장을 다니고 발굴을 하면서 사진 촬영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발굴 현장 사진을 허가 쉽게 받고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그 흔적은 내 메인 사진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한국 고고학 현장은 참 이상한 곳이다. 발굴현장에 대한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 물정이 어두운 나지만 도대체 무엇때문에 현장촬영이 허용되지 않는가? 멀리서 찍을 수밖에 없는데 타 고고학계와 교류조차 하지 않으려는 한국 고고학계의 폐쇄성이 아쉽다. 현장에 대해 서로 공유하고 그에 대해 논쟁과 비판이 활성화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이 나라는 그 조차도 막아버리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폐쇄성을 갖고 있다. 고고학이란 학문 자체를 그렇게 다루니 유물, 유적들을 우습게 보는 일반인들이 나타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낙서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 자체가 없다. 저 학생이 무식하다 욕할게 아니라 저 상황을 만든 고고학계 및 문화재 보존학계에 대한 성토도 이어져야 맞다. 그들조차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없는데 누구한테 죄를 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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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유물을 파괴하고 유물에 대한 명칭을 짓는 것에 근거가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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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또 다른 그레이트 게임
- 최근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그리고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지역에 대한 오래된 영토 분쟁과 민족 분쟁, 무엇보다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이 지역의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루지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중앙아시아로 통칭되는 광대한 지역은 대개 이와 같은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는 제국주의적인 팽창에 몰두하였으며, 실질적인 지도에 없는 땅인 중앙아시아 지역을 자국의 세력권에 넣기 위해 경쟁하고 충돌했다. 이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은 과연 달라졌는지 의문에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는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며, 주로 자원 확보나 개발 등 경제적인 부분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에 걸쳐 발생한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오랫동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영국과 러시아가 경쟁을 벌였던 신장과 티베트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독립을 꿈꾸었으나 중국으로부터 갖은 압제를 겪으며 아직도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며, 전략적 요충지로 영국과 러시아가 장악하려 했던 아프가니스탄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다. 카프카스 지역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도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가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자원 쟁탈 지역이 되고 있다. 이에『실크로드의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의 저자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현재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금 국제적 격랑에 놓여 있는 이 지역은 그 향방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지구의 축소판과도 같다. 홉커크는 당시 발간된 국제 정세를 다룬 문헌이나 영국과 인도, 러시아의 정부 문서, 그레이트 게임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여행기나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두루 섭렵하면서도 역사적 서술의 전형에서 벗어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분투했던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행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애국심이나 개인적 야심을 위해 험준한 산맥과 황량한 사막을 따라 이동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에 참여했던 이들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목적에 봉사하게 된다. 탐험가이자 첩자, 군인이자 야심가였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묘비명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에 묻혔는가 하면 일부는 고국에 돌아와 명성과 권력을 얻기도 했다.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경쟁과 갈등 관계를 표현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제6 벵골 원주민 경기병대 소속의 정보 장교인 아서 코넬리(Arthur Conolly) 중위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루디아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소설『킴(Kim)』(1901)에 나온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그레이트 게임의 시기는 1813년 러시아-페르시아 조약 체결 이후부터 시작되어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 체결로 종료되었다. 이보다 강도가 덜한 2차 그레이트 게임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은 동방 최대의 보물이라 불리던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섰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지칭되어질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영국에게 인도를 식민지로 유지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이후 국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도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이 지역은 지도상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땅,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방어선, 본국이나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팔기 위한 시장으로 인식되었을 뿐 독자적인 전통이나 역사를 지닌 지역이 아니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애초에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대영제국이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던 제정 러시아는 쉽사리 국가 차원의 전쟁에 뛰어들 수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개인들의 참여로 시작되었다. 애국심과 야심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은 순례자나 현지인 말 장수로 변장하고 험난한 지형을 탐사하며 지도를 그리고, 지역의 부족들과 지도자들을 만나고 정세를 살폈다. 이후 본국에 돌아와서는 상대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는 책과 논문을 작성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정부가 지금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정복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처음에 이들의 견해는 무시되고는 했으나 점차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러시아 공포증’이 만연하여 중앙아시아 점유에 소극적이었던 정부를 압박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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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또 다른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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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 파리와 영국에서는 베드버그와의 전쟁 중
- 2024년에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 파리와 영국에서는 베드버그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인류가 동굴에 입주했을 때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인간과 더불어 잘 살아왔던 베드버그는 유럽에서 저가 숙소인 호스텔을 이용하거나 어딘가에서 베드버그가 붙어 온 다른 여행자 때문에 베드버그가 들러붙어 고통받는 일이 생기고 있다. 요즘 같이 베드버그가 가장 왕성할 때, 목조건물이 많은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 여행가는 것이 썩 좋은 선택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베드버그와 전쟁 중이라니 베드버그의 청정국이었던 한국은 어느새 유럽에 갔다온 자들의 물건에서 옮겨오거나 해외에서 배송된 택배로 인해 함께 실려왔을 확률이 높다. 베드버그는 오래되고 낡은 목조건물에 주로 기생한다. 그 이유는 나무 속이 오래될수록 따듯하고 적당히 습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 속에는 베드버그 뿐 아니라 각종 곤충들의 서식처가 되기도 하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무 내부온도가 벌레들의 서식처가 되기에 알맞은 온도를 갖고 있다. 특히 초겨울로 진입하는 때 난방은 베드버그의 안정된 서식을 돕게 한다. 나도 유럽에 있을 때 무려 6차례 베드버그로 인해 고생한 적 있는데 세르비아에서 4차례, 코소보에서 1차례, 슬로바키아에서 1차례 겪은 바 있다. 베드버그들이 아주 좋아하는 곳은 해안가 지역 도시들이다. 한 겨울에도 따뜻하고 해안가 특유의 높은 습도로 인한 습기는 베드버그 서식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한 때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이탈리아 해안 지대가 베드버그들의 천국이었고 요즘은 내륙으로도 확산 중이다. 서유럽에서 베드버그는 1950년대 아주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여행객이나 이주민들이 많아지고 유럽인들이 먼 곳으로 여행 가서 묻혀오기도 하여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다 화학 살충제에 내성이 생겨 퇴치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강한 살충제를 마구 사용할 수도 없다. 그리고 번식력도 좋다. 한 번 들여오면 금방 퍼지는 이유다. 빈대는 벼룩, 이, 모기, 등에와 달리 꽃의 꿀이나 나무 수액을 먹지 않으며, 동물 피를 빨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모기는 번식기의 암컷만 흡혈을 하는 데다 가구에 숨어 서식하지 않는 반면, 베드버그는 최소한의 환경이 갖춰진 따뜻하고 습한 장소를 발견하면 눌러앉아 낮에는 철저하게 어두운 곳에 숨고 밤에 나와 흡혈하며 엄청난 속도로 번식한다. 베드버그는 모기보다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피가 잘 나오는 곳을 찾을 때까지 한 번에 수 방에서 수십 방 씩 이동하며 계속 문다. 이 때문에 보통 발 끝이나 팔 끝에서 시작해서 직선으로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혈관을 찾지 못해 몸을 기어다니다 대충 피부가 연하다 싶은 곳은 다 물고 보기 때문이다. 베드버그는 모기처럼 피를 흡입할 때 마취 및 혈액 응고 방지 성분이 섞인 산성 액체를 피부에 주입하며, 이 성분이 면역계와 반응해 염증 반응을 일으키게 되면서 미친듯이 가렵게 된다. 가렵다가도 따갑게 변하기도 하는데 산성액체가 피부에서 완전히 분사되지 않고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경우 그렇다고 한다. 긁거나 건드릴 경우 빠른 속도로 물집이 확대되며, 심하면 흉터가 생길 수 있다. 물론 물리면 약국에서 항히스타민제를 구매하거나 심할 경우 피부과에 가서 따로 치료제를 처방받아야 한다. 세티리진 같은 비수기성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면 가려움증이 진정된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나의 견해에 의하면 베드버그에 물리면 우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가려운 부위에 샤워기를 대고 뜨거운 물을 붓으면 처음에는 더 가렵다가 어느새 가려운 부위에 열이 끌어올라 가려움이 점차 시들해진다. 그리고 낮이 되면 운동을 하든 뭘하든 땀을 내서 피부 점막에 땀을 배출하면 독소가 땀과 함께 빠져나간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라. 그런식으로 3~4일 정도하면 대개 약 안 쓰고도 가려움증이 낫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나무 베드가 아닌 철제 베드를 사용하자. 베드버그는 날개가 없어 날카로운 다리 축으로 나무나 천 조각에 붙어 이동하는데 철제의 경우, 미끄럽기 때문에 타고 올라가는게 불가능하다. 특히 유럽 여행하다가 베드버그에 물리거나 베드버그를 발견했을 경우, 옷가지들을 전부 비닐봉지에 밀봉해야 한다. 한 곳에 몰아넣지 말고 최대한 나눠 밀봉해야 한다. 그리고 50도를 넘는 뜨거운 물에 세탁을 하고 캐리어의 경우, 규조토, 살충제를 발라 방제하며서 뜨거운 태양볕에 수 시간 건조하는게 좋다. 가죽 배낭의 경우, 가방까지 통째로 드라이 클리닝을 맡기는 것이 좋고, 여의치 않다면 뜨거운 물로 세탁하고 건조기에 넣어 가방을 포함한 옷가지 모두를 세척하는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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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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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 파리와 영국에서는 베드버그와의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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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대한 역사학자로써 단상
- 필자는 역사학자로써 수많은 나라의 독립 기록들을 보고 연구한 사람이다. 그것이 고대가 되었던 중세가 되었던 근현대가 되었던 마찬가지다. 특히 구소련의 14개 국가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속해 있는 독립국가연합의 동구권, 몽골 등의 국가들이 어떻게 독립했는지, 체첸이나, 쿠르드, 팔레스타인, 후티 같은 종족들이 왜 독립에 실패했고 혹은 미승인 국가로 남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인도권 국가들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역사학자로써 그 분야의 연구는 현재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나는 그 안에서 독립을 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헌신들이 독립의 근원이 되었음을 알고 민족 자결권에 의한 자유와 독립을 얼마나 열망했으며 그 독립을 자랑스러워함을 잘 알고 있다. 그로 인한 희생과 헌신은 매우 고귀한 것이며 남의 나라 국민들이지만 그 숭고한 기록들을 읽고 내심 그 민족들을 존경한 적도 있다. 그만큼 한 나라에 정복되었다가 독립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안에, 무력투쟁, 비폭력, 다른 강대국과의 외교적인 행위 등등 많은 노력들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그 어떤 독립운동의 행위든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가 한창일 때, 나는 터키 동남부 지역을 답사하고 있었다. 특히 디야르바크르에서는 많은 수의 쿠르드족을 만났다. 이들은 독립하고 싶어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 독립을 희망하는 지역은 다른 중동 국가들과의 이해까지 같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즉, 석유 매장량이 중동에서 2위를 다투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쿠르드족을 독립에 대한 지원을 해주고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해놓고 여태까지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 즉,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현 시리아 정부, 러시아 등과 싸우는데 이용만 하고 이후에는 철저히 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독립을 못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서방은 쿠르드를 독립이라는 명제로 또 다시 이용하려 할 것이다. 나는 사실 쿠르드족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롭다는 느낌이 있다. 독립을 위해 100여 년 넘게 싸워왔는데 결국 3대에 걸쳐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편에 서기도 했고 서방과 미국의 편에 서기도 했으며 온건하게 터키와 시리아에 다가서서 협상하기도 했다. 그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독립은커녕 생존권을 보장도 못 받고 있다. 국제 관계, 국제 정치는 그처럼 냉혹한 것이다. 한국인처럼 선악구도로 침략받고 공격받는자가 불쌍하다며 눈물 흘려주는 나라는 없다. 자기 국가와 국민이 우선이라, 철저히 이해득실에 의한 계산들이 존재할 뿐이다. 지구상에서 힘 없는 나라는 힘 있는 국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연명해야 그나마 콩고물이라도 받아 먹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국제 관계와 정치, 지정학의 본질이다. 문제는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갖는 사람들, 그 소수를 제외하고 만나본 적이 없다. 국제 관계와 정치, 지정학적 판단과 결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게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혹자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외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원폭 두 방으로 미국이나 소련에 의해 우리가 독립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이 역사고 팩트다. 이 독립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숱한 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과정을 지켜본 나는 우리의 독립운동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폭력 3.1운동이나 6.10 만세운동이든, 독립군들의 게릴라식 무장투쟁이든,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 등의 활약은 훗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든, 독립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다. 미국에서는 이승만, 상해임정 등의 외교적 노력과 그 외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확고한 독립의 의지가 쌓이고 쌓여 미국이나 소련 측의 검토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것들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가브릴로 프란치스의 총알 한 방이 세계대전을 불러왔지만 유고슬라비아의 독립과 통합, 티토 정부를 이끌어 낸 것, 그리고 프랑스 망명정부와 폴란드 망명정부의 나치 독일과의 게릴라적 투쟁, 호치민의 외교술과 디엔비엔푸의 승리 등이 각각의 독립을 이끌어 냈듯이 우리도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원폭 두 발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주는 게 가능했을까? 독립을 하고자 하는 다양한 의지들이 쌓여 있었고 이를 검토한 것은 미국이다. 그리고 그 보증은 장개석의 중화민국이 서주기도 했다. 여러 노력들이 있었기에 광복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선 항일투쟁이나 독립운동이라는 것에 있어 이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나마 우리는 그런 의지들이 반영이 되고 훌륭한 분들이 많았기에 대한민국 여권으로 189개국을 무비자로 돌아다니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었지만 수많은 각고의 희생과 노력에도 국제사회에 인정을 못받아 지금도 미승인국, 혹은 독립을 못하고 디아스포라 민족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많은 보수우파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절하에 나서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 또한 독립운동가였고 일본을 지독히 싫어하신 분이었다. 오죽하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과 맞붙는 홈 & 어웨이 방식, 일본 축구단이 한국에 발도 못 붙이게 강력히 반발하셨을까? 독립운동을 평가절하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도 함께 평가절하 되는건데 건국절 주장하시며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추앙하는 자들은 이런 생각도 하면서 평가절하 하는 것일까? 근현대사에 있어 수많은 나라들이 서구열강의 지배에 벗어나기 위해 독립투쟁을 했다. 그 사이에 한국처럼 이데올로기에 빠져 좌편향 독립투쟁으로 빠지는 자들도 있고 민족주의 우편향 독립투쟁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국가 간 내전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경우,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다. 한글과 한문 몇 자 겨우 깨친 홍범도 장군도 마찬가지고 제2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손에 꼽았다. 이들에게 있어 사상이 무엇인인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뭔지 알았겠는가? 독립운동 하신 분들 중, 대학 나온 인물이 몇이나 될까? 그 극소수인 분들은 공산주의 패악을 알았지만 그 외의 분들은 공산주의라는 것 자체가 뭔지나 알았을까? 역사는 그 시대에 무엇이든 눈높이를 맞춰서 봐야한다. 인터넷이라곤 전무한 시절, 우파 분들이 학교 다닐 돈도 없는 가난한 상태, 그리고 조선 민씨 일가 같은 자들에게 수탈만 당하고 있던 상태에서 누군가가 내려와 공산주의가 뭔지 설득한다는 안 넘어갈 자신이 있을까? 절대로 그 부분은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 현재의 기준에서 판단한 결과론일 뿐이다. 최근 페이스북 보면서 답답함이 밀려오는데 몸과 마음, 머릿 속이 고단해진다. 이러면서 또 남의 나라 독립 투쟁사, 독립 과정들을 또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 당시 그 때,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피땀 흘려가며 투쟁하여 역사를 만들었는지, 그 과정들을 보고 나면 아무리 우리가 스스로 독립하지 못했다고 해도 갖은 행위들로 독립하고자 노력했던 그분들을 차마 욕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역사학자로써 그건 비난하기 어려운 숙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파들을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 보는 위치에서 알아서 생각하는게 좋고 일일히 설득도 어렵다. 그래서 현 상황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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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대한 역사학자로써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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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80년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에 대한 의미
- 1980년 일본 국회 중의원과 참의원들이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을 비롯하여 <북방 영토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결의(北方領土問題の解決促進に関する決議)>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에 일본의 모든 도도부현 의회와 시정촌 의회, 전국지사회, 전국시의회의장회, 전국시장회, 전국정촌회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결의가 모아지는 것을 계기로 총무청에서는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을 검토하기로 하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980년 12월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에 대한 간담회가 학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게 된다. 간담회의의 결과에 대해 답신을 받은 일본 내각은 1981년 1월 6일에 열린 내각 회의에서 매년 2월 7일을 북방 영토의 날로 정하는 안을 채택했다. 왜 2월 7일로 설정을 했냐면 가증스럽게도 1855년 2월 7일 에도 막부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사이에 맺은 조약인 러일 화친 조약(露日和親條約)이 체결된 날이 그 날이기 때문이다. 화친(和親)이란, 국어사전적 의미로 볼 때 '서로 의좋게 지내는 정분', 혹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가까이 지냄' 이라도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친조약을 체결한 2월 7일을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로 지정한 것이다. 사실 이 가증스러운 행위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기념한 날인데 일본은 오랫동안 잃어왔던 자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의미로 지정한 것에서 그 의미가 맞지 않다고 보여진다. 친하게 지내자는 것은 평화와 우의를 동반하는 것인데 1981년부터 현재까지 41년 동안 2월 7일을 북방 영토의 날로 지정하고 다양한 축제를 비롯해 행사를 거듭하여 일본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평화와 우의의 상징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다. 참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러시아, 일본 두 나라가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양국은 식민지 개척 정책의 일환으로 사할린을 자국 영토라 주장하기 시작하며 마찰을 빚게 된다. 그러자 두 나라는 1855년 2월 7일 러일 화친 조약(露日和親條約)을 맺어 사할린을 공동으로 관할하는 구역으로 만들게 된다. 이어 1875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가 사할린을, 일본이 쿠릴 열도를 차지함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쿠릴열도가 자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1941년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면서 안심하고 때린 것이 진주만이다. 이와 같이 양국 간에 불가침 조약이 있었지만 1945년, 소련은 얄타 회담의 결과에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공격을 결정한다. 이로써 소일 불가침조약은 결국 파기되었고 만주 기습 작전으로 일본은 만주, 몽골, 조선 등의 식민지를 상실하게 된다. 소련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에도 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양국은 계속 휴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이래, 대일외교가 전면적으로 수정된다. 1956년 흐루시초프는 소일 공동선언을 함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회복시켰고 일본은 소련과도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소련을 비롯한 모든 공산권 국가들을 차단했던 우리와는 심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공동선언 제9항에서 소련은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평화 조약 체결 후 일본에 넘기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에 서명했다는 것에서 후일 북방 영토 분쟁이 갈수록 심화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정치적으로 일본은 소련을 사실상의 주적으로 규정해 소련군의 상륙을 대비해서 홋카이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배치했었지만 문화적, 경제적 교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나, 푸쉬킨, 도스토예프스끼, 막심 고리키 등의 작품들이 냉전 시대 때 일본에서 별다른 검열 없이 성행했었던 것도 문화 교류들이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후, 2000년대에는 일본이 북방영토 회복 문제를 제기했고, 러시아는 도쿄 근해에 폭격기를 근접 비행시키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한다. 이와 같은 북방 영토를 두고 일본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우리 한국의 반일감정을 이용해 일본과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센카쿠 열도, 남중국해 등의 분쟁에 대해서 중국 편을 들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에 일본은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후에도 추가 제재를 단행하거나, 친러시아파 자산을 동결하고 독자 제재까지 검토하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두 나라의 사이는 골이 깊다. 2019년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에는 러시아가 일본의 태도를 보고 이틀 연속 일본 공해 근처까지 가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당시 한국은 반일 불매 운동 시기였는데 일본의 동해와 독도를 두고 벌인 신경전에서 러시아가 일본의 행위에 대해 더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2012년부터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군함들이 쿠릴열도 지역을 방문했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전몰 수병 추모 항해차원으로 쿠릴 열도와 하바로프스크 지역 등을 24일 동안 항해한다고 하는데, 이를 5년 동안 계속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는 실효지배(Effective control over territory) 강화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실효지배는 굉장히 중요한 외교적 용어다. 영유권을 두고 실제로 국가가 직접적인 컨트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 땅이라고 하든, 온갖 잡소리를 해도 조용히 무시해버리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실효지배하고 있는 측에게 항상 우위를 내줄 수밖에 없어 실효지배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뭐라 떠들든 신경쓸 바가 아니다. 쿠릴 열도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뭐라 떠들던 러시아는 신경 쓸 필요없이 일본의 도발에 대비해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고 실효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우리도 더 이상 말 나오지 않기 위해 일본이 뭐라 떠들던 상관없이 독도와 가까운 울릉도나 독도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 깔끔하다. 그런데 2019년 2월 7일 일본 북방 영토의 날 행사가 열렸다. 여기에는 다른 해의 북방 영토의 날 행사와는 다른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키예프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쿠릴열도는 대일본의 영토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우크라이나 방송사가 중계 방송을 했다. 우크라이나는 전략적으로 러시아의 배후인 일본을 움직여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여기에 분쟁이 벌어지면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장악하기 위해 군을 움직이려는 전략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는 2019년부터 이를 염두해두고 일본과 손잡으려 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일본 내에도 우크라이나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데 러시아인 공동체의 일부를 이루는 경우도 있어 현재 일본 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의 주동이 되어 있다. 이들 네트워크들의 목소리는 일본의 넷우익 같은 극우단체와도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네트워크가 일본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이에 일본은 쿠릴 열도를 반환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도 이러한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감사함을 표시하며 화답했다.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적극적인 친일 국가인 것이다. 이런 추세로 일본은 쿠릴 열도 뿐 아니라 독도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의 동의를 구할 것은 뻔한 일이다. 러시아는 로마노프 제국 시절부터 해군성 수로국이 팔라다 함대의 탐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1857년 '조선 동해안 지도'를 발간하여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다. 최근에도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영공을 두 차례 침범하여 우리 정부가 러시아에 항의하자 러시아는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다가 "영공 침범 안했다"고 입장을 바꾸긴 했지만 같은 항의를 했던 일본한테는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이는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외로 독도가 한국 영토로 인식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독도를 다케시마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더 많다는게 해외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격이 되었다. 그런데 2년전까지만 해도 반일 불매운동 하던 한국 사람들은 이런 점에 있어 굉장히 무감각하디. 반일 불매운동에 열성적이었던 한국인들이 독도가 우리 영토라고 인정했던 러시아를 배격하고 친일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물론 침략은 어떠한 행위로도 정당화 할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와 일본 간의 깊숙한 관계, 북방 영토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면 우리 독도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북한 미사일에 우크라이나 엔진이나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것, 등의 여러 문제를 고려해서 최소한 한국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감정적으로만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보여 진다. 러시아와 관계는 푸틴과의 관계를 떠나서 매우 중요하다. 솔직히 러시아와 푸틴이 우리에게 잘못한게 뭐가 있나? 우리 기업들 기 살려주고 투자할 수 있게 해주고 한국 제품 마음껏 사줬지, 독도는 우리 땅 지지해줬지, 러시아 땅 어디든 무비자로 자유 여행할 수 있게 해줬지, 고려인들 위치도 많이 올려줬지, 도대체 러시아가 우리에게 뭘 더 잘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늘 고마움을 편중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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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80년 북방 영토의 날(北方領土の日) 지정에 대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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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도 유태인 이주 플렌이 존재, 일본 제국이 추진한 유태인 이주 계획, 복어 계획(河豚計画)
- 1933년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 및 독일의 점령 지역에서는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른 국가들로 이주하려 했다. 한편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지역에 대한 개척을 위해 대규모의 인구 및 자본 유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 유럽의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의 학정을 피해 대거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 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만주 지역에 유태인들을 이주시킴으로서 만주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자 했다. 유태계 외국인, 특히 유태계 미국인들의 자본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복어 계획(河豚計画)이다. 이에 대한 특이한 점으로 이 계획의 입안자들은 시온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의 내용을 믿으면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유태인 조직의 정보망 및 자금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이들은 유태인들에게 만주국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함으로써 유태계 인사들로부터 확실한 호의와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나 의외로 유태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었다. 우선 일본은 동양 국가의 특성상 유태인과 역사적으로 접촉한 기간이 아주 짧았으며 일본 내에도 유태인 사회가 전무했기 때문에 일본 내 반유태주의가 횡행할 리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이 이미 러일전쟁 당시 유태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했지만 동양 국가인 일본을 얕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당연히 일본 제국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어느 누구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비 고갈로 패배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제국을 구원한 것이 거물 유태인 금융가인 제이콥 쉬프(Jacob Schiff, 1847~1920)였다. 쉬프는 포그롬으로 유태인을 탄압하여 유태인들의 적이었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하고 있던 일본의 국채를 매입했다. 이 때 쉬프는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일본 제국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하며 일본 제국을 찬양했다. 쉬프가 일본 국채를 매입하고 다른 유태인 금융가들에게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도록 주선하여 일본의 전비를 조달해주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조선에서의 경쟁 세력인 러시아를 물리치며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거듭났으며 서구 국가들에게도 일본은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 제국이 열강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른바 유태인 금융자본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이다. 제이콥 쉬프의 도움을 받았던 일본 제국이 유태인 자본의 힘을 높게 평가하고 유태인들의 힘을 빌리려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복어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일본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犬塚惟重, 1890~ 1965) 이 외에도 야스에 노리히로(安江仙弘, 1888~ 1950) 육군 대좌, 히구치 기이치로(樋口季一郎, 1888~1970) 육군 대좌, 닛산(日産) 그룹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의 총수인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1880~1967) 등이다. 이들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 유태인에 대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전부터 만주 및 중국 침략을 주장하던 관동군 내 일부 인사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계획의 명칭인 복어는 생선 복어에서 따온 것으로, 계획 입안자 중 한 명인 이누즈카 제독의 연설에서 이 계획이 상당히 위험하긴 하지만 성공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며 이를 맛은 좋지만 비싸고 맹독을 지닌 복어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복어 계획을 세운 입안자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유태인 인사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유태인 자치구 건설을 위해 유태인 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하지만 복어 계획은 중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1936년 독일과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는 등 독일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점점 돈독해지고 있었고, 유태인에 대한 옹호 정책은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요인 때문에 이를 심각히 고심하게 된 것이다. 1938년 일본 정부는 논의를 벌인 끝에 유태인 대책 요강이라는 합의문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유태인에 대한 배척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전제 하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합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현재 일본 및 만주 지역에 있는 유태인은 타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 ② 일본 및 만주에 입국하는 유태인에 대해서는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출입국 규칙에 따라 조치할 것. ③ 적극적인 유태인들의 이민은 피하면서 기술이나 자본 유치 등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엔 허용할 것. 이와 같은 3개조의 합의문이 발표된 이후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유태인들을 일본 및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또 일본 주 리투아니아 영사인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1900~1986) 등 나치에 맞서 유태인들을 구한 일본인들도 소수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0년 추축국 동맹에 일본이 가입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유럽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후 1942년 일본은 유태인들에 대한 이주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지하고, 유태인 대책 요강을 무효화하게 된다. 독일 측에서는 상하이 등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을 처리 할 것을 일본 측에 건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게토에 유태인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선에서 끝냈다. 일본의 유태인 학살은 없었지만 게토의 거주 및 경제적 환경은 매우 열악해서 병으로 사망하거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유태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복어 계획은 유태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발상으로만 입안된 것은 아니다. 나치에게 유태인들이 박해받는 처지를 이용해 유태인들을 괴뢰국인 만주국의 경영에 이용하여 일본의 국익을 도모하려는 의도에 있었다. 물론 입안자들은 시온 의정서를 믿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경제적인 능력을 과대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 이주하기를 원하는 유태인들은 그들 특유의 금융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유태인들의 이주로 인한 경제적 혜택을 원하던 일본 국내의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계획은 실패로 종결되었다. 물론 이 계획은 당시 나치 독일의 심각한 박해를 받던 유태인들에게 비록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몇 안 되는 구원책 중에 하나였다. 실제로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등의 노력으로 인해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중국 및 미국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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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도 유태인 이주 플렌이 존재, 일본 제국이 추진한 유태인 이주 계획, 복어 계획(河豚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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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물
-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지하철 서울역에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서울역사를 올라갈 때마다 듣는 소리이다. 소음에 가깝다. 서울역사 앞에 확성기를 켜놓고 예수 믿으라고 떠드는 종교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 광경이 신기해서 그 근처를 둘러보았다. 3곳이나 천막을 펼쳐놓고, 천막 안에는 테이블도 갖춰 놓고, 천막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춤추는 신도들도 있었다. 다행히 호객행위는 하지 않았다. 저들은 왜 저럴까? 내 눈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들의 행위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미소가 넘치기조차 한다. 그들 눈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내가 아픈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천막에 써놓은 글씨로 봐서는 예수 전도회, 천리교라는 단체로 보인다. 서울역사를 방문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루는 지인과 함께 서울역사에서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지인이 말한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야? 매번 저러고 있어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렇게 열심히 예수를 찾으니 예수가 사는 천국에 가면 저 사람들은 분명히 큰 상을 받을 것 같아요.”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는 말의 내용은 단순하다. “예수는 다시 이 땅에 오신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라.” “천국의 백성이 되어라.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할렐루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선교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왠지 모르게 사이비종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교의 자유는 인정하겠지만, 확성기의 소음은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관할 경찰서에 문의해 봤지만, 법적 권한이 없기에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반성이 없을 때 사이비가 탄생할 것이다. 자기 편향에 매몰되어 비판적으로 자기반성을 할 수 없기에 맹신이나 맹종의 싹이 움튼다. 사이비종교는 그런 토양에서 자란다. 저들이 믿는 하느님의 자리에 히틀러가 자리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저들은 현대판 나찌즘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에는 아직도 나찌즘들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히틀러가 나찌즘은 만든 것이 아니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나약한 개인들이 나찌즘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모든 것은 나의 덕택이고, 나의 모든 것은 여러분의 덕택입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대중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 상호의존적인 관계였다. 전체주의는 그런 곳에서 탄생한다. 아렌트는 유럽 계급체계의 붕괴에서 나타난 대중적 인간의 고독한 심리적 상황에서 전체주의의 뿌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00여 년 전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탄생한 것은 국민을 국가에 묶어두었던 보이지 않는 끈들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들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뿌리뽑힌 대중들이었다. 잉여존재였다. 그들은 그들의 공허함을 채워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전체주의 운동은 그러한 그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았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사이비종교가 판을 치는 것도 그러한 운동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의 계급 붕괴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오늘날 현대는 계급의 붕괴가 아니라 정체성 혼란의 위기를 맞이하는 것 같다. 끝도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보니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이 갈 곳이 없어진다. 그들이 설 수 있는 땅이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찾아오는 개인의 고독이나, 외로움,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이 맹신과 맹종을 낳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맹신이나 맹종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도 엿볼 수 있다는 현상이다. 사이비와 정통의 기준이 참된 자기반성으로 본다면, 태극기부대는 왠지 모르게 사이비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들의 집회에 성조기도 보이고, 이스라엘 국기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미국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정치적인 분야에서 사이비들이 많다. 민주당의 친문, 비문이나 친명, 비명이라는 구분도 일반 시민이 바라보기에 우습게 보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건국전쟁>을 언급하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가에 의해 객관적인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부 역사가들도 있다. 그들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나 차이점이 무엇일까? 전체주의는 개인을 조직적으로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자기들끼리의 강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강철의 끈으로 서로를 강하게 결속시킨다. 그곳에서는 생각의 자유를 누릴 공간이 없어진다. 그 속에서는 자유가 박탈당한다. 그들만 모를 뿐이다.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뿌리뽑힌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기대어 설 땅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유하는 인간들이다.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적인 한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조건만 형성된다면 전체주의는 다시 탄생할 수 있다. 서울역 광장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선교하는 집단이 바로 전체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온다면 그들을 위하여 서울역 어느 한 곳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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