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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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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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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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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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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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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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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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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 대한민국 축구, 국민인식과 축구인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좋은 성적 기대하기 어렵다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조 편성이 확정됐다. 그런데 죽음의 조를 피했다고 한다. 우선 전망으로 볼 때 한국은 월드컵 티켓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북중미 월드컵에 출전 티켓이 아시아는 8.5장이라 각 A조부터 C조까지 조 2위만 하면 무난히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2장은 A조부터 C조 3위끼리 아시아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승자가 2장 가져가고 마지막 한 장은 북중미 팀들 중에 플레이오프 티켓을 확보한 팀과 자웅을 겨뤄 승자가 가져가는 방식이다. 무난히 조 2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아시아의 축구강호라는 자존심이 문제다. 한국은 매번 "아시아의 호랑이" 라며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것을 항상 자부해왔다. 그러나 64년 동안 아시안 컵 우승 하나 없는 팀이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별호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아시아의 최강은 냉정하게 말해 카타르다. 그 다음이 일본, 이란, 한국 순이다. 그런데 한국이 "아시아의 최강"이라니... 정말로 한국이 잘나갔을 때가 있었다. 그것도 8~90년대는 정말 그러했다. 그러나 그 때도 아시안 컵 우승과 인연은 없었지만 대개 한국을 아시아의 최강 중 한 팀으로 인정했다. 차범근, 이회택, 허정무, 조광래 같은 선수들은 명실상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바톤을 김주성, 황선홍, 홍명보, 하석주, 서정원이 물려받았고 최용수, 김도훈, 이임생, 이을룡, 고종수 등으로 이어지고 박지성, 안정환, 송종국, 김남일, 이영표로 이어졌다. 이 때까지가 한국이 진정한 "아시아의 호랑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다른 중동 팀들이 무섭게 성장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팀들도 과거처럼 더 이상 한국의 승점자판기나 골 자판기 팀들이 아니다. 이들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아시안컵에서 김판곤 감독의 말레이시아,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축구인들이나 한국 국민들은 이들이 여전히 8~90년대 수준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인식 변화 아주 느리게 진척되거나 고정관념처럼 박혀서 변하지 않는다. 축구만 그런게 아니라 국제 정세도 마찬가지다. 대개 한국인들은 중동이 여전히 4~50년대 무기를 쓰며 다 같이 덤벼도 이스라엘에게 패배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러시아를 공산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빨갱이라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30년 전에 이미 붕괴됐는데 여전히 푸틴 1당 독재에 야당도 없고 국민의 자유를 탄압하는 공산 국가로 본다. 나같은 사람이 러시아를 백날 자유롭게 왔다갔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는 한번 공산당이나 빨갱이면 영원한 공산당이자 빨갱이, 심지어 나는 쏘오련 공산당의 선전물로 자유롭게 다니는 쏘련의 특권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게 현재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안 바뀌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옛날 시스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인식의 갈라파고스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도록 정치꾼들과 언론들이 야합해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이들의 노예가 된다. 진실이 어떤지는 관심이 없고 찾아보는 것도 귀찮아 한다. 한국인들은 언론과 정치꾼들을 욕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이들을 오히려 너무 잘 믿는다. 욕하면서도 잘 속아주고, 유튜브 같은데서 선동해대며 진실이 어쩌구 저쩌구하면 검증할 생각 없이 자기 생각과 맞아 떨어지면 박수 쳐주고 훌륭한 분석이라 떠 받들어주며 슈퍼쳇이나 돈을 투자한다. 나처럼 현지를 돌아다니며 전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투자에 매우 인색하지만 한국의 집구석이나 방구석에 앉아서 검증되지도 않은 인터넷 자료 뒤져가며 선동해대는 프로파간다 유튜버에게는 비싼 슈퍼쳇과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특성이다. 내 말이 틀렸는가? 축구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을 다한 셈이 됐지만 축구로 보자면 한국 사람들 대부분 중동 국가 쯤이야, 동남아시아 쯤이야 5-0 이상 이겨줘야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성장했으면 얼마나 했겠어.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같은 선수도 없는데, 그들이 잘해봐야 얼마나 잘해. 우린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했고 저들 중에 누가 그 정도 했지? 이게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들의 노력은 헛짓이고 오일머니로 쌓은 노력이며 동남아시아 선수들은 피지컬이 작고 후진국이라 해봤자 옛날과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월드컵 2차 예선 때 홈에서 태국과 비겼고, 아시아컵에서 말레이시아에 고전하다 3-3으로 비겼으며, U-23 아시아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에게 패배해 파리 올림픽도 나가지 못하게 됐다. 이제는 "동남아시아 쯤이야 5-0 이상 이겨줘야 기본" 이라는 이 따위 후진적 발상은 버려야 한다. 축구인이나 국민들도 동남아시아 축구가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인정 안하는 국민들, 축구인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들과 못 이기면 감독 탓을 한다. 동남아시아 축구 얕보고 방심했다가 졌는데 무슨 변명이 필요하나?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경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그 또한 실력임을 왜 인정 못하지? 중동도 마찬가지.. 중동 축구를 굉장히 얕보고 "침대축구"니 뭐니 하면서 후진적이라 하는데 "침대축구"도 하나의 전술이고 중동 팀 나름대로 강팀을 이기는 전략이다. 근데 그걸 왜 비난하지? 실점한 팀 잘못이지 득점하고 드러눕는 팀을 왜 비난해? 실력있으면 먼저 골을 넣고 "침대축구"를 할 수 없게 만드는게 진정한 강팀이다. 그리고 귀화 선수들도 많아지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피지컬 싸움에도 이제는 뒤지지 않는다. 그것도 전략이고 투자다. 그 자체가 실력이며 이게 실전에서 발휘됐을 때 성공한 것이다. 즉, 중동도 예전과 같이 쉽게 무너지는 그런 팀이 아니다. 우리는 중동의 요르단에 패배해서 아시안 컵 결승에도 가지 못했다. 유효슈팅 0개의 처참한 완패, 옛날 우리한테 밥먹듯 깨지는 그 요르단이 아니다. 그러면 중동 팀들이 성장했고 우리보다 잘했음을 인정해야지, 모두 감독 탓으로만 몰아가더라. 요르단이 우리보다 더 잘한거고 실력이 있었던거다. 왜 인정못하는 것일까? 그런 인식이니 아시안 컵에서 우승을 못하는 것이다. 상대의 성장을 우습게 보고 얕보고 방심하면서 여전히 한국이 "아시아의 호랑이"이며, "아시아 최강"으로 인식하고 떠받들어주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64년 동안 우승 못하는 것도 팩트고, 올림픽 못나가는 것도 팩트이며, 동남아시아에게 고전한 팩트다.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등 호화 스쿼드에 당연히 아시안 컵을 우승할 줄 알았겠지. 상대팀은 한국 호화 스쿼드들을 철저히 분석했고 거기에 맞춤 전략으로 나왔으며 실력으로 부딪쳤고 호화 맴버 있다고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은 아시안 컵에 나올 때마다 고전했다. 2000년대 들어 아시안 컵 본선에서 3-0 이상으로 깔끔하게 이긴 경기가 몇 개가 될까? 토너먼트 들어갔을 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중동 국가 중 이란(3승 1무 3패), 사우디아라비아 (4무 1패), 쿠웨이트 (3승 1무 4패), 카타르 (2승 2패), 시리아 (1패), 요르만 (2무 1패)로 열세 및 동률이고 UAE나 바레인, 이라크 아니었으면 우리는 중동 팀에게 밀리는 것이다. 그리고 중동 팀 상대로 아시안 컵 전적이 15승 8무 13패, 거의 간당간당한다. 이게 실전이고 팩트인데 뭘 그리 쉽게 우승하며 진출한다 자신만만해 할까? 이번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B조, 이라크(8승 12무 2패 58위), 요르단(3승 3무 1패, 70위), 오만(4승 1패, 76위), 팔레스타인(상대전적 없음, 95위), 쿠웨이트(12승 4무 8패, 137위)와 한 조로 모두 상대가 중동 팀이다. 모두 상대전적에서 우위에 있지만 그래도 방심하거나, 옛날 생각하면 또 몰릴 수 있다. 그 중에 요르단은 최근에 우리에게 승리한 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 편성이 무난하다 하고 있다. 우리가 최근 들어 중동 팀을 시원하게 이긴게 몇이나 있다고 무난하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 어딘지 참 불안해 보인다. 게다가 우린 국가대표 감독이 없다. 최종 예선이 3개월도 채 안 남았는데 이제는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이 사의를 표했다. 아시안 컵 이후, 클린스만 감독을 해임했고 월드컵을 대비해 새로운 빌드업을 쌓고 구상해야 하는데 도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클린스만은 갔고 언론 보도대로 귀네슈 감독에게 맡기고 밀고 갔으면 이러한 없을 것 아닌가. 이래서 클린스만 감독을 함부로 해임하면 안 되는거다. 우리 한국 대표팀은 귀네슈 외에는 답이 없다. 귀네슈 감독 선임해서 빨리 대표팀 정비하고 최종 예선에 임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우리가 무난하다? 무난하긴 뭐가 무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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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 러시아와 중국, 표리부동의 상호관계 속에 실익 추구
    러시아와 중국은 과연 상호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는 겉보기와 달리 현안별로, 상황에 따라 의외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게 된 것은 헤이룽(러시아명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타라바로프(중국명 인룽) 섬, 볼쇼이우수리스키(중국명 헤이샤즈) 섬, 밍위에 섬이라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푸위안 삼각주(혹은 이 삼각주 전체를 헤이샤즈 삼각주라고 부른다)를 둘러싼 국경분쟁이 서로 타결된 이후일 것이다.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일어난 양쪽 국경분쟁은 2005년 6월 2일에 비로소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때 타결된 내용은 타라바로프 섬을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하고, 볼쇼이우수리스키 삼각주를 동·서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에 반환된 삼각주의 면적은 총 약 327제곱 킬로미터 중 약 174제곱 킬로미터로 사실상 중국영토의 가장 동쪽 끝이 되는 셈이다. 이에 러시아와 중국은 약 4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을 육상 국경선과 해상 경계선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3개의 섬이라고 하지만, 작은 섬들도 그 삼각주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어서 엄밀하게 국경선을 획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 타결로 인해 영토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은 영토분쟁에 관한 한 서로 별다른 문제가 없고, 현재 이 지역은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은 영토 문제에 매우 민감한데,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할당받는 영토를 일부 돌려줌으로써, 이를 통해 대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경제적-외교적 관계에서 거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중국은 정치적 관계에 의한 국익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든 러시아든 전부 반환이냐 전부 보전이냐의 문제로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협상은 결코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협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 각각의 내부 사정과 국제질서의 급변이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두 국가는 미국에 맞서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계산법은 현안별로 다르다. 미국에 맞선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보를 보인다. 서로 정상회담도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문화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협력 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CSO)와 구소련연방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지속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러시아는 최근 이른바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서쪽 세네갈에서부터 동쪽의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육상 실크로드인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식 자유 경제 지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침체와 미국의 대중국 제재 그리고 일대일로에 일부 참여국들이 빚더미로 몰리는 상황은 우려를 낳는다. 더욱이 중국은 최근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공사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의 터무니 없는 후려치기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중국에 관해 유럽보다 할인가격으로 천연가스를 팔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가격 차별화를 통해 자원을 한편으로 무기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미래 성장시장으로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의 원래 계획은 천연가스의 유럽 시장이 축소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시장을 돌려서 안정된 수출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려고 했고, 이른바 ‘시베리아의 힘-2’는 몽골을 걸쳐 중국의 동북아 지역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힘-1’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터무니없는 가격 인하 요구로 진전이 없고, 몽골에서도 별로 진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은 중국이 향후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게 되면, 천연가스의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굳이 현재 시점에서 천연가스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러시아가 공급하겠다면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라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로는 그런 가격이면 그동안에 싼 가격으로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해 왔는데, 천연가스의 가격을 훨씬 더 낮추라고 하니, 그러면 러시아도 안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소극적 태도가 불만이었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아무리 관계가 친밀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같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도 한쪽은 영향력 유지를, 다른 한쪽은 영향력 확대를 희망한다. 또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참여들 독려하면서 국가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때 중국은 경제적 투자를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이른바 과거 서방의 식민지, 특히 옛 프랑스 식민국가를 중심으로 바그너그룹을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적-경제적 측면이 강한데, 과거에 서방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던 아프리카는 이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는 서구 식민지에 해방되었고, 서방의 지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정정(政情) 불안과 정변, 종족 분쟁과 영토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국민은 그동안 서구화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잦은 분쟁과 전쟁의 씨앗으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틈을 군벌들이 활개를 치고 들어가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는 반서방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방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핵심은 경제적 지원이고, 각종 치안 불안과 정권 안정을 위해 이제는 서방보다 오히려 러시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근 행보를 보면 중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북한과 베트남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다소 소원하고, 베트남과는 이른바 사사(파라셀)군도와 난사(스프레틀리)군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는 이 두 국가에 관해 후원국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는 외교술로 유연하면서도 균형 외교를 중시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많이 챙겼다.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마도 유라시아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을 하나로 묶으면서 미국- 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러시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베트남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러시아가 개입을 내심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영향력을 희석화시키는데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구도는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행보로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러시아와 스페인이 맺은 세기의 로맨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다. 한 예로 1582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 군이 시비르 칸국을 정복했고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다. 수많은 모피들을 보고 감탄한 이반 4세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약탈죄를 비롯해 코사크 군 전원를 사면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 인 관리들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으니 그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 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러시아 동란 시대라는 최악의 내전을 맞이할 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그 외의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선물로 보냈고, 1635년 오스만투르크에는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사용할 용도의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의 과도한 모피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진출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 1764~1807)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레자노프는 러시아 차르인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 되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 1746~1819)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 하였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러시아에서 유입한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지자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다.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호세 다리오 아르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 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무역을 제안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세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레자노프는 고민을 하다가 호세 장관이 주선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호세 장관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호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호세는 크게 놀랐다. 당시 스페인 인들이 그렇듯이 호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 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카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키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은 호세는 딸에게 굴복하게 된다. 6주일 후,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딸을 아끼던 호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기다리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대륙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사업을 벌이느라 피로해진 레자노프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지금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남아 있는 레자노프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것 같다. 2개 대륙과 대륙,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세기를 초월한 로맨스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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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29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번외편, 아제르바이잔 대학살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 학살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제1, 2차 발칸 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포마크(Pomaks)인 및 발칸 투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포마크(Pomaks)인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계 무슬림의 후손들로 오스만 제국이 발칸과 불가리아를 떠나면서 불가리아인들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민족이다. 결국 오스만 정부, 청년 투르크당이 동방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이주를 승인함으로써 시리아와 동남부 지역 이주되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이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앞에 上, 中, 下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살에 대한 조사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의 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로 인해 터키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같은 투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에게 옮겨갔다.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 정책이 벌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났다. 따라서 투르크를 견제하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인구를 의도적으로 줄였고 그러한 와중에 대략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나라가 멸망하고 디아스포라 형태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 갑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들어오고 자신들은 러시아 내부로 들어가거나 이란 서부 지역, 터키 동부 지역 등으로 강제 추방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 형제 민족이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투르크계를 극도로 혐오했던 페르시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 인해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26~1828)이 일어난다. 약 2년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참패하고 러시아와 투르크만차이(Treaty of Turkmenchay)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이란은 러시아에 광대한 카프카스의 영토를 할양하고, 약 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때부터 카프카스 지역이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을 경작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이주시킨 것이고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마찰을 빚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이란 서부 지역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러시아의 이주 정책에 쫓겨 들어온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을 줄여 아제리인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주시킨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지렛대로 삼아 이란 서부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이 아제리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이란 국적을 얻었지만 당시의 이란으로 이주한 아제리인들은 상당수가 러시아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878년 러시아-오스만 12차 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을 식민지 삼아버렸다.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카르스가 당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 40년 넘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이 지역으로 아제리인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거주하니 이 지역의 터키인들은 형제인 아제리인들을 환영할 지 몰라도 이미 터키 동부 지역에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칸 지방을 상실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자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때 터키 동부 지역은 신분계층이 4단계로 나뉘었는데 가장 위에는 러시아 지배층, 두번째 계층이 바로 아르메니아인이다. 세번째 계층이 아제리인이고 마지막 최하계층이 터키인이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지배층들의 비호를 받으며 투르크계 민족의 재물을 강탈하고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았다. 터키 동부 지역의 40년 러시아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들을 괴롭히기보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을 괴롭히는데 있어 방관했고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방치는 후일 생겨난 큰 비극적인 사건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르스의 러시아 총독부의 딩시 문서들을 보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행위들은 패악질에 가까웠고 투르크계 민족들에게 있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개중에도 아르메니아인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 서로 간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마치 일제 시대 때,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일반 서민들도 있었던 것처럼 제 아무리 식민지배라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이후 이런 인연들은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터키 일반 서민들 중 몰래 숨겨주면서 참화를 면하게 하는 등의 일들도 생기곤 했었다. 1917~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카프카스 지방의 러시아 군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동부 땅을 오스만 정부에 돌려주며 철수함에 따라 터키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끔찍한 학살은 아직 오스만 정부가 터키 동부 일대를 접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안보 공백을 틈타 벌어진 비극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학살을 선동한 자는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1918)이라는 자였다. 샤후먄은 공산화된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고 코민테른에도 참가해 레닌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반동뷴자들을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아제르바이잔 땅의 바쿠를 포함, 나고르노 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 예레반, 아르다한, 카르스, 반 일대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학살했다. 특히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150개, 장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최소 3만이라는 희생자로 보고 되었을 뿐이지 크게는 1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며, 130,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학살을 주도했던 샤후먄은 1918년에 반볼셰비키파에게 잡혀 공개 총살로 사망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의 비극은 종식되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이 주장하는 구바 학살의 경우, 수만 정도에 이르며 바쿠에서는 3,000명에서 1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예레반에서의 13만 정도의 대량학살은 영문 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즉, 아제르바이잔의 선전이거나 과장, 혹은 오보일 수 있다는 것인데 예레반 현지에서의 보도에 의한 것이기에 아제르바이잔 측의 프로파간다나 오보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후 이러한 사건에 분개한 오스만 제국군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1918년 9월 누리 킬리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는 바쿠 전투에서 바쿠를 함락시킨 뒤 1~3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아제리인에 대한 3월 학살의 보복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호 학살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래 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학살을 지시한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의 동상을 수도 예레반에 세우고 국가 영웅의 칭호까지 내렸다. 이후 아르차흐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아르차흐 지역 곳곳애 샤후먄 동상을 세웠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회복한 아르차흐의 영토에서는 샤후먄 동상이 철거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학살자를 영웅시하는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피해자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뻔뻔한 이중 인식이라 규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게 됐고 아르메니아는 이같은 학살에 철저히 침묵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고 서로의 학살만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이라 부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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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9
  • 슬라브 문자 체계의 시작, 키릴문자 이야기
    슬라브 문자 체계의 시작은 고대 불가리아어 문자에게서 시작된다. 비록 불가리아의 통치자들이 독립적 교회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여전히 고위 성직자는 그리스 인이었고 신학 책들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며 이는 대중들을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당시에 900년과 950년 사이 비잔틴 제국의 사제들이 키예프 공국의 선교를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이후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이 사제들과 수도사들을 키예프 공국에 파견한다. 비잔틴 제국은 블라디미르 등이 개종의 뜻을 밝히는 즉시 바실리우스 2세의 딸과 결혼을 요청했고 결국 바실리우스 2세의 딸과 결혼하여 두 나라는 사돈의 국가가 된다. 이에 주변 국가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숭배하게 하기 위하여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여러 사절들을 보냈으나 대부분 추방했다. 키예프 공국은 슬라브 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불가리아에 사절을 파견했다. 이는 당시 문맹인 슬라브 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학자들과 사제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불가리아 왕이었던 사무엘은 이들을 환영하였다. 키예프 성직자들은 불가리아 남서부의 오흐리드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991년과 995년 사이에 3,50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키예프 성직자들의 일부는 키예프로 돌아와 문예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는 후에 노브고로드로 옮겨졌다. 998년 민스크 공의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은 글라골 문자와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교회와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였고 이후 비잔틴 제국의 수도사들을 추방하였다. 11세기 초반 키릴 문자가 키예프의 문예 학교에서 고안되었다. 서양 언어에서 라틴계 알파벳에 익숙한 유럽에서는 N자를 거꾸로 써놓은 듯한 글자나 그리스 대문자의 델타(Δ)나 파이(Π)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사용하는 러시아 문자를 처음 보면 당혹스럽게 되어 있다. 그 이색적인 러시아어 자모는 9세기 말에 만들어진 키릴 자모를 개량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글자꼴을 갖춘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이다. 이러한 키예프 공국에 키릴 문자가 들어온 것은 기독교의 전래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 전례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서 키릴 문자가 함께 들어온 것이다. 키릴로스는 형인 메토디우스와 함께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 사업에 나서 슬라브족을 기독교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 스베티나움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글라골 문자인데 키릴 문자의 원조격이 되는 문자다. 글라골 문자는 가장 오래된 슬라브 알파벳으로 고대 슬라브어 '글라골(Глаголиц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Глаголица의 고대 슬라브어의 뜻은 "발음 글자, 말하는 글자"라고 한다. 실제 현 키릴 문자를 만든 사람은 키릴로스의 제자인 나움과 클레멘트가 글라골 문자를 변형시켜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 즉, 키릴로스가 869년 2월 14일에 사망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키릴 문자는 적어도 870년 이후 생성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키릴로스는 869년 2월 14일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래서 키릴로스의 성인 축일은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는 2월 14일이 공식 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마치 러시아에서 12월 6일인 성 니콜라스 축일이 휴일인 것과 같은 의미이다. 키예프 공국의 키릴 문자는 불가리아에서 가져 온 것으로 다수의 슬라브 인들에 문맹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적극 도입하였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걸쳐 슬라브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은 사제들 가운데에 그리스인 키릴로스가 있었다. 키릴로스는 860년대에 형 메토디우스와 함께 지금의 체코인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다. 그 때 선교의 필요에 의해 슬라브어 발음을 토대로 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글라골 문자이고 그 문자체계에 상응하여 형성된 언어체계가 고대 교회 슬라브어다. 그는 그리고 정교의 성서와 전례를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로 번역했다. 이어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9세기 말에 불가리아에서 글라골 문자를 발전시켜 키릴 문자를 고안해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익히고 쓰기 쉽도록 비교적 단순한 그리스 알파벳 대문자를 많이 활용했다. 사제 키릴로스의 슬라브 명칭인 '키릴' 을 차용하여 ‘키릴 문자’ 로 이름 지어진 이 문자는 점차 슬라브 권의 동부에 퍼지면서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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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인 일부 한국인들
    새벽 단상으로 불편한 비판을 할까 한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으로 따지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은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익숙하던 것들만 하려고 한다. 공연히 모험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했던 것, 익숙한 것만 할려고 하니 거기에서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도 다른 것을 찾을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러니 각종 근거와 지표를 갖다 줘도 무시하거나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중, 친미에만 무게를 두고 앵무새처럼 주장하며 그들이 마치 우리의 모든 면을 풍성하게 해줄 것처럼 믿는다. 나라가 잘 살고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데 그걸 그렇게 싫다고 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한국에서 처음 봤다. 오히려 실익적인 부분을 배격하고 이익을 얻고 있는 나라를 밀어내고 그들을 욕하기까지 한다. 다른 나라들은 하나라도 얻을려고 난리를 치는데 한국 사람들은 뭘 얻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정말 특이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중근세 역사에서 한국은 실리외교 및 국가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실익을 챙기는 역사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벽란도에 공관을 두고 동북아시아로 들어오는 물목들을 중국 송나라 및 금나라, 원나라와 일본 등으로 가볍게 중개해주고 그로 인한 실익까지 계산했었다. 나는 한국사에 있어 진정한 "동북아시아의 팍스 코리아나"를 실현한 나라를 고려로 본다. 북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거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방의 패권을 쥐다시피 했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발해를 무너뜨리고 북방의 패자를 자처했던 거란 요나라는 서서히 북방에서 힘을 잃어갔다. 승자인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물목을 벌어들였고 여진과 일본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 멀리 중동의 상인들도 고려까지와서 진정한 해상 실크로드를 실현하여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1010년부터 여진이 세력을 확장한 111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동안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우리가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 및 세력을 잃게 된 때는 조선 시대 부터다. 이성계가 위화도 반란에 이은 불법 쿠데타로 고려를 뒤엎고 중국 명나라에 사대하는 동안 우리는 고려가 갖고 있던 해상 패권을 고스란히 명나라에게 넘겼다. 이 때부터 조선은 국가 간의 국제 정치에서의 실리 및 이해득실을 따지는 부분에서 멀어졌던 것이고 상공업을 천시하면서 오로지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를 대의(大義)로 여겼다.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과 상공업자들을 개차반으로 생각하니 국가의 근간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어도 이와 같은 행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은 변화했고 서양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식민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동북아시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런 가운데 가장 빨리 그와 같은 변화를 감지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비록 미국에 의해 1853년에 강제 개항을 했지만 이를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양의 문물을 흡수해 빠르게 낙후된 것을 개선해 나갔다. 상공업의 발달이 부국강병을 갖고 온다는 이치를 일본이 먼저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변했는데도 조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상공업을 천시했기에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도 천한 장사치가 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배격했고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천하게 여겼다. 조선은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공자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심한 체제였던 것이다. 그 결과 먼저 깨달아 열강의 위치에 올라선 일본의 목표가 되었고 결국 우리는 일제 치하에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모험심은 줄어들고 실패하면 남탓만 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익이 밥먹여 주냐는 한심한 자들도 보았다. 상공업을 천시하며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이 천한 장사치가 한다 생각했던 조선과 작금 대한민국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공,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고도의 국제정치적 계산으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실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 얘기는 여전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 오로지 감정에만 취해서 기분 좋으면 우방이고 기분 나쁘면 적국이라 욕 쳐대고 있는 꼴들을 보면 딱 그러하다. 한국 사람들은 개개인적으로 실익을 따지고 이해득실 따지는 것을 월등히 좋아하지만 국익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국익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익이라는 것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고 국가가 힘을 갖는 것이다. 국가가 힘을 가지면 개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 힘이 없으면 개인의 이익을 남에게 털리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이익은 곧 국민 개인의 이익을 서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해준다. 우리 기업이 러시아에게 외화를 많이 벌고 있고 러시아 또한 자국의 이익되니까 한국의 투자를 받아들이는건데 이번 전쟁이 아니면 어디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나라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대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물어보면 생각없이 우크라이나에 투자하면 되지라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다. 어떠한 실익과 이유 때문에 투자하냐 물어보면 거의 99.99%가 강대국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불쌍하니까라고 대답한다. 러시아는 우리와 비행기 타면 2시간 거리고,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투자관계 설립 및 국제 관계상으로 가까이 지내는게 쉽지 않다고 얘기해도 귀를 막고 고집을 부린다. 왜 이런 근성이 나오는지 참 이해불가에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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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주재의 우리 기업과 주재원 이야기
    바이든 대통령이 서방의 우방국들과 함께 고강도의 러시아 무역 제재를 승인한 터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개로 파악됐다. 러시아에 설립된 해외 계열사 중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으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삼성과 롯데가 각 9곳이었다. SK와 CJ, 두산, KT&G 등은 각각 2개 법인을 러시아에 세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우리 기업 13개에 주재원 43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법인 기업 53개라면 우크라이나는 13개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법인보다 41곳 많은 숫자다. 단순 계열사 진출 현황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보다 러시아 시장을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그룹이 18곳 (34%)으로 최다였다. 러시아에 배치한 해외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현대자동차 그룹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놓고 있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해외 법인의 경우 향후 미국과 동맹국, 유럽 등이 러시아를 대상으로 고강도 금융 및 경제제재 등이 본격 진행되면 공장가동 중단 등 직접적 경제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져 국내 기업들도 산업분야 곳곳에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할 것은 불문가지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4월 11일 오후 5시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진행하는 방안을 우크라이나 측에 제안했다 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제안을 받은게 아니라 제안을 했다는 것이 팩트다. 기업, 유학생, 각 코트라 주재원들, 교민들, 일반 비즈니스맨들과 각 학계의 연구자들, 그리고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들까지 한러 수교 30년 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일본처럼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야뽄스끼 모레 (일본해)와 다케시마라고 표기까지 해놓은 친일국가에 북한 ICBM 미사일 엔진 기술까지 전수하여 우리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장에게 화상 연설을 시키겠다니, 진짜 미쳤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비우호국가로 찍혀 러시아의 강력 제재를 받으며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러시아로부터 제대로 된 차단을 당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교민 수가 400명이 안되지만 러시아에는 3,500명의 교민들이 산다. 숫자에서 우선 비교가 안 되고 기사 말미에 12,000명 가까이 되는 고려인 동포 중 1000여 명이 고향을 떠나 주변국으로 피신 중이라 써놨는데 러시아는 15만 명이 산다. 숫자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뭐냐? 우리의 한, 미, 일 공조가 영원할꺼라고 생각하는 감성적인 사고는 버리는게 좋다. 국제적인 이득에 따라서 언제든지 합종연횡(合從連衡)이 가능한게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 관계는 한, 미, 일도 다르지 않다. 외통위는 이런 문제보다 동북아시아 문제나 좀 신경써야 한다. 감정적으로 안타까워 하는거와 실전에서의 국제 관계 문제는 전혀 다른 얘기다. 아직 조율 중이라니까 하는 얘긴데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고 러시아는 동해 바다 건너 비행기로 2시간 거리다. 이번에는 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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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7
  • 개념의 미라
    어제의 일이다. 오전에 주판치치가 쓴 <정오의 그림자>를 읽고 있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에 시간이 되나? XX과 너 집 근처에서 한 게임 할 텐데, 함께 보자!” 안타깝게도 어제는 손자 유치원 하원 시키는 날이어서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은 손자 하원시키는 날이야! 5시 이후에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친구와의 통화는 끝나고 독서를 계속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오의 그림자>는 니체와 라캉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궁금증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니체와 라캉을 조금씩은 알고 있지만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선택한 책이 나를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다만 말레비치와 니체의 공통점을 언급한 부분은 이해가 되었다. 살아있는 대상을 재생하기 위해 우리는 켄버스 위에 죽은 이미지를 재생한다는 말레비치의 말과 니체가 언급한 ‘개념의 미라’라고 한 부분은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 ‘개념의 미라’라는 말은 쉽게 풀어보면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는 상호 의사 소통을 위해서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지만, 그 개념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대상의 한 부분을 하나의 개념이라는 틀에 옭아매는 꼴이니 결국 개념이 미라가 된다는 의미이다. 무한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실의 세계를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어가 갖는 한계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이성의 언어로 포착하는 진리란 삶의 보조 수단으로 행해지는 체계화일 뿐, 자연의 변화를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즉 이성중심주의적 세계 인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자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몸의 언어로 자연을 읽어라고 요청하고 있다. 나는 아직 몸의 언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모두 소중히 생각해야 하며,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적인 힘의 상승을 느끼라는 정도로만 이해할 뿐이다. 삶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이 곧 개념의 미라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낸 후에 오후에는 손자를 유아원에서 조금 일찍 하원을 시켰다. 4시 50분쯤 친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즉시 친구들이 술판을 벌여놓은 장소로 달려갔다. 대화의 주제는 당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최근에 벌어진 당구대회에서 16세 소년이 결승에 올라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 중 한 명인 선수와 결승전을 벌였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회의 변화이다. 16세이면 고등학교 다닐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 사회의 가능성과 새로운 도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결승전에서 패한 후 흘렸던 눈물은 순간적으로 밀어닥친 허무 뒤에 오는 삶에 대한 긍정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친구들에게 전했다. 낮술을 한잔한 후에 우리는 다시 당구장으로 갔다. 친구들의 모임은 항상 동일하다. 일등 3만원, 2등 2만원, 3등 1만원! 내기 당구게임이었다. 나는 친구들 중에 당구를 잘 치는 편이다. 친구 중 한 명은 최근에 실력이 급증하여 나와 실력이 비슷하다. 나는 그 친구가 나의 적이자 나의 진정한 벗으로 생각한다. 그의 실력 향상이 자극이 되어 나의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원하는 진정한 벗의 관계이다. 다른 친구는 지금 열심히 당구를 배우고 있다. 경기 결과는 최하수가 1등을 하였고, 나는 2등을 하였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또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했다. 술좌석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걱정부터 노년의 삶의 즐거움, 그리고 생각의 유연성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생각의 유연성에 대한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의 유연성은 개념의 미라와도 일맥상통한 이야기였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 친구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친구는 그를 아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그런 친구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이런 경향이 있다”라는 이야기와 “그는 그렇다”라는 이야기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나는 MBTI라는 심리검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격은 항상 변한다는 프롬의 생각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격에 특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성격을 가졌다”라는 단정적인 검사 결과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MBTI검사가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오남용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검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상식에 가깝다. 즉, 심리검사의 결과는 하나의 경향일 뿐,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틀로 작용하여 자신을 옭아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 부쩍 근대성 비판의 문을 연 니체를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날에도 니체를 읽어야 할 이유를 그의 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20년 전에도 한국 철학회에서 논의되었다고 알고 있다. 논의가 되면 무엇하나? 사회는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니체는 자신의 온몸과 삶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니체를 전공한 한국의 철학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개념의 미라’라는 개념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 뒤에 오히려 개인의 독단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니체의 경고일 것이다. 우리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비판했던 시장의 파리떼나 무리 군중을 넘어서는 위버멘쉬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위버멘쉬는 자기 극복과 삶의 긍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개념의 미라는 새로운 창조를 방해할 뿐이다. 삶을 긍정하는 명랑성은 사고의 유연성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6
  • 현 러시아의 최동단 섬 사할린의 중요성
    사할린은 현재 지하 자원 창고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이나 러시아도 크게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던 곳이다. 워낙 기후가 험한데다가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본에서는 이 땅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개발하지 않았었다. 사실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도 사실상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사할린에서는 불필요했고, 지금처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때도 아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사할린까지의 물자의 보급에도 어려움이 컸다. 실제로 일본이 남부 사할린을 얻어낸 것에 대해서도 쓸모없는 땅을 얻었다는 부정적인 여론도 다수 존재했을 정도였다. 물론 영토가 넓을수록 좋았기에 북부 사할린 전체까지 차지하려고 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할린보다는 훨씬 더 이점이 많은 연해주나 만주 지역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나 나홋카 같은 도시들과는 달리 현재도 사할린은 코르사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등 섬 내 주요 도시들이 종전 당시의 인구나 인프라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사할린은 석유와 가스가 공업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석유와 가스 덕택에 실업률이 2%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는 계속 활황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할린스트임-2 송유관 사업 지분 구성은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 50%, 영국 석유기업 셸 27.5%, 일본 미쯔이 물산 12.5%, 미츠비시 상사 1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는 2009년 LNG 출하가 시작됐으며 연간 LNG 생산능력은 약 1천만t 정도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풍부한 가스와 석유생산량을 갖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서방과 함께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던 일본은 역으로 러시아에게 맞제재를 당해 곤혹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현 상황에서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일본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취한 일방적 대러 제재의 명백히 비우호적인 성격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일본과는 더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와 더불어 러시아 남쿠릴열도와 일본 사이의 무비자 방문에 관한 1991년 협정과 남쿠릴열도 거주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간소화에 관한 1999년 협정에 근거한 일본인들의 무비자 왕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본이 그동안 구축해온 자원 외교도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은 가스와 석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물가가 전체적으로 폭등하고 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3월 31일에 러시아 극동 사할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로 위기를 타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과거 석유 위기를 교훈 삼아 에너지의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원 다원화를 추진했으며 그중 하나가 러시아 자원 개발이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은 LNG 수입의 약 8.8%, 원유 수입의 약 3.6%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사할린스트림-2 사업에서 생산되는 LNG의 약 60%는 일본의 전력회사나 가스 회사용도로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문제도 한국 또한 비우호국가로 찍힌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한국은 현재 사할린스트림-2에서 생산된 LNG를 연 150만t(약 20억㎥)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는 사할린스트림-2 LNG 공장의 생산 능력을 증대하는 한편 또 다른 가스전 사할린스트림-1에도 LNG 공장을 세워 수출을 늘리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는 한국이 사할린 LNG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LNG를 추가로 구매해주길 희망하고 있었다. 한국은 러시아-중국-몽골 등과의 경제협력을 전담할 북방경제협력위원회까지 신설하고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한국은 북핵 위기 악화로 인해 러시아산 PNG 수입을 위한 북한 경유 가스관 건설 사업이 난관에 놓인 상황에서 러시아 측의 LNG 사업 제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할린 LNG 수입량 확대도 LNG 공장 증설 및 신규 건설 등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향후 5~6년 뒤에나 실제로 수입량을 늘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프로젝트가 무르익어 갈 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전체 가스와 석유의 5% 정도지만 중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러시아 사할린스트림-2에서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중동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러시아 사할린산 가스와 석유는 매우저렴한 가격에 사올 수 있는데다 인건비와 운송비까지 중동보다 모두 저렴했다. 그래서 러시아 가스와 석유의 수입을 점차 늘려가고 있는 중에 이번 전쟁으로 인해 서방 세력과 함께 대러제재에 동참함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가"로 찍히게 된다. 러시아로부터 가스와 석유 운송이 쉽지 않게 된데다가 이번엔 러시아 정부의 조치로 가스와 석유를 루블화로 지급해야 한다. 이런 사태들로 인해 물가는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고 유가와 가스 값 또한 연일 고공행진 중에 있다. 러시아와 같이 자원이 풍부하고 영토가 넓어 식량 생산도 높은 국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한국 같이 자원도 없고 원자재를 들여와 제작해 수출하는 형태의 국가는 물가 지옥과 더불어 식량 위기까지 헬게이트가 봉인 해제된 셈이다. 앞으로 이 부분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높은 상황인데 국내에는 아직도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태평가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말 그대로 한국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다 돌아가는 전기톱날 앞에 서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 국회는 젤렌스키에게 연설시키는 것을 조율하는 뻘짓을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가 6.25 전쟁 당시 한국을 도와줬다는 잘못된 역사관을 믿으며 우크라이나에 성금 및 모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금만 눈을 떠보면 뭐가 위기인지가 보이는데 아직도 인지를 못하고 헛짓거리 하는 것 보면 놀랍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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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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