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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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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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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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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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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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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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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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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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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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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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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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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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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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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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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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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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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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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정보의 시대: 우리가 알아야 할 퍼블리시티의 법칙
- 정보 홍수 속에서 진실을 찾는 일은 어렵다. "퍼블리시티의 법칙"은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고 때로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현상을 말한다. 가짜뉴스의 확산 동기는 다양하며, 대응 방안으로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정보 출처의 명확한 표시, 팩트체킹 기구와의 협력, 기술적 해결책 도입, 법적 조치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강화하고 거짓 정보의 유포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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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Бандера, 1909~1959)와 우크라이나의 극단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
- 여러 기사들을 보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측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네오나치에게 점령된 것 보일수도 있다. 젤렌스키가 스스로 유태인임을 밝히면서 본인이 나치가 아님을 밝혔지만 본인은 나치가 아니일지 몰라도 본인 주변의 인물은 나치를 추앙하고 표방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아직도 나치에 부역했던 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Бандера, 1909~1959)를 추종하는 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인데 2021년 우크라이나 지방의회 건물에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와 함께 스테판 반데라의 초상화가 걸려 사회적인 문제가 된 바 있다. 그리고 반데라는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우크라이나인들과 더불어 소련과 맞서 싸운 인물이었기에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지금 현재 러시아와 충돌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영웅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테르 선정 위대한 우크라이나인 중 한 명으로 뽑혔고 그는 나치에 협력하여 소련, 현재 러시아애 저항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반데라와 더불어 반소, 반러주의 상징인 사람이 야로슬라브 스테츠코(Ярослав Стецько, 1912~1986) 전 우크라이나 국민 내각정부(Українське Державне Правління)의 수반이다. 스테판 반데라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 조직(OUN-BО)등의 민족주의 단체들은 나치 독일이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 생각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폴란드인, 유대인 등을 학살했다. 그리고 점차 이들이 독립적인 성향을 내세워 나치 독일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되자 나치 독일은 이들 국민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동프로이센 대관구지휘자 에리히 코흐(Erich Koch, 1896~1986)의 주제 하에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Ukraine)에 합병시켰다. 에리히 코흐는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하여 게슈타포를 동원해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특히 독일인이 우크라이나에서의 지배 종족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정책들이 그들의 안정이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쟁 기반이 되어야하는 곳임을 적극 강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육시설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여기에 따르지 않는 현지인이나 유태인들을 학살할 홀로코스트를 키예프 인근에 설치했다. 이후 소련의 대반격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가 소련에게 장악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 때까지는 소련의 통제에 이들 나치 세력들은 거의 숙청되거나 숨죽이며 살았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이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는 독립 영웅으로 부상했다. 2010년에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이 반데라에게 사후 영웅훈장을 수여하면서 적극 나치 활동을 한 반데라를 위대한 인물로 인정했다. 그리고 소규모 극우 단체 및 민족주의 단체 트리주브, 스킨 헤머, 우크라이나의 애국, UNA-UNSO 같은 단체들과 연합하거나 모여서 2013년 11월, 드미트리 야로시(Дмитрий Ярош)를 수장으로 하는 프라비 섹토르(Правий сектор)가 결성되었다. 이 프라비 섹토르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무력저항을 주도한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시위를 네오 나치 파시스트들의 준동으로 주장하게 되는 빌미를 만들어 준다. 프라비 섹토르를 이끄는 인물들 중 한 명이었던 알렉산드르 무지치코(Александр Музычкo)는 국내에서의 난동 및 사법기관 요인들에 대한 저항혐의로 공개수배를 받아왔다. 러시아에서도 지난 12일 무지치코가 1990년대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 군인 20명을 고문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었다. 그러나 무지치코는 서북부 도시 로브노 인근에서 경찰의 체포작전에 저항하다가 다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사살되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 제1차관 블라디미르 예브도키모프(Владимир Евдокимов)는 무지치코가 동료들과 함께 로브노 인근 카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관과 대테러부대 요원 등을 출동시켜 제압했다. 리아노보스찌(Риа новостей) 통신에 의하면 당시 경찰 작전의 목표가 무지치코의 체포가 제거였다고 주장하면서, 무지치코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정권을 모함하고 프라비 섹토르 지도부의 지시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 행동했기 때문이라 보도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과도정부가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을 아직도 점거하고 있는 극단 조직들을 제압하기 위한 특수전을 펼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불법 무기를 회수령을 공표하면서, 자동소총으로 나라를 구하고 싶다면 군에 지원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이같은 명령은 반정부 시위 때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들고 나왔던 프라비 섹토르 조직원들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프라비 섹토르 측은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내세워 무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다. 프라비 섹토르가 2014년 5월 2일 러시아계 주민 40명을 불태워서 학살한 오데사 사건 발생 후 러시아계가 더 분개할 것에 대비해서 오데사에 경찰 특수부대를 배치했는데 이 경찰들 중 절반이 중앙정부가 나치 정권이라면서 명령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항의의 의미로 방패 던지며 시위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위대를 도운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시장이 대독승전기념일에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 모아 놓고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찬양하여 미국과 독일을 곤혹스럽게 만든 사건들이 존재하는 등, 여전히 나치를 추종하는 일들이 발생해 왔다. 그리고 이는 돈바스 지역의 아조프 대대가 8년 동안 내내 돈바스 인민공화국들에 대한 공격과 그로 인한 친러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2만이 넘는 돈바스의 난민들이 러시아로 넘어가서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2022년 올 해 첫날에도 수도 키예프 거리에는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수백명의 추모객들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 독립 운동을 벌일 때의 상징이었던 붉은색과 검은 색의 이색기를 휘날렸다. 프라비 섹토르와 아조프 대대의 아버지 반데라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다. 그가 폴란드인과 유대인, 러시아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고, 그가 지도하는 민족운동조직을 인종편견으로 물들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그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저항군은 폴란드인 5만~10만명을 학살했고, 유대인들을 독일군에 넘겨주는 앞잡이 노릇을 했으며 러시아인들도 수없이 학살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는 우크라이나 저항조직을 지도하며 공산 세계에서 반공운동을 펼쳤다. 전후 냉전 시대에 돌입하자 이번엔 미국과 영국이 반데라를 지원했다. 반데라는 미국 CIA와 영국 M16의 지원을 받아 반(反) 소련 투쟁을 이끌었다. 나치를 극렬 지지했던 반데라는 반공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나치를 증오했던 미국과 서방이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인종 증오 범죄를 저질렀던 명백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원하며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셈이다. 스테판 반데라와 프라비 섹토르, 아조프 대대는 나치를 옹호하고 인종 테러를 자행했으며 그들로 인해 죽은 사람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사망한 우크라이나인보다 많다. 그런 네오 나치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아주 좋은 명분이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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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Бандера, 1909~1959)와 우크라이나의 극단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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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정치적 변동과 이온 안토네스쿠(Ion Victor Antonescu, 1882~1946)
- 우크라이나에는 스테판 반데라가 있어 나치에 협력해 유태인들을 학살했지만 루마니아에도 스테판 반데라 못지 않는 자가 있다. 그는 바로 이온 빅토르 안토네스쿠(Ion Victor Antonescu, 1882~1946)이다.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의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에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 교육을 받은 후 장교가 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후 귀국하여 1907년에 루마니아 왕국에 대항하여 일어난 농민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13년의 헝가리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고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도 참가하여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파리, 런던 주재 무관을 거쳐 기병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참모 대학 교장을 지내고 사단장 경험을 거쳐 1933년에 루마니아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루마니아 왕국 군대의 근대화를 실시했다. 그리고 1937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반(反) 유대주의와 극우주의의 성향을 가졌기에 코르넬리우 코드레아누(Corneliu Codreanu, 1899~1938)와 가까이 지냈다. 코드레아누가 만든 정당은 전위조국당(Totul pentru Tara)으로 그 성향은 파시즘과 유사했다. 그렇게 파시스트가 된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었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카를 2세와 대립한 끝에 1940년 9월 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역사상 최초로 콘두커토르(Conducător)라는 지위를 만들었다. Conducător는 지도자라는 뜻의 루마니아어로 로마 시대 집정관인 Consul (콘술)에서 유래했다. 이 호칭은 차우셰스쿠도 뒤이어 사용했는데 공통점은 두 사람의 최후가 모두 총살형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면서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전위조국당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1940년 9월 14일 루마니아는 "국민군단국가(Statul Național Legionar)"임을 선포하였으며 미하이 1세를 루마니아의 국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루마니아의 나치이자 파시즘이라 불리는 전위조국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이어 그는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함과 동시에 독일과의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게 된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협력을 위해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상황에 협조했다. 그는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전위조국당과의 사이에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위조국당 대원들이 루마니아 최고의 역사학자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1940) 등 많은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과격화 되면서 통제불능의 상황이 되자 안토네스쿠는 전위조국당에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고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에 전위조국당은 1941년 1월 21일 부터 23일까지 무장폭동을 일으켰만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연히 전위조국당은 해체되었고, 국민군단국가 역시 2월 14일 해체되어, 이온 안토네스쿠는 군부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때 전위조국당을 숙청하고 국민군단국가 해체 및 안토네스쿠의 군부독재 등을 승인했다. 대조국 전쟁 때 독일과 연합하여 소련을 공격하면서 대조국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의 군대는 가장 많은 수의 대규모 병력을 동부전선에 파견했지만 루마니아 군이 다른 열강의 군대에 비하면 숫자만 많았지 무기 상태도 극악인 상당한 약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련의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Александр Василевский)는 스탈린그라드 후방 지구에 주둔한 루마니아 우익의 4군과 좌익의 3군이 독일군보다 약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천왕성 작전(Операция Уран)을 입안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 군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박살내고 독일군 6군을 포위해 분쇄해 버렸다. 이와 같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포위망인 천왕성 작전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군대가 바로 루마니아 군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루마니아 군은 스탈린그라드부터 물러나더니 히틀러의 전선 사수 요청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군대를 출정시키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지켜보며 이대로라면 나라가 패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국왕 미하이 1세는 "합법적 평화"를 원한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외무부 장관 미하이 안토네스쿠(Mihai Antonescu, 1907~1946)는 영국, 미국과의 강화를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이와 같은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련의 폭격이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의 유전 지대와 콘스탄차의 해군 기지에 집중되면서 전쟁은 지속되었다.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은 매우 빠른 진격으로 전쟁에서 철수하거나 아니면 소련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는 상황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8월 20일 소련군이 1940년 6월 이전의 국경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다급해진 미하이 1세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親) 추축국 세력을 숙청했다. 이어 미하이 1세는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이온 안토네스쿠 또한 궁정쿠데타 당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소련 정보기관이 루마니아에 잠입해 측근 세력들과 함께 안토네스쿠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마니아의 노선 변경과 관계 없이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며칠 뒤에는 부쿠레슈티가 함락되고 문테니아와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루마니아는 전쟁 피해 보상금으로 3억 달러를 지불해야 했으며, 독일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동참해야 한다는 조건과 10만 명의 루마니아 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다만 그로 인해 전후 별도의 보복 조치를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전쟁이 끝나자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을 학살한 죄, 독일에 협력한 죄로 1946년 6월 1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여기에 당시의 군사재판을 본 존 래프랜드(John Laughland)는 <나는 죄 없이 죽는다>의 책에서 안토네스쿠가 독일에 협력한 죄까지 포함되어 기소되었었다고 한다. 안토네스쿠 본인은 총살형을 요청했다. 이는 아마도 루마니아의 총리이자 독재자이기 이전에 군인이었기 때문에 교수형보다 총살형을 희망했던 것 같다. 한편 루마니아는 대외 노선의 전환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44년에 급진 좌파인 민족 농민당, 자유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국민 민주 블록(Blocul Democrației Poporului)'을 결성했다. 그 위에 국왕 미하이 1세와 그의 측근인 군의 수뇌부가 이 블록에 접근하였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근위대 사단장 니콜라에 서너테스쿠(Nicolae Sănătescu) 장군은 국민 민주 블록의 4당을 포함해서 내각을 조직하였으며, 9월 12일에 소련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대독 참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곧 정치적 변혁을 회복하려고 하는 민족 농민당의 지도자와 소련군의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공산당과의 대립이 발생한다. 10월에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농민전선, 애국자 동맹, 노동 조합 등을 모집하여 국민 민주 전선(Frontul Democrat Popular)을 결성했다. 12월에 성립한 친(親) 서방파의 미하이 러데스쿠(Mihai Rădescu)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은 우파 신문의 발간 금지와 내무성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1945년 2월에 격심한 정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마침내 소련은 안드레이 비신스키(Андрей Вышинский, 1883~1954) 외무 차관을 보내어 미하이 1세에게 미하이 러데스쿠 장군의 해임을 요구했다. 더불어 3월 6일에는 농민 전선의 페트루 그로자(Petru Groza)를 총리로 하는 인민 민주 전선 중심의 새로운 내각이 탄생했다. 이와 같은 소련의 루마니아 내정 간섭에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항의가 이어졌고 국제적 비판이 전개되었다. 한편 국왕과 우파 정당은 페트루 그로자 내각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시 미하이 1세는 페트루 그로자와 농민 전선을 소련의 지시를 받는 행동대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에 이들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국제적인 타협이 성립되었고 민족 농민당과 자유당에서 각각 1명을 그로자 정권에 가입시키게 하여 정권을 중성화를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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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정치적 변동과 이온 안토네스쿠(Ion Victor Antonescu, 1882~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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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정권 불가리아와 초대 주석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1882~1949)에 대한 이야기
- 1943년에 국왕 보리스 3세는 히틀러와 회담한 뒤 급사했고 이후 6세의 왕태자 시메온이 왕위를 승계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한 이후 연합국으로 전향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소련군과 동맹을 맺은 불가리아는 독일군이 발칸반도에서 탈출하는 것을 봉쇄했다. 불가리아 군은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이후 비엔나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불가리아는 초창기에 독일의 편에 섰다하여 패전국으로 전락되었고 그와 함께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에 공산당에서 투표를 통해 1946년 9월 9일에 왕정이 폐지되었고 시메온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후 그의 섭정인 키릴 왕자와 섭정단, 그리고 의회의원들도 총살하여 숙청했다. 이후 은거한 페르디난트 1세가 아직 살아있었지만 그는 독일에 머물러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1946년에 벌어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불가리아 공산당 소속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1882~1949)가 주석으로 선출되어 소피아에 돌아오게 되었다. 디미트로프는 1882년 6월 18일 불가리아 공국 시기에 코바체브치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코바체브치(Kovačević)는 현재 세르비아의 영토이고 당시에는 불가리아의 영토였다. 그는 불가리아계 모친과 세르비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불가리아인이었지만 10세에 소피아로 들어와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삶을 살았던 탓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식자공으로 취직하여 노동자로 종사했다. 이후 그는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02년에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이 세력들은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형성하게 되면서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로 성장한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에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승화했다. 디미트로프는 1904년부터 1923년까지 불가리아 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지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공산당은 불가리아에 정식적인 정당으로 등록되었다. 디미트로프는 1917년에 체포될 때까지 불가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하면서 당의 조직을 키우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알렉산데르 스탐볼리스키(Александър Стамболийски) 총리가 쿠데타로 인해 체포되어 살해당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반(反) 터키 조직인 알렉산데르 찬코프(Александър Цанков) 총리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디미트로프는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하게 된다.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디미트로프와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 체포되어 궐석재판의 판결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내 같은 공산당들이 체포된 불가리아 공산당들을 구출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고 디미트로프는 탈옥하여 여러 가지 가명을 만들어 쓰며 유럽 전역을 떠돌게 된다. 그는 1929년까지 소련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다시 이주했고, 그곳에서 나치에 맞서 독일 공산당이 이끄는 반(反) 파시즘 인민전선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독일을 여행 중이였던 불가리아 공산당 소속의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방화사건의 공범으로 몰려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 나치에게 이미 넘어간 법원과 검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한편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했으며 결국 독일 공산당을 해산시키려고 사건을 조작한 나치 당국은 디미트로프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을 무죄로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주범으로 체포되었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만 유죄선고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현대 독일의 공식 입장은 '정신이상자의 단순 방화를 나치가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로 나타내고 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1935년 8월 2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 참가해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은 코민테른의 임무라면서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전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에 대해 반(反) 파시즘 통일전선론이 코민테른에 정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반(反) 파시즘 투쟁을 위한 인민전선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론은 함께 7차 코민테른에 참여한 스페인의 공산주의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깊이 감화를 받아 스페인 내전 당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프랑스, 미국, 인도, 영국 등지에서도 반(反) 파시즘 통일전선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디미트로프는 고국인 불가리아로 귀국하여 인민전선의 일종인 불가리아 조국전선을 조직하여 대조국 전쟁 당시 소련군에 참전해 나치를 불가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1944년 소련군의 반격이 계속 성공하여 불가리아로 돌아온 디미트로프는 1946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코민테른에서 공산정권의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44년 조국전선 쿠데타로 총리가 된 키몬 게오르기에프 스토야노프(Кимон Георгиев Стоянов)를 부주석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가리아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부주석인 키몬 게오르기에프의 1923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1934년에도 즈베노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었던 바 있다. 이어 1944년의 조국전선 쿠데타가 그의 마지막 쿠데타로 기록되었으며 디미트로프를 적극 보좌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디미트로프는 여전히 소련 시민권자였다. 게다가 1946년에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의 압력으로 인해 마케도니아를 합병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그와 같은 스탈린의 강요에 반발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에게 접근하여 발칸 사회주의 연맹 창설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시작했다. 1947년 티토와 디미트로프는 유고슬라비아의 니쉬에서 만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디미트로프 자신이 줄곧 주장했던 소비에트에 관련한 이념 논쟁에서 티토와 의견이 맞았지만 1948년 스탈린과 티토가 완전히 틀어진 이후 최악의 관계가 되었다. 같은 해에 디미트로프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발칸 사회주의 연맹에 참여하라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들을 설득하고자 대중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동구권 전체의 통제를 원했던 스탈린의 뜻에 방해가 되었다. 거기에다 티토와 스탈린의 이견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가입 협상과 마케도니아의 할양을 방해하는 셈이 되었다. 디미트로프는 평소에 간 질환을 달고 살아왔던 인물이었다. 1949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가차 소련을 방문했고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간 질환을 치료받던 도중 갑자기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의 사후 후임 서기장으로는 발코 벨료프 체르벤코프(Вълко Вельов Червенков)가 임명되었고 총리로는 조국전선의 일원이었던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가 임명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방사능 치료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독살당했는지의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의 진노를 샀었고 티토와 가까이 지냈던 관계로 스탈린에 의한 독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오랜 기간 동안 엠버밍(Embalming) 처리되어 부검을 실시할 수도 있었지만 부검하기 전에 불가리아가 민주회 되었고 그때 시신이 화장되었기 때문에 디미트로프의 사망은 공산권 국가의 10대 미스테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공산권 국가 시절 그는 초대 주석이었기에 그에 대한 우상화를 위해 엠버밍(Embalming) 된 시신은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조성된 영묘에 안장되었다. 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의 영묘는 6일 만에 완공되었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 유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장되었다. 그러나 영묘를 처리하는 문제로 인해 갖은 9년 동안 논쟁이 있었다. 불가리아의 역사 중 하나인 공산당의 유산이고 이를 상징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철거하려 했지만 그래도 6일 만에 완공된 건물치고는 당시 소피아를 대표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철거 대신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재활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여론조사의 결과 소피아 시민의 3분의 2는 철거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민주화로 세워진 정부는 영묘 철거를 강행했고 1999년 철거되었다. 이 영묘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기에 철거할 당시 4번의 폭파 시도 끝에 비로소 해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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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정권 불가리아와 초대 주석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1882~1949)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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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나 중국 스파이들의 진화 및 변화를 빠르게 감지해야
-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요즘 세상엔 간첩이 어딨어?" "간첩 그딴건 5공 시대 때나 얘기." 근데 간첩이 없는 나라가 있나? 미국의 CIA, 영국의 MI6, 러시아의 FSB, 한국의 국정원 등등.. 국가 대내외 사회와 상황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빨리 취득해 유리한 국익으로 가져오는 행위 자체가 간첩 행위이고 위에 열거한 첩보기관들 자체가 간첩들을 운영하고 있는 기관이다.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정치, 경제와 같은 종목부터 산업에 이르기까지 이 정보화 시대에 정보력 확보는 필수이기에 간첩이 없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넓게 포함하면 각국의 대사, 영사 뿐 아니라 외교관들 자체가 모두 간첩의 범위에 해당된다. 다만 Official cover 냐, Non-official cover 냐의 차이일 뿐이다. Official cover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각국의 대사, 영사 뿐 아니라 외교관들을 말한다. 이들은 합법적인 신분으로 대놓고 들어가 비교적 공개적인 정보수집을 진행하는 요원들이다. 그러나 Non-official cover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공작원들이다. 정보 수집 외에 부서에 따라 암살, 파괴공작, 사보타주 등을 실행하기도 하는 공작원들인 것이다.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이단 헌트,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 모두 간첩을 연기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북한 무장공비나 다양한 형태의 사보타주를 일으키는 자들 또한 Non-official cover 에 속한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간첩들은 미국 CIA이다. 이들은 간혹 요인암살, 그리고 폭동과 봉기를 조장해 사회적 불안감을 심고 이를 배후조종하여 역사적인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는 에서 이와 같은 Non-official cover의 행위를 Black History 라 규정하며 "역사적 사건 배후에 숨어있는 사람들(People hiding behind historical events)"이라 규정했다. 2000년 이후의 현대사를 볼 때, CIA와 영국의 MI6은 수없이 많은 논란과 현대의 역사 속 배후에 숨어있는 사람들임을 자처했다. 최근으로 본다면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사태, 2014년 유로 마이단 폭동 등은 CIA와 영국의 MI6의 개입 정황이 매우 뚜렷한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CIA와 MI6이 대놓고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 비해 우리 한국은 어떨까? 우리 한국은 북한과 아직 전쟁 중인 국가이며 세계사에 있어 휴전 상태가 가장 긴 기네스북을 날마다 경신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불안한 상황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간첩이 없다는 것은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다. 종전된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아직도 전쟁 중인 국가에 간첩이 없다는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다만 긴 휴전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아슬아슬한 평화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 평화에 매일 안전불감증을 느끼며 맞이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간첩이라고 하는 것을 아마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장공비 같은 것을 떠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간첩은 모두 무장공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영국의 MI6 정보요원 제임스 본드에 열광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영국 간첩이며 그가 하고 있는 행위는 엄연히 간첩 행위이다. 더불어 그것이 영화이기 때문에 멋지게 포장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21세기 들어 인터넷이 발달하고 각종 프로그렘이 넘쳐나는 첨단 IT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는 클릭 한 방이면 모든 것을 검색하고 찾아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점차 진화하고 있다. 그런데 간첩과 간첩 행위도 시대에 맞춰 진화(Evolution)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슨 쌍팔년도처럼 땅굴 파고 침투하거나 무장을 하며 무지막지하게 침투하던 무장공비 남파간첩의 시대는 끝났다. 그런 무지막지한 때가 아닌 지금은 안방에 앉아서 온갖 인터넷 및 첨단 IT를 활용하여 온갖 사보타주를 조장하고 간첩질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점차 교묘해지고 대범해지고 있다. 여권만 잘 위조하면 대한민국에 숨어 들어와 사회주의 사상을 강조하고 획책하며 댓글부대에 참여해 내분을 조장한다. 그와 더불어 각종 해킹을 감행해 은행전산망을 마비시키도 하는 한편, 카카오톡이나 각종 메신저도 어디선가 훔쳐보고 있다. 자금이 부족해지면 보이스피싱 등의 IT 범죄로 자금을 충당하여 첩보 활동에 쓰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이자 여행자, 노동자인척 양의 탈을 쓰고 인터넷 상에서 국민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하며 끊임없이 내부 분열로 인한 붕괴를 꾀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시류에 편승해 상대를 인신공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대한민국에서 취득한 수많은 개인정보들을 활용해 아이디들을 만들어 온갖 조작에 참여하고 있다. 모두들 명심할 것은 앞으로도 AI와 IT의 첨단화 시대에 맞춰 간첩행위도 교묘해질 것이며 간첩 또한 그에 맞춰 최첨단으로 진화 (Evolution)해 앞으로 솎아내기도 힘들 것이다. 아직도 북한이나 중공 간첩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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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나 중국 스파이들의 진화 및 변화를 빠르게 감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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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적 전통으로 남아 있는 여성성
- 베트남 전쟁 때는 여인들도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군복을 입고 직접 총포를 쏘며 참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평민들 사이에 숨어 미군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게릴라 전략으로 평민들 사이에 평상복 입고 숨어 미군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미군들은 베트남 평민들을 베트콩과 구별하지 못해 대량 학살하곤 했다. 베트남이 여군을 동원한 것은 비단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때만이 아니었다. 대 프랑스와의 독립 전쟁 때도 여성 군인들의 끈기와 용맹, 게릴라 전 및 폭탄 의거 등으로 베트남이 독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20세기의 고단한 베트남의 흑역사에서 나타난 여성들로 인해 그 강인한 DNA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베트남 여성의 의미가 불교에 투영되기도 했는데 베트남 불교는 모계영향을 받는 특성이 있다. 모계제도는 베트남 불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베트남 불교를 ‘여성적’ 종교로 만들었다. 인도 출신의 남성 부처님들은 베트남에 들어와 여성 부처님으로 변화됐다. 관세음보살이 ‘관세음 어머님’으로 부르고 있으며, 해양 지방에는 남해관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유교적인 모습도 갖추고 있는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열녀각이 있다. 이는 베트남 11세기 이 왕조 때 유학을 받아들인 이후, 마을의 소문난 효녀와 며느리 등을 선정해 이를 기념하여 그들이 행한 효(孝)를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특히 베트남과 같이 모계사회가 강한 곳은 이런 열녀각을 통해 부모와 어르신에 대한 효(孝)에 국가에 대한 충(忠)까지 장착되었다. 베트남에 유독 여성 영웅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는데 그들의 끈기와 리더쉽 등은 현재 베트남 여성들이 태어나서부터 어머니에게 받은 집안 교육에서 비롯된다. 베트남 여성들은 생활력이 매우 강하며 가정과 육아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남편과 이혼해도 절대 아이는 버리지 않고 데려가 키우곤 한다. 남편 없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거액의 위약금까지 뜯어내고 그러지는 않는다. 물론 이혼하게 되면 남편의 재산은 반반 나누는 것이 법으로 되어 있지만 오랜 관례상 그들 스스로 이겨내며 살아간다. 수많은 여성 영웅들을 배출한 베트남은 수없이 많은 전쟁과 수탈을 겪으며 여성들이 위기에서 이겨낼 수 있는 지혜들을 터득했다. 베트남의 여성성을 강인하게 키우는 모습은 가정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베트남의 가정 교육은 생각보다 체계가 있다. 우선 그 아이들이 여자일 경우 확실하다. 어쩌고 보면 유교적 관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베트남이 유학을 받아들인 훨씬 이전부터 생성된 것이었다. 이는 베트남을 건국한 모신(母神) 어우꺼의 생명력을 그대로 전수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베트남의 잔 다르크와 같은 여성 영웅인 쯩니, 쯩짝이 이끄는 쯩 자매의 독립 투쟁 정신도 여기에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나라의 수탈에 남편을 잃은 두 자매는 분노하여 한나라 정부에 반기를 들어 일어섰고 당시 베트남 사회는 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대규모의 독립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복파장군 마원에 의해 독립 투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주도적인 투쟁 정신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여성상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베트남 인들을 탄생시킨 창조의 여신인 어우꺼이고, 두번째는 중국 한나라의 지배에 반발하여 저항 반란을 일으킨 쯩 자매이다. 어우꺼가 이상형인 것은 지고지순한 현모양처형을 말하는 것이다. 어우꺼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조선 시대의 여인의 이상형이 신사임당의 이미지인 것과 같이 베트남 여인의 이상형은 어우꺼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그것은 어우꺼가 100명의 자식을 알이 100개 되던 큰 알에서 100명이 나오던 어쨌든 지금의 베트남인이 있게 한 자식을 낳은 전형적인 어머니의 형상이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중시한 나머지 이러한 어머니의 형상이 강한 베트남에 어우꺼의 이미지를 참된 어머니 상으로 투영시켰다. 베트남의 유교는 11세기 이(李) 왕조 시기에 들어왔으며 지금도 하노이에 가면 이 왕조 시대에 만든 문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수능시험날 되면 베트남의 학부모들이 자식들의 합격을 위하여 문묘의 공자상과 맹자상에 기도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쯩 자매가 이상형인 것은 출세지향형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 쯩 자매의 언니인 쯩짝은 자신의 남편이 한나라 관리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처음에는 남편의 복수를 위해 한나라 관리에게 항거하는 소규모적이고 지극히 가정적인 부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여기에 동생인 쯩니가 합류한다. 그러나 한나라 정부에서는 이를 탄압했고 이에 범민족적으로 한나라에 항거하는 저항 조직이 결성되었다. 쯩 자매는 이 저항 조직으로 한나라에 멸망한 자신들의 조국 남월(南越)의 부활을 외치며 거국적으로 한나라에 저항하게 된다. 그러면서 쯩 자매는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같이, 베트남 민족저항운동의 핵심적인 인물로 발돋움하며 일약 민족 지도자의 상징이 된다. 이런 쯩 자매의 이상형은 당시 남성절대주의에 심어져 있는 온갖 편견을 타파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찾으며 남성들 일색인 정계나 경제계 등 온갖 사회에 진출해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남성들을 이끌고 거국적인 민족저항을 한 쯩 자매는 당시 서기 2세기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여성 운동의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만큼 그 시기에는 여성들이 밖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성성들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철저히 교육되어지며 베트남 여성들은 두 여성성들이 공존하고 있다. 어우꺼의 여성성은 가정에 충실하고 가정을 가장으로써 이끌어나가며 가정을 먹여살리는 것에 있다. 남성보다 그것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가는게 베트남의 여성사회다. 그것이 베트남 가정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찍소리를 못하는 이유다. 한편 쯩 자매의 여성성은 남자보다 능력이 뛰어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대등하게 남성과 경쟁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 있다. 호치민은 이러한 쯩 자매의 여성성을 강조하며 어우꺼의 여성성에 억눌려 있던 베트남의 여성들을 해방시켜 사회 진출할 수 있게 해주었고 당당하게 능력만 있으면 남성과 경쟁할 수 있게 개방해주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여성들은 사회 이곳 저곳에서 남성들과 경쟁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며 양성 평등의 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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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적 전통으로 남아 있는 여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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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여성 정신과 1년에 두 번 존재하는 "여성의 날"
- 베트남은 분명 모계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남자들이 없어도 여자들의 생활력이 월등하여 여자들은 지구상 어딘가에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 남는 민족이 베트남 민족이다. 이 끈질긴 생명력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베트남의 교육 방식에 있다. 이러한 베트남의 여성들은 강하다. 베트남 역사에는 강인한 생활력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간 수많은 여성 영웅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 후한(後漢)을 상대로 민중 봉기를 일으켜 베트남 땅에 독립 국가를 건국한 영웅은 쯩 짝(Trung Trac), 쯩 니(Trung Nhi) 자매는 베트남 여성성에 있어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 두 여성이 중국의 대제국에 저항하여 역사적인 거사를 일으켰을 때 이들을 도와 한나라 군과 싸웠던 사람들은 36명의 여성 장수였고 백발백중의 활과 화살로 한나라 군을 떨게 한 여성 궁수 부대였다. ‘두 명의 쯩’ 여사라는 뜻의 하이 바 쯩(Hai Ba Trung)이라는 명칭이 베트남 전국 대도시 곳곳의 도로 이름에 붙어 있다. 이는 단순한 모계사회 국가의 전설로 치부할 수 없는 두 여성 영웅을 일상적으로 기리고 그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베트남에서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성 영웅들이 존재했다. 프랑스와의 독립 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응우옌 티 민 카이(Nguyen Thi Minh Kay)도 대표적인 여성 애국자고 17세의 나이로 무장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보 티 사우(Vo Thi Sau)도 있으며 후일 베트남 인민공화국 국가 부주석까지 올랐던 응우옌 티 딘(Nguyen Thi Dinh)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여성 영웅들의 이름을 딴 학교와 도로가 베트남의 전국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도 여성들은 총을 매고 미군을 상대했다. 크고 강건한 미군이었고 작은 체구의 베트남 여성들이었지만 그녀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여군들의 활약으로 미군 내에서도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북베트남 여군의 활약은 미군을 위축시켰고 미군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 하나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만큼 북베트남의 여성들은 남성 이상의 몫을 해내던 그런 여성들이었다. 여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로 나타난다. 다른 국가의 경우, 여성이 전쟁에 참여하더라도 물품을 공급하고 지원해주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러나 베트남 여성들은 남성 군인들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 진열 중인 전쟁 기록물들을 보면 남성 군인들과 나란히 총을 겨누고 있는 여성 군인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하노이 전쟁박물관에 가면 추락한 미군 전투기 잔해들을 포획한 사냥감처럼 끌고 가는 여성 전사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베트남 여성들의 강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호치민 주석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 때 바딘 광장에서 첫 국기 게양식을 하는데 여성 2명과 남성 2명으로 하여금 국기를 게양하게 했다. 평소 호치민 주석은 여성들을 평가하기를 “여성은 혁명을 함께 이뤄낸 동지이며 남성과 여성의 권리는 동등하다”고 강조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성 평등에 대한 국가 지도자의 소신은 베트남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호치민은 일찍이 프랑스와의 독립 항전 중인 1930년 10월 20일 베트남 여성 연맹 창립을 지원했다. 이 날을 여성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여성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는 국가 기념일로 선포했다. 그래서 베트남은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과 10월 20일 ‘베트남 여성의 날’ 이렇게 두 번의 여성의 날을 국가 전체가 기념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한 베트남의 성 평등은 군사조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의 군사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국경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1950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열강에 승리를 거두었고, 캄보디아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증명했다. 베트남에서 군대는 특이하게도 남여 모두 평등하게 입대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호치민의 교시에 따라 2년제 대학 이상 재학 또는 졸업자에게는 군대 면제라는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혜는 현재 베트남의 학구열을 강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그래서 대학 생활 중 1회, 한 달 간의 의무 군사 훈련 제도를 도입하고 모든 대학생들이 성별 상관없이 똑같이 훈련을 받고 있다. 베트남 평민층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쉽지 않다. 이에 우수한 성적일 때 국가 보조로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대부분 상류층 자녀들로 보여 진다. 그러니 대부분 평민층 여성 자녀들은 군 입대를 하게 되어 있으며 국가 동원으로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공무 근로자로 일정 기간 동안 우리 한국의 옛 방위병 같이 공익 기관에서 복무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베트남 여성이 한국의 일부 여성 계층, 즉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여성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권리 주장은 아낌없이 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 평등이 아니라 역차별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자들도 SNS에서 많이 보인다. 자신들의 권리 주장을 한 만큼 베트남 여성들처럼 강인한 여성성도 가지고 있으면서 국가가 준 권리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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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여성 정신과 1년에 두 번 존재하는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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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3월 8일 여성의 날을 공휴일로 정한 이유
- 1966년 소련 시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3월 8일을 공식적인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2주 전인 2월 23일 '남성의 날'을 치른 러시아 여성들이 그에 상응하는 공휴일로 '여성의 날'을 지정한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러시아의 옛 전통과 여성의 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처음부터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권리를 상승시키는 여성 권리 향상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사로 제정되긴 했지만 매우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여성의 날을 지지한 적이 없다. 여성의 날 제정은 여성들의 근무 여건 향상을 위해 투쟁하던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이 1909년 주창하면서 이것이 힘을 받아 오늘 날까지 이어왔다. 사실 여성 권리 향상, 남녀 평등제는 사회주의및 공산주의의 산물이나 마찬가지다. 남성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던 러시아 여성들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13년에서야 여성의 날을 기념할 수 있었다. 소련 최초의 국가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0월 혁명 이후 여성의 날을 소련의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는 소련의 여성 조각가 베라 무히나(Вера Мухина, 1889~1953)가 만든 "노동자와 집단농장 여성일꾼의 기념물(Монумент «Рабочий и колхозница»)에 표현된 것처럼 여성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낫과 망치를 들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매진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이 기념물은 국영 영화사 모스필름의 로고에 등장하는 동상이 되었다. 또한 러시아 여성의 날이 여전히 페미니즘 운동의 모든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산주의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여자가 사업을 하거나 관리직에 올랐을 때,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평의 목소리가 만연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남자들과 사업 협상을 할 때면 동등한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그들보다 약한 여자로 대우받는 느낌이 종종 든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여성들이 꽤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아주 쎈 여성들이 해당된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꽃이나 다른 선물을 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정교회 국가답게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와 같은 여성의 모습을가지게 만들어 주셨는데, 왜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선물을 받고서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이런 사람들이 밝하는 여성의 날은 경력에 목을 매는 이기적인 여자들이 만든 페미니즘 기념일로 여기고 있는 여성들도 있으며 보통 여성들을 집안의 안 주인, 사려깊은 어머니, 애정깊은 아내로 보는 러시아의 옛 전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러시아 여성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사탕과 초콜릿을 먹거나 기념일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면 시들어버린 꽃다발을 갖다 버리는 것이 별로 기쁘지 않다고 한다. 1년에 하루가 아니라 항상 그런 존경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에 그들은 여성에 대한 대우가 사실상 10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1년에 하루, 파묻힐 정도로 많은 축하카드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해서 나머지 364일 그녀의 삶이 더 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러시아 여성의 날은 여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보여주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에 편승하여 돈을 벌려는 꽃과 향수, 초콜릿 등을 판매하는 기업체의 배만 불려줄 뿐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말은 여러 구체적인 공식 수치로도 증명된다. 모스크바 시 상업서비스국은 여성의 날을 앞두고 꽃 도매가가 50-60% 상승했다고 한다. 컨설팅 회사인 마르 컨설트 사(MAR Consult Compalny)는 모스크바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성들을 위한 선물에 5억 달러를 소비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현재의 러시아 정교회는 여성의 날을 서구의 잔재로 여기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의 서구의 잔재가 아닌, 러시아 여성의 날은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잔재다. 정교회는 발렌타인 데이나 할로윈 데이와 같이 여성의 날을 근절하려 하지는 않지만, 정교회 신자들에게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대신 정교회 축일을 기념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다가 2013년 정교회는 3월 8일을 '성 마트료나의 날'로 지정하고 케이크를 굽고 먹는 축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나 일부 정교회 신자들은 여전히 '성 마트료나의 날'을 5월 4일로 받아들여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념하고 있고 3월 8일은 그저 무감각하게 여성의 날로 그 또한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날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여성 10명 중 7명은 여성의 날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왜냐하면 여성의 날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아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알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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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3월 8일 여성의 날을 공휴일로 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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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의 여성 권리 선언, 20세기 세계를 강타하다
- 여성은 위대하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 여성들은 세계를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유럽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프랑스 대혁명도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 나타난 혁명이었다. 혁명 당시 여성들이 거리에 나서 "빵을 달라" 며 시위를 벌였고 그 이후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라는 여성 운동가가 나타나 남성, 그 가운데에서도 일부 남성에 대한 제한된 권리 적용에 대해 반발하여 최초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을 발표했다. 구즈는 여성 권리선언을 통해 이성을 지닌 모든 존재가 동등하며 따라서 모두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게 된다. 프랑스 계몽주의(Lumières)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이성을 가진 존재는 동일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구즈는 남녀의 성별 차이가 아닌 인간으로써의 공통점을 강조하였고 같은 인간이라는 명제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구즈는 당시 프랑스 절대 왕정 및 귀족사회 붕괴하고 세워진 과도 정부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남성들만이 정치 참여의 권리를 독점하는 불합리한 폭거로 규정했다. 이러한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폭거를 계몽과 이성적인 면을 앞세워 축출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완성으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존의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 있어 전문과 17조항으로 이루어진 구성을 그대로 채용하여 새로 개정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제7조와 제10조, 제12~13조가 여성 인권을 위해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제7조의 경우 여성들도 남성들과 더불어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받으며, 준엄한 법에 수긍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10조는 자신의 의사표현이 법으로 수립된 공공질서를 교란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연단에 올라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역설한다. 당시 남성 위주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연단에서의 연설은 베르사유에서 호사를 누리던 귀족이나 왕족 여성들도 감히 행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법으로 처벌도 동등하게 받는 한편 국가 대사에 참여하여 일도 동등히 하면서 여성들도 하나의 인간과 프랑스 시민으로써 발언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정한 제12조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장이 개인적 유용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수립되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제13조는 남녀의 조세 부담은 평등해야 하며 여성은 모든 부역이나 고된 일자리는 물론 정부의 요직과 일자리를 배분하는데 있어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구즈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의 정신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 또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비록 구즈의 여성 권리 선언은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지만 프랑스 혁명 200주년인 1989년을 전후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여성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이 재조명되면서 구즈가 재발견되고 200년의 시간을 건너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즈의 이념은 급속도로 여성 권리가 신장하면서 더욱 진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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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의 여성 권리 선언, 20세기 세계를 강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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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국민이 아플 때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정부가 헌법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 말이다.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들었나? 아니었다. 제대로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치료를 못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의료접근성이 높은 나라는 없다. 그러면 저 말의 의미는 무얼까? 응급실을 담당하는 의사 수가 적고, 지방에 근무하는 의사 수가 적어서 국민이 아플 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건가? 그것이 우리의 당면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의대생 숫자 증원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엉뚱하다.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꿰맞추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온 백성이 잘살게 됩니다”라는 말과도 비슷하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 단지 상위 일부 계층만 더 많은 소득을 올릴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부자들의 배만 더 불릴 뿐이다.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의료시스템의 변화 없이 의대생 수를 증가한다고 우리가 겪고 있는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필수 의료에 더 많은 행위별 숫가를 적용해서 의대생들을 필수 의료 분야에 더 많이 지원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모든 것이 돈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가 들고나온 의대생 숫자를 늘리자는 정책은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꼴이다. 의대생 숫자를 늘려봤자 지금의 행위별 숫가 제도로는 여전히 인기 있는 과에 학생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늘어난 의대생들은 누가 가르치나? 늘어난 의대생 숫자를 교육 시킬 자원은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할까? 그 모든 것이 정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그 돈을 왜 엉뚱한데 쓰려고 할까? 그 돈으로 필수 의료에 더 많은 지원을 해 줘도 우리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인다. 어쩌면 현행 제도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꼼수가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 생명을 담보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국민 생명을 담보로 현행 공보험이라는 제도의 근간을 흔들려는 태도도 맞지 않는다. 의료 개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가 생각하는 의료 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상급종합병원은 전문의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말이라는 것이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이 전공의를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상급종합병원이 저임금, 고노동의 전공의 활용해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상급종합병원에 환자가 그렇게 많이 몰리는데, 그 많은 환자를 전공의 도움 없이 어떻게 치료를 할 수 있겠는가? 상급종합병원에 환자가 몰리는 것은 환자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지, 의대 증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방의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으나, 서울의 유명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으나 환자는 동일한 의료비를 지불한다. 당신이라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그것이 의대 증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을 중심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중증질환을 제외한 응급환자나 가벼운 질환의 환자를 다른 종합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는 국민의 의식이 문제이지, 상급종합병원의 광고나 홍보에 의해서 국민이 그곳으로 몰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면 공보험 자체를 손봐야 한다. 차등 진료이다. 정부가 그리는 그림이 진정 현행의 공보험 자체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대 증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빌미로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워 공보험을 없애고 사보험을 도입하려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정부의 숨은 의도라면 참으로 현 정부의 남은 3년은 길어도 너무 길다. 여기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모험이 생각났다.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도중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당을 만났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강철로 된 침대를 갖고 있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그 위에 묶어 침대의 길이에 맞게 여행자들의 키를 늘이기도 하고, 다리를 자르기도 하였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그의 침대에 눕혀 그를 똑같은 방법으로 처벌하였다. 지금 의대 중원을 중심으로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아닐까? 의대 중원이라는 침대를 가져다 놓고 모든 것을 그 침대에 맞게 재단하려고 한다. 뉴스를 보니 정부는 전폭적인 국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법과 원칙에 따라 흔들림 없이 대응한다고 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정부가 꿈꾸는 의료 개혁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국민의 냉정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18세기 영국 어느 시민극의 대사가 생각난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법률이란 대체 뭡니까? 당신들의 악행의 도구이자 방패막이 이외에 무엇입니까? 그 법률로 당신들은 남을 처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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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