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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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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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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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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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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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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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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생명의 장송곡과 희망의 불꽃
    아침부터 ‘부우웅~부우웅~’ 소리를 내는 전기톱 기계음이 아침의 고요함을 깨운다. 창밖을 내다보니 얼마 전 새롭게 조성한 도심 속의 꽃밭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들의 밑둥치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생명이 다한 나무들이었다. 잘려진 나무는 몸통과 가지로 또 다시 잘려진다.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 살인한 후에 시신을 토막을 내어 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원래대로의 자연이었다면 저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인공적으로 옮겨 심어져 자신의 운명을 조기에 마감을 하는 슬픈 운명이었다. 인간에 의해 강제된 한 생명의 조기 사망을 목격하게 되었다. 며칠 전 정원을 걷다 보니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있었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중환자실에서 보호관찰 중인 환자들이었다. 주위의 건강한 나무들은 나뭇가지에 생기가 넘쳐흐르는 푸른 잎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푸른 잎들에서는 생명의 광채가 품어져 나온다. 하지만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은 푸른 잎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무는 피골이 상접한 인간의 모습이었고, 푸른색을 잃어버리고 말라비틀어져 쪼그라들어 흙빛 색 잎들만 달고 있는 나무들은 잿빛 얼굴로 죽음이 임박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사람이든 나무든 한 생명체의 최후 모습은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인부들은 그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망 판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붕붕거리는 무겁고 둔탁한 전기톱의 기계음 소리가 그들 나무에게는 잔인한 사형선고였다. 어쩌면 장송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주변의 살아있는 나무들은 그 장송곡 소리가 슬프게 들렸을까? 나는 문득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애도하기 위해 아파트 문을 열고 꽃밭 정원으로 내려갔다. 자기 몸통을 잃어버린 채 하얀 밑동만 남겨진 나무는 나무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나이테도 보였다. 3, 4년은 되어 보였다. 그 밑동도 뿌리와 함께 곧 제거되겠지만, 오늘 아침 나는 나무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나무가 심어진 꽃밭 정원을 모두 둘러보았다. 인공적으로 심어 놓은 수십 그루의 나무 중에 밑동만 남겨놓고 잘려 나간 나무는 10여 그루는 되었다. 밑동이 잘려나간 나무의 흰 색상이 마치 흰 해골만 남겨있는 듯했다. 살아있는 나무들 사이에 아직도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그는 푸른 잎들을 나뭇가지에 달고 있었다. 그는 사지에서 돌아온 나무였다. 그 나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를 붙들고 울 수는 없었지만, 나의 마음속으론 니체가 말하는 상승하는 힘의 의지를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표를 떼어 주었다. 생육 관찰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부활한 나무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생명은 기계적인 모습을 띠는 경우도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창발적인 성격도 함께 갖고 있기도 한 것 같았다. 동일한 시기에 심어진 나무들이지만 어떤 나무는 회생하였고, 어떤 나무는 사망에 이른 것이다. 식물학자들은 그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생명은 주변과의 여러 관계에 얽혀있으면서 유기체적 활동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주의 모든 것들은 관계에 얽혀있는 하나의 생명이고, 인간은 그 우주 속의 티끌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불교의 화엄사상도 그러한 생각과 유사하다.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구의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고치고 유지하고 다시 만들며 자신을 능가한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 생산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마굴리스는 생명의 목적은 자신을 생명력 있는 물질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과정이다. 마굴리스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98%가 한 해동안 새롭게 교체된다고 한다. 부처는 2500년 전에 이러한 과학적 진리를 깨달아 제행무상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니체의 힘의 의지가 연상되었다. 니체가 말한 힘은 권력이 아니라 에너지 보존법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 에너지를 니체는 힘으로 보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상승하는 힘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자기 생산적 활동을 하는 불타오르는 생명의 의지와도 일맥상통한다. 힘에의 의지는 곧 생명의 불꽃이다. 상승하는 생명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 육체와 정신의 건강, 나아가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를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철학적 논문으로 밝혀야 하겠지만, 가벼운 하나의 단상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생육관찰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의 다양한 운명을 보면서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꿈꾼다. 육체의 건강은 정신의 건강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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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3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활동
    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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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3
  • 심상치 않은 이라크 쿠르드계인 페쉬메르가 집단의 최근 움직임
    현재 이라크 북동부와 이란 북서부, 터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 쉬르낙(Şırnak) 지역에 경계령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최근에 이 지역들을 방문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이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페쉬메르가 집단이 PKK와 접선 및 연동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를 받고 나서부터다. 페쉬메르가와 PKK는 같은 쿠르드 무장단체다. 그런데 PKK는 사회주의성 이념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 페쉬메르가는 오로지 이념이 아닌 순수한 무장투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때는 IS의 격멸을 위해 함께 했었지만 그 이념적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했다. 터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에서 두 단체의 접선이 이루어졌고 터키와 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연합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 한다. 아마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 도시인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은 매우 위험해질 공산이 클듯 싶다.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와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이면서도 남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국경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쿠르드인 인구는 약 1,5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 지역의 면적은 면적은 46,861㎢, 한국으로 보면 경상도와 강원도를 합친 크기다.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는 아르빌(Erbil)로 과거 한국군이 이라크 파병 당시에 주둔했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쿠르드인들이 정착한 지역으로 터키와 이라크가 국경을 두고 갈라지기 전에 모두 쿠르디스탄으로 칭해지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가 양분되는 관할 구역이 재편된다. 영국은 이라크를 식민지로 삼으며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떼어내 이라크 영토에 합병해버렸다.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은 영국이 강제로 만들어버린 인공적 국경이었기 때문에 터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자국 영토로 인식하여 이라크 정부에 반환을 요구해 터키-이라크 간의 해결되지 않은 영토분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라크 쿠르디스탄에는 쿠르드족만 있는 곳이 아니라 터키인도 약 30% 이상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영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이라크와 터키를 강제로 분할해 버렸으니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PKK나 페쉬메르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터키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라크 쿠르드족들과 터키계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후원하고 있었던 당시 이라크 왕국과 사담 후세인 정부에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1960년에 제1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이 발생하자 터키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이라크 쿠르디스탄과 북쿠르디스탄은 터키 정부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쿠르드 민족주의를 결성, 터키와 이라크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게 된다. 1970년에는 시리아 바트당 정부와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알레포 협정이 이루어져 쿠르드족 자치권이 이루어지게 합의했으나 1974년 제2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으로 이라크 정부에 크게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지역에 대해 강한 아랍화를 실시하면서 쿠르드 민족주의를 강하게 억누르고자 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인해 수십년 동안 또 다른 분쟁이 이어졌고 이 분쟁에 페쉬메르가 세력이 주도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격발되었다. 이들은 PKK 조직과 연계하여 이라크 북부와 터키 동남부를 중심으로 테러와 게릴라 전을 감행했다. 특히 터키-이라크 국경 지대인 치즈레(Cizre) 인근 알 추디(Al-Cudi) 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본래 공산주의 성격의 PKK와는 달리 페쉬메르가는 여기에 이슬람 근본주의까지 입혀 알 추디 산을 무슬림의 성산(聖山)으로 만들고 성역화했다. 알 추디(Al-Cudi) 산은 아라랏 산과 더불어 무슬림들에 의해 노아의 방주가 한 차례 정착한 산으로 여겨져왔는데 이 산에 대한 무슬림들의 성역화는 페쉬메르가 세력이 이 산을 장악하면서부터 이루어져 왔다. 이 산을 중심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와중에 1983년 또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더불어 이 일대에서 상당량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여기에 눈독을 들인 영국이 페쉬메르가를 지원하면서 이들의 무력은 급격히 강화되었다. 비록 1983년 봉기는 교착상태에서 끝났지만 이를 기억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은 1988년 쿠르디스탄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활약한 자가 이라크 대외정보국장이며 후일 "쿠르드족의 도살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알 마지드(Ali Hassan Al-Majid, 1941~2010)다. 그는 화학 공격의 대가로 알려졌기에 그의 별칭이 케미컬 알리(Chemical Ali)다. 그는 할라브자에 화학공격을 가해 4,000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학살했다. 그의 주도로 이라크군은1983년~1988년 시기에 안팔 작전을 개시해 50,000~180,000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학살했다. 그리고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고 사담 후세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킨다. 한 달 간의 분쟁으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180만 명이 난민이 되어 각지를 떠돌았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드 지역 남부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이라크 쿠르디스탄 대부분 지역에서 쿠르드족의 저항이 거세게 나타났으며, 걸프 전쟁에서 패배했기에 이들을 제압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후세인은 쿠르드족과 합의하여 쿠르드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완전한 독립을 노리고 미국 편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쿠르디스탄이 완전 독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터키와 이란의 반발로 인해 미국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쿠르디스탄 자치 정부는 반발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대신 2005년 이라크 신(新) 헌법이 제정되자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더 많은 자치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2014년에는 IS와 맞서 싸웠고, 2017년에는 쿠르드 지역 독립투표를 강행했으나 이라크의 강력한 경고로 작은 충돌이 일어났으며 결국 독립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다시 독립투표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터키가 PKK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이라크도 여기에 협력하여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대한 합동 공격까지 논의가 오고가게 되자 급해진 페쉬메르가는 PKK와 공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라크 영내에서 터키와 이라크군의 합동 공격이 서서히 임박해짐에 따라 PKK와 페쉬메르가의 접선 및 연동,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에서의 회합은 터키와 이라크에 대해 대규모 저항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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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3
  •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최근 200년 동안 학자들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문화나 민족학 연구 결과 최근에는 이 민족이 전통적인 게르만 계통 민족 국가이며, 켈트의 후예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이들 은 단일한 부족 체계가 아니라 라인 강 동부 지역, 중,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살리(Sali) 족, 리부아리(Livuari)족과 오늘날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카티(Cati) 족을 포함한 다 종족 공동체의 통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러 소부족의 부족 집단에 대한 호칭이면서도 통칭적인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게르마니아를 원정할 때 프랑크 족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다가 후일 토이토부르크(Teutoburg) 전투에서 최초로 언급되어졌다. 이들 프랑크 족은 살리 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후일 민족 이동 시기에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이에 나도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연구를 진행했었지만 그 기원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본 연구자가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문헌적으로 밝힌 것이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2세기 로마 비석에 새겨진 명문으로 추적한 결과 본래 켈트 인의 분파라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켈트 인의 분파인 전체 게르만 계통 민족들, 그들의 분파들을 정리해 본 결과 라인 강 일대의 분파, 폴란드, 체코 지역의 동유럽 일대의 분파, 그리고 발트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고트 분파로 분류할 수 있는 가운데 프랑크 족과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은 라인 강 분파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들의 현실적인 기원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로마 영내에서 이주해온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의 권한은 미증유로 강화되었다. 로마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은 공지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여 거대한 영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하여 제정 로마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 대지주들의 압제적인 태도와 횡포로 인하여 화폐의 인플레, 물가 상승 등 여러 가지 사회 악재가 초래되었고, 가난한 부족민들의 재정 부담은 날로 배가되었다. 게다가 권위적인 경제 정책은 군인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고, 이 모든 현상이 시골의 사회적 위기를 가중시켰다. 초기에 소규모의 약탈로 시작된 반란은 3세기 후반부에 몰락한 농민들의 폭동인 자크리(Jacquerie)의 난으로 크게 번지게 된다. 자크(Jacques)는 프랑스에 거주한 농민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이들의 반란을 자크리의 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1358년 흑사병의 창궐과 백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부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부터 자크리(Jacques)의 난은 전체적으로 농민 반란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들은 대지주 귀족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옹호한 로마 제국의 낡은 지배 체제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했다. 연이은 농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에는 불안과 무질서가 창궐했고,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알라만 족과 프랑크 족과 같은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233~234년에 최초로 서부 게르만계 혼성 부족인 알라만 족이 원주지였던 엘베 강 유역으로부터 이동하여 라인 강을 건너 플랑드르의 로마 속주까지 진출했다. 이에 진노한 로마 황제 막시미누스(Maxininus, 재위 : 235~238)는 알라만 족들을 다시 엘베 강까지 밀어냈지만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로마로의 영내 이주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로마 제국의 갈리아-게르마니아 무정부 상태를 이용해서 게르만 계통 민족의 이동은 계속 이어졌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있던 4세기 중반에 아시아 기마유목민족인 훈족이 동유럽에 침입했다. 이에 고트족이 발칸 로마 속주로 이주함에 따라 이것을 계기로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이동이 시작되어, 그 후 약 200년간 유럽은 민족 대이동의 암혹 시대가 지속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에 의해 촉발된 게르만 계통 민족의 대이동은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프랑스 사가들에게 이 사건은 이민족의 대 침입으로 규정되었으며, 독일사가에게는 민족 대이동으로 규정됨에 따라 서유럽 사가들의 서술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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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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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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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10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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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스페인 바스크족 이야기
    바스크족은 중세 시대 때는 소수 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동맹 등으로 외교적으로 자주성을 지켜내면서도 스페인 왕국 성립에 참여해 스페인 시민이 되어 동화되는 등 유연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통합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의 왕가들은 모두 바스크 민족의 왕이었던 산초 3세의 후손들이다. 결국 스페인의 중세 왕조들은 바스크족의 후예들, 그리고 바스크족이라는 이렇게 스페인 제국 출발의 핵심에는 바스크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페인계와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이들 바스크족의 혈통이 들어간다. 게다가 프랑스에 여왕을 결혼시킴으로써 결혼 동맹으로 동군연합이 되었고 위그노 전쟁에서 부르봉 왕가의 외가로써 참전해 부르봉 왕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스크족들이 유럽 강대국들과의 결혼 동맹과 군사적인 지원에 성공한 결과 많은 유럽 강대국들의 왕가에 바스크족의 혈통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바스크족을 소수 민족이라 낮추어 보는 국가는 없고 스페인 내에서도 매우 위상이 높다. 중세 시대 바스크족은 다른 유럽인들과 다르게 바이킹들과 평화적으로 교류했는데 이들로부터 조선술, 항해술을 전수받았고 바이킹 몰락 이후에는 대서양의 주인으로 불렸던 만큼 조선술과 항해술에 매우 뛰어났다.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도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왔던 바스크족이 콜럼버스의 모험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획, 고래잡이, 선박, 철광석 수출 등의 사업을 했고 영국, 북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며 무역 흑자로 막대한 수입을 올려서 당시부터 매우 부유한 민족들이었다. 바스크 지방은 원래 나바라 왕국의 영토였지만 1512년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다만 통일 스페인이라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연합체로 구성된 국가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 분권의 특성이 강했고 다른 지방들이 그러하듯이 바스크 지방 또한 폭 넓은 자치를 누렸다. 특히 스페인의 군주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 바스크 지방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바스크 지방에는 더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 19세기 말 산업 혁명 시기 영국 자본이 많이 유입되면서 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했고 금융 쪽에 강하다는 점은 지금도 남아 BBVA 은행(라리가 공식 스폰서인)과 이베드롤라(Ibedrola) 은행의 본사가 빌바오에 위치하고 있다. 바스크인들이 경영하는 몬드라곤 협동 조합은 독특한 운영 방식으로 대부분의 근무처와 다른 장점을 내세워 웬만한 대기업 이상의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일자리 창출 또한 우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원래 바스크 지역은 자치권 확대 약속 때문에 공화 진영에 가담했지만 공화 진영 중 가장 보수적 색채가 짙은 지역이었다. 바스크 지역은 전쟁 전부터 중앙 정부와 멀리 떨어져 나머지 유럽, 아메리카와의 각종 비즈니스로 인해 벌어들인 돈을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현지 산업 노동자들과 소위 '민족 자본가'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바스크 가톨릭 사제들 또한 스페인 전국 규모의 극우 정치판과 거리를 두어 바스크 지방 자체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다른 지방보다 좌우 계급 및 이념 갈등, 세속주의와 카톨릭 교권 사이의 갈등이 확연하게 적었던 지역이었다. 이러니 대외적으로 자치권 확대를 위해 군인들이 밀어주는 스페인 중앙 집권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공화국 정부와 전략적인 동맹을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머지 스페인 공화파 진영을 장악했던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사회 혁명과 무관하게 돌아가게 된다. 바스크족은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졌던 로마에 동화되면서도 특유의 전통적인 남녀 평등 상속 문화를 중세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고수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에서 전통적으로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었고 이것이 유래와 전통이 되었던 민족이다. 1937년에 바스크 지역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항복했을 때 바스크 지역 정부는 국민 진영에게 평화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항복을 조건으로 맺어진 그 약속은 결국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 유명한 게르니카가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코 정권 수립 후에는 중앙 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바스크족의 무장 투쟁 단체인 ETA가 등장했고 2018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분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ETA는 평화적으로 독립을 요구했던 카탈루냐와는 달리 행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는데 이들은 스페인 중앙 정부 인사를 납치해서 죽이거나 정부 건물에 폭탄 테러를 하는 등 무력 투쟁이 주류였다. 한때는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분리주의 테러리스트 중 가장 악명 높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스크족이었다. 이에 대한 일례로 1992년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및 세비야 엑스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었다는 역사의 기념비적인 날들이 이어지며 ETA가 테러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작 ETA는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주민들 중에 스페인과 화해하며 무장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신입 ETA 전사가 거의 입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독립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세도 걷히지 않아 거의 쇠퇴해갔다. 이로 인해 무장 폭력투쟁은 완전히 사라졌고 스페인 정부의 통치에 순응하고 있지만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더불어 바스크는 스페인 정부에서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지역이다. 한 때, 대한민국의 외교부 사이트에서조차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내에서 여행금지지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였다. 스페인의 락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La Oreja de Van Gogh)의 멤버이자 작사 담당인 파블로 베네하스(Pablo Benegas)의 아버지인 호세 마리아 베네하스(José María Benegas, 1948~2015)가 스페인 사회노동당(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의 국회의원을 역임했을 정도로 최근 바스크족의 스페인 정치에 참여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며 2004년 스페인 총선거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인민당에 압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에 마드리드 지하철 테러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원내 1당을 차지했던게 컸고 그로 인해 집권에 성공했지만 2008년 총선 이후, 이후로 인민당 정부로부터 이어졌던 부동산 호황이 금융위기가 일어나면서 자금줄이 막히다시피하며 처절하게 붕괴되었다. 부동산 시장이 급속히 붕괴되자, 많은 기업들이 파산의 길로 접어들면서 전체 실업률이 금융위기 이전의 3배 이상으로 뛰어오르고 청년실업률은 40%-50%를 넘나들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 이전에 30%대였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중도 은행 구제에 대량의 재정을 소모하면서 100%를 넘기기에 이르면서 국가 경제 파탄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스크주 지역은 스페인에서 경제 수준이 월등히 높은 지역이고 부자 동네임을 자처하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보다도 1인당 GDP가 훨씬 높다. 카탈루냐의 경우 프랑코가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공업 단지 조성을 해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해 주었지만 바스크는 전혀 그러지도 않았기에 바스크족 스스로가 일구어낸 쾌거라 보는게 맞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주(州)에 속했다.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 사정이 나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일례로 2010년 기준 안달루시아의 1인당 GDP가 22,000$인 데 비해 바스크는 41,000$다. 바스크의 경제력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실업률의 경우 2012년 바스크의 실업률이 14%였다면 안달루시아 지방의 실업률은 35%였다. 그렇지만 급여 수준으로 볼 때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스페인 국립 통계청(INE)에서 발간한 연간 임금 구조 조사 (Encuesta anual de estructura salarial)을 보면 빠이스 바스코(País Vasco)의 평균 임금은 26,535유로, 스페인 전체 평균은 22,726유로다. 앞서 언급한 안달루시아 지방은 20,891유로이며 가장 적은 소득의 임금은 19,278유로의 카나리아 제도로 나타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전체 평균보다 20% 가까이 높으니 바스크 지역의 경제력은 스페인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스크는 고래 잡이 산업으로도 유명했다. 9세기부터 시작된 바스크 지방의 포경 산업은 주 본거지인 비스케이 만의 고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나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섬까지 진출했다. 나중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이들도 바스크 출신 포경 선원들을 상당히 많이 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진출한 선원들 사이에서 아이슬란드어와 바스크어의 피진어(Basque-Icelandic pidgin)가 생겨나기도 했고 북아메리카에 남은 유일한 프랑스 영토인 생피에르 미클롱(Saint-Pierre et Miquelon)의 국기에 바스크 지방 깃발이 삽입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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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9
  •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집단 서방
    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시작점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라비아 선박의 비 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의 도시들은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으며 시민들의 손과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미리(Miri) 학살 사건과 커리(Curry) 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학적인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다른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그렇지 않아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직접 향신료 산지로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고 있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했다.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리케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아 4척의 범선과 170여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 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코 다 가마는 여행기를 서술했는데,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라비아 인 상인 2명이었다. 이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인도까지 왔는지 의아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Jamorin)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상인들이 보기에는 탐험대의 무역 상품들이 한심해 할 정도로 저 품질이었고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것을 버리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황금을 가져오라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 내려져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에 인기가 많은 캘리코 면직물의 본 고장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이 외에도 당시의 유럽 문명은 선박과 화약 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역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로 인해 통상 교역을 하는데 실패했고 함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에 나서 1499년 9월, 마침내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최근 예멘 후티 군대에 의해 홍해가 차단당하고 있다. 후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이유로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잇따라 공격하면서 글로벌 해상 물류가 큰 차질을 빚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상선을 공격하는 예멘 앞 바다의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은 중동과 유럽을 잇고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주요 해상 수송로이다.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30%가 홍해를 지나고 있다. 덴마크 국적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는 “수에즈 운하를 지나 예멘 앞 바다(바브 알 만다브 해협)를 통과할 예정이던 모든 선박에 이 지역 운항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하파크-로이트도 최소 18일 동안 이 회사 선박의 홍해 통과를 중단키로 했고, 스위스 MSC와 프랑스 CMA-CGM 등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물동량 기준 세계에서 유명한 글로벌 해운사로,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약 53%를 차지하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지난 15일 머스크의 화물선 ‘머스크 지브롤터’와 MSC의 ‘팔라티움 3′ 화물선, 하파크-로이트의 컨테이너 함선 ‘알 자스라’ 호를 미사일과 무인기로 공격한 것에 따른 조치다. 후티 군대는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발발 이후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10여 차례 공격했다. 하루 동안 상선 3척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만든 상품을 실은 컨테이너 함선과 중동 걸프만에서 나온 원유를 나르는 유조선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주로 뱃길이 짧은 수에즈 운하를 지나왔다. 하지만 후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면서 주요 해운사들은 자사 선박들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앞을 통과하는 우회로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뱃길이 5,000㎞ 이상 길어지고, 화물 도착일도 7~10일 가량 늦어질 수 있다고 해운 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운로는 일찍이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항로와 유사하다. 집단 서방은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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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9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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