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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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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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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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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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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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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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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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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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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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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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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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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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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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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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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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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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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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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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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과 우트킨의 죽음에 대한 단상
-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가 텔레그램을 통해 트베리 지역의 비행기 추락 사고 조사의 일환으로 한 유전자 검사가 완료되었다고 밝혀왔다. 사망자 10명의 명단과 대조해서 확인했으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사망자 신원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프리고진과 우트킨이 모두 사망한 것이 확정됨으로써 마침내 모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고의 원인이다. 연방수사위는 여객기 항공 운전 규정 준수 여부 등에 대한 조사도 한다고 밝혔지만 러시아 정부가 프리고진 사망 사고 진상을 밝힐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내 생각으로는 누군가가 기체에 폭발물을 설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푸틴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영내 한 가운데서 그들을 제거했다가는 푸틴이 얻을 이익이 없고 오히려 세계적인 비난을 들을 뿐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내년에 대선이 있다. 표의 향배를 가르는 이상 행위는 오히려 추가 집권에 독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도 득이 없고 실이 많은 행위를 장기 집권자가 왜 하겠는가?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군사 반란의 실패는 결국 본인의 운명과 군부 내 친(親) 프리고진 세력이 몰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프리고진이 게라시모프를 대신하여 차기 총참모장으로 밀었다는 세르게이 수르비킨 전 특수군사작전 총사령관과 자포로제 지역 방어에 나선 제 58 연합군 이반 포포프(Иван Попов) 장군, 제 106 공수여단장인 블라디미르 셀리베르스토프(Владимир Селиберстов) 등이 사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포프 장군은 항명이 면책 사유였고 바흐무트 인근에 주둔한 제 106 공수여단의 셀리베르스토프 장군은 알렉세이 듀민(Алексей Дюмин) 툴라 주지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 경호실장 출신의 듀민 주지사는 프리고진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후임으로 낙점한 전 국방차관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푸틴 대통령의 젊은 후계자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듀민은 푸틴 대통령의 후계 지위에서 낙마하게 되었다. 이번 쿠데타에 모스크바로 그대로 밀고 들어갔어도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의 수비군들이 공군이 출동하고, 우랄 지역에 분포한 러시아군 10만의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버텨만 준다면 프리고진의 군대는 전멸했을 것이다. 그런데 평소 그리 가깝지도 않은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의 설득이 어떻게 통했으며 왜 모스크바로의 진입을 멈추고 벨라루스로 향했는지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프리고진과 우트킨 등 '바그너 그룹' 지휘관들이 이번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최종 확인되자 남은 바그너 그룹 용병들이 차후 어찌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사망하기 이틀 전인 21일에만 해도 프리고진은 사막에서 위장복을 입고 소총을 든 모습으로 "모든 대륙에서 러시아를 더욱 위대하게, 아프리카를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는 영상을 올렸다. 6·24 군사 반란 미수 사건 이후 선택한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피력한 것으로 평가되었었다. 7월 중순, 셀리베르스토프 제106 공수여단장이 듀민 주자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물러났고, 친 프리고진 그룹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프리고진 인맥의 파워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프리고진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 중 하나인 수로비킨 전 사령관도 쿠데타 미수 이후 내내 잠적했었기에 숱한 음모론들이 양산되었다. 수로비킨은 지난 22일 러시아 항공우주군 사령관에서도 해임되었고, CIS 국방부 장관 협의회 산하 대공 방어 문제 조정위원장이라는 명목상의 지위에만 남았다. 그리고 수로비킨의 이름은 러시아 국방부와 방공 위원회 홈페이지에 조정위원장으로 올라 있는 상태이다. 프리고진의 죽음으로 인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러시아 군 내 인맥과 파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켜 오면서 불협화음을 일삼고 있었는데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로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 군부는 쇼이구 국방장관과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에게 완전히 장악되었으며 오히려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군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바그너 그룹의 조직이 개편될 가능성이 있지만 전반적인 조직 운영은 안드레이 트로셰프(Андрей Трошев)에 의해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바그너 그룹은 두고 두 명의 CEO가 이끌어가는 회사로만 볼 게 아니라 다수의 임원들과 그로 인한 후원자들 등과 서로 얽히고 섥혀 있는 이해 관계를 가진 군사업체로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러시아 총정찰국의 안드레이 에버리야노프(Андрей Аверьянов) 장군을 차기 수장으로 가능성이 있다. 당분간은 트로셰프의 지휘로 시리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높다. 시리아, 말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리비아 등에서 수익성이 좋은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였고 여러 정권들과 군사적으로 체결된 계약이 남아있음에 따라 이를 계약 만료 때까지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새 지도부 아래 계속 유지되거나 다른 러시아 용병 그룹에 흡수될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일부 바그너 그룹이 복수하겠다고 하는데 이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크라이나에 이들이 항복해서 그들에게 합류해봤자 이미 이들은 서방이나 우크라이나에 전범으로 찍혀 있는 상황이라 처벌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푸틴이나 러시아 군부를 기습하기에는 병력이 매우 일천하다. 결국 이들조차도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군에 흡수되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무모하게 테러 전략을 감행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긴 하다. 그로 인해 러시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계 및 검문검색이 강화될 예정이라 한다. 현 전황을 보자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대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세 전환점도 아니고 최대한 하리코프 지역을 압박하면서 가을 비가 내리는 라스뿌띠쨔 기간까지 이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러시아 군 내 복잡한 사정들도 정리되면서 아마 겨울 공세로 러시아의 공세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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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과 우트킨의 죽음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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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과 시돈의 경제적 성장
- 페니키아(Phœnicia)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고대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 국가의 중심 지역들은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있었다. 과거에는 페니키아 문명이 약 3200년 전에서 약 2900년 전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 해상 무역 문화를 보유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발굴의 결과, 페니키아 문명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6000년 전에 존재했던,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계하는 기시(Gish) 문명과 연계되어 있다. 학자들은 기시 문명이 아프리카의 쿠마 문화(Kuma), 나일 강 유역의 쿠시(Kush) 문화와 연결 고리가 있으며, 그 관계를 연구 중에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페니키아인들은 무역 활동을 위해 북아프리카의 현 튀니지(고대 카르타고) 지역을 중심으로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권역,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도시, 이베리아 반도의 항구 도시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 중 가장 완벽하게 발굴된 도시는 시돈과 티레 사이에 있는 사렙타이(Sarebthai)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갤리선 선박을 사용한 문명으로 이를 이용한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다. 페니키아 문명을 이룬 이들이 단일 민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같이 도시 국가를 이루었고, 각 도시 국가는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협력하기도 했으나, 도시 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레반트 지역의 티레와 시돈은 페니키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고대 근동 지역의 여러 왕국들은 각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관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 간의 무역, 외교, 동맹 체결, 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 등을 통하여 교류해 갔다. 고대 근동의 왕국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각 중동 제국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정치 및 사회로 통치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 구역을 만들었고,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개의 대륙 사이에 놓인 팔레스타인은 여러 민족의 이동과 이주의 통로였으며, 그 결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상당수의 셈어계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셈족들 가운데는 아람족, 모압족, 가나안족, 아모리 족 등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인도와 유럽 언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의 하티 족으로 알려진 헷족,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후리 족, 필리스티아라 불리는 블레셋 인 등이 살았다. 지중해 연안 곳곳에 도시 국가들이 세워졌으며, 예리고, 므깃도, 하솔, 게셀 등은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이 시기에 페니키아에서는 초기 가나안 언어인 알파벳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나안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의 모체가 되었다. 고대 근동에 대한 이와 같은 관찰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인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이스라엘 초기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히브리 성경 내에 들어가 보면 고대 팔레스타인 나름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특징과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고대 근동의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함과 동시에, 그들만의 고유한 상황과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장 이전의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관해서는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는 히브리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始祖)이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창세기 12장)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족장 이전의 가나안 땅의 환경에 관하여 약간 그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B.C 약 2000년경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형태의 대변혁의 시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의 시작과 더불어 막강한 세력을 남북으로 팽창시켜 나갔다. 북쪽의 히타이트 제국 역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 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모리 인들의 이동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지역에는 에돔(Edom), 모압(Moab), 암몬(Amon), 블레셋(Bleset) 등의 세력들이 머물러 살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들 세력은 주로 높은 문화 수준을 갖춘 도시 국가를 형성하였다. 한 통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 계급을 두고 있었으며, 때로는 도시 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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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과 시돈의 경제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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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 2022년 3월 26일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 연설에 대한 논평
-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2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진행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공개 연설에 대해 논평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폴란드 바르샤바의 구 왕궁 광장에서 "러시아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나토의 동유럽 최전선으로 알려진 폴란드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 중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권좌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저격한 것이다. 바이든의 이러한 언사는 자못 푸틴 대통령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문제 삼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미국이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든이 푸틴 대통령에 의해 권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것은 최악의 외교적인 무례한 처사다. 바이든이 뭔데 러시아 최고의 수반에게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며 말할 수 있는지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인 것이다. 전범인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조차도 사담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그런 외교적인 무례한 발언을 한적이 없다. 하물여 부시도 그러했는데 바이든은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외교적인 실수까지 감행하며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핵 버튼 누르면 이후의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바이든은 푸틴 대통령을 연일 자극하고 있으며 바이든은 러시아에 대해 강경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미 푸틴 대통령이 핵 무장을 언급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자극은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포함한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한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이 “수십년간의 전쟁”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이 전투에서는 며칠, 몇달 안에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인즉,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군사작전을 끝내더라도 미국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 군사력 등을 동원해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억압한 사례를 거론하며 러시아에 맞서 긴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때는 뭐하고 있다가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언급하여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인가? 당시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에서 자유진영인 미국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억압한 소련을 비난했어도 군을 보내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 때문이라 변명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산진영인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문제라 간섭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는데 미국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동유럽 민주화 운동을 이제와서 언급하여 러시아와 장기전을 벌이자는 이유가 뭘까? 빨리 2년이 지나가 바이든이 떨어져서 정권이 교체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푸틴이 아니라 이 인물이 정말 위험천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인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의 이 말은 러시아 국민들도 같이 자극하고 있다. 이 발언에 대해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고 반박했는데 푸틴은 러시아의 대다수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푸틴의 지지율이 7~80%를 넘나드는데 푸틴을 뽑아준 러시아 국민 7~80%를 적으로 삼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러한 발언은 민족주의가 강한 러시아 국민들의 분개를 이끌어 내어 오히려 푸틴을 중심으로 단합할 수 있다. 바이든은 러시아의 문화 코드, 국민 정서에 대해 매우 무지하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이끄는 국가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곧 굶어 죽어도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단합할 수 있는 국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러시아인들의 민족적인 끈기와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다. 바이든의 그러한 발언은 오히려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 앞에 결집하여 단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위험한 발언인 것이다. 이제까지 바이든 대통령이 내놓은 표현 중 수위가 가장 높은데 이와 같은 외교적 무례에 대해 백악관 측은 이후 바이든의 연설에 대해 "러시아에서 권력 교체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러시아 국민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백악관 측이 바이든의 발언이 러시아 정권 교체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것 아니냐는 관측에 놀라서 해명에 나선 이유는 바이든이 외교적인 실수와 중대한 결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권력이나 정권 교체를 논한 게 아니다”라며, “푸틴이 이웃 국가들이나 그 지역에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의 폭력적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것일 뿐, 미국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명을 한다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내정간섭성 발언은 오히려 러시아 국민들의 반미 정서를 강화시키며 단합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핵 버튼을 눌러 제3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킬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답게 발언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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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 2022년 3월 26일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 연설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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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나 프랑스와 노예무역을 하면서 들여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
- 미국 13주가 독립한 이후, 영국이나 프랑스와 노예무역을 하면서 들여온게 아프리카 흑인들이다. 신체적으로 우월하고 힘이 좋으며 지능이 떨어진다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흑인 노예 이야기가 그런데 비단 서구 유럽만의 문제였을까?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이렇게 흑인들에 대한 인종학대 및 차별은 어떻게 생성이 됐을까? 그리고 왜 흑인들 하면 소위 노예라는 인식부터 하게되었을까? 흑인 노예의 시작은 단연코 로마 제국부터다. 로마 제국이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 시초였다. 특히 아프리카 흑인들은 피부색으로도 인하여 로마인들에게 천대를 받았는데 운동 능력 또한 뛰어나기 때문에 원형 극장 검투사 노예나, 원로원 귀족들의 소작농노로 고용되기도 했다. 게다가 로마 제국이 카르타고 다음으로 아프리카 대륙 민족에 타격을 준 것은 현재 리비아 땅에 거주하고 있는 누미디아 인들로 이들의 주력도 흑인 기병이었다. 본래 기마 전술에 익숙치 않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격퇴했을 때 누미디아의 기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이들은 말에서 떨어져도 보병으로 격투가 가능했던 용맹한 전투종족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누미디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헬레니즘의 혈통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덕택이었다. 당시 이집트도 용맹한 누미디아를 잡기 힘들었는데 로마가 정벌에 나서자 이집트는 병거와 기마병들을 총동원했고 코끼리 부대까지 대량 동원해 누미디아를 정복해버렸다. 이후, 누미디아 족이 살던 리비아는 로마 제국에 근근히 흑인 노예들을 공급하는 노예 창고로 전락했다. 현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는 흑인 노예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으로 매우 유명했던 곳이고 당시의 흑인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처럼 제대로 인간다운 권리를 얻어보지 못했다. 로마 시대 때는 노예 계층이 4개의 계층으로 분류가 되는데 첫번째가 마케도니아, 그리스계이고 두번째가 수메르계, 유태계였으며 세번째가 게르만계와 켈트계, 그리고 마지막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위의 3개의 계층에 비해 마지막 계층인 흑인들은 가축 취급도 받지 못했다. 특히 공화정~ 제국 초기 시기의 흑인 노예들은 가축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 주인들에게 착취를 당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외면 및 학대를 당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철학자인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Seneca)도 자신의 에쎄이에 Nigrum servi tamquam designata non agnoscitur populo. (흑인 노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라고 표기하기도 했을 정도다. 로마 세계에서 노예의 삶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노예들이 들판, 도시, 소작농노 등의 다양한 하층계열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매일의 삶의 질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모든 것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모든 노예의 주인은 자기가 소유한 노예들의 삶을 규정했으며 그것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가이우스(Gaius : 130-180)가 저술한 에 의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과도한 폭력은 금지되었고 만일 폭력에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국가가 강제로 노예를 매각할 수 있게 하면서 이전까지 금지된 노예의 결혼과 재산보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면서 노예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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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나 프랑스와 노예무역을 하면서 들여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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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 나치즘의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 부헨발트(Buchenwald)는 독일 튀링겐 내에 패각(貝殼) 석회암층으로 형성된 구릉 지대인 에테스베르크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강제수용소라고 할 수 있다. 부헨발트가 악명이 높았던 것은 약 28만 명의 수감자 중에 약 5만 7천 명이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원인이 대부분 극심한 굶주림과 기아, 질병 때문이었다. 부헨발트는 정확하게 말하면 강제노역 수용소였고, 수감자들이 대부분 인근 군수공장에서 매일 강제노역을 하면서도,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인해 굶어 죽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러시아인들, 폴란드인들, 동유럽의 집시들, 정치범들, 전쟁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는 유학 시절 바이마르를 방문했다가 잠깐 시간을 내어 부헨발트를 방문했는데, 바이마르에서 북서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시간상 별 무리가 없었다. 숲길을 지나 강제수용소 정문을 통과했는데, 그 당시에 필자는 정문에 표어를 알아채지 못했고,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분이 정문에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Jedem das Seine)이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고 했다. 이 표어가 무슨 뜻일까라는 생각이 돌아오는 길에 필자의 뇌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나중에 필자는 이 말의 기원에 관해 알아보았다.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이라는 표어는 원래 라틴어의 ‘suum cuique’로 ‘각자가 각자에게 귀속하는 것을 얻는다’는 뜻이었다. 즉 이것은 라틴어로 보면 일종에 ‘정의’의 표현인데, 나치 방식으로 이 표어의 뜻은 나치 자신이 수감자들을 수용한 것이 일종의 정의로운 행위이고, 그 때문에 ‘너희 수감자들이 이곳에 마땅히 들어와야 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실로 섬뜩하다! 이러한 방식은 전형적인 나치 방식의 기만적 수법이다. 얼핏 들어 보면, 나치의 표어는 곧바로 이해되지 않아 쉽게 현혹되기가 쉽다. 부헨발트의 이곳저곳을 잠시 둘러 보던 중에 바로 앞에 거대한 소각탑이 있어서 필자는 가보기로 했다. 그때 필자는 내부 시설을 다 둘러 보기는 어려웠고, 소각장만 잠깐 볼 수 있었는데 순간에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역사적 참상의 현실 앞에 침묵과 기억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이성이나 존귀함과 같은 것은 인간의 야만과 폭력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나치 정권의 야만적 행위가 왜 인류에게 최악의 전쟁범죄로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지금도 신나치즘을 왜 우리가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지가 참혹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누구든 한 번쯤 각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반적 흐름과 반대로 망자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행태들도 나타나기도 했다. 일부 관광객들이 부헨발트 묘지 언덕에서 썰매를 타기도 했고, 일부 정치인들은 그 당시에 소각장에서 시체들이 타는 냄새로 주민들이 불평을 했다는 식으로 말을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엄숙하면서도 경건하게 희생자들을 참배하는 장소에서 이러한 말과 행동을 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나치 정권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했지만, 극우주의의 확산으로 종종 나치즘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독일통일 이후에 구동독 지역에서 나타났다. 신나치즘은 극우 민족주의와 연결되어서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벨기에, 그리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미국, 남미 등등에도 확산이 되고 있다. 신나치즘은 그 혐오의 대상을 유대인에서 이슬람, 외국인 노동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반유대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면서, 범게르만주의적인 히틀러의 나치즘과 다소 다르다. 특히 유럽에서 경제적 위기의 조짐이 있으면, 신나치즘의 확산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심지어 나치즘의 피해국들에서도 내부적으로 신나치즘이 다양한 형태로 유포되기도 한다. 신나치주의자들은 SNS를 통해 나치즘의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면서, 정치적 매장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신나치즘을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른바 독일 민족민주당(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NPD로 표기)은 신나치즘의 정당이다. 이 정당은 이후에 조국당(Die Heimat)로 당명을 바꾸었는데, 이 말도 엄격히 따지고 보면, 극우 민족주의에 근거한 이주민들에 대한 추방의 의미도 은근히 들어가 있다. 이후로 이 극우 정당은 독일 헌법재판소로부터 6년간 국가의 정당지원금을 받지 못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이 극우 정당의 해산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현재 이 정당의 상당수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로 표기)로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신나치주의자들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을 신봉하고, 나치즘의 문양이나 상징물을 전자상거래를 통해 판매하기도 하고, 나치식의 경례를 군중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거나, 외국인 혹은 이주민, 난민을 집단으로 폭행하거나, 기숙사 혹은 숙소에 심지어 방화를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독일 총리들이 이러한 행태들을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망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정파를 떠나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 또 대다수의 독일 국민은 나치즘의 부활을 원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지니고, 시민사회와 언론도 신나치즘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많이 부족한데, 현재의 상황은 마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듯, 신나치즘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어디서든 출현할 수 있다. 신나치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나치주의자들이 신봉하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책은 독일에서 한때 금서로 학술적인 연구를 위해 일부 열람만 하도록 허용되었으며, 2015년까지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지만, 전자상거래로 일부 거래가 되기도 했다. 2016년부터는 이 책이 독일 뮌헨 현대사 연구소에 의해 원문을 포함해서 비판적 주석을 덧붙여서 재출판되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은 일종의 자서전으로 반유대주의, 민족 차별주의, 인종주의, 팽창주의의 정당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민주주의와 좌파이론에 대한 비판을 노골적으로 전개한다. 이 책은 분명히 정치적인데, 그러면 당연히 이 책도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직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무비판적으로 이 책을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들은 분명히 외국인이나 난민 혹은 이민자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들이 각종 미디어 혹은 SNS에서 선전되는 가짜 뉴스 혹은 정보에 자주 접속하면 극단적 성향으로 빠져들어 가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 신나치즘적인 성향으로 진화되기 쉽다. 작년 독일에서 극우 인사들이 모여서 독일인이 아닌 이주민들을 추방하려는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는 사실이 올해 1월에 폭로되었다. 그렇게 되면 약 200만 명의 이주민들이 추방되어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극우 활동가들과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 관계자들의 이 모임에서 논의된 것 자체는 나치 정권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나치즘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또 그동안에 신나치즘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지도록 독일 당국에서 여러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은 대다수 독일 국민에게는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독일 전역에서 약 25만 명의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정치권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을 집중적으로 강하게 성토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로 이민자가 급증하자, 처음에 미미했던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율은 23%로 급상승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각종 스캔들과 더불어 위의 문제로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율은 17%로 하락했다고 한다. 필자는 신나치즘을 매우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계심이 약화할 때, 신나치즘은 여러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신나치즘이 히틀러의 나치즘과 다르게 변형되었다고 하지만, 그 뿌리는 근본적으로 같다. 부헨발트의 참혹한 역사적 현장을 망각하지 않는 것도 신나치즘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나치즘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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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 나치즘의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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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의 시리아 - 이라크 -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과 문제점, 그리고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 난민을 수용 못하는 이유
- 이슬람권에서 난민을 받고 있는 국가는 시리아 인접국으로 나타난다. 터키, 레바논은 서유럽으로 가기 위한 통과점이고 이라크, 리비아는 난민을 받는 국가라기보다는 난민들이 오히려 발생하는 국가이다. 실제로 유럽에 입국한 아프리카, 중동의 난민들 중에는 시리아 뿐만 아니라 리비아, 이라크 주민들도 상당수에 있다. 한편 부유한 산유국 이슬람 국가들은 같은 무슬림 난민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 상황은 열악하지만 경제는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만큼 소득이 높고 재정이 탄탄한 UAE, 카타르, 쿠웨이트, 이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족해도 왕족들의 호화 및 사치 생활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들 난민을 받는 척만 하거나 빗발치는 국제적 비판으로 인해 난민촌만 건설하고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선별하여 거의 안 받는 형식으로, 빈 난민촌 시설만 크게 지어놓고 실제로는 받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런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출신 난민만 받는 편이다. 그나마 UAE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차드나 에리트레아 출신 무슬림 난민들을 데려다 농장에서 일자리라도 주었지만 쿠웨이트나 카타르는 그런 것도 없다. 그 이유는 두 국가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없고 국토도 매우 작기에 난민 수용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도 받아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기사들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난민 수용은 250만 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관련 기사에서도 UAE 또한 24만 명 이상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2015년 8월 쯤 시리아 난민은 760만에 국외 탈출자는 370만~400만 정도에 달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주장대로라면 다른 나라엔 난민이 거의 없고 사우디에만 난민이 넘쳐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이들은 난민을 직접 수용하는 대신 재정적 지원으로 충당했다. 사우디는 EU 시리아구호기금으로 1,840만 달러(약 219억 원)를, 쿠웨이트는 3억 400만 달러(약 3,621억 원)를 지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11억 달러(약 1조 3,014억 원)를 내고도 난민 1,500명을 받았다고 전했다. 휴먼라이츠워치에서 중동을 담당하는 사라 위트손 사무국장은 중동에서 같은 무슬림들에 대한 고통 분담은 없다. 걸프 국가들은 수표를 끊어주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이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에어컨과 급수시설이 넘쳐나는 300만명 수용의 난민촌을 지어놓고 실제 난민은 받지 않았다. 이들 촌락들을 건설한 것도 유럽과 서방에서 강한 비판과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정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겠다는 압박이 작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늬만이라도 지었다는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결국 이 또한 사우디에 대한 미국의 압력인 것이다. 그때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요즘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미국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중동 왕정 국가들이 난민 수용에 소극적인 이유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과 와하브파 신정국가들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만 일을 몰아주고 현지 아랍인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사회 구조의 영향이 큰 것도 있다. 이들 걸프 아랍 왕정 부국들 입장에서는 시리아 출신 아랍인들이 오면 이들에게 외노자 지위를 주어야할지 아니면 자국민처럼 아무 일 안해도 각종 지원금을 주면서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지, 딜레마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카타르는 14만 달러, 쿠웨이트는 7만 달러에 달하는 1인당 소득을 자랑하는 부유한 산유국들은 난민을 거의 받지 않고 있으며 바레인보다 영토가 좀 더 넓은 카타르와 쿠웨이트는 중동 국가 중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적은 인구와 면적을 명분으로 역시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럽의 소국 벨기에처럼 면적이 좁은 나라나 인구 수백만에 불과한 북유럽 국가들도 받고 있다는 논리를 세우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중심이자 쉥겐조약으로 인해 어디든 갈 수 있는 벨기에나 인구는 적지만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UAE 보다 면적이 큰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와 환경이 전혀 다르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경우, 어떤 일이든 일자리를 만들어서 줄 수 있지만 국토 대부분이 사막인 국가들에게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한계에 있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경우 정작 자국은 시리아 난민들은 한 명도 받지 않는 정도를 넘어 잠시 공항에 경유하는 것조차 방해하면서 스웨덴과 독일에 이슬람주의 선교 자금을 투자한다는 점으로 비판 받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 하마드 국제 공항의 경우, 카타르 항공이 허브로 삼은 공항이기 때문에 그 수송량과 승객 처리량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하며 대개 유럽 혹은 아프리카 혹은 남미 노선이 하마드 공항에서 환승하기 때문에 이용객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항에 난민 경유는 이용객을 통제하고 받거나 아니면 이용객과 섞여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그렇게 되면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공항에 경유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자들은 도하 하마드 국제 공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자들이 하는 일종의 망상에 가깝다. 예멘 난민의 경우, 아예 시리아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예멘 내전이 터지면서 예멘인들이 가까운 사우디아라비아로 몰려들고 있다. 또한 오만도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학ㅎ 있는데, 오만 같은 경우에는 남한 면적 3배에 달할 정도로 영토가 큰 편이고, 인구도 아랍에미리트(850만)이나 요르단(약 800만)보다 훨씬 더 적은 400만 정도지만 영토 상당수가 사막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 그리고 오만은 수니파도, 시아파도 아닌 이바디파라는 극소수 종파이며 오만 인구 대다수가 이 종파이다보니 양 종파와 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당연히 이런 난민들이 들어오는 게 반가울 리 없으며 오만 입장에서는 종파가 다른 난민들을 함부로 받았다가 부국에서 빈국으로 추락한 레바논과 같은 상황이 돨 수 있는 것이다. 비교적 난민을 그나마 수용한 이란의 경우, 시아파 맹주 국가로 대다수가 수니파인 아랍권에서 환영받지 못한 국가지만 그나마 같은 시아파들은 이란으로 가서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란도 수니파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지만 시아파에 한해서 받아주고 있다. 이란에는 현재 10만이 넘는 시아파 난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란의 경우, 이라크 시아파 난민들이 많은 셈이다. 그나마 시리아의 인접국인 요르단은 인구가 1,000만 명에 불과함에도 인구의 10%인 65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았고, 레바논은 인구가 450만에 불과하지만 인구의 4분의 1이나 되는 110만 명의 난민을 수용했다. 이 나라들은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인접국이기 때문에 난민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헤 두 국가는 국내 치안이 급격히 나빠졌다. 터키의 경우 시리아 및 이라크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고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들이 통과하는 곳이다. 그래서 역시 난민들이 많이 몰렸는데 시리아 및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가지안테프만 해도 2010년 인구가 104만 정도 하던 도시인데 난민들로 인해 겨우 3년 사이에 180만 명 가까이 인구가 늘어나면서 갑자기 불어난 인구 때문에 난민들에 대한 처우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다. UNHCR에 등록된 공식적인 터키 내 난민 수는 2022년 9월 26일 기준으로 350만을 넘어섰다. 하지만 전수조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로 이 수치에서 최소한 50만 명은 더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집트에도 시리아, 이라크, 예멘 난민들이 상당히 들어왔으며 시리아와 지리적으로 거리가 더 먼 알제리나 튀니지, 모로코 같은 다른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에도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들이 상당히 많다. 리비아 역시 카다피이 정권 붕괴된 이후 정치적으로 몹시 혼란한 상황이지만 시리아와 이라크, 예멘의 난민들을 대거 수용하였다. 사실 처음에는 이슬람권에서 매우 평화로운 편이고 거리도 가까운 터키로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과 대다수 터키인들은 그들에 비해 훨씬 종교적인 난민들로 인해 제2의 IS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고 더불어 갑자기 몰려든 난민으로 인해 터키인의 생활고 및 난민들과의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코바니 위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샨르우르파도 수루치(Suruç) 군에서 IS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폭탄테러를 일으키자 난민들 중에 IS 조직원이 위장하고 입국했을 것으로 추측해 국경을 봉쇄하였다. 따라서 상당수가 요르단이나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한편 유럽의 몇몇 난민 수용 찬성론자들은 중동 이슬람 왕정 국가의 난민 거부에 대해서 이들 국가의 종교적 사정이라며 옹호 또는 외면하면서, 유럽 내의 반(反) 난민 여론에 대해 인종차별 등의 비난하였기에 대부분 비판받고 있다. 그런데 이들 난민들을 중동 왕조 국가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로 같은 이슬람이라고 중동 땅에서 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국토 상당 부분이 사막이라 이를 개간하기도 어렵고 발달된 유럽의 도시들이 촌락들에 비해 도시가 아닌 지역은 매우 환경이 열악하다. 그 열악한 상황에 투자해 요행히 시설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차후 대책이 전무하고, 정착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한계가 있다. 더불어 그런 한계점에 부딪치면 난민들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 노출이 되는데 그럴 경우, 인권 침해 및 학대로 욕을 먹는다. 즉, 받아줘도 욕을 먹고, 안 받아도 욕을 먹는데 차라리 안 받아서 욕을 먹는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중동의 뜨거운 사막 열기를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같은 이슬람이니 중동 국가들이 난민 받으라는 무식한 헛소리는 한국에서도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이 또한 집단 서방과 미국의 업보다. 제국주의로 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알박기 한 이스라엘부터 석유와 같은 자원들을 탈취하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 사이를 이간질해 서로 전쟁 벌이게 만들거나 미국 같은 경우, 직접 침공하여 파탄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난민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인해 발생했으니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애초부터 중동에 개입하지 말고 정상적인 상도덕으로 거래하여 공동의 공존을 시도했다면 이러한 사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이 중동에서 한 불장난이 수많은 난민들을 만들어냈고 그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은, 난민 뿐 아니라 난민을 받아들여 피해를 입고 있는 일반 유럽 현지 주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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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의 시리아 - 이라크 -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과 문제점, 그리고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 난민을 수용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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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의 이념을 갖춘 알바니아 벡타쉬파
- 근대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세 가지 주장이 등장했다. 첫째는 유럽중심주의적인 부분으로 유럽과 하나가 되기 위해 카톨릭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당시 정교회는 유럽의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입지가 허약하다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칸데르베이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둘째는 여러 종교적 경향을 정치와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셋째는 이슬람교를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이른바 알바니아-이슬람주의로서, 이는 반(反) 유럽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슬라브주의 및 그리스 정교회를 모두 배격하는 주장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위에 적시한 세 가지 입장 중 가장 적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알바니아가 처한 이런 이념 간, 혹은 현실 정치적 입장과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을 무저항주의 정파인 벡타시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벡타시파는 무슬림의 한 분파로 간주되고 있으며 기원은 13세기 하지 벡타시 벨리(Haji Bektash Veli)에 의해 창설되었고, 오스만투르크가 발칸을 정복하자 발칸 반도에도 따라 들어왔다. 이러한 벡타시파가 알바니아에 들어와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17세기 중엽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시 수니파는 정통 이슬람 및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권력, 아랍어 등과 연관성이 큰 된 반면, 벡타시파는 지역적 특색을 가진 문화, 지역 고유의 언어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통해 연관되어 진다. 19세기 알바니아 민족 혹은 지역주의에 주역을 담당한 인물은 벡타시파였던 알리 파사(Ali Pasa)였다. 20세기 초, 벡타시파는 전체 알바니아인 가운데 약 15%, 전체 무슬림인 약 60% 가운데는 약 1/4 정도였다. 이러한 벡타시파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동향의 중심이 되었고, 오스만투르크의 치하에서 불법적으로 알바니아 언어를 가르치는 교육의 중심이었던 정파인 것이다. 1922년 스크라파르(Skrapar)의 프리슈타(Prishta)에서 있었던 첫 번째 알바니아 민족 회합에서 알바니아 벡타시파는 터키 벡타시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1925년 터키에서 벡타시파를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한 다음에는 세계 벡타시파의 회합이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열리면서 터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벡타시파의 특징은 자유의 이념을 극대화하였고 기존의 수니파보다 더 세속적이었다. 벡타시파 무슬림들은 음주를 할 수 있었고, 벡타시 자미에서 술을 직접 생산하기도 했다. 이들의 교리는 남녀 평등을 추구하며 다른 이교적 종교 요소, 특히 정교회가 갖고 있는 교리의 요소들을 적극 수용했다. 기본적으로 벡타시파는 여러 종교의 교리들을 융합한 만신(萬神)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그리스 정교회의 전통이 강한 흑해 연안의 무슬림 벡타시파 일부는 사실상 은밀한 기독교인들(Cryptochristianoi)들로 간주되어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이들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불이익을 피하기 우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벡타시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는 실상과 다르다. 오히려 수니파의 보수적인 교리들에 대한 저항 심리의 발로 보는 편이 더 강하다.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이끌었던 선구자 중 하나인 나심 프라셰리(Nasim Prisheri)는 벡타시파에 대해 신앙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적인 부분과 여러 종교들의 교리들을 받아들인 결과로 인해 여러 종교들의 복합적인 요소가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벡타시파에 보이는 <꾸란>과 <성경>의 복합적 요소는 알바니아 내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벡타시주의(Bektashnism)는 일정 종교 혹은 민족 집단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를 근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자유와 각종 종교들의 융합적인 성격을 지닌 벡타시파는 상이한 종교적 갈등은 물론 상이한 민족적인 갈등까지도 봉합할 수 있는 이념적 장치를 지닌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알바니아에는 이슬람, 카톨릭, 정교회 등 세 가지 종교가 공존했지만 다른 나라나 지역과 달리 이들 세 종교 간 분쟁의 역사는 많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종교적인 믿음이 민족의식의 형성을 방해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종교는 정복자들인 오스만투르크가 지배적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요하고 이를 통해 민족 분할적인 통치 이념으로서 작용한 부분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알바니아 벡타시파의 존재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혹은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이고 있는 것에서 종교나 민족주의로 포장한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인 경우가 적지 않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인 이기심에 따른 분쟁에 대해 또 다른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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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의 이념을 갖춘 알바니아 벡타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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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과 북마케도니아의 갈등 문제
- 발칸반도의 역사를 관찰해 볼 때, 현재 북마케도니아 현실에 있어 어려운 문제는 그리스와의 국호 논란과 영토 분쟁, 서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과 갈등 문제에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볼 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리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대외적인 문제로 볼 때, 대내적으로 북마케도니아 정부의 소수 민족을 향한 관용과 포용 정책이 매우 경직스러운 부분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북마케도니아에 대한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등의 논쟁 및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불안정성은 북마케도니아 정부로 하여금, 자국 내 알바니아계 민족이 주장하고 있던 자치권 요구, 더 나아가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요구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북마케도니아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발칸반도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공화국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가 1991년 9월 유고 내전과 1992년 3월부터 보스니아 내전을 발생시켜 그 위기감이 한층 더 고조시켰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의 민족 간 충돌의 여파도 존재하고 있어 알바니아계와의 분쟁이 북마케도니아 등 다른 지역들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며 유고 내전을 비롯한 각종 발칸 분쟁들을 주시해 왔었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1991년 3월 북마케도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직후부터 계속하여 알바니아계가 다수 거주하고 있는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자치권 및 독립을 요구해 왔었다. 여기 독립 마케도니아를 이끌며 처음 대통령에 오른 키로 글리고로프(Kiro Gligorov, 1917~2012)는 국제 사회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인 국가의 존립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한계와 더불어 전체 약 200만 명의 인구 중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알바니아계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발칸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알바니아계와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는 국제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취임 초기 알바니아계와의 공존을 위해 부수상을 비롯한 2개의 장관직에 알바니아계를 임명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알바니아계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에 자체 투표를 통해 서부 마케도니아 자치국가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어 1993년 11월 북마케도니아 정부 전복을 목표로 일리리다(Ilirida) 자치 공화국 건설을 위해 알바니아 무장조직(AAA : All Albanian Army)을 결성하려다가 정부에 의해 발각되었고, 1995년에는 알바니아 비밀단체가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등 여전히 갈등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8년 이후로 확대되던 코소보 내 민족 갈등이 나토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웃하고 있던 코소보로부터 대규모 알바니아 난민 진입이 시도되었다. 그러자 북마케도니아 정부와 서부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계는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2000년에 들어 코소보로부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기 유입이 확대되었고 2001년 3월 초 테토보(Tetovo)를 수도로 정한 알바니아 민족 해방군(NLA : The National Liberation Army)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마케도니아 정부군은 알바니아 해방군에 비해 무기와 군사 조직 면에서 매우 열악하고 자체 진압 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국제 사회는 내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붕괴될 경우, 전략적인 요충지인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 제 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제 1, 2차 발칸전쟁과 같이 전쟁이 발칸 유럽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이는 미국과 나토 및 러시아의 신속한 군사적 개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01년 7월 5일 양측은 마침내 서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자치권 논의와 알바니아 반군의 무장 해제라는 국제 사회의 중재안인 오흐리드 합의안(Ohrid Agreement)을 받아들임으로써 내전이 완전히 종식되게 된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난 국제 사회에서는 마케도니아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칸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험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역사를 볼 때 마케도니아가 항상 발칸 유럽 분쟁의 주요 핵심 지역 중에 하나였고, 전략적 요충지인 마케도니아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영토 전쟁이 유럽 열강들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옴으로 인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에서 비롯된 우려라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 사회는 마케도니아 내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이로 인한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 이는 마케도니아 국가 존립의 위기가 형성될 것이고, 더 나아가 오랜 동안 발칸 남부 지역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발칸 유럽 내 주변 국가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의 군사적 야망을 부추겨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마케도니아의 위기 문제는 국제 사회에서 큰 관심들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할 것이다. 물론 마케도니아에 대한 그리스의 반대와 여러 외교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팽창 전략을 견제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현재 발칸반도의 남쪽에 자리하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마케도니아를 친미 전략 국가로 설정해 놓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미국은 냉전 시절이 종식된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유럽과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나뉘어져 있었던 발칸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따라서 대규모 경제 지원과 미군 주둔을 위한 군사 시설을 확보하고 전폭적인 외교 지원 등을 통해 마케도니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계속해서 추진해 왔었다. 이어 코소보 회랑과 연결해 세르비아의 육로 진출을 억제하고 러시아의 해상활동과 발칸 및 남동부 유럽 국가들과의 상호 연계성을 파괴하려는 전략을 중점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의 이와 같은 전략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이용되고 버려지는 역사적인 악순환의 반복 과정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근대 시대 이후로 코소보-마케도니아 지역은 지속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서구 열강들의 첨예한 국제 전략의 핵심 지역으로 위치하여 왔다. 따라서 강대국들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 문제를 둘러싼 진정한 해결책들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강대국들은 매번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주변의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방해해 왔으며, 결과적으로 제 1, 2차 발칸전쟁과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강대국들의 역학구도에 따른 영토, 민족적인 분열과 합병은 수없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현재 그리스와의 협정으로 나라 이름이 북마케도니아로 바뀐 마케도니아는 EU 후보국으로써 EU 가입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EU 가입을 위해 EU 회원국들이 요구하는 여러 경제 정책 및 사회 정책 등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러한 와중에 여러 어려움 및 사회적 마찰에 부딪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3년 7월 EU 가입을 어렵게나마 성공한 크로아티아의 경우와, EU 가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멀어 보이는 세르비아의 경우 등의 경우로 볼 때 북마케도니아가 대내적인 민족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실천의 의지와 그 가능성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북마케도니아의 EU 가입은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북마케도니아 정부의 EU 가입에 대한 애착과 선전 등이 현재 여러 대내외적인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에 그칠 것인지, 혹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이겨내고 EU에 가입함으로써 경제적 희망을 갖게 해줄 지는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간의 평화로운 공존에 따라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이것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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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과 북마케도니아의 갈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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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부 지중해 미케네 문명의 멸망 이후, 생성된 그리스 본토 아테네의 역사
-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B.C 12세기, B.C 1200년과 B.C 1150년. 붕괴는 동부 지중해인 북아프리카와 남동 유럽, 근동, 특히 이집트, 동부 리비아, 발칸 반도, 에게 해, 아나톨리아, 카프카스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많은 청동기 시대 문명에 대한 급변화, 폭력적이고 문화적으로 매우 파괴적이었으며 지역 권력에 급격한 경제적인 쇠퇴를 가져와 특히 그리스의 암흑시대를 열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를 특징 짓는 미케네 그리스, 에게 해 지역, 아나톨리아의 궁전 경제는 해체되어 1100년경부터 더 잘 알려진 고대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지속된 그리스 암흑기의 작은 고립된 마을 문화 등으로 변모했다. B.C 750년 아나톨리아와 레반트의 히타이트 제국은 삽시간에 붕괴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중기 아시리아 제국과 이집트 신 왕국은 살아남았지만 그 세력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화되었다. 반대로, 페니키아 인과 같은 일부 민족은 서아시아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군사력이 약해짐에 따라 증가된 자치권과 권력을 누렸다. B.C 1200년이라는 시대적 비정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으로 작용하는 이유로 나타났고 이는 독일의 한 역사가인 아르놀드 헤르만(Arnold Hermann)과 루트비히 헬렌(Ludwig Heeren)이 고고학적 근거와 소빙하기 1차 시기로 비롯되는 지질학적 근거를 들어 비정되었다. 특히 1817년부터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연구 중 하나에서 루트비히 헬렌은 그리스 선사 시대의 첫 번째 기간이 B.C 1200년경에 끝났다고 주장했으며, 이 시기는 10년 동안의 전쟁 후 B.C 1190년에 트로이가 함락된 연도를 기준으로 하였다. 이후 그는 1826년에 이집트 제19 왕조가 멸망한 시기인 B.C 1200년경까지 연도를 끌어올렸다. 서기 19세기의 헬렌은 그의 연구 기간 중 남은 기간 동안 바다 민족의 침략과 도리아인의 침략, 미케네 그리스의 몰락, 그리고 결국 1896년 남부 레반트에서 이스라엘 세력이 최초로 언급되어 나타난 시기를 포함하여 일련의 다른 사건들이 B.C 1200년경에 모여 있었던 것이 포함되었다. 메르넵타흐 스텔레(Merneptah Stele)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의 원인에 대한 경쟁적 이론은 19세기 이후 제안되었으며 대부분 도시와 마을의 폭력적인 파괴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화산 폭발, 가뭄, 질병, 지진, 바다 민족의 침략 또는 도리아 인들의 이주, 철공 작업 증가로 인한 경제적 혼란, 전차 전쟁의 쇠퇴를 가져온 군사 기술 및 방법의 변화가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진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붕괴 이후 야금 기술의 점진적인 변화로 인해 B.C 1000년 동안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철기 시대가 이어졌다. 미케네는 크레타에 이어 이제 트로이까지 함락시키면서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동부 지중해의 강력한 양대 숙적들을 격파하며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한 미케네는 앞으로 펼쳐질 팽창 사업들을 계획하며 내륙의 히타이트, 아시리아와의 교역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 팽창은 불과 1세기를 가지 못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직후, 그들의 전성기가 정점에 이르기도 전인 B.C 1200년경, 미케네 문명은 갑자기 멸망을 맞이했다. 미케네 인들의 타고난 기질은 그들을 바다로만 향하게 해왔다. 그러나 내륙 깊숙이 그들의 배후에서 문명 세계를 장악하려는 강력한 족속들이 미케네의 각종 보화들을 노리고 있었고 미케네 또한 위험이 여러 차례 감지되었지만 사실상 지도층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 같이, 파괴의 시작은 미케네 문명이 자리 잡은 그리스 발칸반도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도리아인이라 불리는 아리안 계통의 족속들이 대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에 이를 정도로 파괴한 바다 민족들의 공격 수준과 매우 흡사했다. 비록 유목민들이 다수였으나 도리아인들은 철기 제련법을 이미 갖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히타이트가 그러했듯이 초기 철기 시대였던 당시, 도리아 인의 철제 무기 역시 생각보다 그리 강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리아인들이 미케네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 체계의 우열보다는 잔혹성과 전투적 기질에서 문명 세계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유목민 특유의 호전성에 일부 해양 민족들의 난폭함 등은 미케네의 입장에서 처음 맞이하는 강한 두려움이었다. 도리아인들이 그리스의 각지를 정복하고 다니자 미케네 문명은 일순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동부 지중해의 문명을 선도하고 나름 강한 군대를 갖고 있었던 미케네였지만 도리아인 군대에게 아주 무력 했던 데다 말 한 필 없이 보병만으로 전투를 벌이는 데는 한계가 명확했다. 미케네는 그들이 크레타와 트로이에 자행한 비극보다 더 참담한 파괴 행위의 희생자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철저하게 잔인했던 도리아인의 말살 정책을 피해 미케네인 일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버리고 척박한 그리스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다른 일부는 함선을 타고 동부 지중해를 넘어 아나톨리아 반도로 도주해 그 곳 해안가에 정착했다. 이렇게 도리아인의 침공으로 미케네 문명이 멸망을 맞이한 후,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이 혼란한 300여 년의 과도기를 ‘그리스 암흑시대’ 또는 ‘호메로스 시대’라 지칭하고 있다. 이 혼돈의 시기에 거주했던 호메로스는 오래전 미케네 문명의 옛 영화가 어떠했는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통해 현재까지 세상에 전해졌다. 보통 암흑기라고 하면 의례 뚜렷한 두 시기 사이의 중간기 정도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이 그리스의 암흑기는 문명적 퇴행이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형태였다. 문화적으로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과정이었으며 지배층이 유목민과 해양민족이라 불리는 해적집단이 섞여 있는 도리아인의 파괴적인 폭력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미케네 인들은 자신들의 문자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문자를 잃어버린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그들이 누렸던 에게 해 일대의 최초 문화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충격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후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이 생기는 것과 같이 미케네 인들의 뇌리에서 그들의 문자인 선형문자 B, 미노아 문명의 문자는 선형문자 A에 대한 기억조차 영원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선형문자를 기억하던 많은 당대 지식인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문자를 영속시킬 수 있는 교육이나, 또한 문자를 알아야할 지적 욕구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이 시기를 암흑기로 점철한 것이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지배층인 도리아인들에 대한 항쟁 이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고대사에서 매우 거창했던 문명 개회의 준비에 비해 얻은 것이라고는 매우 보잘 것 없었던 전쟁이었으며 내륙 레반트에서는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도 날리지 못한 채 기진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케네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키클라데스가 그러했듯이 미케네 역시 큰 적과 대적하면서 민족적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던 사이, 도리아인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 에게 해의 섬 지역을 파괴하고 장악당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허용하게 된다. 그것도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연달아 직격을 당했다. 미케네는 끝내 바다 민족에 의해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전소되고 미노스 인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미케네의 중심지인 크레타에 강한 공격을 가한 바다 민족들은 에게 해 섬 지역의 도리아인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첫 번째 공격은 현 키프로스 섬에 대한 강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사실 바다 민족은 도리아인의 본거지인 펠로폰네소스를 강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다 민족의 에게 해 섬 장악은 도리아 인들의 팽창에 방해가 되었고 결국 이들이 펠로폰네소스와 그리스 본토에 정착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후일 그리스 폴리스 건설의 역사로 이어진다. 전승에 따르면 아킬레스(Achilleus)의 후예들로 알려진 일부 미케네 전사들이 도리아인들에 합류하여 펠로폰네소스 해안가에 고성을 축조하여 바다 민족과 10년에 걸친 혈전을 벌였다고 한다. 마침내 이어진 태풍, 그리고 유인 전략에 걸려든 바다 민족들은 결국 상륙에 성공했지만 기습 공격에 전멸했다. 바다 민족들은 도리아인들의 편에 선 미케네에 의해 또 다른 희생 종족이 된 셈이다. 이렇게 바다 민족은 더 이상의 그리스 본토로의 상륙을 시도하지 않았고 강력한 적수가 사라지자 그리스 본토의 패권은 도리아인에 흡수된 미케네 인들의 주도로 넘어갔다. 이를 통해 자연히 중계 무역을 통해 번영을 이룩한 미케네 인들은 경제적 기반을 통해 역사상 가장 번성한 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테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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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부 지중해 미케네 문명의 멸망 이후, 생성된 그리스 본토 아테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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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
- 나는 칼뱅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이 보는 칼뱅은 부정적이다. 그는 <자기를 찾는 인간>에서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칼뱅주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잊읍시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칩시다.” 칼뱅은 자기애를 패스트에 비유했다. 프롬은 칼뱅의 사상이 인간을 국가와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부속물이 된다는 태도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고 비판한다. 즉 참된 자기애가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권위에 대한 복종은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강력한 이념적인 도구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제1 원인인 신에 대한 복종이 종교적으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자리에 자신이 위치하면 자신만이 옳은 것이 되기 때문에 종교적 맹신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음을 함께 생각해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 책 속에서의 칼뱅은 그야말로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그에게는 종교적 관용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어느 누구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칼뱅은 자신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모든 반대자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국가적 권력에 근거해서 종교, 도덕, 세속의 일을 모두 혼자서 결정하는 월권을 행사했다. 그는 그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했다. 그 책에서 칼뱅은 광신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있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프롬이 칼뱅에 대한 비판은 정당했다고 보여진다. 프롬이 말하고 싶은 것은 참된 나를 찾는 자기 관심이다. 자신의 외부에서 자기를 찾는 인간은 자칫 다른 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 이해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곧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생산성의 표시이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는 적극적인 욕구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프롬은 이기주의와 자기애는 정반대라고 설명한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대해 관심 갖는 것에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하려는 무익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결여는 생산성의 결여를 가져온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오직 자식만을 생각한다는 부모의 사랑이 적절한 예이다. 그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으며, 자신의 생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자식에게 강요만 반복할 뿐이다. 오직 자식만을 생각한다는 부모의 생각은 이미 병적인 증상이다. 참된 자기애를 가진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 사랑이고, 행복인가에 대한 체험을 주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관심은 미덕과 동일시된다. 인간의 관심은 인간의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 것인데, 인간의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도 동일하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자기 관심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있기에 객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관심이 스피노자의 생각과 달리 현대에 와서는 물질적인 획득과 권력, 성공에 대한 관심과 일치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프롬은 이러한 타락은 자아라는 개념의 변천과도 관계가 깊다고 설명한다. 세계가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가 됨으로써 자아의 개념은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프롬은 현대 문화의 실패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관심에 충분하게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프롬은 자신에 대한 참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프롬의 생각은 불교의 자리이타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내 안에 불성이 있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 노력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부처의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관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면목을 깨우치고, 그와 함께 세상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나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함께 뒤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리이타의 정신이다. 가이아의 분노라는 생태계의 파괴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불교적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다. 생태계의 파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서로 관계하고 있다는 관계 중심적 세계관과 참된 자기애를 통한 자리이타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에서 프롬의 사상과 불교적 가르침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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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