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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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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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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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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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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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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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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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
    9세기 동북아시아는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어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들로부터 상선들이 보호를 받았다면 동남아시아에는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 인물이 없었기에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려면 해적들에게 일정부분 상납해야 통과할 수 있다. 상납을 거부했을 시, 어김없이 약탈을 당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졌다. 그러니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남아시아 해안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적들을 보는 즉시 족족 격파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막강한 총포의 위력 앞에 그 악명 높던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은 무력했다. 결국 해적들은 이 일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수마트라와 말레이 일대의 육지에서 생활하는 일부 해적들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필자가 미얀마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에 중국의 미얀마·인도 실크로드 전략은 외교수사에 불과한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중국의 국경 도시 뢰이리(瑞麗)로 넘어가는 순간 이러한 의문은 사라졌다. 이곳에서 이미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뢰이리까지 이어지는 철도공사가 진행 중이며, 항주~뢰이리 고속도로도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건설이 완료된 미얀마 경유 가스·원유 파이프라인도 뢰이리를 지나고 있다. 중국은 2006년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하면서 미얀마를 경유해 인도양으로 진출할 계획을 추진해 왔다. 지금도 그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미얀마 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인도양 진출과 실크로드 건설을 위한 내부 역량 강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실크로드 건설 전략은 시진핑 시대의 중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진핑은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 방문 시 중국 서부 내륙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 경제 벨트 건설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연설에서는 해양 실크로드 건설을 제안했다. 중국남부 연안을 동남아, 남아시아 해양 지역과 연결하자는 구상이다. 해양 수송로 연결과 무역뿐 아니라 자국 화폐로 무역정산 결제, 스와프 등 금융과 화폐협력까지 상정하고 있다. 이 중의 한 가닥인 미얀마·인도 실크로드는 인도양 진출 전략의 업그레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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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6
  • 러시아의 루블화 지불 의무화와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변화
    2022년 3월 23일 푸틴 대통령은 정부 회의에서 적대국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대금 지급 방법을 루블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었다. 푸틴 대통령은 일주일 내에 달러와 유로화 대신 루블 결제로 바꾸기 위한 체계를 만들라고 중앙은행에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EU나 미국에 러시아 상품을 선적하고 달러나 유로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 유럽에 수출한 가스 대금으로 주로 유로를 받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뒤 EU와 미국 등 각국은 러시아 경제제재를 발표했고,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터키 리라화 수준으로 폭락했다. 우크라이나에 군사작전 개시하기 전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75루블 수준이었는데 3월 초 한때 110루블 이상으로 사상 최저치로 가치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100루블 수준으로 조금 회복되었다. 러시아는 경제제재에 반발해 경제제재에 동참한 나라들인 EU 회원국과 미국, 영국, 한국, 일본 등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비우호국에 대해서는 러시아 정부와 기업이 졌던 채무를 달러가 아닌 루블로 상환할 수 있게 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따라서 러시아 외환 보유액 중 서방 은행에 맡긴 자금 상당액은 제재 여파로 동결된 상태인데다 이 때문에 러시아 디폴트 우려가 제기되었었지만 지금은 한 고비 넘긴 상태에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루블화로 가스를 결제하라는 조치는 에너지 전쟁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다. 유럽 등 비우호 국가들을 대상으로 천연가스 매각 대금을 유로나 달러가 아닌 자국 루블화로만 받겠다는 선언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 루블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그에 대한 조치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 비중이 높은 독일은 계약 위반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재를 강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입장에서 내놓은 자구책인데 유럽이나 미국이라 러시아에 했던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가스를 판매국인 러시아가 자기 마음대로 결제 수단을 선택하겠다는데 미국이나 유럽이 이와 같은 러시아의 행위를 과연 예상하지 못하고 제재를 가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가 천연가스나 원유 공급 대금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받는 것이 어려워지게 만든 것은 미국과 서방이다. 그래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제재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은 셈이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 장관은 루블화로만 결제하라는 요구는 계약 위반이라고 했으며 유럽 협력국들과 대응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천연가스 수요량의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리투아니아 국유 가스 기업인 이그니티스도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으로부터 가스 구매를 중단하고 루블화 결제도 하지 않겠다며 반발했다. 오스트리아 화학회사 OMV의 알프레드 스턴은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하기를 천연가스 비용을 지속적으로 유로를 내며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푸틴 대통령의 발표 이후 공급 차질 우려로 급등하게 되었다. 유럽 시장의 천연가스 가격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이날 MWh당 117.00유로로 18.49% 올랐다.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예상대로 상승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이날 8% 넘게 올라 96루블대에 진입했다. 제이슨 투비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번 조치가 폭락한 자국 통화 가치를 복원하고 러시아의 서구 금융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반면 투비는 푸틴 대통령 결정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WSJ는 루블화 의무화가 러시아의 에너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수요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천연가스 뿐 아니라 원유 수출 대금도 루블화로 받을려 하고 있다. 국제 유가도 러시아의 루블화 결제에 대한 충격으로 5% 넘게 올랐다. 이날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된 브렌트유 5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5.3% 뛴 배럴당 121.60달러를 기록했다. 같은 날 미국 뉴욕 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5월물은 5.2% 상승한 114.93달러에 마감했다. 러시아의 이와 같이 루블화 결제로 선회하자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 못지 않은 가스와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으로 방향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남한보다 더 작은 아제르바이잔 본국이 가진 석유와 가스만으로도 유럽에 수십여년을 수출해도 크게 문제 없다는 분석이 있는데다 카스피해를 통해 역시 가스 부국으로 알려진 투르크메니스탄과도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다. 그와 같은 가스관 연결의 시작이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조지아의 트빌리시, 터키의 제이한을 연결하는 BTC 파이프라인을 말함인데 이와 같이 터키까지 도착한 아제르바이잔의 석유와 가스를 터키에서 시작해 유럽 이탈리아까지 연결하는 것이 나부코 가스 파이프라인으로 점철된다. 여러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없던 일로 되었지만 2019년에 트랜스 아나톨리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TANAP)이 개통 공사에 들어가면서 이와 같은 고심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이 생겼다. 나부코 라인이 아제르바이잔-조지아-터키- 불가리아-알바니아-이탈리아까지 연결되는 기획이었는데 불가리아가 빠지고 그리스가 들어간 게 트랜스 아나톨리아 라인이라 볼 수 있다. 총 연장 3,500㎞에 달하는 남방가스통로(SGC)로써 이어지는데 러시아로써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응원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들이 대부분인 국가이고 터키와 중앙아시아 일대와 연결되어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범투르크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미국과 유럽이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과제가 남아있다. 더불어 투르크메니스탄이 친서방, 유럽으로 과연 넘어올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투르크메니스탄은 굳이 유럽이나 미국과 교역 없이도 러시아와 이란의 사이에서 무역을 하며 이미 먹고 사는데는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며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독재와 국내 인권 탄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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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카슈미르 분쟁 재점화와 인도-파키스탄의 오랜 갈등의 역사
    최근 인도가 관할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인기 관광지에서 무장괴한들이 현지인 관광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해 26명이 사망했다. 당시 오마르 압둘라 잠무·키슈미르주 총리는 최근 몇 년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의 공격이라 규탄했고,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가해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강조하면서 보복을 다짐했다. 한편 아직까지 이번 공격의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진 단체는 없다. 다만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이 지역에서는 1989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반군 활동이 이어졌으나, 최근 몇 년 동안의 폭력 사태는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인도 측은 이번 폭력적인 행위들이 파키스탄의 소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 측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님을 밝히고 인도 측의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이 벌어진 잠무-카슈미르 지역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이 분쟁과 더불어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갈등의 역사를 재조명 해 보고자 한다. 카슈미르의 면적은 약 222,236㎢로 한반도의 면적보다 약간 작은 땅이고,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이 지나가는 곳이다. 인도,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한 이후 양측은 계속하여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현재 카슈미르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경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실효 지배 지역을 표시한 경계선통제선(Line of Control)이기 때문에 양측이 서로 카슈미르를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카슈미르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분쟁의 이유는 바로 "물"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은 심각한 물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파키스탄의 경우, 인더스 강이 기근 현상으로 갈수록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많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카슈미르는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인데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땅도 비옥해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루비와 같은 보석들도 많이 생산된다. 또한 직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이자 카슈미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캐시미어(Cashmere)의 본고장이 이곳이다. 1947년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당시에 독립 카슈미르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s)의 소속이었다. 이 당시 각 지역의 번왕국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각각의 편입될 것이 아니면 독립하여 존속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슬림 다수 인구를 지배하던 카슈미르의 힌두교도 번왕은 인도로의 편입을 원했지만 무슬림들의 격렬한 반대로 고민하다가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택했다. 따라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의 편입 요청을 거절한셈이 되었다. 하지만 카슈미르에 소재하던 다수의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독립에 대해 반대하였고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카슈미르의 번왕은 인도에 지원을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파키스탄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들은 인도로 편입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결정이 현재까지 거의 80년 동안 이어지는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선택이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의 결과 카슈미르는 지금과 같은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지역으로 분단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현재 카슈미르 지역의 상당수 지역을 영유하고 있는 국가는 인도이다. 인도는 카슈미르 전체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주 인구 77%가 파키스탄계 무슬림으로서 인도의 주(州)들 중에서 무슬림이 힌두교인보다 많은 유일한 주(州)이기도 하다. 카슈미르가 대한민귝 면적의 두 배의 영토이니 만큼 카슈미르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불교와 힌두교가 우세한 지역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무슬림들이 압도적이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인도 국내에서 심한 탄압과 차별을 받고 있는데 카슈미르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카슈미르 지역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과 병합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 주민들은 기회가 되면 시위를 벌이며 독립을 주장하거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인도 정부가 이를 허용할리가 없기때문에 주둔하고 있는 인도군과의 마찰이 심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히말라야와 연결되는 지진대가 지나가는 지역이라 2005년 10월 8일에는 파키스탄이 점유한 카슈미르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약 80,0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카슈미르의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파키스탄 국기들을 흔하게 볼 수 있고 파키스탄의 독립기념일인 8월 14일에는 항상 축제를 벌이고 있다. 물론 인도에서 이를 두고 치안의 문제를 우려해 단속하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축제를 벌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도군 또한 이를 강하게 단속하지는 않고 있다. 이들을 강하게 단속했다가 무슬림들과 사이에서 극한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 단체들은 카슈미르의 독립과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요구하며 인도 군경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이고 있다. 이번 테러도 그동안 벌어져 왔던 테러 행위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분리주의 무장단체들의 성향도 카슈미르 공화국 독립을 추구하는 측과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추구하는 측으로 양분되어 있어 이들 간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물론 인도군의 군세가 워낙 강력하고 주기적으로 토벌전에 나서고 있어 여타 이슬람 반군들처럼 주요 도시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주로 산악과 농촌에서만 활동하며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한 때 이들은 ISIS와 알 카에다에 지지 성명을 보내며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카슈미르에 주둔한 인도군과 인도 경찰이 카슈미르 주민들의 분리 독립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카슈미르 무슬림들에 대한 살인과 고문, 성폭력 등 잔혹한 인권 탄압으로 인해 인권 단체들로부터 강한 비판받으며 여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인도군이 시위하던 주민을 군 차량의 인간 방패로도 쓰는 사건까지 발생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을 지시한 당시 인도 장교는 인도군 참모총장에게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를 비난하는 파키스탄도 정작 파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는 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탄 발티스탄(Gilgit-Baltistan)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인권 탄압을 자행하고 있어 기타 주민들과 인권단체들에게 비난받고 있는 현실에 있다. 더불어 카슈미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반군들도 주민들에게 폭력을 저지른 사례들이 나오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양쪽 모두에게 카슈미르 주민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은 이와 같은 인권 탄압 사건을 빌미로 인도를 인권 탄압 국가라고 비난하고, 인도 또한 파키스탄에 대해 이슬람 테러 집단을 지원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테러 지원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행위들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서로가 각자의 영토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양국에 대한 정치적 자존감으로 인해 선전성의 성격이 짙다. 두 나라만의 영토 분쟁인 것으로 나타난 카슈미르 지역에 이번에는 중국까지 분쟁에 끼어들었다. 중국은 친파키스탄적인 행적을 취하며 경쟁국인 인도를 견제했다. 게다가 중국은 파키스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일대일로의 중심국가로 여기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약화는 아라비아해로 진출하여 남아시아 일대일로의 완성을 계획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게다가 카슈미르 동쪽 아크사이친(阿克赛钦) 지역을 1962년에 발발한 중국-인도 전쟁 도중에 점거하여 실효 지배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두고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또한 심각하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카슈미르 지역은 3개 국의 이해가 걸린 분쟁으로 세계의 화약고에 속하며 제3차 세계대전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분쟁 지역으로 꼽힌다. 2011년 9월 19일 인도가 베트남과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석유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하기로 하자 이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중국군이 카슈미르 지역에 위치한 인도군 벙커를 공격해 파괴하고 철군했다. 이어 2017년부터 다시 분쟁의 강도가 높아지더니 2019년 2월에 인도 공군이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공습했고 이에 대한 파키스탄의 보복 공격까지 이어지며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우려를 낳게 했다. 그러나 이를 중국이 중재하면서 그나마 위기를 넘겼지만 2019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 공군기를 격추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같은 해 8월,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의 특별 자치를 규정한 헌법 370조를 대통령령으로 무력화시키고, 잠무-카슈미르를 주(州) 지위에서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동부의 라다크 지역을 분리해 카슈미르 지역을 두 개의 연방 직할령으로 분할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조치에 앞서 모든 통신이 차단되고 잠무-카슈미르 전 지역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지역 정치인들은 가택 연금에 처해지게 되면서 인도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파키스탄 정부와 직접적인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인도 헌법 370조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에 대해 자치권을 부여하는 조항으로 자체적인 헌법, 국기, 그리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이다. 물론 외교, 국방, 통신은 연방 정부가 권한을 갖는다. 그와 같은 결과로 인해 잠무-카슈미르는 영주권, 재산권, 기본권을 자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외지 인도인들이 카슈미르에서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정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헌법 370조가 대통령령으로 인해 완전히 무력화 되면서 사실상 폐지되었고 인도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정부 직할령이 되면서 이는 오히려 파키스탄 정부를 자극하게 만들었다. 370조 무력화와 더불어 카슈미르의 주 지위를 박탈하고, 잠무-카슈미르와 라다크라는 두 연방 직할지로 격하하면서 사실상 인도 다른 지역만도 못한 속령급 지위를 부여해 버리면서 카슈미르 문제만큼은 직접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카슈미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2025년 4월 22일 스리나가르 동쪽 50km 지점의 파할감(Pahalgam)에서 '레지스턴스프론트(TRF)'라 불리는 지역 무장 단체에 의해 테러가 발생했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이슬람 경전을 외워보라 시켰는데 못 외우니 총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소 24명이 사망했으며 인도는 파키스탄의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파키스탄과의 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을 잠정 중단시켰다. 파키스탄과의 주요 육로 국경인 와가-아타리 검문소를 폐쇄했으며 48시간내 인도 내 파키스탄 국적자는 인도에서 추방령이 떨어졌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무역 중단을 선포함으로써 양국의 갈등은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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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3차에 걸쳐 삼니움 전쟁을 치르게 된다. B.C 321년,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Titus Veturius Calvinus)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 Caudinus)는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 족의 영역으로 침공했다. 이에 삼니움 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폰티우스는 정면 승부로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는 먼저 삼니움 병사 10명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서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 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 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Apolia)의 루케리아(Ruceria)를 포위하고 있다며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 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도로 2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 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Caudium)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 빠른 시일 안에 루케리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삼니움 군이 도주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진격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 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줄기로 진군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 때 삼니움 인들이 협곡 위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 때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파악하고 서둘러 퇴각하려 했지만, 첫 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삼니움 군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삼니움 군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두어 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로마군이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면서 큰 피해를 볼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굶겨 죽이자니 언제 끝날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 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Herennius Pontius)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 보내라.” 그러자 삼니움 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냅니까?” 라고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버지가 먼저는 모두 살려 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또 다 죽이라고 권고하니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 “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가 크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Pregelas)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Tunica)만 입은 채 멍에 하단으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치욕을 겪고 로마는 다시 칼을 갈았다. 결국 로마는 삼니움 족을 정복하고 전쟁을 승리를 마무리했으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삼니움 족의 남성의 씨를 말렸다.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가 자신의 아버지인 헤렌니우스의 충고를 따랐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완전히 죽여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우를 해줘 친구를 해주는 것도 아닌, 모욕을 주는 것은 상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면 분명히 칼을 갈게 된다. 영화 <친구>에서도 유오성이 열연한 준석이가 상택이에게 한 말이 있다. "친구야. 앞으로 누구를 조질 일이 있으면 상대를 용서하여 친구로 만들던가, 아니면 보기만 해도 오줌 지릴 정도로 조져놔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해보자고 안 달려든다." 이게 인간 사회만 그런게 아니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는 국가의 존망을 가르게 된다. 그리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세 관련 지혜이기도 하고 인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는 눈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삼니움 족은 그런 현명한 자가 있기라도 했지만 한국은 삼니움 족보다도 못하다.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만 있을 뿐, 주변에는 어리석은 지휘관에게 박수 쳐주는 어리석은 원숭이들만 득실거린다. 우리의 미래는 그래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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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러시아의 남진정책 중 하나, 동청철도(東淸鐵道, Китайско-Восточн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와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야기
    중국에서 최초의 오송철도(吳淞鐵道)가 철거되어 가는 무렵인 187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는 시베리아 철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시베리아 철도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연기되었다가 1886년 차르의 동의를 얻어내고, 1891년 마침내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은 다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유럽 지역 농민들을 시베리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고, 청나라와 국경 분쟁을 벌이던 극동 아시아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크림전쟁(1853~1856)에 패배한 이후 영국과 오스만투르크의 동맹으로 남하정책이 저지됨에 따라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팽창 방향을 수정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와 교역을 확대하고, 영국과의 대치 전선을 확대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특히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일본의 군사력 확대는 러시아로 하여금 극동 지역으로 군사력 투입을 신속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같은 수단이 철도였다. 시베리아 철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청나라가 긴장했다. 철도에 대한 거부감에 사로잡혀 있던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장지동(張之洞)등 양무파(洋務派)들이 철도 부설을 주장했으며, 권력의 실세였던 서태후도 이를 받아들였다. 청나라 조정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자극을 받아 심양(瀋陽), 길림(吉林)을 거쳐 훈춘(琿春)에 이르는 노선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1890년 영국인 기술자인 클라우드 킨더(Claude W. Kinder)를 고용해 철도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관동철도(關東鐵道)로 불리는 이 노선은 1892년에 착공해 하북성 탕산(唐山)에서 출발해 산해관(山海關)을 조금 지나서까지 건설되다가 청일전쟁을 맞이하여 공사장 일대에 위기가 생기자 공사가 일시에 중단되었다. 이러한 청일전쟁(1894~1895)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바꾸어 놓았다. 중화주의로 인해 나태하고 태만해 있던 청나라의 지도부는 한 때 조공 국가였던 일본에 패배했다는 사실로 인해 큰 충격에 빠졌다. 오랑캐는 오랑캐로 제압한다는 중국 특유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상책으로 올라왔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청나라에서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 때 적이었던 러시아와 화친해야 한다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에 요동반도를 할양할 것을 요구했고, 중국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에서 이를 인정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을 무산시키게 된다. 이것이 삼국간섭으로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러시아는 요동반도와 여순(旅顺)을 돌려받게 해주는 대가로 만주를 통과하는 철도 부설을 중국에 요구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는 극동 지역에서 멀리 돌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된다. 만주를 통과하면 노선이 단축되고 운행 시간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유럽 측과 극동 측 양 방향에서 건설되고 있었다. 중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철도를 연결하면서 이러한 철도 건설의 역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많은 숙련자들과, 비숙련 자유노동자,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이 확정된 죄수들이 가혹한 조건에서 건설 공사에 내몰렸다. 청일전쟁 무렵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철도는 아무르 강변을 따라 하바로프스크에 근접했고, 유럽에서 출발한 철도는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 호로 향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청나라의 서태후와 이홍장(李鴻章)은 러시아에 대해 매우 낙관적으로 대했다. 일본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였기 때문에 그들은 러시아 만이 청나라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재침할 경우에 대비해 빠른 속도로 군대를 투입 할 수 있도록 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부설하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재상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는 이홍장에게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철도가 미비하여 운신의 폭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가 길림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났다면서 동청철도 부설의 당위성을 강변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테의 주장은 거짓말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바이칼 호에 이르지 못했고, 러시아는 당시 극동에서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간섭 직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밀사들이 왕래하며 동맹 체결이 협의되고 있었다. 청나라는 러시아의 군사적인 지원을 필요로 했고, 러시아는 동청철도 권리를 얻으려 했다. 이에 다급한 것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청일전쟁 기간에 이미 4,000여 만 량(量)의 외채를 짊어지고 있었고 전쟁 후에 배상금 2억 량에다 요동반도 반환 금 3,000만 량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세수는 8,000만 량에 불과했다. 청나라는 빚을 얻어 배상금을 갚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자 이 돈을 러시아가 차관을 들여 해결해 주었다. 차관에는 당연히 조건이 있었다. 러시아는 4억 프랑(약 1억 량)의 차관을 빌려 주면서 동청철도 부설권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허용하지 않으면 원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돈이 없던 청나라는 동청철도를 내주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896년 5월 22일 이홍장과 비테 사이에 청나라-러시아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지름길인 동청철도 부설권을 챙겼다. 아울러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 극동 러시아를 침략할 경우 양국이 군대를 파견해 상호 지원하기로 했다. 일본을 적국으로 하는 상호 방위동맹이었다. 이러한 비밀 협정에는 러시아 함대가 전시에 청나라의 모든 항구를 사용할 수 있으며, 평시에도 동청철도를 이용해 러시아 군의 수송과 보급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철도 연변 30리 이내에서 광산 등에 대한 러시아의 독점적 권리가 인정되었다. 러시아는 사실상 중국 내부에 가늘고 긴 영토를 소유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동청철도 권리 확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러시아가 장래에 중국을 병탄해 나갈 것을 우려하면서 조선의 동향에 대해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앞서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대사관으로 파천했다. 따라서 극동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노골화 되어 갔다. 러시아에 이어 독일도 삼국간섭의 대가를 청나라에 요구했다. 독일은 1897년 11월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교주만(膠州灣)의 청도(青島)를 점령했다. 앞서 독일은 러시아에 청도를 점령할 경우 개입할 것인지에 대해 타진했는데, 러시아는 요동반도에만 관심이 있다며 독일의 군사 행동을 양해했다. 제국주의 국가 간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른 채 청나라는 러시아에 군함을 파견해 독일의 행동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외무장관 마하일 무라비요프(Михай Муравьев)는 이 기회에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상 세르게이 비테는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 반대했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강경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차르의 명령으로 인해 러시아 군은 1897년 12월 12일 여순과 대련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여순항을 포트 아서(Port Arthur)라고 명명했다. 러시아 군은 여순과 대련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군을 불러들이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25년 동안 조차하고, 동청철도와 여순항을 연결하는 지선의 부설을 허락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청나라는 무기력해졌다. 결국 청나라는 여순과 대련의 25년 동안의 조차를 허용하고, 남만주 철도의 부설권도 넘겨주었다. 이 철도가 남만주 철도(南滿洲鐵道)이다. 남만주 철도는 동청철도의 하얼빈에서 출발해 대련만까지 연결하는 철도이다. 두 철도가 만나는 하얼빈은 이 때부터 근대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여순에 관동성을 설치하고 총독을 파견한다. 러시아는 만주를 영토화 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고, 이를 지켜보던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이전에 러시아를 싸우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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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인도-태평양 전략의 구조와 여러 문제들에 대해
    세계 무역의 거의 90%와 탄화수소의 2/3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말라카 해협을 통해 운송되어 왔으며, 대부분은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 국가인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컨테이너 운송 능력의 절반 이상을 운송하고 있으며, 탄화수소의 전체 환적에서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라카 해협은 세계 항구 무역의 1/9과 세계 수출입 화물의 1/5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붐비는 국제 해상 무역 통로 중 하나이다.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매년 10만 척이 넘으며, 그 중에서 유조선 2/3, 대형 화물선 1/3, 컨테이너선 1/2이 포함되고 있다. 인도-태평양은 전략적으로 두 대양을 연결하는 선도적인 무역로인 말라카 해협에 의해 상호 연결된 구조이다. 인도-태평양의 전략적인 잠재력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이 지역 전체에 걸친 중국의 세력 확장이며 둘째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의 동맹 체제와 이와 같은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여 쇠락한 세력의 회복을 노리려는 시도에 있다. 지형적 구조를 가진 인도-태평양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항로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나타나며 북서쪽으로는 수에즈 운하, 바브-엘-만데브 해협, 남서쪽으로는 모잠비크 해협과 인도양과 태평양의 전략적 연결점인 말라카 해협,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순다 해협, 남동쪽으로는 롬복 해협, 희망봉 등과 같이 세계의 전략적 요충지들이 상존하고 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의 경우,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사이에 있는 말라카 해협은 세계 상선들 톤 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위치는 이 해운 항로에 경제를 크게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의 초미의 관심이 되었다. 현재, 말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을 통해 수송되는 석유의 양은 수에즈 운하의 3배, 파나마 운하의 15배에 달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국제 해양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의 전략적인 이해 관계가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21세기 들어 세계 강대국들이 주목할 대상이면서 여러 국익들로 인해 관심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 지역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과 이해 관계의 경쟁에 중심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중국, 인도, 일본, 호주는 모두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인 조정을 해왔다. 따라서 21세기는 바다와 해양의 세기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며, 바다에서 전략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세계 강대국들의 치열한 경쟁을 동반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 지역들을 지배했던 국가들이 주로 군사적인 목표와 지역 내 전략 기지 및 해상 교통로를 위한 경쟁에 집중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세계 국가들은 경제적인 이익과 해양 자원을 위해 경쟁하는 측면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군사력의 발전과 해양 자원을 위해 경쟁하는 노력들은 점점 더 해양 통제를 이용하여 대륙 문제에 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해상 전쟁과 해상 전략에 대한 해양지정학적 이론은 알프레드 T. 마한 박사의 이론이 대표적으로 해상 세계의 영향력을 증진하려는 국가들에게 하나의 전제를 만들어 주었다. 마한은 "해상 무역과 해군의 패권을 통한 바다의 지배는 세계에 대한 지배적인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비록 좋은 상품들이 육지에 있다 하더라도, 바다만큼 필수적인 교류를 촉진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Control of the seas by maritime commerce and naval supremacy means dominant influence in the world. For even though the products of great value are on land, nothing promotes the necessary exchanges more than the sea)."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해양 안보는 강대국의 해양 외교 정책 의제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현재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대체로 평화롭고 안전하지만,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과 인도, 이란을 비롯한 각 중동 국가들, 동남아시아 각 국가들 사이에서 해양 안보 문제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해양 분쟁과 관련하여, 역내 국가들 간의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해양 분쟁은 약 40여 개에 이른다. 이 분쟁의 경우, 영유권 분쟁과 영해에 대한 주권 분쟁으로 나타난다. 동중국해, 남중국해, 인도양, 혹은 센카쿠 및 댜오위다오 열도 분쟁을 포함한 많은 분쟁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제 전쟁과 심지어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잠재적인 물리적 전쟁 원인 지역이 될 수 있는 곳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들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직접적인 무력 분쟁이 발생하지는 않고 있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이들 지역의 안보 문제를 심화시키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은 주로 역내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안보 요구에서 비롯 되어진다. 게다가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이들 인도-태평양지역들은 해양 안보의 복잡한 문제와 양상을 띄고 있으며, 지역적 소규모 분쟁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해적과 무장 강도는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인도양을 가장 위험한 수역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제해사기구의 조사에 의하면2014년부터 작년인 2024년까지 이들 지역에서 해적과 강도 사건 수는 각각 13건, 68건, 34건으로 90건인 서아프리카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해적들로 인한 사건 수는 34건, 10건으로 감소한 반면에, 말라카 해협의 해적 사건은 2014년에서 2024년의 10년 사이에는 51건으로 이전의 10년 전에 6 건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어 인도-태평양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해양안보 이슈는 소말리아 연안의 해적 문제로 아덴만, 아라비아해, 서인도양 해역에는 이들 소말리아 해적단들의 약탈 공격은 해양 안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해적단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협력국들이 소말리아 영해에 진입하여 해적과 무장 강도를 퇴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결의안 1816호를 통과시키게 된다. 이어 인도-태평양 지역은 해적 행위와 더불어 알 카에다 및 알 샤바브와 같은 테러 조직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도 존재한다. 2001년 뉴욕을 강타했던 9.11 테러 이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영국, 뉴질랜드 및 호주를 포함한 국가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이슬람 반군 테러 조직들과 싸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하여 이 지역을 횡단하는 유조선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테러리스트들은 말레이 군도를 중심으로 그 지역에서 취약한 목표물들을 찾아 약탈과 선원 납치를 통해 금품을 갈취하는 등의 행위들을 저질렀다. 특히 원리주의 성향의 이슬람 반군과 그들이 조직된 범죄 네트워크 구성원들은 텔레그렘 일대를 옮겨 다니며 상호 협력하고 선박 납치 및 선원 납치 및 약탈, 금품 갈취보다는 마약,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이버 범죄로 옮겨감에 따라,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인터넷,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해양 안보 위협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적 위협은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남인도, 소말리아 일대로 연결되는 마약 유통망들이 잇달아 적발되고, 캄보디아와 태국, 필리핀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도박 및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가 극심해지면서 현실화되었다. 게다가 알 카에다, 아부 사야프 및 제마 이슬라미야와 같은 테러 조직들은 해양 테러를 동남아시아로 확장했지만 자금 공급을 위해 인터넷 온라인 범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인도 및 동남아시아 각 국에서는 마약 및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경고를 국영방송 뉴스를 통해 알려주고 있으며, 현재에도 이같은 치명적인 범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어 마약 밀매와 인신 매매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 범죄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매우 초국가적인 관심사로 몰리고 있다. 많은 다국적 조직 범죄 집단들은 수익의 상당 부분을 물길을 통한 마약 밀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마약은 불법 시장을 통해 다른 나라로 해상에 의해 운송되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은 마약 제조와 운송이 증가하고 있으며, 범죄 집단들은 말라카 해협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주요 유통 경로로 악용하고 있다. 더불어 해안 경비대나 항만 및 선박 시설 보안 부서들이 이같은 범죄에 대해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마약 문제는 어느 정도 타파해 가고 있어도 인신 매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어 무기 거래 또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해양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무기 거래의 대부분은 컨테이너에 적재되어 해상을 통해 태국 남부에서 말라카 해협과 안다만 해를 거쳐 아체, 방글라데시, 인도, 스리랑카로 범죄 조직에 의해 운송된다. 무기 거래의 증가는 특히 동남아시아와 더 넓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해양 범죄가 증가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영토 및 해양 주권 분쟁은 초국가적 범죄와 해적 및 테러 간의 복잡한 연계 및 결합으로 점철되며 해양 영역에서 안보 위협의 복잡성을 증가시켜 왔다. 이러한 위협성은 중국, 인도, 미국을 포함한 여러 주요 강대국들의 대외 전략의 채택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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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3
  • 이슬람 모더니즘과 자디드 운동
    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슬람(Islam)과 모더니즘(Modernism)이 결합된 이념을 말한다. 이러한 이슬람 모더니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셰이크였던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1849~1905)가 창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자디드 운동이라고 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세속적인 학문과 보수적인 이슬람 학문을 융합하는 형태로 비슷한 시기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1849~1905)는 쿠르드족 아버지와 이집트 아랍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압두의 사상은 중세 이후 수니파에서 이단으로 몰려 사멸된 무타질라 학파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압두는 근대 시대 당시 서구 세력이 이슬람권을 한참 앞선 이유를 두고 이를 비교 분석했다. 그는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사변철학이 발전했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사변철학이 주류 학계에서 완전히 사멸하게 되었다. 반대로 중세 기독교계는 철학과 과학이 신학에 눌려있었으나 근세 들어서 철학이 신학을 압도한 이후 빠르게 발전을 이루었다. 압두는 주류 순니파에서 사멸되었던 무타질라 학파를 복구시켜야만 이슬람권의 신속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 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이슬람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근대화 이념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의 근대화 및 현대화를 주도했던 이념으로도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엽에 그들 스스로를 살라피야(سلفي)라고 칭했는데 이는 20세기 후반에 생긴 이슬람 근본주의 방식의 살라프파가 아니라 전근대 당시 이슬람의 전통을 준수하면서 이슬람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의 변화를 수용하고 서양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상을 지칭한다. 서양은 당시 프랑스 대혁명과 경제적으로 산업혁명 등의 여파가 강해지면서 카톨릭의 권위가 추락하고 모더니즘이 득세하게 된다. 서유럽 국가들의 인구와 자본, 국력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18~19세기 들어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인도의 무굴 제국은 국력이 갈수록 쇠퇴하고 심지어는 문맹률까지 점점 늘어나는 등, 오히려 서양에 뒤쳐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명의 차이를 체감한 이집트와 무굴 제국의 일부 무슬림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수용하여 이슬람 사회도 서양처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는 서구 열강의 서아시아 및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탈이 가속화 되면서 진보적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슬람 사회 역시 서양처럼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서양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약화된 중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의 이슬람 현대주의 운동은 인도나 아랍권의 모더니즘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직접적인 식민지 상태로 인종 차별및 경제적인 착취로 인해 거의 궁핍하다시피한 인도나 이집트, 이란과 달리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속해 있는 타타르 무슬림들은 러시아에서 군복무와 통상을 통해 전통적으로 사회적 입지가 높은 편에 속했다. 따라서 타타르의 지식인들은 러시아가 서구로부터 유입한 학문과 기술을 이슬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이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과, 위구르족, 우즈베크족 등에게 다시 전파하는 일을 주도하게 된다.물론 근대 시대 이전의 카자흐족과 위구르족, 우즈베크족들은 명목상 무슬림이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텡그리 신앙과 같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더욱 강했다. 타타르족 상인들이 카자흐족과 접촉하면서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카자흐족에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세기 초부터 오늘날 타타르스탄의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족과 카자흐족에게 전파하며 그와 동시에 이슬람 문화도 함께 뿌리를 박은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 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카잔 출신의 이슬람 율법학자인 니콜라이 알민스키(Николай Альминский)는 카잔 지역과 볼가 일대에 학교들을 추가로 설립하고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이와 같은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 대다수의 타타르족들로부터 저항이 아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 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한 수준으로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와 무슬림 문화 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많은 볼가 타타르족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에 가서 자디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위구르족도 마찬가지로 타타르족 출신의 교사들이 동투르키스탄 지역으로 가서 청나라 말기의 위구르인들이 제국주의적인 압제에 맞설 수 있도록 민족주의 교육 및 위구르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이슬람 교육의 상징인 마드라사에서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된 교재를 반복하여 암기하는 것이 교육의 주안점이었지만 동투르키스탄의 전통적인 마드라사들은 따로 글씨를 필사하는 법은 배워도 작문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시기에 동투르키스탄을 재점령했던 한족 군벌 정권들은 한어를 가르치는 서당을 신강성 각지에 설치하여 위구르족들에게 강제로 유교 경전을 암기시켰다. 이와 같은 무성의한 교육 시스템과 교사들의 낮은 수준으로 인해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은 한자 몇 개만 겨우 쓰는 수준에 불과했고 일부 위구르족 학생들에게 강제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차단하여 부모와 학생들이 서로 의사 소통도 못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타타르족들이 동투르키스탄에 새롭게 세운 이슬람 현대주의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족 학생들에게 서구식으로 과학, 수학, 역사, 문학, 체육 등을 포괄한 종합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이어 이슬람 역시 교과 과목에 포함시켜 위구르족 일반인들의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위구르어 문법과 작문은 물론 현지 상황에 맞게 중국어 교과 과목도 추가하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교재는 타타르어에서 위구르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의 수준도 월등히 우수한 편에 속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 현대주의에 입각한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족 가정에서 선호도가 월등히 높은 상태였으며, 이와 같이 교육받은 학생들은 훗날 동투르키스탄 제1 공화국을 주도하는 인재들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세워지면서 공산당에 의해 자디드 운동은 쇠퇴하는 듯 보였다.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소련 내 여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대중 교육을 실시하게 함으로서 교육적인 면에있어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자디드 운동가들이 세워 놓은 토대가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창기 소련 정권은 이슬람 자체를 소련에서 일소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디드 운동가들로 인해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살아 남았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와 타협한 결과 소련 내 무슬림 거주지역의 교육 투자와 그 성과만큼은 포르투갈,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보다 월등했다. 1930년대에는 초등 교육이 의무화 되었으며 10세에서 30세 사이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문맹을 퇴치하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당시는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무슬림 식민지에서 초등학교 취학률이 6% 정도에 이르렀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언어와 문학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소련 정권은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랍 문자 사용을 금지하는 대신 자디드 운동가들과 타협 하에 터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게 된다. 1938년 이후로 스탈린 정권의 러시아인 동화 정책이 추진되며 러시아어가 의무 과목이 되긴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부족주의와 지역 감정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언어(우즈베크어, 아제르바이잔어, 카자흐어, 타지크어, 키르기스어, 투르크멘어, 바시키르어 등등)에 기반한 민족 정체성들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 볼셰비키의 숙청 하에서 살아 남은 자디드 운동가들은 무슬림 소수 민족 고유의 역사, 언어, 구전문학, 서사시, 미술을 재발견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따라서 스탈린 사후에는 다양한 민족 문화가 부활되거나 재창조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무슬림들의 구전문학과 서사시는 계속 보존되었으며 현대 문학의 형태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흐루시초프 시대 이후 다양한 민족 언어로 된 잡지와 신문이 출간되었던 것이 대표적으로 이는 어문학적,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 중앙아시아 내 여러 민족들의 역사관과 민족주의가 현대적으로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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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3
  • 시진핑의 캄보디아 방문의 의미
    최근에 시진핑이 동남아시아 3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순방하고 돌아갔다. 캄보디아 순방은 토요일부터였는데 필자의 토, 일요일 이틀 동안의 일정이 바쁜 관계로 분석을 틈틈히 했다. 그래서 이제라도 포스팅 하나를 하게 되었다. 시진핑이 동남아시아 3개국을 직접 방문한 이유는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돌입함에 있어 "앞마당 단속"을 한 셈이었는데 앞서 베트남 방문에서는 여러 국책 사업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을 이끌어 냈지만 중국과 더불어 대미 관세 전쟁에 대한 공동 대응에 대해서는 확답을 받지 못했던 반면, 말레이시아에서는 공동 대응에 대해 중국과 함께 미국의 관세에 맞서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따라서 이번 캄보디아 방문은 매우 중요했는데 사실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캄보디아는 중국의 실존적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인도-태평양 전략의 지정학적 부분과 말레카 해협의 중요성이 걸려 있다면 캄보디아는 중국의 일대일로 국책 사업이 걸려 있는 곳이다. 게다가 베트남과 더불어 중국 상품의 라벨 갈이화에 따른 대미 우회 수출의 최대 활성화가 되어 있는 곳이기에 미국이 부과한 관세율 49%도 이와 같은 우회 수출 및 중국의 일대일로와 연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본래 캄보디아는 중국과 매우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심지어는 남중국해 분쟁에서 중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중국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어 훈 센 총리 시절 때인 2016년 10월 13일에는 시진핑이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원화로 약 2,700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물론 여기에 일대일로의 연결을 위한 지원일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훈 센 총리는 2018년 7월에 열리는 총선을 앞두고 반대파를 견제하기 위해 대법원까지 동원해 야당을 해산해버렸다. 야당 의원 118명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면서 미국과 EU는 민주주의 체제의 위협화 인권 침해 등을 내세워 캄보디아에 제재를 부과했다. 그러자 중국이 직접 나서 2018년 캄보디아 총선에 필요한 장비들을 지원했다. 투표와 개표 과정에 필요한 컴퓨터, 인쇄기, 복사기, 카메라, 투표함 등 30여개 장비를 직접 지원했는데 이러한 지원은 2018년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에 벌어진 캄보디아의 지방 선거에도 중국의 무려 1,170만 달러 규모의 장비를 지원한 바 있다. 중국은 훈 센을 밀어줌으로써 캄보디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었다. 이어 캄보디아는 태국, 베트남과 사이에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에 방어 무기들이 적극 필요했었다. 이는 태국과 베트남이 이미 최신예 중국제 VT4 탱크와 러시아제 T90S 탱크를 배치했었기 때문인데 중국은 캄보디아에 탱크, 장갑차 100대를 무상제공했다. 캄보디아의 대중국 수출 규모는 전년 동기보다 18% 급등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대 중국 수출품은 쌀, 타피오카의 원재료인 카사바, 캐슈너트, 야자유, 고무 등 농산물이 대부분인데 비해 캄보디아의 중국산 수입품은 자동차, 오토바이, 건축자재, 직물, 담배, 비료 등 다양한 품목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중국은 캄보디아에 무역에서 위안화 사용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어 중국은 캄보디아와 군사 관련 비밀 계약을 체결하고 캄보디아 해군 기지인 리암 항을 중국 해군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확보했다. 중국은 이 항구를 30년 동안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향후 10년마다 계약을 경신하기로 했다. 중국은 두 개의 부두를 추가로 건설했으며 한 곳은 중국군이, 다른 한 곳은 캄보디아 군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중국 자본이 들어갔다. 물론 캄보디아는 남서부에 위치한 리암 해군기지가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반발했지만 이미 타이만 일대에 중국 군함들이 리암 기지를 주둔지로 두고 순찰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어 중국이 조차한 것으로 보여 진다. 게다가 리암 항은 중국이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최대 투자하고 있는 시아누크빌 일대를 보호할 수 있는 해안 요새로써도 활용가치가 높은 곳이다. 더불어 이 지역에 중국의 실존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중국계 캄보디아 자본의 가장 큰 재벌로 프린스 홀딩스 그룹이 있는데, 이 회사 회장인 '천 즈(陈志, Chen Zhi)'는 중국 출신이지만 캄보디아로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부동산 사업이나 금융업, 시계 제조업 등 다양한 사업을 보이며 훈 센 총리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리암과 시아누크빌 일대 부동산업의 가장 큰 손이다. 그리고 천 즈는 태자당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인물로 시진핑 및 중국 공산당의 고위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다. 그리고 중국이 캄보디아에 일대일로 사업을 안정적으로 밀어 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천 즈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다. 이후 시진핑은 9년 만에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캄보디아는 훈 센에서 훈 마렛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엔 첫 방문이다. 이 때도 천 즈가 훈 센, 훈 마렛 부자와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과 노로돔 모니니엇 왕대비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회담에 양국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전면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강화에 대해 논의했으며 정치적으로 서로 간의 신뢰를 재확인하는 한편 각종 경제 협력과 군사 안보문제, 그리고 문화 교류 및 전략적 협력 등 5대 주요 분야에 대해 깊은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중국-캄보디아 운명 공동체에 새로운 현대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여기에 양국이 사활을 걸고 있는 부분에 있어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캄보디아 최대 국책 사업인 "푸난 테코 운하" 건설 사업이다. 이 운하 사업은 캄보디아 일대일로의 두 번째 야심작이라 볼 수 있겠다. 첫 번째가 시아누크빌 항의 "마카오화"에 중점을 두면서 리암 항구를 조차해 군항으로 만들어 타이만 일대를 "내해화" 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시아누크빌은 동남아시아 최대 카지노들이 몰려 있는 도시가 되었고 중국계가 도시의 권리 및 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리암 항구를 군항화 시키는 것에 성공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심대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두 번째가 메콩 강 장악에 이은 "푸난 테코 운하" 건설이다. 푸난 테코 운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남부 케프성의 타이만 바다까지 약 180㎞ 길이를 메콩 강 지류를 이용해 물길로 잇는 사업으로 여기에 캄보디아 GDP의 약 4%에 해당하는 17억 달러(약 2조 4,000억 원)가량의 비용이 드는 대공사다. 그러나 이 사업은 겉으로 캄보디아가 주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뒷배경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다. 캄보디아 1인당 GDP가 2,500달러가 채 안 되는데 이 같은 사업에 캄보디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손 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배경에는 중국이 주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업인 것이다. 게다가 운하 건설의 시공은 중국도로교량공사(CRBC)의 모회사 중국교통건설공사(CCCC)이다. 이 사업에 대한 투자를 중국 기업들이 했지만 중국 내 경기 상황이 좋지 않고 정부의 자금난 등으로 인해 중단된 상태에 있다. 캄보디아 정부에서는 이 운하에 최대 3,000재화 중량톤(DWT : 선박 자체 무게를 제외한 순수한 화물 적재 용량)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어 내륙과 해상 수로를 새롭게 열게 하기 위해서 건설의 목적을 밝힌 바 있다. 운하 굴착 뿐 아니라 선박 통과용 갑문과 항해 및 물류 인프라 등을 건설해 캄보디아를 싱가포르처럼 해양 무역에 중점을 두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시도였다. 물론 이 운하가 완공되어 활용이 된다면야 캄보디아의 중요한 내륙 수로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핵심 교통 인프라가 생성되 국가 경제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운영만 제대로 된다면 물류비를 대폭 줄이고 캄보디아 산업 또한 중, 고부가 가치 단계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재대로 개통 및 관리만 된다면야 캄보디아를 동남아시아 최빈국 Bic 3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에서 중진국으로 급속도로 성장할 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업이 성공해서 잘만 운영될 수 있다면야라는 전제 조건이 성립 하에서다. 그런데 사실 필자가 동남아시아를 직접 다니며 관찰해 본 결과, 경제적 수익성으로만 본다면 이 운하 건설 사업은 매우 회의적이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부 케프성의 타이만 바다까지 약 180㎞에 달하며 길이가 매우 짧은 편이다. 게다가 메콩 강의 수역이 폭이 넓어 문제가 없지만 해당 지역으로는 새로 건설하는 운하 수역이다. 게다가 타이만으로 연결되는 하구 지역은 습지와 늪지가 많고 지반 자체가 허약해 일부 구간은 붕괴 가능성이 높으며 선박 회전율이 낮다. 즉, 대형 참사의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류 효율성과 수익성 확보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로 이웃 국가인 기존 베트남의 항만들과 비교했을 때, 수출입적 거리나 이를 연계할 수 있는 인프라적인 측면에서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항구와 경쟁력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애초부터 베트남은 해양 진출에 대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진행한 반면, 캄보디아는 이제 막 해양 진출을 시작하려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경험도 미숙하다. 베트남의 주요 항만들은 글로벌 해운망에 통합되어 있고, 주변을 연결할 수 있는 도로와 철도 등 배후 인프라도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편이라 도로망 정비가 미흡하고 각종 인프라가 열악한 캄보디아와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결국 푸난 테코 운하 이용료를 파격적으로 낮추거나, 각종 인센티브 부여하는 등 특별한 혜택과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수출 기업들 입장에서는 기존의 베트남 항구를 통해 수출하는 것이 시간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훨씬 낫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운영 형태는 결국 마이너스로 간다. 또 다른 문제는 환경 문제다. 푸난 테코 운하는 메콩 강 유역을 관통하면서 새로 길을 내고 있는 편인데, 이 지역들의 생태를 보면 농업과 어업에 의존하는 인구가 많고 생태계도 민감한 수준에 있다. 게다가 줄지어 있는 중화학 공장들이 많아 공업용 폐수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운하 공사는 안 그래도 어려운 사정의 메콩 강 생태계를 교란시키며 파괴될 수 있다. 특히 캄보디아 특유의 열대 기후, 건기와 우기 간의 수위 변화는 가뭄이나 홍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생물의 다양성 보존, 아나콘다 같은 큰 뱀과 바다악어 등의 생물들의 개체 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고, 가뜩이나 관리 소홀로 인한 수질 문제 등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어 운하는 관리가 생명이다. 노후화 되지 않도록 시설 관리를 꾸준히 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수질 관리도 철저해야 한다. 그리고 인프라도 끝없이 개선해야 한다. 운하 건설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지, 보수, 관리하는 측면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나간다. 그렇다고 캄보디아 측이 이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관리는 중국이 하게 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전반적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만 높아진다. 안보 측면에서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가장 경계하는 국가는 미국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이다. 이 운하가 중국 군함의 태국만 진출 통로로 활용될 가능성 또한 무시못한다. 이에 대해 훈 마렛 총리는 운하의 수심이 약 5.4m에 불과해 군사적 용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해명했지만, 그것이 그렇지만도 않다. 직접적인 군사적인 용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물리적인 메콩 강에 대한 중국의 통제는 그 어느 군사적인 위협보다도 더 큰 생존의 위협이다. 메콩 강은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해 남중국해로 빠지는 동남아시아의 젖줄이자 생존 경제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생명선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메콩 강 상류 댐을 건설해 통제에 들어갔다. 여기에 운하까지 건설하면 물줄기의 상당수는 운하를 따라 캄보디아의 타이만으로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베트남 남부 지역은 전형적으로 물의 양이 줄어들어 습지와 삼각주 일대는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 환경적, 식량경제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존재감이 확대되는 것은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들은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까지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운하 사업은 중국이 베트남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하는 전략적인 부분도 한 몫하고 있다. 메콩 강 수운을 조절하여 베트남의 목숨줄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이고, 타이만으로 돌려 버리는 운하로 인해 베트남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베트남을 고립시킴으로써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려는 일종의 "Control Strategy (통제 전략)"인 셈이다. 시진핑의 이번 방문에는 단순한 인프라 지원과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대한 동맹 전선을 성립하는데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으며 자신들의 앞마당인 동남아시아를 통제함으로써 점차 힘을 잃어가는 미국의 영향력을 더욱 축소시키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철도, 항만, 운하 등 교통망을 통해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게 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외교적 입지를 넓히고 동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최강국임을 굳히려는 것에 있다. 캄보디아는 지리적으로 남중국해와 가까워 중국 입장에서는 외교적 교두보로 활용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곳이기에 여러 용도로 매우 중요한 국가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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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3
  • 시진핑의 말레이시아 방문의 의미와 미국이 해야할 대응
    최근 시진핑이 말레이시아를 2박 3일 방문하고 돌아갔다. 시진핑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와 회담하고 양국 협력 강화 방안과 국제 현안을 논의했는데 이는 명목상이고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세계 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와 연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게다가 올해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국인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전체가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전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핑의 방말은 아세안 국가들 자체가 미국의 관세 부과에 또 다른 해방구가 있음을 일부러 미국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안와르 총리는 지난 16일에 일본과 보복 관세 문제를 협의하고 어제 17일에는 태국 방콕을 방문하여 패통탄 총리를 만나국경 문제를 협의하면서 태국에게 부과된 미국 관세에 대해서도 공동 대응을 모색했다. 태국 또한 미국에게 36%의 관세율을 부과받았기에 미국에 협상단을 파견한 반면,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른 아세안 국가 정상들과 만나며 바쁘게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이어 안와르 총리는 방콕의 한 호텔에서 미얀마 군정 수장아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과 비공개로 회담했다. 미국발 관세 폭탄은 동남아시아 각 국의 입장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고 이에 따라 각국이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무역활로를 모색 중에 있다. 미국하고 관세 협상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새로운 무역루트를 찾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파고 들어온 것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자신의 앞마당인 동남아시아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인도-태평양을 통해 아프리카와 수에즈, 중동 일대와 연결되어 있는 동남아시아는 미국으로 볼 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대륙임은 확실하다. 중국 입장에서도 기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분쇄하고 인도양으로 일대일로를 통한 국제지역적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을 해결하려면 동남아시아에 대한 완전한 중국화는 필수적인 문제다. 미국과 중국 양국의 각종 이익들이 충돌하는 대륙 또한 동남아시아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 또한 석유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들이 남방인 동남아시아를 통과하여 들어오기에 동남아시아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수입 및 수출 문제 또한 동남아시아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우리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대륙일 수밖에 없다.본래 말레이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일단 경제적으로 상당히 교류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자체의 무역으로는 중국과의 교류가 월등한 입장이다. 중국과 말레이시아는 지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경제적 유기성과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인해 상호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는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기도 하고 특히 양국의 경제적 유기성은 매우 깊다.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최대 수출 시장 중 하나이며, 말레이시아는 중국의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다. 양국 간의 무역 관계는 전자제품, 원자재,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며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보자면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전자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호 의존성은 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중국은 매우 밀접한 편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오래 전부터 화교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가 영국에서부터 독립했을 당시에는 싱가포르와 함께 말레이 연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후에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다수의 화교가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사실 말레이시아의 경우 화교 문화가 발달되어 있기에 주민 대다수 중 절반에 가까운 규모가 중국계 인사들이 많다. 그 수효는 인접 국가인 싱가포르와 비슷할 정도다. 그러나 중화권이 무조건 같은 정책을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화교라고 하더라도 대륙 중국에 무조건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대만을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대륙 중국보다는 대만을 더 우선시 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과 말레이시아 두 나라 정부의 인증을 받은 대학교가 최근에 세워지는 등 두 나라의 관계 또한 많이 나쁜 편도 아닌 거의 그저 그런 관계였다. 특히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Belt and Road Initiative, BRI)은 중국이 2013년에 시작한 글로벌 개발 전략 때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현대판 실크로드를 구축하기 위한 인프라 및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인데 그 중요한 축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와 말라카 해협이다. 이 정책은 도로와 해상 실크로드를 포함해 전 세계 여러 국가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포함하고 있으며 본래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민 나라도 말레이시아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중화권의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대일로 파트너 국가들의 인프라 발전을 지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 상호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중국의 동남아시아 일대일로 정책의 최초 파트너 국가이자 중국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중국의 다양한 투자를 받았다. 즉, 중국의 투자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성장과 중국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 이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말레이시아와 중국 간의 무역 및 투자 관계는 몇 년 동안 깊게 이어져 온 것이 현실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후 양국 간의 무역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2016년 이후로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가장 큰 투자국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인프라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협력은 양국 간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상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교류들이 진척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핑은 12년 만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에서 시진핑 주석은 전략적 자주성을 유지하고 고위급 인사들의 협력 강화하며 고품질 물품들을 개발하는 기술 협력을 확대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리고 세대 간의 우호를 계승하며 문명 교류 심화 등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는 굳이 시진핑이 오지 않고 왕이 외교부장 정도급의 인사만이 와서 해결해도 되는 문제다. 정작 시진핑이 방문해서 해결할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이는 미국의 관세 부과에 따른 중화권 국가들의 공동 대응 문제에 대한 협의다. 이전에 베트남은 미국과의 공동 대응 문제에 대해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말레이시아는 베트남과 달리 중국과 함께 공동 대응을 약속했다. 말레이시아는 본래 미국과 중국 간의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는 국가였다. 중국과 112억 달러 규모의 철도 사업을 포함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진행하는 한편 미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군사 교류 및 합동 훈련 등을 병행해왔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 부과된 24%의 관세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에 부과한 관세의 경우, 중국 기업의 "라벨갈이" 관세 우회 수출 전략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말레이시아는 중국 기업이 속칭 "라벨갈이" 수출을 할 수 있는 그런 개발도상국 같은 국가가 아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더불어 동남아시아에서 나름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이자 최소 중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인도네시아 및 싱가포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말레카 해협의 통제권도 인도네시아와 양분하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 일대와 미 대륙 서부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 및 원자재들도 말레카 해협을 통과해서 이동한다. 말레이시아에 부과한 높은 관세는 미국 서부 지역의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가 보복으로 말레카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배에 100% 이상의 관세를 때려버리면 이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럼프의 관세 전쟁 국면에서 미국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콸라룸푸르 경제계 쪽과 콸라룸푸르 말레이시아 국립대학 국제전략과 교수들도 “미국이 시작한 관세 전쟁은 바라던 동맹을 얻지 못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면서 “오랜 시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균형 외교를 하면서 위험 헤지 전략을 추구해 온 말레이시아가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부과된 관세를 15% 정도 낮추고 말라카 해협 주변국들에게 인심을 얻어 미국의 무역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중국에 협력하는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 입장에서도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미국 수출입과 직결되는 무역 경제에 있어서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와 적극 협상으로 임하며 신중해야 한다. 말레이시아 이브라힘 총링와 시진핑의 공동 발표와 둘의 협력은 미국과 한국, 일본 모두에게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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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23
  •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독재 행위에 대한 전범 재판과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
    크메르 루주는 1951년에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로써 1980년대에 대한민국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어 표기이며 현지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 Khmêr Krâhâm)이라 불리는데 두 명칭 모두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갖고 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는 국가를 세워 지배하였으나 국가를 지배하면서 비인간적인 수뇌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행한 것에 이어 나라를 초토화시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인들에게 이어지는 막대한 심리적이 고통과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매우 극단적이었던 데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다. 이들을 두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골 성향의 무리들로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히려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 미국의 헨리 키신저 방식의 정치 현실주의 외교 정책을 비판할 때, 크메르 루주의 잘못된 부분들을 사례로 언급하기도 한다. 크메르 루주의 단체명은 원래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 공산당이나 공산당 지지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 호칭이었다. 이들은 북베트남의 지원으로 탄생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 세력을 확대하여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사실 붉은 크메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크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군은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가했으며 친미 우익 세력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군은 캄보디아에 베트콩들이 다수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23만 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캄보디아는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단교하였고 1966년에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내 기지를 설치하고 시아누크빌로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친 북베트남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된다. 물론 베트콩 게릴라들은 보급이나 기습 용도로 구찌 땅굴을 이용했는데 이 땅굴은 베트남은 물론 인접한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이 베트콩의 땅굴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하였고, 오히려 그 폭격에 죽은 민간인만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의회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 성장이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늘어나 이념 대립도 심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 우익 쿠데타가 발생해 론 놀에 의한 친미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론 놀 정권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모른척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무능했으며 특히 당시 군부 또한 학살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캄보디아 내에서 반미 정서가 팽배해지면 오히려 불리하게 되었다. 결국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와 동맹을 맺으며 지지 기반을 급속히 늘릴 수 있었고 결국 1975년에 론 놀 정권을 붕괴시키고 1975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시아누크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각종 이상한 정책으로 인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러한 반발을 킬링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로 제압했다. 이후 베트남에게 함락당한 옛 영토들을 회복하겠다며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벌이며 충돌하다가 베트남군과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 동맹군의 공격으로 인해 정권이 붕괴하고 말았다. 1979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베트남군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었지만 폴 포트와 키우 삼판(Khieu Samphan) 등이 권력을 잃고 몰락한 크메르 루주 세력은 국제 사회와 서방 세계로부터 합법적인 정권의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건국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과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각종 테러를 벌이며 전쟁을 이어갔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옛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권역을 베트남이 지배하려는 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더 나아가 태국까지 병합하여 베트남 제국을 건설하려는 베트남 팽창주의의 야욕으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된 태국은 물론 베트남에게 원한이 있는 중국과 미국이 모두 반발하였으며 싱가포르, 호주 등 공산주의 확산에 경계심을 세우고 있던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까지 가세하였다.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은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였고 크메르 루주의 폭정들을 인지하고 있던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아닌 제3의 세력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ASEAN은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당연히 이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1981년에 ASEAN은 크메르 루주 무장 해제 요구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여 망명 중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데려와 국가 주석으로 옹립하고 민족주의자인 손 산을 수상으로, 크메르 루주의 키우 삼판을 외교부장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연합 정부가 1982년 6월 22일에 수립되어 반 베트남의 기치 아래 모인 미국, 중국, 태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반면 소련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하며 매년 무려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지원을 해 주었는데 이는 미국이 태국에 제공하는 연간 3천만 달러의 지원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들과 MiG-23을 비롯한 전투기와 해군 함정,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주둔 비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이웃 국가인 라오스는 원칙적으로 이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는데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쑤파누봉 정부가 선택한 일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쑤파누봉과 까이쏜 폼위한(Kaysone Phomvihane)과 같은 라오스의 집권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의 고위층 인사들이 보기에도 크메르 루주가 언급하는 주장들은 도저히 공산주의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오스는 공산 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내전을 치르며 정권을 장악한 캄보디아와 같이 내전에서 옛 정권이 패망하고 공산당 반정 게릴라 세력인 파테트라오, 현 라오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있긴 했지만 왕정에서 공산주의 정권으로의 이양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된 사례였고 거기에 라오스는 왕당파, 공화주의 우파, 공산주의 좌파 등 주요 세력의 수장 모두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들인 것을 넘어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 관계였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형제라고 숙청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라오스에서는 왕자 출신의 좌파 지도자이자 집권 여당인 파테트 라오의 최고 수장이던 쑤파누봉이 1975년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 초대 국가 주석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도 다른 정파를 주도하던 이복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나 사형 없이 온건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로 인해 라오스 국민들 사이에는 킬링필드 등과 같은 잔혹한 대학살을 벌이며 공산화가 이루어지던 당시 캄보디아의 모습을 상당히 무시하거나 살인과 보복에 미친 정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베트남의 철수 이후 캄보디아 왕국이 창설되었을 때 손 산의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시아누크 전 국왕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과 같이 참여하여 새로운 정권 구성을 논의했고 1991년 UN 중재로 인해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평화 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대부분 캄보디아에 귀순하고 1999년 이들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21세기에 들어 UN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 전범재판소가 설립되고 근 30년 만에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때는 크메르 루주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사망한 이후였다. 물론 단순히 크메르 루주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잔혹한 처벌을 벌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연좌제가 배제되고 일반 가담자가 아닌 대형 범죄에 책임이 있는 고위 지도자 위주로 기소가 이루어졌다. 사실 크메르 루주에 속했다가 회개한 이들은 많다. 크메르 루주가 지배할 때 살아남기 위해 크메르 루주에 가입하여 학살에 앞장서거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를 받은 뒤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도 많았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 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이 씻겨준 자의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과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 재판이 이루어진 것은 주된 학살이 이루어졌던 S-21 교도소 소장이며 1급 고문자였던 깡 겍 이우(Kaing Guek eav 또는 lew. 1942~2020)로 일명 둑 / 두치(Duch) 동지였다.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는 17,000명이지만 정황 증거와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의 집권 시절 교도소 소장이 직접적으로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했다고 한다. 정신 무장이란 이름으로 대변을 먹게 하거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리는 등 아주 충격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깡 껙 이우 소장은 2020년 9월 2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익명의 제보자에 의하면 그는 수년 동안 폐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깡 껙 이우는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인해 크메르 루주 정부가 붕괴되자 신분을 숨기고 도주하여 한적한 곳에서 숨어 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 받아 아내가 죽게 되었으며 또 다시 도주했다.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하다가 그를 알아 본 현직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형사는 당시 두치에게 잡혀 고문 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악마가 웃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잊혀 지지도 않는다고 치를 떨며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1999년에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 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재판 당시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시켰다. 지난 10년간 회개했다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모습을 취하다가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이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를 원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는 지에 대해 교회들을 원망하는 언사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더불어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이는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먼저 처벌받아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과 관련한 자료인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기사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현장을 보던 두치의 죄과를 모른 상태에서 그를 목사로 추천하던 인물인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Lang Tuyau Fernandez) 목사는 한숨을 쉬었다. 깡 겍 이우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 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를 용서했을지 모를 것 이지만 깡 겍 이우 홀로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깡 겍 이우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많은 고문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그 형사도 어머니가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한다고 했지만 이러한 것과 대조적인 두치의 저와 같은 발언을 보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이와 관련한 서적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프랑스 언론인 티에르 크루벨리에(Tières Crubellier)가 2012년에 저술한 <자백의 대가(La confession)>가 있는데 이는 다소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 서적에서 프랑스였으면 다르게 처리했을 것이라는 형식의 내용이라든지,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후진국 캄보디아에 대해 대단한 인종차별적인 서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재판에 대해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 전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겸 인민 대표 회의 상설 회의 의장, 이엥 사리 전 외교부장, 키우 삼판 전 국가 상임위원회 주석, 이엥 티릿(Ieng Thirith) 전 사회 문제 부장 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킬링필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키우 삼판은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였으며 그는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법부 측이 자신을 공정하게 재판할 능력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민주 캄푸치아의 정책은 키우 삼판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혐의는 매우 농후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을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사회 혁명을 이룩하려면 나라 전체를 교육, 산업, 도시, 화폐가 없는 완전한 농업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킬링필드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정부 또한 이번 재판이 마지막 전범 재판이라는 태도로 매우 비협조적인 상태로 나왔으며 2022년이 되어서야 재판이 종결되었다. 실제로 재판에 회부된 전범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70~80세를 넘은 고령이었던 데다 이엥 사리처럼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노환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이엥 티릿처럼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 누온 체아와 깡 겍 이우는 이미 옥사했으며 2022년 9월 22일에 종신형이 확정된 키우 삼판 정도만이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 중에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훈 센이 장기 독재로 들어서며 2023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면서 아들 훈 마넷(Hun Manet)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독재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많고 캄보디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대우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에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시간이 지나며 세대가 바뀌어 감에 따라 그와 같은 여론은 줄어들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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