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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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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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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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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7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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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7
  • 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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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6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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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청나라의 지배 시기 외몽골에 대해
    에제이(Ejei) 칸은 링단 칸과 수타이 태후(蘇泰太后)의 아들이며, 에제이는 몽골어로 권리, 오른쪽, 올바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콩고르(Kongor)는 자기, 자신을 뜻하고 있다. 그는 링단 칸의 장남이며, 낭낭태후(娘娘太后)의 소생 아부나이(阿布奈)의 이복형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타이 태후(蘇泰太后)는 여허(Yehe, 葉赫) 추장 긴타이시(Gintaisi, 金台石)의 손녀로, 데르케르(Derker)의 딸이다. 후금의 누르하치의 첩 중 1명인 몽고저저(Monggojeje, 孟古哲哲)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는 여허부(葉赫部)의 추장 양기누(Yangginu, 楊吉砮)의 딸이자 긴타이시(金台石)의 누이였다. 1634년 8월 7일 아버지 링단 칸이 티베트 원정을 가던 중 청해 지역에서 갑작스러운 두통, 혹은 천연두로 사망했다. 17세기 초까지부터 대칸의 권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링단 칸은 칸을 자처하는 투메드(土默特) 부를 멸망시키고, 차하르(察哈尔)에 비 호의적이던 하르친(科爾沁) 부 왕공들을 정벌했다. 이들은 모두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귀순하게 된다. 링단 칸이 죽고 난 1634년,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는 1635년 2월 만주 기병대 1만 명의 기습으로 인해 포위되었다. 세첸칸부(車臣汗部)의 슈루이(Shurui)는 링단 칸의 카툰에게 자신에게 귀순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압력을 가했다. 1635년 2월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 계모 낭낭태후 등은 청나라 군에 항복하여 홍타이지에게 원나라 시대부터 전해진 전국새의 옥새를 바치며 대칸의 칭호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홍타이지로부터 진왕(親王) 혹은 고륜액부친왕(固倫額駙親王) 혹은 차하르 친왕(察哈爾亲王)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친왕(亲王)의 작위는 그가 사망하고 난 1661년 동생 아부나이에게 상속되었다. 하지만 아부나이는 공개적으로 청나라 황실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만주족들의 황실 행사에 참여를 거부하다가 1669년, 강희제에 의해 체포되어 심양에 유폐되었다. 어떠한 이유에서였는지 아부나이는 만주에서 탈출하려던 도중에 다시 청나라 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아부나이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딸이자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보르지긴 씨쪽 철철(哲哲) 소생 고륜온장공주(固倫溫莊公主) 마가다(Magada) 혹은 아비다(Avida)와 결혼했다. 효단문황후의 친정 역시 보르지긴 씨족으로, 카라친(喀喇沁) 부 출신이며 친정아버지 망구스(Mangγus)는 칭기즈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拙赤合撒儿)의 17대 손이었다. 그는 1661년, 포로로 있던 중,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남몽골 지역은 차하르 부족이 계속 다스리다가, 1635년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하고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 아이신줘러(愛新覺羅) 황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의 황제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몽골 제국 대칸의 권위를 이양 받았고, 남부 몽골 지역은 완전히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은 연합 제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고종(高宗) 건륭제 때는 할하부가 중심이 된 북부 몽골까지 병합했다.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북부 몽골과 신강(위구르스탄), 티베트에 걸쳐 존재하고 있던 오이라트 계통의 준가르 제국을 격전 끝에 멸망시키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렸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에제이 칸의 장례에 친왕의 의장을 하사하였으며, 몽골의 예로 라마 독경을 하게 명령받았으며 중국 승려를 불러 운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그의 작위는 그의 동생 아부나이에게 같은 해 9월에 상속된다. 후일 아부나이는 청나라 황실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에 감금당한다. 이어 아부나이의 작위는 아부나이의 아들 보르니(Boroni)에게 주어졌다. 아부나이의 아들인 보르니가 청나라 황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지 않게 하기 위하였지만, 결국 1675년, 그는 동생 루브증(Rubjung)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차하르 이 외에 다른 몽골족까지 가세할 것으로 믿었으나 모든 몽골족들은 그를 배신했고 이로써 봉기는 실패하게 된다. 이것으로 몽골은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몽골 북부 할하부 또는 외 할하부의 3칸부인 투시예드 칸부, 세첸칸부, 자사그투 칸부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몽골의 대표 지도부로 생각했었다. 이들은 1691년 준가르 칸국과 강희제의 전쟁 중 양측의 압력을 받아 청나라의 속국이 될 때까지 형식적으로 청나라 조정에 조공을 보내고 자립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내몽골 지역에는 이번원(理藩院)이 설치되었는데 이번원의 전신은 몽골아문(蒙古衙門)으로, 홍타이지 시기 몽골을 정복하고 나서 몽골 지역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다. 장관으로 승정(承政)을 두었는데, 순치제 연간에 상서(尙書)로 개칭되었다. 순치제 16년에는 예부(禮部) 소속이 되었다가 순치제 18년에는 독립된 관청으로서 이번원(理藩院)이 설립되었다. 이번원은 19세기 제2차 아편전쟁 후 외국과의 외교를 위해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치한 이후로 러시아와의 업무만을 위해 이관되었다. 당시에도 이번원의 장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서로 종1품이며 차관으로 좌우 시랑을 두었다. 청나라는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에 따라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직인 중앙정치기구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을 1명씩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번원만큼은 오로지 만주족만이 임명되었다. 이는 몽골인의 수가 자리에 비해 매우 모자랐기 때문에 만주족이 대신 임명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계 민족들은 14세기 후반 몽골 제국의 해체 이후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다. 분열 후 수많은 몽골계 종족들이 난립했으나 17세기 초 중기에 한창 일어나던 후금에 남몽골이 복속되어 대원진국옥새를 바치고 후금과 일체화되었다. 17세기 말기에 강희제는 원정을 통해 준가르 인들을 추방해 버리고 북부 몽골을 복속시켜 버렸다. 이 때 준가르 명군인 갈단 칸은 패퇴 후 알타이 인근에서 자결로 끝을 맺었다. 갈단 칸이 죽고 체왕 랍단이 뒤를 승계하면서 준가르 제국은 동투르키스탄 및 몽골 서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번에느 티베트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18세기 중기 건륭제 때, 준가르 제국을 멸망시키며 준가르 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청해호 일대와 티베트, 동투르키스탄이 차례대로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이 때 중가리아 일대는 준가르 제국의 절멸로 인해 공지(空地)가 되어 버렸고, 여기에 한족들과 동투르키스탄 남부 타림 분지 일대에 살던 위구르, 알타이 일대에 거주하던 카자흐, 키르기스 등 각 투르크의 예하 부족들을 이주시키며 둔간족이라 불리는 한족 무슬림 회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북부 몽골의 할하 인들은 청나라의 간접 지배하에 놓인 이후 끊임없이 청나라에 저항하게 된다. 할하 등 북부 몽골인들은 반독립 지대로 조공 국가였던 형식이라 각 지역의 칸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고 중국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청나라 황실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한족과는 물론 남부 몽골과도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이들 중 투시예드 칸부(Түшээт хан аймаг)는 가장 세력이 강했다. 이들 투시예드는 튀시예드 칸부 혹은 아이마그(Aymag)라 불렸다. 이들은 북원에 속해 있었던 몽골의 귀족 부락이자, 북원의 멸망 이후 독자적으로 외몽골 할하 중동부에 있던 외 할하의 부(아이마그)였다. 투시예드는 몽골의 외 할하부 중 대표적인 수장격인 부락이다. 투시예드의 역대 칸들은 칭기즈칸 가문의 직계 후손들로 황금씨족이었다. 투시예드 칸부의 영역은 울란바토르 시와 그 주변 지역, 외몽골 중부 지방이었다. 세첸 칸부, 자사그투 칸부와 더불어 외할하 3부, 혹은 사인노얀(Sainnoyan) 부, 코토고이드(Kotogoid) 부의 알탄(Altan) 칸부와 더불어 외 할하 5부로도 불린다. 몽골의 다얀 칸 사후, 생성된 외몽골의 5개의 독립된 칸부였다. 다얀 칸은 생전에 몽골의 6부를 분할하여 자신의 11명의 아들에게 분봉하였고, 외몽골 중동부의 할하 부 중 외 할하부는 다얀 칸의 11번째 아들 게르센지 잘라이르(Гэрсэнз жалайр, 1513~1549)에게 분봉되었다. 1549년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사후 그의 아들들 중 오노후이 콩타이지(Онохуй хунтайж)는 외할하 좌익을 물려받았으며, 후일 투시예드 칸부로 발전하게 된다.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사후, 외 할하부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지만, 외 할하부는 북원-타타르의 대칸 정권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내몽골의 다른 부족들이 후금에 투항하여 참여하고 1635년 내몽골과 북원의 대칸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에도 이들은 외 할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1697년 자오모도 전투(Battle of Zhao Modu)에서 외몽골 5개의 칸부가 청나라 군에게 패배하면서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칸부인 세첸 칸부(Сэцэн хан аймаг, 車臣汗部, 徹辰汗部) 혹은 외할하 동로(外喀爾喀東路)는 북원-타타르 왕국의 외몽골 외 할하부 극동부에 위치한 몽골 부락의 하나였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외곽과 고비 사막 일대에 거주하였다. 자사그투 칸부, 투시예드 칸부, 사인노얀 부락, 코토고이드 부락, 알탄 칸부 등과 함께 외 할하를 구성하는 주요 부락(아이마그)이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동쪽으로는 여진족, 그리고 서쪽으로는 투시예드 칸부와 접하고 있다. 북원이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도 다른 외몽골 부락과 함께 독자적으로 존속하였으나, 1697년 자오모도 전투에서 외몽골 5개 칸부가 청나라 군에게 패하면서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가 1911년 폐지되었다. 세첸 칸부는 몽골 다얀 칸의 11남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넷째 아들인 아민두팔(Amindupal)의 아들 수루이(Surui)가 세첸 칸이라 자처한 것에서 유래한 부락명이다. 이들은 1635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또 다른 칸부는 자사그투 칸(札薩克圖汗) 또는 자사그투 칸부(札薩克圖汗部, Засагт хан аймаг) 혹은 자사그투 칸부(扎薩克圖汗部)로 17세기 초부터 1923년 청나라와 중화민국 시대에까지 존속했던 몽골 칸부의 일종으로, 몽골 할하부에서 분할된 할하 4부 중 하나이며, 지도자의 호칭은 자사그투 칸이다. 이들은 할하 우익에서 출발하였다. 투시예드 칸부, 세첸 칸부와 함께 3칸부로 불리고 있다. 자사그투는 1923년 몽골 인민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폐지되면서 부락은 완전 해체되었다. 1688년 청나라 때에 복속되어 1691년 자크비라 세친비둘 노엘맹(札克畢拉色欽畢都爾諾爾盟, Заг голын эх Бидэръяа нуурын чуулган)으로 개편, 자사그투 칸이 직할하는 자사그투 부 중기 외 8개의 기(旗)로 개편되었다. 자사그투 칸부의 칸은 1691년 청나라 황제로부터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작위를 받았다. 몽골 북원 다얀 칸의 아들 잘라이르 부의 게르센지 콩타이지(Гэрсэнз хунтайж)의 아들 아시카이(Ашихай)가 차하르 우익을 형성했고, 아시카이의 손자 라이쿠루 칸(Лайхур хан, 1562~1610)은 1580년 혹은 1587년에 자립하여 잘라이르 부를 세웠다. 영지의 동쪽은 사인노얀 부로 분할되었다. 청나라에 귀순한 이후로는 17~18세기 중 여러 개의 기로 다시 세분화되어 분할되었다. 그리고 알탄 칸 왕조(阿拉坦汗王朝)가 내몽골에 존재했는데 이들은 1606~1691년 몽골 할하 북서부 우부스 호(Увс нуурын)와 데르거 모른(Deleugeo moleun) 일대의 코토고이드(Хотгойд) 부를 다스리던 역대 칸들의 칭호로 나타난다. 코토고이드 부의 역대 지도자들은 칸과 카간 대신 콩타이지(渾台吉)라는 직책을 자칭하였다. 할하의 알탄 칸, 코토코이드 칸부로도 부르며 한자로는 투메드 부의 지도자 알탄 칸(俺答汗)과는 다르게 번역되고 있다. 이들은 1606년 자사그투 칸부에서 자립, 1691년까지 기록에 등장한다. 자사그투 칸부의 라이쿠루 칸이 오이라트를 통제하기 위해 1606년 자사그투 칸부의 북쪽 영지와 코토고이드 부를 슈루이 우바시 콩타이지(Шуруй Уваси Конгтайжи)에게 콩타이지 직책을 부여하고 맡기게 된다. 그러나 알탄 칸부의 콩타이지는 후일 자사그투 칸부와 갈등하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이들은 1691년 청나라에 복속되어 사라졌다. 3대 알탄 칸 에린친 롭상 콩타이지(Эрин Чин Роб Санг Конгтайжи)는 1697년까지 코토고이드 부를 다스렸다. 1682년 에린친 롭상 콩타이지는 자사그투 칸부와 갈등을 벌이다가 축출되었으나, 준가르 칸국과 청나라의 도움으로 복귀하지만 다시 자사그투 칸부에 체포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동생인 센자브(Сенжаб)가 계승하였으나 1703년 센자브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코트고이드 부락이 있던 지역에 이번원(理藩院, Tulergi Golo-be Dasara Jurgan)을 설립하여 만주와 남몽골 부락민들에게 이번원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특히 남몽골의 차하르,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 이미 청나라와 일체화한 몽골 부족들이 할하 거주지로 들어가 이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항하는 북부 몽골 인들을 억제하기 위해 기존 구역을 분할하고 일정한 유목지를 설정했다. 그리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가 속한 행정 구역 외부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분할통치(分而治之)를 시행했다. 이 제도를 시행할 때 설정한 행정구역이 호쇼트 또는 코쇼(Qosi'u)와 솜(Soum), 치굴간(Чигулган)이었다. 북부 몽골이 독립한 이후에 당시 몽골 인민 공화국이 고슈트를 없애고 치굴간을 오늘날 애막(Аймаг)으로 바꾸면서 별도의 행정 구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청나라와 중화민국 시기를 거쳐 현대 중국도 각각 한자로 번역해 기(旗), 소목(蘇木), 맹(盟)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몽골인들의 역동성과 단결성을 억제하고, 청나라의 지배 구조에 순응하면서 동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미 만주에 일체화된 남부 몽골인들은 이 기/맹 체계들을 따르고 있어 한족들이 어디 성(省) 주민인가 물어볼 때 이들은 무슨 기(旗)에 속해 있는 주민인가 물어보며 서로의 출신을 정의했다. 청나라는 이질적인 북부 몽골 인들을 억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찍 일체화 된 남부 몽골인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적극 우대하였다. 남부 몽골인들의 경우 일찍부터 후금 시절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팔기군에 몽골병(蒙古兵; 몽고병) 또는 몽골팔기로, 한족으로 구성된 한족병, 만주족과 타 여진족 부족들 그리고 시버족으로 구성된 청나라 병사와 함께 엄연한 팔기군의 구성원이었다. 물론 수효는 한족병, 한족 군대 기인이 가장 많았고 팔기 내에서 몽골기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나 이들은 한족군기인보다 우대 받는 집단이었고, 청나라 시대 남부 몽골 지역의 132기 중 106기가 다얀 칸의 후손이었다. 황실은 주로 이들 보르지긴 왕공들의 딸과 지속적으로 통혼하였다. 그로 인해 남부 몽골 왕공들의 기세는 매우 높았으며, 특히 준가르 원정과 할하 복속 당시 남부 몽골 왕공들이 주력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사실 남부 몽골 지역이 중국화(中國化) 된 원인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청나라 시기 남부 몽골에 광산 개발이 이루어지자 한족들이 남부 몽골에 정착하면서 남부 몽골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린 것과 한화된 만주인이 몽골인과 혼인함으로 인해 한인 문화가 몽골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된 것 등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01
  • 필리핀의 홍수 사업 규탄 시위는 제2의 네팔 사태처럼 폭동을 불러올 것인가?
    9월 21일부터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리잘 공원에서 대규모 반부패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시위의 발단은 "부패(Corruption)"다. 얼마 전, 네팔에서 벌어졌던 시위와 발단과 규탄하고자 하는 목적이 같다. 필리핀에서 8월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을 때, 막대한 예산이 유령 공사, 부실 공사 등으로 횡령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트리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부분일 뿐, 기존의 필리핀 지도층들은 위에서 아래까지 부패로 인해 썩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체로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관료들의 부패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개 자신들의 운명이 그러하거니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즉, 왠만한 부패는 참고 넘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시민들이 관료들의 부패에 항거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던 것은 필자의 동남아시아 경험상 보통 세 가지로 점철된다. 1. 습하고 더운 기후조건 대개 습하고 더운 기후 조건을 가진 국가 시민들의 특성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낮에는 연일 35도를 육박하는 무더위에 습도도 늘 7~80%는 달고 다닌다. 인간의 체질상, 이런 온도는 상당한 '귀차니즘'을 동원한다. 그리고 왠만하면 복잡한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날도 더운데 복잡한 문제는 아무리 그 더위에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짜증을 유발하게 되면 그걸 서로간에 잘 알기에 복잡하거나 귀찮은 일은 회피하려고 한다. 가령,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이를 트집잡아 경찰이 잡아낼 경우, 경찰에 항의 및 항거하는 것보다 돈 몇 푼 쥐어 빨리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해당된다. 게다가 심성이 악착같거나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대개 성질이 순박하지만 많은 노동보다 쉽고 간편한 일을 선호한다. 동남아 국가들이 바가지가 심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작은 부패 정도는 방치하는 경향이 크다. 2. 큰 빈부격차와 비리 & 부패에 대한 무심함 (운명론과 현실순응론) 동남아시아 어디를 가든 빈부격차가 상당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은 하층민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대놓고 드러내지를 못한다. 그저 대개 운명이거니 하고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고위직들의 부패에 대해서도, 그들은 원래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니까, 혹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끝도 없이 자존심만 높고, 잘 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원래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자"와 아무리 해도 안 되니 그냥 이대로 살자는 "현실 순응론자"로 나뉜다. 대개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어디를 가도 이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러니 발전도 없고 끝도 없이 가난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넘어가지만 이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루를 보낸다. 그러니 일을 해도 동기부여가 적고 자기에게 정해진 일만 하며 자신에게 떨어지는 급여만 적당히 받아간다. 한국인 같으면 뭔가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것도 했다가 저것도 하면서 풀어가는 노력을 하지만 동남아시아인들은 그저 자기가 맡은 일만 하고 그것만 아주 열심히 한다. 3. 공산주의가 아니면 족벌정치 (통치자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통치자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동남아시아의 환경과 연관이 있는데 동남아시아는 집단을 매우 중요시한다. 항상 집단으로 살아가며 패거리 문화를 이루고, 그들을 이끄는 자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편이다. 아주 극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를 전복하는 일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동남아시아 사회는 집단의식이 대단한데 이들에게 있어 군집된 생활은 그 자체의 사회성이다. 우선 가족부터가 대가족을 유지하는 곳이 많고, 어딜 다니든 가족이든 친구들이든, 함께 뭉쳐다닌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하면 친구들까지 떼거지로 데리고 와 보복하는 경우가 많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많다. 일례로 한국에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생활할 일부의 자금을 제외하고 모두 고향에 송금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편이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고,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과 입헌군주인 왕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높다. 라오스나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답게 당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 및 애향심이 높다. 그리고 이는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발달한 농경문화에서 기인한다. 우선 식량생산을 위해 경작을 하려면 여럿이서 협동과 품앗이를 해야 한다. 그러니 자연히 집단화가 될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에 공산주의가 쉽게 투영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서로 협동하고 품앗이를 하면 소출을 서로 나눌 수 있다. 그와 같은 집단으로 생산된 것들을 나누는 것에 익숙한 문화가 공산주의 이론을 빨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류사에 있어 기초 생산인 농경 경제가 발달한 곳에 공산주의 이론이 빨리 정착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땅이 기름지고 농경문화가 발달한 동유럽, 산업의 90%가 농경인 러시아 제국과 중국, 2~3모작 이상이 가능한 동남아시아 등이 그와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농경 사회의 협동은 집단을 이루게 되고, 이 집단을 통치할 리더를 뽑고 그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다. 선출된 리더는 소출이 잘 되도록 집단화를 더욱 독려하고, 상대의 침략을 대비할 수 있게 군대도 같은 집단에서 선출한다. 그의 리더쉽에 따라 촌락 집단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리더에게 그저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맹목적 충성의 DNA는 고대보다 지금까지 선천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 통치자들도 자신의 가족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며 필리핀의 마르코스 가문이나 캄보디아의 훈 센, 태국의 탁신 가문처럼 족벌 정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필리핀은 정당 투표를 중심으로 조직되기보다 주로 가족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족벌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를 파드리노 시스템(Padrino system)이라 하는데 이 시스템에서는 공로가 아닌 가족 관계(인척주의)나 지역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연고주의를 통해 많은 정치적인 임명을 하며 자신의 패거리, 족벌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족벌 정치인 파드리노 시스템은 필리핀에서 많은 논란과 부패의 원천이 되어 왔다. 가족 관계에 따른 인척주의는 필리핀 헌법 제9조 1항과 2항을 위반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무원 임명은 가능한 한 자격과 적격성에 따라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정책을 결정하거나 주로 기밀이거나 고도로 기술적인 직책을 제외하고는 경쟁 시험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Appointments to civil service positions should be made, as far as possible, solely on the basis of qualifications and suitability, and should be determined through competitive examinations, except for positions that involve policy decisions or are primarily confidential or highly technical)." 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척주의는 소수 개인에게 유리하고 정부의 채용 및 승진 과정에서 공정성을 저해한다. 현 필리핀의 봉봉 마르코스나 그의 모친인 이멜다 등의 마르코스 가문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는데 두테르테에 의해 통제되었던 필리핀은 마르코스 가문 때문에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 하에서 마르코스 가문이 챙긴 재산의 총액은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 마르코스 정권이 1986년에 한 번 무너진 이후, 필리핀 대법원은 마르코스 가문이 국가에서 횡령한 재산을 반환하도록 명령하는 세 가지 별도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재산을 내놓은 바 없다. 그로부터 2025년에 이르기까지 근 40년 동안 필리핀에서 적발된 정부의 부패 사건은 33,772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10,094건은 부정 행위이고 7,968건은 뇌물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최악의 부패는 홍수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9,855개의 홍수 통제 프로젝트 중 70%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지난 달 필리핀 우기 때 불라칸 주에는 폭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주민들이 버리고 간 목조 주택까지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공공사업도로부(DPWH) ‘서류상’ 6월 말까지 5,500만 페소(약 13억 4,000만원)이 투입돼 220m 높이의 강둑이 세워져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홍수 방제 공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전국적으로 유령 및 기준 미달 프로젝트 신고가 100건 이상 접수됐다는 것에 있다. 이는 홍수 조절에 배정된 공적 자금의 70%를 누군가가 비리로 해먹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7월 태풍 크라이징과 폭우로 인해 홍수 피해를 제대로 막지 못했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겪었고 수많은 이재민들이 생겼다. 이후 건설업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며 대통령의 사촌을 포함한 여러 고위 정치인들이 건설업체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정황이 밝혀졌다. 이에 부패가 정권의 핵심부에까지 뿌리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동안 존재했던 부패에 그러려니 하며 참고 있었던 국민들의 분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필리핀 랠프 렉토 재무부 장관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홍수 예방 공사 부패로 인해 최대 2조 8,800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은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호세 리잘 공원에 모여 부패 정치인들의 사임을 요구했고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젊은 세대들은 SNS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부터 필리핀의 부패를 성토했기에 오프라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부패 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지난 9월 22일에는 시위 중 200명 이상 체포되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시위대들은 정부 비판을 상징하며 항의하는 의미로 몸에 진흙을 바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취임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폭력 시위가 난무했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시위자들은 타이어를 태웠다. 소이병을 투척했으며, 방범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 가스를 동원했다. 공교롭게도 전국 시위를 한 9월 21일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과거 국민들에게 호소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날이자,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을 선포한 53주년 째 되는 날이었다. 이와 같은 혼란에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이 당시 말라카냥 대통령 궁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코스 현 정부는 정부 대변인을 통해 '외부 세력의 조종이 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외부 세력으로 전가하려 했다. 이는 뻔하다. 중국 정부가 두테르테 가문을 움직여 시위를 조장하여 친미 정권인 마르코스 가문을 뒤엎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ICC에 체포되어 수감 및 재판 중인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중국이 주도한 색깔혁명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 많은 돈이 어디로 갔는지, 이어 왜 자신들의 삶이 비참한지 등의 왜 가난한지 등의 삶을 비관한 근본적인 질문에만 관심이 있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은 독립위원회 구성을 공식 발표하면서 친척과 측근도 예외 없이 수사하겠다고 약속하면 급한 불을 끄려 했지만 국민의 분노는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 한편 필리핀의 경찰과 군 당국은 국가 최고 위기를 발동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들은 시민들에 대한 진압과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억압이 생길수록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억압에 굴복하지 않은 동남아시아 민중들의 특성을 본다면 강력한 진압은 오히려 국민들의 저항심만 더 키우게 된다. 현재 전국 200여 개 사회 단체들이 힘을 모으고 있어 앞으로 더 대규모의 시위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필리핀 역사에서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부패와 독재로 인해 결국 해외로 추방당했다. 현재 봉봉 마르코스 현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와 유사한 처지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분노가 거세지고 정권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봉봉 마르코스와 마르코스 가문 자체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될 가능성도 배제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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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9-30
  • 일본 제국의 동남아시아 전쟁, 작전명 : 남방작전(南方作戰)
    일본의 남방작전(南方作戰)은 1941년 말~1942년 중엽에 걸쳐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점령 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영어로는 말레이 전역(Malayan campaign)이라고 부른다. 사실 남방작전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성립되는데 이 공습이 실패하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터는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매우 넓었다. 영국의 동아시아 최전선 기지인 영국령 홍콩, 영국 동양 함대의 기지이자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길목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부 태평양 주요 기지들이 자리 잡고 있던 필리핀 자치령, 괌, 웨이크 섬, 동남아시아 최대 석유 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도 함께 점령했어야 했다. 동남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었으며,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이 정도의 규모면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규모의 수준이었으며, 두 국가 모두 이 거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점령지를 유지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 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것은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 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불어 홍콩의 영국군만 해도 20,000명에 달했고,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100,000명, 필리핀에도 약 150,000명에서 200,000명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병력들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군력도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동양 함대가 싱가포르에 배치된 상태였고, 필리핀에 전개한 미국 아시아 함대와 동인도 제도에도 네덜란드의 잔존 함대들이 버티고 있었다. 다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육상 병력에도 큰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과 만주국의 유지를 위해 100만에 가까운 병력들이 중국 대륙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전투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광활한 중국의 영토로 인해 점령 지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계속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 육군은 남방작전에 따로 운영할 만한 병력 자체가 크게 모자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본 자체의 해상 수송 능력 및 보급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만이 수송 및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대본영의 추산으로 전투 병력은 최대 12개 사단 정도만 동원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으나, 워낙 작전 지역이 넓고 일본 본토 등도 수비해야 할 이유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각각의 작전 지역에 투입되는 함선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동원 가능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와조전술(蛙跳戰術), 번역하자면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수립한다.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의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 민다나오로부터 술라웨시와 보르네오에 이르는 광대한 동부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들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수립한 작전으로,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공격기지에서 제공 및 제해권을 장악 2. 목표지역을 공중과 해상으로부터 공격 3. 지상군 투입으로 국지를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 4. 항공기를 추진시키고 국지적인 제공 및 제해권 장악 5. 다음 목표에 대하여 공중 및 해상공격, 이 때 지상군은 보급 및 재편성 실시 일본군은 이를 반복함으로써 강한 세력을 보유한 중요 지점을 파괴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연합군 세력들은 와해되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이러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1885~1966)가 이끄는 미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미국이 사용한 것은 이와 유사한 “바이패스(Bypass) 전술”이다. 육사 전사학과는 일본의 와조전술은 독일식 기동전의 영향을 받아 적의 주력 지점을 적극 공략해 섬멸하지만 미국의 바이패스 전술은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차지한 이후, 병참선을 차단하여 마비시킨 다음 주력은 서서히 말려 죽인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일본군은 적은 병력을 데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들을 일일이 빠르게 점령해 나가야 했다. 그로 인해 얼마 안 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적인 장교들은 상식적으로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연합군들의 군대가 아무리 약세여도 회의론으로 자국의 미래를 염려했다. 실제로 히로히토 일왕도 중국 땅이 넓은데 태평양은 그보다도 더 넓지 않은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자원들을 충당하기 위해 객관적인 상황이 경직된 군 수뇌부는 이러한 염려들을 완전히 불식시켰다. 사실 연합군도 제대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군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침공해 올 것은 명백한 상황이었고 일본이 이를 위해 여러 작전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이나 필리핀 등이 최우선 공격목표일 것이라 예측했고 이들 지역에서의 방위전이 준비되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전쟁 이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당시에 일본 측의 주장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방어 시설 및 군사 기지 구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연합군의 방어 태세는 부족했다. 연합군은 총 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총병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매우 넓은 동남아시아는 공격하는 일본군보다도 방어하는 연합군에게 더 큰 장애였다. 거기다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 지리 상황에서 병력의 재배치도 어려웠고, 그나마 육지로 이어진 지역들도 우거진 정글 때문에 도로나 철도의 부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병력 재배치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의 질도 좋지 않았다. 필리핀에 주둔하는 연합군은 최대 10만에 달했다. 연합군 구성은 미국 주둔군 2만과 이제 막 창설된 필리핀군이었는데 제대로 완편 되지 못한 부대가 많았고 장비는 2선조차 한참 뛰어 넘은 구식에 수량도 매우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 휘하의 필리핀인 정예 부대인 스카우트 연대는 대전차 화기를 일부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형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였다. 미군의 경우도 숫자가 부족한데다 드럼 요새 같은 방어 시설물과 요새를 제외하면 기본 장비 외에는 항공 전력 약간에 수십 대 남짓의 경전차, 기본적인 사단 포병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필리핀의 연합군은 그나마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려는 의지가 가장 높았고 실제로도 가장 선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측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 배치한 군대의 경우 전차가 단 1대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인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해당 부대는 정글전 훈련 등은 받은 적이 없던 데다가 사기까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그나마도 우수한 인력과 전력은 유럽전선에 우선적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은 전력이 더욱 부실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현지 원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직 일본군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 민병대는 네덜란드를 위해 전투를 벌일 의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래서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실제 전투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이었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에 있었을 뿐이었고 그마저 개전과 동시에 상당수의 손실을 보았다. 더불어 자바에 배치되어 있던 네덜란드의 해군은 기량이 우수하고 항전 의지도 높았으나 경순양함 이하의 수상함 전력과 잠수함이 주력이었다. 전함만 10척을 보유한 일본 해군을 상대로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 최선이었고 완전히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개전 이후 무리하게 일본 해군에 맞서다 이 작은 전력마저 분파되어 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은 영국 동양 함대였는데, 군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가 비록 최신예 전함이긴 해도 그 함대가 전부였다. 리펄스는 제1차 세계대전 형태의 구식 순양 전함이었고, 이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주력함이나 지원함 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 시기 영국 함대는 대부분 지중해와 북해에서 독일-이탈리아 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칠과 영국의 지도부는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항공모함 1척을 주축으로 한 함대로 일본 해군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 아무리 주력 함대들이 진주만을 공격하러 갔다 하더라도 이 정도는 연합함대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과 상대의 전력을 오판한 영국 동양함대는 다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제공권으로 가면 상황은 더 암울했다. 미국의 경우 필리핀에 107대의 P-40 워호크와 35대의 B-17를 비롯해 상당한 전력을 배치했다. 이는 외견상으로 볼 때 모양새가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 전력은 전쟁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빠르게 증강되고 있었다. 하지만 개전 당시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 전력은 항공기의 수량 및 성능, 조종사들의 기량에 있어 일본군에 열세였다. 대만에 배치된 일본군의 항공 전력은 전투기 210여 대를 포함한 약 550여 대에 달했고 중일전쟁 등으로 인해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반면 미군의 B-17 폭격기와 P-40 전투기는 당시만 해도 많은 문제점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초기 형태의 기체였다. 영국군의 가용 전투기 대부분은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동남아시아에 있는 것은 미군이 공여한 구식 F2A 버팔로 뿐이었으며 수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항공모함이 1척도 없어 모든 항공 지원은 지상 기지의 지원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당 지역 내의 연합군은 사용 언어부터 달랐다. 서로 협동 전투나 훈련을 단 한 차례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와 탄약 등은 물론 신호 체계마저도 호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해당 지역 내에 있는 연합군의 함대를 모두 모아서 혼성 함대를 만들었는데, 통상적인 항해 명령도 내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통역을 담당할 인원도 부족해서 기함에 있는 네덜란드 제독이 명령을 내리면 이를 영국 순양함으로 통역해서 전달하고, 영국 순양함은 미국 구축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명령 전달 체계가 길게 늘어지는 상황이었다. 남방작전의 개시는 대체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공격 목표는 크게 5곳으로 태국 점령, 말레이 상륙, 루손 공습, 서부 태평양의 미국령 도서 지역인 괌, 웨이크 및 길버트 제도 상륙 및 홍콩 공격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기습을 가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버마를 점령하여 이들 지역을 이어주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작전의 최종 목적이었다. 남방작전은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타격해야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력이 분산되는 위험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성공으로 인해 미국 태평양 함대가 무력화 되고 기습적인 효과를 살림으로써 일본군은 이 수많은 공격을 모두 성공시켰다.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영국령 홍콩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의 도중에 이미 광동성 해안 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구룡반도와 인접한 중화민국의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홍콩의 군사적인 가치나 방어 가능성에 환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함대도 개전 이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전투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홍콩을 내주면 나중에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방어 준비에 나섰다. 영국군은 구룡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홍콩의 방어에는 또한 캐나다 군의 왕립 소총 대대와 위니펙 척탄병 대대도 파견되었는데, 이는 전임 홍콩 방어 사령관이던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Arthur Edward Grassett) 소장이 캐나다 출신이기 때문에 귀국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에게 홍콩 방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캐나다 군이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 일이였으며, 캐나다 군이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 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 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 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구룡 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하필 어느 과격한 연대로 인해 공격 시점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 중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성급한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 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若林東一)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이에 분노한 사단장은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무시하고 기어이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 개전 초기 이러한 돌격에 의한 방어선 돌파의 신화는 현지군 중심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군에게나 우연히 통했을 뿐이지만, 후일 결과적으로는 일본군 육군에 근성론을 더욱 더 불어 넣게 되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군의 돌격 신화는 미군의 막강한 무기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하면서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를 파악한 다른 연대들도 자극 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인 사카이 다카시(酒井高志) 중장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을 내렸으며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해 개전 3일 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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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깔끔하게 대만에게 콜드게임 패배를 당한 한국 야구와 286 컴퓨터보다 느린 한국인들의 인식과 시각, 국제관
    우리 야구 대표팀이 또 대만에게 패했고, 이번에는 깔끔히 콜드게임 패를 당했다. 대만은 이제 더 이상 90년대의 한국에게 승수자판기로 승리를 갖다 바치던 약체팀이 아니다. 대만과 우리 대표팀의 통산 국제 대회 전적은 26승 17패로 아직까지는 앞서 있지만 최근 아마든 프로든 언제 대만을 깔끔하게 이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야구는 대만의 국기이다. 그만큼 엄청난 투자를 해왔고 좋은 선수들 양성하는데 힘을 썼다. 그리고 대만인들 나름대로 한국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고 있으며 대만인들이 한국전을 바라볼 때 한국인들이 한일전을 바라볼 때처럼 비슷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대회를 불문하고 관심도가 상당하고 이겨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콜드게임 승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더블리그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8회에 가까스로 4-3 역전을 기록해 겨우 승리했으며, 1999년 아시아 선수권 때도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박재홍의 끝내기 안타로 겨우 승리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막판까지 추격을 허용하는 등 한국을 상대로 저력을 보여왔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9회에 박진만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경기를 내줬을 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고,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때도 8회의 기적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끌려다녔았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는 실업 선수가 포함된 대만 대표팀이 한국 대표팀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2019년 프리미어 12에서는 프로 군단으로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2023년 WBC 때는 네덜란드를 꺾고 우위를 점하는가 하면 아시안게임에서도 4-0으로 한국을 이겼다. 결국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2-0으로 겨우 이겨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작년 프리미엄 12에는 2-6으로 패배했다. 앞서 말했듯 대만은 이제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닌 우리와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 우리는 대만을 90년대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만이 해왔던 각고의 투자, 그리고 그에 대한 노력과 결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여전히 대만을 한 수 아래로 여기며 무시하고 있다. 대만은 이미 변화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만을 쉽게 이기는 상대로 여기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우리가 대적할 수 있는 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이 성장하는 동안 한국 야구는 2015년 프리미엄 12에서 우승한 이후, 갈수록 국제 무대에서 퇴보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한국의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대만 쯤은 여전히 이길 수 있다, 혹은 여전히 쉽게 이길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대만이 한국 대표팀에게 승수자판기 대주던 90년 대에서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대만이 성장했고 대등한 실력을 갖췄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전히 대만이 90년대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런 인식은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국제관과 아주 묘하게 닮아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버린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쏘련, 혹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로 여긴다.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한 번 공산국가면 영원한 공산국가로 여기고 있는듯 싶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여기고 있다. 부정선거, 선거불복, SNS에서 각종 규제 및 탄압, 언론의 획일화 및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철저히 짓밟아 버리는 행태 등은 자유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모습이다. 1990년대의 아름다울 미(美)자의 풍요롭고 기회의 땅이라 여겨지던 미국, 세계 최강자이자 단극 세계의 1인자로 군림하던 미국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인들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수만년 갈 것이고 그 영화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함께 망하는 법이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120~30년 전의 개화기 때로 퇴보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변화에 경직되어 있고 속도도 느리다. 한국이 IT가 강국이고 빠르게 변화하면 뭐하나? 한국인들의 인식이나 시각, 국제관 자체가 286 컴퓨터보다 느린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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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카스피해의 자원과 지정학적 역사
    카스피해는 면적이 약 37만 1,000 ㎢로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령의 4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며 서해와 일본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면적 뿐 아니라 수량도 약 68,000 km3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며 최대 수심 약 1025 m, 평균 수심 약 210 m 정도로 수심도 깊다. 다만 이 일대는 증발량이 많아서 조금씩 면적이 줄어들고 있으며, 카스피 해의 주변은 해수면 아래 30m 정도의 저지대이다. 또한 카스피 해의 밑바닥은 두 개의 분지 지형이 연결된 형태이며,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 깊이 들어간 지점이 있고 가운데 부분의 수심은 비교적 얕다. 이것과 비슷한 대표적인 사례는 옆에 있는 아랄 해다. 카스피해는 예전 아랄 해와는 달리 면적도 9배나 되고 평균 수심도 10배 이상 되고 완전히 고립된 아랄 해와는 달리 흑해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랄 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계속되는 남용은 카스피 해의 유지에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랄 해처럼 대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최근 카스피 해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청어의 수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였으며, 청어를 먹이로 삼는 철갑상어도 먹이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처지라 한다 카스피 해와 그 주변은 각종 자원이 많은데,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유명하며 캐비어로도 유명하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바쿠 유전 개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였으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자원에 눈길을 돌린 미국이 소련 붕괴 뒤 독립한 주변국들에 접근을 가속화하여 분쟁이 시작되었다. 카스피 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한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 사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 컨소시엄'을 꾸려 카스피 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2018년 8월 12일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악타우에서 카스피 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을 가지고, 카스피 해를 특수한 지위의 바다라고 정의하면서 22년에 걸친 영유권 분쟁을 끝내고, 카스피 해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2022년 4월 1일. 카자흐스탄,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4개국이 상호 협력을 강화하고 카스피 해 횡단 회랑의 물류 잠재력을 높이는 동시에 국제 운송 시스템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카스피해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에 대해 5개국의 역사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첫째, 적용할 국제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도출될 경우 협정 이행 위원회가 합의에 의해 판단하거나 새로운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분쟁의 소지는 남게 된다. 둘째, 군사적 불균형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협정은 5개 연안국 이외의 군대를 카스피 해에 주둔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상대방 국가를 해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역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나토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일방적 군사 행동을 묵인하는 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 해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했다. 셋째, 수면 아래의 광물자원과 어족자원에 대한 공동의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는 쌍무 또는 3자 협정을 체결해 자원 배분에 관해 합의했지만, 이란은 주변 연안국과 자원 배분에 대립하고 있다. 자원 배분 문제에 대해 협약은 애매하게 넘어갔다. 넷째,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또는 케이블선 연결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해 투르크메니스탄에 원유를 공급할 계획인데, 이는 연안 5개국의 합의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연안국들 사이에 분쟁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카스피해는 석유 자원 뿐 아니라 전 세계 캐비어의 80~90%를 공급한다. 또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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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영국과 캐나다, 호주, 포르투갈,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국가로써 인정과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최근 프랑스는 7월, 뉴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국가 해법을 위한 장관급 회의를 열었으며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지지한다는 ‘뉴욕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마크롱은 “중동의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헌신에 따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으며 9월 유엔 총회에서 이를 발표할 예정(Conformément à l'engagement historique de la France en faveur d'une paix juste et durable au Moyen-Orient, la France a décidé de reconnaître l'État de Palestine et en fera l'annonce lors de l'Assemblée générale des Nations Unies en septembre).”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22일 UN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최로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두 국가 해법 이행(A peaceful resolution to the Palestinian issue and implementation of the two-state solution)"을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서 마크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나란히 살아가는 두 국가 해법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의 권한 내에서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프랑스는 UN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Nous devons tout mettre en œuvre pour préserver la possibilité d'une "Solution à deux États" où Israël et la Palestine pourront coexister en paix et en sécurité. La France reconnaîtra la Palestine comme État aux Nations Unies.)"고 발표하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박수를 보냈다. 전날 영국과 캐나다, 호주, 포르투갈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공식 발표한 데 이어 프랑스까지 이 흐름에 동참하였고, 193개 UN 회원국 중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152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깊게 개입했다. 1922~1948년에는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령 하에 영국이 지역 할당을 받아 팔레스타인 영토를 통제하였다. 이는 독일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처럼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국가들의 영토를 다른 나라가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제도였다. 이는 당시 오스만투르크가 패전국이었고, 팔레스타인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1896년에 <유대 국가(Der Judenstaat)>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를 재건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이어 헤르츨은 1897년 시온주의자 세계대회(ZO)의 수립을 통해 각 부유한 유태인들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유태계 금융권들은 영국 정부에 전쟁 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태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약석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밸푸어 선언이다. 선언문에 명시된 것에 의하면 "유태인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 거주하는 다수의 아랍인 권리도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했다. 팔레스타인에 독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시온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바젤 계획서'에서 그들의 목표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이며, 신분이 보장된 조국을 건설하자(הבה נקים מולדת רשמית, חוקית ולגיטימית לעם היהודי בארץ ישראל)."는 것이었다. 영국의 대형 자산가 라이오넬 윌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 1868~1937)는 아랍인 지주들에게서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로스차일드는 많은 토지를 사들여 팔레스타인 전체 토지 가운데 6% 땅을 "유태인들의 안식처"로 삼았다.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은 합법적으로 자본을 이용해서 아랍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구매한 셈이지만 이전 주인인 아랍인 지주들에게서 일하던 팔레스타인 소작농들의 운명은 매우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유태인 사업체나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창기 유태인이 존재했을 때만 해도 팔레스타인의 일상은 유태인, 기독교인, 무슬림들 사이에 별 문제 없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그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유럽에서의 포그롬 등 박해를 비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온 유태인들이 늘어나면서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유태인 이주민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29년에는 뉴욕발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태인들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팔레스타인 농민들과 소작농들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무슬림들은 지난 수십년간 평화롭게 살아왔던 헤브론의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된다. 결국 당시 식민지 위임 통치를 하고 있던 영국 행정청의 군대들이 개입하면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929년 헤브론 소요 사태가 있은지 4년 만에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유태인들의 귀국 행렬이 엄청나게 늘게 되었다. 1933년 초부터 1935년까지 유태인 13만 명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왔다.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으며 이들과 충돌이 잦았다. 1933년부터 시작된 대단위 유태인 난민 입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인들은 불만히 쌓이기 시작했다. 이는 유태인들에게 밀려 축출되거나 아랍인 지주들은 유태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시골 마을이나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그 무렵 '고위 아랍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회원들은 더 이상의 유태인 난민 입국과 유태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총파업을 일으키자며 팔레스타인들을 선동했다. 이로써 아랍권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상충하는 견해들로 인해 유태인과 아랍인 공동체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수십 년 동안 해당 지역은 안정되지 못했다. 1948년 영국은 이 지역에서 철수했고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면서 여러 차례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야만 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영국의 행보가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형성했으며, 과거 '팔레스타인'으로 불린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되지 못한 것이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최대 난적인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밸푸어 선언 당시 아서 벨푸어 장관이 팔레스타인 인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민족적 권리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1967년 아랍-이스라엘의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따라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부 예루살렘을이스라엘의 수도로 삼는다는 구상이 바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다. 최근 네타냐후는 가자 시티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자가 정복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네타냐후를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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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8
  • 최근 몰도바에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진주한 이유
    최근에 나토와 프랑스군이 각각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통해 몰도바에 진입했다. 몰도바 정부는 몰도바 내 친러 분리주의 및 자치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을 통해 러시아의 내정 간섭 가능성을 경계해 왔다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를 더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을 앞둔 2023년 2월 13일에는 마이아 산두(Maia Sandu) 몰도바 대통령이 러시아가 자국의 EU 가입을 무산시키기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통한 군사적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EU는 군사 목적으로 창건된 단체가 아니다. 러시아는 몰도바가 나토 가입이 아닌 이상, EU 가입에 대해서 몰도바 내정에 간섭한 바 없다. 그럼에도 마이아 산두가 몰도바의 EU 가입을 러시아가 방해하고 있다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11월 5일에 몰도바의 지방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자국 내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내세워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의 집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선거 전략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핵심 안보 위협을 이용한 "북풍"이 있는 것처럼 몰도바 또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몰도바 내에는 선거철만 되면 국내 안보를 볼모로 "러시아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이는 모순된 기우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명목으로 들어와 있기에 당장 전쟁을 벌이거나 교전을 목적으로 한 군대가 아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병력은 약 6,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에 예비군까지 합치면 약 30,000명 정도다. 반면 몰도바의 총 병력은 15,000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10배다. 게다가 예비군이 70,000명이나 되며 거의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물론 그 중에 병력 8,000여 명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경에 배치되어 러시아 평화유지군과 마주하고 있다. 교전 목적이 아닌 군대에 대단위 전투기를 비롯한 공군 전력이 아닌 오로지 육군으로만 되어 있고, 전차도 몇 대 없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비해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이런 사정을 몰도바 정부가 모를리 없다. 몰도바군에 비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별볼일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두고 러시아의 위협을 내세워 자꾸 선동하는 이유는 마이아 산두의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다. 이같은 몰도바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없으면 이 정당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럼에도 2023년 11월 지방 선거는 시골 도시 일대를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이 장악하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핵심 지역의 과반을 얻는데 실패하여 사실상 걸림돌로 남게 되었다. 그동안 충분히 조장해 온 "러시아풍"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마이아 산두와 "PAS"는 지방 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왠지 껄끄러운 승리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김없이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과 사회주의당(Partidul Socialiştilor)을 통해 러시아가 대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국의 선거에 중공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사례다. 2024년 3월 5일 알렉산드루 무스테아처(Alexandru Musteață) 몰도바 정보안보국(SIS) 국장은 러시아 측이 2024년 가을 몰도바의 EU 가입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 및 2025년 의회 선거에 개입하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면서 몰도바 내 친러 세력을 통해 몰도바의 선거와 내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1년이 지나도록 전혀 공개된 적이 없다. 무스테아처 국장은 러시아가 이를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확실히 러시아가 개입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PAS"의 마이아 산두는 4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지만, 알렉산드르 스토야노글로(Alexander Stoianoglo) 후보가 친러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26%의 득표기록해 과반에 실패하여 2차 결선까지 가게됐다. 2차 결선에서 마이아 산두는 간신히 연임에 성공했다. 다만 여기서도 부정선거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몰도바는 독립 직후부터 친러 성향 주민들이 정부에 반감을 드러내며 국민 통합에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역할이다. 그러나 마이아 산두 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 갈등 해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든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의 자치권을 압류하고 두 지역을 몰도바에 합병시켜 루마니아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 마이아 산두와 "PAS"의 목표다. 그리고 2024년 12월 28일 가스프롬(Gazprom)은 2025년 1월 1일부터 몰도바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몰도바의 에너지 경제는 러시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가스프롬은 몰도바의 7억 900만 달러(약 9,200억 원) 규모의 가스 대금 미납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2024년 12월 31일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가스 경유 협정이 만료되면서 우크라이나가 갱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 정부는 긴급 리스크 관리와 필수 서비스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 12월 16일부터 에너지 부문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국내 전력 수출 제한, 전력 소비량 30% 이상 감축, 에너지원 다변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몰도바는 급한대로 루마니아로부터 가스를 수입하고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저장 시설을 활용하여 에너지 수요를 보충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에너지 안보 강화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장려했지만 한국의 경상도 크기와 비슷한 몰도바의 작은 국토로는 신재생에너지 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그리고 어김없이 2025년 9월 28일 오늘, 몰도바의 총선이 실시된다. 선거철이 되자 어김없이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자국 국내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몰아닥쳤다. 마이아 산두는 중대 의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통해 러시아가 자국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9월 23일 연설에서 러시아가 구소련 국가인 몰도바에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러시아가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소요 사태 음모를 적발해 74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마이아 산두의 기습 체포작전은 야당 선거위원단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100명 이상을 대상으로 250건의 수색을 벌여 74명의 체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에서 범죄 세력을 통해 조율됐다고 했다. ‘마트료시카’로 불리는 친러주의자들이 몰도바에서 활동을 강화하면서 합법적인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산두 대통령이 2,400만 달러(약 330억 원)를 횡령했으며 향정신성 약물에 중독되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들을 상대로 비민주적 체포 작전을 감행한 몰도바 검찰청은 체포 인원 대부분이 세르비아로 체계적으로 이동해 훈련을 받았고 연령대는 19세에서 45세 사이라는 짤막한 정보만 제공했다. 이어 체포된 74명은 최대 72시간 구금될 예정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범죄는 72시간 구금이 아니라 대법원에도 상고해야 할 큰 선거범죄다. 그럼에도 72시간 구금이라는 것 자체가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 2일 전 26일에는 "몰도바의 심장", "몰도바의 미래", "몰도바 사회주의자", "몰도바 공산당" 등 친러 정당인 최대 야당 4개 정당을 유권자 매수, 불법 정당 자금 조달, 자금 세탁 혐의 등을 뒤집어 씌워 출마를 금지했다. 이는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사상 초유의 비민주적인 행위다. 그러면서 마이아 산두는 4개의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뒤, 러시아가 수억 유로를 투입해 수십만 표를 매수하고 있으며 지금 표를 사고 있는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비난했다. 산두는 러시아가 수백 명을 매수해 혼란과 폭력을 선동하고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때맞춰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몰도바에 들어왔다. 이는 친러 세력을 억제시키고, 몰도바의 총선에 개입하기 위한 조치다. 특히 작년 3월 마이아 산두는 프랑스를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양국 간 국방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한 배경으로 프랑스군이 몰도바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총선에서 러시아와 친러파의 개입을 막고, 부정선거를 방지한다는 것과 혹시도 모를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고, 트란스니스트리아 군대 또한 얼마 없는데다 장비도 빈약하니 프랑스나 기타 나토 국가들 입장에서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비민주적인 야당탄압과 더불어, "러시아풍"으로 안보 불안을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친러로 돌아서는 것보다 안정을 선택하게 하려는 여당인 "PAS" 당과 마이아 산두,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프랑스군과 나토군까지 끌어들여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몰도바 총선은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며 승리할 것이다. 이 선거 자체가 이미 공명정대한 민주적 선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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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8
  • 권력과 의사소통
    국회 청문회장에서 어떤 여당 의원이 현직 검사를 증인석에 앉혀 놓고 자기 생각을 목소리 높여 질문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봤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의혹들을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검사에게 속 시원하게 몰아붙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그것으로 의혹이 해소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이 일방의 주장만 내뱉듯이 증인석에 앉아 답변하는 검사 역시 일방의 자기주장만 내뱉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회의원의 질문을 조롱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우리가 저런 자들에게 우리의 사법권을 맡겨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강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청문회란 것은 일종의 정치쇼에 불과하다. 그래도 국민에게 검사라는 권력 집단의 민낯을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청문회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이번 청문회에서 보여주듯이 사법부의 권력은 법과 정의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을 뿐, 그 가면의 뒷모습은 자신들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이익 집단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당에서는 사법개혁을 하자고 외치지만 야당은 삼권분립을 훼손한다고 맞선다.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오염된 사법 권력도 삼권분립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가?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가도 난해한 질문이지만, 오염된 사법 권력이라 말할 때 오염의 기준 역시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에 사법개혁은 결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세상사는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다. 힘에의 의지를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그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루소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자연은 힘이 지배하는 세계,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계이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문명사회의 혼란으로부터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한 것이지만, 니체가 말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와는 다르다. 니체가 말하는 자연은 홉스가 말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하지만 홉스는 자연 상태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었다고 본 것과 달리 니체는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힘의 의지를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홉스와도 다르다. 힘없는 자들과 대중이 사회계약을 무기로 사자를 길들여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 홉스의 시각이라면, 니체는 강자가 약자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의 생각과 유사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우리의 현실에서 법은 약자를 위한 것이기보다 강자를 위한 것이다. 검찰 독재를 꿈꾸었던 지난 정권에 의해 임명되었던 대법원장이란 자는 세종대왕의 법치를 강조하면서 법은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말의 액면 그대로를 보면 백성들의 삶을 위한 법 집행이라는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대법원장의 말 배후에는 양두구육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사법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의 선택을 방해하려고 시도했던 자였다. 그런 자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한다. 도구적 이성이 춤을 춘다.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권력은 힘을 가진 자로부터 나온다는 구호로 변모하고 있다. 힘을 가진 자는 곧 자본을 가진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은 자본을 가진 자에서 나오고, 권력은 자본을 가진 자를 위해 움직이는 세상이다. 원래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고, 현 상태의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상승이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꿈꾸는 힘은 대지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위버맨쉬였지, 결코 자본을 힘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이 모든 가치의 중심에 있다 보니 힘의 자리에 자본이 위치하게 된 세상이다. 자본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 세계를 구분하면서, 체계는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원리에 입각해 있고 생활 세계는 상호 이해와 소통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체계의 논리가 생활 세계를 식민지화했다고 현실을 진단했다. 그러한 상태에서의 의사소통이란 것은 모두가 거짓되고 진솔하지 않아 보인다. 모든 말에서 발언의 진위 여부와 발언의 의도, 그리고 원칙과 절차에 부합하는 발언인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도무지 진실의 여부조차 알 수 없고, 그 의도가 분명히 거짓되어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상호 존중의 절차는 무시되고 일방의 주장만 난무한다. 합리적인 의사소통마저 자본에 의해 왜곡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권력을 향한 무한한 의지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권력, 곧 자본을 향한 의지로만 비추어진다. 자본의 무한 증식을 향한 힘에의 의지! 오늘의 정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행정의 수반인 현 대통령은 국민을 향한 정치를 펼치고 있어 보여서 다행이다. 하지만 국회와 사법의 권력은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을 못 미친다. 교과서에 나오는 삼권분립이 완벽히 이루어지는 나라는 유토피아에 불과할까? 어쩌면 대법원장도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선출직 대법원장의 탄생과 함께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법개혁,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론개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방의 주장만 난무하고, 자본의 논리를 숨긴 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대법원장 선출제와 그를 통한 사법부의 개혁과 언론의 공정성 확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사법개혁, 언론개혁을 통한 대한민국의 완성은 결코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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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7
  • 유로 국가 중, 유일하게 성장한 스페인 경제
    좋지 않은 유럽 경제에서 스페인이 2024년 말에는 두각을 나타냈다. 2024년 당시 스페인은 3%으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EU 평균을 훨씬 웃도는 상태로 마감했다. 2024년 EU 평균 경제성장률은 0.9%에 그쳤다. 스페인 경제의 활력은 2025년과 2026년에도 무난히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EU 집행위원회는 2025~2026년의 스페인 경제성장률을 2% 이상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른 거시경제 지표도 좋은 편이었다. 물가상승률과 공공부채 모두 유럽 평균치에 가까운 실정이다. 다른 EU 국가들은 죄다 무너졌지만 유일하게 스페인만 회복세를 보였다. 실제로 몇 년 전만 해도 스페인은 EU, 특히 서유럽에서 경제가 가장 어려운 국가에 속했었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스페인은 제조업, 에너지 산업, 농업, 관광산업, 건설업 등을 고루 갖춘 국가였고 EU 내에 4번째 규모의 경제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위 Big 4라 불렸었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스페인은 서유럽에서 가장 경제가 낙후한 국가로까지 추락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와 더불어 PPP는 이탈리아를 근소하게 추월했으며, 고용 지표에서 좋은 성장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은 스페인의 부활 요인으로 유럽과 신흥국의 경기 회복에 따른 수출 및 관광업의 호황과 노동생산성 제고를 꼽고 있다. 스페인 GDP는 양적으로 성장했다. 이민자들이 유입됨으로 인해 노동자 수가 늘어났다. 2024년만 해도 순유입 인구만 해도 787,000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민자 수가 5년 만에 170만 명 가량 늘어나 2026년 스페인 총 인구는 5,000만 명을 달성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자연 인구는 2015년부터 감소세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민자들로 인해 경제가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지만 스페인은 달랐다. 스페인의 각종 지표들을 보면 이민자 고용률도 높고 질적으로도 괜찮은 산업 인재들이 많이 들어왔다. 코로나 팬데믹 위기 이후, 회복이 빠른 업계에서는 이민자들을 우선 많이 고용했다. 숙박, 외식, 상업 등 관광 관련 산업에서 이민자 고용 증가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023년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은 2.7%로 세계 평균(2.8%)와 거의 동급에 호주(3.4%), 미국(2.9%)를 제외하면 주류 선진국 중 가장 높은 편으로 나타난다. 2025년 4월 IMF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 또한 35,000불로 우리 대한민국을 앞섰다. 참고로 한국은 33,000불이다.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의 몰려드는 이민자들과 그에 따른 부동산 개발, 코로나 시대 이후 관광업이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성장률 자체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로화 강세로 인해 달러화 표시 GDP도 높게 평가받았다. 스페인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호황 요인에 대해 신규 노동자이자 신규 소비자가 생겼고 이는 내수 시장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했다. 팬데믹 사태 이후, 유럽 내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와 더불어 범유럽권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에도 지정학 및 경제적으로도 멀리 물러서 있는 입장이라 최근 수년 동안의 경제성장율 또한 EU 권역과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권 전체에서 2.5~3% 사이로 가장 높으며 매우 안정적인 수치를 찍고 있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이 2010년대 시행한 긴축정책이라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의 효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스페인 정부는 일종의 비용 절감 정책을 내세워 대응했다. 당시 스페인은 국내 노동자 임금과 기업 수익을 줄여 대외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심각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당시 엄청난 집회와 시위가 잇달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정부를 성토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스페인 정부는 비용 절감 정책을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이후, 2010년에 매우 심각했던 무역적자를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2023년 스페인에서 새로 생긴 일자리 수는 78만 개로 유로존 전체 신규로 창출된 일자리의 44%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내림세를 타면서 2023년 10월에는 11.2%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16%를 넘어선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와 비교하면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스페인 실업률은 여전히 EU 회원국들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특히 25세 미만 청년 실업률은 26% 이상으로 EU 평균인 15%를 크게 웃돌고 있다. 스페인의 경제성장은 이주 노동자 유입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이를 나누어 차지하는 인구도 같이 늘어난 셈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경제성장의 성공 지분이 모두에게 돌아가기 어려운 구조다. 2018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의 좌파 연립정부는 복지와 재분배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2022년에는 노동시장 개혁으로 기간제 일자리 비중이 감소했으며 노동자 권리가 강화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최저임금은 세금을 떼고 월급이 2019년 750유로에서 2024년 1,200유로로 50% 넘게 대폭 인상됐다. 스페인의 경제 전문가들은 과거 금융위기 이후 폭증한 기간제 일자리가 아닌, 급여 조건이 개선된 양질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난 것이 이와 같은 현상이라 보았다. 2022년과 2023년 스페인 정부는 인플레이션 대응으로 대규모 재정 지원책을 도입했다. 가계를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필수 식료품 부가가치세(VAT) 면제와 더불어 전기요금 상한제, 가스요금 감면, 주유비 지원을 비롯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은 유로존 다른 나라보다 물가를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었다.여행산업 호황과 EU 경기회복기금(NGEU) 활용이 스페인 경제 회복의 원천이 되었고, 노동시장, 에너지 가격도 내수 회복에 유리하게 반전되었다. 특히 외국인 방문객 수와 지출액 모두 크게 증가하면서 서비스 수출이 급증했으며 민간투자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공공투자가 증가하면서 총투자 규모는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다. 2022년 노동시장을 개혁하면서 외국인 근로자 유입 증가에 따른 노동시장 강세가 뚜렷해졌다. 스페인의 고용 및 가계 가처분 소득 증가율은 유로존을 상회했다. 그리고 여타 유로권 국가들 대비 높았던 산업용 전기요금도 크게 하락했으며 저비용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어나면서 이를 배경으로 제조업 부문에서 상대적 호조를 보였다. 특히 스페인의 건설업은 경제를 나락에 떨어뜨린 주범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내수에만 머물고 있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로 나타난다. 2020년 현재 건설 부문에서 스페인은 세계 1위로 나타난다. 해외 매출액 기준 세계 1위 건설사가 스페인 건설사인 ACS이다. 그리고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로 대표되는 건축가들의 설계 사무소들이 이와 같은 건설 산업의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수처리 기술에서 세계 1위가 스페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플랜트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이베르드롤라(Iberdrola)등 유수의 전력 기업등을 바탕으로 풍력발전,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 산업도 발달했다. 세계 10대 석유 업체 중 한 곳인 렙솔(Repsol)도 스페인 기업으로 나타난다. 스페인에는 텔레포니카(Telefónica)라는 라틴 아메리카를 필두로 한 세계 5위의 통신업체가 있다. 하지만 투자 대비 회수가 낮은 라틴 아메리카 특성상 큰 업체인데 비해 내실이 매우 부족한 편이다. 스페인은 금융업이 발전했다. 콩키스타도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금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스페인에 가져오면서 은행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는 금융 전통의 역사가 매우 길게 가져온 국가이기 때문이다. 산탄데르 은행은 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이며 유럽 많은 지역에 진출해 있다. 총 자산 규모는 2019년 기준 유럽 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도이치뱅크를 넘어서고 시가 총액 기준으로 영국의 HSBC에 이어 유럽에서 2위이다. 산탄데르 은행 역시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진출해있다. 산탄데르 은행에 이어 2위 규모의 BBVA도 존재한다. 이 은행들은 유로존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거대 규모의 은행들이며 중남미 지역에서 특볋; 강한 영항력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은행이 최근 갖가지 실책으로 인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이후에 다시 안정권을 회복했다. 스페인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던 것은 건설업과 금융업 뿐 아니라 관광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 여행은 보통 먼저 잘 알려진 서유럽 위주인 한국인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스페인의 관광업은 같은 관광 대국인 미국, 서유럽 인들조차 최고의 관광국가로 알아줄 정도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관광으로 인해 직접적인 수입은 한화 56조로 관광수입이 무려 미국 다음가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유럽권 관광지로 익히 잘 알려진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관광 수익과 규모로 능가할 정도이며 이로 인한 고용창출 효과도 매우 높은 편에 있다. 관광 산업은 2025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볼 때 스페인 경제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의 여행, 숙박업은 나름 유구한 전통이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때부터 순례객들을 끌어들였으며, 산업혁명 이후에 일부 계층에만 향유하던 중산층 여행의 잠재성을 일찍부터 주목하여 대도시 철도가 연결되던 1860~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1900~1930년대부터 유럽 각국의 여행 책자에 스페인이 주요국가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 파라도르(Parador)라는 명칭으로 각 지방에 흩어진 고성(古城), 고(古) 건축물들을 숙박업소로 개조하여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코 정권이 국제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스페인 국경을 개방하고 북유럽에 대비되는 따뜻한 피서지로의 매력을 홍보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와 마요르카, 안달루시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이미 한 해 2,000만의 여행객이 방문하게 되었다. 2025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스페인을 8,300만 명이 방문하여 여행 방문객수로는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 2위로 나타난다. 스페인은 관광 수익으로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 2위를 기록하여 굴지의 관광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세계 관광 기구(UNWTO) 여행 총람으로 인해 유로화 사태로 인해 스페인 경제 위기를 버틸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행, 숙박업이 스페인의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음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27
  • 18세기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성립된 치열한 국제적 배경과 러시아-스웨덴 전쟁 (대북방전쟁의 시작)
    모스크바 대공국을 정복했던 폴란드를 제외하고, 러시아 원정에 나선 첫 번째 유럽 국가는 스웨덴이었다. 그 후로도 1812년 나폴레옹의 원정과 독일의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두 차례 더 있었지만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칼 12세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찾지 않았다. 세계사에서 나타난 세 번에 걸친 러시아 원정은 최정예 부대로 전쟁을 시작해서 러시아를 진군해 아예 지도에서 없애버리려고 진행되는 초기, 러시아의 방대한 영토와 무한한 인적자원에 고전하는 중기, 그리고 공격자의 전략 전술을 그대로 답습해내는 러시아의 반격이 시작되는 후기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공통점은 칼 12세,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치부하고 얕잡아 봤다는 것에 있었다. 사실 러시아는 온갖 시련을 당하면서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겉모습과 달리 무서운 전투 민족이었던 것이다. 1706년 말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 스웨덴은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17세기 초, 칼 10세와 11세는 핀란드, 카렐리아와 잉그리아를 합병시켰고, 1648년 30년 전쟁의 말기에 스웨덴은 발트 해 남부 해안의 수많은 다른 국가 내부에 외롭게 단절된 영토를 지배하면서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스웨덴 왕국의 정치와 군사적 목표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과 같은 강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토나 인적 자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칼 10세와 11세의 재임 기간 중 스웨덴 왕국은 계속 팽창했고 발트 해는 스웨덴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스웨덴은 새로 합병한 지역의 통관 세금으로 더욱 부유해졌으며,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총과 말을 수입해서 최고의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급격한 팽창은 주변국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특히 전통적으로 적대국이었던 덴마크는 자신의 국경에 브레멘, 베르됭과 같은 스웨덴 소유의 도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에 크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August II)는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에 장악당한 리보니아 지역의 수복 의무도 부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덴마크와 함께 반(反) 스웨덴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1697년 칼 11세가 죽자 겨우 15세라는 어린 나이의 칼 12세가 즉위를 한다. 아무리 사자라고 해도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같은 경쟁국들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3국 동맹을 맺은 이후에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1700년 4월에 덴마크는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침공했고, 두 달 후에 폴란드는 리가를 공격하며 포위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부동항을 확보하고 싶었던 표트르대제도 스웨덴의 리보니아를 침공하고 나르바를 포위했다. 이들 3개국이 동원한 병력은 100,000명을 넘어섰는데, 스웨덴은 총동원령을 내려도 겨우 30,000명의 병력만 동원할 수 있었던 데다 3개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소년인 칼 12세의 운명은 거의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숫자가 크게 모자라기는 해도 스웨덴 군은 하나 같이 전투에 경험이 상당한 정예군으로 농민들을 징집한 연합군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더구나 북유럽의 지배했던 선왕의 업적이 칼 12세에게도 큰 명예로 남았다. 그는 연합군이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초 강경책으로 대응에 나서게 된다. 군대를 세 방향의 방어 진지에 분산시키게 되면 지루한 전쟁이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 칼 12세는 전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 후에 가까운 적부터 하나씩 격파해가기로 한다. 그는 포위된 도시에서 힘들게 저항하고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좀 더 버텨줄 것으로 확신했고 이를 기반으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으로 역습을 가하게 된다. 본국을 위협 받은 덴마크 군은 결국 8월 18일에 평화 협상을 간청하게 되고, 칼 12세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9월에 전 병력을 다시 리보니아로 보내게 된다. 11월 20일에 나르바를 포위하고 있던 러시아 군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하며 러시아 공격군을 전멸시키고 표트르 대제에게 생애 최대의 굴욕을 안겨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래부터 약졸들이 많았던 폴란드-작센 군도 자국으로 도주하게 되고 불과 5개월 만에 칼 12세는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스웨덴의 땅을 단 한 곳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후일 이와 같은 전과를 접한 프랑스의 대문호 볼테르는 그에게 전사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하게 된다. 매우 어린 나이에 대성공을 거둔 칼 12세는 자신의 용맹성을 과시하며 점차 과단성을 내세우며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자신과 스웨덴에 불행한 상황으로 반전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 대해 평가하기를 100%의 완벽한 승리는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며 80% 정도의 승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였던 것도 이러한 자만심 때문으로 생각된다.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참호에 자리를 잡아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 군이 스웨덴 군의 돌격에 단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도주하는 것을 본 칼 12세는 러시아 민족은 언제나 공격하면 배신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나르바에서 참패를 겪은 표트르 대제는 아직도 러시아 군의 전투력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는 신중함을 배우게 된다. 러시아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벌할 수 있다고 판단한 칼 12세는 리보니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가까운 폴란드부터 유린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폴란드에서 다시 한 번 러시아 지원군을 격파하며 러시아에 대한 경멸감은 더욱 굳히게 된다.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의 대결구도로 볼 때 칼 12세는 항상 선두에서 돌격하며 연전연승을 거두는 동안 표트르 대제는 폴타바 이전까지 연전연패를 당하다가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단 한 번에 전황을 역전을 시키게 된다. 칼 12세는 고향을 떠나 폴란드 국경을 넘어선 다음, 6년 동안 1701년 리가(Riga), 1702년 클리로브(Clirov), 1703년 쏜(Sson), 1704~1705년 렘베르그(Remberg)와 그로드노(Grodno)에서 폴란드와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며 아우구스트를 추방하고 스타니슬라프(Станислав)라는 실권이 없는 국왕을 세우게 된다. 이에 자신을 위협했던 3개 국 중 2개 국을 완전히 굴복시킨 칼 12세는 이제 마지막 남은 러시아로 군대를 돌리게 된다. 서유럽 진출이 목표였던 표트르 대제는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원군을 보내고 핀란드 만에서 네바, 잉그리아를 함락시켰으며 리보니아도 다시 공격했기 때문에, 칼 12세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30,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러시아 국경을 넘게 된다. 비록 러시아 군이 연전연패를 당했지만 표트르 대제의 각별한 후원으로 인해 외국인 지휘관을 영입하고 신식무기를 보급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약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동토의 변방 러시아의 개혁을 단행했고 발트 해 확보를 위해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건설과 수도 천도를 단행한다. 그렇지만 발트 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일대 바다의 강대국인 스웨덴 왕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당시 북유럽 최강국이었던 스웨덴을 공략하기 위해 덴마크와 폴란드를 후원하지만 어린 왕으로만 알았던 칼 12세가 불세출의 전사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칼 12세와 정예 군대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의 진흙 퇴적물 및 천혜의 자연 방어물들과 함께 초토화 작전으로 스웨덴 군의 진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칼 12세는 보급 문제로 인해 모스크바가 아닌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 12세의 본대와 병참 부대 사이의 틈을 파고들게 된다. 병참부대의 판단 착오로 인해 원하지 않는 폴타바 전투를 벌이게 된 스웨덴 군은 칼 12세의 부상까지 겹치며 몰락하고 러시아는 발트 해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 지역과 폴란드에 군대를 보내 대리전쟁을 할 때만 해도 전쟁에서 패전한 것으로 생각해 아직은 스웨덴에게 국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국제전의 상대로 좋은 경험이 될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준비는 철저했고 이는 칼 12세가 직접 원정길에 오른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전투가 러시아의 운명을 가를 수 있었다. 칼 12세는 보병 18개 연대, 기병과 용기병 16개 연대로 구성된 총 3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그로드노(Grodno), 빌나(Vilna), 민스크(Minsk)의 삼각지 형태의 진지에서 러시아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보급품을 담당한 레벤하우프트(Lewenhaupt)의 12,000명의 군사들이 리가(Riga)에서 출발하여 남진 중이었으며, 리벡커(Lybecker)의 14,000명의 스웨덴 군대가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칼 12세는 표트르 대제와 대회전을 벌여 빠른 승부를 내고 싶었지만, 연패를 했던 표트르는 정면 대결을 피하며 초토화 작전으로 최대한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품과 도강 장비를 가진 레벤하우프트가 제 시간에 합류할 수 있는지가 전투의 관건이었다. 만약 리벡커가 제2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한다면 표트르 대제는 항복하여 평화협상에 나서거나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벤하우프트가 계획대로 보급품을 가지고 합류한다면 47,000명으로 불어난 병력으로 모스크바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발트 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어부만 살던 습지대에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초빙해 건설했는데, 리벡커의 별동대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칼 12세의 본대만큼이나 두려운 위협이었다. 만약 리벡커가 이 도시를 함락시킨다면 표트르는 칼 12세의 결전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리벡커가 함락은 시키지 못해도 포위만 제대로 한다면 표트르는 귀중한 병력을 이동시켜 칼 12세와 맞선 본대를 구원할 수밖에 없었다. 칼 12세에게는 또 다른 예비군이 있었다. 폴란드의 국내 상황이 안정되면 폴란드의 주둔 병력 8,000명까지 러시아 국경을 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70,000명까지 불어나 스웨덴 초유의 병력이 동원될 예정이었다. 그 동안에도 4배가 넘는 러시아 군을 가볍게 승리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이면 러시아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칼 12세의 전략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리벡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하는 것은 고사하고 포위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레벤하우프트는 무거운 보급품을 가지고 험지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칼 12세의 본대에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칼 12세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러시아 군은 대리전쟁을 치를 때에도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니 본토에서는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표트르 대제는 월등히 많은 병력으로 스웨덴 진영을 활 모양으로 둘러쌌는데 26개 연대의 보병, 33개 연대의 용기병으로 구성된 총 57,500명의 병력으로 칼 12세의 본대를 견제했고, 아프락신(Apraxin)은 24,500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바우어(Bauer)는 16,000명의 병력으로 남하하는 레벤하우프트를 요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예비 병력인 골리친(Golitsyn)의 12,000명의 부대까지 합치면 러시아군의 규모는 무려 110,000명으로 62,000명의 폴란드 병력은 불참하고도 남은 스웨덴 군 본대보다 2배 더 많았다. 나르바에서는 4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서도 스웨덴 군에게 참패를 당했었지만, 그 동안의 패전으로 많은 훈련을 축적했고 부상만 당해도 전력 손실로 이어지는 스웨덴 군과는 달리 러시아 군은 언제라도 새로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1708년 6월 6일, 표트르 대제가 불 지른 평원에 초목이 자라나면서 칼 12세는 3개월 동안 갇혀 지냈던 진영들을 파쇄하고 바르샤바와 스몰렌스크,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직선 도로들을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세레메테프(Seremetev)와 멘시코프(Menshikov)도 베레지나(Berezina) 강을 이용해 스웨덴 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칼 12세의 전술이 매우 충동적이고 변화가 심해서 도강이 예상되는 보리소프(Borisov)에서만 8,000명의 병력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나머지 병력은 상황 변화에 따라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이는 러시아 군에게 다시 한 번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칼 12세는 남쪽으로 9일간 크게 우회해서 베레지나 강을 가볍게 도강했다. 배후를 위협당한 러시아 군은 후퇴하기 보다는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고 바비치 강변의 홀로브친을 중심으로 집결했고, 정면 대결을 좋아하는 칼 12세도 30일에 바비치 강변에 도달했다. 평소의 칼 12세였다면 도착하는 즉시 공격을 개시해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겠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병력이 많은 러시아 군이 강 제방을 따라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방어진지를 단단히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러시아의 진지는 중앙의 습지대를 두고 북쪽에는 보병 12개 연대와 기병 10개 연대를, 남쪽에는 보병 9개 연대와 용기병 3개 연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좌우 양 측면으로 10,000명의 용기병과 코사크 기병이 스웨덴 군의 우회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 동안 칼 12세의 우회 공격에 측면을 돌파 당한 적이 많았었기 때문에 러시아 군은 강을 따라 넓게 포진하며 스웨덴 군의 우회공격에 대비했다. 칼 12세는 이번에 러시아군이 기다리고 있는 측면 돌파보다는 자살 공격에 가까운 습지대를 통과하는 중앙 공격을 선택했다. 칼 12세는 소부대를 양 측면으로 이동시켜 러시아 군을 제자리에 머물게 하고 러시아 군이 비워두었던 중앙의 습지대로 진공해 들어갔다. 러시아 군은 습지대에서는 스웨덴의 핵심전력인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카를은 거꾸로 중앙의 습지대를 통과해 러시아의 좌, 우익을 둘로 나누어 각개 격파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병력이 20,000명 정도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의 중앙공격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7월 3일, 강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자, 칼 12세는 전 연대에 공격 준비 명령을 내리고, 포대도 미리 지정한 지점으로 조용히 이동시켰다. 날이 밝으면서 스웨덴 군은 일찍 일어나지 않은 러시아 군의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사격한 후에 7,000명의 보병이 강으로 뛰어 들었다. 이 때 당연히 칼 12세가 선두에 섰다.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러시아 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가며 스웨덴 군은 유럽 최고의 정예군답게 조금씩 전진했다. 많은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계획대로 중앙의 습지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스웨덴 군을 힘들게 한 것 습지대가 아닌 러시아 군의 행동이었다. 핀란드와 폴란드에서도 스웨덴 군이 진지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러시아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는데, 이번만큼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대열을 무너지지 않은 채로 30~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씩 물러나면서 침착하게 대응 사격을 했다. 칼 12세는 러시아 군의 예상 밖의 대응을 보고 병력을 정렬해서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두 나라의 군대는 단 한 번도 원거리 사격전을 벌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한 시간 동안 이례적으로 서로에게 총을 사격했다. 레프닌(Repnin)은 오전 7시경,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선봉 부대의 지휘관이 칼 12세 스웨덴 국왕임을 알게 되자 스웨덴 군의 공격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기에 몰린 레프닌은 측면의 골로친이 이끄는 용기병 1,200명에게 칼 12세의 노출된 측면을 기습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칼 12세는 예전의 경험으로 러시아 군이 곧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고 전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배후는 강에, 측면은 용기병에게 포위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국왕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스웨덴의 렌스콜드(Rehnskold)는 근위 기병대 600명을 이끌고 급히 강을 건너 측면의 러시아 기병과 충돌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모두 용기병으로 스웨덴의 정예 근위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러시아 기병이 2번이나 공격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스웨덴 후위 부대들이 강을 건너 칼 12세의 선봉에 속속 합류하자 숲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대열을 유지하며 칼 12세의 공격을 막아내던 레프닌의 보병도 측면의 기병이 무너지고, 새로운 적군들이 보강되면서 결국 진영과 대포를 스웨덴 군의 손에 넘겨주고 기병을 따라 숲으로 후퇴했다. 오전 8시에 레프닌의 진지를 장악한 스웨덴 군은 이제 북쪽의 세레메테프을 상대할 차례였다. 세레메테프는 포화 소리를 듣고 레프닌을 응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습지대가 러시아 군사들의 진격을 방해했다. 남쪽의 러시아 군을 제압한 칼 12세는 북쪽의 러시아 군을 향했지만, 표트르 대제가 세레메테프에게 전황이 불리해지면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 군은 모질레프와 드네프르 강으로 서둘러 후퇴하면서 폴타바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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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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