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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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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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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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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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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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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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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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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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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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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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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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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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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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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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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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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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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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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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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 동, 서파키스탄의 상황이 매우 극단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동파키스탄의 무지부르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들 앞에 나와 연설을 하면서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서파키스탄 정부에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게 된다. 무지부르 라흐만, 그는 다카 외곽의 파리드푸르(ফরিদপুর জেলা) 지역의 가난한 뱅골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공립학교에 3등급으로 입학했으나 1934년 눈 수술로 인해 그만두었고 이후 수술로 인한 느린 시력 회복으로 일찍 결혼했다.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쓴 돋보기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전인도 무슬림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진출했고 캘커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94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 참가하면서 중단된다. 1946년 이슬라미아 대학생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 벵골인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았다. 인도인과 서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벵골인들은 영국으로부터도 뿌리 깊은 차별을 받도 있었다. 그러한 벵골인들의 상황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켈커타 대학을 떠나 동부 벵골로 돌아온 뒤 다카 대학에서 다시 법률을 공부해 동파키스탄 무슬림 학생 연맹을 설립하고 지방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다카 외곽의 가난한 집안의 벵골인이 이제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벵골인들의 빈곤과 실업, 가난한 생활 등을 대변하여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받아들였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벵골민족주의를 사회주의와 융합하여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구축한 셈인데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는 벵골인들에게 정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벵골인들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안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벵골인의 불복종 운동과 파키스탄 군의 유혈 진압으로 인하여 사태는 점차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에 대응해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 시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마침내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1971년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나게되었으며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야히야 칸 자신은 벵골의 영토를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며 다소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 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방글라데시를 완전히 토벌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 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 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 군의 벵골인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린 셈이 되었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 정식적으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 인해 동, 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한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 군은 마침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동파키스탄 정당인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면서 라흐만을 파키스탄의 반역자로 규정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은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면이 있었던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무조건 보이는데로 죽이고 강간하며 파괴하는 엄청난 살육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당시 동서 파키스탄을 주목하고 있던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날아와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게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동파키스탄의 독립 선언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리고 이어진 그의 체포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가져왔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우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사이예드 나즈룰 이슬람(Saiyed Najrul Islam)을 세웠다. 이어 이슬람의 뒤를 타주딘 아흐메드(Tajudin Ahmad)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M.A.G. 오스만니(M.A.G Osmani) 대령은 방글라데시 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어 방글라데시의 군을 총지휘했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 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와 동파키스탄의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Mukti Fauz)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되었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자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이에 놀라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 군 간의 전쟁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 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크게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서파키스탄 군에 크게 열세였던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인들에게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며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당시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 운동 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된 다카 대학에서는 파키스탄 군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화를 저지른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독립에는 전세계 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많은 고심 끝에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 및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학살에 경악했으며 이들은 본국인 미국 행정부와 상원에게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보고 미군의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집단 망명을 선포하면서 인도가 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력도 쇠퇴할 것을 우려하여 크게 기대했지만, 인도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주목은 인도-파키스탄의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의 적이 되었디. 게다가 엄청난 인적 자원이 존재하는 인도 입장에서 또한, 수백만 명의 난민은 큰 부담이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더 저렴하게 먹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기 때문에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되었다가는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추방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의 많은 수가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와 같은 동파키스탄의 게릴라 부대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수피즘에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이었던 파키스탄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에 그쳤었지만 국경지대가 폭격 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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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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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 살라딘의 이름을 전부 서술하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로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Al Malik An Nasir), 승리의 아버지(Abu Al Muzafar), 신앙을 품은 정의(Slakh Ad Din),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Marwan)의 아들인 샤디(Shadi)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يوسف)가 본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꾸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Yusuf, 요셉)와 아이유브(Ayyub, 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앗(Ad)은 원래 정관사 알(Al)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Ram)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알이 ㅅ 받침과 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살라흣 딘이라 읽히게 된다.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Gasan Masud)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하고 있다. 살라딘은 1138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Tikrit)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 출신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Nazim Ad Din Ayyub)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짐 앗 딘 아이유브는 그 당시, 셀주크투르크의 대신인 비흐루즈(Byhruz)와 인연이 이어져 그의 천거를 받아 티그리트 성의 영주로 재임 중이었다. 아이유브는 1132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 이마드 앗 딘 장기(Imad Ad Din Zangi)에게 나룻배를 제공하여 그가 무사히 티그리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로써 아이유브와 그 가문은 장기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아이유브의 후원자였던 비흐루즈는 평소에 장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아이유브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한 와중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한 여인의 복수를 위해 건달을 살해하는 사고를 저질렀고, 비흐루즈는 이에 분노하여 아이유브의 일족을 티그리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침통한 심정으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밤에 출생했다. 갈 곳을 잃은 아이유브와 시르쿠 형제는 모술로 이사하여 장기에게 의탁했다. 장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1139년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를 공격하여 바알벡(Balbek)을 함락시킨 이후 아이유브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살라딘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살라딘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한 이후 그 세력이 분열되자 부리(Buri) 왕조의 아타베그(Atabeg)인 무장 앗 딘 우누르(Ad Din Unur)가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던 바알벡을 수복하려 했다. 당시에 아이유브는 장기의 아들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다마스쿠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살라딘은 아버지인 아이유브와 함께 포로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끌려갔지만, 숙부인 시르쿠는 여전히 장기 왕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은 얼마 동안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유브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봉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다마스쿠스 내부에서도 신임을 얻어 몇 년 만에 고위직을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154년 4월, 아이유브의 옛 주인인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Nur Ad Din)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 때에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누르(Unur)가 사망한 이후, 왕권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아이유브는 그 틈을 이용하여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동생 시르쿠에게 연락하여 그에게 항복할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정복자로 명성을 누렸던 아버지 장기도 장악하지 못했던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보답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까지 살라딘은 아버지와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에서는 당시 그의 행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살라딘이 자신의 청년기를 회고하면서 전쟁을 피해 은둔을 즐기고 현자들과의 토론에 심취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악한 수완가였던 아버지 아이유브와 과격한 용사였던 숙부 시르쿠와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후일 중동 최대의 무슬림 군주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살라딘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세 차례에 걸친 이집트 원정 시기였다. 1163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Wajir, 재상)였던 샤와르(Shawar)가 경쟁자인 디르감(Dirgam)에게 축출당한 이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면 막대한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Amori I) 또한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고, 용맹하고 과감한 성품의 심복이었던 시르쿠 또한 일전을 주장하자 누르 앗 딘은 이집트 원정을 결심했다. 1164년 4월,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시르쿠는 자신의 조카인 살라딘을 부관으로 삼아 자신과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부터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군하여 아모리 1세의 관심을 돌리는 사이, 시르쿠와 살라딘은 같은 해 5월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샤와르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연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3개월 동안 포위했다. 그러자 누르 앗 딘이 스스로 십자군의 후방인 하림(Harim)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모리 1세가 같은 해, 10월에 시르쿠와 휴전을 맺고 철군하면서 시르쿠와 살라딘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67년 초, 시르쿠와 살라딘은 샤와르와 아모리 1세의 밀착을 차단시키기 위해 두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그 해 3월 18일, 알 바베인(Al-baboim) 전투에서 시르쿠와 아모리 1세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의 명령에 의해 직접 중앙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지에 빠진 척 달아나며 십자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시르쿠는 우익의 정예 기병들을 거느리고 아모리 1세와 샤와르의 연합군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르쿠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직행으로 카이로에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시르쿠는 살라딘에게 군대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자신은 직접 남쪽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떠났다. 그 사이에 살라딘은 아모리와 샤와르의 연합군에게 75일 간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나 이를 수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살라딘이 단독 지휘관으로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그 와중에 시르쿠가 조카를 구원하기 위해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자 아모리 1세는 그해 8월 4일에 휴전을 맺었다. 그에 따라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땅을 포기했고, 살라딘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샤와르에게 돌려주었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협상 당시에 살라딘은 얼마 전만 해도 전투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모리 1세의 진영에 인질로 들어가 며칠 간 환대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1168년 12월, 시르쿠와 살라딘은 아모리 1세가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당시에 겪은 고초를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께 이집트로 가자는 시르쿠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시르쿠는 누르 앗 딘에게 조카도 함께 종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누르 앗 딘의 명령으로 인해 살라딘은 숙부를 범칭국으로 삼았고 다시 이집트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카이로를 포위하고 샤와르로부터 금을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모리 1세는 시르쿠에게 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써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시르쿠는 파티마 칼르프의 허가를 받아 그 동안 자신을 수차례 농락했던 샤와르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르쿠는 이집트의 정복자가 되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지 싶었으나 그 해 3월에 폭식을 하던 중 식중독으로 급사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집트의 대신들에 의해 살라딘이 이집트의 새로운 와지르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대신들이 살라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권력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딘은 겉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면서도 군대를 보내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후 살라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히여 오히려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하여 비잔틴 제국과 연합해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계속 실패한 끝에 폭풍우로 인해 모두 침몰당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이를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주했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면 그들과 대적할 정도로 더욱 큰 힘을 얻은 상황에 놓일 것이라 예측했다. 그리고 3일 동안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1182년 11월 10일에 더욱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수도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살라딘은 킨다(Khinda)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Taz Al Mulk,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Imadya)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Hisin Kayfa)의 누르 앗 딘의 “다리들의 문”을 맡게 된다. 하지만 한 달 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Shinzar)를 포위하였다. 이후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고 이를 주장했지마,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atillon, 1125~1187)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취소되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제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인해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제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가 리처드의 동생 존과 결합하여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해 리처드 1세 또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것이니 그 때 결판을 내자고 약속하였으며 살라딘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살라딘은 약속 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 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 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사용하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 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딘은 대신 타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Al Kamil)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카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전쟁을 벌이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이에 어떻게 결사반대한 참모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처음부터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로 인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매우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 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적은 없었으며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함락당할 것이라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 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카톨릭 측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측에서는 살라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큰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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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추앙받는 쿠르드족의 영웅, 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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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주자 이재명과 김문수의 외교, 안보의식
- 필자는 이재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4국과 두루 잘 지내고, 그 나라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제 외교에 관한 발언으로 볼 때 이재명이나 김문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 또한 의문이긴 하다. 이재명은 “한미 동맹은 한미 동맹대로, 한미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대로,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잘 유지하고 물건도 팔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외교적인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다. 한미관계에 대한 안보와 협력도 중요하지만 경제, 무역, 산업, 특히 기간산업으로 등으로 볼 때 중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국가다. 소련이 아닌 현 러시아는 우리에게 적대한 적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때 가장 친하고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왜 러시아하면 거품을 무는가? 러-북을 화해시키고 밀착시킨건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검토 등의 쓸데 없는 발언이 불러온 결과다. 이건 윤석열의 책임 아닌가? 그닥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러-중 밀착의 최대 책임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다. 상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많은 살상무기를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가 갈 곳은 당연히 한 곳 밖에 더 있겠나?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멀리하면 당장 한국은 중요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이 요소수 대란이었는데 지금은 잘 축적해서 문제 없다고 했지만 중국이 요소수 규제 다시 들어갈 때, 우리의 대처를 봐야 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가 말과 통계로만 주장했지, 실제 요소수를 얼마나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지 공개한 바 없다. 요소수도 그러하거늘, 각종 전자 기기의 부품들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다. 이는 미국 제품 마찬가지로 기초적인 전자 기기의 부품 중 중국제가 아닌게 없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희토류다. 희토류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있는 나라 또한 미국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토류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든 귀한 광물로 떠올랐다.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이 없으면 어디로부터 공급을 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초 부품 대란이 발생하면 한국의 물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천정부치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자원이라도 풍부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나라에 아르헨티나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그냥 망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 기초 부품이나 각종 용품, 광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확보해 놓고 러, 중을 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은 마련해 놓고 주장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이와 같은 대책과 대안에 대해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적이 없다. 아무런 대안과 대책 없이 주장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외교부와 외교 전문가들, 흔히 조선일보 기사에서 언급한 외교가의 작자들이다. 특히 본문에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주변 국가의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가 오면 한국이 이재명식 실용외교를 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중국이 대만을 먹을려 했으면 이미 먹고도 남았다. 어차피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몇 없고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하나의 중국"에 동조하고 있는 판에 전쟁이 나면 미국이 대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타국 불간섭 원칙이라는 외교적 성정으로 볼 때 대만을 도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대만과 동맹도 아니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 숫자도 코소보를 독립 및 국가로 인정한 국가의 수보다 적다. 그러한 현실에 주한 미군을 일부를 빼내 대만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고작 5년에 불과하다.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보는가? 중국이 대만 해안을 봉쇄하기만 해도 대만을 물자 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대만은 섬나라이면서 수교한 국가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그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굳이 중국이 군 장병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만의 해안 봉쇄만 해도 알아서 설설 길 나라에게 굳이 무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미 CSIS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군의 전력 분산을 위해 북한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중국하고 북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이 끌어들인게 러시아다. 러-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이는 중국과 미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들어 놓은 셈이다. 러-북이 밀착하고 있는 한, 중국이 여기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국은 충분히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다. 왜 한국은 스스로의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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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 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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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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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 동, 서파키스탄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가 당시 총독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셨을 뿐,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진나는 동파키스탄의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 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사용하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 맞다. 이와 같은 진나의 발언은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고 검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진나의 이와 같은 차별성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굴복하라고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일 때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로 알려진 무하지르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에서 2위의 언어로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으며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사용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사용되던 우르두어로 대동 단결하여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어 진나 본인 또한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치 태생인 진나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그런데 진나는 동파키스탄 연설의 전체 문맥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자며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운 서파키스탄의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졌던 것은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측과 실패한 측으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하던 시점에 이르러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사용해왔던 벵골인들에게 완전 외국어나 다름없던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8년 2월 25일, 벵골인들의 지도자인 디렌드라 나트 두타(Dhirendra Nath Dutta)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서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Liaquat Ali, 1895~1951)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오로지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어 1948년 3월 22일, 동파키스탄에서 진나의 연설이 양 파키스탄의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연설이 진나가 영국령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했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상태에서 동, 서파키스탄을 통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게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유사하게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강력한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이게 되었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대량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리아카드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이후 벵골인 총리인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인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하면서 하야했고 벵골인들은 또 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에 발생한 헌법 개정으로 인해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동부 벵골의 행정 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큰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탄생 100주년 행사를 두고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를 반파키스탄적인 인물이라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다시 크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의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 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는 이후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벵골 문화 탄압이 발생한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원칙 및 신념을 가진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강제로 제압하겠냐는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으며 오히려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사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사용되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두 중앙정부가 압수하여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했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면서 저항을 기획했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 정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1958년 들어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서파키스탄의 헌정을 파괴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경제적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 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의 시민들은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구호에 매우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뱅골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사이클론이 상륙된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서야 경계를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했을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전혀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 대한 이유로 적대국인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게 된다. 이는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편 동파키스탄 시민들의 시위 때문에 퇴진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듬해인 1970년에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두었던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로 인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으며 이대로라면 단독 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에 있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인 핵심 지역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승리했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아와미 연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막상 그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에게 정권을 분리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총수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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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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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 오늘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이 열렸다. 미국 대표단도 있었지만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채, 궁전 내에서 타결을 기다리고 있었고, 터키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선 이 협상의 장소가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 독립과 평화의 상징인 곳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폐지되고 터키의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공화국을 건설하고는 이곳에 입주하면서 터키 영토 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했다. 따라서 터키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화를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을 중재국인 터키 측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을 선정했던 것은 양국의 전쟁 종식과 아타튀르크의 평화주의를 강조하여 양국의 평화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된 이후, 그러한 중재국인 터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측의 입장차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 먼저 가 있던 젤렌스키는 "우크라아나의 최우선 과제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이며 진정성 있고 투명한 휴전(Головним пріоритетом України є повне, безумовне, справжнє та прозор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이는 휴전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쟁에서의 휴전은 그에 상응하는 조건과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10여년 전, 민스크 협정 이전부터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와 집단서방에 속아온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속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휴전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명확하지 않은 조건과,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행동했다. 오직 그들 우크라이나에게는 그저 "무조건 휴전(Безумовне припинення вогню)" 하자는 내용만 반복될 뿐이었다. 휴전에 대한 구체적으로 명확한 플랜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러시아의 휴전에 대한 조건과 요구는 명확했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동의했지만 휴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러시아가 내세우는 조건은 ① 우크라이나 내 최악의 살상무기에 대한 비무장화, ②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③ 우크라이나 내 비나치화, ④ 돈바스 4개 주와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 인정 등이다. 이는 개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아주 획일적이고 명확한 요구 조건이다. 이 조건들만 받아들여지면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즉시 종료할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은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러시아가 바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다. 고작 3일이나 30일 휴전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키겠다고 한적이 없고, 젤렌스키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서 반러 세력을 일소화하겠다고 직접 언급한 적도 없다. 만약에 젤렌스키를 직접 제거하려 했다면 키예프 대통령궁에 오레슈닉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인내심을 갖고 젤렌스키의 개심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심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푸틴 대통령 또한 젤렌스키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부활절 휴전에 관한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승절 문제다. 러시아는 이 때도 잠시 휴전을 제안했었다. 부활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갖고자 하는 의미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의미를 저버리고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전승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소련으로 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과 전쟁 당시 서로의 등을 맡기던 든든한 전우였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했던 우정을 생각하며 평화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날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이 때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여태까지 평화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임을 보여왔다. 그러던 우크라이나가 이제와서 휴전을 언급하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대통령이 이스탄불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다. 필자가 볼 때,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및 휴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크라이나가 앞서 제안했던 그 30일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오고 있다. 우선 전열을 재정비하고 EU나 영국,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보충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바흐무트나 마리우폴 아조프스틸과 같은 요새지들을 몇 군데 더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항전하여 전쟁을 장기화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애초부터 평화에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 휴전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여주기식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게 지우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협상은 예상했던데로 큰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양국이 1,000명씩 포로를 교환하자는 내용에 합의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EU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젤렌스키가 만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진정성 없는 회담에 푸틴 대통령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규탄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가 러시아에게 유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상호 간에 수립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EU 또한 이스탄불 회담에 그 지도부들 중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진정성 또한 떨어진다는 입증했다. 전쟁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장기적으로 갈수록 유럽은 더욱 고통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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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의 이스탄불 협상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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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와 조지아의 근원 민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 조지아의 원(原) 민족인 카르트벨리아 인의 기원을 보자면 우선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를 파악해야 한다.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은 B.C 3600년에서 B.C 2600년경 유럽의 도나우 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걸쳐서 존재한 인도유럽어족 최초의 청동기 문화를 총칭하는 문명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특징은 주거의 흔적들로 볼 수 있는데 돈 강과 볼가 강 남쪽에서 유라시아 지역을 이동하던 유목민들의 야영지가 발견되었으며 돌로 축조한 성채가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볼가 강 남쪽의 촘폿(Чомпот)에는 2m 높이의 돌로 쌓은 성벽이 삼각형 모양의 마을을 지키는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승마용의 목축을 많이 했던 흔적이 있다. 가축은 지방에 따라서 소를 주로 키우거나 양이나 염소를 키우기도 하였다. 말을 키우고 있지만 유목이 아닌 정착되어 있는 것이 얌나야 문화의 큰 특징으로서 말의 뼈는 주거지와 묘지에도 발견되었다. 이는 묘지에서 발견된 말뼈로 볼 때 장례식 당시 희생당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순장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북부 지역의 삼림지대와 계곡에서는 목축보다는 농업이 많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묘지에는 말에 끌게 하여 밭을 가는 쟁기도 발견되었다. 말이나 사람들의 가족들이 탈 수 있는 소 등이 끄는 우마차(牛馬車), 넓은 초원에 사육하기에 적합한 종류의 가축들, 낙타와 사이가 산양(Saiga antelope)을 시작으로 스텝 지역 심층부에 생식하였던 동물의 뼈들, 스텝 지역 심층부에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가족묘지 등등의 발견 등으로 인하여 얌나야 문화는 반(半) 유목식 목축이 행해진 최초 시기 문화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문화 전에는 반(半) 유목 식 목축이 행해진 흔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얌나야 문화가 이러한 반(半) 유목 식 목축 경제의 최초의 시작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얌나야 문화의 묘소들은 쿠르간이 건축되어 있는 묘에 최초로 나타난 피장자가 있고 그곳에는 다른 피장자들도 이장되어 있지만 그 쿠르간을 더욱 크게 증축하여 새로운 피장자를 이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얌나야 문화의 기원은 볼가 강 중상류의 크바린스크 문화(Хвалынская культура)와 드네프르 강 중상류 지역의 스레드니 스토그 문화(Среднестоговская культура)에 있다고 보고 있다. 승마용의 말과 가족 이동용 소의 우차(牛車)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동은 매우 용이하게 가능했다고 추측되며 광대한 지역에 얌나야 문화가 팽창한 것은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로 생각된다. 얌나야 문화 양식의 묘제에 의하면 동쪽에서는 우랄산맥 동쪽 기슭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알타이 산맥과 예니세이 강 지역에 존재했던 아화나시에보 문화(Afanasevo culture)와 분명 관계가 있고 얌나야 문화와 그 주변의 유럽 스텝 지대들에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고 있다.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는 얌나야 문화보다 안드로노보 문화가 오래되었고 아화나시에보 문화는 안드로노보 문화 다음으로 나타난 청동기 문화로 얌나야 문화는 아화나시에보 문화의 성립 시기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J. P 말로리(J. P. Mallory)와 르네 헤레라(Herrera, Rene J)도 마리야 김부타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현재까지 얌나야 문화의 성립을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 대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얌나야 문화의 서쪽에서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리에 걸친 도나우 강 하구 지대 일대에도 넓게 펼쳐져 있다. 이렇게 광대한 범위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 것과 그 주변 지역이 항상 크게 변동되어 있는 것, 말과 우차(牛車) 같은 생활문화양식으로부터 얌나야 문화는 인도-유럽어족 초기의 매우 중요한 문화 중에 하나라는 추정이 학계에 인정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정치적인 세력을 확보한 인도-이란어족과 관련 집단들이 점점 유럽 쪽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관련 문화를 생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인 동유럽 스텝 지대에서 넓게 발전한 스텝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볼 때 쿠르간 가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것들이 해소되면서 구상 암포라 문화(Funnelbeaker culture)와 함께 얌나야 문화가 인도-유럽어족 시대에 유럽에 존재했던 매우 중요한 문화라는 것으로 크게 인식되었다. 이들 얌나야 인종으로 본다면 아프리카 일부 지역, 인도네시아와 베이징 등을 비롯한 극소수 지역에서만 인류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한 원시 인류가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지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확인된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Homo erectus georgicus)’의 존재는 카프카스 인종의 기원을 인류의 시작까지 끌어올리게 되면서 이 인종이 얌나야 문화를 영위했던 인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에 의거하면 180만~160만 년 전, 카프카스 일대에는 당시 지구에서 보기 어려웠던 존재이며 인류학적으로도 고귀한 존재인 ‘직립보행(Upright walking)’을 하던 인류가 살고 있었다. 이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인 15,000~12,000년부터 카프카스 지역의 인류는 각자의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 석기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어떠한 문명적 계기를 만나 금속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카프카스 원인(原人)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명을 건설했는데 이 문명이 얌나야 문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얌나야 종족이나 민족들, 대표적으로 돈 강 남쪽 카프카스 지역의 원시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 초기로 정립되던 시기에 철기를 전쟁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C. J 톰센(C. J Thomsen)이 지적하듯이 당시 시대적 분류 기준의 불평등 구조를 만든 주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석기에서 청동기와 철기로 넘어가는 계기를 접했느냐의 여부가 국가 문명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침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한 면에서 얌나야 문명에 속해 있던 카프카스 인들의 주요 거주지로서 조지아는 당대 유라시아 지역의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기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B.C 7세기경 조지아는 이미 철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게 되면서 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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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와 조지아의 근원 민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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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러시아의 다음 행보에 대한 예측
- 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제압하고 난 다음 목표는 조지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다. 분쟁 지역인 남오세티야의 갈등도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조지아 내에서 반러 감정이 심한데다 방송 앵커까지 푸틴 대통령을 두고 "악취나는 점령자"라고 비난하여 모욕을 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조지아행 항공편을 2019년 7월부터 지금 현재까지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제 확인해보니 조지아 에어라인은 모스크바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세 편이 있을 정도로 양국 간 왕래는 활발하다. 그저 현재 러시아 항공 아에로플로트만 다니지 않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2020년 3월 5일에 러시아 군 정보국이 조지아 정부와 언론 사이트에 사이버 공격을 가하면서 두 나라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현재 두 나라는 단교 상태이고 이익대표부를 두면서 서로 통고하고 있는 실정에 있어 다른 구소련 국가들보다 러시아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와 같은 조지아 관련 문제도 언젠간 깔끔히 해결하고 싶어한다. 세계적인 화약고에 들어가는 카프카스 일대는 러시아 입장에서 가시 같은 존재이다. 우선 체첸의 카디로프 일가가 현재 러시아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기에 정리된듯 싶지만 남오세티야, 압하시야와 같은 자치공화국이나 조지아와 대립 등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조지아 문제 해결하고 벨라루스와 통합 연방 국가로 통합에 합의하게 되면 푸틴의 과업은 끝날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현 정권 자체가 친러이고 러시아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어 대다수 국민들의 러소포비아와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마무리 되면 흑해의 최대 패권을 갖고 있는 국가가 러시아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조지아가 서방과 접촉하고 싶다해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알아서 러시아에 굽힐 가능성이 높다. 굳이 러시아가 목표를 잡고 조지아를 토벌하지 않아도 알아서 복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한편 조지아의 국민들이 그걸 우려하기 때문에 EU와 나토 가입을 희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흑해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절대적인 수준이고 터키 또한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기에 조지아의 입장에서 별다른 대안도 없다. 비록 아르메니아 파사반 정권이 친서방으로 기울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터키-아제르바이잔 문제에 있어 중재에 서줄 나라는 아무래도 러시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이 친러국가이기에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이다. 앞서 말했듯 조지아도 친러 정권인데다 자국민 상당수가 러시아 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메니아도 오랜 시간 러시아와 척을 지기도 힘들다. 게다가 서구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기 위해 계획을 꾸미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인데다 명분도 없다. 카프카스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알아서 정리될 분위기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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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러시아의 다음 행보에 대한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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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시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 몇 년 전에 우연히 국회도서관에 들렀다가 도서관 로비에 진열되어있던 <어떻게 만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로비에는 검색하지 않아도 방문객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진열되어있고, 또한 로비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유료이지만 로비 한쪽에는 복사 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다. 처음 방문한 국회도서관에서 붉은색 카바의 그 책은 나를 유혹했다. 그의 유혹은 강렬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는 나를 흥분시켰다. “이 저자는 어쩜 나와 생각이 이렇게 유사할 수 있을까?” 물론 새로운 기술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그 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끈기 없음이 그와의 이별을 재촉했다. 집중력이 흩어지니 책을 더 이상 탐색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읽지 못한 부분은 복사를 해서 집에 보관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붉은색 카바의 그 책이 다시 기억나서 복사한 대목을 읽어보았다. 복사한 부분은 원본의 아우라는 없었지만, 내용은 같기에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복사한 부분도 모두 탐색하였다. 아뿔사! 그러나 앞부분이 기억나지를 않았다. 아련한 기억만 남아있었다. 다행히 그때 그 책을 읽고 쓴 감상문을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고한 적이 있어서 그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 기사의 일부를 아래에 함께 올린다. 아래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집단적 포기'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집단적 포기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잠재적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적 포기의 원인을 이 책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과 두 번째는 이념적 공모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념적 공모는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경우이다. 모든 독재자의 탄생은 주류 정치인들과의 공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잠재적 독재자를 가리키는 네 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과도 너무나 유사했다. 첫째가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혹은 규범 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이다. 그들은 기본적인 시민권 및 정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가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이다. 상대 정당을 근거 없이 범죄 집단으로 몰아세우면서, 법률 위반을 문제 삼아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가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조를 폭력단체로 몰고 가고, 야당의 대표를 사법처리하려고 하고, 시민언론을 탄압하는 현 정부와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을 쓴 저자의 기준으로는 현 정부는 잠재적 독재자의 정권이다. 만약 축구경기를 하는데 심판이 매수당하고, 상대편 주전 선수를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경기 룰을 바꾸면, 그 경기는 공평한 경기가 될 수 없다.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법관을 자기편으로 앉혀서 법 집행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려고 하고,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어 버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잠재적 독재자는 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을 진행시킨다. 총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키기에 깨어있지 않은 국민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뒤늦게 그 속셈을 알아차린다. 이상이 그 당시의 기사 내용이었다. 최근 읽었던 복사한 부분에는 트럼프의 첫 당선을 두고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이후 미국 미래에 대해 세 가지 전망을 제시한다. 첫 번째가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와 손을 잡음으로써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공화당 지도부는 극단주의자와의 위험천만한 동침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재빨리 과거의 평판을 되찾을 것이다.” 한국이 미국보다 민주주의가 더 발전한 나라일까? 최소한 국민의 전체적인 의식수준은 미국보다 높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힘을 잃어가는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도 지적한다. 지금 우리의 기득권들의 저항 속에 우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미국 사회가 더욱 뚜렷한 양극화 사회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점차 상호 관용과 자제가 무너지고 되돌릴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를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진단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정치 경쟁자가 적으로 변할 때 정치는 전쟁으로 전락하고, 민주주의 제도는 무기로 바뀐다. 그 결과 사회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게 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대통령 탄핵으로 말미암은 조기 대선을 눈 앞에 둔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 길은 엘리트 집단 간의 협력과 타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엘리트 집단이란 것 역시 정치와 한 통속으로 움직이니 그들 역시 정치 집단과 다를 바 없다. 정치가 양극화될수록 정치와 거리를 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부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언론도 정치화되어 있기에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스포트 라이트를 켜지 않는다.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의 미래는 한국 국민의 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도 밝혔듯이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민주주의는 살아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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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시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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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장미시위와 그 이후 현재 조지아의 실정
- 2003년 11월 23일 조지아 시민들이 손에 장미를 들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예두아르트 세바르드나제 당시 대통령의 부정부패가 도를 넘어서고 집권 여당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모의하자 시민혁명인 '장미시위'가 발발한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또한 남오세티아 전쟁처럼 집단 서방의 획책인 대표적인 색깔혁명이다. 장미시위 이후 조지아는 경제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정치적으로도 친(親) 서방 정권이 들어서면서 옛 소련에서 완전히 독립했지만 부정부패는 여전했고 친 서방 경제 노선은 한계를 보여 조지아 화폐인 라리는 어디든 취급받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장미시위는 200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정권 전복 운동인 '오렌지 폭동'이나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러나 장미사태 10년을 맞아 조지아에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서방 정책은 무너지고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장미사태는 미완의 혁명이라는 집단 서방의 안타까움이 극에 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강력한 러시아 부활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의 뚝심에 집단 서방이 공들여 놓은 조지아의 지난 10년 간의 친서방 정책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조지아는 혁명 이후 옛 소련권 국가 중 개방ㆍ시장 경제 체제 측면에서 가장 앞선 곳으로 평가받았다. 세계은행이 183개국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사업하기 편한 나라' 순위에서 2005년 112위에서 2012년에는 16위로 급상승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2010년 6.3%, 2011년 7.2%, 2012년 6.5%로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미 사태 이후 지도자로 올라선 미하일 사카슈빌리는 미국에서 유학한 변호사 출신이며, 친미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조지아 경제는 급속히 추락했고 조지아 특유의 폐쇄적인 사회는 "사업하기 편한 나라"라는 이름에서 가장 불편한 나라로 변모했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친러정권으로 바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대러제재를 거부함으로써 현재 조지아는 러시아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조지아 경제에 있어 주된 산업 생산물은 농업과 광업, 식품업, 주조업에서 나온다. 에너지 운송업 또한 조지아의 주요 산업이다. 조지아가 수입하는 물품은 에너지와 관련된 상품들이 많다. 원유와 천연가스, 원자재 등을 주로 수입한다. 러시아가 수출입이 가장 많은 나라였지만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몰도바와 함께 유럽 연합과 FTA를 포함한 협정을 맺었다. 이어 2017년에는 중국과 FTA를 체결하는 등 점차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터키, 아제르바이잔 같은 이웃 나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또한 높은 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러시아 없는 조지아의 경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조지아는 현재 인플레가 높고 젊은 인구는 국외로 계속 유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지아 내에서 할게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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