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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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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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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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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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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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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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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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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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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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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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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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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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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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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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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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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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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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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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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지안테프 대지진 당시 한국에서 터키에 보내는 구호품과 기부 문제
- 내가 이 기사를 보고 참담함을 금치 못했는데 한국에서 기부(Donation)에 대한 의식과 관련된 만연해진 풍조가 있다. 인류 사회에서 어떠한 의식이 형성이 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문화로 자리 잡는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기부 문화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평소 그 나라 국민들의 기부에 대한 의식과 인식이 어떤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럼 한국의 기부 문화와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의식이나 인식은 어떨까? 한국에서의 기부(Donation)에 대한 인식은 말 그대로 내가 나보다 못한 자에게 베푸는 일종의 "생색(Patronage)"에 가깝다. 뭔가 내가 베풀었다는 보여주기 식이 대부분인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부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내가 본 대다수의 사람은 순수한 의미의 기부와 봉사보다는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기부나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 순수하지 못한 발상은 어떠한 목적이 행해지도록 만든 과정이라는 것에 그칠 뿐, 진정 어린 마음이 없다. 일반적으로 자선이나 대의를 목적으로 대가 없이 내놓는 것이 기부인데 많은 한국의 기부자들은 대가와 보답을 바란다. 물론 대놓고 직접적인 보답이 아닌 간접적인 대가와 보답이다. 예를 들어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기부 중, 이미지 메이킹(mage Making)이나 이를 이용한 이미지 세탁을 위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즉,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이 의미는 프랑스의 작가 겸 정치가인, 레비 공작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Pierre Marc Gaston de Levis, 1764~1830)가 1808년에 『격률과 교훈(Maximes et reflexions sur differents sujets)』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사회주의적, 자유 민주주의적 등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상류층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사회에 공헌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상류층이 아닌 일반인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의 실천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상류층이 거지에게 적선하듯 베풀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천될 수 없다. 받은게 있으면 솔선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의미를 마치 "적선"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내어 같은 위치에서 그 아픔을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식으로 접근해야지 위에서 아래에게 베푼다는 방식은 그 위치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갑질한다는 의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와 구호의 목적은 "같은 위치에서 그 아픔을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져야지 그 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거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목적을 세우는 것은 결코 좋은 행위가 아니다. 터키와 시리아의 대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보내는 구호품에 더러워진 옷들이나 짝을 잃어버린 여름 신발 등이 가득하다고 한다. 이는 자기가 쓰다가 선심쓰듯이 버릴 곳이 없어서 터키와 시리아에 버리자는 것과 같다. 현재까지 터키로 전달된 국내 구호물품만 40톤 가까이 되는데, 이 가운데 10% 정도는 못 쓰는 물건들이라 한다. 이는 평소 한국인들의 구호 물품 보내거나 기부할 때 자세가 고스란히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이, 이 온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갑질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이미지를 더럽게 만드는 민낯이다. 한국의 기부문화, 스스로 정제하여 뭔가 바꿔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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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지안테프 대지진 당시 한국에서 터키에 보내는 구호품과 기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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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함 사건으로 인한 국공분열과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 장개석의 종결된 밀월, 네 번째 이야기
- 북벌 문제와 쿠이비셰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장개석과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장개석과 소련 사이에서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6년 3월에 들어서자 공산당의 정치주임 교관 고어한이 황포군관학교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국민당 안에도 한 사람의 돤치루이(段祺瑞, 청나라 말기 안휘군벌의 수장으로 중화민국의 임시총통으로 지냈다가 숙청된 인물)가 있다. 북방의 돤치루이(段祺瑞)를 타도하려면 먼저 내부의 돤치루이(段祺瑞)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국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월 3일, 장개석과 돈독하게 지내던 미하일 보로딘이 소련 본국의 소환에 따라 귀국한다는 구실로 인해 중국 북방으로 이동하고 적대적인 쿠이비셰프가 소련 고문단장이 되자 장개석의 불안감은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변했고 이러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었다. 소련 당국이 미하일 보로딘을 소환한 것은 중국의 적화가 늦어지고 있다 판단하여 그에 대한 문책으로 소환을 감행한 것이다. 3월 7일, 황푸군관학교 교육장이자 국민혁명군 정치부 주임이었던 덩옌다(鄧演達, 1895~1931)가 장개석을 비방하는 잡지 등이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고 보고하게 된다. 덩옌다는 공산당원으로 훗날 장개석과 대립하다가 장개석에게 처형된 인물이다. 이 시기의 장개석 음해하는 각종 선전, 선동에 대해서 중화민국 측은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너선 펜비가 저술한 <장개석 평전>에 따르면, 이 때 장개석을 노린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공산당의 갈등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인 난관으로 인해 장개석은 극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었고 중산함 사건 직전에는 산터우(汕頭)로 가서 요양할 것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陳立夫, 1900~2001)는 장개석이 당시에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렸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한편 공산당이 북벌에 반대하고 있는 사실에 분노한 장개석은 2월 1일 국민혁명군 총감 임명을 거부하고 2월 2일, 광저우 위수사령관 및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도 사직하겠다고 나서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공산당과 정면대결을 벌이려고 했다. 더불어 왕징웨이가 이에 답하지 않자 2월 27일,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찾아 사직서의 수리와 북벌에 반대하는 쿠이비셰프의 귀국 중 선택하라며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장개석과 왕징웨이 간의 관계 악화는 단순히 왕징웨이가 쿠이비셰프 등 소련 고문들의 말에 혹하여 북벌을 외면한다는 장개석 측의 주장보다 더 복잡한 정황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장개석이 가장 강력한 군부에서의 실력자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탄옌카이(譚延闓), 리지선(李濟深), 주페이더(朱培德)를 비롯한 무시할 수 없는 장개석 못지 않은 군사 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왕징웨이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권위를 행사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장개석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왕징웨이가 여러 군사 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장개석에게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그를 통제하기 어려우니 탄옌카이(譚延闓), 리지선(李濟深), 주페이더(朱培德) 등을 이용해 장개석을 견제했다. 왕징웨이는 이러한 군사적 권위의 확보를 쿠이비셰프와 협력하여 행했고 장개석은 왕징웨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노하며 그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월 중순, 장개석은 이와 같은 정치적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왕징웨이와 상의했다. 왕징웨이는 장개석의 소련 외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장개석은 문건을 정리하고 여행비를 홍콩 달러로 환전한 다음, 부두로 향하게 된다. 그때 비서 천리푸가 광저우에 머무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물었고 한참을 고민한 장개석을 차를 다시 광저우로 돌렸다. 그리고 장개석은 자신이 소련 외유를 취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이때, 만일 내가 광동을 떠나지 않으면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직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광동을 떠나면 직무를 포기하고 달아난 죄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장개석은 왕징웨이와 소련이 합작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이는 끝도 없는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충돌이 격화된 사건은 왕마오궁(王懋功) 사건이 발단이었다. 원래 왕마오궁은 쉬충즈의 부하 출신으로, 쉬충즈 숙청 이후 제1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장개석은 그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고 있다 생각하여 광저우 위수사령관 대리로 임명할만큼 신뢰했다. 그런데 왕징웨이와 쿠이비셰프가 왕마오궁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3만 위안의 군비를 지급하자 이에 격분한 장개석은 왕마오궁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쿠이비셰프가 사주해 국민당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2월 26일, 왕마오궁을 체포하여 2사단장 자리에서 해임했으며 이 사건을 두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장개석이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장개석과 왕징웨이, 공산당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다. 중산함은 원래 영풍함 사건 때 쑨원의 목숨을 구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기함인 영풍함으로 쑨원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쑨원의 호인 중산(中山)을 붙여 중산함으로 개명되었다.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 경위는 1926년 3월 18일 오후 6시, 황푸군관학교 교통계 직원 리스융이 교장판공청 주임 쿵칭루이에게서 상선 한 척이 습격을 당했으니 순시선 1척과 위병 16명을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에 리스융은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 사무실에 전화해 순시선 파견을 요청했고 광저우 판사처 교통계 직원 왕쉐천(王薛晨)이 이를 교통계장 어우양중(歐陽中)에게 보고했다. 이때 전화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쉐천은 이러한 파견 요청의 주체가 교육장인 덩옌다라고 생각하여 보고하고 해군국에 교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섭을 기다리지 않고 순시선 1척을 파견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해군국을 찾아간 어우양중은 마침 자리를 비운 해군국장 리즈룽 대신에 해군국 참모청 작전과장 쩌주이에게 자신의 직원이 교육장으로부터 교장의 명령을 전달받았다고 하면서 병함 2척을 황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들은 쩌우이는 상황이 급박할지도 모른다 여겨 보벽함을 황푸로 파견한 다음에 리즈룽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중산함과 자유함 두척 중 어느 배를 보낼 지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리즈룽은 자유함을 파견하기 위해 함장 셰충젠과 접촉했으나 자유함이 수리 중인지라 중산함을 보내기로 하고 어우양중에게 정식 공문서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벽함과 중산함 함장에게도 공식 명령서 교부를 요청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순시선 한척 파견 요구가 병함 두어척 파견 요구로 바뀌고, 교장판공청 주임의 요청이 교육장을 통한 교장의 명령으로 바뀐 것이 보인다. 8시 30분, 해군국으로 돌아온 어우양중이 10시에 황푸로 전화해 해군국과 교섭하여 병함(보벽함) 1척을 보냈으니 12시 쯤 도착할 것인데 보초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전했다. 중산함은 19일 오전 7시에 출항, 황푸에 도착했다. 황푸에 도착한 후 대리함장 장퉁신은 교육장 덩옌다를 만나려 했으나 그와 일정이 맞지 않아 부관 황전우를 대신 만났다. 장퉁신은 황전우에게 리즈룽의 명령서를 황전우에게 보여주고 장개석의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리즈룽은 소련의 조사단이 중산함을 시찰하려 한다는 쩌우이의 보고를 받고 장개석에게 중산함을 회항시켜도 되겠느냐고 전화로 묻게 되었다. 당연히 배의 출항을 명령한 적이 없었던 장개석은 매우 경악하게 된다. 이처럼 중산함의 출항은 오해로 빚어진 단순 사고로 보였다. 그런데 장개석의 주변에는 매우 정황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1926년 3월 18일 아침,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2시간 동안 5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전화가 왔을 때 장제스는 부재 중이어서 장제스의 아내 천제루가 전화를 받았다. 천비쥔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전화했다고 하면서 장제스가 언제 황푸로 가는지, 어느 부두로 가는지를 물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장개석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 적대적인 회고록을 남긴 천제루조차도 그 날 천비쥔의 전화는 매우 수상했다는 회고를 했을 정도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에 전화를 걸자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공산당원 후궁몐 긴급하게 대화를 나눈 뒤,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개석의 행방을 추궁하자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 덩옌다가 장개석의 집을 방문했고 비서인 천리푸는 "덩옌다가 장제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사전에 알고 있는 듯했다." 라며 그가 가장 의심스러웠다고 전한다. 장개석이 집에 돌아온 뒤인 오전 10시, 리즈룽이 전화 상으로 전날 밤 황푸에 파견한 중산함을 돌아오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장개석은 회항을 허가한다. 저녁 6시가 되어 중산함은 광저우로 돌아가긴 했으나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게 되자 장개석은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해 장개석은 광저우로 가게 된다. 해군학교 부교장이자 쑨원주의학회 회원 어우양거(歐陽格)에게 함대사령 권한을 부여하여 중산함을 진압하고 리즈룽을 구속, 심문할 것을 지시하여 그를 체포했다. 평소에도 자신의 군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공산당이라는 것을 파악한 장개석은 국민당 곳곳에서 형성된 공산 세력을 돌파하기 위해 1926년 3월 20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산함 사건에 이은 3.20 쿠데타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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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함 사건으로 인한 국공분열과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 장개석의 종결된 밀월, 네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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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한민족 조상들이 전염병을 대처한 자세
- 문화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전염병은 중세 유럽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전염병의 공포로 인해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성어가 나타났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유행했던 페스트보다는 그 임펙트가 약했지만 전염병으로 인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다. 호열자(虎列刺)와 같은 콜레라 증상이 한동안 조선 시대를 강타했던 적이 있었으며 호흡기 질환을 총칭하는 역병(疫病)이 동아시아권 전체를 뒤덮은 적도 있었다. 기근과 전염병 및 역병은 거의 동반되어 오는 편이 많고 기근으로 인하여 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면역력도 약화되어 희생자도 상당수 나왔다. 천연두의 경우, 요행히 낫는다고 할지라도 이마에 마마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을 정도로 신체에 생체기도 생기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전염병에 약도 없었지만 일찍 주민들을 격리시키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가옥은 모두 불태웠으며 사방 수십리에 걸쳐 방역에 힘써왔다. 그리고 옷을 자주 빨아입었고 화장실 (칙간) 이라는 것도 존재했으며 목욕도 의외로 자주했다. 그에 비하면 서양은 옷이 더러워지면 귀족의 경우, 새 옷을 입고 더러워진 옷은 버리는게 일상이었으며 일반인들은 귀족이 버린 더러워진을 옷을 주워 입고 마르고 닳도록 자손들에게 대물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목욕은 이교도의 풍습이라 하여 자주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으슥한 곳 어딘가에서 용변을 보기도 했다. 그러한 비위생적인 풍경은 현재 인도에 가면 시골 어디든 볼 수 있는데 인도의 그 비위생적인 풍경이 유럽 중세 시대 풍경과 비슷하다 보면 될 것 같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돌았을 때 격리 장소는 성 안 통로 어딘가였지만 우리는 조선 시대만 해도 마을 밖 수십리 떨어진 곳에 격리시켰고 역병이 발생한 마을을 모두 소개시켰다. 그러나 유럽은 성 내부였기 때문에 소개 자체가 불가능했고 격리 방식도 집단으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집단 감염자들이 속출해 성 전체로 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시대 때 여러 명을 한꺼번에 집단으로 격리시키지 않고 한 집당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 3명 이내로 축소해서 격리시켰다. 조선 시대 효종 때인 1653년 봄 황해도에 문둥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자 임금이 어의 안경창에게 명하여 당시에 유행하는 전염병의 특성과 조선의 실정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풍토와 조선인의 체질에 알맞은 치료법을 담은 책을 펴냈다. 효종 때 지어진 <벽온신방(壁瘟新方)>은 전염병과 기근 등 재난에 대비한 방역전문서로 현존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런 방역전문서가 같은 시기 중세 시대나 심지어 18세기까지 전무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역사상 최고의 명의(名醫)로 알려진 허준은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이란 의서를 편찬하여 보급했다. ‘벽온방’은 온역(溫疫) 즉 전염병을 막는 비방이라는 뜻이다. 광해군 때 전염병이 돌면 백성들한테 전염병 예방 의서인 <간이벽온방>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전국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백성들 모두가 이 이 의서를 읽고 병에 대처하라고 한 것이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일례로 <세종실록>에도 전염병에 대한 세종대왕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고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도 전염병 구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기록에서 전염병을 구제하고 약을 보내게 한 기록도 많으며 발병과 사망자 수 상황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초기 발병을 진화하는 노력과 보고를 소홀히 한 관리에게는 엄한 꾸중을 했던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로 보면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염병에 대한 대처가 매우 기민하고 그 지침도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비교했을 때 각종 전염병의 대처 상황을 문화적인 미개함과 발전함의 우생론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전염병에 대한 대처 문화, 그리고 시민들의 전염병에 대한 인식 수준 차이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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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한민족 조상들이 전염병을 대처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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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전승절 행사 이후에 나온 행진의 의미
- 매년 5월 9일은 러시아의 승전기념일이다. 여기서의 전쟁은 나치 독일군의 공격을 물리친 제2차 세계대전이다. 아시아 지역에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이 항복했던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지만, 유럽에서는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 혹은 9일을 승전기념일로 축하한다. 날짜가 다른 건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시점의 현지 시간을 고려한 것이다. 즉 독일보다 시간이 빠른 러시아는 구소련국가들과 더불어 9일에 기념하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8일에 기념하고 있다.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한 후 프랑스로 진격하여 파리를 점령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주 반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 또한 매우 격렬했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소련 침공 10여 일 뒤인 1941년 7월 3일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이는 보통 전쟁이 아니라 총력전, 전체 소련 인민의 전쟁이다. 소련의 자유냐, 독일 지배하의 지배하에 복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Это не обычная война, а тотальная война, война всего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Выбор стоит между свободой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и подчинением немецкому господству)." 라고 소련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과 전쟁에서의 공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제3국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소련과 대결한 서방 진영에 속한 국가들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과 나치 독일군의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독일군이 패한 것도 1944년 6월 미국과 영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전황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체 사망자는 6,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중 40% 이상이 소련인이었다. 군인들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물론 일반인들이 후방 유격대 활동, 적군의 보복, 강제 노역, 포격,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비통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고, 승전 기념일이 가장 큰 국경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대조국 전쟁은 애국심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면서 2차 대전의 사건들이 왜곡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시민들은 거리에 나섰다. 이것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고 하는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이 행진에 가장 선두에 선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인 드미트리 안드레예프(Дмитрий Андреев)는 현재의 러시아에 있어 승전 기념일은 러시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민족 통합 전략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승전기념일과 그를 둘러싼 기억 공간은 국민적 화합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군사 퍼레이드, 불꽃놀이, ‘불멸의 연대’ 행진 등,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공동의 기억으로 인해 사람들을 하나로 단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이러한 의식들을 국민들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최대한 활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군사 퍼레이드 개최 등 승전기념일을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려는 러시아 당국의 노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현장에서 퍼레이드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때로는 불만을 늘어 놓기도 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블로거 일리야 바를라모프(Илья Варламов)에 의하면 행사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사람들이 아니라 TV 화면을 위한 행사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또한 당국이 ‘기억과 추모의 날’인 승전 기념일을 ‘군사력 과시’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우리 한국도 국군의 날에 군사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이런 퍼레이드하면 전체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폭주할텐데 이 퍼레이드 기간동안 오히려 잠잠하다. 한국의 보수우파들 내에서도 비난이 많을 것 같은데 오히려 이에 대한 비난은 없다. 소위 문재인이나 이재명이 아닌 윤석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에도 보수우파들은 비난하지 않고 따라가는 분위기다.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에 대해 비난이 없는 것을 보니까 대한민국의 보수우파는 그저 좌파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용인되는 집단이 맞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문재인이나 이재명이 이러한 퍼레이드를 했다면 아마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를 한다고 역시 공산주의자가 맞다며 비난했을 것이다. 이처럼 소위 "빨갱이"의 전유물인 군사 퍼레이드도 보수우파에서 출마해 당선된 대통령이면 보수우파들의 비난도 사라진다. 그런데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를 기획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할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러시아는 이 행사가 끝나면 "불멸의 연대" 행사와 행진을 한다. 시민들이 전쟁에서 전사한 애국 장병들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도 6.25 때 전사한 장병들, 연평해전, 천안함 사진들 있다. 들고 나와 행진하면 된다. 이와 같은 행사까지 하면 완벽하다. 이와 같은 행사들을 벤치마킹하여 한국 만의 것으로 만들어 그 전통을 가지면 아이들에게 애국심도 키워주고, 어른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싸웠던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이 되니 그로 인해 국민 대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다. 정치적으로는 내부결속을 다지고 외부에는 주적인 국가들에게 대한민국도 이 정도의 국방력을 가지고 있다며 일종의 보여주기식 무력시위도 될테니 이와 같은 퍼레이드 행사는 일거양득(一擧兩得), 양수겸장(兩手兼將)이다. 대한민국도 러시아가 울고 갈, 아주 멋있는 퍼레이드를 광복 80주년인 올해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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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 전승절 행사 이후에 나온 행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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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2025년 현재의 분쟁, 2019년의 분쟁과 유사한 성격
-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유권 분쟁 중인 카슈미르 지역에서 총기 테러가 발생한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무력 충돌이 지속되어 민간인들의 피해가 계속 커지고 있다. 어제 7일에는 인도군은 이날 새벽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내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기반 시설 등 9곳을 공격하는 ‘신두르 작전’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신두르는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결혼한 여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전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된다. 인도 이미 결혼한 신부나 마찬가지인 카슈미르를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간에 점을 찍기 때문에 테러 분자들의 중심지를 공격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 하겠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참모총장의 발표에 의하면 이날 인도의 위법적인 군사 행동으로 인해 민간인 26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인도 경찰 역시 파키스탄의 맞대응 포격으로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10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까지 집계된 양국 사망자 수는 36명, 부상자는 9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양국은 핵을 가진 핵 보유국이다. 언제든,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위험성이 감지되고 있는 국가들이라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 모두 핵 전쟁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핵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분쟁을 보면 묘하게 6년 전에 발생했던 카슈미르 분쟁과 닮아있다. 때는 2019년 2월 14일, 인도의 잠무-카슈미르 지방 경찰학교에서 차량을 이용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인도 경찰 36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5년에는 총기 난사로 인한 사건이지만 이 때는 자살폭탄 테러로 인한 사건일 뿐, 테러의 매개체 다를 뿐이지 일어난 상황은 2025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도 인도 당국은 테러의 배후지로 파키스탄을 지목하게 되는데 이 때도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여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2019년 2월 26일, 인도 공군은 1971년 이후 48년 만에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미라주 2000 전투기 12대로 접경 지역인 카슈미르 주 바라코트 지역에 있는 테러리스트 단체 '자이시 에 무함마드(Jaesi-e-Muhammad)'의 캠프에 SPICE-2000 유도 폭탄 수 발을 폭격했다. 당시 인도 공군 측에서는 공습 대상이 잠무-카슈미르에서 폭탄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테러 조직 훈련 캠프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측에서는 애초에 그와 같은 테러 시설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당시 인도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 공습으로 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양국간 총격전까지 발생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도군의 공습은 숲에 떨어져 숲의 나무들만 상했다. 즉, 목표였던 테러단체 캠프가 아닌 것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환경파괴 혐의로 유엔에 인도를 제소하겠다고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는 인도 측이 테러단체를 노린 것보다는 파키스탄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자 하는 일종의 메시지라는 측면이 더 강했다. 이에 2019년 2월 27일, 파키스탄 공군은 전날 있었던 인도의 공습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파키스탄 공군 전투기들은 인도 영내의 공터를 폭격했으며, 이 같은 공격 과정에서 자국 영공에 침입한 인도 공군의 MiG-21 2기를 격추시켰다고 발표했다. 1대는 파키스탄 영토에 떨어졌고 나머지 1대는 인도 영토에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더불어 파키스탄 군 대변인 가푸르 소장은 인도 측 조종사 1명을 지상에서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파키스탄은 영공을 봉쇄하였으며, 인도 역시 델리 이북의 민항기 이륙을 모두 금지시키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 인도 공군의 발표에 의하면 인도의 MiG-21이 파키스탄의 F-16 1기를 격추시켰으며 이후 파키스탄 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한다. 인도군 MiG-21 조종사는 비상탈출했으나 파키스탄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집단 폭행을 당하다 파키스탄 군에게 구출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반면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기 2기를 격추했으며 자국 공군의 손실은 전무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작전 보안상의 문제로 전투 참가 기종들 중 어떤 기종이 출격했는지에 대해 비밀에 붙였다. 따라서 F-16이 전투에 참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 부인했는데, 파키스탄은 미제 F-16을 인도와의 전투에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았기 때문에 전면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파키스탄 공군의 주장은 거짓말이고 미제 AMRAAM 공대공 미사일 파편이 인도 측 잠무-카슈미르에 떨어져 있는 것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F-16이 격추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암람 잔해는 양국 공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암람을 운용 가능한 F-16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증거는 되었지만 이를 두고 F-16을 격추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당시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영내로 추락했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어찌됐든 현재까지 조사에 의하면 물증이 없는 상태이다. 현재 F-16의 제조사인 록히드 마틴에 의하면 F-16의 최신 모델을 F-21로 이름을 바꾸어 인도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록히드 마틴은 F-21을 210억 달러에 114기를 인도 공군에 판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 때 파키스탄과 인도 측의 발표로 인해 미제 전투기의 성능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 판매 전망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인도 공군이 F-16을 MiG-21로 격추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계열형인 F-16의 이미지가 인도 내에서 좋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도가 운용 중이었던 MiG-21은 현대화된 MiG-21 Bison 모델이기 때문에 조종사의 기량에 따라 충분히 F-16을 상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인도가 당시 F-16이 추락한 잔해라며 항공기 잔해 사진을 공개했지만 이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 오히려 인도 측의 미그기 잔해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인도 측은 F-16을 격추했다는 확실하게 입증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 항공 분야 전문가들이 파키스탄에 초청 받아 76대의 F-16을 모두 세어 본 결과, 공중전에서 손실이 없다는 파키스탄 공군의 주장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수십년 만에 인도-파키스탄 공군 간에 공중전이 벌어졌다는 것에서 중요한 실전 임무에 MiG-21이나 미라지 2000 등 인도 공군이 가장 구식이면서 성능이 낮은 전투기들을 투입했다는 것에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인도는 Su-30MK등 MiG-21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신예기종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인도 공군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Su-30 역시 전투에 참가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의 F-16에게 암람으로 공격받았으나 적절한 기동으로 모두 회피했다고 알려져 러시아제 수호이 전투기의 성능이 훨씬 훌륭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어 2월 28일, 파키스탄 공군 측은 포로로 잡은 인도군 조종사의 신원을 공개했다. 포로가 된 조종사는 아비난단 바르타만(Abinandan Bartaman)이라는 인물로 파키스탄 공군이 공개한 영상에 의하면 격추된 이후, 파키스탄 군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심각한 부상들을 입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이 당시 촬영한 영상에서 파키스탄 군이 성난 파키스탄 군중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줘서 겨우 살 수 있었으며, 파키스탄 군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바르타만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것에 있다. 당시 인도 정부는 이 영상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이에 파키스탄 군은 즉각 영상을 내리고 상호 간에 긴장을 완화할 의지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더불어 같은 날 샤 메흐무드 쿠레시(Sha Mehmed Qureshi)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인도 측과 대화를 나눌 의향이 있으며, 포로가 된 인도군 조종사의 송환을 적극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파키스탄 총리도 평화를 위한 유화 현상으로 인도 조종사를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며, 2019년 3월 2일, 파키스탄 정부는 억류된 인도군 조종사를 송환했다. 그러나 여전히 접경 지대에서는 포격전이 계속되었으며 인도군과 파키스탄 군은 카슈미르에서 서로 포격을 가해 민간인 6명과 파키스탄 군인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전직 파키스탄 공군 조종사가 공중전 경과를 상세히 밝힌 것에 따르면 양측은 모두 정교한 현대 공중전 기술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운용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파키스탄 공군의 역량이 당시에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지며 공중전 격추 전과는 F-16이 올렸고 JF-17은 폭격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처럼 핵 보유국 사이에서 이틀 연속으로 공습을 주고 받은 것이 역사상 처음이라 로이터 통신이 발표했지만 핵 보유국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군사적 충돌은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이 분쟁이 발생하기 무려 5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중국-소련 국경 분쟁은 난투극으로 시작하여 지상전으로 승화된 사례인 반면, 인도-파키스탄 분쟁은 처음부터 공군력을 이용한 대규모 공습을 실시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발등 불 떨어진 국가는 미국이다. 분쟁 중에 자국산 전투기인 F-16을 파키스탄이 실제로 동원했는지를 조사했다. 문제는 F-16이나 F-21이 실제로 격추되어 추락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미국은 이미 2016년 이후 파키스탄에게 미국산 무기의 수출을 제재하고 있었으며 파키스탄의 F-16은 이 제재 이전에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군사판매(FMS) 합의에 따라 대테러 임무에만 한정하기로 미국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이 이 분쟁에 끼어들 명분이 생긴 셈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인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중국이 일대일로를 시도 중이자 친중 국가인 파키스탄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미국 전투기의 성능에 대한 의구심 차단, 그리고 군사력을 강화 중인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제 전투기들이 경쟁력이 있는지 등에 대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파키스탄과 맺은 계약보다 위와 같은 부분이 매우 중요했다. 어찌됐던 중국, 러시아의 전투기보다 미제 전투기가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무기를 판매에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6년 뒤, 현재 거의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만약 실제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면전에 들어간다면 전쟁은 인도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인더스 강의 수운을 통제하고 있다. 즉, 단기전에서 파키스탄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인도가 유리하다는 것이다. 인도는 인더스 강의 수운을 통제함으로써 파키스탄 내 경제를 파탄시켜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이같은 사태를 끌고 간다면 파키스탄을 오히려 정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파키스탄에는 두 가지 변수가 존재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존재다. 핵무기는 인도가 장기전의 수행을 가로 막게 만드는 최상의 무기이다. 전체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인도보다 한참 못 미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매개라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이 갖고 있는 핵무기의 존재는 인도, 주변의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의 긴장을 불러올 수 있다. 두 번째 변수는 중국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은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다. 중국이 아라비아 해로 진출해 중동으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일대일로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파키스탄이다. 따라서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파키스탄에 공을 들여왔다. 중국의 사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중국군이 참전할 명분을 주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핵을 가진 3개의 국가가 모이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인도 또한 그와 같은 최악의 연출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들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번에도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행여나 전면전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카슈미르 일대를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2019년처럼 흐지부지 넘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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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2025년 현재의 분쟁, 2019년의 분쟁과 유사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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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9 전승절에는 어떤 행사가 벌어질까?
- 보통 5.9 전승절에는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불멸의 연대를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가게 된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일각에서는 저것 또한 정치적인 쇼로 보지만 러시아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싶다. 러시아에서 군인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 각 가정마다 군인이 있다하면 매우 자랑스러워 했으며 로마노프 제국 시절 때는 군인 집안이면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군에 대한 국가의 대우와 예우도 아주 높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군의 체계를 비웃으면서 형편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 대우가 정말로 썩 좋지 않다면 러시아 내에서는 벌써 폭동이 일어나 푸틴 정권이 교체되었어야 했다. 러시아 시민들이 군대, 군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에 군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면 러시아 시민들의 성격상 절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군에서도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여 군 쿠데타가 발생해 현 정권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하느니 한다는 것은 러시아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군은 시민들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세계 최강 몽골군을 몰아냈고,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프랑스 나폴레옹도 격파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나치 독일도 격파했다. 세계에서 이름 높은 역사적인 최강국들을 세 차례나 꺾었으니 시민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여군들을 보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대조국 전쟁 때마다 급하게 투입했지만 이 때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는 여군을 양성하는 것에 아주 적극적이다. 소련도 일반 소총수로는 여군을 배치하지 않았지만 소련의 여군은 통신병이나 간호병과 같은 전통적인 여군의 영역은 물론, 전차병, 저격수나 전투기 조종사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영웅이 된 한 여성 저격수가 말하길 저격수는 인내심과 꼼꼼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성에 맞는 병과라면서 군의 커리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소련의 여군은 대조국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고 많은 여군들이 소련 영웅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군들도 대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퇴역 조치가 내려졌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에도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가 된 대조국 전쟁 참전용사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를 비롯한 주변 CIS 국가에서 모두 존경을 받고 있는 편이다. 다만 당대 소련 여군들은 승전의 영광을 남성 군인들에게 빼앗긴 채 침묵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PTSD 장애를 앓았던 군인들이 많았으며 군대에서 상대 남성 군인들을 성폭행 했던 문란한 여자라는 지역 사회의 편견 때문에 고통 받은 여군들이 많았다. 특히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여류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의 대표작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У войны не женское лицо)>는 대조국 전쟁에서 활약한 여군 용사 200여 명 이상을 인터뷰한 논픽션으로 작품으로, 당시 여군들이 겪은 고통과 투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여군들의 활약은 후세의 여군들에게도 계승되고 있으며 이에 일정한 영향력과 전통으로 남아,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사관학교에서 따로 여성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하는 여군 학교까지 존재하고 있다. 물론 여군학교 생도들의 평균 연령은 14세 정도이고 러시아에서 여성은 징병 대상이 아니다. 현재 러시아 국방부의 여자 기숙 학교는 군인의 딸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20년 이상 근속한 군인 및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군인의 딸들에게 우선 입학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매년 11세 소녀 120명 이 입학하지만 희망자는 훨씬 더 많다. 경쟁률은 6대 1이지만 40대 1까지 되기도 하는데, 이는 러시아 최고 대학들의 경쟁률과 비슷하다. 물론 기숙학교를 다니려면 부모의 공적이라는 배경만 가지고 뽑히지 않는다. 건강과 쉬꼴라(러시아의 중등학교) 기간 동안의 학업 성취도 면에서도 뛰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여자 군 기숙학교 후보자들을 테스트하며, 교육자들이 러시아어, 수학 및 각종 외국어 지식들도 테스트를 거친다. 모스크바에 있는 군 기숙 사관학교 학생 840명은 완전 국비 지원을 받으며 방학 때만 집에 갈 수 있다. 교육부가 아니라 국방부가 승인한 계획에 따라 공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도들은 군사과목도 배우지만 수영, 승마, 피겨 스케이팅, 레슬링, 심지어 펜싱까지 각종 운동도 익히고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악기 연주도 가르치며 기숙학교에는 여러 대회에 참가하는 드러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구원의 탑(Спасская башня)’ 음악 축제에 참가한다. 이처럼 여군 사관학교는 군대에 관해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워낸다. 현대 러시아는 약 5만 명의 여군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대조국 전쟁 이후에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물론 여성을 전투와 비전투로 구분하는 규범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불문율은 모든 부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진다고 한다. 그리고 분쟁지역에서 파병은 이루어지지만 전투참여는 하지 않는다. 사실 대조국 전쟁 이후 인구를 늘릴 필요가 있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할 중요한 여성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9년 이후로는 러시아 병역법이 바뀌어 여군도 보병, 저격, 전차병, 포병 등 전투 병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 특공 및 특임대와 특수부대는 지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러시아 여군 장병들 자체는 남성 군대에 뒤지지 않는 애국심과 전우애가 투철하고 강인한 병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실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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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5.9 전승절에는 어떤 행사가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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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대한 공격을 자행할까?
- 러시아가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 기념식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제 행사의 하루 남았다. 이에 젤렌스키는 러시아 영토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책임질 수 없다 주장하며 공격을 가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는 "몇몇 나라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안전 조치를 요청했다"면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이는 당국의 책임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자작극을 꾸밀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승절 당일에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앞서 러시아는 80주년 전승절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전승절 '사흘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행사 참석 귀빈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협박까지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한 최고라다 의원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군사 퍼레이드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장거리 드론이나 미사일로 모스크바를 공격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파악되고 있긴 하다. 이는 지난 2023년 모스크바를 공격한 우크라이나 드론이 크레믈린 지붕 위에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러시아의 행사 주최 측은 비상이 걸렸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행사 참석을 위해 7∼10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하기로 공식 발표했고 오늘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일부 국가 정상들의 참석이 불투명해졌다. 물론 이는 우크라이나의 위협 때문이 아니다. 우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행사 참석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승절에 김정은을 대신해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의 인사가 대리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파키스탄과 국경 충돌로 인해 급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불참이 유력하다. 세르비아의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과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불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부치치 대통령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인증샷을 남기며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내일 있을 전승절 행사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올 것으로 예상되는 정상급 인사는 약 20명으로 여겨진다. CIS 국가들 정상들 외에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이브라히마 트라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또 람 베트남 총서기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젤렌스키의 협박으로 인해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남기며 우크라이나에 강력히 경고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텔레그램을 통해 전승절을 맞이해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도발이 발생하면, 그 누구도 키예프는 5월 10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마리아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 또한 국제적 테러리스트의 전형적 협박이라 주장하며 젤렌스키가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려는 외국 정상들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는 테러리스트들의 불법 행위라며 비난했다. 띠라서 혹시나 모를 젤렌스키의 도발에 푸틴 대통령은 마침내 키예프를 향해 오레슈닉 미사일을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지시했다. 잘못하면 핵무기에 준하는 오레슈닉 미사일이 키예프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행사장을 드론이나 미사일로 공격한다면, 그 피해는 무지막지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 키예프를 방문한 일부 정상급 인사들이 회담 중, 공습 경보에 놀라 방공호로 대피한 사건이 있었지만,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대규모 인파가 몰린 가운데 열리는 행사장에 우크라이나의 드론과 미사일이 떨어지게 된다면 초토화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러시아는 오레슈닉이 아닌 핵을 우크라이나로 발사할 가능성이 높다. 여태까지 우크라이나의 각종 도발에 참고 있던 러시아의 핵 버튼이 이 때 눌러질 수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핵 버튼이 눌러진다면 우크라이나 자체가 메드베제프가 말한 것처럼 다음 날인 5월 10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전승절 행사장을 공격할 수 있을까? 이런 우크라이나가 태도를 극적으로 바꿀 가능성도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일부 매체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의 고위 대표 중 한 명이 모스크바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해 크레믈린이나 백악관으로부터 공식적으러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 해당 인사는 푸틴 대통령을 앞서 4차례 만난 스티브 위트코프 트럼프 대통령 중동 특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고위직 미국인 인사가 참석한다면 미국과 광물협정을 극적으로 타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유보하고 사흘 동안의 휴전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한 워싱턴의 고위 인사가 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아직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 워싱턴에서 위트코프가 모스크바에 간다면, 우크라이나는 휴전에 동의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는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유럽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맞서 함께 싸웠던 과거의 역사적 동질감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미국 대표를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해 러시아의 외교적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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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대한 공격을 자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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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절의 역사와 러-중 간의 협력
-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많은 러시아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오전 10시에 이루어진 이유는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더불어 이번에는 작년인 2024년과 마찬가지로 "그때 승리했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Победили тогда, победим и сейчас)"라는 구호까지 붙였다. 80년전 나치 독일에 대한 승전 기분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이어가게끔 연출한 셈이다. 올해는 80주년인데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전승절에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세계인들이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계 20개국의 정상들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퍼레이드는 중국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참관한다. 시진핑이 참관으로 볼 때 현재까지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동맹관계라기 보다는 동상이몽 관계로서 단지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관계라고 평가하는게 더 옳다는 의견이 존재하는데 이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다만 푸틴 대통령은 중국과 향후 군사동맹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은 양국의 국경 문제를 확정했기 때문에 마찰을 일으킬 여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러시아는 유럽 방면의 나토가,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미국과 일본이 더 큰 주적이므로 공통의 적을 두고 손을 잡은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있기도 하며 더욱이 양국 국민들의 정서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남중국해 분쟁 이후 양국이 서방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를 적극 지원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서방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자국의 기여를 평가절하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을 비호한다고 불신하는 양국의 공통적인 인식도 내일 있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전후로 여러 역사 관련 이벤트가 벌어지는 와중에 러중 협력이 가속화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의 모스크바 방문과 의장대 파견에 화답하여 중국의 전승절 초청에 가장 먼저 참석과 의장대 파견을 결정한 것도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두 정상은 양국 수교 75주년이었던 2024년 세 차례 만나 '중국과 러시아의 신(新) 시대 전면적 전략적 협조 동반자 관계' 공고화에 합의했다. 또한 5월의 러시아 전승절 행사와 9월의 중국 전승절 행사에 서로를 초대하고 흔쾌히 수락했다. 시 주석의 방러 준비를 위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이 지난 달 1일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오늘 있었던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회담에서 양국 관계 및 미국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그리고 미국-중국과의 관세 전쟁과 이에 대한 후과를 대비해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논의했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이후 성명을 통해 시진핑 주석과 회담은 매우 유익하고 생산적이었다고 했다. 이후 있었던 양국의 공동 성명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쟁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시진핑도 알고 있는 해결 방법을 트럼프는 무턱대고 24시간 안에 종결한다는 섣부른 과오를 범한 셈이다. 특히 반러와 반중을 내세운 국가들과 연대, 특히 핵을 통한 블록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및 프랑스와 독일의 핵 공유 추진하겠다는 의미와 한국과 일본 등이 핵을 무장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견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미군의 방위비 부담 및 트럼프의 관세 정책 등, 여러 행보들에 대해 미군을 내보내고 핵 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핵 무장에 대해 미국이 찬성한다 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합심해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제재하고 견제한다면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러시아를 적으로 돌린 사태가 러-중 간의 더 강력해진 밀착으로 다가왔고, 냉랭했던 러시아와 북한의 사이를 화해 무드로 만들어 견고한 동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핵 무장을 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제재에 나서면서 대한민국은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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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절의 역사와 러-중 간의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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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쑨원, 장개석과의 밀월 관계,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의 세 번째 이야기
- 보로딘은 쑨원에게 당 규약 개정 초안을 제출하며 국민당을 레닌주의 노선으로 개조할 것을 건의했다. 마침 이 시기에 천중밍이 광저우를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토지 재분배, 최저임금제, 주 6일 근무,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시행하여 농민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전투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방어 부대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이와 같은 볼셰비키화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청나라 말기 때부터 지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홍콩을 이용해 영국, 프랑스, 독일과의 직접적인 교역으로 인해 많은 부와 토지를 독점했으며 이들이 혁명의 당위성으로 세운 것은 신해년의 혁명 때부터 남방 지주들의 이익을 보전해주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이들의 합류로 인해 벌어진 혁명이었다. 이들이 격렬히 반발한 것은 이와 같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토지를 재분배하라는 것에서 이미 심한 반발이 야기되고 있었다. 중국 남방 군벌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쑨원과 보로딘과 더불어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했던 랴오중카이(廖恩煦)조차도 갑작스러운 볼셰비키화는 주요 지지자들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보로딘이 국민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는 1차 시도는 실패했지만 당시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과 중국 남방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과 랴오중카이를 이해하고 넘어갔다. 천중밍의 군대가 철수한 이후 쑨원은 보로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기 때문에 보로딘이 적화를 미루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천중밍의 군대가 물러간 후, 1924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보로딘의 지휘 아래에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가 광저우에서 열리게 된다. 보로딘은 쑨원의 부탁을 받고 직접 중국 국민당 당약을 개정하여 당 조직 개편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련 볼셰비키 당 조직을 모방하였기에 거의 적화되다시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국민당은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을 창시한 쑨원을 총리로 하며, 쑨원을 전국 대표 대회와 중앙 집행 위원회의 당 연직 주석으로서 양 기구의 결의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는 천두슈(陳乾生)를 비롯한 공산당에게 총리 자리 및 국민당의 주도권이 넘어길 것을 우려한 국민당 우파를 고려해서 나타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보로딘도 천두슈(陳乾生)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했다.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인 보로딘에 비해 천두슈(陳乾生)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스탈린이 그다지 트로츠키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때, 보로딘에게 있어 천두슈(陳乾生)가 총통 직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같은 공산주의자여도 매우 껄끄러웠던 것은 분명하다.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에서 쑨원은 종신직을 보장받게 되었고, 국민당은 레닌이 주창한 민주주의적 중앙 집권제를 갖춘 혁명 정당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트로츠키주의와도 대치되는 부분이었기에 천두슈는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는 1923년 3차 광동 정부가 수립되어 선전주임을 맡았지만 보로딘과의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일찍부터 갈라 설 준비하게 된다. 당시 청년이었던 모택동(毛澤東)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에서 41석의 위원 중 10석을 공산당이 차지하게 된다. 또한 전국 대표 회의 운영의 경험이 없던 국민당에 대표 회의 체제를 이식하고 전국 대표 회의 주석단을 설치함으로 제법 건실한 조직을 갖추게 된다. 재건 대회의 결과로 국민당은 소련의 정부 기관처럼 이중 권력 구조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보로딘은 자유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옛날의 국민당은 죽었다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에는 수많은 비좌익 계열 당원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쑨원이 공산당에게 지나치게 양보를 하는 것을 크게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이루질 수 없는 무리한 좌우 합작은 후일 국공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고,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외교부장 후한민(胡漢民), 군정부장 쉬충즈(許崇智)가 숙청된 이후 린썬(林森), 쩌우루(居正) 등이 화북으로 추방되자 격노하여 1925년 11월 서산회의(西山會議)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 중앙을 수립함으로 인해 서산회의파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추방된 자리에는 담평산(譚平山)과 임조(林祖)를 비롯한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수뇌부의 우파는 가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좌파 및 공산당이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황푸군관학교(黄埔軍校舊址)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에 기여했다.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은 오늘날 대만, 중화민국 국군의 시초로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대만의 군대를 볼셰비키의 미하일 보로딘의 건의에 의해 정예군을 탄생된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이에 국민당 우파의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한 공산당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중심으로 중국 볼셰비키로 하여금 독자적인 무력을 갖추게 해달라고 보로딘에게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보로딘은 국공합작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했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보로딘과 볼셰비키, 공산 세력을 지지해 주었던 쑨원이 1925년에 사망한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좌익의 거물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우파에 의해 암살되면서 겨우 이루었던 국공합작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汪精衛), 장개석을 지원하여 적화에 우환거리였던 국민당 우파들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들의 용의자들로 몰아 숙청해버렸다. 이들은 국민당을 장악하여 3두 정치를 이끌게 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매우 좋아 소련 당국에도 장개석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하며 보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개석의 정계 포지션은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이었지만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는 오히려 장개석이 쑨원의 후계자로써위치를 부각시켜었다. 그랬기에 냉철하기로 소문난 보로딘조차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깨질 염려가 없다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다. 장개석은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와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중밍을 축출하자 국민당에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자리잡으며 국민당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의 고문들는 장개석을 두고 '너무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혹평했다. 그러나 장개석 외에 왕징웨이를 매우 우유부단하다 평가했기에 소련은 장개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개석을 두고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장개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은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 집행 위원회에 당선되었다. 이는 소련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련 덕택에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개석은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반대하였고 그동안 장개석의 행보에 강한 의문을 품어온 공산당 당원들 또한 장개석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개석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개석의 북벌에 가장 심한 반대를 한 사람이 소련의 수석 군사 고문인 발레리안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Куйбышев, 1888~1935)였다. 쿠이비셰프는 노골적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개석을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벌 문제와 더불어 쿠이비셰프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1차 국공합작의 분열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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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쑨원, 장개석과의 밀월 관계,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의 세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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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불교 이야기
- 미얀마 인들은 절에서 기도도 하면서 기원도 하고 빗자루질로 인해 스스로의 성찰과 봉사도 아까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가족들끼리 음식을 가져와 식사도 하면서 오봇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불교는 그냥 삶이자 생활 자체다. 미얀마 문화는 곧 불교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미얀마 인들의 생활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가정에는 거의가 집안에 빠야씬(Pha yar sin)이라는 불단을 갖추고 있다. 대다수 미얀마 인들의 가정에서 엄수하는 불교 의식 가운데 하나가 ‘신쀼’ (Shinpyu) 의식이다. ‘신쀼’란 7~13세 사이의 남자 아이들을 몇 주 혹은 몇 개월 간 사원으로 보내 승려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제도다. 신쀼 행사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미얀마의 남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와 함께 미래의 지도층으로서 갖추어야 할 극기와 인내, 배려심 등을 체득하게 된다. 미얀마인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식의 하나가 보시(앗흐루, Ah Hlu)이다. 미얀마는 세계에서 기부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이며, 국민의 90% 이상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기부문화는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님이나 사찰에 대한 공양은 곧 사회적인 보시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 미얀마 인들의 보시행위를 보면 나눔은 물질의 풍요가 아닌, 정신의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얀마 인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가정행사를 절에서 치르거나, 스님이 와서 행사를 주재한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결혼식으로, 요즘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은 서양식 결혼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국민들의 교육도 일정 부분 사원이나 수도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히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다. 오랜 군사 독재 하에서 교육이 황폐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문자 해독률이 90%를 넘는 것은 사찰이 운용하는 학교들의 공적이다. 다만 불교의 폐단도 있다. 미얀마 불교 사찰들의 부유함은 어마어마해서 왠만한 대기업들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래서 승려들의 착복과 더불어 부패는 한국의 일부 대형 기독교 목사들보다 심하다 한다. 이렇게 어려운 미얀마 사람들 피빨고 있는 승려들이 성직자라 할 수 있을까? 승려가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는건 일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사회지도층에 있기 때문에 국가반역죄와 같은 중죄가 아닌 이상 처벌을 할 수 없다. 이곳에서의 승려는 그냥 사회지도층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부처인 존재다. 그래서 승려는 미얀마 국법인 세속법에 저촉받지 않는다 했다. 그러한 배경이 있어 미얀마에서 스님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정식 스님이 되려면 꽤 오랫동안 수도원에서 수련해야 하는데 수도승은 정식 승려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으로 인정도 안한다. 그 대신 수도자가 되려는 경쟁율도 엄청 치열하다 한다. 미얀마는 승려가 세속법에 저촉받지 않고 당당히 재물을 취득할 수 있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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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불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