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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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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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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8
  • 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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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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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7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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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06
  • 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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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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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4월 30일, 베트남 전쟁 종식 및 베트남 남북통일 된지 50주년을 맞이하여
    남베트남의 레 민 다오(Lê Minh Đảo) 준장이 지휘하는 5,000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인 쑤언록에서 1개 군단, 45,000명 규모의 북베트남 군의 공세를 4월 9일부터 21일까지 무려 15일 동안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사실상 베트남 전쟁의 막판에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다. 당시 북베트남 군을 지휘하던 반 띠엔 중(Văn Tiến Dũng, 1917~2002) 장군은 훗날 회고록에 자신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전투였다며 서술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에서는 이는 일시적인 방편애 불과하고 결국 사이공이 함락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북베트남 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쑤언록의 주변 지역부터 제압 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 당한 레 민 다오의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4월 21일에 쑤언록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다해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그저 남베트남 군이 마지막으로 불태운 전투 밖에 되지 못했다. 이후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전투를 벌이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레 민 다오 준장은 생포되어 포로가 된다. 쑤언록 함락이 확정된 4월 21일 당일에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 1923~ 2001) 대통령은 쑤언록 함락 소식을 듣고 남베트남 지원을 포기한 미국을 맹비난하며 하야를 발표한다. 이는 앞으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킨 후, 25일 남베트남을 탈출해 대만으로 망명했다. 국가의 수장이 국민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이다. 공석이 된 총통직은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1903~1982) 남베트남 부총통이 이어받았다. 쑤언록 함락 소식과 반 티에우 대통령의 하야는 일반 시민들도 동요하게 만들었고 결국 공산화가 눈 앞에 다가왔다 여긴 남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등 제1 세계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마침내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입안했다. 이 작전은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이미 세웠던 철수 작전의 일환이다.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옵션은 다음과 같다. ① 떤선녓 공군 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 민항기로 공중 수송하는 옵션. ② 군용기로 공중 수송 옵션 ③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 수송 옵션 ④ 최종 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 수송 옵션 흔히 프리퀀트 윈드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 작전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최종 탈출 작전인 옵션 4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항으로 구성되었다. 4월 23일, 사이공 떤선녓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군용기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 번에 수용 가능한 베트남인을 총 2,5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그 숫자도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렇개 되자 미군은 사이공에서 발이 묶인 탈출객은 물론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수용된 5,000명이 넘는 탈출객까지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괌이나 웨이크 섬, 요코타 공군기지로 실어 나르는 수 밖에 없었다. 전날인 4월 22일까지 매일 20대의 C-141과 20대의 C-130이 사이공 떤선녓을 왕래하며 탈출객들을 필리핀까지 실어 날랐다. 우선 철수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 편 및 선박 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남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LST 2척을 파견했다. 이들 LST들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으로 출항했다.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을 크게 치르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4월 25일에는 미국 연방항공청이 떤선녓 공군기지의 민항기 운항을 금지했다. 몇몇 민항기 조종사들이 이를 거부하고 비행장에 착륙해 탈출객들을 실어 나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옵션 ①항은 25일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같은 날 미국 대사관을 경비 중이던 미국 해병대 대사관 경비단 소속 해병 18명을 지원하기 위해 미 해병 40명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추가로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1912~1990) 주 남베트남 미국 대사를 호위할 6명의 해병 역시 도착했다.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 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 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④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비 지출이 된다. 4월 27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 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날 28일에는 사이공 동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비엔호아가 함락되었다. 같은 날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총통 역시 취임한 지 1주일 만에 사임하면서 즈엉 반 민(Dương Văn Minh, 1916~2001)이 후임 총통이 되었다. 마침내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외곽에 진입했다. 같은 날 저녁 18시 6분 즈엉 반 민 총통이 총통 선서를 할 때 북베트남으로부터 귀순한 조종사인 응우옌 탄 쭝(Nguyễn Thành Trung)이 지휘하는 북베트남 공군이 남베트남 군으로부터 노획한 A-37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공군 기지를 공습하여 비행기 몇 대를 파괴했다. 활주로를 이륙한 C-130을 향한 북베트남 군의 대공포 사격이 발생했으며 북베트남 군이 발사한 로켓포와 포탄이 산발적으로 공군기지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미국은 C-130의 운항을 일시 중단했다가 20시에 재개했다. 21시에는 미 국방무관 호머 D. 스미스(Homer D. Smith Jr. , 1922~2011) 육군 소장은 지휘통제소에 내일 총 10,000명을 탈출시킬 60대의 C-130이 도착할 것이라 통보하였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 단계인 옵션 ④가 발동했다. 그리하여 떤선녓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 (Landing Zone) 등 작전 입안 당시 사전에 선정되어진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들의 탈출이 개시되었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인원들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게 된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 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 편으로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를 내려 챙기고 탈출 헬기에 오르며 주 베트남 미군의 베트남 전쟁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결짓게 된다. 남베트남의 붕괴 당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포함한 미국의 철수 작전, 그리고 자발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남베트남 국민은 총 138,869명이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장면이 2021년 8월 31일 아프가니스탄의 프리덤스 센티널 작전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정오 경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대통령 궁에 진입해 금성홍기를 게양하고 즈엉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렇게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되면서 완전히 적화되었다. 그리고 올해가 바로 베트남 적화통일 50주년이 되었으며 베트남 현지에서는 엄청난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을 보자. 동북아시아의 위기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주한미군은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전략동반자협정"에 의해 러시아군의 북한군으로 참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북한을 침공했을 시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했을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막대한 무기를 제공하여 북한의 화력을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다 중공 또한 북한을 도울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러시아의 지원 만으로도 북한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2024년 5월을 기준으로 현재 주한미군의 규모는 28,500명이라 한다. 북한군의 위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계속 주한미군을 축소했던 결과가 이러한데 본국으로부터 계속 충원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금 6.25 때와 같은 시기도 아니기에 영웅적인 미군의 희생을 바랄 시대 또한 아니다. 미군 또한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다. 전투에 대한 마음가짐, 무기, 전략 등등 6.25 이후, 75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6.25 때와 같은 미군의 영웅적이고, 순수한 희생을 마냥 바라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당히 싸우다가 몰리게 되면 부산항 등에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재현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한미동맹 어쩌고 하지만 남베트남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2021년에 종식된 아프가니스탄의 민주정권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이들이 부패로 미국의 지원을 까먹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동맹을 버린 것은 맞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는 전쟁이 발생하면 안 되고 외교전으로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 베트남의 적화 통일 50주년 행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날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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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30
  • 복잡한 그리스-마케도니아와의 민족주의, 영토분쟁 이야기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국명문제와 영토문제로 분쟁을 겪다가 2019년에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는 마케도니아 고대사의 종주권 문제, 역사적 문제까지 함께 동반되고 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이래 그리스와 20년 넘게 이를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그리고 2019년 국명을 마케도니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변경하여 국명 갈등의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현재에도 북마케도니아에서 발행하는 여러 서적들과 일반 북마케도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의 명칭을 제우스, 헤라, 아테나, 아르테미스 등의 그리스식 명칭이 아닌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디아나 등 로마식 명칭으로 표기하거나 부르고 있다. 그 정도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에 국호 문제로 충돌하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보수우파인 마케도니아 국민통합민주당에서 보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다시 선거의 쟁점으로 띄웠다. 사실 고대 시대부터 리스와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족들이 북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게다가 현 북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인들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트라키아인들이 지배했었다. 더불어 도리아인을 융합한 마케도니아가 세력이 점차 강력해짐에 따라 트라키아 주민은 이에 굴복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군대 내에서 대다수 기마병을 담당하면서 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80년 이전까지 그리스나 불가리아 학계에서는 트라키아의 계보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트라키아 인이 완전히 정착한 시기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었다. 전체적으로 고고학에 치중되었던 트라키아 연구는 1980년 이후부터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을 통해 본격적인 서지학적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언어적인 부분을 유추한 결과 인도유럽어 종류를 사용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사카 종족과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것까지 근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언어적 연구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의 주민이라는 것까지 나타났고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을 통해 트라키아 인들이 스키타이와 동일 선상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 언급된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 후일 로마의 타키투스, 요르다네스 등의 기록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사르마트, 훈족에 관한 그들의 유목 생활 기록 등을 볼 때 트라키아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초원 유목 세력과 친연 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 시기 때도 그리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스의 신화 중 캔타우루스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전설은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고 발칸 지역의 켈트족 중 기마 부족들은 스키타이와 매우 유사하였기에 그들을 캔타우루스의 후예로 여겼을 정도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북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위인으로 받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이냐, 현재 슬라브인과 혈통이 섞인 북마케도니아 측 위인이냐의 역사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후 불가르족이 현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슬라브인들을 통치했고 그 슬라브인들이 현 북마케도니아에 밀려 들어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슬라브인의 국가가 된다. 게다가 그리스와 혼혈한 비잔틴 제국의 시민들이 북마케도니아에 들어와 슬라브인과 혼혈해 버리니 이들은 불가리아 제국, 비잔틴 제국에 교대로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고 19세기에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서 독립하자 북마케도니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늦게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와 관계 갖게 된다. 1944년 8월 2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비밀리에 민주연방 마케도니아(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лна Македонија)를 선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1990년 정치 체제가 의원내각제로 이행된 뒤, 1991년 나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으로 바뀌면서 나라가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타 다른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낙후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와 같이 온전한 남슬라브도 아니었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이탈리아계 슬라브인도 아닌 사실상 그리스계 슬라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이 전쟁을 겪은 반면 마케도니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으며 집단서방 또한 마케도니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마케도니아는 매우 안전했고 내전과 더불어 나토의 공습을 받아 피폐해진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에 비해 마케도니아는 내전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립 이후 수차례 마케도니아 병합을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한 것은 터키와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누구보다도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지만 불가리아에 병합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대립하고 있던 터키 또한 이 부분에서 그리스와 입장이 같았다. 그 이유는 불가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가 잘 나가면 전통의 원수지간인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이 위협 받을 위기에 놓일 수 있고 그리스 또한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트라키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동북부, 동트라키아 지역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삼각으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 분쟁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특히 마케도니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주도한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Македонска револуционерна организација)는 테살로니키와 동트라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해당 영토에 대한 귀속을 요구하여 재판을 걸었던 이력도 있다. 더불어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남슬라브 계열의 마케도니아인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서부의 알바니아계들을 홀대하고 배척했다. 그러면서 민족 및 지역 간 갈등이 증폭되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내전은 그리스가 비록 종교도 다르고 이민족이나 다름없지만 아알바니아계 무장세력들을 부추기고 지원해 일으킨 내전이라 불가리아의 총리였던 시메온 2세가 마케도니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나토군이 들어오면서 알바니아계의 반란은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현재도 상당수의 알바니아인들 북마케도니아 서쪽 변경에 거주하고 코소보 남쪽까지 걸쳐 거주하는 측으로 합의를 보면서 오늘날까지 함께 살고 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할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오랜 시간 동안 그리스 북동부의 지방명이자 과거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주장하며 정식 국가로서의 승인을 거부했다. 실제로 그리스 북동부의 해안 지방은 마케도니아 주(州)로서 오랫동안 그리스가 차지해왔다. 알렉산더 역시 그리스계라 믿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라는 단어의 국제 지명도마저 그리스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독립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공화국 측에서 국명 사용을 포기하지 않자 내륙국인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사용하고 있던 테살로니카 항을 봉쇄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여기에 나토와 EU가 개입하니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항구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결국 2018년 6월 12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조란 자에프 마케도니아 공화국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입장에서는 국민투표도 아닌 여당 총리가 단독으로 결정하여 벌인 일이었기에 야당은 여기에 집중 반발했다. 결국 프레스파 협정(Prespa Agreement)에 서명하면서 이 문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북마케도니아 총선에서도 이 문제는 재언급되었고 이번 대선에서도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제1 야당인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우선 대통령부터 바꾸고 5월 8일에 있을 총선에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 혁신당은 세르비아와도 관계를 개선하고 그리스를 비판하여 북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무효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테살로니키가 속해 있는 동트라키아에 대한 영유권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혁신당이 대세를 잡게 된다면 그리스-터키-불가리아를 둘러싼 4개국 간의 영토 분쟁, 그리스와는 역사 논쟁과 국호 문제가 다시 불거져 평지풍파를 일으킨 대단히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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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30
  •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이 로마에 끼친 영향
    당시 갈리아는 갈리아 내부의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이 가장 강력하였는데 세콰니 족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에 호응한 게르만 족의 일파인 수에비 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와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세콰니 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 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세콰니 족의 영토에 그대로 정착했으며 이곳 수확물의 3분의 1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게르만 족들이 새로 갈리아에 이주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세콰니 족조차 게르만 족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끊임없이 게르만 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헬베티 족이 게르만 족에 저항하면서 로마 국경까지 침투하는 등 로마의 입장에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토는 알프스 산맥과 론 강, 그리고 로마 속주와 레누스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 헬베티 족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Orgetorix)는 갈리아 영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러한 제안은 대다수 헬베티족들의 호응을 받게 되었다. 오르게토릭스는 헬베티 족의 지휘를 위임받고 외교를 통해 주변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당시 갈리아를 양분해서 서로 대립했던 하이두이 족과 세콰니 족 양쪽 모두에게 접근한 오르게토릭스는 하이두이 족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둠노릭스(Dumnorix)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세콰니 족의 유명한 실력자의 아들인 카스티쿠스(Casticus)에게 접근하여 그의 협조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들 갈리아 거대 부족들의 야합은 셋 모두 매우 유명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기득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1차 삼두정치를 연상시키는 야합이었다. 그러나 오르게토릭스는 당시 헬베티 족의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으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둠노릭스는 자신의 형이 가지고 있는 부족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카스티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족장에서 퇴진한 뒤 부족장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서로 야합함으로써 각각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뒤 갈리아 전역을 서로 삼분하여 통치하자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야합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고 헬베티 족의 오르게토릭스가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된다. 오르게토릭스는 그의 재력을 이용하여 재판의 배심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죄를 면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헬베티 족의 족장이 무력을 사용해 오르게토릭스를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자 오르게토릭스는 자결했다. 오르게토릭스가 자결했음에도 헬베티 족들은 그가 처음 제안한 갈리아 침략에 대해서는 호평하였으므로 갈리아로의 이주 계획을 계속 추진한다. 이들이 이주할 준비를 마쳤을 때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만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 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여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는 로마 국경을 통과해야 가능했기 때문에 로마의 입장에서 상당한 근심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로마 삼두정치의 집정관인 카이사르가 이들을 정벌하여 갈리아 전체를 속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다른 두 정치인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전장에서 전공이 적었고 크라수스에 비해서 재력이 부족하여 이들에 비해 이렇다할 내세울 것이 없어 권력의 정점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그의 숙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광으로 집정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었기에 이는 카이사르의 정치 생명에 큰 제약이 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후광이 권력의 정점에 올려놓았지만 정점이 되었을 때 마리우스의 후광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갈리아 원정은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마리우스의 후광을 벗어나고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에게는 매우 절실한 원정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갈리아 원정에 성공하여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켰고 그러한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많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결국 갈리아 원정의 성공과 속주화는 로마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결국 카이사르의 높아진 인지도에 부담을 느낀 크라수스는 스스로 파르티아 원정을 자처했지만 실패하고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머물면서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의 모든 정치권 세력들을 장악했다.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와 높은 인지도, 강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되었고 이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으로 나타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그의 정치적 1인자가 되는 기본 바탕이 되었고 그 원정으로 인해 임페라토르(Imperator, 황제)의 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의 성공은 로마 역사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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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현재까지 터키 이스탄불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 상태일까?
    이스탄불은 2022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이어진 달러화 강세와 리라화 약세로 인해 터키 내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리라화 약세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2023년 상반기까지 고수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고물가 저금리의 비정통성 경제 정책의 영향이 크다. 이로 인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저하되어 외국인 투자가 상당수 감소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달러를 매각하면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외환보유고가 급감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임 성공 이후, 전 부총리이자 정통적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메흐메트 심셰크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전 골드만삭스의 이사였던 하피제 가예 에르칸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하면서 고물가에 대응하고 정통적 경제 정책으로 회귀할 것으로 기대를 모있다. 고금리는 죄악이라 주장하며 높은 물가에도 불구하고 약 2년 반 동안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온 에르도안은 재임에 성공한 이후 6월부터 금리 인상을 감행하여 2023년 5월까지 8.5%였던 금리를 5회에 걸쳐 35%까지 인상했다. EIU를 비롯한 글로벌 경제기관들은 터키의 기준 금리가 최소 45~50%대에는 진입해야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천정부치로 올랐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파격적인 금리 인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약 2.5~5%p 가량 인상하여 선거 시즌인 3월까지 최대 37.5~40%대를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오늘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42.5%에서 45.0%로 2.5%포인트 인상했다. 국내 수요와 서비스 가격 경직성, 지정학적 위험 등으로 물가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통화긴축의 효과 지연을 고려하면 현재 필요한 긴축 수준에 도달했다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평균 230~250리라 (한화 약 10,130원~11,000원)을 호가하고 있고 이것 저것 산다해도 200리라 (한화 약 8,800원)을 가뿐히 넘기고 있다. 외식 한 번 하면 250리라가 문제가 아니라 터키 차이나 커피도 마셔야 하니 적어도 350~380리라 (한화 약 15,400원~16,700원)은 가볍게 넘겨야 한다. 이 살인적인 물가에 상당수의 터키인들은 길거리 캐밥 하나 (100~150리라, 4,450원~6,600원)을 사고 그마저 감당이 안 되면 40리라 (한화 약 1,760원)짜리 길거리 군옥수수 하나를 사서 끼니를 때운다. 터키 차이도 동네마다 다르긴 한데 탁심이나 이스틱클랄 지역은 70리라 (한화 약 3,080원) 호가하고 술탄아흐멧이나 베이지드 일대에도 싸면 50리라 (한화 2,200원) 정도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올랐다. 아무래도 차값이 미친 모양이다. 아메리카노 커피는 70리라~100리라 (한화 약 3,080원~4,450원)로 한국과 근저한 가격까지 올라왔고 배낭여행자들은 아메리카노와 터키 차이를 후식으로 포기하고 30리라 (한화 약 1,320원)짜리 생수를 사서를 마신다. 요즘 이스탄불은 일반 서민 뿐 아니라 여행객들도 고물가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많은 수혜를 입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터키인데 서민 경제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듯 하다. 이스탄불 서민들이 에르도안의 이상한 경제정책으로 인한 불만이 높은 상황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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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어떻게 같은 무슬림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나?
    알라위파(Alawites)는 시리아에서 주류 이슬람 분파는 아니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내부 권력을 장악한 뒤, 시리아에서만큼은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 12이맘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의 사후 그의 측근이던 이븐 누사이르(ابن نصير)가 후계자를 자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12이맘은 시아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메시아적 사상"을 갖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이러한 사상 자체가 전무한다. 애초부터 선거로 칼리프를 뽑는 것에 찬성했으니 혈통적인 부분은 그다지 중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에게 있어 "메시아적 사상"은 필연이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의 영적 지위와 기능을 알리(Ali)와 그의 혈통에서 비롯된 11명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신의 화신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임무도 표면적으로는 기적으로 보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최후의 11번째 이맘은 그 스스로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12번째 이맘은 873년 무함마드(Muhammad)라는 인물로 그가 4세 때 마흐디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마흐디의 집 지하 저장소로 사라졌다고 한다. 시아파들은 제12대 이맘은 살아있고 언젠가 마흐디(Mahdi)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마흐디(Mahdi)는 시아파에서 세상을 구할 인물인 구세주이며 메시아이자 세상을 심판할 심판자로써의 임무를 갖고 있다 믿는다. 그래서 시아파들은 마흐디가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제12대 이맘 즉 “숨은 이맘(Hidden Imam)”이 예배를 듣고 이 세상의 일을 중재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란의 주류가 되어 있는 시아파는 12이맘파가 주류가 되어 이끌고 있다. 반대로 알라위파(Alawites)는 이븐 누사이르를 10대 이맘의 지명을 받아 그를 칼리프로 내세웠기에 12이맘파의 배척을 받았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12이맘이 아니라 10이맘파라 하여 10명의 혈통적 이맘만을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12이맘파에서 빠져 나온 이븐 누사이르는 사실상 알라위파의 창시자라 볼 수 있으며 알라위파를 경멸하는 여타 무슬림들에게서 '누사이르 파'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알라위파의 창시자인 이븐 누사이르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시아파에서 분파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종파 분리로 인해, 시리아 내전 당시 이란 측의 미적지근한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결과가 되기도 한다. 알라위파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 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1,000년을 넘게 동부 지중해 지역의 소수종파였지만 다른 종파들이 흡수되고 사라짐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던 종파였다. 알라위는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시아파 극단주의 및 암살단파 등의 영향을 받은 매우 복잡 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가 아닌 이븐 누사이르를 숭배한다는 종교적 오해 아닌 오해로 인해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그로 인해 빈곤에 시달려 수백년 넘게 고생했다. 이들의 교리 또한 상당수가 사라지고 변형되어 왔는데 이미 13세기에 들어 주류 이슬람에서는 알라위가 불신자와 다름없는 이단 취급을 받았던 신세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했으나 이후에는 이들이 수니파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자 이슬람 세계를 파멸시킬 전략으로 알라위를 포섭하여 분열시킬 요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맞아들여 자신들을 배척하고 박해한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수니파의 유명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ابن تيمية)는 알라위파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감행했다. 타이미아는 알라위파를 두고 카르마트파나 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라 혹평했다.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알라위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고 했다. 또한 그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으며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고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이미야의 비난은 매우 호전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알라 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다. 타이미야가 살아 있던 14세기 당시 알라위의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기도 하면서 현재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에서 알라위파를 토벌하는 작전에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 세차례 직접 참전했다. 그 결과로 인해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수니파와 맘루크 정권의 박해를 피해 수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시아 12이맘파로 다시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서술된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에게 돌아선 알라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박해했다. 특히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궤멸적 참패를 당하자 보호막이 없어진 알라위파는 박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정체를 숨기고 은거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대가 되면서 알라위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그동안 박해로 인해 많은 수가 줄어 소수에 불과한 데다 이단 취급 받는 것은 여전했고 세력도 미미하다시피한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나 비슷하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던 드루이즈는 적어도 레바논 아미르 국에서 대대로 제후를 배출하여 세를 넓히는 바람에 지배 계층 자리에 있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 이에 비해 알라위는 매우 처지가 열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 데다 대부분 경제력 없는 농노들이었으며 관료로 배출되는 이가 없다보니 대부분 수니파 지주들에게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이에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졌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오스만 제국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에서 차별을 받았고 임금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나아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선봉에 세워 총알받이의 목적으로 빈약한 무장에 무조건 진격을 시도하게 하여 최전방으로 내몰았다. 교육 수준도 매우 처참하여 시리아 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부친이자 전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알라위파로 자신의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지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오스만의 영토였던 시리아에 프랑스가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다르게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있던 1941년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보호 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로 인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를 토대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 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위파는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출세를 위해 대규모로 입대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있다며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알라위파들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고 자신들을 탄압하던 수니파를 매우 증오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는 급격히 서구화 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군사적인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고 군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 통치 이후에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로 성장했기에 이전의 지배자였던 수니파들은 더 이상 알라위파를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상 프랑스가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를 키워준 셈이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당시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은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와 대화를 나눈 바 있었는데 해당 지도자는 알라위파가 과거 3-400년 동안 핍박을 받다가 이렇게 대우를 받다 보니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놓아두면 분명 시리아의 주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된 정당 의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로만 인구 조사 형식으로 나눈다 포고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1970년에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쟁취한 이래 알라위파는 마침내 시리아의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 볼 때 1,000년이 넘게 탄압을 받아 소수종파로 전락하면서 생존을 걱정했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드디어 기득권 주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이어져 2024년까지 늦게서야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라위파는 주위의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된다. 알라위파는 이들에게 테러와 각종 반란 시도에 직면하면서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발생하고 있던 각종 지역 감정들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목적을 내세워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알라위파 요인들과 친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Hama massacre)과 같은 강경정책으로 대처했으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면서 마침내 정식 시아파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한편으로 수니파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수니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정부 공무원 할당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수니파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며, 수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 1,000년 이상 대립해온 수니파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어 기독교와 드루이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 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동맹을 맺고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정책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그러나 알라위에 대항하고자 하는 근본주의 세력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페즈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존재하던 2015년 4월,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 명 중 ⅓이 시리아 내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하는 ISIS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및 알 카에다 세력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 하는 자유 시리아 군은 무능력한 상태라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항상 불안을 달고 살아야 했다. 시리아 내전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함께 반군과 맞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보면 알라위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안하고 잔인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사드 부자의 집권기는 1,000년이 넘는 알라위파의 역사에서 늦게나마 맞이한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에서 축출된 현재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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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28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마지막 마지노선 이스탄불 협상의 실패
    작년 2024년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이 열렸다. 여기에서 '평화 협정(Peace treaty)'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도 이스탄불에서의 협상이 끝난 뒤 별도로 가진 양국 대표의 기자 회견을 통해 전해졌다. 양측의 회견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하루 만에 끝났다. 본래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최종적으로 합의까지 이르기에는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스탄불 회담을 중재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가지 협상 쟁점 중 4가지 부분에 있어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합의가 될 수 있는 4가지 조건은 첫 번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철회하는 것,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세 번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안보 보장, 네 번째,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이다. 물론 타결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돈바스의 독립과 더불어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핵심적인 목표로 내세웠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비무장화와 나치의 세력인 아조프 대대 및 프라비섹토르 세력의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돈바스를 보호하는 조건에 있어 협상 내용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나치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치의 깃발을 앞세워 선동하는 세력들을 거의 제압했다 여겼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오늘 남부 항구도시이자 최대 격전지인 마리우폴의 도심 돈바스 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고 아조프 대대의 근거지였던 마리우폴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CNN 방송도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보도했으며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역 대부분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며 마리우폴 함락을 사실상 인정했다. 터키 언론인 휘리옛과 TRT에 의하면 이스탄불 협상이 이전 4차 만남에서 러시아 협상단이 우크라이나 협상단에게 문서로 정리해 넘긴 제안서에 대한 답변 문서를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협상단은 협상에서 구두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문서로 전달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협상단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레믈린 보좌관은 협상 종료 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지위와 비핵국가 지위의 추구를 확인하는 제안을 문서로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에 의하면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거부하는 것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외국 군사기지와 더불어 외국의 군대 배치 금지 조항이 포함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해주는 EU 국가 및 나토 국가들의 동의 없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제안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국제법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영구적 중립국을 선포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나 비교적 최근의 민스크 협정보다 더 강화된 다국적으로 조약을 비준하여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다비드 아라카미아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대표가 말하기를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 동안 보증했던 국가들이 서명하고 비준하는 국제 조약의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터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참여 가능한 국가들을 안전 보장의 보증 국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들로부터는 이미 참여를 허락을 받았다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할 경우, 보증 국가들은 3일 간의 협의 후 우크라이나에 무기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영공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하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TRT는 협상 중 휴식 시간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논의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관한 국제 조약이라 역설하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조약 및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 받는 것이 서로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차후에 다시 있을 6번째 만남의 쟁점은 모든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휴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푸틴과 젤렌스키가 정상 회담을 가지며 승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으로 방침을 최근에 바꾸었고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와 최고 의회 라다에서의 승인 및 안보 보증 국가 의회의 비준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군이 개전 전날의 위치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안보 협정의 국제적 조약 서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대한 근접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협상이 싸인되지 않으면 군사작전 종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상호 간의 신뢰를 높이고 향후에 협상할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키예프와 체르니코프에 대해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 이 말은 북쪽의 전선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열세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따라서 북쪽 전선은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오늘 러시아 영내에 있는 벨고로드 군수창고 폭발하여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리아 노보스티(РИА Новости) 국영 통신사는 러시아 긴급 구조대 대표 말을 인용해 "벨고로드 인근에서 발생한 군수창고 폭발은 인재"라고 보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열세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의 협상단은 군사활동의 축소가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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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8
  • 매우 심각한 우크라이나 군 손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의 전투에서 죽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하루 평균 전체 부대원의 5%에 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일 간 전투를 치르면, 부대원 절반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전투가 치열했던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에서는 전투 중, 부대의 2~3배의 병력을 잃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은 보통 10~15일간 최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교체된다. 한 부대의 부대원 중 15~20%가 최전선에, 나머지는 2선과 3선 방어선에 주둔하는데, 15일 정도 지나면 순환 배치되는게 현재 상황이다. 이는 러시아군의 맹공으로 인해 최전방 부대원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도의 피곤함과 더불어 옆 동료를 잃은 슬픔과 공포감을 호소한다고 하였다. 이어 새로운 부대로 교대하기 어려운 지역도 있다. 그런 곳 중 하나가 쿠르스크 전선이다. 쿠르스크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포위로 인해 부상병들의 후방 이송마저 어렵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무기 중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는 러시아군의 화염방사기 시스템인 '토스'(TOS, 러시아어로는 TOC)와 항공기에서 투하되는 강력한 위력의 'FAB' 폭탄(대표적인 모델이 ФАБ-250М-46)이다. 이 무기들은 참호 속에 아무리 깊숙히 몸을 숨기고 있어도 피해가기 어렵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의 한 장교는 토스가 공격을 감행하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토스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스의 위력은 부상자도 없이 모두 살상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전폭기가 우크라이나군의 방공망과 휴대용 스팅어 미사일을 우려해 자주 출몰하지는 않고 있지만, FAB 폭탄이 한 번 떨어지면 아무리 단단한 요새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파괴된다고 밝혔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이 전쟁 초기에 하급 지휘관도 전장에서 독자적인 상황 판단 및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수평적 명령 체제를 발동시켜 러시아군을 한동안 제압이 가능했다면서 지난 1년 동안 전쟁 경험이 풍부한 하급 지휘관들이 많이 전사하면서 전투 현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전선에 배치된 대부분 우크라이나군의 전장,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러시아군의 포격을 피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바로 옆 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우크라이나군이 발사한 드론은 바로 이웃의 아군에 의해 격추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개조해 사용하는 민간 드론에는 식별 장치가 부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 저하와 혼란은 극심한 포탄 부족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투 경험이 적은 사병과 장교들의 역량에 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계속되면 병력과 무기 탄약이 부족한 측이 더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몰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 장교들의 통솔과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다면 수없이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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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건 찬성에 대한 '비판'
    작년 2024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G7, 나토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을 찬성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대신, 우크라이나에게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G7에 12개의 신흥국과 주요경제국 및 EU를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금융, 외환 등에 관련된 국제적 위기 대체 시스템의 부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1999년 9월 IMF 연차총회 당시 개최된 G8 재무장관회의에서 G8 국가와 주요 신흥시장국이 참여하는 G20 창설에 합의되면서 창설되었다. 미국 최대, 최악의 금융 위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Crisis) 사태가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참여한 나라들 간에 첨예한 의견 대립이 보이며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한 환율조작 문제까지 생기게 되면서 G20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가기 시작하고 EU내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G20의 역할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라는 핵심 축의 존재와 신흥국가들의 영향력 강화로 인해 현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G8을 대체하는 국제기구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크라이나가 세계적 시장 흐름에 따라 갈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 여력이 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 산업 시설을 시찰해보면 알겠지만 서부 지역은 농업에 치중되어 있고 공단 등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부실한 기계와 공장 설비 등을 보면 이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수십년은 걸릴 것이다. 그것을 미국이나 서방이 무상으로 지원해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가 모두 돈으로 사야 한다. 도로 하나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 아스팔트가 너덜너덜하고 깨져 있는 상태에 차를 타면 수없이 머리와 천장이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나라에 무슨 경제적 역량이 된다고 우크라이나가 G20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현재 G20 구성원들의 인구를 합치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달한다. 또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한 값은 전 세계의 85%에 해당하며, 세계 교역량의 80%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 경제를 대표하는 모임이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몇 개가 있으며 우크라이나로 인해 세계 경제가 영향을 받을 확률은 몇 %나 될까? EU 시찰단이나 미국,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는 국가의 대표들이 우크라이나 내부의 시설을 돌아본 적은 있을까? 한 마디로 전 세계에서 돌아가는 경제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바이든의 이른바 립서비스로 보인다. 그러나 이게 립서비스가 아닌 진정이라면 G20에 대한 모임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고 애당초 그럴꺼면 1인당 GDP 3,500불 수준의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도 포함시키는게 합당하다. G20이 아나라 G40까지 불려도 상관이 없다. 미국의 논리대로라면 이들도 경제가 망한 국가들이니까 충분히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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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 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인더스 강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모체가 되는 강이다. 현재도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각종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인더스 강은 티베트 고원 서부에서 발원하여 총 길이가 2,880~3,180km에 달한다.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아라비아 해로 들어간다. 인더스 강은 모두 19개의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 중 하나로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 3개의 국가들을 통과하고 있다. 인더스 강은 파키스탄이 93%, 인도가 5%, 중국이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폭이 좁고 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강의 지류들이 속한 강 유역은 역사적으로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는 물론, 파키스탄에서 거의 유일한 곡창 지대로 식량 경제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는 지역이다. 20세기에는 운하를 비롯한 많은 관개 시설들이 건설되어 110,000㎢ 이상의 농토에 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강 체계(River System)로 나타나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하고 있다. 그러나 인더스 강 상류가 인도 국토를 통과하여 파키스탄으로 흐르고 있기 때뭄에 1947년에 분리 독립한 이래 인더스 강물의 분배 문제가 양국 간의 큰 현안이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60년 세계은행(World Bank)의 중재로 ‘인더스 유역 조약(Indus Waters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인더스 강의 강물을 양분하게 된다. 이는 세계은행의 중재로 이루어졌지만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인더스 강 수운에 위협을 가한다면 국제법을 위법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된 것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우선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상류의 수량을 인도가 조절하여 자국의 농경지를 위협하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1948년 양국은 인도가 수량을 충분히 공급하는 대신에 파키스탄이 매년 일정 부분의 금액을 인도에 지불한다는 잠정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보다 영구적인 효력을 갖는 협정의 필요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양측은 진전된 절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인도는 인더스 강 지류들의 물길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고 해도 파키스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파키스탄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고 했으나 인도는 이에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 양측은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여기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개발전문가이자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 와 원자력위원회 (AEC) 위원장인 데이비드 릴리엔탈(D. Lilienthal)은 인더스 강 유역을 탐사하며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1951년 세계은행에 갈등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에 세계은행은 릴리엔탈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인더스 강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우선 릴리엔탈과 세계은행은 인더스 강 문제를 기능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나누어서 접근했다. 이는 인더스 강 유역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와 수량 할당과 같은 경제와 직결된 정치적인 접근보다는 인더스 강의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양국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설득 과정에 있어서 운하와 저수 시설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세계은행의 적극적인 자금 지원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써 무려 8년에 걸친 협상을 통해 1960년 9월 19일 파키스탄의 카라치(Karachi)에서 인도 수상 네루(J. Nehru)와 파키스탄 대통령 인 아유브 칸(Ayub Khan)이 서명함으로써 오랜 갈등이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 측의 서명 당사자가 인도의 수장인 대통령이 아니라 수상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더. 인도의 공식적인 대표자는 분명 대통령이고 인도는 대통령 중심제로 정치체가 운영되는 국가다. 수상이 이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은 조약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2016년 9월 인도 연방 최고 법원에 공익형사소송(Public Interest Ligitation)이 재기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따라서 2016년 9월 25일 인도는 당시 세계은행의 조약 중재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파키스탄 다시 마찰을 일으킨다. 당시 인도령 카슈미르 우리(Uri)의 인도군 기지에 대한 파키스탄 무장단체의 습격사건이 발생했고 19명의 인도 군인이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더스 강 수원에 대해 전면 재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두 달 뒤인 11월 15일에는 펀자브(Punjab) 주의 선거 유세에서 모디 총리는 세계은행에 의해 인더스 강의 파키스탄 측 지류인 수트레즈, 베아스, 라비 강물은 인도와 인도 농부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은 농토에 사용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고 했다. 따라서 인더스 강물의 한 방울이라도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해서 펀자브와 잠무‧카슈미르의 인도계 농부들이 사용하게 하겠다고 연설하며 이들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2016년 12월 23일에는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는 모든 지류를 봉쇄하는 계획을 담당할 ‘세계은행 태스크 포스’를 조직했다. 그리고 같은 달인 25일에는 인더스 강 인도 측 상류 지역에 대규모 저수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인도 언론에 보도되면서 인도가 파키스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모든 수원을 인도 측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혹이 재기되었다. 물론 인더스 강 조약의 주요 내용은 인도 측이 인더스 강 동안의 수트레즈(Sutlej), 비아스(Beas), 라비(Ravi) 등 3개 지류를 갖는 것으로 하고 파키스탄은 서안의 체나브(Chenab), 젤룸(Jhelum), 인더스 강 본류(本流)의 관할권을 갖는 것으로 했었다. 물론 이는 인도가 동안의 지류들로부터 약 3,300만 에이커 피트(Acre feet)의 수량을 공급 받고 파키스탄은 약 12,500만 에이커 피트를 공급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인도는 파키스탄의 약 20%의 수량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파키스탄에 있어 큰 헨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인도는 서안의 지류들로부터 최대 약 70만 에이커의 농지의 관개 용수로 사용할 수 있으며 125만 에이커 피트를 초과하지 않는 새로운 저수 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 또한 인도 측은 수력 발전을 위한 160만 에이커 피트를 확보하는 한편 75만 에이커 피트 내의 홍수 방지용 저수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인도의 잠무-카슈미르(Jammu-Kashmir) 주는 충분한 관개 용수 확보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수력 발전 용수가 충분하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된다. 물론 파키스탄 측에서도 일부 지역의 홍수 대비용 댐 건설이 제한되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1988년부터 파키스탄이 좌안 하수 배출 수로(Left Bank Outfall Drain)’를 착공하여 운영함으로써 발생했다. 해당 수로는 약 500km에 달하며, 아라비아해의 영향으로 염분이 많고 관개 용수로 적합하지 않은 오수들을 파키스탄 측의 인더스 강 삼각주 지대를 우회하여 쿠치 대사막을 통해 바다로 흘려 보내려는 목적에 있었다. 이러한 파키스탄 측이 일방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쿠치 대사막이 있는 인도의 구자라트(Gujarat)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이 세계은행이 중재 하에 체결한 조약문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하수 배출 수로가 90% 정도 완성된 2002년 이후 구자라트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에게서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아라비아해 연안의 염전들이 오수로 인헤 오염되었으며 52개 종의 동식물이 피해를 입는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면서 인도 측의 비난을 샀다. 2016년 하수 배출 수로에 대해 세계은행의 중재가 진행되고 있으며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공사는 중지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인도가 잠무-카슈미르에 건설하고 있는 키샨강가(Kishanganga)와 라뜰레(Ratle) 수력 발전소도 양국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었고 2016년 12월 12일 세계은행이 개입하여 공사를 중단시킨 바 있다. 그러던 현재, 잠무-카슈미르의 테러로 이를 인도에서는 파키스탄과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테러단체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인더스 강 강물을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인도 정부 측의 발언은 파키스탄에 대한 위협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에 있다. 이는 인도가 파키스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군사적 방법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의 이러한 차단 의지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부분들이 매우 많은데 양측이 체결한 국제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발생하는 국제 외교적 신뢰도 하락 문제 등은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파키스탄의 수천만 농부들의 생계가 달린 물줄기를 차단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권 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도 있기에 오히려 인도에게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의 경우, 독자적으로 인도의 이러한 시도에 물리적으로 저항하거나 반격하는 것보다는 UN과 국제 중재 재판소, 국제 물 분쟁에 관한 협약 등을 근거로 국제 여론을 조성하면서 이와 인도의 행위에 공동 대응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치인 중 일부는 우방인 중국을 설득하여 티베트에서 인도로 흐르는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을 차단하여 인도 동북부의 농업에 타격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중국 또한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보여 진다. 지난 80년 가까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인더스 강 문제도 장기적으로 긴장과 소강을 반복하는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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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6
  • 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
    9세기 동북아시아는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어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들로부터 상선들이 보호를 받았다면 동남아시아에는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 인물이 없었기에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려면 해적들에게 일정부분 상납해야 통과할 수 있다. 상납을 거부했을 시, 어김없이 약탈을 당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졌다. 그러니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남아시아 해안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적들을 보는 즉시 족족 격파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막강한 총포의 위력 앞에 그 악명 높던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은 무력했다. 결국 해적들은 이 일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수마트라와 말레이 일대의 육지에서 생활하는 일부 해적들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필자가 미얀마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에 중국의 미얀마·인도 실크로드 전략은 외교수사에 불과한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중국의 국경 도시 뢰이리(瑞麗)로 넘어가는 순간 이러한 의문은 사라졌다. 이곳에서 이미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뢰이리까지 이어지는 철도공사가 진행 중이며, 항주~뢰이리 고속도로도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건설이 완료된 미얀마 경유 가스·원유 파이프라인도 뢰이리를 지나고 있다. 중국은 2006년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하면서 미얀마를 경유해 인도양으로 진출할 계획을 추진해 왔다. 지금도 그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미얀마 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인도양 진출과 실크로드 건설을 위한 내부 역량 강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실크로드 건설 전략은 시진핑 시대의 중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진핑은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 방문 시 중국 서부 내륙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 경제 벨트 건설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연설에서는 해양 실크로드 건설을 제안했다. 중국남부 연안을 동남아, 남아시아 해양 지역과 연결하자는 구상이다. 해양 수송로 연결과 무역뿐 아니라 자국 화폐로 무역정산 결제, 스와프 등 금융과 화폐협력까지 상정하고 있다. 이 중의 한 가닥인 미얀마·인도 실크로드는 인도양 진출 전략의 업그레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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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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