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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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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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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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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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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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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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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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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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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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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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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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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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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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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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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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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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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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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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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제국이 남방에서의 두 번째 패배 - (하)
- 1285년 2월 말에서 3월 초, 원나라의 장수 쉬게튀의 군대는 보찐(布正)을 공격한 뒤 응에안으로 진격했다. 쩐 냐두얏은 최선을 다해 막아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쉬게튀는 1만의 군대를 보내 타인호아(淸化)를 공격했다. 3월 9일, 이전 원나라에 항복했던 쩐 끼엔이 응우옌 군을 이끌고 베보(衛布)를 급습하면서 쩐 왕조의 장수인 응우옌 탓텅(阮悉統)과 딘싸(丁車)를 사살했다. 베트남의 총리였던 쩐 꽝하이는 분노했고 쩐 끼엔을 살해하기 위해 군을 몰아 원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추가로 2명의 장수를 더 잃는 피해를 보고 말았다. 항복한 쩐 끼엔이 원나라 군을 이끌며 강력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결국 쩐 왕조의 군대는 응에안과 타인호아를 탈환하지 못한 채 퇴각하게 되었다. 쉬게튀는 타인호아로 진격했고 쉬게튀의 아들인 바크지아노(巴賈諾)와 한족 출신의 장수들을 모두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에 합류시키고 이들을 전방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 쩐 태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쩐 인종의 삼촌이기도 했던 소국왕(昭國王) 쩐 익탁(陳益稷)이 온 일가친척들을 모은 뒤 원나라 군에 투항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그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했다. 응에안과 타인호아에서 패배함으로써 쩐 왕조의 전선은 붕괴되었고 베트남의 전방과 후방에서 원나라의 공격이 지속되자, 쩐 인종은 전선을 버리고 도주했다. 결국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데다 패배로 점철되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태상황 쩐 성종은 인종과 상의한 뒤, 원나라 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저지시키고자 자신의 남매 중 막내인 안자공주(安姿公主)를 원나라의 총사령관인 토곤에게 바쳤다. 토곤은 안자공주를 받아들이며 쩐 인종과 태상황 쩐 성종도 입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결국 변심한 황제와 태상황은 오히려 군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결국 화가 난 토곤은 다시 군대를 내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쩐 흥다오는 반 끼엡을 떠나 황제를 구원하고자 했다. 쩐 흥다오는 우선 거대한 함선을 구해 응옥산(玉山) 일대로 돌아 원나라 군의 주목을 받으면서 몰래 작은 함선을 타고 나아갔다. 두 황제를 구한 뒤, 자오하이(交海)를 통과하여 바다로 나아갔다가 북상해 치응우옌(雉完)으로 되돌아갔다. 쩐 왕조의 군주들을 놓치게 된 토곤은 화가 났으나 쉬게튀가 보낸 장수들과 만난 이후, 쉬게튀의 군대가 식량이 부족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하게 추격 군을 만들지 않는 대신 천천히 티엔즈엉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쩐 왕조의 황제들이 하이동(海東)으로 도주한 것이 확인되자 토곤은 이항, 우마르, 자오키(Zaoki) 등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1285년 4월 7일, 쉬게튀의 군대가 티엔즈엉으로 진격하는 것을 발견한 두 황제는 함선을 버린 뒤, 남쩌우 강(南兆江)에서 함선을 다시 타고 다이방(大旁)으로 돌아가면서 적의 추격을 피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아직 수군 조달에 미숙했는지 자오키와 탕우타이(唐烏泰)의 수군은 4월 15일이 되어서야 땀지(三雉)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항도 수군을 이끌고 두 명의 황제를 수색했으나 마주하지도 못했다. 이후 원나라 군은 베트남군이 남겨둔 배 몇 척을 찾아냈고 이후 쩐 인종과 쩐 성종이 이미 육지에 함대를 정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나라 군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3일 밤낮을 추격했으나 이미 두 황제는 황자들이었던 쩐 롱(陳弄), 장수 팜 끄디아(范巨地), 레 지엔(黎演), 찐 롱(鄭龍) 등 귀족과 장수들이 흩어져 있던 베트남의 군대를 조직해 오고 있던 타인호아 일대로 사라진 이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토곤과 우마르는 1,300명의 수병을 데리고 타인호아로 진격해 황제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쩐 흥다오는 일단 지도자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자 타인호아에서 철수한 이후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에서 온 토곤의 원나라 군은 맞지 않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인해 고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쉬게튀가 우마르와 함께 쩐 왕조의 황제들을 추격했지만 결국은 찾는데 실패한데다 풍토병 등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추격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직접 전투를 벌이면서 원나라 군이 풍토병 등으로 인해 고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쩐 흥다오는 4월에 북쪽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군을 모아 콰이쩌우(快州)를 지나는 홍 강 구간의 원나라 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 지역을 점령하면 베트남군은 콰이저우를 기점으로 탕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타인호아에는 쉬게튀의 군대가 있었으나 쩐 왕조의 황제들을 포로로 잡지도 못했고 군대가 매우 고생하였기 때문에 우마르와 함께 군을 이끌고 북부로 이동했다. 4월부터 북부에서는 연이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쩐 흥다오는 이미 주둔해 있던 토곤의 군대와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쉬게튀의 군대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쩐 인종은 이번에는 소문왕(昭文王) 쩐 냣두앗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쩐 흥다오와 소성왕(昭城王)을 부사령관으로 삼은 뒤 북으로 진격, 함뜨(咸子)에 주둔해 있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쩐 냣두앗의 부대는 우선 올라오고 있던 쉬게튀의 군대를 향해 돌진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두 군대는 제법 대등하게 전투를 벌였고 쩐 냣두앗은 자신의 부대에 옛 남송의 장수들이 상당수 된다는 부분을 십분 활용해 남송의 깃발을 앞세우며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이는 의외로 효과는 대단했는데 양양 전투에서 남송 군의 저항에 시달렸던 쉬게튀는 당시의 어려운 전투가 생각났는지 질색을 했고 남송 출신의 장수들은 베트남의 군대에서 원나라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족과 몽골족으로 혼합된 원나라 군대 사이의 유대를 붕괴시키기 위해 오직 탓(韃 / 타타르)놈들만 공격한다고 외치면서 한족 출신의 장수들에게는 맞아도 전혀 무해한 종이로 만든 화살을 날렸다. 남송의 깃발과 종이 화살 작전은 의외로 잘 통했기 때문에 이미 전투에 지쳐 있던 한족 출신의 장수 및 병사들은 더욱 전투에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쉬게튀는 크게 패배해 서쪽으로 도주했고 살아남은 일부 쉬게튀의 병사들은 티엔막 강 일대를 탈출했으며 한참 뒤, 겨우 토곤에게 도달해 쉬게튀가 크게 패해 서쪽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1285년 6월 24일, 쩐 흥다오는 직접 지휘를 맡아 쉬게튀와 우마르가 이끄는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쉬게튀와 우마르는 서둘러 해안가를 끼고 도주했으나 결국 포위되었고 쉬게튀는 결국 쩐 왕조의 장수 부하이(武海)에 의해 참수되었다. 기겁한 우마르는 빠르게 말을 달려 타인호아로 들어갔다. 한편, 쩐 인종은 쉬게튀의 잘린 머리를 받게 되었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라고 감탄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쉬게튀의 머리를 감싼 뒤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 쩐 냣두앗과 쩐 흥다오는 타인호아에서의 승전을 보고했다. 쩐 흥다오는 황제 쩐 인종을 알현해 전군을 이끌고 수도 탕롱을 탈환할 것을 논의했다. 이번에는 응안(乂安) 출신의 쩐 꾸앙하이(陳光啓)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팜 응우라오(范五老)와 쩐 흥다오는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쉬게튀 격파에 큰 공을 세웠던 쩐 냣두앗에게는 별도로 죽은 쉬게튀의 병사들이 그들의 사령관 토곤과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 임무가 맡겨졌다. 한편 탕롱 일대에 주둔해 있던 토곤의 군대 역시 서서히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끈질기게도 요충지인 쯔엉드엉(章陽)만에 함선을 정박시킨 채 버티고 있었다. 쩐 꾸앙하이는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했고 원나라 군이 여기저기 지어 놓은 소규모 기지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족 출신의 병사들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쉬게튀의 병사들의 합류를 막고 있던 쩐 냣두앗은 병력 일부를 분리해 쩐 꾸앙하이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주었다. 원나라 군을 피해 흩어져 있던 베트남군은 쩐 꾸앙하이의 진격을 보고 속속 합류함으로서 군대의 규모는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루터에 거의 버려진 채 정박되어 있던 많은 원나라의 함선을 탈취했다. 베트남군은 마침내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원나라 군을 공격했고 쩐 꾸앙하이는 팜 응우라오의 군대와 함께 쯔엉드엉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은 기습적인 공격에 패해서 도주하던 베트남군이 강력하게 돌격해오자 패배하여 도주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함들 대부분은 탈취당하거나 전소되어 침몰했다. 홍 강 일대에서 베트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수도 탕롱을 회복하고자 했다. 쩐 꾸앙하이가 정예병을 이끌었고 응우옌 카랍(阮可拉), 응우옌 쩐통(阮陳松) 등의 장수들이 민병대를 지휘하며 탕롱으로 진격했다. 이어 장수 마빈(馬榮)이 이끄는 군대가 탕롱성 외곽의 원나라 군을 공격해 격파하자 이내 모든 베트남군이 탕롱을 포위한 뒤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군의 강력한 공격을 피해 원나라 군은 탕롱을 탈출하여 홍 강 북쪽 기슭에 주둔했으나 베트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해 북쪽 기슭의 주둔지까지 공격했다. 한편, 원나라의 총사령관 토곤은 아직도 쉬게튀가 서쪽으로 도주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베트남군의 공격에서 겨우 도주해 온 쉬게튀의 병사 중 일부가 도착해 쉬게튀가 서쪽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토곤은 결국 통솔하는 군 전체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285년 6월 24일, 쩐 인종이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토곤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베트남군은 적장인 한족 장수 장헌(張憲)을 사로잡은 뒤 그를 길잡이로 삼아 서쪽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은 패배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우마르와 유규(劉揆)는 작은 함선에 탑승하여 바다로 도주했다. 원나라 군을 격파한 쩐 흥다오는 다시 2만에 가까운 군대를 모은 뒤, 선종불교의 대승이었던 뚜에중뜨엉시(慧中上士)와 함께 베트남군을 이끌고 홍 강 북쪽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을 이끌던 장수 유세영(劉稅營)이 병사를 이끌고 상대했으나 대패했고 그대로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원나라 군은 뉴응우옛 강(如月河)까지 퇴각했으나 베트남군이 나타나 전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함선을 구하지 못한 원나라 군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달려 탈출해야 했는데 베트남군의 장수인 쩐 꾸옥또안(陳國瓚)이 원나라 군의 탈출을 저지하는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북쪽의 원나라 군은 삿강(冊江)으로 이동해 강을 건너려 했으나 쩐 흥다오가 추격하여 격파해 버렸다. 이항은 배후를 공격해 오는 베트남군을 향해 화살로 사격하여 이들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베트남의 부대가 대형을 이루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원나라 군대는 서로 흩어지다가 충돌했고 그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면서 무수한 병사들이 강에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삿강을 무사히 건넌 원나라 군은 도주하여 투민(思明)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항은 베트남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후위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도주하다가 빈빈 일대로 도착한 원나라 군은 쩐 황실의 일원인 천서공주(天瑞公主)와 결혼한 사령관 쩐 꾸옥니엔(陳 國巘)이 이끄는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나라 군을 지휘하던 이항은 쩐 꾸옥니엔의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베트남군이 사격하는 독화살들을 맞으면서 겨우 토곤이 있던 투민으로 퇴각했으나 결국 강한 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향년 50세에 전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나시르 앗 딘이 이끄는 운남의 위구르 군대는 원래 위치해 있던 운남을 향해 이동했고 베트남 쩐 왕조의 장수 하 닷(河達), 하 쯔엉(河長)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습을 감행했으나 원나라 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오히려 하 닷(河達)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는 원나라의 군사들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 인해 베트남과 원나라의 두 번째 전쟁 역시 베트남의 승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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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제국이 남방에서의 두 번째 패배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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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이 부르는 또 다른 폭력
- 며칠 전 수영장에서 배영을 하다가 물을 민다는 것이 옆 레인에 서 있는 여성의 엉덩이를 밀었다.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기에 옆 레인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내 손의 감촉이 물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엉덩이를 민 것으로 느꼈고, 그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만 알려 주었다. 수영하면서 생각해 봤다. 만약 그 여성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고소한다면 나는 성추행범이 되는가? 그렇다면 나로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만약 그 여성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몰고 간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남성이 내 엉덩이를 만졌다.” 하지만 나는 그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지 않았다. 여성의 엉덩이를 밀었을 뿐이다. 수영이 끝난 후 옆 레인의 강사에게 이야기했다. 선두에서 배영을 하는 중에 대각선 방향으로 턴을 하다가 내 왼손이 옆 레인 어떤 사람의 엉덩이에 닿았다고 했다. 혹시 그 사람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르기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옆 레인의 강사는 여성이었다. "아버님! 잘 알겠습니다. 그 여성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이야기가 나오면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여성 강사는 그런 일이 수영장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니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도 옆 레인에서 평영을 하는 여성 발에 내 옆구리를 차인 경우도 있었고, 배영을 하는 여성의 손에 내 허벅지에 상처가 난 일도 있다. 관점의 차이일까? 나는 그런 일을 당해도 그 여성의 행위가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는 낌새를 알아차리면 내가 먼저 그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수영장 옆 레인 강사와 나눈 대화도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최근 조국혁신당이 몇 개월 전에 발생한 성추행에 관한 사건 해결에 미숙했다고 비난하는 말들이 많다. 지난 주말에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에게 가해자로 지목받은 사람이 그녀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는 입장문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남성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 아내와 딸을 제외한 세상 여자들이 모두 무섭게 여겨진다. 그 남성의 주장에 따르면 노래방도 그 여자가 먼저 가자고 해서 가게 되었고, 함께 한 7명의 사람들이 모두 노래방에서 어떤 추행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다. 하지만 내 주변의 대다수는 자신이 성추행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편에 서서 그 여성이 주장하는 가해자와 가해자의 소속 정당까지 싸잡아 비판한다.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보태는 심리가 작용해서일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요즘은 피해를 가장한 원한의 마음을 담은 강자의 논리도 작용하는 것 같다. 약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여성이 주장하는 가해자가 고의가 없다고 해도 여성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면 가해자는 그 여성의 아픔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의 주장에 대한 어떤 비판도 모두 사라지고 가해자만 부각될 뿐이다. 사실 그 뒤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무조건 손을 들 수 없다.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남성이 가해자로 몰린다면, 남성으로서는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억울한 죽음이 떠오른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모두 권력의 횡포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권력의 횡포는 일방통행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권력의 횡포로 강자의 주장만 관철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만 볼 수 없다. 예전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이 약자일 수 있지만, 지금의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상호 보완해 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반자이다. 그러니 남녀의 관계는 상호 존중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나는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도 폭력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모든 일방통행은 모두 폭력으로 작용한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싹트는 사랑이야말로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의 대표적인 예이다. 너 속에서 나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녀의 관계야말로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함께 힘을 합하여 험한 세상을 보다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조국혁신당의 두 남녀 주장에 어느 한쪽 주장에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아니면 배후에 어떤 마음이 작동되어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일반인으로서는 알 수 없다. 특히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했다는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상반되는 서로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그와 함께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 존중의 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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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이 부르는 또 다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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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치, 경제 위기 :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고 있는 중
- 현재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과 막대한 부채, 정치적 갈등이 위험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2025년 들어 국가 부채는 3조 3,454억유로(약 5,461조원)에 달하며다. GDP 대비 113.9%로 유로 국가들 중, 그리스(152.5%)와 이탈리아(137.9%) 다음으로 높다. 연간 재정 적자도 2024년 1,697억유로(약 268조 원)로 GDP의 5.8%에 달했다. 유로존 평균 적자율(3.1%)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EU 전체에 닥친 최악의 위기다. 그리고 끝도 없이 치솟고 있는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 및 취업율 하락은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경제 정책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과 마주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던 18세기 후반 당시 민중들의 분노는 경제적 불평등과 세금 문제, 심각한 빈부차와 식량 부족 등이 원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왕정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지만 이 또한 나폴레옹의 등장이라는 또 다른 절대권력을 불러왔다. 현재 프랑스 역시 경제적 불평등과 세금 문제, 그리고 물가 상승으로 인해 18세기 후반과 유사한 형태의 불안한 흐름이 이이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시 대혁명은 많은 희생을 동반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현재 프랑스는 급진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양새보다 계획적이고 실효성 있으며 지속 가능한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며 가장 어려운 시기의 새로운 돌파구 또한 모색해야 한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 사회적 불안은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마크롱 정부의 신뢰도가 하락한 것에서 비롯된다. 특히 물가 상승과 실업 문제는 시민들의 이반을 이끌어 놓은 핵심적인 문제다. 게다가 62년 만에 정부 불신임 안이 통과되면서 마크롱 정부는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2024년 12월 5일, 프랑스 하원은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 발의한 불신임안을 331표로 통과시키며 미셸 바르니에(Michel Barnier) 내각이 붕괴됐으며 올해는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긴축 예산안을 둘러싼 신임투표에서 패배하여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는 불과 9개월 만에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어진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갈등은 예산 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좌파들은 사회 복지를 축소하여 적자를 매우려 했고, 우파는 여전히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고 민생 문제를 비판하며 마크롱 정부를 압박했다.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이를 '정치적 실패(Échec politique)'로 규정하며, 사회 복지 및 연금 정책에 다시 한 번 손을 대려는 정부에 경고를 보냈다. 마크롱과 그의 정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신뢰도는 최근 수십 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갓 취임한 세바스티앵 르코르뉘(Sébastien Lecornu) 총리는 정치적인 화해와 국민 통합을 강조했고, 이에 따른 민생 안정 및 정치적 신뢰 회복과 경제 회생이라는 아주 중대한 과제를 맡았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가운데 주요 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3일 필자가 <프랑스 경제의 문제점과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인지의 여부>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린 것과 같이 프랑스의 경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2023년에는 재정적자가 GDP의 5.5%로 EU 기준치인 3%를 초과했다. 공공 부채는 GDP의 110.6%에 달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112.4%, 2025년에는 113.8%로 증가했다. 비록 2023~2024년 프랑스의 GDP 성장률은 1.1%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수치상으로만 그럴듯 할 뿐, 생산비 상승과 기업 파산의 증가가 이어지면서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와 같은 재정 취약성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우선 복지와 연금 문제다. 프랑스의 정부 지출로 볼 때 GDP의 57.2%로 OECD 국가 중 핀란드 다음으로 높다. OECD 평균으로 볼 때 42.6%인 것에 거의 15% 이상 높은 편이다. 특히 연금과 건강 보험, 실업 수당 등은 OECD에서 분류했을 때 복지 지출 비율이 23.4%로 핀란드의 25.7%와 스웨덴의 25% 다음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실상 북유럽형 모델에 가깝다. 애초부터 프랑스가 북유럽 국가들처럼 이런 시스템을 유지한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북유럽형 모델을 도입한 것도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즉,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복지 지출을 쉽게 줄이기 어려운 것이 더욱 큰 문제다. 프랑스의 연금은 현 세대가 낸 보험료로 은퇴자의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부족한 부분은 정부 재정으로 충당한다. 연기금을 적립하여 그 수익금과 원금으로 지급하는 한국과 완전히 다르다. 재정으로 평균 소득의 절반 이상을 보장하고, 철도 및 공무원 등 특수 직업들의 연금도 유지하고 있다. 2023년에 연금 문제로 파리에서 대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정년 연장 및 연금 , 사회보장 급여 삭감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 복지나 연금이라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일례는 줬다가 뺏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상, 이는 엄청난 불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본래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나폴레옹의 개혁과 산업화가 이루어진 덕분에 가능했다. 19세기 초,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는 영국으로부터 산업혁명을 이끌어와 세계 열강 중 영국 다음, 두 번째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으며, 제3공화국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자유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제국주의를 표방하여 영국과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프랑스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자 열강 중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영국보다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는 21세기 들어 최악의 경제 위기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3년에는 약 70,000개의 기업들이 파산했다. 2024년에는 그보다 못하지만 약 59,000여 개의 기업들이 도산했으며, 창업한 기업들 상당수는 투자 부진이 이어지면서 꽃을 피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2025년에도 마찬가지로 경기 둔화가 계속되어 신규 기업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치적인 혼란은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2023년 OECD는 프랑스가 2025년부터 물가 안정과 글로벌 수요 개선에 따라 점진적으로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2025년 들어 이같은 장밋빛 전망은 오히려 핏빛 전망으로 변해 더더욱 어려운 수렁으로 끌려가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이미 구조적 개혁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갈등과 혼란 속에 빠져 있다. 마크롱 정부는 계속해서 반대파와 충돌하고 있으며, 마린 르펜을 실각시키며 더욱 거센 반발에 부딪치고 있다. 따라서 마크롱 정부의 개혁 추진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야당은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정부를 압박했으며, 정치적 불신임안도 잇달아 통과됐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은 정부의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것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의 불만과 정치적 갈등은 정부의 신뢰도를 하락시키고 있으며, 마크롱에 대한 지지도는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면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은 경제 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로존 경제가 둔화 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는 노동 시장을 개혁하고 연금 제도 개혁을 포함한 대대적인 경제 재편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공공 재정의 적자를 줄이고 투자자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프랑스는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증가는 신용 등급 강등으로 이어졌다. S&P는 작년인 2024년 5월 프랑스의 국가 신용 등급을 AA에서 AA-로 낮췄고, 2025년에도 전망을 ‘부정적’으로 돌렸다. 무디스도 지난해 Aa2에서 Aa3로 하향했다. 이 영향으로 2022년 초 1%대였던 10년 만기 프랑스 국채 금리는 3년여 만인 현재 3.5%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자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 사실상의 ‘국가 부도’인 IMF 구제금융까지 언급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며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의 불안정성을 "러시아 침공설"과 같은 위기 의식을 외국으로 돌려 국내 상황을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마크롱의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결국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Block Everything"의 슬로건 아래 550건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시위대는 마크롱 대통령 사임, 탄핵 등을 외치며 학교, 역사, 도로 등을 봉쇄하고, 시가지와 상가를 불태웠다. 진압하러 온 경찰과 맞서기도 했고, 폭력 시위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결국 좌파 연합은 마크롱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80여 명의 연서를 통해 하원에 제출하였고, 현재 심의 중에 있다. 프랑스는 양원제를 채택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브라질처럼 하원에서의 소추, 상원에서의 심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통과를 시키면 상원에서도 탄핵소추가 통과되어야 하는 매우 특이한 방식이다. 의회와 상원에서 모두 통과할 경우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진 탄핵재판소(Haute Cour)가 조직되는데 이곳에서 재적의원 2/3의 찬성을 얻어야 탄핵할 수 있다. 마크롱은 프랑스 현직 대통령으로써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에 이어 공화국 건국 사상 두번째 탄핵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만약 재적의원 2/3가 탄핵을 찬성한다면 프랑스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2025년 9월 18일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함으로써 파리는 현재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 진행 중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무너져 가는 세계 7대 경제 강국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결코 남의 일은 아니다. 필자에게 9월 22일부터 소비쿠폰 1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문자가 왔다. 이런 식의 포퓰리즘 정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또한 이와 같은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이 오히려 정부가 해주는 연금 및 복지를 받는 것에만 익숙한 형태로 되어가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결국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 긴축 재정 얘기가 나올 것이고, 그리되면 현재 프랑스 상황의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좌우 이념 대립으로 정신 없는 국가에 프랑스와 유사한 형태의 이유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면 대한민국 또한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 강국의 지위와 신뢰가 흔들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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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치, 경제 위기 :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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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의 27년 3개월 실형 :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전후, 쿠데타 혐의
-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이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려 한 혐의 등으로 11일 연방 대법원에서 징역 27년형 3개월을 선고받았다.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2018년 사회자유당(Partido Social Liberal , PSL)에 입당하고 대표에 취임하면서 사회자유당이 강력하게 우경화되자 이에 반발한 당원들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게 되었고 결국 탈당해서 자신만의 당을 만든 것이 바로 보우소나루의 자유당(Partido Liberal)이라 볼 수 있다. 보우소나루는 2018년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의 후보로 유력한 룰라와 대결할 경우 2위로 떨어질 것으로 보였지만, 룰라가 법원의 결정으로 출마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브라질 전국에서 1위를 달리며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었으며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당선되기 이전과 같이 이후에도 각종 막말을 쏟아냈고, 반이민 정책 등의 극렬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계속하여 실정을 저지르고 직업 군인 출신이었던 보우소니르가 대놓고 군사 정권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과거 2018년 대선 때는 러닝메이트인 노동혁신당의 아미우통 모랑(Antônio Mourão)을 뒤늦게서야 지명했을 정도로 각계의 주류 정당들이 보우소나루와의 협력을 거부했었다. 우선 2022년에는 우파 빅텐트 정당을 하나 만들어 우파 표들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브라질이 그동안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보우소나루도 코로나 사태 해결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자 민심은 대거 룰라로 이동했었고, 보우소나루 자신도 이대로 가면 룰라가 승리하고 좌파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 공언까지 하면서 지지 세력의 결집력을 더욱 높였다. 문제는 트럼프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절친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나 보우소나루 모두 우편 투표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선거론을 주장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만약 룰라가 승리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소송을 걸 것이라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그로 인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와 같은 사건이 브라질에서도 벌어질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으며 결국 2023년 1월 발생하고 말았다. 보우소나루는 자신의 친위 세력이 존재할 정도로 지지자들의 결집력이 워낙 강한데다 지지자들의 성향 역시 극도로 과격했으며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021년 7월에 브라질의 현행 투표 방식인 전자 투표를 취소하고 투표지로 직접 기표하며 수개표하는 방식의 투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선거 결과에 불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보우소나루는 브라질 군대가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에 대선에 당선된 룰라는 쿠데타의 위협을 항상 느끼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본래 보우소나루는 브라질 육군 장교 출신의 전직 군인이다. 보우소나루는 군 생활 중에서 군의 비리를 직접적으로 폭로해 매우 용감한 군인이라는 인지도를 얻었고, 전역한 이후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는 군 장교 출신으로 강력한 리더십과 직설적인 발언을 하면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인기를 얻은 보우소나루는 반 부패와 치안, 경제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워 201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실정은 코로나 펜데믹 시기가 절정이었다. 그는 방역에 관심이 없었고, 경제 정상화와 자유를 중시하면서 코로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코로나는 단순한 감기이며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발언을 하며 희생자 유가족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스크도 쓰지 않고 거리두기 역시 지키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보우소나루는 코로나에 걸려 확진되었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은근히 푸틴의 편을 들면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보우소나루의 이같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 외교는 매우 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022년에는 교사 월급을 무려 33% 인상했는데, 이는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었다. 한 때 결선투표에 오르는 것조차 불투명할 정도로 지지율이 낮았었지만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들이 결집하면서 지지율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룰라에 밀리고 있었고 결국 아쉽게 1.3%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보우소나루는 룰라는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며 우파의 결집을 촉구했고, 이러한 보우소나루의 행위는 군대까지 동요를 일으켜 정정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 몰리게 된다.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은 브라질 전역의 군사 기지 밖에서 처음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보우소나루는 룰라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대선 패배 이후,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트럭 운전사들이 전국의 도로 점거하기도 했다. 12월 12일에는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수도 브라질리아에 있는 연방 경찰 본부에 침입을 시도했으며 보우소나루의 지지자 중 한 명이 브라질의 선거 결과에 항의하여 폭탄을 터뜨리려 시도하는 테러를 자행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급진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히 알려진 셈이 되었다. 주로 왓츠앱이나 텔레그램에서 퍼졌으며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해 경찰의 진압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었다. 2023년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시내 중심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으로 침입하고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룰라 대통령은 사건 당시,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었던 상파울루에 가서 재난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사태의 위협에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브라질 정부는 의회,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한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동 시작한지, 7시간 만에 모두 진압에 성공했다. 이같은 사태에 대해 당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 규탄 입장을 발표했다. 2022년 12월에 이미 미국 플로리다에 가 있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시위대를 비난했다. 이어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지시했다는 룰라 대통령이 재기한 의혹과 비난에 대해 자신과 이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폭동 선동에 대한 수사의 움직임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향하게 되자 보우소나루는 직접 대선 불복 내용이 담긴 영상을 업로드했다가 즉시 삭제하는 등, 1월 폭동과 관련성이 높다는 의혹만 더 키운 꼴이 되었다. 이후 2023년 1월 14일 안데르송 토레스 전 법무부 장관이 대선 불복 폭동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대법원에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폭동 선동 혐의로 수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먼저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 중 39명을 쿠데타, 무장 범죄단체 결사, 공공기물파손 등 혐의로 기소했다. 그리고 보우소나루 또한 체포되었다. 대법관 5명 중 4명은 보우소나루가 2022년 대선에서 룰라 대통령에게 패배한 이후, 선거 결과를 뒤엎기 위해 갖은 음모들을 주도했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대법관 1명은 무죄 의견을 냈다고 한다. 보우소나루가 유죄 판결을 받은 혐의는 대략 5가지다. ▲ 무장 범죄 음모, ▲ 민주적 법치주의의 폐지 시도, ▲쿠데타 시도, ▲ 공공 재산의 폭력적 파괴, ▲국가 문화유산 훼손 등이다. 그러나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모든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자신은 2023년 1월 8일 폭동 당시 미국플로리다에 있었기에 당시 폭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혐의들은 룰라가 정치적인 보복에 따른 것이며, 자신의 2026년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보우소나루는 브라질의 투표 제도가 부정에 취약하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2030년까지 공직 출마가 금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보우소나루는 이에 불복하고 2026년에 재출마를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보우소나루 측은 그와 다른 피고인들을 심리하는 대법원 재판부의 공정성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자신을 재판하고 있는 알렉상드르 지 모라이스(Alexandre de Morais) 대법관에 대해 보우소나루는 오랜 기간동안 정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를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 판사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번 재판에 참여한 다른 두 대법관 역시 룰라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이며 불공정한 재판이라 주장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법적 분쟁과 보우소나루 사건을 비교해 왔다. 따라서 보우소나루 유죄 판결에 대해 트럼프는 자신에게 하려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번 판결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번 비인도적인 행위에 맞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보우소나루는 절친인데다 가족 간에도 인연이 있는 사이이며 두 사람의 아들은 친구 사이다. 보우소나루의 아들인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의 재판이 중단되도록 브라질 정부를 압박해 달라고 트럼프 행정부에 로비해 왔다. 이번 판결 이후 에두아르두는 미국 측이 브라질 관료들에 추가적인 제재를 가할 것 예상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미국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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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의 27년 3개월 실형 :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전후, 쿠데타 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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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미국 현지에서의 갈등
- 19세기 초반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과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볼 때, 뉴멕시코, 네바다, 애리조나 등지까지 점령하면서 당시 멕시코 영토의 절반 이상을 정복했다. 이 당시에 미국과 멕시코, 모두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어 쓸모 없는 황무지들이 많았지만 미국은 이민자들이 몰려와서 인구증가율이 높았었던 것에 반해 멕시코는 이민자들이 적어 인구증가율이 낮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처럼 새로 점령한 지역들은 멕시코에서 인구 밀도가 매우 희박한 지역들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 도중에 흡수된 멕시코인 인구는 새로 텍사스로 유입된 독일계 미국인 인구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 관리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일대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도 변방 지대로 여겨졌기 때문에 투자에 소홀했고 인구 밀도가 희박했었다. 따라서 이 서부 지역으로 알려진 곳들은 미국에 독립을 위해 봉기하지 못하고 순순히 흡수되었다. 대체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유럽의 본토의 면적보다 훨씬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역을 모두 통제 및 지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행정 인력의 부재로 늘 골머리를 앓았었다. 따라서 광산과 항구를 중심으로 점과 선 형태의 행정력만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스페인에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멕시코가 당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동부 지역에서 텍사스로 유입된 독일계 개척자들도 굳이 이들을 추방하려고 하기보다는 농장 노동자 등으로 이들을 저렴하게 착취한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백인 개척자와 멕시코 인이라는 두 이질적 그룹이 공존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에 잔존한 히스패닉계 목동들은 이른바 버커루(Buckaroo)라고 하여 카우보이의 선조가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공존하고 있었으나 미국-멕시코 전쟁 이전에 대부분 격멸되어 인구가 더 감소해 사실상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존재감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혈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선 스페인 통치 시기에 유럽에서 멕시코로의 이민은 거의 남성 위주로만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스페인인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아내로 맞이해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미국 남부 도시들 중 히스페닉계 도시 이름을 구분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영어 지명인 경우 영국계나 독일계 개척자들이 만든 도시이고 스페인어 지명인 경우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꽤 오래된 도시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본디면 플로리다의 샌 어거스틴(San Agustín)이나 미시시피의 파스카굴라(Pascagoula), 텍사스의 샌안토니오(San Antonio), 뉴멕시코의 앨버커키(Albuquerque), 네바다의 그 유명한 라스베가스,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은 스페인식 도시 이름들인데 이 도시들의 특징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건설된 스페인 식민 도시들이라는 것에 있다. 반면 영어 명칭을 쓰는 도시들은 영국, 독일계 개척자들이 만든 도시로 원래 무주지였던 곳을 이주민이 오히려 받아야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휴스턴은 샘 휴스턴 장군의 이름에서 따 온 도시다. 미국의 서남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가 사용되었다. 20세기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의 기간에 동안 대략 100만 명에 달하는 멕시코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 남서부로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멕시코에 접해 있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등에 정착했다. 멕시코 본국은 1910년 이후, 멕시코 혁명 및 그 이후의 정치적 여파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해 이주해온 것이었다. 당대 미국 입국은 어렵지 않았었기에 국경에서 뇌물 얼마 쥐어주면 그냥 통과시켜 주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에는 전쟁에 투입된 인력을 대신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는 1942년에 브라세로 계획(Bracero Program)에 합의했다. 브라세로 계획은 1964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연평균 약 209,000명이 동원되었고, 총인원 460만여 명의 멕시코 노동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원래 3년 간의 노동 계약을 맺었는데 계약 이후에도 미국에 남아 계속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미군에 입대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대로 불법체류자로 남아있기도 했다. 1950~1960년대까지 멕시코 이민자의 80% 이상이 미국 남서부 국경인 선 벨트에 거주했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에서 약 3.5% 정도가 히스패닉계로 나타났다. 물론 현재 미국의 히스패닉에는 멕시코 이 외 출신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950~1960년대에 미국 내 히스패닉계의 대부분은 멕시코 출신이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달라진 점은 1982년 멕시코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이래 멕시코 인들은 한 때 멕시코 땅이었던 선 벨트 서부 지역을 넘어 미국 전역으로 올라왔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뉴욕에 원래 이주해 거주하고 있던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출신들은 멕시코계 갱단에게 밀려나 최하층 이주민으로 전락했다. 원래 미국의 동북부 지역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개척한 곳이고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에는 새로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던 곳이었음에도 멕시코계 주민들이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멕시코의 민간 경제가 1980년대 이후로 붕괴되고 1990년대에도 멕시코 내에는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실질 임금 수준이 계속 하락한 것과 더불어,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1,000만여 명이던 멕시코 인구가 1억 3,000만여 명 이상으로 과도하게 폭증했다. 이어 미국으로 멕시코계 불법이민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뉴멕시코에는 겨우 50만여 명의 멕시코계들이 불법이민자들이었으며 캘리포니아에는 20만여 명의 멕시코계 불법이민자들이 살았다. 몇몇 지역의 멕시코계 인구는 당시에도 수백만여 명에 달했다. 이정도만 해도 적은 인구는 아니었지만 오늘날 멕시코계 미국인 인구 3~4,000만여 명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다. 계속되는 이민으로 인해 몇몇 지역의 엘패소(El Paso)와 샌안토니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 및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는 멕시코계들이 완전히 자리잡은 도시들이 되었고 이 외에도 몇몇 지역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테하노스(Thehanos), 칼리포르니오스(Californios) 등등이 멕시코 북부 출신이면 새로 유입된 멕시코계들은 멕시코 남부 출신들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남북으로 긴 멕시코 영토로 인해 멕시코인들은 남부 및 북부 출신들은 매우 다르다. 남부 지역은 흑인들에 대한 노예 유입이 많았던데다 원주민들의 언어까지 섞여 같은 멕시코여도 대화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멕시코는 미국-멕시코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 북부 지역으로 갈수록 메스티소 백인 인종들의 혈통이 강하고 남부로 갈수록 원주민과 흑인 혈통의 물라토라 불리는 인종이 강해지는 편이다.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미국으로 편입된 멕시코인들의 경우 비교적 백인들의 혈통인 메스티소들이 상당수 섞여 이질감이 거의 없다. 미국인들이 서부 지역으로 오기 이전부터 선 벨트 중서부 지역에서 이들 메스티소들은 꽤 오래 살아왔다. 반면 남부 멕시코인은 더 키가 작고 피부색이 짙은 편에 있는데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적도 근방에 살던 부족들의 유전자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들 물라토 인종들은 때때로 동남아시아 인종들과 유사하게 나타나 구분이 쉽지 않다. 18~19세기 무렵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유럽보다 미국의 평균적인 삶의 질이 월등히 높았었다. 당시 미국은 땅이 넓어 경작할 지역이 많은 반면 유럽은 인구 과잉이 심각한데다 토지가 부족해지고 도시에서는 저임금 중노동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백인 인구가 주류인 것은 초창기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것 이 외에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1인당 GDP나 고학력자 임금 수준은 미국이 웬만한 서유럽 선진국들을 압도하고 있지만 문제는 미국은 치안이 좋지 않고 공교육 및 공공의료 시스템이 유럽보다 훨씬 더 낙후되어 있다. 유럽 내 가난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더 이상 미국 이민을 희망하지 않고 좀 더 가까우면서 안전한 독일이나 영국, 노르웨이 등을 노동 이민 장소로 선호했다. 따라서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은 크게 감소하였고 그 자리는 멕시코계를 비롯한 히스페닉들이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점점 백인 인구 비율이 감소하였으며 메스티소 인구 비중이 증가하게 되자 주류 백인들은 멕시코인들을 경계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하면서 불법체류 및 마약 밀수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멕시코계와 현지 미국인(영, 독계) 간의 마찰이 끊이지 않으며 갖은 차별과 선입견으로 인해 계층 간의 대립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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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미국 현지에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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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은 카타르의 영토, 영공을 침범한 중대한 국제법 위반
- 2025년 9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이 기습적으로 카타르의 수도 도하를 단독 공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 수도 도하에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도자들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그 동안 하마스 지도부들은 카타르 도하에 기반을 두고 활동해 왔는데 가자에 있는 지도부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가자의 지도부는 가자 지구를 밀고 들어오는 이스라엘 군에 맞서 항전을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정치국원들이 거주하는 도하의 한 주거용 건물을 공격했는데 그곳은 과거 이란에서 암살당하기 전,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으로 건너가기 전에 머물렀었던 건물이었다. 2012년에 카타르 국적의 인물이자 하마스의 숨은 간부 중 한 명이 이 건물을 매입했는데 그가 카타르 국적자이기 때문에 건물 매입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스라엘이 공습한 곳은 도하 북부의 도하 지하철 레드 라인 카타라 역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해당 지역은 도하 시내를 관할하는 부동산들이 가장 노른자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비싸다. 카타라 역과 그 주변은 주 카타르 폴란드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 그리스 대사관, 헝가리 대사관, 필리핀 대사관, 세르비아 대사관, 이라크 대사관 등 수십개 국가의 대사관이 자리하고 외국인 대상 국제 학교가 모여있는 카타르에서 제일 가는 부촌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레바논, 시리아 등 친 이란 세력을 공격한 전례들이 있지만, 미국, 이집트 등의 국가들과 하마스-이스라엘의 휴전 협상을 주도해 온 카타르를 타격한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근 수개월 동안 가자 지구와 레바논, 시리아, 예멘 등지에서 하마스와 연계하고 있는 세력들을 공격했다. 특히 2024년 7월 테헤란에서 하마스의 핵심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 정치국장을 암살했고, 레바논과 가자 지구 내 하마스 지도부들을 지속적으로 제거해 왔다. 그런데 하마스 휴전 협상 대표단이 모여 트럼프의 휴전 제안을 논의하고 있던 도중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몇 달전, 이란이 미국과 핵 협상을 하려고 시도하던 전날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이스라엘 군은 도하를 공습한 직후 성명에서 군과 이스라엘 보안국이 하마스 지도부만을 노리고 정밀 타격했다고 밝혔다. 네타냐후는 카타르 공습을 두고 예루살렘 총격 등에 대응한 것이라 밝혔다. 이는 전날인 8일에 예루살렘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팔레스타인에 의한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했고 이스라엘인 6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을 두고 한 발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관계자는 미국에게 사전에 통지를 했다고 언급했다. 네타냐후는 이번 공습이 이스라엘의 단독 작전이라 주장했지만 정말 그럴까? 카타르는 중동 내 몇 안 되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친미 성향의 입헌군주정이 있고, 미 공군 기지도 주둔하고 있다. 카타르의 미 공군 기지는 이라크와 이란의 상황이 벌어지면 유사시 대비하기 위한 기지다. 공습 이후에 트럼프 또한 미 공군 기지가 공습당할 뻔했지 때문에 휴전 협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분노하여 불쾌감까지 표시했다고 한다. 미국은 이번 공습을 허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 따라서 이번 공습에 대해 이스라엘에 비판을 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독립국이자 미국의 동맹인 카타르는 평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 왔으며 이와 같은 카타르를 일방적으로 폭격하는 것은 휴전 협상에 대한 미국의 목표를 진전시키지 않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미국 관리들이 하마스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작전에 '그린라이트'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카타르 주재 미국대사관 또한 도하에 미사일 공격이 발생했다는 보고에 따라 '실내 대피'를 발령했다고 했으며 자국민에게 대피 수칙을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카타르의 방공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타르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과 사드(THAAD) 대공 시스템을 포함한 미국의 첨단 방공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미사일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성공까지 시켰다. 이는 카타르가 미사일 발사 경고를 무시했거나, 패트리어트 시스템 및 사드 대공시스템을 미 국방부가 통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6월에 워싱턴이 이란의 핵 시설을 폭격한 후 테헤란이 알우데이드 공군 기지를 공격했을 때 카타르 방공망이 이란 미사일을 격추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과 미국이 짜고, 카타르의 모든 방공시스템의 작동 버튼을 꺼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후자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미국은 이번 공격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메르다드 파라만드는 라디오 프리 유럽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한편 카타르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는 국가였기에 이번 중재를 포기할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 이스라엘과 관계가 좋지 않은 아랍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같은 국가들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도 카타르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이스라엘을 공식 비난했다. 하마스의 지도부가 있었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교전국도 아닌 휴전까지 중재하려 한 제3국의 수도를 공습한 결정 때문에 카타르 내의 국민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거센 상황이다. 무엇보다 공습을 한 지역이 기존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었던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과 국제학교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이다 보니 잘못하면 이들 대사관과 국제학교도 공격에 노출된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에 들어간다. 이는 카타르의 주권을 무시하고 해당 국가의 폭격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영토와 영공 침범으로 해석될 수 있다. 휴전과 인질 석방에 긍정적 역할을 해온 카타르를 공격했기에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명백한 침해로 규정되며 네타냐후는 전범으로써 죄목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한편 휴전 대표단을 이끄는 하마스 정치국 부의장 칼릴 알 하야(Kalil Al Haya)와 또 다른 고위급 차관인 자헤르 자바린(Jaher Jabarin)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신임 하마스의 수장이었던 칼레드 마샬(Khaled Mashal) 또한 회의에 동석했다. 그러나 사망설이 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마스 지도부가 타격을 받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은닉된 지도자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무장 투쟁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테러 같은 카타르 공격은 오히려 페르시아만 일대의 긴장을 불러올 수 있다.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은 이 사건으로 인해 9, 10일 이틀 동안 비행기 운항이 금지되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공항 자체를 오폭 받을 수 있다는 것에서 나타난 조치였다. 페르시아만을 오가는 선박 또한 통제되었고, 도하의 금융시장과 증권의 주가도 순식간에 폭락했다. 카타르의 금융경제권이 흔들리면 이는 중동 전체에 가장 암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중동에서 도하의 입지는 두바이, 마나마, 쿠웨이트를 중심으로 한 중동 경제의 4륜 마차라 불리는 곳이다. 당분간 중동 일대와 페르시아만은 이스라엘로 인해 또 다른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네타냐후의 무모한 행위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네타냐후 또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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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은 카타르의 영토, 영공을 침범한 중대한 국제법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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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
- 시민들 중 상당수가 마오주의자들에 넘어오면서 게릴라 수준의 전투를 벌이던 이들은 전문적 군인들이 훈련시키고 무장 수준도 신식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네팔 정부군은 매우 고전했다. 그러자 미국과 중국도 네팔군을 지원했지만 민심이 나락으로 떨어진 정부군보다도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나날이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네팔에서의 내전은 이전과 매우 다를 정도로 격화되었고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동안 지속된 내전을 통해 사망자는 19,000명에 달했고 난민은 수십만 명의 단위가 되어 인도로 넘어갔다. 게다가 잦은 부정부패로 인해 신용 등급에서부터 악화되어 네팔 경제와 외교에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혼란을 수습해야 할 갸넨드라 왕은 집권 초기부터 라나 가문을 비롯한 부패한 귀족층 내각을 앞세워 2005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왕정을 부활시켰다. 이 사건은 민심을 크게 자극했고 이 혼란을 이용하여 마오이즘 공산당들이 수도인 카트만두 부근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와 같은 혼란을 막겠다고 벌인 선거조차도 야당을 탄압하고, 왕당파들이 절대적인 압승을 거두는 부정 선거까지 자행한다. 이는 민심을 더더욱 자극시켰고, 공산당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에 의해 왕권이 붕괴될 위기까지 치닫게 된다. 결국 마오이즘 공산 반군 세력들을 비롯해 모든 야당 세력에서부터 진보, 좌익, 심지어 우익온건파, 극보수 성향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까지 모두 왕정 타파를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이와 같이 절대 왕정이 부활한지 2년도 되지 않아 왕은 모든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하면서 물러나야 했고, 2007년 12월 25일 마오이즘 공산당과 국회 원내의 여야정당들이 왕정 폐지에 합의했으며, 2008년 5월 28일 첫 총선거에서 마오이즘 공산당 정당이 압승하면서 무려 239년만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내전 또한 함께 종식되었다. 독립 국가로서 네팔의 정체성을 지켜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샤 왕조는 결국 허무하게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네팔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던 인도는 마오이즘 공산주의자 정권을 매우 혐오했다. 이에 인도 동부 차티스가르(Chatisgar) 주 및 웨스트 벵골 주 등 여러 주에도 낙살라이트(Naxalite)라고 불리는 마오이스트 공산 반군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동부와 서부 지역의 빈민가 등에 암약하면서 인도 정부에 저항하고 있었다. 2009년만 해도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민간인들과 경찰을 합쳐 906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마주하는 잠무 카슈미르에서 그 해 사망자가 민간인, 군인 합쳐서 132명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내전급이나 다름 없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인도는 네팔에 여러 혼란이 계속되는 것도 두고 보고 있었다. 마오이즘 공산당 측은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중국은 이를 환영하면서 정작 자신들에게 큰 이익이 못 되는 상황이기에 중국 또한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던 미국이나 인도 정부 때문에, 중국은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여기에 왕정복고주의자들이 일어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 갸넨드라는 폐위된 이후, 갸넨드라 왕과 그의 일가족들은 수도 카트만두 근교 별장에서 거주했다. 이는 권력으로 밀려나 좌절했을지 모르지만, 모아두었던 돈과 인도 및 여러 상류층과의 협약, 각종 부정부패로 축척한 재산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당시만 헤도 비렌드라 국왕의 존경심이 남아있었던 네팔 국민들은 왕실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현재까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여전히 네팔 국회에서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당이 존재한다. 2008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정복고 주장을 하고 있다. 왕정 폐지로 폐위된 왕가를 구심점으로 삼아 옛 왕가를 지지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시민단체 지지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Rastriya Prajatantra) 당 등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야당이 국회에서 원내 4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폐위당했던 갸넨드라 전 국왕은 왕정이 복고될 것과 왕궁 등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몰수당한 왕가 재산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네팔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들은 주로 카스트에서 주로 브라만이거나 크샤트리아 등 상위 카스트 신분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계층 중에는 현재의 네팔 공화국 정부가 하위 카스트 출신들과 마오이즘 공산당 세력들이 일방적으로 왕정을 폐위하고 강제로 성립시킨 불법 정권이라 주장하는 자들 또한 존재한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 서방 국가들과 국제 사회가 현 네팔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취소 및 철회하고, 불법적인 왕정 폐지로 인해 사라진 옛 네팔 왕국의 재건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존재한다. 이들 중에는 네팔 국가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제정된 현 네팔 국가가 아닌 옛 왕국 시절의 네팔 국가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갸넨드라 전 국왕과 그 일가들은 갸넨드라의 제위기간 동안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 갖은 폭정, 부정부패, 각종 국가를 망신시켰던 기행 등 워낙 악명들이 대단하다 보니, 일부 군주주의 지지파 세력들을 제외하고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갸넨드라 재위 시기였던 2000년대 초, 중반 당시에 옛 네팔 왕국 정부군에게 살해당하거나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이 갸넨드라 전 국왕과 네팔 왕실 일가들에게 큰 원한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사이에서는 왕정이 다시 복원되어 갸넨드라가 다시 국왕이 되면, 혹은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이 된다면, 네팔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던지, 아니면 총을 들고 히말라야 산지로 들어가서 반정부 게릴라 전을 일으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왕정을 폐지하고 세워진 현 공화국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네팔 국내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RPP-N) 당은 갸넨드라 전 국왕이 복위하거나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 이들이 네팔 정치와 사회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고려하여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총리와 의회의 권력이 강력한 일본이나 캄보디아, 영국, 노르웨이 등 아시아 및 유럽의 여타 국가들과 같이 군주의 권력이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거나 만약 왕정복고가 안 된다면 왕실이 폐지된 이후에도 옛 왕족 인사들이 옛 왕궁과 별궁 등지에서 거주하게 하는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와 같이 폐위된 옛 왕실 일가 사람들에게 나라얀히티(Narayanhiti) 궁전 등 옛 왕궁에서 거주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 공산당과 네팔 회의 등 정치권의 주요 여야 정당들과 왕정이 폐지된 이후 정치 권력에 진입한 옛 마오이즘 공산당 출신의 네팔 정치가들의 상당수와 네팔 내전 당시 이전 네팔 왕국 정부군이 자행한 정치 폭력과 전쟁 범죄에 피해를 입었던 자국민 피해자들은 갸넨드라와 그의 아들인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군주제 시절에 자행한 악행과 전횡들을 문제 삼아 정계 진출 제안들마저도 반대하거나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갸넨드라가 재위기간에 벌인 실정으로 인한 영향으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현 집권 세력들의 위세와 시민들의 공화정 수호 의지가 매우 강력한 것과 더불어 갸넨드라의 폭정으로 인해 가족이 정부군에게 죽거나 불구자가 된 피해자, 그리고 유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왕정복고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이 군주제의 복고와 왕궁 등 옛 왕가 재산에 대한 환원 주장을 왕당파 세력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일부 국제 정세 전문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네팔에서 다시 왕정이 복고될 경우 권력을 잃고 밀려 나간 자국 내 공화주의 세력들의 반발에 의해 다시 내전이 발발하거나, 최악의 경우 공화국과 왕국으로 네팔이 분단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2021년 1월에는 폐지된 군주제의 복원을 요구하는 군주제 지지 시위가 수도 카트만두에서 발생하여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자국민들마저도 현 공화정권을 지지하는 계층과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계층들로 크게 분열되었고, 이들의 적대감이 매우 심각하다고 전해진다. 최근에는 2025년 5월에 왕정복귀를 요구하는 네팔 내 근왕파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15년 4월 25일에는 네팔 동부에서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각종 구호품과 기부금을 대량으로 횡령하는 사태까지도 벌어졌었고, 2024년부터 SNS를 통해 고위 정관계 인사들의 자녀들, 이른바 '네포 키즈(Nepo Kids)'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들이 틱톡을 비롯한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온라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그러자 네팔 정부는 9월 5일경 유튜브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렘, X 등 총 26개의 SNS를 무더기로 차단했고, 이에 청년층의 분노가 폭발해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틱톡만이 유일하게 차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부유층 자제들이 자신들의 부와 재력을 과시하려는 공간이 틱톡인데다 이것마저 차단하면 그들의 불만마저도 폭발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네팔 정부는 시위가 격화되자 SNS 차단 계획을 철회했지만 여전히 시위대는 정부의 부패와 권위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SNS 차단이 반정부 시위의 트리거 역할을 한 셈이다. 시위대는 네팔 국기를 흔들고 "소셜미디어가 아닌 부패를 척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의 SNS 금지 조치 철회를 촉구했다. 이날 오전 시작된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평화롭게 행진했으나,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일부 인원이 경찰이 친 바리케이드를 부수거나 밀어 재끼고 의회 난입을 시도해 결국 의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자가 나오게 되자 폭력 시위는 더욱 불이 붙었고, 네팔 대통령궁과 총리 공관, 국회의사당, 대법원, 검찰청, 경찰청, 카트만두 지방법원 등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9월 12일까지 전면적으로 페쇄했으며 인도는 우타르 프라데시의 경계를 강화하고 네팔로 통하는 바흐라이히 국경 지대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인도의 항공사 에어 인디아와 인디고 항공은 자국민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오늘 오전부터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임시 운항을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SNS 차단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반발이 원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네팔 국민들의 누적된 분노와 피로감, 그리고 엘리트 계층에 대한 좌절감 등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네팔은 예전부터 고위층의 비리 수사가 지연되는 사건이 많았고, 정치인 친인척이나 자녀들의 과시적 소비 등 구조적인 부패와 족벌주의로 인해 항상 국민들이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시위대의 주요 구호와 요구 역시 '반부패(Anti-Corruption)", 투명성(Transparency)", "책임정치(Responsible Politics)' 였다. 게다가 청년실업률은 약 20%대로 매우 높은 편이라 경제적 불만도 컸다. 결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고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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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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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러시아 드론 출현, 나토에 대한 도발인가, 경고인가? 아니면 자작극?
- 지난 9일, 러시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드론이 폴란드 영공에 나타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이후, 나토 회원국의 영토에 러시아 군사무기가 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폴란드 정부는 이를 침략 행위(Act of Aggression)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문제다. 훨씬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폴란드는 숙적이자 그 이상의 관계였다. 러시아가 모스크바 공국 시절, 폴란드는 러시아인의 씨를 말리기 위해 이반 4세 사후의 혼란기를 이용해 러시아를 침공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강점기 시대 도래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러시아의 명망있는 귀족과, 미닌, 포자르스키 같은 영웅이 나타나 모스크바를 폴란드로부터 해방시키고 폴란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후, 로마노프 가문이 모스크바 공국의 혈통과 혼혈하고, '젬스키소보루' 의회 선거를 통해 모스크바 공국을 공식 계승함으로써 로마노프 러시아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폴란드 강점기 때, 폴란드 압제자들에게 희생당한 러시아인은 거의 200만에 달했다. 학살도 학살이거니와, 노예로 팔려나간 러시아인이 수없이 많았고, 포로로 끌려가거나, 유럽 내 신, 구교 간의 종교전쟁에 총알받이 쓰이기도 했다. 그 후로 러시아인들은 폴란드, 정확히 말해 폴란드-리투아니아라면 이를 갈았다. 이후 러시아는 아주 강력히 성장했을 때 잠깐 폴란드가 러시아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당시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폴란드는 작센과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러시아-폴란드 연합을 구성하여 스웨덴에 맞서 싸웠다. 다만 이는 러시아를 돕기 위해 싸운게 아니라 스웨덴의 군사적 패권을 두려워해 발트해 연안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스웨덴의 야망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때에 따라서 스웨덴에 붙어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려 하는데 이중플레이 역할을 충실히 소화했다. 그리고 그 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삼국 분할하여 폴란드 동부를 지배하여 거의 200년만에 복수에 성공한다. 폴란드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처음에 러시아는 폴란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려 했지만 계속 반란을 일으키고 저항하였기에 자치권을 회수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시켰다.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는 다시 독립했다. 폴란드는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켰고, 국내가 혼란에 빠지며 적백내전의 여파를 미처 수습하지 못한 소련은 폴란드에게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소련이 세워지면서 공산주의가 싫어 소련을 떠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했지만 독일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분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는 소독 불가침 조약의 희생양이 되었다. 서쪽은 나치 독일, 동쪽은 소련군이 점령함으로써 또 다시 분할 통치를 당하게 된 것이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대조국 전쟁 때는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영국, 프랑스 측으로 들어가 나치에 저항했고, 소련 편을 들어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외에 나치에 협력한 상당수의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소련과 싸우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측으로 들어가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인들이 반이라면, 나치에 협력하여 소련과 싸운 폴란드인들은 40%, 고작 10% 정도만이 소련과 협력하여 나치에 저항했던 셈이다. 그 폴란드인의 절반도, 조국인 폴란드가 소련이 아닌, 영국이나 프랑스의 힘으로 독립되기를 원했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폴란드를 나치에서 해방시킨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다시 폴란드 지배했고, 결국 소련이 배경이 되어 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폴란드 입장에서 독일은 50~100년의 원수라면 러시아는 3~400년 넘는 원수로 여겼다. 같은 슬라브계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언어 또한 어느 정도 통한다는 부분이 있지만 가장 서로 적대시했고,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 가상 적국이 되었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또한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다. 최근에는 2010년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가 발생하면서 러시아와 마찰이 생겼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기념행사에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 또한 맞불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역할 문제와 관련해 폴란드를 비난했다. 2020년 8월 3일에는 폴란드 정부가 가즈프롬에게 과징금 5700만 달러(약 681억 5천만 원)을 부과해 러시아의 반발을 샀다. 2021년 1월 후반에 러시아 정부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체포하자 폴란드는 러시아를 대상으로 대러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러시아가 독일, 폴란드, 스웨덴 외교관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폴란드도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난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금과 물자를 적극 지원했다. 2022년 4월 15일에 러시아는 키예프 외곽의 용병 군사시설을 타격해 폴란드 용병 30명을 사살했다. 2023년 4월 29일. 폴란드가 러시아 외교관 자녀들을 위한 고등학교 건물을 대상으로 전격 압류 집행을 했고,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폭발에 어느 정도 일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폴란드는 지속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 및 강경 조치와 적대감을 표시했으면 러시아를 꾸준히 도발했다.그리고 지난 9일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 영공을 여러 차례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F-35 전투기와 폴란드 전투기가 즉각 출격해 드론을 요격하여 떨어뜨렸으며 방공망은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공군은 텔레그램을 통해 드론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폴란드 동남부 지역 자모시치 시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폴란드 영공에 얼마나 많은 드론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드론의 수가 적거나, 아님 자작극일 가능성이다. 이를 판단하는데 있어 나토 측이 밝힌 견해는 “러시아 드론 6∼10대가 폴란드 영공에 침입했고 초기 정황상 ‘고의적 침범’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공격으로 간주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고의적 침범'으로 보인다면서 '공격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니 침범 자체가 공격인데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러시아가 과연 드론을 보냈는지, 아니면 자작극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만약 러시아가 진짜로 보냈다면 왜 보냈는지 등은 아직 알 수 없다. 폴란드는 2022년 폴란드 미사일 피격 사건을 겪은 바 있고, 2023년부터 러시아가 샤헤드-136 드론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 남부와 접하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 지역에 드론이나 미사일 추진체가 불시착하는 일이 드물게 발생했었기에 이번 일 또한 그리 심각히 볼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작극일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지만 러시아가 보냈다 해도 상관없다. 나토의 방어력을 떠 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동안 꾸준히 러시아를 도발한 폴란드에 대한 일시적 경고일수도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나토가 여기에 대응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를 말하지만 난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다. 이같은 일로, 3차 대전은 가장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한편 폴란드 국내로 봊면 양대 정당인 법과 정의당(Prawao i Sprawiedliwość, PiS)과 시민연단(Platforma Obywatelska, PO)이 번갈아 가며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지율이 양당 모두 겨우 30%를 넘거나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말인즉, 지지율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폴란드는 이전부터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지율이 떨어지면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적인 수단을 많이 동원해왔다. 특히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은 지지율 높이기에는 최적인 단골메뉴나 다름 없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폴란드 대부분의 국민들은 러시아를 주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EU 국가 전체적으로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이 가장 먼저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이는 EU 각국의 여당들에 대한 지지도 대폭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끌어올릴 수 있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EU나 나토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말로만 하고 실질적인 대응에 미온적인 것은 경기 침체로 인한 정치적인 위기의 대한 책임을 오로지 러시아에 돌리고 그로 인한 EU 시민들의 결집을 위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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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러시아 드론 출현, 나토에 대한 도발인가, 경고인가? 아니면 자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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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
- 2025년 9월 8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의회 청사 주변에서 수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는 네팔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부격차가 원인으로 고위층 자녀들이 틱톡이나 SNS에 호화 생활을 즐기는 것이 알려졌고 이에 정부가 SNS를 차단하니 발생했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것보다 이 시위가 발생한 원인과 역사, 그리고 외부세력의 개입 등으로 인한 민족주의적인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네팔에서의 시위는 이번 시위만이 가장 큰 시위는 아니었고, 네팔은 민중시위가 매우 잦은 국가에 속하는 나라다. 지난 3월 말에도 왕정복고의 찬반여부를 두고 대형 시위가 있었다. 네팔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여러 개의 작은 부족국가들이 분리된 상태로 인도와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다. 인도에는 고대 마가다 왕국이 있었고, 마우리아 왕조의 통치를 받다가 인도의 분열 시기에 티베트의 강국, 토번에게 흡수되어 오랜 기간 동안 토번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13세기 들어, 몽골 제국의 침입을 받아 티베트와 함께 몽골 제국에 합병되었고, 몽골 제국이 티베트 불교를 받아 들이면서 몽골-티베트 혼혈민들이 오늘날 네팔 땅에 자주 유입되어 현 티베트계 네팔인 탄생하는 원인이 된다. 현재 네팔에는 인도계와 몽골-티베트계 혼혈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네팔에 대해 알려면 이러한 부분들도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1768년 12월 21일에 프리트비 나라얀(पृथ्वीनारायण शाह)이라는 인물의 주도 하에 분열되어 있는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네팔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 때를 흔히 네팔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이어 1814년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영국이 네팔을 침략했다. 그러나 네팔에는 용맹한 히말라야 전사인 구르카(Gurkha)들이 있었다. 구르카라는 명칭은 네팔 왕국의 지역중 한 구성원이었던 고르카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고르카 왕국은 무굴 제국의 침입을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자유 자재로 오가며 게릴라 전으로 격퇴했던 전사인 구루 고락나트(Gorakhnath)가 건국했다. 이후 구르카는 왕국 전체를 지칭하는 별칭이 되었고, 이후 프리트비 나라얀에게 합병되면서 네팔 왕국은 통칭해 영국인들이 고르카 왕국, 또는 고르카 제국(Gorkha Empire)이라 부르면서 이들의 용맹성을 극찬했다. 참고로 시조인 구루 고락나트(Gorakhnath)는 최초의 구르카 전사이기도 하다. 네팔은 구르카들의 용맹을 필두로 저항한 끝에 영국과 종전 협정을 맺었으며 네팔은 영국에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평야지대의 남부 영토 일부를 영국에게 할양한 대신에 국가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멸망한 이후, 벵골 지역을 통치하는 가문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던 라나(राणा, Rana) 가문이 1850년대부터 100여 년 동안 왕가의 섭정직을 장악하면서 벵골 지역으로부터 카스트 제도를 들여왔고 결국 네팔의 부족민들 사이에서 큰 혼란이 발생한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구르카 계통의 샤(शाह, Shah) 왕조가건국되어 절대 왕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샤 왕조도 왕비 및 여러 기득권에 라나 가문 후손들이 득세하면서 현재까지 최대 기득권으로 자리 해왔다. 그러나 1972년에 즉위한 비렌드라 국왕은 1990년부터 네팔의 민주화를 공언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다. 당시 네팔에는 중공의 지원을 받은 과격한 마오이즘 공산당들이 산간 지역을 점거하고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민주화 요구 시위는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었다. 이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서 민주화 열풍이 불면서 여기에 자극을 받은 네팔에서도 다시 대대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폭력 시위가 난무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마오이즘 공산당들 또한 시위에 가세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까지 탄압했다. 이같은 마오이즘 공산당들의 준동은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로 인해 체제 몰락의 위험 및 심각성에서 벗어난 덩샤오핑이 주변국 민주화를 탄압하기 위해, 수많은 로비와 지원을 했는데 당시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자들이 네팔의 마오이스트들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네팔은 무늬만 의회인 판차야트 체제가 존재했지만 민주화 요구 등으로 인해 비렌드라 국왕은 입헌 체제를 선언하면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다시 도입했다. 그리고 마오이즘도 인정해 네팔 공산당이 정식 창립되었고,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네팔 의회당이 이어 창립되면서 정식적으로 네팔 의회가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비렌드라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잘 조절했고,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당시 특사로 온 사람이 바로 최규하 전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존경을 받은 비렌드라 국왕과는 달리 왕비인 아이슈와랴는 네팔 민중들이나 진보파, 좌익으로부터는 공공의 적 1호로 찍힐 정도로 대단한 미움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라나 가문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라나 가문은 네팔에서 뿌리 깊은 권력가다. 라나 가문은 여전히 네팔 내에서 절대 왕정 보수파를 대변하는 가문이다. 따라서 네팔 민중들에게 있어 그 인기는 매우 최악이었지만 네팔의 은행가와 부동산을 장악한 엄청난 대지주였기에 지금까지도 라나 가문은 계속 건재하고 있다. 당시에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지만 150년 동안 네팔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라나 집안 및 소수민족 부족장들 가문인 귀족들은 국가의 자금과 국민 세금을 횡령하는 것은 다반사고 온갖 불법 자금들을 수령했다. 그러다보니 네팔 경제에서 절대 다수의 부는 이들 귀족층들이 가져갔고, 마오이즘 성향의 공산당들은 이를 비난하면서 네팔 시민들의 지지율이 높아졌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해야 하는 네팔에서 인도는 중국이 마오이즘의 공산당들을 이용해 네팔 지도층들을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비난했다. 한편 중국은 오히려 마오이스트들을 견제하고 네팔 정부군에 무기를 제공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이오 인도군이나 부탄군까지도 마오이스트 공산당들을 견제하고 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네팔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01년 6월 1일 비렌드라 국왕의 장남인 디펜드라 왕세자가 왕궁 파티석상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하여 국왕과 왕비, 누이 등 왕족 9명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을 시도하는 네팔 왕실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머리에 총을 발사한 디펜드라 왕세자는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3일 뒤에 사망했다. 네팔 왕실 학살 사건은 왕세자인 디펜드라가 결혼에 반대하는 국왕 부부에게 불만을 품고 저지른 학살이었다. 왕세자디펜드라는 라나 가문의 재무장관인 파스후파티 라나의 딸 데브야니 라나와 결혼하고 싶었데 같은 라나 가문으로 온갖 비난을 받아온 아이슈와랴 왕비가 데브야니는 인도계이고, 자신과 인척 간이기에 반대했다. 그리고 비렌드라 국왕도 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이와 같은 사인 발표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피살된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 찬탈을 노렸고 중국을 배후에 두고 개입했을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갸넨드라는 당시 현장에 없었으며, 갸넨드라의 아내와 아들은 현장에 있었으나 모두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한 국왕과 왕세자 등 왕족 10명이 학살당한 중대한 대참사인데도 불구하고 장례는 부검 없이 속전속결로 치러졌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있어 더 큰 의심을 낳게 했다. 후일 2008년 왕정이 폐지된 이후 네팔 정부는 이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했지만 디펜드라가 정말로 자살을 기도했는지 등도 갖가지 의혹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의혹 속에서 국가평의회는 형식적으로 디펜드라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한 다음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 샤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갸넨드라는 형식상으로 왕이 되었지만, 이 학살 사건으로 인해 왕실 인기가 완전히 추락했다. 이전부터 선왕들과 다르게 갸넨드라는 상류 보수층들과만 어울렸고, 엄청난 네팔 왕정의 재산들을 스위스 은행으로 빼돌려 세탁하는 등,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더불어 갸넨드라를 승계한 파라스 왕자도 네팔에서 시민들에게 인식이 최악이었다. 파라스 왕자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무고한 사람을 치어 죽였고,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당시 피해자는 네팔에서 인기가 많은 대중가수였으며 경찰과 검찰이 이를 대놓고 덮으려고 하다가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네팔 시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받았다. 그로 인해 시민들은 네팔 왕실을 등지기 시작했고 정부군 상당수까지도 왕실에 등을 돌렸다. 게다가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들이 큰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네팔에는 내전의 조짐이 보였고, 2008년 왕정이 폐지되기까지 네팔은 공산주의자와 정부군과 6년 동안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된다. <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주제로 상, 하 두 부분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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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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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제국이 남방에서의 두 번째 패배 - (상)
- 1258년에 베트남에서는 이미 쩐 태종이 태자 쩐 호앙(陳晃)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쩐 호앙은 쩐(陳) 성종(聖宗)이 되었다. 물론 쩐 태종은 태상황제(太上皇帝)로서 매우 오랫동안 정사에 관여했다.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쩐 태종은 1277년에 사망했고 1년 뒤인 1278년 몽골에 공격에 항전하던 남송 또한 멸망하고 중원의 새로운 통치 왕조로서 몽골족의 원나라가 군림하게 되었다. 몽케의 동생이었던 쿠빌라이는 후일 원(元) 세조(世祖)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남송이 멸망할 시기, 원나라에 공물을 보내는 척 하다가 결국 원나라를 무시하며 강경하게 대처했던 3대 황제 쩐 성종 역시 아버지처럼 자신의 아들인 쩐 캄(陳昑)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 자신은 태상황제가 되었다. 즉위한 쩐 캄은 후일 쩐(陳) 인종(仁宗)으로 불리게 된다. 쿠빌라이는 남송만큼이나 강력하게 저항하던 고려(高麗)를 굴복시킨 이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와 베트남을 재정복하기 위해 선박과 수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쿠빌라이는 베트남의 군주에게 입조(入朝)를 명령했지만 여러 핑계만 대며 나타나지 않자, 다시 한 번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친히 입조할 생각이 없으면 대신 학식 있고, 손재주가 좋으며 각 분야에서 뛰어난 명인들을 보내라며 압박했고 태상황제였던 쩐 성종은 결국 대신들 중 쩐 지아이(陳遺愛)、레 묵(黎目)、레 투안(黎荀)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쿠빌라이는 베트남에서 명인들을 보내오자 여기에 베트남으로 다루가치(达鲁花赤)들을 파견해 감독하려 했으나, 황제인 쩐 인종은 이를 완강히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쿠빌라이는 입조 사신으로 왔던 쩐 지아이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삼고 레 묵은 한림학사(翰林學士), 레 투안은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한 뒤 1,000명의 병사를 쥐어주며 쩐 인종을 폐위시키고 쩐 지아이를 즉위시키라는 칙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파악하고 있던 쩐 왕조에서는 당장에 군을 파견해 몽골군 1,000여 명의 병사들을 격파하고 쩐 지아이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고 몽골에 역으로 보내졌던 입조 사신들은 도주할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도주하다 다시 잡혀와 쩐 지아이는 군사를 붙여 티엔즈엉푸(天長府), 레 묵과 레 투안은 통빈(宋兵)으로 유배를 보냈다. 한편, 쩐 왕조의 재상(宰相)이었던 쩐 꽝하이(陳光啓)가 다루가치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이 다루가치는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황제를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 대단히 분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나라는 1284년 7월 21일 자신의 9번째 아들인 토곤(脫歡)을 진남왕(鎮南王)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양양(襄陽) 전투 당시 우량카타이의 아들 아유 밑에서 활약했던 장수 쉬게튀(唆都)를 20만 대군과 함께 보내 광동(廣東)에서 출병했고 바다를 건너 참파(占城)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배후에서 위협을 느낀 베트남은 참파를 돕기 위해 군대 중 일부와 함선을 보내기도 했다. 쉬게튀는 참파의 수도 도반(阇槃) 인근 해안에 상륙했고 도반을 둘러싸고 있는 목조 성채들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북, 남, 동쪽에서 한 번에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성채는 점거되었고 국왕이었던 인드라바르만 5세(Indravarman V)가 쉬게튀에게 항복을 위해 협상하자고 제안하자 협상에 응했으나 참파는 도리어 시간을 끌면서 원나라 군의 보급을 소모시키는 전략으로 임했다. 그 사이에 인드라바르만과 참파의 병사들은 깊은 밀림으로 들어가 저항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와 같은 원나라의 참파 정벌은 사실 베트남을 포위하여 정복하기 위한 포석으로 참파를 점거함으로서 원나라 군은 베트남의 북쪽과 남쪽을 포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참파가 대략 정리되자, 진남왕 토곤은 위구르 족 출신의 아리크 콰야(Arik Quaya)를 부사령관 겸 안남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한 뒤 본격적으로 원정군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출전한 원나라 군의 장군들을 보면 서하 출신의 이항(李恒), 우즈베크 족 출신의 콘칵(Konkak), 볼콰다(Bolquada), 사타르타이(Satartai), 망쿠다이(Manqudai), 나콰이(Naquai) 등의 장수들과 한족 출신의 이방헌(李防憲), 손우(孫優), 손덕림(孫德臨), 유세영(劉稅永), 유규(劉珪), 의윤(儀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번 정벌을 위해 3만 석의 군량미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으며 유능한 의원이던 추경(鄒庚)이 통솔하는 의무 부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쩐 황실에서는 수도 탕롱의 건홍전(延紅殿)에서 원나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를 위한 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각지의 왕과 귀족들이 참석을 거부했다. 이에 1285년 12월 태상황 쩐 성종은 수도 탕롱의 건홍전에서 각지를 대표하는 노인들을 모은 뒤 원나라의 침공에 저항하겠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모두가 하나 되어 전투를 벌이기로 합의하면서 회의가 끝이 났다. 이처럼 쩐 왕조 최초의 민주적인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이기지 못한 각 지역의 왕과 귀족들은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고 원나라의 눈을 피해 몰래 승려로 변장한 뒤 탕롱으로 들어온 흥도왕(興道王)은 왕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보내온 병력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병사들의 몸에 몽골인을 죽이자는 의미의 살달(殺韃)이라는 문신을 새기며 승전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모든 군과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외부의 적이 몰려오면 국내의 모든 군인과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적을 타격하고,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산 속에 숨은 뒤 절대 투항해서는 안 된다.” 쩐 왕조 조정에서는 마침내 쩐 흥다오를 국공(國公)에 임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칭호를 함께 하사했다. “절제하여 천하의 여러 군을 통솔하며(節制統領天下諸軍), 군관을 택하고 장수를 통솔할 권리를 가진다(擇軍校有將才者分統部伍).” 쩐 흥다오는 이로써 전 베트남의 군 통솔자가 되었다. 베트남의 군대는 낭산(諒山) 일대로 이동했고 쩐 흥다오의 본영은 노이방(內龐)에 있었다. 쩐 흥다오는 1차 침입 때 효과를 봤던 작전으로 원나라 군대를 마주하면 후퇴하면서 식량을 파묻거나 불태운 뒤 일대를 비워 원나라 군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작전을 주 전략으로 채택했다. 원나라 군은 나누어 진격을 시작했다. 제1로는 총사령관인 토곤이 지휘했는데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일부를 나누어 이동했다. 토곤 자신은 아리크 콰야와 함께 닌민(宁明)에서 록처우(祿州)로 향했고 해상에서는 볼콰다가 함선을 이끌고 이동하며 온처우(溫州)에서 낭산(諒山)으로 향했으며 사타르타이와 이방헌이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록빈(縣祿)에서 선동(山洞)으로 진격했다. 쩐 흥다오는 가장 중요한 토곤의 제1로를 방어하기로 했다. 제2로는 나시르 앗 딘(Nasir Ad Din)이 이끄는 위구르 군으로서 운남(雲南) 일대를 출발하여 차이 강(齋江)을 따라 베트남 영토로 진입했다. 베트남에서는 제2로를 쩐 태종의 6번째 아들이자 소문왕(昭文王)이었던 쩐 냣두앗(陳日燏)이 맡기로 했다. 제3로는 참파 정벌의 공신이었던 쉬게튀가 이끌며 참파에서 베트남을 향해 북진했다. 첫 전투는 깔리(可里)의 계곡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쩐 왕조의 병사들은 패배했고 장수 도비(導飛)와 도후(導侯)가 사로잡혔으며 이내 쩐 왕조의 지원군과 마주했으나 오히려 베트남군을 격퇴하고 지원군을 지휘하던 장수 쩐 삼(陳森)까지 사살했다. 깔리 전투 이후 5일 만에 토곤이 지휘하는 원나라의 대군이 록처우로 밀려왔고 빈처우(永州), 티엣르옥(鐵略), 치랑(支棱)을 한 번에 공격했다. 1285년 2월 2일, 원나라 군대는 쩐 왕조의 군대가 모여 있는 노이방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베트남 군 장수들 중 도안타이(導案態)가 전사했으며 쩐 흥다오는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반 끼엡(萬劫) 일대로 퇴각했다 이 때 쩐 왕조의 귀족이었던 쩐 끼엔(陳鍵)과 그의 부관이었던 레 탁(黎崱)은 원나라 군에 항복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베트남에서 매국노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이방에서 패퇴해 도주한 베트남의 병사들은 서둘러 반 끼엡으로 향했다. 그와 같은 쩐 왕조의 군사들을 추격하던 원나라 군의 사령관 토곤 역시 반 끼엡 부근에 1,000척에 가까운 배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결을 막기 위해 추격할 배를 만들게 하고 수색할 별동대를 보냈다. 2월 11일에는 원나라의 장수 우마르가 수군을 이끌고 반 끼엡과 치린(至靈)을 공격했다. 우마르가 이끄는 수군은 곧바로 쩐 왕조의 함선과 격돌했고 쩐 왕조의 수군은 일단 승리했으나 원나라 수군의 강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퇴각했다. 2월 14일 우마르의 수군이 쩐 흥다오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이 때 베트남군은 위기의 순간이었으나 그 때 태상황이던 쩐 성종이 빠르게 원군을 보내게 되면서 우마르의 군대를 공격해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 쩐 흥다오는 군을 수습하여 퇴각했고 수도 탕롱 부근의 홍 강(瀧紅) 일대에 도달했다. 원나라의 군대 또한 육로를 따라 탕롱 일대로 진격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반 끼엡을 지나 부닌(宇宁), 동안(東岸)으로 진출했고 즈엉 강에서 베트남군과 다시 마주했다. 쩐 왕조의 군대는 빠르게 퇴각했던지라 원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고 많은 선박들이 나포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이후 토곤은 즈엉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월 17일, 원나라의 군대가 홍 강 근처에 숙영지를 설치하자, 쩐 흥다오도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다는 듯이 홍 강 북쪽에 목재 요새를 건축하였다. 그런데 강 하류에는 이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막강한 베트남의 해군들이 있었다. 사실 이 때부터 쩐 흥다오가 입각한 작전에 따라 황실과 백성들을 성에서 보내 피신시킨 뒤, 성 주변의 논밭을 전부 불태워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이른바 청야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나라 군이 강가에 도착하자 베트남의 군사들은 투석기로 돌을 공략하며 저항하는 한편, 시간을 끌기 위해 고위 인사였던 쩐 칵충(陳克終)을 사신으로 삼아 부장이었던 아리크 콰야의 진영으로 보냈으나 아리크 콰야는 단호하게 쩐 왕조 조정의 요청을 거절했으며 사신으로 보낸 쩐 칵충이 배신하여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베트남군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좀 더 일찍 원나라 군대와 홍 강 강변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고 탕롱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홍 강을 따라 퇴각했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와 접전이 벌어지면서 퇴각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수의 베트남 병사들이 퇴각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원나라 군대는 홍 강 강변에서 승리한 이후 탕롱에 입성했지만 그들이 본 것은 청야가 된 비어 있는 폐허뿐이었다. 총사령관 토곤은 탕롱의 궁궐에 군대를 주둔하려다가 얼마 되지 않아 탕롱에서 군을 철수시켰고 대신 홍 강 근처의 넓은 부지를 찾아 야영지를 세우고 장수인 콘칵, 망쿠다이, 볼콰다로 하여금 육로로 남진하게 하고 이항(李項), 우마르 등은 함선을 이끌고 베트남의 황제를 추격하게 했다. 한편, 제2로를 담당한 나시르 앗 딘의 군대는 차이 강을 따라 투밧(Thubat)까지 진출했으나 쩐 냣두앗의 부대에 의해 행군이 정지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선동 전투의 패배로 인해 베트남의 군대가 반 끼엡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쩐 냣두앗 역시 철수했다. 나시르 앗 딘은 두 개의 둑을 따라 진격하면서 1개 부대를 배치해 선봉으로 세웠다. 쩐 냣두앗은 원나라 군의 계획을 파악하고는 포기할까 하다가 차이 강에 있던 배가 무사히 상륙함으로써 함선을 타고 무사히 밧학(白鶴)으로 철수하는것에 성공했다. 이후 제3로를 이끄는 쉬게튀의 군대를 가로 막으며 남쪽 전선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황제와 황실, 조정은 홍강을 따라 티엔즈엉(天長)으로 후퇴하였고 원나라 군대는 군을 둘로 분리하여 추격했다. 추격하는 군대와 도주하는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고 마침내 두 나라의 군대가 다막(沱幕)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쩐 왕조의 장수 쩐 빈쩡(陳平仲)이 황제가 파천힐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그의 휘하 6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다막 강가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저지했고 마침내 포로가 되었다. 원나라 측에서는 쩐 빈쩡의 결사대를 뚫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무려 6차례나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원나라의 장수는 포로가 된 쩐 빈쩡이 왕족임을 알고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자신들이 점령한 북쪽의 왕이 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북쪽보다 주군이 계신 남쪽에 있기를 바라고 우리는 사로잡히면 죽을 뿐이다! 세삼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냐?” 결국 쩐 빈쩡은 베트남을 위해 절개를 지킨 채 향년 26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후일 베트남에서는 쩐 빈쩡이 의(義)를 지켰다고 하여 보의왕(保義王)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두 번째 전투는 하이티(海市)에서 벌어졌는데 베트남군은 강에 말뚝을 박아 막았으나 원나라 군은 이러한 점을 예상해 간단히 통과해 버렸고 베트남의 군대는 다시금 패배해 후퇴했다. 하이티에서의 전투 이후 베트남의 군사들은 티엔즈엉과 쯔엉이엔(長安)에 주둔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군대가 곧 도착하였고 비슷한 시각에 반 끼엡에 있던 쩐 흥다오가 1,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도착했다. 한편 쩐 흥다오의 부장 중 하나인 팜 응우라오(范五老)는 낭산을 포함한 남방의 빈빈(永平) 일대에서 끊임없이 기습을 가해 원나라 군대에 피해를 주며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에 원나라의 장수 아리크 콰야는 이와 같이 전세가 불리해져가는 정황을 상세히 기록해 정찰병 편으로 황제 쿠빌라이에게 보냈다. 군을 규합한 이후 쩐 인종은 1285년 3월 10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리냔(里仁) 일대에서 원나라 군과 격돌했으나 원나라 군의 강한 저항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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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제국이 남방에서의 두 번째 패배 -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