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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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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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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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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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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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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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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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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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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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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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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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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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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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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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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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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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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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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터키 이스탄불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 상태일까?
- 이스탄불은 2022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이어진 달러화 강세와 리라화 약세로 인해 터키 내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리라화 약세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2023년 상반기까지 고수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고물가 저금리의 비정통성 경제 정책의 영향이 크다. 이로 인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저하되어 외국인 투자가 상당수 감소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달러를 매각하면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외환보유고가 급감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임 성공 이후, 전 부총리이자 정통적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메흐메트 심셰크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전 골드만삭스의 이사였던 하피제 가예 에르칸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하면서 고물가에 대응하고 정통적 경제 정책으로 회귀할 것으로 기대를 모있다. 고금리는 죄악이라 주장하며 높은 물가에도 불구하고 약 2년 반 동안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온 에르도안은 재임에 성공한 이후 6월부터 금리 인상을 감행하여 2023년 5월까지 8.5%였던 금리를 5회에 걸쳐 35%까지 인상했다. EIU를 비롯한 글로벌 경제기관들은 터키의 기준 금리가 최소 45~50%대에는 진입해야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천정부치로 올랐다.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파격적인 금리 인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약 2.5~5%p 가량 인상하여 선거 시즌인 3월까지 최대 37.5~40%대를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오늘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42.5%에서 45.0%로 2.5%포인트 인상했다. 국내 수요와 서비스 가격 경직성, 지정학적 위험 등으로 물가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통화긴축의 효과 지연을 고려하면 현재 필요한 긴축 수준에 도달했다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스탄불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평균 230~250리라 (한화 약 10,130원~11,000원)을 호가하고 있고 이것 저것 산다해도 200리라 (한화 약 8,800원)을 가뿐히 넘기고 있다. 외식 한 번 하면 250리라가 문제가 아니라 터키 차이나 커피도 마셔야 하니 적어도 350~380리라 (한화 약 15,400원~16,700원)은 가볍게 넘겨야 한다. 이 살인적인 물가에 상당수의 터키인들은 길거리 캐밥 하나 (100~150리라, 4,450원~6,600원)을 사고 그마저 감당이 안 되면 40리라 (한화 약 1,760원)짜리 길거리 군옥수수 하나를 사서 끼니를 때운다. 터키 차이도 동네마다 다르긴 한데 탁심이나 이스틱클랄 지역은 70리라 (한화 약 3,080원) 호가하고 술탄아흐멧이나 베이지드 일대에도 싸면 50리라 (한화 2,200원) 정도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올랐다. 아무래도 차값이 미친 모양이다. 아메리카노 커피는 70리라~100리라 (한화 약 3,080원~4,450원)로 한국과 근저한 가격까지 올라왔고 배낭여행자들은 아메리카노와 터키 차이를 후식으로 포기하고 30리라 (한화 약 1,320원)짜리 생수를 사서를 마신다. 요즘 이스탄불은 일반 서민 뿐 아니라 여행객들도 고물가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많은 수혜를 입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터키인데 서민 경제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듯 하다. 이스탄불 서민들이 에르도안의 이상한 경제정책으로 인한 불만이 높은 상황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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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터키 이스탄불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 상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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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어떻게 같은 무슬림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나?
- 알라위파(Alawites)는 시리아에서 주류 이슬람 분파는 아니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내부 권력을 장악한 뒤, 시리아에서만큼은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 12이맘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의 사후 그의 측근이던 이븐 누사이르(ابن نصير)가 후계자를 자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12이맘은 시아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메시아적 사상"을 갖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이러한 사상 자체가 전무한다. 애초부터 선거로 칼리프를 뽑는 것에 찬성했으니 혈통적인 부분은 그다지 중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에게 있어 "메시아적 사상"은 필연이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의 영적 지위와 기능을 알리(Ali)와 그의 혈통에서 비롯된 11명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신의 화신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임무도 표면적으로는 기적으로 보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최후의 11번째 이맘은 그 스스로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12번째 이맘은 873년 무함마드(Muhammad)라는 인물로 그가 4세 때 마흐디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마흐디의 집 지하 저장소로 사라졌다고 한다. 시아파들은 제12대 이맘은 살아있고 언젠가 마흐디(Mahdi)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마흐디(Mahdi)는 시아파에서 세상을 구할 인물인 구세주이며 메시아이자 세상을 심판할 심판자로써의 임무를 갖고 있다 믿는다. 그래서 시아파들은 마흐디가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제12대 이맘 즉 “숨은 이맘(Hidden Imam)”이 예배를 듣고 이 세상의 일을 중재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란의 주류가 되어 있는 시아파는 12이맘파가 주류가 되어 이끌고 있다. 반대로 알라위파(Alawites)는 이븐 누사이르를 10대 이맘의 지명을 받아 그를 칼리프로 내세웠기에 12이맘파의 배척을 받았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12이맘이 아니라 10이맘파라 하여 10명의 혈통적 이맘만을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12이맘파에서 빠져 나온 이븐 누사이르는 사실상 알라위파의 창시자라 볼 수 있으며 알라위파를 경멸하는 여타 무슬림들에게서 '누사이르 파'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알라위파의 창시자인 이븐 누사이르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시아파에서 분파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종파 분리로 인해, 시리아 내전 당시 이란 측의 미적지근한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결과가 되기도 한다. 알라위파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 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1,000년을 넘게 동부 지중해 지역의 소수종파였지만 다른 종파들이 흡수되고 사라짐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던 종파였다. 알라위는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시아파 극단주의 및 암살단파 등의 영향을 받은 매우 복잡 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가 아닌 이븐 누사이르를 숭배한다는 종교적 오해 아닌 오해로 인해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그로 인해 빈곤에 시달려 수백년 넘게 고생했다. 이들의 교리 또한 상당수가 사라지고 변형되어 왔는데 이미 13세기에 들어 주류 이슬람에서는 알라위가 불신자와 다름없는 이단 취급을 받았던 신세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했으나 이후에는 이들이 수니파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자 이슬람 세계를 파멸시킬 전략으로 알라위를 포섭하여 분열시킬 요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맞아들여 자신들을 배척하고 박해한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수니파의 유명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ابن تيمية)는 알라위파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감행했다. 타이미아는 알라위파를 두고 카르마트파나 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라 혹평했다.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알라위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고 했다. 또한 그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으며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고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이미야의 비난은 매우 호전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알라 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다. 타이미야가 살아 있던 14세기 당시 알라위의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기도 하면서 현재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에서 알라위파를 토벌하는 작전에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 세차례 직접 참전했다. 그 결과로 인해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수니파와 맘루크 정권의 박해를 피해 수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시아 12이맘파로 다시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서술된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에게 돌아선 알라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박해했다. 특히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궤멸적 참패를 당하자 보호막이 없어진 알라위파는 박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정체를 숨기고 은거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대가 되면서 알라위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그동안 박해로 인해 많은 수가 줄어 소수에 불과한 데다 이단 취급 받는 것은 여전했고 세력도 미미하다시피한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나 비슷하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던 드루이즈는 적어도 레바논 아미르 국에서 대대로 제후를 배출하여 세를 넓히는 바람에 지배 계층 자리에 있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 이에 비해 알라위는 매우 처지가 열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 데다 대부분 경제력 없는 농노들이었으며 관료로 배출되는 이가 없다보니 대부분 수니파 지주들에게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이에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졌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오스만 제국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에서 차별을 받았고 임금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나아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선봉에 세워 총알받이의 목적으로 빈약한 무장에 무조건 진격을 시도하게 하여 최전방으로 내몰았다. 교육 수준도 매우 처참하여 시리아 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부친이자 전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알라위파로 자신의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지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오스만의 영토였던 시리아에 프랑스가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다르게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있던 1941년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보호 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로 인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를 토대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 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위파는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출세를 위해 대규모로 입대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있다며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알라위파들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고 자신들을 탄압하던 수니파를 매우 증오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는 급격히 서구화 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군사적인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고 군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 통치 이후에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로 성장했기에 이전의 지배자였던 수니파들은 더 이상 알라위파를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상 프랑스가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를 키워준 셈이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당시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은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와 대화를 나눈 바 있었는데 해당 지도자는 알라위파가 과거 3-400년 동안 핍박을 받다가 이렇게 대우를 받다 보니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놓아두면 분명 시리아의 주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된 정당 의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로만 인구 조사 형식으로 나눈다 포고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1970년에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쟁취한 이래 알라위파는 마침내 시리아의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 볼 때 1,000년이 넘게 탄압을 받아 소수종파로 전락하면서 생존을 걱정했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드디어 기득권 주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이어져 2024년까지 늦게서야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라위파는 주위의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된다. 알라위파는 이들에게 테러와 각종 반란 시도에 직면하면서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발생하고 있던 각종 지역 감정들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목적을 내세워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알라위파 요인들과 친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Hama massacre)과 같은 강경정책으로 대처했으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면서 마침내 정식 시아파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한편으로 수니파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수니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정부 공무원 할당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수니파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며, 수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 1,000년 이상 대립해온 수니파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어 기독교와 드루이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 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동맹을 맺고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정책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그러나 알라위에 대항하고자 하는 근본주의 세력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페즈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존재하던 2015년 4월,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 명 중 ⅓이 시리아 내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하는 ISIS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및 알 카에다 세력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 하는 자유 시리아 군은 무능력한 상태라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항상 불안을 달고 살아야 했다. 시리아 내전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함께 반군과 맞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보면 알라위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안하고 잔인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사드 부자의 집권기는 1,000년이 넘는 알라위파의 역사에서 늦게나마 맞이한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에서 축출된 현재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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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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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어떻게 같은 무슬림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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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마지막 마지노선 이스탄불 협상의 실패
- 작년 2024년 3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5번째 대면 협상이 열렸다. 여기에서 '평화 협정(Peace treaty)'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도 이스탄불에서의 협상이 끝난 뒤 별도로 가진 양국 대표의 기자 회견을 통해 전해졌다. 양측의 회견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하루 만에 끝났다. 본래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최종적으로 합의까지 이르기에는 몇 차례의 큰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스탄불 회담을 중재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6가지 협상 쟁점 중 4가지 부분에 있어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합의가 될 수 있는 4가지 조건은 첫 번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철회하는 것, 두 번째,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세 번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안보 보장, 네 번째, 우크라이나 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이다. 물론 타결되지 않고 있는 나머지 두 가지는 돈바스의 독립과 더불어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핵심적인 목표로 내세웠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비무장화와 나치의 세력인 아조프 대대 및 프라비섹토르 세력의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돈바스를 보호하는 조건에 있어 협상 내용에서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나치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치의 깃발을 앞세워 선동하는 세력들을 거의 제압했다 여겼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더불어 오늘 남부 항구도시이자 최대 격전지인 마리우폴의 도심 돈바스 군의 통제 하에 들어왔고 아조프 대대의 근거지였던 마리우폴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CNN 방송도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다고 보도했으며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역 대부분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며 마리우폴 함락을 사실상 인정했다. 터키 언론인 휘리옛과 TRT에 의하면 이스탄불 협상이 이전 4차 만남에서 러시아 협상단이 우크라이나 협상단에게 문서로 정리해 넘긴 제안서에 대한 답변 문서를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협상단은 협상에서 구두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러시아의 제안을 문서로 전달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협상단 단장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크레믈린 보좌관은 협상 종료 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적이고 비동맹적인 지위와 비핵국가 지위의 추구를 확인하는 제안을 문서로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에 의하면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거부하는 것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외국 군사기지와 더불어 외국의 군대 배치 금지 조항이 포함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증해주는 EU 국가 및 나토 국가들의 동의 없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제안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국제법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영구적 중립국을 선포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나 비교적 최근의 민스크 협정보다 더 강화된 다국적으로 조약을 비준하여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다비드 아라카미아 우크라이나 여당인 인민의 종 대표가 말하기를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 동안 보증했던 국가들이 서명하고 비준하는 국제 조약의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터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참여 가능한 국가들을 안전 보장의 보증 국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들로부터는 이미 참여를 허락을 받았다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할 경우, 보증 국가들은 3일 간의 협의 후 우크라이나에 무기 및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 영공을 폐쇄해야 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보증하는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TRT는 협상 중 휴식 시간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과의 인터뷰에서 논의의 핵심 쟁점은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에 관한 국제 조약이라 역설하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조약 및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 받는 것이 서로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차후에 다시 있을 6번째 만남의 쟁점은 모든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휴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구체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푸틴과 젤렌스키가 정상 회담을 가지며 승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것으로 방침을 최근에 바꾸었고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와 최고 의회 라다에서의 승인 및 안보 보증 국가 의회의 비준 등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군이 개전 전날의 위치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안보 협정의 국제적 조약 서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대한 근접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협상이 싸인되지 않으면 군사작전 종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알렉산드르 포민 러시아 국방차관은 상호 간의 신뢰를 높이고 향후에 협상할 수 있는 필요 충분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키예프와 체르니코프에 대해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 이 말은 북쪽의 전선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군에 열세에 놓였다는 말과 다름없다. 따라서 북쪽 전선은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오늘 러시아 영내에 있는 벨고로드 군수창고 폭발하여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리아 노보스티(РИА Новости) 국영 통신사는 러시아 긴급 구조대 대표 말을 인용해 "벨고로드 인근에서 발생한 군수창고 폭발은 인재"라고 보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된다는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북쪽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열세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러시아의 협상단은 군사활동의 축소가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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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마지막 마지노선 이스탄불 협상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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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심각한 우크라이나 군 손실
-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병력 손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의 전투에서 죽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하루 평균 전체 부대원의 5%에 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일 간 전투를 치르면, 부대원 절반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전투가 치열했던 쿠르스크와 수미 일대에서는 전투 중, 부대의 2~3배의 병력을 잃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은 보통 10~15일간 최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교체된다. 한 부대의 부대원 중 15~20%가 최전선에, 나머지는 2선과 3선 방어선에 주둔하는데, 15일 정도 지나면 순환 배치되는게 현재 상황이다. 이는 러시아군의 맹공으로 인해 최전방 부대원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도의 피곤함과 더불어 옆 동료를 잃은 슬픔과 공포감을 호소한다고 하였다. 이어 새로운 부대로 교대하기 어려운 지역도 있다. 그런 곳 중 하나가 쿠르스크 전선이다. 쿠르스크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의 포위로 인해 부상병들의 후방 이송마저 어렵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무기 중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는 러시아군의 화염방사기 시스템인 '토스'(TOS, 러시아어로는 TOC)와 항공기에서 투하되는 강력한 위력의 'FAB' 폭탄(대표적인 모델이 ФАБ-250М-46)이다. 이 무기들은 참호 속에 아무리 깊숙히 몸을 숨기고 있어도 피해가기 어렵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의 한 장교는 토스가 공격을 감행하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토스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스의 위력은 부상자도 없이 모두 살상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전폭기가 우크라이나군의 방공망과 휴대용 스팅어 미사일을 우려해 자주 출몰하지는 않고 있지만, FAB 폭탄이 한 번 떨어지면 아무리 단단한 요새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파괴된다고 밝혔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이 전쟁 초기에 하급 지휘관도 전장에서 독자적인 상황 판단 및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수평적 명령 체제를 발동시켜 러시아군을 한동안 제압이 가능했다면서 지난 1년 동안 전쟁 경험이 풍부한 하급 지휘관들이 많이 전사하면서 전투 현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전선에 배치된 대부분 우크라이나군의 전장,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러시아군의 포격을 피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바로 옆 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우크라이나군이 발사한 드론은 바로 이웃의 아군에 의해 격추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개조해 사용하는 민간 드론에는 식별 장치가 부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 저하와 혼란은 극심한 포탄 부족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투 경험이 적은 사병과 장교들의 역량에 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계속되면 병력과 무기 탄약이 부족한 측이 더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몰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 장교들의 통솔과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다면 수없이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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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심각한 우크라이나 군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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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건 찬성에 대한 '비판'
- 작년 2024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G7, 나토 정상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을 찬성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대신, 우크라이나에게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G20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G7에 12개의 신흥국과 주요경제국 및 EU를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금융, 외환 등에 관련된 국제적 위기 대체 시스템의 부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1999년 9월 IMF 연차총회 당시 개최된 G8 재무장관회의에서 G8 국가와 주요 신흥시장국이 참여하는 G20 창설에 합의되면서 창설되었다. 미국 최대, 최악의 금융 위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Crisis) 사태가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참여한 나라들 간에 첨예한 의견 대립이 보이며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한 환율조작 문제까지 생기게 되면서 G20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가기 시작하고 EU내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G20의 역할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라는 핵심 축의 존재와 신흥국가들의 영향력 강화로 인해 현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G8을 대체하는 국제기구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크라이나가 세계적 시장 흐름에 따라 갈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 여력이 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 산업 시설을 시찰해보면 알겠지만 서부 지역은 농업에 치중되어 있고 공단 등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부실한 기계와 공장 설비 등을 보면 이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수십년은 걸릴 것이다. 그것을 미국이나 서방이 무상으로 지원해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가 모두 돈으로 사야 한다. 도로 하나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 아스팔트가 너덜너덜하고 깨져 있는 상태에 차를 타면 수없이 머리와 천장이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나라에 무슨 경제적 역량이 된다고 우크라이나가 G20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현재 G20 구성원들의 인구를 합치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달한다. 또 이들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한 값은 전 세계의 85%에 해당하며, 세계 교역량의 80%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 경제를 대표하는 모임이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몇 개가 있으며 우크라이나로 인해 세계 경제가 영향을 받을 확률은 몇 %나 될까? EU 시찰단이나 미국,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는 국가의 대표들이 우크라이나 내부의 시설을 돌아본 적은 있을까? 한 마디로 전 세계에서 돌아가는 경제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바이든의 이른바 립서비스로 보인다. 그러나 이게 립서비스가 아닌 진정이라면 G20에 대한 모임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고 애당초 그럴꺼면 1인당 GDP 3,500불 수준의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도 포함시키는게 합당하다. G20이 아나라 G40까지 불려도 상관이 없다. 미국의 논리대로라면 이들도 경제가 망한 국가들이니까 충분히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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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러시아를 G20에서 제외시키는 안건 찬성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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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 인더스 강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모체가 되는 강이다. 현재도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각종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인더스 강은 티베트 고원 서부에서 발원하여 총 길이가 2,880~3,180km에 달한다.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아라비아 해로 들어간다. 인더스 강은 모두 19개의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 중 하나로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 3개의 국가들을 통과하고 있다. 인더스 강은 파키스탄이 93%, 인도가 5%, 중국이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폭이 좁고 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강의 지류들이 속한 강 유역은 역사적으로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는 물론, 파키스탄에서 거의 유일한 곡창 지대로 식량 경제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는 지역이다. 20세기에는 운하를 비롯한 많은 관개 시설들이 건설되어 110,000㎢ 이상의 농토에 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강 체계(River System)로 나타나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인도-아시아 대륙 서북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하고 있다. 그러나 인더스 강 상류가 인도 국토를 통과하여 파키스탄으로 흐르고 있기 때뭄에 1947년에 분리 독립한 이래 인더스 강물의 분배 문제가 양국 간의 큰 현안이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60년 세계은행(World Bank)의 중재로 ‘인더스 유역 조약(Indus Waters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인더스 강의 강물을 양분하게 된다. 이는 세계은행의 중재로 이루어졌지만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인더스 강 수운에 위협을 가한다면 국제법을 위법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된 것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우선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상류의 수량을 인도가 조절하여 자국의 농경지를 위협하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1948년 양국은 인도가 수량을 충분히 공급하는 대신에 파키스탄이 매년 일정 부분의 금액을 인도에 지불한다는 잠정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보다 영구적인 효력을 갖는 협정의 필요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양측은 진전된 절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인도는 인더스 강 지류들의 물길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고 해도 파키스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파키스탄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고 했으나 인도는 이에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 양측은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여기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개발전문가이자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 와 원자력위원회 (AEC) 위원장인 데이비드 릴리엔탈(D. Lilienthal)은 인더스 강 유역을 탐사하며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1951년 세계은행에 갈등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에 세계은행은 릴리엔탈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인더스 강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우선 릴리엔탈과 세계은행은 인더스 강 문제를 기능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나누어서 접근했다. 이는 인더스 강 유역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와 수량 할당과 같은 경제와 직결된 정치적인 접근보다는 인더스 강의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양국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설득 과정에 있어서 운하와 저수 시설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세계은행의 적극적인 자금 지원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써 무려 8년에 걸친 협상을 통해 1960년 9월 19일 파키스탄의 카라치(Karachi)에서 인도 수상 네루(J. Nehru)와 파키스탄 대통령 인 아유브 칸(Ayub Khan)이 서명함으로써 오랜 갈등이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 측의 서명 당사자가 인도의 수장인 대통령이 아니라 수상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더. 인도의 공식적인 대표자는 분명 대통령이고 인도는 대통령 중심제로 정치체가 운영되는 국가다. 수상이 이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은 조약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2016년 9월 인도 연방 최고 법원에 공익형사소송(Public Interest Ligitation)이 재기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따라서 2016년 9월 25일 인도는 당시 세계은행의 조약 중재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파키스탄 다시 마찰을 일으킨다. 당시 인도령 카슈미르 우리(Uri)의 인도군 기지에 대한 파키스탄 무장단체의 습격사건이 발생했고 19명의 인도 군인이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더스 강 수원에 대해 전면 재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두 달 뒤인 11월 15일에는 펀자브(Punjab) 주의 선거 유세에서 모디 총리는 세계은행에 의해 인더스 강의 파키스탄 측 지류인 수트레즈, 베아스, 라비 강물은 인도와 인도 농부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흘러가는 이 강물은 농토에 사용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고 했다. 따라서 인더스 강물의 한 방울이라도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해서 펀자브와 잠무‧카슈미르의 인도계 농부들이 사용하게 하겠다고 연설하며 이들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2016년 12월 23일에는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어 가는 모든 지류를 봉쇄하는 계획을 담당할 ‘세계은행 태스크 포스’를 조직했다. 그리고 같은 달인 25일에는 인더스 강 인도 측 상류 지역에 대규모 저수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인도 언론에 보도되면서 인도가 파키스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모든 수원을 인도 측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혹이 재기되었다. 물론 인더스 강 조약의 주요 내용은 인도 측이 인더스 강 동안의 수트레즈(Sutlej), 비아스(Beas), 라비(Ravi) 등 3개 지류를 갖는 것으로 하고 파키스탄은 서안의 체나브(Chenab), 젤룸(Jhelum), 인더스 강 본류(本流)의 관할권을 갖는 것으로 했었다. 물론 이는 인도가 동안의 지류들로부터 약 3,300만 에이커 피트(Acre feet)의 수량을 공급 받고 파키스탄은 약 12,500만 에이커 피트를 공급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인도는 파키스탄의 약 20%의 수량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파키스탄에 있어 큰 헨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인도는 서안의 지류들로부터 최대 약 70만 에이커의 농지의 관개 용수로 사용할 수 있으며 125만 에이커 피트를 초과하지 않는 새로운 저수 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 또한 인도 측은 수력 발전을 위한 160만 에이커 피트를 확보하는 한편 75만 에이커 피트 내의 홍수 방지용 저수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인도의 잠무-카슈미르(Jammu-Kashmir) 주는 충분한 관개 용수 확보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수력 발전 용수가 충분하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된다. 물론 파키스탄 측에서도 일부 지역의 홍수 대비용 댐 건설이 제한되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1988년부터 파키스탄이 좌안 하수 배출 수로(Left Bank Outfall Drain)’를 착공하여 운영함으로써 발생했다. 해당 수로는 약 500km에 달하며, 아라비아해의 영향으로 염분이 많고 관개 용수로 적합하지 않은 오수들을 파키스탄 측의 인더스 강 삼각주 지대를 우회하여 쿠치 대사막을 통해 바다로 흘려 보내려는 목적에 있었다. 이러한 파키스탄 측이 일방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쿠치 대사막이 있는 인도의 구자라트(Gujarat)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이 세계은행이 중재 하에 체결한 조약문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하수 배출 수로가 90% 정도 완성된 2002년 이후 구자라트 주의 인더스 강 지류들에게서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아라비아해 연안의 염전들이 오수로 인헤 오염되었으며 52개 종의 동식물이 피해를 입는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면서 인도 측의 비난을 샀다. 2016년 하수 배출 수로에 대해 세계은행의 중재가 진행되고 있으며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공사는 중지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인도가 잠무-카슈미르에 건설하고 있는 키샨강가(Kishanganga)와 라뜰레(Ratle) 수력 발전소도 양국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었고 2016년 12월 12일 세계은행이 개입하여 공사를 중단시킨 바 있다. 그러던 현재, 잠무-카슈미르의 테러로 이를 인도에서는 파키스탄과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테러단체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인더스 강 강물을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인도 정부 측의 발언은 파키스탄에 대한 위협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에 있다. 이는 인도가 파키스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군사적 방법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의 이러한 차단 의지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부분들이 매우 많은데 양측이 체결한 국제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발생하는 국제 외교적 신뢰도 하락 문제 등은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파키스탄의 수천만 농부들의 생계가 달린 물줄기를 차단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권 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도 있기에 오히려 인도에게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의 경우, 독자적으로 인도의 이러한 시도에 물리적으로 저항하거나 반격하는 것보다는 UN과 국제 중재 재판소, 국제 물 분쟁에 관한 협약 등을 근거로 국제 여론을 조성하면서 이와 인도의 행위에 공동 대응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치인 중 일부는 우방인 중국을 설득하여 티베트에서 인도로 흐르는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을 차단하여 인도 동북부의 농업에 타격을 주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중국 또한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보여 진다. 지난 80년 가까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인더스 강 문제도 장기적으로 긴장과 소강을 반복하는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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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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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
- 9세기 동북아시아는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어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들로부터 상선들이 보호를 받았다면 동남아시아에는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 인물이 없었기에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려면 해적들에게 일정부분 상납해야 통과할 수 있다. 상납을 거부했을 시, 어김없이 약탈을 당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졌다. 그러니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남아시아 해안에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해적들을 보는 즉시 족족 격파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막강한 총포의 위력 앞에 그 악명 높던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은 무력했다. 결국 해적들은 이 일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수마트라와 말레이 일대의 육지에서 생활하는 일부 해적들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필자가 미얀마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에 중국의 미얀마·인도 실크로드 전략은 외교수사에 불과한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중국의 국경 도시 뢰이리(瑞麗)로 넘어가는 순간 이러한 의문은 사라졌다. 이곳에서 이미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뢰이리까지 이어지는 철도공사가 진행 중이며, 항주~뢰이리 고속도로도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건설이 완료된 미얀마 경유 가스·원유 파이프라인도 뢰이리를 지나고 있다. 중국은 2006년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하면서 미얀마를 경유해 인도양으로 진출할 계획을 추진해 왔다. 지금도 그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미얀마 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인도양 진출과 실크로드 건설을 위한 내부 역량 강화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실크로드 건설 전략은 시진핑 시대의 중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진핑은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 방문 시 중국 서부 내륙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 경제 벨트 건설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연설에서는 해양 실크로드 건설을 제안했다. 중국남부 연안을 동남아, 남아시아 해양 지역과 연결하자는 구상이다. 해양 수송로 연결과 무역뿐 아니라 자국 화폐로 무역정산 결제, 스와프 등 금융과 화폐협력까지 상정하고 있다. 이 중의 한 가닥인 미얀마·인도 실크로드는 인도양 진출 전략의 업그레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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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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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루블화 지불 의무화와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변화
- 2022년 3월 23일 푸틴 대통령은 정부 회의에서 적대국들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 대금 지급 방법을 루블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었다. 푸틴 대통령은 일주일 내에 달러와 유로화 대신 루블 결제로 바꾸기 위한 체계를 만들라고 중앙은행에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EU나 미국에 러시아 상품을 선적하고 달러나 유로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 유럽에 수출한 가스 대금으로 주로 유로를 받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뒤 EU와 미국 등 각국은 러시아 경제제재를 발표했고,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터키 리라화 수준으로 폭락했다. 우크라이나에 군사작전 개시하기 전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75루블 수준이었는데 3월 초 한때 110루블 이상으로 사상 최저치로 가치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100루블 수준으로 조금 회복되었다. 러시아는 경제제재에 반발해 경제제재에 동참한 나라들인 EU 회원국과 미국, 영국, 한국, 일본 등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비우호국에 대해서는 러시아 정부와 기업이 졌던 채무를 달러가 아닌 루블로 상환할 수 있게 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따라서 러시아 외환 보유액 중 서방 은행에 맡긴 자금 상당액은 제재 여파로 동결된 상태인데다 이 때문에 러시아 디폴트 우려가 제기되었었지만 지금은 한 고비 넘긴 상태에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루블화로 가스를 결제하라는 조치는 에너지 전쟁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다. 유럽 등 비우호 국가들을 대상으로 천연가스 매각 대금을 유로나 달러가 아닌 자국 루블화로만 받겠다는 선언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 루블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그에 대한 조치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 비중이 높은 독일은 계약 위반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재를 강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입장에서 내놓은 자구책인데 유럽이나 미국이라 러시아에 했던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가스를 판매국인 러시아가 자기 마음대로 결제 수단을 선택하겠다는데 미국이나 유럽이 이와 같은 러시아의 행위를 과연 예상하지 못하고 제재를 가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가 천연가스나 원유 공급 대금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받는 것이 어려워지게 만든 것은 미국과 서방이다. 그래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제재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은 셈이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부 장관은 루블화로만 결제하라는 요구는 계약 위반이라고 했으며 유럽 협력국들과 대응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천연가스 수요량의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리투아니아 국유 가스 기업인 이그니티스도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으로부터 가스 구매를 중단하고 루블화 결제도 하지 않겠다며 반발했다. 오스트리아 화학회사 OMV의 알프레드 스턴은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하기를 천연가스 비용을 지속적으로 유로를 내며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푸틴 대통령의 발표 이후 공급 차질 우려로 급등하게 되었다. 유럽 시장의 천연가스 가격을 대표하는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이날 MWh당 117.00유로로 18.49% 올랐다. 그로 인해 루블화의 가치는 예상대로 상승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이날 8% 넘게 올라 96루블대에 진입했다. 제이슨 투비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번 조치가 폭락한 자국 통화 가치를 복원하고 러시아의 서구 금융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반면 투비는 푸틴 대통령 결정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WSJ는 루블화 의무화가 러시아의 에너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수요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천연가스 뿐 아니라 원유 수출 대금도 루블화로 받을려 하고 있다. 국제 유가도 러시아의 루블화 결제에 대한 충격으로 5% 넘게 올랐다. 이날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된 브렌트유 5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5.3% 뛴 배럴당 121.60달러를 기록했다. 같은 날 미국 뉴욕 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5월물은 5.2% 상승한 114.93달러에 마감했다. 러시아의 이와 같이 루블화 결제로 선회하자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 못지 않은 가스와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으로 방향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남한보다 더 작은 아제르바이잔 본국이 가진 석유와 가스만으로도 유럽에 수십여년을 수출해도 크게 문제 없다는 분석이 있는데다 카스피해를 통해 역시 가스 부국으로 알려진 투르크메니스탄과도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다. 그와 같은 가스관 연결의 시작이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조지아의 트빌리시, 터키의 제이한을 연결하는 BTC 파이프라인을 말함인데 이와 같이 터키까지 도착한 아제르바이잔의 석유와 가스를 터키에서 시작해 유럽 이탈리아까지 연결하는 것이 나부코 가스 파이프라인으로 점철된다. 여러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없던 일로 되었지만 2019년에 트랜스 아나톨리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TANAP)이 개통 공사에 들어가면서 이와 같은 고심을 해결할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이 생겼다. 나부코 라인이 아제르바이잔-조지아-터키- 불가리아-알바니아-이탈리아까지 연결되는 기획이었는데 불가리아가 빠지고 그리스가 들어간 게 트랜스 아나톨리아 라인이라 볼 수 있다. 총 연장 3,500㎞에 달하는 남방가스통로(SGC)로써 이어지는데 러시아로써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맞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응원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들이 대부분인 국가이고 터키와 중앙아시아 일대와 연결되어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범투르크주의를 어느 정도까지 미국과 유럽이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과제가 남아있다. 더불어 투르크메니스탄이 친서방, 유럽으로 과연 넘어올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투르크메니스탄은 굳이 유럽이나 미국과 교역 없이도 러시아와 이란의 사이에서 무역을 하며 이미 먹고 사는데는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며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독재와 국내 인권 탄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용인해줄 수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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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루블화 지불 의무화와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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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 재점화와 인도-파키스탄의 오랜 갈등의 역사
- 최근 인도가 관할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인기 관광지에서 무장괴한들이 현지인 관광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해 26명이 사망했다. 당시 오마르 압둘라 잠무·키슈미르주 총리는 최근 몇 년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의 공격이라 규탄했고,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가해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강조하면서 보복을 다짐했다. 한편 아직까지 이번 공격의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진 단체는 없다. 다만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이 지역에서는 1989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반군 활동이 이어졌으나, 최근 몇 년 동안의 폭력 사태는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인도 측은 이번 폭력적인 행위들이 파키스탄의 소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 측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님을 밝히고 인도 측의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이 벌어진 잠무-카슈미르 지역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이 분쟁과 더불어 인도-파키스탄 사이에 갈등의 역사를 재조명 해 보고자 한다. 카슈미르의 면적은 약 222,236㎢로 한반도의 면적보다 약간 작은 땅이고, 인도-파키스탄 국경과 인도-중국 국경이 지나가는 곳이다. 인도,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한 이후 양측은 계속하여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현재 카슈미르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경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실효 지배 지역을 표시한 경계선통제선(Line of Control)이기 때문에 양측이 서로 카슈미르를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카슈미르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분쟁의 이유는 바로 "물"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은 심각한 물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파키스탄의 경우, 인더스 강이 기근 현상으로 갈수록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많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카슈미르는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인데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땅도 비옥해서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벼농사가 발달했으며 루비와 같은 보석들도 많이 생산된다. 또한 직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이자 카슈미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캐시미어(Cashmere)의 본고장이 이곳이다. 1947년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당시에 독립 카슈미르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s)의 소속이었다. 이 당시 각 지역의 번왕국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각각의 편입될 것이 아니면 독립하여 존속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슬림 다수 인구를 지배하던 카슈미르의 힌두교도 번왕은 인도로의 편입을 원했지만 무슬림들의 격렬한 반대로 고민하다가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택했다. 따라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의 편입 요청을 거절한셈이 되었다. 하지만 카슈미르에 소재하던 다수의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독립에 대해 반대하였고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카슈미르의 번왕은 인도에 지원을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파키스탄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들은 인도로 편입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결정이 현재까지 거의 80년 동안 이어지는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선택이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의 결과 카슈미르는 지금과 같은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지역으로 분단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현재 카슈미르 지역의 상당수 지역을 영유하고 있는 국가는 인도이다. 인도는 카슈미르 전체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주 인구 77%가 파키스탄계 무슬림으로서 인도의 주(州)들 중에서 무슬림이 힌두교인보다 많은 유일한 주(州)이기도 하다. 카슈미르가 대한민귝 면적의 두 배의 영토이니 만큼 카슈미르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불교와 힌두교가 우세한 지역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무슬림들이 압도적이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인도 국내에서 심한 탄압과 차별을 받고 있는데 카슈미르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카슈미르 지역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과 병합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 주민들은 기회가 되면 시위를 벌이며 독립을 주장하거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인도 정부가 이를 허용할리가 없기때문에 주둔하고 있는 인도군과의 마찰이 심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히말라야와 연결되는 지진대가 지나가는 지역이라 2005년 10월 8일에는 파키스탄이 점유한 카슈미르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약 80,0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카슈미르의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파키스탄 국기들을 흔하게 볼 수 있고 파키스탄의 독립기념일인 8월 14일에는 항상 축제를 벌이고 있다. 물론 인도에서 이를 두고 치안의 문제를 우려해 단속하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축제를 벌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도군 또한 이를 강하게 단속하지는 않고 있다. 이들을 강하게 단속했다가 무슬림들과 사이에서 극한의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 단체들은 카슈미르의 독립과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요구하며 인도 군경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이고 있다. 이번 테러도 그동안 벌어져 왔던 테러 행위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분리주의 무장단체들의 성향도 카슈미르 공화국 독립을 추구하는 측과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추구하는 측으로 양분되어 있어 이들 간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물론 인도군의 군세가 워낙 강력하고 주기적으로 토벌전에 나서고 있어 여타 이슬람 반군들처럼 주요 도시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주로 산악과 농촌에서만 활동하며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한 때 이들은 ISIS와 알 카에다에 지지 성명을 보내며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카슈미르에 주둔한 인도군과 인도 경찰이 카슈미르 주민들의 분리 독립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카슈미르 무슬림들에 대한 살인과 고문, 성폭력 등 잔혹한 인권 탄압으로 인해 인권 단체들로부터 강한 비판받으며 여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인도군이 시위하던 주민을 군 차량의 인간 방패로도 쓰는 사건까지 발생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을 지시한 당시 인도 장교는 인도군 참모총장에게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를 비난하는 파키스탄도 정작 파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는 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탄 발티스탄(Gilgit-Baltistan)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인권 탄압을 자행하고 있어 기타 주민들과 인권단체들에게 비난받고 있는 현실에 있다. 더불어 카슈미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반군들도 주민들에게 폭력을 저지른 사례들이 나오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양쪽 모두에게 카슈미르 주민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은 이와 같은 인권 탄압 사건을 빌미로 인도를 인권 탄압 국가라고 비난하고, 인도 또한 파키스탄에 대해 이슬람 테러 집단을 지원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테러 지원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행위들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서로가 각자의 영토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양국에 대한 정치적 자존감으로 인해 선전성의 성격이 짙다. 두 나라만의 영토 분쟁인 것으로 나타난 카슈미르 지역에 이번에는 중국까지 분쟁에 끼어들었다. 중국은 친파키스탄적인 행적을 취하며 경쟁국인 인도를 견제했다. 게다가 중국은 파키스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일대일로의 중심국가로 여기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약화는 아라비아해로 진출하여 남아시아 일대일로의 완성을 계획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게다가 카슈미르 동쪽 아크사이친(阿克赛钦) 지역을 1962년에 발발한 중국-인도 전쟁 도중에 점거하여 실효 지배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두고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 또한 심각하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카슈미르 지역은 3개 국의 이해가 걸린 분쟁으로 세계의 화약고에 속하며 제3차 세계대전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분쟁 지역으로 꼽힌다. 2011년 9월 19일 인도가 베트남과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석유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하기로 하자 이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중국군이 카슈미르 지역에 위치한 인도군 벙커를 공격해 파괴하고 철군했다. 이어 2017년부터 다시 분쟁의 강도가 높아지더니 2019년 2월에 인도 공군이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공습했고 이에 대한 파키스탄의 보복 공격까지 이어지며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우려를 낳게 했다. 그러나 이를 중국이 중재하면서 그나마 위기를 넘겼지만 2019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 공군기를 격추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같은 해 8월,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의 특별 자치를 규정한 헌법 370조를 대통령령으로 무력화시키고, 잠무-카슈미르를 주(州) 지위에서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동부의 라다크 지역을 분리해 카슈미르 지역을 두 개의 연방 직할령으로 분할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조치에 앞서 모든 통신이 차단되고 잠무-카슈미르 전 지역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지역 정치인들은 가택 연금에 처해지게 되면서 인도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파키스탄 정부와 직접적인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인도 헌법 370조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에 대해 자치권을 부여하는 조항으로 자체적인 헌법, 국기, 그리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이다. 물론 외교, 국방, 통신은 연방 정부가 권한을 갖는다. 그와 같은 결과로 인해 잠무-카슈미르는 영주권, 재산권, 기본권을 자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외지 인도인들이 카슈미르에서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정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헌법 370조가 대통령령으로 인해 완전히 무력화 되면서 사실상 폐지되었고 인도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정부 직할령이 되면서 이는 오히려 파키스탄 정부를 자극하게 만들었다. 370조 무력화와 더불어 카슈미르의 주 지위를 박탈하고, 잠무-카슈미르와 라다크라는 두 연방 직할지로 격하하면서 사실상 인도 다른 지역만도 못한 속령급 지위를 부여해 버리면서 카슈미르 문제만큼은 직접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카슈미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2025년 4월 22일 스리나가르 동쪽 50km 지점의 파할감(Pahalgam)에서 '레지스턴스프론트(TRF)'라 불리는 지역 무장 단체에 의해 테러가 발생했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이슬람 경전을 외워보라 시켰는데 못 외우니 총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소 24명이 사망했으며 인도는 파키스탄의 개입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파키스탄과의 인더스 강 수자원 협정을 잠정 중단시켰다. 파키스탄과의 주요 육로 국경인 와가-아타리 검문소를 폐쇄했으며 48시간내 인도 내 파키스탄 국적자는 인도에서 추방령이 떨어졌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무역 중단을 선포함으로써 양국의 갈등은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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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 재점화와 인도-파키스탄의 오랜 갈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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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
-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3차에 걸쳐 삼니움 전쟁을 치르게 된다. B.C 321년,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Titus Veturius Calvinus)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Spurius Postumius Albinus Caudinus)는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 족의 영역으로 침공했다. 이에 삼니움 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폰티우스는 정면 승부로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그는 먼저 삼니움 병사 10명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서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 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 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Apolia)의 루케리아(Ruceria)를 포위하고 있다며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 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도로 2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 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Caudium)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 빠른 시일 안에 루케리아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삼니움 군이 도주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진격하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 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줄기로 진군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 때 삼니움 인들이 협곡 위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 때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파악하고 서둘러 퇴각하려 했지만, 첫 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삼니움 군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삼니움 군의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두어 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로마군이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면서 큰 피해를 볼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굶겨 죽이자니 언제 끝날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 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Herennius Pontius)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 보내라.” 그러자 삼니움 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냅니까?” 라고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버지가 먼저는 모두 살려 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또 다 죽이라고 권고하니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 “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가 크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Pregelas)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Tunica)만 입은 채 멍에 하단으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치욕을 겪고 로마는 다시 칼을 갈았다. 결국 로마는 삼니움 족을 정복하고 전쟁을 승리를 마무리했으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삼니움 족의 남성의 씨를 말렸다. 가이우스 폰티우스(Gaius Pontius)가 자신의 아버지인 헤렌니우스의 충고를 따랐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완전히 죽여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우를 해줘 친구를 해주는 것도 아닌, 모욕을 주는 것은 상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면 분명히 칼을 갈게 된다. 영화 <친구>에서도 유오성이 열연한 준석이가 상택이에게 한 말이 있다. "친구야. 앞으로 누구를 조질 일이 있으면 상대를 용서하여 친구로 만들던가, 아니면 보기만 해도 오줌 지릴 정도로 조져놔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해보자고 안 달려든다." 이게 인간 사회만 그런게 아니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는 국가의 존망을 가르게 된다. 그리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세 관련 지혜이기도 하고 인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보며 설계하는 지혜로운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는 눈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삼니움 족은 그런 현명한 자가 있기라도 했지만 한국은 삼니움 족보다도 못하다.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만 있을 뿐, 주변에는 어리석은 지휘관에게 박수 쳐주는 어리석은 원숭이들만 득실거린다. 우리의 미래는 그래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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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지혜로운 자와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