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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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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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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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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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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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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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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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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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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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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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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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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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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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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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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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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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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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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반중감정이 최악인 역사적인 이유
- 몽골 전체를 정복한 청나라는 고비 사막 이남의 내몽골과 이북의 외몽골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이는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강력한 유목민족이었던 몽골 부족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들이 서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월계금지(越界禁止)를 실시하여 몽골족들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족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소규모 부족단위, 씨족단위로 분리된 상태로 청나라의 변방으로써 가장 낙후되고 미개한 사회로 남게 되었다. 대다수 몽골족들은 오로지 목축업과 원시적인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했고 무거운 공납과 부역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세기 말 외몽골을 방문했던 외국인 여행자들은 과중한 공납과 막대한 빚으로 인해 외몽골 민족 전체가 절멸 지경에 내몰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래 청나라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중국은 열강들에게 침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러시아가 북만주와 외몽골을 잠식해 나가자 1895년 외몽골 귀족들은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이는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열강들의 상황을 모르는 유목민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견제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외몽골의 요청을 수락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라며 의례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1911년 8월 외몽골의 라마 불교의 수장인 제8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Bogd Jibzundamba Khutugtu)을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주도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이흐 후레(Ikh Khuree, 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자력으로 당장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다시 대표단을 러시아로 보내어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은 후, 외몽골의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와 극동에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당장 외몽골이 독립하기보다는 명목상 청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자치국이 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붕괴되자 외몽골의 독립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1년 11월 30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이흐 후레를 니스렐 후레(Niislel Khuree)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외몽골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를 몽골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여 신정일치(神政治制)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의 새로운 국가 원수인 복드 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유사한 몽골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내몽골에서도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부족 단위들 중에서 49개 호쇼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칭기즈칸 이래 600년 만에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몽골로 군대를 보내어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외몽골은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차하르 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1912년 4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중국에서의 세력 분할에 대해 합의를 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장악했고 일본은 내몽골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신생 중국은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음을 고수하면서 내몽골을 러허 성과 차하르 성, 쑤이위안 성 등으로 분리시켰다. 수도인 니스렐 후레에서 열린 몽골과 러시아 양측 대표단의 회담에서 몽골 대표단은 자신들의 조국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얻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면서 거부하게 된다. 또한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 국가에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결국 몽골 정부는 300만 루블의 원조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외몽골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위안스카이 정부와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는 외몽골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체결된 러시아-중국-몽골 삼국 조약에서 몽골은 러시아의 압박으로 인해 이와 같은 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대신 몽골은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뒤를 승계한 돤치루이(段棋瑞) 북양 정부는 몽골의 후견국가인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몰락하여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게 되자 캬흐타 조약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1919년 11월 자신의 측근인 쉬수정(徐樹淨)을 서북주비사(西北籌備使)로 임명하고 600명의 군대를 니스렐 후레로 파견하였다. 당시 복잡한 중국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돤치루이는 몽골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여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였으며 강한 군벌인 쉬수정은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칸과 각료들을 모두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칸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복드 칸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약 2,000여 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 해제된 상황에서 완전히 해산 당했다. 1919년 11월 22일 외몽골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이 때 쉬수정은 화려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 당했고 복드 칸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최악의 굴욕이었지만 그로 인해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西北王)이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7월 북경을 두고 북양 군벌 간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짧은 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휘파 군대는 우페이푸(吳佩孚)가 지휘하는 즈리(直隸)파 군대와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의 협공을 받아 4일 만에 완패하고 말았다. 몰락한 돤치루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주했고 쉬수쟁 역시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쉬수쟁은 이후 손문과 동맹을 맺고 재기를 노렸지만 5년 뒤인 1925년 12월 즈리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따라서 돤치루이를 대신해 즈리파와 펑톈파가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권력을 두고 분열되어 내전을 벌이는 등, 중국은 혼전의 연속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몽골에 대한 중국의 관심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1920년 11월 허를러깅 처이발상과 함께 몽골 인민유격대를 조직, 운게른과 중국 군벌을 타도하겠다며 유목민들을 선동해 군세를 확장했고 정식으로 몽골 인민당을 창설하여 소련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아 3월에 캬흐타를 점령한 중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6월 운게른의 군세를 격파하며 그를 후레에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한다. 현재도 은연 중에 중국이 몽골에 가하는 압박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몽골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매우 많은 상태이다. 중국 역시 옛날에 몽골에게 자주 약탈과 침공을 당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몽골에 대한 중국 항구 이용 문제에 있다. 몽골은 내륙국이기 때문에 자원을 수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국의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몽골과 가장 가까운 중국은 반중감정을 가진 몽골을 좋아하지 않아 몽골의 항구 이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몽골에 우호적인 러시아도 하필 이미 극동 항구가 이미 포화 상태에 있어 쉽지 않다. 그래서 라진, 선봉 등 북한의 항구를 개발하려고 공을 들이고 있다. 몽골은 국토가 상당히 척박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식량의 양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악용해 몽골을 압박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사실 과거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생긴 이유 역시 만리장성 이북은 농업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토지와 기후를 가진 쓸모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넘어선 중국에 과하게 의존적인 경제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다. 특히 몽골의 무역 상대 국가들을 보면 몽골 수입의 39.9%, 수출의 84%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홍콩에서 항구를 쓰도록 빌려주고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화물기 및 중국을 종단하는 국제 화물철로로 운송되고 있어 중국이 이를 막는다면 몽골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칭기즈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사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중화민국 시절 청나라 때 영토를 중국이 계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몽골도 자국 영토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몽골인들 중 일반인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극혐하고 있다. 일단 중국인이 몽골 길거리에 모이면 시비부터 걸고 있다. 몽골인들이 한국어로 말 걸다가 한국어로 대답하면 반가워하고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면 그 사람을 중국인으로 여기고 시비걸며 주먹 날리는 경우가 많다. 몽골의 반중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인이다 여기면 일단 두들겨 패고 생각하자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 반중감정의 이면에는 복드 칸 시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던 역사의 치욕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데다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며 역사 공정을 하는 중국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이다. 몽골의 반중감정에 비해 우리 한국의 반중감정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이 또한 역사적인 DNA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몽골은 중국에 저항해 온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중국에 사대한 역사가 길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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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반중감정이 최악인 역사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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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 남북으로 1,600km에 달하는 국토 길이를 가진 베트남은 각각 북쪽과 남쪽 끝에 하노이와 호치민이라는 대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육로로 가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있는데다 두 지역의 기후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적으로 지냈던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음식과 사람들의 성향까지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흔히 베트남의 하노이를 행정 중심의 도시이면서 역사, 문화의 도시로 인식한 반면 호치민을 경제 중심의 도시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각 도시의 사람들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지역 차이를 넘어 외국인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두 도시의 차이를 비교하여 희화화하는 영상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지역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중국의 지배를 1,000년 동안 받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데 비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쪽은 태국, 캄보디아와 유사한 동남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전형적인 남방 불교인 상좌부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참파 왕국이 다스렸던 곳이라 애초부터 서로 간에 문화권이 달랐다.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남북이 통합되었지만 사이공(Sài Gòn : 호치민의 옛 이름)과 다낭을 중심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이루며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및 서양 문화가 들어와 여전히 동아시아 문화권인 북부 지역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지만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해방되었으며 이후에 프랑스군이 재주둔함으로써 프랑스의 지배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195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은 이 때 체결된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과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남베트남으로 다시금 분단되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했던 사이공(Sài Gòn)을 점령하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편에 섰던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도 이와 같은 숙청의 과정에서 주로 발생했는데 주로 공산세력으로부터 반동적인 사상을 가진 집단, 그리고 서양 문화에 익숙한 집단,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남방 화교 집단 등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하노이는 중국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호치민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었던데다가 프랑스가 만든 계획 도시였기에 서방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려왔던터라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하노이와 호치민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적도와 가까운 호치민이 1년 내내 여름이면서 무더운 열대 기후인 것과 달리 하노이는 우리 한국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같은 날씨의 영향으로 인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각의 특화된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데 하노이에서는 소금이 많이 첨가된 쌀국수와 분짜(Bún chả, 완자와 면을 함께 먹는 음식)가 매우 유명하고 호치민은 채소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쌀국수와 달콤하거나 약간의 밍밍한 음식들이 발달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주로 중부 지역인 후에 지방의 음식이 가장 잘 맞아 후에나 다낭 등의 중부 지방 음식을 선호하는 것에 반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자의 음식이 베트남을 대표한다면서 온, 오프라인으로 끊임없이 설전을 벌인다. 날씨와 음식 뿐 아니라 도시나 정치, 경제적으로도 양측은 다르다. 행정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하노이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치민은 도시의 색깔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차이 중 하나가 시간 내 여가 활동 개념인데 예를 들어 밤 11시에 하노이 시민들은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근면하고 부지런함을 선호하는 반면 호치민 사람들은 밤 11시가 되면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러 밖으로 외출을 나온다. 필자가 직접 겪어본 두 도시의 느낌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노이의 경우 상대적으로 엄격하고 보수적인데다 경직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데 반해 호치민은 클럽과 술집 등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놀거리가 많고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넘쳐나며 친절하고 자유 분방한 분위기가 있다. 이어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어감이 조금씩 다르고 발음 또한 여러 모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데 베트남 또한 각 지역 사투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수도인 하노이 언어가 베트남어의 표준어인 만큼 호치민의 언어는 남방 방언, 혹은 사이공 사투리로 취급되고 있다. 하노이의 표준어는 좀 더 정중하면도 경직되어지며 무게감이 있는 느낌이라면 호치민의 방언은 매우 간드러지며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이 강하다. 북쪽 하노이 측은 베트남의 전통복인 아오자이를 즐겨입지만 남쪽 호치민은 미니스커트와 가슴을 드러내는 옷 등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론 요즘은 하노이도 젊은이들이 미니스커트 및 가슴이 드러나는 옷 등을 즐겨입긴 하지만 호치민만은 못한 분위기다. 이처럼 두 지역의 문화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노이와 호치민의 주민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역 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베트남어인 꿉 포 디아 픙(Cục Bộ Địa Phương : 지역감정)은 지역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뉴스 제목으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칼럼 또한 역시 각종 매체들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일상에서 하노이 사람들, 혹은 호치민 사람들이 서로를 험담하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서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베트남 내의 지역 감정은 점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처럼 극명한 두 지역의 차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노이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유교 문화의 영향 하에 있어 예의와 겸손을 사람의 최고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 서방 기업의 진출이 활발한 호치민의 경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최고 덕목으로 여긴다. 그래서 하노이 시민들은 호치민 시민들을 매우 헤프게 여기고 있으며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 시민들을 꼰대스럽다고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생기게 된 이유로 북과 남으로 갈라진 역사가 만들어 낸 간극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통일 후, 하노이가 행정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해 온 반면 호치민은 공산정권의 통제 하에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작동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최근 보트피플 및 서방 유학, 이민 등으로 인해 베트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경제 발전의 큰 동력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양 지역 간의 갈등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노이 시민들은 부를 감추고 내세우지 않으며 겸손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해외 유학파들 및 이민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존재하는 호치민에서는 부와 소비를 당당한 노동의 보상으로 여겨 이를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두고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의 과묵함을 음흉하다고 표현하고 하노이에서는 호치민의 자유분방함이 천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질수록 다시 또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 굳어져 온 베트남의 지역 감정은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는 바로 대한민국의 박항서 감독과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님의 선전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과 화합을 이룩한 것은 축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국가대표의 승리를 기원하며 각 지역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응원했던 순간 만은 지역 감정이 사라지고 베트남이 오로지 하나가 됐다면서 많은 베트남인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합이 축구 경기에 한해 나타난다면서 일시적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하나가 되어 응원하는 경험이 베트남 국민 모두에게 통합과 단결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지역 감정은 한국의 영, 호남 지역 감정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한 과거의 기억과 비행기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크다. 그리고 그와 같은 거리감에서 기인한 문화적 인식의 간극이 현재까지 견고하게 유지되어 지금의 지역 감정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 갈등은 원래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며 지내온 베트남 사람들은 최근 축구를 통해 경험한 통합과 화해의 시간이 잠시나마 일시적일지라도 어쨌든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인들을 하나로 만들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미움과 편견을 없애게 한 것에 우리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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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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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나 마찬가지였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둔하자"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줄곧 빅토리아 눌랜드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전쟁을 독려한 켈로그였기에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역사의 어디선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인 독일의 베를린을 동서로 분할한 것과 유사다. 동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동독으로 소련이 관할하고 서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서독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했다. 켈로그의 주장은 비슷하게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나누고 해당 지역애 비무장 지대를 두는 방안이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분할한 것과 6.25 전쟁 이후, 남북을 분할해 휴전선을 만들고 그 사이에 비무장 지대인 DMZ를 만든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쉽게 말해 두 분할 방식을 혼합한 새로운 분할 방식인 것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서쪽 영토는 이른바 ‘평화 보장 군대’(Reassurance Force)‘로 이름 붙인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 유지군이 통제하는 구역을 설정하고, 러시아군이 장악한 동쪽 영토에는 우크라이나 군과의 비무장 지대(DMZ)를 두고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켈로그는 드네프르 강 서쪽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평화 보장 군대는 러시아군을 향해 절대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드네프르 강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국 영토를 거쳐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며 수도인 키예프를 관통하고 있어 분할하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 국이 각각 베를린의 점령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키예프도 그와 같이 분할하여 드네프르 강 서안은 영국, 프랑스군이 통제하고 드네프르 강 동안은 러시아군이 통제하는 측으로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이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켈로그는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따라 18마일, 너비 30㎞ 안팎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여 서로가 넘지 않는 것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켈로그는 푸틴 대통령이 유럽의 나토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통제 구역을 관할하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이자 러시아의 요구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나토 가입 금지, 나토 군대 주둔 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로그는 통제 구역과 관련해 우크라이나가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는 상황을 만들게 되면,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도록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선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비무장 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두 나라 군대가 전선에서 각각 15㎞씩 물러나면 18마일 정도의 비무장 지대를 만들 수 있는데, 비무장 지대는 감시가 가능 하고 사격 금지 구역도 설치할 수 있기에 평화적으로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전 협정을 위반하는 행위가 민스크 협정을 파기한 것처럼 있을 수도 있지만 이를 감시하여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동서 분할 구상은 이번에 처음 주장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 내에서 꾸준히 이와 같은 내용이 예상되어 주장해왔고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에 의해 우크라아나 서부 지역이 4분할 되고 동부 지역과 오데사는 러시아에게 넘어가며 우크라이나는 키예프를 위시한 중부 지역의 작은 영토만 영위하게 될 것이는 예측이 많이 나왔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러한 켈로그의 제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할 시 어떤 국가들이 참여할지,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 영역화 할지, 참여국들이 각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와 같은 세부적이고 구체화 된 내용이 없어 그냥 한 번 던져 본 수준에 불과하다고 본다. 켈로그의 이러한 제안 자체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석의 여지도 많으며 이는 아직까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도 나오지 않은 제안이기에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켈로그는 이 외에도 키어 스타머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에 있어 미국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가 정상화됐다며 광물 협정이 재논의 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켈로그의 제안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진다. 우선 러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나토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정전 안에 대한 반대, 우크라이나 군의 비무장화를 협상 내용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토에 속한 영국과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한다는 것 자체는 러시아가 내세운 특수군사작전의 목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토군의 주둔을 반대하여 일으킨 특수군사작전인데 우크라이나를 분할하여 동쪽 지역은 러시아에 넘기더라도 서쪽 지역에 영, 프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추후에 우크라이나군 재무장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고 러시아군의 목적이 역시 영토 확장이라는 세간의 오해, 침략국이 맞다는 국제적인 맹비난에 직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입장에서 켈로그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마찬가지다. 젤렌스키는 지난 3월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결코,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는 일시적인 점령일 뿐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게 점령된 모든 지역을 탈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국토 분할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미국이 2014년부터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 반도에 대해 러시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젤렌스키에 여기에 크게 반발했다. 줄곧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 러시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배신한 셈이 된 것이다. 이같은 켈로그의 제안은 그동안 나토에 속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과 비슷하게 한다는 것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던 동유럽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안보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연합국에 맞춰 구상된 휴전 방안과 유사하게 하는 것 자체가 소련의 공산 지배를 받았었던 동유럽 국가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또 1945년 나치 독일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정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친서방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전후 베를린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되었다. 더불어 트럼프 정부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의 의사과 관계없이 미국과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불안감 또한 미국과 터키, 헝가리, 슬로바키아를 제외한 타 나토 국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키스 켈로그의 제안은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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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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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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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부족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천재지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었다. 중재자는 부족 구성원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관행(Sunnah)이 중요시되었다. 베두인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에는 메카와 메디나, 당시는 야스리브(Yathrib)가 가장 두드러졌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이 도시는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 : 후에 이슬람의 기도 방향이 됨)라는 성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부족의 신상도 있었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에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한 지역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지였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이 창건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베두인은 여러 부족으로 분류되어 있고, 사막의 이곳저곳에 있는 초원을 찾아다니며 유목 생활을 한다. 현대화와 더불어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아라비아 인의 3~5%는 이 베두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목 생활을 그만두고 농촌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들도 부족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도 상당히 많다.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도 자기들의 조상이 베두인이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베두인의 아라비아어가 가장 순수한 아라비아어로 믿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이 즐겨 다니는 시 낭독 회에서는 베두인 시인들이 지은 부족의 영광을 노래한 시를 신명나게 읊고 있거나, 베두인 부족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많다. 부족 생활은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자손이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이 친족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동료 부족 구성원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필요한 경우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자기 부족의 편을 들어 도와준다. 이를 두고 14세기 튀니지 출신의 정치 사상가인 이븐 할둔(Ibn Khaldūn, 1333~1406)은 아사비야(‘Aṣabīyah)라는 이름으로 맹목적인 연대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원시적인 혈연적 부족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사회 각층에도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좋은 일례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과 하심 요르단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 등의 국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두 왕국은 각각 사우드 부족과 하심 부족의 소유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의 기능 가운데 부족장 중의 부족장(Shaykh of Shaykhs)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아라비아 국가,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및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지배자들의 친족과 인척들만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도 모든 아라비아 국가의 사회 각층에도 혈연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제공하는 일은 상당히 많다. 아라비아인들은 친족 결혼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혈연 의식이 강하여 사촌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에 부부 사이에도 사촌 오빠(Ibn ‘Ammī : 삼촌의 아들이라는 뜻) 또는 사촌 여동생(Bint Ammī : 삼촌의 딸이라는 뜻)이라 호칭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어구(語句)는 남편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각각 사전에 풀이될 정도이다. 이와 같이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그들의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家系)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최대의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한 집단 구성원이 다른 집단 구성원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면, 피해 집단은 가해 집단에게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 경우에 가해자를 찾을 필요는 없고, 가해 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입은 상처처럼 같은 상처를 입힘으로 인해 복수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단은 부족, 씨족 및 가족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혈연적 단결심은 도시에 정주하는 아라비아인 사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동일한 혈연 사이에는 협조가 잘 되며, 이 현상은 간혹 정부 부처 의 장과 그의 부하 직원 사이에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혈연과의 경우에는 체면과 조심성을 앞세워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혈연이 상이하면 합심하여 끈기 있게 목적을 추구하는 협동(Team Work) 정신이 부족하다. 이러한 혈연에 의한 파당성은 공평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인사 행정이나 다른 사무 처리에 있어서 부작용을 일으켜 비리의 온상이 된다. 이슬람교는 알라 앞에서 만민 평등을 교시하고 있고, 부족 구성원 사이에도 평등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 간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수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막강한 부족은 타 부족을 지배하였다. 부족 가운데 우열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족의 형태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접촉에는 노골적인 인간 차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부족 구성원 간의 평등 의식과 이슬람의 평등사상으로 인해 아라비아인은 상호 간 대화와 접촉의 자유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아라비아 국가의 국체와 정체가 군주국이거나 공화국이든, 혹은 전제 정치를 시행하든 간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민주 정치를 하는 것과도 관계없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화와 의사소통의 자유가 있어 개인은 누구나 필요한 인물을 찾아가 어느 정도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부하 직원이 그의 상관에게 접촉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다. 평민의 자녀가 고관의 자녀와 혼인을 하는 일례는 아라비아인들에게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실은 차(茶)나 우편물을 나르는 하급 공무원이나 평민, 심지어 걸인도 자유로이 관청을 드나들면서 하급 기관장은 물론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지정된 면담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저자세나 필요 없는 아첨은 비굴한 행동으로 여겨 경멸하기 때문에 대체로 상관을 대할 때에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관장은 매주 1회에 2~3시간가량 면담 시간을 책정하여 방문객이나 부하 직원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있다. 복잡한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이와 같은 시간 소모는 다소 행정력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으나, 사회의 최 하부 계층이라도 자기는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혈연 의식 및 대화와 접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연적인 관계와 자기의 생활 주변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도덕과 규율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공중도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라비아인은 혈연적인 인척과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객체(客體), 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공 의식의 결여는 그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정부의 존재 자체를 공공의 복지나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봉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징세와 징병을 강행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 단체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공중도덕의 결여로 인해 현대 산업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교통질서, 직장 내의 위생 질서, 약속 시간 개념 등에는 무관심한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다. 이는 국가와 같은 공공 집단이 다른 소집단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족적 또는 종교적 파벌을 기초로 하여 조직된다. 이 현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아라비아 국가 중에서 가장 잘 모방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레바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아라비아 국가에서는 이러한 병폐로 인해 아예 일국 일당 체제나 전제 왕정(專制王政)이 지배적인 정치 체제로 등장하고 있다. 혈연 공동체의 극소 단위로서의 가족은 혈연 의식의 특징을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그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부족적인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생활 단위는 부족이 아니고 가족이다. 물론 왕족이나 영주 등과 같은 명문 귀족들에게는 부족이나 씨족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평민은 가족 중심의 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민들의 가족 개념은 아직도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이 아니고 대가족 제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족 제도는 합동 가족의 형태이다. 이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다. 양친과 자녀 및 조부모, 숙모, 숙부 또는 방계의 친족 및 조상의 친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가까운 친구들까지 포함되는 방대한 조직인 것이다. 아라비아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가족의 출신 성분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한 가족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상류층에 속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개인과 가족 사이는 어떤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착되어 있다. 개인으로서의 아라비아인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 삶을 개척하기에는 가족 관계가 아직 매우 강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밀착성은 그들의 호명법(呼名法)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개인은 결혼하기 전에는 주로 아무개의 아들, 딸 등으로 불리며, 결혼 후 자녀를 가지게 되면 아무개의 아버지, 어머니 등으로 불린다. 이 호명법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를 그대로 나타내어 주로 남성의 이름을 위주로 하여 호칭되고 있다. 이 현상은 단순히 호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어떤 지위에 천거하거나, 제3자에게 소개할 경우에도 사용한다. 또, 한 개인이 출중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르면, 주로 부족명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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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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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 로마는 내부적으로 신분 투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를 형성하면서, 한편 대외적으로는 계속된 군사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뒤 일시적으로 라티움(Latium) 지역에서 로마의 군사적 지위가 약화된 것이 확실하다. B.C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Casius)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카시우스 조약은 로마와 라티움 동맹 간의 군사 협조를 명문화한 것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로마는 수많은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B.C 5세기 말이면 왕정 시기 로마와 라티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트루리아가 약화되며, 로마는 그 세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B.C 5세기 로마와 라티움 동맹국은 인접 산지 민족들, 특히 아이퀴(Aequi)와 볼스키(Volsci)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 이후 로마는 티베리우스 강 북쪽의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인 베이(Bei)를 오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고 영토를 병합했다. 그러나 B.C 387년 로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 족의 침략으로 인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로마 시를 7개월 동안 점령당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외적인 위신도 실추되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B.C 349년에 다시 침공해 온 켈트 족을 격퇴했다. 로마는 B.C 343년부터 약 B.C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삼니움 족이 라티움 남쪽에 위치한 캄파니야(Campaniya) 주를 침공했으며 라티움 주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로마가 이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손쉽게 끝난 1차 삼니움 전쟁 (B.C 343~B.C 341)에 비해 2차 삼니움 전쟁(B.C 326~B.C 304)이라는 22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삼니움 족의 근거지인 아페나인(Apenain) 산맥이 방어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카우디네(Caudine) 협곡에서 두 명의 집정관과 그의 병력들이 모두 생포되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5년 동안의 소강상태를 갖게 된다. 그 이후 패배에서 회복한 로마인들은 반격을 시도하여 삼니움 족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삼니움 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들을 모두 격파하면서 2차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다. 3차 삼니움 전쟁은 삼니움 족,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켈트 족이 연합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남부에 위치한 삼니움 족을 격파하여 그들의 세력을 북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대항한 이들 3개의 연맹체는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군과 센티눔(Sentinum)에서 맞서게 된다. 초기에 로마군은 이들 연합군의 맹공에 고전하였으나 집정관인 푸빌리우스 데키우스 무스(Publius Decius Mus)가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이는 로마군의 사기를 고양시켜 이들은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B.C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는 양측이 통합 1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회전이었고 로마가 이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가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291년까지 삼니움 족은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다음 해인 B.C 290년에 로마에 굴복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하게 된다. 그 사이에 B.C 340년 로마의 동맹 주도에 불만을 품은 라티움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라티움 전쟁이 일어났으나,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라티움 동맹도 해체되었다.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는 대신 라티움 도시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주는 동시에 로마에 정치적으로 흡수했다.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평정하고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우려한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타렌툼(Tarentum)은 에페이로스(Epeiros)의 피로스(Pyros)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로써 피로스 전쟁이 발발했으며 피로스는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로마를 격파하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그들의 영향 하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피로스는 로마를 제압하여 이탈리아를 그의 패권 하에 두고 그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이후,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다음 이를 토대로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의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로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들의 군사적인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B.C 280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피로스는 로마군에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로스의 전사자는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과 전쟁 상태였으며 이들 시칠리아 도시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동맹관계였다. 남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피로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앞서 호언한 대로 시칠리아에 대해서도 야심이 있었던 피로스는 강한 로마 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여 시칠리아로 떠나게 된다. 시칠리아에서 피로스는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카르타고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꾸준한 보급을 통해 친 카르타고 도시들은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으며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한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여실히 증명한 것과 같이, 강한 해군력 없이는 시칠리아 섬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스가 해군 편성을 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요구한 군자금은 그 도시들에게 있어 큰 부담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피로스에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따라서 전황은 과거보다 피로스에게 더 불리하였다. 피로스는 이에 베네벤툼(Veneventum)에 머물던 로마군을 기습하기로 하고 로마인들이 건설한 가도를 타고 북상하나 로마인들이 이를 파악했기 때문에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피로스의 전쟁 의지를 일소시키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 로마는 피로스가 없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그들의 패권 하에 넣었고 그리하여 로마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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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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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 젤렌스키는 10일 전인 8일 동부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중국인 용병 두 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는 이 날 X를 통해 두 명 중 한 명의 영상을 공유하여 러시아의 돈바스 지역 점령군 부대 내에 더 많은 중국 국적자들이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해 관련 기관이 이를 확인 중이라 했다. X에 젤렌스키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군복 차림의 남성이 묶인 두 손을 흔들며 몸동작을 크게 하여 뭔가 항변하며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러시아 쿠르스크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군에게 생포된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2명이다. 그러나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자는 러시아 영토에서, 중국인은 비록 러시아군이 점령한 곳인 돈바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로 여겨 진다. 젤렌스키 또한 이같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 주재 중국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관련 설명을 듣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의 전쟁 참여가 이번 사례가 처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러시아 군복을 입은 중국인의 모습은 3월 초 포크로프스크 전투의 영상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당시 이를 그다지 중요하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이 날 포로 공개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취하고 있는 반(反) 중국 성향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는 것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 국방안보회의 산하 허위정보 퇴치 센터의 안드레이 코발렌코(Андрей Коваленко) 센터장은 당일 오전에 중국이 조지아의 흑해 연안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나토에 대한 위협이라 주장했다. 코발렌코는 시진핑 주석의 전략은 간단하다면서 흑해 동부에서 나토를 몰아내고, 러시아와 터키의 협력이 없이도 유럽으로 가는 공급로를 만들어 중국의 군사력 투사와 물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작년 2024년 5월 29일, 중국은 중국 교통 건설 유한회사(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Company Limited)와 중국 항만 투자 Pte. Ltd.(China Harbour Investment Pte. Ltd.)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조지아 최초의 심해항인 아나클리아 항 건설 프로젝트에 단독 입찰하여 사업권을 따낸 바 있다. 조지아 TBC 은행과 미국 기반의 콘티 인터내셔널(Conti International)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아나클리아 항만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2020년 색깔혁명 유도 논란과 법적 문제로 무산된 바 있는데 이번에 중국에게 그 사업권이 넘어갔다. 2021년 이후 조지아에서 진행된 1억 달러(약 1,376억 원) 이상 규모의 모든 인프라 프로젝트에는 중국 기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든 사업에 이미 미국과 EU는 손을 떼고 있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과 세계은행(World Bank) 등 기관들은 조지아가 글로벌 무역 루트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심해항 건설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었는데 자신들이 개발하려다가 실패했고 중국에게 이 사업권이 넘어가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항만 사업이 아직 삽을 뜨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입찰 수주는 따냈지만 항만을 건설하는데 있어 여러 문제에 놓여 있어 아직 공사는 시작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난게 2024년 5월 말인데 그 때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있다가 1년 가까이 된 이제야 그 문제를 꺼내며 중국 견제를 부르짖는 것이다. 이 같은 행위를 두고 트럼프의 관세 폭탄 등으로 인해 EU가 압박을 받으니 그 타결책으로 흑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을 견제하여 흑해와 연결된 중앙아시아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보고자 하는 EU가 우크라이나에게 중국에 대해 비난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우크라이나 허위정보 퇴치센터의 비난은 참으로 짜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중국인 포로를 공개한 젤렌스키의 직접적인 노림수가 무엇인지 예상한다면 일단 러시아가 전쟁에 중국인까지 끌여들였고, 궁극적으로 이는 휴전 혹은 정전 협상에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현재 관세 전쟁 중인 미국과 중국인 상황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전쟁 참여를 들먹여 미국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면서 협상에 진정성이 없을 바에야 미국의 직접 참전 및 군사적, 금액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벌이는 이 전쟁에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은 푸틴이 전쟁을 끝낼 의도가 없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했다. 그리고 나아가 미국 등 국제사회에 이에 대한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기와 돈을 더 대줌으로써 분쟁을 끝까지 이어가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젤렌스키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와 먼저 대화하고, 그 다음 러시아와 소통하기를 바란다며 중국인 포로 공개 영상을 본 뒤 입장을 바꿀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이는 조만간 열리는 람슈타인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젤렌스키가 노리는 또 다른 의도는,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전쟁 중에 더욱 긴밀해진 러-중 관계를 와해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틀렸고 실패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와 싸우고 있으니 러-중 관계를 와해시킬 노력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와 연합해 미국과 적대적인 러-중 동맹에 맞서는 것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면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트럼프가 중국을 향해 무려 125%의 관세 부과하는 등 무역 전쟁을 불사하고 있으니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젤렌스키의 이러한 행위는 대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전망을 해본다. 젤렌스키는 그동안 중국의 친러 성향에도 베이징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피해왔다. 오히려 중국에게 러시아와 이 상황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 못지 않게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인데다 러시아와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현대전의 핵심 무기로 등장한 '드론' 생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크라이나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드론의 대부분은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이 우크라이나로의 드론 및 부품 공급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겠지만, 비공식적이라도 장벽이 생긴다면 미국으로부터 무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중국이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지워버릴 생각을 하고 러시아를 도울 경우에 있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러시아에 수많은 드론과 전자전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군은 그 과정에서 '현대전'을 직접 참전하여 경험하면서 전투 능력을 축적할 수 있다. 만약 중국이 러시아에 드론을 지원하여 50%라도 참전을 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의 멸망은 필연이다. 최근 몇 달간 전투의 흐름을 본디면, '드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측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공격 작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성공 요인이다. 우크라이나군 지도부도 중국이 러시아 특수군사작전에 있어 참전할 경우, 매우 결정적인 영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피해왔다. 미국 등 서방과의 경제 협력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대일로가 완성돠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왠만한 모험은 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트럼프의 무역 전쟁 선포로 중국의 대(對) 서방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중국인을 생포했다며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젤렌스키의 전략대로 따라줄 지도 알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중국인의 전투 참여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생포된 중국인의 영상을 공개한 것이 미-중 무역전쟁에 있어 중국의 위협을 부각시키고 미국의 더 큰 지원을 유도할지, 중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 큰 군사적인 위협으로 자충수를 두어 몰락할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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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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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
- 20세기로 접어들며 그동안 동아프리카 전 지역에 대한 통치가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던 양상이 차차 변화를 보이게 되며, 케냐 지역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 케냐의 경우, 이 지역의 중요성과 비중이 간과되어 왔음은, 몸바사에서 키수무에 이르는 철도를 우간다 철도(Uganda Railway)로 명칭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철도가 지나가는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Uasin) 고원 지역이 모두 우간다의 동부 지역(Eastern Province of Uganda)이었기 때문이다. 케냐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각기 자신의 종족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충성하였으나, 우간다의 경우는 조직적이며 체계화된 왕국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유럽인들로서는 왕국의 왕을 상대로 식민 통치의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케냐 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부족과 백인 정착민들 사이에 잦은 분쟁과 갈등이 상존하였다. 따라서 정착민들로서는 이 지역을 정착에 용이한 곳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902년, 식민 정부는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여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 기슈 고원 지대(Uasin Gishu Plateau)를 동아프리카 영국 보호령(British East Africa Protectorate), 케냐로 편입시켰으며, 같은 해 유럽 백인 정착민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을 유치하여 그들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백인이 우월한 인종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을 두고 자신들만의 정당을 결성한다. 정착민들은 영국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판무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 경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정착민들은 식민 정부 감독하의 아프리카 원주민 노동력의 공급을 요구하였으며, 또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점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 사용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로서는 백인 정착민들의 이 지역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에 대한 상반되는 논쟁이 발생한다. 1903년, 찰스 엘리엇 경은 비옥한 백인들의 고원 지대(White Highlands)를 유럽인만이 점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착민들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아시아계 정착민들은 비옥한 토지 사용이 불가능해지며, 이로 인한 영국 본국 정부와 엘리엇 사이의 마찰로, 후일 엘리엇은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결정한 데 대한 문책으로 사임 당하게 된다. 찰스 엘리엇과 영국 정부 사이의 문제 야기는 1904년 체결된 최초의 마사이 협정(First Masai Agreement) 때문에 발생한다. 마사이 족의 지도자 레나나(Lenana)는 이미 전에 영국 정부의 도움을 구하여 받은 적이 있었으며, 그 대가로 1904년 마사이 협정에서는 부득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이 족보다도 유럽인 정착민들에게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찰스 엘리엇 경이 사임당하고, 식민 행정은 식민성(Colonial Office)이라는 지방 관청 산하에 편입되었다. 엘리엇의 후임으로 도날드 스튜어트(Donald Stewart) 경이 부임하였으며, 그는 마사이 족을 위한 적절한 지역을 모색하였고, 케냐와 탕가니카 사이의 국경 부근 지역과 라이키피아(Laikipia)에 마사이 족을 정착시킨다. 이 리프 밸리 지역은 이제 유럽인들의 정착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으며, 마사이 족이 지정 거주 지역에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케냐에서의 백인과 비(非) 백인에 대한 분리 정책이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이로부터 인종 분리 정책은 거주지에서부터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을 표시하여 분리 사용하는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기 시작한다. 제한 거주 지역의 설정은 키쿠유 족과 같은 타 부족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1906년 백인 정착민들의 영향력 행사로 인하여 케냐에는 입법 회의(Legislative Council)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가 구성된다. 백인 정착민들은 이미 이전에 식민지 보호령의 행정을 외무성(Foreign Office)으로부터 분리시켜 식민성으로 이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입법 회의는 케냐 정착민 중 임명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델라미어(Delamere) 경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착민들의 지도자들은 백인 우월성과 백인 정착 거주지(White Highlands)에 대한 정책만을 고집하였다. 이들은 흑백 차별 정책을 통한 발전 계획을 주장하였다. 델라미어와 그로간(Grogan)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인종 차별 정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시아계로 분류된 인도인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강력히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모든 인종의 평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고원 지대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 부여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아시아계 정착민들의 강력한 저지가 없었다면 케냐는 후일의 로디지아(Rhodesia)나 남아프리카와 같은 백인 통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1909년, 지반지(A. M. Jeevanjee)는 아시아인 정착민의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입법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1910년, 백인 정착민들은 그로간을 의장으로 하는 협의회(Convention of Associations)를 창설하여 정착민들의 관심사를 제시하였고, 그들 정책의 총체적 노선을 정부에 알리는 작업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유럽 정착민들은 백인 통치 정책이 강화되기를 원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플랜테이션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주도록 정부가 개입해 주기를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보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은 이와 같은 백인 정착민들의 기본적인 태도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재차 총독과 델라미어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여 델라미어는 입법 회의에서 일정 기간 축출 당하게 된다. 1911년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유럽인들이 토지를 사용하기 위해 마사이 족을 라이키피아(Laikipia)로부터 이동시키려는 것으로, 총독 퍼시 지로드(Percy Girouard) 경은 두 번째의 마사이 협정을 맺게 되며, 1904년의 엘리엇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 당하게 된다. 1913년, 인도인들은 정당(East African Indian National Congress)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입법 회의 내에 인도인 정착민의 의석 확보를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식민지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전시 위원회를 열어, 유럽 정착민들은 1915년 이 위원회에 대표자를 임명시켰다. 전쟁이 종료될 무렵 이들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의 대표자 선출 권을 부여받게 된다. 총독 에드워드 노시(Edward Northey)는 유럽 정착민들의 이익이, 다른 인종들보다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1922년,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4명의 의원을 입법 회의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모든 결정은 유럽인들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땅이 지배받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소견을 밝히지 못한 채 소외당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을 정착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케냐로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실직 문제가 야기되었으며, 이 계획으로 말미암아 난디(Nandi) 족은 새로이 도래한 백인 정착민을 위해 그들의 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백인 정착민 위주의 정책과 계획은 1923년에 작성된 데번셔 백서(Devonshire White Paper)의 출현으로 인해 극도로 위축된다. 1923년, 영국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지반지는 아시아계 인도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으며, 델라미어는 백인 정착민을 대변하였다.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데번셔(Devonshire) 공작이 의장으로서 주관하였던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데번셔 백서를 발표하게 된다. ① 케냐는 아프리카인의 국가이며, 따라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② 케냐의 고원 지대 (Highlands)는 유럽 정착민에게만 할양된다. ③ 아시아인 (인도인)들은 입법 회의에 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참여시킨다. ④ 케냐 내의 인종 차별을 금지한다. ⑤ 아프리카인을 대표하는 1명의 선교사가 입법 회의에 임명된다. ⑥ 정착민을 위한 헌법상의 특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23년에 결정된 이와 같은 사항들은 철저히 백인 정착민 위주의 이익 추구와 정책 수립을 강요하던 유럽인 정착민들에게는 많은 양보와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5년, 식민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Local Native Council)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인들의 문제를 다루도록 유도하였으며,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백인 정착민들은 우간다와 탕가니카를 포함하는 연방체를 결성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아프리카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영국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나 3국 연방체 어느 측에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31년 정착민 출신의 정치가 델라미어가 사망하고, 같은 해 조셉 보른(Joseph Byrne)이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과 의견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정착민들에게 있어 그는 매우 불만스러운 존재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만이 세금을 내고,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던 백인 정착민들은 1936년부터 수입세를 지불하게 되었으며, 행정 회의에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참여시킬 수 있었으나 차차 그들의 특권은 상실되며, 여타의 종족들이 후일 참여하게 된다. 아프리카인 대표에 관한 원칙이 1931년 수립되고, 1944년, 최초의 아프리카인 대표 엘리우드 마수(Eliud Mathu)가 입법 회의의 의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 KANU)은 케냐가 1963년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뒤 2002년 선거 패배 때까지 40년 가까이 집권한 케냐의 정당이다. 그것은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케냐 아프리카 동맹(KAU)으로 알려져 있었다. KAU는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식민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60년 제임스 기추루(James Gichuru)에 의해 다시 설립되었으며 1960년 5월 14일 톰 음보야(Tom Mboya, 1930~1969)의 케냐 독립 운동과 합병하여 KANU로 개칭되었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한 무장 반란 마우마우의 영향으로 비상사태에 처했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국민정치운동인 KAU는 1952년에 금지되었고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를 포함한 지도부는 1953년에 투옥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케냐의 정치체계에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부족주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케냐의 식민지 전체에 걸쳐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부는 1952년에 국가적인 정치 운동을 금지했다. 1954년부터 식민지 정부는 식민 정부에 우호적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지역 내 부족 중심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정부는 1956년 부족 당 지도자들을 레그코(Legko)에 임명했다. 로날드 은갈라(Ronald Ngala), 데니얼 아라비아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1924~2020), 마신데 뮬리로(Masinde Myuliro)가 리프트 밸리, 아르깅스 코덱(Argins Kodek)이 나이로비,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Jaramogi Oginga Odinga, 1911~1994)가 냔자 레코(Nyanja Reko) 회원이 되었다. 중앙 케냐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레미아 제임스 냐가(Jeremia James Nyaga)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케냐 중부에서 정당 금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7년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입법위원회 첫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온건하고 우호적인 지도자 대다수는 1957년 다시 레그코로 선출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1956년 나이로비를 대표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에 의해 지명된 아르깅스 코덱을 격파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톰 음보야였다. 1960년에 설립된 KANU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이념의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독립 직후 부각되었다. 그러나 1965년 케냐 의회에서 세시셔널(Sesishunul) 제10호 서류가 채택되고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와 동맹한 좌파 정치인들이 사임하면서 패러스타탈(Pererstatal) 형태의 국가 개입과 함께 혼합된 시장 경제 정책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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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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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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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지정학적 경계선상에 놓여 있는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이다. 국토 면적은 1,904,569km²로 대한민국의 19배, 한반도 8.5배고 세계에서 14번째로 넓다. 섬의 개수만 18,200개를 넘어서, 인도네시아의 모든 섬을 하루에 하나씩 모두 방문하려면 46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광대하다. 더불어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팜유 생산국이며, 태국 다음의 세계 2위 고무 생산국이다. 그리고 브라질, 베트남 다음의 세계 3~4위 커피 생산국이기도 하고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상당한 규모의 에너지들을 수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어 근대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각종 향신료의 주요 수출국으로써 자리매김한 국가였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경계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일대일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은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시아에서 일대일로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성해야할 전략의 중심지였다. 인도네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축은 여러 전략적인 부분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인도양과 서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인도양이라는 바다는 태평양과 더불어 남반구의 거대한 수역을 상호 연결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기후조건상 대체로 인류가 살기 좋은 따뜻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전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점 국가인 인도네시아에만 해도 2억 7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은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호주,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호주, 뉴질랜드가 영유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들은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제 해상 도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도-태평양 일대는 가장 역동적인 경제 지역 중 하나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협력과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 이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새로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도양의 서쪽 해안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열대 해양을 나타내는 지구 생물학 분야의 용어에서 지정학적 용어로 차용되었다. 이처럼 지정학적인 의미를 가진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인도 뉴델리의 국립 해양 재단 이사인 구프리에트 쿠라나(Gurpreet S. Khurana)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면서 국제 문헌에 기록되었다. 2007년 전략 분석(Strategic Analysis) 외교학지에 실린 "해상 안보 : 인도-일본 협력의 전망(Maritime Security: Prospects for India-Japan Cooperation)"이라는 기사에서 쿠라나 박사는 인도-태평양을 서아시아와 중동 포함하여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인도양과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광의적인 해양 공간으로 정의했다. 쿠라나 박사는 인도와 태평양이 해상 전략, 혹은 지정학적 전략인 인식에서 구분하고 있다면 인도와 일본, 남쪽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해양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이해관계가 성립되고 여기에 태평양을 관할하는 미국이 합류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구축은 매우 안전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지역 전략의 비전으로 탄생했다.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2007년에 인도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양해의 합류(The Confluence of the Two Seas)”라는 고대 아시아의 지리적 관점을 두고 "자유와 번영의 바다로서 역동적인 결합(A dynamic union as a sea of freedom and prosperity)"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 대신,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목표를 설정하여, “인도-태평양”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태평양"의 개념은 아시아-태평양의 지리적 경계 내외의 국가들과 이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이와 같은 지정학적 개념은 전략 지정학적인 담론에서 점차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전 세계 정책 입안자, 전문가, 학자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은 태평양과 인도양 연결에 관한 지리적으로 언급한 것 이 외에도, 해양 안보에서 전략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전략적, 지정학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두 해양의 역할과 기능, 연결성 및 상호 의존성과 연관하여, 인도-태평양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 언어, 정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의 중심인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중요한 해로가 거쳐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3등분 하고 있는 해로의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은 인도-태평양과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까지 연결하는 유라시아 항로의 중심이자 최대 요충지다. 그리고 자바해, 술라웨시 해협 등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태평양의 주요 군도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필리핀과 남중국해를 통해 중국과도 연결될 수 있기에 인도네시아의 지정학적 가치 무궁무진하다. 인도네시아 지역은 세계 3대 경제권(미국, 중국, 일본)이 충돌하고 있는 지역이면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역동적인 지역들 중의 하나이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는 비록 개발도상국에 속하고 있지만 정치, 경제적인 이익에 따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유롭게 노선을 정할 수 있다. 특히 말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 각 해협에는 세계에서 붐비는 항구들로 연결되는 항로들이 존재하며 세계 해상 무역의 약 60%가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그 중 3분의 1은 남중국해를 통과하여 중국, 대만,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로 가며 멀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간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바닷길은 석유, 가스 상품을 중동에서 호주와 동아시아로 운송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면서 이 지역은 또한 해적과 이슬람 반군, 테러 등이 존재하는 불안정한 바다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의 바다들을 통해 세계 경제의 생명선을 보장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 인도네시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중국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2004년 쓰나미 피해 때도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를 도운 국가가 중국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인도네시아는 중국을 좋은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2022년에는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만든 국영 펀드인 실크로드펀드(SRF)가 인도네시아 투자청(INA)과 INA가 운용하는 인도네시아 국부펀드에 최대 200억 위안을 투자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대일로의 기초를 놓았다. SRF와 INA는 인도네시아가 외국인에게 개방한 모든 부문에 투자가 허용되며 특히 중국-인도네시아 간의 경제적으로 연관된 프로젝트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INA는 인도네시아의 낙후한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 중국 자본을 끌어 들였고 1차적으로 수도 자카르타에서 제3의 도시인 반둥까지 142㎞ 구간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사업을 수주했다. 두 나라는 철도 사업을 위해 인도네시아·중국 합자회사(KCIC)를 만든 뒤 대부분 공사자금은 중국 개발은행 대출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다시 자카르타와 반둥을 잇는 고속철도 건설 사업은 재개되었고, 2023년 8월 18일 마침내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자카르타에서 칼리만탄(말레이시아 명 보르네오)의 발릭파판(Balikpapan)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수도를 옮기는데 대부분 건설사 수주를 중국이 따냈다. 이에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미국 또한 이를 인지하고 인도네시아와 교류, 협력을 확대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계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국가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에 잠시 거주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러한 관계 등으로 인해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군사적인 위협이 늘어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필요했다. 특히 중국 측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중국과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고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두 나라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중립 외교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도네시아의 자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두 나라 사이에서 철저히 실리를 취하고 있는 입장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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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지정학적 경계선상에 놓여 있는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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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쿠르드족, 일본 우익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되다.
- 쿠르드족에 대해 필자는 많은 연구와 포스팅을 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유지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자치구인 쿠르디스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쿠르드족에게 독립 국가를 세워준다는 약속을 하고 쿠르드족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1920년 세브르 조약에는 쿠르드족이 사는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 쿠르드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이 들어 있었지만, 이를 대체한 1923년의 로잔 조약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되었다. 결국 쿠르드족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의적인 국경선에 의해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분단되었고, 이는 쿠르드족의 비극이 되었다. 즉, 영국과 미국이 이용해 먹고 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물론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민족주의 세력이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독립에 실패했다. 따라서 각 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20세기가 되면서 문화적인 압력으로 인해 이들의 지도부들이 뭉쳐 정치 세력을 탄생하게 되었고 이에 큰 인구가 존재하는 터키와 이라크, 이란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자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막대한 석유 매장지에 위치해 있었기에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은 강대국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 좋은 민족이었다. 따라서 쿠르드족의 독립과 영속의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반목해와다. 쿠르드족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들을 돕거나 배신을 당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 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 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영국에 배신을 당하고 민족은 각 국가들로 나뉘어 분할되었다. 1972년 냉전 때는 친미 국가인 이란과 친소 국가인 이라크 간의 국경분쟁이 발생했을 당시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들을 이란과의 전선에 투입하고 독립을 약속했지만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족의 일부 단체와 교섭했지만 이를 파악한 이란 정부에 의해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 상까지 받았던 바 있을 정도로 보복은 참혹했다. 이스라엘은 이란 쿠르드족에게 이와 같이 이용하고 터키 쿠르드족들을 학살할 때는 터키를 돕기도 했다. 특히 PPK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 정보를 제공했을 정도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전 오스만 제국군에게 학살당할 당시 쿠르드인들이 오스만 제국군과 같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임과 동시에 이들도 당시에 아르메니아인에게 보복 학살당한 피해자였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거주 쿠르드족조차도 1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으니 소수민족이라 보기에도 어려운 실정이다. 1970년대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Aḥmad Ḥasan al-Bakr, 1914~1982) 행정부 시기의 이라크에서 국제 유가가 폭등하게 되는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도 유전들이 몰려 있는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한 북부 지역은 그 혜택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실제로 현재 이라크의 쿠르드족 상당수는 현재도 오아시스 농업이나 천수 농업을 영위하면서 농사를 짓고, 양과 말, 소를 이끌고 각지를 유목하면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중동에서의 세력 균형을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유럽, 아시아의 세력 중앙에 위치한 터키가 아주 중요한 국가다. 이는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흑해에서 보스포루스를 통과해야 서방과 무역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중동과의 관계에 있어 터키는 매우 큰 전략적 요충지다. 만약 터키가 약해져서 미국이든 러시아든, 서로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면, 미국, 러시아 서로가 터키를 넘어 중동과 유럽 전체를 영향권에 둘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마냥 미국이 쿠르드족을 편들어 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결국 쿠르드족은 미국이나 유럽 세력에게 이용당해질 수밖에 없는 비운의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각 국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쿠르드족은 중동 뿐 아니라 유럽 및 미국, 아시아의 일본까지 난민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민족들의 난민으로 분할 수용하는 것은 유엔 인권 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UNHRC)의 뜻이기도 했다. UNHRC는 각 UN 회원국들에게 쿠르드족에 대한 인권을 내세우며 분할 수용을 강요했는데 이는 쿠르드족을 위한다기 보다는 터키와 중동 각지에 있는 쿠르드족들의 숫자를 줄이고 이들의 분할하여 각종 국제 공작에 수월하게 이용하려는 측면이 더 강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UNHRC의 강요를 받아들여 쿠르드족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쿠르드족을 "재일 쿠르드족"이라 부른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입장은 전적으로 터키 정부의 입장을 따르기 때문에 애초부터 많은 수의 쿠르드족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난민 심사 중에는 추방하지 못한다는 점과 난민 신청 횟수의 제한을 둔다는 법의 허점을 이용해, 터키 국적으로 일본으로 입국 후, 난민 신청이 반려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신청을 하여, 일본에서 불법 이민하는 쿠르드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쿠르드족 불법 난민들은 주로 사이타마 현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100여 명의 쿠르드족이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터키인을 집단으로 습격하고, 부상당한 터키인을 추가로 폭행하기 위해 병원까지 몰려가 경찰이 제지하자 경찰까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에 있는 쿠르드족들이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난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일본 정부에 납세를 전혀 하지 않고 고급 자동차 및 요트를 소지하는 등 호화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들은 이를 SNS로 자랑하고 있을 정도이며 난민으로 들어온 재일 우크라이나인과 소통하며 지내는 등, 일본의 새로운 사회문제로 자리잡았다. 쿠르드족은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제외하고는 인권 단체의 지원과 난민 신청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떠한 범법 행위를 자행해도 석방되며 일본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다. 특히 사이타마 현에서는 불법으로 개조된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주위를 시끄럽게 하고 밤중에 라이트를 끄고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주행하면서 화물차에 과적재들 당연하게 하고 있다. 더불어 초등학생 나이 대의 아이들에게까지 공사장에서 일을 시키고 화물차나 크레인을 몰게 하면서, 일본에서의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SNS에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쿠르드족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으며 이들은 재알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자신들을 차별하지 말고 일본인이 우리 방식에 따라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24년 1월에는 사이타마 현에서 쿠르드족 남성이 일본인 여중생을 주차장에서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체포된 쿠르드족 남성은 어린 여성과 놀았던 것 뿐이지 폭행하지 않았다 주장해 일본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심을 키우고 있다. 그러자 일본 우익 추종자들은 쿠르드족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혐오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 각 지역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모습을 동영상과 사진을 무단으로 촬영한 이후, 막무가내로 ‘불법 체류자’, 혹은 ‘범죄자’라 지칭하여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SNS에 올려 조리돌림을 시전하고 있다. 이 혐오론은 쿠르드족이 범죄 조직과 연루됐다거나 일본 각 지역이 쿠르드족이 자행한 살인 사건들이 잇다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 쿠르드족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며 쿠르드족 학생이나 어린이도 이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특히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는 어린 아이 사진을 찍은 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는 얘기를 SNS에 게재해 확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 관공서에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쿠르드인을 추방해야지 왜 우리의 세금을 쓰느냐 등의 민원을 재기해 업무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모두 쿠르드인들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더불어 우익들은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마을에 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러한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재일교포와 중국인들을 상대로 헤이트 스피치를 벌였던 이들이다. 일본 우익들의 첫 번째 표적은 과거에는 재일교포들과 재일동포 한국인이었고 이어 중국인, 쿠르드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나 재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나 그들 스스로가 저질렀던 행위들이 있기에 이 같은 행위들에 대한 업보인 셈이다. 한편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거의 3,000명에 가깝다. 이들 중에 무직자는 60%가 넘는다. 일본은 전쟁 이후 3년 동안 약 50억엔의 여행 및 생활비를 지원했고, 피난민들에게 폭넓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영주택을 제공하고, 취업 알선 및 일본어 교육 등 다양한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도가 높다. 그러나 못지 않게 이들이 행하는 패악질과 범죄도 많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밝히는 것을 매우 꺼려하며 이를 밝히면 인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더 이상 난민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혜택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고, 이들 범죄 행위들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다.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와 같은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한국도 난민들을 받아들인 옆 나라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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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쿠르드족, 일본 우익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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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한국 기업, 중국 기업의 막대한 투자로 인한 위기 상황에 대해
- 하노이 중심가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40분 거리의 한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1990년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한국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베트남에 진출했을 때 건설한 골프장이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하노이에는 건설, 레저, 자동차 제조업을 포함한 여러 산업 분야에서 김우중 회장이 남긴 족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하노이에서는 "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과정(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 대학 졸업자들을 선발해 베트남을 포함하는 해외 현지에서 그 나라 말을 익히고, 그곳의 경제와 기업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착안되었다. 당시에 김회장님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 프로그램은 ‘김우중 사관학교’라고 부르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하노이의 대우자동차 조립 공장에서는 작업장 벽 한쪽에 늘 작업복이 줄지어 걸려 있었는데, 퇴근할 때 깨끗한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대우’ 마크를 보고 모두 부러워했기 때문이라 했을 정도로 대우에 대한 베트남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어마어마 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현지인들의 마음에 한국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줬음을 알 수 있다. 한국-베트남 간의 이와 같은 교류는 김우중을 비롯해 베트남에 진출했던 1세대 기업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 말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해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영 원리를 앞세운 세계화가 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박연차 태광실업회장과 같은 한국의 기업인들은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섰던 대표적 선두 주자였던 분들이다. 그리고 1990년대 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금융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한국 기업의 해외 시장 개척이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국제 금융 위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혼란에 빠졌던 세계 경제는 어떤 대안적 경제 운영 원리에 따라 변화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서 좀 더 점진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베트남 진출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7,0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 기업의 진출과 개인 투자는 제조업과 건설, 도소매업, 과학기술과 R&D, 차량 수리와 같은 서비스 부문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하노이와 하이퐁, 타이응우옌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지역에서부터 호치민과 빈 즈엉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전역에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베트남 현지 지자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업이 이미 참여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베트남 전국에 걸쳐 있다. 삼성은 전자, 반도체, 휴대폰 생산을 위해 베트남 노동자 16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의 수출은 베트남의 총 해외 수출액의 24~28%에 이를 정도다. 이와 같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가속화되고 있지만 최근 들어 다시 주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베트남 시장에서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동차 생산을 위해, 이미 6만 대를 조립할 수 있는 현재 설비에 더해 공장을 증설함으로써 생산 능력을 10만 대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그 뿐만 아니라 현대건설은 하노이 구시가지 중심 지역인 호안끼엠 일대를 관통하는 3호선 지상철 건설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LG전자 또한 베트남 하이퐁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LG전자가 주력 상품인 TV, 휴대폰, 세탁기, 청소기, 에어컨 등의 생산 라인을 하이퐁 지역 공단으로 통합 이전했다. 이는 베트남 내수 공급 차원을 벗어나 베트남을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삼기 위해 이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기업들이 막대한 투자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국영 철도기업 중국중차(CRRC, 中国中车) 대표단은 제15회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를 계기로 베이징에서 열린 ‘베트남-중국 교통인프라 개발협력회의’에서 베트남 남북고속철도를 비롯한 철도 인프라 사업에 대한 투자 참여 의사를 베트남에 타진했다. 베트남은 고속도로와 남북 고속철도, 도시 철도, 항만, 공항 등 2045년까지 5개 부문 교통인프라 확충 사업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 규모는 베트남 정부로서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로 남아 있지만 베트남 기업 뿐 아니라 중국 기업들에게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베트남-중국의 수교 75주년을 맞고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사물 인터넷, 광전자, 양자 기술, 생명 공학, 신소재, 디지털 결제 등의 기술들이 중국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중국 대형 자동차 기업이 베트남에 1조원을 투자, 전기차 공장을 짓고 베트남의 유일한 국산 전기자동차 제조사이자 전기 스쿠터 제조사인 빈 패스트(Vin Fast)와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국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 회피 전략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올인하고 있다. 제품의 질을 중국 것을 어떻게 믿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경제력이 떨어진 국가들에게 중국제는 극한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물량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물건의 질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90~2000년대의 중국제 물건보다 현대 생산되는 중국제 물건은 질적인 면과 디자인에서 많이 나아졌다. 그동안 막대한 물량으로만 승부했던 중국은 질적인 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노려왔다. 서방 선진국에서 전문가도 모셔오고, 공학 쪽에 우수한 인재들은 서방에 유학보내고 이들이 돌아오면 이들을 중심으로 질적인 변화와 신제품 개발을 계속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산업스파이로 들어가 남의 기술들을 빼오는 등, 질적 향상을 위해 별 짓거리를 다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중국제는 90~2000년대처럼 허접한 물품에서 현재 나름 쓰기에는 꽤 괜찮은 제품으로까지 기술력이 올라왔다. 물론 아직까지 질적인 면에서 우리와 서방 선진국이 약간 우위에 있지만 이제는 이조차도 곧 있음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될듯 싶다. 게다가 값도 저렴하게 양적으로 대량생산을 해버린다면 우리나 서방 선진국들이 어떻게 그 물량과 대적할 수 있을지 암담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어떻게 승부해서 질적, 양적으로 중국에 우위를 점할지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한 중국제 불신은 이같은 상황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현실은 우리 기업들이 베트남에서조차도 중국의 막대한 투자에 서서히 밀리고 있다는 것이고, 삼성 공장이 있던 박닌 또한 중국의 텃밭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몽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다. 동남아시아에 놀러만 오면 이런 현실은 끝없이 도외시 된다. 놀러만 오지 말고, 이런 현실도 좀 제대로 목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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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한국 기업, 중국 기업의 막대한 투자로 인한 위기 상황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