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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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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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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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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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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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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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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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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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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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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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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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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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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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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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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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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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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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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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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복자인 칭기즈칸이 두려워 한 두 명의 영웅 : 자무카와 잘랄 앗 딘
- 세계의 정복자인 칭기즈칸도 두려워한 두 명의 영웅이 있는데 그는 그의 맞수 자무카와 잘랄 앗 딘이다. 자다란 자무카는 칭기즈칸의 어렸을 적부터 형제와 같은 친구였다. 그는 자다란 부족에서 태어났고 칭기즈칸과 함께 자랐다. 그러면서 당시 테무친이었던 칭기즈칸과 의형제인 "안다"의 맹약을 맺었다. 그는 테무친이 큰 고초를 겪었을 때마다 도와줬으며 1182년에 테무친의 부인인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당했을 때, 케레이트 족의 옹 칸과 동맹을 맺고 테무친과 함께 그녀를 구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테무친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1201년에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 타이치우드족의 타르구타이 쿠릴투크, 타타르 족의 자일부카와 연합하며 세력을 키웠으며 쿠릴타이는 자무카를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의 구르 칸에 선출한다. 쟈무카의 이 호칭은 테무친과의 불화를 불러오고, 테무친으로 하여금 쟈무카에 맞서는 부족연합을 구성하게 만든다. 자무카는 테무친보다 연합세력을 키우는 데 실패하였던 이유는 통치철학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무카는 그가 그의 세력 내에서 부족 간의 전통적 경계를 유지하였고, 능력보다 서열을 중시했다. 특히 쟈무카는 몽골 전통 상 낮은 지위를 점하는 양치기를 등용하지 않았고, 반면 테무친은 전통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다. 그는 양치기였던 무칼리, 제배 등을 기용했고 수부타이 같은 지장을 등용해 능력에 맞게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했다. 자무카는 테무친과 맞선 초반에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그는 전술도 뛰어났으며 용맹했기에 테무친의 군대가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1204년을 기준으로 달라진다. 나이만 족의 타이양 칸, 메르키트 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연합하여 테무친을 제거하려 했으나 전투 중에 타이양 칸이 전사하고 나이만족이 패배하여 실패하면서 승부는 테무친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쟈무카는 결국 1206년 테무친에게 패배하여 근거지를 잃고 유랑하던 중 부하의 배신으로 테무친에게 포로로 잡혀왔다. 테무친은 쟈무카를 배신한 자들을 그의 눈 앞에서 처형하고, 그를 살리려 하였으나 자무카는 이를 거부하고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듯이 몽골의 왕도 한 명 뿐이라며 자신을 죽일 것을 청하여 결국 처형된다. 자무카는 뛰어난 군사 전술과 용맹함으로 테무친, 칭기즈칸을 위협하였고 칭기즈칸도 자무카에게 매우 고전했으나 결국 자무카는 전체 몽골의 판도를 보는 능력이 없었고 전략에서 밀려 패배했다. 그에게 그런 전체 판도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칭기즈칸이 아닌 자무카가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영웅, 잘랄 앗 딘은 호라즘의 왕으로 칭기즈칸과 자주 전투를 벌였고 칭기즈칸이 호라즘에 침공했을 당시 대단한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221년 5월, 호라즘의 수도 구르간즈가 함락되고 완전 페허화됨으로써, 호라즘 제국은 그 존재가 사실상 소멸되었고 잘랄 앗 딘은 쫓기게 된다. 잘랄 웃 딘은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자 칭기즈칸에게 끝까지 대항하였던 호라즘 최고의 영웅인 인물이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로 호칭인 잘랄 웃 딘은 '영광', 본명인 밍부르누는 투르크어로 '하늘이 내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잘랄 웃 딘이 이끄는 호라즘의 6만 병력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忽都忽)가 이끄는 몽골의 선봉부대와 조우했다. 당시 몽골군은 약 3만명 규모로 추정되는데, 이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겨주는 대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파르완 전투라 불리는 이날의 격돌은 몽골군이 상대방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이기도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파르완에서의 패배와 함께 손자 무투겐이 전투 도중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한다. 칭키즈칸은 자신이 직접 사마르칸트에 진주하고 있던 본군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호라즘 세력은 각지에서 연패하며 인더스 강 근처까지 밀려가게 되는데, 1221년 11월 25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삼면에서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겪는다. 여기서 그가 한 선택은 폭풍우로 불어난 20척 아래 인더스 강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 강 건너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용맹함을 본 칭기즈칸은 감탄하면서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며 크게 칭찬하고, 더 이상 뒤를 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잘랄 웃 딘은 칭기즈칸도 두려워했던 인물인 것이다. 그는 결국 칭기즈칸에게 패했고 호라즘이 패망하자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 칭기즈칸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그를 곤란하게 했다. 이처럼 잘랄 앗 딘은 끈질긴 항몽(抗蒙) 투쟁을 시도했으나, 호라즘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게릴라 전도 한계가 뚜렷했고 잘랄 앗 딘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게 되어 인도, 타브리즈, 이스파한, 아나톨리아 등지로 도주를 계속했다. 결국 잘랄 앗 딘은 1231년 봄, 티그리스 강변의 알 자지라(Al-jazira)에서 쿠르드 족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호라즘 제국의 마지막 흔적도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 소개했던 이 두 영웅은 칭기즈칸을 뛰어 넘는 무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칭기즈칸은 소규모 전투보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결국은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두 인물을 굴복시켰다. 칭기즈칸의 힘은 전술을 아우르는 전략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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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복자인 칭기즈칸이 두려워 한 두 명의 영웅 : 자무카와 잘랄 앗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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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기적과도 같은 베트남의 승리
-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1257년, 1284년, 1287년 3차례 대월을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비슷한 사례가 일본에도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2차례 모두 태풍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베트남은 1차를 제외하고는 쩐 흥다오와 그의 수하에 있는 베트남군의 실력이 승리를 견인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송나라도 3차례에 걸쳐 일어난 몽골의 공격에 40년 동안 수성을 했었다. 이는 베트남과 비슷하지만 송나라인 경우는 중요 거점지역인 양양(襄樊), 번성(樊城), 강주(江州), 사천(四川)이 모두 점령당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베트남은 세 번에 걸친 전쟁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몽골의 베트남 원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그 동안 몽골에서 다른 대외 원정과 다르게 군사의 숫자에서 상대보다 우위인 전력을 내세운 것인데 몽골은 송나라와 대리국 정벌 도중에 위협적으로 복속시키려 간접적으로 전투를 벌인 형식이었던 1차를 제외하고 2차, 3차에서 50만,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세 차례나 침공했는데도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참고로 이 전쟁으로 인해 몽골 제국의 세계 정복은 종결되었다. 시리아 지역의 아인잘루트 전투가 공세 종말점으로 여겨졌다면 베트남 원정은 세계 정복을 완료하는 전투였던 것이다. 몽골 제국의 지도자이자 황제인 몽케(憲宗, 1209~1259, 재위 : 1251~1259)는 동생인 쿠빌라이를 송나라의 서남쪽 일대인 운남 지역으로 보내 대리국(大理國)을 공격하게 했다. 운남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약소국인 대리국은 쿠빌라이에 의해 제압되었고 쿠빌라이의 장수였던 우량카타이(兀良哈台)는 수하 중 2명을 사신으로 삼아 쩐 왕조로 보내 “자신들은 송나라를 공격하러 갈 것이니 몽골에 귀순한 뒤 길을 열어 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쩐 태종은 이와 같은 쿠빌라이의 요구가 무례하다고 생각해 사신들을 대나무 밧줄로 묶어 옥에 가두어 버렸다. 결국 우량카타이는 원정군 및 대리에서 차출해 온 2만에서 2만 5천 명 사이의 병사를 자신의 아들인 아주(阿朮), 제장인 차크차크두(徹徹都), 콰이두(恒都) 등에게 맡겨 베트남을 침공했으며 쩐 태종은 제장인 쩐 구옥 뚜안(陳國峻)으로 알려진 쩐 흥다오와 권신이던 쩐 트어의 셋째 아들 쩐 냣히유(陳日皎), 옛 레 왕조(黎朝)의 후예인 레 푸쩐(黎輔陳) 등의 제장들과 티엔투옥(天屬), 티엔쯔엉(天彰), 타인즉(聖翼), 쯔엉타인(彰聖), 탄사이(神冊), 꿍탄(鞏神)으로 불리는 6개의 금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쩐 흥다오는 해군을 불러 국경을 봉쇄했다. 그러자 우량카타이는 쩐 왕조의 수도 탕롱(昇龍)를 향해 진격하기 위해 군을 양익으로 나누어 한 쪽은 자신이 이끌었고 다른 한 쪽은 차크차크두에게 맡겨 진격했으며 아들인 아유로 하여금 수시로 주변 지역을 정찰하게 했다. 쩐 왕조의 병사들이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사적으로 방비하자 아유의 부대로 퇴각했으며 이후 차크차크두가 이끄는 부대와 합류했다. 몽골군은 빈레(平厉)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쩐 태종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맞섰다. 쩐 왕조의 군대는 타오 강(红河)의 강변에서 코끼리 병과 기병, 보병 등을 앞세워 전방에 횡렬로 늘어서게 한 뒤 후방에 있는 보병과 기병을 엄호하는 형태로 진지를 구축하며 몽골군을 기다렸다. 몽골군은 타오 강을 건너기 위해 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전방은 차크차크두가 맡고 중군은 우량카타이가 직접 맡았으며 후방은 콰이두와 아유가 맡았다. 우량카타이는 베트남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 대리국에서 차출해 온 병사들을 전방에 열을 지어 전진시켰다. 이 전법은 주효하여 몽골군은 대리국의 군대 뒤에 숨어서 움직이며 베트남의 군사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협상을 하기 좋다고 판단한 우량카타이는 차크차크두를 보내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너희는 강을 건너려는 군대를 공격하지 마라! 우리와 싸우러 온다면 말을 타고 달려 그 뒤를 막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속임수로 배를 빼앗아 남벌 군이 무너지면 다시는 강에 배가 없을 것이고 너희는 모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언이 무색하게도 차크차크두의 군대는 강을 건너자마자 쩐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코끼리 병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아유가 기마 궁대를 이끌고 나와 코끼리의 눈과 피부에 사정없이 화살을 공격을 감행하자 쩐 왕조 군대는 주춤하기 시작했고 쩐 태종 역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오로지 장수 레 푸쩐 만이 태연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몽골군의 위세에 겁이 나 쩐 태종에게 공격을 중지해 달라 했고 레 푸쩐은 그 말을 듣고는 황제 앞으로 가서 고귀한 언행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청했다. 그러나 레 푸쩐의 항전 의지와는 달리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결국 쩐 태종은 노강(瀘江)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레 푸쩐은 쩐 태종을 몽골군이 사격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엄호하며 티엔막 강(拖幕江) 일대로 이동했다. 이 때 쩐 흥다오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지시해 식량을 숨기거나 묻어 버리고 깊은 곳으로 이동하여 매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티엔막 강으로 이동한 쩐 태종은 작은 배에 올라 레 푸쩐, 태위 쩐 투어의 3남 쩐 냣히유 등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견을 물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레 푸쩐과는 달리 쩐 냣히유는 뱃머리에 앉아서 별 말이 없다가 강물에 손가락을 담근 뒤 입송(入宋), 남송으로 망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배 옆구리에 몰래 쓰며 의견을 냈다. 그러자 쩐 태종은 쩐 냣히유에게 당신이 모으고 있는 군은 어디 있는지에 대해 묻지 쩐 냣히유는 군을 모을 수 없었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 한편 태부 직에 있었던 권신 쩐 투도(陳守度)는 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서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 없다며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에 쩐 태종은 그 말을 듣고 아직 해볼 만 하다고 여겨 저항하기로 했다. 그 사이 몽골군은 주변 지역을 정리하며 동보다우(東步頭) 성읍을 점거했다. 다음날 쩐 태종이 이끄는 군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몽골군과 대치했다. 몽골군은 깊을 것 같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 위로 화살을 쏘아댔고 화살이 떠오르지 않는 지역을 피해 말을 타고 도하했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진격해오자 베트남의 군사들은 쩐 태종을 호위하면서 수도 탕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 한 번으로 몽골군은 탕롱을 차지할 수 있었고 무능했던 쩐 냣히유는 근처의 섬으로 도주해 버렸다. 몽골군은 예전 쩐 태종에게 보냈던 사신들을 가둔 감옥을 찾아냈고 이들이 묶여 있는 대나무 밧줄을 풀어주었으나 사신 중 하나가 그 와중에 사망했다. 그러자 우량카타이는 분노하여 점령한 탕롱을 초토화시켰다. 몽골군은 단 두 번의 전투로 수도 탕롱까지 점거하고 파괴해 복수를 하긴 했으나 아직 베트남군의 주력은 남아 있었고 강을 건너면서 베트남군을 추격했기 때문에 전선이 길게 늘어섰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보급품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는 쩐 흥다오가 퇴각하면서 꾸준히 구축한 청야(淸野) 작전이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우량카타이는 병사들을 시켜 주변 마을이라도 약탈해보려 했으나 쩐 흥다오가 이미 주변 지역을 청야했기 때문에 쓸만한 물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9일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한 몽골군이 점점 지쳐갈 때, 자정이 된 시간에 쩐 태종과 태자였던 쩐 호앙(陳晃)이 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몽골군에게 기습을 가했으며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크게 패배했다. 후일 몽골군은 베트남의 군사들이 형편없고 약했다며 방심하고 있었지만 이 전투 당시 몽골군은 기습에 크게 놀라 각 군단들의 유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베트남군은 이러한 몽골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게 되었다. 우량카타이는 더 이상 남은 몽골군으로는 탕롱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빠르게 화잉산(橫山)을 지나 꾸이호아(歸化)를 통과해 운남 일대로 퇴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몽골군이 빠른 기동력으로 벗어나자 베트남 군사들은 몽골군에 대한 추격이 불가능 했는데 꾸이호아의 추장이었던 하봉(河俸)이 자신의 민병대를 이끌고 몽골군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한 우량카타이의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러 출발한 쿠빌라이와 합류했고 이에 몽골 제국에서는 베트남을 달래 후방에 대한 위협을 없애기 위해 2명의 사신을 추가로 보내 쩐 태종을 왕으로 봉했으나 이미 베트남에 대한 침공 사실에 화가 나 있던 태종은 사신을 모조리 결박한 뒤 추방해버렸다. 쩐 태종은 자신을 구해준 레 푸쩐에게 이혼한 아내이자 이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소성공주를 결혼시켰다. 이렇게 제1차 전쟁은 베트남을 다스리는 쩐 왕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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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기적과도 같은 베트남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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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를 반미 국가로 만든 인물,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1954~2013) - (2편)
- 차베스는 한 때, 베네수엘라의 구세주이면서 미국에 대항하는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사후 미국의 경제제재 및 그의 갖은 실정으로 축적한 문제점들이 폭발하여 베네수엘라가 아이티를 제외하면 라틴아메리카 최악의 경제가 파탄된 국가로 전락했다. 그로 인해 차베스는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의 반면교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무능한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차베스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대중 독재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쿠데타로 정계에 등장했다는 부분이 있고,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기를 끌어 순식간에 선거로 권력을 쟁취하고 대중 독재를 했다는 부분에서 권력 장악의 과정은 히틀러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차베스가 사망한지 14년이 지난 현재, 친미 성향을 갖고 있는 후안 과이도(Juan Guaidó)보다 친(親) 차베스 성향을 갖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가 인기가 더 높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볼 때, 민주 사회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정책 기조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수의 지지라는 명목하에 잦은 국민투표를 벌여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 직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대중 독재의 행보를 보였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중 독재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냥 비판할 수 없다. 자국 국민에게 도움을 주고 국가를 성장시켰다면 대중 독재여도 국민이 그를 원했기 때문에 마냥 비판받아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의 대중 독재는 부정부패에 이은 권력욕과 국가에 나락에 빠뜨렸다는 것에 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민 소환 투표제(Votación revocatoria nacional)가 있는 국가다. 그래서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탄핵하는 것도 가능한 국가가 베네수엘라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2004년에 이미 국민 소환 투표가 이루어진 전래가 있었으나 이는 부결되었다. 차베스의 경제 정책을 보자면 기본적으로 베네수엘라의 자원을 팔며 복지를 확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이는 본질적인 국가 경제 체제의 개선은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완전히 절망적인 수준으로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차베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와 같은 포퓰리즘과 반미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우려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차베스를 지지한 끝에 차베스의 연합사회당 정권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차베스 사후 미국의 경제 제재와 셰일가스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 유가가 떨어지자 석유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차베스는 폭력적인 독재자인 히틀러와 반대의 의미를 지닌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의 달콤한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 성숙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게 된 미개한 국민들, 그리고 가장 극단적이면서 파괴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차베스가 석유로 얻는 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었고, 이에 자본가들 및 국내 기업가들과 대립해 베네수엘라의 개혁에 실패했다는 논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가들과 기업가들이 그 정도로 국가 베네수엘라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들을 달래서 협조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차베스는 대놓고 이들 기업가들과 완전히 적대하는 어리석은 정책을 폈다. 더불어 차베스의 반대파들은 단순히 자본가 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산층이 포함된 광범위한 집단이 결속되어 있었다. 차베스 정권은 국민의 절반을 완전히 적으로 만들고 절반의 국민만을 위한 정권으로 존재했다. 차베스는 자원에 의존 하는 것을 막고 새로운 대체 경제를 도입하기 위해 뽑혔지만 무려 15년에 달하는 4차례의 임기 동안 집권했음에도 실패했다. 차베스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정치 세력이 차베스와 유사한 정책을 펴고 있음에도 베네수엘라 하층민들의 경제 상황은 여전히 가난한 것은 똑같았다. 이는 갑자기 돈을 손에 쥐게 된 하층민들의 소비가 엄청났고, 이러한 국민성은 그들이 여전히 하층민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지도자 한 사람이 이끌고 가는 정책 성과가 결국 국가 구조 자체의 개선에 실패했다. 베네수엘라가 실패한 원인은 국가 자체에서 나타난 고질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포퓰리즘의 젖어 생업은 하지 않고, 국가가 주는 돈으로 소비만 일삼는 저열한 국민성, 차베스의 정책과 노선 자체의 근본적 한계 등이 현재의 빈곤한 베네수엘라를 만들었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저유가 때문이지 경제 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많은 극심한 변화를 겪기 마련이고, 정부는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만 한다. 차베스는 막대한 무역 수지 흑자 시대를 겪고 이러한 흑자 시기가 끝나는 시대도 겪었다. 이를 기반으로 삼아 산업을 고도화 하지 않았으며 자원에 대한 의존도 더욱 높였다. 이는 차베스가 사망한 이후에 발생했고 마두로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미 차베스 말기 때부터 그러한 균열은 발생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외교 정책 또한 반미와 반서방 일변도를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와 거리가 멀기에 반미와 반서방 일변도는 오하려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스스로 고립화를 가져왔다. 차베스는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욕 내뱉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지녔고, 특히 공적, 사적으로도 미국과 쌓인 감정이 많기 때문에 미국을 자주 도발했다. 미국 남부 지역이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자 미국을 위해 지원금 좀 보내주자고 주장해 실제로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후에 CITGO를 통해 미국 북부 저소득층 가정에 난방용 석유를 지원하기도 했다. 적국이면서도 미국 정부를 싫어할 뿐이지 일반 미국 시민은 미국 정부와 별개로 여겨 그다지 싫어하지 않은 모양이다. UN 연설문에서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를 대놓고 이라크를 침공한 악마라 비난했다. 그 전날 부시가 연설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라크 사막에서의 유황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El olor a azufre persistía en el desierto iraquí)" 라며 부시를 조롱했다. 반면 버락 오바마는 악마가 아니라고 하면서 책을 선물로 주어 우호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2010년 2월 13일, 육, 해병대 6,000명 이상, UAV 다수, IED에 대응하기 위한 다수의 폭발물 제거차량, 아파치 헬기 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아프가니스탄에Operation Moshtarak을 개시하자 다시 오바마에게 실망했다고 발언했다. 차베스는 미국 다음으로 콜롬비아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는 반미, 반서방을 추구하는 자국의 이념 성향과 맞추지 않는다는 이유여서였다. 그는 콜롬비아의 대통령을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멸칭했으며 콜롬비아에 대해 수많은 비난의 언행을 남겼다. 그러다가 2010년 8월, 후안 마누엘 산토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이 취임하자, 그는 여기에 축전을 보내며 가까스로 콜롬비아와 화해했다.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하자 전 세계가 북한을 규탄하는 가운데 혼자서 미국의 소행이라고 미국을 비난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쿠바의 카스트로,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알리 하메네이,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심지어는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까지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반미 지도자들은 모두 만나면서 친분을 과시했다. 다만, 차베스의 반미외교는 진정성 없이 그저 반항적이며 충동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당시 차베스의 집권 기간 중에 대미 무역량이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차베스 정권 때 대미 무역 의존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 이후로도 맥도날드나 코카콜라 같은 미국 기업이 철수하지 않고 성황리에 영업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반미외교를 펼치면서도 중남미 각국에 석유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Rafael Correa)가 당선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후일 차베스가 사망한 이후, 콜롬비아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세력들과 협력해 미국 사회에 코카인을 뿌리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의하면 차베스 전 대통령이 지난 2005년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FARC)의 도움을 받아 미국 사회에 코카인을 대량으로 유통 시킬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고위 관료들을 소집했다. 지난 2012년 미국으로 도피한 아폰테는 미국 마약단속국(DDA)에 차베스는 당시 회의에서 코카인을 미국 사회에 뿌리는 것을 포함해 미국과 사투를 벌이기 위한 정책 목표들을 촉진하라고 관료들을 압박했다고 했다. 미국 검찰은 스페인 법원에 차베스 정권에서 군 정보 당국을 이끌었던 우고 카르바할(Hugo Karbahal) 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이 문건을 작성했다. 미국은 지난 2008년 마약 밀매 혐의로 카르바할을 기소했는데, 몰래 숨어지내던 카르바할이 스페인에서 위조 여권을 사용하다 체포되자 범죄인 송환을 스페인 측에 요청하기 위해 이 같은 사실의 문건을 작성한 것이다. 차베스의 최측근인 카르바할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고위급 관료 중 하나였다. 스페인 현지 언론 엘 문도는 차베스와 군부 고위 관료, 사법 관료 등으로 구성된 베네수엘라 핵심 지도층들은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코카인의 이동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협력했다고 했다. 차베스 정권은 콜롬비아 카르텔들을 이 같은 계획의 동맹군으로 포섭하기 위해 마약 수익을 나누는 한편 이들 반군들에게 무기를 직접 제공하는 방안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 법원 측은 코카인이 미국의 해안 지대 등 특정 지역으로만 들어갔다면 이와 같은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았겠지만 베네수엘라 당국의 획책으로 인해 실제 미국 사회에서 마약 밀매가 크게 활성화됐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카르바할의 기소장에는 태양의 카르텔(베네수엘라 군부가 운영하는 마약사업 카르텔)의 목표는 단순히 회원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을 넘어 코카인을 대미 항전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는 약물이 복용자 개인에게 미치는 부작용은 물론 광범위한 사회적 폐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술책이라 적시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좌파 포퓰리스트의 상징인 차베스가 국제 마약 밀매 유통망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처음으로 그 윤곽이 드러났다고 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마약 카르텔 소탕 등은 이 같은 차베스 정권의 마약 밀매 및 카르텔과 관련된 범죄 행위를 두고 마두로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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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를 반미 국가로 만든 인물,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1954~2013)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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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모르는 이슬람 할랄과 하람, 이슬람의 금기 "돼지고기"에 대한 이야기
- 인류 역사상 터부(Taboo)가 없는 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미개 사회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이 현저하게 진보된 현대 사회에서도 터부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오늘날 대부분의 서양인들 사이에는 ‘애완동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라는 금기가 있고,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도 ‘왼섶이 안으로 들어가게 옷을 입지 말라’, ‘문지방을 밟지 말라’, ‘밤에는 숨바꼭질을 하지 말라’ 등과 같은 다양한 터부가 있다. 마젤란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면, 쿡 선장은 태평양 지도를 만든 사람이다. 1768년 8월 26일, 쿡 선장은 자신이 직접 제조한 인데버(Endeavour) 호에 선원, 학자, 화가 등을 태우고 플리머스 항을 떠나 이듬해 4월 10일에 타히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의 원주민들은 격의 없이 서로 어울리며 남녀의 구별 없이 한 가족처럼 지냈지만 식사를 할 때만큼은 반드시 남녀가 따로 했다. 원주민들은 이와 같은 습관을 지칭하여 ‘터부’라고 불렀다. 또한 쿡 일행이 하와이에 상륙했을 때, 역시 타히티와 같은 습관을 목격하게 된다. 1779년 쿡 선장이 하와이에서 살해당하고 유럽 일대에서 그의 ‘항해일지’가 널리 읽히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단어인 ‘터부’라는 단어가 있어 세계 공통어로 자리 잡게 된다. 터부의 어원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학설의 결론은 ‘타(ta)’는 ‘표시 한다’, ‘푸(pu)’는 ‘뚜렷하게, 강하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이상한 것이나 비(非) 일상적인 것을 명확하게 표시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애매한 사물이나 인간에게 표시된 금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동의 가혹한 자연 조건 아래에서는 음식의 획득 방법은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인 것은 틀림없다. 인간과 가축의 공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형태로 보면 인간이 가축을 먹는 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이것에 대해서 먹어도 좋은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명시함과 동시에, 식육에 관한 다양한 규정을 명시하였다. <꾸란>에서는 죽은 고기, 피가 흐르는 것, 돼지고기, 알라 신 이 외의 이름으로 도살된 동물의 고기, 교살 당한 동물의 고기, 때려잡은 동물의 고기, 추락사한 동물의 고기, 야수가 먹고 남긴 고기, 게다가 도박에서 분배된 고기 등을 먹지 못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처럼 규정된 도살 법은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면서 예리한 칼을 사용하여 한 번에 경동맥과 숨통을 절개하는, 가장 고통을 주지 않고 도살하는 방법이다. 피를 먹는 것은 금지되나, 도살 후에 고기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예외이다. 포도주와 취하게 하는 음료는 정신에 악영향을 끼치는 약으로 생각하여 금지되고 있으나, 의료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허용되었다. 약용식물(herbs)과 융합한 포도주는 중세 시대 무슬림 의사들이 마취제로 사용하였다. 초기 이슬람에서는 아라비아 인의 식습관을 기준으로 삼아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을 구분하였다. 이에 한발리(Hanbali) 법학파의 창시자인 이븐 한발(Ibn Ḥanbal)은 예언자의 순나(Sunnah)에 수박을 먹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수박을 먹지 말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의 고기를 먹는 것이 음식으로 금지된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할랄(ḥalāl)이라고 부른다. 육류고기는 의례에 따라서 도살된 동물의 살이면 허용 된다. 무슬림은 살육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비스미 알라 알라 후 아크바르(Bismi-Allāh, Allāhu Akbar)라는 말을 하면서 도살하고, 단번에 목을 베어 숨통과 경정맥을 끊어버린다. 사냥감은 만약 총으로 쏘거나 사냥개가 죽은 동물을 물어올 때, 이 말을 했다면 할랄이다. 생선은 잡았을 때 살아 있으면 할랄이고 죽어 있으면 할랄이 아니다. 의례에 따른 도살이 불가능하다면 비(非) 할랄(non-halāl) 고기도 허용된다. 그리고 돼지고기와 같은 금지된 음식을 제공하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교도의 음식’을 피해야 한다. 어떠한 다른 선택이 없을 때는 필요에 의해 금지된 음식이 허용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군에 소속된 무슬림 출신 장병들은 다른 것이 공급될 수 없었기 때문에, 통조림 햄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사례가 있다. 1세기 전 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을 보위하던 무슬림 장병들이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잘못 유포된 소문 때문이었다. 이에 무슬림 장병들은 돼지기름 덩이를 물어 뜯거나 총에 돼지기름을 발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법률권위자들은 극한 상황에서 금지된 음식을 먹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필요에 따라 금지된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법적인 원리에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 금지된 음식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이슬람에는 모든 일이 합리적이 되어야 한다는 계율이 있다. <하디스>에 의하면 식사의 집단주의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친구와 친척 등의 집을 식사 때에 갑자기 방문해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다. 또한 식사에 초대를 받은 경우에는 대답을 머뭇거리는 것은 실례로 여기며, 오히려 단식 중에 먹지 못할 때도 기쁘게 참석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초대받지 않은 채 따라온 사람이라도 손님으로서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며 식사는 바스말라(Basmala), ‘알라의 이름으로 잘 먹겠습니다’로 시작하여, 알 함두 릴라히(Al Hamdu Lilahi), ‘알라를 찬양하며 잘 먹었습니다’로 끝내야 한다. 불결한 왼손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중지의 3개를 사용하여 먹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다. 마루에 앉아서 먹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이 식탁에 둘러서 앉을 수 있도록 우측 무릎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붙인 상태로 먹어야 좋다. 또한 <하디스>에서는 과식과 사양하지 않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데 주인은 손님에 대해서 성심껏 권유하고, 음료 등을 돌려 마실 때에는 오른 쪽에 앉은 사람부터 돌리게 한다. 금 또는 은으로 만든 식기와 용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체로써 <하디스>는 초기 이슬람 시대의 검소하고 금욕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가난한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선행은 속죄 행위와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맹세를 어긴 경우에는 10명의 가난한 사람에게, 또한 단식을 어긴 사람은 60명의 가난한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슬람교도의 주요한 인륜의 하나로 아랍어로 디야파(Dyafa)라고 한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오래 전부터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손님으로 맞이해, 처음 함께 먹은 음식물이 체내에 머무는 기간인 3일 동안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을 매우 신성한 의무로 여겼다. 이 유목민의 미풍은 이슬람에도 계승되어, <꾸란>과 <하디스> 중에서 고아나 가난한 사람 등과 함께 모르는 사람과 여행자를 손님으로서 경의(敬意)로 맞이해, 자선과 희사를 베풀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대접을 좋아한다는 평판을 얻는 것은 그 사람의 덕이 높다는 것을 공인받는 것을 의미한다. 시(詩)를 좋아하는 아라비아 인은 어느 인물이 예의가 있고 정결하다는 것을 평가할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대접이 어떠한지 주제가 된다. 사막 세계에는 주방의 크기, 재(災)의 양, 천막 앞에서 대접할 때 태우는 불의 강도에 따라 그 평판이 결정되는 반면, 정착 세계에는 대접의 빈도, 선물,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 기풍이 칭송된다. 이처럼 대접을 좋아한다고 평판이 난 인물은 많이 있지만, 특히 하팀 알타이(Ḥātim al-Ṭāyyī’) 등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 알려진 인물이다. 대접을 받는 측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의 호의에 대해 최대한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례를 들면 나온 식사를 거절한다거나, 조금 밖에 먹지 않는다거나 하면 주인에 대한 모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히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이 나온 경우에는 나머지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에게 돌려지기 때문에 적당량을 먹은 후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뜨는 것이 예의이다.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도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늘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 2:173 무슬림에게 종교란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꾸란>을 일상의 계율로 삼는 무슬림은 이 규율을 반드시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꾸란>에서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생각이 조금씩 다르다. 의학자들은 돼지에 있는 기생충이 인간의 몸에 해롭기 때문이라고 하고, 일부 학자들은 돼지의 습성이 불결하고 더러워 잘 씻지 않는데 이것이 몸가짐이 엄격한 이슬람 사회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무더운 사막 기후에 돼지고기가 쉽게 상하여 식중독에 걸릴 위험성이 크고, 소나 양은 고기 외에도 우유, 버터, 양모 등의 부산물을 제공해 주지만 돼지는 노동을 돕지도 않고 고기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의 자연조건과 환경이 돼지 사육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돼지는 잡식성 동물로 곡물을 주로 먹는다. 돼지에게 풀이나 짚, 나뭇잎과 같은 섬유소가 많은 것을 제공한다면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 성장하지 못한다. 밀이나 옥수수, 감자, 콩 등의 곡물을 먹이면 돼지는 가장 효과적으로 성장하지만 결국 인간과 먹을 것에서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돼지는 습한 기후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건조한 중동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중동 지역에서 돼지를 기르기 위해서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유목 생활을 하던 무슬림들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돼지를 무더위로부터 보호하기가 어렵고, 물이 넉넉하지 않아 돼지를 기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돼지를 기르기에는 중동 지역의 환경이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돼지고기를 기피하는 전통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신석기 시대 중동 지역의 마을 유적에서는 돼지 뼈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중동 지역에서도 오래전에는 돼지를 길렀지만, 어느 시점부터 돼지 사육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중동 지역에서 돼지 사육이 쇠퇴한 이유로 산림의 황폐화와 인구의 증가를 원인으로 두고 있다. 신석기 초기만 해도 돼지에게 그늘과 웅덩이 뿐 아니라 도토리, 밤, 기타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너도밤나무와 참나무 숲이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여 농지 면적이 증가하고 올리브 나무를 심기 위해 너도밤나무와 참나무 숲을 베어 내자 돼지에게 알맞은 생태적 서식지가 파괴되었고, 결국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문화를 생성했다고 보고 있다. 한편, 모든 이슬람 사회가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꾸란>은 굶주렸거나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인정하여 아무 고기든 먹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전 국민의 80%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곳에서는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있다. 이들은 민족의 문화나 자연조건에 따라서 금기가 달라지는 것이 이슬람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율법에 따라 허용되는 음식과 금지되는 음식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아랍어로 ‘할랄(halal)’은 “허용할 수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할랄은 과일과 야채, 곡류 등 모든 식물성 음식과 어류와 어패류 등의 모든 해산물과 같이 이슬람 율법 하에 무슬림들이 먹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을 의미하는 용어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허용되지 않는 음식은 '하람(Haram)'이라고 한다. 좁은 의미에서 할랄은 ‘허용된 음식’을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금융, 화장품 등 허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하람 또한 넓은 의미에서 이슬람 율법 상 금지된 모든 것을 말한다. 이슬람 사회에서 금지된 음식, 하람으로 규정된 음식은 무엇이 있을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단,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돼지고기와 돼지의 부위로 만든 모든 음식은 하람이다. 또한 동물의 피와 그 피로 만든 식품도 하람이다.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도축한 고기도 금기 음식에 포함된다. 이 밖에도 도축하지 않고 죽은 동물의 고기, 썩은 고기, 육식하는 야생 동물의 고기 등도 먹을 수 없다. 메뚜기를 제외한 모든 곤충도 먹을 수 없는 하람이다. 육류 중에서는 이슬람식 알라의 이름으로 도축된 염소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이 할랄에 해당하고 있다. 무슬림은 동물이 신의 창조물이고 영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도축 행위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엄격하게 규율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식용을 위한 도축 행위는 그와 같은 규율들을 따라야 한다. 한편, 모든 해산물은 할랄 음식에 속한다. 다만 무슬림들은 오랜 유목 생활로 바다 음식이 문화적으로 친숙하지 않고, 해산물의 경우 쉽게 상해서 탈이 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비늘 없는 생선, 연체동물, 갑각류는 거의 먹지 않는다. 오늘날 할랄 산업은 식음료 분야에서 전 산업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할랄 산업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화학 비료나 유지방을 사용했는지가 중요하고, 금융 분야의 경우 돈의 출처가 중요하다. 이는 마약, 술, 돼지고기 가공 등으로 번 돈은 사용이 금지된다. 깨끗하고 안전한 음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무슬림이 아닌 일반인들까지 할랄 식품을 찾게 되면서, 세계 식품 시장의 약 16%를 할랄 식품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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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모르는 이슬람 할랄과 하람, 이슬람의 금기 "돼지고기"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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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지역 개발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
- 이틀 전 9월 6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이 마무리 되었다. 이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 중, 극동 개발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의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을 개발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전개했었다. 첫째는 동북아시아 경제권으로 편입하는 것을 통해 극동 지역의 빠른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는 낙후된 극동 지역의 인프라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추진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는 늦추어졌다. 둘째는 이와 같은 지역 경제 성장을 통해 다른 러시아 지역과의 경제적 격차를 축소하고 시베리아의 경제적 인프라를 개선시켜 동반 성장을 노렸다. 우선 현재까지 극동 지역의 경제적 상황으로 볼 때, 다양한 측면에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서부지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는 러시아 전체 영토에서 극동지역은 40.6%에 해당하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 수효 비중은 5.4%에 불과하며 지역 총생산 및 평균 임금 등의 경제적 지표가 러시아 평균보다 떨어지는 상황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의 기준으로 볼 때, 극동 지역 1인당 월평균 소득은 4만 6,842루블(약 70만 원)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모스크바 중심의 중앙 지역의 6만 1,448루블(약 90만 5,000원)에 대비하여 76%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극동 지역의 집중적인 개발을 통해 단기간 내에 경제 수준을 향상시키고 우랄 서부 지역과의 경제 불균형 해소 및 국토 균형 성장을 추진하는 것은 러시아 정부가 가진 최대의 고민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러시아 정부는 동북아시아의 주요 국가인 한국과 중국, 일본의 산업 경제의 분업 체계로 연계하여 극동 지역의 산업 경제 부문이 급속도로 성장할 것을 기대했다. 현재는 동북아시아에서 생산된 완제품들을 러시아로 수입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낙후된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전략을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산업 국가들의 투자 유치를 통해 블라디보스톡 항구 및 포시에트 항국에서 선박을 조립하고, 원유와 가스 등의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수출하며,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북극항로를 잇는 물류 혁명을 가져오고 각종 식품을 가공하여 수출할 계획이다. 특히, 명태, 오징어, 대게, 킹크랩 등의 해산물 가공은 동해에서 러시아가 할 수 있는 식품 가공의 최대치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첨단 제조업 등을 성장시키려 하는데,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 도요타와 한국의 현대 및 기아자동차의 공장을 유치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분야에서 러시아의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주 목표라 할 수 있겠다. 투자 촉진을 위해 러시아 정부는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외국 투자 기업에 대한 특혜를 제공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톡 경제특구(SEZ), 하바로프스크 선도개발구역(Advanced SEZ)과 포시에트 자유항(Free Port) 등에 투자한 기업에 대해 연방세와 재산세, 토지세 등을 면제해 주었고 입주기업의 현지 활동과 관련하여 행정 절차를 간소화 시키는 등의 조치로 인해 한국과 일본, 중국 기업 등을 중심으로 극동 지역에 대한 투자 확대 및 유치는 지속되어졌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극동 지역 개발은 어떤 부분이 있을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이후 극동 지역에 대한 개발은 러시아 정부의 주요 정책 우선 순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 극동 지역의 개발에 대한 문제는 사실상 러시아의 중요 이슈가 아니었다. 특히 2022년 제7차 동방경제포럼에서는 극동 지역 물류의 중요성 등이 논의되었지만 이는 주로 서방의 제재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과 대책이 주요 주제였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2023년 9월 동방경제포럼에서 극동 지역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21세기 러시아의 최우선 과제라고 언급했으며 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새로이 각인하고 북극항로에 개발과 극동 지역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러시아의 경제적 동방 진출을 본격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미하일 미슈스틴(Михаил Мишустин) 총리는 2023년 10월 자신이 주재한 극동 지역 개발 관련 회의에서 2024년에 극동 연방 지역 예산 할당액을 기존 640억 달러(약 84조 5,500억 원)에서 800억 달러(약 105조 6,800억 원)로 증액했다. 이는 더 이상 서쪽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로 옮겨오면서 아시아-태평양 및 멀리 인도양과 북극해까지 연결하는 장기적 관점의 전략을 수립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는 이전보다 극동 지역 개발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2023년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제8차 동방경제포럼 때는 러시아에 매우 비우호적인 국가를 포함하여 총 62개국에서 7,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다. 당시 러시아는 지난 10년 동안 극동 지역을 개발한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블라디보스톡의 선전 주제는 "협력과 평화, 번영을 위하여"가 주요 테마였으며 100여 개의 프로그램이 개최되었다. 그러면서 향후 극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분야로 물류와 관광, 각종 신기술 등이 언급되었고 이는 해당 국가들이 극동 지역과 북극항로의 진척 사항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2024년 제9차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2024년 9차 포럼 때는 물류 분야 논의가 주목할 만 했었다. 당시에는 극동 지역을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연결시키는 물류의 핵심 지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와 북극항로로 연결되는 해상, 그리고 극동 각지를 연결하는 항공 등의 주요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는 과제가 논의되었다. 특히, 북극항로의 활성화는 당시와 이틀 전에까지 있었던 제10차 포럼 때도 주요 과제로 안건이 논의되었다. 이어 제9차 포럼 때는 관광부문에서 아시아 지역의 주요 관광지로 극동 지역을 브랜드화하며 지역 내에서 관광 중심지로 활성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무인항공기, 그리고 의약품 등의 고부가 가치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이러한 첨단 산업은 주권을 강화하는 국가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극동 지역의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이어 10차 포럼 때, 러시아 정부는 극동 지역에서 중국 및 북한까지 끌어들여 이들과의 연대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이는 2년 전부터 중국에 블라디보스톡 항구를 사용하는 권리를 제공한 것인데 이를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얘기다. 러시아 정부는 중국에 블라디보스톡 항구 사용권을 부여했고 이는 2년이 지난 현재, 중국 동북 지역의 물류와 각종 운송 여건 및 인프라 개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는 지난 2023년 6월 1일부터 극동 지역의 블라디보스톡 항구를 중국에게 개방하여 중국이 이를 자국의 항구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행정 절차를 간소시키면서 중국에서 낙후된 동북 지방 인프라 구축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이는 당시 2023년 3월 양국 정상이 합의했던 2030년까지 러-중 간 경제협력계획(Pre-2030 Development Plan on Priorities in China-Russia Economic Cooperation)에 근거한 것으로 여기에 2026년부터 북한을 참여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하산에서 함경북도 잇는 기존의 낙후된 두만강 철교와 중국 측 도로를 우회해 이동해야 했던 운송 거리가 크게 단축된다는 장점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북한 입장에서는 함경도 지역 물류 효율성이 대폭 개선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 동북 3성과 북한의 함경도, 러시아의 극동지역을 연계하는 산업 및 물류의 발전을 강화하고 3개국 간의 경제협력도 가능하게 한다는 이점이 있다. 지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을 볼 때, 아무르(Amur) 지역을 중심으로 양 국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완공했었다. 이에 하바로프스크 지역에 향후 물류 허브를 조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어 러시아 니즈네레닌스코예(Нижнеленинское)와 중국 통장(Tongjang)시를 연결하는 철도교가 2022년 11월에 개통함으로써 러시아-중국 간의 철도 운송루트가 약 700km 단축된 바 있다. 이 철도의 길이는 2.2km이며 연간 화물 운송량은 2,000만 톤에 달하는데, 러시아는 주로 철광석과 석유 제품과 같은 지하자원을, 중국은 각종 소비재들을 러시아에 수출한다. 또한, 이 철도가 연결되는 배후지에는 하바로프스크와 연결되는 물류 허브를 조성하여 양국 간 물류 이동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촉진할 계획에 있다. 이번 10차 포럼에서 주목할 부분은 시베리아의 힘 2(Power of Siberia 2)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해 몽골을 통과하는 것으로 주요 경로를 최종 협의 했다는 것에 있다. 다만, 파이프라인이 완공되는 시기는 2030년 이후이고, 이 때는 중국의 에너지 수급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만 경제성 문제 해결까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지난 2023년 11월, 러시아 극동 달레첸스크(Далеченск)와 중국 후린(Hurin)시를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어 연간 100억㎥의 천연가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베리아 힘이 완공되기까지는 가스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 또한 극동 지역에서 사실상 협력이 어려워진 한국과 일본 대신, 러시아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러시아와 베트남 양국은 올해에도 중국 80주년 전승절을 비롯하여 이번 10차 포럼에도 관계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극동 지역 협력과 관련되어 회의를 갖고, 극동 지역 산업 부문에 대해 베트남의 투자를 유치하기로 했다. 여기서 베트남 기업은 토목, 건설, 가구 제작, 광물 개발, 식품 가공, 하이테크 분야 등에서 극동 지역의 러시아 기업과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2022년 5월에는 러시아 선사 페스코(FESCO)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베트남 호치민을 연결하는 항로를 개설하고 호치민 항을 환승 항구로 삼아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에 수출할 수 있는 루트를 마련한 바 있다. 이후 러시아의 다른 선사들도 블라디보스톡과 호치민을 상호 연결하는 루트를 개설하면서 이미 베트남과 극동 지역을 두고 물류 교역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인도 또한 끼어 들었다. 인도는 러시아의 주요 협력 대상 중 하나다. 러시아의 북극항로와 극동 항구를 통해 인도의 첸나이(Chennai)까지 연결되는 항로 개설을 이번 10차 포럼에서 러시아와 구체화시켰다. 이 항로를 통해 주로 석탄,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등의 천연 자원 수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인도의 국영 선박 제조사인 고아 조선소(GOA shipyard limited)는 러시아 유나이티드 조선(USC)과 합작하여 선박 제조와 수리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우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러시아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되었던 극동 지역 개발이 전쟁 발발 이후, 뭔가 정체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나, 2023년부터 2년 만에 다시 적극적인 육성 정책이 전개되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투자와 경제 협력은 사실상 어려워졌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를 대신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후 2년 여, 2차례의 포럼등을 거쳐 중국, 북한, 동남아시아, 몽골, 인도까지 늘려나갔다. 이는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하고 있는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로 평가된다. 이미 여러 대안이 생긴 상황에서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은 불가피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각 아시아 국가들과의 물류 연결과 에너지 판매, 제조업 투자유치 등은 극동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러시아는 전쟁과 제재라는 상황에서 극동 지역 경제 발전이라는 가장 실용적인 측면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었으며 기존의 과도한 유럽과 서방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탈피하고 다극화 세계의 한 축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극동 지역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개발 의지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향후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갈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러시아 정부는 극동 지역 경제 개발을 위해 중국을 포함해 북한, 베트남, 인도 등의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 및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여 진다. 향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구축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결국 이는 북극항로와 연계되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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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지역 개발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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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인도네시아 시위, 국회의원 추가 수당 지급 비리와 부정부패, 노동자에게 불리한 노동법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
- 인도네시아의 가공 산업은 2024년에 2023년에 비해 4.72% 성장했으나, 여전히 경제 성장률 4.95% 대비해봤을 때 매우 부진함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제조업 부문은 19.2%를 차지하며 인도네시아 GDP에 가장 높은 기여를 하고 있는데 식음료(5.82%), 기초금속(12.36%), 전자(7.29%) 등의 하위 부문이 주로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제조업 부문 활용도가 굉장히 낮아 조기 탈산업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경제 목표를 위해 서비스 등 다른 부문을 지원하고 고용 기회를 강화하기 위해 제조업을 정책 우선순위로 삼을 것을 권고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것이 현재 녹록치 않다.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 있었다. 2025년 상반기에만 해고된 노동자 수가 42,000여 명을 넘어섰다. 이는 전년의 같은 기간보다 32%나 늘어난 수치였다. 인도네시아는 국내 물가 또한 크게 상승하고 있으며 정부가 재산세를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는 정치, 경제인들의 재산만 불리는 결과라고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이 주택수당을 명목으로 자카르타 최저 임금인 540만 루피아의 10배가 넘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에 의해 알려졌다. 540만 루피아는 한화로 약 460,000원 가량 되는데 인도네시아는 지역마다 최저 임금이 다르며 큰 영토와 수많은 섬들로 인해 경제적으로 최저 임금 책정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마저 최빈곤 지역의 최저 임금과 비교하면 20배가 넘는 수치이다. 자카르타가 인도네시아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540만 루피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받는 최저 임금인 셈이다.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월급에다 주택수당, 유류수당, 식사수당, 통신수당, 이동수당 등을 합해 매월 1억 루피아, 한화로 약 852만 원을 받는데, 이 수당을 올리는 법안이 통과되자 여러 의원들이 기쁨에 춤을 추는 영상이 뜨자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분노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자 의회는 자카르타의 물가 상승을 고려한 적절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이에 시위가 확산되는 와중에도 한 의원은 자신의 SNS에 시위대를 조롱하는 영상까지 게재하면서 대중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시위대는 주택 수당 인상을 철회하고 하원을 해산해서 재선거를 치룰 것을 요구하며 8월 25일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27일에는 탄중푸라 대학교 학생회가 서부 칼리만탄 주 의회를 급습했지만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별다른 조치없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어 노동조합이 최저 임금 인상, 대량 해고 중단, 노동세 개혁 등의 요구 사항을 발표하며 시위를 벌였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구 2억 8,160만 명의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매년 약 300만~350만 명의 신규 노동력이 유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인도네시아의 노동 생산성 수준이 여전히 동남아시아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 불일치가 존재한다. 셋째, 인도네시아는 현재 노동자들이 바라는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넷째, 글로벌 경기 침체는 인도네시아의 수출 수요에도 영향을 미쳐 제조업과 국제 무역에 의존하는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다 파우지야(Ida Faujiya) 노동장관은 인도네시아도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 다양한 조치를 계속 취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 교육 및 훈련의 질을 개선하려 했지만 지역의 편차가 커서 이를 개선하는 것은 오로지 지자체에 맞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특히 기술 및 직업 기술 분야에서 현대 산업의 요구에 맞게 교육 커리큘럼을 개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예산 부족이 늘 걸린다. 문제는 이 예산 부족이라는 것이 지자체 공무원들이 서로 비리를 저지르며 빼먹는 바람에 없는 것이지, 예산은 온전히 지급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2021년 정부의 칙령으로 옴니버스 법(이하 '고용창출법')을 제정해 현행 노동법의 상당 부분을 개정했다. 이는 고용 유연성을 골자로 하고 외국인 인력 사용, 기간제 근로계약의 활성화, 근로계약 해지의 용이성 강화, 근로 시간 연장 및 휴가 단축 등 많은 분야의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노동계는 노동권 침해를 이유로 개정을 반대했다. 도처에서 많은 시위가 발생했었다. 그럼에도 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현재 수천명이 참여한 이번 2025년 시위는 다소 평화적으로 끝날 것처럼 보여졌으나 이후 학생 시위대가 격화하면서 경찰과 충돌했고, 경찰 또한 강경 진압에 나서 600명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밤 경찰 장갑차가 시위대로 돌진하여 오토바이 배달 기사 아판 쿠르니아완(Affan Kurniawan)을 들이받았다. 충돌 직후 장갑차는 잠시 멈췄다가 시위대가 격렬히 항의하자 쿠르니아완을 깔아 버린 다음 그대로 도주했다. 쿠르니아완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쿠르니아완이 장갑차에 깔리는 것을 목격한 시위대의 일부가 극렬히 분노하여 장갑차와 추격전을 벌였다. 한편 다른 시위대는 경찰 기동대 청사까지 가서 항의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인도네시아 경찰은 운전자를 포함한 경찰 8명을 체포했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었으며 자카르타 경찰청장은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항의하는 시민이 던진 페트병과 깃발에 얻어 맞기도 했다. 한 현직 경찰관의 아내는 SNS에서 쿠르니아완이 장갑차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소리를 하다가 모든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고, 이 경찰관의 아내는 신상까지 털리면서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목격자들은 장갑차가 갑자기 시위대로 돌진했으며, 쿠르니아완을 치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깔아 버렸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고,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대통령은 즉각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유가족에게 피해 보상을 약속했으며 직접 유가족을 방문하여 유감을 전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판 쿠르니아완의 사망 소식이 SNS와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들이 시위에 참가해 경찰의 만행에 항의했다. 한편 장례와 시신운구 행렬에 자카르타와 근교의 오토바이 기사 수천 명이 모여 추모하는 한편, 정부와 강경진압의 일변도로 나온 경찰들을 비난했다. 따라서 폭력 시위로 격화한 시위대들은 자카르타 버스 정류장에 불을 질렀고 이 때문에 버스 운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시위대들은 강력 진압에 찬성한 국회 부의장 아흐마드 사흐로니(Ahmad Sahroni)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사흐로니 의원 소유의 테슬라 모델 X와 렉서스 차량을 박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지방 의회 건물이 방화 피해를 입었다. 남부 술라웨시 주 마카사르에 위치한 지방 의회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시 의회 직원 3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인도네시아 국회에서는 급히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가 된 주택수당 등을 폐지하겠다고 이야기 했지만 이것을 10월에 폐지하겠다는 말을 붙였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만 돋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는 시위대가 지역 경찰서의 펜스를 파괴하고 차량을 불태운 뒤 청사에 난입했으며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던지거나 물대포를 쏘았고, 일부 시위 참여자는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반격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국회의장으로,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손녀이자 인도네시아 5대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oekarnoputri)의 딸이 이기도 한 푸안 마하라니(Puan Maharani)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쿠르니아완의 유족들을 위로하면서 마찬가지로 배달기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새 오토바이 1대 마련해 드리겠다고 부적절한 발언을 해 분노를 일으켰다. 푸안은 쿠르니아완 일가의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마하라니는 이전부터 사치와 구설수로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었던데다 워낙 금수저로 자라 서민들의 삶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정치인이었다. 결국 대통령이 자카르타 대통령 궁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회 지도자들의 국회의원 수당과 해외 출장을 포함한 여러 정책을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만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키거나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매우 엄중한 조치를 하라고 군과 경찰에 지시했다. 이는 최근 시위대들의 일부 과격한 행동에 대해 테러와 반역에 해당한다며 과격 시위대들을 상대로 경고를 덧붙였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 이후, 국민들의 승리가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대부분 시민단체나 대학교 학생회는 상황을 지켜보겠다며 일단 시위를 중단했다. 그리고 시위를 이어가는 측도 최대한 폭력을 자제하고 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상황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보고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현재 시위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진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도네시아의 노동법 문제와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이러한 고질적인 공무원들의 비리와 노동법에 대한 개정, 체포된 시위자들에 대한 석방 등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는 다시 발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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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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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인도네시아 시위, 국회의원 추가 수당 지급 비리와 부정부패, 노동자에게 불리한 노동법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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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민들의 남다른 애국심과 민족주의
- 오늘날과 유사한 러시아의 민족정체성으로 볼 때 이전 시기의 정체성과 핵심적인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체제로 볼 때, 차르 시대의 용어로 관을 주도하는 민족주의와 혹은 관을 주도하는 민족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관 주도인 상태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정의상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 비(非) 자유주의적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항상 자의식적인 면에서 제국주의적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국민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민족주의로 남아 있다. 러시아 민족주의는 국민이 아닌 국가를 찬양한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러시아 국민을 찬양할 경우에는 주로 국가와 결부되어 찬양되며, 민족 해방 투쟁이나 자유주의로부터 태어난 민족주의에서 의당 기대하는 것과 같이 자율적인 정치적인 힘으로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그것은 니콜라이 1세 때 대중화되었던 용어를 사용하면 관이 주도하는 민족성 혹은 민족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민족주의는 자의식적인 정치인 계획이며, 사회적으로 구축된 의미 체계 혹은 정체성의 명시적인 구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국민성(Nationhood)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 자명한 불합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국민이 아닌 국가가 정치적 수사와 행동을 통해 그러한 정서를 형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국가가 이 분야에서의 독점을 열성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을 부추기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외국인 혐오가 차르 말기나 스탈린 통치 시기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이 전적으로 소수민족을 차별하거나 이들을 공격하려는 관 주도 국가 정책의 문제는 아니다. 중앙정부이거니 지방정부 차원이거나 공식적인 선동이나 의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무시는,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의 유태인 대학살, 오늘날의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 등 결국 소수민족에 대한 쇼비니즘 활동을 자극하는 것이 된다. 폴란드 학자 아가타 듀바스(Agatha Dubas)는 정권이 그러한 시위 행위를 공격할 경우에는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때 널리 이용되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도구적인 방식을 취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 문제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도구주의(Instrumentalism)적인 태도에서 볼 때, 이러한 모든 조치는 민족성을 구실로 한 범죄와 차별에 대해 크레믈린이 전투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는 크레믈린이 이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민족주의자들이 더욱 광범하고 독립적인 정치적 야망을 펼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에만 시작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레믈린의 활동은 러시아 국민의 외국인 혐오의 진정한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외국인 혐오를 대중적인 정치현상으로 간주하는 이 도구주의는 그 동기 면에서 국내정치를 넘어 대외 정책적인 이해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에 대한 스킨헤드의 공격과 같이, 특정지역에서 이슬람교도와 이슬람사회에 대한 민족적 반발 조짐이 증가하고 있지만, 오늘날 이러한 현상의 자율적인 대중적 근거를 국가의 후원을 받는 러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 대신, 근본적으로 비(非) 자유주의적이고 국민을 ‘국가가 양성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며 공식적으로 강대국 정체성을 끊임없이 선전하는 러시아의 분위기에서, 여론조사와 소수민족을 혐오하는 것에서 비롯된 공격을 통해 대중의 외국인 혐오증과 쇼비니즘이 분명히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강대국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를 자의적으로 조종하기는 하지만, 국가는 소수민족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공식적으로 찬성할 수 없으며 때로는 그 지지자를 배신하기도 한다. 사실상 국가는 대규모의 국내 소수민족과 중요한 외국인 지지자 그리고 특히 이슬람교도를 적대시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러시아성의 종족-민족주의 개념을 드러내놓고 선전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권은 어떤 면에서 러시아인에 대해 적절한 사회정치적 개념을 부여하고자 했던 차르와 소비에트 통치자들이 모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난관과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개념을 보존하려 했던 차르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관 주도 민족주의는 쇼비니즘과 체제에 대한 민족저항을 유발해 대다수 러시아인과 많은 소수민족들의 삶을 모두 황폐화시켰다. 차르주의의 쇼비니즘적인 민족정책은 당연하게도 체제의 토대를 손상시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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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민들의 남다른 애국심과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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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6주년 -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 9월 1일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86주년 째 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3일은 중국의 80주년 전승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작과 끝이 8~9월에 몰려 있다. 참 묘한 날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뉴욕발 대공황은 당시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후일 케인스 방식이라 평가 받은 국가 주도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대공황으로 인해 침체된 위기를 돌파하려 시도했다. 이는 군수 산업을 팽창시키고 이를 배경으로 하기 위해 많은 사회 기반 시설들에 대한 건설에 매진하게 된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들어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 같이 보여졌다. 이러한 나치의 시도는 미국이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집중하게 되면서 최악의 뉴욕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한 것과 완전 대조된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갔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나 적자 예산을 편성하면서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 사업에만 모든 경제 정책을 치중한 결과는 경기 회복은 그저 잠시였을 뿐,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의 재정은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러한 군수 정책의 초반에는 대규모의 메포어음(Mefo-Wechsel), 6개월짜리 단기 어음을 발행하는 것을 통해 화폐 발행을 통한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덮으면서 재정 적자를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더 이상 메포어음으로 인한 단기간 속성의 정책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누적되었고 파산의 위기가 닥쳐오게 된다. 미국처럼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에 투자하면 그로부터 수익이 나와 선순환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군수 산업으로 투자에 올인하게 되면 이러한 민간 인프라 투자 구조의 정책은 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무기를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물론 메포어음 발행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중앙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 1877~1970)는 군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샤흐트에 분노해 그를 중앙은행 총재에서 해임시켰다. 이 때부터 다른 국가를 침공하여 원자재들을 약탈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흑자를 쟁취하지 않는 한, 정부 재정은 붕괴되고 히틀러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구도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으며 이것이 영국-프랑스가 개입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음에도 폴란드에 대한 침공을 단행하게 된 이유였다. 이 때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됐던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벌일 전쟁 계획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게 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는 소련이 개입할 경우, 향후 계획에 있어 매우 중대한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 또한 대공황과 대기근으로 인해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던 시기였기에 독일의 군수 산업 팽창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었고, 나치당 집권 후에 독일이 반소련 정책을 취하게 되니, 독일이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인 도발을 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집단 서방의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은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Максим Литвинов, 1876~1951)를 서방 국가들에게 파견하야 협상을 시도했고 리트비노프는 폴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적백내전의 혼란기 때,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승리, 당시 획득한 동부 지역 영토를 소련이 다시 장악할 것을 우려한 폴란드는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고, 소련의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나치 독일 못지 않게 소련을 경계했던 영국과 프랑스 역시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고 리트비노프의 협상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스탈린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구책은 나치 독일과의 협정 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리트비노프를 협상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리트비노프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해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자 외교전문가인 뱌체슬라프 몰로토르(Вячеслав Молотов, 1890~1986)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의 자신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되는 모든 유태인들을 숙청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통보함으로써 반유태주의라는 상호 간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결국 그러한 인연으로 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맺어진다. 한편 폴란드는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과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했으며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독일을 비난했고 독일 또한 폴란드를 비난했다. 1939년 4월 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맺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잇달아 파기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협정을 맺은 이상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1938년에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때, 이를 그냥 두고 보기만 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군부에게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으며, 백색 작전(Fall Weiß)이라는 침공 계획 안이 세워졌다. 따라서 8월 26일 새벽 4시에 침공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8월 25일에 폴란드-영국이 상호 간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자, 영국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작전 실행은 한 차례 미뤄진 후, 9월 1일을 시작으로 침공 개시 작전에 돌입했다. 8월 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있는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의 한 방송국을 폴란드 육군으로 추정되는 소규모 병력이 기습적으로 침투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직원들을 강압적으로 위협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을 낭독하게 하였으며 이같은 조치 후, 이들은 철수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의 부하였던 알프레트 나우요크스(Alfred Naujocks, 1911~1960) SS 소령의 지휘로 이루어진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나치 독일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육군으로 위장해 방송국을 습격해, 선전포고를 조작한 다음 국경 부근에는 사전에 차출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폴란드 육군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다음 그 시신을 버리고 떠났다. 후일 이 자작극을 통조림(Konserve) 작전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자작극은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을 심문하여 밝히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연합국 내에서도 폴란드가 먼저 독일을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여겼었다. 이어 폴란드 정부가 이것이 독일의 자작극임을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진영에서는 폴란드가 먼저 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여겼다. 9월 1일, 새벽 독일은 위와 같은 통조림 작전으로 인한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한다. 당시 독일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폴란드를 기습했고 새벽 4시 45분경,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그단스크에 기항한 독일 해군의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스비히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이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 요새를 11인치 주포로 기습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개막을 알리는 공격이었으며 뒤이어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공격하면서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폴란드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전투 과정에서 폴란드 군의 보이치에흐 나이사레크(Wojciech Najsarek) 하사가 독일군의 기관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첫 번째 전사자였다. 그리고 폴란드 북부 해안 지역을 공격하기 직전인 새벽 4시 40분, 독일 공군은 폴란드 도시 비엘룬(Wieluń)에 기습적으로 공습을 감행했다. 베스테르플라트의 포격 5분 전에 이미 독일 공군이 비엘룬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비엘룬 시의 75%를 파괴하고 시민 1,2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이 때부터 6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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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6주년 -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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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완숙함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태도다.
- 일반적으로 겸손(謙遜)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뜻한다. 이것은 미덕임이 틀림없다. 겸손에서 겸(謙)은 ‘덜다’, ‘감하다’라는 뜻이고, 손(遜)은 ‘몸을 낮추다’, ‘사양하다’, ‘양보하다’라는 뜻이니, 둘 다 크게 보면 ‘공손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공손(恭遜)에서 공(恭)은 ‘삼가하다’, ‘직분을 다하다’, ‘조심하다’라는 뜻이다. 겸손한 사람은 공손함을 이미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서 먼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취한다. 그런데 요즘 현대 사회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 겸손한 사람들도 있지만 교만한 사람들도 많다. 교만한 사람들은 잘난 체하고 우쭐거리거나 뽐내는 태도를 지닌다. 교만(驕慢)에서 교(驕)는 ‘무례하다’, ‘버릇없다’, ‘속이다’라는 뜻이고, 만(慢)은 ‘게으르다’, ‘거만하다’, ‘오만하다’, ‘모멸하다’, ‘업신여긴다’라는 뜻이다. 특히 교(驕)는 말 마(馬)와 높을 교(喬)가 합쳐진 말로 보면, 자신이 말을 타고 있으면 상대방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니까 자신의 지위나 부유함으로 상대방을 경시(輕視)한다는 말이 된다. 교만과 비슷하지만, 다소 의미가 다른 말인 오만(傲慢)은 잘난 체하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데 중점을 둔다. 오(傲)는 인(人)에 놀 오(敖)가 합쳐진 말로 자기 마음대로 밖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논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있어도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제멋대로 날뛴다는 말이다. 자만(自慢)은 자신과 관련된 것을 자랑하면서 뽐내는 내면적 태도를 말하고, 거만(倨慢)은 잘난 체하면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말한다. 거(倨)는 걸터앉는다는 뜻으로 마치 주인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일어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자리를 잡고 텃세를 부리는 모습과 같다. 하여튼 교만, 오만, 자만, 거만은 서로 다소 의미상의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서로 연관될 뿐만 아니라 겸손에 적어도 반대되는 뉘앙스를 지닌다. 옛 선현들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언제나 교만, 오만, 자만, 거만과 같은 태도를 경계해 왔다. 그들은 적어도 심성론을 통해 도덕적 수양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오늘날 교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자에게 겸손은 진리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학자의 사명』(1794) 네 번째 강의에서 “진리는 항상 진리이고, 겸손도 진리에 속하는데, 겸손으로 인해 진리가 손상된다면 이 겸손은 거짓 겸손입니다”(한국어 번역, 78쪽)라고 말했다. 과도한 겸손은 진리가 손상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이러한 방식의 겸손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거짓된 겸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학자에게 진정한 겸손은 진리 앞에서 학문적 완숙함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겸손함을 갖춘 학자보다 학자랍시고 얕은 지식으로 오만불손(傲慢不遜)하거나 교만방자(驕慢放恣)해서 남을 존중하기보다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남들과 토론이나 대화보다는 남을 가르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학자(學者)라기보다는 차라리 교사에 가까울 것이다. 진정한 학자란 배움에 끝이 없어야 한다. 배움의 대상도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따라서 진정한 학자는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하는 것처럼 배움 앞에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앎에서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그저 스스로 나는 여기까지 밖에 몰라 하고 더 이상 아무런 정진(精進)도 하지 않은 태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태도를 지지는 사람은 스스로 게으름이나 태만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자신의 학문적 완숙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학문적 완숙함을 지니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고 날카롭고 예리하게 핵심을 찌르기 마련이다. 그가 그렇게 침묵할 때는 겸손하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만,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에는 학문적 완숙함이 드러난다. 그는 분명히 침묵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안다. 어쩌면 이것도 학문적 완숙함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독일 유학 시절에 겪은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필자가 만났던 독일 교수님들은 대체로 학문적 겸손함이 베여 있고, 따뜻한 친절함이 있었으며, 필자의 다소 모호한 질문에도 기꺼이 경청하면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었다. 겸손함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막상 따지고 들면 천박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처음에는 별로일지 모르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완숙함의 경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고, 속으로는 오만불손하거나 교만 방자한 사람은 특정한 상황에서 돌발 행동으로 본색이 드러난다. 그리고 억지로 구색에 맞춰 과도하게 겸손한 사람은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때론 자존감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겸손한 사람은 실제로 겸손이 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겸손해 보이려고 할 뿐이다. 겸손이 굴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요즘 한국 사회의 어디서든지 겸손함을 점점 찾기가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속한 학계도 학문적 겸손함이 묻어나서 학문적 완숙함보다 얕은 지식을 과시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고작 일반적 수준에서 논의된 얄팍한 지식으로 뭔가 대단히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것처럼 자기과시에 몰두하는 사람들에서 우리는 무슨 학문적 완숙함을 찾을 수 있던가! 그토록 많은 성과물을 내놓고 있으면서도 학문적 완숙함이 묻어 나오는 걸작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진정으로 학문적 완숙함에 도달한 사람은 섣불리 자화자찬(自畵自讚)보다 남의 의견이나 관점을 경청하면서도 이를 충분히 소화하면서도 겸손하게 자신의 관점을 명료하게 정곡을 찌르기 마련인데, 왜 한국에서는 유독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는가? 필자가 귀국 이후에 경험을 보면 이른바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가만히 보면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합리적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겸손함을 말하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이때까지 뭘 배웠는지가 그저 궁금할 뿐이다. 아마도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아무것도 아무것으로 남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햇빛과 공기에 우리는 조금 늦을 뿐이다. 축축한 흙의, 우리를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암흑으로부터, 자식을 낳는 지연된 시체들[···] 모든 것들이 자신만의 무덤을 갖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이야기들, 아무것도 아니다(1932.9.28., 한국어 번역 177쪽).” 어쩌면 우리의 단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게나 떠드는 공허함을 즐기는 몇몇 사람들만의 향유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간단히 말해 배우기는 했는데 뭘 배웠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겸손함보다 오만불손함과 교만 방자함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겸손은 완숙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겸손은 마치 벼가 완전히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처럼 자연스러움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평소에 겸손함을 익히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다 보면 완숙함도 의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법이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옛 선현의 가르침은 훌륭하다. 완숙함은 끊임없는 정진을 하면서 세상에도 관심을 지니면서 통찰력을 함양하면서 형성된다. 그런데 완숙함은 상당한 전문성과 깊은 통찰력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지혜의 혜안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세계와 진리 앞에 담대하게 서지만 언제나 겸손의 가치를 안다. 겸손하라, 그러면 진리와 세계는 그대에게 손짓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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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완숙함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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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북부, 현재의 도호쿠 북부와 홋카이도에 거주했던 종족들
- 시대에 따라 이 종족들을 에미시(毛人), 혹은 “에비스”라고도 표기했었다. 에조의 초창기에는 동북부의 이민족들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였으나, 에조는 현재 대부분이 사라지고 홋카이도 아이누 족만 남았다. 현재는 대체로 일본인 입장에서 볼 때 일본 내 아이누 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해석된다. 종족의 계통 분류상 아이누 족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아이누 족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에조와 아이누 족은 엄밀히 다르지만 대개 일본이 역사적으로 아이누 계통 종족을 통칭하는 단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들 에조를 뜻하는 한자인 蝦夷는 일본어로는 えぞ(에조)라 읽고 있으나, 한국식 독음으로는 ‘하이’라고 읽는다. '새우 하(蝦)'자에 '오랑캐 이(夷)'자를 쓰기 때문인데 夷자를 서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한국이나 중국에서 나타났던 이민족의 개념과 비슷하다. 고대의 에미시는 혼슈 동부 및 북부에 거주하면서 야마토 인이 중심이 된 일본에 대해 정치적 복속을 거부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통일된 정치 체제를 수립하지는 못하고, 차례로 일본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갔다. 적극적으로 조정에 접근하는 집단도 있었지만, 반대로 적대하는 집단도 적지 않았다. 이 에미시로 불리던 집단 가운데 일부는 가즈토(和人, 일본인), 나머지 일부는 중세의 에조, 이후 아이누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누가 본래 일본 야마토 민족의 역사가 아님을 생각하면 에비스도 외래 에조의 교류로 전해진 신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에미시와 에조 및 아이누는 상호 간의 연속성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근대에 들어 도호쿠 지방에서 야요이 시대의 벼농사 유적이 확인되면서 에미시와 에조 및 아이누는 인종상으로 동일하나 민족적으로는 조금씩 다르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에미시는 야마토 조정 측에서 지칭했던 3인칭 형태의 타칭으로, 에미시라 불리던 그들 스스로를 어떻게 자칭했는지 언급한 사료는 없다. 에미시에는 야마토와 같은 통일된 정체성이 없었다거나 야마토 조정 측과의 협상에서 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도 견해가 서로 다르다. 에미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 중 진무 천황(神武天皇)의 동정전승(東征傳承)에 있는데, 거기서 읊은 노래 가운데 에미시(愛濔詩)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그러나 진무 천황의 기술은 역사적 사실성이 모호한 부분이 많고, 에미시에 대한 기술과 위 기사의 노래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또한 여기서 등장하는 아이누 족이 후의 에조와 아이누가 같은지를 의미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아서, 에미시의 민족적 성격이나 거주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분명한 것은 없어 실질적으로 정설이라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대체로 간토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에 걸쳐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평상시에는 모피, 말과 쌀, 포, 철 등을 교환하는 등 무역도 이루어졌지만,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 조정은 에미시가 사는 도호쿠 땅에 몇 차례 대규모 토벌군을 보냈으며, 잦은 전투가 벌어졌다. 5세기 중국의 남북조의 역사서인 <宋書-倭國傳>에 의하면 왜왕 무가 유송(劉宋)에 보낸 상표문과 같은 역사적 기술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께서는 몸소 갑주를 두르고 산천을 돌며 편히 쉴 날도 없이,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의 나라 66국을 복속시켰으며,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95국을 평정하셨습니다." 이 기록에서도 이미 5세기에는 에미시의 존재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초기 역사를 보면 서기 3세기경에 야마토(大和)가 건국된 이래 간사이(關西)를 중심으로 대륙과 한반도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발전하여 이를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나가는 양상이었으며, 서기 6세기경을 전후하여 남부 지역을 제외한 규슈 및 시코쿠, 그리고 츄부 서부의 혼슈 지역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시켰는데, 이후 간토, 도호쿠에 잔존하던 지방 세력들을 에조라고 칭했다.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에는 현대의 아이누 인들과 가까운 종족들이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대략 5~7세기경에는 간토, 8~11세기경에는 도호쿠의 에조 세력이 일본과의 전투 및 복속과 동화를 통해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 일부 부족장들은 일본 조정에 의해 성씨를 하사 받고 호족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타난 후슈(俘囚)는 일본의 야마토 등 중앙 조정에 복속된 에조 계열 부족장들을 지칭한다. 후슈(俘囚)는 일본어로 본래는 포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부(夷俘)라고도 했다. 일본 열도의 서부에 위치한 고대 일본 조정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등으로 하여금 일본의 동부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당시 도호쿠는 일본 조정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으며 아이누 계통의 지방 세력들이 정착하고 있으면서 토착화 중이었는데 당시 일본 조정은 이들을 모두 오랑캐로 인식하여 에조(蝦夷)라고 하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일본인들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 기준으로 그들은 일본 열도의 토착민이자 야마토인과는 다른 철저한 이민족이었다. 7세기와 9세기에 걸쳐 일본 조정은 에조 부족들을 정벌하거나 회유하여 귀속시켰고, 이들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들 부족장들이 후슈가 되었는데 일본 조정이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면세 혜택 등을 주었고, 후슈들은 이를 기반으로 무역 등에 종사하여 이윤을 남겼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의 호족으로 발전하였는데, 헤이안 시대의 호족인 오슈(奥州)의 아베(安倍), 데와(出羽)의 기요하라(清原), 오슈의 후지와라(藤原) 등이 되었다. 에조 중에는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던 인원들도 있어 큐슈 등에 보내져 군사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조정은 신라구(新羅寇) 등을 방어하기 위해 큐슈 지역에 후슈 출신 병력들을 배치했지만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9세기 말에 다시 본래의 지역으로 돌려보냈다. 흔히 쇼군이라 부르는 정이대장군은 동북부 지방의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군권을 이임 받은 무가의 수장이었다. 정이대장군은 에미시에 대한 정벌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다 서일본의 천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후대에 두 세력의 권력 관계가 바뀌게 된 것이라 보고 있다. 이 외에도 진수부(鎮守府)가 존재했는데 진수부는 고대와 중세 시대에 에미시 인들에 대한 통역을 위해 설치된 관부였으며, 진수부의 지휘관은 진수부장군(鎮守府將軍)이었다. 한창 에조에 대한 일본의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시 에조와 일본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따로 통역관을 고용했다는 것이 진수부였고, 도호쿠벤(東北弁)에서 아이누어와 관련 있는 단어들이나 지명들이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여 에조는 아이누어나 혹은 아이누어와 가까운 언어를 구사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 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호쿠 북부에 잔존하고 있던 에조가 야마토 정권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어 동화된 이후에는 잔존 세력들이 홋카이도로 이동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실 에조가 야마토에게 밀려난 또 다른 야요이인 세력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 적 있고, 에조가 발해나 퉁구스 계통의 부족들과 교류를 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적 교류나 문화적인 교류 자체는 있었을 것으로 판명된다. 다만 유전적인 부분으로 추측한다면 에조를 구성하는 인종들은 대부분 아이누인 계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의 연구에 따르면 에미시 중에 아이누와 관련된 세력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8세기 이전에 이미 야요이 계통의 언어들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야마토인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일례로 한국어, 육진방언(六鎭方言), 제주어 등과 같이 같은 계통의 언어임에도 의사소통이 불분명한 경우는 흔하였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들 에조에 대해서 조선 측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기록되어 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는 이들 에조인들을 모인국(毛人國)이라고도 하며 험한 길을 다니는데 능숙하고 물에서 헤엄칠 때에는 짐승처럼 빠르다고 기록했다. 고대 5세기에는 야마토 조정이 이들 세력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왜5왕 중 무(武)가 478년에 남북조 중 남조의 송(宋)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개를 정복하고, 서쪽으로 66국을 항복시키고, 바다 건너 북쪽으로 95개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라고 기록한 것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모인이 에조로 알려져 있다. 사이메이(斉明) 일왕 당시 견당사(遣唐使)로 당나라에 갔던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伊吉連博徳)가 에미시 두 명을 데려가 당나라 고종(高宗) 앞에 보여주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려 있는데, 야마토 조정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여 에미시를 니키에미시(熟蝦夷), 아라에미시(荒蝦夷), 츠가루(津輕)로 분류해 고종에게 소개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사이메이 일왕 원년인 655년 7월 11일 조에 의하면, 나니와쿄(難破京)의 조정에서 북에미시 99명과 동에미시 95명을 향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각각 호쿠에쓰(北越), 히가시미치노쿠(東陸奧)라는 주석이 있는데, 북쪽은 고시국(越國), 동쪽은 무쓰국(陸奧國)의 방향이며 고시는 실제로는 무쓰 서쪽에 위치하지만 수도에서 보아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에미시로 분류하여 설명했다. 이는 당시 에미시 양대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응대 실무를 맡았던 구니의 관할 방위에 따라 조정이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별은 나중에 데와국과 무쓰국의 관할이 되면서 헤이안 시대까지 답습되어지지만 표기는 고대 중국의 단어로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는 북적으로 바뀌어 에미시(蝦狄)이라고도 쓰게 되었다. 이 같은 설명에 대해 에미시의 생활을 같은 시대 사람이 정면에서 설명한 것으로, 7세기 견당사들이 당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에미시들을 소개하기를 야마토 조정에 매년 입조하는 니키에미시가 가장 야마토 정권에 순응하기 때문에 가까운 종족이고, 다음으로 아라에미시(麁蝦夷),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이 쓰가루(都加留)라고 대답했다. 다이호 율령을 제정한 인물인 이키노 하카토코(伊吉博德)는 에미시가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집도 짓지 않고 나무 밑에 산다고 서술했지만, 사료에 보이는 다른 기술이나 현재의 고고학적 지식과 모순되는 것으로 에미시를 야만인으로 과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창작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신빙성 없는 설명에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에미시 가운데 쓰가루라 불리던 집단은 그들의 고유 명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력한 집단으로 존재했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이 에미시들을 견당사와 함께 당나라에 보낸 것은 당나라에 대해서도 왜가 주변 이민족인 에미시를 번속 국가로 거느린 나름 제국과 비슷한 모습을 당나라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당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제국이었던 당나라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왜국의 모습은 외교적으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당시 일본은 간토 지역의 에조를 정복했고, 도호쿠 일대의 에조는 야마토 조정과의 교역 혹은 해양을 통한 교역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서 발전했다. 이들은 간토 지역에 자주 나타나서 약탈했기 때문에 야마토 조정에서는 에조를 다스리기에는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충돌도 빈번해졌다. 특히 7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에미시는 지금의 미야기(宮城)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山形)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었다. 658년에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수군(水軍) 180척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고 결국 에미시를 장악했다. 야마토 조정은 도호쿠 일부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 간사이 지역이나 간토의 주민들을 도호쿠 일대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시행했지만, 충돌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 입장에서는 주거지로 그리 선호되지 않았다. 그리고 도호쿠 일대의 에미시들도 야마토 조정의 움직임에 맞서 자체적으로 통치 체계를 갖추었으며 조정의 군대와 상당수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야마토 정권과의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인해 과도한 재정 지출과 인명손실을 초래했다. 서기 9세기 경 야마토 조정은 현재의 이와테 현과 아키타 현의 중간지역을 경계로 삼고 향후 2세기 가까이 아오모리 일대에 대한 정복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할 정도였다. 그러나 에조는 통일된 국가체계의 형성에는 실패한 부족 사회였기 때문에 결국 각개 격파 당하고 일본의 통치 하에서 단계적으로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일본에 복속해온 에미시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에미시와의 외교적인 부분으로 볼 때 발해에서 동해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사신들이 항로를 잘못 들어 북동쪽의 에미시의 영토로 들어가 상륙하자마자 에미시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는 것이 일본 측 기록에는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 특히 발해 무왕 때의 사신단의 수령이었던 고제덕(高齊德)은 727년 9월 정사 영원장군(寧遠將軍) 낭장(郎將) 고인의(高仁義)와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徳周), 별장(別將) 사항(舍航) 등 24인과 더불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길을 잘못 들어 일본 열도 북부의 에조의 영토에 당도하여 이들의 습격을 받아 고인의 등 16인이 죽고 고제덕 등 8명만이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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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북부, 현재의 도호쿠 북부와 홋카이도에 거주했던 종족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