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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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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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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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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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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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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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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2년 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전쟁 종식을 위해 영토를 양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
    우크라이나 의회, 최고 라다에서는 2년전 2023년 8월 23일 전쟁 종식을 위해 영토를 양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나토에서 최근 불거진 '우크라이나 영토와 나토 가입을 맞바꾸는 것'과 유사한 평화 안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미로 보여 진다. 라다는 이 날 채택한 결의 안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어떠한 영토 양보도 용납할 수 없다고 확정시켰다. 또한 러시아의 모든 무장 조직은 하나도 남김없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퇴출시켜야 하는 것과 크림 반도 등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인 1991년 국경을 회복하고 국가 주권을 보장하는 것이 전쟁 종식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Восстановление международно признанных границ 1991 года, включая границы Крымского полуострова, и обеспечение национального суверенитета являются предпосылками для прекращения войны)고 규정했다. 우크라이나의 선택은 일단 장기전으로 가겠다며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영토와 맞바꾸는 나토 가입, 불합리한 개념의 평화 안이 나토 내부에서도 제기된 부분이지만, 우크라이나는 이같은 평화 안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다의 결의 안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국가 주권을 지키겠다는 의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감이 점차 쌓이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는 2022년 가을, 하리코프와 헤르손에서 거두었던 일종의 러시아 군이 퇴각한 승리를 완전한 승리로 가는 길이라며 국민들을 선동시키고 일시의 기대감을 부풀렸다가 스스로 여론의 함정에 빠졌다. 더구나 이번 대반격 작전에서 제대로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재,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큰 위기에 놓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동원 대상 남성들이 앞으로 더욱 동원을 회피하는 등 여론이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군 내에서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 될 경우, 우크라이나 군 내에서도 러시아에서 발생한 프리고진의 쿠데타와 같은, 쿠데타가 발생할 수도 있다. 현재 이같은 불만은 나토에 의해 어느 정도 차단되고 있지만 장기전을 준비하는 우크라이나 당국에게는 가장 큰 위험요소 중에 하나다. 프리고진의 반란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여론도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젤렌스키는 '위기론'의 재점화에 나섰다. 젤렌스키는 대국민 연설에서 후방에서는 마치 전쟁이 끝난 것처럼 살고 있다며 자유와 독립은 전선에서 싸우는 누군가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함께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의회의 국가 안보 및 국방위원회의 예고르 체르네프 부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국민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을 전쟁터로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8~10차에 걸친 동원령이 내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차기 국방장관이 유력한 마리아 베를린스카야는 러시아의 '샤헤드' 드론과 각종 미사일 공격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을 뚫고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고 물음을 재기했다. 그녀는 국가를 완전히 전시체제로 변환할 때가 왔다면서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인적 자원을 가진 러시아는 '장기 소모전'에 베팅하고 있다면서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런데 그런 마리아 베를린스카야부터 전장에 먼저 나가 러시아 군과 최일선에서 싸워보고 그런 소리했음 좋겠다는 싸늘한 여론도 형성되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의지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우크라이나 사회 연구단체 '랭킹'(социологический групп "Рейтинг")'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가 전쟁 승리를 위해 앞으로 몇 년간 더 어려움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응답자의 11%는 앞으로 1년, 12%는 겨우 몇 달간 견딜 수 있다고 답했다. 또다른 11%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 체제에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크라이나의 사회 분위기를 본다면 이같은 응답조사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는 장기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국민이 거의 3분의 1 (34%) 에 이르렀다며 응답 조사와 상반된 현실을 지적했다. 이에 현지 정치분석가 안드레이 졸로타레프의 견해에 의하면 전쟁이 나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리에서 동원 대상자들이 숨거나 해외로 도피하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2023년에 이 얘기가 나왔을 때 내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한다. 문제는 그 약속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전쟁 중 대선 실시에 조건부 동의를 한 것은 대외적으로 우크라이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국민 단결을 촉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미국의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2025년 1월까지는 전쟁을 끌어갈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지만 그 의지는 지금도 국민의 의견과 상관없이 지금도 정부만 홀로 불타고 있다. 그 때까지 서방이 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계속하고, 우크라이나 여론이 뒷받침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긴한데 과연 그 때까지 우크라이나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현재, 우크라이나는 장기전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우크라이나 남성들을 총 동원한다 해도 무기와 보급이 줄어들게 되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워싱턴 회동에서 영토 문제 관련 협상 이야기가 나왔는데 유야무야 됐다. 우크라이나 라다에서 이미 2023년에 제정된 영토를 양보 금지 결의안 때문에 영토 문제에서 이미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평화 회담 등은 타결 가능성이 극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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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6
  • 우크라이나 전 최고라다 의장인 안드레이 파루비(Андрей Парубий) 암살 사건 (하)
    파루비가 피격 당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로 나뉜다. 가장 유력한 것이 러시아의 FSB가 배후에 있다는 설이다. 이는 파루비 의원의 정치적 성향과 그의 혐러 행적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는 친(親) 러시아 정권을 붕괴시키게 한 2004년 오렌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2014년 유로마이단에서는 주도적으로 친러 축출을 담당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로마이단이 성공하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한 이후 포로셴코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국방위원회에서 서기를 거쳐 2016∼2019년 최고라다 의장을 지냈다. 파루비의 이와 같은 정치적인 성향을 고려해보자면, 유로연대 당이 러시아 정보 기관인 FSB와 그들의 수하 격인 우크라이나 내 '제5열'이라 불리는 집단,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의 정보 기관으로 현재는 국가의 주요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 집단으로 여겨지는 기관에서 사람을 포섭해 파루비를 제거했다고 비난한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부분이다. 이 당의 이리나 게라셴코(Ірина Герашенко) 대표는 "이번 사건은 그의 친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오랜 원수이자 테러리스트인 러시아와 제5열이 배후에 있다(Цей інцидент пов'язаний з його проукраїнською націоналістичною позицією. За цим стоять Росія, наш давній ворог і терорист, і П'ята колона)"고 개인 SNS에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최고 라다의 안보 및 국방 정보 위원회의 소속의 로만 코스텐코(Роман Костенко) 의원은 도즈드(Дозд) TV 채널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최고위 인사들을 제거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우리도 대칭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는 더 이상 안전할 사람은 없다(Ліквідувавши високопосадовців України, Росія розпочала новий етап війни. Ми повинні реагувати симетрично. Тому ніхто в Україні більше не почувається в безпеці)."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3년 6개월 동안 벌어지고 있는 장기전 기간에 어쩔 수 없이 조장되기 마련인 좌-우 이념 대립, 혹은 친(親) 정부 및 반(反) 정부 간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과 정치적 폭력에서 원인을 찾아 보자는 견해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파루비 의원과 가까운 유럽연대 당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러시아 크레믈린의 지시하에 2014년 유로마이단에 적극 참여한 파루비에게 보복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파루비가 마이단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내에서 정치적 배경을 배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파루비의 암살 사건은 다가오는 정치적인 격변에서 나타난 희생 중의 하나로 보는 경우도 존재한다. 파루비 의원의 유족들은 파루비 의원이 당 지도자인 포로셴코 전 대통령과도 특별히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몇몇 인사들끼리만 교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친(親) 포로셴코 인사에, 젤렌스키와 권력의 대척점에 있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정계 인사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는 그 동안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 있음에도 내부 정치적인 폭력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었다. 작년 2024년 7월 중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이리나 파리온(Ірина Паріон) 전 의원이 리보프에서 알 수 없는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를 암살한 혐의로 기소된 인물이 뱌체슬라프 진첸코(Вячеслав Зінченко)였는데 그가 작년 드니프르 시(市) 시장인 보리스 필라토프(Борис Філатов) 등 일부 급진 정치인들에 대해, 그들에 대한 테러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수사 결과, 밝혀졌었다. 그러나 진첸코 또한 러시아 FSB가 배후일 것으로 의심되었지만 그는 FSB와 연관이 없었을뿐더러, 러시아와의 접촉 또한 근거가 미약하여 FSB 배후설은 사라졌다. 또 올해인 2025년 3월, 극우 활동가로 알려진 데미안 가눌(Деміaн Ганул)이 오데사에서 저격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가눌의 부인은 범인이 우크라이나 보안국인 SBU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믿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의 반응은 극히 위협적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국가 두마 국방위원회 알렉세이 주라블레프(Алексей Журавлев) 제1 부위원장은 이날 뉴스루(News. Ru)와의 인터뷰에서 젤렌스키도 파루비와 같은 운명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파루비가 유로마이단의 주도자로 러시아 또한 인식하고 있으며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며 젤렌스키도 다를 바 없다며 주장했다. 즉, 러시아 측은 이번 암살에서 관련성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FSB가 이번 암살에 배후라는 설이 당연히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경찰과 보안국은 파루비를 살해한 범인을 흐멜니츠키 지역에서 체포했다. 기자들은 러시아 특수부대가 전쟁 중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파루비를 살해한 용의자를 1년 동안 협박해 왔다고 보도했다. 다른 보도에서는 용의자가 전쟁 중에 실종된 것으로 간주되는 아들의 시신 위치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하며 러시아 특수부대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경찰 수사에 따르면, 파루비 의원에 대한 암살 시도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드러났다. 범인은 파루비의 일정을 파악하고 이동 경로를 계획했으며 살해 후,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SBU와 경찰의 공조로 인해 공격 발생 24시간 동안 용의자의 흔적을 추적했으며 36시간 이내에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젤렌스키는 직접적으로 범죄 사실을 공개하고 구금하여 재판까지 하도록 지시했다. 현재 이 범인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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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5
  • 우크라이나 전 최고라다 의장인 안드레이 파루비(Андрей Парубий) 암살 사건, 그는 어떤 인물인가?
    전직 우크라이나 최고라다 의장인 안드레이 파루비(Андрей Парубий)가 리보프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창당한 유럽연대 소속 의원인 파루비는 리보프 시내 거리를 걸어 가다가 따라온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rbc 에서 제공한 영상을 보면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글로보 택배 배달용으로 보이는 노란색 가방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는 파루비를 추격하더니, 어느 순간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 범인은 파루비를 겨냥해 7, 8발을 저격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에서 도주했다. 오토바이를 탄 총격범의 모습은 언론에 공개되긴 했지만, 신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아 여러 추정 중에 있다. 젤렌스키는 X에서 "내무장관과 검찰총장으로부터 파루비 전 의장의 피살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이는 끔찍한 살인 (Міністр внутрішніх справ та Генеральний прокурор повідомили мені новину про вбивство колишнього голови Парубі, і це було жахливе вбивство)." 이라 언급했다. 막심 코지츠키(Максим Козицький) 리보프 군사행정청장은 리보프 도심 전체에 비상 검문령을 내리고 수사력을 총동원해 범인을 찾고 있는 상태다. 이에 따라 현지 경찰은 시내 곳곳에서 임시 검문소를 설치하고 모든 차량을 검문검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루비는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리보프 주 체르보노그라드(Червоноград) 출신으로 그의 조부는 나치 독일 갈리시아 군대의 기관총수로 복무했으며 나치 독일군 소속으로 폴란드 군과의 리보프 전투에 참전했다. 파루비는 리보프 대학교 역사학과에 들어간 역사고고학 전공자였다. 그는 1987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사회과학연구소의 고고학 탐사대에서 과학아카데미 고고민족학연구소 실험실 조수로 경력을 시작했다. 대학에 재학 중인 1988년에 우크라이나 민족 단체인 스파드쉬나(Cпадщина)를 이끌었다. 이 단체 회원들은 나치 독일에 부역한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무덤을 복원하고, 생존한 나치 우크라이나 군인들에 대한 기억을 수집했으며, 각종 캠프를 조직하고, 리보프에서 열린 반 소련 집회 경비 활동에 참여했다. 1989년 3월, 그는 허가 받지 않은 반 국가 집회를 조직한 혐의로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1990년부터 파루비는 리보프 지역 의회 의원과 청소년 및 스포츠 상임 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그런데 선거 전날, 파루비는 허가받지 않은 전단지를 게시한 것 뿐 아니라 선거 운동에서 부정 혐의 등으로 인해 동료 두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리보프 지역 경찰서 감옥에서 자신이 경찰서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동료들이 풀려난 후에 석방되었다. 1991년에는 올렉 탸그니보(Олег Тягнибо)와 함께 우크라이나 사회민족당(SNPU)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2004년 오렌지 시위 이후, 이 당은 전 우크라이나 연합 "스보보다(Свобода)"로 개칭되었다. 그는 극렬한 반러주의자였으며 2004년 오렌지 시위에 참여하여 친러 세력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우리 우크라이나(Наша Украина)' 당에 합류했다. 그는 2010년 봄, 의회에서 크림 반도에 주둔하는 러시아 흑해 함대 기지 연장에 관한 협정 비준 표결을 방해했다. 이 혐의로 인해 그는 형사 소송을 당하기도 했으며 당시 표결을 강행한 페트로 리트빈(Петро Литвин) 의장에게 계란을 던지고, 연막탄까지 터뜨리는 테러를 저질렀다. 파루비는 국가 안보 국방위원회(Комітет національної безпеки та оборони) 서기로 임명된 이후, 2014년 5월 2일 오데사에서 러시아계 시민 수십 명이 사망한 폭력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여 러시아 시민들을 학살한 의혹을 받았다. 파루비는 적극적으로 이를 부인했지만, 젤렌스키가 2019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이후, 2014년 5월 2일 당시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공공 무장 단체를 조직한 혐의가 인정되어 입건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젤렌스키 덕택에 유야무야 되었으며, 파루비는 기소되지 않았다. 파루비는 유로마이단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제1 부의장을 거쳐 의장에 올랐다. 2019년 총선에서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의 유럽연대 당 후보로 출마했으며, 포로셴코 전 대통령에 대한 형사 소송이 제기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키예프 지역의 한 검문소에서 군복을 입고 기관총을 든 파루비 의원의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정치 일선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포로셴코의 사람으로 젤렌스키에 의해 찍혔기 때문인 것도 있는데 이후 고향인 리보프에 머물면서 젤렌스키의 동원령을 적극 홍보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리보프에서 반데라주의자들과 함께 1월 1일 반데라를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공공연히 나치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는 각종 테러를 저지른 인물이기도 했지만 우크라이나 경찰과 사법부로부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갈리치아에서 러시아계 주민을 수없이 학대했어도 그에 대한 아무런 법적 책임도 묻지 않았었다. 그러던 그는 결국 누군지 알 수 없는 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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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5
  • 16세기 마카오와 일본,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과 예수회
    당시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동북아시아에 들어면서 상품 무역과 함께 일본에 들어온 것은 기독교였고 포르투갈 상인과 예수회 선교사는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사쓰마에 상륙한 이후, 중국 천주(泉州)와 일본 사카이(堺)에서의 포르투갈 상관(商館)의 건설이나 예수회 수도원 교구에서 설립한 상관의 관세를 재원으로 하는 것을 말라카 총독에게 제안하게 된다. 더불어 사비에르는 일본에서 수요가 있는 상품 목록도 만들어 안정적인 교역을 노렸다. 마카오 당국과 예수회 사이에 매년 50피코(Pico)의 생사를 예수회의 몫으로 하는 계약이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프로크라도르(Procrador)라는 무역이나 재무 담당 직위에 임명하여, 남만무역으로부터 재원을 조달하게 되었고, 금교(禁教) 이후에도 이 관계는 계속되었다. 예수회 제창으로 마카오 행정집행부가 발족하였고,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는 마카오를 촌락에서 시다드(Cidade, 시市)로 승격하게 하여 행정 단위로서 인정했다. 예수회는 마카오 지역 사회의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나가사키(長崎)의 프로크라도르는 해안 곶에 건설된 교회 내의 카자(Casa)에 무역품을 저장하여 거래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교회가 포르투갈 상관처럼 기능하였다. 곧장 사비에르의 제안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프로크라도르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프로크라도르가 무역을 행하는 점은 발에 걸리는 돌부리(躓きの石)로서 비판 받아 금지된 시기도 있었다. 예수회는 마카오 상인과 카피탕 모르 사이를 중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간이 재판소처럼 기능을 수행하였다. 창설된 상파울루 학원(聖パウロ学院 , Escola São Paulo)에는 금고가 설치되었고, 일본과의 무역이나 관세로 얻은 화폐를 보관하였다. 상파울루 학원은 일본 포교를 위해 일본인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공식적인 무역이 금지되었으나 중국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것과 더불어, 16세기 말부터 일본인과 중국인은 동남아시아에서 거래를 늘렸다. 막부는 주인장(朱印状)을 발행하여, 해외 도항선을 관리하였다. 주인장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면 국적에 관계없이 발행되었다. 포르투갈 인도 주인장을 받아들였다. 마카오 상인 비센트 로드리게스(Vicente Rodriguez)에게 주인장이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카오 상인의 주인장에는 예수회가 협력하고 있었다. 이후 스페인이 동북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시작은 포르투갈에 뒤쳐져 있었고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경유하여 태평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는 스페인령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 아카풀코(Acapulco)와 루손(Luzón)섬 마닐라(Manila)를 잇는 마닐라 갈레온을 시작으로 한다. 스페인이 마닐라로부터 일본을 방문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스페인과의 무역에 적극적이 되었고, 교토(京都) 상인 다나카 가츠스케(田中勝介)를 누에바 에스파냐로 파견하게 된다. 또한 포르투갈 상인이 생사에 대한 독점적인 이익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이를 삭감할 목적으로 교토, 사카이, 나가사키 상인들에게 이토왓푸나카마(糸割符仲間)를 결성하게 하였다. 이에야스 시기에는 기독교 포교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무역은 장려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에도막부는 금교 정책을 철저히 하고 국제 분쟁의 악영향을 막으려는 관점에서 해외 무역 관리 및 통제를 점차 강화하게 된다. 유럽인과의 교역은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국한되었고 스페인 선박 내항이 금지되었다. 후에 아유타야(Ayutthaya)에서 나가사키마치토시요리(長崎町年寄)인 다카키 사쿠에몬(高木作右衛門)의 주인선(朱印船)과 스페인 함대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주인선이 불타는 아유타야 사건이 발생한다. 막부에서는 주인장의 권위가 모욕당하였다고 하여 주인선 대신 봉서선(奉書船)으로 바꾸게 되었다. 늦게 동북아시아와의 교역에 참여한 스페인에 의한 포교에 따라 일본 기독교도들이 증가하게 된다. 개종된 현지 일본인들의 수는 37만~50만 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열도 인구의 3~4%에 달하여 막부의 경계를 부르게 된다. 일본에 있어 포르투갈이 마카오에서 가져오는 중국산 생사는 필요불가결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포르투갈의 무역과 포교를 분리시키려 하였다. 막부는 마카오 정청에 대하여 선교사의 일본으로 도항 금지를 요구하고 로주렌쇼 게치죠(老中連署下知状, ろうじゅうれんしょげちじょう)를 나가사키부교(長崎奉行)에게 내렸다. 이어 1634년 파올로 도스 산토스 사건(Paolo dos Santos 事件)이 발생한다. 산토스는 일본인 사제로서 기리시탄의 국외 추방에 의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이주하였다. 막부는 마카오 상선에 의한 사제 서장 운반을 금하였으나 나가사키의 마카오 상선으로 산토스의 서장이 발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가사키부교였던 다케나카 시게요시(竹中重義)의 밀무역도 발각되었다. 사건에 따라 마카오가 금교 후에도 몰래 포교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과 그에 따른 나가사키의 부패가 드러나면서, 막부는 마카오와의 단교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나가사키는 포르투갈 인들에 대한 관리를 위하여 데지마(出島)가 건설되었으며 나가사키 시내의 포르투갈 인이 수용되었다.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이 일어난 후, 금교를 보다 철저히 하려는 관점에서 막부는 포르투갈과의 단교를 검토하였다. 막각(幕閣)은 포르투갈을 대신할 거래상대로 네덜란드 상관장(オランダ商館長) 프랑소와 카론(François Caron)과 대화하였고, 네덜란드 식민지 대만(台灣)을 경유해서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물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인도 관구 순찰사(巡察使, Visitador)로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일본으로 가는 포교자금의 확보를 과제로 하였다. 거기에서 카르네로는 생사의 출자조합인 콤파니아나 알마산(Almazan)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계약에 따라 매년 50피코 생사 할당을 예수회가 확보하고 재원이 되었다. 카르네이로 계약에 따라 대상인에 의한 생사 독점은 사라지고, 소액 자본으로도 남만무역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콤파니아나 레스폰덴시아는 후에 나가사키에서 나게카네(投銀)라는 투자 형태의 원형이 되었다. 일본 상인에 의한 나게카네(投銀)는 겐덴긴(言伝銀)과 가이죠긴(海上銀)이라는 계약으로 나뉘었다. 겐덴긴은 상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은을 위탁하는 계약이다. 가이죠긴은 해난 시에 채무자가 유한 책임을 지는 고리 계약을 지칭한다. 일본 상인은 중국 식품을 사기 위하여 대량의 겐덴긴을 포르투갈 상인과 계약하여, 포르투갈 상인은 중국으로부터 신용 대부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에 따라 마카오에서는 대 일본인 채무가 급증하였다. 또한 다이묘나 바쿠신(幕臣)을 가이죠긴으로 이익을 얻어서, 막부는 바쿠신의 가이죠긴을 금지한 후에 상인을 포함하여 모든 겐덴긴과 가이죠긴을 금지했다. 한편 카피탕 모르는 상인으로부터 위탁 받은 상품으로부터 일정한 수송료를 징수하였다. 마카오에서 대 일본 부채가 늘어나자, 카피탕 모르 제도를 폐지하고 마카오 시는 임금으로 카피탕 모르를 고용하였다. 말라카. 세이론, 고아에서는 왕국의 수익으로 관세를 납부하였다. 마카오에 있던 포르투갈 인은 명나라에 대하여, 지조, 선박 정박세, 출항 시의 관세 등을 납부하였다. 정박세 금액은 선박 용량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또한 마카오가 네덜란드 공격을 받은 이후, 요새 정비를 위한 공납을 포르투갈 인에게 요청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스페인령 필리핀 식민지인 마닐라와는 달랐다. 일본, 중국, 포르투갈 선박은 나가사키에서 오오무라 가문(大村氏)에게 정박료를 지불하였다. 정박료는 오오무라 가문의 보호비도 포함하였다. 남만무역에 관계하는 화폐 단위로서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금은의 중량 단위로서 타엘(Tael) 즉 량(兩), 포르투갈은 레이스(Reis), 스페인은 페소(Peso)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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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4
  • 프랑스 경제의 문제점과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인지의 여부
    프랑스는 세계 7위 경제대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제조업이 매년 크게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고용률이 독일, 영국보다 거의 10% 가량 더 낮은 편이다. 다만 프랑스와 자주 비교되는 독일과 영국을 볼 때, 이들 국가들은 고용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나라들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도 OECD 평균에는 준하는 수준이다. 다만 이들 영국 독일의 이웃 국가들에 비해 높은 실업률과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가 앞으로 프랑스 경제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대한 과제로 여겨 진다. 프랑스 경제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재정 적자와 부채 비율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이미 EU가 제시한 GDP 대비 적자 한계 비율인 3%를 뛰어넘었다. 그 여파로 인해 신용등급이 Aa2로 강등되었으며 부채 문제 해결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부분, 늘 프랑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연금과 보험 문제다. 2023년 마크롱은 연금 수급나이를 뒤로 늦추는 법안을 시행했지만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 강한 반발에 부딪쳤고, 계속되는 감세정책 또한 강한 드라이브에 걸려 있는 편이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22년 기준으로 7% 내외로 미국 실업률 3.5%의 약 2배 정도이고 공기업 부채도 한국을 뛰어 넘은지 오래다. 프랑스 공기업 부채는 658%로, GDP의 23.8%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 부채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라 증세와 긴축 재정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마크롱 정부는 긴축 재정을 위해 복지를 축소했는데 문제는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받아야 될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피해를 입게 되면서 프랑스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2023년에 벌어졌던 프랑스 연금 개혁 시위도 이와 같은 흐름에서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은 성립 직전까지 왔었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되는 구조였고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하는 구조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2024년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가게 되고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며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실효성은 극히 낮았다. 올해 1분기 프랑스 국가 부채는 약 5,000조원으로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114.1%다. 스페인의 103.5%, 포르투갈의 96.4%보다 높다. 그리고 4일 전인 26일에는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그리스를 넘어서기도 했다. 프랑스가 이와 같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은 복지 및 공공 부문 지출이 매우 과도했던 데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렸고 우크라이나에게 계속 지원해주느라 국채를 매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수를 초과하는 지출을 국채로 조달하다 보니 작년인 2024년 한 해의 재정적자가 GDP의 5.8%에 달했다. 일단 한 번 하락세에 허덕이면 자력으로 줄이기가 어려운 재정 중독의 폐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의 증시는 급강하했다. 프랑스 국채를 대량 보유하고 있는 BNP 파리바, 소시에테제네랄 등 대형 은행 주는 6% 넘게 폭락했으며 CAC 40이라 부르는 파리에 상장된 40개 기업 주가 지수도 1.7% 내려 앉으면서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프랑스의 만성적인 재정적자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해 2024년 프랑스의 재정적자 비율은 GDP 대비 -5.8%를 기록했다. 이는 1년 동안 나라에 들어온 돈보다 나간 돈이 5.7%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1.3%의 재정 흑자를 기록한 그리스와 -4.3%의 적자를 기록한 이탈리아, -2.5%의 스페인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EU에서는 재정 적자 비율이 -3% 이내 정도 되면 안정적 수준으로 보고 있는데 스페인이 그나마 안정성이 있고, 이탈리아 또한 프랑스 다음으로 위기에 있다. 프랑수와 바이루(François Bayrou) 총리는 마침내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했다. 세계 경제 대국 7위의 프랑스가 IMF 구제 금융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 대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바이루 총리는 440억 유로 규모의 적자 감축 안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공무원들의 인원을 감축하는 것과 의약품 보조금을 삭감하는 것, 그리고 공휴일 2일 폐지, 연금 상한제와 복지 지출 동결, 일부 세목 인상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론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공휴일 축소에 대해 국민의 84%가 반대했고 좌우 정당 모두 긴축 안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오히려 내각이 붕괴될 위기로 번지게 된다. 여소야대인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다면 다음 달 총리 신임 투표가 통과보다 부결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는 이같은 사태를 초래한 정권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에 마크롱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다면서 개혁의 의지를 표명했지만 이미 국가의 이자 비용만 연 660억 유로에 달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국방비와 비교해 볼 때 한참 초과힌 액수다. 현 상태가 지속되면 2029년의 이자 비용은 연 1,000억유로에 이를 전망이며 이쯤되면 디폴트를 선언해야 할 위기까지 올 수 있다. 프랑스는 경제 위기에 더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마저 실종되었고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마크롱의 정치 생명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유럽 전체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의 GDP는 유럽 전체의 15% 수준이고 국가 부채 총액은 EU에서 20%가량 차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위기는 유럽 입장에서 볼 때, 결코 남일이 아니다. 프랑스발 재정 위기는 EU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가뜩이나 GDP가 낮은 동유럽 국가들은 막대한 빚더미에 신음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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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4
  • 중국 승전 80주년 행사 - 세계 지정학적 대격변의 장
    중국의 승전 80주년 뿐 아니라, 2025년은 1945년의 의미를 가진 모든 나라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1945년 5월 9일에 나치 독일을 완전히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베를린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소련 깃발을 꽂았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자 소련의 역사적인 승리를 알려주는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에 피해를 입었던 모든 유럽 국가들,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 같은 연합국들도 이 80주년은 나치를 패퇴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미국도 1945년은 남다르다. 일본 제국을 패퇴시키고 항복을 받은 역사적인 80주년이다. 그리고 우리도 광복 80주년을 맞이했었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도 독립 80주년을 맞이했다. 이날 물론 중국 입장에서 대일전승절이지만 사실, 중공과는 상관이 없는 전승절이다. 1945년 9월 3일, 중국 국민당 군의 허잉친(何應欽)이 일본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의 항복문서를 받았다. 즉, 모택동의 중공이 아니라 중화민국, 현 대만 정권의 장개석 정부가 일본에게 항복을 받은 날인 것이다. 중화민국은 1946년부터 매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했다. 그러나 중공은, 건국 이후 중국 국민당의 기념일이라고 하여 9월 3일 대신 8월 15일로 기념하다가 다시 2014년부터 9월 3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중화민국 정권을 군벌들이 할거하고 일본 제국에 타협적이었던 정권이라 폄하하했지만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념을 확립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동시에 대만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날을 중화민족 모두의 경사스러운 날로 인정했다. 이번 80주년 전승절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북한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참석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북한 김정은까지, 북, 중, 러 3국의 한 자리에 모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중국이 갖고 있는 첨단 무기들을 모조리 선보였다. 이 세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는 장면은 전날 있었던 인도의 모디, 러시아 푸틴, 중국의 시진핑이 서로 손을 잡았던 장면과 함께 올해의 지정학적 대격변을 불러오는 사진이자 올 한 해의 가장 충격적인 포토제닉이 아닐 수 없다. 이는 1959년 승전 14주년 전승절 때, 소련의 흐루시초프,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모택동, 베트남의 호치민이 한 자리에 모여 공산진영의 우의를 다진 이후, 66년만이고,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처음이다. 이같은 구도를 만들게 해준 숨은 주역은 단연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우리 한국의 윤석열이다. 바이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해 미국의 대리전 상대로 삼았고, 중국은 러시아를 여러 모로 도움을 주며 소원하고 서먹했던 관계를 완전히 밀착시켰다. 러시아와 중국은 소중국경문제 및 영토분쟁과 동맹결렬 등으로 냉전시대부터 같은 공산국가였어도 노선이 달라 서로 간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들어섰어도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했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가 연해주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믿었고, 러시아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역사, 그리고 실질적으로 태평양에 나아가고자 했던 중국의 야심, 상호 동맹국들 간의 갈등 문제 등으로 최악의 관계였던 것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고 서로 간에 뗄레야 뗄 수 없는 우군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윤석열은 과도한 대러 제재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그리고 살상 무기 지원 문제 등으로 러시아를 자극했고, 사실 러시아와 북한은 매우 소원한 관계였지만 이를 계기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라는 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에 따라 북한은 쿠르스크 전장으로 군을 파견했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윤석열이 다른건 몰라도 "살상 무기 지원" 만큼은 꺼내지 않았다면 러시아와 북한이 이렇게 가까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과도하게 러시아의 배후에서, 러시아를 자극한 외교는 결국 우리 한국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던 북한을 러시아 품에 던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결국 러시아와 북한을 이렇게 이어준 것은 윤석열의 공로?다. 푸틴 대통령이 중국 80주년 전승절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북한 김정은은 아예 베이징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진핑과 단 둘이 마주하기에는 김정은 입장에서도 그다지 탐탁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 입장에서도 올해가 대일항전 광복 80주년이라 중국, 러시아의 80주년과도 맞물린다. 김정은이 온 것은 푸틴 때문이지, 시진핑만 보고자하여 온 것은 결코 아니다. 푸틴이 중재하여 중국과의 어정쩡한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고, 김정은이 여기에 화답한 것 뿐이다. 이제 80주년 행사가 모두 끝났다. 그렇다면 셋은 무엇을 가지고 논의할까? 예상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두만강 프로젝트 개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북극항로 논의까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북한이 북극항로 개발에 뛰어들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두만강 개발은 러시아-중국이 합의했지만 문제는 북한의 동의와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가 성사되면 중국 입장에서는 동북 3성 일대의 물류 허브가 생성되는 것이고 비약적 경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러시아 또한 낙후된 연해주와 극동 일대의 인프라 개발이 성황리에 끝나게 된다. 그동안 혹독한 기후 조건과 부족한 자금 문제 때문에 20년 넘게 연해주와 극동 일대의 인프라 개발이 완료되지 못했는데 중국과 북한 때문에 이것이 완료되어 본격적인 자원 개발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연해주와 극동 경제가 유럽 러시아 경제만큼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는 북한 나진, 선봉 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나진, 선봉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 그리고 중국의 지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환동해의 새로운 물류 허브로 탄생할 수 있다. 러시아가 집중하고 있는 북극 항로의 문제도 여기에 있는데 나진, 선봉이 열리며 굳이 물류 선박이 부산에 기항하지 않아도 된다. 나선 지역에 기항하고 동남해안으로 그냥 통과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북중러 3국의 안보 관련 부분이다. 세 나라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새로이 체결할 가능성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에서 중국군이 개입할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러시아와 북한 사이에서 맺어졌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는 상호 간의 안보가 위협을 받으면 상호 간의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쿠르스크 탈환전에 북한군이 먼저 들어가 싸워주면서 이 제도가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해주었다. 북한에서 안보 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러시아군이 진주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마당에 중국과도 같은 방식의 협정을 체결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만약 북한에 위기가 생기면 북한에 중국군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이고,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더라도 북한에 막대한 양의 물자를 대놓고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에 문제가 생기면 (예를 들어 미국의 침공 등), 러시아군과 북한군이 중국에 진주하여 참전할 명분을 얻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을 주로 상대해야 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안보 시스템이 더욱 단단해지게 된다. 집단 서방과 한 판 승부를 벌이려 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중국이 있기에 물자 걱정할 필요 없고, 군사적으로, 전후 복구용으로도 북한은 그간 쿠르스크에서 해왔던 것을 본다면 러시아 입장에서 매우 신뢰가 가는 국가다. 이는 북중러 3개국의 약점을 서로 채워줄 수 있는 관계로 엮이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셋째, 북한의 국제 사회 진출을 UN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도울 수 있다는 부분이다. 어차피 UN 안보리에서 의결한 대러 제재는 무력화 된지 오래고, 북한은 SCO부터 시작해, BRICS 진출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위치에 갈 수 있다. 전날 기고했던 것처럼 푸틴 대통령이 보증을 설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협정을 맺고 쿠르스크에 군을 파견하는 등, 러시아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기에 북한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이전의 불량국가 이미지를 지우면서 국제 무대에서 도약할 가능성도 염두해볼 만하다. 더 나아가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니 낙후된 산업 시스템이 어느 정도 고쳐질 것으로 생각된다. 전에도 말했지만 북한이 러시아를 보험으로 든 것은 외교 전략에 있어 "신의 한 수"다. 달라지고 있는 북한의 변화와, 중국, 러시아까지 끼어 있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격변에 맞춰 우리도 이같은 변화에 주목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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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4
  • 중국 승전 80주년 - 국공내전에 이은 국부천대(國府遷臺)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당 사이에서 일본군 및 난징 괴뢰 정부 점령 지역에 대해 무장해제와 접수를 두고 치열한 무력투쟁과 내전의 위기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오랜 전쟁의 참상과 국민당-공산당의 양당 간에 내전이 벌어질 조짐에 불안을 느낀 중국인들은 양당 간에 평화 협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의 중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인들이 입은 피해는 엄청나다. 따라서 중일전쟁 종결 직후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참혹한 내전을 피해야 한다는 내부에서 강력한 저항괴 더불어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에 의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견해가 높아졌다. 여기에다 미국은 물론이고 소련조차도 중일전쟁 기간동안 국민당 정부를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국제적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 공산당과의 협상을 재개하도록 요구하게 된다. 당시 국민당 군은 중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중국 서남부의 변경지역으로 퇴각해 있는 상황이었고, 동북부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과 이 지역들의 배후에서 광범위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공산당 군에 비해 전략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공산당과의 협상을 도모하는 동안 공산당 군 활동을 저지시키는 한편, 국민당 군을 신속하게 전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마찬가지로 공산당 군 역시, 미국이 국민당 군을 후원하고 있고, 소련마저 내전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상황에서 국민당 군대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정치, 군사적인 우위가 확고한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당이 제안하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45일 동안 충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이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내전을 회피하고 평화적 건국을 지향하며, 정치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 협상 회의를 소집할 것 등에 합의했으며 장래 모든 당파들이 참여하는 정치 협상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당시 10월 10일에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고 하여 이를 ‘쌍십(雙十) 협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충칭 협상이 진행 중인 가운데 여전히 화북과 동북 지역에서는 공산당 군과 국민당 군의 무력충돌이 계속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 제한적인 군사적인 지원을 계속하는 한편, 공산당과의 협상에 의한 내전을 중지하는 것과 평화적, 민주적 통일 정부 수립을 독려하게 된다. 이에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1945년 11월 죠지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을 특사로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을 중재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협상에 대해 소련도 찬성하는 분위기였고, 1945년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 회담에서 중국의 내전 중지와 더불어 제3 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는 민주적 정부 수립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국내외 정세에 따라 1946년 1월 10일 미국의 마셜 장군, 국민당의 장군(張群)과 공산당의 주은래(周恩來)로 구성된 ‘군사 3인 위원회’가 상호 협의 하에 ‘국공 정전협정(停戰協定)’에 조인하였고, 이 날 한 해 전인 1945년에 합의한 바 있는 정치 협상 회의를 소집했다. 1946년 1월 10일부터 31일까지 개최된 정치 협상 회의에서 통일 정부의 수립과 국민 대회 개최, 군제(軍制) 개혁, 화평건국강령(和平建國綱領), 군사 문제안, 헌법 초안 등 ‘5대 결의’를 채택하고 가결하였다. 또한 정치 협상 회의로부터 국공 양군의 감축 문제에 대해 협상을 위임 받은 군사 3인 위원회는 1946년 2월 25일 국공 정군협정(整軍協定)에도 합의하였다. 이처럼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 양당과 여러 세력들이 참여함으로써 평화로운 정치 협상과 획기적인 감군 계획이 합의됨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내전이 중단 되는 듯한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이 파기되고 국민당 군이 공산당 군에게 밀리게 되자 국부천대(國府遷臺)를 기획하게 된다. 국부천대(國府遷臺)란 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한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이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사건을 말하게 되는데 오늘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중화민국은 '대만' 혹은 '타이완'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국 국민당은 처음에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던 사천성 등의 중국 서남부로 다시 정부를 옮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촉나라에 비유하여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 한나라와 도적떼인 역적 위나라는 양립할 수 없다)는 표현을 써오기도 했다. 물론 중화민국이 말하는 漢賊不兩立의 '漢'은 당연히 대만으로 옮겨간 중화민국 스스로를 가리키고, '賊'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칭하고 있다. 이 때 중국 국민당의 대만 섬 이전에 대해 건의한 것은 지리학자였던 장기윤(張其昀)이었다. 장기윤에 의하면, 대만은 오랫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자원이 존재하고 있으며, 공산당 세력이 미약한 데다 섬의 갖고 있는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장개석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대만은 일본이 장기간 점령한 상태라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개석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당 군은 공산당 군에게 끝도 없이 밀리고 있었고 1949년 4월 23일에 남경이 함락되었다. 그 후 국민당 정부는 대만 타이페이에 정착하기까지 8개월 동안 광저우와 충칭, 청두 등을 전전하면서 중공군과 맞섰다. 그러나 남경이 함락된 이후 국민당 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화남)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마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1949년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게 되자, 국민당은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같은 해, 12월 5일 사천성 시창(西昌)에 대본영, 총사령 본부를 남겨두고 광저우로 탈출했다. 그리고 이어 배를 타고 타이페이로 철수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패주하면서 베이징의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천점을 선발해서 가져갔다.국부천대 당시 장개석은 총통 자격이 아니라 국민당 총재 자격으로 유물을 이송시켰기 때문에 이 모든 유물은 국민당의 명의로 되어 있다. 이후 1949년 12월 27일에 청두는 함락되었고, 시창에 잔류한 국민당 군은 1950년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가다 중국 공산당에 패배하고 시창이 함락당하면서 중국 땅 전체의 적화가 완료되었다. 오늘 전승 80주년 행사로 열병식이 거행되면서 군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여기에서 중국의 최첨단 무기들이 공개되었다. 사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둥펑-17과 미군 항공모함을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잉지-21 극초음속 미사일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형 무인잠수정 AJX002, 무인전투차량, 무인공병차량, 로봇 늑대, 무인수상정 등 다양한 무인 전력들을 연이어 공개했다. 레이저 대공무기, 방공포, 마이크로파 방출기 등 다양한 대드론 장비들도 선보였다. 이 무기들이 중국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인 진먼(金門)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승전 80주년 군사 퍼레이드 열병식은 미국과 집단 서방에 보여 주며 기세를 드러낸 부분도 있지만 주변국과 중국에 대한 적대국들에 대해 경고성 메시지를 보여 준 것으로도 해석된다. 저 무기들이 갈곳이 양안 지역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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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4
  • 중국, 인도 정상이 만나서 해결될 가능성 - 영토 및 국경 분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나?
    중국과 인도의 영토 문제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나라와 인도 무굴 제국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인해 홍콩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청나라는 열강들이 더 이상 자국의 영토를 넘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영국도 필요 이상으로 청나라를 공격하면 드넓고 자원이 풍부한 중원을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 열강들과 복잡하게 대립각을 형성할 수 있으니 더 이상의 자극은 자신들에게 있어 피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의 영토였던 티베트 땅의 경우, 자원에서나 전략적인 면에서 모두 양국에게 큰 가치가 없었기에 식민지 상태로 마구 착취당했던 중원과는 달리, 서양 열강들에게서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붕괴된 기회를 이용해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청나라에서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 정부와 국경 협상을 벌이게 되었고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긋고 이를 경계로 양국이 나뉘게 된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준 이후에도 이 맥마흔 라인을 인증했고, 중국 입장에서는 이 맥마흔 라인에 대해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인도는 독립 과정에서 종교 간의 대립으로 인해 파키스탄과 전쟁 끝에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권의 파키스탄으로 분열하여 별개의 국가로 출범하게 된다.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보이게 되자, 비동맹주의를 주창하며 미국-소련 간의 냉전 체제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인도에서는 냉전으로 인해 자국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국방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일전쟁이 종전된 직후부터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국공내전에 돌입했고, 4년 동안의 내전 끝에 중공이 승리하면서 현재의 중공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공은 1950년대가 될 때까지 아직 자국 내에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인 안정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이후 중공은 6.25 전쟁에 참전하여 UN군을 공격하여 밀어내는 저력을 발휘했고 이는 국제 사회에서 중공의 영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동시에 1951년 중공은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를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1920년 대 이래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티베트의 토착 정권은 인민해방군의 침공을 받는 이후 공산당과의 17개조 합의를 통해서자치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에 합병되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지역의 대표로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 인민 정치 협상회의에 직접 출석하여 모택동과 만나는 등, 한동안은 중국과 티베트의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인도는 국내, 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양국은 불안정한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끼게 된다. 1951년 5월 중국이 티베트를 공식으로 합병하자 인도 총리 네루에게 있어 중국의 존재는 전략적인 구상이 아니라 외교적인 실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인도가 중국과 4,000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직접 마주하게 되면서 양국은 공식적으로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부터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국경 문제는 앞으로 풀어야 할 현안 중의 하나였고 이를 중공 정부가 물려 받은 셈이 된 것이다. 티베트와 인도의 국경선은 19세기 중반과 말기에 존슨 경계선(Johnson Line), 혹은 아르가드-존슨 경계선(Ardagh–Johnson Line), 1914년에 체결된 맥마흔 경계선(McMahon Line) 등이 영국에 의해 설정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를 포함한 중국 역대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동의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세력과 체결된 모든 불평등 조약을 파기한다는 선언까지 하였기에 이 문제는 중공 입장에서 조금도 양보할 일이 아니었다. 자와할랄 네루는 중국과의 분쟁 여지를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양보를 거듭했다. 1954년 4월, 인도는 중국령 티베트와 인도 사이에 무역 및 교류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동의하여 사실상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다. 같은 해 4월에 네루는 아르가드-존슨 경계선에서 후퇴한 존슨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획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선 이북에 있었던 통신 설비를 무상으로 중국 측에 양도하는 호의까지 베풀게 된다. 또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유명한 ‘평화·공존 5원칙 조약 (Panchsheel Agreement)’이 체결되면서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훈풍이 거듭되었지만 티베트라는 거대한 물리적 완충지대를 5원칙 조약이라는 심리적인 완충 지역과 맞바꾸었다며 인도 내에서 강렬한 비판이 존재했다. 이어 네루의 호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루의 초청과 권유에 따라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 회의에 주은례(Zhou Enlai: 周恩來)가 참석했고 이는 곧 중국 외교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국은 내부에서의 공산화와 6.25 전쟁 참전으로 인해 국제사회,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 엄청난 위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모두 반대하는 현상에 부딪치게 되면서 협력이 절실해진 중공은 1957년 3월에 주은례를 인도에 공식 파견하여 네루와 협정을 맺고자 했다. 당시 주은례가 방문한 인도의 모든 도시에서는 거리에 나온 인도 군중들이 열광적으로 ‘힌디 치니 바이 바이!(인도와 중국은 형제다)’라 외쳤다. 당시만 해도 인도와 중국의 우호관계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였다. 1950년에서 1958년까지 중국과의 우호를 증진하려는 인도의 노력은 대단했다. 이 기간 동안 인도는 해마다 중국이 UN의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상정했고, 6.25 전쟁 중에도 중립을 깨고 중국의 입장을 변호하였으며 대만(Taiwan)이 중국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인도의 노력에 비해 중국은 당시 네루에게 매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에게 있어 네루는 영국 식민 세력의 앞잡이였으며 중국의 지도를 받는 인도의 공산 세력에 의해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부르주아였던 것이다. 중국은 인도와의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면서도 내부에서는 네루를 포함한 인도의 지도자들을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Bourgeoisie)’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계급의 반동적인 성격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기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중국에게 있어 인도와의 관계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한 챕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공산 세력권 중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1950년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소련과 중국은 공산주의 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로써 소중관계는 악화일로에 치닫다가 1959년, 완전히 파탄나게 되면서 상호 간의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접근했다. 1960년에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대신 인도에 소련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과 가까이 하려 했던 인도는 계속적으로 냉대를 받게 되자 소련과 가까워졌고, 친소노선을 걸으며 맥마흔 조약에 따른 국경선을 확정하려는 인도와 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정부를 수립한 지 10년이 채 안 된 신생 국가였기 때문에 불안정한 국내, 외 사정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인도 양국의 직접적인 감정적인 앙금은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로옮겨가 조금씩 적대관계로 비화되었다. 1960년에는 중국에서 벌인 2년 간의 대약진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면서 내부적으로 위기에 빠졌고 외부적으로는 소중 결렬로 인해 중국에 대한 소련의 기술, 군사적 지원이 완전히 끊기게 되어 중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세력은 더욱 강해져갔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냉전이 도래되면서 중동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 세계의 역할이 부각되었으며, 중국과 인도는 제3 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반 제국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1961년 비동맹 회의 참여를 거부했는데, 중국이 노리고 있던 제 3세계의 종주국 자리를 포기하고 독자 행동을 취했다. 당시에는 비동맹 회의가 곧 제 3세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과 인도 사이에 첫 전쟁이 발생했고, 이 때부터 60년이 넘도록 국경 분쟁으로 끊임없이 충돌이 이어지게 된다. 냉전 시대가 종결된 이후, 2017년에는 대규모의 국경 분쟁이 발생한다. 이는 중국-부탄 간의 영토 분쟁이 그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부탄의 배후 국가가 인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탄 정부를 무시하고 인도와 맞상대를 하고자 했다. 인도는 처음에 자신들이 이 분쟁에 개입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부탄은 사실상 대화에서 논외가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중국과 인도의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2017년 6월부터 중국은 인도, 부탄의 접경지대인 독람(Doklam, 중국명 둥랑洞朗) 고원의 도카라(Doka La) 고개에서 도로 건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부탄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곳이었으며, 부탄 정부는 자국의 취약한 군사력으로 중국군에 맞서며 항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인도와 부탄이 이전에 맺었던 상호안전보장조약(India-Bhutan Mutual Security Treaty)을 근거로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인도는 즉시 부탄을 대리하여 중국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도카라 고개에 도로를 건설하게 되면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인도의 동북부 지역이 중국의 침공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 인도 측의 주장이자 항의의 명분이었다. 특히 도로 건설의 경우, 1962년의 중국-인도 정전협정 위반과 중국-부탄 평화조약 위반이라는 것 또한 내세웠다. 인도는 중국이 확장하려는 국경 도로가 자신들의 핵심 전략 지역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특히 도카라 고개는 인도 본토와 동북부 7개 주를 연결하는 폭 20㎞의 좁은 회랑으로 ‘닭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지역에 중국의 접근이 용이하게 되면서 동북부 시킴, 아삼 지역을 위협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인도군은 중국이 주장하는 경계를 넘어와 국경 지대의 중국군 초소 두곳을 파괴했으며, 중국 측이 주장하는 경계 내부에 50여 명의 병력이 들어와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도카라 고개 근처에는 중국군, 인도군 각각 3,000명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다. 이어 카슈미르 지역에도 중국과 인도는 국경 문제로 충돌했다. 2022년과 2024년에는 소규모 충돌이 있었으며 인도-파키스탄의 대립이 격화되자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아크사이친(Aksai Chin) 지역에는 중공 인민해방군의 경계령이 떨어져 양국 대치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중국은 2010년대만 해도 외교상으로 한계를 겪고 있었다. 동맹 내지는 혈맹이라고 할 만한 나라가 없을 뿐더러 당시에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도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인 밀월 관계를 하는 것뿐이지, 엄연하게 우방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사이였다. 이미 중국은 냉전 시기에 소중 국경 분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소련과의 관계가 별로였으며, 이후에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회담하며 극도로 가까워지며 국제 무대에서 소련을 끝까지 방해한 전적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계는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연방공화국 시기에도 마찬가지의 관계로 이어졌다. 이어 북한은 6.25 당시 혈맹이었지만 서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이가 되었고 특히 김정일은 중국을 매우 경계했을 정도였다. 이에 친중이라고 해야 할 국가는 파키스탄 정도였고 동남아시아는 반중 기치를 내걸고 있어 사실상 포위를 당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이 모든 관계가 리셋되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이 집권하고 나서 중국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면서 미국이 극도의 반러 정책을 내세우면서 중국을 압박하자 러시아와 중국은 극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BRICS를 통해 회원국들과 상호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으며 그 와중에도 매우 미지근했던 인도와 중국의 관계는 트럼프가 인도에 50% 이상의 관세로 위협하자 중국-러시아 측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의 관계에서 다시 소환된 것은 자와할랄 네루와 모택동의 우호 관계였던 1950~1958년의 시대였다. 중국-인도의 불편한 관계가 무려 70년 만에 다시 우호 관계로 복원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올해 BRICS 정상회의에서도 국경 분쟁으로 인해 서로 마주하기 꺼렸던 인도 모디 총리와 중국 시진핑은 SCO에서 다시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양국 간 무역과 투자 관계를 확대하기 위해 정치적, 전략적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측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직까지는 영토와 국경 문제 논하는 것은 시기 상조로 보여지지만 이 또한 추후 있을 회담 등에서 논의가 되어 해결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바이든은 소원했던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적극적인 우호 관계로 만들어 주었고 트럼프는 영원히 화해가 불가능해 보였던 중국과 인도를 우호적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미국의 이와 외교적 참사 및 실패는 서서히 저물어 가는 제국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징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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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9-04
  • 2025년 중국 텐진 SCO에 대한 경과와 다음 SCO 정상회의에 대한 예상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SCO를 언급한적이 없다.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은 언급해도 SCO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개인적으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러인 내가 중국의 경제포럼에 대해 레벨도 많이 낮다고 판단했었고, 심지어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보다 더 중요도가 떨어진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2025년 SCO를 보면서 이제는 SCO가 꽤 중량감이 있는 국제 기구로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SCO가 생겨난 것은 1996년 4월 26일로 생각보다 오래됐다.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5개국이 당시 정회원국이었고, 당시에는 상하이 파이브(Shanghai Fiv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 SCO가 된 것은 2001년 우즈베키스탄이 가입하먄 정회원국이 6개국으로 늘어났고, 이에 따라 상하이 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sation, SCO)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정회원국에 가입하는데 이어 우크라이나, 몰디브, 이스라엘, 이집트, 아르메니아, 네팔, 캄보디아, 시리아 등 9개국도 대화 파트너 국가에 신청하면서 SCO의 위상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SCO의 경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APEC의 대항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정회원국들 간의 정치적 이해와 입장이 상당히 다른 조직이다. 우선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국경이 인접하는 국가들이 많으며 국경이 서로 마주하는 국가들의 경우, 영토 분쟁과 같은 갈등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SCO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협력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어 201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이 기구를 통해 BRICS 국가들과 함께 대미-대서방 견제 전략을 함께하는 연계를 시작함으로써 서구 협력 기구들을 대체할 수 있는, 꽤 무게 있는 기구로 성장했다. 현재 정회원국은 10개국이지만 대화 파트너 국가는 14개국에 이른다. 초청 국가는 기존의 CIS 국가와 ASEAN 9개국, 그리고 UN 회원국들이 들어와 있으며 몽골과 아프가니스탄이 참관국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SCO는 기존의 경제 협력 기구를 탈피해 테러리즘과 분리주의, 극단주의를 3대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면서 협력을 강화하는 기구로 탈바꿈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일대의 안전 보장을 확립하는 것과 회원국들 간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APEC의 대항마 격으로 시작을 했지만 이제는 나토를 견제하는 목적으로까지 올라서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참관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중국, 러시아 뿐 아니라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의제를 가지고 상호 협력을 할 것인지를 눈여겨 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SCO는 중국의 전승절과 맞물려 텐진에서 8월 31일~9월 1일 양일간에 걸쳐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각 20여 개국 정상들과 10개 국제 기구 수장들이 참석했으며 정상회의에서는 톈진선언(天津宣言)을 채택함으로써 향후 10년 동안 발전 전략에 관한 승인과 더불어 UN 창립 80주년을 맞이하여 공동 성명이 발표되는 것 등이 진행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SCO 회원국들 간의 투자 영역은 기존에 석유와 가스, 광물 등의 산업에서 디지털 경제와 녹색 성장 등의 새로운 산업으로 병행 및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 및 투자 협력 & 협약의 체결과 더불어 다자 무역체제에 대한 지지 및 공조를 통해 회원국들 간의 경제 협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SCO 회원국 정상들은 정식 회원국인 이란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핵 시설을 공격한 것과 더불어 영국, 독일, 프랑스의 UN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 등을 적극적으로 규탄했다. SCO 국가들은 회원국들의 핵확산금지조약인 NPT의 조항 준수하는 것과 화학무기 금지협약(CWC)에 대해 국제 사회로부터 이행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군사 분야에서도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SCO 회원국들은 톈진 선언을 통해 지난 6월 이란을 공습한 이스라엘과 미국을 강력히 규탄했다. SCO는 이번 텐진 선언을 통해 이란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다. 회원국들은 이란에 대한 제재를 해제한 2015년에 결의했던 UN 안보리 결의안 2231호의 중요성을 재확인한다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UN 안보리 결의안은 구속력이 있고, 국제적인 결의안의 규정에 따라 전면적으로 이행되기를 촉구한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 발의된 UN 안보리 결의안 2231호는 이란과 서방이 체결했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을 뒷받침 하기 위해 발호된 것으로, 이란에 대한 제재를 재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외교적, 국제법적으로 명시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난 28일, 영국과 독일, 프랑스는 이란의 핵 개발을 문제 삼아 이란에 대한 제재를 재발동하려는 절차에 착수했다. 이는 이들 모두 UN 상임이사국으로 UN을 이끌고 있는 만큼 국제적 약속을 뒤엎고 이란을 다시 제재하려는 행위를 SCO 회원국들이 규탄한 것이다. 더불어 회원국들은 NPT 조항을 철저히 준수하고 CWC의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군사 분야에서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을 염두해 둔 것으로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다. 따라서 테러 대응에 있어 여러 이중적인 형태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IS, 쿠르드, 알 카에다 등의 테러 조직들을 강력 대응한다면서 이중적으로 이들을 우회 지원한 미국을 돌려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울러 회원국들은 오늘 1일 오전 시진핑이 SCO 정상회의 연설을 통해 SCO 개발은행 설립을 건의했고 회원국들은 이에 합의했다. 그리고 SCO 조직이 전반적으로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조직을 개편하여 참관국과 대화 파트너의 지위를 통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현재는 "텐진 선언"에 대한 전체 선언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해당 선언문에 서명한 회원국 정상들의 명단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는 차차 조만간에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어 시진핑은 이집트의 모스타파 마드불리(Mostafa Madbouly) 총리와 회담을 열었고 중국과 이집트는 서로 굳게 지지하는 좋은 형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이집트의 마드불리 총리는 중국을 이집트의 진정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평가했으며, 양국 간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이집트에서 중국의 일대일로(BRI)와 이집트의 ‘비전 2030(Vision 2030)’ 간의 연계 협력 수에즈 경제 무역 협력구 인프라에 대한 공동 개발 및 중국 기업의 지원 등을 강조하며 그린 에너지 협력까지 제안했다. 또한 시진핑은 캄보디아의 훈 마넷(Hun Manet) 총리와의 회담에서 중국과 캄보디아의 강력한 우의를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양국 간의 우정은 1960년대 이후, 60년이 넘는 오래된 시간의 시험을 이겨냈고, 매우 굳건한 우정을 지녔으며 이는 양국 국민이 공유하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중국-캄보디아의 공동 프로젝트, 산업 및 기술 회랑(ITC)과 어업과 농산물 관련 회랑(FRC, Fish and Rice Corridor)에 대한 더 많은 협력을 강조했다. 또한 미얀마의 대통령 권한 대행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과의 회담에서는 양국 간 시민들 간의 형제 같은 우의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으며 늘 새로움을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앞으로의 협력 또한 약속했다. 이어 네팔의 케이피 샤르마 올리(KP Sharma Oli)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높이 평가했으며 중국과 네팔은 수 세대에 걸쳐 티베트의 험난한 고원처럼 여러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이웃으로써 지난 70여 년 동안 선린 우호를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의 우호를 약속했다. 계속하여 카자흐스탄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Kassym-Jomart Tokayev) 대통령과의 회담이 열렸다. 시진핑은 발전 전략의 긴밀한 연계를 강조하고 각종 가스, 석유 등의 에너지 협력과 카자흐스탄 내, 시골 도시를 인프라를 개선해 줄 수 있게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기타 여러 경제 정책 분야에서 더 깊은 협력을 촉구했다. 지난 5년동안 중국과 SCO 회원국 간의 교역은 급증하여, 2024년에는 사상 최고치인 5,124억 달러를 기록했다. SCO 회의와 시진핑과 각 국간의 회담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는 SCO 회원국들 간 연결성 강화와 고품질적인 발전을 촉진하는 것에 있어 매우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만큼 막대한 빚더미와 더불어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가 계속하여 중국에 잠식되는 형태를 띄고 있는 것도 함께 확인했다. 이 정도면 우리 한국도 참관국, 혹은 대화 파트너 정도로 들어와서 그 동향을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전에 비해 SCO가 꽤 중량감도 있어졌고, 국제 협력 기구로써 다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 위상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는 국제 기구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필자가 중국, 인도, 러시아의 정상이 만나 해결될 가능성에 대한 부분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특히 인도-중국의 국경 분쟁은 수십년 동안 해묵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음 SCO를 예상해보자면 아마 북한 문제가 화두가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의 80주년 전승절에 김정은이 베이징으로 오고, 시진핑, 푸틴 대통령과의 3자 간 만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 아마도 SCO 가입 여부에 대해 김정은에게 제안할 가능성이 높고, 다음 SCO 정상회의에는 김정은이 출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김정은이 SCO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북한의 위상 또한 올라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기간 국제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던 북한이 SCO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고, 이에 북한은 BRICS 정상회의에 출연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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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4
  • 우 푸틴과 좌 김정은, 서서히 드러나는 중국의 속내는 무엇인가?
    중국은 9월 3일 전승절을 맞이해서 관련국들을 초청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국가는 러시아와 북한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면서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상하이 협력 기구 정상회의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푸틴의 외교 행보는 마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장이라도 낸 듯한 모습으로 활발하다. 상하이 협력 기구 정상회의는 현재 중국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인도, 파키스탄, 이란이 회원국이고, 옵서버 국가로 몽골과 아프가니스탄이 있으며, 대화 파트너 국가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튀르키예, 스리랑카, 캄보디아, 미얀마, 네팔 등이 있다. 상하이 협력 기구 정상회의는 처음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중앙아시아 4개국으로 출발했지만, 최근 회원국 수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 정상회의가 우리에게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아마도 여기에 가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 정상회의 바로 직후에 열리는 중국의 전승절에 초청됨으로써 다자외교 데뷔전을 치르고 난 이후에 가입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이 그동안의 고립을 벗어나서 국제관계에 전면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상당히 변수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라,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과 나란히 선다는 것은 반미연대의 삼각 연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한미일의 삼각동맹에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특히 이번 톈안먼 망루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주석의 좌측에, 푸틴 대통령이 우측에 나란히 선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좌석 배치를 러시아 측에서 중국보다 먼저 언급한 것은 한편으로 다소 소원했던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복원되었다는 신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초청국 정상들을 호명할 때 푸틴이 첫 번째로, 김정은이 두 번째로 호명된 것은 중국이 북한의 위상을 높여준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북한의 군사력이 중국으로서도 만만치 않음을 인지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장면에서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의 최근 밀착에 대한 경계심도 엿보인다. 중국은 여전히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면서도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을 보고만 있기보다 이번 상하이 협력 기구 정상회의 및 중국의 전승절을 통해 반서방 연대의 중심국임을 드러내고 싶을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이렇게 한 까닭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에 관한 지지부진한 협상, 관세 및 무역 협정에서 미국 우선주의에 따른 동맹국들과의 마찰 등으로 인한 서방의 분열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서로 분열하면, 중국은 반서방 연대로 뭉치기 마련인데, 이때 다자외교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다자외교보다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을 고립주의로 귀결시킬 것이고, 유럽 국가들은 유럽 연합 회원국 사이에 분열될 수밖에 없으며 미국과도 갈등이 불가피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진핑이 이번 전승절에 김정은을 초청했고 김정은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김정은은 다자외교 데뷔전을 치를 것이고, 시진핑과 정상회담도 할 예정이다. 푸틴도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지만, 여기에서 과연 북한-중국-러시아 정상의 3자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인지가 우리의 관심사다. 실제로 3자 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공동 성명이 발표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 구도가 신냉전 구도로 보이게 될 것이다. 다자외교 방식에서 그와 같은 신냉전 구도라는 설정은 다소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다자외교에 시동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주로 양자 회담을 선호해 왔지만, 전번 두 차례 북미회담에서 분명한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북한이 노리는 것은 ‘핵보유국’ 지위 획득도 있지만, 미국의 경제적 제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필요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복원이 현실적이라는 계산이 들어 있을 것이다.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파병을 대가를 챙기고,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는다면, 현실적으로 지금이 적기라고 보았을 것이다. 모디 인도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서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한 것도 흥미롭다. 인도는 중국과 경쟁으로 그동안 미국에 협조적이었지만, 미국과 관세 문제로 곤경에 처하자,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이를 보면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셈이다. 중국은 러시아와도 인도와도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우군들을 확보하는 반면, 미국은 우방국들의 지지를 잃고 있다. 북한은 이 틈새에서 러시아와 밀착을 통해 보폭을 확장하고 있으며 중국과도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분명히 중요한 변화를 예고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데, 이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국가가 한국과 일본이다. 한국은 이재명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라 부득이하게 이번 중국의 초청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활발한 움직임에 한국도 어느 정도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APEC 정상회의일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전승절이 일본의 패전일과도 같을 것이기 때문에 참석의 명분도 없어서 그저 관망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이번 중국방문은 하여튼 북중러의 반서방 연대라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북중러의 관계는 연대의 틀이 강철연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북한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도 이제 숨 고르기를 한번 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실용적 관점에 근거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다자외교의 틀에서는 북한을 어떻게든 서로 끌어당기려고 할 것이다. 중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 제재 조치를 중국에 입국한 북한 노동자들의 추방으로 북한의 외화벌이를 저지하는 방식으로 취했다. 북한은 중국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러시아로 방향을 선회했고 결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이라는 도박과 같은 승부수를 걸었다. 그때문에 북한은 러시아 파병의 대가를 상당히 챙겼다. 그런데 이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우세로 가는 상황에서 종전이 된다면, 북한은 친러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도 복원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현재 북한은 대중무역에서 한편으로 중국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경제적 지원 없이 현실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토대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북한에 일종의 딜레마라 하겠는데, 북한은 이를 돌파할 방법은 다자외교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남북문제에 관해 한국이 과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물론 남북문제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든 변수가 많아 일관되게 진행하기는 어렵지만, 어렵더라도 긴장보다는 평화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뒷배로 삼으면 삼을수록 한국이 남북문제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과 선택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북한보다 한국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남북 관계가 좋지 않게 되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그동안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남북문제에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길에 스스로 걸림돌을 만들었다. 이제는 낡고 공허한 이념의 잣대로 남북 관계를 다루는 것은 실로 아무런 국익도 없는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필자는 이번 김정은의 방중이 한반도 정세에 어느 정도 변화가 몰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한국의 외교력이 또다른 실험대가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렇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남북 모두에게 생존의 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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