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Nova Topos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
- 칼럼
- Nova Topos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 칼럼
- Nova Topos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
- 칼럼
- Nova Topos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 칼럼
- Nova Topos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
- 칼럼
- Nova Topos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
시진핑의 말레이시아 방문의 의미와 미국이 해야할 대응
- 최근 시진핑이 말레이시아를 2박 3일 방문하고 돌아갔다. 시진핑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와 회담하고 양국 협력 강화 방안과 국제 현안을 논의했는데 이는 명목상이고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세계 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와 연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게다가 올해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국인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전체가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전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핑의 방말은 아세안 국가들 자체가 미국의 관세 부과에 또 다른 해방구가 있음을 일부러 미국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안와르 총리는 지난 16일에 일본과 보복 관세 문제를 협의하고 어제 17일에는 태국 방콕을 방문하여 패통탄 총리를 만나국경 문제를 협의하면서 태국에게 부과된 미국 관세에 대해서도 공동 대응을 모색했다. 태국 또한 미국에게 36%의 관세율을 부과받았기에 미국에 협상단을 파견한 반면,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른 아세안 국가 정상들과 만나며 바쁘게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이어 안와르 총리는 방콕의 한 호텔에서 미얀마 군정 수장아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과 비공개로 회담했다. 미국발 관세 폭탄은 동남아시아 각 국의 입장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고 이에 따라 각국이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무역활로를 모색 중에 있다. 미국하고 관세 협상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새로운 무역루트를 찾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파고 들어온 것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자신의 앞마당인 동남아시아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인도-태평양을 통해 아프리카와 수에즈, 중동 일대와 연결되어 있는 동남아시아는 미국으로 볼 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대륙임은 확실하다. 중국 입장에서도 기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분쇄하고 인도양으로 일대일로를 통한 국제지역적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을 해결하려면 동남아시아에 대한 완전한 중국화는 필수적인 문제다. 미국과 중국 양국의 각종 이익들이 충돌하는 대륙 또한 동남아시아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 또한 석유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들이 남방인 동남아시아를 통과하여 들어오기에 동남아시아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수입 및 수출 문제 또한 동남아시아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우리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대륙일 수밖에 없다.본래 말레이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일단 경제적으로 상당히 교류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자체의 무역으로는 중국과의 교류가 월등한 입장이다. 중국과 말레이시아는 지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경제적 유기성과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인해 상호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는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기도 하고 특히 양국의 경제적 유기성은 매우 깊다.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최대 수출 시장 중 하나이며, 말레이시아는 중국의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다. 양국 간의 무역 관계는 전자제품, 원자재,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며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보자면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전자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호 의존성은 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중국은 매우 밀접한 편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오래 전부터 화교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가 영국에서부터 독립했을 당시에는 싱가포르와 함께 말레이 연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후에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다수의 화교가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사실 말레이시아의 경우 화교 문화가 발달되어 있기에 주민 대다수 중 절반에 가까운 규모가 중국계 인사들이 많다. 그 수효는 인접 국가인 싱가포르와 비슷할 정도다. 그러나 중화권이 무조건 같은 정책을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화교라고 하더라도 대륙 중국에 무조건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대만을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대륙 중국보다는 대만을 더 우선시 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과 말레이시아 두 나라 정부의 인증을 받은 대학교가 최근에 세워지는 등 두 나라의 관계 또한 많이 나쁜 편도 아닌 거의 그저 그런 관계였다. 특히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Belt and Road Initiative, BRI)은 중국이 2013년에 시작한 글로벌 개발 전략 때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현대판 실크로드를 구축하기 위한 인프라 및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인데 그 중요한 축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와 말라카 해협이다. 이 정책은 도로와 해상 실크로드를 포함해 전 세계 여러 국가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포함하고 있으며 본래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민 나라도 말레이시아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중화권의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대일로 파트너 국가들의 인프라 발전을 지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에 대한 댓가를 받아 상호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중국의 동남아시아 일대일로 정책의 최초 파트너 국가이자 중국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중국의 다양한 투자를 받았다. 즉, 중국의 투자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성장과 중국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 이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말레이시아와 중국 간의 무역 및 투자 관계는 몇 년 동안 깊게 이어져 온 것이 현실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후 양국 간의 무역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2016년 이후로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가장 큰 투자국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인프라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협력은 양국 간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상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교류들이 진척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진핑은 12년 만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에서 시진핑 주석은 전략적 자주성을 유지하고 고위급 인사들의 협력 강화하며 고품질 물품들을 개발하는 기술 협력을 확대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리고 세대 간의 우호를 계승하며 문명 교류 심화 등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는 굳이 시진핑이 오지 않고 왕이 외교부장 정도급의 인사만이 와서 해결해도 되는 문제다. 정작 시진핑이 방문해서 해결할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이는 미국의 관세 부과에 따른 중화권 국가들의 공동 대응 문제에 대한 협의다. 이전에 베트남은 미국과의 공동 대응 문제에 대해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말레이시아는 베트남과 달리 중국과 함께 공동 대응을 약속했다. 말레이시아는 본래 미국과 중국 간의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는 국가였다. 중국과 112억 달러 규모의 철도 사업을 포함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진행하는 한편 미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군사 교류 및 합동 훈련 등을 병행해왔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 부과된 24%의 관세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에 부과한 관세의 경우, 중국 기업의 "라벨갈이" 관세 우회 수출 전략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말레이시아는 중국 기업이 속칭 "라벨갈이" 수출을 할 수 있는 그런 개발도상국 같은 국가가 아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더불어 동남아시아에서 나름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이자 최소 중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인도네시아 및 싱가포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말레카 해협의 통제권도 인도네시아와 양분하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 일대와 미 대륙 서부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 및 원자재들도 말레카 해협을 통과해서 이동한다. 말레이시아에 부과한 높은 관세는 미국 서부 지역의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가 보복으로 말레카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배에 100% 이상의 관세를 때려버리면 이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럼프의 관세 전쟁 국면에서 미국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콸라룸푸르 경제계 쪽과 콸라룸푸르 말레이시아 국립대학 국제전략과 교수들도 “미국이 시작한 관세 전쟁은 바라던 동맹을 얻지 못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면서 “오랜 시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균형 외교를 하면서 위험 헤지 전략을 추구해 온 말레이시아가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부과된 관세를 15% 정도 낮추고 말라카 해협 주변국들에게 인심을 얻어 미국의 무역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중국에 협력하는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 입장에서도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미국 수출입과 직결되는 무역 경제에 있어서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와 적극 협상으로 임하며 신중해야 한다. 말레이시아 이브라힘 총링와 시진핑의 공동 발표와 둘의 협력은 미국과 한국, 일본 모두에게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
- 칼럼
- Nova Topos
-
시진핑의 말레이시아 방문의 의미와 미국이 해야할 대응
-
-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독재 행위에 대한 전범 재판과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
- 크메르 루주는 1951년에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로써 1980년대에 대한민국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어 표기이며 현지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 Khmêr Krâhâm)이라 불리는데 두 명칭 모두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갖고 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는 국가를 세워 지배하였으나 국가를 지배하면서 비인간적인 수뇌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행한 것에 이어 나라를 초토화시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인들에게 이어지는 막대한 심리적이 고통과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매우 극단적이었던 데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다. 이들을 두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골 성향의 무리들로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히려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 미국의 헨리 키신저 방식의 정치 현실주의 외교 정책을 비판할 때, 크메르 루주의 잘못된 부분들을 사례로 언급하기도 한다. 크메르 루주의 단체명은 원래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 공산당이나 공산당 지지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 호칭이었다. 이들은 북베트남의 지원으로 탄생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 세력을 확대하여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사실 붉은 크메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크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군은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가했으며 친미 우익 세력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군은 캄보디아에 베트콩들이 다수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23만 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캄보디아는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단교하였고 1966년에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내 기지를 설치하고 시아누크빌로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친 북베트남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된다. 물론 베트콩 게릴라들은 보급이나 기습 용도로 구찌 땅굴을 이용했는데 이 땅굴은 베트남은 물론 인접한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이 베트콩의 땅굴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하였고, 오히려 그 폭격에 죽은 민간인만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의회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 성장이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늘어나 이념 대립도 심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 우익 쿠데타가 발생해 론 놀에 의한 친미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론 놀 정권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모른척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무능했으며 특히 당시 군부 또한 학살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캄보디아 내에서 반미 정서가 팽배해지면 오히려 불리하게 되었다. 결국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와 동맹을 맺으며 지지 기반을 급속히 늘릴 수 있었고 결국 1975년에 론 놀 정권을 붕괴시키고 1975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시아누크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각종 이상한 정책으로 인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러한 반발을 킬링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로 제압했다. 이후 베트남에게 함락당한 옛 영토들을 회복하겠다며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벌이며 충돌하다가 베트남군과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 동맹군의 공격으로 인해 정권이 붕괴하고 말았다. 1979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베트남군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었지만 폴 포트와 키우 삼판(Khieu Samphan) 등이 권력을 잃고 몰락한 크메르 루주 세력은 국제 사회와 서방 세계로부터 합법적인 정권의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건국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과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각종 테러를 벌이며 전쟁을 이어갔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옛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권역을 베트남이 지배하려는 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더 나아가 태국까지 병합하여 베트남 제국을 건설하려는 베트남 팽창주의의 야욕으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된 태국은 물론 베트남에게 원한이 있는 중국과 미국이 모두 반발하였으며 싱가포르, 호주 등 공산주의 확산에 경계심을 세우고 있던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까지 가세하였다.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은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였고 크메르 루주의 폭정들을 인지하고 있던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아닌 제3의 세력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ASEAN은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당연히 이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1981년에 ASEAN은 크메르 루주 무장 해제 요구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여 망명 중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데려와 국가 주석으로 옹립하고 민족주의자인 손 산을 수상으로, 크메르 루주의 키우 삼판을 외교부장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연합 정부가 1982년 6월 22일에 수립되어 반 베트남의 기치 아래 모인 미국, 중국, 태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반면 소련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하며 매년 무려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지원을 해 주었는데 이는 미국이 태국에 제공하는 연간 3천만 달러의 지원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들과 MiG-23을 비롯한 전투기와 해군 함정,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주둔 비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이웃 국가인 라오스는 원칙적으로 이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는데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쑤파누봉 정부가 선택한 일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쑤파누봉과 까이쏜 폼위한(Kaysone Phomvihane)과 같은 라오스의 집권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의 고위층 인사들이 보기에도 크메르 루주가 언급하는 주장들은 도저히 공산주의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오스는 공산 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내전을 치르며 정권을 장악한 캄보디아와 같이 내전에서 옛 정권이 패망하고 공산당 반정 게릴라 세력인 파테트라오, 현 라오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있긴 했지만 왕정에서 공산주의 정권으로의 이양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된 사례였고 거기에 라오스는 왕당파, 공화주의 우파, 공산주의 좌파 등 주요 세력의 수장 모두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들인 것을 넘어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 관계였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형제라고 숙청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라오스에서는 왕자 출신의 좌파 지도자이자 집권 여당인 파테트 라오의 최고 수장이던 쑤파누봉이 1975년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 초대 국가 주석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도 다른 정파를 주도하던 이복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나 사형 없이 온건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로 인해 라오스 국민들 사이에는 킬링필드 등과 같은 잔혹한 대학살을 벌이며 공산화가 이루어지던 당시 캄보디아의 모습을 상당히 무시하거나 살인과 보복에 미친 정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베트남의 철수 이후 캄보디아 왕국이 창설되었을 때 손 산의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시아누크 전 국왕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과 같이 참여하여 새로운 정권 구성을 논의했고 1991년 UN 중재로 인해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평화 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대부분 캄보디아에 귀순하고 1999년 이들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21세기에 들어 UN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 전범재판소가 설립되고 근 30년 만에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때는 크메르 루주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사망한 이후였다. 물론 단순히 크메르 루주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잔혹한 처벌을 벌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연좌제가 배제되고 일반 가담자가 아닌 대형 범죄에 책임이 있는 고위 지도자 위주로 기소가 이루어졌다. 사실 크메르 루주에 속했다가 회개한 이들은 많다. 크메르 루주가 지배할 때 살아남기 위해 크메르 루주에 가입하여 학살에 앞장서거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를 받은 뒤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도 많았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 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이 씻겨준 자의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과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 재판이 이루어진 것은 주된 학살이 이루어졌던 S-21 교도소 소장이며 1급 고문자였던 깡 겍 이우(Kaing Guek eav 또는 lew. 1942~2020)로 일명 둑 / 두치(Duch) 동지였다.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는 17,000명이지만 정황 증거와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의 집권 시절 교도소 소장이 직접적으로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했다고 한다. 정신 무장이란 이름으로 대변을 먹게 하거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리는 등 아주 충격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깡 껙 이우 소장은 2020년 9월 2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익명의 제보자에 의하면 그는 수년 동안 폐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깡 껙 이우는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인해 크메르 루주 정부가 붕괴되자 신분을 숨기고 도주하여 한적한 곳에서 숨어 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 받아 아내가 죽게 되었으며 또 다시 도주했다.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하다가 그를 알아 본 현직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형사는 당시 두치에게 잡혀 고문 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악마가 웃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잊혀 지지도 않는다고 치를 떨며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1999년에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 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재판 당시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시켰다. 지난 10년간 회개했다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모습을 취하다가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이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를 원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는 지에 대해 교회들을 원망하는 언사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더불어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이는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먼저 처벌받아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과 관련한 자료인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기사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현장을 보던 두치의 죄과를 모른 상태에서 그를 목사로 추천하던 인물인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Lang Tuyau Fernandez) 목사는 한숨을 쉬었다. 깡 겍 이우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 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를 용서했을지 모를 것 이지만 깡 겍 이우 홀로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깡 겍 이우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많은 고문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그 형사도 어머니가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한다고 했지만 이러한 것과 대조적인 두치의 저와 같은 발언을 보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이와 관련한 서적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프랑스 언론인 티에르 크루벨리에(Tières Crubellier)가 2012년에 저술한 <자백의 대가(La confession)>가 있는데 이는 다소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 서적에서 프랑스였으면 다르게 처리했을 것이라는 형식의 내용이라든지,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후진국 캄보디아에 대해 대단한 인종차별적인 서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재판에 대해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 전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겸 인민 대표 회의 상설 회의 의장, 이엥 사리 전 외교부장, 키우 삼판 전 국가 상임위원회 주석, 이엥 티릿(Ieng Thirith) 전 사회 문제 부장 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킬링필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키우 삼판은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였으며 그는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법부 측이 자신을 공정하게 재판할 능력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민주 캄푸치아의 정책은 키우 삼판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혐의는 매우 농후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을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사회 혁명을 이룩하려면 나라 전체를 교육, 산업, 도시, 화폐가 없는 완전한 농업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킬링필드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정부 또한 이번 재판이 마지막 전범 재판이라는 태도로 매우 비협조적인 상태로 나왔으며 2022년이 되어서야 재판이 종결되었다. 실제로 재판에 회부된 전범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70~80세를 넘은 고령이었던 데다 이엥 사리처럼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노환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이엥 티릿처럼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 누온 체아와 깡 겍 이우는 이미 옥사했으며 2022년 9월 22일에 종신형이 확정된 키우 삼판 정도만이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 중에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훈 센이 장기 독재로 들어서며 2023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면서 아들 훈 마넷(Hun Manet)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독재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많고 캄보디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대우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에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시간이 지나며 세대가 바뀌어 감에 따라 그와 같은 여론은 줄어들고 있다.
-
- 칼럼
- Nova Topos
-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독재 행위에 대한 전범 재판과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
-
-
시진핑의 베트남 방문,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시진핑이 미국과 관세 전쟁에 나선 이후, 베트남을 필두로 동남아시아 3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순방에 나섰다. 나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다. 1. 미국과 관세 전쟁에서 마음이 급한 시진핑 사상 유래없는 미국과 중국 간의 관세 전쟁이 개시됨에 따라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할 부분은 자신들의 앞마당을 단속하는 일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앞 마당은 동남아시아이고, 미국의 앞마당은 중남미와 라틴아메리카다. 시진핑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가장 부담되는 동남아시아 국가는 베트남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간의 민족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정치 외교적, 경제적으로 상호 교류를 꾸준히 지속해왔다. 중국이 동북아시아 문제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또한 베트남이 존재하고 있어서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않으며 미국과 일본, 한국과도 교류를 강화하면서 중국을 견제했고 미국이 인도-태평양 일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경계해 중국과도 어느 정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태국과 더불어 중립 외교, 흔히 대나무 외교라 말하는 균형 외교를 이끌어 왔는데 이러한 외교 방침이 베트남의 주권을 스스로 보호하고 서방과 중국, 모두의 기업들을 유치해 베트남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끌어왔다. 한편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하다. 베트남에 떨어진 46%의 관세율 때문에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 협상진들이 미국에 급파되어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의 협상이 트럼프와 제대로 된 타결을 하게 된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중국의 배후에서 경제적인 부분으로 미국과 함께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현재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 미국과 관세에서 빠른 타결을 볼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이 유력하다. 그런 측면에서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미국을 함께 견제할 수 있는 우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통 이런 정도면 왕이 외교 부장급 인사를 보내는 것이 중국의 관례였는데 시진핑이 직접 등판하여 나섰다는 것은 사안이 몹시 중대하고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미국의 대중국 관세율 인상을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한게 아닌 진심 위협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어 베트남의 서열 1~4위를 차례로 만났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시진핑은 서열 1위인 또 람 총서기를 만나는 것에 그쳤다면 그저 그런 상황이 될 수 있었던 부분인데 2~4위 서열의 지도부까지 만났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다. 2. 전례없는 국빈방문, 베트남에 공들이는 시진핑 시진핑은 이번에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베트남은 오랜 동지와 같은 형제같은 나라(Việt Nam là đất nước như một người đồng chí, người anh em lâu năm)"라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시진핑은 작년에도 또 람 서기장을 베이징에서 만났어도 이런 얘기를 한적이 없다. 그리고 시진핑은 또 람이 집권하기 전인 6년 전에 하노이를 방문하여 당시 총서기장인 응우옌 푸쫑과 회담을 한 바 있다. 이 때도 시진핑은 위의 상술한 내용을 언급한 적 없다. 더불어 올해는 베트남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7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만 시진핑이 방문해서 축하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방베 하고서는 뜬금없이 "포괄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Comprehensive Strategic Cooperation Partnership)"를 강화하자고 했다. 현재 남중국해에서 파라셀 군도를 두고 중국과 영유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 "포괄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명목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략적 수준의 베-중 운명공동체 가속 구축에 관한 공동성명(Tuyên bố chung về việc đẩy nhanh việc thành lập cộng đồng chung vận mệnh Việt Nam - Trung Quốc cấp chiến lược)"을 발표했다 한다. 베트남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로 반드시 선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특히 중국의 대베트남에 대한 역사공정, 그리고 남중국해 파라셀 군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 중국어선의 베트남 영해에서 불법 조업 등이다. 여기에서 중국과 운명공동체라는 부분은 베트남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묻어두고 미국과 맞설 운명공동체로써 함께 가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중국을 항상 경계하고 이들의 진입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호치민의 뜻과 이는 상충되는 부분인데 이를 무시하는 것인지, 등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뜬금없이 경제 협력 확대에 대해 의논했다. 더불어 양국 정부의 숙원 사업인 중국-베트남 고속 철도 사업 중 라오까이-하노이-하이퐁을 연결하는 철도 프로젝트의 협력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및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협력을 논의했다 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왕이 외교부장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굳이 시진핑이 오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이는 아닌 척 해도 미국의 관세 인상에 대한 불편한 심기와 더불어 이를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리고 시진핑은 남중국해 지역의 공동 개발을 조속히 시작하며, 남중국해 행동준칙(COC) 체결을 앞당겨야 한다고 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싸움의 정점인 중국, 시진핑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남중국해 지역에 대해 중국 단독이 아닌 공동 개발을 하자는 것도 그 저의가 매우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또 람 총서기 중국과의 해상 분쟁을 적절히 처리하고 해상 안정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다며 다소 두루뭉술하게 얘기했다. 이는 남중국해 문제만큼은 중국을 믿지 않는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라 해석된다. 아직 또 람을 비롯한 베트남 정부는 시진핑이 내세운 전략적 결의의 강화와 더불어 열강의 일방적 괴롭힘에 공동으로 반대하자는 것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미국에 보낸 특사가 어떤 협상을 하고 돌아오느냐에 따라 시진핑의 제안을 다소 유보한 것으로 보여 진다. 트럼프와 46%의 관세율을 깎으며 어떤 협상을 할 수 있을지, 과연 시진핑의 제안을 받아들일 지는 두고 봐야 한다. 3. 시진핑의 또 다른 행선지의 목적은? 오늘 베트남을 떠난 시진핑은 술탄 이브라힘 국왕의 초청으로 12년 만에 말레이시아를 국빈 방문했다. 마침 말레이시아는 올해 아세안 회의 의장국이다. 회의 의장국은 발언들을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게다가 다음 달 5월에 콸라룸푸르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린다. 아마 동남아시아 각국에 부과된 관세 문제가 회의의 쟁점이 될 것이다. 시진핑은 의장국인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공동 대응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와 더불어 말라카 해협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인도-태평양-동, 남중국해의 물류 70%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말라카 해협은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말레이시아를 설득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미 상선들에 대한 관세율을 높게 책정할 것읗 제안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더불어 말라카는 각국의 영해들이 있는 해협으로 무해통항권이 허용되는 해협이 아니다.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있는 중국이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지역의 해협들은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민감한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할 캄보디아의 경우, 인도차이나 지역 일대일로의 마지막 축을 이룰 국가다. 게다가 막대한 중국 자본을 쏟아 부으며 거의 중국의 경제력이 잠식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남아시아에서 일대일로의 끝 지역은 미얀마와 캄보디아, 두 곳인데 캄보디아의 경우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혹시나 모를 베트남에 대한 지정학적 포위 및 고립을 완성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고, 말라카와 타이만을 연결하여 중국의 내해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항구가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에 미국으로 들어가는 중국 제품의 라벨갈이 역할을 오랫동안 하여 이번에 미국의 관세를 크게 얻어 맞았는데 미국과 협상할 수 있는 매개가 전무하다시피한 캄보디아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진핑의 동남아시아 순방은 관세 전쟁에 앞서 앞마당 단속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해 보기 위해 직접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
- 칼럼
- Nova Topos
-
시진핑의 베트남 방문, 어떻게 보아야 할까?
-
-
몽골의 반중감정이 최악인 역사적인 이유
- 몽골 전체를 정복한 청나라는 고비 사막 이남의 내몽골과 이북의 외몽골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이는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강력한 유목민족이었던 몽골 부족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들이 서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월계금지(越界禁止)를 실시하여 몽골족들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족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소규모 부족단위, 씨족단위로 분리된 상태로 청나라의 변방으로써 가장 낙후되고 미개한 사회로 남게 되었다. 대다수 몽골족들은 오로지 목축업과 원시적인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했고 무거운 공납과 부역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세기 말 외몽골을 방문했던 외국인 여행자들은 과중한 공납과 막대한 빚으로 인해 외몽골 민족 전체가 절멸 지경에 내몰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래 청나라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중국은 열강들에게 침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러시아가 북만주와 외몽골을 잠식해 나가자 1895년 외몽골 귀족들은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이는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열강들의 상황을 모르는 유목민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견제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외몽골의 요청을 수락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라며 의례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1911년 8월 외몽골의 라마 불교의 수장인 제8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Bogd Jibzundamba Khutugtu)을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주도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이흐 후레(Ikh Khuree, 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자력으로 당장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다시 대표단을 러시아로 보내어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은 후, 외몽골의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와 극동에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당장 외몽골이 독립하기보다는 명목상 청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자치국이 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붕괴되자 외몽골의 독립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1년 11월 30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이흐 후레를 니스렐 후레(Niislel Khuree)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외몽골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를 몽골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여 신정일치(神政治制)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의 새로운 국가 원수인 복드 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유사한 몽골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내몽골에서도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부족 단위들 중에서 49개 호쇼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칭기즈칸 이래 600년 만에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몽골로 군대를 보내어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외몽골은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차하르 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1912년 4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중국에서의 세력 분할에 대해 합의를 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장악했고 일본은 내몽골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신생 중국은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음을 고수하면서 내몽골을 러허 성과 차하르 성, 쑤이위안 성 등으로 분리시켰다. 수도인 니스렐 후레에서 열린 몽골과 러시아 양측 대표단의 회담에서 몽골 대표단은 자신들의 조국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얻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면서 거부하게 된다. 또한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 국가에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결국 몽골 정부는 300만 루블의 원조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외몽골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위안스카이 정부와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는 외몽골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체결된 러시아-중국-몽골 삼국 조약에서 몽골은 러시아의 압박으로 인해 이와 같은 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대신 몽골은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뒤를 승계한 돤치루이(段棋瑞) 북양 정부는 몽골의 후견국가인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몰락하여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게 되자 캬흐타 조약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1919년 11월 자신의 측근인 쉬수정(徐樹淨)을 서북주비사(西北籌備使)로 임명하고 600명의 군대를 니스렐 후레로 파견하였다. 당시 복잡한 중국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돤치루이는 몽골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여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였으며 강한 군벌인 쉬수정은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칸과 각료들을 모두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칸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복드 칸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약 2,000여 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 해제된 상황에서 완전히 해산 당했다. 1919년 11월 22일 외몽골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이 때 쉬수정은 화려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 당했고 복드 칸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최악의 굴욕이었지만 그로 인해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西北王)이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7월 북경을 두고 북양 군벌 간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짧은 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휘파 군대는 우페이푸(吳佩孚)가 지휘하는 즈리(直隸)파 군대와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의 협공을 받아 4일 만에 완패하고 말았다. 몰락한 돤치루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주했고 쉬수쟁 역시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쉬수쟁은 이후 손문과 동맹을 맺고 재기를 노렸지만 5년 뒤인 1925년 12월 즈리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따라서 돤치루이를 대신해 즈리파와 펑톈파가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권력을 두고 분열되어 내전을 벌이는 등, 중국은 혼전의 연속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몽골에 대한 중국의 관심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1920년 11월 허를러깅 처이발상과 함께 몽골 인민유격대를 조직, 운게른과 중국 군벌을 타도하겠다며 유목민들을 선동해 군세를 확장했고 정식으로 몽골 인민당을 창설하여 소련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아 3월에 캬흐타를 점령한 중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6월 운게른의 군세를 격파하며 그를 후레에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한다. 현재도 은연 중에 중국이 몽골에 가하는 압박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몽골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매우 많은 상태이다. 중국 역시 옛날에 몽골에게 자주 약탈과 침공을 당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몽골에 대한 중국 항구 이용 문제에 있다. 몽골은 내륙국이기 때문에 자원을 수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국의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몽골과 가장 가까운 중국은 반중감정을 가진 몽골을 좋아하지 않아 몽골의 항구 이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몽골에 우호적인 러시아도 하필 이미 극동 항구가 이미 포화 상태에 있어 쉽지 않다. 그래서 라진, 선봉 등 북한의 항구를 개발하려고 공을 들이고 있다. 몽골은 국토가 상당히 척박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식량의 양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악용해 몽골을 압박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사실 과거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생긴 이유 역시 만리장성 이북은 농업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토지와 기후를 가진 쓸모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넘어선 중국에 과하게 의존적인 경제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다. 특히 몽골의 무역 상대 국가들을 보면 몽골 수입의 39.9%, 수출의 84%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홍콩에서 항구를 쓰도록 빌려주고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화물기 및 중국을 종단하는 국제 화물철로로 운송되고 있어 중국이 이를 막는다면 몽골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칭기즈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사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중화민국 시절 청나라 때 영토를 중국이 계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몽골도 자국 영토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몽골인들 중 일반인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극혐하고 있다. 일단 중국인이 몽골 길거리에 모이면 시비부터 걸고 있다. 몽골인들이 한국어로 말 걸다가 한국어로 대답하면 반가워하고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면 그 사람을 중국인으로 여기고 시비걸며 주먹 날리는 경우가 많다. 몽골의 반중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인이다 여기면 일단 두들겨 패고 생각하자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 반중감정의 이면에는 복드 칸 시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던 역사의 치욕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데다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며 역사 공정을 하는 중국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이다. 몽골의 반중감정에 비해 우리 한국의 반중감정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이 또한 역사적인 DNA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몽골은 중국에 저항해 온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중국에 사대한 역사가 길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 칼럼
- Nova Topos
-
몽골의 반중감정이 최악인 역사적인 이유
-
-
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 남북으로 1,600km에 달하는 국토 길이를 가진 베트남은 각각 북쪽과 남쪽 끝에 하노이와 호치민이라는 대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육로로 가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있는데다 두 지역의 기후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적으로 지냈던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음식과 사람들의 성향까지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흔히 베트남의 하노이를 행정 중심의 도시이면서 역사, 문화의 도시로 인식한 반면 호치민을 경제 중심의 도시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각 도시의 사람들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지역 차이를 넘어 외국인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두 도시의 차이를 비교하여 희화화하는 영상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지역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중국의 지배를 1,000년 동안 받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데 비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쪽은 태국, 캄보디아와 유사한 동남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전형적인 남방 불교인 상좌부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참파 왕국이 다스렸던 곳이라 애초부터 서로 간에 문화권이 달랐다.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남북이 통합되었지만 사이공(Sài Gòn : 호치민의 옛 이름)과 다낭을 중심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이루며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및 서양 문화가 들어와 여전히 동아시아 문화권인 북부 지역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지만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해방되었으며 이후에 프랑스군이 재주둔함으로써 프랑스의 지배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195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은 이 때 체결된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과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남베트남으로 다시금 분단되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했던 사이공(Sài Gòn)을 점령하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편에 섰던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도 이와 같은 숙청의 과정에서 주로 발생했는데 주로 공산세력으로부터 반동적인 사상을 가진 집단, 그리고 서양 문화에 익숙한 집단,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남방 화교 집단 등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하노이는 중국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호치민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었던데다가 프랑스가 만든 계획 도시였기에 서방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려왔던터라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하노이와 호치민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적도와 가까운 호치민이 1년 내내 여름이면서 무더운 열대 기후인 것과 달리 하노이는 우리 한국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같은 날씨의 영향으로 인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각의 특화된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데 하노이에서는 소금이 많이 첨가된 쌀국수와 분짜(Bún chả, 완자와 면을 함께 먹는 음식)가 매우 유명하고 호치민은 채소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쌀국수와 달콤하거나 약간의 밍밍한 음식들이 발달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주로 중부 지역인 후에 지방의 음식이 가장 잘 맞아 후에나 다낭 등의 중부 지방 음식을 선호하는 것에 반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자의 음식이 베트남을 대표한다면서 온, 오프라인으로 끊임없이 설전을 벌인다. 날씨와 음식 뿐 아니라 도시나 정치, 경제적으로도 양측은 다르다. 행정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하노이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치민은 도시의 색깔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차이 중 하나가 시간 내 여가 활동 개념인데 예를 들어 밤 11시에 하노이 시민들은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근면하고 부지런함을 선호하는 반면 호치민 사람들은 밤 11시가 되면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러 밖으로 외출을 나온다. 필자가 직접 겪어본 두 도시의 느낌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노이의 경우 상대적으로 엄격하고 보수적인데다 경직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데 반해 호치민은 클럽과 술집 등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놀거리가 많고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넘쳐나며 친절하고 자유 분방한 분위기가 있다. 이어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어감이 조금씩 다르고 발음 또한 여러 모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데 베트남 또한 각 지역 사투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수도인 하노이 언어가 베트남어의 표준어인 만큼 호치민의 언어는 남방 방언, 혹은 사이공 사투리로 취급되고 있다. 하노이의 표준어는 좀 더 정중하면도 경직되어지며 무게감이 있는 느낌이라면 호치민의 방언은 매우 간드러지며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이 강하다. 북쪽 하노이 측은 베트남의 전통복인 아오자이를 즐겨입지만 남쪽 호치민은 미니스커트와 가슴을 드러내는 옷 등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론 요즘은 하노이도 젊은이들이 미니스커트 및 가슴이 드러나는 옷 등을 즐겨입긴 하지만 호치민만은 못한 분위기다. 이처럼 두 지역의 문화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노이와 호치민의 주민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역 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베트남어인 꿉 포 디아 픙(Cục Bộ Địa Phương : 지역감정)은 지역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뉴스 제목으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칼럼 또한 역시 각종 매체들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일상에서 하노이 사람들, 혹은 호치민 사람들이 서로를 험담하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서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베트남 내의 지역 감정은 점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처럼 극명한 두 지역의 차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노이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유교 문화의 영향 하에 있어 예의와 겸손을 사람의 최고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 서방 기업의 진출이 활발한 호치민의 경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최고 덕목으로 여긴다. 그래서 하노이 시민들은 호치민 시민들을 매우 헤프게 여기고 있으며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 시민들을 꼰대스럽다고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생기게 된 이유로 북과 남으로 갈라진 역사가 만들어 낸 간극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통일 후, 하노이가 행정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해 온 반면 호치민은 공산정권의 통제 하에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작동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최근 보트피플 및 서방 유학, 이민 등으로 인해 베트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경제 발전의 큰 동력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양 지역 간의 갈등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노이 시민들은 부를 감추고 내세우지 않으며 겸손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해외 유학파들 및 이민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존재하는 호치민에서는 부와 소비를 당당한 노동의 보상으로 여겨 이를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두고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의 과묵함을 음흉하다고 표현하고 하노이에서는 호치민의 자유분방함이 천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질수록 다시 또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 굳어져 온 베트남의 지역 감정은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는 바로 대한민국의 박항서 감독과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님의 선전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과 화합을 이룩한 것은 축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국가대표의 승리를 기원하며 각 지역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응원했던 순간 만은 지역 감정이 사라지고 베트남이 오로지 하나가 됐다면서 많은 베트남인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합이 축구 경기에 한해 나타난다면서 일시적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하나가 되어 응원하는 경험이 베트남 국민 모두에게 통합과 단결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지역 감정은 한국의 영, 호남 지역 감정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한 과거의 기억과 비행기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크다. 그리고 그와 같은 거리감에서 기인한 문화적 인식의 간극이 현재까지 견고하게 유지되어 지금의 지역 감정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 갈등은 원래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며 지내온 베트남 사람들은 최근 축구를 통해 경험한 통합과 화해의 시간이 잠시나마 일시적일지라도 어쨌든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인들을 하나로 만들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미움과 편견을 없애게 한 것에 우리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
- 칼럼
- Nova Topos
-
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
-
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나 마찬가지였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둔하자"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줄곧 빅토리아 눌랜드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전쟁을 독려한 켈로그였기에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역사의 어디선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인 독일의 베를린을 동서로 분할한 것과 유사다. 동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동독으로 소련이 관할하고 서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서독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했다. 켈로그의 주장은 비슷하게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나누고 해당 지역애 비무장 지대를 두는 방안이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분할한 것과 6.25 전쟁 이후, 남북을 분할해 휴전선을 만들고 그 사이에 비무장 지대인 DMZ를 만든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쉽게 말해 두 분할 방식을 혼합한 새로운 분할 방식인 것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서쪽 영토는 이른바 ‘평화 보장 군대’(Reassurance Force)‘로 이름 붙인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 유지군이 통제하는 구역을 설정하고, 러시아군이 장악한 동쪽 영토에는 우크라이나 군과의 비무장 지대(DMZ)를 두고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켈로그는 드네프르 강 서쪽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평화 보장 군대는 러시아군을 향해 절대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드네프르 강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국 영토를 거쳐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며 수도인 키예프를 관통하고 있어 분할하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 국이 각각 베를린의 점령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키예프도 그와 같이 분할하여 드네프르 강 서안은 영국, 프랑스군이 통제하고 드네프르 강 동안은 러시아군이 통제하는 측으로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이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켈로그는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따라 18마일, 너비 30㎞ 안팎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여 서로가 넘지 않는 것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켈로그는 푸틴 대통령이 유럽의 나토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통제 구역을 관할하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이자 러시아의 요구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나토 가입 금지, 나토 군대 주둔 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로그는 통제 구역과 관련해 우크라이나가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는 상황을 만들게 되면,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도록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선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비무장 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두 나라 군대가 전선에서 각각 15㎞씩 물러나면 18마일 정도의 비무장 지대를 만들 수 있는데, 비무장 지대는 감시가 가능 하고 사격 금지 구역도 설치할 수 있기에 평화적으로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전 협정을 위반하는 행위가 민스크 협정을 파기한 것처럼 있을 수도 있지만 이를 감시하여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동서 분할 구상은 이번에 처음 주장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 내에서 꾸준히 이와 같은 내용이 예상되어 주장해왔고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에 의해 우크라아나 서부 지역이 4분할 되고 동부 지역과 오데사는 러시아에게 넘어가며 우크라이나는 키예프를 위시한 중부 지역의 작은 영토만 영위하게 될 것이는 예측이 많이 나왔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러한 켈로그의 제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할 시 어떤 국가들이 참여할지,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 영역화 할지, 참여국들이 각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와 같은 세부적이고 구체화 된 내용이 없어 그냥 한 번 던져 본 수준에 불과하다고 본다. 켈로그의 이러한 제안 자체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석의 여지도 많으며 이는 아직까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도 나오지 않은 제안이기에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켈로그는 이 외에도 키어 스타머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에 있어 미국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가 정상화됐다며 광물 협정이 재논의 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켈로그의 제안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진다. 우선 러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나토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정전 안에 대한 반대, 우크라이나 군의 비무장화를 협상 내용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토에 속한 영국과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한다는 것 자체는 러시아가 내세운 특수군사작전의 목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토군의 주둔을 반대하여 일으킨 특수군사작전인데 우크라이나를 분할하여 동쪽 지역은 러시아에 넘기더라도 서쪽 지역에 영, 프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추후에 우크라이나군 재무장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고 러시아군의 목적이 역시 영토 확장이라는 세간의 오해, 침략국이 맞다는 국제적인 맹비난에 직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입장에서 켈로그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마찬가지다. 젤렌스키는 지난 3월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결코,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는 일시적인 점령일 뿐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게 점령된 모든 지역을 탈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국토 분할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미국이 2014년부터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 반도에 대해 러시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젤렌스키에 여기에 크게 반발했다. 줄곧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 러시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배신한 셈이 된 것이다. 이같은 켈로그의 제안은 그동안 나토에 속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과 비슷하게 한다는 것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던 동유럽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안보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연합국에 맞춰 구상된 휴전 방안과 유사하게 하는 것 자체가 소련의 공산 지배를 받았었던 동유럽 국가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또 1945년 나치 독일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정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친서방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전후 베를린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되었다. 더불어 트럼프 정부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의 의사과 관계없이 미국과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불안감 또한 미국과 터키, 헝가리, 슬로바키아를 제외한 타 나토 국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키스 켈로그의 제안은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
- 칼럼
- Nova Topos
-
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
-
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부족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천재지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었다. 중재자는 부족 구성원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관행(Sunnah)이 중요시되었다. 베두인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에는 메카와 메디나, 당시는 야스리브(Yathrib)가 가장 두드러졌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이 도시는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 : 후에 이슬람의 기도 방향이 됨)라는 성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부족의 신상도 있었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에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한 지역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지였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이 창건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베두인은 여러 부족으로 분류되어 있고, 사막의 이곳저곳에 있는 초원을 찾아다니며 유목 생활을 한다. 현대화와 더불어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아라비아 인의 3~5%는 이 베두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목 생활을 그만두고 농촌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들도 부족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도 상당히 많다.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도 자기들의 조상이 베두인이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베두인의 아라비아어가 가장 순수한 아라비아어로 믿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이 즐겨 다니는 시 낭독 회에서는 베두인 시인들이 지은 부족의 영광을 노래한 시를 신명나게 읊고 있거나, 베두인 부족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많다. 부족 생활은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자손이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이 친족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동료 부족 구성원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필요한 경우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자기 부족의 편을 들어 도와준다. 이를 두고 14세기 튀니지 출신의 정치 사상가인 이븐 할둔(Ibn Khaldūn, 1333~1406)은 아사비야(‘Aṣabīyah)라는 이름으로 맹목적인 연대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원시적인 혈연적 부족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사회 각층에도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좋은 일례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과 하심 요르단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 등의 국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두 왕국은 각각 사우드 부족과 하심 부족의 소유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의 기능 가운데 부족장 중의 부족장(Shaykh of Shaykhs)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아라비아 국가,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및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지배자들의 친족과 인척들만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도 모든 아라비아 국가의 사회 각층에도 혈연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제공하는 일은 상당히 많다. 아라비아인들은 친족 결혼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혈연 의식이 강하여 사촌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에 부부 사이에도 사촌 오빠(Ibn ‘Ammī : 삼촌의 아들이라는 뜻) 또는 사촌 여동생(Bint Ammī : 삼촌의 딸이라는 뜻)이라 호칭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어구(語句)는 남편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각각 사전에 풀이될 정도이다. 이와 같이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그들의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家系)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최대의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한 집단 구성원이 다른 집단 구성원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면, 피해 집단은 가해 집단에게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 경우에 가해자를 찾을 필요는 없고, 가해 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입은 상처처럼 같은 상처를 입힘으로 인해 복수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단은 부족, 씨족 및 가족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혈연적 단결심은 도시에 정주하는 아라비아인 사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동일한 혈연 사이에는 협조가 잘 되며, 이 현상은 간혹 정부 부처 의 장과 그의 부하 직원 사이에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혈연과의 경우에는 체면과 조심성을 앞세워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혈연이 상이하면 합심하여 끈기 있게 목적을 추구하는 협동(Team Work) 정신이 부족하다. 이러한 혈연에 의한 파당성은 공평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인사 행정이나 다른 사무 처리에 있어서 부작용을 일으켜 비리의 온상이 된다. 이슬람교는 알라 앞에서 만민 평등을 교시하고 있고, 부족 구성원 사이에도 평등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 간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수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막강한 부족은 타 부족을 지배하였다. 부족 가운데 우열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족의 형태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접촉에는 노골적인 인간 차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부족 구성원 간의 평등 의식과 이슬람의 평등사상으로 인해 아라비아인은 상호 간 대화와 접촉의 자유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아라비아 국가의 국체와 정체가 군주국이거나 공화국이든, 혹은 전제 정치를 시행하든 간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민주 정치를 하는 것과도 관계없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화와 의사소통의 자유가 있어 개인은 누구나 필요한 인물을 찾아가 어느 정도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부하 직원이 그의 상관에게 접촉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다. 평민의 자녀가 고관의 자녀와 혼인을 하는 일례는 아라비아인들에게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실은 차(茶)나 우편물을 나르는 하급 공무원이나 평민, 심지어 걸인도 자유로이 관청을 드나들면서 하급 기관장은 물론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지정된 면담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저자세나 필요 없는 아첨은 비굴한 행동으로 여겨 경멸하기 때문에 대체로 상관을 대할 때에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관장은 매주 1회에 2~3시간가량 면담 시간을 책정하여 방문객이나 부하 직원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있다. 복잡한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이와 같은 시간 소모는 다소 행정력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으나, 사회의 최 하부 계층이라도 자기는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혈연 의식 및 대화와 접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연적인 관계와 자기의 생활 주변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도덕과 규율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공중도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라비아인은 혈연적인 인척과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객체(客體), 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공 의식의 결여는 그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정부의 존재 자체를 공공의 복지나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봉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징세와 징병을 강행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 단체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공중도덕의 결여로 인해 현대 산업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교통질서, 직장 내의 위생 질서, 약속 시간 개념 등에는 무관심한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다. 이는 국가와 같은 공공 집단이 다른 소집단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족적 또는 종교적 파벌을 기초로 하여 조직된다. 이 현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아라비아 국가 중에서 가장 잘 모방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레바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아라비아 국가에서는 이러한 병폐로 인해 아예 일국 일당 체제나 전제 왕정(專制王政)이 지배적인 정치 체제로 등장하고 있다. 혈연 공동체의 극소 단위로서의 가족은 혈연 의식의 특징을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그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부족적인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생활 단위는 부족이 아니고 가족이다. 물론 왕족이나 영주 등과 같은 명문 귀족들에게는 부족이나 씨족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평민은 가족 중심의 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민들의 가족 개념은 아직도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이 아니고 대가족 제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족 제도는 합동 가족의 형태이다. 이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다. 양친과 자녀 및 조부모, 숙모, 숙부 또는 방계의 친족 및 조상의 친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가까운 친구들까지 포함되는 방대한 조직인 것이다. 아라비아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가족의 출신 성분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한 가족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상류층에 속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개인과 가족 사이는 어떤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착되어 있다. 개인으로서의 아라비아인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 삶을 개척하기에는 가족 관계가 아직 매우 강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밀착성은 그들의 호명법(呼名法)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개인은 결혼하기 전에는 주로 아무개의 아들, 딸 등으로 불리며, 결혼 후 자녀를 가지게 되면 아무개의 아버지, 어머니 등으로 불린다. 이 호명법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를 그대로 나타내어 주로 남성의 이름을 위주로 하여 호칭되고 있다. 이 현상은 단순히 호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어떤 지위에 천거하거나, 제3자에게 소개할 경우에도 사용한다. 또, 한 개인이 출중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르면, 주로 부족명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
-
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 로마는 내부적으로 신분 투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를 형성하면서, 한편 대외적으로는 계속된 군사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뒤 일시적으로 라티움(Latium) 지역에서 로마의 군사적 지위가 약화된 것이 확실하다. B.C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Casius)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카시우스 조약은 로마와 라티움 동맹 간의 군사 협조를 명문화한 것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로마는 수많은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B.C 5세기 말이면 왕정 시기 로마와 라티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트루리아가 약화되며, 로마는 그 세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B.C 5세기 로마와 라티움 동맹국은 인접 산지 민족들, 특히 아이퀴(Aequi)와 볼스키(Volsci)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 이후 로마는 티베리우스 강 북쪽의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인 베이(Bei)를 오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고 영토를 병합했다. 그러나 B.C 387년 로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 족의 침략으로 인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로마 시를 7개월 동안 점령당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외적인 위신도 실추되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B.C 349년에 다시 침공해 온 켈트 족을 격퇴했다. 로마는 B.C 343년부터 약 B.C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삼니움 족이 라티움 남쪽에 위치한 캄파니야(Campaniya) 주를 침공했으며 라티움 주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로마가 이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손쉽게 끝난 1차 삼니움 전쟁 (B.C 343~B.C 341)에 비해 2차 삼니움 전쟁(B.C 326~B.C 304)이라는 22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삼니움 족의 근거지인 아페나인(Apenain) 산맥이 방어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카우디네(Caudine) 협곡에서 두 명의 집정관과 그의 병력들이 모두 생포되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5년 동안의 소강상태를 갖게 된다. 그 이후 패배에서 회복한 로마인들은 반격을 시도하여 삼니움 족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삼니움 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들을 모두 격파하면서 2차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다. 3차 삼니움 전쟁은 삼니움 족,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켈트 족이 연합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남부에 위치한 삼니움 족을 격파하여 그들의 세력을 북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대항한 이들 3개의 연맹체는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군과 센티눔(Sentinum)에서 맞서게 된다. 초기에 로마군은 이들 연합군의 맹공에 고전하였으나 집정관인 푸빌리우스 데키우스 무스(Publius Decius Mus)가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이는 로마군의 사기를 고양시켜 이들은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B.C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는 양측이 통합 1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회전이었고 로마가 이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가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291년까지 삼니움 족은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다음 해인 B.C 290년에 로마에 굴복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하게 된다. 그 사이에 B.C 340년 로마의 동맹 주도에 불만을 품은 라티움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라티움 전쟁이 일어났으나,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라티움 동맹도 해체되었다.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는 대신 라티움 도시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주는 동시에 로마에 정치적으로 흡수했다.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평정하고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우려한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타렌툼(Tarentum)은 에페이로스(Epeiros)의 피로스(Pyros)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로써 피로스 전쟁이 발발했으며 피로스는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로마를 격파하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그들의 영향 하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피로스는 로마를 제압하여 이탈리아를 그의 패권 하에 두고 그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이후,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다음 이를 토대로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의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로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들의 군사적인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B.C 280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피로스는 로마군에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로스의 전사자는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과 전쟁 상태였으며 이들 시칠리아 도시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동맹관계였다. 남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피로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앞서 호언한 대로 시칠리아에 대해서도 야심이 있었던 피로스는 강한 로마 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여 시칠리아로 떠나게 된다. 시칠리아에서 피로스는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카르타고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꾸준한 보급을 통해 친 카르타고 도시들은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으며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한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여실히 증명한 것과 같이, 강한 해군력 없이는 시칠리아 섬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스가 해군 편성을 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요구한 군자금은 그 도시들에게 있어 큰 부담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피로스에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따라서 전황은 과거보다 피로스에게 더 불리하였다. 피로스는 이에 베네벤툼(Veneventum)에 머물던 로마군을 기습하기로 하고 로마인들이 건설한 가도를 타고 북상하나 로마인들이 이를 파악했기 때문에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피로스의 전쟁 의지를 일소시키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 로마는 피로스가 없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그들의 패권 하에 넣었고 그리하여 로마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된다.
-
- 칼럼
- Nova Topos
-
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
-
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 젤렌스키는 10일 전인 8일 동부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중국인 용병 두 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는 이 날 X를 통해 두 명 중 한 명의 영상을 공유하여 러시아의 돈바스 지역 점령군 부대 내에 더 많은 중국 국적자들이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해 관련 기관이 이를 확인 중이라 했다. X에 젤렌스키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군복 차림의 남성이 묶인 두 손을 흔들며 몸동작을 크게 하여 뭔가 항변하며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러시아 쿠르스크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군에게 생포된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2명이다. 그러나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자는 러시아 영토에서, 중국인은 비록 러시아군이 점령한 곳인 돈바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로 여겨 진다. 젤렌스키 또한 이같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 주재 중국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관련 설명을 듣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의 전쟁 참여가 이번 사례가 처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러시아 군복을 입은 중국인의 모습은 3월 초 포크로프스크 전투의 영상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당시 이를 그다지 중요하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이 날 포로 공개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취하고 있는 반(反) 중국 성향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는 것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 국방안보회의 산하 허위정보 퇴치 센터의 안드레이 코발렌코(Андрей Коваленко) 센터장은 당일 오전에 중국이 조지아의 흑해 연안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나토에 대한 위협이라 주장했다. 코발렌코는 시진핑 주석의 전략은 간단하다면서 흑해 동부에서 나토를 몰아내고, 러시아와 터키의 협력이 없이도 유럽으로 가는 공급로를 만들어 중국의 군사력 투사와 물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작년 2024년 5월 29일, 중국은 중국 교통 건설 유한회사(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Company Limited)와 중국 항만 투자 Pte. Ltd.(China Harbour Investment Pte. Ltd.)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조지아 최초의 심해항인 아나클리아 항 건설 프로젝트에 단독 입찰하여 사업권을 따낸 바 있다. 조지아 TBC 은행과 미국 기반의 콘티 인터내셔널(Conti International)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아나클리아 항만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2020년 색깔혁명 유도 논란과 법적 문제로 무산된 바 있는데 이번에 중국에게 그 사업권이 넘어갔다. 2021년 이후 조지아에서 진행된 1억 달러(약 1,376억 원) 이상 규모의 모든 인프라 프로젝트에는 중국 기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든 사업에 이미 미국과 EU는 손을 떼고 있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과 세계은행(World Bank) 등 기관들은 조지아가 글로벌 무역 루트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심해항 건설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었는데 자신들이 개발하려다가 실패했고 중국에게 이 사업권이 넘어가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항만 사업이 아직 삽을 뜨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입찰 수주는 따냈지만 항만을 건설하는데 있어 여러 문제에 놓여 있어 아직 공사는 시작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난게 2024년 5월 말인데 그 때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있다가 1년 가까이 된 이제야 그 문제를 꺼내며 중국 견제를 부르짖는 것이다. 이 같은 행위를 두고 트럼프의 관세 폭탄 등으로 인해 EU가 압박을 받으니 그 타결책으로 흑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을 견제하여 흑해와 연결된 중앙아시아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보고자 하는 EU가 우크라이나에게 중국에 대해 비난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우크라이나 허위정보 퇴치센터의 비난은 참으로 짜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중국인 포로를 공개한 젤렌스키의 직접적인 노림수가 무엇인지 예상한다면 일단 러시아가 전쟁에 중국인까지 끌여들였고, 궁극적으로 이는 휴전 혹은 정전 협상에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현재 관세 전쟁 중인 미국과 중국인 상황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전쟁 참여를 들먹여 미국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면서 협상에 진정성이 없을 바에야 미국의 직접 참전 및 군사적, 금액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벌이는 이 전쟁에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은 푸틴이 전쟁을 끝낼 의도가 없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했다. 그리고 나아가 미국 등 국제사회에 이에 대한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기와 돈을 더 대줌으로써 분쟁을 끝까지 이어가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젤렌스키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와 먼저 대화하고, 그 다음 러시아와 소통하기를 바란다며 중국인 포로 공개 영상을 본 뒤 입장을 바꿀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이는 조만간 열리는 람슈타인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젤렌스키가 노리는 또 다른 의도는,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전쟁 중에 더욱 긴밀해진 러-중 관계를 와해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틀렸고 실패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와 싸우고 있으니 러-중 관계를 와해시킬 노력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와 연합해 미국과 적대적인 러-중 동맹에 맞서는 것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면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트럼프가 중국을 향해 무려 125%의 관세 부과하는 등 무역 전쟁을 불사하고 있으니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젤렌스키의 이러한 행위는 대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전망을 해본다. 젤렌스키는 그동안 중국의 친러 성향에도 베이징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피해왔다. 오히려 중국에게 러시아와 이 상황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 못지 않게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인데다 러시아와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현대전의 핵심 무기로 등장한 '드론' 생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크라이나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드론의 대부분은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이 우크라이나로의 드론 및 부품 공급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겠지만, 비공식적이라도 장벽이 생긴다면 미국으로부터 무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중국이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지워버릴 생각을 하고 러시아를 도울 경우에 있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러시아에 수많은 드론과 전자전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군은 그 과정에서 '현대전'을 직접 참전하여 경험하면서 전투 능력을 축적할 수 있다. 만약 중국이 러시아에 드론을 지원하여 50%라도 참전을 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의 멸망은 필연이다. 최근 몇 달간 전투의 흐름을 본디면, '드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측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공격 작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성공 요인이다. 우크라이나군 지도부도 중국이 러시아 특수군사작전에 있어 참전할 경우, 매우 결정적인 영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피해왔다. 미국 등 서방과의 경제 협력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대일로가 완성돠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왠만한 모험은 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트럼프의 무역 전쟁 선포로 중국의 대(對) 서방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중국인을 생포했다며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젤렌스키의 전략대로 따라줄 지도 알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중국인의 전투 참여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생포된 중국인의 영상을 공개한 것이 미-중 무역전쟁에 있어 중국의 위협을 부각시키고 미국의 더 큰 지원을 유도할지, 중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 큰 군사적인 위협으로 자충수를 두어 몰락할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
- 칼럼
- Nova Topos
-
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
-
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
- 20세기로 접어들며 그동안 동아프리카 전 지역에 대한 통치가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던 양상이 차차 변화를 보이게 되며, 케냐 지역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 케냐의 경우, 이 지역의 중요성과 비중이 간과되어 왔음은, 몸바사에서 키수무에 이르는 철도를 우간다 철도(Uganda Railway)로 명칭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철도가 지나가는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Uasin) 고원 지역이 모두 우간다의 동부 지역(Eastern Province of Uganda)이었기 때문이다. 케냐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각기 자신의 종족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충성하였으나, 우간다의 경우는 조직적이며 체계화된 왕국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유럽인들로서는 왕국의 왕을 상대로 식민 통치의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케냐 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부족과 백인 정착민들 사이에 잦은 분쟁과 갈등이 상존하였다. 따라서 정착민들로서는 이 지역을 정착에 용이한 곳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902년, 식민 정부는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여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 기슈 고원 지대(Uasin Gishu Plateau)를 동아프리카 영국 보호령(British East Africa Protectorate), 케냐로 편입시켰으며, 같은 해 유럽 백인 정착민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을 유치하여 그들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백인이 우월한 인종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을 두고 자신들만의 정당을 결성한다. 정착민들은 영국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판무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 경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정착민들은 식민 정부 감독하의 아프리카 원주민 노동력의 공급을 요구하였으며, 또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점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 사용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로서는 백인 정착민들의 이 지역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에 대한 상반되는 논쟁이 발생한다. 1903년, 찰스 엘리엇 경은 비옥한 백인들의 고원 지대(White Highlands)를 유럽인만이 점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착민들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아시아계 정착민들은 비옥한 토지 사용이 불가능해지며, 이로 인한 영국 본국 정부와 엘리엇 사이의 마찰로, 후일 엘리엇은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결정한 데 대한 문책으로 사임 당하게 된다. 찰스 엘리엇과 영국 정부 사이의 문제 야기는 1904년 체결된 최초의 마사이 협정(First Masai Agreement) 때문에 발생한다. 마사이 족의 지도자 레나나(Lenana)는 이미 전에 영국 정부의 도움을 구하여 받은 적이 있었으며, 그 대가로 1904년 마사이 협정에서는 부득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이 족보다도 유럽인 정착민들에게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찰스 엘리엇 경이 사임당하고, 식민 행정은 식민성(Colonial Office)이라는 지방 관청 산하에 편입되었다. 엘리엇의 후임으로 도날드 스튜어트(Donald Stewart) 경이 부임하였으며, 그는 마사이 족을 위한 적절한 지역을 모색하였고, 케냐와 탕가니카 사이의 국경 부근 지역과 라이키피아(Laikipia)에 마사이 족을 정착시킨다. 이 리프 밸리 지역은 이제 유럽인들의 정착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으며, 마사이 족이 지정 거주 지역에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케냐에서의 백인과 비(非) 백인에 대한 분리 정책이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이로부터 인종 분리 정책은 거주지에서부터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을 표시하여 분리 사용하는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기 시작한다. 제한 거주 지역의 설정은 키쿠유 족과 같은 타 부족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1906년 백인 정착민들의 영향력 행사로 인하여 케냐에는 입법 회의(Legislative Council)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가 구성된다. 백인 정착민들은 이미 이전에 식민지 보호령의 행정을 외무성(Foreign Office)으로부터 분리시켜 식민성으로 이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입법 회의는 케냐 정착민 중 임명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델라미어(Delamere) 경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착민들의 지도자들은 백인 우월성과 백인 정착 거주지(White Highlands)에 대한 정책만을 고집하였다. 이들은 흑백 차별 정책을 통한 발전 계획을 주장하였다. 델라미어와 그로간(Grogan)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인종 차별 정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시아계로 분류된 인도인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강력히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모든 인종의 평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고원 지대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 부여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아시아계 정착민들의 강력한 저지가 없었다면 케냐는 후일의 로디지아(Rhodesia)나 남아프리카와 같은 백인 통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1909년, 지반지(A. M. Jeevanjee)는 아시아인 정착민의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입법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1910년, 백인 정착민들은 그로간을 의장으로 하는 협의회(Convention of Associations)를 창설하여 정착민들의 관심사를 제시하였고, 그들 정책의 총체적 노선을 정부에 알리는 작업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유럽 정착민들은 백인 통치 정책이 강화되기를 원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플랜테이션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주도록 정부가 개입해 주기를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보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은 이와 같은 백인 정착민들의 기본적인 태도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재차 총독과 델라미어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여 델라미어는 입법 회의에서 일정 기간 축출 당하게 된다. 1911년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유럽인들이 토지를 사용하기 위해 마사이 족을 라이키피아(Laikipia)로부터 이동시키려는 것으로, 총독 퍼시 지로드(Percy Girouard) 경은 두 번째의 마사이 협정을 맺게 되며, 1904년의 엘리엇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 당하게 된다. 1913년, 인도인들은 정당(East African Indian National Congress)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입법 회의 내에 인도인 정착민의 의석 확보를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식민지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전시 위원회를 열어, 유럽 정착민들은 1915년 이 위원회에 대표자를 임명시켰다. 전쟁이 종료될 무렵 이들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의 대표자 선출 권을 부여받게 된다. 총독 에드워드 노시(Edward Northey)는 유럽 정착민들의 이익이, 다른 인종들보다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1922년,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4명의 의원을 입법 회의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모든 결정은 유럽인들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땅이 지배받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소견을 밝히지 못한 채 소외당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을 정착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케냐로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실직 문제가 야기되었으며, 이 계획으로 말미암아 난디(Nandi) 족은 새로이 도래한 백인 정착민을 위해 그들의 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백인 정착민 위주의 정책과 계획은 1923년에 작성된 데번셔 백서(Devonshire White Paper)의 출현으로 인해 극도로 위축된다. 1923년, 영국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지반지는 아시아계 인도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으며, 델라미어는 백인 정착민을 대변하였다.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데번셔(Devonshire) 공작이 의장으로서 주관하였던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데번셔 백서를 발표하게 된다. ① 케냐는 아프리카인의 국가이며, 따라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② 케냐의 고원 지대 (Highlands)는 유럽 정착민에게만 할양된다. ③ 아시아인 (인도인)들은 입법 회의에 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참여시킨다. ④ 케냐 내의 인종 차별을 금지한다. ⑤ 아프리카인을 대표하는 1명의 선교사가 입법 회의에 임명된다. ⑥ 정착민을 위한 헌법상의 특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23년에 결정된 이와 같은 사항들은 철저히 백인 정착민 위주의 이익 추구와 정책 수립을 강요하던 유럽인 정착민들에게는 많은 양보와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5년, 식민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Local Native Council)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인들의 문제를 다루도록 유도하였으며,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백인 정착민들은 우간다와 탕가니카를 포함하는 연방체를 결성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아프리카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영국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나 3국 연방체 어느 측에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31년 정착민 출신의 정치가 델라미어가 사망하고, 같은 해 조셉 보른(Joseph Byrne)이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과 의견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정착민들에게 있어 그는 매우 불만스러운 존재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만이 세금을 내고,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던 백인 정착민들은 1936년부터 수입세를 지불하게 되었으며, 행정 회의에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참여시킬 수 있었으나 차차 그들의 특권은 상실되며, 여타의 종족들이 후일 참여하게 된다. 아프리카인 대표에 관한 원칙이 1931년 수립되고, 1944년, 최초의 아프리카인 대표 엘리우드 마수(Eliud Mathu)가 입법 회의의 의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 KANU)은 케냐가 1963년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뒤 2002년 선거 패배 때까지 40년 가까이 집권한 케냐의 정당이다. 그것은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케냐 아프리카 동맹(KAU)으로 알려져 있었다. KAU는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식민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60년 제임스 기추루(James Gichuru)에 의해 다시 설립되었으며 1960년 5월 14일 톰 음보야(Tom Mboya, 1930~1969)의 케냐 독립 운동과 합병하여 KANU로 개칭되었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한 무장 반란 마우마우의 영향으로 비상사태에 처했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국민정치운동인 KAU는 1952년에 금지되었고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를 포함한 지도부는 1953년에 투옥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케냐의 정치체계에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부족주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케냐의 식민지 전체에 걸쳐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부는 1952년에 국가적인 정치 운동을 금지했다. 1954년부터 식민지 정부는 식민 정부에 우호적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지역 내 부족 중심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정부는 1956년 부족 당 지도자들을 레그코(Legko)에 임명했다. 로날드 은갈라(Ronald Ngala), 데니얼 아라비아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1924~2020), 마신데 뮬리로(Masinde Myuliro)가 리프트 밸리, 아르깅스 코덱(Argins Kodek)이 나이로비,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Jaramogi Oginga Odinga, 1911~1994)가 냔자 레코(Nyanja Reko) 회원이 되었다. 중앙 케냐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레미아 제임스 냐가(Jeremia James Nyaga)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케냐 중부에서 정당 금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7년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입법위원회 첫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온건하고 우호적인 지도자 대다수는 1957년 다시 레그코로 선출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1956년 나이로비를 대표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에 의해 지명된 아르깅스 코덱을 격파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톰 음보야였다. 1960년에 설립된 KANU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이념의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독립 직후 부각되었다. 그러나 1965년 케냐 의회에서 세시셔널(Sesishunul) 제10호 서류가 채택되고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와 동맹한 좌파 정치인들이 사임하면서 패러스타탈(Pererstatal) 형태의 국가 개입과 함께 혼합된 시장 경제 정책을 추구했다.
-
- 칼럼
- Nova Topos
-
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