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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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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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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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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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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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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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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알래스카 LNG 사업과 관련하여 알래스카 발견의 역사 (3편)
    세계에서 불어닥치는 각종 기후 변화(Climate Change)와 전쟁을 선포한 버락 오바마 정부는 2015년 8월에 청정 전력 계획(Clean Power Plan)을 발표하고 미국의 탄소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030년까지 32%를 감축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후 미국은 2015년 11월, 세계 195개국이 참가하고 73개 국이 비준한 파리 기후 협약 당사국이 되었다. 2015년 파리 기후 협약은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더 나아가 온도 상승 폭을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 위한 협정이다. 각 국가들은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하여 이를 스스로 정해 국제사회에 약속하고 이 목표를 실천해야 한다. 이에 국제사회는 그 이행에 대해서 공동으로 검증하는 기관을 두게 되는데 이를 주도했던 오바마 시대의 미국은 트럼프 1기 시대인 2017년 돌연 탈퇴를 선언하게 된다. 한편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써 최초로 2015년 8월 북극 회담(GLACIER)에 참석 차, 알래스카를 방문했다. 당시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해 유실된 알래스카 원주민 마을을 방문했으며 기후 변화 현상의 심각성을 경고하면서 북극 개발 규제를 강화해 갔다. 그런데 이와 대치하는 현상이 알래스카 건너 러시아에 나타난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미국 오바마 정권의 북극 개발 규제에 대해 국제 정치적 탄압으로 규정하고 북극항로 개발에 적극 검토하게 된다. 당시 크림을 합병한데에 대해 미국을 위시한 집단 서방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루블화를 폭락시킨 것에 대해 경제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추진한 것이 북극 항로 개발이었다. 오바마가 북극 회담(GLACIER)에서 북극 개발 규제에 나선 것은 환경 뿐 아니라 러시아 경제를 더욱 옥죄기 위해 국제 정치 전략적으로 북극에서 러시아의 활동을 적극 제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 오바마는 2016년 3월에 방미한 캐나다 쥐스탱 트루도(Justin Trudeau) 총리와의 회담에서 향후 10년 동안, 온실 가스 배출을 2012년에 대비하여 40%까지 감축하기로 합의하고 환경 파괴 없는 북극 경제권(Sustainable Arctic Economy)을 조성하기로 협약하고 이를 공동 발표했다. 이는 말이 환경 파괴를 억제하기로 한 것이지 미국의 북극해 시추 규제안 (U.S. Arctic OCS Drilling Regulation) 마련하고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고립화 시키기 위한 전략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이같이 돌아가는 상황을 푸틴 대통령이 모를리 없었다. 미국에서는 1983년 알래스카 프린스 윌리엄 만에서 엑손 발데즈(Exxon Valdez) 호가 원유 유출 사고를 저지르며 북극해 지역까지 그 원유가 띠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루이지애나 주 인근에서 발생한 디프 호라이즌(Deep Horizon) 호가 폭발하여 원유가 대량 유출된 사건까지 벌어지자 미 연방 정부는 해양 유전 개발에 대해 사고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규제를 강화해 왔었다. 2016년 7월에는 자국인 알래스카 북극해 오염 방지에 관련해 여러 운영 기준을 포함한 북극해 시추 규제 안을 발표하면서 겉으로는 지구와 환경을 위하는 척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상당한 미국 시민들의 피 같은 세금이 흘러 들어갔는데 환경보호단체와 동물보호단체들은 많은 예산이 자신들에게 할당되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여 동정론을 이끌어 내기에 바쁘다. 그렇게까지 비난을 받으며 동정론을 끌고 오는 이유는 다른거 없다. 결국 돈 때문이다. 이들은 각종 UN과 미국, EU 등에서 매년 수억 달러씩 예산을 지원받으며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 그리고 환경 보호 및 동식물 보호 등에 세계인들의 세금을 쓰고 있다. 새로운 북극해 시추 규제안 (U.S. Arctic OCS Drilling Regulation)으로 인해 원유업체들은 북극해 원유 탐사의 모든 과정을 미국 내무부 산하 미 연방 해양 자원 관리국(BOEM : Bureau of Ocean Energy Management)에 사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원유가 유출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각종 감압 유정 시추를 위한 추가 시추선을 확보하고 오염을 방지할 수 있는 돔 장비 등을 구비해야 했다. 그로 인해 원유업계는 개발 비용이 대폭 상승하게 되었고 이러한 비용 상승은 자원 개발로 먹고 사는 기업의 심각한 불만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알래스카 지역의 북극해 환경 규제 강화로 인한 유전 개발이 중단되었었는데 현재는 어떻게 유지되어 오고 있을까? 2015년 9월 독일-네덜란드 합자 원유 업체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은 알래스카 북서부 연안의 추크치(Chukchi) 해 원유 탐사 개발 사업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물론 탐사 사업의 성과가 적은 영향도 있었지만, 미국 정부의 환경 규제 정책의 영향으로 원유 탐사 개발 사업은 지속이 불가능했었다. 최근의 국제 원유가 하락으로 인해 손실을 상쇄할 정도의 막대한 원유를 추크치 만에서 찾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추크치 만의 원유는 그 매장량에 있어 기대보다 못했고, 미국 정부의 환경 규제책으로 인해 탐사 비용과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이어 추크치 만의 98개 구역을 임차하여 원유 탐사 계획을 진행했던 코노코 필립스(Conoco Phillips)도 2013년 4월 미국 정부의 환경 규제로 인해 추가 개발하는데 있어 큰 장애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코노코 필립스 회사도 원유 탐사 계획을 중단했다. 로열 더치 쉘 및 스테토일 회사의 리스 임차를 보류하는 한편 이에 대한 기간을 연장하는 요청 또한 거부하면서 미국의 환경 규제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미국 내무부(Department of Interior) 산하 연방 안전 및 환경집행국(BSEE : Bureau of Safety & Environmental Enforcement)은 2015년 9월, 알래스카 연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원유 탐사 개발 계획을 중단시켰다. 이어 추크치 만 임차지의 리스를 임차 보류하기를 원하는 로열 더치 쉘과 스테토일의 요청을 거부했다. 임차보류를 할 경우 미국 연방의 규정 상 5년 동안 리스를 연장할 수 있었지만 BSEE는 이를 불허함으로써 로열 더치 쉘과 스테토일은 재정적 위기를 맞게 된다. 한편 BSEE는 추크치 만의 유전 개발 구역을 임차한 로열 더치 쉘, 렙솔, 스테토일 등의 업체들이 원유 탐사 개발 사업을 중단하자 남아 있는 2012~2017년 주기 리스 기간의 분양 계획을 일부 지역에서 철회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개발 가능성은 열어두게 되었다. 물론 이들 업체의 리스는 당초 10년을 임차로 보류 및 연장 조치가 없을 시, 리스 기한은 추크치 만이 2017년, 뷰포트 해가 2020년에 만료될 예정이었으며 사업이 중단된 이상 업체들은 리스 기한을 채우지 못해도 미국 연방 규정상 알래스카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 샐리 쥬웰(Sally Jewell) 내무부 장관은 알래스카 추크치 만 지역의 연이은 탐사 계획을 중단시키고 다음 2017~2022년 주기를 감안할 때, 당시 2017년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리스 분양은 무의미하다고 언급했다. BSEE는 2016년 11월 18일, 2017~2022년 주기 해양 원유 탐사지 리스 분양 계획에서 추크치(Chukchi) 만과 뷰포트(Beaufort) 만을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샐리 쥬웰 내무부 장관은 리스 분양 지역을 선정할 시, 지역 사회와 갈등의 소지가 적고 관련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 그리고 천연자원의 매장량이 높은 지역 등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고려했으며, 북극해 지역은 이와 같은 리스 분양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또한 샐리 쥬웰 장관은 북극해 생태계의 취약성과 그 특이성으로 인해 개발 리스크를 크게 고려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이라 말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 국익 토지 보존법(ANILCA : Alaska National Interest Lands Conservation Act)이 존재한다. 이 법은 1980년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했으며 알래스카 내에 국립공원, 야생동물 보호구역, 국가 기념물 등을 포함한 177,000여 에이커의 토지가 현재까지도 미국 연방 정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특히 알래스카 북동부에 위치한 면적 7,700㎢ 크기의 토지들은 국익 토지 보존법에 의해 미국 연방 정부가 관리하고 있으며, 1998년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추정한 바에 의하면 매장된 원유와 천연가스가 약 77억 배럴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는 보호 구역 내에 상당한 분량의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1977년부터 개발과 보존의 문제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알래스카 일대의 개발, 즉 ANILCA 법에 해당되는 지역은 미국 연방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며 과거 기록상 이는 개발을 허가 받기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돈 영(Don Young) 연방 하원의원은 지금까지 알래스카 지역의 개발을 위해 하원에서 입법 발의를 했지만 상원에서 과반수인 60명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2016년 선거 이후 미국 연방 의회 상원은 공화당 2석을 잃어 공화당 의원이 51명으로 공화당 의원들 중 중도 보수파들은 알래스카 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화당이 우세했던 2005년에도 메인 주 공화당 상원 의원인 수잔 콜린스(Suzanne Collins)의 반대로 인해 알래스카의 개발이 무산됐던 적도 있었다. 국익 토지보존법에 해당하는 지역에 터전을 가진 알래스카 원주민 부족들은 알래스카 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2016년 미국 대선이 벌어지기 이틀 전, 원주민 부족장들은 백악관을 방문하여 알래스카의 자원 보존을 탄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각종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제 원유 가의 불안정성과 채굴 원유량의 감소로 인해 악화된 알래스카의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알래스카 개발 정책에 호의적인 트럼프 정부 및 공화당은 우위를 점한 연방 의회에 의한 알래스카 개발 승인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빌 워커 알래스카 주지사는 2016년 11월 18일을 기준으로 북극해 시추 규제안의 규정에 맞는 충분한 안전 대응 방침을 마련하여 개발과 보존 사이의 균형을 갖춘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2017~2022년 리스 분양 계획에서 알래스카의 추크치, 뷰포트 해를 제외한 내무부의 결정이 매우 실망스럽다며 관련 지역 자치 단체들과 협력해 이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리사 머카우스키(Lisa Murkowski) 연방 상원 의원은 해양 원유 탐사를 지지하는 알래스카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개발 규제를 내세운 오바마 정부에 대해 분노했으며 북극해 에너지 산업에 규제를 걸어 알래스카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리사 머카우스키 연방 상원 의원이 입법 활동과 인사 인준을 통해 내무부의 결정에 대응을 한다 할지라도 실질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최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 했다. 도날드 영(Donald Young) 연방 하원 의원은 오바마 정권 당시 내무부의 결정이 극렬 환경 보호론자들의 요구에 연방 정부가 굴복한 처사라며 비판했다. 이에 앞서 도날드 영 연방 하원 의원은 로열 더치 쉘의 탐사 사업 중단 이후 남은 2012~2017년 기간 동안의 리스 분양 계획을 철회한 내무부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에서 굴착기를 타고 알래스카에 출입해 물리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격앙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인 그린피스(Green Peace)를 비롯해 Alaska Wilderness League, Center for Biological Diversity, Friends of the Earth, National Audubon Society, Northern Alaska Environmental Center, Pacific Environment, Sierra Club, Wilderness Society 등의 환경보호단체 및 학회들은 이전부터 기후 변화 방지를 위해 북극해 개발 규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다. 추크치 및 뷰포트 해 임대지의 리스 기간 연장을 두고 대립했던 BSEE와 로열 더치 쉘 사이에서 BSEE를 지지하며 연방 정부의 환경 규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당시 신디 쇼건(Cindy Shogan) 알래스카 야생 동맹(Alaska Wilderness League) 대표는 오바마 정부가 적법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리스 분양 계획을 철회했으며 원유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로열 더치 쉘과 코노코 필립스의 책임이 크다고 언급하며 이들을 줄곧 비판해왔다. 따라서 해양 보호단체 오세아나(Oceana)의 수잔 머레이(Susan Murray) 대표는 알래스카가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기회의 땅이라 주장하며 그와 같은 기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하고 중요한 해양 자원을 보호 및 보존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한다며 내부무의 결정에 찬성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환경 보호 정책에 적극적이었던 오바마와 다르게 트럼프는 화석 연료 개발을 통해 미국 내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로 인한 경제 회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따라서 미국 본토 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래스카 유전 개발 정책에 매우 호의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트럼프 1기를 지나 바이든 정권 때 이르러 알래스카와 북극권의 천연 자원 개발은 지지 부진했었다. 이는 바이든 정권이 당시 오바마 정권의 선례를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래스카 개발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계획 안이 수립되지 못했다. 최근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미국 내 제조업 부활을 위해 화석 연료 생산을 증대하는 방안을 촉진하고 있다. 이에 알래스카 원유 탐사 개발은 다시 이루질 것으로 보이며 지난 15일, 푸틴 대통령과 알래스카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알래스카와 북극해 개발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아마 알래스카와 북극해는 러시아와 미국의 공동 개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북극항로 하나의 문제가 알래스카와 북극해의 개발 문제까지 확대된 상황이다. 그리고 미국 트럼프 정부와 환경보호단체, 동물보호단체 등의 끊임없는 마찰과 내부 전쟁이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좀 더 확대해 보면 그린란드 문제까지도 함께 들어가 있다. 이쯤 되면 트럼프의 그린란드 합병, 캐나다를 미국의 52번째 주로 만들겠다는 얘기가 허언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트럼프의 그린란드-캐나다 관련 발언들이 이 모든 것을 염두해 둔, 포석의 발언이었을까?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알래스카 LNG 사업과 관련하여 알래스카 발견의 역사 (4편) : 러시아-미국의 경쟁, 북극항로와 관련된 알래스카의 지정학적 중요성>
    • 칼럼
    • Nova Topos
    2025-08-31
  • 범몽골주의의 민족주의 발현과 몽골의 민주화, 그리고 소득 수준이 낮은 몽골의 경제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하길 요구했다. 반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들은 몽골 현지인들로 거의 대부분은 읽지 못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 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공산주의 치하 말기의 몽골에서는 범몽골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1980~90년대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범몽골주의는 몽골인들의 정치 및 문화적 통합을 제창하는 민족통합 운동과 사상을 말한다. 즉, 현재의 몽골 공화국, 중국, 러시아 연방공화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몽골계 민족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려는 주장과 운동으로 주로 몽골국,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동북지역, 신장 등의 몽골인 거주지, 러시아 연방의 부리야트 공화국의 통합을 말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몽골 공화국 북부의 투바 공화국까지 통합의 범위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전체를 통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고, 역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민족 통합 운동은 몽골 공화국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통합을 말한다. 범몽골주의는 몽골인들이 20세기 초기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발흥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내내 민족 운동의 중심 축으로 기능했으며, 1990년대 초기 몽골 공화국의 체제 전환 이후 현재까지도 변형된 형태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범몽골주의의 역사적 추이에 대한 분석은 몽골 근현대사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는 물론, 현재 몽골, 중국, 러시아에 분산 거주하고 있는 몽골계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세 나라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핵심 사안이다. 1989년 12월 말, 체스 그랜드마스터인 가리 카스파로프(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 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몽골을 중국에 매각하는 것은 소련에게 경제적 이득을 줄 수 있다(Selling Mongolia to China could provide economic benefits to the Soviet Union)"라는 발언이 퍼지며 민족주의적인 시위가 거세졌다. 1990년 1월 2일, 몽골 민주 연합은 민주 혁명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뿌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시위가 번져 더욱 과격한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14일,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울란바토르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월 21일에는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여 시위 전면에 내세웠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목으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의 사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붉은 별을 지우고 새로운 소욤보 문양을 장착한 국기를 흔들었다. 몽골은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 및 동구권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89년에는 민주화 운동이 아예 몽골에서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1921년 독립 이후 70여 년 동안 이어온 몽골 인민혁명당(MPRP)의 일당 독재가 1990년에 종식되었다. 1990년 5월 정당법이 채택되어,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0년 7월에는 몽골이 최초의 자유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오랫동안 일당 체제를 유지 해 온 몽골의 정당 정치에 민주화 이후 다른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과 같이 신생 정당들이 많이 등장하였지만, 대부분의 정당들이 의회 진입에 실패하였다. 따라서 몽골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된 7월 29일은 현재 몽골에서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몽골의 정당들은 1992년 첫 의회 선거부터 총 7차례의 선거를 치러 왔다. 몽골 인민당(MPP)은 오랜 역사 및 경험을 가진 정당으로서 선거에 최소한 의석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왔으며, 세 차례의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정권을 잡았다. 반면, 민주당(DP)을 축으로 한 야권은 첫 선거부터 패배하면서 이후 통합 및 선거 연합으로 이합집산을 하여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몽골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면서 다당체계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역대 의회 선거에서 MPP와 DP만이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실제로 양당 체계 및 패권 정당 체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측면에서는 몽골의 민주주의는 잘 정착했지만 시민의 정치 참여도나 예산 집행의 투명성 등은 아직 높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다. 정치를 떠나 사회적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가정 폭력, 여성들의 인권 문제 등 여전히 개선해야 될 점이 있다고 지적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사이에 놓인 내륙 국가다 보니 두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꾸준히 간섭을 받기도 했다. 몽골이 독립 이후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 지대였던 점이 컸다. 그래서 두 국가 모두 견제할 필요가 있는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한다. 공산권의 붕괴 이후, 몽골의 여당이었던 몽골 인민 혁명당은 야당 세력과 합의해 다당제와 자유 선거를 도입했으며 이를 통해 비교적 단기간에 민주화를 달성했다. 몽골이 민주주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로부터 북방민족들이 선거와 비슷한 쿠릴타이 제도로 족장을 뽑은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의 경우 칭기즈칸 이후부터 원나라까지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쿠릴타이 등으로 리더를 뽑는 방식이었는데 물론 지금과 같은 전 국민 직선제는 아니고, 권력을 가진 씨, 부족들이 모여 리더를 뽑는 형식이었다. 일종의 우리 고대 화백 회의와 같은 귀족 정치인 셈인데 이 때문에 몽골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하면 정치적 권위주의는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경제적으로 몽골 국민의 소득은 많이 낮은 편이다. 1990년 대 체제를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 여러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친데다 1990년대 말에 IMF 외환위기가 다가오게 된다. 몽골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경제 성장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사실 공산주의 시절에도 그리 잘 살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이후 체제 변환이 된 다음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넓은 국토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어서 내수가 빈약한 상태다. 특히 경제가 자원 수출에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보니 산업도 다양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 중에서 중국에 대한 자원 수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 중국 경제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몽골 경제를 지탱해주는 원자재 광물 수출 산업도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는 몽골이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국민성과 더불어 몽골 정부 성향에 공산주의의 잔재와 외국에 배타적인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부터가 배타적인 부분이 남아있어 외국 기업을 거의 갈취하는 수준으로 높은 수익금을 요구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일례로 들면 현재 한 호주 기업에서 몽골의 구리 광산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는 몽골 정부에서는 해당 호주 기업에게 모든 개발 비용 지불 및 2030년까지 몽골 정부에게 배당금의 34%를 지불할 것을 조건으로 걸어 놓았던 것이다. 물론 몽골 정부 입장에서는 엄청난 득이 되는 계약이지만 정부가 기업에게 돈을 갈취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계약이었기에 국가 신용도에서조차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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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동유럽, 발칸 5개국 여행기 7(마지막)
    동유럽, 발칸 5개국 관광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과 자그레브 시내 관광을 끝으로 귀국한다. 7박 9일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헝가리, 오스크리아, 체코의 관광지는 웅장함과 화려함의 조화가 이루어졌다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발칸의 두 나라는 동유럽 나라에 비해 강대국이 아니기에 동유럽 나라들이 간직한 화려하고 웅장한 역사적 유물들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동유럽의 번영으로 인한 동유럽의 사람들의 피로감을 발칸에서 풀라는 자연의 조화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걸린다. 가이드 말로는 자주 교통 정체가 발생하기에 정확한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가이드 안내에 따르면 플리트비체 호수는 석회암지대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땅 꺼짐으로 폭포가 형성되어 생긴 호수 지형으로 크고 작은 16개의 폭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상부 폭포 12개, 하부 폭포 4개가 있는데, 우리는 하부 폭포만 둘러본다. 유람선을 타고 큰 호수를 둘러보는 코스도 있는데, 우리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플리트비체 호수 전체규모는 서울의 반 정도라고 하니, 반나절 관광으로는 그 전체를 모두 볼 수 없음은 당연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도착해서 본 첫 번째 광경은 물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높이가 큰 폭포였다. 높이 78m의 벨리키 슬라브 폭포이다. 나를 경탄하게 만든 것은 플리트비체 호수의 물빛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빛이었다. 푸른색이 아니라 에메랄드색, 혹은 비 온 뒤 맑게 개인 하늘색 빛에 가까웠다. 지금은 사진이라는 문명의 기술이 있어서 그 색을 사진에 담을 수 있지만, 사진이 없을 때 화가들은 그 색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졌다. 인간의 생각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낳았지만, 그와 함께 인간의 사고도 변화되었다. 인간의 기억력과 상상력은 퇴보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연의 신비로운 광경을 나는 사진에 담았다. 내 눈의 기억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수를 건너는 다리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아마도 자연보호 차원이었을 것이다. 하부 폭포를 둘러보는 중 위쪽 상부 폭포 쪽의 넓은 호수 위에 유람선이 보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광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큰 유람선을 띄우게 했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숭고미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플리트비체 호수의 자연은 인간에게 고상한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있었다. 에메랄드빛의 플리트비체의 호수는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휴식을 가져다주었다. 호수 위에는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는 오리도 있었다. 물론 물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도 많았다. 에메랄드빛 호수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발길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자그레브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그레브발 인천행 비행기가 두 시간 지연 출발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다시 플리트비체 호수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제는 자그레브에서 자유시간이 늘어났다. 어제는 단체로 자그레브 시내 관광을 했지만, 오늘은 자유여행으로 자그레브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오늘날 내 눈이 유혹하는 대로, 내 발길이 닿는 데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자유여행이 여행의 참 멋이다, 자그레브의 늦은 오후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몇 년 전 영국 런던 여행이 그랬다. 하루는 가이드를 통한 10명 남짓한 단체 관광으로 가이드 설명과 함께 런던 시내를 여행하였고, 그다음 날은 나 혼자 여행하였다. 여행에서의 복습은 여행의 추억거리를 더 많이 간직하게 해준다. 혼자 템즈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었던 기억, 피카디리 광장에서 젊은이들의 거리 공연했던 광경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였다. 가이드는 옐라치치 광장에서 자그레브 대성당까지만 동반하였고, 그 이후로는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자그레브 중앙역에서 자그레브 대성당까지의 길은 반복해서 걸었는 만큼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돌의 문과 그 위쪽에 있는 지붕이 예쁜 성 마르크 성당까지 다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기 위해 이곳저곳 가게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 생긴 터널을 발견하여 그곳도 걸어봤다. 35도에 육박하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터널 안은 시원하였다. 특히 유럽은 습도가 낮아 터널 안은 더욱 시원하였다. 자유여행이 끝난 후에 가이드에게 그 터널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곳을 여름철 자그레브 여행의 필수코스에 포함시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더위를 시키기에는 가장 적당했다. 나는 가게에서 맥주를 사서 아내와 함께 근처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자그레브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우리를 태우고 함께 여행한 버스 기사가 자신의 시간은 저녁 8시까지라고 해서 우리는 저녁 8시 조금 넘긴 시간에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했다. 그 시간부터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6시간을 자그레브 공항에서 머물러야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행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겹다고 생각하면 지겨운 일이지만, 즐기자고 생각하면 그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지겨움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나는 한적한 공항 의자에 누워 면세점에서 산 맥주를 마시며 7박 9일의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꿈만 같았다. 익숙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새로운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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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레바논-이스라엘 전쟁의 여파
    레바논 분쟁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에 있어 큰 분수령이 되었다. 제1차 중동 전쟁 이래 1980년대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아라비아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 인들을 상대로 하여 벌인 전쟁이었고, 팔레스타인 인들이 주체로 참가해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기도 했다. 무장 게릴라 조직인 팔레스타인 페다인(Fedayeen)은 1960년대 중반부터 요르단의 카라메,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군과 대결을 벌였다. 페다인들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1950년대에 주로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민족 게릴라들로 아랍어로 "민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1948년의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창설된 페다인은 1956년에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1978년 리타니 작전, 1981년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당시 페다인은 무장 조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팔레스타인 PLO가 정치, 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한적인 군사 작전으로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82년의 레바논에 대한 침공은 그 목표와 규모, 지속 기간, 손실의 강도, 이후의 정치적 영향 등을 고려해 볼 때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 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쟁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레바논에서 PLO를 축출하고 팔레스타인 조직들의 저항 운동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상황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아파 무장조직이자 정당인 헤즈볼라가 탄생했고,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슬람 혁명수비군에 의해 레바논에서 창설된 시아파 무장조직이다. 이들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침공에 맞섰다. 헤즈볼라는 이란, 시리아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무기 지원도 받아 최대 25,000여 명의 대원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미국에 끈질기게 맞서왔다.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손꼽은 대표적인 테러 단체로 알려졌지만 레바논 내 120만 명의 시아파 주민과 아랍권의 지지를 받고있는 정당이자 무장조직으로까지 성장했다. 헤즈볼라는 2001년 5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할 때까지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오래 지속된 레바논 내전과 관련이 깊다. 1936년 아랍 민병대에 대항하는 기독교 우파 민병대인 팔랑헤 민병대를 창설한 사람이 피에르 제마엘(Pierre Gemayel)이다. 그 아들 바쉬르 제마일(Bachir Gemayel)은 악명을 떨친 “레바논 부대” 사령관이자 팔랑헤당 지도자였다. 바쉬르 제마일은 1982년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9월 14일 팔랑헤당 당사의 거대한 폭발 사건이 발생하면서 폭사당하고 말았다. 이 팔랑헤당 당사 폭발 사건 또한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친형 아민 제마일(Amin Gemayel)이 1982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까지 레바논 대통령을 지냈다. 2006년 11월 21일, 레바논의 반(反) 시리아계 정치인 피에르 제마엘(팔랑헤 민병대 창설자 피에르 제마엘과 동명이인) 산업장관이 베이루트 기독교인 거주지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소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아민 제마일 대통령의 아들이었으며 폭력의 악순환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페다인은 이후, 이라크 지역으로 들어가 이라크의 비정규군으로 활약했다. 페다인은 이라크 남부에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을 자주 기습했다. 이에 따라 미, 영 연합군은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것은 며칠 뒤로 미루고, 주로 페다인 부대 소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페다인 부대원들은 AK-47총과 수류탄 투척기로 무장한 채 트럭을 타고 다녔으며 이들은 연합군의 후방 교란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곳곳에 매복해 있는 페다인들은 지형지물을 잘 아는 점을 활용해 게릴라 전술로 미 보병 3사단과 해병대들을 괴롭히며 다른 저항 조직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거나 투항하는 것처럼 백기를 들고 다가오다가 불시에 공격하는 것도 페다인들의 수법 중 하나다. 페다인들은 2000년대 초반 주로 나자리아, 나자프, 사마와 등 이라크 남부와 중부 도시 인근에서 활동했었으며, 남부 도시 바스라에서 끝까지 남아 저항하는 1,000여 명의 페다인 저항 부대들은 헤즈볼라, 하마스와 꾸준히 연계했었다. 당시 미군은 종종 페다인 부대원들을 실은 긴 차량 행렬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들은 주로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전해왔다. 이들 페다인들의 정식 명칭은 '페다인 사담(فدائيي صدام, 사담의 순교자들)'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에게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주로 16세 이상 젊은층들이고 30,000~40,000명 규모로 나타난다. 2000년대 초까지는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 후세인(عُدي صدّام حُسين)이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우다이는 평상시 페다인 부대를 이라크 국경에서 밀수와 이라크 내 반(反) 후세인 세력을 제거하는 등에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페다인 부대원들은 후세인 치하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후세인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엄청났다. 이라크 전쟁 당시 페다인 부대원들이 이라크군의 투항을 막기 위해 살해 위협까지 일삼았으며 토벌된 2003년 이후, 후세인의 차남 쿠사이가 이끄는 특수 보안대(SSO)에 합류했다. 이들의 수효는 적게 2,000~5,000여 명, 많게는 보안당국과 경찰 인력까지 포함함 100,000명이 있었으며 700만 명의 저항 세력임을 주장하는 예루살렘 여단(القدس)과 같은 비정규군에 속해 꾸준히 미군과 싸워왔다. 현재 페다인의 상당수는 헤즈볼라와 하마스에 합류되어 있는 상태이고, 작은 조직들이 소규모 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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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 네덜란드-포르투갈과의 남만무역(南蛮貿易)으로 인해 동아시아에 도입된 조총(鳥銃)과 뎃포(鐵砲)
    남만무역의 포르투갈 선박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항해로 사용되었으며, 유럽으로부터 직접 동아시아에 온 선박은 없었다. 카피탕 모르의 정기 선박은 당초 갈레온 선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갈레온 선이 침몰한 마드레 데 데우스 호 사건(Madre de Deus 號事件) 이후는, 보다 소형으로 지중해 형의 갈레오타 선을 복수로 사용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무역의 개인 상선은, 중국의 정크선, 카라크(Carrack) 선으로도 불리는 나우(Nao)선 등이 사용되었다. 나우 선은 대부분이 고아나 바사 인에서 건조되었다. 말레이 반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는 데에는 4개월이 걸렸으며, 말라카-중국-일본 왕복 항해는 1년이 걸렸다. 17세기 문헌에서 마카오로부터 온 선박은 아마카와센(天川船)이나 난반센(南蛮船)이라고 불렸으나, 포르투갈선(葡萄牙船)이라고 하는 선박은 없었다. 마카오 상인은 아마카와인(天川人)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하여 같은 시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선박은 오란다센(阿蘭陀船)이라고 불렸다. 마카오로부터 온 선박의 승원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국가로서 인식하기 어려웠다. 남만무역에 대하여 일본인이 본 포르투갈 인(남만인)의 호화로운 복장은 거의 아랍 복장이며, 어깨를 늘린 상의인 주반(じゅばん)은 아랍어 “줍바(Zubba)”에서 왔다. 크게 부푼 즈봉(ズボン)으로 기장이 발목까지 내려 온 시르왈(Sirwal), 하렘팬츠(Harem pants)도 아랍 복장이다. 남만문화에 있어 종교 이 외의 부분은 아랍 문화의 요소가 매우 강하다. 1543년 시암(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의 배 한 척이 일본 큐슈 남쪽 다네가 섬(種子島)에 표류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인이 일본에 뎃포(鐵砲)를 건네주었다. 그것이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鳥銃)이었다. 조총이 일본에 전해진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1543년 8월 25일,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 섬 서남단 가도쿠라 곶에 표착했다. 당시 상황은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가 1606년에 쓴 <철포기(鐵砲記)>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으로써 왜구의 수장이었던 왕직(汪直)이 중국 영파(寧波)에서 출항했는데, 승객 중에는 포르투갈 인 2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후 함선은 역풍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큐슈 가고시마 현 다네가 섬에 도착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인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들은 그 때까지 일본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화승총을 가지고 왔다. 길이는 2~4척(尺)이었고, 가운데는 뚫려 있었으며 아래는 막혀 있었다. 옆의 구멍에 화약을 넣고 작은 총알을 넣으면 바로 발사될 수 있었었다. 총을 발사하면 빛이 나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에 모두 귀를 막아야 했다. 이 화총(火銃)은 일본인들이 그 동안 사용했었던 명나라의 총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다. 일본인들은 그 총을 남만뎃포(南蠻鐵砲)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인을 ‘남쪽 오랑캐’라는 의미로 남만이라 불렀다. 일본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 일본에 철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네가 섬의 영주인 시케토키(惠時)와 도키다카(時曉) 부자는 총의 위력에 감탄하며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동시에 제조법과 사용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장인 야이타 기요사다(八板淸定)에게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요사다 장인은 실패했다. 이듬해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에 오자, 기요사다는 그들에게서 다시 제조법을 배웠고, 첫 화승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야이타 기요사다는 ‘사쓰마 뎃포’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총은 머스켓(Musket) 총의 일종으로, 탄약을 앞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는 전장식 소총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오스만투르크가 먼저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는 1475년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신에 강선이 없기 때문에 현대의 총기류처럼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일본은 서양에서 머스켓 총을 전달 받은 지 1년여 만에 자체적으로 기술을 습득하여 제작하게 되었다. 6세기 동아시아에는 유럽인들이 진출하면서 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먼저 서양과 접촉한 현지 세력이 분열을 극복하고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태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자바의 마타람 왕국, 수마트라의 아체 왕국, 베트남의 레 왕조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지배자들은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교역을 활용해 큰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새로운 무기와 군사 기술을 습득해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나갔다. 그리고 부족 중심의 연맹체를 강력한 왕권 하의 절대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일본도 서양의 아시아 진출 시기와 동시에 통일체로 형성해 나갔다.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등이 국제 무역 세력을 흡수하고, 조총(鳥銃) 등의 새로운 군사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통일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 새로운 무기는 일본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뎃포(鐵砲)를 처음으로 접한 다네가 섬 영주가 모조품을 만들자, 전국 다이묘들이 서로 경쟁하듯 뎃포 제작에 나섰다. 일부 다이묘들은 뎃포와 그 제작 기술을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독점하려 했다. 분고국(豊後國)는 사이카이도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오이타 현에서 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에 해당한다. 7세기 말, 도요국(豊国)을 분할하여 부젠국(豊前国)과 함께 설치되었다. 일본인들은 꾸준히 조총을 개량했다. 나사를 만들고, 초석을 제조하는 기술을 연구, 개발했다. 정확하게 측정한 화약과 총알을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나무 통에서 화약과 탄환을 꺼내 신속하게 장전, 발사하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은 포르투갈에서 처음 수입했을 때보다 월등히 성능이 우수한 조총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어 각 다이묘들은 대형 화승총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1573~1574년경에는 오뎃포(大鐵砲)라는 긴 조총이 등장해 전투에 적극 활용되었다. 일본 전국시대 군웅들 가운데 뎃포 제작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무역과 뎃포 제작의 중심지인 사카이(堺,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국을 지배할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뎃포 부대 육성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3월,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일본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일본도 등을 선조에게 진상했다. 당시의 정황을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전하께서는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고 적기도 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무기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인들과 접촉이 없었던 데다 일본을 통해 무기가 들어왔지만, 선조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선조가 이러한 일본의 신무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중화의 질서에서 변방국이 진상하는 무기를 얕잡아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은 그 무기를 시험해 봤어야 했고 시험을 통해 조선의 기술로 1년이면 개발에 성공해 다가올 왜란에서 적극 활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선 조정에서는 유성룡을 제외하고는 그 무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는 200년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무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조선의 군 수뇌는 조총의 위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초반 전투들에서 참혹하게 궤멸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왜군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따로 개조하여 조선만의 화승총을 만들어 무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대는 효종 시기, 청나라의 요청으로 만주로 출병해 러시아 코사크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해 그 위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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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 필자의 2024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방문,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평가
    2024년 베오그라드에 4년 만에 왔었는데 몰라 볼 정도로 바뀐 부분이 많았다. 우선 버스터미널 뒤쪽에 신규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건설 중이고 꿉꿉한 냄세에 지저분해 보였던 터미널이 아주 깔끔하게 바꼈다. 물론 터미널 건물은 예전 그대로지만 주변 환경이 깔끔해졌고 쓰레기 넘쳐났던 곳은 완전 깨끗해졌다. 이 모든게 알렉산드르 부치치 대통령의 노력 덕분이다. 고대 시대에 베오그라드는 싱기두눔(Singidinum)이라 불렸다. 로마가 지배하기 이전에는 켈트의 일족인 일리리아 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달리 세르비아와 싱기두눔이라 불렸던 베오그라드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의해 쉽게 정복되었다. 로마 인들이 일리리아 인들과 트라키아 인들을 감독하기 위해 싱기두눔 요새를 축조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 찾기 힘들다 한다. 그리고 세르비아 고고학계에서 그 흔적 찾고 싶어도 그곳에 쏟을 국가 예산은 부족한 실정이다. 375년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고트 족에게 장악되었다. 이들 고트 족을 역사에는 비시고트(Visigothi), 혹은 서고트 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서고트인들은 훈족의 침입에 의해 이탈리아로 밀려나고 훈족은 이곳을 장악하여 영유화한다. 그리고 아틸라의 삼남 이르네크의 중심영토로 분봉되었다. 그러나 이르네크가 동고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함으로써 이 싱기두눔은 동고트의 땅이 되었다. 이후 비잔틴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가 아바르 족, 카를루스 대제의 프랑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제1 불가리아 제국의 크롬 칸에 의해 함락된다. 베오그라드는 이후 불가리아가 멸망할 때까지 불가리아 땅이었다. 그러나 1018년 제1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자 잠시 헝가리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스테판 네마냐를 중심으로 일어난 남슬라브인들에게 탈환되고 도시 이름도 싱기두눔에서 슬라브식 이름은 베오그라드로 바뀌게 된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르비아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면서 베오그라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베오그라드는 전략적 거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역사상 115차례의 전투와 44차례의 파괴가 벌어지면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침략과 파괴를 당한 도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지금까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베오그라드는 그러한 생명력으로 인해 세르비아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베오그라드 신시가지 또한 스마트하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깔끔해졌다. 이는 세르비아 정부가 2000년 코소보 전쟁 이후 나토와 유엔에게서 받은 경제 회복 지원금으로 구획한 계획 도시였지만 그동안 지지부진했다가 중국의 투자를 받으며 급속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코소보 전쟁으로 피폐한 세르비아 정부는 나토와 유엔에게서 경제 회복 지원금 및 피해 복구 지원금 등을 받아 실제로 경제 회복이나 국민들 구제하는 비용으로 쓰지 않고 신도시에 투자했다. 그러나 EU 회원국이 아니기에 유로나 나토의 투자에는 한계가 있었고 지지부진하는 바람에 베오그라드 터미널과 역 부근은 완전 귀신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황폐화 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10년 전인 2014년 기준으로 1인당 GDP는 5,350불로 유럽의 1인당 GDP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사실상 거의 최하위 수준에 가까웠다. 특히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 놓고 볼 때 몬테네그로와 함께 경제규모 세계 100위권에 속해 있다. 게다가 IMF의 구제 금융도 받고 있는 실정에 있었다. 신시가지는 본래 상당한 양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던 곳이다. 세르비아 정부는 2003년부터 지뢰들을 제거하고 신시가지를 구획했는데 17년동안 멈춰있었다. 그리고 신시가지에 존재하는 삼성 세르비아 본사도 2005년부터 들어와 있는데 신시가지를 만든 이후에 지금까지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면서 완전한 신시가지를 구획했지만 상당히 느리게 진척되었다. 그리고 자주 중단이 되곤 했기에 사실상 방치에 가까웠었다. 그런데 부치치 대통령이 중국의 투자를 끌어내면서 방치에 가까웠던 신시가지 개발이 속도를 냈다. 5년 전만 해도 완벽한 상태의 신시가지 구축이 되려면 앞으로 20년이 더 있어야 한다고 코로나 기간동안 속도를 내어 3년 만에 완성하는 기적을 일구었다. 정부의 과학기술센터, 연구센터 등이 들어왔고 서민들을 살게 할 대규모 아파트 건설 등도 계획되어 계속 짓고 있다. 계속 건물들이 올라가는 신시가지를 보면서 한국 뉴스에 전해지는 것과 달리 세르비아가 이전 EU나 나토, IMF 등에 빨대 꽂힘을 당할 때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남았다. 시내 중심에 들어와 보니 지난 2010년 대에 방문했을 때 베오그라드가 생각난다. 당시 2010년대만 해도 이와 같은 활기찬 도시는 꿈에 불과했다. 시내에는 밤새도록 흥겨운 음악 등과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이는 이 도시가 활기를 되찾았다는 뜻이 된다. 코로나 이전에는 특유의 회색건물과 꿉꿉한 냄세, 활기를 잃어버린 거의 죽어가는 환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4년 만에 바뀌었다. 다만 거리 곳곳에 지저분히 남아있는 그레피티만 좀 어떻게 처리 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비아와서 언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는 그냥 공용어처럼 일상화로 쓰인다. 중국어도 정말 많이 들린다. 그리고 시민들의 미소도 되찾은 듯 싶은게 어딜 가든 반갑게 맞아준다. 2000년대, 2010년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우울함을 보지 않은 사람은 2020년대의 이와 같은 세르비아의 확 달라진 풍경의 감격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자들은 부치치 대통령이 독재한다고 생각하며 발칸의 독재자로 여긴다.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세르비아가 부흥했다. 이처럼 겨우 사람 구실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현 부치치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 그는 진정 걸물이다. 지도자를 잘 뽑으면 나타나는 현상을 세르비아가 보여주고 있다. 나토나 EU, 미국이 뭐라하던, 부치치 대통령은 뚝심으로 그냥 밀고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실제로 돌아보니 지금까지 아주 잘하고 있다. 게다가 부치치 대통령은 1970년생, 55세로 젊은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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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9
  • 베네수엘라를 반미 국가로 만든 인물,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1954~2013) - (1편)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남미 최대의 반미(反美) 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지금은 니콜라스 마두로가 대통령이지만 마두로의 반미 성향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차베스다. 한국인들에게 마두로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로, 베네수엘라의 64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반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차베스 또한 애초부터 반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1954년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에서 태어났으며 학창시절에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를 꿈꾸던 순수한 야구 소년이었다. 차베스는 마침 육군에 야구선수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에 건너가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이 가난했기에 야구선수보다 더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 야구선수의 꿈을 접고 직업군인이 되었다. 차베스는 야구선수가 되지 못했지만 육군 장교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베네수엘라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선수로 참여했고, 선수로써의 성적인 시원치 못했지만 대통령에 재임했을 때, 베네수엘라 야구 국가대표팀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이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에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지 기옌이 맡아 2005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에 성공하자 국가기념일까지 만들어 대대적으로 축하하기까지 했다. 차베스는 육군 장교가 된 이후,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시킨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에게 큰 매력을 느껴 볼리바르 대학 정치학과에 재직하여 그를 연구했다. 그리고 당시 형인 아단 차베스(Adan Chávez)가 사회주의 좌파 성향이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차베스는 좌파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군 내부에서 부패 문제가 매우 심각해지자 여러 좌파 지식인들과의 만나게 되면서 볼리바르-200(Bolívar-200)이라는 정치 군인 단체를 만들고 '볼리바르 사상'을 주입시켰다. 그 후의 차베스는 군사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해 비판했다. 이 시기에 마침 유가 하락과 더불어 외채위기와 더불어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크게 후퇴했는데, 당시 베네수엘라 정부는 변변한 대책을 내세우지 못해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 때부터 차베스는 정열적으로 강의를 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시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으며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차베스는 육군 수뇌부와 정부에게 찍혀 콜롬비아 국경 지대로 전출되었고, 이에 콜롬비아 국경 근처에서 민군협력증진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여했다. 그는 1988년에 중앙군으로 복귀하여 승진했다. 이후 대통령궁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정치인으로써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좌파긴 했지만 군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등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는 아직 군에서 그의 세력이 매우 약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한편 같은 시기에 카를로스 페레스(Carlos Pérez) 대통령 때 경제가 계속 하향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여당인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은 여론에서 매우 불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페레스는 이전에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경험(1974~1979)이 있었으며 그는 매우 뛰어난 선거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 야당인 기독사회당(Partido Socialcristiano)이 서로 분열하는 행운까지 겹치며 과반으로 득표해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페레스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아들였고 이 구제금융으로 인해 교통비와 석유값을 보조하는 정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따라서 당시 순식간에 물가가 2배 이상 오르게 되었고 이와 같은 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빈민층들의 시위가 크게 발생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수백명이 사망하는 일명 "카라카스 참사"가 발생했다. 그 이후에도 페레스의 실정이 이어지면서 차베스는 페레스 정권을 완전히 전복시킬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3년 뒤인 1992년 페레스 정권의 지지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레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부패 혐의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워 현역 중령으로써 10% 정도의 군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페레스 측의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쿠데타가 진압되어 페레스 정권에 투항하는 조건으로 방송 연설을 할 기회를 얻었다. 이 때 차베스는 자신의 동료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며 지금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것이라 주장하면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 같은 연설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 2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라파엘 칼데라(Rafael Caldera, 1916~2009) 정권 시대에 보석으로 사면되었다. 라파엘 칼데라의 이념이 비록 보수에 가깝긴 했어도 재선 당시에는 일부 좌파 정파의 지지를 받던 상태였기 때문에 사면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라파엘 칼데라 입장에서는 페레스 대통령의 부패 혐의도 입증되긴 했으니 굳이 차베스를 더 투옥시킬 이유가 없었다. 차베스의 쿠데타는 베네수엘라의 정치 체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베네수엘라는 사실 오랜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이에 빈발하게 발생하던 쿠데타와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해 체결된 "푼토 피호 협정(Punto Fijo Pact)"이 발표된 이후 1958년부터 양당 체제 하의 정권 교체가 계속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차베스가 쿠데타를 기도했을 당시 푼토 피호 협정이 맺어진 34년 째 되던 해였다. 당시 방송 연설로 유명인이 된 차베스는 옥중에서도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운동을 주장해 당시 대통령인 라파엘 칼데라의 득표율보다 높은 기권율 40%를 기록하는데 공헌했다. 이어 1994년 라파엘 칼데라의 사면으로 인해 출소한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간 이후에도 한동안 선거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1997년 들어 생각이 바뀌어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이애 군소 정치조직에 불과했던 볼리바르 혁명 200 (Revolución bolivariana 200)을 확대 재편했다. 원래는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이름 그대로 정당을 창당하려고 했지만 1997년 5월 베네수엘라 법원에서 볼리바르를 당명으로 사용할수 없도록 판결을 내려 당명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제5 공화국 운동(Movimiento de la Quinta República)이라는 정당을 창당했으며 사회주의 운동당(Partido del Movimiento Socialista), 애국당(Partido Patriótico) 등과 좌파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3자적 정책 노선으로 공약으로 내걸고 모라토리엄 선언과 사회주의적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자본주의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는 뜻인 3자적 정책 노선이 아니라 그 이름만 차용했을 뿐, 실질적인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갔다. 당시 뚜렷한 비전과 더불어 투박하면서 열정적인 연설 등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가며 지지율을 올렸다. 1998년에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Hugo de los Reyes Chávez)를 바리나스 주지사로 당선시켰고 그 이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약진했다. 그러나 의회 다수는 차지하지 못했다. 이어서 치러진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는 드디어 56.2%의 득표율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 미국이 급진적인 공약과 과격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인해 경고성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차베스는 1996년에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비자발급을 신청했지만 1992년 쿠데타 시도를 이유로 미국 방문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다. 차베스는 정책 노선 외의 이유말고도 개인적으로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차베스는 1999년 2월 2일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정부의 주요 요직으로 곧바로 자신의 지지자들과 좌익 연립 정당의 인사들을 임명했다. 이에 볼리바르 혁명 200의 창당인으로 알려진 헤수스 우르다네타(Jesús Urdaneta)는 국가정보국장(DISIP)에 암명했으며 쿠데타를 일으켰었던 전 동료 에르난 그루베르 오드레만(Hernán Gruber Audreman)은 카라카스 주지사에 임명했다. 이른바 절대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인 볼리부르게시아(Boliburgesía)라는 자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차베스는 대통령 당선 이전에 치루어진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소야대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베네수엘라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은 날에 치르는게 관례였으나 차베스의 갑작스러운 약진에 위기를 느낀 의회가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선거보다 한 달 일찍 치르도록 변경했고 그 결과 베네수엘라 의회는 야당이 다수가 되어 여소야대가 되었다. 차베스는 이미 선거 운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었고 이에 개헌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볼 때, 양원제로 구성되어있던 베네수엘라 의회를 단원제로 개편하고,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화시키면서,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연장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연임을 허용하는 것이다. 임기의 6년 연장과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프랑스 제5 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에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던 문제의 개헌 안도 프랑스 헌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연임에 관한 부분은 제4 공화국 시절에 대통령의 재선은 허용되어 있었지만 연임은 불가능했기에 이를 대폭 수정한 것이다. 이어 야권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의회를 대체하여 새로운 제헌의회 선거에서 여당 연정이 압승을 거두었고 개헌에 성공한 뒤 기존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 한 이후에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59.8%라는 득표율로 역시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동시에 치러진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도 과반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1선에서 지지기반은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이었다. 이후에 여러 가지 차베스의 정책 실패에 겹쳐 중산층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 차베스가 원유 가격의 상승을 위해 여러 반미 지도자들과 회동을 가졌으며 차베스는 여러모로 급진적인 정책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오히려 반 차베스파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차베스는 매우 성급하게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이미 의회에서 여당 연정이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론 과정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연정 내부에서도 이탈자들이; 속출했고 결국엔 이들 이탈자를 맞아 들인 차베스의 반대파들이 세력을 크게 키우는 결과로 나타나면서 연립 여당까지 합쳐 의석 100석을 넘던 여당은 80석 대 중반으로 내려 앉았으며 야당진영은 70석 대 후반까지 불어나게 된다. 결국 이 시기부터 의석이 불어난 반대파의 저항으로 인해 차베스는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1년 하반기부터 반대파의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었고 특히 2002년 우파 정치 군인들의 쿠데타 시도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쿠데타는 대다수의 언론과 대기업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여론 지형상, 반 차베스파가 차베스에게 우위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도 세력이 극우세력이라 차베스 반대파 내부의 중도파와 좌파가 배제되었다. 특히 차베스가 내걸었던 49개의 개혁법들을 모두 무효화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밝히면서 주요 야당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차베스가 대통령 사퇴서를 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차베스 딸의 통화 내용이 유출되면서 이 또한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에 차베스파 정치 군인들이 반발하고 빈민들 30만 명이 차베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쿠데타에 대한 규탄 시위를 벌이게 된다. 물론 처음에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결국 시위 진압에 실패하고 또한 장기간의 내전을 우려한 쿠데타 주도 세력들이 항복하여 결국 쿠데타는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차베스는 국정에 복귀했다. 언론에서는 RCTV가 가장 강렬하게 차베스를 반대했다. RCTV는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방송국이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일방적으로 편파보도를 일삼다가 쿠데타를 진압한 차베스가 복귀하자 하루 종일 뉴스 프로그램을 보내지 않고 예능 프로그램으로 대체했다. 이후, 2004년 국민투표까지 차베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결국 2007년 재허가 심사에서 떨어졌고 현재는 일개 케이블 TV 방송국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물론 지상파 방송권 박탈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당이 2005년 총선을 보이콧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가 힘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패배한 베네수엘라의 야권에서는 2010년 총선에 적극 참여하여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 때 언론에게 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차베스는 쿠데타 진압 이후, 자신의 편을 들어준 공동체 방송국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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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9
  • 미국이 노리는 베네수엘라 원유의 현황
    현재 국제 정세는 매우 불안함의 정점을 찍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토벌하기 위해 가자 작전을 도입 중이라 중동 정세도 매우 불안한 상태다. 특히 중동 내 분쟁은 현재 불안하면서도 잠잠한 상태로 국제 유가는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함의 연속이다. 특히 중동에서 분쟁이 중동 각국으로 번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나 북중미 국가들이 석유를 안정적으로 수급 받을 수 있는 국가가 바로 베네수엘라이다. 베네수엘라는 1920년 대에 처음으로 석유를 생산했으며 전통적으로 5대 산유국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928년에는 세계 2위 석유 생산국이자 세계 1위 석유 수출국이 되었으며 석유가 베네수엘라 전체 수출의 80% 책임졌다.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재정 수입의 42%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미 함정과 전투기에 원유를 공급해 미국의 승리에 어느 정도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 1960년에는 세계 5대 석유 수출국이었던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와 함께 OPEC을 창립하였다. 초기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은 외국 기업이 주도했다. 이는 석유 추출 기술과 정제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후 석유 부문에서 여러 개혁을 시도하면서 석유 추출 기술을 습득하자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1943년에는 탄화수소법(Hydrocarbon Law)을 시작으로 외국계 기업들은 조세 및 조세를 준하는 명목으로 석유로 인한 수익의 절반을 베네수엘라 정부에 상납하도록 하였고, 5년 사이에 정부의 수입은 6배나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5개월 동안 OPEC의 금수조치가 발생하자 유가가 4배로 상승하였고 이는 베네수엘라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유가 상승의 호황에 힙입어 2년에 걸쳐 100억 달러가 국고로 흘러 들어오게 되어 베네수엘라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유함은 독재와 자산의 부실 관리 온상이 된다. 1972년과 1997년 사이에만 무려 1,000억 달러가 횡령되었으며 이러한 부패와 무분별한 포퓰리즘 정책이 겹쳐 베네수엘라의 경제 체제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1976년 유가 호황 속에서 당시 베네수엘라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Carlos Andrés Pérez, 1922~2010) 대통령이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석유의 탐사와 생산, 정제, 수출을 모두 감독할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 회사 Petroleos de Venezuela S. A.(약자, PDVSA)를 설립하게 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PDVSA가 합작 투자에 대한 지분 60%를 보유하는 조건으로 외국의 석유 회사와 협력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정부 규제로 운영되도록 구조화 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위축되었고, 인플레이션이 치솟으며 석유에 의존하던 베네수엘라의 경제력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미국의 Citgo 등 외국 정유 회사들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외채가 누적되면서 베네수엘라에 위기가 찾아왔다.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는 2014년 국제 유가가 폭락했을 때였다. 100달러 이상에 달하던 유가가 거의 반 토막 났을 때, 베네수엘라 정부 수입의 주요 원천인 석유가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당시 석유를 대체할 경제 자원을 다각화하지 못한 차베스 정부와 그 후계자인 마두로 정부의 경제 관리의 부실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 부문을 노리고 있었던 미국이 제재를 가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이어지자 베네수엘라는 거의 10년 동안 경제 위기에 처해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의 베네수엘라는 실패한 석유국가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Energy Institute의 발표에 의하면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벨트(Orinoco Belt)에서만 2020년 기준, 확인 매장량을 2,618억 배럴로 알려졌다. 이는 전 세계 15.1%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벨트(Orinoco Belt)에 분포하는 원유는 생분해(Biodegradation)로 인해 가벼운 탄화수소가 사라지고 무거운 탄화수소 성분만 남은 초중질유(Extra Heavy Crude Oil, 重質油)다. 이는 경질유보다 회수율도 낮고, 정제와 수송도 어려워 경제적인 매력이 떨어지는 원유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중질유를 생산할 때는 특화된 생산 기술이 필요하며, 일반적으로 수송하는 파이프라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콘덴세이트(Condensate)나 나프타(Naphtha)와 같은 희석제를 첨가하여 중질유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희석된 제품 수입에 따른 생산 비용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베네수엘라의 원유는 손이 매우 많이 가는 유종이라여러 가공을 거쳐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이 베네수엘라 원유를 노렸던 이유는 가격이 저렴하고 수입해 들어오는 산유국 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제재로 인해 돈줄이 막혔을 때, 희석제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으려는 긴 줄이 늘어서고, 주유를 위해 1~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이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답지 못한 모습이었는데 그만큼 베네수엘라의 원유는 희석제의 정제가 필요한, 손이 많이 가는 원유인 것이다. 지난 17년 동안 미국은 베네수엘라 정부와 개인 회사들, 특히 석유 회사들에 대해 제재를 가해왔다. 2006년 조지 W. 부시 정부가 미국의 모든 상업용 무기 판매를 금지하였는데, 이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약 조직에 대한 대테러와 미국에 뿌려지는 마약을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에 협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베네수엘라에 대해 제재를 강화해왔다. 특히 2018년에는 트럼프 1기 정부는 베네수엘라 대선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대선 다음 해인 2019년부터 마두로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인 PDVSA의 미국 내 70억 달러(한화 약 9조 2,050억 원) 규모의 자산을 동결시키고 석유 대금 송금을 금지하는 등의 최악의 제재를 결정했다. 이 때 셰브론(Chevron)에게도 베네수엘라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으며, 자국 내 기업이 베네수엘라와 어떤 형태로든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이에 마두로 정부도 2019년 미국과 정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국교도 단교했다. 이로 인해 천문학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시설이 노후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제재까지 겹치자 20여 년째 희석제가 수입되지 않는 등, 극심한 연료난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에 가한 제재는 베네수엘라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미국 회계감사원(U.S. 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에 의하면, 2019년 PDVSA에 부과된 제재로 인해 베네수엘라의 GDP가 35% 축소되고 경제 붕괴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석유 생산량은 1990년대 320만 b/d에서 2018년 140만 b/d 미만으로 오랫동안 감소해 왔으며, 석유 제재의 여파로 더욱 감소하여 2021년에는 55.8만 b/d까지 감소하였다. 2022년 11월부터 셰브론(Chevron)의 운영 재개를 허가하면서 생산량은 다소 증가했고 2023년 5월, 13.5만 b/d 증가하였다. 그러나 회복이 더디었기 때문에 3개월 연속 생산량이 감소하는 등 등락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OPEC 보고서에 따르면 원유 생산량이 2023년 9월, 73.3만 b/d로 7월 79만 b/d, 8월 75.8만 b/d에서 점차 감소했다. 베네수엘라 초중질유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희석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으로 인해 기술적인 문제로 생산량이 감소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따라 다수의 기관들이 베네수엘라의 단기적인 석유 생산량 증가는 셰브론(Chevron)과 PDVSA가 합작 운영하는 유전에서 대부분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셰브론(Chevron)은 2024년 초부터 추가적으로 시추하고 있다. 이처럼 셰브론(Chevron)을 포함한 기업들의 노력으로 단기적인 생산량 성장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듯 싶다. 하지만 장기간 자본 투자의 부재, 기반 시설의 정기적인 유지 보수 관리 부족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 향상을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프라의 수리 및 관리, 인력 재고용도 시급한 문제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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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9
  • 사상 최대 규모의 "살육"이 예상되는 이스라엘의 "가자 점령 작전"
    최근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 점령을 위한 '기드온의 전차 작전' 2단계에 돌입했다 한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20일 가자지구 북부의 인구 밀집 지역인 가자 시티 외곽을 점령했다. 이스라엘군은 이 지역에 추가 병력을 투입한다고 발표해 가자 시내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살육"이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지난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 갈릴리의 평화 작전(Operation Peace for Galilee)이라고 불리는 작전에서 "샤브라사틸라 대학살"이 발생한다. 당시 갈릴리의 평화 작전(Operation Peace for Galilee)은 예수의 탄생지인 나사렛이 있는 갈릴리라는 지명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조합했다. 1982년 6월에 시작된 이 레바논 전쟁은 10주를 이어가다가 8월 12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의 베이루트 철수를 위한 최종 조건이 성사되면서 8월 말부터 9월 1일 사이에 PLO 전사들 수천 명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여 종결되었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 3만 명은 마침내 레바논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보통 제5차 중동 전쟁에 해당되는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개시일을 6월 6일로 보고 있으나, 실제 전쟁은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 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포격을 감행했던 6월 4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에 주재하고 있던 이스라엘 대사를 암살하려 했던 사건에 PLO가 관련되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 암살 미수 사건의 주체는 PLO에 매우 적대적으로 나타나면서 이스라엘이 뒤에서 몰래 지원하고 있던 급진 무장조직인 아부니달(Abunidal)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PLO를 더 위협적으로 보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사건의 주범이라 몰아세우며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진범이 누군지 알고 있었음에도 PLO를 제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이는 매우 이스라엘다운 비열한 태도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이스라엘의 수상이 된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1928~2014) 당시 국방장관이 레바논에 대한 침공을 지휘했다. 레바논 남부 지방은 PLO의 거점으로 PLO가 상당수의 팔레스타인 난민과 반 이스라엘 성향이 강한 레바논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 이스라엘 투쟁을 해 오던 거점이었다.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목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투쟁이 벌어지는 전략 사령부인 PLO를 레바논에서 축출하여 사실상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 남부의 PLO와 교전을 하면서 레바논 남쪽 영토를 침공했다. 이스라엘 영토와 레바논 영토 양쪽에서 다수의 민간인 사망자들이 발생했으며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여 시리아 주둔군의 대공미사일 포대를 포격해 파괴해버렸다. 이스라엘은 베카 계곡의 시리아 군 기지를 공습해 파괴하고 PLO와 전투를 벌이면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이스라엘은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인 거주지역이 주를 이루는 도시 전체에 대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와 같은 무법적인 행동은 제네바 협약과 헤이그 협약으로 성문화 된 국제 인도법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폭격은 전쟁범죄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메나힘 베긴(Menachem Begin, 1913~1992) 수상은 1981년 7월의 대규모 공습으로 인해 베이루트의 건물 한 채가 파괴되고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민간인 지역에서 게릴라 목표물을 공격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적이 있다. 이어 당시 8월 5일 로널드 레이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베긴은 강력한 군대가 무고한 민간인들 사이에서 히틀러와 그의 심복들이 지하 깊숙한 벙커에 은신해 있는 베를린을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베긴을 비롯한 이스라엘 수뇌부들은 민간인들을 상대로 히틀러와 나치가 자신들에게 행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팔레스타인인에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베이루트 포위 공격이 끝나갈 무렵인 8월 6일에는 베이루트의 한 아파트에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다녀간 이후, 이스라엘의 폭격기들이 잇달아 공습을 했고,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휴전을 하였고, PLO는 레바논 내전 중에 PLO의 우호적 조직이 되었던 같은 이슬람 조직인 레바논 민족운동(NLM, National Liberation Movement)의 동맹자들과 함께 전장에 남았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 포위 공격의 중단을 위해 PLO의 레바논 철수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스라엘 군이 수도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후, 레바논의 경제는 크게 악화되었다. 전쟁은 6월 6일부터 7주 동안 이어지면서 PLO가 레바논에서 철수한 8월 12일에 휴전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집요하게 압박하자 아랍의 각국 정부들은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 PLO는 어쩔 수 없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미국은 동맹국인 이스라엘에게 1981년과 1982년에 걸쳐 14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원조를 제공하게 된다. 이 14억 달러라는 돈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는데 사용한 미국산 첨단무기들과 군수물자를 축적하기 위한 금액으로 이용되었다. 이스라엘이 행한 베이루트 포위 공격 기간에 요르단 강 서안의 절반 지역이 이스라엘 군의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고 넓은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며 5만여 명 이상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강한 무력을 가진 이스라엘 군의 레바논 철수를 관철시키면서 PLO가 염려한 민간인 학살을 예방하기 위한 조항을 문서로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공격을 가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안전보장을 요구한 미국 관리들에게는 구두로 난민들에 대한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약속을 보장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이 약속한 안심은 결국 사브라샤틸라(Sabra Shatila)의 대학살로 인해 철저히 어겨졌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협의를 거쳐 1985년 2월 레바논에서 철수했지만 남부 레바논 지역에는 팔레스타인 PLO 게릴라들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2000년까지 일부 병력을 잔류시키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국경을 넘어 리타니 강과 접하는 지역들을 이스라엘 군은 남부 레바논군과 함께 지배하게 된다. 레바논 전쟁의 최대 비극은 이스라엘과 PLO의 전투 가운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이스라엘 군이 보호하고 있었던 극우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Falange)의 샤브라사틸라 난민촌을 습격한 사건으로 이어진 대학살로 나타났다. 샤브라사틸라 학살 이전에 개전 초기에는 이스라엘 군이 4만여 명이 거주하는 레바논 최대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시돈 근처를 공격하였고, 난민들이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난민촌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6년에는 텔 알자타르(Telaljatar) 난민촌에서 팔랑헤 집단들이 난민 2천여 명을 학살한 적이 있다. 이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한 국제 인도법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전쟁 범죄라 볼 수 있다. 팔랑헤 집단은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레바논 민병대이다. 이들은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으로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샤브라사틸라 난민촌을 공격해 엄청난 수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했다. 9월 16일부터 18일 아침까지 민병대원들은 1,3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후일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이스라엘 군은 야간에 조명탄까지 쏘아 난민촌 일대를 밝히면서 팔랑헤 집단의 학살을 적극 지원하고 철저히 묵인했다. 당시 팔랑헤 집단을 통제할 수 있는 책임자는 이스라엘 국방장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한 아리엘 샤론이었다. 샤론은 예루살렘에 있는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이슬람에 대한 모욕적 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제2차 인티파다의 계기를 만들었다. 샤론은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있어 최악의 학살자이자 현재 네타냐후보다 더한 인물이다. 샤론의 행위는 오히려 네타냐후가 천사로 보였을 정도다. 아리엘 샤론은 전쟁 범죄자지만 후일 이스라엘의 수상이 되어 대 팔레스타인 강경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스라엘 대법관인 이츠하크 카한(Izkhak Kaha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샤브라사틸라 학살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을 당시, 아리엘 샤론과 메나힘 베긴, 기타의 고위 장성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후에 더 밝혀진 기록들에 따르면 아리엘 샤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대량 학살과 팔레스타인인들을 중동에서 추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팔랑헤 집단에서 학살에 숙련된 자들을 난민촌에 투입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 레바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군 8개 사단, 12만 명이 넘는 병력이 참여했고 이스라엘 군은 657명이 사망하고, 3,887명이 부상을 입었다. 레바논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 민간인들이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으로 19,00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30,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레바논 전쟁은 현재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가장 인기가 없는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전쟁광인 이스라엘 국민이 볼 때도 1982년 레바논 침공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PLO의 레바논 철수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레바논 국민들이 반이스라엘 전선을 형성하게 했고 헤즈볼라가 창설되어 대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을 야기한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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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9
  • 동유럽, 발칸 5개국 여행기 6
    오늘은 오스트리아 잘츠 부르크를 출발하여 슬로베니아 블레드로 이동한다. 블래드 성과 블레드 호수의 환상적인 조화를 감상하기 위해 버스는 우리를 싣고 아침부터 4시간이나 달린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후에는 또다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반 엘라치치 광장과 자그레브 대성당 등을 관광하기 위해 3시간이나 달린다. 지나온 5일간의 관광지를 머리에 떠올려 보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에서 본 여러 성과 성당들이 모두 겹쳐서 머리에 떠오른다. 사실은 하나하나가 매우 훌륭한 관광지이지만, 그것들을 음미해 볼 시간도 없이 연이어 관광하니 혼란스러움은 당연했다. 음식물을 소화할 시간도 없이 또다시 음식물을 내 입속으로 가져다 넣는 꼴이다. 빨리빨리! 우리의 여행문화일까? 선택은 내가 했기에 그동안의 여행 추억을 소화시키는 것은 나의 몫이다. 함께 여행하는 예비 신혼 부부 한 쌍은 요즘은 여행 일정과 예약만 해주는 여행사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리고 단체 관광이 경제적이어서 이번 일정을 선택했다고 한다.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만 있다면, 이제는 자유 여행도 관심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루 평균 버스 이동 시간 5시간 전후, 도보 여행 15,000보에서 20,000보의 여행 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여행 6일째가 되니 나도 서서히 지쳐간다. 다행히 오늘의 여행 일정은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블레드 성은 가파른 절벽 위에 지어놓은 조그마한 성이다. 그것이 유명한 것은 블레드 호수와의 절묘한 조화에 있다. 블래드 호수 중앙의 섬에도 조그마한 성당이 있었다. 호수 위의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프레트나라는 보트을 타야했다. 프레트나 보트는 사람이 노를 저어 움직이는 옛날 방식 그대로의 배이다. 전통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노를 그대로 사용한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 놀라웠던 것은 호숫물이 맑아서 바닥의 조각난 돌까지 보였고, 그러한 자연환경을 가족과 함께 물 위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블레드성과 호수 중앙의 작은 섬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그 자체였다. 슬로베니아의 관광은 블레드성과 블레드 호수 관광으로 짧게 끝내고 슬로베니아를 떠나 크로아티아로 향했다. 슬로베니아의 다른 관광지는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슬로베니아 관광은 블레드라는 도시에 있는 블레드 성과 호수를 관광했다는 흔적만 남겼다. 그래도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를 갔다 온 것은 분명했다. 사실 13시간이나 걸려 먼 유럽에 왔기에 가능하면 여러 곳을 다니고 싶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부터 슬로베니아를 거쳐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면서 본 자연의 경치는 헝가리나 체코에서 본 모습과는 달랐다. 알프스의 끝자락이어서 그런지 높은 산들이 많아 보였다. 버스 차창을 통해 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나로서는 버스 여행이 지겹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첫 출발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다시 돌아왔다. 첫날 잠만 자고 떠났던 자그레브 시가지 모습은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려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의 이미지보다는 잘 구획된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시의 거리가 일단 넓고 여유롭게 보였고, 엘라치치 광장에서 자그레브 대성당에 이르는 길가에 조성된 시민광장은 넓은 공간에 오래된 나무와 잔디밭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의 잔디 위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에서는 탱고 리듬의 음악을 틀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시민들의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 자그레브 대성당의 관광은 지진으로 파괴된 건축물 복원 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그 웅장한 모습을 모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는 유럽의 다른 성당에 못지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그레브 대성당의 모습을 뒤로하고, 돌의 문을 지나 성 마르크 성당을 관광했다. 돌의 문 옆에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상에는 많은 열쇠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할머니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외에 성 마르크 성당 지붕을 장식한 모자이크 모양의 국기도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니 그리스 정교회 건물의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성당 정면에 세 개의 문이 열리자 그 중앙에서 흰옷을 입은 신부님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다시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스 정교회의 예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자그레브의 시내 관광으로 오늘 일정은 끝났다. 내일이면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관광을 끝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아직 하루의 일정은 남았지만, 이번 여행을 돌이켜 보았다. 이번 여행에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한다면, 더 넓은 자연을 마음께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매일 4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보는 동유럽의 자연과 발칸 2개국의 자연은 달랐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더 넓은 초원에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의 모습이었다. 평화로워 보였다. 온 세상이 자연과 함께, 자연이 마련한 잔칫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는 자세로 살아가면 안 될까? 지금 이곳도 자연의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그레브에서는 이상기온으로 열매가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을 도구로만 삼는 인간에게 언젠가는 자연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이 그 시간인지도 모른다. 내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또 다른 영감을 얻기를 기대하면서, 여행 마지막 하루 전의 소감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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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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