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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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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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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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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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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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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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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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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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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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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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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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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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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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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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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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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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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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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 남북으로 1,600km에 달하는 국토 길이를 가진 베트남은 각각 북쪽과 남쪽 끝에 하노이와 호치민이라는 대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육로로 가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있는데다 두 지역의 기후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적으로 지냈던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음식과 사람들의 성향까지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흔히 베트남의 하노이를 행정 중심의 도시이면서 역사, 문화의 도시로 인식한 반면 호치민을 경제 중심의 도시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각 도시의 사람들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지역 차이를 넘어 외국인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두 도시의 차이를 비교하여 희화화하는 영상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지역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중국의 지배를 1,000년 동안 받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데 비해,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쪽은 태국, 캄보디아와 유사한 동남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전형적인 남방 불교인 상좌부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참파 왕국이 다스렸던 곳이라 애초부터 서로 간에 문화권이 달랐다.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남북이 통합되었지만 사이공(Sài Gòn : 호치민의 옛 이름)과 다낭을 중심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이루며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및 서양 문화가 들어와 여전히 동아시아 문화권인 북부 지역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지만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해방되었으며 이후에 프랑스군이 재주둔함으로써 프랑스의 지배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195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은 이 때 체결된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과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남베트남으로 다시금 분단되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했던 사이공(Sài Gòn)을 점령하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편에 섰던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도 이와 같은 숙청의 과정에서 주로 발생했는데 주로 공산세력으로부터 반동적인 사상을 가진 집단, 그리고 서양 문화에 익숙한 집단,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남방 화교 집단 등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하노이는 중국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호치민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었던데다가 프랑스가 만든 계획 도시였기에 서방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려왔던터라 개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하노이와 호치민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적도와 가까운 호치민이 1년 내내 여름이면서 무더운 열대 기후인 것과 달리 하노이는 우리 한국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같은 날씨의 영향으로 인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각의 특화된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데 하노이에서는 소금이 많이 첨가된 쌀국수와 분짜(Bún chả, 완자와 면을 함께 먹는 음식)가 매우 유명하고 호치민은 채소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쌀국수와 달콤하거나 약간의 밍밍한 음식들이 발달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주로 중부 지역인 후에 지방의 음식이 가장 잘 맞아 후에나 다낭 등의 중부 지방 음식을 선호하는 것에 반해 하노이와 호치민은 각자의 음식이 베트남을 대표한다면서 온, 오프라인으로 끊임없이 설전을 벌인다. 날씨와 음식 뿐 아니라 도시나 정치, 경제적으로도 양측은 다르다. 행정 기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하노이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치민은 도시의 색깔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차이 중 하나가 시간 내 여가 활동 개념인데 예를 들어 밤 11시에 하노이 시민들은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근면하고 부지런함을 선호하는 반면 호치민 사람들은 밤 11시가 되면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러 밖으로 외출을 나온다. 필자가 직접 겪어본 두 도시의 느낌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노이의 경우 상대적으로 엄격하고 보수적인데다 경직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데 반해 호치민은 클럽과 술집 등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놀거리가 많고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넘쳐나며 친절하고 자유 분방한 분위기가 있다. 이어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어감이 조금씩 다르고 발음 또한 여러 모로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데 베트남 또한 각 지역 사투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수도인 하노이 언어가 베트남어의 표준어인 만큼 호치민의 언어는 남방 방언, 혹은 사이공 사투리로 취급되고 있다. 하노이의 표준어는 좀 더 정중하면도 경직되어지며 무게감이 있는 느낌이라면 호치민의 방언은 매우 간드러지며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이 강하다. 북쪽 하노이 측은 베트남의 전통복인 아오자이를 즐겨입지만 남쪽 호치민은 미니스커트와 가슴을 드러내는 옷 등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론 요즘은 하노이도 젊은이들이 미니스커트 및 가슴이 드러나는 옷 등을 즐겨입긴 하지만 호치민만은 못한 분위기다. 이처럼 두 지역의 문화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노이와 호치민의 주민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역 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베트남어인 꿉 포 디아 픙(Cục Bộ Địa Phương : 지역감정)은 지역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뉴스 제목으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칼럼 또한 역시 각종 매체들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일상에서 하노이 사람들, 혹은 호치민 사람들이 서로를 험담하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서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베트남 내의 지역 감정은 점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처럼 극명한 두 지역의 차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노이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유교 문화의 영향 하에 있어 예의와 겸손을 사람의 최고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 서방 기업의 진출이 활발한 호치민의 경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최고 덕목으로 여긴다. 그래서 하노이 시민들은 호치민 시민들을 매우 헤프게 여기고 있으며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 시민들을 꼰대스럽다고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생기게 된 이유로 북과 남으로 갈라진 역사가 만들어 낸 간극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통일 후, 하노이가 행정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해 온 반면 호치민은 공산정권의 통제 하에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작동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최근 보트피플 및 서방 유학, 이민 등으로 인해 베트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경제 발전의 큰 동력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양 지역 간의 갈등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노이 시민들은 부를 감추고 내세우지 않으며 겸손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해외 유학파들 및 이민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존재하는 호치민에서는 부와 소비를 당당한 노동의 보상으로 여겨 이를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두고 호치민 시민들은 하노이의 과묵함을 음흉하다고 표현하고 하노이에서는 호치민의 자유분방함이 천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질수록 다시 또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 굳어져 온 베트남의 지역 감정은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는 바로 대한민국의 박항서 감독과 김상식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님의 선전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과 화합을 이룩한 것은 축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국가대표의 승리를 기원하며 각 지역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응원했던 순간 만은 지역 감정이 사라지고 베트남이 오로지 하나가 됐다면서 많은 베트남인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합이 축구 경기에 한해 나타난다면서 일시적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하나가 되어 응원하는 경험이 베트남 국민 모두에게 통합과 단결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지역 감정은 한국의 영, 호남 지역 감정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한 과거의 기억과 비행기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크다. 그리고 그와 같은 거리감에서 기인한 문화적 인식의 간극이 현재까지 견고하게 유지되어 지금의 지역 감정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 갈등은 원래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며 지내온 베트남 사람들은 최근 축구를 통해 경험한 통합과 화해의 시간이 잠시나마 일시적일지라도 어쨌든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인들을 하나로 만들고, 그들에게 불필요한 미움과 편견을 없애게 한 것에 우리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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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해묵은 지역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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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나 마찬가지였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둔하자"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줄곧 빅토리아 눌랜드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전쟁을 독려한 켈로그였기에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역사의 어디선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인 독일의 베를린을 동서로 분할한 것과 유사다. 동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동독으로 소련이 관할하고 서베를린 지역은 당시의 서독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했다. 켈로그의 주장은 비슷하게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나누고 해당 지역애 비무장 지대를 두는 방안이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분할한 것과 6.25 전쟁 이후, 남북을 분할해 휴전선을 만들고 그 사이에 비무장 지대인 DMZ를 만든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쉽게 말해 두 분할 방식을 혼합한 새로운 분할 방식인 것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서쪽 영토는 이른바 ‘평화 보장 군대’(Reassurance Force)‘로 이름 붙인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 유지군이 통제하는 구역을 설정하고, 러시아군이 장악한 동쪽 영토에는 우크라이나 군과의 비무장 지대(DMZ)를 두고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켈로그는 드네프르 강 서쪽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으로 구성된 평화 보장 군대는 러시아군을 향해 절대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드네프르 강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국 영토를 거쳐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며 수도인 키예프를 관통하고 있어 분할하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 국이 각각 베를린의 점령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키예프도 그와 같이 분할하여 드네프르 강 서안은 영국, 프랑스군이 통제하고 드네프르 강 동안은 러시아군이 통제하는 측으로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이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켈로그는 미국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따라 18마일, 너비 30㎞ 안팎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여 서로가 넘지 않는 것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켈로그는 푸틴 대통령이 유럽의 나토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통제 구역을 관할하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이자 러시아의 요구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나토 가입 금지, 나토 군대 주둔 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로그는 통제 구역과 관련해 우크라이나가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는 상황을 만들게 되면,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도록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선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비무장 지대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두 나라 군대가 전선에서 각각 15㎞씩 물러나면 18마일 정도의 비무장 지대를 만들 수 있는데, 비무장 지대는 감시가 가능 하고 사격 금지 구역도 설치할 수 있기에 평화적으로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전 협정을 위반하는 행위가 민스크 협정을 파기한 것처럼 있을 수도 있지만 이를 감시하여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동서 분할 구상은 이번에 처음 주장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에 내에서 꾸준히 이와 같은 내용이 예상되어 주장해왔고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에 의해 우크라아나 서부 지역이 4분할 되고 동부 지역과 오데사는 러시아에게 넘어가며 우크라이나는 키예프를 위시한 중부 지역의 작은 영토만 영위하게 될 것이는 예측이 많이 나왔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러한 켈로그의 제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켈로그는 우크라이나를 분할할 시 어떤 국가들이 참여할지,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 영역화 할지, 참여국들이 각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와 같은 세부적이고 구체화 된 내용이 없어 그냥 한 번 던져 본 수준에 불과하다고 본다. 켈로그의 이러한 제안 자체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석의 여지도 많으며 이는 아직까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도 나오지 않은 제안이기에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켈로그는 이 외에도 키어 스타머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에 있어 미국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가 정상화됐다며 광물 협정이 재논의 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켈로그의 제안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진다. 우선 러시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나토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정전 안에 대한 반대, 우크라이나 군의 비무장화를 협상 내용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토에 속한 영국과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한다는 것 자체는 러시아가 내세운 특수군사작전의 목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토군의 주둔을 반대하여 일으킨 특수군사작전인데 우크라이나를 분할하여 동쪽 지역은 러시아에 넘기더라도 서쪽 지역에 영, 프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추후에 우크라이나군 재무장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고 러시아군의 목적이 역시 영토 확장이라는 세간의 오해, 침략국이 맞다는 국제적인 맹비난에 직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입장에서 켈로그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마찬가지다. 젤렌스키는 지난 3월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결코,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는 일시적인 점령일 뿐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게 점령된 모든 지역을 탈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국토 분할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미국이 2014년부터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 반도에 대해 러시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젤렌스키에 여기에 크게 반발했다. 줄곧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 러시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를 배신한 셈이 된 것이다. 이같은 켈로그의 제안은 그동안 나토에 속해 있던 동유럽 국가들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과 비슷하게 한다는 것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던 동유럽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안보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연합국에 맞춰 구상된 휴전 방안과 유사하게 하는 것 자체가 소련의 공산 지배를 받았었던 동유럽 국가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또 1945년 나치 독일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정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친서방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를 전후 베를린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되었다. 더불어 트럼프 정부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의 의사과 관계없이 미국과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불안감 또한 미국과 터키, 헝가리, 슬로바키아를 제외한 타 나토 국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키스 켈로그의 제안은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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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특사이자 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우크라이나 분할 제안"이 이루어질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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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부족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천재지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었다. 중재자는 부족 구성원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관행(Sunnah)이 중요시되었다. 베두인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에는 메카와 메디나, 당시는 야스리브(Yathrib)가 가장 두드러졌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이 도시는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 : 후에 이슬람의 기도 방향이 됨)라는 성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부족의 신상도 있었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에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한 지역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지였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이 창건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베두인은 여러 부족으로 분류되어 있고, 사막의 이곳저곳에 있는 초원을 찾아다니며 유목 생활을 한다. 현대화와 더불어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아라비아 인의 3~5%는 이 베두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목 생활을 그만두고 농촌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들도 부족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도 상당히 많다.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도 자기들의 조상이 베두인이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베두인의 아라비아어가 가장 순수한 아라비아어로 믿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이 즐겨 다니는 시 낭독 회에서는 베두인 시인들이 지은 부족의 영광을 노래한 시를 신명나게 읊고 있거나, 베두인 부족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많다. 부족 생활은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자손이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이 친족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동료 부족 구성원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필요한 경우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자기 부족의 편을 들어 도와준다. 이를 두고 14세기 튀니지 출신의 정치 사상가인 이븐 할둔(Ibn Khaldūn, 1333~1406)은 아사비야(‘Aṣabīyah)라는 이름으로 맹목적인 연대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원시적인 혈연적 부족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사회 각층에도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좋은 일례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과 하심 요르단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 등의 국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두 왕국은 각각 사우드 부족과 하심 부족의 소유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의 기능 가운데 부족장 중의 부족장(Shaykh of Shaykhs)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아라비아 국가,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및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지배자들의 친족과 인척들만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도 모든 아라비아 국가의 사회 각층에도 혈연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제공하는 일은 상당히 많다. 아라비아인들은 친족 결혼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혈연 의식이 강하여 사촌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에 부부 사이에도 사촌 오빠(Ibn ‘Ammī : 삼촌의 아들이라는 뜻) 또는 사촌 여동생(Bint Ammī : 삼촌의 딸이라는 뜻)이라 호칭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어구(語句)는 남편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각각 사전에 풀이될 정도이다. 이와 같이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그들의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家系)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최대의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한 집단 구성원이 다른 집단 구성원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면, 피해 집단은 가해 집단에게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 경우에 가해자를 찾을 필요는 없고, 가해 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입은 상처처럼 같은 상처를 입힘으로 인해 복수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단은 부족, 씨족 및 가족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혈연적 단결심은 도시에 정주하는 아라비아인 사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동일한 혈연 사이에는 협조가 잘 되며, 이 현상은 간혹 정부 부처 의 장과 그의 부하 직원 사이에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혈연과의 경우에는 체면과 조심성을 앞세워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혈연이 상이하면 합심하여 끈기 있게 목적을 추구하는 협동(Team Work) 정신이 부족하다. 이러한 혈연에 의한 파당성은 공평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인사 행정이나 다른 사무 처리에 있어서 부작용을 일으켜 비리의 온상이 된다. 이슬람교는 알라 앞에서 만민 평등을 교시하고 있고, 부족 구성원 사이에도 평등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 간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수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막강한 부족은 타 부족을 지배하였다. 부족 가운데 우열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족의 형태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접촉에는 노골적인 인간 차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부족 구성원 간의 평등 의식과 이슬람의 평등사상으로 인해 아라비아인은 상호 간 대화와 접촉의 자유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아라비아 국가의 국체와 정체가 군주국이거나 공화국이든, 혹은 전제 정치를 시행하든 간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민주 정치를 하는 것과도 관계없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화와 의사소통의 자유가 있어 개인은 누구나 필요한 인물을 찾아가 어느 정도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부하 직원이 그의 상관에게 접촉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다. 평민의 자녀가 고관의 자녀와 혼인을 하는 일례는 아라비아인들에게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실은 차(茶)나 우편물을 나르는 하급 공무원이나 평민, 심지어 걸인도 자유로이 관청을 드나들면서 하급 기관장은 물론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지정된 면담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저자세나 필요 없는 아첨은 비굴한 행동으로 여겨 경멸하기 때문에 대체로 상관을 대할 때에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관장은 매주 1회에 2~3시간가량 면담 시간을 책정하여 방문객이나 부하 직원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있다. 복잡한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이와 같은 시간 소모는 다소 행정력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으나, 사회의 최 하부 계층이라도 자기는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혈연 의식 및 대화와 접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연적인 관계와 자기의 생활 주변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도덕과 규율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공중도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라비아인은 혈연적인 인척과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객체(客體), 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공 의식의 결여는 그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정부의 존재 자체를 공공의 복지나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봉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징세와 징병을 강행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 단체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공중도덕의 결여로 인해 현대 산업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교통질서, 직장 내의 위생 질서, 약속 시간 개념 등에는 무관심한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다. 이는 국가와 같은 공공 집단이 다른 소집단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족적 또는 종교적 파벌을 기초로 하여 조직된다. 이 현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아라비아 국가 중에서 가장 잘 모방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레바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아라비아 국가에서는 이러한 병폐로 인해 아예 일국 일당 체제나 전제 왕정(專制王政)이 지배적인 정치 체제로 등장하고 있다. 혈연 공동체의 극소 단위로서의 가족은 혈연 의식의 특징을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그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부족적인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생활 단위는 부족이 아니고 가족이다. 물론 왕족이나 영주 등과 같은 명문 귀족들에게는 부족이나 씨족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평민은 가족 중심의 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민들의 가족 개념은 아직도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이 아니고 대가족 제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족 제도는 합동 가족의 형태이다. 이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다. 양친과 자녀 및 조부모, 숙모, 숙부 또는 방계의 친족 및 조상의 친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가까운 친구들까지 포함되는 방대한 조직인 것이다. 아라비아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가족의 출신 성분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한 가족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상류층에 속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개인과 가족 사이는 어떤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착되어 있다. 개인으로서의 아라비아인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 삶을 개척하기에는 가족 관계가 아직 매우 강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밀착성은 그들의 호명법(呼名法)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개인은 결혼하기 전에는 주로 아무개의 아들, 딸 등으로 불리며, 결혼 후 자녀를 가지게 되면 아무개의 아버지, 어머니 등으로 불린다. 이 호명법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를 그대로 나타내어 주로 남성의 이름을 위주로 하여 호칭되고 있다. 이 현상은 단순히 호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어떤 지위에 천거하거나, 제3자에게 소개할 경우에도 사용한다. 또, 한 개인이 출중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르면, 주로 부족명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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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내 베두인(Bedouin) 사회와 부족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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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 로마는 내부적으로 신분 투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를 형성하면서, 한편 대외적으로는 계속된 군사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뒤 일시적으로 라티움(Latium) 지역에서 로마의 군사적 지위가 약화된 것이 확실하다. B.C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Casius)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카시우스 조약은 로마와 라티움 동맹 간의 군사 협조를 명문화한 것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로마는 수많은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B.C 5세기 말이면 왕정 시기 로마와 라티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트루리아가 약화되며, 로마는 그 세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B.C 5세기 로마와 라티움 동맹국은 인접 산지 민족들, 특히 아이퀴(Aequi)와 볼스키(Volsci)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 이후 로마는 티베리우스 강 북쪽의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인 베이(Bei)를 오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고 영토를 병합했다. 그러나 B.C 387년 로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 족의 침략으로 인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로마 시를 7개월 동안 점령당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외적인 위신도 실추되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B.C 349년에 다시 침공해 온 켈트 족을 격퇴했다. 로마는 B.C 343년부터 약 B.C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삼니움 족이 라티움 남쪽에 위치한 캄파니야(Campaniya) 주를 침공했으며 라티움 주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로마가 이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손쉽게 끝난 1차 삼니움 전쟁 (B.C 343~B.C 341)에 비해 2차 삼니움 전쟁(B.C 326~B.C 304)이라는 22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삼니움 족의 근거지인 아페나인(Apenain) 산맥이 방어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카우디네(Caudine) 협곡에서 두 명의 집정관과 그의 병력들이 모두 생포되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5년 동안의 소강상태를 갖게 된다. 그 이후 패배에서 회복한 로마인들은 반격을 시도하여 삼니움 족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삼니움 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들을 모두 격파하면서 2차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다. 3차 삼니움 전쟁은 삼니움 족,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켈트 족이 연합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남부에 위치한 삼니움 족을 격파하여 그들의 세력을 북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대항한 이들 3개의 연맹체는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군과 센티눔(Sentinum)에서 맞서게 된다. 초기에 로마군은 이들 연합군의 맹공에 고전하였으나 집정관인 푸빌리우스 데키우스 무스(Publius Decius Mus)가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이는 로마군의 사기를 고양시켜 이들은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B.C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는 양측이 통합 1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회전이었고 로마가 이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가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291년까지 삼니움 족은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다음 해인 B.C 290년에 로마에 굴복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하게 된다. 그 사이에 B.C 340년 로마의 동맹 주도에 불만을 품은 라티움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라티움 전쟁이 일어났으나,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라티움 동맹도 해체되었다.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는 대신 라티움 도시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주는 동시에 로마에 정치적으로 흡수했다.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평정하고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우려한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타렌툼(Tarentum)은 에페이로스(Epeiros)의 피로스(Pyros)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로써 피로스 전쟁이 발발했으며 피로스는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로마를 격파하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그들의 영향 하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피로스는 로마를 제압하여 이탈리아를 그의 패권 하에 두고 그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이후,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다음 이를 토대로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의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로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들의 군사적인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B.C 280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피로스는 로마군에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로스의 전사자는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과 전쟁 상태였으며 이들 시칠리아 도시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동맹관계였다. 남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피로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앞서 호언한 대로 시칠리아에 대해서도 야심이 있었던 피로스는 강한 로마 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여 시칠리아로 떠나게 된다. 시칠리아에서 피로스는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카르타고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꾸준한 보급을 통해 친 카르타고 도시들은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으며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한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여실히 증명한 것과 같이, 강한 해군력 없이는 시칠리아 섬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스가 해군 편성을 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요구한 군자금은 그 도시들에게 있어 큰 부담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피로스에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따라서 전황은 과거보다 피로스에게 더 불리하였다. 피로스는 이에 베네벤툼(Veneventum)에 머물던 로마군을 기습하기로 하고 로마인들이 건설한 가도를 타고 북상하나 로마인들이 이를 파악했기 때문에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피로스의 전쟁 의지를 일소시키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 로마는 피로스가 없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그들의 패권 하에 넣었고 그리하여 로마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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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샴냐움 전쟁 -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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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 젤렌스키는 10일 전인 8일 동부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중국인 용병 두 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는 이 날 X를 통해 두 명 중 한 명의 영상을 공유하여 러시아의 돈바스 지역 점령군 부대 내에 더 많은 중국 국적자들이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해 관련 기관이 이를 확인 중이라 했다. X에 젤렌스키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군복 차림의 남성이 묶인 두 손을 흔들며 몸동작을 크게 하여 뭔가 항변하며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러시아 쿠르스크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군에게 생포된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2명이다. 그러나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자는 러시아 영토에서, 중국인은 비록 러시아군이 점령한 곳인 돈바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로 여겨 진다. 젤렌스키 또한 이같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 주재 중국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관련 설명을 듣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의 전쟁 참여가 이번 사례가 처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러시아 군복을 입은 중국인의 모습은 3월 초 포크로프스크 전투의 영상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당시 이를 그다지 중요하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이 날 포로 공개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취하고 있는 반(反) 중국 성향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는 것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 국방안보회의 산하 허위정보 퇴치 센터의 안드레이 코발렌코(Андрей Коваленко) 센터장은 당일 오전에 중국이 조지아의 흑해 연안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나토에 대한 위협이라 주장했다. 코발렌코는 시진핑 주석의 전략은 간단하다면서 흑해 동부에서 나토를 몰아내고, 러시아와 터키의 협력이 없이도 유럽으로 가는 공급로를 만들어 중국의 군사력 투사와 물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작년 2024년 5월 29일, 중국은 중국 교통 건설 유한회사(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Company Limited)와 중국 항만 투자 Pte. Ltd.(China Harbour Investment Pte. Ltd.)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조지아 최초의 심해항인 아나클리아 항 건설 프로젝트에 단독 입찰하여 사업권을 따낸 바 있다. 조지아 TBC 은행과 미국 기반의 콘티 인터내셔널(Conti International)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아나클리아 항만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2020년 색깔혁명 유도 논란과 법적 문제로 무산된 바 있는데 이번에 중국에게 그 사업권이 넘어갔다. 2021년 이후 조지아에서 진행된 1억 달러(약 1,376억 원) 이상 규모의 모든 인프라 프로젝트에는 중국 기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모든 사업에 이미 미국과 EU는 손을 떼고 있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과 세계은행(World Bank) 등 기관들은 조지아가 글로벌 무역 루트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심해항 건설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었는데 자신들이 개발하려다가 실패했고 중국에게 이 사업권이 넘어가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항만 사업이 아직 삽을 뜨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입찰 수주는 따냈지만 항만을 건설하는데 있어 여러 문제에 놓여 있어 아직 공사는 시작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난게 2024년 5월 말인데 그 때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있다가 1년 가까이 된 이제야 그 문제를 꺼내며 중국 견제를 부르짖는 것이다. 이 같은 행위를 두고 트럼프의 관세 폭탄 등으로 인해 EU가 압박을 받으니 그 타결책으로 흑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을 견제하여 흑해와 연결된 중앙아시아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보고자 하는 EU가 우크라이나에게 중국에 대해 비난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우크라이나 허위정보 퇴치센터의 비난은 참으로 짜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중국인 포로를 공개한 젤렌스키의 직접적인 노림수가 무엇인지 예상한다면 일단 러시아가 전쟁에 중국인까지 끌여들였고, 궁극적으로 이는 휴전 혹은 정전 협상에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현재 관세 전쟁 중인 미국과 중국인 상황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전쟁 참여를 들먹여 미국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면서 협상에 진정성이 없을 바에야 미국의 직접 참전 및 군사적, 금액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벌이는 이 전쟁에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은 푸틴이 전쟁을 끝낼 의도가 없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했다. 그리고 나아가 미국 등 국제사회에 이에 대한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기와 돈을 더 대줌으로써 분쟁을 끝까지 이어가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젤렌스키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와 먼저 대화하고, 그 다음 러시아와 소통하기를 바란다며 중국인 포로 공개 영상을 본 뒤 입장을 바꿀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이는 조만간 열리는 람슈타인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젤렌스키가 노리는 또 다른 의도는,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전쟁 중에 더욱 긴밀해진 러-중 관계를 와해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틀렸고 실패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와 싸우고 있으니 러-중 관계를 와해시킬 노력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와 연합해 미국과 적대적인 러-중 동맹에 맞서는 것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면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트럼프가 중국을 향해 무려 125%의 관세 부과하는 등 무역 전쟁을 불사하고 있으니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젤렌스키의 이러한 행위는 대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전망을 해본다. 젤렌스키는 그동안 중국의 친러 성향에도 베이징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피해왔다. 오히려 중국에게 러시아와 이 상황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 못지 않게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인데다 러시아와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현대전의 핵심 무기로 등장한 '드론' 생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크라이나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드론의 대부분은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이 우크라이나로의 드론 및 부품 공급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겠지만, 비공식적이라도 장벽이 생긴다면 미국으로부터 무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중국이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지워버릴 생각을 하고 러시아를 도울 경우에 있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러시아에 수많은 드론과 전자전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군은 그 과정에서 '현대전'을 직접 참전하여 경험하면서 전투 능력을 축적할 수 있다. 만약 중국이 러시아에 드론을 지원하여 50%라도 참전을 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의 멸망은 필연이다. 최근 몇 달간 전투의 흐름을 본디면, '드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측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공격 작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성공 요인이다. 우크라이나군 지도부도 중국이 러시아 특수군사작전에 있어 참전할 경우, 매우 결정적인 영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피해왔다. 미국 등 서방과의 경제 협력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대일로가 완성돠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왠만한 모험은 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트럼프의 무역 전쟁 선포로 중국의 대(對) 서방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중국인을 생포했다며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젤렌스키의 전략대로 따라줄 지도 알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중국인의 전투 참여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생포된 중국인의 영상을 공개한 것이 미-중 무역전쟁에 있어 중국의 위협을 부각시키고 미국의 더 큰 지원을 유도할지, 중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 큰 군사적인 위협으로 자충수를 두어 몰락할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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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가 중국인 용병 포로를 공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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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
- 20세기로 접어들며 그동안 동아프리카 전 지역에 대한 통치가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던 양상이 차차 변화를 보이게 되며, 케냐 지역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 케냐의 경우, 이 지역의 중요성과 비중이 간과되어 왔음은, 몸바사에서 키수무에 이르는 철도를 우간다 철도(Uganda Railway)로 명칭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철도가 지나가는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Uasin) 고원 지역이 모두 우간다의 동부 지역(Eastern Province of Uganda)이었기 때문이다. 케냐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각기 자신의 종족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충성하였으나, 우간다의 경우는 조직적이며 체계화된 왕국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유럽인들로서는 왕국의 왕을 상대로 식민 통치의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케냐 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부족과 백인 정착민들 사이에 잦은 분쟁과 갈등이 상존하였다. 따라서 정착민들로서는 이 지역을 정착에 용이한 곳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902년, 식민 정부는 새로운 경계선을 설정하여 리프트 밸리(Rift Valley)와 우아신 기슈 고원 지대(Uasin Gishu Plateau)를 동아프리카 영국 보호령(British East Africa Protectorate), 케냐로 편입시켰으며, 같은 해 유럽 백인 정착민들은 더 많은 정착민들을 유치하여 그들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백인이 우월한 인종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을 두고 자신들만의 정당을 결성한다. 정착민들은 영국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판무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 경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정착민들은 식민 정부 감독하의 아프리카 원주민 노동력의 공급을 요구하였으며, 또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점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 사용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로서는 백인 정착민들의 이 지역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에 대한 상반되는 논쟁이 발생한다. 1903년, 찰스 엘리엇 경은 비옥한 백인들의 고원 지대(White Highlands)를 유럽인만이 점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착민들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아시아계 정착민들은 비옥한 토지 사용이 불가능해지며, 이로 인한 영국 본국 정부와 엘리엇 사이의 마찰로, 후일 엘리엇은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결정한 데 대한 문책으로 사임 당하게 된다. 찰스 엘리엇과 영국 정부 사이의 문제 야기는 1904년 체결된 최초의 마사이 협정(First Masai Agreement) 때문에 발생한다. 마사이 족의 지도자 레나나(Lenana)는 이미 전에 영국 정부의 도움을 구하여 받은 적이 있었으며, 그 대가로 1904년 마사이 협정에서는 부득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이 족보다도 유럽인 정착민들에게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찰스 엘리엇 경이 사임당하고, 식민 행정은 식민성(Colonial Office)이라는 지방 관청 산하에 편입되었다. 엘리엇의 후임으로 도날드 스튜어트(Donald Stewart) 경이 부임하였으며, 그는 마사이 족을 위한 적절한 지역을 모색하였고, 케냐와 탕가니카 사이의 국경 부근 지역과 라이키피아(Laikipia)에 마사이 족을 정착시킨다. 이 리프 밸리 지역은 이제 유럽인들의 정착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으며, 마사이 족이 지정 거주 지역에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케냐에서의 백인과 비(非) 백인에 대한 분리 정책이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이로부터 인종 분리 정책은 거주지에서부터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을 표시하여 분리 사용하는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기 시작한다. 제한 거주 지역의 설정은 키쿠유 족과 같은 타 부족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1906년 백인 정착민들의 영향력 행사로 인하여 케냐에는 입법 회의(Legislative Council)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가 구성된다. 백인 정착민들은 이미 이전에 식민지 보호령의 행정을 외무성(Foreign Office)으로부터 분리시켜 식민성으로 이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입법 회의는 케냐 정착민 중 임명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델라미어(Delamere) 경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착민들의 지도자들은 백인 우월성과 백인 정착 거주지(White Highlands)에 대한 정책만을 고집하였다. 이들은 흑백 차별 정책을 통한 발전 계획을 주장하였다. 델라미어와 그로간(Grogan)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인종 차별 정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시아계로 분류된 인도인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강력히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모든 인종의 평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고원 지대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 부여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아시아계 정착민들의 강력한 저지가 없었다면 케냐는 후일의 로디지아(Rhodesia)나 남아프리카와 같은 백인 통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1909년, 지반지(A. M. Jeevanjee)는 아시아인 정착민의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입법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1910년, 백인 정착민들은 그로간을 의장으로 하는 협의회(Convention of Associations)를 창설하여 정착민들의 관심사를 제시하였고, 그들 정책의 총체적 노선을 정부에 알리는 작업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유럽 정착민들은 백인 통치 정책이 강화되기를 원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플랜테이션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주도록 정부가 개입해 주기를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보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은 이와 같은 백인 정착민들의 기본적인 태도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재차 총독과 델라미어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여 델라미어는 입법 회의에서 일정 기간 축출 당하게 된다. 1911년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유럽인들이 토지를 사용하기 위해 마사이 족을 라이키피아(Laikipia)로부터 이동시키려는 것으로, 총독 퍼시 지로드(Percy Girouard) 경은 두 번째의 마사이 협정을 맺게 되며, 1904년의 엘리엇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 당하게 된다. 1913년, 인도인들은 정당(East African Indian National Congress)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입법 회의 내에 인도인 정착민의 의석 확보를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식민지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전시 위원회를 열어, 유럽 정착민들은 1915년 이 위원회에 대표자를 임명시켰다. 전쟁이 종료될 무렵 이들은 행정 회의(Executive Council)의 대표자 선출 권을 부여받게 된다. 총독 에드워드 노시(Edward Northey)는 유럽 정착민들의 이익이, 다른 인종들보다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1922년,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4명의 의원을 입법 회의에 참여시킬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모든 결정은 유럽인들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땅이 지배받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소견을 밝히지 못한 채 소외당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을 정착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케냐로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실직 문제가 야기되었으며, 이 계획으로 말미암아 난디(Nandi) 족은 새로이 도래한 백인 정착민을 위해 그들의 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백인 정착민 위주의 정책과 계획은 1923년에 작성된 데번셔 백서(Devonshire White Paper)의 출현으로 인해 극도로 위축된다. 1923년, 영국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지반지는 아시아계 인도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으며, 델라미어는 백인 정착민을 대변하였다. 당시 국무 장관이었던 데번셔(Devonshire) 공작이 의장으로서 주관하였던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데번셔 백서를 발표하게 된다. ① 케냐는 아프리카인의 국가이며, 따라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② 케냐의 고원 지대 (Highlands)는 유럽 정착민에게만 할양된다. ③ 아시아인 (인도인)들은 입법 회의에 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참여시킨다. ④ 케냐 내의 인종 차별을 금지한다. ⑤ 아프리카인을 대표하는 1명의 선교사가 입법 회의에 임명된다. ⑥ 정착민을 위한 헌법상의 특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23년에 결정된 이와 같은 사항들은 철저히 백인 정착민 위주의 이익 추구와 정책 수립을 강요하던 유럽인 정착민들에게는 많은 양보와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5년, 식민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Local Native Council)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인들의 문제를 다루도록 유도하였으며,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백인 정착민들은 우간다와 탕가니카를 포함하는 연방체를 결성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아프리카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영국 정부는 지방 원주민 회의나 3국 연방체 어느 측에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31년 정착민 출신의 정치가 델라미어가 사망하고, 같은 해 조셉 보른(Joseph Byrne)이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과 의견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정착민들에게 있어 그는 매우 불만스러운 존재였다. 아프리카 원주민들만이 세금을 내고,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던 백인 정착민들은 1936년부터 수입세를 지불하게 되었으며, 행정 회의에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참여시킬 수 있었으나 차차 그들의 특권은 상실되며, 여타의 종족들이 후일 참여하게 된다. 아프리카인 대표에 관한 원칙이 1931년 수립되고, 1944년, 최초의 아프리카인 대표 엘리우드 마수(Eliud Mathu)가 입법 회의의 의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 KANU)은 케냐가 1963년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뒤 2002년 선거 패배 때까지 40년 가까이 집권한 케냐의 정당이다. 그것은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케냐 아프리카 동맹(KAU)으로 알려져 있었다. KAU는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식민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60년 제임스 기추루(James Gichuru)에 의해 다시 설립되었으며 1960년 5월 14일 톰 음보야(Tom Mboya, 1930~1969)의 케냐 독립 운동과 합병하여 KANU로 개칭되었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한 무장 반란 마우마우의 영향으로 비상사태에 처했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국민정치운동인 KAU는 1952년에 금지되었고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를 포함한 지도부는 1953년에 투옥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케냐의 정치체계에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부족주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케냐의 식민지 전체에 걸쳐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부는 1952년에 국가적인 정치 운동을 금지했다. 1954년부터 식민지 정부는 식민 정부에 우호적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지역 내 부족 중심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정부는 1956년 부족 당 지도자들을 레그코(Legko)에 임명했다. 로날드 은갈라(Ronald Ngala), 데니얼 아라비아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1924~2020), 마신데 뮬리로(Masinde Myuliro)가 리프트 밸리, 아르깅스 코덱(Argins Kodek)이 나이로비,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Jaramogi Oginga Odinga, 1911~1994)가 냔자 레코(Nyanja Reko) 회원이 되었다. 중앙 케냐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레미아 제임스 냐가(Jeremia James Nyaga)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케냐 중부에서 정당 금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7년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입법위원회 첫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온건하고 우호적인 지도자 대다수는 1957년 다시 레그코로 선출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1956년 나이로비를 대표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에 의해 지명된 아르깅스 코덱을 격파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톰 음보야였다. 1960년에 설립된 KANU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이념의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독립 직후 부각되었다. 그러나 1965년 케냐 의회에서 세시셔널(Sesishunul) 제10호 서류가 채택되고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와 동맹한 좌파 정치인들이 사임하면서 패러스타탈(Pererstatal) 형태의 국가 개입과 함께 혼합된 시장 경제 정책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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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민족동맹과의 독립전쟁, 동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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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지정학적 경계선상에 놓여 있는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이다. 국토 면적은 1,904,569km²로 대한민국의 19배, 한반도 8.5배고 세계에서 14번째로 넓다. 섬의 개수만 18,200개를 넘어서, 인도네시아의 모든 섬을 하루에 하나씩 모두 방문하려면 46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광대하다. 더불어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팜유 생산국이며, 태국 다음의 세계 2위 고무 생산국이다. 그리고 브라질, 베트남 다음의 세계 3~4위 커피 생산국이기도 하고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상당한 규모의 에너지들을 수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어 근대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각종 향신료의 주요 수출국으로써 자리매김한 국가였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경계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일대일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은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시아에서 일대일로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성해야할 전략의 중심지였다. 인도네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축은 여러 전략적인 부분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인도양과 서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인도양이라는 바다는 태평양과 더불어 남반구의 거대한 수역을 상호 연결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기후조건상 대체로 인류가 살기 좋은 따뜻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전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점 국가인 인도네시아에만 해도 2억 7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은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호주,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호주, 뉴질랜드가 영유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들은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제 해상 도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도-태평양 일대는 가장 역동적인 경제 지역 중 하나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협력과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 이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새로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도양의 서쪽 해안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열대 해양을 나타내는 지구 생물학 분야의 용어에서 지정학적 용어로 차용되었다. 이처럼 지정학적인 의미를 가진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인도 뉴델리의 국립 해양 재단 이사인 구프리에트 쿠라나(Gurpreet S. Khurana)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면서 국제 문헌에 기록되었다. 2007년 전략 분석(Strategic Analysis) 외교학지에 실린 "해상 안보 : 인도-일본 협력의 전망(Maritime Security: Prospects for India-Japan Cooperation)"이라는 기사에서 쿠라나 박사는 인도-태평양을 서아시아와 중동 포함하여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인도양과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광의적인 해양 공간으로 정의했다. 쿠라나 박사는 인도와 태평양이 해상 전략, 혹은 지정학적 전략인 인식에서 구분하고 있다면 인도와 일본, 남쪽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해양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이해관계가 성립되고 여기에 태평양을 관할하는 미국이 합류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구축은 매우 안전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지역 전략의 비전으로 탄생했다.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2007년에 인도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양해의 합류(The Confluence of the Two Seas)”라는 고대 아시아의 지리적 관점을 두고 "자유와 번영의 바다로서 역동적인 결합(A dynamic union as a sea of freedom and prosperity)"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 대신,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목표를 설정하여, “인도-태평양”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태평양"의 개념은 아시아-태평양의 지리적 경계 내외의 국가들과 이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이와 같은 지정학적 개념은 전략 지정학적인 담론에서 점차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전 세계 정책 입안자, 전문가, 학자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은 태평양과 인도양 연결에 관한 지리적으로 언급한 것 이 외에도, 해양 안보에서 전략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전략적, 지정학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두 해양의 역할과 기능, 연결성 및 상호 의존성과 연관하여, 인도-태평양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 언어, 정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의 중심인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중요한 해로가 거쳐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3등분 하고 있는 해로의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은 인도-태평양과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까지 연결하는 유라시아 항로의 중심이자 최대 요충지다. 그리고 자바해, 술라웨시 해협 등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태평양의 주요 군도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필리핀과 남중국해를 통해 중국과도 연결될 수 있기에 인도네시아의 지정학적 가치 무궁무진하다. 인도네시아 지역은 세계 3대 경제권(미국, 중국, 일본)이 충돌하고 있는 지역이면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역동적인 지역들 중의 하나이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는 비록 개발도상국에 속하고 있지만 정치, 경제적인 이익에 따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유롭게 노선을 정할 수 있다. 특히 말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 각 해협에는 세계에서 붐비는 항구들로 연결되는 항로들이 존재하며 세계 해상 무역의 약 60%가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그 중 3분의 1은 남중국해를 통과하여 중국, 대만,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로 가며 멀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간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바닷길은 석유, 가스 상품을 중동에서 호주와 동아시아로 운송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면서 이 지역은 또한 해적과 이슬람 반군, 테러 등이 존재하는 불안정한 바다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의 바다들을 통해 세계 경제의 생명선을 보장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 인도네시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중국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2004년 쓰나미 피해 때도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를 도운 국가가 중국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인도네시아는 중국을 좋은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2022년에는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만든 국영 펀드인 실크로드펀드(SRF)가 인도네시아 투자청(INA)과 INA가 운용하는 인도네시아 국부펀드에 최대 200억 위안을 투자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대일로의 기초를 놓았다. SRF와 INA는 인도네시아가 외국인에게 개방한 모든 부문에 투자가 허용되며 특히 중국-인도네시아 간의 경제적으로 연관된 프로젝트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INA는 인도네시아의 낙후한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 중국 자본을 끌어 들였고 1차적으로 수도 자카르타에서 제3의 도시인 반둥까지 142㎞ 구간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사업을 수주했다. 두 나라는 철도 사업을 위해 인도네시아·중국 합자회사(KCIC)를 만든 뒤 대부분 공사자금은 중국 개발은행 대출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다시 자카르타와 반둥을 잇는 고속철도 건설 사업은 재개되었고, 2023년 8월 18일 마침내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자카르타에서 칼리만탄(말레이시아 명 보르네오)의 발릭파판(Balikpapan)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수도를 옮기는데 대부분 건설사 수주를 중국이 따냈다. 이에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미국 또한 이를 인지하고 인도네시아와 교류, 협력을 확대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계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국가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에 잠시 거주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러한 관계 등으로 인해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군사적인 위협이 늘어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필요했다. 특히 중국 측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군사적, 외교적으로는 중국과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고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두 나라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중립 외교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도네시아의 자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두 나라 사이에서 철저히 실리를 취하고 있는 입장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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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지정학적 경계선상에 놓여 있는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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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쿠르드족, 일본 우익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되다.
- 쿠르드족에 대해 필자는 많은 연구와 포스팅을 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유지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자치구인 쿠르디스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쿠르드족에게 독립 국가를 세워준다는 약속을 하고 쿠르드족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1920년 세브르 조약에는 쿠르드족이 사는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 쿠르드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이 들어 있었지만, 이를 대체한 1923년의 로잔 조약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되었다. 결국 쿠르드족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의적인 국경선에 의해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분단되었고, 이는 쿠르드족의 비극이 되었다. 즉, 영국과 미국이 이용해 먹고 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물론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민족주의 세력이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독립에 실패했다. 따라서 각 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20세기가 되면서 문화적인 압력으로 인해 이들의 지도부들이 뭉쳐 정치 세력을 탄생하게 되었고 이에 큰 인구가 존재하는 터키와 이라크, 이란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자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막대한 석유 매장지에 위치해 있었기에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은 강대국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 좋은 민족이었다. 따라서 쿠르드족의 독립과 영속의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반목해와다. 쿠르드족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들을 돕거나 배신을 당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 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 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영국에 배신을 당하고 민족은 각 국가들로 나뉘어 분할되었다. 1972년 냉전 때는 친미 국가인 이란과 친소 국가인 이라크 간의 국경분쟁이 발생했을 당시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들을 이란과의 전선에 투입하고 독립을 약속했지만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족의 일부 단체와 교섭했지만 이를 파악한 이란 정부에 의해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 상까지 받았던 바 있을 정도로 보복은 참혹했다. 이스라엘은 이란 쿠르드족에게 이와 같이 이용하고 터키 쿠르드족들을 학살할 때는 터키를 돕기도 했다. 특히 PPK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 정보를 제공했을 정도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전 오스만 제국군에게 학살당할 당시 쿠르드인들이 오스만 제국군과 같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임과 동시에 이들도 당시에 아르메니아인에게 보복 학살당한 피해자였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거주 쿠르드족조차도 1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으니 소수민족이라 보기에도 어려운 실정이다. 1970년대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Aḥmad Ḥasan al-Bakr, 1914~1982) 행정부 시기의 이라크에서 국제 유가가 폭등하게 되는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도 유전들이 몰려 있는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한 북부 지역은 그 혜택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실제로 현재 이라크의 쿠르드족 상당수는 현재도 오아시스 농업이나 천수 농업을 영위하면서 농사를 짓고, 양과 말, 소를 이끌고 각지를 유목하면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중동에서의 세력 균형을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유럽, 아시아의 세력 중앙에 위치한 터키가 아주 중요한 국가다. 이는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흑해에서 보스포루스를 통과해야 서방과 무역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중동과의 관계에 있어 터키는 매우 큰 전략적 요충지다. 만약 터키가 약해져서 미국이든 러시아든, 서로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면, 미국, 러시아 서로가 터키를 넘어 중동과 유럽 전체를 영향권에 둘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마냥 미국이 쿠르드족을 편들어 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결국 쿠르드족은 미국이나 유럽 세력에게 이용당해질 수밖에 없는 비운의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각 국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쿠르드족은 중동 뿐 아니라 유럽 및 미국, 아시아의 일본까지 난민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민족들의 난민으로 분할 수용하는 것은 유엔 인권 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UNHRC)의 뜻이기도 했다. UNHRC는 각 UN 회원국들에게 쿠르드족에 대한 인권을 내세우며 분할 수용을 강요했는데 이는 쿠르드족을 위한다기 보다는 터키와 중동 각지에 있는 쿠르드족들의 숫자를 줄이고 이들의 분할하여 각종 국제 공작에 수월하게 이용하려는 측면이 더 강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UNHRC의 강요를 받아들여 쿠르드족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쿠르드족을 "재일 쿠르드족"이라 부른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입장은 전적으로 터키 정부의 입장을 따르기 때문에 애초부터 많은 수의 쿠르드족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난민 심사 중에는 추방하지 못한다는 점과 난민 신청 횟수의 제한을 둔다는 법의 허점을 이용해, 터키 국적으로 일본으로 입국 후, 난민 신청이 반려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신청을 하여, 일본에서 불법 이민하는 쿠르드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쿠르드족 불법 난민들은 주로 사이타마 현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100여 명의 쿠르드족이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터키인을 집단으로 습격하고, 부상당한 터키인을 추가로 폭행하기 위해 병원까지 몰려가 경찰이 제지하자 경찰까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에 있는 쿠르드족들이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난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일본 정부에 납세를 전혀 하지 않고 고급 자동차 및 요트를 소지하는 등 호화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들은 이를 SNS로 자랑하고 있을 정도이며 난민으로 들어온 재일 우크라이나인과 소통하며 지내는 등, 일본의 새로운 사회문제로 자리잡았다. 쿠르드족은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제외하고는 인권 단체의 지원과 난민 신청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떠한 범법 행위를 자행해도 석방되며 일본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다. 특히 사이타마 현에서는 불법으로 개조된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주위를 시끄럽게 하고 밤중에 라이트를 끄고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주행하면서 화물차에 과적재들 당연하게 하고 있다. 더불어 초등학생 나이 대의 아이들에게까지 공사장에서 일을 시키고 화물차나 크레인을 몰게 하면서, 일본에서의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SNS에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쿠르드족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으며 이들은 재알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자신들을 차별하지 말고 일본인이 우리 방식에 따라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24년 1월에는 사이타마 현에서 쿠르드족 남성이 일본인 여중생을 주차장에서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체포된 쿠르드족 남성은 어린 여성과 놀았던 것 뿐이지 폭행하지 않았다 주장해 일본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심을 키우고 있다. 그러자 일본 우익 추종자들은 쿠르드족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혐오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 각 지역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모습을 동영상과 사진을 무단으로 촬영한 이후, 막무가내로 ‘불법 체류자’, 혹은 ‘범죄자’라 지칭하여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SNS에 올려 조리돌림을 시전하고 있다. 이 혐오론은 쿠르드족이 범죄 조직과 연루됐다거나 일본 각 지역이 쿠르드족이 자행한 살인 사건들이 잇다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 쿠르드족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며 쿠르드족 학생이나 어린이도 이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특히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는 어린 아이 사진을 찍은 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는 얘기를 SNS에 게재해 확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 관공서에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쿠르드인을 추방해야지 왜 우리의 세금을 쓰느냐 등의 민원을 재기해 업무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모두 쿠르드인들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더불어 우익들은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마을에 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러한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재일교포와 중국인들을 상대로 헤이트 스피치를 벌였던 이들이다. 일본 우익들의 첫 번째 표적은 과거에는 재일교포들과 재일동포 한국인이었고 이어 중국인, 쿠르드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나 재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나 그들 스스로가 저질렀던 행위들이 있기에 이 같은 행위들에 대한 업보인 셈이다. 한편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거의 3,000명에 가깝다. 이들 중에 무직자는 60%가 넘는다. 일본은 전쟁 이후 3년 동안 약 50억엔의 여행 및 생활비를 지원했고, 피난민들에게 폭넓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영주택을 제공하고, 취업 알선 및 일본어 교육 등 다양한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도가 높다. 그러나 못지 않게 이들이 행하는 패악질과 범죄도 많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밝히는 것을 매우 꺼려하며 이를 밝히면 인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더 이상 난민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혜택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고, 이들 범죄 행위들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다.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와 같은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한국도 난민들을 받아들인 옆 나라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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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쿠르드족, 일본 우익의 새로운 공격 목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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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한국 기업, 중국 기업의 막대한 투자로 인한 위기 상황에 대해
- 하노이 중심가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40분 거리의 한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1990년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한국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베트남에 진출했을 때 건설한 골프장이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하노이에는 건설, 레저, 자동차 제조업을 포함한 여러 산업 분야에서 김우중 회장이 남긴 족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하노이에서는 "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과정(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 대학 졸업자들을 선발해 베트남을 포함하는 해외 현지에서 그 나라 말을 익히고, 그곳의 경제와 기업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착안되었다. 당시에 김회장님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이 프로그램은 ‘김우중 사관학교’라고 부르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하노이의 대우자동차 조립 공장에서는 작업장 벽 한쪽에 늘 작업복이 줄지어 걸려 있었는데, 퇴근할 때 깨끗한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대우’ 마크를 보고 모두 부러워했기 때문이라 했을 정도로 대우에 대한 베트남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어마어마 했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현지인들의 마음에 한국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줬음을 알 수 있다. 한국-베트남 간의 이와 같은 교류는 김우중을 비롯해 베트남에 진출했던 1세대 기업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 말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해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영 원리를 앞세운 세계화가 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박연차 태광실업회장과 같은 한국의 기업인들은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섰던 대표적 선두 주자였던 분들이다. 그리고 1990년대 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금융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한국 기업의 해외 시장 개척이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국제 금융 위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혼란에 빠졌던 세계 경제는 어떤 대안적 경제 운영 원리에 따라 변화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에서 좀 더 점진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베트남 진출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7,0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 기업의 진출과 개인 투자는 제조업과 건설, 도소매업, 과학기술과 R&D, 차량 수리와 같은 서비스 부문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하노이와 하이퐁, 타이응우옌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지역에서부터 호치민과 빈 즈엉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전역에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베트남 현지 지자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업이 이미 참여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베트남 전국에 걸쳐 있다. 삼성은 전자, 반도체, 휴대폰 생산을 위해 베트남 노동자 16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의 수출은 베트남의 총 해외 수출액의 24~28%에 이를 정도다. 이와 같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가속화되고 있지만 최근 들어 다시 주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베트남 시장에서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동차 생산을 위해, 이미 6만 대를 조립할 수 있는 현재 설비에 더해 공장을 증설함으로써 생산 능력을 10만 대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그 뿐만 아니라 현대건설은 하노이 구시가지 중심 지역인 호안끼엠 일대를 관통하는 3호선 지상철 건설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LG전자 또한 베트남 하이퐁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LG전자가 주력 상품인 TV, 휴대폰, 세탁기, 청소기, 에어컨 등의 생산 라인을 하이퐁 지역 공단으로 통합 이전했다. 이는 베트남 내수 공급 차원을 벗어나 베트남을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삼기 위해 이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기업들이 막대한 투자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국영 철도기업 중국중차(CRRC, 中国中车) 대표단은 제15회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를 계기로 베이징에서 열린 ‘베트남-중국 교통인프라 개발협력회의’에서 베트남 남북고속철도를 비롯한 철도 인프라 사업에 대한 투자 참여 의사를 베트남에 타진했다. 베트남은 고속도로와 남북 고속철도, 도시 철도, 항만, 공항 등 2045년까지 5개 부문 교통인프라 확충 사업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 규모는 베트남 정부로서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로 남아 있지만 베트남 기업 뿐 아니라 중국 기업들에게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베트남-중국의 수교 75주년을 맞고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사물 인터넷, 광전자, 양자 기술, 생명 공학, 신소재, 디지털 결제 등의 기술들이 중국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중국 대형 자동차 기업이 베트남에 1조원을 투자, 전기차 공장을 짓고 베트남의 유일한 국산 전기자동차 제조사이자 전기 스쿠터 제조사인 빈 패스트(Vin Fast)와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국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 회피 전략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올인하고 있다. 제품의 질을 중국 것을 어떻게 믿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경제력이 떨어진 국가들에게 중국제는 극한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물량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물건의 질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90~2000년대의 중국제 물건보다 현대 생산되는 중국제 물건은 질적인 면과 디자인에서 많이 나아졌다. 그동안 막대한 물량으로만 승부했던 중국은 질적인 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노려왔다. 서방 선진국에서 전문가도 모셔오고, 공학 쪽에 우수한 인재들은 서방에 유학보내고 이들이 돌아오면 이들을 중심으로 질적인 변화와 신제품 개발을 계속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산업스파이로 들어가 남의 기술들을 빼오는 등, 질적 향상을 위해 별 짓거리를 다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중국제는 90~2000년대처럼 허접한 물품에서 현재 나름 쓰기에는 꽤 괜찮은 제품으로까지 기술력이 올라왔다. 물론 아직까지 질적인 면에서 우리와 서방 선진국이 약간 우위에 있지만 이제는 이조차도 곧 있음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될듯 싶다. 게다가 값도 저렴하게 양적으로 대량생산을 해버린다면 우리나 서방 선진국들이 어떻게 그 물량과 대적할 수 있을지 암담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어떻게 승부해서 질적, 양적으로 중국에 우위를 점할지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한 중국제 불신은 이같은 상황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현실은 우리 기업들이 베트남에서조차도 중국의 막대한 투자에 서서히 밀리고 있다는 것이고, 삼성 공장이 있던 박닌 또한 중국의 텃밭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몽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다. 동남아시아에 놀러만 오면 이런 현실은 끝없이 도외시 된다. 놀러만 오지 말고, 이런 현실도 좀 제대로 목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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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한국 기업, 중국 기업의 막대한 투자로 인한 위기 상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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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조기 총선 결과, 대연정의 출범은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2월 23일 실시된 독일 조기 총선은 집권당인 사민당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었고, 정권교체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대체로 독일의 총선 결과는 여론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집권당의 승리냐 패배냐 정도는 충분히 가늠될 수 있다. 다만 과연 어느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될지는 정확하게 사전에 알기 어렵고, 다만 총선 결과를 통해 그렇게 된 까닭은 분석이 가능할 뿐이다. 이번 독일 총선은 이른바 ‘신호등 연정’ 붕괴와 더불어 조기 총선 이전 집권당이었던 사민당의 패배와 더불어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급부상 이외에도 한동안 유권자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좌파당의 부활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독일의 총선은 정당명부제에 따라 5% 이상 득표를 얻지 못하면 원내에 진출할 수 없게 된다. 우파에서 자민당(4.3%)과 좌파에서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4.972%)이 해당한다. 자민당은 이전 총선에서 11.5%를 득표한 것에 비추어 보면 무려 7.2%가 하락한 것이니 완전한 패배라고 하겠다.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은 신생정당으로 이번에 원내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유권자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확인한 것인 만큼 향후 어떻게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이 두 정당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좌파당이 부활한 이유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극우파의 급부상에 따른 유권자들의 경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총선을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차기 총리로 거론되었던 기민당 대표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가 극우파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민법 개정을 추진하려다 무위에 그친 사건이었다. 당장 좌파당의 공동대표인 하이디 라이히네크는 나치와 같은 이념을 가진 집단과 협력하려는 메르츠 대표를 성토했으며, 이 의회 연설 장면이 그대로 삽시간에 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이로 인해 사민당과 녹색당을 지지했던 상당수의 유권자가 좌파당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전까지 빈사 상태인 좌파당보다는 중도 좌파 혹은 녹색당에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키워왔지만, ‘신호등 연정’이 무너진 마당에 다른 대안을 선택하려던 참에 마침 명분이 생긴 셈이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이들의 이탈이 뼈아프겠지만, 그것은 사민당과 녹색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책임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독일에서는 이른바 극우 정당과 어떠한 협력도 하지 않는 ‘방화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그 어떤 정치적 이해 관계가 있더라도 극우파와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극우파의 급부상이 나치의 망령을 재현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좌파당은 이번 총선에서 지난 총선(4.9%)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8.8%(64석))를 득표했다. 녹색당은 14.8%에서 11.6%(85석)로 하락했으며, 사민당은 25.7%에서 무려 16.4%(120석)로 하락했다. 이를 합하면 진보 진영은 의석으로 보면 269석이니까 전체 630석의 과반인 316석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면 중도 보수파인 기민당과 기사당은 어떤가? 중도 보수진영인 두 정당은 24.1%에서 28.5%로 다소 지지율이 올라, 의석수로 보면 208석으로 원내 1당으로 되긴 했지만,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지지율이다. 극우파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은 10.3%에서 20.8%로 무려 2배 이상으로 지지율이 올랐고, 의석수로 보면 152석이나 되니 독일의 극우파가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소수 정당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극우파가 캐스팅 보드와 같은 역할이 아니라 의회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사실 기민당과 기사당은 의석수로만 보면 극우파와 연정을 구성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방화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가 되고, 더욱이 그렇게 되면 좌파에서의 정치적 공세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중도 보수 진영은 ‘방화벽’을 지키면서도, 좌파당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서도 극우파보다는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 이른바 ‘대연정’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민당(과 기사당)과 사민당이 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중도파라는 점에서 현재 독일이 당면한 문제를 정파보다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대체로 합의한 결과라고 하겠다. 물론 ‘대연정’의 의석수로 보면 과반수인 316석을 넘어 329석이 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13석만 이탈해도 연정이 붕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가면, 녹색당이냐, 좌파당이냐가 관건인데, 녹색당이 대연정에 합류하게 되면 이른바 ‘흑적록 연정’인 ’케냐 연정‘이 되고, 좌파당이 합류하게 되면 좌파당이 보라색이기 때문에 ’블랙베리 연정‘으로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관건은 두 가지가 문제다. 하나는 기민-기사 연합이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민당은 좌파당과 연정에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기민당과 기사당 연합이 좌파당과 연정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촉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두 경우에든 성사되기 위해서는 사민당의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굳이 이런 방식의 연정을 구성한다면 후자보다 전자가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당장 독일의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려는 ’독일 위한 책임‘이라는 합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어쩌면 나중 문제라고 하겠다. 이번 ’대연정‘은 결국 기민-기사 연합이 외무·내무·경제·가족·건강·교통·농업 장관을, 사민당이 재무·법무·노동·환경 장관을 맡는 방식으로 서로의 이익과 책임을 어느 정도 합의하는 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민-기사 연합은 매우 중요한 재무 장관 자리를 사민당에 양보함으로써, 사민당으로부터 더 많은 장관 자리를 받았다. 이것은 재무장관을 양보하더라도 외교-내무-경제 등의 장관 자리를 챙김으로써 적어도 중도 보수적 정책을 이끌고 나가려는 기민-기사 연합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라 하겠다. 사민당은 매우 중요한 재무부 장관 자리를 확보하고, 노동-환경 등의 장관 자리를 보장함으로써, 향후 녹색당과 좌파당과 협상하는데 카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집권 연장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언제든 다음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번 독일 조기 총선은 민심의 요구가 무엇인지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이때 핵심은 경기침체와 극우파 급부상, 이민자와 난민 문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문제에서 집권 ‘신호등 연정’이 정책에서 서로 갈등만 하다가 결국 자민당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이미 정치적 혼란을 키웠고, 그 결과 집권당의 총선 참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다. ‘신호등 연정’ 붕괴로 인한 당시 숄츠 총리의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는 집권당의 총선 패배로 정권교체로 귀결되었지만, 사민당이 기민-기사당의 파트너로서 대연정에 참여함으로써 기사회생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독일의 국익을 위해 각 정파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내세우기보다 현재 독일의 상황에서 정치적 타협만이 해답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대연정’이 과연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지는 현재로서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은 극우파의 가파른 지지율 상승에서 알 수 있듯이, 5월에 ‘대연정’의 출범과 더불어 독일의 당면한 현안들을 ‘대연정’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민심은 ‘대연정’에 대해 언제든 등을 돌릴 것이다. 메르츠 대표는 유럽을 더욱 강하게 만들면서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고 말한 것은 이제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과거처럼 미국에 의존하기보다는 유럽 자체적으로 안보를 이를 시점이 도래했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이미 밝힌 것에 대한 독일의 응답이라 하겠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하여튼 미국의 관심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에 있기 때문에, 유럽 안보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다. 그것은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한다면, 속 빈 강정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유럽이 독자적 안보를 구축하는데, 대러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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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조기 총선 결과, 대연정의 출범은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