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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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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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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7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6
  • 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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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6
  • 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5
  • 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15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미국이 캐나다 적대시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과연 잃는게 더 많을까?
    캐나다 경제는 미국에 상당히 의존적인 상황이다. 캐나다의 수출의 76%가 미국이며 수입의 52%가 미국이다. 밴쿠버 - 시애틀, 뉴욕시 - 토론토, 뉴욕시 - 몬트리올, 시카고 - 토론토 간 화물 무역 수요가 매우 많은 상황이다. 캐나다의 대미 수출량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4.5%에 해당된다. 캐나다의 수출 비중은 전체 GDP의 35%, 수입 비중은 전체 GDP의 34%에 해당된다. 이 중 대미 교역율은 70%에 해당되니, 대미 수출 비중은 전체 GDP의 24.5%에 달한다. 미국으로부터 10%의 수출이 감소하면 캐나다의 GDP가 2.45%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데 캐나다의 외교력이 EU와 영연방 국가들에게 강력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이들이 미국에 대항해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EU와 영연방 국가들 또한 대미 경제, 무역 거래가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이걸 뿌리치고 캐나다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그리고 웃기는 것은 캐나다의 무역 다변화 이야기다. 캐나다는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편이다. 캐나다의 철도는 총 연장 49,422km, 그 중 전철화 구간은 129km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불어 캐나다의 도로는 거의 대부분이 주에서 관리되며 도서 지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고,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도 멀기 때문에 도시간 교통이 매우 부실하다. 전체 도로 중 비포장 도로의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국토 중요 간선이나 대도시권 일대가 아니라면 운전 환경이 극히 좋지 못하다. 캐나다의 포장도로는 총 연장의 절반이 좀 안 되는 415,600km 정도로, 나머지 630,000여 km는 전부 비포장 도로다. 그나마 있는 도로망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위주로 깔려 있기 때문에 매니토바, 퀘벡 등 대도시권을 끼고 있는 주들도 북부 지역으로 가면 제대로 된 도시 간 도로가 없다. 캐나다 경제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편이다. 캐나다 전국 화물 수송량의 35%가량이 화물차 하나에 의존하고 있으며 나머지 철도, 수운, 항운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캐나다의 화물차는 전체 등록 차량 2,000만여 대 중 4% 정도로, 연간 누적 차량 이동 거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로는 트럭이 많이 지나 다니다 보니 곳곳에 움푹 파인 곳이 많지만, 주 정부는 이를 대충 메꿔 놓거나 아예 방치하는 경우도 잦은 편이다. 그 정도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동서간의 물류 이동은 매우 열악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세계 2위의 면적, 천연자원을 언급하는데 캐나다에서 그 막대한 천연자원 활용하는데 큰 장애가 있다. 캐나다의 석유 산업은 생산 단가가 높아 그다지 효율적이지가 못하다. 내륙의 오일 샌드는 사출 비용이 매우 비싸 비효율적이다. 그 외에도 캐나다는 해외 자본 의존도가 높은데, 한 때 캐나다 내 해외 자본의 20.1%가 광산업이었으며, 석유 및 가스 채굴 산업으로 한정해도 10%에 달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캐나다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탄소 포집을 비롯한 기후 변화 대응 기술과 재생 에너지 산업에 투자하고 있기에 자원 개발은 쉽지 않을 것이다. 캐나다가 제조업 자체의 존재감이 낮은데 유명한 자국 기업의 부재와 높은 해외 의존도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도 무슨 아시아와 유럽과 무역 다변화를 한다는 것인가? 인구도 적으면서 산업 기반까지 뒤쳐지는 캐나다가 미국의 영향을 벗어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소리다. 아무리 트럼프가 싫어도 캐나다의 현실을 보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따져보며 생각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고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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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4-15
  • 트럼프는 왜 러시아를 관세 목록에서 제외했나?
    트럼프는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는 대규모 계획을 지난 2일에 발표했다. 트럼프는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미국이 약탈당하고, 강간당하고, 약탈당했다며 광범위한 상호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미국의 주요 동맹국을 포함한 180개 국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또한 10%의 관세가 부과되었고, 다수의 옛 소련 위성국들과 공화국들도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됐다. 그런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제재로 양국 간 무역이 이미 제로가 됐기 때문에 관세 목록에서 제외되었다고 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술해보기로 한다. 미국과 러시아가 최초로 수교한 것은 18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가 대통령이 되기 전, 러시아 최초의 공사로 임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러시아는 중립을 지켰고 크림전쟁 이후, 미국에 알래스카를 팔아 넘긴 것이 러시아 제국이 미국과 의미있는 관계의 전부였다. 그러나 미국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고 적백내전에서는 미국은 백군을 지원하면서 이 때부터 러시아와 미국은 대립관계로 돌아선다. 적백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고, 1933년 미국은 소련 정부를 승인했다. 미국은 공산주의가 자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련에 대해서도 견제를 하기 시작하는데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나치 독일과 맞서기 위해 소련과 미국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다. 미국은 랜드리스를 통해 소련에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고, 결국 소련은 자국민 2,700만의 희생을 발판으로 나치 독일을 제압했으며 일본까지도 밀어내 중추적 승전 국가가 되었다. 이후 둘은 적이 되면서 냉전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인된 적대국이었을 뿐, 물밑에서는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 당시 미국 기업들과 소련과의 교류는 많았다. 소련 측에서는 자국 경제를 발달시키기 위해 미국 기술자들을 상당수 초청하여 자국 내 광산과 공업단지 개발 업무에 배치했던 바 있으며 스탈린이 경제 개발 5개년을 내세우며 공업화 시킬 때도 미국의 40개 회사들과 계약을 맺은 바 있다. 100명 이상의 포드 공장 숙련공들이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을 조직했던 바 있었으며 미국의 공업체계를 많이 참고하면서 공업제도와 식품보급체계를 갖추었다. 특히 레닌은 미국 SF 영화를 좋아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적대국이지만 이미 물밑에서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제2세계를 형성하여 미국을 포함한 제1세계와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었음에도 양국은 치열한 경쟁을 거듭했다. 소련은 스탈린 시대 농업집산화 실패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는데 1972년에는 미국에서 1,800만 톤, 1979년에는 2,500만 톤의 곡물을 구매했다. 당시 미국에서 수입한 곡물 1톤은 소련에서 생산하는 같은 양의 곡물보다 절반 가량 저렴했기 때문에 당시 소련인들은 자국산보다 미국산 식량을 더 얻어 먹었다. 당시 소련의 서민들은 미국을 나치 독일 수준으로 증오하거나 적대하지 않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라이벌(Наш гордый конкурент)"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냉전 시기 할리우드에서는 소련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람보 시리즈 혹은 록키 시리즈 같은 영화들이 유행했는데 당시 소련인들은 이와 같은 적대적인 영화들을 보더라도 위화감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고 미국이 소련을 매우 무서워한다면서 오히려 즐거워했고 딱히 큰 반감을 갖지 않았다 한다. 당시 소련 시절을 겪었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국이 그런 영화를 만들며 가장 강한 적으로 자신들을 표현했을 때, 미국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자들과 맞서 싸우는 악당 같은 모습에서 미국이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핀란드를 통해 미국의 노래가 소련으로도 꽤 유입되기도 했고 미국 영화가 소련에 합법적으로 상영되거나 1970년대에 펩시콜라가 소련에 진출하여 소련인들이 콜라를 즐겨마시는 등 냉전 시대에도 교류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도입되기 전, 러시아 제국 시대보다 훨씬 활발했다. 반대로 미국 또한 소련에게서 받은 것은 각종 자원들이었다. 소련에게서 석유를 저렴하게 수입했고, 석탄, 철광석, 동, 니켈, 망간, 아연, 코발트, 텅스텐, 수은, 보크사이트, 연 등의 자원을 수입했다. 그리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최초의 국제 합동 우주 프로젝트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하여 미소 양국은 적대관계(Hostile Relations)를 유지하면서도 적대적 공생관계(Adversary Symbiosis Relations) 로 보여 진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되며 러시아 연방이 들어섰고, 상호 경제교류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푸틴이 집권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경제가 급성장함에 따라 다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각각 경제제재를 하게 되면서 경제교류는 활발하게 하지 못했다. 러시아내에서도 미국 기업들이 들어와 있지만, 미국내에서도 러시아 기업들이 일부 들어와 있다. 그리고 러시아 갑부들이 미국에서 경제적인 업무를 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한다. 최근에는 일론 머스크가 러시아에 전기차 공장을 추가로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관세 부과에서 러시아를 언급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제재로 양국 간 무역이 이미 제로가 됐기 때문이라 이유를 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양국 간의 무역은 표면상으로는 제로가 됐을지 몰라도 이미 물밑에서는 오고가는 것이 있다. 바로 원자재 부품이 그러하다. 미국은 2024년 10월, 러시아로부터 항공기 부품 구매액은 760만 달러로 2022년 2월 이후 월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항공기 부품 수입을 증가시켰고, 러시아 무기에 사용되는 수입 핵심 부품의 60% 이상은 대러시아 제재를 주도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미국 내 93개 상업용 원자로에서 사용하는 농축 우라늄의 20%가 러시아산이다. 미국은 미소 냉전 종식 직후 1993년 해체된 러시아 핵탄두의 고농축 우라늄을 발전용 핵연료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산 우라늄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바이든이 러시아산 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에 사인했지만 러시아산 우라늄 공급이 중단되면 원자로 운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2028년까지 유예하고 있다. 즉, 아직도 러시아산 우라늄을 받고 있는 것인데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이 법안이 무효화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러시아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게 되면 미국은 제재를 우회하여 러시아와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그러면 그동안 미국이 가진 도덕적인 부분,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될 수밖에 없다. 제재를 하기로 해놓고 뒤에서 우회해 거래하는 나라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은 표면적인 이유 뿐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그동안 물밑에서 거래해 오던 각종 부품들이 미국에 수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미국의 약점인 제조업의 기초가 되는 부품과 원자재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중재를 미국이 하고 있는데 러시아에 관세를 부과해 자극시킬 필요는 없다. 미국 입장에서는 어쨌든 전쟁 중단이 목적이다. 따라서 러시아를 자극하거나 계속 제재를 가하고 더불어 관세를 올리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종식에 합의할 수 없고, 그것이 러시아의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러시아에서 나오는 모든 석유에 2차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밝혔다. 이는 러시아를 직접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무역을 계속하는 국가들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칫 잘못하면 러시아와 무역을 계속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에게 더욱 의존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러시아산 석유, 가스, 우라늄 및 기타 제품을 구매하는 국가로부터의 수입품에 500%의 관세를 부과하는 조항이 포함됐는데 중국과 인도, 터키,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이라 했다. 그러나 이 국가들에게도 국가적 자존감이 있다. 더불어 미국은 멀고 러시아는 가깝다. 게다가 중국이나 터키, 인도,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은 송유관으로 직접 운송이 된다. 이들이 미국의 조치를 두려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 또한 트럼프의 말을 듣고 휴전해야 할 필요가 없다. 결국 망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EU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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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홍콩 반환의 이후의 사회와 영화, 예술 문화의 침체
    홍콩 최고 스타 장국영이 사망한 지, 22년 째 되던 어제 4월 1일, 그동안 나의 우상인 장국영을 추모하여 단순히 추모글만 썼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실 오늘 전후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제는 프랑스의 르펭이 대통령 뿐 아니라 공직 출마 자격을 침탈당했고, 일본에 들어온 쿠르드족 난민이 일본 우익의 타겟이 되고 있으며 그 공격성이 심화되고 있다는 큰 국제 뉴스들이 올라왔다. 그러나 4월 1일은 특별한 날인 만큼 장국영과 관련 있는 <홍콩 반환의 이후의 사회와 영화, 예술 문화의 침체>에 대해 써 보고 내일 4월 2일은 <프랑스 르펭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3일에는 <재일 쿠르드족>에 관련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4일에는 <시리아 알라위파>에 대해 써볼까 한다. 1997년 6월 30일, 홍콩 총독부에서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이 내려오고, 마지막 총독인 크리스토퍼 패튼(Christopher Patten)은 눈시울을 붉히며 홍콩을 떠났다. 당시 패튼은 유니언 잭이 끌어내려지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매우 착잡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장면은 전 세계를 통해 생중계 되었다. 크리스토퍼 패튼(Christopher Patten), 이 인물은 영국 현대 보수주의의 상징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대처 정권과 존 메이저 정권에서 외무연방부 해외개발 담당 부장관, 환경부 장관, 랭카스터 영지 담당 장관 겸 보수당 의장 등을 지냈던 전형적인 보수인사였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와 재집권을 이끌어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의 담당 지역구인 랭카스터 구역에서 패배해 낙선했다. 존 메이저는 패튼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당선되면 재무장관에 임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에서 탈락했으니 그를 내각에 기용하기에는 여러 정치적 무리수가 있었고 고민과 장고를 거듭했다. 당시 홍콩에는 데이비드 클레이브 윌슨(David Clive Wilson)이 총독이었지만 영중공동선언(Sino-British Joint Declaration)으로 인해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한 상태였다. 영국은 1979년 홍콩 신계 지역의 조차가 1997년으로 끝남에 따라 해당 조차 기간을 연장하려 했다. 그러나 등소평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홍콩 지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에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계속 점유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홍콩 행정구역으로 볼 때 이미 기존의 홍콩 섬 및 구룡반도는 도심 지역으로서 개발이 끝난 상태였고, 이를 배후지로 상정되는 지역이 바로 신계 지역이다. 이 때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끝나고 중국에 반환되면 홍콩은 기존의 도심 지역만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홍콩의 자립은 불가능해지고 영국 입장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 직접 통치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신계를 조차하는 문제가 절실해질 수밖에 없는데 조차 기간 연장이 무위로 끝나게 되면서 영국은 홍콩의 영구적인 점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1982년 마가렛 대처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칙을 세우면서 영국은 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기본합의서 조인은 1984년 10월,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12월 19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가 공동 발표를 히고 데이비드 클레이브 윌슨(David Clive Wilson)이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최종 날인을 하면서 결국 홍콩의 1997년 양도는 확정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는 1국가 2체제를 말함인데 중국 안에서 두 체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공존시킴으로써 홍콩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제도다. 이 이 일국양제는 1997년부터 2047년까지 50년 동안 보장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국양제 기본이 념에 의거해 2047년 6월 30일 당시까지 영국령 홍콩의 자본주의적 경제와 정치 체제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는 2047년까지 홍콩에 적용이 되지 않고, 중국 헌법 및 공법도 적용되지 않으며 홍콩 내에서는 헌법의 역할을 하는 홍콩 기본법과 홍콩의 형법, 민법 등이 적용된다. 또한 중국의 일반적 지방 행정편제를 적용받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당장 홍콩의 행정 수장은 당 서기 및 성장, 시장이 아닌 행정 장관이다. 영국은 반환 직전까지 일부 의회 의석을 홍콩 주민들에 의해 직선제로 선출하고, 영국과 중국 양국이 합의해서 만든 홍콩 기본법에 따라 행정 장관 간선제를 실시하는 등 어느 정도 민주적 체제를 이식해놓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려면 당시 영국 총독인 데이비드 윌슨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윌슨 총독은 좌파적 성향의 정치인이자 노동당 소속이었고 런던 대학에서 중국 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홍콩 대학에서도 중국어를 전공하는 등, 노골적인 친중 인사였다. 그러던 사이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홍콩 시민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윌슨의 상태로 보아 존 메이저 총리는 일국양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우려해 크리스토퍼 페튼에게 홍콩 총독 지위를 제안했다. 물론 보수당 선거 당시 그가 지역구에서 참패했기에 챙겨준 측면도 강했지만 존 메이저는 페튼의 정치적 능력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튼은 이를 수락하여 1992년 7월, 홍콩 제28대 총독이자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홍콩 시민들은 페튼이 단순히 현상 유지만 하다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그 동안 홍콩 총독들이 대부분 중국 정세에 밝은 외교관 또는 학자 출신이었기에 광둥어와 중국어를 최소한 의사소통은 무리없이 가능할 정도의 사실상 중국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페튼은 광둥어는 물론, 중국어도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그래서 특별한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재직하는 '마지막 총독'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페튼은 개혁을 시도했고 1994년 선거 개혁을 실시한다. 당시 홍콩인들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독을 현지인들이 선출하거나 영국 정부에서 임명하더라도 실권은 현지인 총리가 갖도록 했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다르게, 홍콩은 반환되는 날까지 영국인 총독이 여전히 전권을 갖고 있었다. 선거제도도 전임 머레이 맥클레호스(Murray Mac Lehose) 총독으로 인해 1982년에서야 도입되었고, 홍콩 입법국 의원들은 간선제로 선출했으며, 직선제인 구의회 의원도 1/3 가량을 총독이 임명했다. 페튼은 선거개혁을 실시하면서 ① 소선거구제 도입, ② 투표연령을 만 18세로 하향, ③ 임명직 구의원 폐지, ④ 직능대표의원 선거권자 범위를 확대시켰다. 이는 1997년에 홍콩 반환 이전, 민주주의를 확실히 뿌리내리게 만들려는 페튼의 정책이었다. 전임 윌슨 총독을 통해 홍콩 반환 후 선거권 확대로 민심을 얻으려 계획하다가 페튼에게 완전히 선수를 빼앗긴 중국 측은 분노했다. 중국은 홍콩이 반환되면 이 헌법 조치들을 무효화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고 결국 반환되자마자 입법국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페튼이 한 일은 홍콩 내 인문 예술, 문화업계에 대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 일이었다. 그 유명한 영화 <패왕별희>도 1992~93년, 페튼 총독 시기에 만들어져 상영되었고, <중경삼림>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반환일인 1997년 7월 1일이 다가올수록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연간 관객수조차도 2000만 명 대 아래로 추락했다. 홍콩 영화의 점유율도 1992년 홍콩 영화의 매출은 15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에는 11억 달러로 폭락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에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제작 중단되거나 상영이 금지되었고, 개봉되었어도 홍콩에서 흥행에 크게 실패하거나 대륙에서는 상영이 아예 금지되면서 홍콩 내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점차 침해를 받게 된다. 더불어 1997년 7월 1일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주둔했으며 7월 1일 홍콩에는 오성홍기가 걸리면서 중국 영토가 되었다. 그 여파로 많은 일반 홍콩 시민들은 물론 영화인들도 중국의 억압 통치를 피해 캐나다나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장국영은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더불어 밴쿠버에 있는 비싼 저택은 거의 홍콩인들이 대거 구입했다. 그러나 서구권으로 진출한 홍콩인들이 홍콩에서의 영화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할리우드의 주류로 자리잡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홍콩이나 중국 본토로 다시 돌아와 영화를 찍게 된다. 그러나 홍콩 시장은 좁은데다 중화권으로 반경을 넓혀도 최소한 8,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홍콩 배우들이 설자리는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배우들의 세대 교체도 실패했다. 특히 홍콩 영화 액션 스타는 견자단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그 계보가 끊겼다. 물론 신진 홍콩 액션 배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윤발, 장국영, 성룡, 이연걸, 견자단과 같은 압도적 위상과 인기를 지닌 액션 스타는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홍콩의 연예인 지망생들도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도 데뷔하려는 실정이다. 좋은 각본이 있으면 대부분 중국 영화쪽으로 넘어가서 제작되며, 중국의 검열 기준에 어긋나는 영화는 제작될 수 없기에 홍콩만의 특색을 가졌던 영화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천안문 발언 등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장국영을 비롯한 배우들은 매우 검열이 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장국영이 자살했을 때, 한 동안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홍콩의 영화, 가요, 예술은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정도로 그 차이의 명확성을 보여 주며 일각에서는 쇠퇴하고 있었던 홍콩 영화가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갔기 때문에 "홍콩 영화가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 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장국영의 죽음과 함께 홍콩 영화는 완전히 끝났다. 어찌보면 그는 '홍콩 영화의 흥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홍콩 영화는 중국화가 되기 전, 자유 홍콩을 상징하는 주체였다. 많은 이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80년대 홍콩을 동경하기도 했으며 필자 또한 어린 시절에 그러했다. 그러나 현재 대륙 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신세가 된 홍콩 영화계에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이제 홍콩 영화는 어린 시절 아련하게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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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4
  • 필리핀의 사회 문제와 두테르테가 마약과의 전쟁을 하게 된 이유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마약 단속 과정에서 자행된 필리핀 두테르테 정부의 불법적인 인권 탄압 혐의에 대한 수사 재개를 승인했다. ICC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을 체포했으며 두테르테의 마약 단속 도중 마약 중독자 및 밀매업자들에 대한 살해 및 기타 권리 남용 혐의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겠다는 검사의 요청을 승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ICC는 이미 두테르테 정권의, 소위 인권 탄압을 명목으로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2021년 11월 필리핀 정부의 요청으로 수사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두테르테가 체포된 이후, 그를 정식으로 기소하기 위해 수사를 재개한 것이다. 필리핀은 두테르테가 집권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마약 문제와 마피아 등 각종 범죄들과 사회 문제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필자가 필리핀 마닐라에 체류하고 있을 때는 두테르테가 대통령 되기 직전, 한창 유세 중인 2016년이었다. 이 때만 해도 매일 아침 신문을 보면 피살 사건은 늘 보도 되고 있었던데다, 그 중 경찰 등의 법 집행 기관에 의해 피살된 사건의 경우 마약범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라 보도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인에 의한 피살 사건의 경우 또한 살해 동기의 대부분이 마약과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 하고 있을 정도로 최악의 치안을 가진 국가였다. 이만큼 필리핀에서 마약을 흡입하거나 소지, 그리고 마약 거래와 연관될 일일 경우, 생명에 매우 중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했었다. 필리핀에서 마약을 소지한 사람과 불법총기를 소지한 사람 중에 누가 더 위험하냐고 물었을때 대부분의 필리핀 인들은 마약이 더 위험하다고 대답한다. 반면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총기가 더 위험하다고 대답을 한다. 자칫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마약을 인식하고 필리핀에서 살고 있다면 큰 낭패를 볼 수가 있을 정도로 마약에 대한 인식이 무지했다. 참고로 필리핀에서는 마약 5g 이상 소지한 경우 20년 형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고 이는 살인죄와 형량이 비슷할 정도로 심각한 범죄다. 또한 5g 이상은 보석도 신청할 수가 없기에 중간에 형량을 낮추고 출소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봐야 한다. 특히 필리핀 교민 중에서 선량한 교민과 관광객에 접근하여 마약을 탄 후, 음료나 술을 권하고 여자까지 동침하게 함으로써 마약 복용자로 만든 후, 셋업 범죄로 돈을 착취하는 자들도 넘쳐 나기에 같은 한국인이라 해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실정이다. 필리핀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는 마약은 메스 암페타민(Meth Amphetamine)이라 불리는 샤부(Shabu)라 불리는 약이며 이는 일반적으로 필로폰(Philopon)으로 통용된다. 필로폰은 코카인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많은 양이 소비되어 왔다. 이와 같은 필로폰은 가난한 극빈층이나 중하류층이 주로 소비하지만 필리핀 부유층은 엑스터시(Ccstasy)와 같은 파티용 마약을 소비하고 있다. 이처럼 필리핀은 ‘샤부’와 같은 불법 마약의 생산국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7,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라 통제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섬들도 대부분 무인도에 불과해 사람이 사는 섬은 약 880개 뿐이며 이름이 붙여진 섬도 약 2,700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의 섬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들로 이런 곳들에서 대개 불법 거래가 이루어진다. 현재 지상 최대의 필로폰 산지는 미얀마로 미얀마의 북부의 산악지대는 메스를 제조하기 위한 재료를 수입하기에도, 생산된 메스를 밀매하기에도 최적인 곳이다. 그리고 생산 비용마저 매우 저렴하다 보니 해로인을 완전히 대체했을 정도다. 거기에 소수민족들 간의 분쟁 및 미얀마 군부와의 내전으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마약 생산을 독려하며 주변국의 치안과 마약 단속률마저 저점을 찍었고 한창 경제 개발에 힘쓰기 시작한 미얀마 내부의 정치 경제적 문제까지 겹쳐 이 마약들이 해외로 유출되는데 있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있다. 보통 결정체 형태로 약을 제조하여 유통하는 일반적인 메스 생산자들과 다르게, 현지에서는 먹거나 태워서 코로 흡입하기 좋은 알약 형태로 만들어 밀매하고 있는데 이를 '야바(Yaba)'라고 부른다. 특히 필리핀은 이러한 '야바(Yaba)'를 지역 마피아들과 거래하기 아주 알맞는 장소다. 이렇게 거래된 약이 필리핀 본 섬인 루손에 퍼지고 그 약은 다시 일본과 한국에 상륙하여 퍼지고 있다. 한국의 버닝썬 게이트 당시 물뽕이라 하여 섞던 약이 미얀마에서 생산되어 필리핀에서 거래되고 한국에 밀수되는 쓰리쿠션 형태로 들어온 것들이다. 이처럼 필리핀은 불법 마약 거래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마약 조직들의 주요 활동지가 되어왔다. 멕시코, 콜롬비아,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와 같이 유력 정치인들과 정부 관계자들은 마약 조직들 및 이들을 보호하고 마피아들까지 깊게 연결되어 있어 불법 마약 문제에 연관되어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필로폰에 중독된 필리핀인들이 증가하면서 필리핀의 불법 마약 소비 또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필로폰의 악명 높은 신체적, 정신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손쉬운 접근성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샤부’의 소비는 전혀 막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필리핀 내 사회 문제로 취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 사회 차원의 ‘샤부’를 매우 적은 양으로 재포장하여 판매함으로 인해 오히려 빈곤층들이 경제적인 이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필리핀 내 악의 고리는 끊임 없이 순환되었다. 이처럼 취업도 쉽지 않고, 각종 사회 문제의 대물림 속에 악의 고리가 끝없이 순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리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문제와 더불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실업문제이다. 필리핀의 극심한 부의 편중과 양극화는 큰 사회문 제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재 필리핀 내 상위 3~5% 정도는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며, 이들이 사실상 필리핀의 정계를 이끌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인구의 25%는 최하위 빈곤층으로 하루 5달러 이하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필리핀의 빈곤층은 28.2%로 21세기 들어 최고치를 기록한 바 있으며, 현재 필리핀 국민 3명 중 1명이 빈곤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필리핀의 슬럼 지역 거주 인구는 40%에 이르며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다. 필리핀보다 1인당 GDP가 떨어지는 라오스와 미얀마조차도 이처럼 슬럼 지역 거주 인구가 높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슬럼 거주 인구가 많다는 것은 치안이 몹시 불안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빈곤의 주요 원인으로는 1960~2000년까지 약 40년 동안 지속되어진 저성장, 그리고 높은 인구증가율과 더불어 빈부격차가 매우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에 한국보다 잘 살았었던 필리핀은 당시 한국의 입장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필리핀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바램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시대를 거치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저성장을 지속했다. 특히 1980~1995년에 경기 침체를 맞아 평균 2%라는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많은 빈곤층을 양산했으며 우리 한국에게도 추월을 당하면서 경제력이 곤두박질쳤다. 게다가 인구증가율은 매우 높았다. 필리핀의 인구증가율은 연간 2.36%로, 하루 평균 5,000여 명이 출생할 정도였다. 이는 전형적인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이 낙태를 금지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뤄지는 모든 피임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필리핀의 인구는 1억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1억을 넘어선 상태였다. 이처럼 한정된 자원에 비해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빈곤 비율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각종 지표에서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빈부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또 정치권 내부에서 각종 비리와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에 터지는 문제는 뻔하다. 많은 인구에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적다보니 취업난과 실업 문제까지 급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리핀의 실업률이 태국 0.7%, 베트남과 말레이시아가 2.3%인 것과 비교하면 아세안 지역 내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 볼 수 있다. 최근 필리핀의 해외 근로자 숫자가 1,000만 명으로 인구의 약 10% 수준임을 감안할 때, 실제 필리핀의 실업률은 공식 발표 된 수치보다 2배 이상 높을 것으로 보인다. 즉,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불안이 급증하고 범죄율은 치솟을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두테르테는 스스로를 "악과 싸우는 독재자"로선언하면서 취임 6개월 내에 부패를 뿌리 뽑지 못하면 사퇴하겠다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필리핀의 통제 불능 수준의 사회 문제 및 범죄 문제를 감안하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조치다. 전임 대통령인 아키노, 마르코스도 해결하지 못하고 손 놓아 버린 것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경찰에게는 범죄자 즉결처형권이 부여되며, 마약밀거래상을 죽인 자에게는 포상금이 주어진다. 일반 시민에게도 범죄자 처형 동참을 촉구했으며, 사형제도 부활시켰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에 당선된 6개월 이래, 5달간 경찰에 사살된 마약 관련 범죄자가 2,000명이 넘어섰다. 또한 경찰이 사살한 범죄자 2,041명 이 외에도 괴한에 의해 살해된 3,841명을 합치면 무려 5,882명이 살해되거나 사살되었다. 이후 두테르테에 대한 여론 조사를 보면 필리핀 국민에게서 반응이 좋다. 조사 결과, 두테르테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91%로 나타났으며 두테르테는 필리핀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료로 인정되었다. 그만큼 필리핀의 사회가 무정부나 다름 없는 무법 천지였고, 선량한 시민들은 언제 범죄에 노출될지 몰라 불안해 했었다는 것이 된다. 두테르테 효과 덕분에 그의 재임 시기에 전체 범죄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퇴임 이후, 필리핀은 다시 예전의 불안한 모습으로 돌아갈 위험이 커지고 있다. 결국 두테르테처럼 강력하게 하지 않으면 사회 안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서서히 입증이 되고 있다. 필리핀이 정작 중요한 것은, 외교적인 부분보다는 확실한 내정 개혁과 사회 개혁이다. 안정된 치안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외에 투자 유치를 해야 한다. 마침 필리핀 주위에 중국을 제외하곤, 협력할 수 있는 국가들이 널려 있다. 물론 우리 한국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필리핀은 6.25 때 UN군으로 참전한 혈맹국이다. 경제 협력으로 필리핀의 참전 은공을 보답할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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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4
  • 르펜, 백척간두에 선 정치적 운명
    요즘 프랑스 정가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인물은 2027년 대선 후보로 꼽히는 마리온 안 페린 마린 르펜 의원이다. 르펜은 2024년 6월 30일 실시된 총선에서 국민 연합(RN)의 득표율을 33.2%를 기록해 원내 제1당까지도 노렸다. 그러나 국민 연합은 7월 8일 제2차 투표에서 반극우 전선이 형성되면서 밀려나 원내 제3장으로 머물고 말았다. 르펜은 여러 차례 대선에서도 출마했고 낙선도 했지만, 정치적 자산을 상당히 확보해서 여전히 극우파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실 국민 연합이 원내 3당이기는 하지만, 그 어느 정당도 단독 과반이 아니기 때문에 마크롱 정부는 르펜의 협조 없이 국정을 이끌고 나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르펜은 상당히 정치적 존재감을 키웠다. 이처럼 승승장구(乘勝長驅)할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르펜에게 뜻밖에 위기가 왔다. 르펜이 2004년∼2016년 유럽 의회에서 의회 활동 지원 예산(약 250만 유로∼약 400만 유로 이상)을 자신의 경호원과 비서관 등의 급여로 사용된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2024년 11월, 검찰은 르펜을 국민 전선(국민 연합의 과거 명칭)의 당대표로서 자신의 경호원과 비서관 등을 허위로 등록해서 이들의 급여를 타내는 방법으로 유럽 의회의 돈을 횡령한 것으로 간주하고 르펜을 기소했다. 즉 르펜의 혐의는 유럽 의회의 공금을 르펜이 유럽 의회의 활동과 관련된 공적 목적이 아닌 국민 전선 당대표의 활동비로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니까 이것은 공적 자금 횡령에 해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2025년 3월 31일 파리 형사법원은 검찰의 기소를 유죄로 받아들여서 르펜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이 중 절반인 2년을 집행을 유예한 이후에 나머지 2년은 교도소에 수감하는 대신 전자팔찌를 착용하도록 했다. 또 법원은 르펜에게 벌금 10만 유로를 부가했으며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가집행하도록 판결했다. 특히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은 르펜에게는 사실상 대선 출마 금지를 선고한 것으로 정치적 사형선고라 하겠다. 르펜은 판사의 판결이 다 끝나기도 전에 퇴정했으며 법원 앞에서 즉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파리 항소심 법원은 1심 선고 직후 2026년 여름 이전에 르펜의 항소심 판결을 내리겠다고 밝혔지만 그 전망은 현재로서 르펜에게 불리하다 하겠다. 사실 이번 파리 형사법원은 판결은 르펜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상당히 이례적이기도 해서 관점에 따라 베네딕트 드 페르튀스 판사의 정치적 판결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법은 법이라고 못 박으면서 르펜의 유죄판결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법이 있기에 판사가 유죄판결을 선고한 것일까? 법원이 정치자금법을 적용할 때, 위법 사항이 발견되면 정치인(혹은 공무원)에게 5년간의 구금이라든지 벌금에 처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르펜처럼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정치인에게는 사형과 같은 판결을 하지는 않았다. 즉 이것은 정치인에게 위법 사항이 있더라도 유권자에게 선거를 통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할 것인지 박탈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르펜 이외에 다른 모든 정치인도 이번 르펜의 유죄 선고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기존의 통념으로 보면 당연히 르펜의 무죄가 어느 정도 예상되었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실로 이번 판결로 정치인들은 긴장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실 이러한 형사법은 정치인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했다. 결국 아무리 정치인이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선거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도 사실이어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와 부정부패를 희석화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법원은 2016년 12월 9일에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2017년 6월 1일에 시행된 프랑스의 반부패법인 사펭2법과 2017년 ‘정치권 신뢰 회복을 위한 법률’을 적용했을 것이다. 이 두 법률에 따르면 공금횡령 등 부정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공직자는 피선거권 박탈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쩌면 그동안에 선택적으로 적용되었던 조항이 이제 의무적으로 부과하도록 함으로써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방지함과 동시에 프랑스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로 공적 자금의 유용에 대한 유죄판결은 모두 예외 없이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처분이 내려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번 르펜의 유죄 선고는 예외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형사소송법으로도 이를 즉시 집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직 항고심이 남아 있어서 그 결과에 르펜이 대선에 나갈 수 있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항간에는 르펜의 이번 유죄판결이 야당에 대한 마크롱의 정치보복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마크롱은 이미 내치에는 손을 떼고 외치에 전념하고 있어서 이러한 관점은 타당하지 않다. 더욱이 마크롱은 총이 문제로 르펜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던 사실로 보면, 설득력이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르펜은 아마도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유럽 연합 재판소로 끌고 가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유럽 연합의 재소를 거부하면 다른 방법이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시민들에게 자신의 유죄판결이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대체로 파리 시민들은 르펜의 이번 유죄판결을 찬성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더욱이 르펜의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참석해서 자신의 유죄 판단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데에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국민 연합이 다음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나올지도 불투명해졌다는 점이다. 르펜 다음으로 거론되는 국민 연합 대표인 조르당 바르델라가 있기는 하지만 존재감이나 정치 경력으로 보면 아무래도 르펜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대선후보로 유력시되었던 르펜의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르펜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도 표심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국민 연합이 플랜 B가 없다고 하지만 시간이 계속 지나면 국민 연합으로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국민 연합으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일 수 있어서 아마도 대선 전까지 상당한 혼란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제 르펜의 정치적 운명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다. 르펜은 기대될 곳이 항소심 밖에는 없는데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마도 예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검찰이 자금과 관련된 문제로 기소했다면 이와 관련된 상당한 증거를 확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1심이 프랑스에서든 국제적으로 관심이 컸던 것은 기존 프랑스 형사법 조항보다 더 강화된 법률에 따라 처벌된 인사들보다 르펜이라는 한 정치인의 무게감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유력한 대선주자라도 예외 없이 공금횡령과 같은 범죄는 아예 피선거권 박탈이라는 정치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법적 처벌을 가함으로써 차후 이에 대한 정치 경각심을 높여 줄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대체로 극우파 인사들은 이번 르펜의 유죄판결을 정치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좌파 진영 인사들은 정치인의 부정 혹은 부패에 대한 단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번 르펜의 유죄판결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권으로부터 독립된 사법권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특히 오랫동안 유럽 연합의 지원금이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기보다 일부 인사들의 사적 사용으로 인한 공금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걸 보면 공금횡령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그 피해액도 상당하다. 다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엄격한 사법적 판단과 법적 처분이 이루어져야만 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의회든 정부든 사법당국이든 의지가 분명하게 요구된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지의 구현이 정치인이라면 동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번 판결은 누구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예외 없이 법이 법이기 때문에 아무리 유력한 대선주자라도 마찬가지로 위법한 사항이 있다면 분명하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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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4
  • 동유럽 세계와 오스만투르크의 분쟁 : 제1, 2차 비엔나 전투를 배경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간에 1529년 9월 27일에서 10월 14일까지 18일 동안 비엔나에서 벌어진 대공방전으로 비엔나 포위라고도 하며, 1683년의 두 번째 포위와 구분하기 위해 1차 비엔나 공방전으로 지칭한다. 두 차례 모두 결과는 수비 측인 오스트리아의 승리였고, 이로써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서유럽 진출이 좌절되었다. 8세기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더불어, 유럽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비엔나 전투는 1683년 9월 11일과 9월 12일에 비엔나에서 발발했다. 이 전투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2달간 비엔나를 포위한 이후 발발한 전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신성로마제국의 기독교 연합군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 및 포위 부대와 맞서 전투를 벌였다. 비엔나 교외의 칼헨부르크 언덕이 주요 전장이었다. 이 전투는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처음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맞서 협력한 전투였으며, 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기독교 세계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698년까지 이어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레오폴트 1세에게 대부분의 헝가리 영토를 내주어야 했다. 신성로마제국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연합 병력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력군은 폴란드 군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반면 리투아니아 군의 행군이 지연되어 비엔나가 포위에서 풀린 후 이들이 도착했다. 비엔나 방어전은 에른스트 뤼디게르(Erenst Ridiger)와 그라프 폰 스트람베르크(Grap Von Stramberg) 장군이 이끌었으며, 그는 레오폴트 1세의 신하 중 한 명이었다. 전반적인 부대의 사령은 폴란드 왕인 얀 3세 소비에스키가 맡았으며, 그는 폴란드 군의 사령관도 겸임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군대는 투르크 조정의 수상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총사령관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총 병력은 약 9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683년 7월 14일 오스만 제국 군이 비엔나 포위를 시작했으며 오스만 제국 군은 60개의 예니체리 부대와 7만 명의 감시군이 있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683년 9월 11일에 시작되었으며, 구원군 46,000명이 비엔나에 도착한 직후에 일어났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비엔나에 대한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300년간의 신성로마제국 및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전투인 오스만투르크-합스부르크의 전쟁에서 이 전투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16년 동안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탈환했고 이 지역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으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동유럽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이 전투는 또한 역사상 가장 큰 기병전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하여 여러 역사적인 흔적과 전환점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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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2
  • 시리아를 장악한 HTS의 전신, 알 누스라(Al-Nusra) 전선
    알 누스라는 시리아 내전에서 활동했었던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지하드 무장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알 누스라는 2017년 초까지 알 카에다 계열의 조직으로 레반트 일대에서 활약한 근본주의 조직 중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강력한 조직이었다.이러한 알 누스라의 총사령관은 과거 ISIS의 지도자였던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와 협력 관계였다가 투쟁과 운영 자금과 관련한 노선 차이와 기득권 정쟁 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갈라진 인물인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Abu Mohammad al-Julani)이다. 현재는 알 누스라 전선이라는 이름을 버렸으며 알 카에다와 결별하고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과 합병해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ayʼat Tahrir al-Sham, HTS)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이름은 바뀌었을지라도 알 누스라와의 기본 이념은 거의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속해 운영하고 있다. 수장인 알 줄라니의 본명은 오사마 알 아브시 알 와흐디(Osama al-Absi al-Wahdi)이고 현재 나타난 이름인 아흐메드 후세인 알 샤라(Ahmed Hussein al-Sharaa)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축출하고 시리아의 수장이 된 다음부터 쓴 이름이다. 알 줄라니의 출생과 출생지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우선 알려져 있는 내용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 출신으로 고향은 데이르에조르 주 알 샤힐 마을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골란 고원 출신의 시리아인 부모에게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출생 시기도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는데 1974년생 또는 1981년생으로 추정된다 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82년 생이라 했다. 이처럼 출생지와 출생연도가 자료마다 다르니 정확한 정보가 미흡한 상황이다. 알 줄라니의 부친은 석유 엔지니어였고 나세르주의자였다고 한다. 나세르주의는 전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의 통치적 성격이나 사상 등을 의미하며 아랍 사회주의 이념의 주축이었다, 그래서 바트주의 사상의 시리아 정부의 탄압을 받아 이에 사우디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도중에 알 줄라니를 낳았다고 한다. 참고로 알 줄라니의 아버지는 이라크 바그다드 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며 어머니는 지리교사였다고 전해지며 본인은 다마스쿠스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가 미디어학과로 바꾸긴 했지만 시리아의 인텔리였다. 부친부터 시리아의 하페스 알 아사드 및 바샤르 알 아사드의 바트주의와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알 줄라니의 집안은 시리아에 대한 반골 성향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측면이 오히려 알 줄라니의 근본주의 성향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게 민든 셈이 되었다. 한편 알 누스라는 알 줄라니가 창단한 조직이 아니다. 그 역사는 19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에서 시작한 이슬람 보수주의 운동인 "알 누스라 운동"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에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에 속해 있었고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주변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하마스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시리아로 넘어간 지역은 "알 누스라 전선"으로 창당된다. 하마스나 현 HTS의 모태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인 셈이다. 이들 알 누스라 전선은 알 누스라 운동의 사상을 계승하는 시리아 이슬람 보수주의 정치 그룹 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바트당의 쿠테타 이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시리아의 대통령이 되면서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근본주의 단체들은 바트주의를 표방한 알 아사드 집안의 엄청난 탄압을 받아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알 누스라 전선은 다시 재개할 수 있믄 계기를 맞게 된다.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색깔혁명이 도래하면서 시리아에서도 알 아사드 집안에 반기를 든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이슬람 보수주의를 비롯한 야당 세력과 화해를 시도하여 시위를 무마하려 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그 화해의 일환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범들에 대한 석방을 시도했다.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주요 인사들이 석방되면서 시리아에서 자생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급격히 정치 세력으로써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샤르 알 아사드의 계획은 13년 후,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실책으로 나타난다. 이 때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알레포 지방을 중심으로 극단주의의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아사드 집안의 파멸을 노리는 미국과 집단서방은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알 아사드 정부 측은 점차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한 무력 진압을 시작했고 알 누스라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시리아 정부 예비군 무기고를 탈환하고 자체적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강대한 이슬람 무장조직인 자이쉬 알 이슬람(Jaish al-Islam), 아흐라르 알 샴(Ahrar al-Sham), 알 누스라 전선 등이 정치 조직에서 무장 조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내전은 이렇게 하여 발생하게 된 것이다. 알 누스라 전선은 자신들의 거점으로 이들리브를 선택했다. 이후 알 카에다에 가입했고 2015년에는 이들리브 지방을 지배하던 시리아군에 대항해 이슬람 전선과 연합군 집단임 "정복의 군대"(Jaish al-Fatah)를 결성하여 시리아 정부군을 격파하고 이들리브 지방을 완전히 탈환했다. 이어 여세를 몰아 북부 라타키아까지 정복하고 특수부대 훈련소 등을 운영하며 교육을 수료한 특수부대를 운영했다. 이들은 2016년 4월 알레포 남서부 칸 투만 지방에서 이란 혁명 수비대를 격파하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며 사실상 레반트 지역 알 카에다의 주력이 되었다. 이들은 레반트 지역의 타 이슬람주의 군벌들에 대한 영향력도 막대하여 ISIS와 시리아 정부군을 제외하면 시리아에서 최대의 전투력을 갖춘 군사 조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알 줄라니가 수장으로 성장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맞서 알 카에다에 맞서 싸웠고 알 카에다 고위 간부인 아부 무사비 알 자르카위(Abu Musab al-Zarqawi)의 잔존 세력의 부대들을 흡수했다. 이들은 시리아 내전에서 알카에다 이념에 따라 활동하는 가장 큰 무장 조직이 되었으며 2016년 7월 자브핫 파타 앗 샴(Jabha Fatah Ad Sham)으로 단체명을 바꾸어 알카에다를 탈퇴했다. 그리고 2017년 1월에 이들리브 지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을 망라한 거대 연합체인 하야트 타흐리르 알 샴(Hayat Tahrir al-Sham : HTS)을 창설하며 명실상부한 시리아 반군의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여전히 알 누스라 전선으로 불리는 이유는 러시아, 시리아는 물론, 반군 조직들조차 이들을 비난할 때 바뀐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저 똑같은 누스라 전선으로만 호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측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알카에다 이념을 추종하고 국제 지하드 네트워크의 일부인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서 알 누스라 전선이라고 공식적으로도 호칭하고 있다. 알 누스라 전선의 특징은 세속주의자, 자유 민주주의자를 기본적으로 적대하고 샤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표방한다. 특히 얼마 남지 않은 자유 시리아 군 주력 부대였던 13사단의 사령부를 기습해 무기들을 탈취하고 그들의 간부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며 자유 시리아 군 깃발을 흔들며 저헝하는 반군 지역 시민들에게 강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 정부군과 주적으로 맞서고 있는 실정이지만 ISIS와는 여전히 가깝게 지낸다. 그들의 성향은 시리아 지역에 한정된 지하디즘을 내세우고 있으며 ISIS보다 관용적인 성향이다. 이들은 이교도들인 시아파나 소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고 외국인 인질들을 살해하는 ISIS와는 반대로 자신들은 샤리아 법에 의거해 보호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ISIS가 단기간에 패망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을 파악해 최대한 겉으로 서방 인권 단체들을 자극하지 않은 측면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알 카에다 계열이며 근본주의자들이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의 비 이슬람 세계 국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있다.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합법적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점령지 시민들의 자치단체에 행정을 일임하고, 조직원들을 동원해 치안 유지 활동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터키 정부의 묵인 하에 이들리브 주의 실질적인 지배 조직으로 등극하는데는 성공했다. 따라서 조직은 HTS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군사는 HTS가, 행정은 이들리브 시민들의 자치 조직들을 만들어 분담하는 형식의 국가 경영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사드 정권을 뒤집고 구국정권을 내세워 지도 세력이 된 현재, 타 종교를 박해하고 세속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등의 행위들을 일삼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격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아는 앞으로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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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2
  •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이야기
    로마 원로원과 인민으로 나타나는 로마 공화정은 고대 로마 시대에서 B.C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끌었던 공화정 정체와 그 정부를 지칭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은 권력을 분리하면서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오랜 기간 동안 파트리키(Patricii)와 그 외에 명문가 출신이 아닌 플레브스(Plebs)가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국은 발전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둔 귀족들이 통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이 정부를 장악할 수 있게 한 법이 철폐되었으며, 그 결과 신(新) 귀족이 출현했다. 공화정이 출범하고 처음 2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영토를 확장했다. B.C 3세기에 로마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했다. 이후 2세기 동안 로마는 오리엔트의 상당한 지역과 갈리아까지 지배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공화정 체제는 제국주의로 변질되면서 로마 제국으로 거듭났다.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 이행되는 정확한 시점은 해석하기 따라 다르다. 역사가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인 임페라토르에 오른 B.C 44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B.C 31년,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한 B.C 27년 등을 로마 공화정이 종식된 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로마가 이루었던 수많은 법률 및 입법 제도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근대 국민 국가와 국제기구에 그 자취를 남겼다. 또 로마의 라틴어는 유럽 여러 지역의 문법과 어휘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연구의 주제인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사 전체에서 보면 왕정과 제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근대 역사 철학의 완성자인 헤겔(Hegel)은 로마와 그리스는 세계사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민족이라 평가한다. 철학자인 헤겔은 기독교와 더불어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유럽 지역을 문명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다. 로마와 기독교를 통해 유럽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기반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시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로마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법의 영역 등에서 보여준 탁월함이 로마 역사의 의미를 찾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에서 선진적인 정치 제도와 정치 행위의 행간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일례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을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정치 제도의 본보기로 삼아, 자신이 거주하던 시기의 이탈리아의 정치적 부패를 극복하고자 했다.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들은 파트리키(Patricii)라는 귀족과 플레브스(Plebs)라는 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왕정이 붕괴된 이후, 이것을 주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는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 통치를 맡기는 방식을 고안해 내고 이러한 부분들이 로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집정관은 연임을 무한히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모든 현안을 그들의 재량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집정관을 독식하자 또 다른 왕정으로 변신하게 될 것을 우려한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이 연임을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 집정관은 경험이 없는 자들이 맡는 직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집정관들은 주로 집정관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모인 귀족 집단인 원로원의 조언을 듣고 일을 처리하고자 했기 때문에 원로원의 권력이 점점 비대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력이 매우 강해졌는데 이 감찰관은 원로원의 의원들 중 명망있는 가문만이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대(大) 카토도 감찰관의 직책을 오랫동안 수행했다. 이렇듯이 원로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었기 때문에 이 원로원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시피 되었다. 따라서 공화정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지게 된다. 그러나 집정관의 권력이 원로원으로 넘어가도 군사 지휘권(Imperium, 임페리움)은 집정관의 고유 권한이었으며, 이것만큼은 원로원의 권력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집정관들은 선출되자마자 2개 군단(각각 4,000명씩 8,000명)이 주어졌고 해마다 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로마의 사정상 집정관은 주로 전선에 나가 있는 일이 잦았다. 집정관들은 실질적인 권한이 원로원에게 넘어갔어도 그들이 병력을 통솔해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에 열중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은 행정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관은 군단을 지휘하느라 로마에 머무는 일이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에 남아 집정관 대신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직책이 만들어진다. 이를 법무관(Praitor, 프라이토르)라고 한다. 법무관직 역시 초기에는 로마 시를 담당하는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마 법무관 아래엔 건축물과 도로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를 조영관(Aydiris Plebis, 안찰관, 아이딜리스 플레비스)이라고 했다. 안찰관은 원래 평민만 선출될 수 있었으며 호민관을 보조하면서 케레스(Ceres) 신전을 관리하는 일을 했으나, 이후 공공사업, 시장,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리하도록 권한이 확대되었다. 또한 두 명의 귀족 안찰관이 더 추가되었으며 이들은 명령권을 보유한 상위 안찰관이었다. 안찰관의 하위 직급에는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Qoaistor, 콰이스토르)가 있었다. 앞에 서술한 직책들은 순서대로 역임해야 했고 이를 두고 로미의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렀다. 주로 상부에서 임명하는 일반적인 관료 사회와는 달리 로마 공화정에서 저 직책들은 모두 선거로 당선되어야만 맡을 수 있었다. 또한 로마는 특이하게 상부의 결재를 받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담당관의 재량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안찰관이 법무관보다 권위가 낮은 직책이긴 하나 안찰관은 법무관의 허락 없이 자신의 재량으로 건물을 수리하거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관료제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계단식 조직이 아니라 각각 담당 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선출직 행정관인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집정관, 법무관 등은 귀족에서만 선출되었으나, 로마 초기의 평민 반란 이후에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동등해지면서, 호민관(Tribunus Plebis, 트리부누스 플레비스) 리키니우스(Licinianus)의 주장으로 그 수의 절반을 평민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다만, 집정관 직위의 경우는 B.C 367년까지도 파트리키 귀족들만 선출될 수 있었다. 플레브스 평민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귀족들은 대대장(Tribunus Militum, 트리부누스 밀리툼) 6명에게 집정관 급 권위를 부여해 통치하게 하는 일명 집정 무관(Tribuni Mitum Consular Potestae 혹은 Consular Tribune)이라는 관직을 만드는 편법으로 집정관 직에 선출될 권리를 귀족들만의 특권으로 유지했다. 이러한 집정 무관 직위는 B.C 366년 평민도 집정관직을 지낼 수 있게 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Lex Licinia Sextia)이 통과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집정 무관직의 신설이 앞서 언급한 귀족-평민 간의 갈등이라는 도식은 부정되고, 2명의 집정관만으로는 당시 로마의 다중 전선을 감당할 수 없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 대부분이다. 파트리키는 라틴어 명사 "Patres (아버지)"에서 비롯된 용어로, 이는 고대 로마의 귀족 계급 집단을 지칭한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 권력을 독점했지만, 평민 플레브스들과 거듭된 충돌이 이어졌으며 이어 타협을 거치면서 많은 권력을 평민들에게 넘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고대 로마의 사회 구조가 발전했다. 그러다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대가 끊기는 가문이 많아지고 평민 출신의 신흥 귀족 노빌레스들이 대두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권위만큼은 사회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 공화국에서 로마 제국을 거쳐 비잔틴 제국 시대까지도 명예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노빌레스가 평민 귀족이나 신흥 귀족으로 번역되는 것과 같이 파트리키는 전통 귀족, 정통 귀족, 건국 귀족, 개국 귀족 등 로마 초기부터 있던 권력 집단 씨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역된다. 파트리키 가문들 내에서도 주요 씨족들(Gentes Maiores)과 그 외의 씨족들(Gentes Minores)이 구분되었다고 하는데, 주요 씨족들의 정확한 목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코르넬리우스(Cornel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발레리우스(Valerius), 파비우스(Favius), 아이밀리우스(Aemilius) 등 몇몇 가문들은 거의 확실하게 주요 씨족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Titus Livius Patavinus)에 따르면, 로마 왕국의 건국자 로물루스가 원로원 의원으로 삼은 100명의 인사들이 아버지(Patres)로 불렸고, 이들의 후손이 파트리키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로물루스가 지혜로운 원로 100인에게 고귀한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일반 평민인 플레브스들과 분리된 파트리키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디오니시오스(Dionysius)는 로물루스가 부유함을 기준으로 삼아 파트리키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로물루스가 파트리키를 창설했다기보다는 부족 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개념이 도래했다고 본다. 즉, 로마가 흡수한 부족의 옛 부족장은 파트리키, 부족민은 평민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곧 소원해질 수 있는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존처럼 유지하기 위해 클리엔텔라(Clientela) 관계가 등장했다. 파트리키는 자신 휘하의 평민들을 클리엔테스(Clientes)로 삼아 보호해줬고, 클리엔테스는 그런 그들을 파트로누스(Patronus)로 받들며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파트리키는 로마 출신 귀족에 국한되지 않았고,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정 초기 시대에 로마로 이주한 타 도시의 귀족들 역시 파트리키로 인정받았다. 타 도시의 씨족이 파트리키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봉기로 축출된 지 5년 후인 B.C 504년에 사비니 족의 귀족 아티우스 클라수스(Attius Classus)가 500명의 친족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하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파트리키의 위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대다수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원로원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특히 신들과 소통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등 모든 사제직은 오직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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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2
  • 미얀마 최대의 난민 로힝야인들의 역사와 문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로힝야 인종의 기원 문제
    로힝야는 1799년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Francis Buchanan-Hamilton)의 저서에 루잉아(Rooing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로힝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오랫동안 뱅골 일대와 시킴, 미얀마의 라카인 주를 지배한 아라칸 왕국에 그 영향을 미쳤다거나 미얀마로 들어온 무슬림 아랍인 선원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슬림 아랍인 선원들의 후손 설은 14세기 이슬람의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맞지만 상반되는 내용도 많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정크선을 타고 15일간 항해한 끝에 미얀마 네그라이스(Negrais) 곶 부근의 아라칸 지방인 바라흐나카르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곳 사람들의 입은 흡사 개의 입같이 생겼다. 그들은 미개인으로서 힌두교건 다른 어떠한 종교건 믿지 않으며 해변가에 갈대를 세우고 풀로 이엉을 얹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남자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벌거숭이다. 그러나 간혹 한두 사람은 음경과 고환을 감싼 갈대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있다. 그들과 함께 벵골이나 자바섬에서 온 일군의 무슬림들은 특정한 구역에 살고 있다." 로힝야인들의 외모는 아랍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방글라데시인과 유사한 뱅골족이 상당수 존재한다. 아라칸 지역에 소수의 파르시족이나 무슬림이 전근대부터 소수 방문하거나 거주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대다수 로힝야의 선조들은 순수 벵골인이라 보기 어렵고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당시, 미얀마까지 통합하여 영국령 인도를 완성하고 인도 각지에서 저항하던 종족들을 벵골인들과 함께 마구 뒤섞어 미얀마로 밀어냈다. 따라서 로힝야는 그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 뿌리를 단정 짓기 힘들다. 워낙 뒤섞어 놓은 상태인데다 벵골인이 다수이긴 하지만 인도 각지의 민족들과 혼혈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씨-부족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2년 기준으로 58,000명이던 무슬림의 수는 1911년에 3배 이상 증가했다. 다만 이 숫자 대부분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벵골과 미얀마를 왕래하는 사람들이고 기록에서는 이들을 거주하는 인구로 보지 않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당시 동파키스탄으로 불리는 방글라데시로부터 미얀마로 벵골족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이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미얀마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에 다시 미얀마로 25만여 명에 이르는 2차 난민이 있었다. 현재 로힝야족의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아랍 문자, 혹은 아랍 문자에서 파생된 하니피 로힝야 문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에 로힝야족이 영국 치하에서 서면으로 통신을 할 때 우르두어를 파키스탄의 일족으로써 사용했던 것의 영향때문이지, 아랍권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따라서 미얀마로 들어온 중동계 및 중앙아시아계 무슬림의 후손들은 미얀마 현지에 동화되어 상좌부 불교 신자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그대로 믿었던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인종적으로 황인화가 되어진 상태에 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의 중동계 및 중앙아시아계 무슬림 이주민들의 후손들 역시 오랜 혼혈화로 인해 현지 말레이인이나 자바인 등 현지 주류 민족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을 정도로 동화되고 혼혈화되었다. 물론 로힝야인들이 그 기원을 언급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아랍계 후손이었다고 해도 이미 언어, 문화적으로 볼 때 벵골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장 옛 무굴 제국 북부 지역이었던 북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 남아있는 무굴 제국의 주류인 투르크인, 페르시아인 지배층의 후손들도 언어와 문화, 인종적으로는 현지 토착민에 거의 동화되어 이슬람교 신앙만 겨우 지켜내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전근대 미얀마는 생산성이 매우 낮은 낙후 된 지역이 많았고 주요 도시들도 해안 지대보다는 내륙에 위치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힝야족, 로힝야어라는 별개의 명칭으로 볼 때 전혀 다른 혈통과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지만, 이는 일개 모험가인 이븐 바투타의 일대기에서 나타난 단어를 토대로 20세기 초 로힝야인이 자신들에 대한 민족주의를 대두시키면서 발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을 두고 1990년대 초만 해도 항상 벵골족이라 불렸으며 치타공 벵골인이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얼굴이 검갈색인 이유는 강한 햇볕에 타서 그러한 것이고 인종적으로 볼 때 전형적인 몽골리안으로 나타난다. 이들 인종은 흑발, 직모, 피부색, 이목구비 등으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인종과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고 해도 그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벵골인은 흑백혼혈, 정확히 코카소이드와 네그리토의 혼혈이라 곱슬 머리카락에 피부색, 안와상융기 등 생김새부터 달라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확연한 벵골인과 가깝고, 언어도 벵골어의 남부 방언인 치타공어 갈래다. 동남아시아 계통의 미얀마인의 미얀마어와, 인도 계통의 벵골인이 사용하는 방글라어 사이의 차이가 매우 뚜렷이 나타나며 이들을 대개 로힝야어라고 명명은 해주고 있지만, 실상은 치타공어와 단어 몇 개, 그리고 사용하는 문자가 다른 수준일 뿐 억양까지 동일한 수준이다. 그나마 표준 벵골어와 다르게 표준 벵골어가 쓰이는 수도 다카어와는 크게 다르지만 이는 로힝야어와 방글라데시 치타공어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한 비교라 볼 수 있겠다. 로힝야어는 당연히 미얀마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서, 미얀마인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 미얀마에 멀리 보면 3세대, 100년이 넘는 기간이나 거주하면서 로힝야어와 치타공어가 큰 차이가 없고, 미얀마어와 기초적인 의사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미얀마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인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교육복지도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인에게 미얀마어를 가르칠 생각이 없다보니, 로힝야인의 입장에서 미얀마어를 굳이 배워야 할 필요도 없고, 로힝야인이 독자 언어로 토착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렇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언어의 변화는 매우 보수적으로 불과 수십 년 동안의 단절만으로 언어가 고유 언어로 될 만큼 바뀌지는 않는다. 만약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인들에게 미얀마어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면 로힝야어는 미얀마어의 차용어들이 유입되어 치타공어 및 표준 벵골어와는 더욱 많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힝야 난민과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은 말로는 자유롭게 의사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간에 필담은 불가능한데, 방글라데시에서 벵골어를 동부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는 반면에 로힝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아랍 문자나 하니피 로힝야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로힝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이 부분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로힝야가 다수의 여러 민족이 섞인 집단과 주 종족이 벵골인이고, 억양도 벵골어와 유사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각국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글라데시가 난민 캠프의 출입을 차단해도 로힝야가 도시에 몰래 들어가 취직해서 일하고 섞이는 것을 방글라데시 경찰이 단속을 하고 있지만 이를 잡아내는 것 또한 사실상 불가능하다. 방글라데시에서 계속 살아온 치타공인과 미얀마에서 온 로힝야인을 구별하려면 글을 써보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로힝야인이 자신이 글을 쓸 줄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는 방글라데시 또한 문맹률이 높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단속을 일일이 하는 것도 큰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따르며, 오히려 방글라데시 치타공 사람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등 아랍 문자로 표기되고 있는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각 언어의 단어나 문장을 아랍 문자로 쓰다가 그 모습을 본 누군가에게 로힝야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스스로가 방글라데시 치타공 사람인지 로힝야인인지 직접 말하지 않는 한, 사실상 난민 캠프를 몰래 탈출하여 불법으로 입국한 로힝야인을 방글라데시 사회에 동화되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한편 로힝야인의 문화로 전통음악과 전통춤 또한 방글라데시나 인도 서벵골 주와 큰 차이가 없으며, 특히 방글라데시 본토 치타공 시민들의 전통음악과 전통 춤은 로힝야인의 전통과 매우 유사하다. 로힝야인들 조상들의 고향이라 일부 주장하는 아랍권의 전통음악과 전통 춤을 비교한다면 매우 이질감이 있다. 로힝야나 로힝야어라는 단어는 인류학, 문화학, 언어학적인 학문적 의미를 가진 단어라기보다는 근래에 생긴 정치적이고 정체성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인공적인 단어이고, 그렇기 때문에 미얀마인들은 '로힝야'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인, 로힝야어를 부정하고 일관적으로 그들을 벵골인, 벵골어로 부른다. 그러나 정작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서벵골인들은 로힝야인을 같은 벵골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로힝야인의 입장에서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민족이 된 셈이다. 물론 반대로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벵골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는 로힝야인들 또한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편이다. 로힝야인들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벵골인의 지파로 인정하게 되면, 이들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상태로 로힝야 민족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로힝야인의 민족정체성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그만큼 난관이 따른다. 그래서 로힝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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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2
  • 미얀마 사가잉 대지진(Sagaing Great Earthquake)과 위험한 동남아시아의 지질 및 지층 형태
    2025년 3월 28일 15시 20분 54초에 미얀마 사가잉 주에서 리히터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했다. 오늘 있었던 사가잉 대지진은 1948년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가장 거대한 지진으로 나타나며 독립 이전, 미얀마의 역사까지 포함한다면 1912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7.9의 메묘(Maymyo) 지진 이후, 무려 113년 만에 발생한 최대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해 미얀마 전역은 물론 1,000km 떨어진 인접 국가인 태국 방콕에서도 건물 붕괴가 일어나는 등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사가잉 대지진의 진앙은 사가잉 주(州) 북서쪽 약 16km(10마일) 지점이며 미얀마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만달레이 근교라 만달레이 일대에서도 많은 피해가 있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그런데 미얀마는 내륙부 동남아시아에서 지진 위험이 항상 경고되어 있던 국가였다. 물론 이렇게 할 지진이 많지 않았지만 인도 판, 순다 판, 소규모 판인 버마 판 사이에 위치해 있는 충돌 지대의 판이라 항상 대형 지진이 발생할 위험 경계선에 놓여 있었던 곳이다. 더불어 방글라데시 쪽으로는 인도판이 들어가는 수렴 견계인 아라칸(Arakan) 해곡이 위치해 있으며, 여기에서 동쪽의 미얀마 내륙으로는 버마 판과 순다 판이 충돌하는 판의 경계가 있다. 이 지역의 판의 경계를 사가잉 주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사가잉 단층(Sagaing fault)"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쪽의 버마 판은 동쪽으로, 순다 판은 남쪽으로 이어지는 주향 이동 단층으로 언제든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의 남동쪽 해역에서부터 거의 정북쪽으로 올라오는 이 단층은 미얀마 북쪽 인도와의 국경 근방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무려 1,200km에 달한다. 그런데 이 단층에서는 많은 수의 강한 지진이 연달아 발생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이 단층에서 최대 지진은 1839년 3월 23일 발생한 아바(Ava) 지진으로 손꼽힌다. 당시 아바 지진의 리히터 규모는 8.1~8.3으로 추정되며, 미얀마 역사상 내륙 지진으로는 최대의 지진으로 그 피해는 인근 태국, 인도, 네팔에 영향을 미쳤고, 방글라데시에는 그 여파로 엄청난 해일이 발생해 다카 시의 3분의 2가 물에 잠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지진이 발생했으며 20세기 들어 1912년 메묘 지진이 일어난 이후, 44년 만인 1956년, 사가잉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7.1의 강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1956년에 발생한 지진이 묘하게도 70년 후에, 같은 사가잉 일대에서 다시 발생했다. 만달레이 남서쪽에서 사가잉과 만달레이를 잇는 사가잉 대교(Sagaing Bridge)가 붕괴되었으며 미얀마 3대 불교 성지 중 하나 마하무니(Mahamuni) 사원과 탑이 붕괴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인명 피해가 예상되고 있다. 이어 현재 사상자 900명에 육박하고 있고, 미얀마의 인구밀집도 및 각종 현상들을 볼 때 최소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생기고 10만 명이 넘는 이재민들이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 미얀마 군정은 네피도, 사가잉, 만달레이, 바고, 마궤, 샨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웃 국가 태국도 마찬가지로 방콕에 공사 중이던 30층 높이의 빌딩이 무너져 인부 수십여명이 매몰되었으며 식당과 상점이 들어선 방콕 시내 건물이 흔들리고, 고층 호텔의 옥상 수영장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 또한, 수도 방콕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서남부 운남성에서도 진동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운남성 일부 지역에서도 건물이 부서지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베트남도 그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남부 호치민 1군과 11군, 푸뉴언(Phu Nhuan) 군과 7군 등 고층 빌딩에 거주 중인 많은 주민들이 집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아래층으로 대피했다. 그리고 필자가 있는 하노이에도 약간의 진동이 감지되었다. 이와 같은 대지진으로 인해 내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지진의 위험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처럼 휘청거리는 이유가 뭘까? 동남아시아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보면,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가 동쪽과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대륙부에서는 많은 산악과 하천 저지대의 기복이 심한 지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도서부에서는 말레이 반도 및 인도네시아 군도를 형성하고 계속 동쪽으로 나가 환태평양 조산대와 만나면서 필리핀 열도를 만들어 놓은 형국에 있다. 이러한 지각 구조로 보면, 인도-호주 판(Indo-Australian Plate)과 필리핀 판(Philippine Plate)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도-호주 판은 대륙의 히말라야 및 티베트 고원에서 남쪽으로 인도와 미얀마 사이로 뻗어 내려오는 산맥들, 안다만(Andaman) 제도 및 니코바르(Nicobar)제도, 수마트라 섬에서 말루쿠(Maluku) 제도까지의 인도네시아 군도를 말하고 있다. 반면 필리핀 판(Philippine Plate)은 필리핀 열도부터 일본 열도를 거쳐 캄차카 반도까지의 환태평양 조산대의 불의 고리를 형성한다. 이 두 개의 판, 플레이트들이 만나는 지역 및 해역에는 지진과 화산 활동이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미얀마에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 말루쿠 등을 거쳐 필리핀 루손 섬까지 활 같이 생긴 모양을 이루는 지역은 이른바 ‘불의 고리(Ring of Fire)’라고 부르는 환태평양 지진대 및 화산대의 일부를 이루는 지역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인도양 및 남중국해 일대의 지역은 화산과 지진 등이 빈번한 곳이지만 그에 비해 내륙부 동남아시아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는 화산과 지진 같은 자연 재해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인도양 및 남중국해 일대의 지역 및 싱가포르 등은 본래 지진으로부터 견딜 수 있는 빌딩들과 가옥들이 많은 편이다. 특히 싱가포르, 자카르타, 마닐라 등, 대도시들의 고층빌딩 마천루들은 지진으로부터 내진 설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내륙부 동남아시아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는 내진 설계가 취약한 편이다. 대형 지진과 화산 활동 등이 많지 않다보니 내진 설계를 무시하고 지은 가옥들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고층빌딩 마천루 또한 내진 설계가 부실해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필자가 있는 베트남의 경우, 정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오래된 옛 건물 및 아파트들과, 높은 습도로 인한 곰팡이들 및 철골의 부식이 심하고, 내진을 장담하기 어려운 고층빌딩들은 강풍이 불면 흔들거리는 면 또한 있어 불안한 입장이다. 게다가 지하에는 본래 늪지대였던 곳들이 많아 지반 자체가 형편 없는 곳이 많다. 즉, 연못 같은 물들이 지하에 흘러들어가 땅 속 깊이 들어온 건물의 지축을 파먹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불안한 지반 때문에 하노이와 호치민은 지하철이 아닌 지상철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하노이와 호치민 도시 곳곳에 웅덩이와 호수, 저수지 같은 곳이 많은데 대개 예전에 늪지 및 습지였던 곳이 많아 도시를 개발하면서 그곳에 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호수들이다. 그런 지반 위에 세워진 고층 건물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지반은 계속 침하된다. 그런 사정인데도 하노이와 호치민에서는 계속 고층건물 마천루들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이는 베트남 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국 방콕이나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 캄보디아의 프놈펜과 같은 도시도 마찬가지로 지반이 불안정하며 내진 또한 형편없이 부실하다. 미얀마에서 진도 7.7의 강진 때문에 이웃 나라 태국 방콕의 고층건물이 그 영향으로 무너지고 호치민의 고층빌딩들도 흔들렸다는 것은 그 취약성을 반영한다. 얼마나 불안한 지반 위에 형편 없는 내진으로 건설 되었으면 진앙지에서 1,000km가 넘는 지역의 건물들까지 그 영향으로 폭삭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달리 설명할 부분이 없다. 만약에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리히터 규모 진도 6.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특히 베트남은 1893년과 1939년 서북부 디엔비엔푸 지역에서 초대형 지진 피해를 당한 바 있는데 이 때 리히터 규모 6.8, 6.75 였다. 또 호치민 시와 인접한 남부 지역에서도 1923년에 규모 6.3의 지진이 대륙붕 해역에서 발생한 바 있다. 만약 이 지진이 도심이나 산업지역에서 발생했다면 피해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아시아 지진협회(AEA)에서도 2011년 하노이, 호치민, 바리아-붕따우 성 등 세 곳이 리히터 규모 5.0∼7.0의 대형 지진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베트남은 지진대에 속해 있지 않지만 대형 지진과 쓰나미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앞으로 해야 할 것은 최첨단 지진 탐지 장비를 갖추고 지진과 쓰나미에 대응한 조기 경보 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고층건물 내진설계에 대한 법안을 발의해, 엄격하게 감독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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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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