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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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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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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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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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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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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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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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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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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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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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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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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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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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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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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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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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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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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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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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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소수민족 모로족과 민다나오, 루손 섬의 필리핀 정부와의 관계
- 모로인은 필리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 사는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들을 말한다. 모로인의 인구는 약 500만 명이다. 모로라는 단어는 무어인의 변형으로 알려졌다. 14세기부터 말라카 및 보르네오 섬으로부터 이슬람교가 술루 제도를 통해 민다나오 섬, 세부 등 현재 필리핀 남부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이슬람교를 믿기 시작한 다양한 민족 및 무슬림들을 통칭하는 단어가 모로족이다. 모로라는 단어의 어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베리아 반도 및 북서 아프리카의 무슬림을 뜻하는 무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이 민다나오 지역뿐만 아니라 필리핀 열도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통칭할 때 사용했던 단어였다. 현재는 마긴다나오(Maguindanao), 마라나오(Maranao), 타우수그(Tausūg)가 대표하고 있고 필리핀 도독령 이전에 이슬람을 신앙했던 세부아노 인도 모로족으로 간주되고 있다. 17세기 이후로 술루 술탄국이 팔라완 섬 남쪽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하면서 팔라완 섬 남부에는 무슬림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마닐라 정부의 카톨릭화 정책으로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팔라완 섬 북부는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에 비하면 모로족이 적은 편이지만 이슬람을 신봉하며 마긴다나오 어나 타우수그 어를 구사한다. 물론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2013년에 방사모로 공화국이라는 미승인국을 건국할 정도로 필리핀과는 종교적, 문화적으로 매우 거리가 멀다. 애초에 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필리핀인들과 달리 이들이 사는 민다나오 지방은 카톨릭과 이슬람교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다만 이들이 잠보앙가(Jamboanga) 쪽은 이슬람이 좀 우세한 편이어서 미승인국까지 세우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사실 민다나오에서도 무슬림과 카톨릭 신자들은 웬만하면 정쟁을 벌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만약 갈등이 생기면 민다나오 쪽에서 있는 내전이 더욱 커져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사모로는 2013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 동안 필리핀에서 존속했던 미승인국이다. 방사모로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계통으로 나라를 뜻하는 방사와 모로의 조합, 그리고 모로국으로 편역 할 수도 있다. 원래는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강력해져 세운 국가였다. 당연히 필리핀 정부가 이를 공격해왔는데 처음에는 필리핀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대부분 승리를 하여 2013년에 독립을 선포했다. 처음에는 강력해지는 것 같지만 필리핀 정부가 다시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하여 결국 8월 말부터 서서히 밀리다가 같은 해, 9월 말에 결국 멸망했다. 2012년 필리핀 정부와 자치구 설립에 합의했으나 그에 대한 반발로 인해 독립한 것 같다. 방사모로 공화국이 붕괴한 이후 2014년에 정부군과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양측이 다시 협상에 들어갔고, 폭넓은 자원 채굴권 보장을 기반으로 한 방사모로 자치구가 설립되었다. 2012년 1월 27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술루 지역에 있는 한 성당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23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와 같은 테러의 배후로 술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슬림 테러조직 아부 사야프(Abu Sayyaf Group, ASG)이 있다고 발표되었다. 이어서 같은 해, 1월 30일에는 인근 잠보앙가 시에 있는 한 모스크에 폭탄이 투척되어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지난 50여 년간 지속되며 120,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필리핀 무슬림 분쟁의 종식에 대한 기대가 높은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영향을 끼칠까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4년 아키노(Benigno Aquino III) 정부와 필리핀 무슬림 최대 반군 조직인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MILF)과 맺은 평화 협정을 실현할 실행법이 오랜 진통 끝에 의회를 통과하고 이를 확정하기 위한 국민 투표가 지난 2019년 1월 21일에 실시되었다. 이러한 실행 법들에 근거해 기존의 민다나오 무슬림 자치구(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 ARMM)는 방사모로 무슬림 자치구(Bangsamoro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 BARMM)로 대체될 예정이다. 당시에 실시된 국민 투표는 기존의 ARMM 포함 지역과 참여 의사를 밝힌 인근 두 도시(Cotabato City, City of Isabela)에서 실시되었다. 따라서 그 투표 결과가 발표되던 1월 27일에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술루 지역은 이번 투표에서 방사모로 조직법(Bangsamoro Organic Law, BOL)에 반대하는 표가 더 많이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폭탄 테러 사건이 이제 첫 출범하려는 BARMM과 민다나오 무슬림 지역의 평화에 혹시나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과거에도 무슬림 반군과의 다양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들의 저항이 이어지면서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리핀 무슬림 분쟁은 소수 민족 분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필리핀 무슬림이 인종적으로 다른 필리핀 국민들과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카톨릭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소수인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문화적 소수 민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소수 민족 분쟁은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그동안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에스테반 레이(Esteban Ray)는 분쟁의 발생 원인에 관해 차별적인 정부 정책과 이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으로 판단했다. 특히 소수 민족 내부의 불평등한 구조도 분쟁을 촉발하는 원인으로 주목했다. 이는 소수 민족 내부에 투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부유한 계층이 존재하고, 더불어 경제적인 상황이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전쟁터라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갈 다수의 빈곤층이 존재할 때 이들 간의 연계를 통해 분쟁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에스테반 레이의 이론은 필리핀의 무슬림 분쟁 발생 배경을 설명하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필리핀 무슬림 사회는 필리핀 국가 전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일부 전통적인 상류층들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다수의 무슬림 민중들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분쟁의 발생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며 빈부격차는 모든 것의 근원적인 원인이 된다. 한편 로버트 구어(Robert Gurr)는 1993년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소수 민족 분쟁이 촉발하는 배경으로 정치적 권리, 경제적 권리, 그리고 사회, 문화적 권리에 대한 불만의 고조를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분쟁으로 이어지기 위한 또 다른 조건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우선 소수 민족의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으며, 둘째로 중앙 정부가 이를 억제할 정도의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소수 민족에 대한 외부의 지지와 지원이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환경을 활용하려는 정치적 야심가가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로버트 구어의 소수 민족 분쟁의 발생 배경과 조건에 관한 이론도 필리핀의 사례에 적용될 수 있다. 필리핀 무슬림 분쟁이 본격화되던 1970년대 초기의 상황은 로버트 구어의 소수 민족 분쟁 발생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로버트 구어에 의하면, 소수 민족 분쟁에 대한 중앙 정부의 정책은 크게 무력 진압과 타협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이는 분쟁을 일으킨 소수 민족의 요구 사항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중앙 정부의 태도 여부에 따라 분쟁이 지속되기도 하고, 또한 합의에 도달하여 분쟁이 종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소수 민족 분쟁의 이슈로 자주 등장하는 분리 독립 주장은 특수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현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개별 사안에 따라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의 경우 무슬림 분쟁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에 대해 주요 반군 단체인 MILF가지속적으로 분리 독립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전개되고 있는 평화의 움직임은 MILF가 그 동안 고집해 왔던 분리 독립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 실질적인 자치를 요구함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다. 이는 필리핀 정부와 MILF 사이에 상호 정체성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공동 번영을 모색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수차례의 평화 협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번에 추진하는 BARMM은 과연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필리핀의 무슬림 반군 문제는 표면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적 분쟁으로 보여 질 수 있다. 이는 서구와 아라비아 세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러한 현상적 근원은 멀리 <구약성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도 두 종교 간 갈등을 심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에 와서 중동 국가들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후로 지목되는 미국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간의 충돌에 종교적 신념이 관여되어 있다. 필리핀 무슬림 분쟁을 종교적인 이유에서 찾는다면 그 근원은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718년부터 1492년까지 무어(Moor) 족 아라비아계 무슬림에 대해 벌였던 재정복전쟁(Reconquista)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본토에서 수백 년 동안 무슬림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 와서 마주하게 된 또 다른 무슬림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음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교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필리핀 무슬림 반군 문제는 종교적인 원인보다는 세속적인 원인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언제부터 필리핀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인된 기록에 의하면 1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450년경에는 일부 민다나오 중서부 지역에 이슬람 술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한 1521년에는 그 세력이 이미 마닐라까지 미칠 정도로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필리핀 무슬림들은 스페인의 정복 전쟁에 지속적으로 저항했으며, 이는 필리핀의 주권이 미국으로 이양된 1898년까지 이어졌다. 미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 필리핀 무슬림들은 최초로 필리핀 정치 공동체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이는 당시 술루의 술탄이 자치권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 하에서 미국과 맺은 베이트 협약(Bates Treaty)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 협약을 파기하고 1902년 직접 통치를 위한 법안을 공포했다. 이후 필리핀 무슬림들은 카톨릭이 지배적인 필리핀 사회에 소수 민족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오랜 고립의 시기에서 벗어난 필리핀 무슬림 사회의 근대적 전환을 의미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 전통적 지배 계층은 새로운 정치 체제의 지도층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필리핀 무슬림 사회의 지배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필리핀 무슬림 사회는 미국 식민 통치 시기부터 정치적인 소외와 경제적 주변화를 경험한다. 이 때부터 시작된 타 지역 사람들의 민다나오 이주 정책은 1946년 필리핀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이는 많은 무슬림들을 자신의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몰아내는 원인이 되었다. 새롭게 무슬림 지역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과 현지 무슬림 간의 갈등이 점차 격화되었고,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분쟁은 사병 집단을 동원한 유혈 충돌로 발전했다. 이처럼 사적이며 간헐적으로 발생했던 분쟁이 전면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변화하게 된 주요 사건은 1968년 3월에 발생한 자비다(Jabidah) 학살사건이었다. 이는 필리핀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무슬림 병사 30명이 병영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민다나오에서는 최초의 무슬림 반군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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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소수민족 모로족과 민다나오, 루손 섬의 필리핀 정부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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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파나마 운하를 노리는 이유와 전략
- 트럼프는 중국이 현재 파나마 운하를 운영하고 있지만 우리는 파나마 운하를 중국에 넘겨준 게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미국은 운하를 파나마에 준 것이고, 이를 되찾고자 한다고 했다. 중앙아메리카 국가를 가로지르는 82km 길이의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주요 연결 통로로 알려져 있다. 매년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은 최대 14,000척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운하라는 지름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옛날 라틴아메리카 대륙 끝까지 돌아 물류 가격으로도 비싸고 먼 길을 가야 했을 것이다. 사실 트럼프의 이와 같은 발언은 취임식 때 한 것이 처음이 아니다. 최근에 트럼프는 파나마라는 국가 및 2개의 대양을 이어주는 운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중국의 군인들이 불법적으로 파나마 운하를 운영하고 있다는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파나마와 중국 당국은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당시 파나마의 호세 라울 물리노 대통령은 운하를 운영하는 방침에 중국의 간섭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며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 반박했다. 아울러 트럼프는 파나마 측이 미국 선박에 과도한 운하 이용료를 부과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운하 운영권을 되찾아오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파나마 당국은 미국 선박에 과도한 운하 이용료를 부과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트럼프 작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청년 보수 단체 터닝포인트 USA가 주최한 행사에 참여하여 파나마가 부과하는 통행료는 터무니없고 매우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파나마에 운하 소유권을 넘긴 것은 관대한 기부라고 주장하며 이를 도덕적, 법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미국은 신속하고 완전한 반환을 요구할 것이라 했다. 트럼프는 전 날에도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서 파나마가 미국에 대한 갈취를 끝내지 않으면 파나마 운하를 전면적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할 것이라 했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매년 약 24억 달러(약 3조 4,000억 원) 이상에 달하는 통행료는 파나마 정부 수입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통행료는 선박의 크기 및 화물의 종류와 양 등에 따라 달라지며 화물선의 경우 최대 50만 달러를 내고 았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의 주도로 1914년 완공된 이후 운하 지대에서 파나마 인들의 반미 움직임이 고조되자 1999년 미국은 파나마 운하의 중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소유권을 파나마로 이전하면서 사실상 팔아버린 셈이 되었다. 파나마는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국이지만 트럼프의 발언에 강하게 반발했다. 파나마의 물리노 대통령은 이 날 X에 올린 연설 영상에서 파나마 운하와 인접한 모든 지역들은 파나마가 소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파나마 국민은 운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파나마의 주권과 독립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트럼프는 소셜미디어에서 두고 보자면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파나마 운하를 장악하겠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2024년 12월 트럼프의 취임 연설 이후에도 물리노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와 관련해 전 세계 그 어떠한 국가도 파나마 행정부에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해상 무역량의 약 5%를 처리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파나마 운하는 중국 군인들이 아닌 파나마 정부 기관인 파나마 운하 당국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중국의 파나마 운하 및 인근 기반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 대해 일부 미국 관리들이 얼마나 우려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중국 정부 혹은 군이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나와 있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파나마에서 중국 기업들의 입지는 상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2023년 10월에서 2024년 9월 기준 파나마 운하 물동량의 21.4%를 차지하는 등 중국은 미국에 이은 운하 2위 사용국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은 운하 인근의 항구, 터미널 등에도 크게 투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파나마 운하에 인접한 5개 항구 중 각각 태평양, 대서양에 위치한 발보아와 크리스토발 항구는 지난 1997년부터 허치슨 포트 홀딩스(Hutchison Port Holdings)의 자회사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이 회사는 홍콩 출신 사업가인 리자청(李嘉誠)이 설립한 홍콩 기반의 대형 상장사인 CK 허치슨 홀딩스(CK Hutchison Holdings)의 자회사로, 영국 등 전 세계 24개 국에서 활동하는 항만 운영 업체이다. 이를 두고 트럼프는 허치슨 포트 홀딩스(Hutchison Port Holdings)가 파나마 운하 전체 운영권을 쥐고 있다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미국의 외교 전문 싱크탱크 전략 국제 연구 센터(CSIS)의 미주 프로그램 책임자인 라이언 버그(Ryan C. Berg)는 허치슨 회사가 중국의 국영 기업인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허치슨 기업에 대해 중국이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파나마 항구에서는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에 대해, 잠재적으로 유용한 전략 정보가 많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를 통제 하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중국 간 경제적 성격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화물에 관한 정보는 차후 유통 공급망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파나마 운하는 현재 파나마 정부 기관인 파나마 운하관리국이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이 소유권을 강제로 가져올 방법은 없다. 이에 트럼프의 발언은 실제로 운하 소유권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통행료 인하를 염두에 둔 협상용이라는 반응도 나오고 있지만 여태까지 트럼프의 행동과 언행 등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실제 파나마 운하를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파나마 운하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주목을 받는 학자인 앤드류 토마스(Andrew Thomas)가 언급하길 당시 미국은 파나마 항만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이에 허치슨 회사는 아무런 반발이 없이 얻어냈다고 하면서 과거에는 파나마의 항만 운영 입찰을 두고 거의 경쟁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한편 중국의 민간 및 국영 기업들 또한 크루즈 선착장, 운하 위 다리 건설 등 여러 프로젝트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이어가며 파나마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앤드류 토마스는 이를 두고 중국의 대외 활동이라 묘사하며, 이로 인해 트럼프가 중국이 파나마 운하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 원인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항구의 운영이 소유권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트럼프의 주장은 터무니 없다고 했다. 한편 이 같은 트럼프의 발언을 들은 중국은 자국과 중남미와 관계에 의하면 평등과 상호 이익, 혁신, 개방성, 시민을 위한 혜택을 특징으로 한다고 반박했다. 파나마의 전략적인 위치를 고려한다면 중국이 수년 동안 이곳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전통적으로 미국의 터전으로 여겨졌던 중남미 대륙에서 자국에 대한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경쟁해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파나마와 중국의 관계에 의하면 지난 2017년에 파나마는 대만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공식적인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이는 중국 외교의 큰 승리로 자축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파나마는 1조 달러 규모의 글로벌 인프라 및 투자 이니셔티브인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한 최초의 중남미 국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가 일대일로에 동참하는 것에 이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을 선택했다. 한편 중국은 파나마에 중남미 지역 첫 번째 공자학원을 개설하고 철도 건설 기금을 제공하는 등 소프트 파워 확장에도 나서고 있다. 또한 중국 기업들은 파나마 언론인들의 소위 미디어 트레이닝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초, 파나마 시에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방문해 물리노 대통령과 회담을 벌였다. 물리노 대통령은 중국 및 중국 기업과 관련된 협정을 검토할 것이라 언급했다. 그는 루비오 장관에게 또한 파나마 운하에 대한 주권은 협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물리노 대통령은 이민 문제에 관해 미국과 더욱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루비오는 트럼프와의 메시지, 운하 인근의 두 항구를 운영하는 홍콩 회사인 CK 허치슨 홀딩스를 통한 중국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며 미국-파나마 조약 위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루비오는 중국 기업이 두 개의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용납할 수 없으며 즉각적인 변화가 없다면 미국은 조약에 따른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트럼프가 파나마를 압박하니 물리노 대통령은 파나마가 중국의 일대일로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베이징 주재 파나마 대사관은 규정에 따라 일대일로에 대한 참여를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이 결정에 대해 중국 측에 이미 90일 전에 통보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압력을 가한 후에 나왔다. 물리노 대통령은 일대일로에서 탈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단절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그런데 현재 파나마 운하의 문제점은 미국이 운영권을 도로 찾는다고 해도 적자를 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 있다. 잦아지는 엘니뇨 등 기상 이변 현상으로 인해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인데, 파나마 운하의 통행 방식 상 갑문에 물을 채우기 어려운 상태에서 선박들의 대기 시간이 크게 늘었다. 그러다보니 현재는 파나마 운하를 포기하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늘고 있다 한다. 결국 파나마 운하의 경우, 그린란드 합병과 달리 수익성 등을 고려한다면 미국에게 넘어갈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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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파나마 운하를 노리는 이유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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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중국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
- 동남아시아에서 미국과 영향력 강화 경쟁 중인 중국이 미래공동체 구축 방침을 재확인하고 자신들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동남아시아를 단속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일대일로 지원사업을 벌이면서 태국과의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해 몇 가지 교류를 약속했다. 우선 양국은 상호 비자 영구 면제 협정에 서명했다. 그동안 태국은 일본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라가 태국이다. 현재 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라가 베트남이듯이 일본은 태국에 심혈을 기울여 공들여왔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무역 경제의 위축을 타개하기 위한 통로나 마찬가지였고 태국 또한 일본은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런 태국에 대해, 일본의 장악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두 나라의 비자 영구 면제 협정은 태국에 대한 중국의 무한 투자가 가능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태국에 진출해 있던 화교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이어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 우선 2017년 1단계 구간 착공에 성공했다. 2단계 구간도 2024년 7월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한창 진행 중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알려졌다. 2단계 구간은 태국 나콘랏차시마에서 농카이까지 연결하는 총연장 357㎞ 노선이며 2031년에 개통 완료를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구간은 향후 중국-라오스 철도를 통해 태국 방콕과 중국 남서부 운남성의 곤명 지역까지 이어진다. 공사의 주체는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로 중국에 의해 지어진다. 태국은 고속철도를 지을 돈이 없기 때문에 중국이 투자해 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가금육 등 태국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고, 전기차 등 신산업 분야에서 태국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반면 태국은 미국의 오랜 우방이었지만 2014년 쁘라윳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집권하자 오바마 정권은 이를 매우 비난했었다. 따라서 쁘라윳 정권은 중국에 밀착하게 되었으며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올해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양국은 온라인 사기 등 초국가적 범죄에 대해서도 공동 대응하기로 했으며 테러 범죄에 대해 상호 간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위구르인 송환 문제다. 위구르족은 중국 정부에 저항하다가 터키로 망명을 시도하려 비교적 중립국으로 여겨지는 태국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했었다. 이에 태국 당국은 일부 난민에 대해 터키 망명을 허용하는 반면 다른 일부에 대해선 중국으로 송환하는 등 일관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망명 위구르인 단체인 세계위구르회의(WUC)의 딜사트 라시트 대변인은 태국이 난민 수용소 등에 분산 수용해오던 위구르족 90여명을 9일 비행기에 태워 중국으로 송환했다. 올해 3월 초에 있었던 위구르인 중국 송환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태국 수도 방콕 부근에 있는 군 비행장에 중국 항공기가 도착해 있었으며, 위구르족 여성들과 아이들은 이 항공기에 태워져 강제 송환되었다. 태국에 불법 입국한 위구르족의 강제 송환에는 중국 측의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2014년에는 자국에 불법 입국한 위구르인 200여 명 중 일부를 몇 차례에 나눠 터키로 출국시켰는데 이는 태국의 우방인 미국의 오바마의 요청 때문이었다. 당시 태국 당국자는 터키로 보낸 위구르인들의 수를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으며, 남성들은 대부분 이민국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가 터키로 출발했다. 특히 태국 남부 송클라 주에 불법 입국하는 위구르인들이 많았다. 같은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로 들어온 뒤, 태국의 핫야이 국경을 넘어 송클라에 들어오거나 트랭가누에서 어선을 타고 송클라로 비밀리에 입국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이처럼 불법 입국하다가 걸린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이 터키 출신이라며 터키로 보내줄 것을 주장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들이 자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출신이라면서 자국으로 송환시킬 것을 요구해왔다. 위구르족이 중국에서 테러를 저지르려다 실패하여 터키로 망명하려고 경유지로 태국을 선택했다. 따라서 불법 입국한 위구르족 처리는 국제적인 외교 현안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태국은 불법 입국 위구르족을 송환하라는 중국과 이들에게 터키 망명을 허용해야 한다는 터키 사이에서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위구르족은 터키에서 신장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언어, 종교적으로 가까운 터키를 정치적인 망명지로 선호하고 있다. 터키에는 약 30,000명의 망명 위구르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터키 외교부는 성명에서 중국이 신장 자치구 주민들에 대해 라마단 기간 종교 활동을 제한한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냄으로써 위구르족 문제는 중국-터키 간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됐었다. 그러나 태국과 중국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중립국으로써 태국에서 터키로 이동하는 것은 갈수록 어렵게 되고 있다. 그리고 올해 2월 27일 새벽, 방콕(Bangkok) 이민자 수용소에서 11년간 구금되어 있던 위구르족 40여 명을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온라인 사기, 테러 등 초국가적 범죄에 대해 상호 대응 및 협조하겠다는 성명이 발표된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이들은 지난 2014년 중국 신장 지역에서 탈출하여 터키로 향하던 중 태국에서 체포된 바 있었다. 이번 강제송환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위구르족들은 방콕 이민자 수용소에서 검은 테이프로 창문이 봉인된 트럭 6대를 탑승하여 돈므앙(Don Mueang) 공항으로 이동된 이후 중국 남방항공 전세기를 통해 신장 자치구 카슈가르(Kashgar) 공항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국제 사회의 비난이 잇다르자 태국 정부는 당초 위구르족 송환 계획을 부인한 바 있으나, 이후 국가 안보 및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인해 송환을 시행했다고 하였다. 태국 국방장관인 품탐 웨차야차이(Phumtham Wechayachai)는 중국 측으로부터 위구르족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약속 받았으며, 태국 당국자들이 이들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는 보장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 역시 2월 초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위구르족 송환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중국 측으로부터 이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설명하였다. UN에서는 지난 1월 21일 태국에 위구르족 송환 중단을 촉구했다. 따라서 이들이 중국으로 송환될 경우 고문 등의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태국 당국은 1월 22일 즉각적인 강제 송환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비밀리에 송환 준비를 진행시키며 중국 정부와 상호 연락을 취했다. 특히, 송환 직전인 2월 26일에는 국제 사회에서 추가적으로 경고했지만 결국 태국 정부는 송환을 강행했다. 엠네스티 같은 국제 인권단체 NGO들은 태국의 이번 조치가 적법한 송환 절차를 위반하였으며, 특히 차량 창문을 검은 테이프로 봉인한 것을 두고 이는 전례 없는 송환 처리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국제인권감시기구(HRW) 역시 태국이 자국법과 국제적 의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위구르족을 중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박해에 직면하게 했다고 비판하였다. 미국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국무장관은 이번 태국의 위구르족 강제송환을 두고 가장 강력하게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행위로 인해 위구르족들이 중국에서 박해를 받고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끔찍한 고문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루비오 장관은 최근 국무장관 인준 청문회에서 태국에 위구르족을 송환하는 자체를 금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어, 이번 태국의 조치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태국에서 중국으로 송환된 위구르족의 안보 보장 여부를 정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완전한 접근권을 요구했다. UN은 태국이 서명한 국제법인 고문 및 부당한 대우가 예상되는 지역으로의 송환 금지안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태국 정부에 접근권을 반복적으로 요청하였으나 태국 정부가 일부러 이를 거부했다고 설명하였으며, 태국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확실한 입장을 취했다고 비판하였다. EU,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주요 국가들도 태국의 결정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으로 확인된다. 위구르족 송환 직후인 2월 28일, 미국과 일본은 태국 내 보안 위협에 대한 경고를 발령하게 된다. 특히 미국 대사관은 과거 태국 내 유사한 강제 송환 조치로 인해 보복성 폭력 사태를 초래한 바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2015년 위구르족 109명을 중국으로 송환한 직후 방콕 중심부 에라완 사원(Erawan Shrine)에서 폭탄 테러 발생했었다. 당시 테러로 인해 20명이 사망하고 12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는 태국 영토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대사관은 자국민들에게 관광객이 밀집되는 혼잡한 장소에서 각별한 주의를 촉구하였으며, 일본 대사관 역시 자국민들에게 유사한 경고 메일을 발송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과 일본의 조치들은 태국의 송환 결정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며, 태국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된다. 특히 태국 경제가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태국에 실질적인 경제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로 보여 진다. 태국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침체된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2년간 적극적인 관광 활성화 정책을 추진해온 바 있다. 2024년 약 3,500만 명의 국제 방문객을 맞이한 태국은 2025년 3,600만~3,900만 명의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앞서 언급된 미국과 일본의 조치는 태국의 이러한 목표 달성을 크게 저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결정은 국제 사회 내에서 태국의 인권 부문에 대한 신뢰도 면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패통탄 총리는 취임한 이후 태국의 불안정한 정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접국의 범죄 조직 단속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위구르족 송환 결정은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 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향후 국제 사회와의 협력 관계 및 인권 부문에 대한 신뢰도 회복을 위해 태국 정부가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노력 또한 쉽지 않다. 결국 얼마 전, 방콕에서 우려대로 테러가 발생했고, 재발 방지를 위해 중국과 다시 협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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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중국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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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에서는 2025년 3월 31일,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 형을 선고하고, 그 중 절반인 2년의 집행을 유예한 이후 나머지 2년 형을 감옥에서 복역하는 것이 아니라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전자 발찌를 착용하는 등의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여 복역하도록 했다. 또한 5년 간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그녀의 2027년 프랑스 대선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되었다. 그러나 르펜은 항소하겠다고 하였으나 항소심에 뒤집혀 무죄 및 무혐의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한다. 물론 이 불가능한 현실이 이루어져 무죄 및 무혐의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2027년까지의 판결 번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판결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프랑스 형법에서 프랑스의 수형자 ·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 사항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형법> 제432-10조 1항 - 공무원 등 공공 사무 취급자가 조세, 분담금 및 기타 공과금의 납부 의무가 없음을 알고도 세금, 분담금 및 기타 공과금을 납부 받거나, 징수하거나 또는 그 납부를 요구 또는 명하거나, 납부 의무금액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하여 그 사정을 알면서 위와 같은 행위를 한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제432-12조 1항 - 공무원 등 공공사무취급자 또는 선거에 의하여 위임을 받은 자가 감독, 운영, 청산, 지급 등 업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수행함에 있어 그 대상 기업으로부터 또는 직무수행 과정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익을 취득하거나, 수수하거나 또는 이를 유지하는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제432-13조 1항 - 사기업에 대한 감시 · 감독 업무, 사기업과의 계약체결 업무, 사기업의 영업활동에 대한 의견표명 업무를 담당하였던 공무원등 공공사무취급자가 직무종료후 5년 이내에 관계 사기업에 대한 용역, 자문 및 자금의 제공행위를 하거나 이를 승낙한 때에는 2년의 구금형 및 30,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제433-2조 1항 - 그 주체가 누구이건 재물의 수수, 요구 또는 약속을 한 경우 그 목적이 서훈 수여, 고용 제공, 계약 체결 기타 모든 사항에 관하여 공공 행정기관으로부터의 호혜적인 결정을 위한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영향력 행사에 있는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제321-1조 1항 - 장물취급이라 함은 정을 알면서 중죄 또는 경죄로 인하여 생긴 장물을 은닉, 취득 또는 양도하거나 양도를 알선하는 행위를 말한다. 3항 - 장물취급은 5년의 구금형 및 3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유럽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고, 2024년 11월 14일 진행된 공판에서 검찰은 르펜에게 징역 5년과 공직선거 출마 제한 5년을 비롯 벌금 30만 유로를 구형했다. 그런데 이는 엄연히 위헌하다. 첫 번째, EU 자금 횡령에 대해서는 유로저스트(Eurojust)나 유럽 연합 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ropean Union, 약칭 CJEU)에서 재판을 받으면 된다. EU 같은 경우는 국내에 있는 법률이 헌법의 규정에 맞지 않는 상황일 경우에 해당 국가의 법원에서 헌법과 법률을 해석하여 적합성의 심사를 하게 되어 있는데 결정은 해당 국가가 아니라 CJEU에서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최종 판결은 프랑스가 아닌 브뤼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 판결의 장소는 브뤼셀이 아니었고, EU 자금 횡령에 관련된 법무관들도 EU의 5 대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의 국적을 가지는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EU 사법재판소의 소장인 그리스 출신의 바실리오스 스쿠리스(Vassilios Skouris)는 아예 배제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EU를 창설 때 맺은 로마 조약(Treaty of Rome)과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을 위배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애초부터 르펜에게 씌워진 혐의인 EU 자금 횡령과 유럽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에 절대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번째, 프랑스 사법부의 적법성 논란이다. 선출되지 않은 판사들이 선거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엄연한 삼권분립(Three branches of government)의 위반이다. 프랑스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사법부가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사법권 독립의 보장자로서 최고 사법 위원회의 의장을 겸하고, 최고 사법 위원회가 대법관 및 고등 법원장 임명을 제청하게 되어 있는 등 사법권에 관하여도 대통령은 상당한 권한을 보유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사법권이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르펜에게 이 같은 부적격한 판결이 내려진 것은 대통령 마크롱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사법부가 행정부 수반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는 것은 누구든 정치적 보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재 프랑스의 각종 사회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경제도 침체되어 있는데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 선동 및 러시아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모습 등으로 인해 그의 지지는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마크롱 입장에서 르펜의 부상은 정치 생명까지 갉아 먹힐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 프랑스의 형법을 보면, "프랑스의 수형자 ·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 사항"을 두고 따져봤을 때, 적법한 조항이 없다. 즉, 프랑스의 수형자 ·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4년 형은 존재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위에 나열한 항목들을 보면 죄다 1심에서 판결했던 5년 형으로만 골라 보았다. 여기에서 굳이 르펜에게 적용되는 혐의로 본다면 제432-12조 1항과 제321-1조 1-3항에 해당된다. 그런데 르펜은 지난 선거에도 마찬가지고 2027년 대선에서도 르펜에게 EU가 자금을 지원한 내용도, 그녀가 EU에서 자금을 횡령한 내용도 증거가 부족하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법에 의한 부분이지 EU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제321-1조 1항의 내용도 마찬가지로, 장물 취득과 관련된 계좌를 공개한 적도 없었고, 르펜의 차명 계좌가 있었다 할지라도 차명 계좌와 르펜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증명하지도 못했다. 유럽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도 마찬가지다. 보좌진 중에 누구를 허위 고용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기소유예(Deferred Prosecution)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의지도 없어 보였다. ※ 총평 베네딕트 드 페르튀스 판사는 르펜이 EU 기금 400만 유로 이상을 횡령하고 그 돈으로 극우 정당의 국내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려는 음모의 중심에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는 말이 안 되는 판결이다. 따라서 이는 마크롱과 사법부가 결탁한 정치 보복(Political Retaliation)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야권 인사의 손 발을 묶고 경고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EU의 뜻이자 글로벌리스트들의 뜻일 가능성도 높다. 르펜은 이를 EU 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지만 EU 측이 재소를 거부한다면 방법이 없다. 그러면 최후의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결국 혁명으로 모든 걸 바꾸게 하는 방법이 현재로써는 르펜이 다시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법전의 위계도 추락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의 반발을 예상하여 이를 눈치 보는지, 아직까지 명령적 규범(Normes Réglementaires) 형태가 작동하기 전이다. 프랑스의 명령적 규범은 행정청이 발하는 규범, 즉 행정명령을 말하는 것인데 지난 31일에 선고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대통령과 총리가 발의하는 데크레(Décret)가발동하지 않고 있다. 결국 루마니아의 조르제스쿠에 이어 프랑스의 르펜마저 정치 보복으로 실각하게 된다면 EU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것이다. 과연 프랑스는 이 위기를 잘 이겨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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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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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가 모든 국가에 10%+α 상호 관세를 발표함에 따라 저 세계 무역 경제가 요동 치고 있다. 한국에는 25% 부과했지만필자가 있는 베트남에 무려 46%나 부과했다. 한국보다 베트남이 트럼프에 더 호의적이고 우호적이었지만 상당수가 해리스와 바이든을 지지한 한국보다 무려 19%가 뛰어 오른 관세 부과 대상국으로 올랐다. 이를 보면 누가 누구와 친하다, 혹은 누가 미국의 동맹국이며 친미국가인가 등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제조업이 현격히 저하된 미국 입장에서 관세로 인해 제조업을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인 것이고, 자국의 엄청난 부채나 산업 근간을 살리기 위한 어쩌고 보면 동맹국의 살을 깎아 먹으며 일어서고자 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다치고 베트남은 왜 그렇게 관세를 높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이름으로 이른바 "라벨갈이"를 하고 관세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미국에 수출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중국에 대한 상호관세율은 34%다. 앞서 미국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후 마약 유입 문제로 중국에 총 20%의 추가 관세를 이미 부과한 바 있기에 이를 합산한다면 총 54%의 관세율을 부과하는 셈이다. 참고로 베트남 뿐 아니라 태국은 36%, 캄보디아는 베트남보다 더 높은 49%의 관세를 적용받았다. 이 내륙부 동남아시아 3개국의 공통점은 친중국가라는 것이다. 그 중에 태국은 대표적인 친미 국가였지만 태국의 패통탄 친나왓 수상과 그녀의 여당 정권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받아들이고 중국의 투자를 유도하여 미국의 눈 밖에 났다. 캄보디아는 거의 중국화 된 상황이기에 40% 이상 관세는 확정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모두 45% 이상의 관세를 적용받은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벨갈이" 우회 방식의 국가로 두 나라의 라벨이 붙어 수출되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동화부터 소파에 이르기까지 중국 기업체들이 중국 밖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베트남에 막대한 물량의 투자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계속 포스팅하면서 주장해왔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서 밀려나고 있는 이유 또한 중국의 막대한 물량의 투자 때문이다.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라벨갈이" 할 생산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행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트남도 이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트남 국영 방송인 VTV 에는 트럼프의 관세 부과에 대한 뉴스가 하루 종일 나오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에서도 긴급회의를 열고 베트남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미국의 대표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 등에 상호 관세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몇 %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40% 이상은 될듯 싶다. 한 번 당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보복을 하는 베트남의 특성상 같은 관세율은 필연적이다. 참고로 나이키는 신발 제품의 약 절반을 중국과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약 25%는 베트남에서 만든다. 나이키 이 외에도 다른 주요 스포츠 브랜드들도 베트남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년 전 조사에서 2023년 미국으로 수입된 신발 3분의 1이 베트남에서 제조되었고 브랜드별로 보면 나이키 신발류 50%, 룰루레몬 40%, 아디다스 신발류 39%, 애버크롬비 35%, 나이키 의류 28%, 갭 27%, 아디다스 의류 18% 등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 노스페이스와 팀버랜드, 반스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업체 VF 코퍼레이션 역시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 밖에도 가구, 장난감 제조업체들도 베트남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에 의존하는 이유는 인건비가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적으로 승부하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질적, 대형 메이저 메이커로 승부하려는 미국이 중국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무엇보다 미국 입장에서는 동남아시아가 중국에 그 영향력이 들어가는 것을 억제하고 싶어 한다. 인도-태평양 (QUAD) 전략이 위협을 받게 되면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여 아시아에 영향력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타격을 받게 된다. 중국에게서 이러한 위협을 감지한 미국이 대규모 무역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에 중국 기업들이 라벨갈이한다는 이유로 46%의 관세율을 부과한다면 베트남 문화적 특성상 중국 기업과 대항하는 위치에 있던 미국 기업들은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은 수출 다변화를 노리면서 러시아, 중국의 투자 유치를 위해 이들 기업들을 초청할 것이고, 러시아는 거리가 멀어서 쉽지 않다 할지라도 중국의 동남아시아 대한 영향력은 더욱 증대될 것이며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축소될 것이다.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경제 식민지화 역할이 끝나면 그 다음은 한국과 일본이 타겟이 될 것이다. 동북,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인 면을 고려한 트럼프의 지혜로운 선택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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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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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사라지는 진실
-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군인들이 국회 정문을 봉쇄하고, 국회의 유리창을 부수고 국회 건물에 침투하는 장면까지 온 국민이 지켜보았는데도, 대통령은 탄핵심판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대통령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을 모두 끌어내어 비상계엄 해제 의결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명령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실패한 계엄이었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주류 언론은 그 부분을 세심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현장에 있던 군인들을 심층 취재했다면 국민의 알 권리를 해소해 주었을 텐데. 이 나라의 언론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대통령의 말들만 여과 없이 전한다. 두 시간짜리 계엄이고,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한 계엄이었다고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듯이 대통령 역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방송통신위원장부터 비롯해서 정부의 핵심 부처에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 모든 인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니 국회는 탄핵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발하는 만큼 국회는 탄핵으로 대항한 꼴이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국회만 무력으로 제압하면 자신의 왕국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꿈이 좌절되었다. 물론 아직 탄핵 심판의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에 미지수이긴 하다. 만약 탄핵이 기각된다면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엄청난 계획을 세울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권력에 취해있는 사람은 권력의 끝이 어디인지 그 멈출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망하게 되는 것 같다. 권력의 힘은 가공할 공포를 가져다준다. 특히 그 권력이 소수 특권층에만 머무는 경우 더욱더 무섭다. 그러한 권력은 언론과 지식인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다. 1968년 3월 미군은 비무장 상태의 베트남 민간이 504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미라이 대학살이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미라이 사건을 미치광이 켈리 중위가 저지른 우발적 사건으로 보도했다. 24년 10월 한국일보에 최윤필 기자가 쓴 “미라이 학살 공식 보고서들이 감춘 진실들”이란 기사를 보면 캘리 중위는 군법정에서 “숨쉬는 것은 모두 없애라”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런 명령을 내린 메드나 중대장은 훗날 “군과 국가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완전히 솔직하진 못했다”고 시인했다고 한다. 캘리는 71년 3월 “최소 22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20년형)과 육군장관 감형(10년형)을 거쳐 74년 보석으로 풀려났다. 촘스키는 미국의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이기보다는 단지 대기업과 권력의 이익에 부응한다는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미라이 대학살을 언급했다. 그 사건이 미국에 알려진 것은 미국 재계가 반전으로 돌아선 이후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즉 그 사건이 발생한 지 일 년이 지난 후였다. 또한 미국 평화운동입장에서도 그 사건은 알았어도 거론조차 하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사건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라이는 각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휠리 왈라와라 불린 군사작전의 불유쾌한 각주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작전은 대규모 학살 작전이었고 B-52폭격기가 여러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습니다. 그 책임자는 켈리 중위가 아니라 워싱턴에 앉아서 공격 좌표를 결정한 사람입니다.” 촘스키는 그 당시 베트남에서는 미라이와 같은 유사한 학살 사건이 많았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다루었다고 해도 미라이 사건처럼 꼬리짜르기에 불과했다. 어제 MBC뉴스를 보니 기자가 군인들에 의해 포박당하여 끌고 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 당시 군인들에 의해 포박당한 그 기자의 마음에도 대통령의 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대통령은 검찰과 언론의 수장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고 나서 뻔한 거짓말임이 분명한데도 거짓말을 남발한다. 언론과 검찰이 그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검찰이 수사하지 않고, 언론이 그 문제를 부각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수 특권층은 그렇게 자신의 기득권을 챙기면서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조민 양이 받은 부산의전 장학금 600만 원에 대해 온 나라가 뒤짚어질 정도로 젊은이들도 분노했고 기자들은 조국의 집 근처에서 배달 음식조차 기사화했던 날들을 생각해보면 지금 심우정 검찰총장 딸의 외무부 특혜 채용 의혹이나 아들의 장학금 수수 의혹에 대해서는 취재를 거의 하지 않는 수준이다. 이중 잣대가 너무나 심한 우리 사회이다. 조국에게 그렇게 분노하던 젊은이들과 기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박원순의 죽음과 장재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왜 그렇게 달라야 할까? 최소한 자기반성을 할 줄 안다면 이중 잣대는 가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반성이 없는 사회이다. 자기반성이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의 현실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은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仁)일지도 모른다. 특권이 없는 사회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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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사라지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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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과 루마니아 민족주의 세력의 부상, 그리고 조르제스쿠
- 빅토르 폰타 총리 시기에는 국민자유당의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국민자유당(Partidul Național Liberal) 당은 루마니아의 대표 보수주의 정당이다. 그러나 이 정당은 루마니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보수주의와 루마니아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차우셰스쿠의 실각 이후, 루마니아가 EU의 원조를 받게 되고 가입 신청을 하게 되면서 친유럽주의로 기울게 된다. 반대로 사회민주당이 진보주의 정당으로써 루마니아의 좌파로 자리매김했고, 이들 또한 직접적인 친러는 아니지만 과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 때 정치인들을 대거 흡수하여 거대 정당이 되었다. 국민자유당은 원칙적으로 루마니아 민족주의를 주창했지만 그 색이 바래지면서 친EU주의로 변모했고, EU와 관련된 자들과 EU가 내세우는 정책들을 받아들였다. 시리아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요하니스 대통령은 EU이 제시한 난민 의무 분담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했다. 다만 루마니아의 집시들도 그만큼의 수용이 어려운 현실에 난민까지 떠 맡겠다하니 루마니아 국내에서의 불만은 순식간에 높아만 갔다. 루마니아는 난민 1,785명만 수용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EU는 루마니아에 추가로 난민 4,650명을 수옹할 것을 요구했고 루마니아 경제 재건에 필요한 분담금을 줄이겠다 협박하니 결국 루마니아는 EU가 원하는 난민의 350명을 더 받아들여 거의 5,000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셈이 되었다. 또한 EU의 LGBT의 아젠다를 받아들여 루마니아의 사법부는 동성 커플에게도 이성 커플과 똑같이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동성 커플에게도 이성 커플과 마찬가지의 사적인 권리와 가족의 권리를 갖는다며 동성 커플이 그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법률상 지위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동성 결혼을 인정한 셈이나 다름없다. 이는 루마니아 내, 기독교도들의 반발을 불렀지만 그다지 종교에 신실하지 않은 헝가리계 이민자들, 독일계, 프랑스계 주민들이 EU의 NGO 단체들을 등에 업고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EU의 아젠다들에 행정부가 적극 승인했는데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은 행정 명령에 즉각 사인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요하니스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친독일인사다. 요하니스는 1959년 루마니아 시비우의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신 자체의 배경이 그냥 독일계다. 그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하인츠 요하니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참전했던 인물로 패전 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트란실바니아에 남았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후,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대부분이 독일로 다시 이민을 떠났는데 요하니스는 가족들과 함께 1992년에 독일 뷔르츠부르크로 이민을 갔다. 요하니스의 현재 가족들은 모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아직도 살고 있다. 그는 이후 루마니아로 돌아와 2000년 시비우 시장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트란실바니아에 살고 있는 독일계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이후로도 독일과 왕래하면서 독일 정가들과 친분을 구축해왔고, 이는 EU에서 동유럽의 대표로써 입지를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말 그대로 EU가, 특히 독일이 길들이는 퍼핏이 된 것이다. 그가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서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주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2015년 대러제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제재하는 모습을 보여 푸틴 대통령의 분노를 자아냈다. 2014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의 독일계 인물로써 당선된 요하니스는 2019년 대선에서도 2차에서 전보다 높은 63.87%의 득표를 받으며 재선되었다. 아마 이 선거에 EU와 독일의 입김이 작용되었을 확률이 높은데 여기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2019년에는 루도비크 오르반(Ludovic Orban)을 총리로 임명했는데 그 또한 헝가리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를 부모를 둔 친 EU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형인 레오나르드 오르반(Leonardo Orban) 또한 EU 다국어 집행위원장이다. 게다가 자신의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행정부 관료들을 모두 독일계로 교체했다. 이는 다민족 국가로써 루마니아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매우 독선적인 인사를 단행했다며 엄청난 반발을 받았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지원을 지속 강화할 것이라 하였고,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꾸준히 받아들였다. 기존의 집시에, 시리아 난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해 루마니아 시민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요하니스와 국자당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에 극에 달했다. 그러나 요하니스는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 국민이 보여준 결단력과 회복력에 사의를 표하며 국제 사회는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보유하고 있다 발언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총리실이 소재한 빅토리아 궁전에 우크라이나 국기 색상의 조명을 비출 것이라 했다.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순간부터 우크라이나와 함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지속할 것이며 파리에서 개최된 우크라이나 지원 국제회의에 참석해 마크롱이 제시한 지원 계획에 찬성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곡물 운송을 촉진하고 곡물운반선을 호위하는 등, 동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열의를 보였다. 이어 5G 통신 인프라 사업 관련 화웨이의 장비 사용 요청을 불허하였으며, 이는 국가 이익에 관련하여 정보 통신 인프라 및 5G 네트워크 시행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국내법에 의거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이는 중국 측의 인프라 개선 사업도 받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4년 11월 24일 대통령 선거가 찾아왔다. 2024년 루마니아 대선에 출마한 후보는 총 14명(당원 10명, 무소속 4명)이었으나, 루도빅 오르반(Ludovic Orban) 후보가 엘레나 라스코니(Elena Lasconi) 후보를 위해 대선 후보직에서 자진사퇴하며 최종적으로 총 13명의 후보가 11월 24일 1차 선거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1차 투표 전 여론 조사에 따르면 PSD 소속 마르첼 치올라쿠(Marcel Ciolacu) 후보가 27~28%의 득표율로 앞서고 AUR 소속 제오르제 시미온(George Simion) 후보와 PNL 소속 니콜라에 치우커(Nicolae Ciucă) 후보가 각각 16~17%의 득표율로 그 뒤를 따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루마니아 정계 내에서 광풍을 일으키게 된다. 그가 바로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이다.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출생한 전형적인 루마니아인이다. 그는 1986년 부쿠레슈티의 니콜러에 발케스쿠(Nicolae Bălcescu) 농업 연구소를 졸업하고 1999년 같은 연구소에서 토양학 박사 학위를 받은 토양 환경학 전문가였다. 그는 1991년 루마니아 의회 환경청장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루마니아 환경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이력을 발판으로 조르제스쿠 후보는 기독교를 실물 경제에 적용하는 '음식, 물 에너지(Hrană, Apă, Energie)'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루마니아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모든 경제 활동에 대한 전략적 재검토를 목표로 하는 공약을 제시했다. 특히 ‘주권-분배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경제적 모델을 도입해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를 개혁하고, 물과 토지를 포함한 천연자원에 대한 전략적 투자 및 직업학교 개편을 통해 국가를 재전문화 할 것이라 했다. 조르제스쿠 공약의 전략적인 목표는 루마니아인들에게 미래의 진정한 자유를 주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번영, 조화, 존엄성 및 희망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 대신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적극적인 현 정부를 비판했다. 그의 발언 및 공약은 우크라이나 지원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수출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하고 농산물 수입 할당량 제한을 해제하여 피해를 본 루마니아 농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약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포퓰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방위력 강화, 루마니아의 외교 관계 다각화, 에너지 및 식량 생산 촉진, 수입 의존도 감소도 공약에 포함되었다. 러시아와 관계 개선 등, 이런 이야기는 직접적인 공약도 없는 얘기다. 그는 EU와 나토를 반대하고 러시아를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을 해온 바 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가까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은 없다. 이는 러시아인과 소련의 지배 시대를 극도로 혐오하는 루마니아 시민들의 국민정서를 고려한 것이겠지만 처음부터 그가 친러 인사는 아니다. 그는 루마니아의 전통적인 가치를 중요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시스트와 연합한 루마니아군 인사들을 칭찬했으며 루마니아 전통 복장을 입고 백마를 타고 초원을 누비는 모습을 틱톡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루마니아 민족주의자였고 러시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파시스트 군대와 연합한 루마니아군을 지지했기에 오히려 그의 성향은 반러에 가깝다. 그 파시스트 군대와 소련이 싸웠기 때문이고 결과는 패전을 불러왔다. 한편 그는 11월 24일 1차 투표에서 22.95%로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엘레나 라스코니와 함께 12월 8일에 예정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그리고 친EU, 글로벌리스트 아젠다에 동의하지 않은 조르제스쿠를 2024년 12월 6일 루마니아 헌법재판소가 대선을 취소하고, 조르제스쿠의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러시아가 루마니아 선거에 개입했다는 것이 대선 취소의 가장 큰 이유인데 루마니아 대통령 클라우스 요하니스는 루마니아 정보 기관 문서를 기밀 해제하고 공개했다. 여기에는 조르제스쿠가 대선 후보가 된 것을 자연스럽지 않았으며 국가를 파괴하는 행위자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조정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조르제스쿠의 대선 슬로건인 "균형과 정직"은 방법론적으로 2024년 러시아 대선 당시 틱토커들이 우크라이나를 표적으로 삼은 이전의 틱톡 캠페인 슬로건인 "형제 형제"와 동일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루마니아 행정부와 사법부는 조르제스쿠가 러시아의 지원 받았고 대선 또한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는 그 어떠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2025년 2월 26일 루마니아 검찰은 선거 자금 남용, 파시스트 집단 지원, "헌법 질서에 반하는 행동 선동"을 포함한 다양한 혐의에 대해 조르제스쿠에 대한 형사 수사를 시작했고 2025년 대선에 출마 등록을 하던 중 길거리에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 구속과 구금은 일론 머스크에 의해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려는 시도라며 비난을 받았다. 2025년 3월 7일, 조르제스쿠는 2025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3월 9일, 루마니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BEC)는 조르제스쿠의 출마를 거부했다. 실격 처리 당시 조르제스쿠는 1차 투표에서 약 40%의 득표율로 여론 조사에서 앞서고 있었다. 출마 거부의 이유에 대해 BEC는 결정에서 헌법재판소가 2024년 선거를 취소한 것을 언급했다. 조르제스쿠는 결정에 항소했지만, 2025년 3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했고 결국 조르제스쿠는 정치 생명이 끝날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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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베트남의 저력
- 베트남 역사에서 첫번째 이왕조가 중국 5대 10국 중 하나인 남한을 격퇴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했으며 11세기에는 송나라, 13세기에는 몽골, 15세기에는 명나라, 18세기에는 청나라를 격퇴했으며 20세기에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결국 프랑스를 격퇴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이기고 오늘에 이르게 되는 저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몽골은 1276년 남송을 무너뜨린데 이어 1283년에는 베트남 남부 일대에 있던 참파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군사를 파병하라고 압박했다. 베트남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분노한 당시 몽골제국 황제인 쿠빌라이 칸은 1285년, 아들인 토곤(脫驩)을 사령관으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베트남을 공격했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베트남군은 참패해 다시 수도인 탕롱성이 함락됐고, 대부분 신하들도 몽골에 항복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게 됐다. 이때 쩐 장군이 구국의 영웅으로 나섰다. 그는 임금에게 "항복하려거든 신의 목부터 베소서"라고 간하며 "모든 국민이 떨쳐 일어나 마음을 뭉쳐 싸운다면 이길 것"이라고 임금을 설득했다. 이후 격장사(檄將士)'라는 글을 지어 베트남 청년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 글에서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토곤의 살점을 장안 거리에서 썩게 해야한다"고 강하게 외쳤고, 이 글을 보고 피난가던 베트남인들이 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순식간에 25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는 여전히 숫적으로 압도적인 몽골군과의 전면전은 피하고 지속적으로 몽골군을 괴롭히는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그를 따르는 베트남 군도 팔꿈치에 몽골 오랑캐를 죽이겠다는 의미의 '살달(殺撻)'이란 글을 문신으로 새기며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쳐나갔다. 결국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고생한데로, 정글과 밀림 속 게릴라전에 익숙치 않은 몽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몽골군 50만명은 폭염과 식량부족에 지쳐 대패해 물러갔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또 한번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다. 이번엔 3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몽골군은 또다시 쩐 장군의 게릴라전에 병참선이 무너지고 열대 전염병이 부대 전역으로 퍼져 도저히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1288년 몽골군은 퇴각을 위해 집결, 수로를 통해 바익당 강을 건너 퇴각하려고 했다. 이때 쩐 장군은 퇴각하는 몽골군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당시 바익당강은 밀물과 썰물 때 수심차이가 심한 강이었는데, 이를 이용해 몽골군을 대거 격퇴한다. 먼저 바익당강 일대에 쇠말뚝을 잔뜩 박아둔 뒤, 몽골군을 유인해 썰물 때까지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물러서다가 썰물 때 몽골군 함선이 쇠말뚝에 걸리면 그때 총공격을 하는 작전이었다. 몽골군은 제대로 이 전략에 휘말려 참패를 했으며 이 전투에서만 10만명 이상의 군대를 잃었다. 이로 인해 쿠빌라이 칸의 동남아시아 원정 작전은 대실패로 돌아갔으며, 몽골군은 다시는 베트남을 침공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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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발트해를 가로 지르는 해저 고속철도 터널 건설 프로젝트를 재개
- 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발트해를 가로 지르는 해저 고속철도 터널 건설 프로젝트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완공될 경우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로 기록 된다. 핀란드 정부는 에스토니아 정부와 양국 수도 헬싱키와 탈린을 잇는 해저 터널 프로젝트인 ‘핀이스트(Fin Est)’ 사업 추진은 이미 2018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양국의 터널 건설은 두 도시 간 노동시장 교류를 더욱 확대하겠다는 취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헬싱키 시에서는 성명에서 헬싱키와 탈린을 합쳐 150만 명 규모의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면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두 도시를 더 쉽고 빠르게 이어 줄 수 있는 교통수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두 도시는 페리를 이용해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페리 이용 인구는 연간 800만 명에 달한다. 페리 여행을 즐기는 핀란드 국민 뿐 아니라 헬싱키로 출퇴근하는 에스토니아 국민도 1주일에 수만 명이다. 고속 철도가 완공되면 쾌속 페리로 1시간 40분인 이동 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들게 된다. 영국 BBC방송에 의하면 이 사업에는 130억 유로(약 17조원)가 투입될 예정이다. 터널 길이는 80㎞에 달해 영국과 프랑스 를 잇는 채널 터널(50㎞)과 현 세계 최장 해저 터널인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를 잇는 세이칸 터널(53㎞)보다 길다. 공사는 2018년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여러 해당 국가들의 사정과 코로나로 인해 중단되었고 이제 곧 재개 된다고 한다. 2019년 당시 이 해저 터널 사업이 중단된 이유에 대해 당시 탈린 시장이었던 미하일 콜바르트(Mihhail Kõlvart)가 시 정부 예산이 부족해 주요 인프라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고 에스토니아 정부도 예산 부족으로 인해 공사가 더디고 있다며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중심부와 비루 케스쿠스(Viru Keskus) 쇼핑센터를 연결하는 터널 공사는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탈린 시 정부는 EU 기금을 지원받게 되었을 때, 신규 시립 병원 등의 일부 사업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여 결국 기금 지원을 받긴 했지만 해저터널 건설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터널 공사는 트램 라인을 항구와 연결하는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는 이처럼 고비용 사업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탈린 시정부는 코로나의 대유행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개발은행(EIB, European Investment Bank)으로부터 7,880만 유로(한화 약 1,071억 원)치 차관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제서야 조달되었다는 얘기이다. 2022년 12월 에스토니아 시 정부는 2023년도 예산을 8억 2,400만 유로(한화 약 1조 1,210억 원)로 책정한 바 있고 이를 핀란드 정부와 합의를 봄에 따라 이제 다시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발트 3국과 핀란드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측면에서 공사재개를 서두른듯 싶고 터키와 헝가리가 핀란드의 나토 가입 승인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옴에 따라 발트해 지역을 둘러싼 긴장이 현실화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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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와 에스토니아가 발트해를 가로 지르는 해저 고속철도 터널 건설 프로젝트를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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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1주년 : 우크라이나의 대선 방해 공격이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85%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된 이유
- 우크라이나는 12일과 13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지역), 보로네시, 로스토프, 니즈니노브고로드, 벨고로드 등 러시아 전역을 향해 드론 공격을 감행했었다. 러시아 전역의 유류 저장소와 대형 정유소 등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민간인 시설에 드론이 떨어져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를 쓰며 아무나 붙여대는 자유 러시아 군단(FRL)과 러시아 자원병 군단(RVC), 시베리아 대대 등이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실제 러시아를 공격한 드론은 대부분 항공기형 드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소위 '자살 폭탄용 드론'보다는 크기가 작고 폭탄 적재량도 적은 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공 방어망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빠르게 생산이 가능하다. 인화물질이 모여 있는 유류 저장고나 정유소를 목표로 삼으면 폭발력이 배가 되기에 의외로 공격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군사 기지에 배치된 항공 전력에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정도는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잡한 드론 공격이 러시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는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가 지난 2년 동안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습에 시달렸지만, 완전히 죽을 정도로 폭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전에 내가 포스팅한 것처럼 10개 중 2개는 남겨 놓고 일반 민간인들의 숨통을 열어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닌 러시아는 몇 군데 에너지 관련 시설들이 파괴된다고 해도, 전세에는 큰 지장은 없다. 반면, 드론 생산 부문에서 앞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 수법을 차용해 항공기형 소형 드론을 대량으로 만들어 한꺼번에 날려보내면, 우크라이나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리고 공중전과 달리 지상에서는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드와 쿠르스크 지역으로 침투하는 우크라이나 특유의 게릴라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는 지난해 5~6월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당시, 국경 지역 습격은 거의 단발성으로 끝나고 이같은 전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포탄이 부족한데다 무기가 거의 바닥났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매체의 평가는 매우 냉정했다. 스트라나.ua는 이번 침투 작전의 효과는 지난해보다도 더 미미한 것 같다고 혹평했다. 우크라이나의 무장 세력이 쿠르스크 지역의 국경 마을 테트키노(Tеткино)를 장악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특히 러시아측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던 이들의 탱크들은 곧바로 파괴되었으며 러시아 영토를 점령했다는 증거로 올린 영상도 우크라이나에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마디로 조작질 한 것이다. 러시아 대선인 15~17일을 겨냥하여 연일 우크라이나 군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계속되었다. 일부 무장 병력의 국경 마을 침투까지 이루어지자, 러시아군도 즉각 보복 공격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측의 선거 방해 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푸틴 대통령이 14일에 했던 경고에 따른 것으로 보여 진다. 러시아는 15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 미사일 공격을 가해 최소 20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대선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 민간 마을을 포격하고 있다면서 이와 같은 범죄를 반드시 처벌할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15일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중국에서 반정부 여론을 조성하려는 CIA의 비밀 작전을 승인했다는 외신 보도를 언급하면서 미국은 현재 러시아를 상대로 비슷한 공작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년간 이 같은 적들의 활동을 경험해 왔다는 것이라 주장했고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러시아에서 그와 같은 이적 행위들을 진행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공격은 오히려 러시아인들의 분노를 유발해 푸틴 대통령에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푸틴의 선거를 방해하고 러시아인들 사이에 혼란을 야기시키려 했다면 이번 전략은 대실패다. 결국 개표 80%의 상태에서 87,16%의 득표율로 푸틴 대통령은 당선을 확정했고 완전히 개표가 끝나더라도 85% 이상의 득표는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푸틴 대통령의 절대적인 명령이 세워질 수 있도록 우크라이나 군과 반러 세력, 나발니 측근들, 반정부 인사들, 집단 서방과 미국이 한꺼번에 도와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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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1주년 : 우크라이나의 대선 방해 공격이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85%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