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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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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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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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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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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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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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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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인도 힌두민족주의의 신정체제와 다양성 및 포용을 중요시 하는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1992년 12월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갑자기 공격을 감행해 그 역사가 500년 된, 무굴제국 시기에 건설돤 모스크를 때려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종교적 침해 사건은 또 다른 종교 분쟁을 불러와 전국에서 무슬림들 2,000여 명이 학살 수준으로 무참히 당한 참사로 이어졌다. 이 당시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인도 인민당(BJP) 주요 인사들은 이와 같은 과도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에 유감의 뜻을 밝혔었다. 그와 같은 참혹한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난 올 초 1월 22일에 파괴된 모스크 터에 거대한 힌두교 사원 개원식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에 직접 참석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는 당시에 희생된 무슬림들에 대해 어떠한 유감의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힌두 민족주의만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인도 민족의 자부심이 회복되었으며 기다리던 영광스러운 “새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4,000억원을 들여 지은 이 힌두교 사원은 라마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290,000㎡의 넓은 터에 49m 높이의 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파괴된 모스크는 무굴제국 시대 때 지어진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역인데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 모디 총리는 '세속 국가'인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타 문화, 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인 의미를 갖고 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슬람 제국인 무굴제국의 침략자들이 16세기 이곳에 있던 라마 신 사원을 무너뜨리고 폐허 위에 모스크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개원은 무슬림 정권에게 침탈당한 힌두 문화와 전통, 자부심의 복원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측 전문가들은 이러한 힌두 사원 완공 행사가 오랜 인도 정치의 핵심 가치였던 종교와 정치의 분리, 다양성과 포용을 거부하고 오로지 힌두 민족주의로 일관하여 과도한 우익성향으로 인한 인도 전 지역을 통합해 "하나된 인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인도 인민당은 무굴제국 시절 이슬람에 의해 훼손된 힌두 사원의 복원 운동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모디 총리도 당시 인도 인민당의 실무자로 힌두 사원 복원 운동 캠페인에 참여했다. 1992년 아요디아 참사는 그 와중에 발생한 종교 분쟁의 비극이었다. 인도 인민당은 보수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며 실제로 힌두교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 보니 반외국인, 반이슬람 성향이 강하다. 특히 1996년부터 2004년까지의 집권기에 이같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인도식 파시즘 정당"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특히 1998년 5월에는 파키스탄에 대비한다면서 핵실험을 강행했고 파키스탄 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인도 인민당은 당의 이념을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의 힌두 중심 보수주의가 기반이 되었고 실제로 인민당의 초대 당수로 파텔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이다. 사르다르 파텔은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더불어 인도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힌두교 중심주의 성향이었던 파텔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찬성했고 파키스탄이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을 적대시했다. 실제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긴 했지만 셋의 성향은 각자 달랐다. 간디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간의 통합을 중시한 반면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는 통합을 중시하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파텔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파텔은 힌두 극단주의, 힌두 민족주의의 시조로 평가되기도 하며 모디 총리가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이 힌두 극단주의 정당은 파텔의 제자이자 그의 정신을 계승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중심이 되어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Rashtriya Swayamsevak Sangh)이라는 과격단체가 결성되었고 리더인 고드세는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해버렸다. 물론 간디의 암살 배후 파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어 그저 의혹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간디의 암살 이후, 힌두 민족주의는 전 인도인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은 한동안 인도 정치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다만 20세기 인도 정국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정당인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인도인들의 신뢰가 떨어졌고 결국 그 대안으로 들어온 것이 현 인도 인민당이라 볼 수 있겠다. 인도 인민당은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의 임원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고 이들은 15억이 넘는 인구와 30여 개의 공용어 등, 구심점이 명확하지 않은 인도에서 언어와 문화가 각기 다른 다수 인도인을 하나로 쉽게 통제할 만한 사상은 오직 힌두교 뿐이기에 이 같은 힌두 극단주의 및 힌두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이 주효해 21세기 들어 하층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이 보수 성향으로 발현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은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도 인민당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을 지지하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과 인도 소수 종교 중 최대라 할 수 있는 무슬림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들과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 갈등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아요디아의 학살이나, 구자라트 지역에서 힌두교도들의 폭동으로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보니 극우적인 형태의 힌두 민족주의에 인도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구자라트 학살에는 당시 구자라트 주지사였던 현 모디 총리가 학살에 방관하거나 그의 측근들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어도 솜방망이 처벌 정도 수준으로 끝냈기 때문에 구자라트 지역 무슬림들은 모디 총리를 학살의 공동정범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 모디 총리는 아요디아에 다시 찾아와 올 총선을 앞두고 힌두 사원 개원식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는 고개숙이지 말아야 한다. 더는 앉아 보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며 “라마 신의 정신은 우리 인도 헌법의 첫 장에 나온다. 우리가 라마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서로 다투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모디 총리의 아요디아 힌두 사원 개원 행사 참여는 이번 4월 19일부터 예정된 총선을 겨냥한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당시 행사는 인도 발리우드 스타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 생중계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수도인 뉴델리 등 전국 곳곳에서는 라마 신과 모디 총리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 휘날리기도 했다. 또한 많은 주에서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주식 시장도 문을 닫았다. 이에 대해 인도 내 극우주의자들은 인도에서 그 동안 소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만끽했지만 다수 힌두는 세속주의 원칙에 억눌려 왔다면서 아요디아 힌두 사원은 전 인도 내 힌두화를 위한 시작점이라 언급했다. 이에 무슬림과 시크교가 다수인 야당과 인도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에서는 국가가 종교 행사를 장려하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배제를 더욱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으며 이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현재 모디 총리가 힌두교의 최고 대제사장인 시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힌두교가 국가 공인 종교가 되는 사실상 신정 국가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인도가 힌두교 하나만을 용인하는 신정체제로 가느냐,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앞세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세속 체제를 유지하느냐, 이는 힌두민족주의와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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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대항해 시대 당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발견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도로 진출하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두 국가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그 경쟁이 심화되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라는 도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양에서 새로 발견되었거나 발견된 땅을 어느 군주에게 귀속시킬지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교황에게 승인 받은 상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라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고 통일하여, 이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콜롬부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콜롬부스가 발견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위도 상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포르투갈 양측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의 중재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사이의 가운데 지역인 대서양 한 가운데 경선을 기준선으로,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귀속은 서쪽이 스페인으로, 동쪽의 땅은 모두 포르투갈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제2차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전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북아메리카 카리브와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페인의 영토가 되고 브라질 혼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다. 지금 브라질의 해안가 지역은 기준선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준선 동쪽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까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해서 서유럽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긴 했지만 동쪽에는 무슨 국가들이 있는지에 거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 지구를 양분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교황이 그냥 둘이 정쟁을 벌이자 말리고자 했던 하나의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조약을 맺는 과정 중에 당초 교황이 제시한 카보베르데 기준 서쪽 100리그 경선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주장으로 370리그 경선으로 더 밀어낸 것과 관련해 콜롬부스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밀어 붙였다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공식 기록상으로 브라질은 1500년에 발견되었으나,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대서양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갔다는 점과 발견 당시 항해 기록이나 이를 보고 받은 포르투갈 왕실이나 새로운 땅을 발견해 놓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다. 그나마 이러한 진실을 밝혀줄 수 있었을 기밀 항해 기록은 리스본 테주 강변에 위치하던 왕궁의 문서 보관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1755년 11월 1일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연이은 지진 해일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태다. 당초 조약대로라면 스페인 측이 보장받은 부분이 훨씬 컸는데도 포르투갈은 후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을 차지하였는데 아마존 강 하구가 조약 기준선 기준으로 포르투갈 관할이었던 덕택이다. 당시 유럽인 탐험가들은 배를 타고 다녔고 내륙은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하필 안데스 산맥에 막혀 거의 아마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바다같이 넓은 아마존 강의 하구를 확보한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나중에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아마존 상류와 지류를 거슬러 올라 항해하여 아마조니아 곳곳에 깃발을 꽂고 포르투갈어를 이식하여 개척하면서 결국 지금의 거대한 브라질 영토가 완성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완성된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 된다. 이에 기아나 지역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남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반을 차지한 셈이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신대륙 전체로 본다면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및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스페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분이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등 서부 지역,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및 앨라배마 연안 지역 등은 모두 원래 스페인의 영토였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도 원래는 스페인이 발견해 차지했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후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1526), 미겔 로페스 레가스피(Miguel Lopez Legazpi, 1502~1572) 등이 동남아시아에도 필리핀 도독령을 설치했다. 이에 태평양 측도 문제가 되어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도 동경 142도까지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 선에서는 서쪽이 포르투갈, 동쪽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 차지가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되어 조약의 양 당사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속령의 확보에 나서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들 나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기들끼리 맺은 조약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종교 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조약의 권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약대로라면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이 세계의 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몇 항 몇 조에 있는지 보여주라며 비아냥거렸고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이 조약을 근거로 19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현재는 먼로 독트린을 통하여 촉발된 아메리카 패권 성향이나,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장 중남미 지역의 쿠바만 하더라도 스페인이 19세기까지 주권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3위가 스페인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언어가 식민 통치 시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카톨릭과 함께 중남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 축구로 유명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최우선 진출 대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부 프로축구 리그인 라 리가, 프리메라 리가일 정도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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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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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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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이재명 대통령, G7 정상 무대 데뷔와 트럼프 통화의 정치적 의미
    한국 보수의 딜레마: 변화 없는 현실 안주의 끝은 어디인가 한국 정치의 축 중 하나였던 보수 진영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일시적인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쇠락의 징후다. 변화 없는 현실 안주, 자성 없는 책임 회피, 철학 없는 언어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보수는 더 이상 ‘대안 세력’이 아닌 ‘방해 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외교 일정 그 이상이다. 이는 한국의 국격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현 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일정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수 진영은 이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 시절 언론과의 갈등으로 축소되었던 대통령 전용기 언론 탑승 인원이 문재인 정부 수준으로 복원된다는 발표는, 정권의 대외 소통 의지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 간 첫 통화는 흥미로운 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정상은 관세, 무역 등 현안을 논의했을 뿐 아니라, 골프 라운딩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서로가 암살 위기를 겪은 경험을 공유하며 리더십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정치의 본질이 결국 ‘사람과 신뢰’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여전히 “부정선거론”이라는 허구에 기대어 이재명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하고, 트럼프의 일방적 지지를 상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외교 현실을 무시하고, 국가의 실익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된 태도에 불과하다. 트럼프조차 이재명 대통령을 “명성이 높은 인물”로 칭하며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데, 보수 진영은 이를 외면한 채 음모론과 혐오 정치에 빠져 있다. 보수 진영의 담론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구호 아래 구체적 정책도, 철학도 없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수사만 있고 내용은 없으며,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 변화하자는 말에 “좌클릭이다”라는 반응부터 보이며, 쇄신 요구를 “배신”으로 몰아붙인다. 진정한 보수는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갖춰야 한다. 21세기 보수의 생존 조건은 ‘고립된 고집’이 아니라, ‘개방된 사고’에 있다.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다. G7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와의 신뢰 형성, 언론과의 소통 회복은 모두 시대 변화의 징표다. 이를 외면하고 음모론과 자기위안에 빠져 있는 보수는 더 이상 ‘보수’가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 연합에 불과하다. 국민은 더 이상 이들을 대안 세력으로 보지 않는다. 야당으로서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이유다. 이제 보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화를 거부하며 고립을 자초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철학을 구축할 것인가. 쇄신 없는 보수는 언젠가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퇴출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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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7
  • 현대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미스테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와 황금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황금 광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 영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한 달도 안 되어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연합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하다가,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이라크는 주권을 되찾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라크는 1958년 요르단과 연합하여 아라비아 연방을 설립했다. 그러나 1958년 여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가 레바논 위기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파병되는 이라크 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아브드 알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이 7월 14일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파이살 2세 국왕과 왕실 근위대를 항복시켰다. 결국 아라비아 연방은 해체되고, 이라크에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총살당했다. 그러나 카심도 불과 5년 뒤, 바트당 쿠데타로 역시 총살당했다. 하지만 왕정이 군부 쿠데타로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이라크가 쿠데타와 전쟁, 내분으로 혼란을 빚게 되자 영국에 망명 중인 이라크의 하심 가문의 수장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Sharif Ali Bin Al Hussein)을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켜 입헌 군주제로 개헌하여 왕정을 복귀시키자는 이야기가 이라크 국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샤리프 후세인은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의 3남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의 협력을 받아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아라비아 반란을 이끌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몰아냈고, 오스만투르크가 다스리던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정을 받게 되었다. 1920년 파이살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시리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를 원한 프랑스가 군사력을 동원해 왕국을 진압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대신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1932년에는 주권 국가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이라크가 수니파, 시아파 두 교파로 양분되어 대립했으나 그는 별 문제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1933년 승하하여, 유일한 아들인 가지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가지 1세는 191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헤자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후세인 1세로 아라비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의 제안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으나 영국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가지 1세는 젊어서부터 반영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영국 헤로 스쿨(Hero School)에서 1년 동안 유학했으며 이어 샌드 허스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유학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 더욱 심한 반영주의자였으며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이라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나 승마와 기계 조작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932년 부왕인 파이살 1세가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영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아시리아 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이살 1세가 자주적인 이라크를 건설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왕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었다. 가지 1세는 이라크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확장되는 반영 운동에 동조하여 영국의 목표는 이라크를 파멸시키거나 노예화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를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판단해 아시리아 인 폭도들에게 공습을 감행했다. 가지 1세는 아시리아 인들의 폭동을 진압해 영국의 음모를 분쇄한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933년 파이살 1세가 서거하자 가지 1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반 문맹으로써 학식이 높지 않고 군대가 민간 정치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가지 1세는 군주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민적인 인기는 대단하였다. 가지 1세는 정치보다는 아시리아 폭동 진압의 영광을 누리는 데 집중하여 국민들을 자주 만나며 인기를 과시했고 군복을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 반영파 장교들을 규합하였다. 이 때부터 이라크 정계는 군부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가지 1세와 영국의 지지를 받는 상류 계층 정치인 및 지방 부족들의 대결장이 되었다.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친영파의 사주로 가지 1세에 반대하는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가지 1세는 이를 모두 진압하게 된다. 1936년 가지 1세는 아시리아 폭동을 진압할 때 활약한 바크르 시드키(Bakr Sidqi) 장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지원하여 친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7년 가지 1세는 자신의 특기인 기계 조작 능력을 활용하여 알 주아워(Al Juawor) 궁전에 라디오 카스르 알 주아워(Qasr Al Juawor)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는 군 장교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아라비아의 이념과 반영주의를 중동 전역에 선전하였다. 가지 1세의 방송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 방송이 연결되는 모든 아라비아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가지 1세는 아라비아 지역 최고의 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가지 1세는 쿠웨이트와의 합병을 추진했으며 쿠웨이트 입법위원회 위원 14명 중 10명으로부터 이라크와의 합병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받아 내었다. 이는 가지 1세의 인기와 쿠웨이트의 반영주의가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가지 1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추진하자 영국은 가지 1세를 크게 경계하여 이라크 주재 영국 대사 모리스 패터슨(Morris Peterson)을 통해 알 주아워 방송국 폐쇄를 요청했지만 가지 1세는 패터슨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영국 정부는 공공연히 가지 1세의 제거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Nuri Pasha Al-Said)의 아들 사바 사이드(Saba Al-Said)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 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Abdul Ilah)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2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불과 2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신주를 들이 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의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Saeb Saqath)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Nhaji Saqath)는 친영파들의 압력으로 인해 사건을 종결해야 했으며 다시 권력을 장악한 친영파들은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다. 그리고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히려는 사법부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세 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سوف تدفع ثمن الدم الذي سفكه ملك الباذنجان!)”라고 울부 짖으며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이에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친영파에 대한 쿠데타를 벌이고 추축국에 가입해 영국과 잠시 전투를 벌이는 등 반영 소요 사태가 계속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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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07
  • 사하라 사막과 서아프리카에 전래된 문화, 노크 문화(Nok culture)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문화의 요람이며 아프리카의 역사가 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문화의 바탕이 된 몇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한다면 사하라 사막의 여러 주민들이 지켜온 전통 문화는 사하라가 사막화되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기후와 자연 조건에 순응하면서 창출했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모지인 사하라의 암벽에는 수 만 점의 부조와 동굴에 새겨진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B.C 7,000년경부터 A.D 1,000년에 걸친 벽화들이다. 수렵 장면, 소떼를 쫓는 유목민, 말이 이끄는 두 바퀴 전차(戰車), 전투나 축제 등 일상생활의 풍속도들이 있고 코끼리, 하마, 기린 등의 그림과 종교의식을 위한 거신(巨神) 상도 존재하고 있다. 이들 벽화의 규모는 매우 크며 예술적 감각도 탁월한 부분을 감안하면 오늘날 검은 아프리카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하는 격렬한 표현 의지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B.C 8000년경부터 사하라 사막은 습윤(濕潤) 기후로 점차 숲과 늪이 생겼으며 여기에 코끼리, 하마, 기린 등 야생동물들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무렵 지중해 연안과 남부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채집하던 수렵민이 들어와 거주하게 된 것이다. 사하라에 남겨진 벽화 등 유적으로 보아 지중해 형 민족과 흑인 계통의 민족이 절반씩 나타났고, 이들 두 계열의 혼성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B.C 6000년경 사하라 주민들의 생업은 목축을 중심으로 수렵과 채집을 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농경의 벽화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하라 사막이 건조하기 시작한 것은 B.C 3000년경부터였다. 이는 제4기 이래 사하라 사막 지대가 말라버린 것은 신석기 시대의 대변혁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B.C 500년경 사하라 사막은 지금과 같은 사막이 되었다. 이러한 사막의 건조화, 사막화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사하라가 사막이 되자 불모지를 탈출한 사하라의 부족들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소떼를 몰고 사방으로 흩어져 이동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진 넓은 세상에서 적응하는 것에는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관련 아프리카 학계는 최근 사하라 남쪽의 가장자리에서 농경의 기원을 말해주는 석기시대의 촌락 유적들을 몇 군데 발견하였다. 이들 촌락의 주민들은 아마도 야생잡곡을 채집한 경험을 가졌던 사하라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사하라 사막이 건조해지자 강이나 호수 주변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집약적인 농경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서아프리카의 재배 기술을 아프리카 도처의 사바나 지역으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리타니 남쪽에 있는 다르 티체트(Dar Tichet)에서는 B.C 1500년~500년경에 걸친 여러 단계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유목 가축으로 소와 염소는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며 재배 작물로서는 기장이 있었는데 이 잡곡은 B.C 1200년경부터 식용으로 사용해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무장한 베르베르 족이 지나간 흔적도 남아있었다. 이로써 청동기 시대의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 이남을 연결한 교역로도 사하라 사막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또한 일찍 사하라 사막과 서부 아프리카로 들어온 북아프리카 인들은 서부 수단에서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한편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니제르 강과 베누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수 백 점의 테라코타 토기가 철기, 마제석기와 함께 발굴되었다. 처음 발굴 지점인 노크(Nok) 마을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를 노크 문화로 명명하였다. 이들 테라코타는 연대적으로 B.C 1000년부터 A.D 200년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며 후기 석기 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친 여러 부족사회의 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노크문화는 또한 사하라가 사막화됨에 따라 남하해온 흑인 부족들이 사바나와 산림지대에서 농경으로 정착하면서 공예기술을 양성하여 분업 사회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노크문화가 검은 아프리카 문화의 원형이었지만 여러 부족이 수천 년에 걸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그 원형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하여 발전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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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7
  • 러시아 최초의 의회인 노브고로드 민회(民會)와 선거제도
    키예프 루스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의 공으로 제위 시키려 했다. 이는 키예프의 다음 공후를 자신의 아들로 세습하려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공후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로 생각하신다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인용문 일화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이 당시 키예프 공국 체제에서 제2의 도시로 각광을 받던 노브고로드는 키예프 공국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유라시아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후의 권한이 점점 강력해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세력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던 남서부 체르니코프, 페레야슬라브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세력이 강화되어 반(半) 공화제 정치 체제의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생활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흡사했다. 전통사학에서 언급하기로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하여 고도로 제도화된 베쩨(Вече)라는 일종의 민회와 노브고로드의 시장 역할과 더불어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천인대장이면서 도시 민병대의 수장인 띠샤쯔끼(Тысяцкий), 다른 귀족 가문의 일원들,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으로 구성된 정부였다. 이러한 독특한 정부체제는 전제왕권을 지닌 국가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한 상인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띠샤쯔끼(Тысяцкий)는 초창기에는 군을 담당했지만 법률 및 상업적인 관리를 포사드니크에게 이양 받음에 따라 그들은 군과 경찰, 사법적인 부분은 관장하는 직책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정확한 헌정체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존재가 확실한 노브고로드의 최소한 명목상으로 존재한 지도자는 노브고로드 대공 공작이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주위 국가들에서 명망 높은 공작을 모셔왔으며, 국력이 약해진 13세기와 14세기 초에도 여전히 외부에서 공작을 영입해왔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정부 행정의 수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리들의 정확한 권한을 밝혀내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이는 이반 3세가 침공하여 노브고로드를 점령했을 당시 다수의 문서들이 소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정 수반은 여전히 대주교로 국정에 관한 회의들을 주재했으며 대주교 궁으로 알려진 다면궁에서 열린 “귀족평의회(Совет Госпо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최근 사학자인 J. 글렌버그(J. Granberg)는 실제로 그러한 기구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했다. 글렌버그는 이러한 대주교 중심의 정부 개념의 이해를 파악할 때 역사학자들이 희박한 사료에 많은 몰입을 시도한 결과 추정되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론들로 인하여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공국의 실제 권력자 혹은 행정수반이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특성상 어느 경우든지 대주교가 도시의 주요한 관리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주교는 노브고로드의 교회들을 감독할 뿐 아니라, 대사관을 대표하고, 세속적인 법정 판결을 감독했으며,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세속적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보야르들과 함께 노브고로드의 여러 회의들을 거쳐 그 의견들을 수렴한 것으로 생각되며, 대주교가 단독행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러한 대주교는 외부에서 임명되지 않고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후 키예프 정교회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에게 재가를 받는 식으로 임용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는 아마도 노브고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단일 지주였을 것이며, 법정 수수료와 시장의 저울 사용 비용,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들을 활용하여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노브고로드 대주교 재산 축적의 원천은 노브고로드의 지리적 위치와 상인들과 결탁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노브고로드는 발트 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바리야기(Барияг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의 북쪽 중심지였고 볼가 강 수로를 통해 동방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노브고로드가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유화는 정치적인 위상도 격상시켜 키예프 대공은 대대로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 대공에 임명하여 도시를 장악하려 했다.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두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와 야로슬라프 1세도 한 때 노브고로드 공이었고, 야로슬라프 1세의 법전『루스까야 쁘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노브고로드에서 주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결국 노브로고드에서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의 정치적 실권은 점차 토착 귀족층인 보야르와 상류층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그와 함께 민회(民會)가 도시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1136년에는 민회가 공을 추방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1156년에는 자신의 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도 받아낸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정부 체계에 따른 민회(民會)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노브고로드에서 중요한 정무관으로는 베쩨(Вече ; 민회)를 주재하는 노브고로드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 시장)가 있다. 베쩨에서는 공작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세금 징수와 도시의 여러 안건과 시외의 문제들을 논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민회의 존재로 인해 공작의 주요한 결정 사항들은 대부분 시장인 포사드니크의 재가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체계는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14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을 한 명만 두지 않고, 민회에서 한번에 6명을 선출했다. 6명의 시장은 종신직이었으며, 매해 그들 중에서 수석시장인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를 선출했다. 이러한 민회인 베쩨의 정확한 실체 역시 불확실하나, 자유농민을 포함한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민회가 민주적 기구였는지 보야르 귀족들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러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는 물론 노브고로드 대주교나 주교 역시 민회에 의해 선출되거나 적어도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시(市)는 민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5개 구로 분할했고, 광범한 자율권을 가진 각각의 구는 도시의 테두리를 넘어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주 농촌을 관할했다. 5개 주 바깥의 새로 획득된 넓은 대지는 도시 전체가 관리했다. 노브고로드에서도 최고의 직위는 사법, 행정, 군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대공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주교에게 있었다. 그러나 1136년의 민중혁명이 발생하면서 민회가 대공의 권력과 활동에 세세하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의 권력은 서서히 미미해지고 시민들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한 민회 역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민회는 공후를 임명하고 해임했으며,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를 선출했고, 대주교 지위에 합당한 세 후보를 선출하여 사실상 대주교의 선임을 결정했다. 또한 민회는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고, 법률 선포, 세금 조달 등을 관장하는 도시의 최고 권력이었다. 민회의 성원 자격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 가장이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종을 울려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포사드니크는 공과 행정업무를 분담했고, 공후의 협력자 또는 부관 역할을 하면서 공후의 대한 전제적 통치에서 도시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공후의 부재 시에 역할을 대행했다. 티샤츠키는 자유민 1,000명의 대표로서 상업적 분쟁 등을 처리했다. 대주교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 외에도 세속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서로 적대하는 당파를 화해시키며 해외 사절단을 조직하고 거느리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기관으로는 명사위원회가 있었다. 노브고로드와 부와 세력이 반영된 기관으로서, 귀족층, 전, 현직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 각 구와 거리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민회에서 논의 또는 제정한 법과 그에 행한 조치들을 정교하게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노브고로드 정치의 흐름을 면밀히 조절했다. 사법 체계 역시 상당히 치밀하고 인도주의적이었다. 여러 단계의 법정에 민주적인 배심원 제도와 중재 제도 등을 두어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 노브고로드는 교역도 크게 성장하고, 키예프의 유산을 승계하여 문화도 크게 발전시키면서 15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하나의 예로, 노브고로트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들은 시민들 사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상공업에 종사한 자영업 상인들과 장인들도 역시 노브고로드의 정치적 문제에 참여했다. 이에 전통적인 학자들은 그들이 콘치(Kонец ; 복수형 Kонцы)라 불리는 5개 자치구에 분산하여 거주했으며 또한 그 자치구별로 상업적인 조직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특정 골목과 거리, 도시의 어떤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지에 따라 해당 골목, 혹은 거리의 명칭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인 집단들은 쏘뜨냐(Cотня ; 100인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초의 러시아에서 길드(Guild)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루스 민족의 여러 나라들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길드가 존재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브고로드 중세사에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공업자들의 조직의 실체 역시 불명확하기 때문에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보다 조직화된 길드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노브고로드의 골목(Alley)이나 거리(Distance)는 길드나 조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행정 단위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거리 조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를 짓거나 돌림병일 들 때 죽어나간 이웃 주민들을 매장하거나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활동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역시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러시아 최초의 길드라고 하는 이반(Иван)의 Cотня (100인대) 같은 경우에도 그 실체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거리와 골목에 속해 있는 상인 세력들은 특정 귀족 파벌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면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조약과 그 외의 규약들에서 상인들, 속칭 “원로(Elder)”들이 간혹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규약들 중 불과 100여개 정도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12개의 자작나무 껍질로 서술된 규약들은 1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대부분은 1262년 이후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정치 조직을 이해하고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작은 다른 루스의 공국들과는 달리 세습 직이 아니었고 그 권력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여전히 공작은 노브고로드 시민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100여명의 노브고로드 공작들 중 다수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에 의해 초빙되거나 폐위되었다. 그 중 일부는 랴드(Pяд)라 불리는 계약에 서명하면서 계약에 따른 내용들을 인정하게 했다. 이러한 랴드라는 것은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공작의 권리와 의무를 정해 놓은 계약으로 판단된다. 현재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에 보존된 랴드는 초빙된 공작 12명과 노브고로드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문서보관소에 서술된 12명의 공작 중 5명은 트베리, 4명은 모스크바, 3명은 리투아니아에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노브고로드 공작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적 지도자였다. 또한 공작은 도시의 교회들을 후원하고 재판소를 유지했으며 공작이 노브고로드에 부재할 시, 공작 지위의 나메쯔니크(Намечник)나 빠사드니크가 대신 업무를 보았다. 재판에는 빠사드니크가 항상 참석했고, 빠사드니크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판결도 내려질 수 없었다. 또한 시장의 허가가 없이는 공작이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분할하거나 법을 만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작은 노브고로드에 자신의 사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노브고로드의 영토에서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노브고로드 공작은 도시에서 그에게 지불하는 돈만 받아가는 일명 월급쟁이 사장과 같았다. 여러 리아드에 의하면 공작은 노브고로드 영토 밖에서 노브고로드 시민을 체포하거나 재판에 기소할 수 없었다. 그러한 노브고로드에 공작의 거처는 두 곳 있었는데, 하나는 시장 터에 있었다. 이 저택은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인용하여 야로슬라프 궁전이라 하였다. 다른 공작의 거처는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고라디쎼(Городище)였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국은 수 개의 띠샤짜스(Тысячаc, 나라의 핵심 영토)와 볼로츠(Волоц, 북부와 동부의 식민지 또는 공물을 바치던 지역)로 분할되었다. 노브고로드 시와 그 주위를 비롯한 도시들은 이러한 구역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프스코프는 13세기 이후로 노브고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으며, 1348년 볼로또바(Болотово)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 외의 다른 도시들도 노브고로드 그리고 자신들의 이웃 도시들과 연대하면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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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6
  •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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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06
  • 통합과 조화의 정치, 공동체 삶의 회복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어제 2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재명은 취임 첫날 비상경제점검 TF를 구성하여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회의를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치러진 대선이라서 취임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취임 첫날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어제 이재명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첫 출발은 현충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이했던 점은 인천 계양에서 출발하여 현충원까지 가는 길에 올림픽 대로 4차선 중 2차선만 통제하고 나머지 차선은 통제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시민들의 불편을 배려한 조치로 보였다. 국민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다웠다. 현충원 방명록에 쓴 글씨가 그의 진심을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한다. “함께 사는 세상,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국민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어떤 특정 계급에 매몰된 사람과 달리 그는 가난을 극복한 사람답게 그의 행보에는 사람 냄새가 났다. 국회 로텐더 홀에서의 취임연설 광경도 지켜봤다.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서 내빈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 중 조희대 대법원장과 악수 나누는 장면에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재명의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하고자 했던 대법원장의 시도와 그러한 장벽을 뚫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재명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옹지마이다. 한 길 앞도 내다볼 수 없다면 오늘 나의 행동에 조심해야 함을 생각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기에, 조희대 역시 선한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봤다. 그 옆에 자리한 김형두 헌재소장 권한대행과의 만남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였던 것 같았다. 서로 밝은 웃음으로 맞이한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헌법재판소의 8:0이라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 없었다면, 이런 자리가 마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명문으로 기억된다. 특히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큰 울림으로 기억에 남았다. 통합은 유능의 지표이고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는 말도 명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대통령 취임 선언문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다소 문학적인 글도 있었다. “그늘진 담장 밑에서도 기필코 해를 찾아 피어나는 6월의 장미처럼, 우리 국민은 혼돈과 절망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대통령이 된 인간 이재명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역시 어둠을 해치고 밝은 태양으로 나아가는 저력이 있는 국민들이 뭉쳐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흥이 나면 어떠한 무서운 괴물도 물리칠 수 있는 저력을 가지 백성들의 나라이다. 전 세계가 이 나라를 경이로운 눈길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에 나타난 그가 꿈꾸는 나라는 이렇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다시 힘차게 성장 발전하는 나라, 국민 모두 함께 잘사는 나라, 문화가 꽃피는 나라,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이다. 그의 연설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직한 일꾼으로서,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탁받은 대리인으로서 대통령으로 주어진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고 있다. 특히 평화과 관련된 언급을 했을 때,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입니다.”라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었다. 물론 서양 사회에서는 “평화를 지키고 싶으면,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옛 격언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 말을 삶을 견디고 싶으면 죽음을 대비하라고 바꾸어 말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에 함께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이듯이 평화와 전쟁 역시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삶과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이 있어, 전쟁이 있어, 죽음이 있어 그만큼 더 선과 평화와 삶이 소중한 것이다. 어제 있었던 대통령 취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때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모된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더욱 공동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민에 대한 강조는 공동의 삶에 대한 강조이다. 국민 모두의 행복은 수량적인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살아 가지만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공간을 염두에 둘 때,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다. 즉 공동의 공간을 존중할 때 우리는 상호인정과 다른 의견에 대한 타협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이재명 대통령이 꿈꾸는 나라가 아닐까? 견제와 균형은 결코 수량으로 도식화할 수 없다. 견제와 균형은 오히려 조화이다. 5:5가 조화가 아니라 10:0이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소수 야당은 견제와 균형을 언급하면서 다수 야당을 만들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할 것 같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의 초점은 조화에 있다. 수량적으로 5:5일지라도 악의 무리가 어느 한쪽을 지배하면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지금 비록 소수 야당일지라도 조화를 추구한다면 국민은 알아서 그들에게 많은 표를 줄 것이다. 21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으로 새로운 나라를 향한 첫 발걸음을 축하하면서 새로운 통합 속에서 조화가 꽃피는 나라, 새로운 행복의 나라를 꿈꾸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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