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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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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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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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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7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 칼럼
    • Nova Topos
    2025-11-27
  • 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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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6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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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전 근대 유럽에서의 가발은 권위의 상징
    전 근대 유럽에서의 가발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귀족이나 장군, 제독과 같은 고위 장교와 고위 공무원들은 공식 석상에서 가발을 애용했다. 이러한 머리를 '퍼루크' 라고 한다. 유럽 근세 시대에서 근대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 초상화를 보면 많은 왕이나 정치인, 군인 등 귀족들 대다수가 풍성한 가발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루이 14세는 크고 아름다운 가발을 착용하여 전 유럽의 주목을 받았는데, 절대왕정을 추구한 프리드리히 1세 등 후대의 프로이센 군주들 역시도 루이 14세의 헤어스타일을 동경하였다. 이들은 매우 비슷한 모양의 가발들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가발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가발들은 흰색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주고 묶어서 롤처럼 말린 형태가 선호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푸들이나 양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대표적인 예가 헨델의 초상화를 들 수 있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매우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이 가발들도 당시에는 수공업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비싸 가발 도둑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가발을 훔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흔한 방법이 천으로 가린 큰 바구니에 어린 아이들을 싣고 그 바구니를 머리 위로 든 여성이 도둑질을 목표로 찍어둔 가발 쓴 사람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빠르게 바구니 안의 아이가 가발을 낚아 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발을 대상으로 한 절도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가발 쓴 사람들은 바구니를 머리에 올려둔 여인이 다가오면 피했다고 한다. 군인들도 하얀 가발을 착용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그나마 돈이 없으면 맨 머리에 밀가루를 뿌려 흰색을 내야 했는데, 올백을 기본으로 하고 포니테일 방식의 머리 모양은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 번 해두면 상당기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밀가루가 땀과 머리카락 기름 등에 반응해 썩는 경우가 생겼던대다 쥐가 한밤중에 파먹으러 달려들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피부병이 생기는 등의 고생을 했다. 영국이나 몇몇 영연방 국가의 판사들과 변호사들은 현재에도 하얀 말총 모양의 가발을 쓴다. 나름의 전통으로 이어지기는 하였으나,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하고 있고, 대단히 비싼 가격의 가발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법조인들도 있어서 이에 대해 찬반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같은 유럽 문화권에서도 이에 대해 귄위주의적인 부분으로 보며 이에 비판적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2008년부터 형법을 제외한 재판들에서 변호사들이 가발을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판사는 형사 재판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여 착용해야 한다. 어쩌면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발을 쓰는 것이 아닐지. 여태까지 권위의식을 가장한 유럽의 가발이라는 행태 등으로 볼 때, 유럽 근현대 시대의 가발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계층의 상류층으로써 권위적인 면을 앞세워 서민들을 찍어 누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임을 강조하기 위한 권력의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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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5
  • 청나라의 지배 시기 당시 티베트
    몽골과 티베트의 첫 조우는 1236년인데, 당시 티베트 부족장 한 명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금나라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그 기록이 시작되고 있다. 1240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하기 위해 항복한 탕구트 계열 장군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티베트를 공격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인 까담빠 종파의 사찰 두 곳이 전소되고 승려들이 학살당하는 등, 잔인한 결과들이 이어졌다.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정복하면서 성과 같은 행정구역을 설치하지 않고 다루가치들을 파견하였다. <티베트 정치사(Tibet: A Political History)>를 저술한 샤캅파(Shakippa)는 다루가치가 라싸에 있었지만 티베트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원나라 황실로부터 책봉이 있었지만 이는 사카 판디타(Saka Pandita)와 관련 없는 일부 샤캬파 수령에게 해당할 뿐이라 적시했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 샤캬파(홍모파)의 샤캬틴진을 대리 통치인으로 삼았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 문자를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여기에 더해 티베트 불교 승려 팍빠를 시켜 파스파 문자를 만들도록 했다. 홍모파의 승려 팍빠는 상도를 중심으로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비록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에서만 사용되었고 여타 몽골 제국 방계 국가들에서 사용되지 못하면서 사장되었지만, 티베트 문화가 원나라에 몽골인 지배층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 대장경을 몽골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색목인으로 분류되어 원나라에서 우대를 받았다. 팍빠와 같은 티베트 불교 수장들이 원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대우는 왕공귀족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티베트 불교 수장들은 명목상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렬에는 황제 및 후비공주 등 모두가 문 밖에서 영접할 정도였다. 원나라 무종(武宗) 시대에는 티베트인 승려(西僧)를 구타하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하는 자는 혀를 절단한다는 황명이 내려졌다. 절대 권력을 얻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한족들의 논밭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의 많은 횡포를 부렸다. 다른 한편 중화주의자들의 반 티베트 감정은 중국 내 반 몽골 감정과 함께 엮여있다. 다시 말해 한족 자신들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해자가 아니며 과거 원나라, 청나라 때의 복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생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티베트 불교에 샤캬파만 있던 것은 아니고, 샤캬파와 경쟁하던 캬규파에서 차가타이 칸국의 도움을 받아 봉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원나라가 붕괴되자마자 티베트에서는 캬규파 세력이 샤캬파를 밀어내고 티베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원나라, 명나라 교체 시대 몽골족들이 명나라에게 패퇴하는 과정에서, 대도가 함락당하고 상도가 명나라 군에게 파괴된 것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 역시 쇠퇴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 행사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과시적이었는데, 더군다가 티베트 본토의 샤캬파 세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북원에서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 행사를 재현하기는 불가능했다. 티베트 불교는 투메드 부락의 알탄 칸 때부터 다시 몽골 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샤카파를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알탄 칸은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 겔룩파로 개종하였다. 이어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도 몽골의 알탄 칸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78년에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교주 소남갸쵸가 알탄 칸을 방문했는데, 알탄 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교주를 달라이 라마로 선포했다. 이는 몽골 지역의 종교가 티베트 불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초의 달라이 라마 등장이었다. 소남갸초는 자신의 선대 교주들을 각각 1,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고 알탄 칸에 감사하는 마음 및 알탄 칸 계의 정통성 확보, 몽골을 통한 티베트 내에서의 겔룩파 세력 강화를 위해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삼았다. 따라서 티베트의 4대 달라이 라마는 유일한 몽골인 출신의 달라이 라마이다. 알탄 칸이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것은 투메드 부락과 적대하던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오이라트 연맹 역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였다. 유목제국은 정주민 제국과 다르게 체계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 거점이 요새와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분으로 인한 국력이 약화되는 것이 큰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나 이슬람교는 유목 제국들의 내분을 막는 해결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이라트 연맹과 이웃한 투르크계 카자흐 칸국이나 모굴리스탄 칸국이 이슬람교를 믿는 상황에서 이들과 대치하던 오이라트 부족들은 티베트 불교로 개종을 선택했던 것이다.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였던 호쇼트 부족들이 티베트 고원과 코코노르 호수 일대를 장악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겔룩파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5세는 호쇼트의 칸들과 협력하여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토번 제국의 멸망 이래 수백여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티베트 고원 일대를 통일하였다. 호쇼트 몽골-티베트 연합군은 부탄 왕국을 위협하였으며, 라다크와 레(Le) 일대까지 진출을 노렸으나, 무굴 제국이 티베트와 인도 사이에 있던 소규모 왕국들을 지원하면서 팽창은 저지되었다. 한편 호쇼트 칸국이 같은 오이라트 계열 유목 집단인 준가르 제국의 위협을 받자, 달라이 라마들은 당시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청나라 황제들은 준가르 제국을 견제하고 제국 내외 몽골족들의 민심을 얻을 목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고, 대신 티베트를 청나라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청나라는 호쇼트 칸국 시절보다 오히려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강화해주었으며 대신 코코노르(암도) 지역에는 티베트 고원 위창 지역과 별개의 이번원을 세웠다. 본래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외곽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하고 있다. 한족의 지식층들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 청나라 치세 당시 티베트인들과 외몽골 인들의 지위는 명목상으로는 한족에 비해 우월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가 사망한 1682년 아후, 후임 선정을 두고 호쇼트 부락의 탠진징길갤포(Tenjinjingelpo) 라창(Rachang)과 섭정인 상게 갸초(Sange Gyacho)가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1697년 상게 갸초는 창양 갸초(Changyang Gyacho)를 찾아내 달라이 라마 6세로 내세웠으나, 상게 갸초와 준가르 제국의 칸인 갈단 칸 사이의 접촉을 주시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강희제는 라창 칸을 지지하게 된다. 티베트에서 호쇼트 부락의 통치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던 라창 칸은 그 기세를 이용하여 1705년에 섭정이었던 상게 갸초를 살해한 이후, 달라이 라마 6세 창양 갸초를 청나라로 호송했다. 하지만 도중에 창양 갸초가 사망하자 25세의 승려 예셰 갸초(Yessea Gyacho)를 달라이 라마 6세로 옹립했다.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 6세 예셰 갸초를 책봉함으로써 호쇼트 부락을 지지했다. 그러나 라창 칸의 행보에 불만을 품은 청해(코코 노르) 호쇼트 세력과 살해당한 상게 갸초의 지지 세력들은, 1708년 티베트 동부 리탕(Ri Tang)에서 탄생한 창양 갸초의 환생자 겔샹 갸초(Gelsiyang Gyacho)를 달라이 라마 7세로 옹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준가르 제국을 이 분쟁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1715년 겔샹 갸초를 납치하여 서녕(西寧)에 있는 쿰붐 사원(白居寺)에 연금시키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상황을 관망했다. 1717년 겨울,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한 준가르 제국의 칸인 체왕 랍탄이 달라이 라마 7세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체링 돈돕 휘하의 병력 6,000명을 라싸에 보내 호쇼트 군을 격파하고 라창 칸을 살해한 이후, 상게 갸초의 잔당과 결탁했다. 이 때 준가르 군은 살육과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한편으로는 소규모 부대를 청나라 군의 수중에 있는 쿰붐 사원에 보내 달라이 라마 7세 겔샹 갸초를 탈취하여 라싸에 있는 체렝 돈돕 휘하 준가르 군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지만 계획이 불발되어 탈취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청해 호쇼트 부락이 달라이 라마 7세를 호송해오는 중이라고 선전했다. 체왕 랍탄은 반 라창파 귀족인 탁체파(Takche)에게 사쿙(Sakyong)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그를 정부(간덴 포브랑, Ganden Pobrang)의 수반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권은 섭정하던 준가르 군 지휘관 체링 돈돕에게 있었다. 당시 선교사가 라싸의 점령자들인 준가르 군이 1718년 내내 티베트 사람들에게 전례가 없는 잔학 행위를 벌였다고 비판할 정도로 체링 돈돕을 위시한 준가르 인들은 공포통치를 자행했다. 라싸의 주민들은 달라이 라마 7세 겔샹 갸초를 데려 오지도 않고, 공포 통치만 일삼는 준가르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은 라창 칸의 호쇼트 부락 잔존 세력과 함께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강희제는 호광총독(湖廣總督) 어런터이(阿倫泰), 시위(示範), 서렁(設置) 등에게 청나라 군을 이끌고 라싸로 가게 했으나, 이들은 7월부터 카라우수(卡勞蘇)에서 벌어진 준가르 군과의 야전에서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어런터이를 상실한 청나라 군은 퇴각했으나 윤 8월 초순, 준가르 군에게 포위를 당한 요새에서 기아와 전투 등으로 인해 궤멸 당했다. 강희제는 청해 호쇼트 부락 세력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력을 약속 받는 한편 달라이 라마 7세 겔샹 갸초를 책봉했다. 1720년 9월 청나라 군은 청해 호쇼트 군과 겔샹 갸초를 쿰붐 사원에서 라싸로 데려왔고, 준가르 세력을 제압했다. 이로써 티베트는 준가르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세력권 내로 진입하게 되었다. 겔샹 갸초는 1720년 11월 혹은 1721년에 포탈라 궁에서 달라이 라마 7세로 공식 즉위했다. 청나라군은 1723년까지 라싸의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체류했으며, 준가르 제국과의 긴장 관계를 해소한 뒤 철병했다. 그러나 청해 호쇼트의 수장인 롭상 단진은 자신이 티베트의 왕인 갤포가 되고자 무력을 행사했다. 달라이 라마 7세 정권의 카론(Karon)들은 섭정 선정에 앞서 이번원에게 청나라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카론들은 청나라에 군사 원조까지 요청했는데, 세종 옹정제의 명령으로 1724년 청나라 군이 다시 파병되어 청해 호쇼트 부락을 압박하고, 티베트로 진군하면서 롭상 단진은 준가르로 도피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내외 몽골에 이어 청해 지역의 몽골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옹정제는 논의를 벌인 끝에, 과거 호쇼트 부락의 라창 칸에 의해 아리(Ari)의 총독이자 카론으로 임명되어 반 준가르 노선을 견지하면서 청나라 군을 지원했었던 캉첸내(Kangchenne)를 총리 서장 사무로 삼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7세 정권 내의 반대파, 친 준가르 파는 청나라의 대신이 라싸에 도착하기 직전 친청파인 캉첸내를 살해하고, 달라이 라마 7세의 권위를 내세우며 청나라에 정부 승인을 요청했다. 한편 친 캉첸 내파, 친청파였던 카론 포라내(Porane)는 달라이 라마 7세와 그 실세들이 준가르 및 롭상 단진과 야합했다고 청나라 조정에 고발하면서,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판첸 라마를 옹립했다. 준가르의 군주 갈단 체링이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 7세와의 접촉을 시도하자, 옹정제는 1728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친 준가르 파를 압박하고 달라이 라마 7세 겔샹 갸초를 내지인 사천성과 가까운 곳인 캄 지방의 리탕 사원에 연금시켰다. 청나라는 겔룩파의 후원자와 라싸 방위라는 명분으로 2,000명의 청나라 군을 주둔시키고 티베트 측에 물자나 주둔 비용들을 부담시키지 않았다. 1729년 준가르를 대대적으로 공략해서 긴장 관계를 해소한 청나라는 주둔군을 500명으로 감축했고, 고종 건륭제는 즉위 직후 완전한 철군을 원했으나 티베트 정부가 주둔 연장을 요청하면서 임시 연장의 형태로 지배를 확립해나갔다. 친청파인 포라내의 사후, 그의 차남 규르메남걀(Gyurmenagiyal)이 자위를 세습했는데, 그는 캉첸내 계열 인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청나라의 종주권을 폐기하고자 했다. 규르메남걀은 1748년 건륭제를 설득하여 라싸의 청나라 군을 100여 명으로 감축시켰다. 청나라가 라싸에 파견한 암반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였고, 나아가 건륭제는 준가르 사절의 티베트 방문까지 허가했다. 그러나 규르메남걀의 계획은 친청파 인사들에 의해 암반들에게 입수되었고, 암반 푸칭(fucing)과 랍돈(labdon)은 규르메남걀과 그 수행단을 유인하여 암살에 성공했다. 당시 살아남은 롭상 태시(Robsang Teasi)는 암반 및 기타 청나라 인들을 살해하고, 준가르로 도피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분노한 건륭제는 달라이 라마 7세 겔샹 갸초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군을 티베트에 진주시켰으며, 1751년 1월, 만주족 장군인 반디(Bandi)가 라싸에 들어와 <주장선후장정(西藏吉後摩程)>을 체결했다. 이 장정을 통해 청나라는 암반이 병력을 거느리고,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1788년과 1791년 구르카와 청나라의 전쟁이 벌어진 이후, 건륭제는 암반의 상주 만으로는 티베트를 통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했다. 전쟁 기간 중 달라이 라마와 4명의 카론이 암반과 상의 없이 사안들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장내선후장정> 29조를 만들어 금병체첨(金瓶製簽) 및 암반의 인사권 및 외교권 개입을 허용했다. 결국 18세기 말, 티베트는 전례 없이 정치적 자주성과 독립성이 훼손되었고,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 황제 사이의 최왼 관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행정적인 관계로 강화되었다. 청나라의 황제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물론 자치권을 상당히 부여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와 준가르의 격렬한 충돌 가운데 번부가 되었고, 그에 수반하는 대신(Amban)이 상주했다. 그 외에도 만주족을 비롯하여 어원커족, 나나이족, 다우르족도 청나라의 통치 과정에서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건륭제는 <만주원류고>를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이름은 만주족으로 불리기 이전의 여진족 및 만주 지역의 퉁구스 제족이 티베트 불교를 통하여 믿게 된 문수보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열하성(熱河省)에 피서산장을 건설할 때 사원들 중 일부는 티베트 건축물과 비슷하게 짓기도 했다. 티베트는 청나라와 네팔 사이의 전쟁에서 청나라 군에 원병을 해주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가 티베트를 통치하다보니 주변 국가들인 네팔, 시킴, 부탄을 복속시켰으며, 남서부 국경으로는 무굴 제국과 접했다. 그리고 접해있지 않았으나 지리적으로 무굴 제국 영토인 벵골과 아삼 등과 근접하다보니 티베트를 통해 무굴 제국 동부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내몽골 지역의 몽골계 제부는 청나라 초기인 태종 숭덕제의 치세 때 일찍 복속되었고, 지리적으로 만주와 가까이 접한 곳이었기에 서로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만주족이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 만주 문자를 창제한 것 역시 내몽골의 영향이 가장 컸다. 원나라 시대부터 몽골족들이 만주와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북경에 대도를 세웠고, 북쪽에는 상도를 세웠다. 칭기즈칸의 황금씨족들은 상도와 대도를 통해 만주, 몽골, 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이들의 정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원나라는 티베트에서 티베트 불교 및 티베트 문화의 일부를 받아들였고, 외몽골과 내몽골, 중가리아의 문화는 티베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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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5
  • 몰도바 총선, 역시 예상대로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의 압승
    몰도바의 9월 28알 총선은 필자의 예상대로 집권당인 PAS와 마이아 산두 대통령의 완승으로 끝났다. 서방 언론은 총선을 전후해 러시아의 선거 개입을 제기하고 비판했으며 마이아 산두 또한 여기에 편승하여 친러 세력과 러시아를 비판했다. 특히 친러시아 분리 및 독립 요구가 거세게 나타난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서는 투표 자체가 사실상 차단되고, 출구조사가 금지되는 등, 비(非) 민주적으로 탄압하여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선거 행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역시 예상대로 친서방 산두 정권을 지지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보이지 않는 힘 또한 총선에 영향을 미쳤다. 산두 대통령의 '행동과 연대당(PAS)'은 9.28 총선에서 과반으로 득표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산두 대통령을 비판하고 맞섰던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이 이끄는 친러시아 성향 정당들의 득표율은 26%에 그쳤다. 주요 4개 야당들을 친러 정당이라 주장하여 70여 명을 체포하고 선거 정당의 지위를 박탈한 것에 비하면 26%의 득표율 또한 매우 선전한 것으로 여겨 진다. 물론 이 외의 원외정당급에 불과한 일부 군소 정당이 여전히 친러시아 성향을 갖고 있지만, PAS가 과반을 득표한 상황에서 친러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번 총선은 산두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이 계속 이어질 것인지, 혹은 의회에 의해 제동이 걸릴지 여부를 가름하고 이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선거였다. 서방 외신들은 PAS의 승리로 인해 몰도바의 EU 가입 등 산두 정권의 친서방 노선이 가속화 되어 내년 상반기 안으로 몰도바의 EU 가입은 무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문제는 몰도바 전체 투표율이 52%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있다. 서방 세계에 거주하고 있던 몰도바인들은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여당에 몰표를 던졌고, 이는 무려 78%나 되었다. 그러나 몰도바 국내 상황으로만 본다면, 집권 여당인 PAS의 정치적 입지가 안정적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더불어 친러 성향의 지역에서는 무력과 통제를 이용해 투표가 사실상 원천 봉쇄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몰도바 당국은 총선 이후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는 혐의로 친러 인사이자 야당 인사인 74명을 체포했고, 주요 야당 4개 정당의 선거 후보 정당으로의 등록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를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본다면,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강압적으로 탄압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총선 이후 부정선거 규탄 및 총선 무효 시위가 벌어질 것이 예상되고 있다.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이 이끄는 야당 측의 부정 선거에 대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총선 전에 PAS와 친러 정당들이 접전을 벌일 것이라는 여론 조사가 나왔다. 선거를 앞두고 9월 초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친러 정당 4개 블록들이 36%, PAS가 34.7%를 각각 득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개표 결과, PAS가 과반 득표를 넘겼다. 게다가 몰도바 선관위는 출구조사를 금지하는 역대급 반민주적인 행위로 인해 여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추적이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 주민에 대한 투표 봉쇄 및 투표 방해와 더불어 집단 서방 국가들에 거주하고 있는 몰도바인들이 현 정부를 지지하고, 유럽 일부 국가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프랑스 정보기관의 활동에 대해 텔레그램 창립자인 파벨 두로프는 "몰도바 총선을 앞두고 프랑스 및 몰도바 정보기관이 몰도바 반정부 채널에 대한 검열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프랑스 외무부는 X를 통해 두로프의 주장을 반박했고 두로프가 과거에도 루마니아 대선 당시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비판했다. 두로프가 지난 프랑스 방문 당시,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협박을 받은 사건, 그리고 최근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몰도바에 진입한 사실 등으로 볼 때, 프랑스 외무부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두로프는 X를 통해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프랑스 정보기관으로부터 법적 절차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몰도바의 반 정부 텔레그램 채널을 검열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주장했다. 두로프는 만약 프랑스 정보기관이 실제로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면, 이는 사법 절차에 개입하려는 시도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나의 취약한 법적 지위 등을 이용해 몰도바 총선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또한 루마니아 대선 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었다고 주장했다. 전에 두로프는 프랑스의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 기간 동안에 보수 성향의 채널을 차단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폭로한 적 있다. 참고로 루마니아 대선은 2024년 11월에 치러졌는데, 루마니아 보수 세력들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했음을 이유로 선거 결과를 완전히 무효화했다. 그런데 루마니아 보수 정당의 지지를 받았던 몰도바 심장(Partidul)당은 친러 정당으로 낙인 찍혀 이번 총선에서 선거 등록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물론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끼어 있는 몰도바는 지리적으로 루마니아와 러시아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에서 우리에게 넘어온 채널들을 살펴본 결과, 명백하게 텔레그램의 규칙을 위반한 채널 여러 개를 찾아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목록을 받았는데, 프랑스와 몰도바 정부가 용납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에 텔레그램은 채널 차단 요청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텔레그램은 정부 당국의 채널 검열이 심한 개발 독재 국가 같은 곳에서 특히 인기 있는 메신저다. 참고로 최근의 네팔 시위, 인도네시아, 필리핀, 동티모르 시위 모두 배경에 텔레그램이 있었고 그것으로 서로 소통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친러주의자들이 텔레그램을 통해 동유럽 정치에 개입했다고 주장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프랑스 정부는 최근 자국의 대규모 반 정부 시위가 텔레그램을 통해 조직됐다고 주장하면서 그 배후에 크레믈린이 있는 것 아니냐며 전혀 관련 없는 러시아 정부에 의혹을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몰도바 야당은 이번 총선 결과에 불복하여 반 정부 투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루마니아의 보수 정당, 칼린 조르제스쿠의 세력과 연계됐다는 이유로 총선 참여가 금지된 심장당은 "이번 총선은 선거가 아니라 산두 행정부의 임명이나 마찬가지였다(Aceste alegeri generale nu au fost niște alegeri, ci mai degrabă o numire a administrației Sandu)."고 주장하며 총선에 불복할 것이라 했다.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도 "우리는 도둑 맞은 선거 결과는 인정하지 않을 것(Nu vom recunoaște rezultatele alegerilor furate)."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당의 총선 불복 및 반정부 시위는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주둔하고 있는 현재, 몰도바 정국에 큰 변화를 몰고 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향후 벌어질 일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예측된다. 첫 번째, 선거 불복 시위는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네팔이나 동남아시아에서처럼 심하게 과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몰도바에 진입해 있는 프랑스군이 관여 할 것은 뻔한 일이고, 그로 인해 시위 양상은 하루 이틀 정도 절정에 이르겠지만 3~4일을 고비로 점차 묻혀지는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심각한 언론 통제와 통행 등, 자유의 기본 조건등이 어느 정도 통제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비 민주적인 선거를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판적인 보도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몰도바 정보부는 이 보도들을 모두 통제할 것이다. 심각할 경우, 친러 인사로 몰아 비판적인 언론인들에 대해 체포 작전을 감행할 것이고, 보도 검열은 심화될 것이다.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에 대한 통제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두 지역들의 주민들이 선거 불복 및 반정부 시위에 참여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부에서 소요사태가 있을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 검열, 통금 시간 설정 등이 있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 접경 지역으로 프랑스군이 들어가 엄격한 통제와 압박을 실시할 가능성 또한 염두해 두어야 한다. 현재 마이아 산두와 PAS 당이 가장 믿고 있는, 이른바 "믿을맨"은 몰도바에 진주해 있는 프랑스 군이다. 이쯤 되면 프랑스 군과 나토군이 몰도바에 들어온 이유는 명확해진다. 결국 만약에 있을 수 있는 오데사 함락과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연결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서남부 지역으로 진입을 막기 위해 들어와 있다기 보다는 몰도바 총선에 개입하고 몰도바가 EU에 안전하게 가입할 때까지 몰도바 정권을 지켜주는 "평화유지군" 형식인 것이다. 세 번째, 몰도바의 전 대통령인 이고르 도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누군가를 사주해서 암살할 수 있고, 그 뒷배경엔 프랑스 정보부가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니면 습격 및 납치 등을 통해 비밀리 체포 작전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고, 도돈 전 대통령의 비리 문제 등, 여러 범죄가 될 만한 문제들을 엮어 기소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은 친러 인사로써 사실상 몰도바의 친러파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이자 구심이다. 게다가 마이아 산두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친서방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번 총선이 부정선거로 주장하고 있는만큼 프랑스나 나토 입장에서도 도돈 전 대통령은 눈앳가시나 마찬가지다.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현재 누구보다 가장 위기의 인물인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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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4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시킬 유일한 중재자는 터키 대통령 레제이프 에르도안
    누군가가 필자에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데 있어 둘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닌 남이 이를 중재해야 한다면 누가 좋겠냐고 물어본적 있었다. 필자는 그 질문에 주저 없이 이렇게 말했다. "레제이프 에르도안!" 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며 터키 에르도안이 어떻게 전쟁 종식과 평화 회담을 중재할 수 있는 물어본다. 서구 국가나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해 중재가 불가능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이해못하고 있으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미국이나 서구가 중재한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서구가 중재는 불가능하다. 외교에 있어서 분쟁을 중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전쟁 당사자들의 분쟁 스토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거나. 2. 전쟁 당사자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경우 그렇다고 같은 슬라브계인 동유럽 국가들은 분쟁을 중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위협을 크게 느끼고 있는 그들이라,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중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들 중, 슬로바키아가 그나마 유일한 중재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우크라이나가 슬로바키아를 싫어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첫 번째 방법인 "전쟁 당사자들의 분쟁 스토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즉, 완벽하게 이해하며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두 번째 방법이다. 서구는 전쟁 당사자들의 약점을 확실히 휘어잡기 어렵다. 오히려 서구는 러시아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부분이 많다. 객관적으로 중국도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중국의 중재를 꺼려한다. 아랍과 중동 국가들은 두 가지 모두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결국 남은 건 터키 뿐이다. 터키 또한 첫 번째 방법의 해당 사항이 될 수 없지만 두 번째 방법에 있어 확실한 해당 사항이 될 수 있다. 터키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양국이 모두 두려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해협이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현재 분쟁 중인 상황에서 유일한 수출 품목은 "밀"이다. 흑토에서 막대한 양이 생산되는 밀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세계 각국에 수출되고 있다. 만약 터키가 자국의 재량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한다면 수출 품목이 사라진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멸망할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는 러시아 입장도 마찬가지다. 현재 북극항로가 있지만 아직 완전한 개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당분간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수출입은 러시아 경제의 중요한 버팀목이다. 터키가 이걸 통제한다면 러시아는 급격히 인플레 현상이 먼저 찾아올 것이고, 러시아 경제의 암흑기가 찾아올 것은 뻔한 일이다. 러시아 입장에 터키를 좋게 잘 대해주면서 달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두 나라의 약점을 완전히 컨트롤하고 있는 터키의 에르도안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종전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의 여부를 쥐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과 서구는 반면 터키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정말로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다면 트럼프와 푸틴의 협상이나 트럼프의 말뿐인 협잡질이 아니라 미국과 서구가 마음을 열고 에르도안을 설득해 중재에 나서게 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미국과 서구가 에르도안을 설득할 수 있을까? 터키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이다. 이같은 터키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미국과 서구는 에르도안에게 중재시킬 마음이 전혀 없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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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4
  • 마크롱의 팔레스타인 국가인정 선언, 향후 국제질서에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이를 공식화했다. 그와 같은 프랑스의 선언은 9월 22일이었고 그 하루 전인 9월 21일에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와 호주가 프랑스에 앞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했다. 2024년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페인 등 서유럽 일부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선언했지만, G7 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이처럼 연쇄적으로 공식화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한 UN 회원국은 193개 회원국 중 151개국으로 늘어났다. 1988년 12월 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한 국가가 78개국이었던 것에 비하면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인정하고 있지 않거나 유보하는 중요 국가는 미국, 이스라엘, 독일, 이탈리아, 일본, 한국 정도다. G7 중 미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아직 승인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먼저 인정하지 않은 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로 인한 역사적 빚 때문에 선뜻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하기 어렵지만, 두 개 국가의 해법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이 중동 정세의 호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류하고 있지만, 속내는 미국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꿈을 지지하면서도 국가인정에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한국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로 인정하긴 어렵지만, 두 개의 국가 해법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네타냐후는 잇달아 나온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승인한 국가들을 행해 수치스러운 결정이라든가 광기라고 비난했지만,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텅 빈 유엔 총회장에서 고립된 이스라엘의 현실뿐이었다. 미국은 마크롱의 이번 선언을 하마스에 대한 보상이라고 반발하면서 이스라엘을 두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오히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다른 서방 국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마스보다 압바스 정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7월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회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내용상 프랑스가 G7 국가로서 사실상 첫 번째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서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마크롱은 자국의 지지율을 고작 15% 정도였지만, 이번 선언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마크롱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함으로써,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중동 판세를 흔들어서 미국의 일방적 정책을 다자 외교로 변경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향후 중동 정세에 과연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스라엘의 극우파가 아마도 이른바 시나이반도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스라엘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이스라엘주의를 현실화하는 ‘다윗 회랑’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보도도 일부 아랍권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길목이 시리아의 동남부 지역인데, 이스라엘이 최근 시리아 영공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시리아 정부에 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여튼 이스라엘이 가자 전쟁을 통해 하마스를 궤멸시키고 요르단강 서안까지 장악하려는 의도로 보면 서방 입장에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서방이 팔레스타인에 뿌려 놓은 불씨가 결국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영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국가 승인을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한 것은 이제라도 뭔가 중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로 보이기는 한다. 마크롱의 외교적 노림수는 팔레스타인의 국가인정이라는 선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중동 재편에 제동을 어느 정도 걸면서 아랍 국가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있다. 비록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중동에서 아랍국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프랑스에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 있다. 아랍국들의 속내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함에 있어서 서방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거기에 부응한 서방 국가가 바로 프랑스인 셈이었다. 미국이 그동안 중동 문제를 다룸에 있어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은 네타냐후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영토적 야욕을 부채질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마크롱이 UN 연설에서 강자의 법칙이 위험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트럼프를 우회 저격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의지의 연합’을 주도했고, 팔레스타인 국가인정에 앞장서면서 국제적 리더로서 위상을 포장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둘 다 상징적이지만, 마크롱의 행보는 오랫동안 미국의 보호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 미국의 지원이 불확실해지면서, 워싱턴의 발자국을 따르지 않으려는 국가들은 프랑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프랑스의 국제적 영향력은 많이 감소했지만, 불확실한 세계에 미국과 다른 길로 나아갈 때 중심적 인물들은 프랑스 대통령들이었다.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그들은 외교로서 돌파해 나갔으며 성과도 나름대로 거두었다. 마크롱의 지금 행보도 마찬가지다. 사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처럼 불거진 것은 영국이 아랍인과 맺은 ‘후세인-맥마흔 선언’, 프랑스와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비밀 협정), 유대인과 맺은 ‘벨푸어 선언’을 하면서 영국을 제외한 당사국들이 서로 협정 내용을 모르다 보니 각기 저마다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영토 문제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후세인-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의 지위 문제에서 서로 모순된 내용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영국은 이 선언을 그 당시에 자화자찬하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겠만, 현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영토 할당 협정을 비밀리에 맺으면서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에 해안 지역 일부와 현재 이라크와 요르단을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협정을 하면서 아랍권을 배제함으로써 사실상 어쩌면 벨푸어 선언보다 더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1917년 구소련의 볼셰비키가 이 비밀 협정을 폭로하면서 영국은 자신의 이중 플레이가 드러나 당황했고, 아랍권은 자신들이 영국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경악했다. 그러면 프랑스는 어떠한가? 프랑스는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그동안 표정 관리만 해왔을 뿐이다. 마크롱도 팔레스타인보다 레바논에 더 신경을 쓰는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프랑스도 책임이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랑스는 당시에 말하자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후에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거질 것을 간과하고, 그냥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국에 맡겨버리고 그대로 수수방관했을 뿐이다. 영국은 워낙 책임이 큰 당사국이라 일종의 도덕적 책임감으로 선뜻 팔레스타인의 염원인 팔레스타인의 국가인정을 주저했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 중 어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그때 비로소 영국이 동참한다면 약간의 책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움직이니까 영국도 영연방 국가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하면 다수의 구가들이 이에 동참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마크롱의 이번 선언은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다. 프랑스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 마크롱의 이름이 프랑스 국내에서 사라지겠지만, 국제적으로 그의 이름은 성과로 남을 것이라고 말이다. 마크롱의 앞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외교적으로 프랑스의 목소리를 내면서 국제질서를 다각화하는 전략은 긍정적이다. 필자는 마크롱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왜 진작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미국의 눈치만 보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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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0-03
  • 동티모르에도 반부패 시위 확산, 동남아시아에 이어지고 있는 반부패 시위로 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 열도 동쪽 끝에 위치한 티모르 섬은 제국주의 당시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분할 통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간차를 두고 서쪽은 인도네시아와 동쪽의 티모르 섬은 각각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 197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이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끈질긴 저항운동을 벌여 2002년에 두 번째 독립에 성공했다. 동티모르는 한국인들에게도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상록수 부대를 파견한 곳으로 알려진 나라다. 동티모르의 나라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티모르-레스테(Timor-Leste)라 불리며, 영어로는 이스트 티모르(East Timor)이다. 면적은 14,874㎢이고 인구는 약 140만 명 정도로, 면적이니 인구로 볼 때, 한국에서는 강원도와 비슷한 규모로 나타난다. 다만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로부터 두 번의 독립을 쟁취한 국가이기에, 동남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가장 강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2002년에 독립한 이후 동티모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알려졌디. 동티모르는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와 심각한 빈부 간의 불평등, 그리고 빈민층들의 영양실조와 높은 실업률을 겪고 있다. 동티모르는 인구의 40% 이상이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동티모르 국민소득의 90%는 석유 기금에서 나오고 있는데, 2024년에는 182억 7,000만 달러로 평가되었지만 문제는 티모르 섬 내의 석유자원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티모르는 정식 화폐 대신 미국 달러가 암암리에 유통될 정도로 경제력이 매우 취약한 편이다. 최근 2024년을 기준으로 140만 명의 인구 중에서 84만 명, 약 60% 이상의 하루 소득은 4달러 미만이었으며 성인들 중 30%가 문맹으로 한 때 수도인 딜리의 인구 중 80%가 실업자인 적도 있었다 한다. 2024년 IMF 통계 기준으로도 동티모르의 1인당 GDP는 1,454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으로 그나마 2019년에 미얀마의 1인당 GDP를 추월하여 동남아시아 최고 최빈국 신세는 간신히 벗어나기는 했다. 이는 독립 선언 직후, 수하르토가 동티모르를 침략하여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파괴하여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었었다. 게다가 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대놓고 차별 받았다. 이에 독립하기 전, 그나마 존재하고 있던 학교와 병원 등 공공 인프라들이 인도네시아군 및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동티모르는 낙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동티모르는 경제난과 혼란으로 복구되지 못했다. 그런데 작은 섬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매장된 석유자원 개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근처 바다에 엄청난 양의 가스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문제는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는데다가 위치 또한 정확하지 않아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들과 석유 회사들이 동티모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아 외국 원조에 의지해야 했다. 석유로 인해 GDP가 최근들어 급성장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산업기반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동티모르 특유의 빈곤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동티모르가 친중 국가라는 것에 있다. 중국은 동티모르가 독립한 이후, 대통령궁과 외교부, 국방군 주둔지 등에 대해 자금을 지원했고, 일대일로 프로젝트에도 참가시켰다. 그 덕택에 어느 정도 인프라 갖춰지긴 했지만 여전히 멀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동티모르의 공립학교는 자금이 부족한 상태이지만 교육열이 높아 포화 상태다. 매년 15,000명이 넘는 중등학교 졸업생과 4,000명의 대학 졸업생이 취업 기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노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젊은 동티모르인의 거의 절반이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취업 희망국가는 호주와 한국, 영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동티모르 140만 시민 중 64.6%가 30세 미만으로 매우 젊은 국가라는 장점이 있다. 동티모르 국회의원 들의 연봉은 2023년 기준으로 36,000달러가 넘는다. 2021년 3,000달러인 국가 평균 소득의 10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2006년에 통과된 법률에 따라 전직 국회의원들은 연봉과 동일한 수준의 평생 연금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의원들은 공식 업무 차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을 무료로 제공받는다. 그러한 행태에 대다수 젊은 일반 시민들은 자괴감이 밀려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2025년의 시위는 국회의원 65명에게 토요타 SUV 차량 프라도를 공짜로 제공하는 조치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차량 제공에 대한 불만을 갖고 시위를 벌인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로 국회의원들의 무료 차량에 대한 시위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2008년에는 경찰이 그해 의원들을 위해 계획된 100만 달러 규모의 신형 차량 구매에 항의하던 학생들을 여러 명 체포했다. 2018년 11월에는 동티모르 대학 운동(MUTL)이 국회의원들을 위한 신형 토요타 프라도 SUV 구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동티모르 국가 경찰은 시위대를 상대로 최루탄을 사용했고, 22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다. 국회의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신차가 구매된 것은 2020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25년 9월,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부패 때문이다. 최근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팔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패턴이라 볼 수 있다. 시위는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간 지속되었다. 수도 딜리에서 대학생 2,000명이 시위를 벌였고, 이들은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정부 차량에 불을 질렀으며, 경찰관들을 향해서는 돌을 던졌다. 시위대가 분노한 것은 국회의원 65명에게 토요타 SUV 차량 프라도를 공짜로 제공하는 조치였고 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고 있던 동티모르의 Z세대들에게 있어 시위 촉발의 트리거가 되었다. 국회의원들에게 이미 차량을 지급하고 있는데도 새 차량을 지급하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발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동티모르 의원 1명당 연간 3만 6,000달러의 기본급여 지급되는데 이에 대한 서민 출신 학생들의 자괴감은 엄청났다. 9월 15일 시위가 일어나자 다음날인 16일 국회는 즉시 무료 차량 지급 계획을 폐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날인 17일에도 시위가 일어났다. 이미 차량이 지급되었다는 루머도 돌았다. 시위대의 불만은 단순하게 국회의원의 차량 지급에만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교육을 재원도 없고 물과 위생시설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하는 정치가들만 호의호식하는 것이 오히려 젊은이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학생들은 차량 구매 취소 외에도 전직 국회의원들의 종신 연금 지급 중단과 시위 금지 구역을 100m에서 25m로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에서 시위가 발생한 이유의 시작은 관료들의 심각한 부정부패였다. 우선 동티모르 정부는 시민들의 시위에 굴복했다. 국회의원들의 종신 연금 지급이 중단되었고 국회의원들이 신차로 바꾸려 한 계획도 철회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를 전혀 예상 못했던 동티모르의 정부는 생각지도 못한 시민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소나기는 우선 피하고 볼 일이라며 그저 임시적으로 굴복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부정부패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뻔한 일이다. 부패의 고리는 끈질기게 연결되며 그 또한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양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여기에 색깔혁명의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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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 유럽 근현대 시기 프로이센 정부와 유태인, 아쉬케나지
    프로이센 정부는 유태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태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태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태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으로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태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태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 받는 것 등의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처럼 부계명을 사용하던 유태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으로 그 권익이 발전된 사례다.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태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들로 성장해 나갔으나 러시아 제국 영토 내 우크라이나 일대 유태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로 성장하는 속도가 다소 늦어졌다. 물론 폴리트(Polit)의 유태인 소작농들은 새로운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 인, 우크라이나 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대규모의 유태인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 농촌 지역에 거주하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태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인, 폴란드 인의 앞잡이라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민족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반유태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태인의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 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네프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상당수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했지만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착 유태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네프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태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빈민들로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들을 처리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非)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의 주장들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회에서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및 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태인들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태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모두 부유할 것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태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많지 않았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태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된다.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태인들 중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빠르게 유혹되어 유테인 마피아나 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지 유태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 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수효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 공화국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약 600만 명의 학살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태인들 중 90~91%가 학살되어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숫자는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계통 혈통들이 300만 정도에 이른다.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도합한 것이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문화는 거의 멸절되었는데 특히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되었다. 다행히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한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태교 신앙을 하고 있는지의 유무여부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폴란드 등의 동유럽은 근대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같은 민족이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쉬케나지 유태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토속 유태인과의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쉬케나지 유태인을 다른 현지 유럽인들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태인의 혈통으로 나타나면 유태인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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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3
  •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 - 뿌린데로 거둔다 : 유럽은 과거 제국주의 식민지 주민들이 역습 중
    이슬람이 생겨난 이후, 파죽지세로 조로아스터교 국가였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정교 국가였던 비잔틴 제국을 밀어붙이며 영토를 확장해 이슬람 제국을 만들었고 북아프리카를 횡단하여 스페인을 정복하고 프랑스로 진출하려 했지만 투르와 프와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의 명재상 카를 마르텔에게 패배하여 확장을 멈추었던 무슬림들은 정복지 내에서 관용을 베풀어 타 종교도 인정했다. 그 대신에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세금을 걷었는데 이러한 종교인정세는 지즈야(Jizya)라고 불렸다. 무슬림들은 세금을 걷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종교활동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이슬람의 관용을 무시하고 무슬림들을 강압적으로 대하려 한 세력은 바로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유럽의 왕들과 영주, 기사들을 소집하여 성지(聖地)인 예루살렘 탈환과 같은 기독교 형제들을 이교도의 압제에서 구해야 된다고 군사들의 결집을 호소했고 1097년 성지 탈환을 위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유럽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대학살은 무려 10만이 넘는 무슬림들의 피로 요르단 강을 붉게 물들었고 이런 참혹한 상황을 보던 무슬림들은 피의 보복을 다짐한다. 이후로 이어진 십자군 전쟁에서 50만 이상의 무슬림들이 살해되었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무슬림들은 유럽 기독교 세력들을 막아내며 그들의 종교를 지켜냈다. 십자군 전쟁의 승리는 무슬림들에게 있어 지하드(聖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기독교에 대해 오스만투르크 등의 제국들이 동유럽을 정복했어도 그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 대신 세금을 걷으며 기독교를 인정해주었다. 현재 터키 땅과 동유럽의 정교회 성당, 카톨릭 성당 등이 오래 버티며 영욕의 세월을 유지해 온 것도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용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는 관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항해시대로 인해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앞세워 타 종교를 우상이고 이교도라 하여 학살하고 그들의 성상을 때려부쉈으며 아시아의 무슬림들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학살하여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동남아시아의 상당수 전통있는 모스크가 파괴된 것은 이들 유럽 기독교도들의 만행이었다. 그렇게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던 당시, 무슬림들을 박해하고 핍박했던 유럽 기독교도들이 이제는 반대로 무슬림들의 테러를 걱정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 그동안 유럽의 기독교로 점철되는 문화를 전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여 강제로 주입시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의 신성한 공간이나 성상을 우상이라 여기고 파괴하며 예수의 사랑을 공포와 파괴의 정책으로 자행했던 그들의 행위에 대해 유럽 기독교인들은 여태까지 교황님이 한번 사과한 것 외에는 단 한번도 무슬림들과 여태까지 탄압했던 타 종교들에게 사과한적 없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잘못한 부산물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있으며 난민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도 있음에 그들은 이 원인에 대해 통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과오를 모른척 하고 싶거나,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독일이 나치의 잘못에 대해 매년 사과하고 유태인들과 유럽국가들에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당했던 행위는 엄격하고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무슬림들을 공동의 적으로 만들고 그들을 축출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세속주의적인 국가들이라면 서구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지만 샤리아의 통치 개념을 가진 신정주의 국가는 동화와 공존이 불가능하다. 나는 세속주의적인 마인드라 모든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원리주의나 신정주의 마인드의 무슬림들은 중세 카톨릭 꼴통들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사실 이러한 꼴통 원리주의를 만들어 놓은 집단은 서구이다. 서구의 식민지화, 침탈, 분열로 인한 내전을 부추기게 만든다. 그러다보니 이들에게는 그 자구책으로 선전한 것이 원리주의, 근본주의였다. 기독교의 식민 종주 세력과 싸우면서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이슬람 원리주의로 흘러가 이를 한 몸으로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투쟁을 강조하고 이를 성전(聖戰)으로 규정한다. 그러니 곳곳에 테러들이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막 유목 문화와 높은 아랍 및 페르시아, 투르크 문명권의 결합은 토속문화와 문명권의 결합이라 볼 수 있는데 중동지역의 토속 문화는 씨족 중심이라 굉장히 폐쇄적이다. 환경이 그러다보니 그 고장 사람들끼리 통혼할 수밖에 없었고 근친 결혼도 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토속적 관례는 매우 철저히 지키며 다른 문화는 경계하고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면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이 그들이 종족을 유지하는 방법이고, 중동적인 관습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유럽 국민들의 세금에 빨대를 꽂고 샤리아 율법을 지키며 절대 그 유럽의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이유, 그들의 침투와 샤리아를 계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이들에게 있어서 유럽이든 어디든, 자신들의 관습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고, 타 문화, 특히 현지 문화를 터부시하며 그것 또한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성전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은 다양성과 포용성으로 세계적인 제국을 이루었기에 유럽인들조차도 선망했었고,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가장 증오하고 애증인 국가가 되었었지만 지금 무슬림들은 오스만 제국보다 수준도 떨어지고, 서방에 대한 독기 밖에 없다. 서구가 식민지화 하기 위해, 혹은 이스라엘 같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중동에 끝없이 협잡질을 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팔레스타인 전쟁, 리비아 내전, 예멘 후티 전쟁, 1~4차 중동전쟁 등,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80% 이상의 전쟁들이 죄다 서구가 개입해서 일어난 전쟁이다. 원인 제공은 서구가 했고, 그 씨앗을 옮겨 심은 것도 서구이다. 보편적 인류가치로 따진다면 더불어 사는 인류 사회에서 그 처지를 헤아려 받아줄 수 있지만 세상의 이치는 늘 보편적인 인류가치로 따지지는 않는다. 국가가 있고 국민들이 있는 이상, 국가와 국민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인류애적으로 조금씩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는 한계에 도달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치적, 정략적, 외교적인 부분에 이용되기도 한다. 우선적으로 말해서 난민이 발생하게 만든 도의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국가에서 이를 선행하여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이 든다.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 쿠르드족 문제 등 각종 문제에 미국과 서유럽이 끼어 있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집단 테러로 인한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공격에 나섰지만 장기전 끝에 쫓겨간 것은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생성된 난민이 최대 80%에 달한다. EU는 책임을 통감하고 인도주의적으로 국경을 열어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이 또한 쉽사리 감당이 안 되고 있다. 중동에서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음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냅둬야 하는데 여기저기 끼어들어 결국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만들었다. 게다가 EU에서는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할당제를 도입해 수용시키고 이를 따르지 않는 국가들에 제재도 가하기도 했다. 서구 유럽은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북중미, 남미, 태평양 군도들과 오세아니아 등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들을 착취해서 번영해 놓고 여태 사과 한 번 한적 없다. 그리고 열강들 간의 국제 정치적, 외교적 이해 문제로 자신들끼리 갈등이 빚어져 결국 자신들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이 과거에 식민지로 삼았던 사람들에게 문을 개방했고, 식민지인들이 들어오면서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서유럽에는 과거 식민지였던 주민들이 들어와 국내에서 부상해 정치권과 경제권에 진출했고 이제는 역으로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서유럽 백인 지배층들을 피지배층으로 놓고 부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과거 식민지로 부를 누리고, 지배층이었던 현지인들은 과거의 피식민계층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앞으로 영국은 인도계가 계속 총리를 먹을 것이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계가, 독일은 나미비아나 모잠비크계가 정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벨기에는 콩고계, 스페인은 물라토 등의 북중미 카리브계나 남미 메스티소들, 포르투갈은 브라질계와 서인도 및 서아프리카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계, 이탈리아는 리비아 출신 아랍계 및 베르베르인, 에티오피아 및 소말리아계 등에게 정계를 내주고 이들이 EU의 일원이 되어 유럽을 잠식해 나갈 것이다. 10년 뒤, EU 총회나 정상들 모임에 백인을 보기 힘들지도, 그나마 그 백인들이 알제리계, 터키계 등 아랍계 백인이거나 남미 히스페닉 백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EU는 그 과정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게 서구 기독교인들과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다.
    • 칼럼
    • Nova Topos
    2025-10-02
  • 중국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본, 동북아시아 중세 시대의 국제 정세
    14세기는 동아시아 전역이 혼돈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1330년경에는 제2차 선 페스트 유행(Bubonic Plague Pandemic)이 몽골에서 발생하였고, 이는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인구 대다수 및 기타 지역의 100만에 달하는 인구가 희생되었다. 1351년부터 1354년까지 3년 동안은 다른 유행성 전염병이 폭발하였다. 정부의 소금 전매와 황하를 통한 심각한 홍수에 의한 기존의 반란들은 홍건적의 난(紅巾賊의 亂, Red Turban Rebellion)을 야기했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되었지만, 원나라의 잔존 세력으로 북쪽의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의 북원(北元)과 남쪽의 운귀(雲貴) 지역 양왕(梁王) 세력 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은 몽골로부터 독립하였고, 홍건적이 평양(平壤)을 초토화시켜면서 고려가 장악한 북변 지역들을 수복하였다. 일본의 경우,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복고(建武復古)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전복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로 대체되었다. 일본 주변부에 대한 통제 약화는 왜구(倭寇)들이 고립된 섬들을 중심으로 기반을 마련하게 하였다. 특히 쓰시마(對馬), 잇키(壹岐), 고토 열도(五島列島)가 그러했다. 장사성은 1353년 난을 일으켜 그의 아우와 이백승 등 18명과 함께 원나라에 항거하여 태주를 포함한 4개 진을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 조정에서 장사성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장사성은 이를 거절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우(天祐)라 하고 자신을 성왕(誠王)이라 칭했다. 왜구들은 일본 본토뿐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까지 침략하였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반란군 지도자 주원장(朱元璋)은 예산 세원으로서 해외 무역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첫 황제 홍무제(洪武帝)로 등극하면서, 홍무 4년인 1371년 주원장은 해금령을 반포하였다. 여기에 모든 해외 무역은 공식적인 조공 사절단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조공 무역은 명나라의 대표단과 속국(Vassal state)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사 무역 종사자들은 적발되었을 경우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 가족과 이웃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홍무 17년인 1384년에는 영파(寧波), 광주(廣州), 천주(泉州)에 있던 시박제거사(市舶提擧司, Maritime Trade Intendancies)를 철폐하였다. 선박, 선창, 조선소는 파괴되었고, 항구는 바위와 소나무 말뚝으로 차단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해금은 중화 제국과 관련시키고 있지만, 세원으로서 장려하였고 특히 당(唐)나라, 송(宋)나라, 원(元)나라 시대에 중요하였던 해외 무역을 장려한 기존의 전통과는 어긋난 것이었다. 정화의 해외 원정대는 명나라 정부가 해외 교역을 독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449년 토목보의 변으로 정통제(正統帝, 훗날의 천순제天順帝)가 몽골에게 체포되면서 몽골 제국이 갑자기 급부상함에 따라 원정은 중단되었다. 큰 규모를 자랑하던 해외 사 무역으로 인해 전투용 말과 같은 물품을 명나라가 구입하려는 것에 있어 가격 경쟁을 불러왔고, 재정은 재배치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화 원정의 중단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의 중국인 교역은 지속되었다. 명나라 후기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인들이 수행한 사 무역 혹은 밀무역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만력 41년인 1613년, 명나라는 장강(長江) 남쪽과 북쪽 지방간의 해상 교역을 금지시켰다. 이를 통해 선장들이 강소성(江蘇省, 당시는 남직례성南直隸省)으로 가서 일본으로 방향을 확보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원나라의 간섭 시기에 고려는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관료를 두고 종묘와 사직을 가진 자주적인 국가로 원나라와는 구분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양국 간에 사람들의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기근이 들었을 때는 상대 국가에 구휼미를 보내주는 등 마치 하나의 국가인 것처럼 보였던 점도 있었다. 그만큼 고려와 원나라는 가까웠기 때문에 무역이 활발했다. 원나라 말기에는 장사성(張士誠)과 방국진(方國珍) 등 장강 이남의 한족 군웅 세력들이 사절을 보내 고려 국왕에게 헌상하는 개경 상인들이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무역을 하였다. 중국 동남연해 지역은 고려 사람들에게 남쪽 경계로 인식될 정도였고, 바다는 큰 통행의 장애가 아니었으며, 항상 열려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명나라의 건국 이후 고려는 반원(反元) 정책과 연계하여 즉시 사신을 보내 외교를 맺고자 하였다. 중원을 통일하지 못한 신생국인 명나라도 이에 호응하여 양국의 조공 책봉 관계가 성립되었으며 해도를 이용하여 여러 차례 사신의 왕래가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의 주원장은 장사성과 방국진 등이 해상 무역을 통해 정치 세력화했던 것을 보고 중국 해상들의 해외 무역을 금지하였다. 그 동안 고려와 중국은 서해를 이용하여 활발하게 무역을 하였는데, 갑자기 중국 상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자 무역품의 주요 소비층인 권문세족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이에 고려의 지배층은 대명 외교에 참여하여 합법적인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고려 사신의 조공을 1년 3회에서 3년 1회로 제한하고 사신들은 해도를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 때 고려에 왔던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던 중 국경 지역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명나라는 고려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민왕에 이어 즉위한 우왕을 책봉하지 않았으며 갑자기 많은 말의 조공을 요구하면서 고려를 압박하였다. 공마를 둘러싼 고려와 명나라의 갈등은 그 자체로 말 무역과 관련 것이었지만, 명나라가 고려의 처지를 알고 외교와 사행 무역을 어렵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시박(市舶)은 호시박(互市舶), 또는 번박(蕃舶)이라고도 하여, 당대(唐代) 해마다 교역 등의 목적으로 중국 포구를 찾아왔던 외국 상선들의 총칭이다. 이들 시박은 국적에 따라 남해박(南海舶, 곤륜박이라고도 하며 동남아시아 선박), 바라문박(婆羅門舶, 인도 선박), 사자국박(獅子國舶, 스리랑카 선박), 파사박(婆娑舶, 페르시아 선박) 등으로 불렸다. 시박사는 이들 외국 선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었다. 명나라는 이후에도 조공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려 사신을 해도로 입조하게 했으며, 1년에 여러 차례 오던 고려 사신을 3년에 한 차례로 제한했다. 그리고 요동으로의 고려인 출입을 금지하는 등 새로운 조치를 내놓았다. 그러한 가운데 사신의 횟수를 줄이는 것은 고려의 대외 무역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외교 무역의 기회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동에 대한 폐쇄 조치는 당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던 고려와 요양 및 심양 지역의 사 무역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모두 고려의 무역과 경제에 일정한 타격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당시 고려의 우왕은 공민왕 사후,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얻어야 했으며, 지배층들은 일반 무역 뿐 아니라 대명 외교의 악화로 인해 조공 무역마저 단절될 위기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고려는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저 최선의 성의를 보이며 명나라의 호의적 처분을 바랄 뿐이었다. 1385년에 명나라가 공민왕의 시호를 내리고 우왕을 책봉하면서 잠시 우호적인 관계가 되는 듯했으나, 고려가 공물을 줄여주도록 요청한 것을 불쾌하게 여긴 명나라가 다시 고려에게 3년에 한 번 조공하도록 하고 말의 값을 일일이 매기겠다고 통보하였다. 또한 티무르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티무르 제국 서쪽에서 명나라와 협공할 수 있는 동맹국을 찾아 떠났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정난의 변 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울러 1387년에 요동 지역을 평정한 뒤에는 철령 이북이 본래 명나라의 영토이기 때문에 요동에 속하게 한다고 통보하였다. 계속된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에 고려인들의 감정이 악화되어 마침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을 준비하고 1388년에 정벌군이 출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최영을 처형한 후 이성계를 비롯한 친명 세력이 집권하자 양국의 관계는 급속하게 회복되었다. 1389년에 공양왕이 즉위한 뒤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수세적으로 대응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해금정책으로 인해 해상들이 강소와 절강 지역에서 고려를 다닐 수 없게 되자 조공외교와 그에 수반되는 사행 무역을 통해 보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유난히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사행 무역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명나라의 비난을 받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무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 상황에서 사행시에 많은 물품을 교역하여 귀국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고려의 무역 양상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예성강의 항구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조운선과 상선이 모이는 항구였기 때문에 중국 해상들이 편리하게 무역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중국의 상선들이 고려에 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고려 사람들은 서북면 지역에서 국경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중국 해상의 왕래가 끊기게 되면서 고려 건국 이후 400여 년 간 대 중국 무역 중심지였던 예성강 항구는 국내 항구로 위상이 떨어지고, 대신 서북면 변경지역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상 무역이 쇠퇴하고 육로무역이 흥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왕조 교체 시기에 고려와 국경을 접한 중국 요동과 심양 지역은 홍건적과의 전쟁, 덕흥군의 침입 등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명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지 못해 나하추(納哈出) 등 지역 토호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물산을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서북면 지역의 부호들과 상인들은 중국의 혼란과 고려의 약화된 통제력을 이용해 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에 고려는 공양왕 시대에 들어서면서 관리를 보내 불법적인 무역을 강력히 단속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중국에서 들어온 사치품을 사용하지 말도록 권장하였다. 이처럼 명나라의 해금정책과 고려의 국경 무역 금지로 인해 고려가 멸망되던 시대에는 중국과의 해상무역이 중단되고, 국경 지역의 육로 무역마저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사행 무역만이 합법적인 무역으로 남게 되었다. 바다가 막힌데 이어 육상의 국경 무역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금은 해적에 대항하여 국가가 수립한 방어책의 결과라고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막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시행되었기에, 다른 설명들이 제시 되어 왔다. 그에 대한 첫 번째 주장이 명나라가 중국 물품에 대한 일본의 필요성을 이용하여 일본을 항복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홍무제는 외국이 중국 백성을 규합하여 자신의 통치에 도전할 것을 막고자 해금을 고안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무제는 스리비자야 왕국(Srivijaya kingdom)의 간첩 행위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교역을 금지시켰다. 교역을 활용하는 것은 외국 정부들이 조공 체제를 준수하고 비협조적인 통치자들을 압박하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금의 유출을 금지한 송나라와 원나라의 정책과의 유사점으로 인해, 일부에서는 홍무제가 칙령을 통한 통화 발행을 지키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홍무제의 정책 시행은 1450년까지 지속되었다. 1425년에는 위조 동전이 만연했으며 고 인플레이션으로 성장하면서 사람들이 원래 가치의 0.014%로만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주장으로는 유교적 인(仁)의 통치를 고취하고 대외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욕심을 제거하려는 홍무제의 의지가 생성된 부작용으로 보여 진다. 혹은 중앙 조정을 위하여 남방 백성들을 약화시키려는 계책이었다고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무제가 북원의 잔존 세력들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것을 우선시하였으며 해금령과 지방관들을 남겨두고 이에 관한 자신의 언급을 조훈(祖訓, Ancestral Injunctions)으로 남겨두어 이어나가게 한 것은 사실이다. 10년 후, 조공 사절단이 오로지 선박 2척만 끌고 올 수 있는 법안이 입안되었고, 해금은 선한 행동을 한 국가들에 대한 보상과 일본 정권이 밀 무역 자들과 해적을 근절하도록 하는 유인책으로 볼 때 이는 지나치게 적은 것을 제공한 셈이다. 무로마치 막부에게 자신의 군대가 일본의 도적들을 생포하고 전멸시키며 곧바로 일본으로 진격하여 일본 국왕을 감금시키겠다는 홍무제의 전언에 대해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대국이 일본을 침범할 수 있어도 일본이 이를 막아낼 수 있는 책략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해금이 명나라 군으로 하여금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없애고 변경을 안정화하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지방 자원들을 묶어 두었다. 74개 연안 수비대는 광동 광주에서 산동(山東)에까지 이르러 설치되었다. 이는 영락(永樂) 연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전초 기지들은 이론적으로 11만 명의 백성들이 필요로 했다. 이처럼 교역 세 수입의 상실은 만성적인 자금난을 야기했다. 특히 절강(浙江)과 복건(福建) 지역이 그러했다. 중국과 일본의 연안 지역을 빈곤에 노출시키고 정권에 반발하게 하는 방식으로 명나라가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천명한 문제를 오히려 확대시키게 된다. 특히 정몽주(鄭夢周, 1338~1392)와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1326~1420?)는 최초로 왜구들과 단독으로 상대하였다. 이마가와는 노획물과 노예들을 한반도로 돌려보냈다. 1405년,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20명 이상의 왜구들을 중국에 해송하였는데, 이들은 영파에서 산 채로 가마솥에 삶아졌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침략이 계속되면서 가정(嘉靖) 연간에 가장 강력하였다. 16세기,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 Jiajing wokou raids) 시기 ‘왜구’와 ‘동이(東夷)’는 대부분 일본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무제는 조훈을 통해 해금을 내렸기 때문에, 이후 명나라 시대 대부분은 대체로 철저히 준수되었다. 17~18세기,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통하여 남방의 농토와 북방의 전장이 연결되었다. 이러한 뇌물 수수와 무관심은 지방관의 재량권을 확대하여, 포르투갈 인들이 1517년 페르낭 피르스 드 안드라드(Fernão Pires de Andrade)가 광서를 방문했고, 쌍서(雙嶼, 포르투갈 사료에서는 ‘영파’를 음역한 Liampo), 천주(泉州, 포르투갈 스페인 사료에서는 Chincheu)에서 교역하기 시작하였지만, 단속 역시 심하여, 1520년대 포르투갈 인들의 추방령이 내려졌다. 1547년 절강성 영파와 복건 장주(漳州) 앞 바다 섬들, 1549년 복건 장주 월항(月港)에서 밀무역을 수행하던 포르투갈인들 역시 추방되었다. 1557년 포르투갈 인들은 마카오 정착을 인가받았지만, 중국을 도와 해적을 압박한 지 몇 년 뒤에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금은 초기에 강요할 수 없었고 제대로 시행된 적도 없었다. 지방관들도 밀무역에 자주 종사하였고 교역 제한 칙령을 무시하기도 하였다. 군관들은 교역 거래를 중개 해주었고 연안 지역 유력 가문들도 교역 수익에 의존했다. 평민들도 교역 관련 산업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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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2
  •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 유통국의 오명을 벗은 아프가니스탄
    아편(Opium)은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서 채취되는 마약으로, 강한 마취, 진통, 진정, 최면, 해열, 기침을 멎게 하면서 지사 작용까지 가능한 의약용의 성분이 있다. 이 아편의 기록은 고대 수메르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감기에 증상이 심한 사람은 열과 기침이 동반하면서 몸살 증상을 보이게 될 때, 아편은 해열, 진통 작용과 더불어 기침을 멎게 하는 진해 작용까지 하고 있으니 이 모든 감기 증상들이 쉽게 낫는다는 장점이 있다. 배탈이 난 사람의 경우에는 설사와 복통을 겪게 되는데 아편은 지사와 진통 작용을 하게 되니 배탈의 증상은 곧바로 사라지게 된다. 그 외에도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있어서도 진통 작용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에게는 최면 진정 작용을 하니 아편 하나로 온갖 증상에 대응할 수 있는 효능이 있었던 의약이었다. 이처럼 효용성이 아주 높고 극소량으로도 큰 효과를 보게 되니 전근대 사회에서 아편은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에 가까울 정도였다. 문제는 아편이 아주 강한 효과 이상으로 강한 부작용을 지녔으며 각성 효과 강력하여 중독성도 매우 강한 마약이자 순간독성(Acute Toxicity)이 아주 강한 극약이기도 하다. 아편에 함유된 모르핀, 코데인, 테바인 등의 성분은 뇌의 오피오이드 수용체(opioid receptors)에 작용해 강한 쾌감과 고통의 완전한 상실을 일으키는 강력한 마약의 특성을 지닌다. 양귀비는 일반적으로 시원하고 습하지만 잘 배수가 되는 환경에서는 어디든 재배될 수 있으며 인도 아삼 지역은 매우 습하고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로 인해 수량이 풍부한 곳이라 예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아편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그 외에도 메콩 강 일대의 미얀마, 태국, 중국 국경이 삼각으로 겹치는 "골든 트라이앵글",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인 카슈미르, 아프카니스탄의 힌두쿠시 산악 지대와,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 일대는 매우 시원하고 수량이 넘치며 땅이 습하고 촉촉한 특징을 갖고 있어 양귀비를 재배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이러한 조건들이 아주 잘 맞는 국가로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으로 악명이 높다. 전 세계에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아편의 약 80%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공급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을 당시 미국도 이곳의 아편을 이용했었고, 탈레반도 아편을 주고 신형 무기를 사서 미국에 저항했다. 1991년 미 국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CIA 비밀작전이 이 지역을 '독립적인 아편 지대에서 세계 시장을 위한 헤로인의 주요 공급처'로 변화시켰다(CIA covert operations in Afghanistan transformed the region from an independent opium belt into a major supplier of heroin for the world market)."고 하여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미국이 2004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마약사업 퇴치에 90억 달러를 썼지만 양귀비 재배가 증가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201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아편 생산으로 12억~21억 달러로 GDP의 최대 11%를 차지하며 엄청난 수익을 획득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아편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농부들은 아편 양귀비를 저위험-고수익 농작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편은 오래 보관할 수 있고 키우는 것도 쉽기 때문에 기존의 다른 농산물보다 큰 돈을 만질 수 있다. 또한 아편 유통은 밀수업자 네트워크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경 폐쇄됐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편이 원래 음지에서 거래되는 것으로 볼 때 아직도 많은 아편 농장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미 군정기 때부터 단속해야 할 현지 아프가니스탄 군경들도 많은 수가 아편 판매와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이 뇌물도을받고 단속도 적절히 무마시키며 겉으로는 밀이나 다른 곡물을 심었다. 그리고 잘 안 보이는 험난한 곳에는 양귀비를 키우며 암흑의 판매처도 늘어가고 있다. 미국이 지배했던 당시, 국제 안보 지원군이 주둔했을 때 탈레반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지원했던 돈들은 아편 단속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돈의 대부분은 부패한 아프가니스탄 민주 정부에 의해 횡령되어 극히 일부 공무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게다가 단속 수준도 뇌물 상납이 어려운 가난한 집안과 가장을 잃고 양귀비 재배로 벌어먹는 집안의 밭을 급습해 무작정 양귀비를 베어 버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이와 같은 마약 단속에 대해 현지인들의 증오심이 높아졌고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 2009년에는 마약 단속 경찰 트럭이 양귀비 밭에 몰래 숨겨 놓은 지뢰로 인해 폭발하여 23명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으며 아예 탈레반에 가담하는 자들까지 생겨나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민주 정부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이는 그들에게 아편을 대신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정책을 동시에 펼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점령국이었던 미국은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양귀비의 효용성이 마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주식인 빵, 식용유, 비누 같은 물품들을 구하기 어려운 시골이 많다. 따라서 양귀비 꽃은 거의 생필품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양귀비의 꽃잎은 잼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씨앗은 갈아 빵을 만들거나 식용유를 짰으며, 마약을 추출하고 남은 줄기는 말려서 장작으로 쓴 다음, 양귀비 꽃 줄기 재로 비누를 만들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병원들은 의약품이 거의 없어 열악한 상황에 아편을 비상약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가난한 국가들에서 매우 흔한 일인데 한국도 휴전 이후 50~60년대에 병원 갈 돈도 없고 병원 가기도 힘든 시골에서 몰래 양귀비 꽃을 심어 아편을 추출해 극소량을 약 대신 쓰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국민 1/3이 열악한 의료 실태 때문에 마약을 진통제로 쓰고 있다. 현재도 양귀비를 비밀리에 경작하는 것이 90% 이상 도서 및 농촌 지역 60대 이상 노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찰들도 이를 무작정 잡을 수 없어 규모가 큰 곳만 본보기로 색출하는 형편에 있다. 이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민주 정권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단독 정권이 되었고, 2022년 양귀비 재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리고 2023년과 2024년 아편 재배에 대한 근절이 가속화 되면서 아편 밭이 대대적으로 불태워지는 등 경지 정리를 하고 있는 편이다. 이에 UN 마약범죄사무소(UNODC)에서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마약 재배 및 생산이 90% 이상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기존 비축분으로 인해 마약 밀매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은 상황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집권 세력인 탈레반이 '불법 마약 근절'을 선언하며 양귀비 재배를 금지하면서 이마저도 점점 줄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동남아시아의 미얀마에서는 내전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양귀비 생산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이 됐다. 양귀비 재배 면적이 지난해 47,100㏊(헥타르·10,000㎡)에서 올해 45,200㏊로 약 4% 감소했지만 골든 트라이앵글과 반군이 장악한 샨 주는 여전히 재배 면적의 88%를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로 나타나고 있다. 미얀마의 아편은 양귀비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들며, 이를 다시 가공하면 헤로인이 되어 전 세계의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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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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