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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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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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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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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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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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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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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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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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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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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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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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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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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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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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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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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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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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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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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 스비아토슬라프는 942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이고르 대공과 올가 대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올가 대공은 52세에 스비아토슬라브를 낳았다. 스비아토슬라프가 3세 때인 945년에 아버지 이고르 대공은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스비아토슬라브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살해한 드레블리예 부족들과 전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주변 신하들이 스비아토슬라프를 말 위에 앉히면 그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영토 방향으로 창을 던지곤 했다. 창은 당연히 말 아래로 떨어졌지만 부친을 살해했던 원수를 향한 복수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고작 4세였다. 소년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스비아토슬라프는 슬라브에서 가장 출중한 장수로 성장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된 사실은 연대기 작가가 묘사한 그의 행적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막을 치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야전에서 말안장을 머리에 베고 얇은 천 조각 하나 걸치고 잘 뿐이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거의 대부분 날고기만 먹었고, 물은 냇가에서 마셨다. 그는 진정한 장수였다. 상대방과 전투를 치를 때도 절대 기습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사신을 보내 ‘한판 붙자’는 전갈을 보내고 전투를 시작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마치 표범처럼 빠르게 달렸다. 덥거나 춥거나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친인 올가 대공이 세례를 받으러 콘스탄티노플로 갔을 때 스비아토슬라프가 이를 동행했는데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설명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표현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키는 그리 크지 않은 중간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의 인상은 강했다. 가슴은 딱 벌어져 넓었고 목은 굵었으며, 눈은 하늘색이었다. 눈썹은 진했고, 코는 평편하고 낮았다. 콧수염은 무척 길었으나 구레나룻은 거의 없었다. 머리 스타일은 변발을 하고 있었다. 변발은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진주와 루비가 달린 금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을 다녀온 직후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서부 우크라이나 슬라브 계통의 민족들과 일부 마자르 족은 스비아토슬라프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직접 서부 슬라브 인들과 마자르 족에게 가서는 거짓 평화조약을 제시하고 그들을 자신의 진중에 초대했다. 그리고 연회를 베풀어 슬라브와 마자르의 귀족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이어 서부 우크라이나 백성들과 마자르족에 대해서도 화해의 표시를 보내 안심시켜 놓고 공격하여 약 7,000명을 살해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전형적인 무사형 군주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는 흔히 코사크의 대장이나 바이킹 선장에 비유되고 있는데 확실히 그의 풍모와 복장 · 습관에는 초원지대의 코사크족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러시아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정을 다닐 때 그는 마차도 솥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어떤 고기도 삶아먹지 않았다. 오로지 말이나 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길쭉하게 베어내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또한 천막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다만 안장깔개를 펼쳐 깔고 안장을 머리 밑에 괴면 그만이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962년 즉위하자마자 키예프 공국을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정복하며 키예프의 국가안보를 지켜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군사 원정은 964년에 본격화 되었다. 대규모 동방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키예프의 동쪽으로 진격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동슬라브 계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핀족과 투르크 계통 민족들을 자신의 왕국으로 복속시켰다. 당시 이슬람교를 숭배하고 있던 볼가 강 유역의 볼고 불가르를 정복하고 키예프 공국보다 먼저 지난 세기에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교를 숭상하는 국가인 하자르 제국을 공격했다. ‘하자르인의 국가’라는 뜻의 하자르의 수도 이틸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스비아토슬라프는 3년 만에 키예프로 돌아와 연로한 모친인 올가와 그의 세 아들을 만나면서 잠시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965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하자르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온 동슬라브의 비아티치(Biatichy) 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오카(Oka) 강변의 마자르 계 부족들을 정복한 후, 볼가 강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 페체네그를 공략하고 우랄 강 인근까지 약탈했다. 페체네그를 제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다시 하자르 제국을 향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스비아토슬라브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어 벌어진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의 군사는 하자르의 군대를 격퇴했다. 하자르 제국의 수도 이틸을 다시 한 번 유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카스피 해 서쪽으로 내려가 사만다르(Samandar) 요새를 파괴하고 그곳에서 다시 서진하여 알란 인과 카프카스의 몇몇 부족을 정복한 다음 다시 돈 강 어귀에 있던 하자르 제국의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하자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만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공격으로 하자르 제국이 쇠퇴했다는 것은 키예프 공국이 지역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시아계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주던 하자르 제국의 완충 역할이 종결됨으로써 키예프 공국이 직접 그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는 부정적 의미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의 동방원정으로 인하여 동슬라브 족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던 돈 강과 볼가 강 유역 전체가 키예프 공국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동방 원정을 끝낸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방 원정에 착수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서방 원정을 시작한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Pokas)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968년 제1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이웃 나라인 키예프 공국의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면 제국의 금을 보상금으로 주겠음을 제안했다. 황제의 제안을 수락한 스비아토슬라프는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해 군사적 성과를 올렸다. 제1 불가리아 제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 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다뉴브 강 유역에 진출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의 다뉴브 평원을 정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지역을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불가리아는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는 황금과 비단, 포도주와 각종 과일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는 은과 말이, 러시아로부터는 모피와 밀랍과 꿀과 노예들이 들어오는 집결지였다. 그러한 경제적인 부분에서 풍요를 직감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다뉴브 강 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려고 하였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평소에도 “키예프에 남아 있기보다는 다뉴브 강에 있는 페레야슬라베츠(Pereyaslabech)에 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가 자신의 왕국인 키예프 공국의 중심이라는 말도 함께했다. 하지만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를 장기간 비워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가 키예프를 비운 사이에 아시아계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 인들이 키예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키예프로 퇴각했다. 그곳에는 연로한 어머니 올가와 어린 세 아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적인 페체네그의 침공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불가리아보다 더 위협적인 스비아토슬라프가 발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은 비잔틴 제국의 전략적인 외교의 힘이기도 했다.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전략은 2,000여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비결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페체네그를 격퇴한 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주변에 또 다른 강대국이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의 키예프 공국이 다뉴브 강 유역으로 대규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제는 키예프 군대를 기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산맥을 넘어 침공한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격퇴했고 이를 추격하여 발칸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몰아붙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병참선이 끊길 뿐 아니라 후방 역습의 위험에 처한 스비아토슬라프는 급히 다뉴브 강으로 후퇴했고 이어 플로이에슈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협상을 제의했고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과 크림 반도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비잔틴 제국에 굴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과의 교역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으로써 키예프로 퇴각해야 했다. 6만 대군 중 비잔틴 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여 군사만을 데리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스비아토슬라프는 페체네그 인의 기습을 받았다. 이 때 전투에서 키예프 군대는 거의 전멸되고 스비아토슬라프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승리의 환호감에 젖은 페체네그 인들이 스비아토슬라프의 머리를 베어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에 금을 씌워 술잔을 만든 후에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비아토슬라프의 용맹함과 지혜가 자신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사망한 972년부터 980년까지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공석에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대공 지위에 올랐고 이 때부터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000년, 새 천년들어 폴란드에서 슬라브족 전체에 있어 가장 위대한 위인 100인을 선정하였는데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극도로 증오한 폴란드였지만 슬라브족 전체로 봤을 때,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남긴 슬라브족 통합과 단합의 위대함은 인정했던 것이다. 스비아토슬라프 1세는 모든 슬라브족의 영웅이자 정복군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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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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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 베링해협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베링해협은 아시아 측에는 러시아령, 북아메리카 측은 미국령이다. 이 해협의 해저 대륙붕은 깊이가 35~50m 정도로 매우 얕은 편이고, 최단거리 해협은 85km에 달한다. 바다를 기준으로 보면 베링 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북극해, 남쪽으로는 태평양 사이의 해협이다. 대륙과 대륙 사이로 놓여있지만 지질학적으로 볼 때 매우 안정된 지역이다. 판과 판의 기준으로 볼 때, 베르호얀스크 산맥 동쪽의 러시아 극동은 북아메리카와 같은 판에 속하기에 남쪽 캄차트카와 알류샨 일대와 다르다. 참고로 해당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기에 화산과 지진이 잦다. 그러나 베링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벗어나 있어 매우 안정적인 지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해협의 수면 깊이가 얕으며 해수면이 가장 낮았을 시기에는 육지가 드러나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되었던 적이 있었다. 베링 해협의 이름은 러시아 해군에 고용되어 이 바다를 탐사하여 첫 발견한 덴마크의 항해사 비투스 베링의 이름을 차용했다. 베링 해협은 미국과 러시아의 경계이며 베링 해협 한 가운데에 있는 다이오메드 제도의 서쪽에 있는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 영토이고, 동쪽에 있는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미국 영토다. 참고로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어로 라트마노바(Ратманова)라고 불린다. 비록 두 섬 사이의 거리는 3.7km 밖에 되지 않지만, 두 섬 사이로 날짜변경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시차는 무려 21시간 차이가 나는 특이한 지역이다. 두 섬의 영토가 갈라진 것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할 때 이 섬의 중간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라트마노바 섬은 무인도이지만 미국령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사람이 살고 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스몰 다이오메드 섬에는 83명이 거주하는데, 주로 이누이트족이 거주하고 있고 경제는 어업과 상아 가공이다. 냉전 시기에 두 섬 사이를 두고 ‘얼음 장막’(Ice Curtain)이 쳐졌다. 소련과 미국은 두 섬을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물론 촬영하는 것조차 금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링 해협은 태평양과 북극해를 분류하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이다. 게다가 세계 군사력 1, 2위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마주하는 해협이기 때문에 정치,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에 속한다. 만약 러시아 제국 시절에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지 않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다 해도 이 해협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북극항로가 개통되고 있는 현재, 그 중요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최근 키릴 드미트리예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 러시아 대통령 국제 경제 협력 특별 대표이자 러시아 직접 투자 펀드 대표가 러시아와 미국을 연결하는 베링 해협 해저에 110km 길이의 '푸틴-트럼프 터널' 건설을 제안하고 나섰다. 드미트리예프의 주장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는 80억 달러의 비용으로 8년도 채 안 되어 완료될 수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예산의 1/8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만약에 완공된다면 이 터널은 철도와 화물 운송 노선을 갖추어 공동 자원 개발과 러시아-미국 경제 연결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드미트리예프에 의하면 베링 터널은 아시아 횡단 철도 노선을 북아메리카와 직접 연결할 수 있게 하여 전례 없는 아시아-유럽-미국 운송 회랑을 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맞는 말이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은 또한 특히 북극 지역의 에너지 및 광물 분야에서 공동 자원 개발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지난 8월 15일 러시아-미국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나타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공동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양국이 연결된 인프라에 공동 투자할 때 일자리를 창출하고 양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며 침체기에 빠져 있는 미국 경제도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저터널의 이야기는 이번에 언급한 드미트리예프가 처음으로 주장하는 얘기가 아니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 프로젝트는 인류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발전의 궤를 같이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보다 베링 해협을 통해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시키자는 구상은 1869년대 미국의 에이브러함 링컨 전 대통령 행정부 당시에 미국이 먼저했고, 러시아는 1905년 니콜라이 2세 차르 때 구상했다. 그 사이 1890년 콜로라도 준주의 주지사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은 그의 논문에서 베링 해협을 거쳐 전 세계를 연결하는 코스모폴리탄 철도(Cosmopolitan Railway)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2년 후, 미국의 건축공학자인 조지프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가 베링 해협에 철교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제국에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04년 미국 철도 신디케이트(Syndicate)가 같은 제안을 러시아에 타진했고, 러시아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고심끝에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제국 내 혁명 기운이 고조되면서 이같은 사업은 무산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논의되지 않다가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21세기 들어 중국에서 고속철도를 미국까지 연결하자는 제안이 2014년에 제기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는 중국이 러시아, 미국, 캐나다를 한 번에 연결하자는 것이다. 또한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도 비슷한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널 공법이 발전했고, 영국-프랑스가 도버 해협을 뜷었듯이 베링 해협 또한 터널을 뚫어 연결하자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된다. 베링 해협의 최고 깊이는 55m로 영국-프랑스의 도버 해협 174m보다 깊지 않다. 영국과 프랑 스사이에 건설된 유로 터널은 해저 구간만 38km다. 물론 베링해에 터널을 뚫는다면 그보다 두 배는 더 길다. 하지만 툰트라 지역의 교통 여건과 수요 등이 비용을 상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러시아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이 구상은 아직까지 주장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국제 인프라 건설은 공사 자금이 막대하고, 공사의 구상에 착공에서 완공까지 공사 기간이 길다. 더불어 거대한 공사에 따르는 공해 문제, 도시 문제, 문화 오염, 환경 파괴, 기상 문제 같은 것은 당연히 거론된다. 더불어 기술 문제와 건설 후의 경제성 등 정치, 외교, 안보, 군사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만큼 이 공사는 세계 다극화의 각각 한 축을 맡고 있는 초강대국끼리의 국제적 공사다. 더구나 베링 해협의 터널 사업은 북극해 개발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혹독한 기후 여건과 자연 환경, 기후 변화, 기술, 자금 조달, 각 국의 전략 간의 조화와 충돌 및 정치, 외교적인 갈등 등 온갖 현안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베링 해협 해저 터널 건설에 대한 국제적인 공론화는 이미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이와 같은 모든 제한은 인류 사회와 역사적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21세기 신(新) 글로벌 시대로 진행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 파급 효과는 직, 간접적으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아메리카, 유럽, 동아시아 3대 거대 경제권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직접적인 물류의 증가 뿐 아니라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 개발과 연해주 개발, 알래스카 개발, 북부 캐나다 북극해 지역에 대한 개발 또한 이루어져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될 것이다. 러시아는 2011년 8월, 650억 달러짜리 TKM-세계연결터널(TKM-World Link tunnel) 건설 구상을 발표하였고, 이러한 구상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연결을 위해 베링 해 중간의 양쪽 다이오메드 섬 간의 인프라 건설을 포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시베리아, 캐나다 북극, 알래스카 지역의 광범위한 개발도 포함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의 건설은 북극항로의 개발을 촉진할 것으로 보아며 유라시아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포함하는 유르아메리아시아(Eur-Ameri-Aasia)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개념까지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국 또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와 연계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트럼프가 추진하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보다 여기가 훨씬 노다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게다가 우리는 기술이 좋고, 유라시아 터키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해협 해저에 터널을 연결한 경험이 있다. 우리의 경험과 기술은 이곳 터널 건설의 수주를 따내기만 한다면 세계 물류의 주역으로써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간접적으로 북극항로에 대한 우리의 지분도 살짝 걸쳐 놓을 수 있으니 트럼프를 통해 이 사업권의 수주를 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3,500억 중, 2,000억 불을 생째로 뜯기는 것에 대한 댓가로 이 사업을 잡으면 반강제로 뜯기다시피한 2,000억 불은 충분히 상쇄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구상 자체가 우리 정부한테는 없다는 것에 있다. 국가가 번영하고, 국익을 챙기고 돈 벌 구석은 찾아 보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험을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탄식이 나올 정도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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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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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 지난 11월 7일,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의 그간 있었던 외교적 현안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기자는 일본의 다카이치 새 정부가 1945년 8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사할린의 미즈호 마을에서 한국인, 즉 정확히 말해 고려인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등의 전쟁 범죄 사실을 규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당국의 범죄에 대해서는 잊은 채 러시아와 북한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자하로바 대변인은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게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역사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행한 악행들을 그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해 왔다고 답했다. 우선 러시아는 전쟁에서 몰렸을 때 일본의 이와 같은 보복주의적인 정책이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야만적인 팽창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접 국가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점을 주기적으로 강조해왔다고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본 측이 사할린과 쿠릴 열도 남부 지역의 상륙 작전을 진행하던 중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증거로 보이지 못하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 국민들에 대해 소련 정부의 행동이 가혹했다며 비난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은 이러한 비난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고 했더. 일본 정부는 항복 이후에도 공소시효가 없는 전쟁 범죄들을 계속 저질러왔다며 이와 관련해 러시아 당국은 이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2021년부터 러시아는 사할린 미즈호 마을(현재의 포자르스코예 Пожарское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문서들을 단계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일본 제국에 속했던 사할린 남부 지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그 절정이 1945년 8월의 학살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군 전역자들을 포함한 가해자들이 “소련군에 동조했다”는 구실로 27명의 조선인 주민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희생자 중에는 6명의 어린이가 있었으며, 그 중 1명은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다. 이 사건에 대해 사할린에서 자행된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소련이 수집한 비공개 문서들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라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그동안 벌였던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를 고의로 훼손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베했다. 사할린 미즈호는 일본이 러시아 남부 사할린 지역에서 실시한 식민 정책으로 형성된 전형적 농촌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약 250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10여 명의 조선인도 일본인의 차별과 감시 속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에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게 되자, 조선인들은 소련군에 협조한다는 소문을 공유하게 된다. 드디어 남사할린 마오카(眞岡) 지역에 소련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궁지에 몰렸다. 마오카는 일본인 주민들이 본토로 피난하기 위해 배를 탈 항구였다. 미즈호 마을은 마오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다. 미즈호는 8월 21일부터 일본인 주민들이 피난하면서 마을은 거의 비어 있게 된다. 다만 일본 재향군인회 관계자들의 지시를 받은 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청년단 남성들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군에 협조한 조선인들이 스파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는 소문을 믿고, 함께 생활했던 마을의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임시로 노동 등을 목적으로 마을 주변에 머물렀던 조선인 모두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8월 20일 아침부터 25일까지 조선인 약 35명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나누어 몰래 매장하였는데, 이 때 여성 3명과 젖먹이를 포함한 6명의 어린이도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오카 항구가 점령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들이 마을로 되돌아왔고, 살해 가담자들 또한 마을을 탈출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하지만 1946년 여름 이후, 소련 군 당국이 사할린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사건의 전모와 살해 가담자들을 모두 밝혀내게 된다. 이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18명 중에 7명은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고, 11명에게는 10년 형과 더불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형이 집행되었다. 일본이 이처럼 학살을 진행한 이유는 전쟁에서 패배한 분풀이도 있었을 것이고, 그동안 벌인 갖은 전쟁 범죄에 대해 증인들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조선인들이 곧 진주할 소련군을 도와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것을 우려했다. 이와 같은 판단으로 인해 일본군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마을에 살던 젊은이와 노인은 물론 여성과 갓난아기까지 도륙했던 것인데 당시 소련의 방첩 기관은 61세의 농민인 윤양원씨의 증언을 확보했다. 윤양원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친구 채정환이 사는 미즈호 마을로 소를 사러 갔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지난 8월 친구가 살해당했다’고 고백했다. 8월 러시아인들이 상륙했을 때 일본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즈호 마을의 모든 조선인들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 국가안보부 유즈노 사할린스크 담당 수사관의 심문 기록도 존재한다. 한 조선인 여성은 이 때 당시 조사에서 8월 21일인가? 22일에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경찰관이었던 이시다라는 인물이 조선인들을 한 곳에 모아 모두 30명 가까이 죽였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사할린에서 역사 교사로 일했던 콘스탄틴 가포넨코(Константин Гапоненко)는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 문서에 근거하여 이 학살 사건을 책으로 저술했다. 가포넨코는 당시 수사와 재판 기록에 그 기반을 두고, 이 사건이 일본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일본인들과 일본군들이 평화로운 조선인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자행한 극도로 잔인한 만행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2008년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낸 바 있어 그 정황들을 참조할 수 있다. 문제는 사할린에서 미즈호에만 이러한 만행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12년 8월 14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현 우골레고르스Углегорск) 지역에 조선인이 10,229명 정도가 살았지만, 전쟁 후에는 5,332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인구가 50%가량 감소한 것이다. 당시 소련 측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의 이유로 소련군의 진주로 인한 피난 및 고국 귀환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군인들의 학살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2012년 11월에는 매우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우골레고르스크 지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본군이 누군가를 죽였다카더라' 라는 막연한 카더라식의 증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012년 11월 증언 때처럼 목격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 정황을 직접 들은 증언이 확보된 것은 처음이었다고 국가기록원이 밝혔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사할린에 거주하는 황순영(당시 78세, 여성)씨는 11살이던 1945년 여름 에스토루에 살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황순영씨는 이모부 내외가 에스토루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20일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을 끌어내 뾰족한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순영씨는 그 때 임신 중이었던 이모가 3살 아들과 함께 숨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이후에는 땅굴을 파고 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어 전쟁이 끝난 뒤에 이모는 땅에 묻힌 남편과 시동생을 파내 초상을 치렀는데, 그 때 어머니가 다녀오셨다고 회상했다. 1945년 8월 당시 5살이었던 이태엽(2012년 당시 나이 72세)씨는 나중에 이웃으로부터 들은 또 다른 이웃집 부자의 사연을 증언했다.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이태엽씨는 이웃에 살았던 최씨가 말해줬는데, 에스토루에서 강씨와 부인, 아들 둘로 구성된 일가족 중 강씨와 큰 아들이 일본군에 살해당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엽씨는 당시 일본군이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죽창을 만들라고 하여 최씨는 죽창을 만들러 갔지만, 강씨는 다리가 불편한 큰 아들을 돌봐야 하여 못 간다고 버티다가 일본군이 착검한 칼에 찔려 죽었고, 큰 아들은 거기에 항의하다 함께 죽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밝혀지고 있는 정황으로 볼 때 그동안 알려진 2개의 학살사건 이 외에도 사할린 전역에 전쟁으로 인한 학살 사건 등이 난무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일본의 패전 사이에 피난과 해방, 그리고 고국으로의 귀향을 바라고 있던 사할린 조선인들에게 있어 매우 끔찍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포로나이스크 시(Поронайск, 舊 카마시스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은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약 288Km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도 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공터에는 김경순 여사가 세운 “통한의 비”라는 것이 존재한다. 1945년 8월 17일, 부친 김경백(당시 54세)와 오빠 김정대(당시 19세)가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8일 경찰서에서 다른 조선인 16명과 함께 살해당하고 경찰서까지 불태워진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해당 비석을 세운 것이다. 카미시스카 지역은 북위 50 근처 소련과의 국경에 인접해 있고, 일본군 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던 군사지역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또한 오지(王子) 제지의 제지공장과 6개의 주요 탄광도 위치하고 있던 산업과 군사적인 면에서 사할린에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필히 수호해야 할 도시였다. 특히 1940년대 이후 철도의 연장 공사와 더불어 도로, 비행장 건설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고 동원 이전부터 농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었다. 물론 소련에서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본의 감시를 수행했던 조선인 앞잡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났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더불어 전투기와 탱크들을 앞세우고 남부 사할린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최북단 군사도시였던 카미시스카 지역은 아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8월 17일 일본인에 대한 소개(疏開)를 결정되면서 주민들에 대한 대피와 모든 주요 시설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에 대한 소개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며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고 소련의 스파이다. 그래서 침공해 온 소련군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올 오해였다. 당시 소련군 중에 몽골계 혹은 부리야트계 병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인과 외모가 흡사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오해로 인해 일본인들의 의심과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문만으로 경찰과 헌병들이 나서서 그와 같은 학살을 저질렀을지는 현재에도 의문이다. 긴급하게 피난할 상황에서 유독 조선인들, 그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유랑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고 감시했던 조선인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안 심리에 기인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카미시스카 지역이 사할린 주둔 일본 군사 지역이라는 점과 군사 시설 건설 및 이와 관련된 조선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볼 때 군사적인 보안 측면에서 이 또한 소개령으로 보고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병과 경찰이 개입된 점으로 볼 때 조직적인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미시스카 지역에서의 학살은 여러 증언들이 존재한다.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산모가 물을 길러간 남편이 오지 않아 찾으러 나가 보니 남편의 목이 잘려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증언도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한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방화도 저질렀는데, 22개의 공장, 22개의 호텔, 병원, 극장, 이발소, 세탁소, 사진관, 신사, 일반 주택 등이 화재들로 인해 소실되었다. 2025년 8월, 비극적인 학살 사건들의 80주년을 맞이하여 사할린 현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 또한 1946년 7월 19일자 시신 발굴 관련된 문서들과 1946년 7월 21일자 현장 조사 보고서를 포함한 여러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 자료들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학살의 장면들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범죄를 밝혀내고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 천명했다. 다카이치는 중국에 이어 러시아도 자극했다. 그러나 다카이치 정부의 이런 식의 자극은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사할린에서 일본에 보내지고 있는 가스와 원유를 끊게 되면 일본은 비싼 돈을 들여 미국으로부터 액화 가스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본의 경기는 더 나빠질 것이고, 결국 다카이치 또한 이시바 시게루 이전의 총리들처럼 총리 자리를 내놓아야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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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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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 우크라이나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은 대체로 지난 6월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동원 병력들이 대기소로 사용되는 극동 철도 공장 물류 센터에서 동원 대상자들이 사실상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영상에는 일부 강제 동원 대기자들이 군사위원회 징병관들에게 고함치며 화를 내고 대들다가 문을 바리케이드로 막은 다음, 몽동이로 무장하고 탈출하자며 선동했다. 하지만 나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온 우크라이나의 군 특수부대와 경찰의 강력한 곤봉 진압으로 인해 이들의 탈출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강제로 최전선인 포크롭스크로 이동되었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러시아군의 총알받이 되게 했다. 요즘 강제 동원에 반기를 든 군인은 무조건 러시아군과 마주하는 최전선에 배치된다고 한다. 이는 징병 거부로 인한 불만을 잠재우고, 우크라이나 군 내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보기로 보여 진다. 더불어 지난 8월에는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서부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는 동원 대상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로코모티브 경기장을 길거리 강제 동원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문을 부수고 난입한 사건이 그것이다. 필자도 이 사건을 포스팅한 바 있다. 이는 시민들이 분노해 동원 대상자들을 탈출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당황한 징집 사무소 측은 급히 경찰을 불러 주민들의 난입을 봉쇄하고, 동원 대상자들을 서둘러 뒷문으로 빼돌려 바로 전선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사건은 숫자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진희 기자의 <바이러시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동원 관련 민원 건수는 1월~10월 사이에 약 5,0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전년 대비 50%가 증가한 셈이고 이는 1~5월에 1,600건 정도였지만, 이후 3,400건이 늘어났다. 6월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고 <바이러시아>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 군 당국은 최악의 병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동원했다. 그러다보니 우크라이나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43세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군의 평균연령 약 38세보다 5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 초반 자진 입대했던 젊은 예비군들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전투 병력들은 고령화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의 연령은 앞으로 더 올라갈 예정으로 이미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즉, 필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우크라이나 중년 남성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동원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라면 더 이상 현역과 비슷한 예비군이 아닌 민방위도 끝나는 나이대다. 이에 젤렌스키는 물러서면 국가 자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하여 군에 대한 자진 입대와 결사항전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무려 3년 8개월을 달려온 전쟁에 우크라이나인들은 거의 지쳐가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동원 인식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전쟁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어떻게든 해외로 도피하는 것, 혹은 잠적하여 아예 동원을 피하겠다는 분위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더불어 동원을 거부하며 길거리에서 징집관을 폭행하거나 총을 쏘며 도주하는 사태가 잇달으고 있으며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합세해 동원 대상자를 도피시키는 사건까지 온갖 영상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동원을 거부하는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 주 크레멘추크에서는 한 남성이 징집 사무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던 도중에 권총을 꺼내 직원들에 발사하여 2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남성은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는 징집관들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하던 중 시민들과 시비가 붙으며 충돌해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징집용 차량까지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했는데 그녀의 경호원이 우크라이나 동원 징병관에 의해 군사위원회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졸리는 이날 니콜라예프에서 헤르손으로 가는 길에 검문검색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동원 사무소로 끌려갔다. 졸리의 일행을 태운 SUV 차량 2대가 전날 밤 니콜라예프 주(州) 피브덴누크라인스크(Південноукраїнськ)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병역 서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요 인물'인 졸리를 호송 중이라 설명했지만 검문소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그를 징병사무소로 보냈다. 이에 황당한 졸리는 징병 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석방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러시아(https://www.buyrussia21.com)에 의하면 결과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징병 사무소 측은 졸리가 화장실이 급해 찾아왔다는 거짓말로 해명했고, 그녀의 경호원도 석방됐다고 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크라이나 네티즌들로 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같은 할리우드 스타인 브레드 피트가 길거리에서 징병관들에게 끌려가는 밈까지 만들어져 등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 강제동원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졸리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강제동원이 더 이상 가짜뉴스가 아니다라는 것을 오히려 입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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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우크라이나의 강제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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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중국인을 차별했던 중국인법(Chinese Act) 제정과 중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 중국인이 처음 호주로 유입된 시기는 호주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던 1851년으로 이후 20여 년 동안 약 50,000명의 중국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점차 숫자가 늘어나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빅토리아 지역 금광으로 들어온 중국인 숫자는 1854년 약 4,000명 수준에서 1857년 23,623명 수준으로 불어났고 1859년에는 42,000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이들 중국인들은 백인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고 이 와중에 중국인은 비도덕적이고 이교도이며 아편을 피울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금을 중국으로 가져간다는 편견이 확산 되었다. 그러자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호주 식민지 정부들은 18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이주를 제한하려는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실례로 빅토리아 입법부(Victorian Legislative Council)는 1855년 중국인 이주를 제한하기 위해 중국인을 싣고 오는 선주들에게 한 사람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후 1881년에는 이에 더해 중국에서 입항하는 배에 대해 100톤 당 1명씩 중국인 이민을 허용하는 내용의 <중국인법(Chinese Act)>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별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1851년 호주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었다. 이어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 당시 청나라의 노무자들이 대규모로 호주에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러나 중국계 이주민들은 영국계 중심의 기존 호주 사회와 충돌했고 이에 따라 이들이 저임금 노동을 맡음으로 인해 임금 저하의 원인이 된다며 아시아 인들의 이민을 제한하자는 경제적 주장이 나왔다. 이에 백인 외 인종의 이민을 받지 말자는 인종 차별적인 주장까지 섞여 탄생한 것이 백호주의의 시발점이었다. 따라서 호주가 연방을 구성한 이후로 백호주의는 공식화되었다. 1901년에 제정된 호주 연방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1901)>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으나 구술 시험이나 제조업 취업 금지 조항 등을 통해 특정 인종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제한하였다. 특히 이 법안은 호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항 시 유럽에서 통용되는 언어 가운데 하나로 50자 받아쓰기 시험을 실시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입국하고자 하던 중국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호주 정부는 1901년 12월 17일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 법(Pacific Island Labourers Act)>을 제정하여 1904년 3월 31일 이후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들의 호주 입국을 금지하였으며, 이미 호주에 입국한 자들도 1906년 12월 31일 이후에는 호주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인식되었던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으로 아 쉐웅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 쉐웅은 1881년부터 1901년까지 두 번의 짧은 중국 방문 기간을 제외하고 빅토리아에 계속 거주한 중국계 이민자로 빅토리아에서 귀화(Naturalization)한 이후 1901년 중국에 가서 약 5년 동안 지냈다. 이후 1906년 빅토리아로 돌아올 당시 1901년 제정된 연방정부의 <이민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에서 이민자에게 요구하는 받아쓰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입국을 거절당하고 감금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아 쉐웅은 자신은 이민자가 아니라 호주 국적(Australian Nationality)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민 제한법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빅토리아 최고 법원(The Supreme Court of Victoria)에 인신 보호(Habeas Corpus)를 신청하였고 커센(Cussen)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아 쉐웅에 대한 석방을 명령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호주 연방 고등법원에 상고되었고, 호주 연방 고등법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국적과 별개로 존재하는 호주 국적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쉐웅에게 <이민제한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판결, 당국에 사건 취하(Abandon)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 이후, 12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호주의 백호주의와 유사한 형식의 혐중 시위와 혐중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 호주에서는 이같은 차별 행위가 법적으로 엄금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아직까지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법적인 조치가 매우 약한 편이다. 모든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봐야 한다. 현 세계인구는 82억이고, 중국인은 그 중에서 14억을 차지한다. 회교와 해외 중국계까지 합치면 거의 20억 정도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약 24%가 중국인과 중국계라는 것이고 중국인들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무방하다. 이는 세계 어딘가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 한국과 중국, 양국이 무비자로 개방되어 있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여행을 하고 있다. 최근 보수우파들도 혐중한답시고 중국 여행하고 온 사람들이 많더라. 그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중국인들은 어떨까? 2021년 3월 기준으로 일본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77만 명, 미국 거주 외국인 중 중국인 인구는 2,400만 명, 영국에 사는 중국인은 2021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50만 명 이상이다. 한국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수효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으며 일본, 미국, 영국에서도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숫적으로 훨씬 열세다. 이들에게 공격을 받아도 현지 경찰이나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해도 중국인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나가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중국인들에 의해 충분히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대놓고 혐중 시위와 중국인 여행객들에 대한 신변 위협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오는 것도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불안한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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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중국인을 차별했던 중국인법(Chinese Act) 제정과 중국인 유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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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 필리핀에서 5만 명의 코피노들을 낳고 잠적한 한국 남자들도 문제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라이따이한" 문제가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말하는데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때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을 두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하지만 "라이따이한" 또한 세대별로 나뉘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세대는 "라이따이한 1세대"들이다. 문제는 "라이따이한 2세대"들부터다. 베트남이 도이머이로 인한 개방과 더불어 한국과 수교한 90년대부터 베트남에 들어간 한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부터 문제인데, 라이따이한 2세대들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콘돔 미착용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순진한 현지 여성들을 작업해 성관계를 가져 임신시키고, 연락하니 차단하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한국 남자들이 많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3세대"들과 2010년대 들어 들어온 "라이따이한 4세대"들의 남편들은 더 심하다. 이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있었던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보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 어렵던 시대였다. 이걸 간파한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고 씨를 뿌리고 도망가면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에 한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혼모인 여성들이 많은데 베트남의 문화상, 피임이나 낙태는 매우 죄악시 되고 있고, 북베트남의 경우, 유교 문화권이 남아 있는 상태로 집안과 친척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냥 낳아 기른다고 한다. 요즘 2020년대 들어서도 그런 인식은 마찬가지긴 한데 2000년이나 2010년대 보다 많이 줄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와 틱톡과 같은 숏츠 영상, 그리고 스마트폰의 발전은 "라이따이한 세대"가 생기기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베트남 여성과의 만남에서 성관계가 활발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남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끼리 커뮤니티가 있어 책임 없이 임신시키고 도망가는 한국 남자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커뮤니티에는 해당 한국 남성들의 정보가 박제되기 때문에 한국에 있더라도 스스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요즘 베트남 여성들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2020년대의 베트남의 MZ 세대들은 굉장히 영악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녀본 필자가 볼 때,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IT 최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없는 행동으로 여성을 작업해 임신시키고 한국으로 도망가면 바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박제된다. 요즘 아이들일수록 IT와 관련하여 다루는 솜씨들이 한국 아이들 못지 않아 보통이 아니다. 옛날의 베트남 생각하고 베트남 여성을 정액받이 생각하여 접근했다가는 한 순간에 골로 가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1회성 만남을 즐기고 싶다면 가라오케나 마사지 샵 같은 유흥지들을 가면 된다. 거기선 1회성 만남을 즐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면 깔끔하다. 게다가 베트남 여성들은 자기 남성이 아니면 굉장히 쿨하고 관계에 있어 깨끗이 끝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명 인터넷에서 말하는 베트남에서 "싸튀충(정액을 사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넷 은어)"의 시대는 끝났다. 잘못 건드려 국가적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교제하고 싶으면 정당히 진심으로 만남을 갖고 교제하거나 1회성으로 끝내고 싶으면 유흥지들에 가는 것이 좋다. 미디어나 인터넷, SNS, 각종 IT 소셜들의 발달로 인해 베트남 뿐만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IT도 서서히 베트남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더 이상 정액받이 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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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고 있는 2020년대 현 베트남 사회 : 베트남에 라이따이한 세대가 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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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 캄보디아가 2025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는 수혜 국가 1위로 올라섰다 한다. 한국은 2025년 총 92개의 협력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할 계획이며, 이 가운데 캄보디아가 지원 규모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고 KOICA에서 밝혔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 UN 및 각 국가들로부터 원조 받아 연명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여 오늘날의 경제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원조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ODA를 통해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국제 사회에 헌신하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ODA도 윤석열이 당시 이러한 일환으로 한 것이라 믿는다. KOICA는 <프놈펜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는 2025년 캄보디아에 총 3억 1,500만 달러(약 4,000억 원)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예정이며 주로 교육과 수자원 관리, 보건위생, 교통 및 농촌 개발 등 캄보디아의 주요 개발 분야에 집중 지원될 계획이라 밝혔다. 당시 개발 원조는 27개의 유상 차관 프로젝트와 62개의 무상 원조 프로젝트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차관을 받아 이루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중 가장 핵심 사업은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추진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Korea-Cambodia Friendship Bridge)’ 건설에 있다. 이 우정의 다리는 2023년에 훈 센과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프놈펜 내 다운펜 지역 야시장 인근부터 쯔로이짱와 반도 끝을 거쳐 껀달 주 아레이 끄삿 지역까지 총 길이 2,375m, 폭 27.5m의 사장교로 건설되는 한-캄 우정의 다리 공사는 이미 2024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는 한국수출입은행으로부터 2억 3,500만 달러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받게 되며, 공사 소요 기간은 5년으로 공사 완료 예상 시점은 2030년이다. 우정의 다리의 설계 및 감리는 유신컨소시엄이 1,885만 달러에 수주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 외 무상 원조 사업으로는 캄보디아 국립 어린이 병원 의료진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2023년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1,600만 불(약 208억원)을 투입하여 프놈펜 소재 국립 어린이병원 내과계에 대한 역량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안으로는 국립 어린이 병원 내 내과계 병동을 새로 짓고, 최신 의료기 자재들을 지원하며, 병원 운영 및 의료 인력의 역량을 강화에 나선다. 병원 동은 2026년 3분기까지 지상 5층, 전체 면적 8,715㎡, 총 196병상 규모로 준공될 예정이며, 병원 준공에 맞춰 150여 종 1,900여 점의 의료 기자재가 지원되고, 세부 분과별 전문 인력 초청 연수 및 현지 연수도 이루어졌다. 2024년 5월 훈 마넷 총리의 한국 방문 이후 양국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무상원조(ODA) 지원 규모가 두 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정부 때 이루어진 것이다. 캄보디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맺었다는 것은 캄보디아와 준동맹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북한-러시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와 유사한 관계다. 이처럼 준동맹국 캄보디아와 ODA는 2022년 1,789억원, 2023년 1,805억원, 2024년 2,178억원, 2025년 4,353억원 등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ODA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 스리랑카, 네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이 대를 이어 장기 독재를 하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해 있다. 독재에 심화되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들에게 ODA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으며 이는 해당 국가의 의존성만 커지게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국가가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 또한 젤렌스키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패가 만연한 상태로 EU 국가들이 자국을 희생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우크라이나를 마찬가지로 지원했었고 이는 젤렌스키와 각종 정부요원들의 비리로 인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이제 막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고 북한과의 대치로 방위비를 많이 써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부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초저출산과 3D 업종 기피현상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외국인들의 본국 송금으로 인한 외화 유출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제 미국에 2,000억 불을 투자해야 한다. 이래저래 돈 나갈 곳만 많고, 이러한 상황에 ODA는 우리 형편에도 맞지 않다. 윤석열은 캄보디아에 가서 감당 못할 계약을 하고 왔고, 김건희는 빈곤포르노나 찍고 왔다. ODA는 우리 국민의 혈세로 지원된다. 2030 부산세계엑스포 유치를 위해 ODA 약속을 남발한 것도 윤석열 정부고,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전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도 캄보디아 전문가도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부산엑스포 유치지원단장 출신이었다. 환장할 일이다. 우크라이나에 또 과도하게 퍼준 것도 윤석열 정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총 23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으며, 2024년 3억 달러는 무상 지원, 2025년 이후 20억 달러는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제공된다 했다. 또한, 1억 달러 규모의 차관이 사회 부문 지원을 위해 이미 지원한 상태다. 이것들도 다 국민들의 혈세다. 과도하게 우크라이나에 퍼준 것도 이해 못할 뿐더러, 캄보디아에 퍼준 ODA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퍼준 ODA에 대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ODA 명목상으로 뒷돈 챙겨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도 마찬가지이며 폴란드와의 방산 무역 또한 의심할 부분들이 많다. 대우크라이나 지원, 김건희, 삼부토건 및 각 재건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벌써 PD 수첩 등 많은 매체들이 폭로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와 함께 비자금 조성하고 캄보디아에까지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여 검은 돈을 세탁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일찍부터 이중과세 방지와 탈세 및 조세회피 예방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했지만 부패한 훈 센 집안의 행태로 본다면 이와 같은 협정은 무의미하다.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어 있는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조세포탈지로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돈을 물쓰듯 쓰기만 한 윤석열 정부가 흑자를 본 부분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리고 캄보디아 ODA와 대우크라이나 지원, 대폴란드 방산 협정 사이에 숨겨진 부패와 비리는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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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ODA 지원 &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윤석열 정부가 계획한 퍼주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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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 내가 2017년에 중국 광저우에서 잠깐 있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의 첫 번째 전제 국가인 남월(南越)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도 함께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특히 청나라의 대외무역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1757년부터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남아 및 서양 세력과의 무역은 광동성(廣東省)의 수도 광저우(廣州)에 국한하여 시행하였다. 1683년 대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반청복명 세력인 정씨(鄭氏)가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른바 해금(海禁)을 풀고 4개의 항구를 열어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아모이(澳門, 마카오), 장주(漳州), 영파(寧波), 그리고 운태산(雲台山)이 주요 4개의 항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1757년에 이들 4개 항구를 다시 폐쇄하고 광저우 항구만을 열어 대외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이슬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에 자유로이 왕래한 것이 아니라 무역 할 수 있는 달인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정한 조계지 거주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일 이 지역을 재외상관(在外商館, Factory)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광저우의 사면도(沙面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면도(沙面島)의 재외상관은 청나라 정부에서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요새화된 외국인 거류지로 원래 해외 특허로 만들어진 회사의 군사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재외상관 제도가 청나라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보호라는 명목적인 측면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대외무역제도에는 일정한 기구와 관리들이 있었다. 청나라 측에서 보면 먼저 양광 총독(兩廣總督)과 광동 순무(廣東巡撫) 등의 지방장관들이 있었고 광저우 부근의 해관(海關)은 외해관감독(粤海關監督, 외국인은 Hoppo라고 칭하였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하부 조직에서 실제로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청나라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동 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 형태인 길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특허상인을 공행상인(公行商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저우 지역에 있는 외국인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의 징수도 이들 공행상인(公行商人)이 담당하였다. 서양 측에서도 이를 조합한 일정 기구가 있었는데 당시 대청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경우를 보면 특허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대청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중국 현지 기구로서 관화인 위원회(管貨人委員會, Select Committee of Supercargo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관화인(管貨人, Supercargo) 중에서 3, 4명으로 구성된 이러한 위원회에는 수석(首席, President)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서양인의 총책임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대청무역 독점은 1834년에 종료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면업 자본이 자유무역을 계속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영국 정부가 대청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무역 감독관(貿易監督官, Superintendent of Trade)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 무역 감독관은 기존의 관화인위원회 수석이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것과는 달리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 관리라는 점에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였다. 일찍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나라에 통상무역을 요청하러 찾아온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다. 이는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아편전쟁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나라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청나라 조정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화이(華夷)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청나라가 결코 여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인 아편의 중국 내륙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가와 관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로운 틈에 매우 헤이해졌으며 부정축재와 더불어 매관매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축재의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 큰 고통을 겪었고 이를 배경으로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계속하여 발생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들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정부에 납세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년 아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 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反) 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많은 중원 백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나라 정부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아편과 같은 마약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한 폐해가 막심하자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아편이 수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시기로 알려진 이른바 3대의 청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나라 백성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0,000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방황하는 유민 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1773년에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0,000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 아편을 두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격돌하여 조정은 격심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금론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을 완치시키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하게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는 것과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오랜 유교 론으로 볼 때 백성들을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볼 때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이금론을 반박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 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湖廣省)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道光帝)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 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서양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한 대응에 반하여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많아지며 이에 많아진 정보 덕택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부분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한 혐오스러움이었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 등은 혐오대상은 아니었지만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근대적 사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함이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 잡은 한편, 사대부 가문들이 알려주는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Complicated and incomprehensible play clown)’ 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전혀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다수 영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말과 같이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Only the emperor is free and all are slaves)” 이라는 중국의 정치와 사상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동양철학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인들을 ‘해방(Liberation)’시키고 ‘계몽(Enlightenment)’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편전쟁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러한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여러 정황들에 있어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아편 무역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정부의 방침대로 정해지는 일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그리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존재했고 막대한 부와 많은 인구에 비하여 많이 약화되어 보이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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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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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과 광저우, 그리고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임칙서(林則徐, 1785~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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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이 발발한 시기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마약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나타난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닉슨 이후에 등장한 모든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공화당의 로날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는 마약과의 전쟁을 더욱 심화시켰고, 가수인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의 죽음으로 인해 민주당인 빌 클린턴마저 가담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결과적으로 마약 이용자를 전혀 줄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폭력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흑인민권운동으로 그 위상이 신장된 미국 흑인들의 삶을 사회적, 경제적, 비공식적 차별로 새롭게 생성하여 결국 미국을 마약 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 흑인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민권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하락했고, 이들의 권리를 찾는 운동은 폭동과 폭력 시위로 점철되어 갔다. 그저 금지된 약물인 마약을 투약했을 뿐, 폭력적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전과자로 만들었고, 이들이 약물로 인한 전과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빈민층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들을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데 엄청난 세금을 써야 했다. 이처럼 폭증하는 재소자들로 인해 미국의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는 교도소와 교도관들을 늘려야만 했고, 이는 미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가 531명 정도의 비율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국, 이란, 쿠바 같은 국가들보다 수감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미국은 수십 년째 수감자 인구와 인구 대비 수감자 비율에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감소세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 비율은 5위로 줄어들지만 다시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계속 시설을 증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재소자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형기를 못 채운 잡범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수용 한계를 넘어선 재소자들로 인해 관리 부실로 갱단간의 전쟁, 마약 유통, 살인 등 미국의 교도소는 범죄의 집합소가 된지 오래이고, 경범죄로 들어간 잡범들이 폭력적인 갱단 흉악범으로 변해 출소하는 범죄의 학교가 되어 버렸다. 단순한 마약 투약자가 교도소에 들어가서 갱단 조직원이 되어 출소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미국에 존재하던 인종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들은 꿈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치안 위협이 극도로 높아지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내부에서 이 정책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비폭력 단순 마약사범을 무조건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사용자 처벌, 대량 투옥 위주의 미국 사법 체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현 2025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개선된 바 없다. 미국 정치권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금지한 약물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은 헤로인(Heroin), 코카인(Cocaine), LSD, 엑스터시(Ecstasy),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 마리화나(Marijuana), 환각버섯(Psilocybin mushroom), 펜타닐(Fentanyl) 등이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펜타닐(Fentanyl)이다. 만약 중국의 펜타닐 원료 수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미국의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아니다(No!)이다.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중국 대신 펜타닐의 원료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미국 정치인들이 미국 마약의 문제를 볼 때, 마약의 무차별적인 공급에 있다고 주장하며 마약의 원료 생산지를 제거하거나 멕시코, 중국 등 공급 측을 제재하는 생산 차단에 주력해왔다. 최근에는 중국이 펜타닐 차단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경주 APEC의 미국-중국 회담에서 트럼프는 중국이 합성마약 펜타닐과 그 원료의 밀수출을 단속하면 펜타닐과 관련해 중국에 부과한 관세에 한해 완전히 폐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중국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난 정말로 중국이 그럴 인센티브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중국 정부의 펜타닐 단속을 보는 대로 미국 정부는 나머지 10%를 없앨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와 같은 단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과는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다. 소비만 있으면 공급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마약을 구입해주는 미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마약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조직들은 아무리 처벌을 강화하고 마약 공급업자들을 체포한다고 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마약을 조달해 와 미국에 유통시켰다. 오히려 규제와 처벌의 강화로 인해 마약의 가격이 올라 수익성이 증가하고 마약의 공급이 더더욱 증가하는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마약 수요 원인인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자와 판매 수단만 체포하고 단속한들 또 다른 공급자 및 수단이 등장해 대체할 뿐이다. 사실상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수요가 감소되지 않아서 마약 판매가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해 준다면 앞으로도 미국의 마약 시장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끊임없이 제품 공급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마약과의 전쟁은 처음부터 마약 중독자들의 숫자를 갖은 형벌과 체포를 통해 감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사실 이는 마약의 특성, 특히 미국에서 중독성과 해악으로 인해 처벌 및 관리 대상인 코카인, 헤로인,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성 진통제(Opioids), 메스암페타민 등의 약물들이 어떤 약물들인지 이해가 부족했었다. 일단 한 번 흡입하거나 사용하게 되면 단순히 그 주변이 공포와 폭력으로 인해 사용을 억제하거나, 혹은 자기 절제를 통해 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약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마약 투약자들을 투옥시키면 해결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효과는 매우 미미했다.당연히, 한 번 맛을 본 마약 중독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소하여도 대부분 쉽게 마약을 끊지 못하고 상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약을 끊은 사람들조차도 단순히 처벌을 통해 마약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단순히 투약했전 투약자들조차도 투옥시키는 현실이 지속되자, 교도소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났지만, 당연히 단위면적당 수감자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이를 관리할 인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약중독자들과 함께 격리되어야 할 마약이 교도소로 유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관리가 되지 않을수록 교도소 내 범죄조직들은 간수들을 매수하기 쉬워졌고, 아주 극악의 환경에 마약까지 유통되니 죄수들 간의 폭력이나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강제라도 마약을 끊어야 할 중독자들의 중독 상태는 지속되어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이에 마약 범죄가 아닌 상태로 들어온 죄수들조차도 교도소에서 마약을 접하고 마약중독자가 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 된 것이다. 거기에 수감 생활 동안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마약에 대한 유혹에 더더욱 취약해졌다. 특히 교도소 내 범죄 문제는, 도저히 교도소 자체의 인력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감옥의 겉모습은 간수들이 관리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감옥에 생성된 범죄조직들이 교도소를 반 정도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불어 관리 인력의 문제로 인해 부패 문제, 관리 소홀 문제 또한 심각했다. 이는 교도소에 들어갈 예산이 날이 거듭될수록 부족하다보니 교도관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이나 복지 예산 또한 좋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교도관이 열심히 일했을 때 주는 인센티브는 없는데, 일은 매우 고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도관들도 관리에 대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약 중독 문제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죄수들은 직업을 잃고 노숙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도소 내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 더 심각하고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 사회로 돌아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에 투입된 예산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마약 투약자 및 판매자에 대한 체포 및 처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마약 투약자를 치료하고 재활하여 본질적으로 마약을 끊게 만드는 것이 교도관이나 경찰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고스란히 시민 사회의 몫이 되었고, 날로 늘어가는 치료 및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과 중독자 수에 비해, 관련 예산과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하면서 주 정부나 연방 정부는 이들을 지원할 역량이 되지 않고 여력도 되지 않으니 중독자 수가 줄지 않고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마약성 진통제 문제로 여겨진다. 마약성 진통제로 인한 사망자 수와 상용자 수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미국의 열악한 의료 보험 제도, 각종 사회 복지 제도와 제약 회사들이 엮여 발생한 재앙 중 하나가 마약 문제보다 더 심각한 마약성 진통제 문제다. 이는 단순히 사용자나 판매자를 처벌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 또한 규제 대상이며, 이를 팔거나 쓰는 것 또한 처벌 대상이다. 그리고 그 강도 또한 낮지 않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많은 마약들을 불법으로 간주함으로 인해, 당연히 마약의 생산과 유통은 범죄조직들이 도맡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과 비교적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쉽게 닿지 않는 중남미 지역에 상당수의 마약 공장을 건조했다. 이들 범죄조직은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된 현지 중남미 지역 범죄조직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초대형 마약 카르텔들로 진화했다. 이들은 국가의 정치, 경제, 사법,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등은 국가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대 미국 마약 밀수 카르텔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고 있다 주장하며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에게 "세계 최대의 마약 밀수범"이라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두로에 걸린 현상금을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인상했다. 물론 이 같은 트럼프의 지적은 틀린 말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1990년대부터 베네수엘라의 태양 카르텔(Cártel de los Soles)이라는 범죄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었다. 태양 카르텔의 경우 미국에서 테러조직이자 범죄조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두로는 태양 카르텔과 연루된 군 장성 상당수를 정부요직에 임명하였고 태양 카르텔의 수익을 공유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에 트럼프는 태양 카르텔이 미국의 마약 밀수에 큰 지분을 차지하는 멕시코의 시날로아 카르텔(Cártel de Sinaloa)과 연관이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대통령은 이러한 트럼프의 의혹에 발끈하여 이는 사실이 아니라 반박 공표했다. 한편 베네수엘라의 외무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아 비난했다. 또한 트럼프가 자신과 연루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이 저지른 아동 성범죄 사건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외무부의 주장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2025년 6월 5일, 정부효율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SNS에서 트럼프 대통령와 설전을 벌이던 일론 머스크가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의 이름이 들어있다면서 그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잡한 사건에 대해 트럼프는 침묵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외무부 측이 주장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것이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진짜 이유일 수 있다. 내부 정치적인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큰 사건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앞 바다인 카리브해에 다수의 군함들과 미사일 90기를 급파하며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륙 준비단 4,500명 가량을 베네수엘라 앞 바다에 배치하는 등 침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에 마두로 대통령은 같은 날 450만 명의 민병대에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현재까지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마약 카르텔을 청소하고 소위 갱단 두목이라 불리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처단한다는 것이지만 진짜 이유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성범죄 연루를 덮고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털어가는 등,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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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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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에서 실패와 중국과의 펜타닐 관세, 베네수엘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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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했다.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와 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 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의 재임 시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인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존재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들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의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인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암보이나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에는 큰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Agung)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 섬을 통일할 목적으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이어 마타람의 군대가 1628년과 1629년 두 차례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수성에 성공했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을 대만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 곳들을 연결하는 교류 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에도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에 1658년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1636년에는 솔로르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고 17세기 동안 티모르 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라 불리는 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쳐지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하려 한다.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 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 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 전, 해상 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는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 섬 등 소 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 지역들을 보유하였고, 티모르 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두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 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 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Trunajaya Uprising, 1674~1681)가 발생했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게 패퇴하고 수도가 함락당한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비슷한 사건들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였으며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점령되어갔다.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Java War of Succession, 1749~1757)의 결과로 인해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 섬과 보르네오 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Lampung)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술탄국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네덜란드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아시아 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58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여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 해안인 말라바르 해안(Malabar Coast)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Colam) 항구, 1662년 코친(Cochin) 항구를 함락해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적인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에서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도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다.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 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와 회사령 동인도를 이어주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Travancore)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 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 군 6,000명(유럽인 2,400명)의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Colachel)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 군에게 크빌론(Cbilon, 콜람)을 함락당하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의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으로 휴전이 합의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 때 네덜란드 영향 하에 있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 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 군이 1742년 6월, 네덜란드 영향 하의 콜람을 공격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의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이 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대만에 진출했는데 일반적으로 포르모사라고도 알려진 대만은 1624년부터 1662년까지 그리고 1664년부터 1668년까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에도 막부와 무역을 하였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과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대만에 존재를 확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보편적으로 대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원주민들과 최근 한족들의 봉기는 네덜란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의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대신 청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1662년 정성공의 군대에 의해 젤란디아 요새가 포위된 후 네덜란드 식민지를 해체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충신이자 반(反) 청나라 제국인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웠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를 맞이해 인도에 새로운 항로 개척이 진행되어,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대만도 이 국제 정세에 포함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일부의 일본인과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였으며, 다른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도 대만의 정치 지형에 주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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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통치기와 대만으로 진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