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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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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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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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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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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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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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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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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러시아 입국 강화 : 이전처럼 입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
    내일 30일부터 러시아에 입국하려면 사전에 입국 신청서와 함께 얼굴 사진 등 생체 정보를 모바일 앱에 등록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자국에 무비자로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의 등록을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디지털 기술부는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자료를 모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인 루아이디(ru ID)를 개발했다. 그러나 내년 6월 30일까지 1년 동안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기간으로, 입국 전에 반드시 제출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제약이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무비자 입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입국 전에 생체정보를 입국 신청서와 더불어 '루아이디'를 통해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 '러시아 연방 정부령 제1510호' 에 따른 것으로, 30일부터 1년 동안(2025년 6월 30일~2026년 6월 30일) 2단계 시범 사업으로 들어왔다. 시범 실시 단계에서는 입국 전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 전송은 당연히 의무 사항이 아니다.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여 입국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러시아 입국에 불허 사유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아이디(ru ID)를 등록하지 않고 러시아에 입국하게 되면 휴대폰 심(SIM) 카드 발급과 외국인에게 개방된 러시아의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를 발급받는데 있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발급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안 되기 때문에 틴코프 은행 체크카드 발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제한이 생긴다면 카드에서 돈 인출이 막막해짐은 물론 로셀호즈은행(Россельхозбанк)과 가스프롬뱅크(Газпромбанк)에서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또한 필자가 생활했던 작년까지는 가능했는데 올해는 이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루아이디(ru ID)를 통해 입국 신청서 및 생체 정보를 전송한 경우, 입국한다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휴대폰 심(SIM) 카드 구매를 위한 SNILS(사회보장번호와 유사) 발급이 가능해지고 러시아 정부의 공공서비스 이용 신청 등도 가능하다. 다만 여행객들에게는 심카드 외에는 공공서비스 이용은 필요가 없을 뿐이다. 입국 신고 및 생체 정보 등록은, 한국인 등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국가의 국민이 루아이디 앱에 가입한 이후, 입국하기 72시간 전까지 출입국 날짜와 방문 목적, 개인 및 생체 정보 등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응급 치료 혹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입국 4시간 전 등록이 허용되고 있다. 등록해야 하는 생체 정보는 얼굴 사진, 여권 사진,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며 등록을 마치면 입국 때 필요한 QR코드가 발급되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방문을 위해 사전에 전자여행허가(ESTA: Electronic System of Travel Authorization)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참고로 한국인이 미국을 방문하려면 2008년 11월 중순부터 인터넷에서 입국에 관한 간단한 등록 절차를 거쳐 ESTA (입국 허가)를 발급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은 6세 미만의 아동과 러시아 주재 외교관, 영사관, 국제기구 직원, 벨라루스 국민 등이다. 그리고 입국할 때, 머물 도시, 호텔명, 호텔주소, 연락처 등이 명확해야 하고, 체류 목적, 날짜 등이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이 불명확 할 때는 러시아 입국이 거부된다.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 입국 시 지문 날인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지문 날인은 입출국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러시아에서 사진 찍을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관공서나 러시아의 인프라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조치가 없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인프라에 자주 드론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를 찍을 때, 사전허가를 받지 않으면 임의동행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보통 일반 관광객인 경우, 대부분 경고를 받고 풀려난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기차역이나 선로, 그리고 화물열차를 찍으면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국은 러시아에서 비우호국가로 찍혔기 때문에 입국 심사 때 물어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취해지는 똑같은 조치이니 한국인만이 표적 대상이 되었다고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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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이란과 이스라엘 12일 동안의 전쟁,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니다.
    이란과 이스라엘, 12일간의 전쟁에서 이 전쟁은 휴전 상태가 됐다. 그러나 누구의 승전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고위 장성들과 핵 과학자들을 상대로 정밀 타격을 하여 암살했고,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시스템을 뚫어 초토화시켰다. 세상의 어느 군대도, 이스라엘을 그렇게 초토화 시킨 나라가 없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스라엘을 도와 이란의 핵 시설에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싸움에 미국이 끼어든 셈인데 만약에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면 미국이 끼어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텔아비브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영토가 초토화 되는 것을 미국이 모를리 없다. 결국 이스라엘 편에 선 미국은 이란에 공격을 날렸다. 그러나 이란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만약 이란의 핵 시설이 파괴되었다면 그 안에 우라늄 농축액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이란 전국 뿐 아니라 이라크, 터키, 쿠웨이트, 바레인, UAE,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멀리 러시아에도 방사능인 세슘이 강한 농도로 검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출된 방사능은 이란 핵 시설 주변에 국한되었고 그 또한 방사능 유출이 미미했다. 핵 연료인 우라늄 농축액을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미국은 어느 하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게 없다. 다만 달성한거라곤 임시 미봉책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휴전으로 바꾼 것 뿐이다. 트럼프 혼자 자화자찬(自畵自讚) 하며 성공했다 발표하고 한국 언론에서는 미국이 이겼다며 트럼프를 "승장"으로까지 표현했다. CNN이나 NYT도 그따위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무슨 이스라엘이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둔 양 헤드라인과 기사를 장식했다. 말 그대로 이는 정신 승리에 가깝다. 그리고 아직은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결과가 확정된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방공미사일을 비롯한 대규모 방공시스템들을 점검하며 수정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역에 대한 복구는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곳이 파괴된 텔아비브는 복구가 최소 한 달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만큼 테헤란도 복구가 빠르다. 한편 테헤란에서는 승리 축하 파티가 여러 곳에서 열고 있다. 이란 입장에서는 1. 이스라엘의 최강 방공시스템을 통과 및 파괴, 2. 물론 약속대련이지만 미군 기지를 직접 때렸다는 것은 이란 역사에 있어 이는 매우 기념비적인 일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폭격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쿠스드군 사령관 이스마일 카니(Esmail Qaani)가 살아있는 상태로 테헤란 축제에 나타나 테헤란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이스라엘이 그를 제거했다고 뉴스를 띄운 서방 매체들이 모두 경악할만한 일이다. 그는 벙커에서 군을 지휘하느라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휴전이 성사되고 폭격이 멈추자 테헤란 집회 현장에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국 언론들은 카니 대역으로 누군가를 변장시켜 건재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했다고 억지를 쓸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은 이란에 상륙을 피했다. 공습은 핵 관련 시설에 불과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이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중동 전쟁에 직접 참전한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예년과 다르다는 것은 미국이 이란과 전면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예측들을 두고 일부 한국인들은 그 예측이 틀렸다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은 오히려 확전을 바라는 것 같다.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는 것들이 확전이 나면 호전적으로 변한다. 필자는 전쟁이 벌어지면 예측이 맞아 떨어지는 것보다 틀리길 더 바라는 사람이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같은 것도 사실 틀리길 바랬다. 당장 여행업을 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비행기 유류할증료가 폭등할텐데 그걸 좋아하고 바라고 있는게 정상이라 보는가? 그런데 그런 자들을 가만히 보면 전쟁에 열광하는 히틀러 총통의 지배 시기의 독일 국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는데 아마 평생 가도 모를듯 싶다. 필자는 이스라엘의 약점을 보았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최강의 방공망들인 사드, 에로시리즈, 다비즈실링, 페트리어트, 아이언 돔이 무력화 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 방공망 미사일들이 풀충전 됐을 때는 어느 정도 막아냈지만 2~3일이 지나니 거의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 그 상태로 2주만 더 지나면 방어시스템의 미사일은 바닥났을 것이다. 그 때부터는 서서 맞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찍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역사상 이렇게 얻어 맞은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의미를 축소시키는데 이게 그렇게 의미 없다고 폄하할 정도가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의 방공망은 안전한가? 북한의 미사일이 이란처럼 서울 상공에 쏟아내면 우리의 사드와 페트리어트가 이를 방어해낼 수 있을까? 우리 또한 이스라엘처럼 최상의 방공망을 유지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방공망이 뚫리는 것을 보았고 북한은 이를 보고 충분히 학습했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솔직히 우리는 북한의 미사일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잘 모른다. 폐쇄국가의 특성상 이걸 확실히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못지 않게 우리는 작은 사이즈의 국가이기 때문에 지형,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사실 미국 아니었으면 이스라엘은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거 뚫은것 자체, 최강 방어시스템 자체의 약점을 알아냈다는 것 자체가 이란 입장에서는 최고의 성과다. 장성이야 죽으면 대체할 수 있고 핵과학자는 러시아나 북한에서 영입하면 그만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방어시스템이 뚫렸다는 것은 바로 대체가 가능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한이 쏘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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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중동 국가들이 핵으로 무장할 수 없는 이유
    중세의 아랍인들은 물을 끌어오는 관개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미 바그다드 칼리프 시절 때 그러한 기술을 익혀 해왔으며 그 전통은 이전 수메르 시절, 바빌로니아가 만들었던 지구라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막 지대에서 물을 끌어오고 땅속에 지하수에서 물을 뿜어내게 만드는 기술은 동시에 아랍의 토목 공업도 함께 발전하는 케이스가 된다. 이를 두고 팔라즈(Falaj)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인공 관개 수로를 카나트(Qanat)라고 한다. 사막의 경우 인공적으로 녹화를 한 지역이라도 담수를 구하기가 어렵다. 고지대(상류)에서 저지대(하류)로 담수가 흐르는 도중에 건조한 환경 때문에 말라버리는 것이다. 설사 발견해도 모래에 포함된 염분이 녹아 있어 식수로 적합한 경우가 적다. 그래서 고지대의 수원의 지하부터 수십 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그 위쪽에서부터 아래로 통로 겸 우물을 만들고 터널을 관리하며 그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물 관리가 생명인 중동에 막대한 냉각수가 필요하고 척박하고 혹독한 기후로 인해 관리만 해도 막대한 돈과 세심함 및 꼼꼼함이 필요한 핵을 중동이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핵 발전소를 지을 조건이 좋지 않다. 그 조건에 대해서 어제 내가 포스팅 해서 알 것이고, 담수가 아닌 해수를 사용해야 할 경우, 바닷가에 밀집해야 한다. 중동 국가 중 시리아, 레바논은 바다가 지중해 한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민간인들이 사는 곳이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시리아는 라타키아, 타르투스, 자블라가 도시로 있고 이곳은 대표적인 지중해 휴양지다. 사막화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농지들이 해안가를 따라 펼쳐져 있다. 이곳을 핵재처리 시설 및 발전소 등으로 개발하면 시리아의 식량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 이는 레바논도 사정은 같다. 트리폴리, 시돈, 티레는 대표적인 휴양지인 동시에 고대 페니키아 유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게다가 적국인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 이스라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요르단은 바다가 사해에 홍해 북동부 아카바 연안이 전부다. 핵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겠지만 홍해와 사해에 밀집된다면 적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짓는게 불가능하다.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UAE 등은 중동과 세계 금융 경제, 자원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고, 막대한 양의 석유를 무기를 삼아 세계 경제를 흔들면 되니 핵이 굳이 필요없다. 가장 무서운 예멘의 경우, 유지할 돈이 없다. 발전소를 지어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는 있어도 발전소를 유지하는 비용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폐기된 핵처리물 또한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문제다. 핵폐기물을 소홀히 했다가 세계적인 문제가 생긴 일례가 러시아의 카라차이 호수다. 핵재처리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어딘가에는 갖다 버려야 되는데, 전문적인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에 당시의 관점에서 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수에 매립해 사고가 터졌다. 가뭄이 들어서 카라차이 호가 말라버리는 바람에 호수 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주변 지역을 덮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퍼진 오염 물질의 양은 약 18.5경 베크렐로,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대형 사고 터진 것이다. 예멘의 경우,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호수에 매립할 리는 없겠지만 사막에 매립한다 할지라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은 관리 능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재처리 핵 시설과 기타 우라늄과 플라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이 없다. 이란이나 북한이 도우면 모를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돕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게다가 예멘을 지배하고 있는 후티는 여전히 사우디와 대립 상태인데다가 이미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어서 더 어렵다. 이라크의 경우, 터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아직 숨어 있는 원리주의 단체들이 많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날로 말라 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그리고 그 수운은 터키가 통제하고 있으며 바스라 쪽은 걸프만을 영토로 삼고 있는 해안 지대의 폭이 좁기에 핵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우디와 터키, 이집트의 경우, 핵을 만들 필요가 없는 국가들이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는 그 위치의 지정학적으로만 봐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양쪽을 통제할 수 있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다. 이란이 핵을 만든다고 중동이 모두 핵무장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전반적인 이유다. 흔히 우라늄은 저농축과 고농축으로 나뉜다. 현재 우라늄의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용으로 저농축이다.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은 U235로 저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핵물질이며 핵분열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동위체다. 자연계에 있는 U235의 양은 우라늄 전체의 0.7%에 불과하다. 그러나 U235가 연쇄 반응을 하면 고농축을 할 수 있다. 미국괴 이스라엘은 이란이 고농축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핵무기를 만든다고 의심한다. 문제는 원자력발전소 어디든 저농축과 고농축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도 과거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로 핵분열 성능이 뛰어나고 핵연료 부피를 줄일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주로 사용했다. 한국은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수차례 우라늄 변환, 농축, 플루토늄 분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2004년에는 레이저 분리 장치를 이용해 총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우라늄은 77~80%의 농축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 없는 학술적 호기심에 의한 일회성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우리도 언제든 고농축 우라늄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한국은 미국, 프랑스, 벨기에와 협력하여 연구용 원자로의 핵연료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고농축 우라늄 최소화' 공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여전히 고농축 우라늄은 사용된다. 그런데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다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처럼 이란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방이 적국인 이란이 공격용 핵무기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를 남을 침략한 적도 없고, 오히려 사방에 위협만 받았다.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ISIS와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반군 테러단체들에게 자금, 무기,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도 고농축 우라늄을 아직 쓰고 있고 일본도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아직도 고농축 우라늄을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일본, 북한, 러시아, 미국이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은 핵을 가졌기 때문인데 미국을 제외한 북한, 중국의 위협을 받는다고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도 이 수준에 머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핵을 가진다 해도 이스라엘이 위협을 느낄 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을 보자. 트럼프가 한국에 주한미군 방위비 올린다고 난리쳤을 때, 그리고 한국에 관세 때렸을 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했을 때, 핵 개발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핵 개발 후 생기는 뒷감당을 어찌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보고 우리도 핵 무기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이제 한국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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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8
  • 심층분석 :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중동의 핵 확산이 가능한가?
    대다수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그 확산이 가속화되고, 미국과 서구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가진다고 다른 중동 국가들이 핵무기를 가질거라 어떻게 장담하는지 알 수 없다. 핵무기가 일반 군수산업처럼 막 찍어내고 그런 무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가이드 알바를 할 때, 그거 가이드 하기 위해 핵 관련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그래야 관련 설명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고객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이 열심히 귀담아 듣는 그 모습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우라늄 농축 과정 및 핵을 제조하는 원리에 대해 지난 번에 칼럼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타 중동 국가들이 이란처럼 왜 핵을 가질 수 없는지 알려드릴까 한다. 핵을 만들던, 원자력 에너지를 만들던, 모든 것은 원자로에서 시작된다. 한 개의 원자핵이 중성자 또는 감마선을 쏠 때, 많은 에너지들이 방출되는데 거의 크기가 같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더 작은 핵으로 분열하는 것을 핵반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통 우라늄, 플루토늄 같이 질량수가 큰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여 더 가벼운 원자핵 2개와 2~3개의 중성자 등으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핵분열이라고 한다. 핵분열에서의 연쇄 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 원자핵이 분열하면서 방출되는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분열시키고, 그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것을 원자력이라 한다. 핵분열의 연쇄작용과 이를 통제하려면 원자로(Nuclear Reactor)가 필수다. 임계점을 넘은 핵연료의 연쇄작용을 가만히 놓아 둔다면 그 반응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료봉을 여러 개 묶은 연료 집합체로 원자로에 다발로 삽입한다. 대개 경수로 형식으로 이용되는 원자로에는 감속재로 경수를 쓰고 고속 중성자를 사용하는 원자로에는 감속을 할 필요가 없기에 감속재가 없다. 전 세계의 원전의 80%는 경수를 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냉각수인데 보통 담수나 해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상 노심 냉각 장치 (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를 위해서도 물은 필수적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이 핵분열로 발생한 열로 증기를 만들고, 증기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을 돌리는데 쓰인 증기는 공기 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수기로 보내져 바닷물인 냉각수에 의해 식혀져 온배수로 방류된다. 1,000㎽급 원전 1기에 초당 60~70톤의 냉각수가 사용된다.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손쉽게 얻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바닷가에 짓는다. 원자력발전소의 열을 식히는 모든 장치는 물이 필요하며 발전 과정에서 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중동은 대표적으로 물 부족 국가들도 많고 바닷가에 면해 있는 국가들은 오로지 해안가에 해수만 써야 하는데 바다가 주변국을 마주하는 국가들이 많다. 특히 원자로에는 끝없이 냉각수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만약 원자로에 냉각수가 끊기면 노심 연료봉의 온도가 높아지고 그러다보면 폭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체르노빌이든, 후쿠시마든, 참사는 대부분 원자로의 노심에 냉각수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연료봉이 열을 받는 바람에 생긴 참사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서 핵을 주조하려면 일상에서 쓰는 저농축 우라늄과 고농축 우라늄(U235), 플루토늄을 생성시키기 위해사 핵연료 재처리를 해야 하는 시설이 필요한데 중동에는 없다. 그리고 이거 유지하는 것도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간다. 게다가 이를 다루고 제어하는 핵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대개 사암으로 이루어진 사막이 많아 노출되기 십상이며 위험성은 더 커진다. 특히 햇볕이 뜨겁고 건조한 사막기후는 냉각수의 가장 큰 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중동이 핵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이 핵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님을 알려둔다. 그리고 미국의 위협을 받고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이 된다는데 이미 이스라엘은 핵을 가졌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 애초부터 미국이 위험스러웠다면 미국의 알래스카와 가까운 러시아가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중동의 소형화된 핵무기가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터질 위험보다 러시아가 쏜 핵무기가 뉴욕이나 워싱턴에 터질 위험이 더 높다. 그 이유는 거리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중동이 쏘면 유럽이나 영국 등 다른 나토 국가들이 요격할 수 있지만 러시아가 쏘면 캐나다 한 국가 밖에 거쳐 가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타격할 수 있다. 마침 러시아 캄차트카에 그와 같은 핵 미사일 기지가 있긴 했다. 그런데 더 가까운 러시아가 쏜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란의 핵무기를 막는 것은 미국의 생존과 안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란은 미국과 서방의 장기 제재, 적국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이스라엘은 매우 위협적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란은 핵을 선택했다. 먼저 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본국 수호를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란은 여태까지 수많은 참을성과 자제력을 보여왔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란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는 않는다. 다만 친미, 친서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위협적이라는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여태까지 이란-이라크 전쟁 외에는 전쟁을 한적이 없고, 해당 전쟁 또한 미국의 사주로 인해 사담 후세인이 먼저 침공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따라서 이슬람 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란은 단 한 번도 남을 침공한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위협적이란 말인가? 한국은 이스라엘-이란 전쟁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전쟁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북한을 부추겨 우리를 공격하기를 했으며 이란이 한국에게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한국이 이란에게 악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지원한 미국은 뭐가 되는거고 태평양전쟁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 보고 대일 참전을 부추겨 만주,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하게 만들어 북한 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은 뭐가 되는 것일까?
    • 칼럼
    • Nova Topos
    2025-06-27
  • 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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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7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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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6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과 휴전으로 얻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득
    트럼프도 이번 휴전으로 얻는게 있었다. LA 폭동 같은 미국 국내의 뉴스가 중동 사태 때문에 죄다 묻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인들과 관심과 눈은 중동으로 향했다. 어쩌고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트럼프가 네타냐후를 부추겨 이란을 선제 타격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럼 한동안 혼란스러워져 있던 미국의 민심은 저절로 이스라엘에 촉각이 모인다. 이렇게 네타냐후와 거래를 통해 미국 내 불량한 분위기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전쟁의 두려움을 확산시켜 아무도 폭동에 관심을 갖게 하고 물가 인상, 인플레, 유가 상승, 주가 하락까지 모든 것에 대해 간접 블러핑으로 그 불안 요소를 한 곳에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은 매우 고도의 정치 전략이다. 모두의 이목이 중동에 집중되는 동안, 미국 각지에서 폭동들에 대해 관심이 줄었다. 어떠한 시위나 폭동이든, 관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들 만의 외침으로 전락해 아무 의미 없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전략은 폭동 진압에 있어 엄청 큰 유효타를 때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천재적인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터키의 에르도안이다. 본인에게 오는 모든 불만을 시기에 따라 적절히 외부로 타겟을 돌려 위기를 넘겼다. 경제 위기로 터키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HTS를 움직이고 지원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시리아 내정을 장악했다. 시리아의 북부의 땅은 현재 터키의 영토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터키 국민들은 다시금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이스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울루를 투옥시켜 전 국민의 분노를 샀을 때, 여태까지 사형 판결을 받고도 갇혀 있던 쿠르드족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과 거래해, 극단 쿠르드족인 PKK의 무장을 해산시켜 터키에 대한 테러리즘이 사라졌다고 공표해 이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마모울루의 투옥에 항거하여 저항하던 시위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타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에르도안의 정치력만큼은 세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창 열기를 뿜던 홍콩 민주화 시위는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집회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홍콩 민주화 시위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게다가 전 세계가 펜데믹에 주목하는 바람에 홍콩 시위는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결국 미국 폭동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이를 통해 폭동이 자연스럽게 해산되게 만들고 본인의 정치력을 극대화하는 이득을 챙겼다. 그냥 장사치 경제인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정치 능력 또한 많이 성장했다. 이제 트럼프는 매우 노련한 정치력까지 갖춘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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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6
  •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 휴전의 의미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완전하고 전면적인 휴전을 하는 것으로 완전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중동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 이유는 트럼프와 미국의 중재 및 그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란은 미군 폭격기가 핵 시설을 공습한 지 하루만에 보복으로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قاعدة العديد الجوية) 미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날렸다. 이 기지는 카타르 도하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군사 기지 중 하나이며 아부 나클라 공항 ( مصار ابو نهلة ) 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 에미리 공군, 미국 공군 (USAF), 영국 왕립 공군 (RAF) 및 기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 중부사령부 전방 본부, 미 공군 중부사령부 본부, 제83원정항공단(RAF), 그리고 미 공군 제379원정 항공단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지는 중동 미 공군 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아시아 미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이 보복할 카드, 이란의 보복 선택은 미군 기지 공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강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는 하는 척 행세만 하고 만 상황이 되었다. 이란은 카타르에 날린 미사일 수가 미군이 이란 핵 시설에 투하한 폭탄의 수와 같았다.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카타르에 약 10발의 미사일이 발사됐고 최소 1발이 이라크를 향해 발사됐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으로도 미사일을 날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바레인은 자국 영공 내 항공편 운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를 빚어왔다. 미국의 비어있는 세 곳의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지만 양측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리고 보복이 끝나자 카타르의 총리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Sheikh Mohammed Bin Abdulrahman Al Thani)가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이란은 종전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멈추고 휴전을 하면 이란 또한 휴전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명확시했다. 미국과 네타냐후는 이란이 공격을 멈추면 이스라엘도 휴전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휴전 합의안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종전이 아니다. 이란의 12시간 휴전(공격행위 중단)과 이스라엘의 12시간 휴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종전안'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이는 일시적이다. 그리고 미국과 트럼프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앞서 비슷한 맥락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지만 휴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군 작전을 전개했다. 명백하게 휴전 원칙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해 이 또한 미국과 사전 협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란이 이를 온전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휴전을 한 것은 양측의 폭격으로 인해 서로 간의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좋은 면일까? 우선 이스라엘은 파괴된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 이스라엘 각 도시들을 재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언 돔, 다비즈실링, 에로우 시스템, 사드, 페트리어트 등의 방공체계에 미사일들을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 동안 이란과의 폭격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부분 미사일이 소진되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이스라엘은 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재정비가 필요하고, 미국의 지원품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내부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면서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네타냐후는 정치권 내부도 정리하면서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는 측면이 크다.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휴전이 절실하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휴전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모양새도 빠질 뿐더러,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이란에게 패배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선택한 것이 미국을 움직여 휴전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파괴된 지역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잇단 군 총책임자들이 제거되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정식으로 인선하고 군의 사기를 독려해야 한다. 즉, 이란도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 40년 넘게 축적해온 미사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방어시스템을 총 점검하여 풀 가동시키고, 휴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물이야 어차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 이는 우려할 바가 못 된다.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이란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해 이스라엘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미군 기지를 공격해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렸다. 이스라엘이 하메네이 정권 붕괴를 노리고 접근한 전략 또한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이란 국민들만 단결시켰다. 하메네이에 저항적인 야당 의원들도 이란의 승리 기원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이란은 스스로 단결 및 단합에 성공했다. 이번 휴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단결과 단합을 루즈하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는 아직 전쟁 중이므로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세계 최강의 방공망들이 무력해졌음을 드러냈다. 2~300개를 날리면 풀 충전한 상태의 이스라엘 방공망들은 대부분은 요격에 성공할지 몰라도 요격시키지 못한 것에 우라늄을 농축해 만든 소형 탄두를 탑재시킨다면 2~300개 중에 적어도 10개는 떨어질테니 그로 인한 엄청난 폭발력으로 초토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율 100%라면 모를까 8~90%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풀 충전됐을 때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 되었고, 이란은 여기에 힌트를 얻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우라늄 농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시간이 지나 방공미사일이 소진됐을 때, 최강의 이스라엘의 방공망은 이란의 끊임없는 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취약점을 노출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을 통제하고 막아도 일반 시민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이스라엘 피해의 영상들을 각 네트워크에 올렸고,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이 올려 놓른 개인 영상들 덕택이다. 어떤 영상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불벼락이 떨어지듯 수없이 낙하하는 이란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보기도 했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이스라엘의 방공미사일을 보기도 했다. 요즘 같이 온라인 플렛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도를 통제하고 언론을 통제한다고 진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란은 이로써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지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무지막지한 미사일과 드론들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과제로 남았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소진시키기 위해 최대한 드론 제작의 수를 늘릴 것이고, 이번에 출정시킨 드론이 300대에 이른다면 다음 계획은 3,000대를 한꺼번에 출격시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공망을 소진시킨 다음 미사일 수백발을 쏘아 올리면 이스라엘은 다음 방어가 어렵게 된다. 즉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거의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 발사대를 타겟으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발사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에서 수입하면 된다. 한편 협상을 중재한 미국 또한, 전면전으로 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 또한 하나의 약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들리는 미국 내의 소식통들에 의하면 미국은 현재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협상보다는 이란 내에 상륙해 전격전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폭격을 이란에 가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것과 유사한 작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군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란의 지형은 아프가니스탄보다 험준하다. 마주하게 될 것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게릴라들일 것이고,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게 자명하다. 그리고 그만한 준비조차도 되어있지 않다. 게다가 미군은 자국의 제조업 상황도 그리 좋지 않으며 희토류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어 첨단 무기 생산하는 것도 상당 부분이 제동이 걸려 있는 판이다. 예전의 미국이었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없었다. 그냥 치고 들어가 융단 폭격과 더불어 지상군이 진입해 적을 제거했다. 그렇게 희생된 인물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란의 가셈 솔레이마니, 오사마 빈 라덴 등이다. 그러나 미국은 공격 이후, 협상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유화책이라 볼 수 있고, 트럼프의 공약 중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반하는 경우일 수도 있기에 이런 저런 딜레마에 걸려 있다. 그리고 미국의 위상 약화도 문제다. 여태까지 트럼프가 걸친 국제 문제에 단 한 건도 속시원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마치 큰 불은 잡았다 할지라도 잔불 처리를 하지 않아 다시 큰 불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의 신뢰도를 깎아 먹은 셈이 된 것이고, 그의 말은 동의해주고, 따라주는척 하면서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된다는 식의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이라 볼 수 있겠다. 중동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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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5
  • 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 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B.C 900년에 사카 계통의 종족들이 점차 서진하면서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얌나야 문화를 영위하고 있던 민족들을 밀어내면서 또 다른 대이동의 시작이 이루어진 이후, 카프카스 지역에도 새로운 종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B.C 9세기 내내 유라시아 전 지역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극동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유라시아 땅에서 정주민에 대한, 또는 정주국가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B.C 822년 사카의 영향을 받은 서부 중앙아시아, 키질쿰 지역의 유목 부족들이 남하하여 힌두쿠시 지역을 공격했던 전쟁, B.C 824년에서 B.C 823년까지 역시 사카 종족의 대이동에 따른 영향으로 인더스 지역에서 농민들과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쟁을 벌인, 이른바 인더스 내전, B.C 821년 이란 북부에서 메디아 왕국과 또 다른 사카계 민족인 사르마트 족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메르브 전투, B.C 816년에서 B.C 815년까지 카스피 해 남부 타바리스탄의 도시들이 아시리아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B.C 858~B.C 824)의 이민족 탄압 정책에 항거해 아브작(Abzak)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와 싸운 ‘아브작 전쟁’, B.C 826년부터 B.C 823년까지 8차례나 벌어진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와의 전쟁 등 각종 약탈 전쟁도 이어 발생했다. 약탈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각종 학대와 학살로 단순화하여 서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이미 정주 국가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각 약탈을 빌미로 상대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주 전장지인 서부 이란 지역의 경우, B.C 815년 9월에 메디아와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흐샤트리타(Khshathrita)를 이어 메디아의 왕으로 즉위한 데이오케스(Deiokes)는 젤리라바트(Cəlilabad)에서 메디아와 사카의 일족인 파르시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파르시 족이 메디아 왕국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데이오케스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에 정착한 파르시 족들이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메디아 국왕에게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사카계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파르시와 달리 메디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엘람 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인 조로아스터교를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비록 파르시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메디아 시민들이 파르시와 통혼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메디아의 왕은 파르시 인을 후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메디아 왕국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보호자로서 수메르 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아시리아와 소수의 북방 메소포타미아 원주민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중동은 정주민과 유목민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약탈을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B.C 9세기 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져온 상업적인 부흥으로 고대 중동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면서 다량의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B.C 8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하여 중동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중동의 도시 인구의 4분의 3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바빌론의 경우 B.C 7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5,000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5,000명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수메르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매우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들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역청을 발라 석성을 쌓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늘어난 병력 수요를 고대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도시 국가 왕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후와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각 귀족들의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가난해져서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측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화제로 전소된 가옥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부유해지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이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와의 또 다른 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 도시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맞게 아시리아 제국처럼 단일 통치 국가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바래왔었다. 그래서 국왕들 일부가 아시리아와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각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B.C 810년 이후 생긴 파르시의 존재는 각 도시 국가의 야심들에 부응해 파르시 부족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아시리아에 속한 북부 수메르의 국왕들은 반대로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한 독립을 염원했고, 그와 같은 목표 의식들은 다른 수메르 도시 국가의 국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이미 데이오케스 왕 때 메디아와 하나였던 파르시는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사카, 스키타이 민족이라는 인연으로 이란 지역에서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메디아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파르시와 두 종족과 국가를 양쪽으로 상대하던 아시리아를 긴장시켰다. 특히 메디아 왕국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아시리아나 시리아와 같은 인근의 강대국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미 B.C 790년대 초에는 유프라테스 강, 자그로브 산맥, 지중해와 카스피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B.C 788년, 무려 3개의 혜성이 나타나면서 오리엔트 지역의 정치권에는 일종의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많은 점성가들이 이를 분석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종교는 종교일 뿐, 큰 사건, 한 시대가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B.C 7세기 말, 파르시 족은 중부 이란과 남부 이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180만㎢, 인구는 20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였다. 그 국가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아케메네스는 사트라프(Satraf)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는 그 출신이 불분명했지만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 중의 왕이 수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영토의 오리엔트에서 북적대며 거주하던, 200만의 인구인 수메르,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는 적극적으로 강병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의 엘람과 북쪽의 메디아 왕국을 병합해야 했다. 이는 남쪽의 엘람을 정벌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북쪽인 메디아 왕국과 협상을 통해 통합하여 이란 자체를 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아리아 인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다. 이는 한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치적인 논리에 있었다. 더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도 대군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립된 지 아직 반세기 정도 만에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매우 넓어지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도 닿지 않는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했다.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 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복속시킨 지 얼마 안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후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파르시 족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가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분리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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