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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티마 왕조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레반트 및 지중해에 끼쳤던 영향
    파티마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이맘으로 집권했는데, 이는 본래 이슬람에서 예언된 메시아인 마흐디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그와 같은 문구를 게재했던 것이다. 이 분파의 기원과 왕조 자체는 9세기 후반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티마 통치자들은 창시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 빌라를 시작으로 대부분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소카빌리아(Socavilia) 출신의 쿠타마 베르베르 족은 일찍이 파티마 왕조에 의해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여 그들 제국의 군대를 구성했다.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 및 압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적인 수니파 칼리프들을 찬탈자로 여겨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의 후손들만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알 후세인을 통해 이맘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 올바르게 이끄는 자)" 및 "카임(Qāʾim, 일어서는 자)"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분파되어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이후 이와 같은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 Sadiq)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알 사디크는 아들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765년 알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때 그의 후계자 자리는 공석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알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후일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의 아들이자 알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를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차용하여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압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id, 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압바스 왕조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와(Daʿwa, 초대 / 부름)라는 말을 전파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의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러한 비밀 연락망의 수장은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훗자(ḥujja)였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Abdula Al Akbar, 연장자 압둘라)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 선교의 주요 "원로(Grand Master)"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인해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정치적인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면서 널리 분파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882년 예멘과 884년 인도, 889년 바레인, 페르시아, 마그레브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닌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주장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는 알 후세인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 및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심지어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이맘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며, 이로 인해 수니파 및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압둘라의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 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했고, 후일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파티마 왕조의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압바스 왕조의 빠른 대응과 그것이 그에게 가져온 관심은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그곳은 이스마일파 선교사였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 카와리지파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한 마그레브의 상당 부분이 명목상으로 봉신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비아 왕조인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Ikjan)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바누 사크탄(Banu Saqtan,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에게 마그레브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탄압과 다른 쿠타마 부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Tajrut, 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Banu Gashuman)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에 대한 지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라비아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동맹을 맺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와 같은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설득이나 강요를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 선교식 연합적인 부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과의 관계 및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알 후세인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 조직의 수장에서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 시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Balazma)에서 아라비아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Nafusa) 산에서 하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Aglav Amir Ibrahim III)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알 쉬이는 콩스탕틴(Constantin) 인근의 밀라(Mila)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큰 저항을 못하고 당했는데, 두 차례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그의 비밀 연합을 재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 승계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Jiyadat Allah III)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쟁취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 된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이는 알 쉬이가 이끄는 베르베르 군대가 밀라를 탈환하고 다음 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Setif)를 함락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는 후일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놓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Kayuna)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군의 장군은 급히 도주해야 했으며 쿠타마 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Mudli Ibn Jakariya)의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 아글라브 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Tubna)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 왕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Rakada)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Bagaya), 티지스(Thizis) 요새를 연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왕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Al Arbus)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서로 간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 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Chotel Zerid)를 장악하고 투주르(Tujur), 나프타(Napta), 가프사(Gapsha)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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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로마 공화정의 행정, 입법은 당시의 기준으로써 매우 선진적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폴리비오스(Folivios) 등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우수한 정치 체제로 찬사 받았다. 특히 공화정은 Res Publica의 번역어로 나타나는데 이 뜻은 원래 “공공의 것” 혹은 “공동의 부”를 의미하며 사적 문제나 사유 재산과 반대되는 뜻으로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지칭했다. 이 말이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B.C 5, 4세기에 발전한 로마의 공화정을 뜻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 다만 귀족 계층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두고 있는 형태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헌법은 다양한 성문법과 로마 특유의 불문법, 관습에 기반 하여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헌법이라 볼 수 있다. 로마 헌법의 기본적 구성은 로마 왕국 시절의 헌법에 기반 하여,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변모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로마 특유의 공화적인 전통은 제정 시대를 지나 후일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헌법은 크게 세 가지 집단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도시국가의 과두 정치 체제의 중요 원리를 두고 운용되었다. ① 로마시민권자로 구성된 민회 ② 선출직 공직자 및 치안판사에게 조언하고, 그들의 법적 권위를 존중하며 행동하는 원로원 ③ 로마시민권자가 선출한 선출직 공직자(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재무관 등) 따라서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평민은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었고, 민회는 그들의 이익을 이론적으로 보장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정을 통치하는 것에 필요한 종교, 군사, 사법권을 행사하는 선출직을 돕거나 이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여러 성문법과 관습법을 통해,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신분의 로마시민권자들은 담임 권을 보장받고 집정관, 호민관은 법률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B.C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위급 직급인 집정관, 고대 그리스의 아레오파고스보다 더 진보적인 의회인 원로원, 민회인 호민관과 같은 제도가 정착했고 원로원 중심의 과두 정치 체제가 안정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후기 공화정 체제로 불린 B.C 2세기 이후, 여러 혼란과 내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공화정 체제의 여러 제도가 위협 받게 되었다.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통솔권 정쟁 이후, 술라 체제가 들어서면서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술라 개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으며, 이는 계속된 내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장기간의 내전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종식되었고, 그가 사실상 유일무이한 로마의 제1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형식적인 공화정체-실질적인 제정(Publicum formale regimen - practica omissum)”으로 불린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의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 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가졌고, 재정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평가 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 정체가 발달하면서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강해지게 된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Curia)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회(Comitia Curiata), 최소의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부족 지역구(Tribus, 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B.C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가 생겨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정무관(Roman Magistrate, Magistratus)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를 보유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평민 조영관은 예외로 독립적인 관직이었다. 공화정 시기 각 정무관은 법에 따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오직 로마의 인민으로 알려진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였다. 여기에서 파트리키 최고의 권력을 명령권(Imperium)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집정관과 법무관이 보유하였다. 더불어 명령권의 경우, 군사 지휘권에 있었다. 또한 모든 정무관은 강제 권한이 존재했다. 이를 통해 정무관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시민들은 강제 조치에 대해 절대적인 보호권(Provacativo)을 갖고 있었다. 정무관은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한편 신의 전조(징조, Omen)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종종 정적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무관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는 상호성(Collegiality, 共治)이 존재한다. 이는 독재를 막기 위해 각 정무관 직위는 최소 두 명 이상이 맡았던 것이다. 다른 견제 수단은 보호권(Provocativo)인데, 이는 적법절차의 초기 형태로 오늘날 인신 보호 영장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어떤 정무관이 국가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 시민은 호민관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정무관이 자신의 1년 임기를 마치면, 향후 10년 동안 해당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 제도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명령권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무관은 임기가 끝나 공식적인 직위가 없어도, 사실상 정무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이를 대행 정무관(Promagistratus)이라 한다. B.C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기능에 주목하여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Mikte)로 규정하고, 이 세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격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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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1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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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7-10
  •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과연 끝날 것인가?
    최근에 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방공 미사일과 정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적 분쟁으로 인해 과도한 대외 군사 지원으로 무기의 국내 비축 물량이 부족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했단 미사일들과 정밀 무기들의 화물 선적을 중단시켰다. 지금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우선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에 약속한 군수 물자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트럼프가 대선 전부터 언급한 공약 중 하나였기에 우선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주 3일에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전을 보낸 것도 있지만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여 그의 본심을 떠보려는 전략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두 정상의 통화는 벌써 5번째로 둘은 아직까지 만남을 서두르지 않은 채, 통화로만 이어가며 대화의 창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통화에 대한 푸틴-트럼프 측이 내놓은 결과 발표는 이전의 4차례 통화했던 내용들과 전혀 달랐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크레믈린 외교 담당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두 정상이 거의 1시간 동안 전화로 의견을 나눴으며 늘 서로 통했고, 솔직하고 업무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Два лидера говорили по телефону почти час, постоянно общаясь друг с другом, оставаясь откровенными, деловыми и конкретными)."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전투의 빠른 중단 문제를 재거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특수군사작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전달했다(Президент Трамп поднял вопрос о скорейшем прекращении боевых действий на Украине, однако президент Путин заявил, что не откажется от цели проведения специальных военных операций по устранению коренных причин конфликта)."고 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이어진 협상에서 밝힌 부분은 매우 일관적이다. 새삼스럽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무조건적인 휴전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계속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지만, 휴전이나 종전에 관련하여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대화는 트럼프의 발표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홈프는 자신의 SNS인 트루스 소셜에 "매우 긴 대화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평화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It was a very long conversation, and we talked about the war in Ukraine, and I was not happy. There was no progress toward peace)."고 부정적으로 썼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정말 실망스럽다(Really disappointed)"고 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그것은 바이든의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하며 러시아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트럼프가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4차례의 대화가 이어진 동안 이처럼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 대화에서 처음으로 서로 간의 주장이 충돌하고, 이에 실망한 트럼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의 대응이 러시아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면,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일종의 조율되어진 핑퐁 게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도 그와 같은 핑퐁 게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의 대응이 매우 부정적인 상태에 나타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와 휴전 협상이 사실상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미국이 그 동안 자제해 왔던 대러 제재가 다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시기에 수많은 제재를 했지만 러시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국가들과 교류하고 자국의 제조업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왔다. 따라서 트럼프의 대러 제재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기에 이 카드는 쓰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대신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음 날인 4일,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를 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젤렌스키에게 그대로 전달하면서 젤렌스키에게 어느 정도 살 길을 열어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속 좁은 속 내에 있다. 트럼프는 취임 이전부터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다면 푸틴과 협상을 잘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푸틴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당시 퇴임한 직후, 메르켈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재무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면서 푸틴 대통령의 뒤통수를 쳤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도 개인적 친분으로 인한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 게다가는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다. 이를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려 했다면 트럼프가 실수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트럼프의 비위는 크게 상했다. 트럼프의 속 좁은 성정으로 인한 국정에서의 영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대 우크라이나 지원은 그의 상한 비위로 볼 때, 다시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벌써 4일, 젤렌스키와의 통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 방공 지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공급이 보류된 부분이 있다면 점검하겠다"면서 방공 부문에 있어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보도했다. 또한 양국 실무자들이 다시 만나 방공 분야는 물론, 다른 무기의 제공 문제도 논의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또한 4일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와 우크라이나의 방공 역량에 대해 논의했으며, 공동 생산 등 방공 부문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면서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 특히 드론 및 관련 기술은 안보에 매우 중요하기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 러시아의 드론 공격에 적ㄷ극 대비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트럼프-젤렌스키의 전화 통화는 영국과 EU 또한 주목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을 정도다. 트럼프가 4일 젤렌스키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미국의 무기 공급 중단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명확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이를 위한 후속적인 실무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 사항인데, 두 정상이 풀지 못한 사안인 무기 공급 재개에 대해 양국 실무자들이 결론 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미 국방부의 무기 공급 중단 결정이 모두에게 있어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미 국무부, 미 하원의원들도 국방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놀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관리들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특정 무기인 방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The United States has suspended all types of military support, including specific weapons such as air defense missiles)."고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볼 때 이 같은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정치적인 양보를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진 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무기 제공 중단 조치의 시점도 참으로 절묘하다. 젤렌스키는 지난 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를 단독으로 만났다. 트럼프는 회담 이후, 키예프가 패트리어트 방공망의 지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도 필요한 무기라고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사정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젤렌스키는 헤이그에서 방공 미사일을 추가적으로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는 오히려 예정된 공급 물량마저 차단했고, 트럼프는 이후 4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도 젤렌스키에게 무기 공급의 간만 보았지 실제 지급 재개에 대핸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무기 제공 재개를 두고 젤렌스키를 지렛대로 삼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자극시키고, 평화 협상에 임하라는 일종의 "지렛대형 압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서 "매우 전략적인 대화였다(It was a very strategic conversation)."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질문에 그들을 돕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공급에 대해서는 그들에게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방공망 형성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미사일이라 대답하여 즉답을 회피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해서 매우 불만스럽다고 말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의 휴전 요구를 조롱한 것이 아니냐며 질문한 기자에 대해서 그는 미국 상원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를 재개하는 조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의 제재에 잘 대응해 온 전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는 말하기 어렵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매일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원칙적인 답변만 고집했다. 트럼프의 기자 회견들을 종합해 보면, 푸틴 대통령의 군사 행동 의지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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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0
  •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페르가나 주 도시 안디잔과 대우그룹의 인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의 천연 자원은 석유, 천연 가스, 지랍, 석회암이 있다. 산업은 금속 가공, 화학 산업, 광산업, 식품 가공업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 조립 공장이 안디잔 주에 있는 아사카에 세워진 상태이며, 공장에서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 미니버스를 생산한다. 세계 1위 면화 생산 지역이며 원유와 가스, 금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된 계획경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경제개혁도 속도를 못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 지역은 가난이 만연해있고 실업률도 높다. 1992년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대우그룹에서 목화, 지폐 생산용 종이 등의 원자재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져다 쓰는 대신에 정부와 합작으로 법인을 운영하는 방식의 법인을 차리기로 했다. 당시 대우 측에서 승용차 수입 또한 조건들 중 하나로 내세웠고,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자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서 생산한 르망과 에스페로를 소량 수입 판매하였다. 그런데 이들 차량의 인기가 당초 대우그룹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매고를 보이며 큰 인기를 보이자,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론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됨과 동시에, 차량 생산을 현지에서 시행한다는 계획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추가로 중화학 공업 육성 각서를 체결하여 우즈 대우 법인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초의 자동차 생산 국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우 입장에서는 유럽 및 제 3세계 진출의 교두보 설치라는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양측 모두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대우의 투자로 결국 1996년 1월, 이곳 안디잔 아사카 지역에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아사카 공장에서 대우자동차는 현지에서 티코, 레이서, 넥시아, 라보, 다마스, 에스페로까지, 총 6종의 차종을 연간 10만대 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제3 세계 진출형 교두로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1996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된다. 안디잔에서 생산된 차종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옆나라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대외 수출에서도 대우 브랜드의 비호 아래 큰 호조세를 보여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이미지 및 낙후한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지역 재정을 해결하는데 있어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라본으로 브랜드가 바뀐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대우에 대한 큰 사랑을 보이며 라본 브랜드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불거진 경영문제가 1년 이상 지속되자, 결국 같은 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우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철수하자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제너럴 모터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상대로 공장 입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덕택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정부 측과, 대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우즈베키스탄 국민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제너럴 모터스의 인수는 기존 대우자동차와의 라이센스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2002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강한 주도로 기존의 대우자동차 모델들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또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현지에서 있었던 대우자동차 출신의 인력들을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고용하여 은퇴하거나 사임한 이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이들이 중용되고 있다. 필자는 몇 년전, 몇 차례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페르가나, 나망간, 안디잔)를 방문하면서 이 지역들의 경제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했다. 석유를 비롯한 다양한 광물자원과 각종 농산물들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와 갑을방적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진출한 것도 값이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때문이었다. 더불어 동부 페르가나 지역에 속한 안디잔 지역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선 것은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가 20년 동안 지켜온 한민족 전통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안디잔과 페르가나, 나망간의 고려인 사회는 주 정부 인사와 지역의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0년에 처음으로 음력설과 단오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후 한민족의 전통 명절이 회복되었는데 그 중에 음력 5월 5일 단오 행사가 특별하다. 2005년과 2009년, 우리 정부의 고려인 정책은 여전히 수도인 타슈켄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브랜드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과 한국 기업인들의 투자를 희망하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 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 강화에 동부 3주의 고려인 사회가 이를 기여할 수 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우즈베키스탄 동부 3주에서 한국은 꿈의 나라이고 한국어는 최고 인기 과목이다. 이는 그동안 고려인 사회가 쌓아온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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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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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9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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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6편 (완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면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1920~2012)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Bob Dylan),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6~1978)과 링고 스타(Ringo Starr)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와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주었던 현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판단된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같은 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인도가 친소국가였고,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공산세력을 확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해석하고 즉각적인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해군 제7 함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 막바지인 것도 있지만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도 캄푸치아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놓여 있었고, 한국 또한 북한과의 긴장완화를 위해 대화에 나서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남아시아 지역 강국인 인도에게 자신들의 인도양 전략을 위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대해 그 민감함에 이해는 하였지만 어처구니 없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매우 불쾌해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강제로 들어오려 하는 격이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도 내에서도 격렬한 반미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파키스탄을 도울 생각은 없었고 인도는 그러한 미국의 속셈을 간파해 미 군함이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이 마냥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물적, 양적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후원하고 있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고, 라이벌 국가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련은 만약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 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소련은 인도, 방글라데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 함대 제10 전투단을 벵골만으로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 미사일, 이를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더불어 소련군의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 전투단은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 해치를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 시위에 밀려 퇴각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견제는 결국 3일 뒤 독립전쟁에소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파키스탄 지원을 강행하여 소련군과 정면으로 맞서려 했다면 제3차 세계대전에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황이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당시 친중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인 지원을 했다. 중국은 인도-중국 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인도와 1979년에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에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과 친중국가인 파키스탄이 인도와 방글라데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승전의 보복으로 방글라데시의 UN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는 마침내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던지 말던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뒤이어 방글라데시를 국가로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했으며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선거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방글라데시 내부에는 친파키스탄 정당과 무지부르 라흐만의 아와미 연맹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친파키스탄 세력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 안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내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사회 체제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반발도 극심했다. 1975년 1월 당시 의회에서는 아와미연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파키스탄과 친밀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당들이었다. 현재와 달리 아와미 연맹은 단순한 정당이 아닌 독립 운동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친파키스탄 정당을 해산하고 독립 운동 연합체인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와 같은 숙청 과정에서 군 내부의 파키스탄 부역자 출신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장교들이 8월 15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군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친파키스탄 부역자들이 파키스탄에 다시 복속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실질적인 군사 활동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민병대인 묵티비하니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다. 묵티비하니 세력은 독립이 이루어진 후, 국내로 돌아온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군인 집단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조직력이나 무장에서 수준이 한참 떨어진 단순한 민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파키스탄과 같이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들이 방글라데시 군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군부는 자연스럽게 묵티비하니 출신 계파와 파키스탄 정규군 출신 계파, 2개의 파벌로 갈라지면서 군부 또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1975년의 쿠데타는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등 파키스탄 출신 군부 세력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아 자행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집단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파키스탄과 분리된 자주 국가를 세우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새벽 5시경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거주하는 사저에 침입했다.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두 딸을 제외한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의 일가족 전부가 쿠데타 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당시 살해 당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10세(1964~1975)에 불과한 라흐만의 막내아들 셰이크 러셀(Sheikh Rusel)도 있었다. 무지부르 라흐만의 사저는 쿠데타 직후 정부에 귀속되었지만 몇 년 후, 셰이크 일가가 국가에 돈을 주고 되찾아 왔으며, 1994년 무지부르 라흐만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이 사저는 무지부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는 곳이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과도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어서 국가사적지로 등록되었다. 그래서인지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들은 이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2016년에는 존 케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군부는 무지부르 라흐만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독립 운동의 주축 정당으로서 민중들의 지지가 높던 아와미 연맹을 건드리지 못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1990년에는 방글라데시가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한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살해된 지 21년 뒤인 1996년에는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가 되었다. 하시나는 집권 직후부터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했던 법률을 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까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살해에 가담한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여러 공직들을 담당하며 가장 잘 나가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시나의 집권 이후, 모두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와 암살 사건 발생 후, 무려 35년이 지난 2010년에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에 직접 가담했고 쿠데타에도 가담한 군인 12명 중 5명이 처형되었으며, 4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국외에 도피 중이던 1명이 방글라데시 국내로 송환되어 처형당했다. 다만 나머지 쿠데타 군인 6명은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도피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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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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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 이슬람의 이스마일파의 분파, 카르마트파에 대한 이야기
    카르마트 파는 이슬람의 이스마일 파의 한 분파로 899년경, 카르마트 파의 주류는 후의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였는데, 사와드(Sawad) 같은 종파의 책임자 함단 카르마트(Hamdan Qarmart)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했다. 이 때의 그의 행동을 지지한 사람들을 카르마트 파라고 불렀다. 또한 바흐레인(Bahrein), 예멘, 레이(Rei) 등, 이 정파의 조직도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가계를 이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카르마트 파라고 불렸다. 이라크 남부, 사와드의 교단들은 시리아에 진출해서 10세기 초에 크게 활약했는데, 압바스 왕조 군대의 토벌을 받아 907년에는 사와드, 이어서 시리아의 카르마트 파의 세력들은 일거에 쇠퇴했다. 정치적으로 가장 활발하였던 것은 바흐레인의 교단으로 무미니야(Muminiya)라는 수도를 축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사와드에도 간혹 무력으로 침공하고, 또한 930년에는 메카를 습격하여 카바의 검은 돌을 바흐레인에 가지고 돌아왔다. 바흐레인의 교단은 11세기 후반 무렵까지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결국 소멸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계파의 영향은 아가 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8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7이맘파라고도 한다. 제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제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로 보인다. 이것과는 달리 12이맘파는 자파르 알 사디크(Zafar Al Sadiq)의 차남 무사 알 카딤(Musa al-Kadhim)을 제7대 이맘으로 세웠다. 장남인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Zafar)는 자파르 알 사디크보다 먼저 사망했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수니파 이슬람에 환생이나 윤회에 관련된 교리는 없지만 이스마일 파에는 전생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교리가 있다. 이스마일 파는 전통적인 시아파 교리에서의 마흐디(구세주) 관련 교리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으며 이스마일 파 이맘이야말로 진정한 이맘이라고 선언했다. 카르마트의 사상은 기존의 이슬람 사상과는 크게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샤리아의 폐지를 주장했고 샤리아 법 제도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의 부활도 부정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또한 부정하는 것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시아파의 분파로 분류되었지만, 사이드 알 마으루프(Said Al Mhrup, 마흐디)에게서 결정적인 오류를 발견한 이후 시아파의 이맘조차 거부하고 독자적인 진리로의 믿음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주 이질적으로 나타난다. 카라미타의 군대는 일반 무슬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으며, 많은 순례객들과 낙타 대상도 공격하였다. 카르마트 파가 930년 메카를 습격할 당시, 난폭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순례의 의무를 폐지시키고, 이슬람의 순례, 단식, 예배 등이 내적 의미만을 지니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일 뿐이라는 이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카르마트 파는 강경한 채식주의를 고수하여 바클리야(Al-Baqliyyah), 채소 상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카르마트 파의 조직은 마치 공산당 조직과 흡사했으며, 사회주의의 원시적 형태로 언급되기도 한다. 중세 파티마 왕조는 이맘의 승계와 역사의 종말론적 순환개념을 재 정의하여 자신들이 제6대 이맘의 주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구세주의 등장과 역사의 종말은 먼 미래로 미루어졌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해당 이론으로 인해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여러 개념들이 이스마일파의 사유방식에 혼합되었다. 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카르마트 종파의 신자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발티스탄(Gilgit Baltistan)과 아자드 카슈미르(Azad Qashmir), 인도령 카슈미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지방의 일부 종파 신도들이 거주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 극소수가 존재하고 있다.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리 파의 제44대 이맘 하산 알리 샤(Ḥassan ʻAlī Shāh, 1800~1881)가 페르시아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북인도로 이동했으며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는 1971년생 아가 칸 5세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가 칸은 공식적인 영토는 없지만 14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와 1,500만 명 이상의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한 국가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 및 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 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강하며, 이스마일 및 니자리 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아가 칸 4세는 극단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스마일 파를 세속, 온건 성향으로 개혁하는 인물로 이스마일 파 소수민족들이 사는 산간 일대에 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지어주고 투자해주는 정책을 통해 이스마일 파 신도 전반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악명 높은 극단파 암살단의 후예가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세속주의 온건파로 바뀌었다. 아가 칸 가문이 유럽 대륙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지가 오래되었고 아가 칸 4세만 해도 이미 혈통의 1/2이 유럽인이며 영국에서 영국인으로 성장한 데다 아가 칸과 아들들도 유럽 및 미국인과 결혼했으니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아무래도 서구적 가치관에 익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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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 무슬림 이민자들로 인한 포르투갈의 사회문제와 현 미국 LA 폭동 및 사회문제의 유사한 현실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로 건너온 흑인 무슬림들이 포르투갈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무전취식에 욕설에 더럽게 공공시설을 쓰는가하면 관광객들의 돈을 뜯고 떼거지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닌다. 그리고 마리화나 같은 마약도 몰래 팔고 있다. 대개 불법체류자가 많아 범죄가 발생하면 포르투갈 경찰도 손쓰기 힘들다고 한다. 불법체류자의 경우 지문이 등록되있는게 아니니 잡기 쉽지 않다. 게다가 나이지리아 이슬람 무장세력 보코하람이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포르투갈을 선택했다는 설이 나오면서 당국도 긴장하는 상황에 있다. 비자를 강화하고 아프리카 불법체류자 단속하면 인도주의나 인권을 중시하는 인권주의자들이 포진해 있으니 그것도 골치 아픈 문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대개 EU에 포진되어 있고 이자들은 EU의 진정한 적폐다. 이런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면 이들 인권단체들은 떼지어 들고 일어난다. 그러다가 해당 국가에 범죄가 발생하면 결코 범죄피해자를 옹호하고 규탄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법체류자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여 동정론을 이끌어내 가해자들인 불체자들을 변호하기 바쁘다. 그렇게까지 비난을 받으며 가해자인 불체자들을 옹호하는 이유는 다른거 없다. 결국 돈 때문이다. 이들은 EU에서 매년 수억 유로씩 예산을 지원받으며 아프리카 난민, 중동 이슬람 난민들을 돕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들을 살기 좋은 유럽에 정착시키고 온갖 혜택을 주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불체자들의 행위를 배격하고 피해자를 옹호한다면 자신들이 세웠던 명분이 무너지고 EU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체자들을 옹호해야 하는 것이다. EU에서 예산이 수억 유로씩 나와야 불체자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횡령도 하고 인권단체의 명분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대개 유럽에서 돈벌려고 들어오는 타국 불체자들 중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스페인-포르투갈로 입국하는 흑인들이 많다. 질 좋고 유럽 사회에 도움이 되는 흑인보다 질 안좋고 남 괴롭히는걸 좋아하는 흑인들이 한몫 챙길려고 유럽에 오는 것이다. 고로 그런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그런 질 떨어지는 흑인들을 EU 소속 인권단체가 불쌍하다며 안아주자하니 당연히 그런 편견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슬람을 연구하고 전공한 학자로써 그에 대한 입장을 말하자면 7세기부터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기독교처럼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여태까지 그와 같은 이슬람 개혁을 외치는 이맘들이 있었지만 대개 최후가 좋지 않았고 꾸란과 하디스, 샤리아에 기초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라도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움직임을 가져야 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 아랍하면 테러라는 문구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흑인 무슬림들 하면 불법체류자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가 세계 종교계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이슬람교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간 흐르면서 진보적인 방식과 형식을 추가하며 변화해왔고 원칙은 유지하되 전 세계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보편적으로 접근 할 수 있도록 변화에 성공한 종교가 됐지만 이슬람은 7~8세기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성향은 종교의 순수성을 떠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리잡았다는 것에서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슬람도 이제 변해야 한다. 지금은 칼리프 시대가 아니고 술탄의 지배하에 모든 것이 용인되는 종정일치(宗政一治)의 7~8세기가 아니라 21세기 세계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반대 지역인 미국에서는 내전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한 이후부터, 전시상황에서 적국의 위험 인물들을 추방할 수 있다는 외적법(Alien Enemies Act)을 근거로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미국이 전시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같은 외적법은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에도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LA와 같은 폭동이 잘 없다. 왜 그럴까? 러시아는 애초부터 이민을 선별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차도 까다롭다. 첫째, 임시 또는 영주권을 취득하려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매우 우호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계 또한 철저한 심사를 거친다. 취업, 학업, 러시아 친척 또는 혈통, 투자 또는 부동산 구매 등의 사유로 이민이 허가될 수 있다. 그리고 임시 거주 허가를 받은 후, 1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둘째, 영주 허가를 받은 후 5년이 지나면 러시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셋째, 러시아어 원어민, 러시아 시민의 배우자, 고학력 전문가, 러시아에 대한 투자자 등은 1~3년 거주 후,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다 했다. 다만 난민의 경우, 최소 5년은 이민청에서 철저히 관리, 감독한 다음 소정의 심사과정을 통해 통과하면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난민이나 이주민들, 불법체류자 등에 대해 매우 까다롭게 관리해왔다. 미국이 LA 폭동과 같은 사태를 맞이한 것은 민주당 정권 때부터 이를 방만하게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권주의자들이 난민과 이주민들, 불법체류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답시고, 이들에게도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를 적용해달라 주장하면서 이것이 적극 법에 반영되었다. 그런 상황에 이제 와서 불법 이민 단속과 대규모 추방을 공언하여 실행하니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애초부터 이 정책은 연방 정부가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하다보니 이를 억제하는 측면에서 반발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인도주의적 사유로 허용되었던 임시 보호 조치들을 일괄 폐기했고 미국 국토안보부(DHS)와 산하 기관인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에서 대규모 불법 이민자 단속을 실시하니 이민자 사회에서의 반발과 그에 따른 저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LA 카운티 전역에서는 시위가 확산되었는데 이같은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일 가능성이 있다. LA 뿐 아니라 미국 연방 도시들 곳곳에서 이와 같은 사태가 터질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이다. LA 현지에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개빈 뉴섬, 캐런 배스 등 민주당 및 캘리포니아 현지 정치인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이민자 단속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6월 7일 저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00명의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로스앤젤레스에 배치하라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이에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자국민에게 군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은 광기"라며 반발했다. 이와 같은 부분들로 볼 때, 민주당을 지지했던 주와 도시들에도 유사한 반발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강제 진압이 거세지게 되면 최악의 경우, 시민들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다. 총기소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은 시민들이 무장하며 저항하게 되면 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다. 이쯤되면 러시아에서 3년 전, 코로나에 걸려 세상을 떠난 자유민주당의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ладимир Жириновский, 1946~2022)가 미국이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서, 선거는 없을 것이고, 트럼프가 미국의 마지막 연방 정부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이상하게 조금씩 맞아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 폭동은 사실 다문화 정책으로 혼혈화 되어 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닥칠 수 있는 위험이다. 이게 비단 미국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원칙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미국의 현 상황을 봤을 때, 마치 로마 제국 말기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미국에 대한 가짜뉴스에만 젖어 "역시 천조국"이라며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미국의 어두운 면과 지금과 같은 최악의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똑똑히 목도해야 한다. 세상 어느 제국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속성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6-10
  • 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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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0
  • 인도 힌두민족주의의 신정체제와 다양성 및 포용을 중요시 하는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1992년 12월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갑자기 공격을 감행해 그 역사가 500년 된, 무굴제국 시기에 건설돤 모스크를 때려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종교적 침해 사건은 또 다른 종교 분쟁을 불러와 전국에서 무슬림들 2,000여 명이 학살 수준으로 무참히 당한 참사로 이어졌다. 이 당시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인도 인민당(BJP) 주요 인사들은 이와 같은 과도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에 유감의 뜻을 밝혔었다. 그와 같은 참혹한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난 올 초 1월 22일에 파괴된 모스크 터에 거대한 힌두교 사원 개원식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행사에 직접 참석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는 당시에 희생된 무슬림들에 대해 어떠한 유감의 뜻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힌두 민족주의만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인도 민족의 자부심이 회복되었으며 기다리던 영광스러운 “새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4,000억원을 들여 지은 이 힌두교 사원은 라마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290,000㎡의 넓은 터에 49m 높이의 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시조인 라마(Ram)왕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파괴된 모스크는 무굴제국 시대 때 지어진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설법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역인데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 모디 총리는 '세속 국가'인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타 문화, 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인 의미를 갖고 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이슬람 제국인 무굴제국의 침략자들이 16세기 이곳에 있던 라마 신 사원을 무너뜨리고 폐허 위에 모스크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개원은 무슬림 정권에게 침탈당한 힌두 문화와 전통, 자부심의 복원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측 전문가들은 이러한 힌두 사원 완공 행사가 오랜 인도 정치의 핵심 가치였던 종교와 정치의 분리, 다양성과 포용을 거부하고 오로지 힌두 민족주의로 일관하여 과도한 우익성향으로 인한 인도 전 지역을 통합해 "하나된 인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인도 인민당은 무굴제국 시절 이슬람에 의해 훼손된 힌두 사원의 복원 운동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모디 총리도 당시 인도 인민당의 실무자로 힌두 사원 복원 운동 캠페인에 참여했다. 1992년 아요디아 참사는 그 와중에 발생한 종교 분쟁의 비극이었다. 인도 인민당은 보수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며 실제로 힌두교 근본주의 성향이 있다 보니 반외국인, 반이슬람 성향이 강하다. 특히 1996년부터 2004년까지의 집권기에 이같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인도식 파시즘 정당"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특히 1998년 5월에는 파키스탄에 대비한다면서 핵실험을 강행했고 파키스탄 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인도 인민당은 당의 이념을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의 힌두 중심 보수주의가 기반이 되었고 실제로 인민당의 초대 당수로 파텔의 사진이 걸려 있을 정도이다. 사르다르 파텔은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더불어 인도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힌두교 중심주의 성향이었던 파텔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찬성했고 파키스탄이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을 적대시했다. 실제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긴 했지만 셋의 성향은 각자 달랐다. 간디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간의 통합을 중시한 반면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는 통합을 중시하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파텔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파텔은 힌두 극단주의, 힌두 민족주의의 시조로 평가되기도 하며 모디 총리가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이 힌두 극단주의 정당은 파텔의 제자이자 그의 정신을 계승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중심이 되어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Rashtriya Swayamsevak Sangh)이라는 과격단체가 결성되었고 리더인 고드세는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해버렸다. 물론 간디의 암살 배후 파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어 그저 의혹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간디의 암살 이후, 힌두 민족주의는 전 인도인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은 한동안 인도 정치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다만 20세기 인도 정국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정당인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인도인들의 신뢰가 떨어졌고 결국 그 대안으로 들어온 것이 현 인도 인민당이라 볼 수 있겠다. 인도 인민당은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의 임원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고 이들은 15억이 넘는 인구와 30여 개의 공용어 등, 구심점이 명확하지 않은 인도에서 언어와 문화가 각기 다른 다수 인도인을 하나로 쉽게 통제할 만한 사상은 오직 힌두교 뿐이기에 이 같은 힌두 극단주의 및 힌두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이 주효해 21세기 들어 하층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이 보수 성향으로 발현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은 극우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도 인민당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을 지지하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과 인도 소수 종교 중 최대라 할 수 있는 무슬림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들과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 갈등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아요디아의 학살이나, 구자라트 지역에서 힌두교도들의 폭동으로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도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보니 극우적인 형태의 힌두 민족주의에 인도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구자라트 학살에는 당시 구자라트 주지사였던 현 모디 총리가 학살에 방관하거나 그의 측근들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어도 솜방망이 처벌 정도 수준으로 끝냈기 때문에 구자라트 지역 무슬림들은 모디 총리를 학살의 공동정범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 모디 총리는 아요디아에 다시 찾아와 올 총선을 앞두고 힌두 사원 개원식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는 고개숙이지 말아야 한다. 더는 앉아 보고만 있지 말아야 한다”며 “라마 신의 정신은 우리 인도 헌법의 첫 장에 나온다. 우리가 라마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서로 다투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모디 총리의 아요디아 힌두 사원 개원 행사 참여는 이번 4월 19일부터 예정된 총선을 겨냥한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당시 행사는 인도 발리우드 스타 등 많은 유명 인사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 생중계 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수도인 뉴델리 등 전국 곳곳에서는 라마 신과 모디 총리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 휘날리기도 했다. 또한 많은 주에서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주식 시장도 문을 닫았다. 이에 대해 인도 내 극우주의자들은 인도에서 그 동안 소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만끽했지만 다수 힌두는 세속주의 원칙에 억눌려 왔다면서 아요디아 힌두 사원은 전 인도 내 힌두화를 위한 시작점이라 언급했다. 이에 무슬림과 시크교가 다수인 야당과 인도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에서는 국가가 종교 행사를 장려하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장벽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한 배제를 더욱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으며 이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현재 모디 총리가 힌두교의 최고 대제사장인 시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힌두교가 국가 공인 종교가 되는 사실상 신정 국가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인도가 힌두교 하나만을 용인하는 신정체제로 가느냐,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앞세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세속 체제를 유지하느냐, 이는 힌두민족주의와 민주세속주의의 갈림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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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구의 반을 나눠 먹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다.
    대항해 시대 당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발견하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도로 진출하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두 국가가 전쟁까지 갈 정도로 그 경쟁이 심화되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에 나서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라는 도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양에서 새로 발견되었거나 발견된 땅을 어느 군주에게 귀속시킬지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교황에게 승인 받은 상황이었다. 교황의 칙서에 따라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이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하고 통일하여, 이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콜롬부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콜롬부스가 발견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위도 상 포르투갈의 권리가 인정되던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포르투갈 양측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의 중재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사이의 가운데 지역인 대서양 한 가운데 경선을 기준선으로,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귀속은 서쪽이 스페인으로, 동쪽의 땅은 모두 포르투갈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제2차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전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북아메리카 카리브와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페인의 영토가 되고 브라질 혼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다. 지금 브라질의 해안가 지역은 기준선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기준선 동쪽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까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비롯해서 서유럽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긴 했지만 동쪽에는 무슨 국가들이 있는지에 거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실제로 지구를 양분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교황이 그냥 둘이 정쟁을 벌이자 말리고자 했던 하나의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조약을 맺는 과정 중에 당초 교황이 제시한 카보베르데 기준 서쪽 100리그 경선에서, 포르투갈의 강력한 주장으로 370리그 경선으로 더 밀어낸 것과 관련해 콜롬부스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밀어 붙였다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공식 기록상으로 브라질은 1500년에 발견되었으나,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인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대서양 반대편까지 배를 몰고 갔다는 점과 발견 당시 항해 기록이나 이를 보고 받은 포르투갈 왕실이나 새로운 땅을 발견해 놓고도 아무런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다. 그나마 이러한 진실을 밝혀줄 수 있었을 기밀 항해 기록은 리스본 테주 강변에 위치하던 왕궁의 문서 보관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1755년 11월 1일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연이은 지진 해일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태다. 당초 조약대로라면 스페인 측이 보장받은 부분이 훨씬 컸는데도 포르투갈은 후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인 브라질을 차지하였는데 아마존 강 하구가 조약 기준선 기준으로 포르투갈 관할이었던 덕택이다. 당시 유럽인 탐험가들은 배를 타고 다녔고 내륙은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하필 안데스 산맥에 막혀 거의 아마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바다같이 넓은 아마존 강의 하구를 확보한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나중에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아마존 상류와 지류를 거슬러 올라 항해하여 아마조니아 곳곳에 깃발을 꽂고 포르투갈어를 이식하여 개척하면서 결국 지금의 거대한 브라질 영토가 완성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완성된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 된다. 이에 기아나 지역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남아메리카 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반을 차지한 셈이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벗어나 신대륙 전체로 본다면 북아메리카는 영국의 버지니아,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및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스페인이 차지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분이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네바다 등 서부 지역,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및 앨라배마 연안 지역 등은 모두 원래 스페인의 영토였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도 원래는 스페인이 발견해 차지했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에게 넘겼다. 그 대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페르디난드 마젤란과 후안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1526), 미겔 로페스 레가스피(Miguel Lopez Legazpi, 1502~1572) 등이 동남아시아에도 필리핀 도독령을 설치했다. 이에 태평양 측도 문제가 되어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태평양도 동경 142도까지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 선에서는 서쪽이 포르투갈, 동쪽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동남아시아는 포르투갈 차지가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되어 조약의 양 당사자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속령의 확보에 나서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들 나라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기들끼리 맺은 조약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종교 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조약의 권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약대로라면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모든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이 세계의 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몇 항 몇 조에 있는지 보여주라며 비아냥거렸고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이 조약을 근거로 19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현재는 먼로 독트린을 통하여 촉발된 아메리카 패권 성향이나,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장 중남미 지역의 쿠바만 하더라도 스페인이 19세기까지 주권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3위가 스페인어라는 것에 있다. 이는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언어가 식민 통치 시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가 카톨릭과 함께 중남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대 축구로 유명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최우선 진출 대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부 프로축구 리그인 라 리가, 프리메라 리가일 정도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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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9
  • 근대 시기 유럽의 대외 무역으로 인한 중동의 변화
    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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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 중국 명(明) 청(淸) 교체기 시대 베트남에 정착한 화교들, 명향(明鄕)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 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 응우옌 왕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나라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 요소에 ‘중국계 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 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치민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대남실록전편(大南實錄前編)』의 기사에 따르면 1679년,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迪)이 공동으로 이끄는 중국 선단에 속한 선박 50척과 사람 3,000명이 도착했다고 한다. 대남식록전편에 의하면 이들 광동인 집단은 망명하길 원했으나, 언어와 풍습이 너무 달라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현주(賢主) 완복빈(阮福瀕)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이들이 가정(嘉定)-동나이(同奈) 지역으로 남하한다면, 캄보디아의 번왕 앙 논에게 말을 넣어 실향민이 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였고,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두 집단으로 흩어졌다. 양언적이 이끈 집단은 미 토(Mỹ Tho)를 설립하였고, 다른 집단은 훗날 사이공이 될 장소 근처인 비엔 호아(Biên Hóa, 邊和)로 간 것이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의 통치 시기(1887~1945)의 식민지 정부는 응우옌 왕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 이민’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 외국인(중국계 이민)’ 사이에서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단어로 이들 중국계 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 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 인 혹은 크메르 인 여성 사이에 탄생한 혼혈의 자식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 명향은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남 낀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민망 년간(1820-1841) 중국인에 대한 동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明香’은 ‘明鄕’으로 표기법이 바뀌었다. 중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나라의 향화’라는 단어 대신 ‘명나라의 후손 또는 유민의 고향’ 즉, 베트남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베트남어로 발음 및 성조까지 같다. 이는 두 지역에 ‘한풍(漢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1698년 남방 지배를 위한 기구로 가정부(嘉定府)가 들어선 이후에 동나이 지역 중국인은 청하사(淸河社), 사이공에 살고 있던 중국인은 명향사(明香社)로 조직됨으로서 명나라 유민들의 베트남 정착이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회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인도네시아의 콘밍(Khonming)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콘밍은 인도네시아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콘밍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 통치 시대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콘밍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모임을 형성 및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콘밍에게는 이와 같은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청(淸)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이주할 경우 반역자로 취급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만주족에 굴복하기 싫은 한족과 삶의 한계 상황에 이른 극빈층들이 정크선을 타고 남쪽 섬나라로 도주해 갔다.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며 상부상조로 현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시켰다. 이 때 청나라 남부 한족들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지배하는 쪽에 섰으며 일반 베트남인들에 비해 부유하고 권력이 강한 편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성향 화교들은 북베트남을, 반공주의 성향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을 선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시킨 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 공산정부는 화교들의 상당수를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및 이웃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로 추방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소위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자들의 상당수가 화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호주의 베트남계 호주인, 미국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화교 혈통인 경우가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많은 수가 귀국했으나 현 베트남 공산정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들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화교들과 다르게 베트남 경제를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2020년대 들어서 화교들이 중국-베트남 전쟁 이전처럼 남부 호치민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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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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