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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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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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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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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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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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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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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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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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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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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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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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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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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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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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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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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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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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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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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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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홍수 사업 규탄 시위는 제2의 네팔 사태처럼 폭동을 불러올 것인가?
- 9월 21일부터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리잘 공원에서 대규모 반부패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시위의 발단은 "부패(Corruption)"다. 얼마 전, 네팔에서 벌어졌던 시위와 발단과 규탄하고자 하는 목적이 같다. 필리핀에서 8월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을 때, 막대한 예산이 유령 공사, 부실 공사 등으로 횡령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트리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부분일 뿐, 기존의 필리핀 지도층들은 위에서 아래까지 부패로 인해 썩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체로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관료들의 부패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개 자신들의 운명이 그러하거니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즉, 왠만한 부패는 참고 넘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시민들이 관료들의 부패에 항거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던 것은 필자의 동남아시아 경험상 보통 세 가지로 점철된다. 1. 습하고 더운 기후조건 대개 습하고 더운 기후 조건을 가진 국가 시민들의 특성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낮에는 연일 35도를 육박하는 무더위에 습도도 늘 7~80%는 달고 다닌다. 인간의 체질상, 이런 온도는 상당한 '귀차니즘'을 동원한다. 그리고 왠만하면 복잡한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날도 더운데 복잡한 문제는 아무리 그 더위에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짜증을 유발하게 되면 그걸 서로간에 잘 알기에 복잡하거나 귀찮은 일은 회피하려고 한다. 가령,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이를 트집잡아 경찰이 잡아낼 경우, 경찰에 항의 및 항거하는 것보다 돈 몇 푼 쥐어 빨리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해당된다. 게다가 심성이 악착같거나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대개 성질이 순박하지만 많은 노동보다 쉽고 간편한 일을 선호한다. 동남아 국가들이 바가지가 심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작은 부패 정도는 방치하는 경향이 크다. 2. 큰 빈부격차와 비리 & 부패에 대한 무심함 (운명론과 현실순응론) 동남아시아 어디를 가든 빈부격차가 상당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은 하층민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대놓고 드러내지를 못한다. 그저 대개 운명이거니 하고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고위직들의 부패에 대해서도, 그들은 원래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니까, 혹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끝도 없이 자존심만 높고, 잘 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원래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자"와 아무리 해도 안 되니 그냥 이대로 살자는 "현실 순응론자"로 나뉜다. 대개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어디를 가도 이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러니 발전도 없고 끝도 없이 가난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넘어가지만 이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루를 보낸다. 그러니 일을 해도 동기부여가 적고 자기에게 정해진 일만 하며 자신에게 떨어지는 급여만 적당히 받아간다. 한국인 같으면 뭔가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것도 했다가 저것도 하면서 풀어가는 노력을 하지만 동남아시아인들은 그저 자기가 맡은 일만 하고 그것만 아주 열심히 한다. 3. 공산주의가 아니면 족벌정치 (통치자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통치자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동남아시아의 환경과 연관이 있는데 동남아시아는 집단을 매우 중요시한다. 항상 집단으로 살아가며 패거리 문화를 이루고, 그들을 이끄는 자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편이다. 아주 극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를 전복하는 일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동남아시아 사회는 집단의식이 대단한데 이들에게 있어 군집된 생활은 그 자체의 사회성이다. 우선 가족부터가 대가족을 유지하는 곳이 많고, 어딜 다니든 가족이든 친구들이든, 함께 뭉쳐다닌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하면 친구들까지 떼거지로 데리고 와 보복하는 경우가 많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많다. 일례로 한국에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생활할 일부의 자금을 제외하고 모두 고향에 송금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편이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고, 캄보디아는 훈 센 가문과 입헌군주인 왕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높다. 라오스나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답게 당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 및 애향심이 높다. 그리고 이는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발달한 농경문화에서 기인한다. 우선 식량생산을 위해 경작을 하려면 여럿이서 협동과 품앗이를 해야 한다. 그러니 자연히 집단화가 될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에 공산주의가 쉽게 투영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서로 협동하고 품앗이를 하면 소출을 서로 나눌 수 있다. 그와 같은 집단으로 생산된 것들을 나누는 것에 익숙한 문화가 공산주의 이론을 빨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류사에 있어 기초 생산인 농경 경제가 발달한 곳에 공산주의 이론이 빨리 정착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땅이 기름지고 농경문화가 발달한 동유럽, 산업의 90%가 농경인 러시아 제국과 중국, 2~3모작 이상이 가능한 동남아시아 등이 그와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농경 사회의 협동은 집단을 이루게 되고, 이 집단을 통치할 리더를 뽑고 그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다. 선출된 리더는 소출이 잘 되도록 집단화를 더욱 독려하고, 상대의 침략을 대비할 수 있게 군대도 같은 집단에서 선출한다. 그의 리더쉽에 따라 촌락 집단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리더에게 그저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맹목적 충성의 DNA는 고대보다 지금까지 선천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 통치자들도 자신의 가족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며 필리핀의 마르코스 가문이나 캄보디아의 훈 센, 태국의 탁신 가문처럼 족벌 정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필리핀은 정당 투표를 중심으로 조직되기보다 주로 가족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족벌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를 파드리노 시스템(Padrino system)이라 하는데 이 시스템에서는 공로가 아닌 가족 관계(인척주의)나 지역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연고주의를 통해 많은 정치적인 임명을 하며 자신의 패거리, 족벌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족벌 정치인 파드리노 시스템은 필리핀에서 많은 논란과 부패의 원천이 되어 왔다. 가족 관계에 따른 인척주의는 필리핀 헌법 제9조 1항과 2항을 위반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무원 임명은 가능한 한 자격과 적격성에 따라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정책을 결정하거나 주로 기밀이거나 고도로 기술적인 직책을 제외하고는 경쟁 시험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Appointments to civil service positions should be made, as far as possible, solely on the basis of qualifications and suitability, and should be determined through competitive examinations, except for positions that involve policy decisions or are primarily confidential or highly technical)." 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척주의는 소수 개인에게 유리하고 정부의 채용 및 승진 과정에서 공정성을 저해한다. 현 필리핀의 봉봉 마르코스나 그의 모친인 이멜다 등의 마르코스 가문이 여기에 해당되고 있는데 두테르테에 의해 통제되었던 필리핀은 마르코스 가문 때문에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 하에서 마르코스 가문이 챙긴 재산의 총액은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 마르코스 정권이 1986년에 한 번 무너진 이후, 필리핀 대법원은 마르코스 가문이 국가에서 횡령한 재산을 반환하도록 명령하는 세 가지 별도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재산을 내놓은 바 없다. 그로부터 2025년에 이르기까지 근 40년 동안 필리핀에서 적발된 정부의 부패 사건은 33,772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10,094건은 부정 행위이고 7,968건은 뇌물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최악의 부패는 홍수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9,855개의 홍수 통제 프로젝트 중 70%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지난 달 필리핀 우기 때 불라칸 주에는 폭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주민들이 버리고 간 목조 주택까지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공공사업도로부(DPWH) ‘서류상’ 6월 말까지 5,500만 페소(약 13억 4,000만원)이 투입돼 220m 높이의 강둑이 세워져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홍수 방제 공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전국적으로 유령 및 기준 미달 프로젝트 신고가 100건 이상 접수됐다는 것에 있다. 이는 홍수 조절에 배정된 공적 자금의 70%를 누군가가 비리로 해먹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7월 태풍 크라이징과 폭우로 인해 홍수 피해를 제대로 막지 못했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겪었고 수많은 이재민들이 생겼다. 이후 건설업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며 대통령의 사촌을 포함한 여러 고위 정치인들이 건설업체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정황이 밝혀졌다. 이에 부패가 정권의 핵심부에까지 뿌리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동안 존재했던 부패에 그러려니 하며 참고 있었던 국민들의 분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필리핀 랠프 렉토 재무부 장관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홍수 예방 공사 부패로 인해 최대 2조 8,800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은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호세 리잘 공원에 모여 부패 정치인들의 사임을 요구했고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젊은 세대들은 SNS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부터 필리핀의 부패를 성토했기에 오프라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부패 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지난 9월 22일에는 시위 중 200명 이상 체포되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시위대들은 정부 비판을 상징하며 항의하는 의미로 몸에 진흙을 바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취임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폭력 시위가 난무했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시위자들은 타이어를 태웠다. 소이병을 투척했으며, 방범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 가스를 동원했다. 공교롭게도 전국 시위를 한 9월 21일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과거 국민들에게 호소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날이자, 197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을 선포한 53주년 째 되는 날이었다. 이와 같은 혼란에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이 당시 말라카냥 대통령 궁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코스 현 정부는 정부 대변인을 통해 '외부 세력의 조종이 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외부 세력으로 전가하려 했다. 이는 뻔하다. 중국 정부가 두테르테 가문을 움직여 시위를 조장하여 친미 정권인 마르코스 가문을 뒤엎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ICC에 체포되어 수감 및 재판 중인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중국이 주도한 색깔혁명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 많은 돈이 어디로 갔는지, 이어 왜 자신들의 삶이 비참한지 등의 왜 가난한지 등의 삶을 비관한 근본적인 질문에만 관심이 있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은 독립위원회 구성을 공식 발표하면서 친척과 측근도 예외 없이 수사하겠다고 약속하면 급한 불을 끄려 했지만 국민의 분노는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 한편 필리핀의 경찰과 군 당국은 국가 최고 위기를 발동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들은 시민들에 대한 진압과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억압이 생길수록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억압에 굴복하지 않은 동남아시아 민중들의 특성을 본다면 강력한 진압은 오히려 국민들의 저항심만 더 키우게 된다. 현재 전국 200여 개 사회 단체들이 힘을 모으고 있어 앞으로 더 대규모의 시위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필리핀 역사에서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부패와 독재로 인해 결국 해외로 추방당했다. 현재 봉봉 마르코스 현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와 유사한 처지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분노가 거세지고 정권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봉봉 마르코스와 마르코스 가문 자체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될 가능성도 배제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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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홍수 사업 규탄 시위는 제2의 네팔 사태처럼 폭동을 불러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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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동남아시아 전쟁, 작전명 : 남방작전(南方作戰)
- 일본의 남방작전(南方作戰)은 1941년 말~1942년 중엽에 걸쳐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점령 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영어로는 말레이 전역(Malayan campaign)이라고 부른다. 사실 남방작전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성립되는데 이 공습이 실패하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터는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매우 넓었다. 영국의 동아시아 최전선 기지인 영국령 홍콩, 영국 동양 함대의 기지이자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길목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부 태평양 주요 기지들이 자리 잡고 있던 필리핀 자치령, 괌, 웨이크 섬, 동남아시아 최대 석유 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도 함께 점령했어야 했다. 동남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었으며,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이 정도의 규모면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규모의 수준이었으며, 두 국가 모두 이 거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점령지를 유지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 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것은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 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불어 홍콩의 영국군만 해도 20,000명에 달했고,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100,000명, 필리핀에도 약 150,000명에서 200,000명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병력들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군력도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동양 함대가 싱가포르에 배치된 상태였고, 필리핀에 전개한 미국 아시아 함대와 동인도 제도에도 네덜란드의 잔존 함대들이 버티고 있었다. 다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육상 병력에도 큰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과 만주국의 유지를 위해 100만에 가까운 병력들이 중국 대륙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전투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광활한 중국의 영토로 인해 점령 지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계속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 육군은 남방작전에 따로 운영할 만한 병력 자체가 크게 모자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본 자체의 해상 수송 능력 및 보급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만이 수송 및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대본영의 추산으로 전투 병력은 최대 12개 사단 정도만 동원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으나, 워낙 작전 지역이 넓고 일본 본토 등도 수비해야 할 이유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각각의 작전 지역에 투입되는 함선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동원 가능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와조전술(蛙跳戰術), 번역하자면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수립한다.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의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 민다나오로부터 술라웨시와 보르네오에 이르는 광대한 동부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들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수립한 작전으로,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공격기지에서 제공 및 제해권을 장악 2. 목표지역을 공중과 해상으로부터 공격 3. 지상군 투입으로 국지를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 4. 항공기를 추진시키고 국지적인 제공 및 제해권 장악 5. 다음 목표에 대하여 공중 및 해상공격, 이 때 지상군은 보급 및 재편성 실시 일본군은 이를 반복함으로써 강한 세력을 보유한 중요 지점을 파괴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연합군 세력들은 와해되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이러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1885~1966)가 이끄는 미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미국이 사용한 것은 이와 유사한 “바이패스(Bypass) 전술”이다. 육사 전사학과는 일본의 와조전술은 독일식 기동전의 영향을 받아 적의 주력 지점을 적극 공략해 섬멸하지만 미국의 바이패스 전술은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차지한 이후, 병참선을 차단하여 마비시킨 다음 주력은 서서히 말려 죽인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일본군은 적은 병력을 데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들을 일일이 빠르게 점령해 나가야 했다. 그로 인해 얼마 안 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적인 장교들은 상식적으로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연합군들의 군대가 아무리 약세여도 회의론으로 자국의 미래를 염려했다. 실제로 히로히토 일왕도 중국 땅이 넓은데 태평양은 그보다도 더 넓지 않은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자원들을 충당하기 위해 객관적인 상황이 경직된 군 수뇌부는 이러한 염려들을 완전히 불식시켰다. 사실 연합군도 제대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군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침공해 올 것은 명백한 상황이었고 일본이 이를 위해 여러 작전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이나 필리핀 등이 최우선 공격목표일 것이라 예측했고 이들 지역에서의 방위전이 준비되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전쟁 이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당시에 일본 측의 주장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방어 시설 및 군사 기지 구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연합군의 방어 태세는 부족했다. 연합군은 총 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총병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매우 넓은 동남아시아는 공격하는 일본군보다도 방어하는 연합군에게 더 큰 장애였다. 거기다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 지리 상황에서 병력의 재배치도 어려웠고, 그나마 육지로 이어진 지역들도 우거진 정글 때문에 도로나 철도의 부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병력 재배치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의 질도 좋지 않았다. 필리핀에 주둔하는 연합군은 최대 10만에 달했다. 연합군 구성은 미국 주둔군 2만과 이제 막 창설된 필리핀군이었는데 제대로 완편 되지 못한 부대가 많았고 장비는 2선조차 한참 뛰어 넘은 구식에 수량도 매우 부족했다. 그나마 미군 휘하의 필리핀인 정예 부대인 스카우트 연대는 대전차 화기를 일부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형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였다. 미군의 경우도 숫자가 부족한데다 드럼 요새 같은 방어 시설물과 요새를 제외하면 기본 장비 외에는 항공 전력 약간에 수십 대 남짓의 경전차, 기본적인 사단 포병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필리핀의 연합군은 그나마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려는 의지가 가장 높았고 실제로도 가장 선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측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 배치한 군대의 경우 전차가 단 1대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인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해당 부대는 정글전 훈련 등은 받은 적이 없던 데다가 사기까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그나마도 우수한 인력과 전력은 유럽전선에 우선적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은 전력이 더욱 부실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현지 원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아직 일본군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 민병대는 네덜란드를 위해 전투를 벌일 의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래서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실제 전투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이었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에 있었을 뿐이었고 그마저 개전과 동시에 상당수의 손실을 보았다. 더불어 자바에 배치되어 있던 네덜란드의 해군은 기량이 우수하고 항전 의지도 높았으나 경순양함 이하의 수상함 전력과 잠수함이 주력이었다. 전함만 10척을 보유한 일본 해군을 상대로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 최선이었고 완전히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개전 이후 무리하게 일본 해군에 맞서다 이 작은 전력마저 분파되어 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은 영국 동양 함대였는데, 군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가 비록 최신예 전함이긴 해도 그 함대가 전부였다. 리펄스는 제1차 세계대전 형태의 구식 순양 전함이었고, 이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주력함이나 지원함 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 시기 영국 함대는 대부분 지중해와 북해에서 독일-이탈리아 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칠과 영국의 지도부는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항공모함 1척을 주축으로 한 함대로 일본 해군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 아무리 주력 함대들이 진주만을 공격하러 갔다 하더라도 이 정도는 연합함대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과 상대의 전력을 오판한 영국 동양함대는 다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제공권으로 가면 상황은 더 암울했다. 미국의 경우 필리핀에 107대의 P-40 워호크와 35대의 B-17를 비롯해 상당한 전력을 배치했다. 이는 외견상으로 볼 때 모양새가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 전력은 전쟁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빠르게 증강되고 있었다. 하지만 개전 당시 필리핀에 배치된 미국의 항공 전력은 항공기의 수량 및 성능, 조종사들의 기량에 있어 일본군에 열세였다. 대만에 배치된 일본군의 항공 전력은 전투기 210여 대를 포함한 약 550여 대에 달했고 중일전쟁 등으로 인해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반면 미군의 B-17 폭격기와 P-40 전투기는 당시만 해도 많은 문제점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초기 형태의 기체였다. 영국군의 가용 전투기 대부분은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동남아시아에 있는 것은 미군이 공여한 구식 F2A 버팔로 뿐이었으며 수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항공모함이 1척도 없어 모든 항공 지원은 지상 기지의 지원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당 지역 내의 연합군은 사용 언어부터 달랐다. 서로 협동 전투나 훈련을 단 한 차례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와 탄약 등은 물론 신호 체계마저도 호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해당 지역 내에 있는 연합군의 함대를 모두 모아서 혼성 함대를 만들었는데, 통상적인 항해 명령도 내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통역을 담당할 인원도 부족해서 기함에 있는 네덜란드 제독이 명령을 내리면 이를 영국 순양함으로 통역해서 전달하고, 영국 순양함은 미국 구축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명령 전달 체계가 길게 늘어지는 상황이었다. 남방작전의 개시는 대체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공격 목표는 크게 5곳으로 태국 점령, 말레이 상륙, 루손 공습, 서부 태평양의 미국령 도서 지역인 괌, 웨이크 및 길버트 제도 상륙 및 홍콩 공격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기습을 가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버마를 점령하여 이들 지역을 이어주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작전의 최종 목적이었다. 남방작전은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타격해야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력이 분산되는 위험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성공으로 인해 미국 태평양 함대가 무력화 되고 기습적인 효과를 살림으로써 일본군은 이 수많은 공격을 모두 성공시켰다.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영국령 홍콩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의 도중에 이미 광동성 해안 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구룡반도와 인접한 중화민국의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홍콩의 군사적인 가치나 방어 가능성에 환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함대도 개전 이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전투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홍콩을 내주면 나중에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방어 준비에 나섰다. 영국군은 구룡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홍콩의 방어에는 또한 캐나다 군의 왕립 소총 대대와 위니펙 척탄병 대대도 파견되었는데, 이는 전임 홍콩 방어 사령관이던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Arthur Edward Grassett) 소장이 캐나다 출신이기 때문에 귀국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에게 홍콩 방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캐나다 군이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 일이였으며, 캐나다 군이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 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 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 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구룡 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하필 어느 과격한 연대로 인해 공격 시점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 중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성급한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 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若林東一)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이에 분노한 사단장은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무시하고 기어이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 개전 초기 이러한 돌격에 의한 방어선 돌파의 신화는 현지군 중심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군에게나 우연히 통했을 뿐이지만, 후일 결과적으로는 일본군 육군에 근성론을 더욱 더 불어 넣게 되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군의 돌격 신화는 미군의 막강한 무기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하면서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를 파악한 다른 연대들도 자극 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인 사카이 다카시(酒井高志) 중장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을 내렸으며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해 개전 3일 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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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동남아시아 전쟁, 작전명 : 남방작전(南方作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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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대만에게 콜드게임 패배를 당한 한국 야구와 286 컴퓨터보다 느린 한국인들의 인식과 시각, 국제관
- 우리 야구 대표팀이 또 대만에게 패했고, 이번에는 깔끔히 콜드게임 패를 당했다. 대만은 이제 더 이상 90년대의 한국에게 승수자판기로 승리를 갖다 바치던 약체팀이 아니다. 대만과 우리 대표팀의 통산 국제 대회 전적은 26승 17패로 아직까지는 앞서 있지만 최근 아마든 프로든 언제 대만을 깔끔하게 이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야구는 대만의 국기이다. 그만큼 엄청난 투자를 해왔고 좋은 선수들 양성하는데 힘을 썼다. 그리고 대만인들 나름대로 한국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고 있으며 대만인들이 한국전을 바라볼 때 한국인들이 한일전을 바라볼 때처럼 비슷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대회를 불문하고 관심도가 상당하고 이겨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콜드게임 승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더블리그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8회에 가까스로 4-3 역전을 기록해 겨우 승리했으며, 1999년 아시아 선수권 때도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박재홍의 끝내기 안타로 겨우 승리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막판까지 추격을 허용하는 등 한국을 상대로 저력을 보여왔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9회에 박진만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경기를 내줬을 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고,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때도 8회의 기적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끌려다녔았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는 실업 선수가 포함된 대만 대표팀이 한국 대표팀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2019년 프리미어 12에서는 프로 군단으로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2023년 WBC 때는 네덜란드를 꺾고 우위를 점하는가 하면 아시안게임에서도 4-0으로 한국을 이겼다. 결국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2-0으로 겨우 이겨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작년 프리미엄 12에는 2-6으로 패배했다. 앞서 말했듯 대만은 이제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닌 우리와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 우리는 대만을 90년대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만이 해왔던 각고의 투자, 그리고 그에 대한 노력과 결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여전히 대만을 한 수 아래로 여기며 무시하고 있다. 대만은 이미 변화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만을 쉽게 이기는 상대로 여기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우리가 대적할 수 있는 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이 성장하는 동안 한국 야구는 2015년 프리미엄 12에서 우승한 이후, 갈수록 국제 무대에서 퇴보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한국의 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대만 쯤은 여전히 이길 수 있다, 혹은 여전히 쉽게 이길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대만이 한국 대표팀에게 승수자판기 대주던 90년 대에서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대만이 성장했고 대등한 실력을 갖췄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전히 대만이 90년대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런 인식은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국제관과 아주 묘하게 닮아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버린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쏘련, 혹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로 여긴다.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한 번 공산국가면 영원한 공산국가로 여기고 있는듯 싶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여기고 있다. 부정선거, 선거불복, SNS에서 각종 규제 및 탄압, 언론의 획일화 및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철저히 짓밟아 버리는 행태 등은 자유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모습이다. 1990년대의 아름다울 미(美)자의 풍요롭고 기회의 땅이라 여겨지던 미국, 세계 최강자이자 단극 세계의 1인자로 군림하던 미국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인들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수만년 갈 것이고 그 영화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함께 망하는 법이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120~30년 전의 개화기 때로 퇴보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변화에 경직되어 있고 속도도 느리다. 한국이 IT가 강국이고 빠르게 변화하면 뭐하나? 한국인들의 인식이나 시각, 국제관 자체가 286 컴퓨터보다 느린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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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대만에게 콜드게임 패배를 당한 한국 야구와 286 컴퓨터보다 느린 한국인들의 인식과 시각, 국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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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의 자원과 지정학적 역사
- 카스피해는 면적이 약 37만 1,000 ㎢로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령의 4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며 서해와 일본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면적 뿐 아니라 수량도 약 68,000 km3으로 세계 최대 규모이며 최대 수심 약 1025 m, 평균 수심 약 210 m 정도로 수심도 깊다. 다만 이 일대는 증발량이 많아서 조금씩 면적이 줄어들고 있으며, 카스피 해의 주변은 해수면 아래 30m 정도의 저지대이다. 또한 카스피 해의 밑바닥은 두 개의 분지 지형이 연결된 형태이며,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에 깊이 들어간 지점이 있고 가운데 부분의 수심은 비교적 얕다. 이것과 비슷한 대표적인 사례는 옆에 있는 아랄 해다. 카스피해는 예전 아랄 해와는 달리 면적도 9배나 되고 평균 수심도 10배 이상 되고 완전히 고립된 아랄 해와는 달리 흑해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랄 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지만 계속되는 남용은 카스피 해의 유지에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랄 해처럼 대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최근 카스피 해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청어의 수가 10년 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였으며, 청어를 먹이로 삼는 철갑상어도 먹이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처지라 한다 카스피 해와 그 주변은 각종 자원이 많은데,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유명하며 캐비어로도 유명하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바쿠 유전 개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였으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자원에 눈길을 돌린 미국이 소련 붕괴 뒤 독립한 주변국들에 접근을 가속화하여 분쟁이 시작되었다. 카스피 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한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 사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 컨소시엄'을 꾸려 카스피 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2018년 8월 12일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악타우에서 카스피 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을 가지고, 카스피 해를 특수한 지위의 바다라고 정의하면서 22년에 걸친 영유권 분쟁을 끝내고, 카스피 해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2022년 4월 1일. 카자흐스탄,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4개국이 상호 협력을 강화하고 카스피 해 횡단 회랑의 물류 잠재력을 높이는 동시에 국제 운송 시스템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카스피해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에 대해 5개국의 역사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첫째, 적용할 국제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아니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도출될 경우 협정 이행 위원회가 합의에 의해 판단하거나 새로운 조약을 만들어야 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분쟁의 소지는 남게 된다. 둘째, 군사적 불균형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협정은 5개 연안국 이외의 군대를 카스피 해에 주둔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상대방 국가를 해상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역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나토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일방적 군사 행동을 묵인하는 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 해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반대했다. 셋째, 수면 아래의 광물자원과 어족자원에 대한 공동의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는 쌍무 또는 3자 협정을 체결해 자원 배분에 관해 합의했지만, 이란은 주변 연안국과 자원 배분에 대립하고 있다. 자원 배분 문제에 대해 협약은 애매하게 넘어갔다. 넷째, 카스피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 또는 케이블선 연결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 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해 투르크메니스탄에 원유를 공급할 계획인데, 이는 연안 5개국의 합의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연안국들 사이에 분쟁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카스피해는 석유 자원 뿐 아니라 전 세계 캐비어의 80~90%를 공급한다. 또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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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의 자원과 지정학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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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캐나다, 호주, 포르투갈,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국가로써 인정과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 최근 프랑스는 7월, 뉴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국가 해법을 위한 장관급 회의를 열었으며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지지한다는 ‘뉴욕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마크롱은 “중동의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헌신에 따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으며 9월 유엔 총회에서 이를 발표할 예정(Conformément à l'engagement historique de la France en faveur d'une paix juste et durable au Moyen-Orient, la France a décidé de reconnaître l'État de Palestine et en fera l'annonce lors de l'Assemblée générale des Nations Unies en septembre).”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22일 UN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최로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두 국가 해법 이행(A peaceful resolution to the Palestinian issue and implementation of the two-state solution)"을 주제로 한 국제회의에서 마크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나란히 살아가는 두 국가 해법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의 권한 내에서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프랑스는 UN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Nous devons tout mettre en œuvre pour préserver la possibilité d'une "Solution à deux États" où Israël et la Palestine pourront coexister en paix et en sécurité. La France reconnaîtra la Palestine comme État aux Nations Unies.)"고 발표하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박수를 보냈다. 전날 영국과 캐나다, 호주, 포르투갈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공식 발표한 데 이어 프랑스까지 이 흐름에 동참하였고, 193개 UN 회원국 중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152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깊게 개입했다. 1922~1948년에는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령 하에 영국이 지역 할당을 받아 팔레스타인 영토를 통제하였다. 이는 독일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처럼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국가들의 영토를 다른 나라가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제도였다. 이는 당시 오스만투르크가 패전국이었고, 팔레스타인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1896년에 <유대 국가(Der Judenstaat)>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를 재건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이어 헤르츨은 1897년 시온주의자 세계대회(ZO)의 수립을 통해 각 부유한 유태인들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유태계 금융권들은 영국 정부에 전쟁 자금 지원을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태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약석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밸푸어 선언이다. 선언문에 명시된 것에 의하면 "유태인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 거주하는 다수의 아랍인 권리도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했다. 팔레스타인에 독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시온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바젤 계획서'에서 그들의 목표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이며, 신분이 보장된 조국을 건설하자(הבה נקים מולדת רשמית, חוקית ולגיטימית לעם היהודי בארץ ישראל)."는 것이었다. 영국의 대형 자산가 라이오넬 윌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 1868~1937)는 아랍인 지주들에게서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로스차일드는 많은 토지를 사들여 팔레스타인 전체 토지 가운데 6% 땅을 "유태인들의 안식처"로 삼았다.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은 합법적으로 자본을 이용해서 아랍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구매한 셈이지만 이전 주인인 아랍인 지주들에게서 일하던 팔레스타인 소작농들의 운명은 매우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유태인 사업체나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창기 유태인이 존재했을 때만 해도 팔레스타인의 일상은 유태인, 기독교인, 무슬림들 사이에 별 문제 없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그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유럽에서의 포그롬 등 박해를 비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온 유태인들이 늘어나면서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유태인 이주민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29년에는 뉴욕발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태인들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팔레스타인 농민들과 소작농들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무슬림들은 지난 수십년간 평화롭게 살아왔던 헤브론의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된다. 결국 당시 식민지 위임 통치를 하고 있던 영국 행정청의 군대들이 개입하면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929년 헤브론 소요 사태가 있은지 4년 만에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유태인들의 귀국 행렬이 엄청나게 늘게 되었다. 1933년 초부터 1935년까지 유태인 13만 명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왔다.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으며 이들과 충돌이 잦았다. 1933년부터 시작된 대단위 유태인 난민 입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인들은 불만히 쌓이기 시작했다. 이는 유태인들에게 밀려 축출되거나 아랍인 지주들은 유태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시골 마을이나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그 무렵 '고위 아랍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회원들은 더 이상의 유태인 난민 입국과 유태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총파업을 일으키자며 팔레스타인들을 선동했다. 이로써 아랍권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상충하는 견해들로 인해 유태인과 아랍인 공동체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수십 년 동안 해당 지역은 안정되지 못했다. 1948년 영국은 이 지역에서 철수했고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면서 여러 차례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야만 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영국의 행보가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형성했으며, 과거 '팔레스타인'으로 불린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되지 못한 것이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최대 난적인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밸푸어 선언 당시 아서 벨푸어 장관이 팔레스타인 인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민족적 권리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1967년 아랍-이스라엘의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따라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인 동부 예루살렘을이스라엘의 수도로 삼는다는 구상이 바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다. 최근 네타냐후는 가자 시티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자가 정복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네타냐후를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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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캐나다, 호주, 포르투갈,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국가로써 인정과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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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몰도바에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진주한 이유
- 최근에 나토와 프랑스군이 각각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통해 몰도바에 진입했다. 몰도바 정부는 몰도바 내 친러 분리주의 및 자치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을 통해 러시아의 내정 간섭 가능성을 경계해 왔다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를 더 현실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을 앞둔 2023년 2월 13일에는 마이아 산두(Maia Sandu) 몰도바 대통령이 러시아가 자국의 EU 가입을 무산시키기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통한 군사적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EU는 군사 목적으로 창건된 단체가 아니다. 러시아는 몰도바가 나토 가입이 아닌 이상, EU 가입에 대해서 몰도바 내정에 간섭한 바 없다. 그럼에도 마이아 산두가 몰도바의 EU 가입을 러시아가 방해하고 있다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11월 5일에 몰도바의 지방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자국 내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내세워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의 집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선거 전략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핵심 안보 위협을 이용한 "북풍"이 있는 것처럼 몰도바 또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몰도바 내에는 선거철만 되면 국내 안보를 볼모로 "러시아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이는 모순된 기우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명목으로 들어와 있기에 당장 전쟁을 벌이거나 교전을 목적으로 한 군대가 아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병력은 약 6,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에 예비군까지 합치면 약 30,000명 정도다. 반면 몰도바의 총 병력은 15,000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10배다. 게다가 예비군이 70,000명이나 되며 거의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물론 그 중에 병력 8,000여 명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경에 배치되어 러시아 평화유지군과 마주하고 있다. 교전 목적이 아닌 군대에 대단위 전투기를 비롯한 공군 전력이 아닌 오로지 육군으로만 되어 있고, 전차도 몇 대 없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장에 비해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이런 사정을 몰도바 정부가 모를리 없다. 몰도바군에 비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별볼일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두고 러시아의 위협을 내세워 자꾸 선동하는 이유는 마이아 산두의 '행동과 연대당(PAS, Party of Action and Solidarity)'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다. 이같은 몰도바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없으면 이 정당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럼에도 2023년 11월 지방 선거는 시골 도시 일대를 여당인 "행동과 연대당(PAS)"이 장악하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핵심 지역의 과반을 얻는데 실패하여 사실상 걸림돌로 남게 되었다. 그동안 충분히 조장해 온 "러시아풍"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마이아 산두와 "PAS"는 지방 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왠지 껄끄러운 승리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김없이 이고르 도돈 전 대통령과 사회주의당(Partidul Socialiştilor)을 통해 러시아가 대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국의 선거에 중공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사례다. 2024년 3월 5일 알렉산드루 무스테아처(Alexandru Musteață) 몰도바 정보안보국(SIS) 국장은 러시아 측이 2024년 가을 몰도바의 EU 가입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 및 2025년 의회 선거에 개입하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면서 몰도바 내 친러 세력을 통해 몰도바의 선거와 내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1년이 지나도록 전혀 공개된 적이 없다. 무스테아처 국장은 러시아가 이를 위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확실히 러시아가 개입해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가가우지아 측과 연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PAS"의 마이아 산두는 4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지만, 알렉산드르 스토야노글로(Alexander Stoianoglo) 후보가 친러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26%의 득표기록해 과반에 실패하여 2차 결선까지 가게됐다. 2차 결선에서 마이아 산두는 간신히 연임에 성공했다. 다만 여기서도 부정선거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몰도바는 독립 직후부터 친러 성향 주민들이 정부에 반감을 드러내며 국민 통합에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역할이다. 그러나 마이아 산두 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 갈등 해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든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 지역의 자치권을 압류하고 두 지역을 몰도바에 합병시켜 루마니아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 마이아 산두와 "PAS"의 목표다. 그리고 2024년 12월 28일 가스프롬(Gazprom)은 2025년 1월 1일부터 몰도바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몰도바의 에너지 경제는 러시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가스프롬은 몰도바의 7억 900만 달러(약 9,200억 원) 규모의 가스 대금 미납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2024년 12월 31일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가스 경유 협정이 만료되면서 우크라이나가 갱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 정부는 긴급 리스크 관리와 필수 서비스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 12월 16일부터 에너지 부문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국내 전력 수출 제한, 전력 소비량 30% 이상 감축, 에너지원 다변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몰도바는 급한대로 루마니아로부터 가스를 수입하고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저장 시설을 활용하여 에너지 수요를 보충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에너지 안보 강화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장려했지만 한국의 경상도 크기와 비슷한 몰도바의 작은 국토로는 신재생에너지 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그리고 어김없이 2025년 9월 28일 오늘, 몰도바의 총선이 실시된다. 선거철이 되자 어김없이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자국 국내 안보를 볼모로 한 "러시아풍"이 몰아닥쳤다. 마이아 산두는 중대 의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통해 러시아가 자국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9월 23일 연설에서 러시아가 구소련 국가인 몰도바에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러시아가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소요 사태 음모를 적발해 74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마이아 산두의 기습 체포작전은 야당 선거위원단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100명 이상을 대상으로 250건의 수색을 벌여 74명의 체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에서 범죄 세력을 통해 조율됐다고 했다. ‘마트료시카’로 불리는 친러주의자들이 몰도바에서 활동을 강화하면서 합법적인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산두 대통령이 2,400만 달러(약 330억 원)를 횡령했으며 향정신성 약물에 중독되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들을 상대로 비민주적 체포 작전을 감행한 몰도바 검찰청은 체포 인원 대부분이 세르비아로 체계적으로 이동해 훈련을 받았고 연령대는 19세에서 45세 사이라는 짤막한 정보만 제공했다. 이어 체포된 74명은 최대 72시간 구금될 예정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범죄는 72시간 구금이 아니라 대법원에도 상고해야 할 큰 선거범죄다. 그럼에도 72시간 구금이라는 것 자체가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 2일 전 26일에는 "몰도바의 심장", "몰도바의 미래", "몰도바 사회주의자", "몰도바 공산당" 등 친러 정당인 최대 야당 4개 정당을 유권자 매수, 불법 정당 자금 조달, 자금 세탁 혐의 등을 뒤집어 씌워 출마를 금지했다. 이는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사상 초유의 비민주적인 행위다. 그러면서 마이아 산두는 4개의 핵심 야당의 출마를 금지시킨 뒤, 러시아가 수억 유로를 투입해 수십만 표를 매수하고 있으며 지금 표를 사고 있는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비난했다. 산두는 러시아가 수백 명을 매수해 혼란과 폭력을 선동하고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때맞춰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몰도바에 들어왔다. 이는 친러 세력을 억제시키고, 몰도바의 총선에 개입하기 위한 조치다. 특히 작년 3월 마이아 산두는 프랑스를 방문해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양국 간 국방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한 배경으로 프랑스군이 몰도바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총선에서 러시아와 친러파의 개입을 막고, 부정선거를 방지한다는 것과 혹시도 모를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군은 1,500명 정도고, 트란스니스트리아 군대 또한 얼마 없는데다 장비도 빈약하니 프랑스나 기타 나토 국가들 입장에서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비민주적인 야당탄압과 더불어, "러시아풍"으로 안보 불안을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친러로 돌아서는 것보다 안정을 선택하게 하려는 여당인 "PAS" 당과 마이아 산두,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프랑스군과 나토군까지 끌어들여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몰도바 총선은 마이아 산두와 여당인 "PAS" 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며 승리할 것이다. 이 선거 자체가 이미 공명정대한 민주적 선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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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몰도바에 프랑스군과 나토군이 진주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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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의사소통
- 국회 청문회장에서 어떤 여당 의원이 현직 검사를 증인석에 앉혀 놓고 자기 생각을 목소리 높여 질문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봤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의혹들을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검사에게 속 시원하게 몰아붙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그것으로 의혹이 해소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이 일방의 주장만 내뱉듯이 증인석에 앉아 답변하는 검사 역시 일방의 자기주장만 내뱉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회의원의 질문을 조롱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우리가 저런 자들에게 우리의 사법권을 맡겨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강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청문회란 것은 일종의 정치쇼에 불과하다. 그래도 국민에게 검사라는 권력 집단의 민낯을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청문회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이번 청문회에서 보여주듯이 사법부의 권력은 법과 정의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을 뿐, 그 가면의 뒷모습은 자신들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이익 집단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당에서는 사법개혁을 하자고 외치지만 야당은 삼권분립을 훼손한다고 맞선다.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오염된 사법 권력도 삼권분립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가?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가도 난해한 질문이지만, 오염된 사법 권력이라 말할 때 오염의 기준 역시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에 사법개혁은 결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세상사는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다. 힘에의 의지를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그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루소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자연은 힘이 지배하는 세계,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계이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문명사회의 혼란으로부터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한 것이지만, 니체가 말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와는 다르다. 니체가 말하는 자연은 홉스가 말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하지만 홉스는 자연 상태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었다고 본 것과 달리 니체는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힘의 의지를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홉스와도 다르다. 힘없는 자들과 대중이 사회계약을 무기로 사자를 길들여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 홉스의 시각이라면, 니체는 강자가 약자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의 생각과 유사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우리의 현실에서 법은 약자를 위한 것이기보다 강자를 위한 것이다. 검찰 독재를 꿈꾸었던 지난 정권에 의해 임명되었던 대법원장이란 자는 세종대왕의 법치를 강조하면서 법은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말의 액면 그대로를 보면 백성들의 삶을 위한 법 집행이라는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대법원장의 말 배후에는 양두구육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사법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의 선택을 방해하려고 시도했던 자였다. 그런 자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한다. 도구적 이성이 춤을 춘다.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권력은 힘을 가진 자로부터 나온다는 구호로 변모하고 있다. 힘을 가진 자는 곧 자본을 가진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은 자본을 가진 자에서 나오고, 권력은 자본을 가진 자를 위해 움직이는 세상이다. 원래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고, 현 상태의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상승이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꿈꾸는 힘은 대지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위버맨쉬였지, 결코 자본을 힘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이 모든 가치의 중심에 있다 보니 힘의 자리에 자본이 위치하게 된 세상이다. 자본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 세계를 구분하면서, 체계는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원리에 입각해 있고 생활 세계는 상호 이해와 소통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체계의 논리가 생활 세계를 식민지화했다고 현실을 진단했다. 그러한 상태에서의 의사소통이란 것은 모두가 거짓되고 진솔하지 않아 보인다. 모든 말에서 발언의 진위 여부와 발언의 의도, 그리고 원칙과 절차에 부합하는 발언인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도무지 진실의 여부조차 알 수 없고, 그 의도가 분명히 거짓되어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상호 존중의 절차는 무시되고 일방의 주장만 난무한다. 합리적인 의사소통마저 자본에 의해 왜곡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권력을 향한 무한한 의지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권력, 곧 자본을 향한 의지로만 비추어진다. 자본의 무한 증식을 향한 힘에의 의지! 오늘의 정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행정의 수반인 현 대통령은 국민을 향한 정치를 펼치고 있어 보여서 다행이다. 하지만 국회와 사법의 권력은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을 못 미친다. 교과서에 나오는 삼권분립이 완벽히 이루어지는 나라는 유토피아에 불과할까? 어쩌면 대법원장도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삼권분립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선출직 대법원장의 탄생과 함께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법개혁,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론개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방의 주장만 난무하고, 자본의 논리를 숨긴 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대법원장 선출제와 그를 통한 사법부의 개혁과 언론의 공정성 확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사법개혁, 언론개혁을 통한 대한민국의 완성은 결코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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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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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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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국가 중, 유일하게 성장한 스페인 경제
- 좋지 않은 유럽 경제에서 스페인이 2024년 말에는 두각을 나타냈다. 2024년 당시 스페인은 3%으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EU 평균을 훨씬 웃도는 상태로 마감했다. 2024년 EU 평균 경제성장률은 0.9%에 그쳤다. 스페인 경제의 활력은 2025년과 2026년에도 무난히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EU 집행위원회는 2025~2026년의 스페인 경제성장률을 2% 이상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른 거시경제 지표도 좋은 편이었다. 물가상승률과 공공부채 모두 유럽 평균치에 가까운 실정이다. 다른 EU 국가들은 죄다 무너졌지만 유일하게 스페인만 회복세를 보였다. 실제로 몇 년 전만 해도 스페인은 EU, 특히 서유럽에서 경제가 가장 어려운 국가에 속했었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스페인은 제조업, 에너지 산업, 농업, 관광산업, 건설업 등을 고루 갖춘 국가였고 EU 내에 4번째 규모의 경제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위 Big 4라 불렸었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스페인은 서유럽에서 가장 경제가 낙후한 국가로까지 추락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와 더불어 PPP는 이탈리아를 근소하게 추월했으며, 고용 지표에서 좋은 성장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은 스페인의 부활 요인으로 유럽과 신흥국의 경기 회복에 따른 수출 및 관광업의 호황과 노동생산성 제고를 꼽고 있다. 스페인 GDP는 양적으로 성장했다. 이민자들이 유입됨으로 인해 노동자 수가 늘어났다. 2024년만 해도 순유입 인구만 해도 787,000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민자 수가 5년 만에 170만 명 가량 늘어나 2026년 스페인 총 인구는 5,000만 명을 달성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스페인의 자연 인구는 2015년부터 감소세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민자들로 인해 경제가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지만 스페인은 달랐다. 스페인의 각종 지표들을 보면 이민자 고용률도 높고 질적으로도 괜찮은 산업 인재들이 많이 들어왔다. 코로나 팬데믹 위기 이후, 회복이 빠른 업계에서는 이민자들을 우선 많이 고용했다. 숙박, 외식, 상업 등 관광 관련 산업에서 이민자 고용 증가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023년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은 2.7%로 세계 평균(2.8%)와 거의 동급에 호주(3.4%), 미국(2.9%)를 제외하면 주류 선진국 중 가장 높은 편으로 나타난다. 2025년 4월 IMF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 또한 35,000불로 우리 대한민국을 앞섰다. 참고로 한국은 33,000불이다.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의 몰려드는 이민자들과 그에 따른 부동산 개발, 코로나 시대 이후 관광업이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성장률 자체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로화 강세로 인해 달러화 표시 GDP도 높게 평가받았다. 스페인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호황 요인에 대해 신규 노동자이자 신규 소비자가 생겼고 이는 내수 시장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했다. 팬데믹 사태 이후, 유럽 내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와 더불어 범유럽권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에도 지정학 및 경제적으로도 멀리 물러서 있는 입장이라 최근 수년 동안의 경제성장율 또한 EU 권역과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권 전체에서 2.5~3% 사이로 가장 높으며 매우 안정적인 수치를 찍고 있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이 2010년대 시행한 긴축정책이라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의 효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스페인 정부는 일종의 비용 절감 정책을 내세워 대응했다. 당시 스페인은 국내 노동자 임금과 기업 수익을 줄여 대외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심각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당시 엄청난 집회와 시위가 잇달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정부를 성토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스페인 정부는 비용 절감 정책을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이후, 2010년에 매우 심각했던 무역적자를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2023년 스페인에서 새로 생긴 일자리 수는 78만 개로 유로존 전체 신규로 창출된 일자리의 44%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내림세를 타면서 2023년 10월에는 11.2%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16%를 넘어선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와 비교하면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스페인 실업률은 여전히 EU 회원국들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특히 25세 미만 청년 실업률은 26% 이상으로 EU 평균인 15%를 크게 웃돌고 있다. 스페인의 경제성장은 이주 노동자 유입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이를 나누어 차지하는 인구도 같이 늘어난 셈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경제성장의 성공 지분이 모두에게 돌아가기 어려운 구조다. 2018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의 좌파 연립정부는 복지와 재분배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2022년에는 노동시장 개혁으로 기간제 일자리 비중이 감소했으며 노동자 권리가 강화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최저임금은 세금을 떼고 월급이 2019년 750유로에서 2024년 1,200유로로 50% 넘게 대폭 인상됐다. 스페인의 경제 전문가들은 과거 금융위기 이후 폭증한 기간제 일자리가 아닌, 급여 조건이 개선된 양질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난 것이 이와 같은 현상이라 보았다. 2022년과 2023년 스페인 정부는 인플레이션 대응으로 대규모 재정 지원책을 도입했다. 가계를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필수 식료품 부가가치세(VAT) 면제와 더불어 전기요금 상한제, 가스요금 감면, 주유비 지원을 비롯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은 유로존 다른 나라보다 물가를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었다.여행산업 호황과 EU 경기회복기금(NGEU) 활용이 스페인 경제 회복의 원천이 되었고, 노동시장, 에너지 가격도 내수 회복에 유리하게 반전되었다. 특히 외국인 방문객 수와 지출액 모두 크게 증가하면서 서비스 수출이 급증했으며 민간투자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공공투자가 증가하면서 총투자 규모는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다. 2022년 노동시장을 개혁하면서 외국인 근로자 유입 증가에 따른 노동시장 강세가 뚜렷해졌다. 스페인의 고용 및 가계 가처분 소득 증가율은 유로존을 상회했다. 그리고 여타 유로권 국가들 대비 높았던 산업용 전기요금도 크게 하락했으며 저비용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어나면서 이를 배경으로 제조업 부문에서 상대적 호조를 보였다. 특히 스페인의 건설업은 경제를 나락에 떨어뜨린 주범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내수에만 머물고 있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로 나타난다. 2020년 현재 건설 부문에서 스페인은 세계 1위로 나타난다. 해외 매출액 기준 세계 1위 건설사가 스페인 건설사인 ACS이다. 그리고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로 대표되는 건축가들의 설계 사무소들이 이와 같은 건설 산업의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수처리 기술에서 세계 1위가 스페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플랜트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이베르드롤라(Iberdrola)등 유수의 전력 기업등을 바탕으로 풍력발전,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 산업도 발달했다. 세계 10대 석유 업체 중 한 곳인 렙솔(Repsol)도 스페인 기업으로 나타난다. 스페인에는 텔레포니카(Telefónica)라는 라틴 아메리카를 필두로 한 세계 5위의 통신업체가 있다. 하지만 투자 대비 회수가 낮은 라틴 아메리카 특성상 큰 업체인데 비해 내실이 매우 부족한 편이다. 스페인은 금융업이 발전했다. 콩키스타도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금을 대량으로 약탈하여 스페인에 가져오면서 은행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는 금융 전통의 역사가 매우 길게 가져온 국가이기 때문이다. 산탄데르 은행은 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이며 유럽 많은 지역에 진출해 있다. 총 자산 규모는 2019년 기준 유럽 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도이치뱅크를 넘어서고 시가 총액 기준으로 영국의 HSBC에 이어 유럽에서 2위이다. 산탄데르 은행 역시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진출해있다. 산탄데르 은행에 이어 2위 규모의 BBVA도 존재한다. 이 은행들은 유로존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거대 규모의 은행들이며 중남미 지역에서 특볋; 강한 영항력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은행이 최근 갖가지 실책으로 인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이후에 다시 안정권을 회복했다. 스페인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던 것은 건설업과 금융업 뿐 아니라 관광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 여행은 보통 먼저 잘 알려진 서유럽 위주인 한국인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스페인의 관광업은 같은 관광 대국인 미국, 서유럽 인들조차 최고의 관광국가로 알아줄 정도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관광으로 인해 직접적인 수입은 한화 56조로 관광수입이 무려 미국 다음가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유럽권 관광지로 익히 잘 알려진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관광 수익과 규모로 능가할 정도이며 이로 인한 고용창출 효과도 매우 높은 편에 있다. 관광 산업은 2025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볼 때 스페인 경제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의 여행, 숙박업은 나름 유구한 전통이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때부터 순례객들을 끌어들였으며, 산업혁명 이후에 일부 계층에만 향유하던 중산층 여행의 잠재성을 일찍부터 주목하여 대도시 철도가 연결되던 1860~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1900~1930년대부터 유럽 각국의 여행 책자에 스페인이 주요국가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 파라도르(Parador)라는 명칭으로 각 지방에 흩어진 고성(古城), 고(古) 건축물들을 숙박업소로 개조하여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코 정권이 국제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스페인 국경을 개방하고 북유럽에 대비되는 따뜻한 피서지로의 매력을 홍보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와 마요르카, 안달루시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이미 한 해 2,000만의 여행객이 방문하게 되었다. 2025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스페인을 8,300만 명이 방문하여 여행 방문객수로는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 2위로 나타난다. 스페인은 관광 수익으로 프랑스에 이어 전 세계 2위를 기록하여 굴지의 관광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세계 관광 기구(UNWTO) 여행 총람으로 인해 유로화 사태로 인해 스페인 경제 위기를 버틸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행, 숙박업이 스페인의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음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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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국가 중, 유일하게 성장한 스페인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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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성립된 치열한 국제적 배경과 러시아-스웨덴 전쟁 (대북방전쟁의 시작)
- 모스크바 대공국을 정복했던 폴란드를 제외하고, 러시아 원정에 나선 첫 번째 유럽 국가는 스웨덴이었다. 그 후로도 1812년 나폴레옹의 원정과 독일의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두 차례 더 있었지만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칼 12세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찾지 않았다. 세계사에서 나타난 세 번에 걸친 러시아 원정은 최정예 부대로 전쟁을 시작해서 러시아를 진군해 아예 지도에서 없애버리려고 진행되는 초기, 러시아의 방대한 영토와 무한한 인적자원에 고전하는 중기, 그리고 공격자의 전략 전술을 그대로 답습해내는 러시아의 반격이 시작되는 후기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공통점은 칼 12세,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치부하고 얕잡아 봤다는 것에 있었다. 사실 러시아는 온갖 시련을 당하면서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겉모습과 달리 무서운 전투 민족이었던 것이다. 1706년 말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 스웨덴은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17세기 초, 칼 10세와 11세는 핀란드, 카렐리아와 잉그리아를 합병시켰고, 1648년 30년 전쟁의 말기에 스웨덴은 발트 해 남부 해안의 수많은 다른 국가 내부에 외롭게 단절된 영토를 지배하면서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스웨덴 왕국의 정치와 군사적 목표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과 같은 강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토나 인적 자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칼 10세와 11세의 재임 기간 중 스웨덴 왕국은 계속 팽창했고 발트 해는 스웨덴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스웨덴은 새로 합병한 지역의 통관 세금으로 더욱 부유해졌으며,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총과 말을 수입해서 최고의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급격한 팽창은 주변국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특히 전통적으로 적대국이었던 덴마크는 자신의 국경에 브레멘, 베르됭과 같은 스웨덴 소유의 도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에 크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August II)는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에 장악당한 리보니아 지역의 수복 의무도 부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덴마크와 함께 반(反) 스웨덴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1697년 칼 11세가 죽자 겨우 15세라는 어린 나이의 칼 12세가 즉위를 한다. 아무리 사자라고 해도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같은 경쟁국들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3국 동맹을 맺은 이후에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1700년 4월에 덴마크는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침공했고, 두 달 후에 폴란드는 리가를 공격하며 포위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부동항을 확보하고 싶었던 표트르대제도 스웨덴의 리보니아를 침공하고 나르바를 포위했다. 이들 3개국이 동원한 병력은 100,000명을 넘어섰는데, 스웨덴은 총동원령을 내려도 겨우 30,000명의 병력만 동원할 수 있었던 데다 3개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소년인 칼 12세의 운명은 거의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숫자가 크게 모자라기는 해도 스웨덴 군은 하나 같이 전투에 경험이 상당한 정예군으로 농민들을 징집한 연합군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더구나 북유럽의 지배했던 선왕의 업적이 칼 12세에게도 큰 명예로 남았다. 그는 연합군이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초 강경책으로 대응에 나서게 된다. 군대를 세 방향의 방어 진지에 분산시키게 되면 지루한 전쟁이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 칼 12세는 전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 후에 가까운 적부터 하나씩 격파해가기로 한다. 그는 포위된 도시에서 힘들게 저항하고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좀 더 버텨줄 것으로 확신했고 이를 기반으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으로 역습을 가하게 된다. 본국을 위협 받은 덴마크 군은 결국 8월 18일에 평화 협상을 간청하게 되고, 칼 12세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9월에 전 병력을 다시 리보니아로 보내게 된다. 11월 20일에 나르바를 포위하고 있던 러시아 군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하며 러시아 공격군을 전멸시키고 표트르 대제에게 생애 최대의 굴욕을 안겨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래부터 약졸들이 많았던 폴란드-작센 군도 자국으로 도주하게 되고 불과 5개월 만에 칼 12세는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스웨덴의 땅을 단 한 곳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후일 이와 같은 전과를 접한 프랑스의 대문호 볼테르는 그에게 전사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하게 된다. 매우 어린 나이에 대성공을 거둔 칼 12세는 자신의 용맹성을 과시하며 점차 과단성을 내세우며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자신과 스웨덴에 불행한 상황으로 반전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 대해 평가하기를 100%의 완벽한 승리는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며 80% 정도의 승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였던 것도 이러한 자만심 때문으로 생각된다.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참호에 자리를 잡아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 군이 스웨덴 군의 돌격에 단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도주하는 것을 본 칼 12세는 러시아 민족은 언제나 공격하면 배신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나르바에서 참패를 겪은 표트르 대제는 아직도 러시아 군의 전투력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는 신중함을 배우게 된다. 러시아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벌할 수 있다고 판단한 칼 12세는 리보니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가까운 폴란드부터 유린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폴란드에서 다시 한 번 러시아 지원군을 격파하며 러시아에 대한 경멸감은 더욱 굳히게 된다.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의 대결구도로 볼 때 칼 12세는 항상 선두에서 돌격하며 연전연승을 거두는 동안 표트르 대제는 폴타바 이전까지 연전연패를 당하다가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단 한 번에 전황을 역전을 시키게 된다. 칼 12세는 고향을 떠나 폴란드 국경을 넘어선 다음, 6년 동안 1701년 리가(Riga), 1702년 클리로브(Clirov), 1703년 쏜(Sson), 1704~1705년 렘베르그(Remberg)와 그로드노(Grodno)에서 폴란드와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며 아우구스트를 추방하고 스타니슬라프(Станислав)라는 실권이 없는 국왕을 세우게 된다. 이에 자신을 위협했던 3개 국 중 2개 국을 완전히 굴복시킨 칼 12세는 이제 마지막 남은 러시아로 군대를 돌리게 된다. 서유럽 진출이 목표였던 표트르 대제는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원군을 보내고 핀란드 만에서 네바, 잉그리아를 함락시켰으며 리보니아도 다시 공격했기 때문에, 칼 12세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30,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러시아 국경을 넘게 된다. 비록 러시아 군이 연전연패를 당했지만 표트르 대제의 각별한 후원으로 인해 외국인 지휘관을 영입하고 신식무기를 보급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약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동토의 변방 러시아의 개혁을 단행했고 발트 해 확보를 위해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건설과 수도 천도를 단행한다. 그렇지만 발트 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일대 바다의 강대국인 스웨덴 왕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당시 북유럽 최강국이었던 스웨덴을 공략하기 위해 덴마크와 폴란드를 후원하지만 어린 왕으로만 알았던 칼 12세가 불세출의 전사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칼 12세와 정예 군대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의 진흙 퇴적물 및 천혜의 자연 방어물들과 함께 초토화 작전으로 스웨덴 군의 진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칼 12세는 보급 문제로 인해 모스크바가 아닌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 12세의 본대와 병참 부대 사이의 틈을 파고들게 된다. 병참부대의 판단 착오로 인해 원하지 않는 폴타바 전투를 벌이게 된 스웨덴 군은 칼 12세의 부상까지 겹치며 몰락하고 러시아는 발트 해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 지역과 폴란드에 군대를 보내 대리전쟁을 할 때만 해도 전쟁에서 패전한 것으로 생각해 아직은 스웨덴에게 국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국제전의 상대로 좋은 경험이 될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준비는 철저했고 이는 칼 12세가 직접 원정길에 오른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전투가 러시아의 운명을 가를 수 있었다. 칼 12세는 보병 18개 연대, 기병과 용기병 16개 연대로 구성된 총 3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그로드노(Grodno), 빌나(Vilna), 민스크(Minsk)의 삼각지 형태의 진지에서 러시아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보급품을 담당한 레벤하우프트(Lewenhaupt)의 12,000명의 군사들이 리가(Riga)에서 출발하여 남진 중이었으며, 리벡커(Lybecker)의 14,000명의 스웨덴 군대가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칼 12세는 표트르 대제와 대회전을 벌여 빠른 승부를 내고 싶었지만, 연패를 했던 표트르는 정면 대결을 피하며 초토화 작전으로 최대한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품과 도강 장비를 가진 레벤하우프트가 제 시간에 합류할 수 있는지가 전투의 관건이었다. 만약 리벡커가 제2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한다면 표트르 대제는 항복하여 평화협상에 나서거나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벤하우프트가 계획대로 보급품을 가지고 합류한다면 47,000명으로 불어난 병력으로 모스크바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발트 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어부만 살던 습지대에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초빙해 건설했는데, 리벡커의 별동대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칼 12세의 본대만큼이나 두려운 위협이었다. 만약 리벡커가 이 도시를 함락시킨다면 표트르는 칼 12세의 결전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리벡커가 함락은 시키지 못해도 포위만 제대로 한다면 표트르는 귀중한 병력을 이동시켜 칼 12세와 맞선 본대를 구원할 수밖에 없었다. 칼 12세에게는 또 다른 예비군이 있었다. 폴란드의 국내 상황이 안정되면 폴란드의 주둔 병력 8,000명까지 러시아 국경을 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70,000명까지 불어나 스웨덴 초유의 병력이 동원될 예정이었다. 그 동안에도 4배가 넘는 러시아 군을 가볍게 승리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이면 러시아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칼 12세의 전략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리벡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략하는 것은 고사하고 포위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레벤하우프트는 무거운 보급품을 가지고 험지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칼 12세의 본대에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칼 12세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러시아 군은 대리전쟁을 치를 때에도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니 본토에서는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표트르 대제는 월등히 많은 병력으로 스웨덴 진영을 활 모양으로 둘러쌌는데 26개 연대의 보병, 33개 연대의 용기병으로 구성된 총 57,500명의 병력으로 칼 12세의 본대를 견제했고, 아프락신(Apraxin)은 24,500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바우어(Bauer)는 16,000명의 병력으로 남하하는 레벤하우프트를 요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예비 병력인 골리친(Golitsyn)의 12,000명의 부대까지 합치면 러시아군의 규모는 무려 110,000명으로 62,000명의 폴란드 병력은 불참하고도 남은 스웨덴 군 본대보다 2배 더 많았다. 나르바에서는 4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서도 스웨덴 군에게 참패를 당했었지만, 그 동안의 패전으로 많은 훈련을 축적했고 부상만 당해도 전력 손실로 이어지는 스웨덴 군과는 달리 러시아 군은 언제라도 새로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1708년 6월 6일, 표트르 대제가 불 지른 평원에 초목이 자라나면서 칼 12세는 3개월 동안 갇혀 지냈던 진영들을 파쇄하고 바르샤바와 스몰렌스크,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직선 도로들을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세레메테프(Seremetev)와 멘시코프(Menshikov)도 베레지나(Berezina) 강을 이용해 스웨덴 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칼 12세의 전술이 매우 충동적이고 변화가 심해서 도강이 예상되는 보리소프(Borisov)에서만 8,000명의 병력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나머지 병력은 상황 변화에 따라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이는 러시아 군에게 다시 한 번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칼 12세는 남쪽으로 9일간 크게 우회해서 베레지나 강을 가볍게 도강했다. 배후를 위협당한 러시아 군은 후퇴하기 보다는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고 바비치 강변의 홀로브친을 중심으로 집결했고, 정면 대결을 좋아하는 칼 12세도 30일에 바비치 강변에 도달했다. 평소의 칼 12세였다면 도착하는 즉시 공격을 개시해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겠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병력이 많은 러시아 군이 강 제방을 따라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방어진지를 단단히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러시아의 진지는 중앙의 습지대를 두고 북쪽에는 보병 12개 연대와 기병 10개 연대를, 남쪽에는 보병 9개 연대와 용기병 3개 연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좌우 양 측면으로 10,000명의 용기병과 코사크 기병이 스웨덴 군의 우회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 동안 칼 12세의 우회 공격에 측면을 돌파 당한 적이 많았었기 때문에 러시아 군은 강을 따라 넓게 포진하며 스웨덴 군의 우회공격에 대비했다. 칼 12세는 이번에 러시아군이 기다리고 있는 측면 돌파보다는 자살 공격에 가까운 습지대를 통과하는 중앙 공격을 선택했다. 칼 12세는 소부대를 양 측면으로 이동시켜 러시아 군을 제자리에 머물게 하고 러시아 군이 비워두었던 중앙의 습지대로 진공해 들어갔다. 러시아 군은 습지대에서는 스웨덴의 핵심전력인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카를은 거꾸로 중앙의 습지대를 통과해 러시아의 좌, 우익을 둘로 나누어 각개 격파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병력이 20,000명 정도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의 중앙공격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7월 3일, 강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자, 칼 12세는 전 연대에 공격 준비 명령을 내리고, 포대도 미리 지정한 지점으로 조용히 이동시켰다. 날이 밝으면서 스웨덴 군은 일찍 일어나지 않은 러시아 군의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사격한 후에 7,000명의 보병이 강으로 뛰어 들었다. 이 때 당연히 칼 12세가 선두에 섰다.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러시아 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가며 스웨덴 군은 유럽 최고의 정예군답게 조금씩 전진했다. 많은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계획대로 중앙의 습지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스웨덴 군을 힘들게 한 것 습지대가 아닌 러시아 군의 행동이었다. 핀란드와 폴란드에서도 스웨덴 군이 진지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러시아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는데, 이번만큼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대열을 무너지지 않은 채로 30~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씩 물러나면서 침착하게 대응 사격을 했다. 칼 12세는 러시아 군의 예상 밖의 대응을 보고 병력을 정렬해서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두 나라의 군대는 단 한 번도 원거리 사격전을 벌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한 시간 동안 이례적으로 서로에게 총을 사격했다. 레프닌(Repnin)은 오전 7시경,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선봉 부대의 지휘관이 칼 12세 스웨덴 국왕임을 알게 되자 스웨덴 군의 공격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기에 몰린 레프닌은 측면의 골로친이 이끄는 용기병 1,200명에게 칼 12세의 노출된 측면을 기습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칼 12세는 예전의 경험으로 러시아 군이 곧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고 전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배후는 강에, 측면은 용기병에게 포위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국왕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스웨덴의 렌스콜드(Rehnskold)는 근위 기병대 600명을 이끌고 급히 강을 건너 측면의 러시아 기병과 충돌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모두 용기병으로 스웨덴의 정예 근위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러시아 기병이 2번이나 공격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스웨덴 후위 부대들이 강을 건너 칼 12세의 선봉에 속속 합류하자 숲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대열을 유지하며 칼 12세의 공격을 막아내던 레프닌의 보병도 측면의 기병이 무너지고, 새로운 적군들이 보강되면서 결국 진영과 대포를 스웨덴 군의 손에 넘겨주고 기병을 따라 숲으로 후퇴했다. 오전 8시에 레프닌의 진지를 장악한 스웨덴 군은 이제 북쪽의 세레메테프을 상대할 차례였다. 세레메테프는 포화 소리를 듣고 레프닌을 응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습지대가 러시아 군사들의 진격을 방해했다. 남쪽의 러시아 군을 제압한 칼 12세는 북쪽의 러시아 군을 향했지만, 표트르 대제가 세레메테프에게 전황이 불리해지면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 군은 모질레프와 드네프르 강으로 서둘러 후퇴하면서 폴타바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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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성립된 치열한 국제적 배경과 러시아-스웨덴 전쟁 (대북방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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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월 혁명과 니콜라이 2세 차르의 축출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멸망 과정
- 1917년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상황은 나라 내 외곽에서 모든 면으로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선 외부 정세를 보자면, 무장이 제대로 되지 못한 러시아 군대는 전선에서 계속하여 독일군에게 패배했고, 그리하여 수백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사상자를 내고 죽어 갔다. 러시아 외부의 이와 같은 형편은 나라 안에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경제가 붕괴되었다. 그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파업이 빈발해졌으며 인파가 많아지며 대규모화 되었다. 1917년 1월과 2월의 두 달 사이에 연인원 676,300명이 참가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할 정도로 러시아 전국이 혼란에 놓이게 된다. 정부의 고위층에서는 황후가 퇴위할 것을 요구했고 의회의 일각에서는 차르의 퇴위와 이에 따른 섭정의 옹립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부 각료들은 민중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난국을 수습할 것을 차르에게 직접적으로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차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중순부터, 1914년 개전 직후 그 이름이 종전의 독일식으로부터 러시아식으로 고쳐진 수도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는 시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2월 15일 10일의 비축 분량 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도군관구 사령관 하바로프 장군(Khabalov)은 배급제를 실시했다. 2월 23일에 와서 드디어 영하 20도의 추위를 견디며 몇 시간째 장사진을 이룬 채 기다리고 섰던 시민들에게 빵이 떨어졌다는 말이 떨어졌다. 여기에서부터 세계를 변혁시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마침 이 날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트로그라드의 비보르크(Выборг) 지구의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여 시위대들이 형성되었고 다리 건너 시내 중심부 진입을 시도했다. 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일부는 얼어붙은 네바 강을 건너 페트로그라드 시 중심부에 진출했으며 오후 5시, 본대도 다리를 돌파하여 네브스키 대로를 행진했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도 여기에 합류했고 이들의 슬로건은 주로 “빵을 달라”였다. 당시 파업에 참가한 인원은 약 13만 명이었다. 2월 24일, 파업이 다른 구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0,000명이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유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붉은 기를 흔들며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의 구호는 벌써 “빵”에서 “전제 체제 타도”로 바뀌어 갔다. 군대와 경찰도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위대에 동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전지(戰地)에 있는 니콜라이 2세는 하바로프 장군에게 다음 날까지 시위를 진압할 것을 명령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 날 총 21만여 명이 파업에 가담하고 학생들도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이에 코사크 병사들이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브스키 대로에서 시위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 때 슬로건은 빵으로 시작하며 “전쟁 반대” 혹은, “전제 타도”까지 나타나게 된다. 2월 26일 일요일 오전은 평온했고 낮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오후에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을 개시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귀환병으로 구성된 파블로프스키(Павловский) 연대 4중대가 이에 격분하여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저지하기 위해 네브스키 대로로 향하게 된다. 이어 병영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언했으나 다른 연대의 병사들에게 무장해제 당하게 된다. 시위대에 공감하는 병사들의 이반이 시작되면서 혁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2월 27일 볼린스키(Волынский) 연대의 교도대, 하사관의 지휘 하에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장교를 살해한 이후 반란을 선언했다. 근위 보병 2개 연대와 공병 제6예비대대도 반란에 가담했으며 병사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감옥과 구치소를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을 석방하고 재판소는 화재로 뒤덮였다. 이어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만 정, 권총 3만 정을 탈취했으며 오후 3시경 비보르크 지구의 모스크바 연대, 저녁 때 장갑차 부대, 밤에 시 남부의 3개 연대가 반란에 가담했다. 이날 총 66,700명의 병사가 혁명군의 편에 서면서 왕당파의 군대는 점점 쇠퇴했다.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는 진압부대를 편성하여 출동했으나 도중에 해체되면서 마지막 수단도 실패했다. 이로써 수도 내 혁명의 승리는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같은 날,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칙령에 따라 두마의 해산을 명령했다. 두마는 일단 이러한 칙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두마의 주요 정치 단체의 지도자들은 12명의 의원으로 임시위원회를 수립하고 우선 질서 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그 날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멘셰비키의 츠헤이드제(Н. С. Чхеидзе)를 의장으로 하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표자들의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Provisional Executive Committee of the Soviet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를 결성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대변지로「이즈베스티야(Известия)」를 속간했다. 이 두 조직들 가운데 어느 한 쪽도 처음에는 스스로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혁명에 대한 계획 자체가 없었다. 두마의 임시위원회는 여전히 차르가 민중의 신임을 받는 내각의 구성에 동의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이론이 엇갈려 있었다. 특히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전제 체제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의해 완전히 타도될 때까지는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의 장악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노동자들을 도와 전제 체제를 타도하는 것에 우선적으로 한정하고 소비에트에 적극 참여하였다. 2월 28일 총 12만 6,700명의 병사가 혁명 편에 가담했다. 하바로프의 부대는 오전까지 해군 본부를 지켰으나 혁명 편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되었다. 오후 2시 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귀영하면서 수도의 정부군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수도의 거의 모든 병사들이 혁명 편에 가담하면서 제정 러시아는 마침내 무너지게 된 것이다. 2월 혁명 6일간의 일지를 총 정리해 볼 때 2월 14일 두마 개회 일에 맞춘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생들의 시위, 2월 18일 푸틸로프 공장의 파업에 이어, 2월 23일에 비보르크 지구의 방직공업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의 시가행진이 시작되었고,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여성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대는 늘어갔고, 슬로건도 빵을 달라는 주장에서 전쟁 반대, 혹은 전제 타도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대중 봉기에 병사들이 가담하여 2월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매우 감정적으로 변한 대중들의 열기를 수렴하여 혁명을 진전시킬 기구가 시급히 조직되어야 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수도를 장악한 2월 27일 저녁, 타브리다(Тавриды) 궁전에서 공장과 군대에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및 병사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거리와 광장에서 탄생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전투적인 동맹이 1905년의 경험을 살려 즉각 민중의 권력기관을 구성한 것이다. 1905년과 달리 혁명 투쟁에 적극 가담한 병사들이 노동자와 함께 혁명의 양대 지주로서 처음부터 소비에트에 참여했다. 3월 1일, 수도의 병사들은 소비에트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소비에트의 “명령 제1호”라는 문서로 정리하여 발표했다. 3월 초에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멘셰비키가 대표로 많이 선출되었다. 대부분 농민 출신인 병사들은 사회혁명당의 오랜 기반과 포괄적인 주장에 친근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회혁명당에 감사함을 느끼고 적극 지지했다. 혁명투쟁에 처음 가담한 많은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치열한 전투성보다는 다소 느슨하고 부담 없는 멘셰비키가 편했다. 페트로그라드 봉기의 승리 소식은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한 달도 못되어 전국의 모든 현과 대부분 군에 노동자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공업 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동안의 노동제를 실시하고,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차르 정부의 판사를 파면하고 새로운 인민 판사를 뽑았다. 수비대는 소비에트에 복종했고, 농민들도 뒤이어 농민위원회와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소비에트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도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노동자와 병사들 소비에트가 조직된 2월 27일 밤, 두마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위원회에 시내의 질서 확립을 위임했다. 위원회는 전선에 나가 있는 니콜라이 2세에게 대표단을 파견했다. 차르는 수도가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철도 노동자들의 봉기로 수도에 접근도 못 하고 있었다. 위원회의 대표는 차르에게 말하길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라고 설득했다. 전선의 사령관들도 이러한 요구를 지지했다.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차르는 3월 2일,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다음 날 미하일은 사태를 파악하고 제위 계승을 거부했다. 3월 4일 니콜라이 2세의 퇴위 칙서와 미하일의 제위 거부 칙서가 동시에 공표되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와 제정 러시아는 완전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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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월 혁명과 니콜라이 2세 차르의 축출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멸망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