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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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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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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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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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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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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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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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EU와 루마니아 경제의 현실, 루마니아의 최대 화두 자원경제 유지
    루마니아는 현재 EU의 일원이자 나토의 회원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활동도 EU와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17년 2월에는 루마니아 에너지관리청인 ANRE에서 에너지 기업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가 2018년 중반부터 흑해에서 천연가스 생산을 시작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루마니아의 흑해 대륙붕 2곳인 미디아, 펠리칸 대륙붕에서 연간 최대 40억㎥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루마니아 당국은 2017년에 미디아-펠리칸 대륙붕에서 첫 해 생산량을 10억㎥로 끌어올렸다. 루마니아는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 생산으로 연간 5억∼6억㎥ 규모에 이르는 수입량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양을 수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 칼라일 인터내셔널의 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본래 동유럽의 최대 산유국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가 석유를 수입으로 바꾸었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루마니아에 있기 때문에 한 때는 석유를 자급하였지만 최근에는 수요가 늘어나 해당 유전에서 추출하는 원유의 양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 외 천연가스 총 생산량의 5%가 루마니아에서 나오고 있다. 기타 산업으로 루마니아는 농업이 발달했다. 전통적으로 밀, 옥수수, 포도, 해바라기씨 등이 세계 생산량 상위 10%에 들어갈 정도로 풍부하다. 더불어 맥주가 물보다 저렴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맥주보다도 포도주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기후가 포도 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포도 생산량이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다. EU의 가입 이후, 경제가 제조업을 위주로 크게 증진되었다. 경제 성장률이 동유럽에서 높은 편으로 동유럽 국가가 그렇듯이 EU의 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더불어 높은 인적 자본에 힘입어 경제 성장이 일구어지고 있는 편이다. IT 분야는 대표 회사들은 적게 나타나지만 다국적 기업들의 진출이 많은 편이다. HP나 마이크로소프트등이 진출해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유럽 데이터 센터가 루마니아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인터넷 속도 순위를 보면 루마니아는 상당히 높은 순위에 랭크되고 있다. 유럽에서 빵을 생산하는 능력이 최상급이라 이름 붙을 정도로 농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평원이 흑토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대표 제품이라 할만한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유럽 시장에서 저가 차량으로 크게 알려진 자동차 제조 기업인 다치아(Dacia)가 있다. 국내에서 알려진 것들은 안티에이징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제로비탈 화장품이 있고, 안티 바이러스 업체인 비트디펜더가 있다. 두 회사 모두 각각 한국에도 지사를 가지고 있다. 비트디펜더의 인지도는 다른 국외 제품 면에서는 떨어지고 있지만, 국내에서 기술 OEM으로 10개 가까운 업체들이 사용 중이어서 실질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외산 보안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측 엔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안티 바이러스 제품은 알약과 하우리, 바이러스 체이서라 볼 수 있으며 자동화 솔루션인 RPA 솔루션 중 현재 독보적인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UI Path 역시 루마니아에서 만들었다. 또한 워드 프레스 테마 제작사 중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Hestia, Zelif lite (프로버전은 Zelle PRO), NEVE 등의 테마를 제작한 유명 테마 제작사인 Themeisle도 루마니아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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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01
  • 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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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1
  • 한베 가족의 비극 : 베트남의 이례적인 사형판결
    최근 베트남에서 이례적인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수는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인이다. 본래 베트남에서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법정 최고형은 마약 관련 범죄, 자국민 살해, 극악의 보이스피싱 범죄에 해당 되는데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에 살해 당한 사람이 한국인이며 살인자 또한 한국인이다. 살인자인 한국인은 지난 3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베트남 현지인 아내를 폭행하고 기르던 개를 죽이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 징역형에 베트남 현지에서의 추방으로 끝날 수 있다. 이에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대피한 베트남 아내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시아버지인 살인자의 부친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이에 살인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일 뒤 베트남에 왔고, 아들의 집에서 아들과 술을 마시며 아내를 잘 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그러나 해당 살인자인 아들은 아버지가 아내 편만 들고 자신을 혼냈다고 생각해 격분해 아버지가 잠든 뒤 흉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인 아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한국인 아버지를 존속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에 베트남에서는 발칵 뒤집혔다. 베트남의 사회적인 통념상, 존속 살해는 아무리 극악의 범죄자라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이건 일반적인 살해 범죄가 아닌 도덕적인 측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선 살인자인 아들은 베트남 공안에 체포되었고, 대상이 외국인 용의자에 피해자 또한 같은 국적의 외국인이었기에 사건 심의 자체도 논란에 휩싸였다. 사법부의 한 편에서는 "외국인이 외국인을 죽인 사건인데 남의 나라 사람을 두고 법정 최고형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나?, 그는 한국에 넘겨 한국 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건은 베트남에서 벌어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이 사건은 존속 살해라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사회적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주장하고 있기에 생각보다 심의가 오래 끌었다. 사건 심의가 복잡하게 끌려 간 배경에는 유교적 사상과 불교적 사상이 남아 있는 베트남의 전통 문화 때문이다. 베트남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매년 음력 7월 15일 보름날은 불교의 여러 기념일 중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을 부란(Vu lan)기념일이라 하는데 우리가 카네이션을 드리는 것과는 달리 부모님에게 장미를 드리고,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날로 아주 각별하고 특별한 날이다. 이러한 전통은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은덕을 베풀며, 아름다운 미덕을 쌓는 도덕, 문화 특징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날은 우리의 어버이날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부란절은 중원절(Tet Trung Nguyen)이라 하여 부모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 날의 유래는 목건(目犍)이라는 보살이 일생에 죄가 많아 저승에서 굶주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효자였던 목건의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어미에게 공양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음력 7월 보름날, 제례를 위해 모인 주승들의 도움으로 결국 어머니를 구했다고 전한다. 이후, 부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목건련처럼 하라고 일렀다. 부란은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해 생겼고 요즘은 부모뿐 아니라 조상에게도 효(孝)를 바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부란 공휴일은 매년 부모님과 조상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 내가 존재하게 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자식은 항상 부모가 키워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한 날이 되었다. 부란이 돌아오는 계절이 되면, 많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과 고아, 독거 노인들을 위해 선물을 주는 방법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이런 일들은 베트남 전통과 도덕문화의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뜻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존속 범죄에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것은 이와 같은 베트남의 사회 도덕적인 상황과 무관치 않다. 패륜 범죄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과 더불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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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5-31
  • 러시아, 자국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의 바이 백 조항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법안 추진 중
    러시아 특수군사작전 개시 이후 자국을 떠났던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이 러시아 땅에 다시 발 들여놓기 어려울 위기에 처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를 나간 외국 기업의 '바이-백'(매수 청구권)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가두마에서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 측에 넘긴 주식, 혹은 자산을 재매입하는 옵션 행사를 규제하는 '기업의 귀환에 관한 법안(Законопроект о возвращении корпораций)'을 지난 4월에 상정한 이후, 다음 달 6월에 심의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이미 러시아 재무부와 4월 말에 합의가 끝난 상태로 2차 및 3차 독회가 계속될 예정에 있지만 6월 두마의 심의가 통과되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법안은 '주식회사 관련 법률(속칭 법인법, Закон о корпорациях)'에 대한 개정안으로 전쟁 발발 전인 2020년 말, 두마에 제출됐으나, 표류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 이후인 2022년 5월 25일 1차 독회를 통과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가 종전 분위기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법(Закон об иностранных инвестициях)'의 조정을 포함한 새 개정안으로 4월에 상정되었고 이제 2차 심의가 재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 개정안은 러시아 당국이나 현 소유자가 특정한 몇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외국 브랜드의 자산에 대한 원 소유자의 매수 권한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즉 1) 외국인 주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국가에 거주하는 경우 2) 매수계약서 상의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낮은 경우 3) 계약 체결 후 2년 이상이 지났고, 러시아인 소유주가 직원과 채권자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했을 경우 등이 속해 있다. 물론, 원 기업은 바이 벡 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보상 금액은 러시아 정부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원 소유주가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보상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감액 규모는 법원에서 정하게 된다. 대상 기업이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속할 경우에는 러시아 당국이 자산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국방이나 재정 안정에 관련된 사업의 경우, 옵션 행사는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히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산업 분야는 이미 러시아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본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그 영향을 받는다. 러시아 정부가 복귀를 허가하지 않고 일정 보상 금액을 주어 그대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티야는 이 법안이 채택될 경우, 바이 백 옵션을 체결한 18개 외국 기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날 때, 통상 러시아 인수자 측과 옵션 거래를 맺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서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와 미국의 맥도날드 등 몇몇 업체만이 옵션 거래를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르노 자동차는 6년 이내에 주식을 다시 매수할 바이 벡 권리와 함께 자산을 넘겼고, 맥도날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산을 러시아 패스트푸트 업체 '브꾸스노 이 또찌까'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현대자동차도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넘기면서 2년 바이 백 옵션을 걸었다. 러시아가 새 법안 상정을 근거로, 외국 기업과 맺은 바이 백 옵션 계약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두고, 중재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질 것이지만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규제 의지는 확고하다. 이는 푸틴 대통령부터 러시아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방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4~2015년 러시아의 크림 병합으로 인한 서방 제재 당시에 러시아에 투자한 기업들과 현대, 삼성 등의 대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국민 감정에 이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업들은 다 철수했지만 오로지 끝까지 남아있었던 한국 기업들에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러시아인들은 한국 제품으면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했다. TV, 냉장고, 스마트폰, 에어컨, 청소기, 심지어는 김치 냉장고까지 당시 러시아인들의 집에는 한국 제품이 1개씩이라도 갖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현대, 기아자동차 판매율도 급증했다.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KIA, 횬다이는 러시아의 국민자동차로까지 여겨졌다. 당시 일찍 매장을 철수했던 일본의 도요다는 러시아의 자동차 브랜드 판매에서 5위권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로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에 한국 기업들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켜주길 원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혜안은 놀라웠다. 삼성이나 LG는 러시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의 외국 브랜드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광판에서는 HYUNDAI와 KIA MOTORS 광고가 큰 스크린으로 홍보되었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에는 LG 전자 대형 스크린이 홍보판에 새겨져 필자의 경우, 지나갈 때마다 그 스크린을 보고 가슴속에 벅찬 감격을 느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덕택에 삼성 스마트폰은 수년 동안 판매율 1위를 놓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미국 아이폰의 아이툰즈보다 삼성 안드로이드를 더욱 선호했고, 1억 4천만의 충성스러운 고객들은 삼성이 어떤 시리즈를 새로 출시하든 불티나게 팔아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7~8년 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윤석열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비행기 직항도 금지하자 러시아에 주재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아 러시아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현대와 삼성이 나가자 러시아인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다른 서방 기업과 일본 기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의리를 지킬 것으로 믿었던 한국 기업들이 나간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치명적인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우기 위해 자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치고 들어왔다. 이제 러시아인들은 이전처럼 한국 기업 제품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국 기업들은 평생 충성하던 1억 4천만의 고객들을 버렸고, 이제 다시는 그들을 고객으로 되찾지 못할 것이다. 윤석열과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바이 벡 조항도 쓸모 없게 되었다. 한 번 배신하고 떠난 그들을 예전처럼 찾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자국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그만큼 우수해졌고, 중국 제품 또한 저렴한데다,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에서도 이제는 서방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제품이 없다해서 그들에게 있어 잠시 불편함이 있을 뿐, 없으면 없는데로 그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쉬울 것은 없다. 특수군사작전 동안 떠나지 않고 러시아인들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준 외국 기업들은 중국 기업들이고 오히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큰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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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0
  • 바레인 왕실 알 칼리파 가문의 내력
    1970년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의 바레인에 대한 주권요구를 포기하게 하고 바레인을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되었고, 1971년 8월 15일 바레인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8월 바레인의 샤이크 이사(Shaikh Isa) 국왕은 토후 명칭을 아미르(Amir)로 바꾸고, 1973년 5월 26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 내 급진 좌익 세력들의 침투로 인해 왕정 위협과 혼란이 우려되었고 이사 국왕은 결국 칙령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및 사법, 행정 등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바레인은 1975년 8월의 국회 해산과 더불어 정당 활동이 일체 금지되어 있고, 강력한 국왕 중심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레인의 왕가인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역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나타난다. 알 칼리파 가문은 아라비아 종족 연맹체인 바니 우트바(Bani Utbah)를 계승한 수니파 상인 가문 중 하나로 분류되며 1766년 본거지인 쿠웨이트에서 알 주바라,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카타르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안에는 진주가 많이 생산되어 국고를 채울 수 있었고 1783년 알 칼리파 가문은 오만이 지배하고 있던 카타르 동쪽의 바레인 섬을 침공하여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카타르의 침공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인물이 아흐메드 빈 무함마드(Ahmed Bin Muhammad)로 그가 카타르의 1대 국왕으로 알려진 알 하킴(Al Haqim)이다. 하킴이라는 이름은 “정복자 아흐메드”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흐메드 알 파테(Ahmed Al Fate)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칼리파 가문이 무력으로 이익을 장악한 것은 이 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아흐메드의 통치 이후 바레인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이집트의 위협도 존재했고 오만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오만의 식민 통치를 받기도 했다. 1803~1809년의 시기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전락했고 1810년부터는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20년 영국이 중동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바레인에 이르게 되자 바레인 정부는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식 근대 국가 체제가 도입되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레인은 부족 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사회 관련 문제는 종교 법정에서 관할했다. 위원회는 진주 생산과 팜 농장, 어업 등 경제 전반을 관여했으며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1869년부터 192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바레인을 통치한 이사 빈 알리(Isabin Ali)는 바레인의 최장기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부터 대대적인 행정개혁이 이루어졌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하마드 빈 이사(Hamad Bin Isa, 재위 : 1923~1942)는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를 고문으로 두고 사실상 영국이 통치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레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막대한 양의 석유다. 바레인 석유회사가 석유 탐사를 시작해 1932년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다. 이후 바레인 경제는 어업과 진주 생산에서 석유 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고, 오일머니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현재 바레인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로 나타나고 통치 세력인 수니파는 소수 종파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 되는 의회 해산은 종파 갈등으로 전이되었으며 이후 바레인은 지금까지도 시아파의 끊임없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시아파 수장 국가인 이란과의 관계도 국내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이란에서 파생된 ‘바레인 해방 이슬람 전선’이 바레인의 지도 세력을 암살하고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강대국의 힘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인정받는 것은 중동의 작은 나라 왕실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바레인 왕실은 특히 서구와의 관계 처세에 능숙한 국가다. 민주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탄생지이면서 모범국가인 영국, 미국과 아주 친한, 친 서구 국가이다. 사실 오늘날 바레인 왕국의 탄생은 영국의 힘이나 다름없다. 중동에서 영국이 만든 두 개의 괴뢰 국가가 있는데 하나는 바레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다. 예부터 상인이던 알 칼리파 가문이 바레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된 것은 1820년 영국과 일반적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1861년에는 영구적인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로 인해 이집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의 큰 국가들은 바레인 영토를 넘보지 못했다. 영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에서 소국(小國)들의 입지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강대한 국가가 탄생하여 자국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바레인 침공을 막아내며 독일 등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26~1957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바레인의 최고행정관(Chief Administrator)을 역임한 영국인 찰스 벨그레이브 경은 바레인의 민, 형사 사법체계를 만들고 경찰 기능을 구성했으며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대중화 된 교육을 도입하는데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레인의 지방분권화와 석유 탐사에도 크게 공헌했다. 당시 중동지역 여학교도 1928년에 처음으로 설립됐고 노예제도 폐지됐다. 전화 도입, 신문 발행, 영화관, 방송국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로 나타난다. 이어 바레인 왕실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 영국 왕실과도 친밀했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할 때 중동의 군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은 왕자나 공주들을 보냈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의 결혼식에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아랍의 봄’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부득이하게 불참했다. 2012년 5월엔 윈저성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비공식 오찬에도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한 데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면서 방영이 좌절되었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도 영국 서리(Surrey)에 있는 애플가스 컬리지에 진학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에 있는 리즈 학교(Leys School)에 다녔다. 이후 햄프셔의 엘더쇼트에 있는 몬스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68년 졸업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영국군 장교로도 복무한다. 하마드 국왕의 아들인 살마 빈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왕세자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나마에 영국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기로 하고 칼리드 빈 하마드 바레인 외무장관과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이 건축 행사를 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 의지하던 바레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질서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마드 국왕은 영국에서 독립한 다음 해인 1972년 왕세자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빈 살만 왕세자도 대학 학부는 워싱턴D. C. 아메리카 대학 출신으로 알려진다. 미국과의 친분은 중동 내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깊은 관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격화되자 사우디군 1,000여 명이 바레인에 파견되었다. 역시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 역시 500여 명의 경찰을 보내 바레인의 치안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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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30
  • 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점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하나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차드 분쟁은 행위자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초기 남북갈등 시기는 1966~1979년이고 두 번째, 북부 구쿠니파로 알려진 국방장관을 지지하고 있는 종파와 대통령을 지지하는 하브레파 간의 분쟁은 1980~1987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저항세력반군연합(UFR) 간 분쟁은 1990년~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에게서 탈식민화된 이후 대략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통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선거가 계속 치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에 따른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의 반발 또한 집중되어 민주주의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군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이제까지 조직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으로 인해 국내적 불안정정이 고조되어 반군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지자 반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보코하람과 연합도 불사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북부 세력 출신이었던 이드리스 데비가 1990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차드 분쟁은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독재 정권이 이어오고 있는 상기의 요인들이 남아 있는 한, 차드 분쟁은 전쟁 수준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차드 내전의 분쟁 전개에 관해서는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과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차드 내전은 종결되는 듯하였으나, 차드의 통일을 달성한 하브레 정권이 독재 탄압 정치를 자행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 하브레의 최측근이자 군사고문인 이드리스 데비가 1989년 수단으로 망명한 이후 1990년 11월 구제인민운동(MPS)을 결성하였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의 남부 반군 세력의 지원을 얻어 하브레 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차드 내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12월 수도인 은자메나를 공략하여 하브레를 축출하고 집권에 성공하였으며, 1993년 1월 신(新) 헌법 제정을 위해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정 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3월 국민투표에서 신(新) 헌법안이 승인되는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차드 내전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었다. 1996년 6월에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드리스 데비가 재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이드리스 데비의 구제인민운동(MPS) 당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기타 소수 야당과 대연립 내각을 성립하였다. 1998년 5월 이드리스 데비는 남부 지역의 반군(FARF)과 평화협정을 조인하였고, 반군 세력을 합법, 정당화시키는 등 기존의 반군 세력을 정치권,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3년 리비아에 거점을 둔 저항군 반란연합(UFR)이 반란을 재개하고 투쟁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니제르와 리비아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여러 반군 세력들이 내전의 잠재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차드 정부 또한 주변국에 거점을 두고 세력을 유지하는 반군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6년 12월 리비아의 변화와 합의를 위한 차드전선(Chadian Front for Change and Accord, FACT)이 리비아 정부의 공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하자 차드 정부는 리비아 국경을 폐쇄하고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드라스 데비의 장기집권이 지속됨에 따라 차드 내에서도 반정부에 대한 시위들이 점차 증대되었다. 2016년 2월에는 같은 해, 4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에 이드라스 데비 정부는 반정부 시위에서 촉발될 수 있는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대규모 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도 하였다. 2016년 5월, 두 차례의 선거를 거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데비 정권과 집권 여당의 주도로 대통령 임기 연장을 주축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로,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어 왔다. 해당 헌법 개정안은 첫째,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6년 으로 연장하고 둘째, 국무총리제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켰으며 셋째, 국회의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 등을 명제로 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고 대통령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반군인 공화국 구원을 위한 군사위원회(Military Command Council for the Salvation of the Republic, CCMSR)는 2018년 8월에 차드 영토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 CCMSR은 북부 지역의 군 주둔지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정부군과의 충돌이 저 강도 수준에서 지속되고 있다. 한편 리비아에 주둔하던 UFR 또한 2019년 초 차드 북서부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정부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차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이 UFR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였고, 250여 명의 반군이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드 국토행정 공공안보부 장관은 같은 해, 3월에 리비아 접경지역인 북부 지역의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차드의 북부, 동부지역에서는 금광업자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고,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충돌 등이 역시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공동체 간의 충돌로 인해 사회 불안정이 점증하고 있다. 북부 지역에서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광부업자들 간의 충돌은 정부의 지하자원 발굴 및 국가 이익의 배분 등으로 인해 발생해 왔다. 최근에는 CCMSR 반군 또한 연루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의 충돌은 2019년에 현저히 빈번해지게 나타났다. 정착민과 아랍 유목민들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전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민간인이 소지한 무기를 압류하는 조치를 취한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가 심화되어 5월 16일에는 사망자 12명, 5월 19일에는 사망자 22명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차드 내전에 대한 분석과 저 강도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지속되던 차드 내전은 1990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저 강도 분쟁의 형태로 완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8~90년대처럼 대규모 전쟁은 발발하지 않고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반군 세력들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드 분쟁이 저 강도 수준으로 장기화되는 것은 대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대내적으로는 차드 정부의 정당성 문제와 사회 경제적 문제가 분쟁의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드에서는 내전에서의 승리, 혹은 쿠데타를 통해 정부가 구성되어 왔다. 현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하브레 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권력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드라스 데비는 쿠데타 이후 민주화 정책을 취했으며 남부 지방의 반군들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획득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반군이 여전히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또는 이웃 국가 내부 상황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아 왔다. 차드 분쟁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대외적 요소로는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반군에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차드의 반군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리비아의 지원 하에 차드 반군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안보적 위기가 닥쳐오고 테러리즘, 공동체 간 분쟁이 격화됨이 심화되자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정권 안정을 위해 폭정도 불사하게 되었다. 차드는 보코하람에 의한 테러 위협과 공동체 간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와 같은 새로운 안보적인 위협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안보 이슈들이 차드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지만 차드 분쟁의 악화 요인이자 전쟁 촉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초, 국제 위기 감시 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보코하람 반군 보고서를 통해 보코하람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실향민이 10만 명 이상임을 밝하기도 하였다. 또한 차드에는 보코하람 위협으로 발생한 난민 7천여 명이 차드로 유입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17년 이후 급증한 보코하람에 대해 차드 정부는 다국적군의 연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코하람은 주요 위협 요인이다. 보코하람의 차드 유입은 국내적 불안 정정을 높임으로 인해 반군 활동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분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공동체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사태는 차드 북부 지방의 티베스티(Tibesti) 지역과 동부 와다이(Ouaddai) 및 실라(Sila)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드라스 데비 대통령은 실라 및 와다이 지방에서 목축업자와 유목민 간에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범국가적인 우려라고 규정하였으며 2019년 8월에는 해당 지방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공동체 간의 폭력 사태는 차드 정부가 국내의 만성적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차드로 유입된 반군들의 세력 확장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9
  •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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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5-29
  • 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
    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 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 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 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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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
    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 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 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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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8
  •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 : 바이든 일가의 조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 내용은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으로 Хантер Байден, увольнение генпрокурора Украины и коррупция в Бурисма (헌터 바이든,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해임과 부리스마의 부패)라는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헌터 바이든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후광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가스회사인 부리스마(Бурисма) 홀딩스의 이사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5년간 부리스마 이사로 일하며 매달 8만 달러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헌터 바이든은 자신이 이사가 된 것이 아버지의 후광이었음을 인정했다.. 헌터 바이든은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분야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말 자체는 트럼프 측이 재기한 부분에서 아버지 덕에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 것이 크게 힘을 받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비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사가 되어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 자체가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이사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인사 비리(Personnel corruption)"이다. 게다가 헌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업한 경험도 없었고, 아버지 조 바이든의 지역구인 델라웨어에서 주 정부 허가를 요구하는 업체의 로비를 하는 등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부리스마 홀딩스 자체가 미국과 절대적인 유착이 있었던 그룹이었기에 조 바이든의 아들인 헌터 바이든이 인사 비리로 인한 이사로 재직이 가능했다.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하고 있는 지역은 러시아의 가스관 "투르크스트림"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들어가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 부분이다. 게다가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해서 공급하는 가스보다 러시아가 가스관으로 보내주는 천연가스가 무려 3,5배가 더 저렴했다. 그러다보니 부리스마 홀딩스가 얻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미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흑해 위기와 돈바스 전쟁 등은 미국의 입김과 이에 반발하는 러시아 간의 간접적인 충돌로 빚어진다. 이렇게 뒤가 구린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검찰에서 이를 수사하려 했다. 그러자 조 바이든은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총장 빅토르 쇼킨을 해임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10억 달러의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고 압력을 넣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자주 독립 국가이자 민주적인 국가였다면 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이 들어올리가 있었겠는가? 이 또한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명백한 내정 간섭이다. 그리고 이 불법적인 내정간섭으로 인해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인 빅토르 쇼킨은 바로 해임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국제법으로 명백한 위헌인 내정간섭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러시아의 돈바스 진입, 소위 저들이 말하는 "침공(Invasion)"이라 떠들면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생비난을 해오고 있다. 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을 압박해 퇴진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바이든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압수 수색이나 특검 등의 수사라곤 전혀 하지 않았는데 무슨 증거가 나오겠는가? 그 외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푸틴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당시 "우크라이나 부패 척결을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이 비판은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쇼킨이 해임되고 난 후, 유리 루첸코가 새 검찰총장이 되어 부리스마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지만 하나 마나한 상황, 그 사이에 부리스마 홀딩스는 증거를 인멸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구린지 갑자기 검찰총장인 유리 루첸코마저 해임됐다. 해임된 사유는 정확히 밝혀진건 아니지만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루돌프 줄리아니와 접촉해 바이든 비리 혐의 증거 자료를 모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서 이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해 내부고발이 터졌다. 누군가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정보 당국의 감사관은 조지프 매과이어 국가 정보국 국장 대행에게 ‘긴급’ 사안이라고 통지했지만 사태가 긴박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회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지프 매과이어가 이 사건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특검이 들어가 수사할 수 있는 기회는 또 날라갔다. 이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100% 신뢰한다고 믿었던 루슬란 랴보샤프카 검찰총장의 주도 하에, 과거 수사의 적절성에 대해 재검토한 결과, 우크라이나 검찰은 헌터 바이든이 해당 사건에 연루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하였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미 사건의 증거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인멸된 상태였다. 이런 사건들로 볼 때 미국의 입김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가들, 경제, 사법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정도까지 본다면 우크라이나를 먹으려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 아니었을까?
    • 칼럼
    • Nova Topos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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