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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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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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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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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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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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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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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 지난 7월 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결된 BRICS 정상회의는 회원국 수가 11개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불참으로 인해 그 위상이 오히려 퇴색됐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지난 10, 11일 로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10일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 URC 2025)와 11일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도 영국 키어 스타머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불참했다. 오히려 로마에서 벌어진 양일 간의 회의 의미가 BRICS 정상회의보다 더 반감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등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 참석자들이 초대된 만찬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키예프에 대한 유럽 대륙의 경제 지원은 무료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Il Presidente del Consiglio italiano Giorgio Meloni ha ricordato che gli aiuti economici del continente a Kiev non sono un servizio gratuito)."고 서술한 이탈리아 일간지 란티디플로마티코(L'Anti Diplomatico)의 보도가 겨우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홀대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거의 홀로 책임지게 된 유럽 국가들이 로마에서 다시 반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결속을 다졌을까?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의하면 10, 11일 이틀간 열린 로마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Ukraine Recovery Conference)는 로마에서 우크라이나 기업들과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원, 우크라이나 국내 각종 지역 문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 4가지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는 2022년 스위스 루가노, 2023년 런던, 2024년 베를린에 이어 4번째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2017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개혁 회의(Ukraine's Reform Conference)가 출범된 것이 시초로 러시아-우크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열린 로마 회의의 성과는 초기 자본금 2억 2,000만 유로의 특별 기금(Ukraine Recovery Fund)을 조성하는 합의에 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유럽투자은행(EIB)이 이 기금을 내년인 2026년까지 5억 유로로 늘리기로 했다. EU를 대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Gertrud von der Leyen) 집행 위원장은 EU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의 지원을 위해 국제 금융기관들과 약 23억 8,000만 유로 상당의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3억 중, 18억 유로는 대출 보증 형태로, 5억 8천만 유로는 무상 원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EU는 앞으로 규모를 최대 100억 유로로 키울 작정인데 EU는 나토 분납금인 국가 GDP의 5%를 맞춰야 하고 각 국의 분담금 지급 시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U 분담 지원금을 만약 축소하기라도 한다면 국가 GDP의 상당 부분을 EU 분담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GDP 낮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 운영 자금에 세금도 그만큼 부과해야 하니 부담되는 것은 EU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불만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고, EU 각 국은 이러한 시민들의 불만들을 달래야 한다. 즉, EU는 우크라이나로 인해 서서히 자금난에 시달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피해 복구를 위해 3억 유로를 내놓기로 하는 등, EU 국가들도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타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금 23억, 그리고 앞서 언급한 5억, 3억 유로와 같은 금액은 실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자금들, 초창기인 2022년과 비교해 보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의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앞으로 14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재건 및 현대화에 필요한 재원은 1조 달러(Сума, необхідна для відбудови та модернізації України протягом наступних 14 років, становить 1 трильйон доларів)."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2개의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하나는 서방 측에 의해 동결된 러시아 해외 자산과 러시아 원자재 수출에 대한 특별세 부과로 5,4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부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의 민간 투자로 4,6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자는 완전히 날강도 짓이고, 후자는 민간 투자를 열어 EU 시민들의 피같은 돈을 빨아 먹겠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에서부터 우크라이나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메르츠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를 약 5,000억 유로로 추산한다고 주장했으며 슈미갈 총리의 1조 달러 주장을 부인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피해 보상을 하기 전까지, 러시아 자산 동결을 해제해서는 안 된다며 비교적인 정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러니 우크라이나가 주장한 2개의 기금 조성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후 복구를 위해 민간 투자 부문을 맡아 온 미국의 대형 투자업체 블랙록(Black Rock)이 로마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 복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국 투자기업 블랙록 주도의 민간 투자 유치 건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의 핵심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착안한다면 자금이 급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 블랙록 CEO는 지난 2023년 젤렌스키와 회동한 이후, 민간 투자를 끌어 내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투자 전략 수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로마 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블랙록은 포기한 이유를 키예프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 우크라이나 정책을 핑계로 들었다. 블랙록이 우크라이나 복구를 위한 투자 유치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지난 7월 6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블랙록은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주요국 기관 투자자들의 초기 지원으로 수십억 달러의 유치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관 투자자들이 협상을 일부 중단했기 때문에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당초 블랙록의 민간 투자 유치 목표는 최소 150억 달러였는데 프랑스 업체가 블랙록의 역할을 이어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의 참여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 최소 150억 달러라는 목표가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에게 있어 다행한 점은 미국이 복구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 키스 켈로그 대통령 특사는 이날 로마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한 새로운 '마셜 플랜'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광물 자원 거래로 조성된 특별 기금으로 우크라이나 복구 지원에 앞장 설 것이라 언급했다. 이번 로마 회의에서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까지 논의되었다. 슈미갈 총리는 내년인 2026년 예산 편성에서 19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키예프는 2025년 러시아에게 입은 피해 복구 사업에 할당된 자금 지원을 절반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1일 로마에서는 전날 복구 회의에 이어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지닌 유럽 30개 국으로 구성된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우크라이나 지원 체제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제외된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로 결성된 국가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대러 강경파인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 공화당), 리처드 블루멘탈(Richard Blumenthal, 민주당) 미 상원의원이 이 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로마 정상회의의 성과를 말한다며 우크라이나의 휴전 감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윤곽을 잡있다는 것에 있다. 마크롱 과 스타머 총리는 비록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런던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의 우크라이나 파견군 규모를 50,000명으로 늘릴 수 있다며 허풍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이처럼 런던에서 합의했다며 그 합의 사항을 공개했다. 또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 작전 본부를 우산 파리에 두고 12개월 후에는 런던으로 이전, 순환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키예프에도 지부가 설립된다고 했다.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직후 몇 시간 이내에 바로 작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평화 유지군의 운영 계획을 마련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평화 유지군에게는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우크라이나 영공 및 해상 안보를 지원한다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훈련 교관들과 군수 물자 공급 및 병참 전문 요원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될 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물론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평화 유지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큰 관건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4월 미국이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에 정보 및 물류 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원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일 미국의 구체적인 약속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린지 그레이엄과 리처드 블루멘탈 미 상원의원들도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의지의 연합(Union of the Will)'은 로마 정상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추가 평화 협상인 제3차 이스탄불 협상을 지지한다면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한 나토가 2024년 약속한 대로 올해 최소 4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휴전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휴전이 발효되면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인즉, 휴전이 되면 곧바로 평화유지군을 가장한 나토군을 투입하겠다는 얘긴데 러시아의 휴전 협상 요구 내용과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다. 결국 유럽은 러시아와 휴전 없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휴전과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유럽과 우크라이나이지 러시아는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휴전을 요구해도 EU와 우크라이나는 결코 휴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올해 "로마 회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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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 11일 양일 간에 걸친 "로마 회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EU의 지원 또한 지지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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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 2020년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로 우리가 위기를 맞았을 때, 베트남은 가장 먼저 한국에 대해 문을 닫았고 이후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기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적개감을 갖는데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혐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시에 댓글로 확인했다. 이는 혐베와 혐한을 부추기는 기레기들의 글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베트남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본다. 베트남 현지에서 현지인 여성들에게 몹쓸 짓하며 각종 물의를 일으키고 간접적인 인종차별하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에는 베트남 사람들은 후진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인종차별하며 비하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 당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럴 낮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건만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종차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을 마치 자기 아래로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후진국 이미지 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분이 바로 아래 링크와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류이자 문화 교류자로, 진정한 친구로 대해본 적이 있었는가? 베트남인들을 애초부터 깔보고 들어가면서 후진국인으로 업신여기고 베트남에 들어와 생활하는 교민들이 많아지면서 현지인들에게 갑질하는 것,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8년 전에는 하노이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성추행했던 한국인들을 필자가 때려 눕힌 적 있다. 그렇게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정작 위기 때 우리가 저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내에서 혐한이 생기고 있는 이유는 베트남을 깔보고 갑질하며 무조건 자신들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성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현지 뿐 아니라 현재 한국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내 일하러 온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들은 해줬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특히 외노자들 때문에 일자리 없어서 외노자들 추방하라 주장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정상적인 비자받아 한국와서 돈 벌어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권 예우를 해주었는지도 궁금하다. 현지 베트남 사람들이 차별대우들을 받고 언제까지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지인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고 갑질하며 온갖 하대와 몹쓸 짓을 다하는 그런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류로 인식했다면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베트남에서 어려웠을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필자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어려움을 겪었었던 교민 사업가들, 교민들도 현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순박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게다가 과거에 문화적 수준이 조선과 비슷할 정도로 높았던 사람들이다. 같은 사례로 러시아권 국가들 얘긴데 사업 때문에 왔던 관광으로 왔던 간에 러시아권 국가들에 와서 현지 여성과 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많다. 그 원인이 "러시아권 국가의 여인들은 김태희가 밭가는 나라" 라는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모델급 여인이나 몇몇 혼혈 인종 중 미모가 있는 여인들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 러시아권 국가들에 오니 현지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현지 러시아권 사업가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며 사업 파트너가 되서 만나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들이 한국인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장 안 좋은 것은 후진국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권 국가들에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돌아 다니고 한국 기업들이 스폰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거만하게 들어와 상전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권 국가들의 정부와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지만 이런식으로 행동들을 하면 그 호의감이 얼마나 갈까? 상대 문화를 존중하고 동등한 잣대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화다. 러시아권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쉽게 현지 여성과 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와 한국에서 보는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지를 이번 하노이 무인 사진관에서 폭행 사건이 표본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한국보다 경제력에서 떨어진다고 예의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에 결혼정보회사 등이 베트남 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매매혼 비슷하게 했던 행위들을 했었고 이들 나라들이 경제력이 낮다고 한국 남자들이 결혼해주면 감사한 줄 알아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들이 베트남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여성 대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 베트남의 각 커뮤니티들에서는 반한감정, 혐한감정이 들끓고 있다. 지금 모든 베트남 커뮤니티들 이 여성들을 규탄하고 어디 사는지 칮아내느라 여기저기 제보도 받고 난리 난 상태인 것이다. 요즘 베트남 커뮤니티 내 박제방이 유명한데 이미 혐한으로 도배되어 있는 상태다. 커뮤니티에 박제되는 순간, 한국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신상정보가 나돌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는 베트남인들의 성정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보여 진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숫자가 30만이 넘어가는데 한국 내 베트남의 커뮤니티들에서도 비판이 매우 거센 상태다. 필자가 베트남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으면서 늘 느끼는건데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인들을 거의 거지보듯이 하고 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남베트남보다도 못살았던 나라가 현지인을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마치 노예나 종놈보듯이 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의 나라에서도 저런 갑질 및 폭력을 행사하는 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해도 다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투자도 어렵게 받는 이유가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갖은 추태와 현지인들에 대한 멸시 등등 한국인 자신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본인들이 베트남에서 환영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진정성이 떨어지지만 예의가 바르고 공사 구분이 확실해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지 않는 졸부 마인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졸부 마인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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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트남 하노이 사진관에서 벌어진 한국인들의 폭력 사태 -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의 갑질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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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막바지를 앞두고 있고,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휴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가 있다. 해당 국가는 카스피해의 막대한 자원을 기반으로 일약 부국(富國)으로 올라선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서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완충지대에 놓여 있으며 원유와 가스를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에서 수급받고 있는 터키 입장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자원 에너지 수급의 생명줄인 곳이다. 게다가 민족이 같은 투르크족 "형제의 나라"이자 "동맹국"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된 송유관으로 가스를 받고 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유라시아 국가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국가였다. 필자는 2022년 4월 4일에 페이스북과 브레이크뉴스 칼럼에 포스트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에서 에너지 전쟁이 격발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 카스피해는 남한의 3.7배,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거대한 석유 창고로 풍부한 원유를 품고 있는 곳이다.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망광구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회가 많은 곳이고 BTC와 CTC 라인의 시작점이 열렸어도 인근에 말라가고 있는 아랄 해까지 에너지 전쟁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땅이다. 카스피해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바쿠 유전을 개발한 이래 소련과 이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 일대 석유 자원에 눈독을 들인 미국이 소련이 붕괴된 이후, 독립한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카스피해 일대의 자원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간주하고 이를 공평하게 분할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고 이들도 카스피해 영역 인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바다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전(油田)을 가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보았다. 이에 바다인 카스피해의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서 독점적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의 영해로 설정된 지역에 자원이 거의 없는 이란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연안국은 호수인 카스피해에 균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카스피해 공유 5개국이 20%씩 천연자원을 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에 부분적인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텐기스 유전을 발견하자 카스피해가 바다임을 인정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카스피 해가 바다로 규정되어야 12해리+EEZ에서 나오는 석유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와 같은 아제르바이잔의 결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소련 시절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기름을 마음껏 가져다 썼는데, 이젠 그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카스피 해를 호수라고 해야 해상 유전의 기름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군사적 배경도 있다. 카스피 해가 호수이면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 해군을 상대국 해안에 해군을 배치할수 있다. 이에 비해 신생 3개국은 강대국의 함선이 자국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국제해양법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다섯 나라가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다가 2018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해안도시 악타우에서 만나 ‘카스피해의 법적 상태에 관한 협정’(Convention on the Legal Status of the Caspian Sea)에 합의했다. 명칭은 바다(Caspian Sea)로 규정하고, 조약의 세부 조항에는 수역(body of water)이란 애매한 표현을 썼다. 얼핏보면 절충안 같지만 대체적으로 호수라고 규정한 현상유지의 협약이란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강대국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누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스피해 지역은 2002년경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 국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었고 일본 역시 그 뒤를 이어 대규모 투자를 본격 착수했으며, 우리 대한민국도 2002년 4월 산업자원부와 5개사가 '카스피해 유전개발 컨소시엄'을 만들어 카스피해 진출 교두보로 선정한 카자흐스탄을 대상으로 1차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에 대단위의 원유와 가스가 발견되자 우크라이나는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벨라루스로 수송하기 위해 오데사-브로디(Odessa-Brody) 파이프 라인을 직접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에 아제르바이잔 샤 데니즈(Shah Deniz) 제2 광구 생산 가스의 대유럽 수출 경로 설정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광구를 통한 유럽으로의 가스수출은 2020-25년이 되면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현재는 일부 광구에서만 유럽으로 연결되고 있고 이 외 투르크메니스탄 여건이 허락한다면, 연간 10~25bcm 규모의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카스피해의 BTC 및 투르크스트림을 통해 자원을 거의 거저 먹다시피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오히려 암묵적으로 카자흐스탄과 파이프 라인이 통과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각자 자국 땅을 거쳐가는 파이프 라인에 대한 임대비를 비롯한 많은 이득이 걸려있던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알바니아는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BTC 라인을 통한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2011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공동 건설을 추진했다.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의 건설 이후에는 EU와 투르크메니스탄 간의 협력 강화가 이어졌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진행으로 인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의 타당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란과 러시아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카스피해 연안 항만 발전 전략을 ‘직접적 시책’과 ‘관련적 시책’으로 나누었는데, 주목해야 할 직접적 시책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서 진흥 정책으로 시행되고 있는 "우선적 사회 경제 발전 구역"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고 있는 자유항 제도를 "마하치칼라 자유항(Свободный порт Махачкала)" 제도로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되는 화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로 둔 제도였고, 러시아가 카스피해를 거쳐 이란으로 수출하는 주력 품목으로 선철(銑鐵), 철강 제품 등이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를 경유한 대 이란 곡물 수출로 볼 때, 2016년~2021년 사이 307,000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022년~2025년에는 1,258,900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에너지 자원 개발사업은 러시아와 이란의 교역과 맞물려 있고, 이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의 이란의 교역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환경문제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연안국들이 경제개발에 나서는 바람에 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 5개국은 자원 배분과 오염 방지에 관한 문제를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문제로 러시아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해에서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생겼다. 비록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이 지역의 자원을 둔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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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막바지를 앞두고 드리워지는 카스피해 위기(Caspian S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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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 브라질의 보수우파 진영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2018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당 소속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2019년 1월 1일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재선을 앞두고 마지막 임기 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대러시아 제재에 상당수 국가들이 참여했는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다. 이는 브라질이 러시아 비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할 경우 브라질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보우소나루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코미디언에게 맡겼다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희극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전가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 28일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의 질문에 브라질은 중립 노선을 엄격히 준수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3월 1일 우크라이나의 난민에 대해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나서면서 확실히 중립으로 자리매김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일에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립 입장 표명을 연대 성명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천연 자원 부국인 브라질의 경제는 또 다른 자원 부국 러시아를 경제 재제한 집단 서방으로 인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이라 이와 야당의 입장 표명은 일종의 헤프닝이 되었다. 이후 보우소나루는 7월 24일 대통령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재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보우소나루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26%, 보통 26%, 부정적 47%로 사실상 재선은 어렵지 않냐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0월 2일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43.2%를 득표하여 2위를 기록했다. 브라질의 인구 집중 지역인 남동부에서 약진해 개표 초기에는 이기고 있었는데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사는 북동부 지역의 표가 합산되자 이는 판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룰라가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0월 30일 둘만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2018년 대선에서 우파 연합을 주도했었던 1차투표 3위 브라질 민주운동의 시모니 테베치(Simone Tebet) 후보와 1차 투표에서 4위를 한 브라질 민주노동당의 시루 고미스(Ciro Gomes) 후보가 차례로 보우소나루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광범위한 반 보우소나루 연대가 구성되었다. 10월 30일 진행된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개표 결과 좌파 후보인 룰라 전 대통령에게 1.8%p의 격차로 밀려서 재선에 실패해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선거는 민주화 이래 브라질에서 치러진 대선 중 최고 접전이었다.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더해 1994년 이후 선거로 당선된 브라질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성공한 사례들이 굳어져 브라질 정치계의 징크스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 날 선거에서 깨지게 되었다. 얼마 전 탄핵을 겪고 전직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수감되며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단임 상태에서 넘어간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로 얼마 전 감옥에 들어간 전직 대통령에게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부패혐의로 인해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와 함께 수감된 룰라의 혐의는 모두 대선 전 대법원에서 무혐의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10일 전 무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당시 룰라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지도자라는 동정론까지 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지지도를 회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상대 정당이 얼마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또 다른 대통령이 감옥에 간 정당과 맞선다는 최고의 이점이 모두 사라진 결과로 나타났다. 다만 세계 최초로 얼마 전 탄핵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상태에서 정권을 교체 당한 대통령은 보우소나루보다 약 8개월 앞서 정권을 교체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문재인이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지 않았다면 1980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먼저 기록할 뻔했다. 한편 보우소나루는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을 외쳐 왔지만, 정작 자신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게 되었고, 퇴임 후, 이와 같은 부정선거 논란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대선 1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진 2022년 브라질 국가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하원 513석 중 99석을 기록하며 1994년 이래 단일 정당의 최다 의석수 기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보우소나루 입장에서는 아주 최악의 상황은 피하게 되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11월 1일 침묵 끝에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하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보우소나루는 조용히 퇴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지지자들이 대규모 선거불복 시위를 벌였고, 그 배후에는 보우소나루가 조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11월 3일, 제라우두 아우키민(Geraldo Alckmin) 부통령 당선인과 접견하면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해 논의했다. 아우키민 부통령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연방 정부가 모든 정보와 협력을 제공하여 정권 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우소나루는 12월에 퇴임해 2023년 1월 1일 열리는 룰라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구체적인 행선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트럼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2023년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발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고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 침입해 점거하였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에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동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조 바이든은 룰라 대통령과 통화하여 폭동에 반대하고 브라질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혔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폭동은 힘을 받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브라질 당국은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했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편 룰라 대통령은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으며 보우소나루는 트위터를 통해 이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한편 2023년 1월 15일 대통령궁 법인카드 사용내역이 공개되면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4년간 긴급지출용 법인카드로 보좌진 21명과 함께 식료품, 주유 등 67억원 상당의 돈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보우소나루의 최측근이고 보우소나루 행정부에서 마지막 법무장관을 맡은 안데르송 토히스(Anderson Torres)의 집에서 계엄령에 관한 시나리오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면서 보우소나루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된다. 2023년 1월에 발생한 브라질리아 폭동은 룰라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우소나루에 대한 정치 보복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이후에도 잇달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등,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앞서 내가 페이스북에 언급했듯이 정치 보복은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독재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치 보복이다.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거대 집단을 이끌기 위해 필히 가져야 할 중요 매개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화 되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권력이다. 당연히 이념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와 권력은 필연적으로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혐의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귀걸이다. 적용되어진 혐의의 이면에는 정치적 패배에 의한 정치 보복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정치 보복은 이전 집권자나 현 집권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정치를 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보복 및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정치가가 된다. 정치 권력은 그만큼 냉혹하고 비정하다. 결국 보우소나루는 내란 음모, 무장 범죄 조직 연루, 국가 자산 및 유적지 위협 등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보우소나루의 아들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에 대한 지지와 사면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 시기에 트럼프 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올해 7월 9일 트럼프는 자신이 존경하는 보우소나루를 브라질 정부가 마녀사냥을 하고있다면서 브라질 정부에 관세 40% 올려서 50%를 부과했다. 트루스 소셜에 공개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서한에서 “브라질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국제적인 수치이며 이번 재판은 열려서는 안 된다(Brazil's treatment of former President Bolsonaro is an international disgrace and this trial should not take place).”고 밝혔다. 그는 보우소나루를 매우 존경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죄가 없으며 단지 국민을 위해 싸운 것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 트럼프는 관세 인상 근거로 “브라질이 미국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Brazil is attempting to censor US social media platforms).”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2022년 대선 이후 각종 SNS와 치열한 대립을 벌여 왔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극우파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X 등을 통해 부정선거 및 인종주의, 증오발언, 허위정보를 유포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며 통제에 나선 것이다. 수차례 계정 삭제 요구에도 X가 응하지 않자, 브라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30일 X 접속을 차단하는 방침을 판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브라질이 미국 기업의 디지털 무역 활동을 방해하고 다른 불공정 무역행위를 지속해왔다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개시했다고도 언급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기 위한 관세 부과를 허용하는 규정이 무역법 301조의 내용이다. 트럼프는 공식 서한에서 50%의 관세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현 정권이 자행하는 중대한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브라질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도 추가 관세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50% 관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여러 국가 대상 관세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미국이 상품 무역에서 7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브라질을 향해 지속 불가능한 무역적자도 이번 고율 관세의 고려 요인이라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 제시한 50%의 관세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처우 문제만이 아닌, 브라질이 미국에 기록한 흑자 무역을 불공정 행위로 규정한 것도 포함한 복합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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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행보와 50% 관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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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 트럼프가 러시아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겠다 한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한 자리에서 앞으로 50일 이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러시아에 100%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할 것(If the Russia-Ukraine war does not end, we will impose a harsh 100% tariff on Russia)이라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들이 러시아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다며 만약 50일 안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가혹한 경제적 조치가 따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14일에 밝힌 관세 조치가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국가들까지 합류한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의 형식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하고 있는 국가들까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는 무역이라는 조치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본인 또한 이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이어 전쟁을 멈추는 데도 무역은 매우 훌륭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대해 대단한 마이너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침도 밝혔다. 그는 최상급의 무기를 생산해 나토 동맹국에 공급할 것이며, 그 무기는 다시 우크라이나에 전달될 예정이라 했다. 구체적으로는 패트리어트 방공 체계를 비롯한 대규모 공격 무기들이 포함되며, 일부 무기는 기존 나토 보유분을 교체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전쟁으로 붙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기다려온 순간이라 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는 단지 방어무기 뿐 아니라 미사일, 탄약 등 다양한 범주의 군사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나토가 전비를 부담하는 조건이라 설명했다. 즉,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회담 중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도 드러냈다. 그는 푸틴과 대화가 항상 친절했지만, 그 직후 키예프나 다른 도시들이 공격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매우 실망했다 하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인물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그리고 푸틴은 자신이 속였던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속이려 했다며 이제는 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 중 관세는 본격적으로 외교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가 현실화 될 경우, 에너지 시장은 물론 국제 정치 지형에도 큰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트럼프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친분이 있던 푸틴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기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푸틴은 순수한 선의 마음으로 국제 관계에 접근했다가 맹우라 여겼던 독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다. 따라서 푸틴 입장에서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자주 바뀌는 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는 단순한 친목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무역을 별로 하지 않는다. 각종 경제 제재를 해도 러시아는 잘 버텨왔다. 내수 시장 활성화와 집단 서방의 결정에 반발하는 국가들과 교역하며 이들과 함께 집단 서방에 저항해 왔다. 이미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 없고,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관세를 0%로 마쳤다. 그런데 무역 활동이 없는 러시아한테 100% 관세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관세 폭탄에 러시아 또한 미국과 맞서 카드 하나를 더 구상할 것이다. 그와 같은 카드는 첫 번째, 미국과 대화 창구를 아예 닫겠다는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여태까지 러시아는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며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단교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기에 쓸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그동안 미국에 제재하지 않았던 필수품목들을 제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우라늄 농축 능력의 약 44%를 차지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핵연료의 약 3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23년 미국의 전체 우라늄 수입 중 러시아산 비중은 12%, 농축 우라늄는 27%에 달했다. 작년에도 이는 비슷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우라늄 수출을 0%로 제한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자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이며, 전체 발전량 중 약 19%를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라늄이 단절되면 미국의 전력 생산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또한 가동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재앙이다. 세 번째, 미국이 원하는 희토류 공동 개발을 취소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희토류 공동 개발을 제안한 바 있다. 희토류는 첨단 기술, 국방,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략 자원이기 때문에 중요성이 매우 높은 광물이다. 특히, 전기차, 스마트폰, 풍력 터빈, 디스플레이, 레이저, 의료 기기 등 다양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미국 또한 희토류는 존재한다. 다만 채굴된 원석에서 희토류 원소를 분리·정제하는 일인데 미국은 이를 분리하고 정제할 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는 아예 이와 같은 분리, 정제하는 시설이 없었다. 2023년 MP머티리얼스가 국방부 지원을 받아 희토류 정제시설을 구축했는데 아직 처리 용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데다, 저렴한 전기와 노동력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니까 저렴한 희토류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정제 과정이 더럽고 복잡한데다 그렇다고 희토류가 금이나 은처럼 그렇게 비싼 금속도 아니니까 돈도 별로 되지가 않으니 미국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을 정제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던 이유였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여전히 수입 중인 국가들에 대한 2차 제재를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BRICS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의 노골적인 협박인 셈인데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BRICS 국가들은 러시아와 주로 교역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를 건드린다면 이 국가들은 미국에 각종 기본 원자재 제공에 대한 관세를 100% 이상 높이거나 제한하는 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은 미국의 희토류 산업을 쥐고 있기에 이를 대폭 활용성은 더더욱 높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국제 공조를 통한 압박 노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에너지 및 무역 제재를 활용하면서 다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이 나토를 통해 다시 무기를 제공한다면 러시아는 전술핵과 전략핵 두 가지를 전진 배치하여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하여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을 격상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아마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격과 정예병들이 투입되어 빠르게 전쟁을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감정과 공적인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같은 행위, 특히 그의 감정 조절 장애는 미국에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우려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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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러시아에 대한 관세 위협, 효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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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
- 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 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 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 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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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 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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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영웅, 김병화 선생의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북극성 콜호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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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파키스탄군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가 주관하는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당시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Amir Abdullah Khan Niachi) 중장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Jagjeet Sing Aurora)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Nirakantha Krishnan)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Hari Chand Dwan) 중장, 제4 군단장 사가트 싱(Sagat Sing)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Jacob Paz Raphael Jacob) 소장이 원을 그리며 자리했다. 이 양군 사령관들은 비록 적대하던 수장들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모두 영국 샌드허스트 출신의 동문들이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된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차가 엄청났다. 물론 경제 수준은 상호 간에 비슷했다. 당시 파키스탄과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72달러와 112달러였다. 오히려 파키스탄이 평균적으로 볼 때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넓은 영토와 파키스탄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인도가 파키스탄보다 전쟁에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당시 파키스탄의 인구가 6,000만 명이었는데, 인도는 5억 4,000만 명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체의 GDP 규모는 파키스탄 106억 달러, 인도가 673억 달러로 무려 6배 이상 앞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면전쟁의 불리한 조건들이 사실상 파키스탄에게만 적용되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군대를 양쪽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은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서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입지조건 때문에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있는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초장거리 보급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래서 보급선 중간에 적국인 인도가 있었고, 파키스탄은 육로를 연결하여 사실상 동파키스탄을 재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기본적인 국력이 인도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군사들이 적은 파키스탄이 군대를 양쪽으로 갈라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략적인 목표도 인도와 동파키스탄에게 유리했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의 목적이 완수된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은 인도의 공습을 막는 동시에 동파키스탄을 재점령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인도로부터 서파키스탄을 방어할 전력만 모으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동파키스탄은 독립해 버리니 작전이 실패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과 대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 전혀 협조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숫적으로도, 물자로도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기도 하면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에 있던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 중 회담 성립에 집중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참전하려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점령했던 것과 다르게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고 1971년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서는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색출하여 공개처형을 자행하면서 강력한 복수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지역의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이 많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 사람들 및 벵골인들과 특별히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인해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와 같은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Horst Faas, 1933~2012), 미셀 로랑(Michel Rolland)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 상 사진 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니 방글라데시 측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 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세까지 살았다. 동파키스탄 시기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 인들은 현재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 국가에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에 있어 서부 벵골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로힝야도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의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얀마-방글라데시에서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일부 받았었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퇴임했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1924~1988) 장군이 주도하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어 같은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확전되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근본주의 세력들을 후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이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파탄 난 파키스탄은 경제력이 거의 빈국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반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으로 인해 인도는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 있어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함선이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 이 함선은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고 26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더불어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 초계기로 시대에 비해 매우 낙후한 항공모함이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군 측은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이 항공모함을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전투기들이 대공포를 맞고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인도의 항공기가 뜨는 것조차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인도의 낙후된 무기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군은 당시 대공미사일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 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전투기는 전혀 없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인도의 방어망이 인도보다 더 낙후된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잡아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던 항공모함이었지만 인도군은 실전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과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또한, 파키스탄 또한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국가 안보 자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보유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이벌 인도의 핵 보유로 인해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영토까지 상실하자 파키스탄은 대칭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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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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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와 공화정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
- 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는 실질적으로 시민들 대표에 가까웠던 많은 귀족들이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고 여기에 성공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권을 능가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도 여기에 해당했고 아테네에서도 솔론과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로마 국왕의 존재감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지게 되었다.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 정권을 거쳐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 정권이 나타났고 결국 B.C 500년 정도 되었을 때 로마는 왕정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스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정이 형성되었다가 귀족들도 권력을 잃게 되었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 있지만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특유의 파트로누스(Patronus (후원자)의 어원), 클리엔테스(Clientes, 영어 : Client (고객)의 어원)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누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 파트로누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누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떠한 파트로누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누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누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도 지역적 특성이 반드시 정치 체제를 결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로 인해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이 비싼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이후,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 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제외된 로마군은 켈트족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에는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평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 볼 때 절대적이지 않았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 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을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들은 호민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원로원, 집정관, 군단 사령관의 지위에 올라 유력 가문이 되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새로 함께하는 자”라는 의미의 노빌리스(Nobili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Nobl)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귀족은 파트리키(Patrici), 평민은 블레브스(Blebs), 기사계급은 에퀴테스(Eqites)라 불린다. 로마는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에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로마의 지리적인 특성에도 기인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에 있었다. 여기에 테베레 강(Tiberis)까지 끼고 있어 이탈리아를 가로 지를 때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 근처를 거쳐 가야 했다.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해서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나 동맹 제의에 노출되었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거기에 구성원들 대다수가 특정 신앙, 부족, 민족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의 문화적 영향과 라틴 인들과의 접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주변국들에게 배타적이었다. 처음부터 가난한 농촌의 로마였던 시기의 레물루스 왕 시절부터 주변 마을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킴으로서 국가로써 성장했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해 온 경험으로 인해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해결했으니 지리적 요인과 정치 및 사회적인 문제까지 겹쳐 로마인들은 전투 민족으로써 성장했고, 이것은 각 소국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을 벌이는 것이 흔했던 당시 기준으로도 무언가 특이했던 것은 분명했다. 상무 정신과 대단히 보수적인 가부장 문화는 오랜 기간 로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특징을 보통 개방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로마 왕국 시절부터 실제로 로마인들의 대외 정책은 배타성과 개방성이 혼재된 것이었다. 우선 적이 되면 상대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복속 될 때까지 끈질기게 전쟁을 벌이면서 거의 사생결단의 방식으로 나왔다. 우선 로마 사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주적이었던 베이(Bey), 삼니움(Samnium), 볼스키(Bolski) 등을 비롯한 부족국가들과 해마다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교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약탈 및 전쟁을 벌였던 것이 로마인이었다. 물론 로마의 기록들은 상대 국가나 부족들이 로마를 자주 약탈하였으니 로마인들의 전쟁은 타당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로마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일방적인 대외정책을 펼쳤고, 상대 이익에 맞는 적절한 유화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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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와 공화정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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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 1995년 카타르 쿠데타는 1995년 6월 27일 카타르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써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가 타니 가문의 지지 하에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프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5년 쿠데타는 1992년부터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에게 주었던 일부 권한을 아버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사니가 다시 회복하려 했다. 이는 1995년 초부터 부자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1972년 2월 쿠데타를 통해 전 국왕이었던 하마드 빈 알리 알 타니가 이란으로 순방을 간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카타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은 근대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1977년 5월에는 차남이었던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공석이었던 왕세자 자리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칼리파 국왕이 1990년대 이후 차남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넘겨주던 권력 이양을 중지하고 전 석유 및 재무 장관이자 1992년에 하마드 빈 칼리파의 영향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던 압델 라지즈 빈 칼리파 알 타니(Abdelaziz bin Khalifa Al Thani)에게 권력을 다시 넘겨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의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위원회는 슈라 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하마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헌법에 따른 강제적인 왕위 이앙 절차를 마쳤다. 또한 하마드 왕세자는 쿠데타 직후 짧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오늘 일어난 일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단행되어야만 했던 일이고 나는 이를 해야만 했다(What happened today is not pleasant, but it had to happen and I had to do it.)”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해외 외교관들은 쿠데타가 형제 간 왕위계승권 문제 및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영향이라 분석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자신의 아들을 “멍청한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계속해서 카타르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국 카타르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아들 하마드 빈 칼리파는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려고 미국의 로펌회사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1996년 2월에는 전 경제부 장관이었던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의 주도 하에 전 국왕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복권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역으로 시도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미수에 그쳐 실패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같은 전통적인 아랍 지역의 카타르 동맹국들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강제로 퇴위당한 칼리파 빈 하마드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가 2004년 고국인 카타르로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제한 및 여러 가지 검열 정책을 폐지했으며, 여성 활동을 일부 허용했다. 1996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은 1996년 2월 14일 카타르에서 발생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에 대한 폐위 시도이자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나타난다. 카타르 정부는 이 쿠데타 미수를 “아부 알리 작전(Operation Abu Ali)”이라 부르고 있다. 2017~2018년에 발발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언론사인 알 자지라는 1996년 당시 카타르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바레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된다. 1995년 6월 27일,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는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이미르에 스스로 등극하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이 스위스 제네바로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무혈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 격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 위원회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는데 성공한다. 하마드 빈 칼리파의 통치 첫 해에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한 아버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걸프 협력 회의(GCC)가 새로 왕위에 등극한 하마드 빈 킬리파와 자주 충돌하는 것을 이용하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연달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퇴위한 전 아미르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알 타니 가문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역으로 자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 카타르는 1996년의 쿠데타 미수 사태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등 해외 각국의 지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으며 19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일부 익명을 요구한 서방 외교관은 쿠데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2018년에는 2017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알 자지라가 다큐멘터리 보도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며 정식으로 보도했다. 이와 같은 알 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 음모의 핵심이 무장 괴한들이 카타르 왕궁에 진입하여 하마드 빈 칼리파를 납치해 알라이얀 도로에 있는 자택에 연금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납치 작전은 2월 16일 오전 5시로 예정되었으나 발각될 가능성 때문에 급하게 작전 시기를 2월 14일로 앞당겼다. 카타르 정보부에 따르면 이러한 작전 변경은 당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Muhammad bin Zayed Al Nahyan)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정보부는 카타르의 군사 시설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실행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타르 정부는 2월 20일 쿠데타 관련 주동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알 자지라에서는 전 프랑스 육군 사령관인 폴 바릴(Paul Baril)이 아랍에미리트에서 카타르 쿠데타 작전 시행을 요청받아 무기를 받고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외무부 장관인 안와르 가르가시(Anwar Gargash)는 알 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폴 바릴은 아부다비를 방문했던 전 국왕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의 보안요원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내용은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 아랍에미리트라는 선동적인 내용이라 비난했다. 쿠데타의 주동자로 아미르의 사촌이자 전 경제부 장관인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가 지목되었다. 수 년 동안의 망명 생활 끝에 하마드 빈 자심은 1999년 7월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2월, 하마드 빈 자심을 포함한 32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은 내란 음모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에 연루된 85명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석한 피고인들은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나아가 1997년 자국에서 열린 아라비아 경제 회의에서 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이스라엘과 수교국인 이집트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비난했다. 1998년에는 왕이 절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게 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외국으로 유학을 나간 여성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회의도 가지고, 여성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여성 정치가 활동 및 언론 활동까지 전면 허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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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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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의 독립과 헌법 제정의 과정에서 민주화 시기까지
- 바레인은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해 온 알 칼리파 가문이 국가의 기초를 만든 후 1971년 영국군의 수에즈 동쪽 지역의 철군과 더불어 족장이었던 이사 이븐 술만 알 칼리파(Isa Ibn Sulman Al Khalifa)의 주도로 독립하면서 왕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바레인 군주에 대한 칭호는 1783~1971년에는 바레인 하킴(Hakim of Bahrain), 독립 이후에는 에미르(Emir)였으며, 2002년 2월 수정 헌법에 따라 국왕(King of Bahrain)으로 바뀌었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바레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원이 장관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레인 헌법에서 30명의 의원은 성인 남자로 제한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은 당연직 의원이 된다. 이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12일 국민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5년에 1973년에 만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1975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으로 통치하였다. 현재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원제 국회를 포함하는 1973년 헌법으로 복귀를 요구한다. 1973년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바레인 최초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30명의 국민의회(The National Assembly of Bahrain) 의원들이 20개의 선거 구역에서 비밀투표, 과반수 적용 안 되는 단순 다수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참정권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이 국민의회의 당연직 구성원들이 됨으로 인해 전체 의원의 수는 44명이 되었다. 24,883명의 등록된 유권자 가운데 19,509명이 투표함으로 인해, 투표율은 78.4%였다. 당시 정당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2개의 강력한 정치 블록인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이 출현하였다. 인민 블록(People's Bloc)을 보자면 도시 지역에서 8명이 선출되었다. 인민 블록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포괄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1965년에 제정된 보안 조치 폐지를 주장하면서, 좌파적이고 아라비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바레인 인민해방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Bahrain, PFLB, 1974~2001)과 바쓰 운동으로 알려진 바레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Bahrain, NLFB)과 제휴하였다. 인민 블록은 알리 카심 라베아(Ali Qasim Rabea), 압둘 하디 칼라프(Abdulhadi Khalaf) 등을 포함하였다. 압둘 라흐만 알 누아이미를 비롯한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 간부들이 점령지인 아라비아 걸프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 1968-1974) 창설에 참가하였고, 1974년 PFLOAG 바레인 부문을 바레인 인민해방전선(PFLB)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다른 하나는 6명의 시아파로 구성된 ‘종교 블록’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시골 선거구 출신으로 교사들과 종교법정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교 블록’은 셰이크 이사 카심(Sheikh Isa Qassim), 셰이크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Abdul Amir al-Jamri),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Sheikh Abdulla Al-Madani), 셰이크 압바스 알 라이스(Sheikh Abbas Al-Rayes), 술래이만 알 무바라크(Suleiman Al-Mubarak), 하산 알 무타우아즈(Hassan Al-Motawwaj)로 구성되었다. 당시 가장 탁월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셰이크 만수르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Mansour Abdul Amir al-Jamri, 1938~2006)가 바레인의 종교 블록을 이끌면서, 817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이 블록은 노동 조합을 지지하고, 음주를 금지하였으며 학교 내에서 남녀 분리, 남성 의사들의 여성 진료 금지 등 전통적인 관습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셰이크 이사 카심이 이 선거에서 1,079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15개 선거구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사 카심은 현재 알 와파크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또 1967년까지 좌파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가 이 ‘종교 블록’에 들어와 771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이념적인 경계가 완고하게 확고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소속으로 알려졌다. 무소속 의원은 정부와 두 블록들,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 사이에서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당시 바레인 노동 운동 지도자들은 수많은 파업을 조직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4년 알 칼리파 정부는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을 제안하였다. 당시 국민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4년 아미르 령(The Amiri decree No. 4 / 1974)으로 1975년 8월 26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으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민 의회를 다시 소집하거나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고, 국가 보안법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이 법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바레인에서 시행되었으며, 정부에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최대 3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국가보안 법정(State Security Courts)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임의적인 체포나 고문을 허용하였다. 인권단체들(Human Rights Watch and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25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위반을 용이하게 하였다. 2001년 하마드 국왕은 이 법을 폐기하고, 헌법을 회복시켰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dam bin Isa al Khalifah) 국왕은 1950년 1월 바레인 남부 지역의 리파(Riffa)에서 선왕인 이사 이븐 살만 알 칼리파(Isa ibn Salman Al Khalifa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99년 3월 38년 동안 통치하였던 이븐 알 칼리파 왕이 타계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왕비 샤이카 사비카 빈트 이브라힘 알 칼리파(Shaikha Sabika bint Ibrahim Al Khalifa)와의 사이에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Al Khalifa) 등 6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파이잘 이븐 하마드 알 칼리파(Faisal ibn Hamad Al Khalifah) 왕자가 2006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의 현 왕실로 1766년 창설되었고 1783년부터 바레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신도가 대부분인 자국민들과 다르게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이러한 종파로 인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바니 우툽(Bani Utub) 연맹의 일원으로, 네지드 사막에 거주하다 17세기 사바흐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이주하게 된다. 다만 얼마 후,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카타르의 북부 주바이라로 이주했다가, 18세기 친척인 사바 왕조의 도움으로 잔드 왕조 치하에 있던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 후로 알 칼리파 가문은 현재까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다. 19세기 오만 제국 및 사우드 왕조가 바레인을 장악하여 축출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과 보호 협정을 맺으며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독립 후,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친선을 맺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의 부친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영국의 보호국을 탈피하여 독립국이 된 1971년에 기존의 호칭인 하킴을 버리고 아미르로 호칭을 변경했다. 하마드 국왕은 2002년 왕이라는 뜻의 말리크로 호칭을 높였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 Khalifa)는 1950년 1월 28일에 출생했으며 현재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그는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1년에 독립한 바레인의 첫 아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아미르 제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아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하마드 국왕은 2020년 말 오랫동안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삼촌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 군주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는 전제 군주이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 및 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같은 시위는 1999년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 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아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고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면서 바레인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과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때 바레인 군경들은 실탄을 발포하여 수도 마나마에 있던 진주 광장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 광장은 폐허로 변하면서 민주화 항쟁은 실패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 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가장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 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민주 항쟁의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광장과 중앙의 진주 탑을 철폐하고, 그 곳에서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시위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 진주 광장은 완전히 말살되어 2017년 알 파루크 교차로로 개조되었고 지금은 광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국왕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000만원)로 대폭 올렸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의 왕실 가문들은 친미 독재에 적응된 인물들이 많았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독재자를 방조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라비아 국가들의 수장들이 그러하듯이 하마드는 억압적인 독재를 자행하면서도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 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 식 반 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리비아를 참조하여 파악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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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의 독립과 헌법 제정의 과정에서 민주화 시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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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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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내 변화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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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의 TV 토론,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
- 대선에서 TV 토론이 도입된 것은 후보자들의 철학·정책·가치관·사고력 등을 유권자들이 TV 생방송을 통해 직접 비교·평가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투표로 연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TV 토론 없이 유권자들은 어떤 후보가 과연 대통령의 자격에 적합한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TV 토론을 통해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에게 각자의 정치적 소신과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유권자들의 표심을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그 때문에 대선에서 각각의 후보자들은 TV 토론에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다소 초반에 밀리더라도, TV 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지지율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 TV 토론은 경제 분야, 사회 분야, 정치 분야로 나누어서 모두 3차에 걸쳐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토론 수준은 TV 토론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매우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TV 토론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번 TV 토론은 유권자들의 표심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 공격으로 선두 주자의 지지율을 뒤에 각각의 주자로 서로 갖고 오려는 의도에 묻혀 버렸다. 이러다 보니 각각의 후보들이 판세를 엎을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유권자들의 관심도에 비해 그저 그런 정도에서 TV 토론이 끝나고 말았다. 한 후보는 상대방이 서로 합세해서 공세를 펼치니까 다소 방어적이거나 조심하면서 자세를 낮추는 태도를 보였다. 또 다른 후보는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최소한의 펙트 체크도 하지 않은 채 토론에 참여해서 주어진 원고를 단순히 읽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 다른 후보는 상대방의 말이나 의도를 간판하지 못하고, 중간에 상대방의 말을 자르는 식으로 자신이 옳다는 점만을 부각하면서 비호감도만을 상승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후보는 선명성에 몰입한 나머지 상대방을 추궁하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번 대선에 참여하는 데 만족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번 TV 토론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말꼬리 잡기가 난무했으며, 심지어 전 국민이 TV 토론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데도 단연코 해서는 안 될 발언까지도 거리낌 없이 튀어나왔다.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지지율이 낮은 후보자가 지지율이 앞선 후보자를 공격하는 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달리 보면 이것은 토론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자의 권한이 너무 없다 보니 종종 후보자들이 토론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사회자가 너무 토론 진행에 개입하다 보면 편파성 시비가 나올 수 있으니 그럴 바에는 아예 토론 과정에 개입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자의 존재감이 없어지고 사회자는 후보자들의 과도한 발언이나 논점 이탈에 대한 제지 등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자를 전문가로 해서 유권자들을 대신해서 송곳 질문이나 핵심적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하거나, 혹은 사회자와 더불어 전문가가 추가적 질문을 통해 정확하고 문명한 질문을 하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TV 토론 방송도 횟수를 늘리고, 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토론에 익숙하거나 토론하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토론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다 보니, 결국 토론 능력이 언제나 아쉽고, 막상 토론하려다 보니 주어진 시간에 맞추려다 보면 정작 자신이 해야 할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으로 일관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거나 자신의 관념에 얽매여 과거 그대로의 것을 답습하기 마련이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토론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 아니라고 해서 토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토론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토론 방식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다. 이번 대선 토론은 4자 토론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4자 토론 방식보다 양자 토론 방식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은 각각 후보자들의 정책과 비전 등을 비교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4자 토론 방식은 한 후보자들에게 주어진 시간도 양자 토론 방식보다 적어서 후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제시하기 어렵다, 서로 정치적 공방을 벌이더라도 토론에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공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토론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론이 형식적으로 그저 후보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그저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으려는 후보자들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국가지도자로서는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선택보다는 자신의 권력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과거 발언을 지나치게 들추어내고,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기만 하는 사람은 토론의 장을 통해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보다 열세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번 대선 토론에서 주도권 토론이나 답변 시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어떤 질문에 대해 다소 엉뚱한 답변을 의도적으로 하거나, 회피하는 듯한 모습도 드러났다. 이것은 답변을 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현재의 네거티브적 공방에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토론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것은 토론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자연스럽게 각각의 후보자들이 스스로 가이드 라인을 정하면서 유권자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한 표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 토론처럼 진행되는 경우 자유로운 토론 방식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사실 이번 대선 토론에서 각각의 후보자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서로 다른 관점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해결 방안에서는 과거와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토론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방안을 놓고 토론이 전개되었더라면, 그리고 이것으로 정치적 공방을 벌였더라면, 그래도 토론에서 서로 동의하는 점도 있었을 것이고 혐오와 증오만을 불러오는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 난무하다 보니, 각각 후보자들의 주장들은 어차피 상대방의 공약에 대한 검증보다는 상대방 후보자의 인신에 대한 검증을 하려는 의도에 매몰되어 버렸다. 후보자의 인신을 검증하는 것이 이번 대선 토론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에 ‘올인’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토론 수준이 낮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번 대선 토론은 토론 방식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대선 토론의 목적이 유권자들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토론 방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토론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정당한 선택을 위한 토론이라면, 관계기관들은 좀 더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토론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구체적인 토론 방식과 토론 횟수 등은 이번 대선 이후에 전문가들과 논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선거도 아닌 국가의 중대사인 대선에서 토론 방식이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개선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 토론을 통해 토론 방식의 개선은 후보자들의 소신과 정책 방향, 철학과 가치관, 정책수행 능력 등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대선 토론이 후보자들의 관점보다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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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의 TV 토론,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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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를 보자면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문제로 상호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련 사이의 관계도 의외로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냉전 시대 이후에는 루마니아가 친서방 진영에 가입하게 되면서 사이가 더욱 악화된 상황에 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존재했던 19세기부터 존재한다. 두 나라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과정에서 흑해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18~19세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데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더불어 1806년에 시작된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몰다비아 동부 베사라비아 지방을 점령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하에서 베사라비아 지방은 현지 루마니아계 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과 불가리아인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 루마니아계 국가인 몰도바의 전신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루마니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1878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국경선을 변경하여 두 나라의 영토를 두고 영유권을 확정지으면서 몰다비아 동부 지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출범하면서 오늘날의 베사라비아에는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립해 나갔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베사라비아와 부자크 지역 영토 상당 부분을 합병하였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1940년 해당 지역을 소련에게 다시 반환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은 이후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독일과 소련의 대조국 전쟁에 참전했다. 다시 루마니아가 몰도바 지역을 점령하는가 싶더니 소련군이 반격을 하게 되면서 루마니아 왕국이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산하에 있던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한 대신 부자크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군이 진주한 루마니아에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냉전 시기 당시에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에는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양측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은 냉전 당시에 서방권과 소련 사이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을 견제했다. 198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여러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채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체제의 안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전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해졌다. 과거 체코와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소련군이 직접 진압했던 시대와 다르게 80년대 당시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군이 대부분 묶여 있어 군의 지출을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상황이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연설 도중 우발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뒤에 총살되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도 1991년에 해체되고 러시아가 생겨났다. 현재에도 루마니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 있다. 2007년에 루마니아는 EU와 나토에도 가입하면서 러시아의 배후를 위협했다. 2010년대 후반에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루마니아도 러시아 외교관 추방 정책에도 참여하는 등 대러 제재에도 적극 참여했다. 게다가 과거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루마니아의 영토였던 몰다비아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반러 정서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갈등이 심한 입장이다. 2021년 4월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하고 러시아도 이에 맞대응해 상대 유럽 국가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루마니아도 여기에 합세해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이날 부쿠레슈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알렉세이 그리샤예프의 활동과 행동이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 규정을 위반했다며 추방 명령을 발표했다. 루마니아 외교부는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발레리 쿠즈민 루마니아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타스 통신과 당시 인터뷰에서 루마니아의 결정은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결정이라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탈리아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가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 함장이 러시아 외교관 중 한 명에게 기밀 정보를 전달하다 적발된 이후 이탈리아가 러시아 외교관 2명을 추방한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이탈리아 해군 함장 월터 비오트는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나토의 안보 및 전략적 운영을 저해할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이탈리아 무관에 대해 24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확인했다. 이에 앞서 2021년 3월 23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2014년 프라하 인근 대규모 탄약고 폭발 사건에 러시아 스파이가 연루된 혐의로 수십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 체코와의 연대를 위해 4명의 러시아 외교관에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어 11월에는 벨라루스와 EU 회원국인 폴란드 국경에서 중동 난민을 폴란드로 밀어내는 문제로 인해 양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에 무력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루마니아의 국방부는 미국,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4개국 군함 7척이 전날 흑해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 훈련을 벌였다. 당시 훈련에는 미국 해군 6함대 기함 마운트 휘트니와 구축함 포터, 터키 호위함 야부즈, 루마니아 호위함 마라세스티, 우크라이나 상륙함 유리 올레피렌코와 경비함 슬라뱐스크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흑해 북서부의 미군 함정 훈련 해역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발진한 미 해군 대잠 초계기 P-8A 포세이돈 3대가 초계 비행을 벌였고 키프로스에서 발진한 미 공군 고공정찰기 U-2S(드래건 레이디)도 흑해 북서부 상공과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비행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의 목적이 흑해 해역 위기 상황에서 나토군의 대응능력을 향상하고 나토 회원국 해군 간 공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했다. 물론 이에 대해 러시아 국방부 측은 러시아 공군과 흑해함대 전력이 나토군 훈련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감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공격적인 흑해 해역 군사활동과 흑해 연안 국가들의 훈련 참여는 지역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난했다. 흑해 해상에서 나토 회원국과 나토 가입을 추진 중인 친서방 우크라이나가 연합 훈련을 벌이는 사건은 이전에도 자주 있었으나 당시 2021년 11월 훈련은 벨라루스-폴란드 국경 난민 사태로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서방 진영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루어져 주목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 주변 군사 활동을 두고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 나토 간 무역 대치는 북유럽에서도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전투기들이 바렌츠해, 노르웨이해, 북해 등의 공해 상공에서 정례 비행을 하던 러시아 Tu-160 장거리 전략폭격기들에 초근접 비행을 펼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에 의하면 영국 공군 소속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들이 러시아 전략폭격기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해 위험한 비행을 펼쳤다고 지적했다. 당시 Tu-160 폭격기는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 미그(MiG)-31 요격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적대국인 상황에 있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루마니아 내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부쿠레슈티에서는 2019년 10월 18일에 러시아 문화 행사가 개최되면서 문화적으로 두 나라는 정치, 외교적인 부분과 관련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러시아는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으며 18세기 러시아의 일부 고의식파들이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에 루마니아 각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을 리포베니(Lipoveni)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현재에도 리포베니 후손 2만여 명 정도가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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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루마니아의 관계 : 적대적 공생관계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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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루마니아 경제의 현실, 루마니아의 최대 화두 자원경제 유지
- 루마니아는 현재 EU의 일원이자 나토의 회원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활동도 EU와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17년 2월에는 루마니아 에너지관리청인 ANRE에서 에너지 기업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가 2018년 중반부터 흑해에서 천연가스 생산을 시작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루마니아의 흑해 대륙붕 2곳인 미디아, 펠리칸 대륙붕에서 연간 최대 40억㎥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루마니아 당국은 2017년에 미디아-펠리칸 대륙붕에서 첫 해 생산량을 10억㎥로 끌어올렸다. 루마니아는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 생산으로 연간 5억∼6억㎥ 규모에 이르는 수입량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양을 수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미디아·펠리칸 대륙붕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블랙시오 일 앤드개스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 칼라일 인터내셔널의 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본래 동유럽의 최대 산유국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가 석유를 수입으로 바꾸었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루마니아에 있기 때문에 한 때는 석유를 자급하였지만 최근에는 수요가 늘어나 해당 유전에서 추출하는 원유의 양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 외 천연가스 총 생산량의 5%가 루마니아에서 나오고 있다. 기타 산업으로 루마니아는 농업이 발달했다. 전통적으로 밀, 옥수수, 포도, 해바라기씨 등이 세계 생산량 상위 10%에 들어갈 정도로 풍부하다. 더불어 맥주가 물보다 저렴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맥주보다도 포도주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기후가 포도 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포도 생산량이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다. EU의 가입 이후, 경제가 제조업을 위주로 크게 증진되었다. 경제 성장률이 동유럽에서 높은 편으로 동유럽 국가가 그렇듯이 EU의 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더불어 높은 인적 자본에 힘입어 경제 성장이 일구어지고 있는 편이다. IT 분야는 대표 회사들은 적게 나타나지만 다국적 기업들의 진출이 많은 편이다. HP나 마이크로소프트등이 진출해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유럽 데이터 센터가 루마니아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인터넷 속도 순위를 보면 루마니아는 상당히 높은 순위에 랭크되고 있다. 유럽에서 빵을 생산하는 능력이 최상급이라 이름 붙을 정도로 농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평원이 흑토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대표 제품이라 할만한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유럽 시장에서 저가 차량으로 크게 알려진 자동차 제조 기업인 다치아(Dacia)가 있다. 국내에서 알려진 것들은 안티에이징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제로비탈 화장품이 있고, 안티 바이러스 업체인 비트디펜더가 있다. 두 회사 모두 각각 한국에도 지사를 가지고 있다. 비트디펜더의 인지도는 다른 국외 제품 면에서는 떨어지고 있지만, 국내에서 기술 OEM으로 10개 가까운 업체들이 사용 중이어서 실질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외산 보안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측 엔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안티 바이러스 제품은 알약과 하우리, 바이러스 체이서라 볼 수 있으며 자동화 솔루션인 RPA 솔루션 중 현재 독보적인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UI Path 역시 루마니아에서 만들었다. 또한 워드 프레스 테마 제작사 중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Hestia, Zelif lite (프로버전은 Zelle PRO), NEVE 등의 테마를 제작한 유명 테마 제작사인 Themeisle도 루마니아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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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루마니아 경제의 현실, 루마니아의 최대 화두 자원경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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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에 진출한 이슬람과 아랍인의 융합
- 7세기경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여러 많은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실히 믿을 만한 그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구전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의 상인들이 있었다. 오만은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무역을 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슬람 제국에서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하던 오만 계통의 아랍인들 중 술레이만(Suleiman)과 사이드(Said)는 7세기 말, 이슬람 칼리프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럽의 고대 과학 기술을 흡수하는 한편 인도의 우수한 수학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리학 등이 발전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us)의 저서인 <천문학 집대성(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과 <지리학(Geography)>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천문대를 설치해 천문학 연구도 급속히 발달했으며 이어 카이로에도 천문대가 건설되어 나일 강의 수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 지리학의 선구자가 된 아부 자이드 알 발키(Abu Zayd al-Balkhi)는 바그다드에서 지도 제작을 위한 발키연구소(Balkhī school)를 설립해 지리서를 비롯해 지역지도와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발키 연구소의 구성원은 대부분 페르시아계로, 알 발키를 비롯해 알 이스타크리(al-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 알 무카다시(al-Muqaddasi) 4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 중 알 이스타크리가 발키 학파의 주된 사상을 펼치는 책임자였다. 발키연구소의 구성원들은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도는 대부분 저서에 첨부되는 형태로 작성되어 계승되었다. 당시 아라비아의 지도는 세계 전도와 지역지도가 함께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동아프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이 동아프리카에서 성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슐레이만과 사이드의 칼리프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흑인들의 땅으로 알려진 잔지바르(Jenjibar)로 피신했다. 잔지(Jenji)는 페르시아어로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르(bar)는 “해안”을 의미하고 있다. 잔지바르로 피신한 이들은 동아프리카 내륙인 탄자니아에도 전도하기 위해 이맘들을 파견했다. 피신한 각각 다른 두 무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프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멘(Yemen)을 떠난 자이드(Zaid)의 사람들과 엘 하사(El Hasa)의 일곱 형제들로 나타난다. 일곱 형제들은 아마도 당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국가들의 수도였던 엘 하사와 이곳을 떠난 전사 집단의 일곱 지도자였던 것과 같다. 그들은 동아프리카 해안가들을 돌며 몸바사(Mombasa)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분쟁에서 피신해 온 하산 빈 알리(Hasan bin Ali)는 6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7척의 배로 동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에 오르게 된다. 하산 빈 알리는 아마도 시라즈(Shiraz) 술탄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척의 배는 각각의 다른 정착지를 찾아 몸바사, 펨바(Pemba), 코모로 군도의 조하나(Johanna) 등지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편 하산 빈 알리는 킬와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이 당시 이미 해안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하산은 아라비아 해양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킬와의 아프리카 흑인 영주와 담판을 지어 많은 양의 옷감을 주고 킬와 섬을 매입하게 된다. 하산이 정착한 킬와 섬은 대륙과의 사이에 있는 깊은 해협이 존재하고 있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하산과 일행은 타 국가와 민족들의 침입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산 빈 알리가 킬와에 정착한 것은 12세기 말경으로, 이 때 이미 해안에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수효는 분명히 적었을 것이고, 현재 동아프리카 해안가에 진출한 초창기 무슬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고고학과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라무(Lamu) 근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인상적인 석조 주택과, 사하라 남부에서 발견되는 큰 산호 덩어리로 조성된 호안(護岸) 시설을 지닌 만다(Manda)에 비교적 부유한 무슬림들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제련이 만다 인근에서 계속되었으며, 이슬람식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곳은 페르시아 만의 압바스 상선들과 무역이 분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동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역의 형태가 물물 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개 해안가의 많은 발굴 작업들이 킬와(Kilwa)에서 행해졌는데, 당시 이슬람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상사성을 이해할 수 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의 무역을 선도했고, 툼바타(Tumbata), 펨바, 잔지바르, 붐바(Vumba)와 라무 군도, 모가디슈를 연결하는 무역망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해안가와 섬의 도시들은 거의 12, 13세기에 형성되었다. 15세기경, 이 해안 도시들은 잘 설계되어 석조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가옥들이 있는 거리가 조성되고, 도시의 외곽 지대는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어지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는 작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슬람교 모스크와 산호, 석회와 돌로 지어진 족장들의 집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 정착촌과 도시 형성은 섬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정착민들 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해상 무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라무에서는 섬 주민들이, 몸바사에서 택시로 왕래하는 것과 같이, 해안 지대와 섬에 생긴 자연 지형 사이의 다우 범선으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섬들은 또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요새화되어 있었고, 도시들은 그들의 방어 하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곳들의 유적지로부터 그 주민들이 대부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자신들의 영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킬와는 석조를 쪼아 가옥을 짓는 방법과 나무를 조각하는 법, 그리고 무명실을 짜는 방법에 대한 지식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말, 킬와는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모가디슈와 함께 거래해 온 소팔라(Sofala)와의 황금 무역에서 큰 이익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략 이 시기에 킬와는 이러한 황금 무역에 대해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사원의 확장뿐만 아니라, 궁전과 후수니 쿠브와(Husuni Kubwa)라고 하는 무역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후수니 쿠브와 궁전은 2에이커에 달하여, 가로수 길과 테라스, 안 마당뿐만 아니라, 장식용 수영장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 사이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으며, 서로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킬와는 하산 빈 알리가 아프리카 인들로부터 사들였을 때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 인들이 아랍인과 혼혈한 상태에서 후일 다시 돌아와 다시 탈환할 것을 염려한 하산은 킬와와 본토 사이에 큰 운하를 팠는데, 이것이 킬와를 만조 때뿐만 아니라 항상 섬으로 만들었다. 하산은 또 다시 방어 공사를 보강하여 킬와를 소팔라에서 펨바까지의 해안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곳이 동아프리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산의 아들 알리의 통치 시대에 알리가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몸바사의 통치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선이 1498년 4월 7일에 몸바사에 도착했을 때 킬와는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이 킬와를 소팔라와의 황금 무역으로부터 차단했을 때인 1505년에 그러한 식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무렵에 이르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지역의 사치성 상품들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와 멀리 인도, 동남아시아의 후추와 향료 등이 요구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당시 극동,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주요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면직물, 식물로서 그 의학적인 특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중국산 대황(大黃), 보석류, 후추, 열대 상록수로, 향신료와 약용으로 사용된 육두구(肉荳) 씨, 육두구 씨로 만든 향미료, 생강, 그리고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려 향료로 사용하고 있는 정향(丁香) 등이 해로를 통하거나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해 아라비아로 운반되었고, 혹은 해상 운송 권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홍해로 이동되어져 아라비아로 운송되었다. 아라비아 지역은 동서 교역에 있어서 주요한 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해마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많은 배들을 내려 보내어 구매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안장용 표범 가죽, 철, 그리고 기장을 포함하여 상아, 노예, 향료, 별갑, 동물 가죽 등의 장사를 지속적으로 벌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상아와 노예들의 주요 원산지였던 반면에 당시 유일하게 동아프리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향신료는 유향(乳香)과 계피, 사탕수수 정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 군도(Malacca Islands)에서 나는 정향과 인도 산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극동 지역인 중국의 항구들로부터 얻어졌으며,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상인들은 이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점과 제품 공장을 얻기 위해 현지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지불해 임대하는 조건으로 취득했다. 동아프리카 무역에서 향수의 원료인 용연향(龍涎香)과 금은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의 중심지는 짐바브웨(Zimbabwe)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소팔라(Sofala)로 기록되었다. 상당한 양의 해양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던 인도인들도 이러한 향료와 황금 무역에 참여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인도와 동아프리카 간의 무역 관계는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무역만큼 중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인들은 아마도 금융과 소매 무역을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이유로 그들이 아라비아 인과는 달리 오랫동안 확실한 능력을 보여 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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