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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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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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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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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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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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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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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수니파와 시아파하고 결이 다른 이바드파와 오만 왕가
    이바드파(الاباضية)는 오만과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지배적인 이슬람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알제리나 튀니지, 리비아, 동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일부나마 존재하고 있다. 수니파,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예언자인 마호메트의 사망 이후에 갈라져 나온 분파지만 본질은 하와리즈와 가까운 카지리트 파의 소속된 상류 분파로 알려져 있다. 카리지트 이바드파의 최초 지도자 아브드 알라프 븐 이바드('Abd Allāh b. Ibād)의 이름에서 차용된 하와리즈 파에서도 가장 온건한 일파로 알려졌으며 그들은 하와리즈 파의 이맘인 이븐 알 즈바일(Iben Al-Zbail)의 지배를 받아 이라크 남부인 비슬라(Bhisla, 오늘날의 바스라)에 정착했으며, 692년 우마이야 왕조와 페르시아 사이의 제2차 내란이 끝난 후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를 감수해야 했다. 또한 타키야(Takiya)라는 신체의 위해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숨기는 교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무슬림인 것을 감추는 자들도 많았다. 꾸란에 하드(Hardh)라고 하여 정해진 죄를 범한 자는 비록 무슬림이 아니지만, 무와히드(Muwahid)로 보아서, 동일한 이슬람교도로서의 공통성을 중시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이슬람 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죄 등 각종 사회적 문제를 재기하고, 후에 카다르(Qadar) 파가 이를 계승하게 되면서 이바드 파의 교리는 하와리즈 파와 생각은 같이 하지만 외형적으로 다른 형태를 보이기 된다. 오만에 이바드 파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는 8세기 초 북아프리카에 전해져 이바드 파가 주축이 된 루스탐(Rustam) 왕조를 건국했다. 한편 다른 카지리트 파는 현재 거의 소멸하였지만, 이바드 파만은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 남부 알제리, 오만 및 이집트에서 17세기부터 전해지고 있고 공식적인 이바드 파의 사원에 소수의 신자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카리지트 파가 세운 오만 이맘 왕국은 751년부터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고 시칸데르의 혈통들은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이후 시칸데르는 오만 남부에 거주하는 아즈드 족과 예멘 왕 알 자이르 간의 전쟁에서 메카 신정의 재무관(財務官) 입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원래의 메카 군 지휘관이었던 알리 카부르가 알 자이르의 용병술과 지엽적인 게릴라 전술에 대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고전하자 당시 알리 카부르의 부관이자 카지리트의 이맘인 시칸데르가 메카로 들어와 아라비아 전체의 이맘으로 선출된 후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시칸데르의 아들, 사이드 빈 키쿠트(Said Bin Qykhut)는 시칸데르 이맘의 명령에 의하여 지금의 소말리아 지방으로 건너가 그 왕인 베루아(Verua)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소말리아 구스 군을 이끌고 알 자이르의 배후 기지를 축출했다. 이렇게 키쿠트는 알 자이르를 패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키쿠트는 군사적인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764년에는 카말리(Qamali)에서 에티오피아의 왕 티글리드(Thiglyd)의 침략군을 격퇴하였고 이어 예멘 정복 전쟁 때는 아즈드 족 집단에게 밀리고 있던 제다 부족의 남부 전선을 이끄는 대장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아즈드 족을 포위 공격했다. 그로 인하여 예멘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도중 키쿠트는 아라비아 지휘관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알 막심 빈 투르카(Al-Macsim Bin Turka)를 수여받게 된다. 알 막심 빈 투르카(Al-Macsim Bin Turka)는 오늘 날 훈장의 개념으로 최고의 이슬람 전사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표식으로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조각된 단검을 말한다. 이를 연구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학계에서는 이 단검을 칸자르의 시초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보는 견해와 오만, 아랍에미리트의 연구자들은 시칸데르가 군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칸자르가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키쿠트는 772년에 오만의 이맘으로 선출되었고 야즈드 족의 이맘이자 예멘의 술탄인 알 자이르가 메카의 신정 통치에 반발하여 일으킨 전쟁에서 메카 지역과 전체 아라비아의 이맘으로 선출되어 아랍 연합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키쿠트가 알 자이르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압바스의 칼리프는 이러한 오만과 메카의 독자적인 이맘 직위 선출에 반발하여 이를 무효로 돌리고자 하였다. 이는 자신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알 자이르 정벌군의 지휘권을 원한 메카의 유력 가문인 쿠라이시 무아위야 4세의 책동 때문이었다. 무아위야 4세의 사주를 받은 팔레스타인 군사령관 라이푸트(Al-Raiput)는 메카로 들어가 키쿠트를 임명한 이맘들을 카바 사원에서 추방하여 표결에 필요한 이맘 위원들 숫자가 채워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군을 지휘하는 이맘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관례이자 권리였는데 이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로 인하여 카바 사원에서는 대대적인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 메카의 시내 전체가 폭동으로 시 전체 체제가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선 키쿠트의 일부 식솔들이 메카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를 탈출하여 아프리카 동남부 잔지바르로 피신하였고 키쿠트도 잔지바르로 가서 자신과 부친인 시칸데르와 함께 전쟁을 벌였던 병사들을 모았다. 키쿠트와 그의 병사들은 메카에서 자신의 이맘 직위 박탈을 알리려고 온 전령들을 모두 죽였고 총 6개 군단을 모은 키쿠트는 메카로 진군하였다. 무아위야 4세는 키쿠트의 기습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군사들을 모으지 못하고 에티오피아의 흑인 노예들을 모아 키쿠트의 오만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이미 압바스 뿐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키쿠트의 정예병들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아위야 4세는 키쿠트에게 완패하고 메카를 탈출하여 북아프리카로 피신하였다. 메카에서 권력을 쟁취한 키쿠트는 무아위야 4세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 만수르 등을 메카와 수니파의 공적(公賊)으로 규정하고 무아위야와 압바스의 추종자들을 처형하였다. 키쿠트는 메카 이맘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여 권력 기반을 다진 후 다시 군단 병들을 이끌고 원래의 목표였던 알 자이르를 정벌하러 떠나면서 아라비아 전체의 사정은 모두 진정되었다. 우선 키쿠트는 부친인 시칸데르와 마찬가지로 같은 무슬림인 예멘의 종족들과 군사들을 회유했다. 키쿠트는 예멘의 타무드(Thamud), 타림(Tarim), 세이윤(Seiyun), 알 카튼(Al-Qatn), 무칼라(Mukala) 등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회유에 성공한 종족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종족들 모두 참살했다. 그리고 예멘의 해안 지역 중 활발한 무역과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는 도시들을 대부분 장악하여 막대한 양의 무역 물들을 약탈해 오만으로 이동시켰다. 키쿠트의 오만은 고대에 이집트와 로마까지 연결된 향료의 유일한 생산지로 알려진 아덴을 공격했고 아즈드 족의 수도인 사나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그는 메카에도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아랍군의 독점권을 이용하여 아라비아 남부 지역, 특히 예멘의 각 도시들을 획득하였으나, 실제 사나와 아덴 같은 큰 도시들은 카리지트 이맘 왕국 본 군대를 이끌고 공략했다. 그리고 발달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해군을 조직해 바다에서 아덴을 공격했다. 그리고 소말리아와 탄자니아 해안까지 이르는 아프리카 해상 정복 전쟁을 통하여 동아프리카에서 홍해 등을 거쳐 가는 물자들을 약탈하면서 원정군의 막대한 군자금을 축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인들도 대동해 중계 무역 규모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진주와 같은 보석들의 수출품들을 통해서도 상업적 이익을 취하면서 동아프리카 해안의 거점들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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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수단 내전의 최대 격전지이자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다르푸르(Darfur) 분쟁 이야기
    다르푸르는 대체로 지금의 수단 공화국 서쪽 끝 부분에 해당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코르도판(Cordopan), 동쪽으로는 와다이(Wadai)가 존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르알가잘(Baralgazal) 강, 북쪽으로는 리비아 사막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다르푸르 지역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의 북부 다르푸르 주민들은 하이집트 왕조가 생겨나기 이전에 나일 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던 종족과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상업행위를 하며 입지를 구축했던 하이집트의 대상(隊商)들은 B.C 2500년경부터 다르푸르에서도 활동했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민족 생성 신화에 나오는 다르푸르의 초기 다구(Dagu) 족 통치자들은 고대 이집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고, 다르푸르 사람들은 신왕국시대 (B.C 1570~B.C 715)의 이집트, 그리고 지금의 수단 북부에 위치한 쿠시(Qusi) 왕국의 도시인 나파타(Nafata)와 메로에(Meroe)와도 교역을 했다. 다구 족이 다르푸르를 다스린 이후에는 툰구르(Tungur)족이 다스렸다. 다르푸르에서는 서기 900~1200년에 기독교가 전파되며 기독교를 믿었으나 서쪽에서 이슬람교를 믿던 차드 호를 중심으로 한 카넴보르누(Canembornu) 제국이 동쪽으로 진출함에 따라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1240년경에는 카넴보르누 왕국의 왕이 이집트에서 사이(Sai)까지 동쪽으로 뻗어 있는 교역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는데, 아마 이 시기부터 카넴보르누가 다르푸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르푸르는 카넴(Canem)이나 보르누(Bornu)가 한창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고 있을 때, 두 나라 중 한 왕국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1640년경부터 1916년까지는 케이라(Keira) 족이 다르푸르를 지배했다. 푸르라는 이름이 역사적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664년이었고 지배자인 케이라 족은 이슬람교를 믿었으며 케이라 왕조의 왕들은 이슬람교와 케이라 족의 지배를 받아들인 흑인 주민들을 '푸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케이라 족과 흑인의 혼혈이 차츰 늘어나게 되자 역으로 혼혈된 케이라 족이 '푸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르푸르 사람들은 케이라 왕조 때 완전히 이슬람화 되었으며 다르푸르의 술탄들은 와다이(Wadai) 왕국과 때때로 전쟁을 벌였고, 다르푸르에서 거의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아랍 부족들을 정복하려고 했다. 1870년대에 이르러 다르푸르는 이집트에 편입되었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강력한 영국과 이집트의 연합군에게 진압당했으며 1881년에는 영국령 이집트의 아스완 총독이었던 루돌프 카를 슬라틴(Rudolf Carl Slatin)이 다르푸르의 총독으로 부임해왔다. 슬라틴은 종교개혁가이자 수단의 정치지도자인 알 마디(Al-Madi)의 공세에 맞서 영토를 지켰다. 하지만 1883년 12월에는 결국 수단에 다르푸르를 내주게 된다. 이후 다르푸르는 알 마디의 영토에 합병되었으나 알 마디를 승계한 아브드 알라(Abd Alla)가 1898년 권좌에서 추방된 이후, 이집트를 다스리던 영국인들이 세운 수단 정부의 왕인 알리 디나르(Ali-Dinar)를 1899년 다르푸르의 술탄으로 인정하게 된다. 1915년에 알리 디나르는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영국군 원정부대에게 패배해 죽음을 당했다. 이후 다르푸르는 수단의 한 지방으로 격하되었고, 이후에는 2개의 주(州)로 분리된다. 지리적으로 볼 때, 다르푸르는 약 44만㎢의 거대한 평원으로 평원 가운데에는 마라 산맥의 화산 지대가 솟아 있다. 마라 산맥의 평균 높이는 2,200m이며, 최고봉인 마라 산의 높이는 3,088m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다르푸르 평원은 매우 황량하고 비교적 지형이 단조로운데다가 리비아 사막과 마주하고 있는 북부 지방은 더욱 메마른 사막화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돌이나 모래가 많이 섞인 토양에는 열대성 식물과 함께 계절에 따라 약간의 풀, 키 작은 가시덤불만이 자라고 있는 황폐한 땅이다. 마라 고원에는 다르푸르의 다른 지역들보다 제법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산 속에 수많은 와디(Wadi, 비가 내릴 때만 물이 흐르는 강)가 생겨나 평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며 그와 더불어 다르푸르의 남쪽은 생각보다 비옥한 초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주민 구성으로 보자면 다르푸르 북쪽 주민 대다수는 아랍인들이지만 남쪽에는 아랍인과 푸르족이 섞여서 살고 있고 그 외에도 베자(Beza)족, 자가와(Zagawa)족, 누비아(Nuvia)족, 다구족이 있다. 상당수의 다종족이 거주하는 마라 고원에는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쌀을 비롯한 곡식과 과일을 집약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르푸르의 비교적 비옥한 남부에서는 수수와 기장, 깨, 땅콩(낙화생), 근채류(根菜類), 채소 등을 재배하고 건조하고 사막화된 북부 지역에서는 낙타와 양, 염소를 키운다. 전통적인 수공예품으로 양탄자와 가죽제품, 목각제품이 있으며 다르푸의 주요도시는 니알라(Niala)와 알파시르(Alfasir)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다르푸르 분쟁은 2003년 2월부터 수단의 다르푸르 지역에서 발생하여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인종과 종족 간에 종교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까지 함께 얽혀서 발생한 분쟁이다. 이 분쟁은 지난 2004년, CNN과 AP 통신 등 주요 서방의 언론들이 2004년 10대 뉴스로 선정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 2006년 5월, 당사자들 사이에서 평화협정이 진행 중이었지만 얼마 안 가 협정을 파기되어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지난 4월 29일은 ‘다르푸르의 날’이었고 내전이 발생한지 20주년째 되는 날이다. 이집트 남쪽 아프리카 영토 최대 크기의 국가인 수단의 서부 지역 다르푸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살 4주년을 맞아 세계 35개국에서 ‘피의 모래시계’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모래 대신 피가 담긴 모래시계를 들고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다르푸르 곳곳에서 피가 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외쳤다. 다르푸르 대학살은 2003년 수단 정부,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이 아랍계 민병대인 잔자위드(Janjaweed)를 투입해 시작한 학살로 지금까지 40만 명이 살해되고 난민 200만 명이 발생했던 북아프리카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이다. 더불어 이와 함께 발생한 분쟁은 아프리카 흑인계 반군과 "말 등에 탄 악마"(Devil on horseback)라 불리는 잔자위드, 그리고 북부 아랍계 이슬람 민병대 간의 무력 분쟁으로 나타나며 지금까지 사망자만 60만에 달한다. 그 중 80%가 분쟁과 아무 상관없는 민간인들이었다. 수단이 1956년 영국에게 독립한 이후부터, 독립 정부는 거의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잔자위드에게 현대식 무기를 제공해주는 자들이었다. 이 분쟁 이전에도 아프리카계 흑인이 살고 있는 남부 지역과 아랍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북부 지역과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고 1983년에 시작된 수단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수단의 정부는 샤리아를 수단의 헌법으로 적용시켰으며 이 법은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수단인들에게 적용되었다. 서부의 다르푸르 인들은 남부의 흑인 아프리카인과 다르게 거의 무슬림이고 기독교인은 드물게 나타나며, 수단의 정부에게 반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아랍 이슬람계 민병대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인종 청소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르푸르 인들은 정부가 고의적으로 다르푸르를 등한시하고, 차별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대립의 또 다른 이면에는 석유 이권을 두고 벌이는 기득권들의 싸움이라는 요소가 있다. 수단은 최근 유가 급등을 타고 유전 개발이 한창인 상황이다. 특히 다르푸르에는 약 30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단 정부 입장에서 다르푸르의 유전지대를 아프리카계 흑인 지역에 두고 싶지 않았고 더불어 러시아 에너지의 의존도를 벗어나기 위해 서구 유럽 국가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였다. 영국부터 시작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이 지역 유전들을 사들이려 했으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이를 순순히 내주지 않아 이들이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서방의 여러 나라 지도자들은 수단 정부와 이슬람 민병대가 흑인들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면서 인권탄압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상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눈 감고 있다. 물론 서방의 이 주장은 틀린 주장이 아니다. 노예사냥과 강간, 납치, 대규모 집단 학살 등이 다르푸르에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서구 여러 국가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는 순수한 인도주의적인 동기 이 외에도 인권탄압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 등을 명분 삼으면서 정작 다르푸르에 대한 지원은 손 놓고 있는 셈이다. 이는 수단 정부가 다르푸르의 흑인계들을 알아서 정리해주길 바라는 입장일 수 있다. 어느 정도 흑인들이 학살이 되든, 강제 이주가 되든 정리가 되면 적절히 때를 보아 수단 사태에 개입하면서 석유 이권을 챙기려는 계산이다. 이는 서구가 남의 나라 이권에 개입할 때 늘 써먹는 방법이다. 그리고 때가 적절히 찾아오고 있다. 마침 3차 쿠데타가 발생해 서방과 미국이 알 부르한 대통령을 지원하고 러시아가 반군으로 취급 받는 함단 다갈로를 지원하며 대리전 획책하고 있는 것, 모두 다르푸르의 석유 이권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석유 이권보다는 반군 정부가 들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인해 아프리카의 러시아를 지지하는 국가를 한 국가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이래 저래 두 양극의 대리전 대결로 힘없고 가난한 수단의 국민들이 고통받게 생겼다. 안타까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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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3
  •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알바니아 민족주의 (中편)
    현 알바니아와 코소보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같이 섞여 있으며, 기독교도들은 정교도와 카톨릭교도으로 분류되고 있다. 중세시대 정교를 이끌고 있는 비잔틴 제국 하에 존재하고 있던 상황에서 11세기 이후 기독교는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정교와 서쪽의 로마 교회로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따라서 발칸에 무슬림이 들어온 것은 15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발칸 진출로 인해 비잔틴 제국이 완전히 쇠락한 이후라 볼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 20세기 근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나타난 발칸의 민족주의가 또 하나의 ‘종교’와 같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을 결속하는 중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 민족주의가 전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종교적인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발칸에 떠오르는 화약고의 별칭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당시 유럽 세계에 있어 거대한 화두가 되었다. 니콜라스 맬콜름(Nicolas Malkolm)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신화(The myth of Albanian nationalism)> 라는 저서에서 ‘Transcending religious issues is just a myth (종교 문제를 초월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라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파쉬코 바사(Pashko Vasa)는 <오, 가난한 내 알바니아!(Oh, my poor Albania!)>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깨어나라! 알바니아 인들이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형제같이 모두 모여서 교회인가 자미(Camii, 모스크)인가를 따지지 말고 서약을 하자. 알바니아인들의 신조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라. (Wake up! Albanians, wake up from your deep sleep. Let us all gather together like brothers and make a pledge without worrying about whether it is a church or a Camii. The creed of the Albanians is ‘Albanianism’)” 이처럼 파쉬코 바사가 주창한 위와 같은 선전 문구는 알바니아의 ‘중흥(Restoration)’을 요구하는 모든 글에 비슷하지만 다른 형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인용되었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정체성 형성은 물론 민족 단합을 추구하는 것에 여전히 방해가 되었던 것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기간인 4~5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정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적인 대립 문제였다. 알바니아의 종교 문제는 알바니아인이 서로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 한 나라를 구성할 수 없다는 거짓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는 형식으로 선동되면서 발생했다. 파쉬코 바사가 말하길,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종교적 문제가 사람들을 분열시킨 것이 없었던 유일한 나라였다고 한다. 알바니아 인들은 그 민족사에서 언제나 하나로 뭉쳐왔으며 알바니아에서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서로 혼인하는 사례가 흔하고, 한 가정에서도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같이 한 지붕 아래서 평화롭게 산다고 주장했다. 종교적인 부분과는 달리 알바니아인은 언제나 알바니아인으로 존재해왔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허상으로 간주되었던 민족주의가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같은 종교집단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위계적인 정교회 성직자들과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알바니아인 정교도들 간의 갈등이 심각했고 그리고 다소 위계적인 형태를 지니던 이슬람 수니파 성직자들과 남부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벡타시 종파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이처럼 알바니아의 민족주의가 종교적인 차이를 초월하게 된 것은 특히 엔베르 호자의 독재로 통칭되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나타난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종파로 분할되면 민족주의가 자리 잡는데 크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대표되는 3명의 인물은 상이한 종파들에게서 배출되었다. 나임 프라셰리(Naim Frasheri)는 무슬림이었고, 판 놀리(Fan Noli)는 정교도, 기예르기 피스타(Gjergj Fista)는 카톨릭교도였다. 이처럼 알바니아 ‘중흥’의 민족주의 이념은 종교를 초월하게 되었다. 알바니아인들 가운데 정교도들은 스스로 정통의 알바니아인으로 자처해 왔는데, 그 이유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알바니아 민족의 구심을 일구었던 스칸데르베그도 개종하기 전에는 정교도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개종하기 전의 알바니아인들은 정교도인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무슬림의 다수는 오스만투르크와 유대하고 있으며 지금도 터키에 존재하는 알바니아계는 알바니아인보다 터키인으로 자처하고 있다. 이는 현대시대 뿐 아니라 오스만에 의해 개종한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인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더 순수한 알바니아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 ‘중흥’의 주축이 되어 알바니아를 잠식하려고 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무력으로 맞섰다. 한편 기독교인들 중, 정교도는 그리스인, 카톨릭은 이탈리아인들과 친화성이 있는 가운데, 카톨릭 교도들도 자신들을 진정한 알바니아인으로 자부하는데, 그러한 큰 이유는 알바니아의 도덕, 관습법 등이 전통적으로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인을 통합하고 있는 것은 종족과 언어로, 이 두 가지가 공동의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핵심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알바니아인들은 같은 교과목의 학교, 단일한 민족의 문학 등을 보유한다. 1991년 알바니아 공산체제가 붕괴되면서 종교와 민족주의 이념 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세속적인 의미로서 종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간의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쪽 유럽의 기독교와 동쪽 이슬람 교간의 대립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알바니아가 공산체제에서 스칸데르베그를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설정한 이유는 그 종교적 입지의 의미를 축소하고 정복자였던 오스만투르크에 저항한 전사로서의 모습을 강조했다. 스칸데르베그가 기독교도로 무슬림에게 저항한 것이 아니라, 알바니아인으로서 터키인에게 대항했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이를 확립시킨 것이다. 여기에 코소보 지역을 두고 세르비아와 대립을 하게 된 것은 1878년에 체결된 프리즈렌 동맹에서 스칸데르베그의 저항 정신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삼았고 결국 이는 유고슬라비아이 치하에 들어간 코소보에 대한 탈환의 의지를 극대화하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스칸데르베그,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구심점이고 코소보 전쟁 당시 코소보-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 코소보 해방군(KLA)의 정신이자 정체성으로 자리했다. 스칸데르베그를 이해 못하면 알바니아와 코소보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코소보 전쟁에 임하는 코소보-알바니아계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만큼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무장전선에 있어 신(神, God)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알바니아의 영토 이 외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극단적인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민족통일주의 개념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다. 니콜라스 맬콜름(Nicolas Malkolm)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신화(The myth of Albanian nationalism)> 에서 이를 "스칸데르베그주의(Skanderbegnism)"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93년 하심 타치(Hashim Thaçi)에 의해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었고 하심 타치는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에 대한 저항과 보슈냐크인들이 같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참전해 세르비아인과 싸웠다. 그러면서 하심 타치는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나토와 미국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들의 협력과 물자 지원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하심 타치와 함께 코소보 해방군을 이끌던 자로부터 6년 전에 보스니아 전선에서 하심 타치와 미국 CIA,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 건너온 무자헤딘들과 사라예보에서 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미 당시는 데이턴 협정을 맺고 난 이후의 얘긴데 무자헤딘들 중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 상당수의 군대가 보스니아에 남아 파괴된 보스니아를 보슈냐크들과 함깨 복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심 타치가 당시 보스니아에 와 있던 오사마 빈 라덴과 만났을 확률이 높지만 실제로 만났다는 얘기의 진실은 하심 타치 본인과 당시 CIA만 알고 았다. 아무튼 하심 타치는 1996년 이후에도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약 3년 동안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코소보 일대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세르비아 무장 세력들과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또한 나토와 미국이 하심과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했고 그들이 벌인 사악한 행위들은 철저히 눈감아 주었다. 미국 정부는 알바니아계 디아스포라 조직들을 통해 많은 자금들을 코소보 해방군(KLA)에 보냈다. 이들은 알바니아 마피아들을 통해 코소보 해방군의 작전 지원을 위해 마약 거래를 했고 세르비아인들을 납치하거나 포로로 잡은 이들의 장기 적출을 하고 이를 팔아 먹어 군자금도 충당했다. 세르비아인이 남자면 장기 적출을 하고 여성은 매춘으로 팔아 넘겼다. 1996년부터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지는 3년 동안 KLA는 나토와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고 비인도적 행위를 통해 군자금을 받았으며 알바니아계 디아스포라 조직들을 통해 많은 자금들이 이들에게 모이면서 코소보 공화국 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와 같은 초기 빌드업은 전쟁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져 2008년 코소보 공화국이 독립하고 현재 상태에 이르는데 기본 토대가 되었다. 즉 이들은 12년 동안 독립 후, 정부를 구성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며 친미, 친서방 정권이자 발칸을 뒤흔드는 미국의 "트로이 목마"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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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3
  •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알바니아 민족주의 (上편)
    21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코소보 전쟁, 많은 사람들은 코소보 전쟁이 세르비아와 코소보, 나토의 미국의 세르비아 폭격 등으로 요약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을 틀린 말이다. 만약 이를 단순히 세르비아와 코소보, 나토 및 미국과의 관계로만 근원적인 부분에 접근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코소보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 이념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현대판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정면 충돌이다. 거기에 곁가지로 미국과 나토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압살하기 위해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힘을 실어준 전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1992년 이후에 나타난 남슬라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이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해 세르비아 관련여러 연재한 내용들을 통해 언급해왔다면 이번에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고대 시기 일리리아 인들이 알바니아와 발칸 지역들에 정착하면서 로마 제국과 슬라브, 고트족들이 오기 전까지 원주민으로 남아있었다. 로마 제국이 발칸을 정복한 이후, 일리리아인들은 로마인들과 혼혈하면서 계속 발칸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들어온 슬라브족들은 남슬라브계 민족을 형성하며 발칸에 정착했고 이 때부터 로마인과 믹스된 로망스-일리리안들과 대립의 역사를 갖게 된다. 이 로망스-일리리안들이 바로 알바니아인들의 혈통적 직계 조상들이다. 이들은 중세 시기에 불가리아 제국 및 세르비아 왕국과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로망스-일리리안들은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과 대립해 나간다. 현대 알바니아인들의 스칸데르베그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고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도 스칸데르베그의 기마동상과 광장이 있다. 로망스-일리리안들이 알바니아인으로 인식된 것은 로망스-일리리안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브리(Arbri)에서 태동하여 이를 그리스어로 알바니아(Albania)라고 발음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당시 스칸데르베그와 그의 일족인 로망스-일리리안들을 두고 그리스인들이 알바니아라 부른 것을 자신들의 민족명으로 삼았던 것이고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인의 시조이면서 최초의 왕이자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본질을 알려면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라는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스칸데르베그의 가문인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양인 검은 독수리는 현재 알바니아 국기의 문양이다.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한 이후, 알바니아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아들여 알바니아계 정체성을 지니고 무슬림들로 개종했다. 오히려 보슈냐크인들보다 빨리 무슬림으로 개종했기에 오스만 제국 고위 관료로 상당수 등용되기도 했고 오스만에 자리잡은 알바니아계들은 후일 터키 공화국이 세워졌을 때도 터키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터키 7대 대통령이자 6.25 터키군 참전 용사인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이 대표적인 알바니아계 터키인이라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알바니아계의 특성은 어느 나라에 정착하든 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지만 자신들의 고유 정체성은 그대로 지니면서 잡초 같이 살아 남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닌 채로 현지화로 녹아든다는 것에 있다. 이런 특이한 특성의 근원에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혹은 로망스-일리리안 민족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알바니아(Shqipëria e Madhe)라 불리는 민족통일주의 개념이 주된 이념이다. 알바니아와 코소보, 그리스의 이피로스 주와 몬테네그로의 울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서부 지역과 세르비아의 프레셰보와 메드베자, 부야노바츠 지역을 통합해 "강한 알바니아(Strong Albania)"로 거듭나 발칸 최강국으로써 번영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알바니아의 민족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때는 언제일까? 때는 19세기 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영향으로 같은 슬라브계 민족들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서 오스만의 영향력이 약화된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인들은 슬라브계 민족의 발호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무슬림인데다가, 오스만 제국에 적극 충성하여 그에 대한 댓가도 받았었고, 무려 42명의 오스만 제국 재상들이 알바니아계였기 때문에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있어 터키인과 동급 으로 취급되면서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거주하는 영토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으로 분할되어 넘어갈 것을 우려하게 된다. 따라서 알바니아인들은 민족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모임을 갖기로 했다. 불리한 전황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전쟁이 한창이던 1877년 12월 12일에 코스탄티니예에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알바니아 민족의 권리 보전을 위한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for the Preservation of the Rights of the Albanian People)"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지역 단위로 흩어져 있어 남슬라브계 민족에 의해 자 민족의 안보를 우려하던 알바니아인들이 처음으로 단체행동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78년 초에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알바니아인 상당수가 거주하던 지역들이 영토 할양에 포함이 되니 알바니아인들은 서로 단결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1878년 6월 10일, 47명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베이들이 코소보 프리즈렌에 모여 알바니아 민족 영토 전체를 보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의하게 된다. 당시 맺어진 프리즈렌 동맹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것으로 종결했지만 첫 회의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통합과 자치, 개혁 등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모였다는 것 자체가 당시 오스만 지배 하의 흩어져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결성된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적 성향이 매우 두드러지는 단체였다. 이 단체의 성격으로 볼 때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발송된 프리즈렌 동맹의 각서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터키인이 아니며 터키인이 되지 않도록 하는만큼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우리를 슬라브인, 오스트리아인이나 그리스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게 맞설 것이다. 우리는 알바니아인이고자 한다. (Ne nuk jemi turq dhe aq sa nuk do ta lëmë veten të bëhemi turq, do të luftojmë me të gjitha forcat kundër atyre që do të na bënin sllavë, austriakë apo grekë. Ne duam të jemi shqiptarë.)" - 알바니아어 번역문 오스만 제국은 비록 러시아와 전쟁에서 패전으로 끝이 났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는 알바니아 민족단체를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프리즈렌 동맹 각서를 보고 이에 대한 불편함을 느껴 동맹 인사들이 자신들을 알바니아인이 아닌 "오스만인"으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게된다. 이에 반발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만 제국과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으며 프리즈렌 동맹은 만장일치로 압딜 프라셔리(Abdyl Frashëri)를 동맹 대표로 뽑아 그의 영도 하에 알바니아 자치와 반 오스만 성향을 갖게 되면서 스칸데르베그 이후, 400년 만에 군사행동을 나서게 된다. 이처럼 프리즈렌 동맹은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반란에 나서게 되자 알바니아의 독립을 우려한 오스만 제국은 동맹의 해체를 요구하게 된다. 이처럼 프리즈렌 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첫 충돌은 베를린 회의로 인해 몬테네그로 영토 할양을 처리하고 있던 제독 메흐메트 알리 파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으며 프리즈렌 동맹은 여기서 메흐메트 알리 파샤를 포함한 오스만 지휘관 다수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프리즈렌 동맹은 1879년에서 1881년간 알바니아 민족 영토를 할양 받아 점유를 확립하러 오는 몬테네그로의 군대와 지속적으로 격돌하여 패퇴시켰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주변국들과 충돌하여 독립을 꿈꾸던 프리즈렌 동맹을 좋지 않게 보던 베를린 회의의 강대국들은 오스만 제국에 알바니아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고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데르비시(Dervishes) 파샤 장군 휘하의 대규모 진압군을 편성하여 프리즈렌 동맹을 공격했고 아직도 강력한 오스만 정규군에게 1881년 4월, 프리즈렌이 함락당하며 동맹은 해체되었다. 이로써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 상당수는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오스만 제국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의 일시적인 성공은 몬테네그로와 그리스로 할양되던 지역 일부를 재협상하게 되었고 이렇게 재협상 된 영토들은 30여년 후 제1차 발칸 전쟁당시 몬테네그로와 그리스로 할양되어 현재 몬테네그로와 그리스의 영토로 남아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초석이 되어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통일, 알바니아 자치 및 독립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갔다. 프리즈렌 동맹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근대적 태동으로 여겨진다. 1905년 알바니아 해방 비밀 결사가 결성되고 1912년에 코소보 프리슈티나에서 발생한 알바니아 봉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프리즈렌 동맹에서 결의된 알바니아 영토를 구성하는 4개 빌라예트(Vilayet, 州)들은 대알바니아주의를 제창하며영토를 수복하자는 선동에 나서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국경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에게도 성지(聖地)나 마찬가지이며 세르비아 또한 민족적 성지(聖地)를 주장하면서 코소보를 둔 대립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내일은 中편, "알바니아 민족주의 백타쉬파와 코소보 해방군 결성"에 관한 연재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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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2
  • 세르비아-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숨겨진 유고 내전의 잔혹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서남쪽으로 129㎞ 떨어진 곳에는 아름다운 중세 고도(古都)인 모스타르(Mostar)라는 도시가 있다.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네레트바 강이 가로질러 나간다.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에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산다. 그리고 이를 연결시켜주는 스타리모스트(Starimost)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일명 "평화의 다리"로 불리며 현재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현재 이 다리는 복원된 상태이지만 원형 다리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566년 모스타르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자랑하던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다리는 높이 57m에 길이 4m, 폭 4m로 당시까지만 해도 단일 다리로는 발칸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을 넘어 전세계에서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다리는 1990년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의 상징으로 남았고 학살이라는 비극의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물론 현재도 네레트바 강과 스타리모스트를 사이에 두고 무슬림과 카톨릭이 양분하여 살고 있다. 1993년부터 진행된 모스타르 학살을 알려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전반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이끌던 요시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 내 각 구성국들에서는 민족주의적 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중앙 정부는 유고슬라브인 통합주의자들이 밀려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장악되기 시작했으며, 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각 구성국가들도 주 민족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둑세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주의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위주로 독립하여 새로운 연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했다. 그러자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합치면 64% 정도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과반이 넘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은 국민투표를 보이콧했고, 이미 세르비아인이 장악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독립을 희망하던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상호간의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인들의 무력 토벌에 맞섰다. 이것이 보스니아 내전의 전말이다. 그런데 보스니아 전체 영토를 보면 스르브스카와 보스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헤르체고비나 주에는 확고한 주 민족이 없었다. 대개 카톨릭을 믿고 있는 크로아티아계가 주류였다. 그 중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계 헤르체고비나인들이 장악한 도시지만 무슬림들이 반 정도 존재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하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강대한 세르비아인에 맞서기 의해 맺어진 동맹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민족 사이의 관계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독립 직후에는 세르비아계가 매우 강력했기에 자신들도 세르비아 민병대에 학살당할 것을 우려해서 서로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슈냐크인들 역시 세르비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척결해야 할 존재였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비중은 보슈냐크인 50%, 크로아티아인 15%, 세르비아인 35%로 크로아티아인은 보슈냐크인에 비해 열세였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과의 대립에 있어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보슈냐크인과 다르게 크로아티아인에게는 강력한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독립국 크로아티아가 있었고 그 배후에는 나토와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독립국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끌었던 프라뇨 투지만과 그가 만든 정당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이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라는 지부를 세웠다. 이 지부는 보통 모스타르와 디나르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대에 주로 게릴라처럼 머물고 있었으며 민주연합당은 후에 보슈냐크인 정당인 민주행동당과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을 일구어 내긴 했지만, 세르비아인 세력을 몰아내고 나서 각자가 장악한 지역을 두고 상호 지역 간의 통제권과 곳곳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이 많은 지역에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Hrvatska Zajednica Herceg-Bosna)를 선포하여 보스니아 정부들과 보슈냐코 무슬림들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주 거주지인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넘어 보슈냐크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부 보스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슈냐크계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등 제노사이드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처럼 보슈냐크인들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크로아티아인이 보슈냐크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지원이 있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나토와 미국이라는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지만의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했다. 이때 투지만은 보슈냐크계에 대한 지원을 끊고 오히려 보슈냐크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하게 된다.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 때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공격을 받아 전력적으로 열세였고 매우 불리한 처지였다. 우선 1992년에 크로아티아와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휴전이 성립되고 난 이후 1992년에 투지만은 신유고슬라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 및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대통령과 함께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보슈냐크인들을 인종청소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를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것으로 분할하자는 그라츠 조약(Treaty of Graz)에 합의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4차의 시기로 1차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2차 세르비아-보스니아 전쟁 (일명 보스니아 내전), 3차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일명 헤르체고비나 내전), 4차 세르비아-코소보 전쟁 (일명 코소보 전쟁)으로 분류가 된다. 이 중 보스니아 내전이 심각해지자, 1992년 8월에는 보스니아를 민족별로 3개 공화국으로 재편하는 내용의 중재안인 오웬-스톨렌텐베르그(Owen-Stollentenberg) 안이 제시되었다. 이에 크로아티아인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1993년에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를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으로 승격하면서 전쟁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러나 보슈냐크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오웬-스톨렌텐베르그 안을 거부했다. 보슈냐크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3개 체제로 갈린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내전에 휩싸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이유였다. 세르비아인들은 본래 스르브스카가 세르비아의 영토였고 세르비아인들이 절대다수 지역이었기에 스르브스카를 보스니아 영내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오웬-스톨렌텐베르그(Owen-Stollentenberg) 안이 파기되었고 보슈냐크인들은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정식 국가로 인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완전히 결렬되었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는 양측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로 집계되었다. 이 전쟁 중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슈냐크인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한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도 전쟁 범죄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1993년 9월, 세르비아 민병대와 사라예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던지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슈냐크 모두 서로 죽고 죽이면서 사상자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당시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군대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점령지 상당 부분을 수복했다. 당시에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 정부와 미국, 나토에 지원 받는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들에 비해 좋은 무기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공격을 할 때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여 항복을 강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디나르알프스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산악전에서 승부를 보던 보슈냐크군이 승전을 거듭하면서 전세는 크로아티아한테 불리해졌다. 그러자 1993년 10월부터 크로아티아인들은 모스타르, 제니차 등 헤르체그 보스니아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들을 대량 학살하여 보슈냐크 군에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은 헤르체그 보스니아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만을 불러 일으켰다. 더불어 모스타르에서는 슬로보단 프랄략의 주도로 크로아티아의 선제 박격포 포격을 했다. 이 때 포격을 받은 스타리모스트 다리는 붕괴되었다. 모스타르의 크로아티아계 지구인 둠(Dum) 에서 쏘아대는 박격포 포탄은 보슈냐크 무슬림 지구인 마졸리체(Mazoljice) 지역에 계속 떨어졌고 기록에 의하면 총 967발이 적중되었다고 하며 9개의 모스크가 파괴되었다. 이후 둠(Dum) 지역의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은 네레트바 강을 건너 마졸리체(Mazoljice) 지역에 들어가 무슬림들이 보이면 무조건 사살했다. 이에 마졸리체(Mazoljice) 의 보슈냐크들은 민병대를 조직했고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맞서 싸우면서 한 조직원들이 네레트바 강을 우회해 둠(Dum) 지역에 들어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보복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모스타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극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고 마침내 보슈냐크인은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우위에 섰다. 1994년 3월이 되자 헤르체그 보스니아는 헤르체고비나 주 이 외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고,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수도로 선포했던 모스타르까지 보스니아 군이 장악하게 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 때, 모스타르의 주민 3만 7천 명 중,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으며 그 중 6,400명이 사망했다. 모스타르의 건물은 집 9채, 모스크 2개, 성당 1개를 제외하고 모두 초토화 되었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 모스타르 학살은 유고 내전 3대 학살(부코바르, 스레브레니차, 모스타르)에 들어간다. 그러나 스레브레니차를 제외하고 부코바르와 모스타르 학살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가 철수하면서 모스타르 학살에 대한 자료들은 상당수를 파기해버렸고 크로아티아나 보슈냐크가 서로 보복학살을 했던 끔찍한 몇 안 남은 자료들은 모두 사라예보 고문서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한편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모두 지원해주던 미국은 크로아티아인이 모스타르에서 보슈냐크인들을 학살한 사실에 놀라 투지만 대통령을 워싱턴 D.C.로 불러내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즉각 멈출 것을 요구했다. 당시 막 출범한 EU 역시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을 브뤼셀로 소환해 크로아티아의 제노사이드를 규탄하고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보스니아 반환을 요구했다. 투지만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정부는 미국과 EU의 압력에 굴복해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1994년 7월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면서 보스니아 내전의 또 다른 전쟁인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일단락 되었다. 한편 모스타르 학살의 주범 슬로보단 프랄략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 섰다.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를 "사기!"라고 소리치며 주머니에 든 작은 병의 액체를 마셨다. 그리고 그는 “나는 방금 독약을 마셨다”고 외쳤다. 재판은 중단됐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인들의 경악을 불러왔다. 이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에서 학살을 한 혐의자는 프랄략 외에도 3명이나 더 된다. 비록 이 학살 사건이 세르비아계에 비해 규모는 적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인정을 한 것이 이날 판결의 핵심이었다. 이날 재판에서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헤르체그 크로아티아 군에게 돈과 차량, 무기 및 군 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후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명목상 그 뒤로도 존속했지만 정부로써의 의미를 상실했고 1996년에 완전히 해체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내 각 주로 개편되었다.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2000년대에 차례대로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되어 민족 학살에 대해 유죄를 인정 받고 복역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인들 중에서는 헤르체그 보스니아 공화국을 보스니아 내 구성국으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있다. 세르비아인들도 스르브스카 공화국을 인정하여 1국가 2체제로 살고 있는데 크로아티아계라고 스르브스카 같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분리 독립에서의 과정으로 볼 때 당시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엄청난 재앙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고, 미국과 러시아 및 EU 등의 강대국이 개입해 전쟁을 가까스로 봉합한 데이턴 협정을 파기하거나 또는 데이턴 협정 자체를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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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22
  • 프랑스 연금 개혁안 반대 시위에 대한 단상
    요즘 프랑스 파리는 연금 개혁안 때문에 2~3월 보통 난리가 아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마크롱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 법안이 성립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 야당이 제출한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모두 부결되었지만 정부가 하원 표결을 불신임하는 헌법 특별조항(49조 8항)을 발동하는 강경책까지 사용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풍파가 예상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하원에서 야당이 17일에 제출한 총리 불신임안 두 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정부가 제출한 연금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는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총리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내각이 총사퇴해야 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다만, 헌법위원회의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남아지만 법안의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부할 권한이 있다해도 대체로 승인하는 편이기 때문에 연금개혁안 또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은 헌법위원회의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마린 르펜 등이 헌법위원회 검토를 요구 중에 엤다. 2022년 마크롱이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임명한 보른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 뛰는 헌법 특별조항을 소환한 것이 것이 이번이 총 11번째의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법적인 문제는 없지만 정부가 의회를 건너 뛰고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지지와 야당의 지지까지 받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현재 여소야대 구도에서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지지한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당과 치열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향후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의회가 향후 정부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되면 시간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이 따를 것으로 보여 원활한 국정 운영은 쉽지 않다. 이에 극좌 성향을 가진 마틸데 파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 의원은 정부를 붕괴시키고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 9표가 부족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을 대변할 정부는 이미 죽었고 더는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정부가 연금 개혁안을 올해 1월 10일에 발표한 한 이후인 지난 1월 19일부터 두 달 동안 8차례 전국적인 단위로 시위 및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 불신임안이 부결된 20일에는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면서 양상은 더욱 심각하게 변해갔다. 여기에 환경 미화 노동자들이 파업해 쓰레기가 거리에 쌓여 있으며 시위 때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불 타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더불어 환경 노조는 23일에도 전국 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과잉 진압으로 현재 논란이 심화되는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20일 표결이 끝난 뒤에도 시위가 잦아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앞에 깊은 불확실성 시기가 놓여 있고 침묵을 지키는 마크롱 대통령이 어떻게 권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여론도 사실 좋지 않은 편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엘라브가 18~19일 18살 이상 프랑스인 1,1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과반인 69%가 정부가 하원 투표를 건너 뛰고 법안 통과를 시도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 개혁 법안 최종안이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정년은 2030년까지 현행 62세에서 64세로 늘어난다. 연금을 100% 받기 위해 기여해야 하는 기간은 2027년까지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64세에 연금을 100% 받기 위해서는 43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67세까지 일해야 한다. 노동 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올해 9월부터 최저 연금 상한선이 최저 임금의 85%로 10% 올라간다. 다만, 취업을 일찍한 경우 조기퇴직이 가능하다. 워킹맘에게는 최대 5% 연금 보너스가 지급되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그게 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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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21
  • 프랑스 절대왕정의 신분체제이자 유럽 중근세 시대의 봉건제를 대표하는 이름,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이야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봉건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되어진 사회구조를 통칭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였으며 의회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면서 민주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왕정복고(The Restoration)'가 이루어지고 대혁명 당시에 이루어졌던 '제도 개선(System improvement)'은 점차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부르주아에서 신흥귀족으로 변모한 자들이 프랑스에서 돈과 권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고 이와 같이 축적된 힘이 혁명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던 이유가 됐다. 앙시엥 레짐을 신분제도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아래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내부를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층 신분과 피지배층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주장들이 상당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 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러한 부분인데 정작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례로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로 알려진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특권만 없었을 뿐이지 재산도 매우 많았고, 귀족 작위 및 칭호도 허가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이러한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면적인 숙청에는 반대하는 자들은 주로 내세울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을 가질 만한 것이 없었던 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 것이 쉽게 출세를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은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상태로 변해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세력이 약화된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징세권은 세리들에게 넘어가 있었고 왕권은 상당부분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시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세력 하에 들어왔다. 1789년 혁명 전야 때는 절대왕정 자체가 이미 이름 뿐인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이와 같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간의 권력과 부의 욕심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혁명 이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은근히 절대왕정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낮추는 반(反)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지원하여 왕정을 전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상류층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자리잡게 되었다. 앙시엥 레짐의 제1계층은 성직자와 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에 달했다. 대체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적 특성상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중세 시대와는 달리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국왕의 신하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제1계층의 숫자는 당시 프랑스 전 국민의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면세 계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제1계층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에 있는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에 따라 재물 축적 및 정계 및 군대에 진출함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했다. 물론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과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주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랑스 내의 큰 성당들과 수도원이 귀족 출신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이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계층들이 많았다. 따라서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철저히 이해관계가 달랐다. 실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이단심문은 자주 나타나는 행사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내린 결정 사항도 우선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통제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 프랑스 카톨릭의 분립을 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 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교도의 국왕들은 필수적으로 가까이 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암묵적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스페인 국왕이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군주로서 교황을 지켜주는 우방의 역할을 했지만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뛰어넘어 유럽의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 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부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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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1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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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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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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