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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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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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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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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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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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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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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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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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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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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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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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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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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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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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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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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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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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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 연기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양날의 검으로 자리 잡을 수 가능성이 높다. 젤렌스키에게는 선거가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사법리스크 또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이 장기화될수록 젤렌스키에게 매우 유리하다. 하루라도 권좌에 머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2~3년전부터 젤렌스키의 대통령 지지도는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예프 사회학 국제 연구소(Кие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институт социологи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비교적 지지한다'는 응답이 러시아와 개전 직후 2월 90%에 달했으나, 2023년 9월에는 82%로 줄었다. 2024년에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거의 30%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쟁에 대한 피로도 강제동원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들이 작용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젤렌스키에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는 잘루즈니 영국 대사나 기타 유력 후보들에게 대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이들에게 러시아 군에 대한 반격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그들의 대국민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차상의 시나리오이다. 둘 중의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라다 의회의 법 개정도 필요없이 계속 계엄령 연장으로 대통령을 선거 없이 해먹을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일찌기 전쟁이 끝난 뒤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최상과 차상, 두 가지 방책 모두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잘루즈니 영국 대사는 지금까지 대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표시한 적이 없고, 미국이 밀어주는 키릴 부다노프 또한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없다. 다만 전임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만이 대선 출마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게 우크라이나 정계의 현실이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대선 후보급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잘루즈니가 총참모장 시절 자신의 부관인 겐나디 챠스챠코프(Геннадий Частяков) 소령이 생일 선물로 받은 선물 가방이나 선물 중 하나를 열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폭발 장치가 터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부관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테러 공격의 희생자였고 그것이 젤렌스키일 것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젤렌스키의 무언의 경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속한 야당 '유로연대'는 대놓고 당시 부관의 죽음을 젤렌스키-잘루즈니 갈등과 연계시키는 주장을 폈다.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총참모장의 최측근 부관이 매우 이상하게 폭사한 것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총참모장 사이의 갈등을 크게 확산시켰다.현재 우크라이나 정계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행정부와 군이 조금씩 균열되어 가는 분위기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고 있다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스트라나.ua 기자도 비슷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다 한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군 장성들이 젤렌스키에 대한 반발로 2년 전, 러시아의 프리고진처럼 언제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키예프로 군을 이끌고 진격할지 모른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군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키예프를 지키고 있는 군대는 젤렌스키와 라다를 호위하는 수도 경비 병력이 최소 정도 밖에 없다. 듣기로는 많아야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다. 대부분의 주력군들이 러시아와의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젤렌스키가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키예프는 최소 병력 정도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키예프 분위기는 지금 당장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국내 언론은 잠잠하다.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네이버 메인에 올라오지도 않고 있다. 젤렌스키가 이 급박한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군 수뇌부들과 대선 후보로 여겨자는 인사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군 수뇌부들이 언제 마음이 돌변해 키예프로 전차를 돌릴지, 알 수 없지만 쿠데타의 가능성은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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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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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 일본의 대만 지배에 있어 대만 초대 총독은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그는 가고시마 출신이다.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갑오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현역 해군대장으로서 대만 총독을 맡아 군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타이베이 부임한해 만인 1896년 본국 마쓰가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귀임하게 된다. 가쓰라 타로(桂太郎)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야마구치 하기죠 출신으로 육군을 대표하는 죠슈벌(長州伐)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총독 제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지 불과 넉 달 만에 육군 차관으로 본국에 귀환한 그는 1898년에는 다시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 뒤로도 출세가도를 타고 총리대신을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총리대신 재임 중의 일이다. 다음으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갑오전쟁 당시 여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그는 육군 중장이라는 현역의 신분으로 1년 6개월 동안 대만 총독을 지내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총독에서 물러난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메이지 천황이 운명하자 부인과 함께 천황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도 야마구치 태생의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것은 물론 육군 참모본부 국장과 육군대학 교장을 지내면서 가쓰라 타로에 이어 일본군에 독일식 전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타이베이에 부임하자마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 규칙을 마련해 본격적인 토지 징탈을 시작하게 된다. 동양토지회사도 이 때 설립 되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재배되었던 쌀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실려 나가기 시작했으며 때를 같이 하여 지룽(基隆), 가오슝(高雄) 등 항구의 축항공사도 시작되었다. 북쪽의 타이베이와 남쪽 항구도시인 타이난을 잇는 종단철도가 완공된 것도 그의 재임 때였다. 이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직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고다마 총독은 특히 민정장관에 고토 신페이를 임명함으로써 철저한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그 뒤 만철 총재, 내무대신, 외무대신, 도쿄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 정계를 픙미했던 주인공이 고토였다. 제5대 총독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도 야마구치 태생의 죠슈번 계보에 속한다. 일본 정계와 군벌에서 “죠슈와 사쓰마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빈정거림이 들려올 만큼 죠슈벌과 사쓰마벌이 요직을 두루 나눠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역대 군벌출신 중에서도 도쿄 위수총독이라는 흔하지 않은 경력을 지녔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을 때 그 결과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대시위가 일어나자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의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총독으로서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재임 기간이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리산의 울울창창한 열대 삼림에 대한 본격 채벌이 시작된 것이 사쿠마 총독 때의 일이다. 현재 타이베이에 남아 있는 총독부 청사도 이 때에 비로소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총독을 거쳐 제7대 총독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조선총독부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일전쟁 직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공사관에 육군무관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이상이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가 문관통치로 바뀌기 전의 총독들이다. 일본 식민지 정책의 큰 흐름은 조선이나 대만에나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했다. 그리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실력 양성 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인 중 일본에 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85%, 비호감을 표시한 비율은 10%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중화권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대만인들에게 있어 일본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로 조사되었다. 이전인 2017년 조사에서조차도 호감 83%, 비호감 12%에서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외성인들 차원에서 볼 때, 일본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낮은 편인데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였으며, 난징 대학살 사건 등 사람이 대량 학살당하고 매번 패전하여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 대만은 중일전쟁을 치룬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직속 후신이며 본성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만이 일본에 아무리 우호적이라 해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피해국이라는 행태에 동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선을 긋고 있다. 다만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국민당 리덩후이 정권 시절과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정권은 좀 더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긴 했다. 특히 리덩후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여 해서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하여 대만 국내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71년 UN 상임이사국을 중공으로 교체하고 대만을 축출하는 안에 대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수의 자유 진영 국가들도 대만을 배신하고 중공 편에 서주는 와중에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만의 UN 탈퇴 후에는 일본은 중공과 수교를 맺었으며 이 중일수교 직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대만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베 신조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대만과 일본 양국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베 총리가 직접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였다.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던 일본에 물자 지원을 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 성금 약 200억 엔을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 정부의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 2010년대 기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만은 사실 여부를 떠나 태국,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타이베이 쑹산 초등학교 앞에 가면 '도호쿠 구호 감사 겸 쯔위궁 350주년 축하 시계탑'이 존재하고 있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대한 견제에 정치, 외교적으로 이용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국 포위망에 한 축을 구축했었다. 2018년 2월,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중국의 시진핑이 화해의 제스처로 구조대를 보내려 했는데 대만은 그것을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구조대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은 대만에 위로를 보내는 친필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2024년 12월에는 일본과 대만이 대만 유사시를 염두에 두고 대만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 정보 공유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2025년 2월 17일, 일본 정부가 호적에 대만을 표기하는 것을 5월부터 허용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라고 오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발표했다. 다카이치는 대만 유사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놓고 정면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存立危機事態)'는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위협받을 권리가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자위대가 출동하여 무력행사 가능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역대 근현대사에서 중국은 일본을 이긴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청나라 말기의 혼란, 그리고 청나라가 붕괴되고 군벌 분열시대와 이념 분열시대에 휩쓸린 중국이 통일되고 부유하며 안정적인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중국은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나라이고, 전쟁 무기들을 물량으로 계속 찍어내고 있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인 러시아도 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중국은 굳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 압박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중국의 원자재, 특히 희토류의 주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 중국 희토류 수출 통제에 큰 타격을 받은 후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도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일본의 중국 선원 나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바 있는데 일본은 불과 3일만에 항복한 바 있다. 게다가 주 원료가 문제가 아니라 가공과 정제가 문제다. 이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예민한 문제를, 대만을 건드리면 집단 자위권을 발휘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이고,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위험한 문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중국 원자재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일본의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고 있다. 제2 도련선이 무너져도 관망만 했던 일본의 자위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하겠다고의 발표는 일본의 군, 경제의 모든 것을 걸고 중국과 대적하겠다는 것인데 이제와서 그와 같은 발언은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일본 단독으로 중국과 소위 "맞짱" 뜨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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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만 지배기로부터 이어온 관계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정면 도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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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8년 동안 대공의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발생한다. 원래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Yaropolk I)가 즉위하기는 했지만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가 반발하여 키예프를 침략한다. 여기에 막내인 노브고로드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합류함으로써 키예프를 두고 세 형제가 공방전을 벌인다. 실제 키예프 공국의 목적은 지난 1세기 동안의 전쟁 후에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란의 발생과 더불어 비잔틴 제국이 이를 이용하여 차남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Oleg Drevlyans)를 지원함으로 인해 키예프 공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콘스탄티노플 정교회를 통해 키예프 공국을 서서히 흡수했고 위성 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이어 새로운 키예프 교회의 수장을 파견했고 그들은 그리스어로 설교하는 비잔틴 사제들이었다. 이에 대해 야로포르크 1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975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신을 보내 키예프 공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한편 키예프 교회에 자주성을 부여하는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키예프를 전복시킬 목적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1세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야로포르크 1세는 기독교를 단절해버렸다. 비잔틴 제국은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조종하여 야로포르크 1세를 비난했고 이어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군을 진주시키자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 1세는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의 군대를 교전 끝에 패주시켰다. 형을 추격한 블라디미르 1세는 결국 형인 올레그 드레블리얀스를 살해했고 형의 남은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를 포위하여 장남인 야로포르크 1세를 고립시켰다. 이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과 함께 115개의 질문을 보내어 서방 교회의 예식으로 기독교를 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블라디미르 1세의 목적은 비잔틴 제국과 로마 카톨릭의 간섭을 막기 위해 키예프 교회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립 속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자세한 질문이 두 주교에 의해 전해졌고 그 주교들은 슬라브 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심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역시 독립적인 키예프 교회를 거부하였고 이는 양측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1세의 로마를 향한 움직임은 비잔틴 제국을 좀 더 유화적으로 만들어 978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결정 하에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로 인정받았다. 이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분열된 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회였다. 이러한 가운데 979년 마침내 키예프가 함락되었고 야로포르크 1세는 폐위되었다. 이후 야로포르크 1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고 이러한 야로포르크 1세의 이야기는 후일 기독교 문학에 사용되었다. 980년 키예프에 입성하여 대공의 직위를 승계한 블라디미르 1세는 부친인 스비아토슬라프의 업적을 계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 1세는 8년 동안 정쟁으로 인하여 생긴 슬라브 부족들과 제휴하고 각 부족들의 통치권을 총독에게 이양시켰다. 블라디미르 1세는 스비아토슬라프와는 달리 내치의 안정을 먼저 시도했고 이를 통해 동부 슬라브 인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대공에 승계하자마자 외부와의 전쟁을 시작했던 군주라면 블라디미르 1세는 내부의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군주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시대를 거치며 키예프 공국은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도 비견할 만한 위세를 갖추면서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블라디미르 1세는 러시아 민요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현재 화폐 1 그리브나의 모델로 발탁되었을 정도로 동슬라브 권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1세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아내를 7명, 첩을 800명이나 두었으며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 통합하는 일에는 광적일 정도의 군인이며 행정가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먼저 8년간의 내란 동안 심각하게 추락한 키예프 대공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986년 군사 원정에 나서 서쪽으로 폴란드를 공격했다. 8년간의 혼란으로 인하여 폴란드에게 함락되었던 갈리치(Galichi)를 탈환했고 987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여 리투아니아 왕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는 스웨덴 왕국의 구원군 함께 키예프 군을 방어했으나 키예프의 강력한 기마 전사들로 인하여 두 동맹군은 거의 전멸되었고 블라디미르 1세는 발트 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키예프는 발트 해와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대초원 깊이 들어와 있던 페체네그 인을 공격하여 벨라루스 초원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 인하여 페체네그는 발칸으로 남하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988년에는 폴란드 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리보프(Liviw) 외곽으로 몰아낸 다음 그 경계에 방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했다. 이어 발칸으로 진출하여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제국의 황녀와 결혼을 제의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를 받아들여 비잔틴 제국의 황녀와 결혼했고 지속적인 교역 및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불가리아 · 로마 교황 등과의 교류도 넓혀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이로 인하여 언어와 문자의 보급에도 힘쓰고 그리스 문헌도 도입하여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슬라브는 이념적 통일성을 갖게 되고 대공과 공후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봉건제가 촉진되며 비잔틴 제국 및 유럽 세계와 가까워져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슬라브 인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전통 샤머니즘 신앙에 젖어 있던 키예프 공국은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고 키예프 공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 1세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교를 숭상하고 있는 하자르 인이 블라디미르를 찾아와서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이에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가?” 그러자 하자르인 사절들은 이렇게 답하였다. “야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노하시어 그 죗값으로 우리를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죄로 인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찾을 수 없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 인이 왔다. 불가르 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 라고 말하며 평소 호색적인 블라디미르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슬라브 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제국의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할머니인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했다. 독일에 찾아간 사절들은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왔다. 사신은 블라디미르에게 한 보고에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 라고 말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가 관할하는 정교를 선택했다 한다. <러시아연대기>에 담긴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전래에 대한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 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존치했던 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공국은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키예프 공국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와 많은 부분에서 떨어져 있는 관계로 동양과의 여러 교류를 모색하기보다는 유럽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 세계는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면서 키예프 공국이 사실상 동방 정교의 종주국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 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정교회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기존의 호색 적이고 절대자로써 생활을 벗어나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블라디미르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으며 동방 샤머니즘의 토템들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들을 세웠다. 후일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슬라브 부족들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동방 샤머니즘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긴 했으나 정교회가 민간신앙 요소들을 대거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한편 슬라브 부족들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다소 투박한 동양 샤머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는 또 슬라브 부족장들에게 정착민의 세계로 소속되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정교회 성당인 동정녀 마리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키예프 공국이 지배하던 영토 곳곳에 많은 성당이 들어섰다. 키예프 공국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이른바 동방 샤머니즘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법률의 역할도 이루어졌다. 또한 키릴 문자의 보급과 더불어 근대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동방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제국,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키예프 공국에는 비잔틴 제국의 문화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 입각하여 성상 숭배에 관한 여러 성물들이 들어왔다. 발칸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마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키예프 공국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유입되어 급속도로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보고로드, 두 곳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Pecherski)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Uspenski) 성당과 드미트리(Dmitri)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Neli) 강변의 포크로프(Pokrov) 성당도 이 때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제국 양식의 프레스코 화와 모자이크 화 부조로 만들어진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고 비잔틴 제국이 쇠퇴한 뒤 동방 국가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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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와 러시아에 정교회가 자리잡은 배경과 러시아의 현군(賢軍) 블라디미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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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 터키 차낙칼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심취해있었던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많은 연구 끝에 발굴에 성공한 곳이다. 그곳은 바로 트로이 유적..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트로이 전쟁의 무대이다. 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리스의 신들이 이 전쟁의 승자에 대해 내기를 걸었을 정도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기록상 10년여 지속되었다고 한다. 정황은 트로이 파리스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부인인 헬레네를 유괴하여 트로이로 돌아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그리스는 동맹을 맺어 트로이를 공격했고 그리스 동맹군은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를 중심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트로이는 영웅인 핵토르 왕자를 중심으로 그리스 세계와 맞섰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스의 불화가 불거진 사이 트로이는 아시아 지역의 동맹군 파견을 요청하게 되고 이 전쟁은 결국 장기전으로 가면서 아시아 유목민족들도 참전하는 전쟁 양상으로 변해갔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군에게 기만술을 사용한 그리스가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유럽을 대표하는 그리스 세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트로이와의 국제전으로 두 세계의 진정한 패자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 폴리스 세계가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그리스와 맞대결을 펼친 트로이는 어떤 국가였을까? 인터넷 기록을 찾아보면 트로이의 건설은 B.C 4,000년기 말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B.C 4,000년 말의 지층 및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다. 현재 나타난 기층은 B.C 3,000년 경으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이 도시를 발굴했을 시기인 1870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연대 측정 자체가 없었을 때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참조하여 그 연대를 추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도시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보다 후대의 것인 B.C 700년대의 유적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대 측정은 1985년에 진행했고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추정했던 B.C 3~4,000년 연대의 성벽 및 유적, 유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했던 B.C 700년경부터 트로이의 진짜 역사라는 셈이다. 이 시기에 트로이 전쟁이 발생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흔히 트로이 발견 과정을 두고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라는 상인이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다.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신화는 신화적인 관점으로 봐야하고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Hisarlık Tepesi)을 답사한 이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 때 슐레이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게 되면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 다닌 것이 맞다. 물론 슐레이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레이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슐레이만이 히사를리크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학설을 들은 이후였다. 그 동안 널리 알려져 있던 슐레이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리크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레이만 본인이 언급하면서 일리아드의 시가 진실인양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슐레이만은 유적 발굴 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 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트로이 발굴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드러난 사건도 비일비재 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면서도 히사를리크 일대를 발굴한 것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굴의 이면에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사기 행위도 분명 존재했다. 고고학적으로 트로이라는 도시의 존재와 트로이 전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졌지만 후세에 와서는 신빙성 없는 신화로 치부됐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서북부 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인 사실일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1930년대에는 미국인 블레겐이 보다 정밀한 작업을 통해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대로 여겨지는 지층과 유적을 발굴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학자가 트로이 유적 발굴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한 상태다. 트로이에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나 핵토르 같은 영웅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등은 더욱 알기 어렵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썼을 때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미 500년이나 지난 뒤였다. 따라서 호메로스 이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화적인 상상력이 덧씌워져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돈다. 시각장애인에 문맹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리스가 목마에 병사들을 숨겨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전설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일리아드'에는 없고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전한 것이다. 일부에선 그리스와 10년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치른 트로이인들이 그렇게 부주의했을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도 터키 차낙칼레와 히사를릭 언덕에는 아직 트로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유적을 두고, 신화적인 부분을 부풀려 역사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터키는 트로이보다 역사가 더 오래되고, 실제 역사가 증명된 유적들이 많다. 그럼에도 신화적인 요소인 트로이를 실제 역사처럼 만들고, 홍보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상품성"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보다는 오로지 "상품성"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있는 역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없애는데 골몰하는 자들이 많다.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사기성 넘치게 역사를 상품화 해도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러란 말이냐?" 라는 같잖은 정직함과 정의감, 그러면서 자신들은 옳고 정의로운 일을 했다는 같잖은 소신으로 뭉친 부류들이 많다. 그런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지난 역사가 부끄러우니 이걸 지적하고 비난하며 그 때부터 이어온 노예사관을 가진 한국인들이라 그런 역사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대로 인해 생긴 노예사관, 노예근성은 당연히 벗어던져야 하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당시 중국에 머리 숙이며 사대했던 국가가 대한민국 뿐이었나? 주변 베트남, 태국, 미얀마, 대만, 오키나와 (류큐국), 일본, 여진족까지 중국에 사대했고, 사사건건 중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몽골의 각 민족들도 중국에 머리를 조아릴 때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연호를 쓰고 책봉을 받았으며, 중국식 달력을 이용하고 사상을 배웠다. 그게 그 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다. 일본 또한 그 질서에 속한 국가였다.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는가? 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받으러 가는 일본 사신들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교류하기 전에는 역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국 만의 잘못인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듯이 당시 동아시아에 속한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갔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대 세계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과거에 동아시아가 중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따라가는 것은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노예근성이고,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에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칭 보수 우파들도 똑같은 노예근성에 있다. 과거 조선 시대 역사라 할지라도 없애는 것에 골몰하지 말고 이런 것은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일본 또한 신사에서 제를 올리고 있고, 전통을 중요시하여 새해마다 마쯔리 축제를 하며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새해 다짐을 한다. 그런데 야스쿠니 제외하고 그걸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건 일본을 부러워 하고 배우라면서 이런 전통 수호는 왜 배우라고 권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적 보수이자 미국과 일본을 떠받들며 당신들의 생명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어줍잖은 선택적 보수인 당신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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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남아 있는 트로이 유적, 역사적 진실과 상관없는 "상품성", 반면 대한민국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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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선구자, 솔론의 금권개혁
- 솔론은 엑세케스티데스(Eksecestides)라는 인물의 아들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는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Codros)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에 의하면 솔론은 플라톤과 같은 가문 사람으로, 플라톤의 경우, 모계 측인 동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전설에 대해 솔론이 이집트 신관들과 대화한 내용들을 두고 이 내용이 집안에 전승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고향은 살라미스(Salamis)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신뢰되는 설은 아니다. 나중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고 참주에 등극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는 이종사촌 지간에 동성애 관계였다는 설도 있는데, 이건 의외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솔론은 시인이기도 한데, 그의 시들을 접한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처음에 솔론이 취미 차원에서 시를 짓는 활동을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윤리적 목적이나 정치적 의도를 갖고 시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웬만한 저술은 대체로 운문으로 전승되거나 운문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술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당히 수준 있는 지식인으로, 주요 저술들을 외우고 다닐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저술을 만들 수도 있는 능력자였던 것이다. 솔론의 재산이 얼마나 있었는지 대해서 좀 논란이 있는데, 부자였기 때문에 사치를 부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매우 가난했다는 주장이 병존한다. 그는 적어도 중산층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중에 그가 총액이 5~15달란트에 해당하는 부채를 사적으로 탕감해주었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 대까지는 부자였다가 아버지가 지인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었기 때문에, 이 부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출전하거나 지휘한 적도 있었던 데다, 빈민파로 상정되는 산악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유산 계급이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솔론이 상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의 상업 활동이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지식인이 연구 활동을 위해 여행길에 나서거나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고, 또한 생계를 갖는 것 자체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상인이라는 직업은 외지의 다양한 풍습을 경험하고 외국의 지도층과 유대를 쌓으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다양한 실무 경험들을 쌓는 계기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나중에 그가 정치활동을 함에 있어서 상인 시절의 경력이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솔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인데, 그나마도 솔론이 죽은 뒤 100년 정도 뒤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냉철하고 비판적인 역사가였던 이들조차도 솔론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설화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의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생몰연대의 경우, 대체적으로 위의 추정치가 많이 사용되는데, 사실 저 수치는 솔론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 B.C 558년에 솔론이 80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설화를 반영하여 산정된 것이다. 그나마 사망연도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에 등극한 때로부터 2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설화에 기반한 수치로 보여 진다. 역사학자들조차도 그의 출생 및 사망연도에 대해서는 별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설화에 의존하고 있다. 솔론은 7현자의 중 한 명으로, 그 중에서도 고정적으로 뽑히는 4명의 현자 중 한 명으로 나타난다. 솔론은 최소한 탈레스와도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되는 탈레스의 서신에는 탈레스가 솔론과 공동연구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입법가 시절에는 스키타이의 현자 아나카르시스(Anacarsis)와 교분이 있었다는 전승도 있다. 그 이 외에도 말년에 솔론이 참주 정치를 피해 망명할 때 7현자의 다른 현인들이 솔론을 초대하는 편지가 남아 있다. 이러한 솔론이 활동하는 당시 아테네는 총체적 난국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와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은 농경지는 일부 지주에게 집중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심각한 경제양극화를 겪고 있었다. 평민들은 소출의 1/6을 지주에게 바쳤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토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은 많은 인구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아티카 일대는 외부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빈민층들은 크게 증가하였고, 그들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토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채무를 갚을 경제력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노예가 되거나 도주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테네는 항상 빈민들로 구성된 산악파와 귀족 지주들의 평야파, 해안파가 대립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정치적으로는 킬론(Kilon) 사건까지 발생함으로 인해 킬론의 잔당과 메가클레스(Megacles)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킬론 사건은 B.C 632년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한 킬론이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참주에 등극하려다가 실패한 뒤 메가클레스 일파에게 척살당한 일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 일파는 무리수를 두다가 중대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는데, 그들은 아테나 신전에 피신해 있었던 킬론 일파에게 복수의 여신들 신전 앞에서 재판 받으라며 설득하고는 킬론 일당이 아테나 신전에서 복수의 여신 신전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척살해버렸다. 이는 아테나 여신의 비호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의 권한을 무시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킬론의 잔당들은 메가클레스와 그의 일파를 저주받은 자들이라 비난했으며, 이는 중대한 사회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있었다. 이처럼 아테네는 농업위기로 인한 경제기반의 붕괴와 사회분열로 인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직접 민주제(直接民主制)는 대표자 없이 구성원 전체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민주주의 제도이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간접 민주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과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의 다수결원칙 아래 정치적 결정에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형태로 실시되었다. 현대에는 이 제도를 그대로 채용하는 국가가 거의 없으며, 직접 민주제를 채용하는 국가로는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아테네도 나름대로 부족한 농경지를 확보해보고자 살라미스의 경작지를 노렸다. 하지만 경제양극화는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정치적 분열은 그나마 모자랐던 역량마저 외부 세력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살라미스 섬의 주요 항구인 니사이아(Nisaia) 항이 함락되자, 아테네는 살라미스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이처럼 메가라 같은 3류 도시와도 경쟁에서 패배하자, 아테네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당시의 절망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살라미스에 대한 아테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정도였다. 솔론은 이 상황에서 정계 주요 인사로 부각되었다. 그와 같은 계기는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항쟁으로, 이 전쟁에서 솔론은 주도적 역할을 한다. 아테네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정신과 방식으로 살라미스 분쟁의 재개를 주장하면 갑자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어서인지, 솔론은 정신병에 걸린 척 하고 그 길이가 100행에 달한다는 시를 낭송하여 대중들을 선동한 뒤,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전쟁을 재개한다. 이에 대한 일설에 따르면 이 당시부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지지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결집한 뒤 솔론을 보좌했다고 한다. 솔론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로 인해 아테네는 자신감을 회복한다. 물론 전투의 방식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아마도 별동대를 이용한 후방 급습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솔론이 거둔 승리로도 살라미스의 영유권은 확고하게 확정된 것은 아니었기에 영유권 분쟁은 스파르타의 중재를 받아 협상에 들어갔다. 이 협상에서 아테네의 영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문헌학적, 문화학적 근거를 총동원한다. 먼저 문헌학적 근거로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인용한다. 그 내용은 일리아스의 사열식 장면 묘사에서 살라미스의 왕 아이아스(Ayas)가 아테네 함선 옆에 진영을 구축했다는 것이었다. 솔론은 당대 최고의 호메로스 전문가로 통했기 때문에, 메가라에서는 크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학적인 근거로 솔론이 들고 나온 근거는 살라미스 섬 선주민들의 매장 관습과 아티카 일대의 매장 관습이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메가라 일대의 관습이 시체의 얼굴을 서쪽을 향하여 매장하는 것인 반면, 살라미스와 아티카의 매장 관습은 시체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게 하여 매장한다고 주장했다. 메가라도 여기에는 반론을 제기하여, 아테네는 개인별로 따로 매장하지만 메가라와 살라미스는 일족끼리 같이 매장하는 관습이 있다고 반론한다. 이에 솔론은 살라미스는 이오네스 족의 땅이라는 신탁의 지지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마무리 지을 때까지 장기전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테네가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처럼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에서 아테네의 승기를 이끌어 낸 일로 인해 솔론은 아테네에서 주요 명사가 되었다. 시기상의 순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 다음으로 킬론 사건의 사후처리를 중재한 것으로 보인다. 킬론 사건으로 인한 분쟁은 B.C 600년 솔론의 중재로 인해 종식되었다. 솔론은 공식 재판을 열 것을 제안하였으며, 그 결과 메가클레스 일파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일련의 개혁과 동시에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이후 종교 개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아테네 종교 문화는 다소 폭력적이거나 폭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솔론은 이를 파이스토스(Paystos)의 에피니데스(Epinides)의 협조로 종교 제도를 재정비했다. 이후 직접 군을 통솔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솔론은 B.C 595년 델포이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키르라(Kyrla)의 행위를 비난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폴리스들, 특히 암피크티오니아(Ampyktionia) 동맹의 공동적인 대응을 이끌어냈다. 폴리스들은 솔론의 요청에 따라 연합군을 구성하여 키르라를 정벌하고 델포이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당시 솔론은 붕괴되어가는 아테네의 전세를 승세로 이끈 전쟁 영웅에다가 30년을 이어온 국내 분쟁을 종식시키고, 외교적 영향력마저 과시하였다. 그러한 솔론이 국내 모든 계층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솔론은 이미 국내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이 솔론이라면 당시 사회적 문제의 배경이자 핵심이었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 제도를 혁신해 줄 것이라 기대하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제 솔론은 가계 부채 해소와 토지의 편중 현상의 해결, 그리고 정치 제도의 혁신을 요구 받게 되었다. 당시 모든 계층은 솔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론의 출신과 직업, 언행은 당대 모든 세력이 솔론만큼은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할 만했기 때문이다. 지주 및 귀족 계층에게 솔론은 아테네 최후의 왕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였고, 신흥 상인 계층에게는 자신들과 같은 동업자였다. 그런가 하면 빈민층에게 그는 다른 귀족이나 지주, 상인들처럼 자신들을 착취하거나 거짓과 사기를 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에, 빈민층의 참상에 대한 공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하다는 듯이 솔론은 B.C 594년 아테네의 집정관인 아르콘(Arcon)에 선출되었다. 그가 집정관에 마지못해 취임했다는 설도 존재하고 있지만, 그는 취임하면서 평등은 분쟁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웅변을 했고, 그 결과 부유층과 빈민층 모두가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는 부유층은 자질과 능력에 기반 한 평등을, 빈민층은 수와 양에 기반 한 평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솔론은 모든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르콘에 취임했고, 그 결과 그의 아르콘 취임 시 참주에 등극할 것을 제의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유명한 솔론의 개혁이 솔론의 아르콘 취임 이후의 일인지, 아니면 이미 취임 전부터 어느 정도 시작하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아르콘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솔론이 추진한 개혁이 정확히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에 솔론 이후의 아테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솔론이 세운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여러 법안의 성과를 모두 솔론의 업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확실하게 솔론이 만든 것이라 볼 만한 정책을 뽑아 보자면,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는 뜻으로 세이사크테이아(Seisactaia)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부채 탕감 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현존하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이후 사람 신체를 담보로 한 대출을 금지시켰다. 부채의 대상에는 당시 담보로 압류당한 농경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외에 부채로 인해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시민들을 모조리 해방시켰다. 여기에는 다른 학설이 있는데,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하는 가설에 의하면 통화개혁을 통해 의도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여 빈민층이 실물로 부채를 갚기 편하게 만들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솔론이 국내 모든 부채를 탕감한 것은 사실로 보여 졌기 때문에 이에 무거운 짐 덜어주기 자체가 통화 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 정책 역시 병행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일단 솔론의 무거운 짐 덜어주기 정책은 시행되긴 했지만 모든 진영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나중에 플루타르코스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솔론의 유능함의 덕택이라 말할 정도였다. 일단 지주 및 귀족 계층은 자신들의 채권이 사라져서 불만이었다. 게다가 전해지는 기록들에 의하면, 솔론의 친구들이 이 정책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솔론 본인이 개인적으로 총액만 최소 5달란트에서 최대 15달란트로 추정되는 막대한 양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어느 정도의 반발은 사라졌다. 다른 한 편으로 빈민층은 토지 재분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의 정책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 스파르타처럼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를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빈민층은 아직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빈민층은 다시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리기 시작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토지를 재분배하던가, 아니면 다른 방책을 고안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솔론의 해결책은 전반적인 산업 구조 전체의 변혁이었다. 일단 솔론은 농업 생산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법적 규제들을 제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당시 아티카 일대는 토양이 척박하여 농경보다는 목축이 어울릴 정도였고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솔론은 올리브를 비롯한 작물들의 재배거리에 대한 규제들을 시행하여 농경지의 피로 도를 관리하고, 우물의 설치 및 활용에 대한 관련 규정들을 만들어 부족한 수자원의 효율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티카에 유입된 다수의 인구를 부양할 식량을 생산하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그러자 솔론은 부족한 식량은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역상들은 영리업자이지 자선가가 아니기 때문에 구매력 없는 빈민층을 위해 식량을 수입할 리 없다는 것은 솔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솔론은 올리브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우선 솔론은 올리브 외의 농산품 수출을 규제하여 부족한 식량의 해외 유출을 방지한다. 결국 잉여 농산물은 팔리든 안 팔리든 어떤 식으로든 국내에서 소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지주들이 수익을 얻기 위해 주요 작물을 올리브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올리브는 보통 올리브유로 가공하여 판매되었다. 따라서 아티카의 주력 산업이 올리브 재배가 되자, 아테네에는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는 인부를 비롯하여, 거기에 쓰이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공, 올리브유를 담는 도기를 만드는 도공 등의 수요가 급증한다. 솔론은 모든 시민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여 빈민층이 이러한 산업에 종사하여 얻은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했다. 그 결과 지중해 세계에서 상당히 후진적이었던 아테네 도자기 수준은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일설에 의하면 아티카 인구의 1/4가량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아테네의 도자기 또한 아테네의 주력 수출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솔론은 이민에 관련한 규정을 정해서, 자국에서 영구 추방된 자나 가족과 함께 생업을 하러 오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이주를 허용했다. 아테네의 산업 구조를 완전히 개혁한 솔론은 출신이 아닌 경제적 수준에 따라 정부 기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차등을 부여한다. 이러한 솔론의 정치 제도 개혁은 후세에 금권 정치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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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선구자, 솔론의 금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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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르코지, 친러였기에 미운 털이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 프랑스 파리 형사법원이 9월 25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민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중대한 범죄’라고 적시하며 집행정지 없는 즉시 집행(Exécution provisoire)을 명했다. 그리고 10월 31일에 그는 수감됐다. 혐의는 2007년 대선에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불법 자금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18년 전의 사건을 이제 와서 유죄 판결 내린다는 것은 마린 르펜에 이은 정치 탄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올해 3월 프랑스 법원은 공금 횡령 혐의로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5년간 피선거권 박탈도 명령했다. 현재 프랑스의 야당은 정부의 긴축 예산안과 재정 적자 및 빈곤율 급증 등 사회경제적 위기를 이유로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프랑스 하원에 제출했다. 프랑스 국가 부채는 5,000조 원에 달한다. 나라 경제가 파탄 위기이기 때문에 마크롱의 입장에서 최대 정치적 위기에 몰린 셈이다. 마크롱은 이같은 정치적 위기를 유력한 야당 후보들과 전직 대통령에게 돌리며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내부적인 그와 같은 마크롱의 상황과 사르코지의 친러적인 성향이 맞물린 것으로 본다. 18년이나 지난 캐캐묵은 사건을 가지고 이제 와서 기소한 것은 마린 르펜에 이어 다른 유력한 인물 하나를 희생시켜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다. 사르코지는 집권 시절, 여러 말이 많이 나올 정도로 정치가로써 실격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우선 2013년 프랑스 검찰은 사르코지를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대통령 선거 전에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의 릴리안 베탕쿠르로부터 정치자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이어 2014년 질베르 아지베르 당시 대법관에게 자신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 수사와 관련한 내부 기밀을 제공하는 대가로 모나코에서 퇴임 후 일자리를 약속한 혐의를 받아 집행유예 2년을 포함해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어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법 선거 자금을 조성한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에게도 500만 유로를 받은 혐의로 조사 중이었지만 이제야 해당 혐의가 적용돼 구속됐다. 게다가 여자관계가 매우 문란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던 2008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거부했다. 그러며서 미스트랄급 강습 상륙함을 러시아에 수출하려고 했으며 탈레스 회사 등의 프랑스의 방산 기업이 러시아 전차 부대를 현대화 시키는 것을 승인했다. 이어 프랑스제 열상 등의 핵심 기술을 이전하는 것도 승인했으며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 중재 역할을 자처하는 등의 선명한 친러 행보를 보여왔다. 2015년 10월 29일에는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고립을 중단하고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와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20년 사르코지는 러시아에서 정책고문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푸틴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맹우로 지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사르코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실제로 젤렌스키도 메르켈과 함께 사르코지의 이름을 언급하며 부차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우선 사르코지 자신이 주장했던 것이 현재 이 순간에도 옳다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부차 현장에 가지 않겠다고 발언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메르켈과 다르게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는 중이다. 당시 대선 정치 자금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추가 조사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도 보지만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어떻게 했는지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로 인해 러시아와 친하게 지낸 것 이후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메르켈과 다르게 사르코지에 대한 비난은 크게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푸틴 대통령을 두둔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EU 가입에 다시금 반대하면서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있으며 국제 사회의 감시 아래 국민투표를 실시해 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르코지는 여전히 친러 성향을 숨기지 않으며 러시아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크라이나와 프랑스 내에서 비판이 쏟아졌지만 사르코지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후 사르코지는 우크라이나에 지속적으로 지원하려는 마크롱을 비난했으며 최근 마크롱이 위기에 몰리자 이와 같은 비난의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마크롱은 18년이나 묵혀 놨던 카다피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사건을 터트리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르코지는 부패한 인물인 것, 카다피를 배신하고 리비아를 폭격해 카다피를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인물은 맞다. 그가 잘한 것은 친러 관계를 유지하여 유럽에 전운을 드리우지 않게 했다는 것이고, 프랑스의 경제 상황이 워낙 엉망이었기에 긴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가 카다피에게 받은 자금으로 인해 감옥에 있지만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한 비리를 캔다면서 이를 활용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보여 진다. 결국 마린 르펜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출소할 때 되면 러시아 게이트를 터뜨려 그와 관련 비리를 캔다면서 추가 조사를 하여 어떻게든 혐의 입증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결국 마크롱은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야당 인사들을 계속 희생 제물로 삼을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독재 아니던가? 마크롱은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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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르코지, 친러였기에 미운 털이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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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 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은 쁠랙 피분 송크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새로운 태국의 독재자가 된 인물이다. 다만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독재를 했었기 때문에 태국 현대사에서 잠시 거쳐 갔던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릿 타나랏은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 왕실 편년사(Cambodia Royal Chronicle)>의 번역 작가로도 유명한 라완 루안디트아난(Rawan Ruanditanan) 소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부터 7세까지 모친의 집안이 있던 무크다한(Mukhdahan)에서 자랐고 7세에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출라촙크라오(Chulachobkrao)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군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다, 쁠랙 피분 송크람에게 발탁되었고 1949년 일어난 이른바 “왕궁 반란 사건(The Palace Rebellion)” 당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송크람 정권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방어한 것을 기반으로 타나랏은 송크람의 신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그리고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이유 아래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키워갔다. 그러나 1957년 치러진 태국 총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발생하자 타나랏은 송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9월 18일 수많은 쿠데타들이 이미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내 성공하게 된다. 1958년 타나랏의 쿠데타를 가져온 일련의 정치적 대립은 국제 사회에서 노란 두건(Yellow Bandana와 붉은 두건(Red Bandana)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치적 대립은 길게는 1957~1958년 사이에 발생한 동남아시아 대규모의 경제위기, 보다 짧게는 1947년에 있었던 태국의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시초였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본다면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로 등장한 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권력을 둘러싼 근본적인 모순까지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군사 쿠데타들에서 보여주었던 태국 쿠데타의 특징들, 이념, 정책, 사회적 근본 모순에 관해 쿠데타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차원의 쿠데타라는 특징과 더불어 타나랏의 쿠데타는 좀 이전 4차례의 쿠데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전 쿠데타인 1947년 피분 송크람의 군사 쿠데타는 프랑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편을 들었다가 미국의 폭격을 받아 자진 사임한 이후, 3년 만에 발생한 쿠데타였다. 송크람은 1932~1944년 대공황으로 인한 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등장했고 이후 태국 정치사에서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반을 형성했었다. 한 군부 집단이 과반 의석을 독점한 것은 송크람의 쿠데타로 인한 의회의 탄생, 국왕의 절대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이양, 군부가 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수코타이 왕조 이후부터 시작된 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송크람의 통치는 늘 권위주의, 독단적 국가 운영, 인권 문제, 그리고 지나친 복지 위주의 민중에 대한 선심성 논란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비난들과 송크람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은 왕과 이를 둘러싼 전통 권력 상류층들, 고위 관료, 군, 그리고 송크람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국가 운영에 반대한 지식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을 압축한 것이 송크람을 축출한 1944년에 발생한 쿠데타이다. 이에 대해 송크람의 집권 시기 많은 혜택을 받은 친(親) 송크람 세력, 농민, 도시 빈민 등 송크람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왕과 친(親) 국왕 세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에 대한 반대로 붉은 색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붉은 두건과 노란 두건의 대립이 시작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붉은 두건은 친 송크람파, 노란 셔츠는 친 국왕파를 상징하고 있다. 일부 분석들은 친 송크람과 반 송크람을 단순히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 모순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친송크람파의 일부는 태국 내 공화주의 세력이다. 다시 말해 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력이 친 송크람파에 가담한 데는 송크람의 집권 시기 그가 보여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있다. 태국에서 국왕은 절대적 존재다. 당시 라마 7세, 라마 8세 국왕은 한 때 국민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았었다. 국민을 위해 국왕이 많은 자선사업과 시혜를 베푼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젊은 시절 라마 7세와 라마 8세는 1년의 1/3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개선 문제를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챙겼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매우 강력했다. 과거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라도 최종적으로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그대로 권력을 내려놓고 망명한 일례도 있다. 중요한 정치적 위기 시 사태를 정리한 것은 언제나 국왕이었다. 현재 일반 국민 사이에 국왕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에는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58년 라마 9세는 31세의 젊은 나이였고 1946년에 즉위한 이래로 12년째 통치 중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건강이 거의 좋지 못해 와병 중이었다. 그리고 피분 송크람과 사릿 타나랏으로 인해 정치적 권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군사 쿠데타 문제는 시민들이 보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릿 타나랏은 몇 명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현재 그의 자손들은 거의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그의 수상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던 솜차이 타나랏(Somchai Thanarat)은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보여준 행적으로 인해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의 태국 시민들은 이와 같은 차기 수상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추문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나랏의 후계자로 떠오른 국방장관 타놈 끼띠카쫀(Thanom Kittikachorn)은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타나랏의 행정력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현장에 관심을 가진 타나랏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이 신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군 장성이라는 점이 이미 군사 쿠데타로 인해 어느 정도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에 수상 계승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권력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과 군부 역시 솜차이 파와 타놈 파로 갈려져 있는 상태다. 정국의 혼란, 국왕의 잦은 와병에 수상의 승계 구도 문제까지 맞물려 수상의 권위와 수상에 대한 신뢰가 기로에 서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입헌 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도 있다. 태국 내 공화주의자들은 1932년 입헌 군주제가 사실상 국왕과 그를 둘러싼 전통 지배 계급의 통치를 연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고 여전히 국왕과 그를 둘러싼 소수의 전통 지배 계급과 군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좌우하고 있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왕가가 태국에서 가장 부자라는 것에 이의를 재기하는 사람은 없다. 왕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로 알려졌다. 특히 <포브스>에서는 태국 왕실이 세계 왕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혀 태국 내에서 논란을 촉발시킨 바 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태국 왕실의 재산은 당시 미화로 100조 달러에서 350조 달러까지 다양한 예상들이 존재한다. 시암 시멘트, 시암은행 등 태국의 상당한 재벌급 기업들과 방콕의 주요 쇼핑몰, 최고급 호텔 가운데 왕가의 소유가 다수 있을 정도다.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왕실 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은 부동산 임대 사업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 활동에서 발생하는 왕실의 모든 수입에 대해 소득세가 면제된다. 국왕의 국민에 대한 시혜는 이와 같은 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 절대 왕정 시기 통치 세력, 왕을 보위하던 고위급 신하들과 군대가 입헌 군주제 쿠데타 이후 그대로 고위 관료로 탈바꿈 했고, 군부 역시 국왕을 보위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1932년 입헌 군주제를 위한 쿠데타는 이 관료들과 국왕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국왕은 존재하면서 상징적인 인물이고 실제 권력은 국민에게 있으며 그리고 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 받은 총리에 의해 권력이 행사 되는 입헌 군주제와 태국의 입헌 군주제는 거리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한 민간 정부는 국왕의 권력 하에서 일상적인 행정 처리만 하는 조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지난 70여 년 간 절대 신성으로 여겨졌던 국왕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들이 이어지면서 푸미폰 라마 9세의 즉위 이후, 70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태국 정부와 군은 국왕모독에 관한 국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붉은 두건 세력은 타나랏 총리와 송크람에 대한 개인적인 추종 세력들, 타나랏의 재임 시절 경제적으로 혜택을 본 빈민, 농민 계층의 경제적인 바람에 공화주의적인 운동까지 복합적으로 포괄된 세력이라 볼 수 있겠다. 반면 노란 두건 세력은 국왕과 그 주변의 전통 상류층 집단, 군대, 교육 받은 보수적 중산층,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현 민주당으로 이어 오는 민주화 요구 세력들이 이 집단을 대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1958년 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에는 1932년 이후 태국 정치의 근본 모순에서부터 개인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이익까지 다양한 정치적인 정당성들이 모두 녹아 있는 셈이다. 수적으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친 타나랏 세력은 당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해 총리 직을 박탈당한 쁠렉 피분 송크람 총리까지 1958년 9월 18일 쿠데타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집권했다. 붉은 두건을 지지하는 세력의 수적 우위로 인해 선거에서의 승리는 거의 보장되어 왔다. 반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중추, 관료제, 법원 그리고 군을 장악한 노란 두건은 선거로 구성된 친 타나랏 정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주로 자신들이 장악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총리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새로운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통제하려 시도해왔다. 1973년 10월 학생 민주화 운동 이전까지 총리가 해임되고 정부가 바뀐 것만 보면 타나랏 총리까지 합쳐서 세 번째라 볼 수 있겠다. 따라서 1958년 9월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는 친 송크람 파벌들을 이전에 발생한 부정선거 혐의로 대법원에서 자격 정지시킨 이후, 친 타나랏파를 대두시키고 송크람 계열을 더욱 무력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 경험을 놓고 볼 때 법원에서 친 송크람파 정당과 그 행정 세력들을 무력화 시키게 되지만 그래도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르면 친 타나랏파 세력들이 집권하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란 두건과 친 국왕 세력들은 이전의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보다 확실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방편으로 피분 송크람을 실각시키고 오히려 타나랏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달리 1958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친 국왕파는 선거를 회피할 수는 없어 그대로 치루었다. 이는 시민들이 주목하고 있고 국제 사회의 이목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선거를 치러 타나랏이 총리가 되었다. 이번 쿠데타 세력이 1946년 쿠데타 세력과 그 이후 법원을 통해 친 송크람파 정부를 제거했던 세력과 다른 점은 부정선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헌법과 의회의 기본 구조를 대폭 수정하여, 친 송크람 세력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을 가급적 차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쿠데타 이전부터 타나랏파는 임시 헌법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거를 통해 하원을 구성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의 근간은 바뀌지 않겠지만, 많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의석수를 늘리려 했다. 근본적인 모순과 대립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쿠데타의 세력인 타나랏 세력이 가진 숫자의 힘과 친 국왕 세력이 가진 실질적 권력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수많은 쿠데타를 야기했다. 어쩌면 당시 태국은 많은 신생독립국이 독립 직후 겪었던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 권력 구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오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 혹은 국민 국가 수립과 함께 권력을 누려왔던 국왕이나 구(舊) 세력과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세력 혹은 시민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투쟁과 갈등이 마무리 된 자리에 새로운 국가의 권력 구조와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해 일어났던 군사 쿠데타 이후 1956년에는 4번째 군사 쿠데타가 전격 단행되었다. 이 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사령관은 신문을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발표 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군사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발생한 군사 쿠데타가 맞다. 이러힌 일들이 발생한 지 이틀 만인 9월 20일에 군은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선포하고 정부 기관들을 군의 통제 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이틀 간 쿠데타 상황에서 발생한 정권을 교체하는 일들을 놓고 볼 때 후일 군사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게 되는 태국에서 쿠데타마저도 법적 절차와 의미, 그리고 제도화된 단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대개 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고 비밀리에 정권을 탈취하고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는 법적 효력이나 절차 등을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8년 9월 쿠데타에서 태국군은 사실상 국가를 장악한 기간 동안 발생된 조치에 대해 정치적인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령만을 선포한 것이지 쿠데타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간 대립하고 있는 정파 간 형식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20일 이 대화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쿠데타를 선포하여 사릿 타나랏이 정권을 장악하는 수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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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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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สฤษดิ์ ธนะรัชต์, Sarit Thanarat 1908~1963)의 쿠데타와 태국 왕실,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 하락하는 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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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 스비아토슬라프는 942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이고르 대공과 올가 대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올가 대공은 52세에 스비아토슬라브를 낳았다. 스비아토슬라프가 3세 때인 945년에 아버지 이고르 대공은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스비아토슬라브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살해한 드레블리예 부족들과 전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주변 신하들이 스비아토슬라프를 말 위에 앉히면 그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영토 방향으로 창을 던지곤 했다. 창은 당연히 말 아래로 떨어졌지만 부친을 살해했던 원수를 향한 복수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고작 4세였다. 소년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스비아토슬라프는 슬라브에서 가장 출중한 장수로 성장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강력한 전제 군주가 된 사실은 연대기 작가가 묘사한 그의 행적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막을 치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야전에서 말안장을 머리에 베고 얇은 천 조각 하나 걸치고 잘 뿐이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거의 대부분 날고기만 먹었고, 물은 냇가에서 마셨다. 그는 진정한 장수였다. 상대방과 전투를 치를 때도 절대 기습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사신을 보내 ‘한판 붙자’는 전갈을 보내고 전투를 시작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마치 표범처럼 빠르게 달렸다. 덥거나 춥거나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친인 올가 대공이 세례를 받으러 콘스탄티노플로 갔을 때 스비아토슬라프가 이를 동행했는데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설명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표현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키는 그리 크지 않은 중간이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의 인상은 강했다. 가슴은 딱 벌어져 넓었고 목은 굵었으며, 눈은 하늘색이었다. 눈썹은 진했고, 코는 평편하고 낮았다. 콧수염은 무척 길었으나 구레나룻은 거의 없었다. 머리 스타일은 변발을 하고 있었다. 변발은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진주와 루비가 달린 금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을 다녀온 직후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서부 우크라이나 슬라브 계통의 민족들과 일부 마자르 족은 스비아토슬라프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직접 서부 슬라브 인들과 마자르 족에게 가서는 거짓 평화조약을 제시하고 그들을 자신의 진중에 초대했다. 그리고 연회를 베풀어 슬라브와 마자르의 귀족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한 뒤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이어 서부 우크라이나 백성들과 마자르족에 대해서도 화해의 표시를 보내 안심시켜 놓고 공격하여 약 7,000명을 살해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전형적인 무사형 군주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는 흔히 코사크의 대장이나 바이킹 선장에 비유되고 있는데 확실히 그의 풍모와 복장 · 습관에는 초원지대의 코사크족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러시아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정을 다닐 때 그는 마차도 솥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어떤 고기도 삶아먹지 않았다. 오로지 말이나 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길쭉하게 베어내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또한 천막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다만 안장깔개를 펼쳐 깔고 안장을 머리 밑에 괴면 그만이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962년 즉위하자마자 키예프 공국을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정복하며 키예프의 국가안보를 지켜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군사 원정은 964년에 본격화 되었다. 대규모 동방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키예프의 동쪽으로 진격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동슬라브 계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핀족과 투르크 계통 민족들을 자신의 왕국으로 복속시켰다. 당시 이슬람교를 숭배하고 있던 볼가 강 유역의 볼고 불가르를 정복하고 키예프 공국보다 먼저 지난 세기에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교를 숭상하는 국가인 하자르 제국을 공격했다. ‘하자르인의 국가’라는 뜻의 하자르의 수도 이틸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스비아토슬라프는 3년 만에 키예프로 돌아와 연로한 모친인 올가와 그의 세 아들을 만나면서 잠시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965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하자르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온 동슬라브의 비아티치(Biatichy) 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오카(Oka) 강변의 마자르 계 부족들을 정복한 후, 볼가 강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 페체네그를 공략하고 우랄 강 인근까지 약탈했다. 페체네그를 제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다시 하자르 제국을 향하여 남쪽으로 진군했다. 도중에 스비아토슬라브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어 벌어진 하자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의 군사는 하자르의 군대를 격퇴했다. 하자르 제국의 수도 이틸을 다시 한 번 유린한 스비아토슬라브는 카스피 해 서쪽으로 내려가 사만다르(Samandar) 요새를 파괴하고 그곳에서 다시 서진하여 알란 인과 카프카스의 몇몇 부족을 정복한 다음 다시 돈 강 어귀에 있던 하자르 제국의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하자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만다. 스비아토슬라프의 공격으로 하자르 제국이 쇠퇴했다는 것은 키예프 공국이 지역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시아계 유목민의 침략을 막아주던 하자르 제국의 완충 역할이 종결됨으로써 키예프 공국이 직접 그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는 부정적 의미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의 동방원정으로 인하여 동슬라브 족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던 돈 강과 볼가 강 유역 전체가 키예프 공국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동방 원정을 끝낸 스비아토슬라프는 서방 원정에 착수했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서방 원정을 시작한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Pokas)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968년 제1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이웃 나라인 키예프 공국의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면 제국의 금을 보상금으로 주겠음을 제안했다. 황제의 제안을 수락한 스비아토슬라프는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해 군사적 성과를 올렸다. 제1 불가리아 제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 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다뉴브 강 유역에 진출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의 다뉴브 평원을 정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지역을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불가리아는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는 황금과 비단, 포도주와 각종 과일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는 은과 말이, 러시아로부터는 모피와 밀랍과 꿀과 노예들이 들어오는 집결지였다. 그러한 경제적인 부분에서 풍요를 직감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다뉴브 강 지역으로 수도를 천도하려고 하였다. 스비아토슬라프는 평소에도 “키예프에 남아 있기보다는 다뉴브 강에 있는 페레야슬라베츠(Pereyaslabech)에 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가 자신의 왕국인 키예프 공국의 중심이라는 말도 함께했다. 하지만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를 장기간 비워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가 키예프를 비운 사이에 아시아계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 인들이 키예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키예프로 퇴각했다. 그곳에는 연로한 어머니 올가와 어린 세 아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적인 페체네그의 침공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불가리아보다 더 위협적인 스비아토슬라프가 발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은 비잔틴 제국의 전략적인 외교의 힘이기도 했다.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전략은 2,000여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비결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페체네그를 격퇴한 후 스비아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주변에 또 다른 강대국이 부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스비아토슬라프의 키예프 공국이 다뉴브 강 유역으로 대규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제는 키예프 군대를 기습했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 산맥을 넘어 침공한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격퇴했고 이를 추격하여 발칸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몰아붙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의 수도인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 병참선이 끊길 뿐 아니라 후방 역습의 위험에 처한 스비아토슬라프는 급히 다뉴브 강으로 후퇴했고 이어 플로이에슈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스비아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협상을 제의했고 스비아토슬라프는 발칸과 크림 반도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비잔틴 제국에 굴복한 스비아토슬라프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과의 교역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으로써 키예프로 퇴각해야 했다. 6만 대군 중 비잔틴 군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여 군사만을 데리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스비아토슬라프는 페체네그 인의 기습을 받았다. 이 때 전투에서 키예프 군대는 거의 전멸되고 스비아토슬라프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승리의 환호감에 젖은 페체네그 인들이 스비아토슬라프의 머리를 베어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에 금을 씌워 술잔을 만든 후에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비아토슬라프의 용맹함과 지혜가 자신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스비아토슬라프의 사후,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스비아토슬라프가 사망한 972년부터 980년까지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공석에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대공 지위에 올랐고 이 때부터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2000년, 새 천년들어 폴란드에서 슬라브족 전체에 있어 가장 위대한 위인 100인을 선정하였는데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극도로 증오한 폴란드였지만 슬라브족 전체로 봤을 때,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남긴 슬라브족 통합과 단합의 위대함은 인정했던 것이다. 스비아토슬라프 1세는 모든 슬라브족의 영웅이자 정복군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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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슬라브족이자 러시아판 알렉산더 대왕, 슬라브족의 대영웅 스비야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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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 베링해협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베링해협은 아시아 측에는 러시아령, 북아메리카 측은 미국령이다. 이 해협의 해저 대륙붕은 깊이가 35~50m 정도로 매우 얕은 편이고, 최단거리 해협은 85km에 달한다. 바다를 기준으로 보면 베링 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북극해, 남쪽으로는 태평양 사이의 해협이다. 대륙과 대륙 사이로 놓여있지만 지질학적으로 볼 때 매우 안정된 지역이다. 판과 판의 기준으로 볼 때, 베르호얀스크 산맥 동쪽의 러시아 극동은 북아메리카와 같은 판에 속하기에 남쪽 캄차트카와 알류샨 일대와 다르다. 참고로 해당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기에 화산과 지진이 잦다. 그러나 베링 지역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벗어나 있어 매우 안정적인 지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해협의 수면 깊이가 얕으며 해수면이 가장 낮았을 시기에는 육지가 드러나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되었던 적이 있었다. 베링 해협의 이름은 러시아 해군에 고용되어 이 바다를 탐사하여 첫 발견한 덴마크의 항해사 비투스 베링의 이름을 차용했다. 베링 해협은 미국과 러시아의 경계이며 베링 해협 한 가운데에 있는 다이오메드 제도의 서쪽에 있는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 영토이고, 동쪽에 있는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미국 영토다. 참고로 그레이트 다이오메드 섬은 러시아어로 라트마노바(Ратманова)라고 불린다. 비록 두 섬 사이의 거리는 3.7km 밖에 되지 않지만, 두 섬 사이로 날짜변경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시차는 무려 21시간 차이가 나는 특이한 지역이다. 두 섬의 영토가 갈라진 것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할 때 이 섬의 중간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라트마노바 섬은 무인도이지만 미국령 스몰 다이오메드 섬은 사람이 살고 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스몰 다이오메드 섬에는 83명이 거주하는데, 주로 이누이트족이 거주하고 있고 경제는 어업과 상아 가공이다. 냉전 시기에 두 섬 사이를 두고 ‘얼음 장막’(Ice Curtain)이 쳐졌다. 소련과 미국은 두 섬을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물론 촬영하는 것조차 금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링 해협은 태평양과 북극해를 분류하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협이다. 게다가 세계 군사력 1, 2위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마주하는 해협이기 때문에 정치,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에 속한다. 만약 러시아 제국 시절에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지 않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다 해도 이 해협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북극항로가 개통되고 있는 현재, 그 중요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최근 키릴 드미트리예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 러시아 대통령 국제 경제 협력 특별 대표이자 러시아 직접 투자 펀드 대표가 러시아와 미국을 연결하는 베링 해협 해저에 110km 길이의 '푸틴-트럼프 터널' 건설을 제안하고 나섰다. 드미트리예프의 주장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는 80억 달러의 비용으로 8년도 채 안 되어 완료될 수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예산의 1/8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만약에 완공된다면 이 터널은 철도와 화물 운송 노선을 갖추어 공동 자원 개발과 러시아-미국 경제 연결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드미트리예프에 의하면 베링 터널은 아시아 횡단 철도 노선을 북아메리카와 직접 연결할 수 있게 하여 전례 없는 아시아-유럽-미국 운송 회랑을 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맞는 말이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은 또한 특히 북극 지역의 에너지 및 광물 분야에서 공동 자원 개발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지난 8월 15일 러시아-미국의 알래스카 회담에서 나타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공동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양국이 연결된 인프라에 공동 투자할 때 일자리를 창출하고 양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며 침체기에 빠져 있는 미국 경제도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저터널의 이야기는 이번에 언급한 드미트리예프가 처음으로 주장하는 얘기가 아니다. 베링 해협 해저터널 프로젝트는 인류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발전의 궤를 같이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보다 베링 해협을 통해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시키자는 구상은 1869년대 미국의 에이브러함 링컨 전 대통령 행정부 당시에 미국이 먼저했고, 러시아는 1905년 니콜라이 2세 차르 때 구상했다. 그 사이 1890년 콜로라도 준주의 주지사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은 그의 논문에서 베링 해협을 거쳐 전 세계를 연결하는 코스모폴리탄 철도(Cosmopolitan Railway)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2년 후, 미국의 건축공학자인 조지프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가 베링 해협에 철교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제국에 제의했지만 러시아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04년 미국 철도 신디케이트(Syndicate)가 같은 제안을 러시아에 타진했고, 러시아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고심끝에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제국 내 혁명 기운이 고조되면서 이같은 사업은 무산되었다. 냉전 시대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논의되지 않다가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21세기 들어 중국에서 고속철도를 미국까지 연결하자는 제안이 2014년에 제기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는 중국이 러시아, 미국, 캐나다를 한 번에 연결하자는 것이다. 또한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도 비슷한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널 공법이 발전했고, 영국-프랑스가 도버 해협을 뜷었듯이 베링 해협 또한 터널을 뚫어 연결하자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된다. 베링 해협의 최고 깊이는 55m로 영국-프랑스의 도버 해협 174m보다 깊지 않다. 영국과 프랑 스사이에 건설된 유로 터널은 해저 구간만 38km다. 물론 베링해에 터널을 뚫는다면 그보다 두 배는 더 길다. 하지만 툰트라 지역의 교통 여건과 수요 등이 비용을 상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러시아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이 구상은 아직까지 주장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국제 인프라 건설은 공사 자금이 막대하고, 공사의 구상에 착공에서 완공까지 공사 기간이 길다. 더불어 거대한 공사에 따르는 공해 문제, 도시 문제, 문화 오염, 환경 파괴, 기상 문제 같은 것은 당연히 거론된다. 더불어 기술 문제와 건설 후의 경제성 등 정치, 외교, 안보, 군사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그만큼 이 공사는 세계 다극화의 각각 한 축을 맡고 있는 초강대국끼리의 국제적 공사다. 더구나 베링 해협의 터널 사업은 북극해 개발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혹독한 기후 여건과 자연 환경, 기후 변화, 기술, 자금 조달, 각 국의 전략 간의 조화와 충돌 및 정치, 외교적인 갈등 등 온갖 현안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베링 해협 해저 터널 건설에 대한 국제적인 공론화는 이미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이와 같은 모든 제한은 인류 사회와 역사적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21세기 신(新) 글로벌 시대로 진행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 파급 효과는 직, 간접적으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아메리카, 유럽, 동아시아 3대 거대 경제권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직접적인 물류의 증가 뿐 아니라 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 개발과 연해주 개발, 알래스카 개발, 북부 캐나다 북극해 지역에 대한 개발 또한 이루어져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될 것이다. 러시아는 2011년 8월, 650억 달러짜리 TKM-세계연결터널(TKM-World Link tunnel) 건설 구상을 발표하였고, 이러한 구상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연결을 위해 베링 해 중간의 양쪽 다이오메드 섬 간의 인프라 건설을 포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시베리아, 캐나다 북극, 알래스카 지역의 광범위한 개발도 포함하고 있다. 베링 해협 해저 터널의 건설은 북극항로의 개발을 촉진할 것으로 보아며 유라시아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포함하는 유르아메리아시아(Eur-Ameri-Aasia)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개념까지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국 또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와 연계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트럼프가 추진하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보다 여기가 훨씬 노다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게다가 우리는 기술이 좋고, 유라시아 터키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해협 해저에 터널을 연결한 경험이 있다. 우리의 경험과 기술은 이곳 터널 건설의 수주를 따내기만 한다면 세계 물류의 주역으로써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간접적으로 북극항로에 대한 우리의 지분도 살짝 걸쳐 놓을 수 있으니 트럼프를 통해 이 사업권의 수주를 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3,500억 중, 2,000억 불을 생째로 뜯기는 것에 대한 댓가로 이 사업을 잡으면 반강제로 뜯기다시피한 2,000억 불은 충분히 상쇄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구상 자체가 우리 정부한테는 없다는 것에 있다. 국가가 번영하고, 국익을 챙기고 돈 벌 구석은 찾아 보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험을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탄식이 나올 정도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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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기된 베링 해협, 러시아-미국 사이의 시베리아-알래스카 해저터널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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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 지난 11월 7일,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의 그간 있었던 외교적 현안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기자는 일본의 다카이치 새 정부가 1945년 8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사할린의 미즈호 마을에서 한국인, 즉 정확히 말해 고려인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등의 전쟁 범죄 사실을 규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당국의 범죄에 대해서는 잊은 채 러시아와 북한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자하로바 대변인은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게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역사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행한 악행들을 그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해 왔다고 답했다. 우선 러시아는 전쟁에서 몰렸을 때 일본의 이와 같은 보복주의적인 정책이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야만적인 팽창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접 국가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점을 주기적으로 강조해왔다고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본 측이 사할린과 쿠릴 열도 남부 지역의 상륙 작전을 진행하던 중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증거로 보이지 못하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 국민들에 대해 소련 정부의 행동이 가혹했다며 비난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은 이러한 비난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고 했더. 일본 정부는 항복 이후에도 공소시효가 없는 전쟁 범죄들을 계속 저질러왔다며 이와 관련해 러시아 당국은 이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2021년부터 러시아는 사할린 미즈호 마을(현재의 포자르스코예 Пожарское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문서들을 단계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일본 제국에 속했던 사할린 남부 지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그 절정이 1945년 8월의 학살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군 전역자들을 포함한 가해자들이 “소련군에 동조했다”는 구실로 27명의 조선인 주민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희생자 중에는 6명의 어린이가 있었으며, 그 중 1명은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다. 이 사건에 대해 사할린에서 자행된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소련이 수집한 비공개 문서들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라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그동안 벌였던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를 고의로 훼손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베했다. 사할린 미즈호는 일본이 러시아 남부 사할린 지역에서 실시한 식민 정책으로 형성된 전형적 농촌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약 250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10여 명의 조선인도 일본인의 차별과 감시 속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에 소련이 참전하여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게 되자, 조선인들은 소련군에 협조한다는 소문을 공유하게 된다. 드디어 남사할린 마오카(眞岡) 지역에 소련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궁지에 몰렸다. 마오카는 일본인 주민들이 본토로 피난하기 위해 배를 탈 항구였다. 미즈호 마을은 마오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다. 미즈호는 8월 21일부터 일본인 주민들이 피난하면서 마을은 거의 비어 있게 된다. 다만 일본 재향군인회 관계자들의 지시를 받은 재향군인회 회원들과 청년단 남성들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소련군에 협조한 조선인들이 스파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는 소문을 믿고, 함께 생활했던 마을의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임시로 노동 등을 목적으로 마을 주변에 머물렀던 조선인 모두를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8월 20일 아침부터 25일까지 조선인 약 35명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나누어 몰래 매장하였는데, 이 때 여성 3명과 젖먹이를 포함한 6명의 어린이도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오카 항구가 점령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들이 마을로 되돌아왔고, 살해 가담자들 또한 마을을 탈출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하지만 1946년 여름 이후, 소련 군 당국이 사할린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사건의 전모와 살해 가담자들을 모두 밝혀내게 된다. 이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18명 중에 7명은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되었고, 11명에게는 10년 형과 더불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형이 집행되었다. 일본이 이처럼 학살을 진행한 이유는 전쟁에서 패배한 분풀이도 있었을 것이고, 그동안 벌인 갖은 전쟁 범죄에 대해 증인들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조선인들이 곧 진주할 소련군을 도와 일본인들에게 해를 입힐 것을 우려했다. 이와 같은 판단으로 인해 일본군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마을에 살던 젊은이와 노인은 물론 여성과 갓난아기까지 도륙했던 것인데 당시 소련의 방첩 기관은 61세의 농민인 윤양원씨의 증언을 확보했다. 윤양원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친구 채정환이 사는 미즈호 마을로 소를 사러 갔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지난 8월 친구가 살해당했다’고 고백했다. 8월 러시아인들이 상륙했을 때 일본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즈호 마을의 모든 조선인들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 국가안보부 유즈노 사할린스크 담당 수사관의 심문 기록도 존재한다. 한 조선인 여성은 이 때 당시 조사에서 8월 21일인가? 22일에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경찰관이었던 이시다라는 인물이 조선인들을 한 곳에 모아 모두 30명 가까이 죽였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사할린에서 역사 교사로 일했던 콘스탄틴 가포넨코(Константин Гапоненко)는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 문서에 근거하여 이 학살 사건을 책으로 저술했다. 가포넨코는 당시 수사와 재판 기록에 그 기반을 두고, 이 사건이 일본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일본인들과 일본군들이 평화로운 조선인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자행한 극도로 잔인한 만행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2008년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낸 바 있어 그 정황들을 참조할 수 있다. 문제는 사할린에서 미즈호에만 이러한 만행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12년 8월 14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현 우골레고르스Углегорск) 지역에 조선인이 10,229명 정도가 살았지만, 전쟁 후에는 5,332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인구가 50%가량 감소한 것이다. 당시 소련 측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의 이유로 소련군의 진주로 인한 피난 및 고국 귀환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군인들의 학살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2012년 11월에는 매우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우골레고르스크 지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본군이 누군가를 죽였다카더라' 라는 막연한 카더라식의 증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012년 11월 증언 때처럼 목격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 정황을 직접 들은 증언이 확보된 것은 처음이었다고 국가기록원이 밝혔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사할린에 거주하는 황순영(당시 78세, 여성)씨는 11살이던 1945년 여름 에스토루에 살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황순영씨는 이모부 내외가 에스토루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20일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을 끌어내 뾰족한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순영씨는 그 때 임신 중이었던 이모가 3살 아들과 함께 숨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이후에는 땅굴을 파고 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어 전쟁이 끝난 뒤에 이모는 땅에 묻힌 남편과 시동생을 파내 초상을 치렀는데, 그 때 어머니가 다녀오셨다고 회상했다. 1945년 8월 당시 5살이었던 이태엽(2012년 당시 나이 72세)씨는 나중에 이웃으로부터 들은 또 다른 이웃집 부자의 사연을 증언했다.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이태엽씨는 이웃에 살았던 최씨가 말해줬는데, 에스토루에서 강씨와 부인, 아들 둘로 구성된 일가족 중 강씨와 큰 아들이 일본군에 살해당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엽씨는 당시 일본군이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죽창을 만들라고 하여 최씨는 죽창을 만들러 갔지만, 강씨는 다리가 불편한 큰 아들을 돌봐야 하여 못 간다고 버티다가 일본군이 착검한 칼에 찔려 죽었고, 큰 아들은 거기에 항의하다 함께 죽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밝혀지고 있는 정황으로 볼 때 그동안 알려진 2개의 학살사건 이 외에도 사할린 전역에 전쟁으로 인한 학살 사건 등이 난무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일본의 패전 사이에 피난과 해방, 그리고 고국으로의 귀향을 바라고 있던 사할린 조선인들에게 있어 매우 끔찍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포로나이스크 시(Поронайск, 舊 카마시스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은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약 288Km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도 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공터에는 김경순 여사가 세운 “통한의 비”라는 것이 존재한다. 1945년 8월 17일, 부친 김경백(당시 54세)와 오빠 김정대(당시 19세)가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8일 경찰서에서 다른 조선인 16명과 함께 살해당하고 경찰서까지 불태워진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해당 비석을 세운 것이다. 카미시스카 지역은 북위 50 근처 소련과의 국경에 인접해 있고, 일본군 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던 군사지역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또한 오지(王子) 제지의 제지공장과 6개의 주요 탄광도 위치하고 있던 산업과 군사적인 면에서 사할린에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필히 수호해야 할 도시였다. 특히 1940년대 이후 철도의 연장 공사와 더불어 도로, 비행장 건설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고 동원 이전부터 농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었다. 물론 소련에서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본의 감시를 수행했던 조선인 앞잡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났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더불어 전투기와 탱크들을 앞세우고 남부 사할린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최북단 군사도시였던 카미시스카 지역은 아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8월 17일 일본인에 대한 소개(疏開)를 결정되면서 주민들에 대한 대피와 모든 주요 시설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에 대한 소개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며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고 소련의 스파이다. 그래서 침공해 온 소련군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올 오해였다. 당시 소련군 중에 몽골계 혹은 부리야트계 병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인과 외모가 흡사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오해로 인해 일본인들의 의심과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문만으로 경찰과 헌병들이 나서서 그와 같은 학살을 저질렀을지는 현재에도 의문이다. 긴급하게 피난할 상황에서 유독 조선인들, 그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유랑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고 감시했던 조선인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안 심리에 기인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카미시스카 지역이 사할린 주둔 일본 군사 지역이라는 점과 군사 시설 건설 및 이와 관련된 조선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볼 때 군사적인 보안 측면에서 이 또한 소개령으로 보고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병과 경찰이 개입된 점으로 볼 때 조직적인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미시스카 지역에서의 학살은 여러 증언들이 존재한다.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산모가 물을 길러간 남편이 오지 않아 찾으러 나가 보니 남편의 목이 잘려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증언도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한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방화도 저질렀는데, 22개의 공장, 22개의 호텔, 병원, 극장, 이발소, 세탁소, 사진관, 신사, 일반 주택 등이 화재들로 인해 소실되었다. 2025년 8월, 비극적인 학살 사건들의 80주년을 맞이하여 사할린 현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 또한 1946년 7월 19일자 시신 발굴 관련된 문서들과 1946년 7월 21일자 현장 조사 보고서를 포함한 여러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었다. 이 자료들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한 학살의 장면들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 범죄를 밝혀내고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 천명했다. 다카이치는 중국에 이어 러시아도 자극했다. 그러나 다카이치 정부의 이런 식의 자극은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사할린에서 일본에 보내지고 있는 가스와 원유를 끊게 되면 일본은 비싼 돈을 들여 미국으로부터 액화 가스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본의 경기는 더 나빠질 것이고, 결국 다카이치 또한 이시바 시게루 이전의 총리들처럼 총리 자리를 내놓아야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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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과 러시아의 대응 : 사할린 조선인 학살 사건의 전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