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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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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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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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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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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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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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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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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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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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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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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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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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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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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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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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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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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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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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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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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이다. 구리와 석탄 매장량이 각각 세계 2위와 4위 규모일 정도로 지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몰리브덴의 매장량도 세계 11위이며 희토류는 전세계의 16%가 몽골에 묻혀있다. 타반 톨고(Taban Tolgoi)에는 석탄, 오유 톨고이(Oyu Tolgoi)에는 구리와 금 등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광산들이 사실상 몽골 경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몽골 GD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에 달하고 있다. 광업은 2위 농업의 16.5% 보다 훨씬 높다. 특히 수출에서는 광물 자원 비중이 90%가량으로 절대적이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몽골 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 광산, 일반 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 규모가 GDP의 5%를 넘고, 국가 안보 및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 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략 광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채굴권의 승인, 투자 보장 계약 심의, 정부 지분율 결정 등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광산 개발 방식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 광산에 반드시 지분을 보유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몽골의 전략 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등 주요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오유 톨고이 지역은 우문 고비 아이막 항복드 솜(Hangbokd Som)에 위치한 80,000ha 면적의 세계 3대 구리 광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구리, 금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계 이반호에 미네스(IVANHOE MINES)사에 의해 탐사 되어, 광업 메이저 회사인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울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가 66%, 몽골 정부 34%의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2009년에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우르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회사는 다국적 광업기업인 리오 틴토(RIO TINTO)가 50.8% 소유함으로 리오 틴토(RIO TINTO)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확정, 추정 및 예상 매장량을 모두 합산하여 31.1억 톤의 매장량이 보고되고 있으며, 품위는 Cu 0.98%, Au 0.299g/t으로 나타난다. 노천 광산과 지하 광구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 노천 광산 채굴만 이루어지고 있다. 지하 광구 리프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5년부터 지하 광구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 연간 순 구리 55만 톤, 금 45만 톤으로 세계 3위 구리 광산이다. 따라서 2020년을 기준으로 한 해 동광석 100만 톤을 채굴하여, 69만 톤 동정광을 수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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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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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왕국(滇王國)과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 북방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
- 이들 나라 중 전왕국(滇王國)은 고고학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역시 촉국(蜀國) 만큼이나 독자적인 문화를 나타내 중국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삼성퇴 문명과 마찬가지로 황하 문명보다는 앞서 있으며 그 동안 서남이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 문명이 15세기 이후에 발달했다고 추정했던 중국학계는 그들의 연구목록을 대폭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중심인 곤명(昆明)일대가 전국(戰國)시대 당시 전국(滇國)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경내에 전지(滇池)가 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는 호상(湖上) 주거 생활을 했는데 무선호(抚仙湖)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약간 발견된 것 같다. 또한 묘지와 해당 무덤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발굴이 있었다. 이러한 발굴지의 위치는 호반에서 떨어진 언덕에 자리 잡았었다고 운남성 고고학연구소에서 주장하고 있다. 전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사마천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야랑과 함께 “왕인(王印)”이 주어진 서남이의 두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한 무제가 하사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명문이 새겨진 도장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명문의 도장은 학술적으로 한나라와 서남이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 B.C 109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천(四川) · 운남 방면을 정벌했을 때 한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에 전왕(滇王)에게 왕인(王印)을 주었다. 그러나 서기 전 80년대 서남이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전족의 유적인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진녕현(晋寧縣) 석채산에 있는 무덤군으로 전한 초~후한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동물의장이 우수하면서 환조(丸彫) 내지 선각(線刻) 무늬 모양으로 사회생활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그 중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인 전족에게 조공하고 사역된 피지배민족으로 식별되는 것도 있으며, 기년제사(祈年祭祀) · 공희(共犧) · 농업 · 가내작업 등이 세부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어 이 지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5∼1960년 4회에 걸쳐 운남성 박물관이 50기(基)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석기 · 토기 · 동고(銅鼓) · 편종(編鍾) · 동기 · 철기 · 거울 · 금은기 · 칠기 · 도기 · 화폐 등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한쪽 날의 돌도끼 · 유견(有肩)돌도끼 · 간돌화살 · 돌송곳 등이 있고, 토기로는 접시 · 항아리 · 바리 · 완(硯) 등이 있다. 무덤은 지방적 색채가 짙은 청동제 무기 · 장신구를 풍부하게 부장한 것이 많으며, 중국 문화의 중심지에서 수입된 유물도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6호분에서 출토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인문(印文)이 있는 금인(金印)은 서기 전 109년 한(漢)나라 무제가 전족(滇族)의 왕에게 사여(賜與)한 것으로 보이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물론 이 도장은 정복자인 한나라에게서 하사받게 된 것으로 이 시기는 전왕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무덤이나 유물이 점점 한나라 양식을 따라가게 되던 때이다. 하지만 한나라에 복속되기 이전의 유물들은 중원의 유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국인들은 대체로 전문적인 야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귀족들의 무덤들은 인상적인 청동 예술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뜻밖에 부분에 있어 이들 지역에 스키타이 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북방계 문화도 나타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유지에는 석채산(石寨山), 이가산(李家山), 양포두(羊甫頭) 등이 있는데 이곳 유지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전혀 한족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 유목적 영향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영향까지 받았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이 교차하면서 혼합되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부분 때문에 서남이는 완벽한 남방계가 아닌 북방과 남방 혼용의 문화로 주장할 수 있다. 5호 16국 이전에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리와 사천 지역의 중간 지역을 두고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은 다소 황당한 명을 장군 장교(莊蹻)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검중(黔中) 이서(以西)의 지역을 경략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지리적으로 전혀 모르는 곳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소위 한족이 표현했던 미개한 서남이(西南夷) 지역이 역사 기록에 출현하게 되었던 첫 번째 사례였다. 초나라 장수 장교는 협로를 뚫고 들어가 서남이를 정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초나라의 경양왕(頃襄王) 22년 (B.C 277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을 차지하여 길이 끊기게 되면서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현지의 왕이 되었다. 위왕 시기와 경양왕 22년 전후 50년의 간격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장교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그 후손이 왕이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관련된 사료『사기(史記)』「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중에서 큰 나라로 기록된 것이 야랑(夜郞), 전(滇), 공도(邛都), 사(徙), 작도(筰都), 애방(厓駹), 백마(白馬) 등이다. 남월(南越)의 경우 조타(趙佗) 시대에 재물을 동원해 동서 만 여리에 이르는 지역을 역속(役屬)시켰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야랑 역시 그렇게 역속 되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가 월(越)을 평정하고 9군을 설치할 때는 역으로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파촉(巴蜀)의 죄수병과 야랑(夜郞)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여파로 서남이 지역에도 공도(邛都)를 월휴군(越巂郡),작도(筰都)를 침리군(沈犁郡),애방(厓駹)을 문산군(汶山郡),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설치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주로 한 무제(漢武帝)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뚫을 때 파촉 지방의 재력을 이용하다 그 지역의 민생이 피폐해 지자, 흉노를 방비하는데 전력하고자 야랑(夜郞)의 2개 현(縣)과 1개의 도위(都尉)를 제하고는 그 지역에서 물러난 실패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서남이인들은 그 후로는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당대(唐代)에는 남조(南詔), 송대(宋代)에는 대리(大理) 등을 세웠고 현재도 그 후예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서남이의 여러 종족들은 일찍부터 중원 왕조에 종속되었다. 한 무제 건원(建元) 6년(B.C 135년)에 한왕실에서는 야랑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하여 행정을 관할하였으며, 그 후에 계속하여 공(邛) · 작(笮) 등에도 하나의 도위(都尉)와 10여개의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예속시켰다. 한대 원정(元鼎) 6년(B.C 111년)에는 지금의 운남성 동부와 귀주성 서부 지역에 장가군(장가郡, 장=조각장+羊, 가=조각장+可)을 설치하고 야랑후(夜郞侯)를 야랑왕(夜郞王)에 봉하였다. 서남이의 다른 부락들도 이것을 보고 모두 귀순을 청하였다. 한 무제는 마침내 공도(邛都)를 월수군(越수郡)으로, 작도(笮都)를 침려군(沈黎郡)으로, 염방을 급산군(汲山郡)으로,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고쳤다. 서남이는 부족 간에 균형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격차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 야랑 · 전 · 공 등의 부족이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머리를 감아올리고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촌락을 형성하여 모여 살았다. 수 · 곤명 등은 모두 변발을 땋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도 · 작도 · 염방 등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유목생활도 하였다. 서남이는 상업에도 활발하게 움직여 인접한 촉(蜀)나라와 무역을 하였는데, 그들의 주요 생산품인 작마(笮馬) · 야크털 · 금 · 은 · 동 · 상아 등을 가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비단 · 철 · 소금 · 대 · 레몬잼 및 일용품과 교환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년)에 한 왕조는 군대를 동원하여 전족(滇族)을 토벌하였다. 이에 전왕(滇王)이 항복하자 전(滇)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전왕에게 옥새를 하사하여 그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전족에 관한 업무를 계속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야랑왕 흥(興)과 구정(鉤町)의 전우(田禹), 누와후(漏臥侯) 유(兪)가 여러 해 동안 교전을 벌이자 한나라 황실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그들은 거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한 성제(成帝) 하평(河平) 2년 (B.C 27년) 장가태수 진립(陳立)이 야랑왕 흥을 죽임으로써 야랑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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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왕국(滇王國)과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 북방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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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농산물, 혹은 농지(농장)의 현황과 콩(대두), 중국 수출 문제
- 미국은 세계 주요 콩 생산국 중 하나로, 2020년대, 1년 평균 기준으로 약 43억 부셸의 콩을 생산했다. 콩은 식품, 연료 및 급여로 사용되며 미국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콩은 항상 주요 미국 농작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소수의 농민들이 실험적으로 콩을 재배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콩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콩 수출국이다. 미국의 농업 유형을 분석해보면 기본적으로 상업농이라 볼 수 있다. 상업농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모든 수준에서 고도화된 기계화로 나타난다. 엄청난 크기의 트랙터와 같은 장비는 단순해 보이나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작업에 따라 트랙터에는 GPS 통합, 드론 제어 터미널, 실시간 위성 이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미국에 방문했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엄청난 넓이의 옥수수밭을 본적 있다. 그 때 옥수수밭이 너무 넓어 엄청난 크기의 트렉터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트렉터 크기가 왠만한 2층 버스 높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미국의 농업은 현재 상업농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지만 미국 초기 역사에서는 자급자족의 농업이 흔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만이 이를 자급화를 실천했다. 자급농 위주였던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인들이 진출했고 영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농업 방식을 도입했다. 이 때부터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농업 수익성은 높아졌고, 모든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농장에서 일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현재도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기타 그룹들은 오래된 농업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유럽의 기독교 운동에서 유래한 미국의 종교 및 문화 집단인 아미쉬(Amish) 중 일부 그룹들은 현대 농업 장비를 거부하고 농장에서 동물과 수작업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미쉬 같은 자급농과 소규모 농장이 존재하고 있으나 평균 농장 규모는 441에이커로 178.5ha이며, 평으로 환산하면 약 539,861평이다. 농장 규모가 대형으로 커짐에 따라 갈수록 농업기계와 장비는 농업 운영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농업 기계화에 의해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과 비례하여 농기계의 활용과 투자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기계화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진다 할지라도 소규모 농장에서 볼 때 생산성으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는 비용이 증가되기 때문에 농업 혁신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농무부가 발표한 2024년을 기준으로 약 200만 개가 넘는 농장이 있는데, 가족 농장이 전체의 97.3%, 면적으로는 92.7%, 판매액으로는 89.6%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수치로만 환산하면 미국에서는 가족 농장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농업은 가족 농장이 중심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6%이며, 판매 금액에서 소규모 가족 농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19%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의 농업은 대규모 가족 농장과 중소 규모의 가족 농장들이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규모 가족 농장은 3.4%, 농지면적은 24.8%에 불과하지만 판매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율로는 51.8%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500만 달러 이상의 판매액을 가진 8,134개 농장이 전 판매 금액의 22.8%를 차지하고 있다. 비가족 농장은 나머지 2.7%로 판매 금액은 10.4%에 불과하다. 특히 해외 수출되는 작물 중에 옥수수와 콩은 가족 농장에서 소출된 것으로 내보내 지는데 콩(대두)의 경우, 2018년에 나타난 미, 중간의 무역 분쟁으로 볼 때 미국의 중국을 대한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콩(대두) 수출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중국은 주로 브라질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콩의 국내 수요를 늘리고 다양한 용도로 콩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콩 기름은 바이오 연료 및 재생 디젤 연료 산업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콩(대두) 재배 지역과 전통적인 무역 경로가 변할 수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이와 같은 미래의 도전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대두를 사들이지 않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을 늘려 가기 시작하자 트럼프가 중국에 미국산 ‘대두(Soybean)’ 수입 재개를 요구하겠다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와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콩은 그리 간단한 농산물이 아니다. 이는 대두 농가가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수입 중단 문제는 자칫 내년 11월 3일에 있을 미국 중간선거의 결과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두는 14억 중국인들에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매년 미국산 대두의 25% 이상을 구매하는 최대 수입국이었다.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수입한 규모는 지난 해에만 126억 달러(약 17조 8,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은 그 이전까지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북반구의 미국산 가을 대두를 수입한 이후, 3월부터 남반구의 남미 국가에서도 대두를 사들였다. 대개 미국산 대두 구매 예약은 10월이 되기 몇 개월 전에 이미 마무리되어 미국은 각 가족 농장에서 최대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미국 대두가 대풍작인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무역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 이상으로 대두 수입은 미국을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 쓸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이양시켰고,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등, 미국에 여러 양보 안을 제시했다. 따라서 시진핑은 대두 수입을 가지고 미국에 다른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이른바 ‘관세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올해부터 BRICS 국가들 소속의 브라질 등 남미에서 생산한 대두 수입량을 대폭 늘렸다. 지난 8월 브라질산 대두 수입은 지난해 같은 8월 때보다 2.4% 늘어난 1,049만 톤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대두 수입 물량의 85.4%에 달하는 수치였다. 중국의 8월 미국산 대두 수입은 2024년의 같은 시기보다 12.3%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브라질이 대두를 수확하는 시기가 지연되는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 정도다. 중국은 새로 수확되는 미국산 대두에 대해서는 구매 예약을 하지 않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산을 계속 수입하고 있다. 미국 농가가 대두 수확기에 들어간 지 2주 이상 지난 9월 11일까지도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단 1건도 예약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당국이 미국산 대두 주문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난 상반기 때 미국의 중국 대두 수출 누적량도 작년인 2024년 같은 기간보다 51% 감소했다. 중국으로의 수출이 사실상 막히면서 미국의 2025년 대두 수출은 23% 이상 급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두 가격은 폭락했고, 재고가 증가함으로써 옥수수 등 다른 작물들을 저장할 공간마저 부족해진 상태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미국 농무부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이 시기까지 미국의 대두 구매를 예약하지 않은 것은 1999년 이후로 처음이라고 했다. 중국은 아르헨티나에서도 35건 이상의 대두 화물 선적을 예약했다. 11월에 선적될 예정인 계약분만 227만 톤 이상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이전까지 중국의 남미산 대두 수입량 최대치가 2015년 7월 223만 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번에 사상 최대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생각지도 못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분노한 트럼프는 브라질에 대한 관세를 올리고 아르헨티나에 관세를 100% 이상 올린다고 협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중국에 대두 팔지말라고 협박하는 카드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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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농산물, 혹은 농지(농장)의 현황과 콩(대두), 중국 수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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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 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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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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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가자 전쟁 종식 선언, 과연 중동의 평화가 오는가?
-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벌인 가자 전쟁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집트의 홍해 휴양지인 샤름엘셰이크에서 트럼프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세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함께 가자 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이 구상했던 평화안에 자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휴전중재국 전상들 외에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헝가리 등의 정상들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요르단, 바레인, 파키스탄 등의 정상들을 포함해서 34명이 참여함으로써 ‘가자 평화 선언’을 지지했고, 트럼프에게 거대한 병풍을 쳐주었다. 그런데 이번 ‘가자 평화 정상 회의’에 정작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불참했으며, 이란도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중동의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중동의 평화가 왔다고 하면서 모든 성과를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면서 승리를 자축했으며, 유럽과 아랍의 정상들은 트럼프의 들러리를 서면서 아양을 떨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 정상 회의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당연히 존재감을 돋보이는 국가는 튀르키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 총리가 참석한다면, 이번 정상 회의에 불참을 예고하면서 트럼프가 자신과 사전에 조율하지 않은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트럼프는 엘시시와 별도로 회담하면서 네타냐후가 이번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에르도안은 네타냐후를 히틀러라고 거칠게 불렀고, 이스라엘과 무역 중단도 단행했기 때문에, 네타냐후와 만남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르도안은 전용기에 머물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결국 네타냐후는 불과 1시간 만에 회의 참석을 철회했다. 사실 이번 평화안을 하마스가 수용한 것도 에르도안의 설득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하마스는 처음부터 이전 정상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고, 튀르키예와 카타르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번 평화안은 문서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총 20개의 항목을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인데, 1단계는 대체로 군사작전 중지, 이스라엘 군의 부분 철수, 인질-수감자 석방, 가자 지구에 인도적 물품 반입 등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수감자 1,900여 명을, 하마스는 생존 이스라엘 인질 20명을 서로 석방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마스는 생존 인질들을 전부 석방했지만, 사망한 인질들의 유해 28구 중 9구만 송환되어 난항을 겪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은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총론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했지만, 각론에서는 아직 1단계에서 벌써 삐꺽거림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양측 서로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그렇게 한 까닭은 나머지 유해들이 자신들이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인질들임을 드러내고,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신들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리저리 지하로 피해 다니고 있는데, 나머지 유해들이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 이미 공습으로 나머지 유해들이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 유해들이 이스라엘 인질들의 유해들인지 알 수 없다는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인도적 물품 반입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하마스가 인도적으로 반입되는 물품들이 가자 주민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마스가 이를 빼돌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하마스가 합의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하마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 위협했으며, 더 나아가 물품 반입도 지연하거나 줄일 것이라고 유엔에 통보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 발을 빼면서 시신 인도 문제는 합의사항이 아니라고 했는데, 미국은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콧물을 떨어뜨리기가 싫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나친 억지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모한 포격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에게 히든 카드를 들고서 다음 2단계에서 서로 주도권을 행사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이번 평화협정은 1단계가 완전히 끝나면 2단계로 들어가고 마지막 3단계로 이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2단계는 하마스의 무장 해제, 이스라엘의 단계적 철수, 가지 지구 전후 통치 방식 등이고, 3단계는 영구 휴전, 가자 지구 재건, 국제 평화 위원회 구성 등이다. 그런데 이 단계별 평화안을 보면 1단계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서로의 신뢰를 보여주지 못한데, 어떻게 2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지에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1단계에서 이행되지 못한 사항들이 2단계에서 추가로 논의하게 되면 이것이 2단계의 다른 사항들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평화안은 2단계가 핵심이라고 보이는데, 벌써 세부 사항별로 1단계보다 더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하마스는 이미 약 7,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로 소집해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전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마스가 이렇게 한 까닭은 일부 보도에 따르면 가자 전쟁 중 친이스라엘 민병대 조직원들을 색출함으로써, 설령 가자 지구 통치권을 이양하더라도 팔레스타인 과도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훗날을 대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랍 중재국들도 훈련된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경찰로 만들어서 1,000명 정도를 가자 지구에 투입하고 이후 최대 10,000명 정도까지 확대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쩌면 가자 지구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2단계 협상의 큰 걸림돌은 하마스의 무장 해제라고 하겠는데, 미국에서는 하마스가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을 시에 폭력적으로라도 해제시킬 것이라고 엄포놓으면서 하마스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하마스는 내부적으로 합의가 서로 안 되니 시간을 끌면서 재기를 노릴 것이다. 더 나아가 하마스는 최소한의 아무런 무장도 없이 자위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언제든 중동의 평화가 깨질 수 있다고 경고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이 문제에 관해 하마스가 만들어 놓은 지하 터널의 완전한 파괴 및 외부로부터 무기들의 반입 금지 등을 주장할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군의 철수도 이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냉정히 말하면 협상 중재국들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직접 협상할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양측의 직접 협상하기에 상호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설령 협상이 되더라도 준수 여부도 불투명하고 돌발 사태에 대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의회 연설 중 두 명의 의원이 항의하기도 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아랍계로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라는 글씨로, 다른 한 명은 좌파로 집단 학살이라는 글씨로 항의했다. 트럼프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분명히 거부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 전쟁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 두 의원의 항의는 매우 당연하다. 트럼프의 관심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서 노벨 평화상을 노리고, 가자 전쟁 이후 재건 사업에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갖고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아랍국가들도 한몫 챙기겠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해 왔던 책임을 다소나마 무마하려고만 할 뿐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트럼프의 쇼’가 진정한 평화로 이어질지는 안갯속이다. 전쟁 당사국이 빠진 채로 2단계 협상에 돌입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자 전쟁 종식에만 집중하는 듯하다. 가자에 이후에도 전쟁 대신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 수준에서 하나의 해법이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를 반대하겠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증오와 분노만으로 피로 얼룩진 분쟁의 씨앗은 단연코 사라질 리가 없다. 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히 지속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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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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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가자 전쟁 종식 선언, 과연 중동의 평화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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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는 국가적 안전을 보증하였다. 이반 뇌제는 코사크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보내 시베리아를 경략하도록 했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코사크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치이들은 용병처럼 활약하였으며, 캄차트카, 베링해, 태평양까지 러시아의 국경을 확대하였다. 러시아가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것은 코사크 인들 덕택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새로운 식민지가 창출되면서, 러시아의 중앙부 농민들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국가와 지주의 권위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과감히 이주하거나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베리아의 군대 총독들은 이주하거나 탈출한 농민들을 수비대로 재편성하거나 농업 활동에 종사시켰다. 소련 학자들은 이들이 러시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고 현재도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러시아는 왜 아시아로 팽창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을까? 러시아의 농노화가 진행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러시아는 새로운 변방 지대 진출을 추구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도 농민들에게 토양을 제공하고, 농촌 경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새로운 땅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반 뇌제가 시베리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베리아산 풍부한 모피는 내외적으로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손상을 오랜 시기동안 받았다고 간주한 러시아는 동방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몽골의 후계 칸국 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16세기에도 변방 유목민족들의 공격으로 러시아는 국경지대에서 방어적인 공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방어적 작전에서 이민족을 향한 공격적 자세로 전면적으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시베리아를 경략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민족은 총 18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중 105개의 종족이 시베리아에 산다. 워낙 많은 민족들이 있는 관계로 러시아 내 민족학 연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지만 가장 전수조사가 어렵기도 한다. 오히려 민족학 연구자들은 연구할게 워낙 많다는 학문적 산실이 시베리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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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이 아시아로 확장 정책을 강행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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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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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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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 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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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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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노르돔 시아누크 왕의 일생
-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아누크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인으로써 당시 왕이 될 적임자는 아니었던 인물이다. 그러한 점이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최고 적격자로 보였다. 하지만 왕로 즉위하자마자 주변의 예상을 깨고 정략적 외교술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동남아시아 근대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현대사를 정면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발생한 식민과 독립, 열전과 냉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전,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때로는 주역으로, 때로는 패배자로, 종국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아누크는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노력했다. 1953년 프랑스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 동맹 불 체결 조약을 선언했다.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고 1961년 라오스 국제회의를 제창하는 등 국가의 중립화에 공헌했다. 시아누크는 가난한 나라의 군주였지만, 향락적이고 사치스런 생활도 많이 했다. 뜬금없는 정치 행보와 교묘한 말 바꾸기로 인해 종종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고, 공식 발표된 아들의 수만도 14명에 이를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했다. 장남인 라나리드 왕자는 첫 부인의 소생이지만, 현 시하모니 왕의 어머니인 모니크(Monik) 왕대비는 공식적으로는 6번째 부인이다. 결혼 당시 이미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나서고 있는 미인 대회 입상자를 지금의 왕비로 삼았다. 모니크 상왕비는 프랑스계 이탈리아 사업가와 캄보디아 왕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시아누크는 서방 문화와 동양 왕실 문화에 물든 국제 외교가의 대표적 호사가이기도 했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시아누크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1967년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Jacqueline Kennedy Onassis)은 시아누크의 주관 하에 연일 이어지는 서양식 연회에 질려 했을 정도다. 독립 이후, 1955년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시아누크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 전 의석을 석권하는 등 첫 총선을 대승으로 장식했고, 국가 주석, 총리, 외교 장관을 겸임하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인생에서 있어서 최대 전성기였다. 시아누크는 1960년대 냉전 상황에서 제3 세계 비동맹 운동의 한 주역으로 활약하며, 캄보디아를 한 강대국의 일방적 세력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열되는 베트남 전쟁은 시아누크와 캄보디아를 쇠퇴일로로 안내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시아누크의 묵인 하에 캄보디아 영내를 호치민 루트로 잘 알려진 병참 수송로로 활용했고, 1970년 미국은 친미 정치인 론 놀 장군을 부추겨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이던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베이징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그 이후 영욕이 교차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나마 망명객을 친구로서 맞아주던 중공의 총리 주은래(周恩來)가 1976년 지병으로 죽자, 그는 의형제를 맺고 지내던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도움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아누크를 위해 주석궁을 차용하여 지은 별장식 궁전도 평양 인근에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말년에는 평양을 자주 방문해 요양을 했다. 시아누크는 생전 북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비동맹 회의에서 처음 만나 북한을 적극 지지해준 것이 인인이 되어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북한은 시아누크의 망명 생활 중 장수원(長壽院)이라는 궁전을 지어주어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프놈펜 도심에는 현재에도 김일성 대원수 거리가 있으며, 시아누크는 2012년 1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 태양절을 즈음하여 국제 김일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에게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 이후 친미 정권인 론 놀 정부가 붕괴되고 1975년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낙원을 주창한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장악되자, 폴 포트가 이끄는 정권의 상징적인 국가수반이 되어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 세력인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의 이름뿐인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인 폴 포트는 시아누크를 다시 왕으로 추대해 절대 왕정 국가로 회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폴 포트는 다만 시아누크의 명성과 인기를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시아누크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결국 1년 만에 크메르 루주에 의해 직위를 찬탈당하고 정치적인 은퇴를 강요당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처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중공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 루주 정권을 타도했으나,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 화를 우려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 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2년 동안의 시아누크의 외교 활동으로 인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4개 정파가 모인 가운데 종전 협상을 타결 지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캄보디아 과도 정부 수반에 선출됐으며, 2년 뒤 유엔(UN) 감시 감독 하에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첫 총선에서 큰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예상을 깨고 압승하자, 실력자 훈 센은 내전 재발을 협박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 총리 제도를 설득해 제1총리 직은 라나리드 왕자가, 제2총리 직은 훈 센이 나누어 가지는 등 양두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해 시아누크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 이후 1997년 훈 센 측과 라나리드 진영의 권력 다툼 속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 왕당파인 라나리드 진영이 훈 센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그의 장기인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인이 된 시아누크 왕은 전립선암을 겪었으며, 전해진 바에 의하면 1996년에는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10월 15일 시아누크는 건강 악화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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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노르돔 시아누크 왕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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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피싱 범죄, 그 배후는 누구일까?
- 최근 들어 캄보디아 접경 지역과 캄보디아 등에서 중국계들의 납치 범죄들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민들에게 각종 피싱 범죄와 인신매매에 대한 경고가 연일 이어지고 많은 피싱으로 의심되는 문자를 받고 있으며 캄보디아에 대해 갖은 흉흉한 소문들이 들려온다. 2020년대 초반부터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아누크빌 등지를 거점으로 한 국제 범죄조직들이 고수익 일자리를 미끼로 한국인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외국인들을 유인하여 납치하고 범죄 센터에 감금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범죄조직들은 SNS나 온라인 구인 사이트를 통해 고수익 보장, 숙식 제공, 항공권 지원 등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직자들을 유인했으며 IT 개발, 온라인 마케팅, 카지노 고객 관리 등의 직종으로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한 피해자들은 여권을 빼앗기고 외부와 차단된 건물에 감금되었다. 이후 범죄조직의 감시 아래 하루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암호화폐 투자 사기 등 범죄 행위를 강요받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저항할 경우 폭행, 전기 충격, 고문 등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했으며, 다른 조직에 팔려가기도 했다. 이에 일부 피해자들은 가족에게 연락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풀려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한국의 각종 범죄자들, 해외의 범죄자들이 서식하기 아주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물가도 저렴하고 여러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흑의 통로도 많은데다 관료들이 부패하면 사기 범죄에 특화될 수 있는 토대라 마련되어진다. 특히 6억 이상의 인구에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난하다. 그러다보니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이 범죄 카르텔들을 심고 양산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과 중국 관련하여 온갖 불법적인 범죄들이 많이 생성되는데 대개 마약과 사기, 인신매매 범죄가 주를 이룬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범죄조직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강화했다. 앞서 포스팅 한 것처럼 안면인식 기술이 발달하고, 지문 날인 등의 범죄 수사 기법이 발달함에 따라 범죄조직들은 그 동력을 상실했다. 이들은 법망이 상대적으로 허술하고 부패가 만연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과 같은 지역은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개발된 경제특구이기에 치안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범죄 조직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범죄조직들이 중국을 빠져나가니 중국 내에서는 범죄가 줄어든 반면, 동남아시아나 한국 등에서 중국인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 현지 당국이 묵인하기도 하고, 막대한 뇌물을 받고 이들을 비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규모 합숙 시설을 갖추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다. 피해자들은 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20~30대 청년층들이 많고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이러한 조직들이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에 자리잡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최빈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자들의 부패가 이루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범죄 조직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연간 125억에서 190억 달러로, 이는 캄보디아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기에 가성비도 매우 좋은 곳이 동남아시아, 특히 캄보디아 지역이다. 그래서 각종 흉악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동남아시아로 도망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성비와 범죄 대상 물색하기에도 좋은데다 뇌물을 적당히 주면 숨어 있기 좋고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진행하여 큰 돈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의 운영 주체들은 동남아시아 지역 대규모 마약 밀매에도 연관되어 있는 마약 카르텔들이다. 따라서 이들 범죄조직들을 통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운영진 측에서 일부러 납치한 이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약을 내부에서 퍼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인신매매, 대포통장 및 대포차 거래, 무기 밀거래, 야생동물 및 광물 밀수, 금이나 비취 등 귀금속과 보석 밀거래, 불법 벌채 및 개간, 돈세탁, 아동노동 등 기존 동남아시아 범죄조직들이 벌이던 다양한 범죄 행위들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으로 인해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친중 국가들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왔고, 고속도로 등 기본 인프라 사업과 더불어 온갖 카지노 사업체들이 중국 건설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 이유는 중국 본토에서 도박과 대규모 카지노 영업 행위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집권할 때부터 일부 종목들 정도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진핑이 집권한 이후에는 반부패 등을 내세워 이를 명목으로 카지노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2022년부터 중국 공산당 고위직의 은밀한 돈세탁 경로로 애용되었던 마카오에서는 당시 양회 때 카지노 규제가 강화되기로 결정되면서 중국의 비리로 빼돌려진 돈들이 새로이 세탁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 있었으며, 가까운데다 국가 상태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 캄보디아가 새로운 탈세와 횡령 등을 세탁할 수 있는 신종 세탁소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마침 캄보디아도 이로 인해 벌어들일 수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특히 2015년부터 중국에서 넘어오는 온라인 도박 사업자들에게 사업자 등록까지 허가하고 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에 해외에 카지노를 건립하여 중국인들을 유치하려는 사업체들이 도박하기 쉬운 곳을 찾다보니 캄보디아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일대일로로 인해 새로운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시아누크빌에 카지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정부들이 중국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사업상 권리 및 각종 자격이 되는 라이센스들을 뿌렸기 때문에, 중화권 국가들의 조직폭력계 삼합회를 비롯한 흑사회 조직들까지 이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게 되면서 이러한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한 단지가 건설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마카오 스타일의 중국 카지노 건물들은 시아누크빌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퍼지게 된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해외 투자 알선을 시켜주고 이들이 동의하면 해외로 내보내 사업을 하게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을 가보면 국경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수의 카지노와 클럽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캄보디아 일대일로의 중심인 시아누크빌은 중국의 카지노와 클럽 등의 유흥 사업장들이 점령해버린지 오래다. 중국의 카지노와 같은 유흥 사업장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의 범죄조직들은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북부 지대의 메콩 강 중류 지역 마약밭에서 나온 다량의 필로폰들과 해로인을 판매하는 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유통하고 팔던 범죄조직의 총책은 흑사회였고, 흑사회 조직들은,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언론에서 ‘악마’, 혹은 ‘마약왕’ 등으로 묘사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갑자기 캄보디아 언론에 의해 존경스러운 소수민족을 선도하는 지도자로 둔갑했다. 특히 해당 지역은 다수의 카투족(Katuak)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 카투족들에게 얼마 간의 돈을 주고 마약밭을 관리하는 총책을 맡겼다. 이들 조직들은 중국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마약에 대한 집중 조사가 이루어지고 단속이 강화되면서, 마약을 버리고 뛰어든 사업은 카지노와 클럽, 호텔 등의 유흥사업이었다. 이들은 유흥업소를 넘어 각종 온라인 범죄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온갖 온라인 사기 범죄에 쏠쏠히 재미를 보기 시작했고, 장기 밀매 사업까지 손을 댔다. 그리고 온라인 취업 공고로 사람들을 납치해 범죄에 이용하는 등, 그 수법이 날로 잔혹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중국 국적을 가진 자들, 혹은 중국계인데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과 공권력이 이들 범죄자들의 소탕전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를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매우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들이 해결한다는 것에 대해 국제법상 내정간섭에 몰릴 수 있다며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최종 보스이자 배후가 중국 정부가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심을 피하려면 중국은 이제라도 제대로 입장 표명을 하며 범죄 조직을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중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방법이 캄보디아를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일까? 법무부 2021년 12월말 기준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국적자는 41,525명에 달한다 했고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2024년 기준 63,681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과 캄보디아의 다문화 가족인 "한캄가족"의 수효도 만만치 않다. 첫 번째, 캄보디아가 여행금지국이 되면 '예외적 여권 사용'으로 왕래해야 한다. 여행금지국가 지정 이전에 이미 해당국 영주권이나 거주권(체류자격) 등을 취득한 사람이 이에 해당되고, 나올 때는 개인자격으로 알아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여행금지국가 국민은 한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주권이나 국적 취득자, 정상적인 비자를 받아 한국에 체류할 자격이 되는 사람은 외교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입국할 수 있기에 매우 까다롭다. 두 번째, '예외적 여권 사용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예외적인 방문 시 주의 사항"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행금지국가에 방문 또는 체류하게 되는 경우, 그 기간 중 본인에 대한 안전상 위해 또는 재산상 불이익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고, 정부에 일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여행금지국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 교민으로써 여러 이해관계와 사업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본인이 책임을 지게 되면서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캄보디아에 기반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지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현재 외교부에 나와 있는 자료 내 캄보디아 한국 교민은 약 8,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꽤 많은 숫자고 러시아 거주 한국 교민보다 많은 숫자다. 이 많은 인원이 자신들의 사업을 정리하고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 번째, 한캄가족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을 경우다. 캄보디아 부인이나 자식이 한국 국적을 취득 못했거나 결혼비자를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특수 비자를 내줄 수 있겠는가? 내주게 된다면 한국 국내에서 반발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과 일부러 이혼하고 가정 깨고 한국으로 돌아오랴? 비자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고, 이들 가족들이 한꺼번에 한국에 들어오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한 국가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잘 알지도 못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행금지국가" 지정 및 "단교"를 스스럼 없이 마구 발언을 남발하는데 한국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 포용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자기 일이 아니니 마구 뱉어내면 그만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캄보디아 간의 공조로 한국의 공권력이 캄보디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범죄조직 단지들을 무력화시키고 범죄자들과 교전 및 체포하여 국내 법으로 처벌받게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해결할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소탕하겠다는 것이다. 범죄자들이 체포에 불응할 시, 사살도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 생각되며 캄보디아 정부 입장에서 볼 때 국제적인 신뢰 문제도 있기에 이러한 협정 조인을 주장하면 조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어느 국가도 범죄 소굴 국가로 낙인 찍히는 것은 원치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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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피싱 범죄, 그 배후는 누구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