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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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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1
  •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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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2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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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9
  • 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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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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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9
  • 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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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세기의 두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나?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이 가까스로 성사된 이후, 이번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젤렌스키와 연속으로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한 뒤, 토마호크 장거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결정에 앞서 푸틴 대통령과 소통하여 결정할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두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었고 2시간 30분 동안 두 정치인은 통화를 통해 대화가 매우 유익했음을 나란히 언급했다. 그리고 내주 고위급 회의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고 제의했으며 이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대대적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트루스 소셜에 기재하기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진행될 양국 간의 교역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수 세기 동안의 염원이었던 중동에서 위대한 평화적 해결에 대해 축하를 전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중동에서의 성공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물론 정상회담으로 가기 전에 거쳐야 할 부분은 양국간에 고위급 회의에 있다. 정상회담에 앞서 조율할 사전 작업으로 보면 된다. 트럼프는 이와 같은 사전 고위급 회의에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미국 측 대표단과 함깨 참석할 것이라 설명했다. 아직 회의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기에 이는 더 두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데 이어 어제는 백악관에서 젤렌스키와 만날 예정에 있다. 그는 젤렌스키와의 회담 소식을 확인하며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이어 푸틴 대통령과 나눈 대화,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젤렌스키와 논의하고자 했다. 또한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평화 정착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으며, 전쟁 종식은 미국과 러시아 간의 협력에 대해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줄 것임을 확인해줬다.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만나기 전에 푸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푸틴 대통령이 토마호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트럼프의 의중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나섰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트럼프는 이날 전화 통화에서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졌는지의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유리 우샤코프 보좌관은 이날 기자들에게 러시아 측에서 주도한 두 정상의 대화가 매우 실질적이며 솔직했고, 또한 매우 비밀스러웠다고 브리핑했다. 그는 트럼프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면서 두 정상 간의 만남에 대한 준비를 즉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우샤코프 보좌관의 말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주로 논의되었으며,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를 자세히 전달했다고 했다. 그가 현 상황을 두고 러시아가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고, 키예프 정권은 테러 수단에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으로 볼 때, 정확한 전황을 미국에 전달하고,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이 전황을 바꾸기는 것이 아니라 러-미 관계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 노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 경고한 것으로 본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트럼프가 17일 젤렌스키와의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 때 제기한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통화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의 특사로 활동하는 키릴 드미트리예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 직접투자기금(Фонд прямых инвестиций) 대표는 푸틴과 트럼프의 통화가 전 세계에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이라 평가하며, 다음 단계를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드미트리예프는 유럽의 강경한 세력들이 평화 프로세스를 좌절시키려 하고 있지만,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화, 평화, 협력이 승리할 것이라 했다. 트럼프의 공개 내용만으로 볼 때 양국 정상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건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는지, 혹은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 문제가 논의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러시아의 매체들은 양국의 정상이 이번 통화로 인해 전쟁 종식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분석했다. 우선 종전의 돌파구는 푸틴 대통령이 키예프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건들을 철회하는 것이고, 즉각 휴전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가 푸틴의 방식대로 전쟁 종식의 방안을 젤렌스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강요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 둘 중의 하나라 보면 된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것도 아니라면, 결국 트럼프의 긍정적인 메시지는 다분히 전략적,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트럼프는 급한 대로 토마호크의 우크라이나 제공 문제를 주요 관심사에서 제외하여 미국과 러시아 간의 급격히 팽창하는 위기 의식을 제어할 수 있다. 러시아와의 협상이 진전되고 있음을 주장하며,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토마호크 논의를 부다페스트 정상회담 이후로 슬쩍 없는 척 넘길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부다페스트 정상회담 계획은 우크라이나와 EU에 주는 심리적인 압박이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트럼프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대러 강경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늘 친러시아 성향을 보여왔다. 부다페스트에서 러-미 회담이 열린다는 것은 트럼프가 러시아 측으로 기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3일 전만 해도 양국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예정된 백악관 회담에 대해 직접 브리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반격 계획에 대해 논의할 것이며 우리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한 고위 관리는 미국의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진짜 공세에 나설 수도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어떤 무기를 확보하고 계획이 승인되었는지에 달려 있다(Україна може розпочати справжній наступ, і це залежить від того, яку зброю ми отримаємо від Сполучених Штатів і чи буде схвалено цей план)."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반격할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전혀 없었다고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에 그와 같은 반격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이 있었다면 쿠르스크 작전이나 그보다 앞선 하리코프 반격 작전처럼 극비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첫 해인 2022년 가을, 기습적으로 하리코프 탈환 작전을 감행하여 러시아가 장악한 광대한 땅을 수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작전을 극비로 추진한 것이 성공한 주요 요인 중에 하나였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2023년 여름,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공격 정보를 사전에 유출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당국도 자주 이 문제를 반격 작전이 실패한 이유로 제기하고 있다. 당시 주요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작전 계획과 작전 루트를 자세히 보도했고, 이를 파악한 러시아는 3중, 4중 방어선을 구축했다. 진정한 반격이 있다면 이런 내용은 보도하지 않은게 좋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군의 공세 작전에 대해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밝힌 것은 실제로 이를 계획했다기보다 러시아에 대한 전략적 압박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시기적으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제공하는 시점과 비슷하다. 미국은 이를 통해 러시아가 종전 조건을 완화하고 협상에 나서는 것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와 같은 완화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 미국과 러시아의 고위급 회담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도출해내고, 부다페스트 정상회담에서 이를 확인하면서 종전의 돌파구를 찾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러시아는 기존에 내세운 협상안을 꾸준히 고수할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목적들인데 이를 완화한다는 것은 전쟁의 목적과 명분,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푸틴 대통령은 정치적인 영향력이 약해지고, 현재 공고히 된 푸틴 대통령의 내부 권력이 흔들릴 수 있다. 전쟁은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마무리 짓는 것은 그보다 10배 이상 더 어렵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 협상에 나서는 이유는 이를 통해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서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이다.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과 민중의 희생, 러시아라고 하는 다극화 내 한 축을 맡고 있는 강대국의 위상과 내실 등을 뛰어넘는 내용을 들어보기는 할 것이다. 그 대신 목표 달성까지 전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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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2
  •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를 보며 느낀 대한민국 외교부의 무능과 비판
    필자는 본래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부의 문제점에 대해 수없이 보고 겪었으며 그 행태들을 책 두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잘 안다. 한국 외교부의 문제는 비단 해외에 나와 있는 재외국민들에게 비협조적인 부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교전문가가 대사나 영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정권에 줄대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자들이 낙하산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외국민이나 여행자들의 안전보다 국내의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고 재외국민들의 행사, 특히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이 되는 행사에는 즉각 참석한다.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자신의 경력에 어필하고 이를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자칭 외교전문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정식으로 외무고시를 보고 당당히 입사한 전문가들도 있지만 이 전문가들조차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예절을 지켜줘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학습은 높은 자들에 대한 영접이나 어울리는 교육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부터 만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외교관들을 파견하기 전, 여행자의 신분으로 3~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여 각 나라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와 사회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권장하고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일반 국외 여행자들이 되어 현지인을 만나고 그 사회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목적에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권장하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전문가이고 중동에 파견되고 싶다면 중동을 돌아다니며 일반 현지인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 해당국가의 현실성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런 외교관의 기본소양이 전혀 안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의하면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라고 되어 있다. 어느나라든 위급상황이 생기면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가 자국민들을 도와주게 되어 있다.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은 교민 및 단기간 머물러 있는 해외여행자, 비즈니스맨, 연구자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나 우리의 세금으로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에 운영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든 보호하라고 쓰는게 세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봉쇄되어 오데사와 키예프에 있었다. 그 때도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행태에 학을 뗀 바 있다. 오데사에서 키예프까지 475km나 되는 거리를, 대사관에서 오데사에 봉쇄되어 있는 국민에게 알아서 택시타고 키예프로 오라는 황당한 행태를 겪은 바 있다. 그걸 항의하니 대사관에서 댓글 알바를 풀어 항의하는 국민을 오히려 비난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현지에 대한 소식 및 정보에 대한 업데이트도 전혀 안하고 있는 곳도 많다. 그리고 교민 및 돈 좀 있는 사업가들과 골프나 치러 다니고, 앞서 첫 줄에 언급한 것처럼 비전문가인 낙하산을 대사로 앉히는 경우도 꽤 많이 봤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제 외교관 중 대사 24명, 총영사 17명이 각 국가들에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데 어차피 외교나 교민 문제에 대해 일을 잘 안하는 사람도 많은데 있으나 마나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를 비난한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도 앉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 놓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전문가가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대사와 영사가 부임하지 않아 재외국민 보호의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외교부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외국민(우리나라 국적을 갖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이지만 재외공관에 재외국민 보호를 강제할 관련 법률이 없기에 법적인 근거가 없다. 영사 업무에 관한 지침만이 존재할 뿐이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업무 지침인 "외교통상부 훈령 제110호"가 존재한다. '훈령'은 행정기관의 내부적인 명령이나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적 강제성이 없다.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외공관에 있음을 법으로 명시하고, 그 범위와 한계, 이에 따른 징계와 처벌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 법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현실이니 외국에 대사나 영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재외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고 재외교민 보호의 의무라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 대사, 영사가 공석인 51곳이 현재 작동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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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2
  • 호주와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특성
    마오리(Māori)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으로 마오리어로 Māori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자신들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칭한다. 이는 '땅의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보통 코와 코를 비비는 인사법인 '홍이'(Hongi)와 박력 있는 의식인 마오리 하카(Haka)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마오리족은 혼혈을 포함해서 70만 명 가량이고 취업을 위해 호주 등으로 이민 간 마오리족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계 민족들 중 가장 늦게 분화했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200~1300년경으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정착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곳은 하와이키(Hawaiki)라는 섬이었다. 하와이키에는 여러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전쟁과 부족해진 식량으로 인해 배를 타고 새로운 섬을 찾아 정착하려 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 하와이키의 대족장인 쿠페(Kupe)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도중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쿠페의 아내는 "저곳은 섬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쿠페는 그곳으로 가 보았고,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고 하는데, '긴(Roa) 흰구름(Aotea)'이라는 쿠페의 아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와이키' 섬의 전설은 폴리네시아 동부에 여럿 존재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유전학과 언어학적 연구는 폴리네시아 인들의 출신지로 서쪽을 지목했다. 폴리네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꼽는 지명이 있다. ''Avaiki"(소시에테 제도), "Savai'i"(사모아), "Havaiki"(레오 타히티), ‘히바’(이스터 섬) 등이 그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 이름들은 고대 폴리네시아 공용어의 ‘사와이키’(Sawaiki, 고향)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이 단어는 다른 뜻도 내포하고 있다. 소시에테의 ‘아바이키(Abaili)’는 그 자체로 저승을 지칭하며,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사모아어의 ‘사우알리이(Saualii)’는 ‘영혼’을 뜻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향하는 곳은 해가 저무는 곳, 서쪽이다. 사모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사바이(Sanai)'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섬은 가장 서쪽에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DNA 연구 결과로써 밝혀낸, 사와이키의 위치는 사모아의 사바이이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그 섬은 다름 아닌 현재 대만이다. 지금도 대만의 원주민들은 수십에서 수백 부족까지 나누어지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아프리카 옆에 있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DNA가 볼 때,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전 대만을 떠나 필리핀을 거쳐 파푸아로 진출했고, 호주 인근의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금의 폴리네시아까지 진출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대만에서 온 것은 아니고 6~8000년 전, 중국에서 B.C 3000년 정도에 대만 섬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다만 폴리네시아 인의 경우는 한족들이 장강을 정복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대만 섬을 떠나 남태평양 곳곳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7세기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남극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왔다. 마오리족이 상륙하기 이전에 뉴질랜드는 무인도였고, 섬에는 모아나 하스트 수리 같은 거대한 조류들이 서식했다. 섬에 사는 사람을 본 적 없었으니 이 동물들은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종족인지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몇백 년 만에 마오리족으로 인해 모두 멸종되었다. 마오리족은 고구마를 경작하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특히 돼지가 이러한 새들의 알을 잘 파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개체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환경에 잘 적응했는데, 이들의 집은 화산섬인 뉴질랜드의 지열을 이용한 난방 효과를 얻기 위해 땅을 파서 지붕을 낮게 올렸으며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와 돼지고기 등을 묻고 뜨겁게 달군 자갈돌을 그 위에 덮어 놓아 음식을 요리하는 항이(Hangi)라는 요리법을 발달시켰다. 지열 난방의 효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눈까지 내리는 남섬에서 마오리족은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 질서로 움직였다.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었으며,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여성은 남녀 가리지 않고 같이 앉거나 재산도 평등하게 분배받았으나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마나(Mana)였다.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족장이나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었다. 아니면 죽은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의식적으로 식인을 행했는데, 적의 피부를 섭취함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 목적이 있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했고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른다. 영어의 터부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 라고 불리는 우상들을 모셔놓은 성소 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를 말한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로 나타났다. 가령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또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ā)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 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하지 않았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 것으로 여긴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먼저 마을에 들어오려면 그 마을의 추장에게 입장하려는 "부족"의 "족장"이 선물을 바친 다음, 서로 마오리어로 이야기를 한다. 자신들 부족의 역사와 전통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족에 들어오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문하는 부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성들이 대를 이을 수 있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 뒤에 위치한다. 들어오려는 부족장의 말이 끝나면, 부족의 사람들이 "후이 에 타이 에 타이키 에(Hui E Thai E Taiki E)"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족장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현대화로 인해 대놓고 전투를 벌일 일이 없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전통을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경계 태세를 취하기도 한다. 마오리족 마을에 방문할 때 맞이하는 사람들이 좀 위협적이어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마을의 8세 정도 되는 마오리 아이가 부족장이 말하는 도중에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하자, 부족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웃으며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적절히 협상이 끝나면 두 부족 사이는 적개심을 풀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부비는 인사인 홍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부분 땅에 뜨거운 돌덩이와 음식을 넣어서 만드는 항이(Hangi)라는 전통 저녁을 만들어 방문하는 부족과 같이 식사를 한다. 마오리족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화레 누낭아-Whare Rūnanga)이 존재한다. 남섬에는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 등의 집이 사용되고 있다. Tauranga (타우랑가)가 존재한 북섬에도 Rongomainohorangi (롱고마이노호랑기)에 있다. 보통 이곳 내부에는 돌아가신 조상님 사진 혹은 그림이 달려있다. 조상님 나이와 마찬가지로 건물도 무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마오리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몸을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게 둔다고 한다. 그 동안은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뭔가 무섭지만 조상님들이 보살펴주는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시신을 자신의 부족의 화레에 모시는 것이 매우 큰 의미이자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 마오리족 가정에서 아내가 사망하자 그 부모와 남편이 시체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움까지 벌인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싸우는 것 또한 그 사람에게 존경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일로,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다. 마오리족들은 과거에 위대한 인물이나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문신한 머리를 잘라내어 특수 처리를 한 이후 미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든 문신 두상 미라를 토이모코(Toi moko)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토이모코를 18세기 후반부터 수집해 거래하다가 1988년 때부터 마오리족들의 반환 요구로 인해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서 반환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있는 토이모코들이 마오리족들에게 반환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망하면 먼 친척과 아는 사람도 전부 와서 하루 정도 지내고 가는데, 마오리 왕족이 죽었을 때 25,000명이 왔다 갔다고 한다. 이 마을 회관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이는 사랑방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손님이 오면 여기에 담요나 매트리스 등을 깔고 잔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의 수련회 비슷한 개념으로 이와 같은 화레가 있는 마오리 촌으로 캠핑을 가기도 한다. 넓은 화레에 학생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데, 마오리 특유의 토템 문양들로 도배된 천장과 무서운 형태의 문신을 한 조상의 사진을 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뉴질랜드 럭비팀과 호주 럭비팀이 각각 마오리 하카와 에버리진 전투의 함성으로 기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마오리족은 평상시에는 Tangata Whenua라는 명칭에 맞게 고구마 농사를 짓고, 돼지를 기르며 살았지만 여러 이유로 갈등이 붙으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전투를 벌였다. 패배한 부족을 이끄는 상위계급 전사나 족장들은 마나를 흡수할 요량으로 먹혔기 때문에,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면 이기는 쪽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를 불린 부족이 생기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졌다. 섬인 뉴질랜드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손해도 손해지만, 언젠가는 마오리족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하카(Haka)라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두 부족은 모든 전사들을 이끌고 평지에 집결해 일정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모욕하면서 부족 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었는데,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혀를 빼 밀어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모두의 하카가 종결하고, 한쪽 부족의 추장이 자신들의 세가 밀린다고 싶으면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며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여겼으며, 패배한 부족도 자신들의 소중한 인력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이익인 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하카를 끝내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것 상관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마오리족은 전통적으로 파투(Patu)라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와 타이아하(Taiaha)라는 긴 나무막대기를 들고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도끼, 창, 원시적 수준의 칼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무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재료가 목재다. 날카롭게 깎아서 찌르거나 벨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둔기를 사용한다. 이러한 무기로 죽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려면 힘이 어지간히 세야 할 것 같은데 마오리족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갈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들면서 유럽 상인들을 통해 머스킷을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전투는 더더욱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 두고 머스킷 전쟁이라 한다. 1840년 마오리 부족들 간의 갈등을 중재한 영국과 마오리 부족장들 사이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 / Tiriti o Waitangi)' 이후 부족들의 갈등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때까지 마오리족은 이미 서로 2만 명 이상을 살상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직전의 인구 추정이 10만 명 정도인데, 머스킷 전쟁 이후에는 전쟁과 유럽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5만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스킷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었으며 마오리 부족들도 이 시기에 상당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 팽창까지 이루어지며 학살까지 발생했는데, 대표 사례로 1835년에 채텀(Chethum) 제도에 살고 있는 모리오리(Moriori) 족에 대한 공격에 손꼽힌다.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마오리족 500명이 11월 19일에 침입했고, 12월 5일에 마오리족 400명이 더 왔다. 이들은 모리오리 족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모리오리 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이를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모리오리 족은 한 차례 유혈 분쟁을 겪은 이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전통 누누쿠-웨누아(Nunuku-whenua, Nunuku's law)가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 회의를 열어 맞서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평화와 우정을 제안하며 물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전달하기 전에 마오리족은 한 번에 공격 해왔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모리오리족이 살해되고 많은 시체를 먹었으며 남은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 노예들조차도 몇 년 동안 학살하여 대부분 사라졌다. 그 결과 당시 1,700명에 달했던 모리오리족은 35년이 지난 1870년에는 100명만 남았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마오리 부족들은 모리오리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모리오리의 성지에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여 의도적으로 모욕했으며, 모리오리족의 결혼 및 출산 자체를 금지시켰다. 채텀 제도를 점령한 두 마오리 부족인 무퉁가(Mutunga)와 타마(Tama)는 이후에는 자신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몇 안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곧 영국 선교사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두 부족 대부분이 기독교도가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모리오리 학살은 다시 의기투합한 두 부족으로 인해 18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저격수의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참호전 속에서도 하카를 하는 대범함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노획한 독일제 무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 선원들이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카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 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 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영토가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불태워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William Honson)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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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 몽골 민주화의 아버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와 민주주의 몽골 공화국의 탄생
    몽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4년 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 된 나라가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여 독립했으며, 그 후 러시아 혁명시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 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몽골의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처이발상 시기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불교 승려 등은 숙청되어 사라졌다. 공산정권은 몽골의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도입시킴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개석(蔣介石)이 외몽골은 독립시키고,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해 몽골족은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후 모택동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의 공산 정권은 친(親) 소련주의를 고수하여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흐후 1984년 8월, 26년 동안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 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가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적인 노선을 견지했고, 이는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몽골의 개혁-개방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로부터 출발한다. 1963년 생인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 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알게 되었다. 엘벡도르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뜨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뻬레스뜨로이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엘벡도르지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 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엘벡도르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으게 된다. 1989년 11월 28일,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 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입니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뜨의 개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Одоо Монгол Улс Перестройка-г зоригтойгоор хөөцөлдөх цаг болжээ. Залуучуудын хийх ёстой зүйл бол үгээр дэмжихээс гадна үйлдлээр дэмжих явдал юм. Бид хүчээ нэгтгэж чадвал зорилгодоо хүрч чадна. Бидний зорилго бол ардчилал, Гласностын нээлттэй сүнс юм. Энэ зорилгоо хэрэгжүүлэхийн тулд ард түмний сайн дурын байгууллага бий болгох хэрэгтэй.)” 오랜 공산 치하에 젖어온 몽골 사회에서 엘벡도르지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후환이 두려워진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 명의 동지가 찾아왔으며,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학습 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反) 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붙였다. 마침내 1989년 12월 10일 아침, 그들은 수도 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이게 된다. 엘벡도르지는 그 자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 정권 68년만에 생긴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 선수 가리 까스빠로브(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Советскому Союзу следовало продать Монголию Китаю, чтобы преодолеть свои экономические трудности).”고 말했다. 이 체스 선수의 발언은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견해는 물론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의 발단이 된다. 새해가 되어 1990년 1월 2일,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 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이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으로 바트믕흐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1월 14일,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월 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칭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침략자로써 아주 치를 떠는 대상이었기에 소비에트 치하에서 칭기즈칸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칭기즈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칭기즈칸 탄생 600주년인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칭기즈칸을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반(反)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Хүний нүүртэй социализм)"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인 몽골인 거의 대부분은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자인 비치크 문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였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도 재평가하였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별을 지워버린 국기를 흔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시위대는 행진, 데모, 단식투쟁, 교사 파업 및 노동자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위대는 몽골 도심, 농촌 전반에서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불러나갔다. 이후 1월과 2월 매주마다 주말 시위가 열렸으며, 수도 울란바토르 뿐 아니라 주도 에르데네트와 다르항, 후브스굴 주 무룽에도 열리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매일 시위를 열자 1990년 3월 4일 몽골 민주 연합(MDU) 및 기타 3개 개혁 조직은 회동을 열어 정부의 회담 참석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시위대는 10만 명까지 불어났다. 1990년 3월 7일 민주연합은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공산당의 사임을 촉구하며 10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이들의 뒤를 이어 불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은 시민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3월 11일 정부-시민단체 회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몽골 인민혁명당 정치국 의장이었던 잠빙 바트뭉흐는 1990년 3월 9일 정치국을 해산하고 의장에 사임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 내에서는 시위대 진압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여 잠빙 바트뭉흐에게 작전 명령을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엄중하게 다루라고 말했다. 이처럼 몽골 민주화 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 날 집회에는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3월 9일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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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1
  • 미국 트럼프가 주선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세 번째 휴전 성사에 대한 의미
    미국과 서방은 중동과 아랍을 달래며 끌어 안으려 하는게 아니라 압력을 넣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은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통해 달래어 끌어 안으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제는 중동과 아랍이 미국과 서방, 이스라엘의 압력에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미국과 서방이 중동을 폭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이스라엘의 과도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의 행태가 오히려 반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트럼프는 가자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기에 이 또한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트럼프 체제에서만 세 번째 휴전이기 때문이다. 중동과 서방의 분쟁은 20세기 이전엔 치열한 종교적 대립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종교적 대립에 이념적 대립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민족적 대립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아랍 종파와 이란계 종파간의 종파대립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편승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하나로 뭉쳐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면 분명 서방과 미국, 이스라엘이 참혹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석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동맹을 맺었어도 서로를 견제했고 신뢰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반미, 반서방, 반이스라엘을 표방했지만 표면적인 것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정반대였다. 에르도안은 표면적으로만 서방과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떠들었지 서방과 중동 사이에서 자국의 실익만을 추구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마찬가지다. 아랍연맹, 동맹이라는 거창하게 선전했지만 그들 또한 가자지구에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그 사이에서 얻을 실익이 무엇인지만 계산했다. 결국 가자를 도운 국가는 이집트 뿐이었다. 하마스는 시리아의 지원이 끊기자 몰래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3년 전에 걸친 전쟁에서 잘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는 표면적으로 가자 지구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을 거부하고 하마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땅굴을 이용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하마스는 이집트에서 발원한 무슬림형제단의 형제나 마찬가지다.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압제에 반항하는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아흐메드 야신(Ahmed Yassin)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당 및 조직으로 창당한 것이 하마스(Hamas)이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무슬림형제단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이집트는 가자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서로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이 접해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항공은 이집트 아리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에 대비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쌓인 난민 수용 시설을 지었고, 이집트 공군이 가자 지구 상공에서 구호물품을 투하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가자 지구의 환자 수십명이 이집트로 이송되었으며 이집트 공군은 가자지구 북부에 구호품 공중투하 작전을 지속했다. 이집트가 봉쇄 조치를 했음에도 가자 지구를 떠나 이집트에 정착한 팔레스타인 난민이 11만 5,000명을 넘었다. 결국 가자를 도와준 것은 이집트 하나 뿐이었던 셈이다. 앞으로도 가자 지구를 복구하거나 난민들을 보살필 국가는 이집트 하나 뿐 일 것으로 본다. 지난 1948년 영국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기나긴 숙명적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여태까지 테러 전쟁을 분석해본적이 있는데 대개 전력이 열세인 국가나 민족이 할 수 있는 최선, 최후의 저항이다. 물론 테러는 반인륜적 범죄로 용서받을 행위는 아니지만 왜 테러가 발생하는지 원인에 대해 물어보고 질문하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왜냐면 그것은 3자의 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3자는 그냥 매체에서 보여주는 행위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선악(善惡)을 판단한다.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테러국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어서다. 그러면서 모든 중동 국가들과 아랍인들, 무슬림들은 테러 국가,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왜곡하여 해석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멀리 바다 건너 캄보디아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똑같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국제관은 "당장 나한테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무지하다. 트럼프가 성사시킨 세 번째 휴전 조약.. 이게 얼마나 갈까? 영원히 종식되는 전쟁이 아니기에 언제든 다시 터질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여기에서 멈출 마음이 없다. 이전처럼 가자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자를 도우려하는 국가들의 함선 또한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 그 고립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하마스 또한 어떠한 일을 벌이긴 할 것이다. 너무 강한 조치는 그 압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저항을 부르게 되어 있다. 강한 압력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어떠한 사물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 또한 살기 위해 과도한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본능과 심리를 갖고 있으며 보일의 법칙(Boyle's law)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나타나는 수많은 저항 운동과 반란, 민란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휴전 조약은 이스라엘이 가자에 진입하려 한다는 뉴스가 나온지 1~2개월만에 일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 시티 점령에도 실패했고 결국 가자 전체를 이스라엘 지상군이 장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휴전은 미국이 가자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체면을 세워주고, 가자에는 복구와 휴식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내세운 평화 안 중에 이제 한 쳅터가 겨우 정리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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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과 러시아인들의 담장에 대한 개념
    러시아의 지방도시나 마을들에는 버려진 집들이 많다. 대개 이런 집들은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런 집들의 처분은 굉장히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대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다. 따라서 수도인 모스크바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방면으로의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을 두었다. 지방정부는 지방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지만 해당 주민들의 소득 수준을 간과할 수 없다. 소득 수준에 맞게 세금을 걷다보면 예산 집행은 연방 의회인 두마의 승인을 얻은 연방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주는 예산으로도 한계가 있다. 러시아 토지법과 부동산법을 전공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버려진 집들 처분은 가장 먼저 걸리는게 예산과 인건비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걸리는 것은 러시아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 때문이다. 이 집들의 주인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데 보상금을 줄 돈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받아들인게 2018년에 개정된 주택법에 의거한 보험에 관한 부분이다. 이 "주택보험"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험제도를 차용했다. 이건 한국의 제도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한국의 보험제도는 러시아에서도 엄지척을 들어올릴만큼 러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사유재산도 보호하고 적절하게 보상도 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 2018년 법이 바뀌기 전의 문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항상 계약서를 휴대하고 있고 바뀌기 전의 법령에 연방 정부의 도장까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이 집들, 참 처분이 곤란한게 지방정부의 큰 딜레마다. 한국의 경우,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미관에 문제가 있다며 판자촌을 화끈하게 밀어버렸지만 러시아는 사유재산 및 토지법상 2018년 이전 개헌하기 전의 문제가 걸려 있어 골치 아프다. 사람도 살지 않고, 청소년들 탈선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저런 "폐가"들은 가로등도 잘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불빛이 약해 밤에 길 지나다니기 무섭다. 이처럼 치안의 문제도 있고 심각한 부분이다. 러시아 집의 담장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래 전부터 외부의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만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담장은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담장에 항상 구멍이 나 있는 것. 담장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지켜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주택의 창문 장식에는 전통적으로 두세 겹의 커튼과 레이스가 사용되고 창문은 심지어 3층까지 창살로 덮이곤 한다. 완벽한 담장의 개념은 폐쇄 사회를 만들어 내며 안전 유지에 드는 거래 비용을 높이고 있다. 경비원과 감시원들은 의례 준수를 위해 생산 노동에서 열외가 된 사람들이다. 러시아에 담장 현상이 생겨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자원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는 나라였다. 담장은 그들이 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담장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불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불신은 소련 시절부터 쌓여 왔다. 키프로스나 스페인 어딘가에 가서 높은 담장을 보면 그 너머에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셋째, 담장은 재산 문제와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체제를 도입한 이후 사유재산 보장을 약속했지만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유재산 보장은 매우 미약했었다. 사업가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사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가 언제라도 이 사업을 '가로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전까지 유일한 재산 소유자는 국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를 대리한 임시 경영자일뿐이다. 소련 시절의 심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소유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담장의 과대망상을 낳았다. 끝으로 담장은 끝없는 러시아 공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모종의 시도이기도 했다. 담장은 모든 종류의 유출입과 원거리 이동을 제한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이러한 담장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체제에 익숙해지면서 그 이전에 쌓여온 불신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대인 현재, 담장 현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 민주체제에 익숙해진 것이다. 게다가 세대도 소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서서히 주축으로 올라오면서 이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러시아는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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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최대 매물, 희토류(Rare-earth element)
    세계의 광물 경제는 중동의 석유,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국의 희토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자원들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은 석유 파동 당시, 자원 무기화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중동의 오일쇼크는 당시 등소평이 이를 지켜보면서 자원 무기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개혁 개방을 한 이래 희토류 개발을 적극 장려하게 된다. 이는 풍부한 매장량에 따른 채굴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제 기술과 인프라까지 갖추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이는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데 포함한 정제 설비 및 전력, 수송 인프라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자 정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희토류가 주목받는 이유는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자성적, 발광적 특징과 함께 탁월한 방사선 차폐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계 희토류 생산은 중국이 거의 90% 이상 독점하고 있는데 중국 광산에서 채굴 뿐만 아니라 이를 제품으로 만드는 정제 과정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중국은 1970년대 이후 희토류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거대 경제를 이루고 정제 기술도 이미 미국을 추월해버렸다. 희토류 생산하고 정제하는데 있어 기술 인력과 자본력에서도 다른 나라를 크게 앞서가고 있어서 앞으로도 중국의 희토류 시장 독점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진다. 미국 등이 중국산 희토류 자원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미국 본토의 희토류 광산에서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광산에서 채굴된 희토류도 미국 본토의 정제 시설은이 매우 낡고 규모도 적은데다 기술 인력도 부족해 경제성이 떨어져 제품으로 정제는 거의 중국에 위탁해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도 한동안 생산을 하지 않다 보니 인력이나 기술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뒤쳐진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타국의 희토류 광산 개발도 중국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독점이 단지 중국 광산 만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 채굴, 정제, 유통 등 희토류 산업의 전반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채굴이 중단된 폐광산까지 국가가 직접 재개발에 나서며 자국 내 희토류 공급망을 만들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내 인프라에 있다. 희토류 관련 연구 인력들을 하찮게 여기고 지원금액도 다른 자원에 비해 적게 책정했다. 그 결과, 미국 내 희토류 생산 및 가공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희토류의 수출량을 자유자제로 조이고 풀고를 반복했다. 이 때문에 희토류 가격이 다시 폭등하거나 폭락하여 세계 국가들의 애를 먹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희토류 매장량과 정제술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지금 같은 추세로 희토류를 소비해도 적어도 고갈될 때까지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기업들은 대체 소재 연구에 들어갔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고 있지만 이 또한 완전히 성공할지도 의문이다. 전기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1.5 kg의 희토류가 소요되는데, 토요타는 베트남 등 희토류 대체 생산지 확보에 나서는 한편 희토류를 쓰지 않는 신형 배터리를 개발했다. 그러나 베터리의 성능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 full 충전이 오래 걸리고, 베터리는 빨리 닳아 없어지는 사태가 계속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내구성 또한 문제가 되었다. 열이 빨리 받고, 그로 인해 화재 사건 또한 잦았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신형 베터리를 전량 회수해 희토류 없이 재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원래 미국은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희토류 생산국이었지만 환경 오염 문제 때문에 다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희토류 자원 무기화에 맞서 다시 자국의 희토류를 채굴하며 대항하려 하고 있지만 희토류 채굴은 쉽지 않다. 희토류는 채굴 및 가공 과정에서 극악한 환경 오염과 심각한 산업 재해를 야기하고 있다. 정화 비용이나 노동자에 대한 복지 및 보상 등 기업이 사회적, 윤리적인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전기 및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 곳,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공산당 1당 독재의 통제력으로 인해 장기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일관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서 최상이고, 환경 규제 또한 느슨하다. 희토류를 정제하려면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또한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들과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고 있다. 그 이유로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도 발생하는 등, 환경파괴가 심각하며 이를 처리하는 인원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하고, 독성 화학물에 대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인명이나 환경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중공이라는 나라의 특성, 이로 인한 희토류 정제는 중진국급 국가 중 가장 땅이 넓고, 환경 존중,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는 중공 만이 오로지 돈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희토류 채굴 및 정제를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환경 단체와 인권 단체들의 압박이 강해 감히 희토류를 정제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더라도 억제하기 매우 쉬운 체제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밀어 붙일 수 있었다. 여기에 아주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인프라, 무엇보다 희토류를 소비하는 산업인 전자와 방산, 배터리 등이 꾸준히 개발되고 있는 한, 희토류는 채굴과 정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희토류 채굴은 인건비가 저렴해야 하고 극심한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을 동반하게 되어 있기에 미국은 무언가 획기적인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희토류 관련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고, 채굴은 미국에서 한다할지라도 정제는 중국으로 보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미 지질 조사국(USGS)에 따르면 희토류 글로벌 생산량(17만 t)의 70.6%(12만 톤)가 중국산이라고 집계했다. 심지어 미국이 수입한 희토류의 80%가 중국산일 정도로 미국은 희토류에 관해서는 전량 중국에 의지하고 있다. 러시아, 베트남,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도하면서 희토류 시장에 새로 진입했다. 특히 EU는 희토류의 98%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인데, 2023년 3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에 꼭 필요한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의 65% 이상을 한 나라에서 수입 못 하게 하는 핵심 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중국으로부터의 희토류 수입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쉽지 않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도 희토류를 중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하고 있다. 한국 또한 스마트폰, 하이브리드 자동차, 고화질 TV,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항공우주산업 등 첨단 산업에 희토류가 들어 간다. 중국이 싫어 중국과 단절해야 한다면 당장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 자동차 등을 쓸 수 없게 된다. 혐중론자들이 좋아하는 유튜브나 SNS, 릴스 또한 중국산 희토류가 없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 고화질 TV,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데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최근 국내 자동차 업계는 희토류인 ‘디스프로슘’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디스프로슘은 온, 습도에 약해 장기 보관이 어려운 품목으로 재고가 많지 않은데, 재고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 한다. 디스프로슘은 올해 4월, 중국이 자원무기화로 인해 수출을 통제한 7종의 희토류 가운데 하나로, 반영구적으로 자력을 보유한 ‘영구자석’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중국이 거의 전량 생산하는 원료로, 의료 장비부터 전기차 모터, 풍력발전기 터빈 등 자석이 필요한 곳에 모두 쓰인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전기차 모두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 중이다. 중국은 한국 정부가 지난 2023년 지정한 ‘핵심 광물 33종’ 가운데 30종을 핵심 광물이나, 수출 통제 품목으로 지정한 상태라 중국의 움직임이 한국 산업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 자동차 부품 산업은 수출액의 24.2%, 이차전지는 10.8%가 감소하는 등 타격이 불가피하다. 반중 혐중해봤자 우리한테만 손해다. 전자 부품, 자동차 부품, 컴퓨터(노트북, 스마트폰 포함) 부품의 기본 원료는 희토류고, 중국이 이걸 무기 삼는다면 대한민국은 방법이 없다. 미국도 중국 희토류 때문에 달리 대안이 없어 난리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어디서 희토류를 구입해 정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처럼 인권 유린, 환경 파괴 등등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매우 유별난 국가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도 꼼짝 못하는데 한국이라고 뭐 다르나? 필자 또한 혐중론자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가야 한다. 전 세계 주력 산업이 점차 친환경으로 갈수록 핵심 광물의 수요 역시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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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9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친정과 숙청
    차르 즉위년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차르 체제에 대한 견제 및 이반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시종관인 아다셰프(Алексей Адашев), 사제 실베스트르(Сильвестр), 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등의 도브랸들을 측근으로 발탁했으며,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보야르들의 ‘귀족의회’인 두마에 대해 대척점을 마련했고 이들과 대대적으로 대립했다. 1547년에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카이사르의 별칭인 차르를 칭하고, 이후 차르 직위는 모든 루스 대공국 왕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명칭이 되었다. 이후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 제국(Царство Российское)이라고 지칭된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참조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일부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차르로 등극한 첫 해에 발생한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피해가 막심했다. 크레믈린에 소재하던 그의 조부인 이반 3세의 종탑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 흥분한 시민들의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를 화재의 진화 및, 차후 3년간 세금 면제 등으로 사태를 수습했으며 개혁 성향의 측근들과 함께 키예프 13공국들의 공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노력했다. 당시 이반의 왕권 강화를 도왔던 13공국 공후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인 메르데예프(Мердеев), 페레야슬라블 공후인 벨로도르프(Беллодорв), 체르니코프 공후인 밀레세예프(Милисеев)였다. 이들은 왕후인 아나스타시야,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 등과 더불어 이반 4세의 최측근으로서 초기 개혁 정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해, 이반은 선출회의(Верховный)를 도입하여 귀족들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선출회의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귀족 정권의 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자신을 배경으로 세력을 갖게 된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키워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어 1547년과 154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인 시성식이 있었다. 그 중 농민 출신들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러한 농민 출신을 시성한 사실은 러시아의 기독교화 작업이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에 의해 체계화되고 통일된 기독교 의식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정교회로 하여금 귀족들을 견제하는 장치로 활용했고 여기에 대다수 시민인 농민들을 그 세력 하에 두어 수백 년간 뿌리 박혀 있던 귀족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흔들기 위한 또 다른 의도였다. 차르로 등극한 1548년 이반 4세는 명망 있는 가문 로마노프 집안의 아나스타샤를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외국과 외교 동맹을 맺을 생각도 했지만, 이반 4세는 국내 안정과 더불어 그 동안 근간을 이루었던 러시아 귀족들을 배려하여 그와 같은 결정을 했다. 이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을 달래 반란 발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이반 4세는 1549년에 서구식 신분제 의회와 유사하며 프랑스의 삼부화와 유사한 ‘전국 회의’,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 법 제정, 지방 행정 개혁 등 주요 사안을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이들에게 승인을 요청하도록 했다.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한 이반 4세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상인과 도시자유민 등의 ‘제3 신분’ 대표들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보야르들이 자행한 모욕과 부정부패 등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례와 비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 결과, 보야르들은 차르에게 굴복했으며 이반 4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기 시작한다. 이반은 1550년의 개혁 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보야르들이 전권을 행사하던 지방 법정에 지방 드보랸과 자유민들을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 세습 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차르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와중에 토지 문제만큼은 보야르와 두마의 저항으로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였으나, 이반 4세는 빠르게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을 중심으로 토지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조부인 이반 3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두려워 이를 방관했을 뿐이다. 그가 귀족들의 세력에 굴복한 것은 몽골-타타르 세력과의 전쟁 중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웨덴이나 폴란드의 외세를 공식적으로 끌어들일까 우려한 행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반 3세와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는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차르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귀족들에게 굴복했으며 그들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부분에 대해 법적으로는 위배되지만 그들의 반발에 두려워 비공식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550년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 법전의 이름을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라 하였는데 이 수제브니크(Судебник)는 이미 이반 3세 때 공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두마의 세력의 월등히 강해 법전을 만들고도 행하지 못했지만 이반 4세는 수제브니크를 다시 회복시켜 몇 가지 법령을 추가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군대 제도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하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은 앞으로 바다의 길이 열릴 것을 전망하고 해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으며 중앙 권력 강화로 인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화가 지속되자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다시 연이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했으며 로스토프에서는 대공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윌리스(Gustav Wilis) 공작의 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반은 방화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한편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인사들을 체포하여 부패, 뇌물, 탐학, 그리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화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Андрей Курбский), 시종관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 등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노브고로드에 군사를 보내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 생각하여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체포하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로스토프 대공을 모스크바의 두마 회의 빙자해 불러들였고 이내 체포하여 처형하고 로스토프로 군사를 보내 대공의 가족들을 모두 참살했다. 1551년에는 이른바 ‘100개 조항 회의’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고, 중앙 집중식 통일된 정교화 작업을 시행했다. 1552년 10월 이반 4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낳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의 원인이 되었던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장남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후에 그는 7번째 왕비 마리아 나가야(Мария Нагая)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반란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게 되는데 증상에 대해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이반 4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매우 어리다고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Владимир Старлицкий)를 이반의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 집권 초기의 혹독한 중앙 집권에 반발하고 있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 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반이 사망하고 난 이후를 도모하게 된다. 그 동안 이반을 충실히 보좌해왔던 아다셰프, 실베스트르였지만 이반의 생각과 이와 같이 달랐던 이유는 이반의 전제 정치에 희생만 강요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반의 편에 서서 그 동안 실권을 누렸던 보야르들의 권위에 반발했지만 이는 그들이 기존의 보야르들을 제압하고 자신들이 그 기득권을 장악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이반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쿠데타 모의까지 했지만 아직도 이반의 지지 세력이 강력했고 자신들과 적이었던 보야르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하여 병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반은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신함을 알고는 분개했고 이들을 모두 숙청하려 하였지만 대주교 마카리(Macarius)가 이들을 용서할 것을 상소하여 이들이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분기를 누르며 이들을 다시 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숙청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상황에서 이들은 다시 이반의 생각과 달리하여 끝내 이반과 갈등 관계를 형성했다. 우선 이반의 생각은 자신의 장남인 드미트리를 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완전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 드미트리는 생후 5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아였기 때문에 그를 태자, 혹은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은 너무 빠르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자신이 혹시 모를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생각이었지만 선출회의의 대표들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드미트리에게 반 강제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다음 서약을 하지 않는 자를 불충의 죄로 물어 모두 처형해버렸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이반은 다시 한 번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서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을 명령했다. 또한 이반은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어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은 다시 충돌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욱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하여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귀족들이 동방 진출을 원했던 이유는 아직 킵차크 칸국의 잔여 세력들이 건재하고 있고 이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인 13공후 국들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는데 동방 지역 경략을 늦추고 서방 지역 경략을 강화한 이유 역시,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보야르들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의 킵차크 잔적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서방 원정에도 문제 생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칸국 정벌에 나서 같은 해 12월에 카잔 칸국을 병합했으며,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했다. 이에 러시아 영내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이반 4세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도는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병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자주 노여워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등 심한 광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이반의 평정심과 자제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 것은 1560년 그가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 왕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후의 자리를 지키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 주장하며 더욱 포악해지면서 귀족들을 탄압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귀족들에게 독살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이반이 1558년부터 이어진 귀족들의 정복지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주장에 반발한 것에 대해 왕비가 마침 사망하자 귀족들에 혐의를 지우고 자신에게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 혹은 그 세력마저 완전히 제압하여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로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반의 중앙집권화와 전제 정치 확립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정적들 제거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반의 광폭한 인격으로 이어졌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Грозный)”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광폭 통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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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9
  • 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자 잠재력이 높은 몽골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 부국이다. 구리와 석탄 매장량이 각각 세계 2위와 4위 규모일 정도로 지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몰리브덴의 매장량도 세계 11위이며 희토류는 전세계의 16%가 몽골에 묻혀있다. 타반 톨고(Taban Tolgoi)에는 석탄, 오유 톨고이(Oyu Tolgoi)에는 구리와 금 등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광산들이 사실상 몽골 경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몽골 GDP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4.8%에 달하고 있다. 광업은 2위 농업의 16.5% 보다 훨씬 높다. 특히 수출에서는 광물 자원 비중이 90%가량으로 절대적이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바꾼 몽골은 이처럼 넘쳐나는 지하자원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광물 가격이 오르고 광업 개발 투자가 급증한 덕택에 2011년에는 17.3%라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몽골 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 광산, 일반 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 규모가 GDP의 5%를 넘고, 국가 안보 및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 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전략 광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채굴권의 승인, 투자 보장 계약 심의, 정부 지분율 결정 등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광산 개발 방식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 광산에 반드시 지분을 보유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몽골의 전략 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등 주요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오유 톨고이 지역은 우문 고비 아이막 항복드 솜(Hangbokd Som)에 위치한 80,000ha 면적의 세계 3대 구리 광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구리, 금 등이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계 이반호에 미네스(IVANHOE MINES)사에 의해 탐사 되어, 광업 메이저 회사인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울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가 66%, 몽골 정부 34%의 지분을 소유하는 형태로 2009년에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쿠오이세 힐 레소우르체스(TURQUOISE HILL RESOURCES)회사는 다국적 광업기업인 리오 틴토(RIO TINTO)가 50.8% 소유함으로 리오 틴토(RIO TINTO)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확정, 추정 및 예상 매장량을 모두 합산하여 31.1억 톤의 매장량이 보고되고 있으며, 품위는 Cu 0.98%, Au 0.299g/t으로 나타난다. 노천 광산과 지하 광구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 노천 광산 채굴만 이루어지고 있다. 지하 광구 리프트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25년부터 지하 광구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 연간 순 구리 55만 톤, 금 45만 톤으로 세계 3위 구리 광산이다. 따라서 2020년을 기준으로 한 해 동광석 100만 톤을 채굴하여, 69만 톤 동정광을 수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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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8
  • 전왕국(滇王國)과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 북방과의 또 다른 연결고리
    이들 나라 중 전왕국(滇王國)은 고고학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 역시 촉국(蜀國) 만큼이나 독자적인 문화를 나타내 중국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삼성퇴 문명과 마찬가지로 황하 문명보다는 앞서 있으며 그 동안 서남이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 문명이 15세기 이후에 발달했다고 추정했던 중국학계는 그들의 연구목록을 대폭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중심인 곤명(昆明)일대가 전국(戰國)시대 당시 전국(滇國)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경내에 전지(滇池)가 있기 때문에 전(滇)으로 간칭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는 호상(湖上) 주거 생활을 했는데 무선호(抚仙湖)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약간 발견된 것 같다. 또한 묘지와 해당 무덤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발굴이 있었다. 이러한 발굴지의 위치는 호반에서 떨어진 언덕에 자리 잡았었다고 운남성 고고학연구소에서 주장하고 있다. 전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사마천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야랑과 함께 “왕인(王印)”이 주어진 서남이의 두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한 무제가 하사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명문이 새겨진 도장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 명문의 도장은 학술적으로 한나라와 서남이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 B.C 109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사천(四川) · 운남 방면을 정벌했을 때 한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에 전왕(滇王)에게 왕인(王印)을 주었다. 그러나 서기 전 80년대 서남이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전족의 유적인 석채산유적(石寨山遺蹟)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진녕현(晋寧縣) 석채산에 있는 무덤군으로 전한 초~후한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동물의장이 우수하면서 환조(丸彫) 내지 선각(線刻) 무늬 모양으로 사회생활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많다. 그 중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인 전족에게 조공하고 사역된 피지배민족으로 식별되는 것도 있으며, 기년제사(祈年祭祀) · 공희(共犧) · 농업 · 가내작업 등이 세부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어 이 지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5∼1960년 4회에 걸쳐 운남성 박물관이 50기(基)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석기 · 토기 · 동고(銅鼓) · 편종(編鍾) · 동기 · 철기 · 거울 · 금은기 · 칠기 · 도기 · 화폐 등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한쪽 날의 돌도끼 · 유견(有肩)돌도끼 · 간돌화살 · 돌송곳 등이 있고, 토기로는 접시 · 항아리 · 바리 · 완(硯) 등이 있다. 무덤은 지방적 색채가 짙은 청동제 무기 · 장신구를 풍부하게 부장한 것이 많으며, 중국 문화의 중심지에서 수입된 유물도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6호분에서 출토한 <전왕지인(滇王之印)>의 인문(印文)이 있는 금인(金印)은 서기 전 109년 한(漢)나라 무제가 전족(滇族)의 왕에게 사여(賜與)한 것으로 보이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물론 이 도장은 정복자인 한나라에게서 하사받게 된 것으로 이 시기는 전왕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무덤이나 유물이 점점 한나라 양식을 따라가게 되던 때이다. 하지만 한나라에 복속되기 이전의 유물들은 중원의 유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국인들은 대체로 전문적인 야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귀족들의 무덤들은 인상적인 청동 예술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뜻밖에 부분에 있어 이들 지역에 스키타이 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북방계 문화도 나타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유지에는 석채산(石寨山), 이가산(李家山), 양포두(羊甫頭) 등이 있는데 이곳 유지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전혀 한족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 유목적 영향 뿐 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영향까지 받았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이 교차하면서 혼합되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부분 때문에 서남이는 완벽한 남방계가 아닌 북방과 남방 혼용의 문화로 주장할 수 있다. 5호 16국 이전에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리와 사천 지역의 중간 지역을 두고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은 다소 황당한 명을 장군 장교(莊蹻)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검중(黔中) 이서(以西)의 지역을 경략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지리적으로 전혀 모르는 곳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소위 한족이 표현했던 미개한 서남이(西南夷) 지역이 역사 기록에 출현하게 되었던 첫 번째 사례였다. 초나라 장수 장교는 협로를 뚫고 들어가 서남이를 정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초나라의 경양왕(頃襄王) 22년 (B.C 277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을 차지하여 길이 끊기게 되면서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현지의 왕이 되었다. 위왕 시기와 경양왕 22년 전후 50년의 간격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장교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그 후손이 왕이 되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관련된 사료『사기(史記)』「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중에서 큰 나라로 기록된 것이 야랑(夜郞), 전(滇), 공도(邛都), 사(徙), 작도(筰都), 애방(厓駹), 백마(白馬) 등이다. 남월(南越)의 경우 조타(趙佗) 시대에 재물을 동원해 동서 만 여리에 이르는 지역을 역속(役屬)시켰다고 하는 기사가 있는데 야랑 역시 그렇게 역속 되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가 월(越)을 평정하고 9군을 설치할 때는 역으로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파촉(巴蜀)의 죄수병과 야랑(夜郞)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여파로 서남이 지역에도 공도(邛都)를 월휴군(越巂郡),작도(筰都)를 침리군(沈犁郡),애방(厓駹)을 문산군(汶山郡),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설치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주로 한 무제(漢武帝)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뚫을 때 파촉 지방의 재력을 이용하다 그 지역의 민생이 피폐해 지자, 흉노를 방비하는데 전력하고자 야랑(夜郞)의 2개 현(縣)과 1개의 도위(都尉)를 제하고는 그 지역에서 물러난 실패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서남이인들은 그 후로는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당대(唐代)에는 남조(南詔), 송대(宋代)에는 대리(大理) 등을 세웠고 현재도 그 후예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서남이의 여러 종족들은 일찍부터 중원 왕조에 종속되었다. 한 무제 건원(建元) 6년(B.C 135년)에 한왕실에서는 야랑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하여 행정을 관할하였으며, 그 후에 계속하여 공(邛) · 작(笮) 등에도 하나의 도위(都尉)와 10여개의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예속시켰다. 한대 원정(元鼎) 6년(B.C 111년)에는 지금의 운남성 동부와 귀주성 서부 지역에 장가군(장가郡, 장=조각장+羊, 가=조각장+可)을 설치하고 야랑후(夜郞侯)를 야랑왕(夜郞王)에 봉하였다. 서남이의 다른 부락들도 이것을 보고 모두 귀순을 청하였다. 한 무제는 마침내 공도(邛都)를 월수군(越수郡)으로, 작도(笮都)를 침려군(沈黎郡)으로, 염방을 급산군(汲山郡)으로,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각각 고쳤다. 서남이는 부족 간에 균형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격차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 야랑 · 전 · 공 등의 부족이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머리를 감아올리고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촌락을 형성하여 모여 살았다. 수 · 곤명 등은 모두 변발을 땋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도 · 작도 · 염방 등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유목생활도 하였다. 서남이는 상업에도 활발하게 움직여 인접한 촉(蜀)나라와 무역을 하였는데, 그들의 주요 생산품인 작마(笮馬) · 야크털 · 금 · 은 · 동 · 상아 등을 가지고 그들에게 필요한 비단 · 철 · 소금 · 대 · 레몬잼 및 일용품과 교환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년)에 한 왕조는 군대를 동원하여 전족(滇族)을 토벌하였다. 이에 전왕(滇王)이 항복하자 전(滇)에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하고, 전왕에게 옥새를 하사하여 그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전족에 관한 업무를 계속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야랑왕 흥(興)과 구정(鉤町)의 전우(田禹), 누와후(漏臥侯) 유(兪)가 여러 해 동안 교전을 벌이자 한나라 황실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그들은 거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한 성제(成帝) 하평(河平) 2년 (B.C 27년) 장가태수 진립(陳立)이 야랑왕 흥을 죽임으로써 야랑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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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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