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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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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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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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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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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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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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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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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강남 개발의 역사 : 수 양제 시대에 건설된 대운하
    위진남북조 시대 약 400여 년 간의 중국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인해 경제 문화적으로 남북 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隋) 문제(文帝)는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계획에만 그쳤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완성시켰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이는 남북조 시대 등의 분열 시대로 인해 남북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0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에는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공사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通濟渠)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하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회화(淮河)와 합류했다. 통제거(通濟渠)로 인해 황하와 회하(淮河)가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회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2년 후, 강남 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 이 운하 개통은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은 모두 400km 정도로 여겨진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한 것에는 수나라 도성인 장안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 장안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였던 강남에서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 효율성이 떨어지며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소한 서민 경제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게 기간을 넓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했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강제로 투입시킨 게 문제였다. 거기에다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에서 저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재림이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서 수 양제의 폭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漢)나라 이후 개발되지 않은 매우 기후가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매우 가혹하게 징집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당시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과 황하, 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는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기술로 인해 2,700km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낙양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낙양 함가창(含嘉倉)부터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까지 300리를 육상을 통해 물자를 이송해야 했는데, 물자 이송에 필요한 양도 매우 엄청나서 이동시 운송량의 반이 소모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수, 당나라 시기에는 대운하 개통 이후 현종(玄宗) 시기까지 비판을 받으면서 낙양을 장안 못지않게 중시했다. 당시에는 직접 황실과 조정이 낙양으로 행행을 했다. 양제나 측천무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결국 현종 시기인 734년의 낙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江淮河南轉運使)가 된 배요경(裴耀卿)이 삼문협 동쪽에는 집진창(集津倉), 서쪽에는 삼문창(三門倉)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통로로만 육상 운송으로 이송시키게 했다. 이로 인해 육로 운반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李齊物)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 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開元新河)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 세운 후량(後梁)부터 5대 왕조와 송(宋)나라, 금(金)나라까지 변량(汴梁)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후일 금나라가 북송을 정복하고 송나라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해서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나라 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으며, 대운하의 역할은 원(元)나라 시기에는 바닷길이, 명나라 때는 새로 개발된 대운하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 양제의 대운하는 끊겨 있는 상태에 있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 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 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나라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북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학대했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택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대운하의 첫 번째 통로는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거 수리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먼저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고, 이전에 팠던 광통거(廣通渠)와 연결하여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 교통이 뚫리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한구(邗溝)와 장강 남부의 운하를 개조하여, 장강, 회하의 여러 지류를 가로지르는 운하 체계를 완성했다. 대운하,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공사로 전 세계에 유명하다. 대운하는 북으로 탁군에서 남으로 항주까지,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 및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의 성을 지나가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관통한다. 전체 길이는 1,784km에 이른다. 수 양제 양광이 건설한 대운하는 세계에서 하류 운수거리가 가장 길고 공사 량이 가장 많으며 역사가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이다. 운하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 물력, 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형 운하 공사의 건설을 명하였고, 많은 민간의 인력, 물력, 재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은 수나라의 조기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수 양제 양광 본인에게도 중국 고대 제왕사상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隋書-煬帝本紀>上, 卷3의 기록에 의하면, 대업 원년, “하남의 각 군의 남녀 백여만을 보내어 통제거를 파게하고, 서원에서 곡, 낙수를 황하에까지 끌어들였다. 대업 4년에는 “정월 을사. 조서를 내려 하북의 여러 군의 남여 100여 만에게 영제거를 파게 하여, 심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했다.”라고 하였다. 우선 수 양제는 대운하를 파기 위하여 수백만의 백성을 동원했다. 이 같은 인력동원은 현재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수 양제가 이처럼 대규모로 대운하를 파게 된 것에 관하여,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수 양제 자신이 운하의 수로를 따라 양주로 가서 미인들과 즐기는 것 이 외에도 양제가 수양(睢陽)의 지기(地氣)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때 한옥(韓偓)의 <開河記>에 의하면, “수양에는 왕기가 나왔다. 하늘에 점을 친 경순신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500년 후에 천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양제의 처남이자 간의대부(諫議大夫)인 소회정(蕭懷靜)은 운하를 파서 첫째는 광릉까지 가는 길을 열고, 둘째는 왕기를 파버리자고 한다. 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는 아주 좋아하며 대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의 제동야인(齊東野人)도 그의 장회소설 <隋煬帝艷史>에서 장회의 편명을 “경순신이 천자의 기운을 고하고, 소회정은 운하를 파는 계책을 바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아주 상세하고 그럴듯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대운하를 둘러싼 야사이자 전설이다. 이것으로 역사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이 풍수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이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양주(梁州)에 가서 황음한 일을 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민간 전설들로 판단해 보자면, 대운하의 성공적인 건설은 최소한 수 양제로 하여금 그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隋煬帝艷史>에서는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양광은 양주경화(揚州瓊花)를 구경한다는 빌미로 여러 번 대운하를 따라 강남으로 가서 엽색 행각을 벌였다. 매번 대운하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양안에는 5색 깃발을 휘두르고, 그 기세가 융중했다고 전한다. 대운하가 지나는 소북의 민간에는 지금까지도 양제가 당시 양주에서 미녀와 즐겼던 황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수나라 때와 수 양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서와 서적들을 조사하다보면, 그중에는 괴이하고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사서와 서적에서는 야사 전설의 선입관으로 수 양제를 항상 황음무도한 일만 생각하는 후안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양제를 유사 이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혹하며 가장 황음한 폭군이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수 양제가 세계에 유명한 대운하 공사를 벌이고 여러 가지 역사적 업적을 쌓은 것과는 아주 배치된다. 마치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그 목적이 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든지, 왕기를 없애기 위함이라 폄하하고 있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수 양제는 양주의 미녀들을 모조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즐기면 되지 굳이 운하를 축조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왕기를 없애는데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운하까지 축조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면 재력이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동원되는 대운하를 건설한 이유는 남북 지역의 통합을 염두해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히 양주로 미인을 보러 가기 위함은 아니었고 수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함도 아닌 국가 통합의 차원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양제는 물자가 풍부한 강남 지역의 많은 물자들을 북으로 운송하여 경도와 황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순유하고 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에 대한 일례로 대운하를 판 후에, 강남 지역에서 낙양으로 운송되는 쌀, 비단, 진귀한 보물 등이 계속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서적에서는 수 양제를 매우 황음하고 지력이 떨어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수 양제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당시의 문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후일 양제는 요사스러운 폭군처럼 묘사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양자강 유역을 기준으로 화북 경제권과 강남 경제권이 분리다. 중국 역사에 있어 군웅할거의 주요 무대가 화북 지방에 집중되다 보니 주목받지 못했을 뿐, 수나라로 통일되기 전까지 강남 지역에서도 왕조가 계속 이어지면서 양자강 유역 이남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금(金)나라에 밀린 송(宋)나라가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강남의 경제력은 송나라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반증이 통일 왕조 중의 하나인 수(隋)나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해 짧게 유지되다 망한 중국의 왕조로 여겨진다. 수나라는 400여 년 동안 고착화 되어있던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세워졌지만 안정을 회복하기보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과욕으로 동북아시아의 또 다른 강자였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을 과도하게 소모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북의 물자로만은 부족하게 되니 풍요로운 강남을 이용하려 한다. 육로로 강남의 물자를 가져오는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을 파악한 수나라는 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강남 운하다. 현대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엄청난 인원이 동원인 약 1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어 남북으로 약 2,700km의 길이의 물길을 약 8년 만에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토목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는데 동원된 백성들의 원망으로 돌아선 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경제의 중심이었던 여항(黎杭, 항저우)에서 시작된 운하는 정치의 중심 중 하나였었던 낙양(落陽)을 거쳐 북방 군사의 중심이던 탁군(涿郡, 베이징)까지 이어진다. 운하로 강남의 풍요가 화북까지 이어져 전쟁 준비는 마쳤지만 자만으로 시작된 전쟁은 패배는 귀결되었다. 짧았지만 강하고 단순했던 수나라로 인해 이후에 성립된 왕조들은 운하를 이용해 긴 기간 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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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이유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뇌부부터 말단 집단까지 포함한 다른 집단들의 연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하고 지휘할 수 있는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수뇌이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 명령을 내릴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콜차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 대도시들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최전성기에도 68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 보지 못했다. 병력도 적어 한계가 있는데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다보니 강력한 적군의 무력이 더욱 증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의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 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이 피지배계층이라고 무시하며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이자 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코사크와 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대의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는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를 유도해 투항시키거나 탈영을 유도했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했다. 백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파기되었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다.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정권만 바뀌어진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발트 해 국가들이 간섭 군과 더불어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중부 및 동부 우크라이나 이 외에는 카프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리에 의해 7만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와 같이 긴 전쟁을 이미 치루었던 차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어려운 처지였던 데다 간섭 군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新韓村)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1920년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부 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적군의 트랴피친(Тряпицын)의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볼셰비키 군에게 패배했고, 이 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 국가로 탄생되었다. 마지막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Аяно-Майский)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Анатолий Пепеляев)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볼셰비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볼셰비키의 포로가 된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까지 남아있는 외부 간섭 군대인 일본군도 1924년에는 완젆;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며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이에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들에 괴뢰 국가들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 행위에 영토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시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 것에 급급하여 그러한 비어진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도 했으나 백군과 협동으로 인해 파르티잔들을 진압했고, 자국의 군대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反) 혁명 세력에 대한 지지 기반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러자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측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1920년 반(反) 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인해 붕괴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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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 체코 총선이 끝나면서 부각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
    지난 10월 3~4일 양일에 걸친 체코 총선에서 ANO 2011과 당수인 안드레이 바비시가 승리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2024년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페트르 파벨(Petr Pavel) 체코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에는 80만 발 규모로 시작된 지원 계획이었는데 2024년 4월에 2025년 말까지 180만 발로 대폭 확대하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당시 체코의 야나 체르노초바(Jana Černochová) 국방장관은 2024년에만 다양한 구경의 포탄 150만 발을 공급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는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될 것임을 언급했다. 체코 정부는 2025년 가을까지 대(對) 우크라니아 지원을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밝혀욌다. 특히 155mm 및 152mm 대구경 포탄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 원조가 지연된 바 있었던 2024년 초, 우크라이나가 겪었던 포탄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체코 이니셔티브 발표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포탄 수의 격차가 축소되는 추세를 보였었다. 얀 리파브스키(Jan Lipavský) 체코 외교장관은 이와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간의 포탄 사용 비율이 1:10에서 1:2로 크게 개선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전장 방어 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페트로 피알라와 파벨 대통령이 주선한 성과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영토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의 80%를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포탄 공급은 전쟁의 향방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코 이니셔티브"의 추진 과정에서 엄청난 도전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러시아는 "체코 이니셔티브"로 인한 포탄 제공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유포했는데 주로 러시아 측이 제기한 부분은 품질과 성능에 대한 의혹이다. 이에 체코와 네덜란드 등에 소재하고 있는 독립 조사 기관들이 공동으로 실시한 국제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가 체계적인 허위 정보 캠페인을 통해 "체코 이니셔티브"의 신뢰성을 훼손하려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2024년 가을, 일부 언론들은 "체코 이니셔티브" 책임자들에게 전달된 다수의 서한을 입수하였는데, 이는 155mm 포탄의 신관 메커니즘 결함으로 인하여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를 체코와 우크라이나 정부가 덮고 은폐했다는 주장과 내용이었다. 그러나 토마시 코페치니(Tomáš Kopečný) 체코 정부 대표는 이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조직적인 허위정보 유포 시도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실제 조사에서도 품질 관련 문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와 같은 상세한 조사 과정은 결국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어 중개 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투명성이 떨어지고 수수료를 횡령했다는 폭로를 하고 있다. 이는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개하는 기업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공개 입찰이나 투명한 선정 기준 없이 5개의 체코 기업 만을 선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이는 EU 내에서도 몇 차례 지적되었던 부분이었다. 특히 일부 중개 기업들이 체코 정부 관료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서로 양분하여 나눠 먹을 수 있는 방산 비리의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처럼 체코 현지 기업과 현지 정부 간의 이해 상충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프로젝트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유럽 특유의 부패 관행은 EU와 영국, 미국조차도 감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도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체코의 공여 자금으로 포탄을 구매하여 우크라이나에 전달하는 중간 역할 수행하고 있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코 중개기업들이 부과하는 최대 13%의 수수료 또한 의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수수료는 우크라이나의 국영 조달기관의 상한선인 3%의 4배 이상이다. 이에 마리나 베즈루코바(Марина Безрукова) 전 우크라이나 국방 조달청장은 유럽 공여국들의 자금이 직접 우크라이나로 이전되지 않는 현행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다만 체코 측은 이와 같은 수수료가 안전한 포탄 운송과 책임 보장을 위한 추가 비용을 포함한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그 사이 관계자들끼리 해먹을 것은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에 보내고 있는 실정일 것으로 본다. 필자가 경험한 동유럽은 충분히 그와 같은 비리가 통용되고도 남을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체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 지원이 널리 확대되었다.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등 나토 회원국들이 자금을 지원했고, 체코가 포탄을 구매해 우크라이나에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2025년 4월을 기준으로 유럽 국가들은 "체코 이니셔티브"에 총 8억 3,100만 유로(약 9억 4,3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특히 나토의 회원국인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등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면서, 안정적인 포탄 공급을 위해 재정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EU가 100만 발 포탄을 조달할 계획과 다르게 EU 역내 시장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 시장에서 포탄을 조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꺼려하는 국가들로부터도 포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전제가 생긴다. 이에 EU의 계획보다 더 효과적인 공급망 구축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10월 체코 총선을 앞둔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으로 포탄 공급이 보장되었다. 이에 얀 리파브스키 외교장관은 현재 확보된 자금으로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인 포탄 공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총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는 EU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 차원의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의 장기적인 방위력 강화에 기여했지만 러시아군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체코 이니셔티브" 또한 그 효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편, ANO 2011을 중심으로 한 체코 야당은 2025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했을 시, "체코 이니셔티브"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젤렌스키는 지난 5월 초, 체코를 방문했을 때, 야당 인사들과의 면담을 통해 이니셔티브의 지속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합의 도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젤렌스키는 체코의 지속적인 지원이 우크라이나 방위에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총선에서 ANO 2011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안드레이 바비시가 총리로 복귀한 즉시, "체코 이니셔티브"는 완전한 종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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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 싱가포르의 강력한 처벌주의인 "싱가포르 법 집행 모델"을 중국인 무비자 입국에 맞춰 적용해야
    싱가포르는 벌금의 나라라 지칭될 정도로 도시 정화와 질서 유지가 매우 엄격한 국가다. 리콴유는 중국인이 갖고 있는 좋지 않은 습관과 관습들을 모두 뜯어 고치겠다며 갖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까지 모두 벌금을 물도록 강력히 규제했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북한이나 원리주의 이슬람을 주창하는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벌칙이 강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중국과 같은 공산권도 벌칙이 강한 경향이 있으나, 이는 정치범이나 사회적 중범죄에 한하여 강한 경향이 있지만 쓰레기 무단투기와 같은 경미한 환경적 행위나 교통 위반 같은 경범죄의 같은 경우는 오히려 한국에 비해서 중국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외국인들 또한 싱가포르에서 범법행위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 일이 없다. 그런데 지하철 등 대중교통 내에서 취식금지 규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벌금을 쎄게 물고 나서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공공기관, 버스,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엘리베이터, 슈퍼마켓, 백화점, 병원 등은 금연구역이다. 싱가포르는 주택 등 실내에서 흡연이 금지구역이라 층간 흡연 문제가 발생하면 벌금 물게 되어 있다. 누군가가 담배 냄새가 나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건물 내에서 연기를 감지하고 화재경보기가 바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것이 담배 연기로 판명되면 막대한 벌금을 물게 된다. 금연구역 외에는 재떨이가 있는 쓰레기통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는데 싱가포르인의 70%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로 이들 중 애연가들이 많으며 토종 말레이인들도 애연가들이 많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흡연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담배를 혐오하고 있기에 편의점에서 담배는 뭔가 진열장 같은 곳에 가려 놓으며 내놓고 팔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한국이나 일본의 편의점 계산대 뒤에 존재하는 담배 스탠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No ID No Sale” 등의 문구가 적힌 미닫이 문 형태의 진열장에 넣어놓고 판다. 이처럼 싱가포로 정부가 담배를 혐오하는 이유는 리콴유가 생전에 음주, 흡연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만약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흡연하다가 적발되면 5,000 싱가포르 달러(SGD)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 금액은 한화로 약 546만원이다. 한국도 금연구역에서 흡연시 과태료가 부과되는 것은 같지만 10만원 안팎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싱가포르와 비교가 불가하다. 그리고 술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밤 10시 이후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다. 싱가포르가 유독 타 선진국들보다 밤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유흥주점인 KTV도 밤 10시 이후에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고 가벼운 맥주집이나 레스토랑도 밤 10시 이전에 일찍 문을 닫게 되어 있다. 대신 집 안에서 마시는 것은 자유다. 이와 같은 규제가 생성된 계기는 2013년에 리틀 인디아 외국인 노동자 폭동 때문인데 당시 폭도로 돌변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술에 취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을 공원이나 돌아다니면서 마실 경우, 밤에는 100% 경찰서에 끌려가고 낮에는 사람들이 주의를 주며 이를 규제한다. 그리고 음주를 하고 싸움을 벌일 때 폭력 행위는 무조건 강력 처벌한다. 폭행 당사자는 감옥으로 간 이후, 태형을 선고 받고 매를 맞게 된다. 음주하고 싸움이 잦은 차이나타운에는 특히 폭력 행위에 대한 강력 처벌을 강조하는 계도 포스터가 간체자로 된 중국어와 영어로 공동 병기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도로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다 적발되면 약 300 SGD (한화 약 32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대중교통 탑승 중 생수를 포함한 음식물을 섭취하면 500 SGD (한화 약 54만원) 정도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래서 음식물은 왠만하면 어느 건물 내부에서 먹고 대중교통에서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특히 이 같은 규제가 없는 것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이를 어겨 벌금 많이 물고 있다고 한다. 껌의 경우, 의학용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전혀 판매하지 않으며 관광객이 자국에서 가져온 경우라도 공공장소나 거리에서는 껌을 씹을 수 없다. 게다가 껌은 싱가포르 내 반입 금지 물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껌 등 지정된 반입 금지 물품을 대량으로 소지하다 적발되었을 경우에도 1,000 SGD (한화 약 109만원)이다. 이어 공중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후 물을 내리지 않는 것 또한 불법으로 규정된다. 싱가포르는 영토가 작고 적도에 가까운 열대 기후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용변을 내리지 않고 방치하면 큰 위생 문제가 될 수 있어 더욱 예민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즘 싱가포르의 공공 시설들은 보통 센서식 변기가 많다. 그래도 수동으로 변기 내리는 곳도 있기 때문에 경찰들이 잠복했다가 벌금 물리며 화장실에서 껌을 몰래 버리거나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도 같은 불법 위생 혐의가 적용된다. 음주운전 또한 마찬가지로 예비 살인, 혹은 살인 미수로 보여지며 음주운전으로 인명사고를 내면 살인 미수, 혹은 1급 살인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태형을 처벌 받는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차량을 통해 월경을 할 때는 자동차 연료 탱크에 연료가 2/3 이상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다. 만약 2/3 미만일 경우에는 역시 벌금을 물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법안이 존재하는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물가가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저렴하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지 않으면 싱가포르인들이 물가가 저렴한 말레이시아로 가서 기름만 채우고 넘어오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교통법 또한 매우 엄격한데, 보행자 무단 횡단은 잘 잡지는 않은 편이지만 차량이 신호 위반을 할 경우 단속이 심한 편이다. 보행자의 경우, 싱가포르는 불시에 무단 횡단 또한 단속하기 때문에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건너는 것은 당연하다. 교통법규 위반은 3회면 면허 정지를 당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구급차, 소방차의 길을 내어주지 않거나 음주운전을 할 경우 벌금이나 징역과 더불어 태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사기, 마약 운반, 피싱 등은 징역형이나 태형 10대 이상, 심지어 마약으로 인해 사형까지 선고받고 집행되는 것이 일상이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마약 관련 범죄는 단순 소지나 운반도 무조건 인종 및 성별, 나이 불문하고 무조건 사형에 처해진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성범죄율이나 강력 범죄율은 타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 선진국들의 오랜 신경을 쓰게 만드는 마약 문제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운 국가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싱가포르라는 나라 자체가 성범죄에 태형을 가하는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징역 몇 년과 더불어 태형 동반(Mandatory Caine)으로 형법상 성범죄 처벌에 대해 태형 집행을 명시했다. 특히 아동 성범죄의 경우, 태형 대 수는 배로 올라간다. 길거리에서 들개나 길고양이, 새, 그리고 수달이나 들닭 등의 야생동물에 멋대로 먹이주는 행동도 엄격히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 막대한 벌금이 부과된다. 싱가포르는 부과된 벌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으면 10배가 넘는 2차 티켓이 날라오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싱가포르의 강력한 처벌주의인 "싱가포르 법 집행 모델"을 이제 한국에도 적용시켜야 할 때가 왔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비자 입국에 대응하여 그들의 비도덕적 행위, 무례한 행위, 각종 범법 행위 등에 대해 강력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싱가포르형 모델"의 처벌 법으로 도시 청결 및 치안도 안전하게 유지하고 쎄게 물린 벌금은 우리의 국가 내 재정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어차피 중국인의 무비자 입국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이미 발생한 사안이라 다시 무비자 입국을 도로 물릴 수도 없다. 결국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이들의 행위들에 대한 대책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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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2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하)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는 올 9월 들어 지지율이 최고조 올라오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1일 의회선거 유세 집회 중에 괴한에게 금속제 둔기로 머리를 맞는 테러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됐기 때문이다. 바비시는 체코 동부의 도브라시에서 이날 오후 지원 유세 중에 한 남성이 금속제 의수로 머리를 내리치는 테러를 당했다. 체코 경찰은 현장에서 테러공격 용의자를 즉시 체포했다. 이 날 현장에서는 바비시 외에도 여성 한 명이 다쳐서 치료를 받았다. 우선 바비시는 뇌 CT 촬영 등 모든 검사를 마치고 일단 퇴원했다. 바비시는 그날 밤 소셜미디어 X를 통해 "이번 테러 때문에 2일 선거운동 일정을 취소한다.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고 의사들도 휴식을 권해서 불행하게도 선거유세를 중지해야 한다. 올로모우츠 주 지역의 일정은 취소가 불가피하다(Kvůli tomuto teroristickému útoku jsem zrušil svůj dvoudenní kampaň. Musím počkat na výsledky různých testů a lékaři mi doporučili odpočinek, takže bohužel musím kampaň pozastavit. Zrušení mého programu v Olomouckém kraji je nevyhnutelné)."고 밝혔다. 우선 경찰은 일련의 테러 사건을 정신 이상자의 공격 범죄로 보고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카렐 하블리첵 부의장은 자신의 X 계정에 "이번 일은 선거 폭력이며 정치적 동기에 의해 경쟁자들이 가하는 폭력 테러"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선거는 10월 3, 4일 치러지는 의회 하원 선거로 치열한 선거전이 계속되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테러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공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도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암살 위기를 겪었다. 하물며 체코에서도 반(反) EU 성향인 바비시를 EU에서도 좋게 볼 리 없다. 특히 벤자민 롤이 이끄는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과 같은 NGO 단체들은 과격행위를 해서라도 바비시의 총리 등극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괴한의 정체는 정신이상자라기 보다, 벤자민 롤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 집권 총리가 친 EU 계열인 페트로 피알라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제대로 된 수사나, 정신 이상자의 공격 범죄라는 단순 범죄로 끝내려 했을 가능성 높다. 여기에서 바비시는 우선 그 괴한늘 쿨하게 용서했다. 괴한은 사건 후, 이틀 뒤 바비시에게 사과했고, 바비시는 허위 정보에 현혹된 것이라며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테러와 바비시의 쿨하게 용서한 행위 등은 오히려 체코 시민들의 지지율을 높게 만들었다. 바비시는 필자가 지난 상편에 언급했던 그의 회사인 에그로퍼트의 EU 보조금 관련 사기 혐의 등 법적 리스크에 직면해 있는 상태였지만 유권자들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연금을 인상시킬 것이며, 에너지 가격에 상한제를 둔다는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급여 동결시키는 등, 유권자들이 원하는 부분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EU가 강권하다시피하던 불법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와 기후 변화 정책에도 반대했다. 이어 피알라 정부가 체코의 어머니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며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냈다. 체코의 우크라이나 탄약 지원 계획에 투명성이 부족하다며 폐기도 공언함으로써 우크라이나에 대한 체코의 무기 지원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바비시는 본인의 SNS인 X에서도 "체코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다(Česká republika je zatahována do Ukrajinské války)"라고 주장하면서 체코 정부는 슬로바키아 정부와 공동으로 상호 발전을 위한 여러 안건들을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토 피초 총리와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피알라 정권의 얀 리파브스키(Jan Lipavsky) 체코 외무장관은 바비시 전 총리를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친러주의자라 비판했다. 이에 바비시는 리파브스키 외무장관에 대해 갖은 비하 발언을 쏟아내었고, 장관의 가족들을 조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이메일이 유출되면서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ANO 2011이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고, 이에 체코 정계의 전문가들은 향후 바비시가 체코의 외교 정책을 재편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슬로바키아의 피초와 헝가리의 오르반과 함께 EU보다는 친러로 다른 EU 국가들과 대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는 최근 친러 성향을 갖고 있는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과 유사한 행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의 외교 정책 기조를 전환한 로베르트 피초(Robert Fico) 총리에 대해 바비스가 지지를 보내는 등 향후 체코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그러면서 다가온 10월 3~4일 총선에서 체코 통계청이 약 98% 투표소에서 개표한 결과 바비시의 ANO 2011은 35%의 득표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ANO 2011은 수도 프라하를 제외한 13개 주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득표율에 따라 바비시의 ANO 2011은 전체 200석에서 80석을 확보했다. 반대로 페트로 피알라 총리의 중도 보수 스폴루(SPOLU)는 23%로 2위에 그쳤으며 피알라 연정에 참여하는 STAN당은 11.1%, 진보 성향의 해적당은 8.7% 득표하면서 ANO 2011에 크게 밀렸다. 득표율 5%를 넘기지 못한 다른 정당들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연정 구성을 위한 회담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며 SPD와 운전자당의 지지를 확보해 단독으로 소수정부를 꾸리고 조금씩 EU와 거리를 두겠다는 발표를 했다. 체코 운전자당(Motoristé sobě)은 친(親)석탄과 자유시장 노선을 지지하며, 자전거 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정당이다. 강한 EU에 대한 회의주의 시각을 갖고 있고, 유로화 도입, 유럽 그린딜(녹색 정치), 젠더 이데올로기, 다문화주의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 정체성과 문화 보존을 강조하며 이를 적극 장려한다. 전반적으로 국민보수주의와 우익대중주의가 혼합되어 있는 정당이라 볼 수 있다. SPD는 자유와 직접 민주주의(Svoboda a Přímá Demokracie)라는 정당의 축약어로 반(反) 이민, 반(反) 난민, 반(反) 이슬람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SPD는 이민자들이 주축이 된, 체코에서 매우 특이한 정당이다. 당수는 토미오 오카무라(岡村富夫, Tomio Okamura)라는 일본 출신의 체코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토미오 오카무라는 일본인 출신이지만 재일교포 3세라는 특이성까지 갖고 있다. 첨언하자면 토미오 오카무라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인 오카무라 헬레나는 체코 모라비아 왈라키아 출신으로 1966년 그의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부친 마스 오카무라(益岡村)와의 결혼하여 따라 도쿄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체코슬로바키아로 아들인 토미오와 함께 돌아오기 전까지 생애 첫 10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체코 국적으로 귀화하여 2012년 체코 원로원(체코 상원) 즐린 선거구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체코 정계에 나서게 된다. 그는 2014년 3월 의회 연설에서 그린카드를 받은 외국인이라도 직업을 얻지 못하면 귀국해야 하며, 체코 내에서도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익적인 주장을 펼치며 체코 내, 강성 보수 우익 인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ANO 2011과 SPD, 운전자 당과 같은 연립 정당들은 헝가리 피데스(Fidesz), 마린 르펜의 프랑스 국민연합(RN),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 독일의 AfD 등과 함께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라는 이름의 EU 의회 교섭 단체를 만들며 우파들끼리 연계하고 있다. PfE 소속 정당들은 하나 같이 EU 통합과 대(對)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바비시는 자신을 평화주의자라 내세우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비시의 이력과 그가 총리 1기 때 했던 정책들을 봤을 때, 평화주의보다 체코, 자국 위주의 실용주의적인 면이 더 돋보였던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체코 정국의 안정과 자신이 가질 총리직, 그리고 체코만큼은 LGBTQ와 같은 비상식적인 젠더 놀음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바비시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나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처럼 친(親) 러시아 색채를 대놓고 드러낸적은 없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 역시 전면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체코는 거기에서 빠지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체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중도보수 연정과 나토 군사위원장 출신인 페트로 파벨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전폭 지원하고 있었다. 피알라와 파벨은 2024년부터 서방 각국에서 돈을 모아 우크라이나에 탄약을 사주는 일명 '체코 이니셔티브'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체코 이니셔티브는 체코의 피알라-파벨이 주도한 EU와 나토로부터 탄약과 포탄을 구매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당초 80만 발 규모로 시작된 지원 계획을 2025년 말까지 180만 발로 대폭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야나 체르노초바(Jana Černochová) 체코 국방장관은 2024년에만 다양한 구경의 포탄 150만 발을 공급했다면서 시작 테이프를 끊었다. 우크라이나는 체코로 인해 155mm 및 152mm 대구경 포탄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했으며 포탄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총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체코 이니셔티브는 EU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 차원의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얀 리파브스키 외교장관은 현재 확보된 자금으로 2025년 9월까지 매월 정기적인 포탄 공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ANO 2011의 총선 승리로 인해 체코 이니셔티브는 막을 내릴 것으로 보여 진다. 총선에 앞서 체코 피알라 정부는 반러 조치도 단행했다. 9월 30일 체코 외무부는 안보 우려를 들이대면서 국제공항 6곳에서 러시아 외교 및 공무 여권 소지자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체코 정부의 승인이 있거나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경우에는 입국이 허용되지만, 러시아 정부가 발급한 외교 및 공무 여권의 효력을 통째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조치는 EU 국가에서 체코가 처음이다. 체코 외무부는 이어 지난 8월 1일에는 러시아 내 모든 체코 비자 신청 센터에서 비자 신청 접수를 중단했다. 그러나 바비시는 이를 원상태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여러 인터뷰에서 러시아와의 더 큰 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도 강조했다. 최근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드론이 침범했던 사례 등으로 대러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에 체코의 여당 측은 대대적인 "러시아풍"을 내세우며 안보 위기를 선거 유세의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선동했다. 피알라는 유세 도중 "체코 공화국이 완전한 자유, 번영와 함께하며 확고하게 서방의 한 부분인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인가, 또는 동쪽의 어떤 곳으로 전환할 것인가(Otázkou je, zda Česká republika zůstane silnou demokracií, pevně součástí Západu, s úplnou svobodou a prosperitou, nebo se obrátí k něčemu dále na východ, kam zamíří)"를 주장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개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바비시와 ANO 2011의 손을 들어줬다. 체코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함께 한 배를 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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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2
  • 오늘 10월 10일은 대만에서는 쌍십절(雙十節), 우창 봉기로 인한 신해혁명(辛亥革命) 114주년
    청나라 말기인 1911년 당시에는 이홍장과 서태후라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을 노리며 넓은 대륙을 잠식해 들어오던 도중에 청나라의 지식층들은 황실을 사수하여 열강들로부터 중국을 방어하자는 수구파와 서구의 영향으로 입헌군주제로 돌리고 영국처럼 의원내각제 가야 한다는 입헌파, 그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 등으로 3분할 되어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각종 한족과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중원의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Aisin-Gioro Yikuang)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출범시킨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던 자들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내각에서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만주족들의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혁과 반대로, 만주족 귀족들과 황족들이 청나라 내, 이권을 완전히 독식하려는 의도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우전부(郵傳夫, 우체-통신부) 대신이었던 성선회(盛宣懷, 성쉬안화이)라는 인물이다.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담보로 삼아 열강들에게 차관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는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여만 간다는게 문제였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예산은 서태후가 이화원 중건과 더불어 회갑연 등에 사용한 예산이었다. 이 예산은 명목상으로 해군예산이었지만 이 중에는 텐진에서 산해관, 봉천(奉天)을 거쳐 길림까지 부설하려던 철도 건설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때만 해도 해군아문(海軍衛門)에서 철도 부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철도 건설 예산도 함께 편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산 편성도 서태후의 이화원 중건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한반도로 대규모 병력을 전개시키지 못해 청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다. 참고로 청나라가 철도 부설하려고 여순에서 생산했던 6,000톤의 레일은 결국 청일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중국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唐山, 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서각장(胥各庄)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 후일 이 철도는 톈진까지 이어졌다. 이 철도는 6월 9일에 개통되었으며 개통일인 1881년 6월 9일은 조지 스티븐슨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개통식으로 삼은 것은 이홍장의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또한 중국인이 설계하고 공사한 최초의 철도는 첨천우(詹天佑)가 건설한 북경에서 장자커우(張家口)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경장선(京張線)이었으며 1905년부터 1909년까지 건설했다. 북경에서 한구(漢口)까지 경한선(京漢線)이 건설된 정도였다. 그 외에는 북경에서 남경(南京)과 연결된 경포선(京滬線), 북경에서 봉천까지 연결된 경봉선(京奉線)을 1912년까지 건설하는 상태에 있었다. 특히 길이 1,212km의 경한선(京漢線)은 개통 첫 해인 1906년에만 350만 냥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 철도가 어느 정도 돈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는 철도 건설이 붐이 일었을 정도로 청나라 전국에서 철도 건설 사업이 이어졌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청나라의 철도 총연장은 9,000km에 이르렀을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1897년 당시 양자강을 지나는 지역에 철도 관련 부설 이익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광저우(廣州)에서 한구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越漢線)을 부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40년 동안 청나라를 부국강병 시키키 위해 전력을 다한 성선회는 이를 영국의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나라는 주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영국에게 받은 차관 400만 파운드를 연 5.9%로 철도 운영을 통해 30년 동안 갚아 나가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북경에서 내려오는 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북경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고 아마 광동 지역 개발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 철도 건설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발생한 1911년 당시 월한선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와 주저우(株洲)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구간이 1911년에 간신히 개통되었고 우한에서 장사를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차례의 중단 사태를 거쳐 1916년에 광저우 북쪽 삼수(三水)에서 소관(韶關)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1918년에는 우한-장사 구간이 완성되고 마지막 남은 소관-주저우 구간은 북벌로 인해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1929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1936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남북으로 철도를 연결시키겠다는 발상은 우한에 양자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 완성되었다. 이런 부분들은 지속되는 전쟁과 국내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두 번째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와 같은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으로 실시하는 철도 부설하는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1903년 당시 사천성(四川) 총독이었던 석량(錫良, 시량)은 횡으로 이어진 철도인 사천-한구를 연결하는 천한선(川漢線)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러한 의견을 청나라에서는 "철로간명장정(鐵路簡明章程)"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가하게 된다. 그리고 1905년 서태후가 총애했던 신하인 장지동(張之洞)은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저우의 대표들을 모아 신상회의(紳商會議)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게 된다. 이에 미국합흥공사에 675만 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상인들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들이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 계급들의 금액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서민들과 거지들의 돈까지 모았는데 이것이 후일 폭동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민영자본에게 이를 맡긴다는 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성선회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이기 때문에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으로 외국자본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성선회의 견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 주도로 넘어간 이후,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개설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성선회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해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지금의 호남 지방과 호북 지방의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 진영들의 반대는 매우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성선회는 민간 진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도 국유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차에 성선회가 새로운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조정에 주청했으며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직예(直隷), 호광(湖廣) 총독을 거친 단방(端方)을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자들은 여기에 가만 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4개 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 안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사천, 광동, 호남, 호북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담보로 맡겼다. 결국 청나라의 민중들에게 있어 철도의 국유화가 오히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인 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 구간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각지에서 서민들의 이권수호운동이 발생했는데 이를 보로운동(保路運動)이라고 한다. 이를 조직화된 것이 바로 보로운동회(保路運動會)다. 이어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도 나타났다. 특히 성선회를 민족의 역적으로 인식하여 그를 능지처참하자는 분위기가 사천성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결국 9월 7일에는 강력 토벌에 나선 경찰들로 인해 보로운동의 수뇌부가 체포되었고, 이에 사천성에서 일어난 10만 명이 넘는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경찰과 서민들 사이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강에 띄운 유동나무 목판인 "수전보(水轉報)"는 수백판이 금강을 따라 떠내려가며 소식이 삽시간에 사천성 전역에 전달되었고 이어 보로운동회의 봉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9월 말 사천 영현(榮縣)에서 첫 봉기가 성공하였다. 이어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의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사태는 사천성만으로 축소시키기에는 무리가 되었다.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대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사천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호북 지역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에는 군대가 비어 있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 마침내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우창의 8사단 공병 제8 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부터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까지 가세했다. 총독 서징(瑞澂)이 도주했고 혁명군은 당일 우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민주공화정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 정부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 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라 지칭되고 있다. 신해혁명이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나 십(十)이 두 번 들어가서 쌍십절(雙十節)이라 붙여지고 중화민국(中華民國), 현 대만 정부는 오늘을 중요한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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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1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상)
    지난 10월 3일, 4일의 양일간에 체코에서 총선이 있었다. 이 총선에서 우파 정당인 ANO 2011이 압승을 거두며 기존 동유럽에서 EU의 영향력에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4년 만에 여당에 복귀한 ANO 2011은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다 2011년에 설립한 정당이다. ANO는 체코어로 '맞아'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러운 시민의 행동(Akce Nespokojených Občanů)'의 약칭이기도 하다. 이 정당은 체코 제1의 부자인 바비시가 좌파를 극도로 혐오하여 급조한 정당이었는데 점차 체코 정계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각계를 대표하는 대표 정당에까지 올라섰다. 여기에 바비시의 철학이 결집되어 있는데 우선 국가의 부패를 척결하고, 정치인에 대한 면책특권을 폐지하며, 실업과 싸우고,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볼 때, 당은 종종 극우로 기울어지기 보다는 중도우파 성향에 가깝고, 이러한 부분에 있어 체코 기민당(KDU-ČSL)과 정치적으로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안드레이 바비시는 늘 체코 공화국이 유로화를 채택하는 것에 반대해왔다. ANO는 더 이상의 유럽 통합과 더불어 "브뤼셀 관료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안드레이 바비시는 나중에 체코 공화국이 경제적으로 균형 잡힌 예산을 갖게 되면 유로화를 채택할 수 있다 밝히기도 했다. 이는 약간의 이중적인 면이 있긴 한데 유로에 가입해 있으되, 제3 세계의 동향을 보고 그때가서 움직이겠다는 신중론이 들어가 있다. 필자가 공부하고 연구한 바비시는 경제적으로도, 정치 정책적으로도 매우 신중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독일과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독일과 재정 콤팩트(Fiscal Compact)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재정 콤팩트 조약(Fiscal Compact)은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2012년 체결한 EU의 협약으로, 회원국의 재정 적자를 GDP의 3% 이하, 국가 부채를 GDP의 60% 이하로 유지하는 등 엄격한 재정 준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조세정책 등 일부 분야에서 바비시는 자영업자에 대한 부분 세제를 폐지하고, 취업 연금 수급자에 대한 부분세제의 부활 등 중도 좌파의 요소를 운동 정치에 재도입했다. 그는 또 당초 교육부의 1.1% 인상 제안과는 달리 학교 교사 임금을 2.2% 인상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의료 분야에서 바비시는 공공 의료 보험 회사들의 막대한 지출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ANO의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정치가와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파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ANO 2011을 좌파에 두었으며 정치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중도 우파에 두고 있다. 그러자 안드레이 바비시는 인터뷰에서 ANO 2011은 "사회공감을 가진 우파 정당"이라 언급했다. ANO 2011은 2017년 총선 이전에 유로화 반대, 그리고 EU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문제, 이민 쿼터 등과 같은 유로화에 회의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러나 ANO 2011은 집권 이후 더욱 친 EU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유로화 문제와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반대했다. Echo24의 언론인 다니엘 카이저(Daniel Kaiser)는 EU에 대한 ANO 2011의 입장을 "유로-기회주의(Euro-opportunism)"라 불렀다. 그렇다면 ANO 2011의 수장인 안드레이 바바시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1954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바바시는 1980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동유럽 혁명이 벌어지는 도중, 1989년에 공산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민주화로 인해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내 상황에서 사업에 치중했고, 유럽의 대형 농화학 및 농기계 기업인 애그로퍼트(Agrofert)를 창업해 억만장자로 동유럽에 몇 안 되는 올리가르흐가 되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바비시의 재산은 4억 달러(한화 약 5,600억원) 정도다. 그러나 안드레이 바비시는 재산을 모을 때에 탈세, 뇌물, 자살로 위장한 경쟁자를 살인하거나, 갑질하는 등의 온갖 부정부패로 고발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재판마다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2011년 ANO 2011이라는 정당을 창당하면서 대표가 되었다. 바바시는 2013년, 2017년 두 차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여당 대표로 체코의 총리 지위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바비시는 체코 총리가 되었다. 당시 바바시는 친유로에서 난민 수용 반대, LGBTQ 반대, 유로화 화폐 도입 반대 등을 내세웠고,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벌이는 등, 대놓고 친러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2019년, 바비시는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200만 유로의 EU 보조금을 불법으로 지급했다는 고발을 당하게 된다. 이에 관해, 유로 형사재판소에서 바비시는 기소를 당하게 되었고 여기에 저항한 바비시는 법무장관을 해임하고 마리 베네쇼바(Marie Benešová)를 법무장관에 임용하면서 사법 조작 논란까지 불거지게 된다. 바비시는 당시 이를 두고 "나를 끌어내려는 정치적 음모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임하지 않는다(Nikdy neodstoupím, protože je to politické spiknutí s cílem mě svrhnout)."고 말하며 자신에 대한 음해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에 친 EU 세력과 야당이 합세해 바비시 총리의 탄핵을 선동했고, 이에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는 약 25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제2의 벨벳 시위"를 일으키고자 했다. 당시 시위는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공산주의 정권을 종식시킨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러한 시위에도 바바시는 끝까지 버텨냈다. 애그로퍼트는 2018년에만 최소 8,200만 유로(약 1,067억원)의 EU 보조금을 타낸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보조금 스캔들과 바비시 총리의 ‘이해충돌’ 문제를 지적한 EU 감사보고서가 유출되었다. 필자가 볼 때, 이는 극도의 친러 정책을 이끌고 있는 바비시를 끌어내리기 위하여 EU 측이 브랙시트로 EU를 탈퇴한 영국의 가디언에게 이를 일부러 흘린 것으로 보고 있다. 가디언은 이를 매우 자극적으로 기사를 썼고, 8,200만 유로의 EU 보조금을 체코의 납세자들이 상환할 처지에 놓였다고 서술하자 이를 본 체코의 시민들이 11월 17일에는 벨벳 혁명 30주년을 맞이해 들불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NGO 단체가 존재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수백만의 순간(Milion chvilek pro democratii)’, 일명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이라는 단체였다. 이 시위를 선동한 단체의 대표는 벤자민 롤(Benjamin Roll)이라는 인물이다. 벤자민 롤(Benjamin Roll)과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이라는 단체는 매우 수상한 단체다. 벤자민은 카를 대학 복음주의 신학부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전공한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다. 그는 2018년에는 동성 결혼 제도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고 로고스 조직의 지원 호소에도 서명했던 인물이다. 이쯤되면 그는 LGBTQ 추종자에 친 EU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난민 수용에 적극 찬성하고 러시아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다. 이 NGO는 EU 산하에 들어가 있는 단체로, 국제 엠네스티와 더불어 EU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이들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단체가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이고, 단장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이다. 마침 2019년 11월 1일 폰 데어 라이엔이 EU 집행위원장이 되어 주도한 첫 사건이 11월 17일 체코 벨벳 혁명 30주년 집회인 셈이다. 이런 정도면 EU가 이 집회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벤자민 롤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몇몇 정치인은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고, 일부는 주말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Some politicians don't understand why we're here, and some think we're ruining their weekend. But the fight for freedom and democracy will never end).”라며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 했다. 벤자민 롤(Benjamin Roll)과 밀리온 츠빌렉(Milion chvilek)은 선거에 불복하여 조만간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들은 EU의 지원을 받고 있고, 반(反) 바비시 전선의 최일선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 등으로 인해 바비시와 ANO 2011은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져 갔다. 체코 시민민주당(Občanská demokratická strana, ODS)과 체코 해적당(Česká pirátská strana, CPS)의 지지율 합이 50%에 육박하고 둘 다 반(反) 바비시 성향을 갖고 있기에 바바시는 실각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2021년 10월 8일부터 9일 양일간 진행된 총선에서 바비시 총리가 이끄는 ANO 2011이 6석을 잃으면서 패배했고, 바비시는 ODS의 페트르 피알라(Petr Fiala)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나게 됐다. 다만 밀로시 제만(Miloš Zeman) 대통령의 내각 인준 거부 사태로 인해 피알라 내각 출범이 지연되면서 보름 정도가 지난 12월 17일에 퇴임하게 되었다. 이후 바바시는 제만 대통령의 후임을 뽑는 2023년 체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차 투표에서 34.99%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해 결선투표로 진출했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현 연립 여당의 지지를 받는 군 출신 무소속 페트르 파벨(Petr Pavel) 후보에게 큰 격차로 밀려 결선투표에서 41.32%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2023년 2월 열린 ANO 2011 집행부 회의에서 그는 더 이상 야당이 집권할 것을 예상하여 미리 구성하는 내각인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의 예비 총리를 맡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뒤를 이어 제1 부대표인 카렐 하블리첵(Karel Havlíček)이 예비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바비시가 창당한 당이기 때문에 그의 당내 입지는 여전히 강력했다. 결국 1년 뒤인 2024년 2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98표 가운데 88표를 얻어 다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마침 제조업 강국이었던 체코의 제조업 침체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 및 개입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만이 상당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반사 이익을 얻은 바비시와 ANO 2011의 지지율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게다가 바비시는 체코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비판하고 정부의 외교 정책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지율이 급등했고 결국 2024년 6월 EU 의회 선거에서 7석을 차지하며 제1당에 올랐다. 이는 2025년 10월 총선에서 정권 탈환을 향한 신호탄이 되었으며 결국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 직위 탈환을 앞두고 있다. - 2025년 체코 총선, 안드레이 바비시(Andrej Babiš)의 재등장과 대(對) EU, 우크라이나 관련 정책 변화 가능성 (하) - 체코의 국제 정세 지형이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친러로 바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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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1
  • 조지아의 여당 "조지아의 꿈"의 승리로 끝난 지방선거, 이어 발생한 불복 시위는 미국 NED가 기획한 색깔혁명의 시도인가?
    조지아의 선거에 이은 선거 불복 시위는 끝이 없는듯 싶다. 이번 10월 4일에 있었던 조지아의 지방선거에서는 여당이자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이 압승을 거뒀다. 이는 작년인 2024년 10월 26일 개최된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친 EU 정당인 야당이 맥을 못 추고 있었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하자 조지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집권당인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 당과 조지아 4개 야당이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당시 조지아의 꿈 당은 총선에서 전체 투표수의 약 54%를 얻으며 4차례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 150개의 의석 중 조지아의 꿈 당은 직전 총선 결과인 90석보다는 적지만 과반을 넘는 89석을 차지했다. 4개 야권 정당이 뭉친 야권 연합은 총 61석을 획득했다. 야권은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총선 결과에 강력히 반발했고, 선거 다음 날인 10월 27일 선거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불복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총선 결과가 알려지자 10월 28일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조지아와 EU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를 벌였다. 친서방 성향의 무소속 살로메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전 대통령은 10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은 국민의 표를 훔친 사건이라 비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현재, 작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조지아의 서부인 아자리야 지역은 본래부터 친러 지역이었기에 대다수를 석권하는데 성공했고, 관건이었던 동부 지역 또한 몇 지역에서 접전이 있었지만 결국 64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조지아 선관위에서 55%의 투표용지를 집계한 결과, 조지아의 꿈은 전체 투표의 80% 이상을 획득했으며, 특히 접전이 예상됐던 수도 트빌리시 시장 선거에서 현 시장인 카하 칼라제(Kakha Kaladze) 후보가 73% 이상 개표 기준으로 7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난히 압승했다. 물론 여당인 "조지아의 꿈"이 압승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압도적인 패배에, 야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거져 나오는게 있다. 바로 "부정선거 논란"이다.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친유럽 성향의 야권이 주장하던 EU 가입에 대한 찬성이 80% 이상을 차지했었다. 특히 13년 전인 2012년 총선에서 조지아의 꿈에게 패배해 정권을 빼앗긴 통합국민운동(UNM) 측이 지방 선거 결과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했다. 조지아 제1 야당인 통합국민운동(UNM)은 전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의 정당이다. 이들의 배후에는 미국 국립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이 있다. NED, 이 간악한 집단은 명목상으로는 ‘NGO’에 속해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집단은 미국 CIA에 막대한 지원를 받고있다. 그 동안 NED 집단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크게 공헌한 집단이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다. NED가 내세운 인물이 바로 미하일 사카슈빌리이다. 사카슈빌리는 어릴 때부터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컬럼비아 대학교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23일, NED의 선동과 더불어 사카슈빌리는 친미, 친서방주의자들과 함께 손에 장미를 들고 시위에 나서 셰바르드나제의 정부를 불법적으로 뒤엎었다. 이것이 이른비 "조지아 장미혁명"이라는 CIA의 지원, NED의 기획, 행동대장 사카슈빌리와 UNM의 액션으로 "색깔혁명"을 일으켜 뒤엎어 버린 것이다. 특히 NED는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는 매파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악마화를 주도적으로 한 가짜 NGO 단체인 셈이다. 10월 4일 개표 이후, UNM은 기자회견을 통해 “선거관리위원회와 여당이 조지아 국민의 승리를 훔쳤다(საარჩევნო კომისიამ და მმართველმა პარტიამ გამარჯვება წაართვეს ქართველ ხალხს).”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어 또 다른 야당인 변화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Change)의 니카 그바라미아(Nika Gvaramia) 당 대표는 이번 지방선거가 ‘헌법적 쿠데타(კონსტიტუციური გადატრიალება)’라고 강조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조지아의 독립 선거 모니터링 단체인 공정 선거 및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사회(ISFED : International Society for Fair Elections and Democracy)는 지방 곳곳에서 유권자들을 협박했고 표를 매수한 행위 등, 부정행위가 여러 건 적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지아 선관위는 지방선거가 각 지역에서 평화롭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고 재차 강조했으며 비록 투표율이 41%로 적긴 했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ISFED 또한 EU와 NED의 끈이 연결된 단체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 총선부터 올해 지방선거까지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익숙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끝난 몰도바 총선에서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선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러시아풍"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체코 총선도 마찬가지고, 동유럽에서 선거는 "러시아풍"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동유럽의 각 집권당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강조하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집권을 이어 나가려 한다.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가지고 EU를 멀리하자는 "급진적 변화(Radical Change)"보다 EU가 있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비하자는 "안정(Stability)"에 포커스를 두었다.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잇다른 경제 위기에 지친 시민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이를 억지로라도 눌러 오로지 "안정(Stability)"만이 국가와 국민을 구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소위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러시아가 예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 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또한 동유럽을 침공할 것이라 선전하여 국민들을 선동한다. 이번 조지아 지방 선거도 마찬가지다. 결국 UNM은 러시아가 개입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야당을 지지하는 전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불법적인 의회에 불참할 것이며, 국제 선거관리단의 진행 하에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전 총리이자 '조지아의 꿈'을 창당하고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여당의 비선실세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가 나섰다. 그는 명예총재로써 존재하고 있는 인물로 조지아 GDP의 30%나 되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바니슈빌리는 원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친러 논란을 지우기 위해 2011년에 와서야 러시아 국적을 포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지아에서는 사실상 현 총리인 이라클리 코바히제(Irakli Kobakhidze)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바니슈빌리가 실질적인 실권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거둔 지방 선거의 승리는 세계적인 사건이며 국민의 뛰어난 역량을 제시하는 지표"라고 평가하며 여당을 두둔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바니슈빌리의 이러한 발언은 조지아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당은 이바니슈빌리가 러시아어로 이 발언을 한 것에 분노하여 여당인 "조지아의 꿈"을 러시아가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트집을 잡았다. 결국 야권 세력과 NED 등의 NGO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평화적 혁명'을 구호로 내세워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외치는 것은 평화적 혁명이 아니라 심각한 폭력이 동반된 폭동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부패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 관저 인근으로 행진했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는 루스타벨리 대로와 자유광장 일대에 모여 정권 교체와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시위는 현지시간 오후 4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조지아 의회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또 다른 그룹은 자유광장 에 모여 성 게오르기 동상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집회를 이어니갔다. 한편, 트빌리시 국립 제1 대학에서 출발한 학생 행진대는 멜리키슈빌리 대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When injustice becomes law, resistance becomes a duty).”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조지아 국기를 들고 “그루지야! 그루지야!”를 연호하며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극단주의 시위대가 대통령궁 울타리를 넘어 울타리 일부를 파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처럼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시위로 인해 전면 충돌로 비화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처음에는 '평화적 혁명'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통령 궁의 울타리를 넘으며 경찰과 충돌을 야기했다. 평화시위라도 어떠한 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와 같은 선을 이미 넘어버렸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통령 궁 울타리를 시위대가 뛰어 넘어 진입하는 "평화 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러시아 매체 RT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포착했다. 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폭동을 조장하는 자들이 "가면을 쓴 정체 모를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입수한 마지막 5번째 사진이 이들인데 이들은 가장 앞장 서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 경찰도 흥분하게 되어 있고,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찰은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려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 차량 여러 대를 투입하면서 폭도들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여 이들을 대통령궁에서 쫓아냈다. 이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은 근처 카페와 트빌리시 거리 곳곳을 공격하여 창문을 부수고, 가구를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러시아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조지아 내무부는 이번 사태로 경찰관 21명과 시위 참가자 6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라클리 코바히제 총리는 "부상자 중 경찰관 1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부상자 다수가 최루탄, 고무탄 등으로 인해 타박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내무부는 "시위가 평화적 범위를 벗어나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폭력 행위로 변질됐다"며 주최 측 인사들이 체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결국 UNM 소속 이라클리 나디라제(Irakli Nadiradze) 전 트빌리시 시의원, 야권 정치위원회 소속 무르타즈 조델라바(Murtaz Jodelabar) 전 검찰총장 등 야권 핵심 인사 5명이 정권 전복 선동 및 집단으로 폭력단을 조직한 혐의, 그리고 폭동을 획책한 죄목으로 전격 구속했다. 이들은 조지아 형법으로 유죄 판결 시 최대 9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가면을 쓴 정체모를 남자들"이 NED의 맴버들이라 추측하고 있다. 아마 뒤에는 미국 CIA가 최종 보스일 것으로 보여 진다. 6일 현재 시위는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끊임없이 조지아의 내부분열을 획책하여 제2의 우크라이나로 만들려는 미 행정부의 속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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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0
  •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공원 묘역에서, 42년 전 오늘,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있있다.
    오늘은 아웅산 테러 42주년. 한국은 한글날이지만 42년 전에는 미얀마 양곤 아웅산 묘지에서 북한에 의한 테러 사건의 비극이 있었다. 아웅산 묘지 공원에는 미얀마의 실질적인 국부라 할 수 있는 아웅산 장군이 잠들어 있는 신성한 곳이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이라 불리는데 1983년 10월 9일 이곳 아웅산 묘역에서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북한이 테러를 저질러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제3 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면서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해 양측이 냉전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미얀마는 제3 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북한과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하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가장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순방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했다. 당시 정부 핵심 관료들, 특히 외교에 밝은 노신영, 이범석 장관 등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했다.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국가에, 군사 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얻을 만한 실리적인 부분과 국제적 위상이 떨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북한을 더 지지하는 성향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과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테러 위협이 상존하는 지역이라 더욱 위험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서울을 떠나 양곤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양곤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U San Yu)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 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두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한 후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이후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했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했다.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폭발 이후, 한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인 김재익(金在益, 1938~1983) 씨도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김재익씨는 대한민국을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경제 천재였던 인물이다. 그는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정보화 정책, OECD 가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했고 한국 사회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하여 금융과 재정을 긴축하고, 수입을 자유화하며, 임금 상승은 생산성 증가의 범위 내로 억제하고, 환율과 금리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또한 경제의 능률 향상을 위해서는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김재익 덕분에 물가상승률은 20%에서 3.2%로 줄었고 경재성장률이 1980년을 제외하고 모두 10%를 넘었을 정도로 그는 5공 시대에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아까운 인물이었다. 테러 사건 직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당시 미얀마는 군부가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고 사실 우리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고, 세계 최빈국인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이 늦어지면서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의 지각은 불가피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으니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하거 향후 스케줄이 늦어지게 된 것이 테러를 당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주 미얀마 한국 대사이자 비서실장인 이계철 대사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차를 타고 먼저 도착했으며 당시 경호실장과 처장의 시범 연주를 지시했고 진혼곡 나팔 소리가 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한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은 참을 수 없는 무례였고, 이에 미얀마 정부를 포함하여 전 국민들 또한 격노했다. 이에 미얀마는 북한과의 국교를 즉시 단절했다. 그리고 공산권 국가로 최초로 북한을 국가 승인까지 취소했다. 이어 테러리스트 3명 중 2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1명 또한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고 복역 중에 사망했다 전해진다. 이후 아웅산 공원은 2012년까지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2012년 5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방문하여 당시 테러 때 희생된 관료들의 넋을 위로함과 동시 다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필자는 2019년 4월 6일에 미얀마 방문 때, 양곤의 아웅산 공원 묘소를 일부러 찾아 헌화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의 정치인과 기타 분들을 위해 짧게나마 묵념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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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0
  •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연금민영화에 따른 연금개혁문제
    라틴아메리카의 연금 개혁의 원인은 재정적자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모두 부담하게 되면서 국가의 부채가 쌓이게 된다. 따라서 국가 주도로 인해 연금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연금개혁을 통해 부과하는 방식에서 개인 계정의 적립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연금 개혁은 크게 대체형(Replacement), 선택형(Multiple-choice), 혼합형(Mixed mode), 3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체형(Replacement)은 구세대에게는 부과 방식과 신세대에게는 개인 계정의 적립 방식을 적용시킨다. 선택형(Multiple-choice)은 구세대에게 부과 방식을 적용시키고 신세대에게는 부과 장식과 적립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혼합형(Mixed mode)은 구세대에게는 부과방식을 신세대에게는 부과방식과 적립방식을 혼합시킨 방식을 적용시켰다. 대부분의 국가는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경우, 대체형(Replacement) 방식이고 선택형(Multiple-choice)은 페루, 콜롬비아, 혼합형(Mixed mode)은 코스타리카, 우루과이가 이용하고 있다. 연금 개혁 이후 여러 문제들이 개선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개선된 점으로 볼 때, 재정 건전성이 확보되고, 연기금 투자 수익이 증가하면서 자본시장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연금 개혁 이후 재정적자의 비율이 감소했으며 칠레의 경우 재정적자의 비율이 93%에서 60%로 감소했다. 연기금 투자수익이 크게 증가되었고 연기금 보유 자산의 증가와 연평균 수익률의 증가는 투자 수익의 증대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로 인해 자본시장이 발전할 수 있었다. 남미 각지에서 다양한 민간보험회사가 연금을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경쟁을 통해 민간보험사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보험시장에는 세계적 금융 자본도 진출해 있었다. 이로써 세계적 자본의 발전된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연금 개혁 이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연금의 가입이 낮다는 점에 있다. 개인별 계정의 경우 강제 가입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도입한 이후 연금 가입률이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소득 계층별 연금 가입률의 차이가 있다. 이어 비공식적 부문의 종사하는 사람의 가입률이 매우 낮다는 것에 있다. 고용불안에 놓여 있어 연금 가입을 계속적으로 할 수 없으며 현재 생활유지가 중요해 연금을 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교적 소득이 높은 소득 5분위의 72.4%가 연금에 가입했으나 1분위의 경우 53.1%가 연금에 가입했다. 또한 젠더 간의 차이도 크게 나타난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연금 가입률이 낮다. 이는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결혼, 출산으로 인해 연금 납부기간을 의미하는 보험료 밀도가 남성에 비해 매우 낮다. 이는 여성의 연금 급여 액 역시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띠라서 저소득 비공식 부문과 여성이 연금 수급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투자 수익의 소득계층 격차가 있다. 고소득계층의 경우 과거 수익률 등의 정보를 활용하여 민간 보험을 선택하게 된다. 저소득 계층은 동료의 추천, 펀드의 저명도를 기준으로 민간 보험을 선택했다. 더불어 저소득계층은 고소득 계층에 비해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투자 수익률이 비교적 낮았다. 셋째, 과도한 연기금 관리 운영 비용이 든다는 점에 있다. 다른 보험 회사와의 경쟁을 위한 광고비, 마케팅 비가 많이 쓰이고 유지비, 투자비가 기존 국민 연금에 비해 많이 소요된다. 비용의 증가는 가입자 수수료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어 가입자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안정성으로 인해 적립금의 50~58%가 국채에 투자되고 있다. 그러나 다변화된 투자, 그 중에도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해외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해외 투자가 국내 저축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국가가 해외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수익률을 위해서는 다변화된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처럼 개혁 이후 국민 연금이 개선된 듯이 보였지만 한계점이 더욱 부각되게 된다. 따라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차 개혁을 하게 되었고 공적연금을 강화해 연금의 사각지대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에 2차 개혁을 실행한 대표적인 나라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라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개인별 연금계정을 폐지했으며 칠레는 소득 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연대 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개인 계정 연금을 폐지하는 대신 이를 보완하려고 했다. 연대 연금 제도를 통해 연금 급여가 일정 수준의 이하인 연금 가입자에 대한 소득 보장 제도가 마련되었다. 또한 젠더의 형평성을 위해 여성에게는 유족들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자녀의 수에 따라 일정 기간의 가입 기간을 인정했다. 또한 개인 별 연금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이에 운영 수수료를 완화하는 개혁도 존재했었다. 칠레의 경우 가장 낮은 수수료를 부과하도록 했으며 또한 수익률 향상을 위해 채권투자 이외에도 새로운 투자를 늘리는 방안도 개혁에 포함되었다. 연금 민영화 이후 남미 국가들에서는 문제 연금 사각지대가 증가하였고 운영 수수료가 기존 부과식 공적 연금 보다 높아 비효율적이라는 점이 제시되는 등, 관리 운영상의 문제도 나타났다. 이후 페루 국회는 조기 은퇴자의 연금 수령 가능 연령을 성별에 관계없이 50세로 통일했다. 페루 국회는 연금 관련법을 개정했다. 이번에 바뀐 조항은 조기 은퇴자의 개인연금(Private pension) 수령 시작 연령으로, 남녀 모두 만 50세 이후부터 개인 연금 수령이 가능해졌다. 페루는 이전까지 여성은 조기 은퇴 시 만 50세부터 개인연금을 수령할 수 있었으나, 남성의 경우는 만 55세가 지나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페루 국회는 경제 활동을 이어 나가기 어려운 페루 국민에게 개인 연금 수령 가능 연령 개정안이 도움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단, 만 50세 이상이어도 개인 연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납부한 가기 부담금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 했다. 따라서, 법률 개정에 따라 조기 은퇴 이후 개인 연금을 수령하고자 하는 가입자는 지금까지 연금 운용사에 납부한 자기 부담금이 법적 하한선 이상이어야 한다. 한편, 개정 연금법 시행 후 30일 이내에 은행, 보험사, 개인연금 펀드 등 연금 상품을 취급하는 민간 기관은 개정된 연금법에 따라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쳐야 한다. 따라서 페루 국회가 대통령의 종신 연금을 박탈할 수 있는 법안을 가결했으나, 정부는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현 페루 대통령인 페드로 카스티요(Pedro Castillo) 대통령이 취임하기 바로 직전, 페루 국회는 퇴임 후 범법 행위로 기소당한 전직 대통령의 종신 연금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이에 해당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비올레타 베르무데스(Violeta Bermudez) 당시 페루 총리(Prime minister)는 해당 법안이 오히려 대통령 임기 중 더 많은 비리 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해당 법안은 다시 국회로 되돌아왔으며, 향후 처리 여부는 아직 미지수인 상태에 있다가 다시 9월 1일에 있어 연금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5일 페루 정부가 청년층의 민간 연금 기금 납입을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페루 시위의 트리거가 되었다. 이는 청년층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로, 전체 취업자 중 70%는 임시직과 일용직, 그리고 가족 내 무급 노동, 무등록 영세 자영업 등 비공식적인 부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페루는 지난 6년 동안 대통령이 5차례나 바뀔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하며, 갱단 폭력이 급증하고 마약 유통이 심화되어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이 극심한 상태다. 따라서 임기 말기를 맞이한 디나 볼루아르테(Dina Boluarte) 페루 대통령의 지지율은 2.5%, 의회 지지율은 3%에 그쳤다. 지난 2022년 12월 취임한 이후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명품 롤렉스 시계 여러 개를 뇌물로 받았다는 '롤렉스 게이트' 등으로 논란에 휩싸이고 있었으며 12건의 검찰과 경찰 수사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지난 7월에는 자신의 월급을 10,000달러(약 1,350만 원)로 2배 넘게 인상하는 대통령령을 의결해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젊은 Z세대들의 큰 불만을 야기했다. 수도 리마에서 Z세대 주도로 연금 개혁에 반발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것은 그동안 발생했던 페루의 갖은 비리가 쌓이고 쌓인 끝에 폭발한 분노였다. 페루의 18~29세 인구로 구성된 Z세대는 페루에서 전체 인구의 27%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반부패, 반정부 시위는 인도네시아, 네팔과 마찬가지로 Z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9월 28일 시위에는 수백 명의 시위대들이 리마 도심의 정부 청사 쪽으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 폭죽을 던지고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으로 맞대응했다. 이처럼 충돌 과정에서 기자 1명, 경찰 1명을 포함해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29일에도 운송업 종사자 수백 명과 청년들로 구성된 시위대들이 행진하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하면서 폭력 진압을 변질되면서 강제로 해산되었다. CNDDHH 소속 마르 페레스 변호사는 "시위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경찰에 촉구한다. 대량의 최루탄을 발포할 정당성은 없었고, 더구나 사람들을 공격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Instamos a la policía a respetar el derecho a la protesta. No había justificación para disparar grandes cantidades de gas lacrimógeno, y mucho menos para atacar a la gente)."고 비판했으며 잠시 강제로 진압되었다 해도 다시 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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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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