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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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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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습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젤렌스키는 "거미줄 작전" 이후, X에서 러시아는 본성을 바꾸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 400대 이상의 드론과 40발 이상의 미사일을 동원해 도시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에 이례적으로 침묵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4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이후, 거미줄 작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 불가피하다는 부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 자산 공격에 보복하지 말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강하게 응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트럼프의 발언을 보면 미국은 러시아 핵 전력에 대한 드론 공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키예프는 워싱턴을 향해 자신들에게도 유리한 카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론 공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그러나 백악관은 러시아와의 핵 전쟁에 끌려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인해 젤렌스키가 갖고 있는 지도, 혹은 영토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우크라이나 측은 푸틴 대통령에게 제대로 우크라이나를 폭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공군 기지에 대한 드론 공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키예프 측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젤렌스키가 X에 남긴 언급에 대한 코멘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보유국의 입장에서 전략 자산을 공격 받은 러시아가 응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젤렌스키는 앞서 우크라이나를 공습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지만, 트럼프는 여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때로 공원에서 두 아이가 심하게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억지로 떼어 놓기 보다는 잠시 더 싸우게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Sometimes, two children fight badly in the park, and in such cases, it may be better to let them fight for a while rather than forcibly separate them.)고 발언했다. 이는 젤렌스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보복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한 우크라이나가 먼저 러시아에 도발을 했으니, 어디 마음대로 싸워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방관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발언에 젤렌스키는 발끈했다. 그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놀이터에 놀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다(Україна — це не дитина, яка грається на дитячому майданчику з президентом Путіним.)라고 운을 뗀 뒤, 그는 어린이들을 죽이러 놀이터에 온 살인자(Він убивця, який прийшов на дитячий майданчик, щоб убивати дітей)라고 반박했다. 이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아버지를 예로 들며 "오랜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그가 온전히 느끼고 이해할 수 없을 것(Він ніколи не зможе повною мірою відчути та зрозуміти біль українського народу, який втратив своїх дітей у довгій війні)"이라고 트럼프에게 화를 냈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아이들 싸움" 발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레믈린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러시아에게는 국가 이익, 안보와 직결된 실존의 문제지만 워싱턴과 접촉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У президента Трампа могут быть свои взгляды на российско-украинский конфликт, но для России это экзистенциальный вопрос, напрямую связанный с национальными интересами и безопасностью, и ей важно поддерживать контакт с Вашингтоно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격렬한 싸움은 하키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심판들이 잠시 시간을 준 뒤에야 경기를 중단시킨다"고 미국이 심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후에도 백악관에서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상호 공격이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높이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통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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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4
  •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전황 : 러시아군의 파죽지세의 진격과 드론 전술
    최근 러시아가 이스탄불 직접 협상에 개의치 않고 진격의 속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5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4㎞씩 전진하며 2024년 11월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 군의 여름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최근 1주일 만에 200㎢에 달하는 18개의 우크라이나 마을을 점령했다는 분석 및 속보가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들은 지난 6월 2일의 기사에서 러시아군의 5월 공격 강도는 4월보다 19% 더 높았다며 하루 평균 공격이 4월에는 154.8건이었으나, 5월에는 183.6건으로 30건 가까이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에서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진격이 가능한 날씨와 기후 조건이 맞았다는 것이다. 라스뿌띠쨔 시즌이 끝나면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완벽한 시기가 지금이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과 2023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 때도 공격을 개시하는 측의 시작 날짜로 주로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기후 조건 맞아 떨어지거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조건에서 3년을 넘어선 현 전쟁 상황으로 볼 때 전례없이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5월 30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8월 쿠르스크 전선을 돌파해 빠르게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Україна прорвала Курський фронт у серпні минулого року та швидко окупувала значну частину території)"면서 "그러나 러시아군이 올해 3월 초 탈환 작전을 시작해 드론을 이용한 새로운 작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을 격퇴한 승리(Однак російська армія розпочала операцію з відвоювання на початку березня цього року та відкинула українську армію, що стало перемогою нової операції з використанням безпілотників)"라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앞서 2025년 2월 말부터 쿠르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에 보급을 전달하는 모든 공급로를 차단하고 쿠르스크를 탈환한 러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들을 모두 점령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주목받는 것은 현재 광섬유로 제어하는 러시아 드론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빠른 돌격 작전으로 인해 이른바 "고기 분쇄기" 방식으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남겼다는 서방 언론의 비야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상 공격의 방식을 바꾸고 드론 타격을 중점으로 하여 상당히 전과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선 공격 목표 지점으로 정찰 드론을 띄워 적진을 파악한다. 그리고 곧이오 카브(활공 포탄) 발사나 포격을 시작했다. 적진이 어느 정도 파괴되면, 개인이 조종 가능한 1인칭 시점의 드론인 FPV 드론을 보내 남아 있는 진지를 정밀하게 탐사하면서 구석구석 공략을 시도한다. 이 때 드론 운용 방해용 전파인 전자전을 피할 수 있는 광섬유 기반의 공격 드론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 병사 4~5명이 오토바이나 ATV, 혹은 도보로 적진에 진입하여 잔당 소탕에 나서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이같은 패턴의 공격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의 드론 전력이 우크라이나를 넘어섰고 초반에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드론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2~3년을 흘러가면 드론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 언론에 의하면 1년 전 만해도 드론 전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앞서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바이락타르 드론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가 느렸고 항상 어렵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는 드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끊임없이 드론을 생산하거나 이란으로부터 샤헤드 드론을 수입했다. 그러자 이제는 공격 전략이 바뀌면서 러시아는 드론 전에 완전히 적응했고, 지금은 그 전력 동등하거나 우크라이나보다 조금 더 앞선 형태를 보였다. 특히 드론의 공격 범위가 수십 ㎞로 확대되면서 이전과 달리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드론 지휘소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드론이 뜨면, 곧바로 정찰 드론을 보내 후방의 드론 지휘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카브(활공 폭탄) 투하나, 포격, 공격 드론을 보내고 우크라이나가 파견한 드론은 격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이 러시아가 드론 전에 완벽히 적응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론 부대는 한 차례 공격한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의 드론에서 쏟아내는 카브 공격을 피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공격 패턴이 러시아와 같다. 그러나 러시아 드론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있어 전체적인 화력이 러시아보다 떨어지고 그 위력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 공격 패턴이 변화한 것에는 이미 여러 차례 파악된 바 있다. 대표적인 공격 전략이 샤헤드 드론의 집단 공격이다. 10~15대의 샤헤드 드론이 일단 목표물에서 좀 떨어진 상공 4,000m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공격 명령의 신호가 떨어지면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급강하 하여 공격에 나선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해서 급강하 하는 모든 드론을 요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공격 전술을 사용하려면 10여 대의 드론을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 방해 전파를 차단할 수 있는 자체 통신 시스템까지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드론의 전력은 우크라이나 방공군 소속의 장교가 실토하기를 새로운 드론 전술로 인해 우크라이나 방공망의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져 있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더불어 러시아 드론의 성능도 급격히 좋아졌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전문가들은 격추된 러시아 드론을 분해해보면 중국의 민간 드론인 '매빅'은 많이 줄어들었고, 이를 개조한 모델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드론의 기본 기판은 여전히 중국산이지만,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러시아산이라고 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 드론이 대량으로 조립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자율형인 AI형 드론과 가미카제 자폭 드론도 크게 늘어나 러시아는 각기 용도애 따라 다른 드론들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다. 군사 전문지 디펜스 익스프레스(Defense Express)는 지난 5월 21일 러시아가 위성 항법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미 AI로 장착된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고 타격 목표물을 식별한 뒤, 공격하는 AI형 드론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AI형 드론은 최근까지 사용 범위가 30km 내외에 불과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최대 100km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지상 작전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 모든 것이 '드론 전술'이 진화한 덕택이라 보기에는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쿠르스크 탈환 작전의 성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 작전 차이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쿠르스크에 고립된 상황에서 방어에만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러시아군은 접경 지역에 완충지대를 구축하라는 푸틴 대통령의 명령과 더불어 북한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우크라이나군을 더욱 강하게 공략했다. 게다가 쿠르스크 전체를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기에 시간은 러시아군 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군의 적진 돌파 작전도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원들은 현재 사용이 중단된 대형 파이프 라인 속으로 10여 ㎞를 걸어 우크라이나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해당 파이프 라인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동유럽으로 연결되는 지하 천연가스관을 말한다. 투입된 병사들이 잔존하고 있는 천연가스로 인한 호흡 곤란과 두통으로 후유증을 호소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러시아군에 놀란 우크라이나군은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스스로 무너졌다. 게다가 후퇴 명령까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막대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그런데 참고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기습한 가스관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 나토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루블로 가스 대금 지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궈 놓은 가스관이었다. 이처럼 쿠르스크 탈환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과 전술로 이루어낸 공격 패턴은 다른 전선에서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 도네츠크 주(州)의 전략 요충지인 뽀끄로브스크(Покровськ)와 또레츠크(Торецьк) 사이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의 남동쪽에서 쿠르스크와 비슷한 전선 형태를 만들어 방어 및 공격 기지를 형성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돌출된 지역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러시아는 그 지점을 포위한 뒤 사방에서 드론을 날려 보내며 공격 패턴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정세를 판단해 후퇴하지 않으면, 제2의 쿠르스크 전선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주력은 콘스딴띠노브까(Константиновка) 전선으로 속속 투입되어 병력이 증강되고 있다. 이처럼 몰려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앞으로 관건은 드론 전쟁을 통한 반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드론의 투입수를 늘려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와 함께 방어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병력이 모자르다는 것에 있다. 병력 부족의 치명적인 약점은 현재 러시아군과 전투에 있어 크게 발목을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다. 이것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30일 휴전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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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3
  • 현 러시아의 발전을 이끌었던 소련의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대한 이야기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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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6-13
  • 2022년 러시아의 부분동원령을 거부하고 난민 신청한 러시아인, 2심에서의 패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2024년 5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인이 올해 2심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거취는 대법원 최종 선고에서 가려지게 된다. 서울고법 행정 9-3부(재판장 김형배)는 최근 러시아인 A모씨가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난민 불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한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A모씨는 이름이 안드레이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이제 안드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그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2022년 10월 부분 동원 소환장을 받자, 러시아를 탈출해 인천공항에 도착해 노숙 생활을 하여 논란이 됐던 5인방 중 한 명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의 심사 거부로 인해 인천공항에 발이 묶여 꽤 오래 노숙생활을 했었다. 당시 Газета.ru와 라이프 등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동원 회피'에 대해 난민 지위 획득에 대한 근거가 아니기 때문에 망명 허가를 거부했다(Bласти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отказали россиянам в предоставлении убежища, так как основанием для получения статуса беженца уклонение от мобилизации не является.)"라고 언급했으며 "한국은 전체 난민 신청의 1.3%만이 인정된다(B Южной Корее одобряют только 1,3% всех заявлений на предоставление убежища.)"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필자도 이를 포스팅하면서 뉴스 칼럼에 내기도 했다. https://www.breaknews.com/1014529 이들 러시아인들을 돕는 이종찬 변호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체류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제공받을 뿐, 나머지는 빵과 음료수로 때우고 있다며 의료 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제한적인 데다,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또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 거부는 난민인정 사유가 된다며 적어도 난민심사를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받아들여져 안드레이는 2023년 1월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분 동원령에 따른 징집을 피해 러시아를 탈출했으니 귀국 시 처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번에 안드레이의 난민 인정을 거부했고, 안드레이는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안드레이가 정치적인 동기로 징집을 거부한 것인지, 또는 귀국하면 본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국제적으로 난민법에 따르면 인종 및 종교, 국적 등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경우,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대법원 판례로 볼 때 단순히 강제 징집 거부는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징집 거부가 정치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박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모호한 처사의 이야기다. 난민에 대한 국제법은 개별 국가법 및 외교법, 행정법에 따라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의무가 들어가는 강제성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각 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해당 국가의 주권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슬림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LA에서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난민을 받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안드레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 발발 이후 자신의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반전 시위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징집 통보도 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푸틴에 대한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원심인 1심에서는 안드레이가 SNS에 전쟁 반대의 글을 올리고, 시위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징집 거부를 정치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2년 4월과 9월, 러시아 첼랴빈스크의 한 광장에서 열린 두 차례 ‘반전 시위’에 참여했다는 안드레이의 진술과 지인들이 작성한 안드레이의 시위 참여 확인서 등이 판단할 수 있는 적법한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탈영하거나 전투를 거부한 병사에게 최대 10년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러시아군 당국이 전장에서 탈영한 병사를 살해했다는 한국이나 집단 서방 언론의 보도를 근거로 안드레이가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군에서의 탈영은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라 군법에 의한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투 거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당연히 군법에 의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징집은 본래 러시아에서 영장이 떨어질 수 있는 나이 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러시아는 한국처럼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지게 되어 있으며 1998년부터 이 징병제는 현행 유지 중이다. 러시아 연방법 제59조 (Статья 59) ① 국방은 러시아연방 국민의 본분이며 의무이다. (1. Защита Отечества является долгом и обязанностью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② 러시아연방 국민은 러시아연방법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2.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есет военную службу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③ 러시아연방 국민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군복무의 이행과 상치하는 경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다. (3. Граждани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случае, если его убеждениям или вероисповеданию противоречит несение военной службы, а также в иных установленных федеральным законом случаях имеет право на замену ее альтернативной гражданской службой.) 러시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안드레이는 거부하고 한국으로 도망와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2심 때의 판단은 이런 부분들이 적용됐을까? 결국은 안드레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드레이는 당초 난민 면접과 소장에서 “2021년 정부 반대 시위에 1차례 참여했다”고 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전쟁 발발 후 몇 차례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2022년 4월, 9월 2차례 참여했다” 등으로 말을 바꾸었다. 결국 시위 참여 시기와 횟수 등 중요 부분에서 일관성 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시위 참여 시기를 전쟁 이후로 바꾼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면서 패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됐다. 또 시위 참여 확인서도 각기 다른 사람이 작성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면서 안드레이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게 아닌지 의문이라 보았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단순한 병역 기피를 위해 도망 온 것이라 해석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드레이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러시아든, 한국이든 병역 문제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병역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주한 스티브 유 (유승준)과 치아를 고의 손상시켜 병역 면제를 받으려한 가수 MC 몽, 그리고 몇몇 병역기피를 위한 편법을 이용한 정치계, 경제계 인사들 등, 이들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만약에 이 난민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병역 기피의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징병 군인들의 숫자가 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선례가 생긴다면 이는 사회적인 혼란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병역 기피로 인한 러시아 난민의 난민 인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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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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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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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7
  •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의 전면적인 등장과 서기장이 되기 이전까지 그의 행적
    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키부 스토이카(Chivu 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 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올랐으며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희대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우셰스쿠에게는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루처(Andruță)는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던 가난뱅이였다. 그와 같이 가난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의 부모님은 농사 이 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집안 출신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안드루처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 후반 희대의 독재자들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던 BBC가 차우셰스쿠를 조명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스코르니체슈티를 방문해 그와 그의 부친인 안드루처를 알고 있다는 한 정교 신부를 인터뷰한 바 있었다. 신부는 차우셰스쿠의 아버지에 관해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던 인물." 이라 하였다. 차우셰스쿠가 희대의 광기 어린 독재자가 된 이유는 이와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의 환경적인 요소도 분명 자리했을 것이다. 유년기 차우셰스쿠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가 함께 살기에는 매우 공간이 협소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옥수수죽으로 알려진 머멀리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도 역시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과 같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해당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고 내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이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갔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증언하기로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고향에서 도망쳤다고 했지만 대체로 아버지인 안드루처가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보통 광기 어린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1. 집안 환경이 불우했고, 2.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3. 아버지가 주정뱅이에 가족들에 심하게 폭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한 환경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권력이 정점이 되었을 때 내제되어 있는 그 불만들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 조건들에 부합했던 것은 히틀러도 그랬고 스탈린도, 게오르기우데지나 체코의 노보트니, 북한의 김일성, 차우셰스쿠, 심지어는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집안 자체가 그러했었다. 우선 차우셰스쿠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차우셰스쿠는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신발 공장에 취직해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CR : Partidul Comunist Roman)의 열성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u)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 형태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1932년에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 불법 단체로 인정되었던 데다가 아직 10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그와 같은 잡일은 당시 루마니아 왕국으로 볼 때 매우 불법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일련의 파업들을 주도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3년 첫 번째 체포 이후 차우셰스쿠의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 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 체포되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와 같은 활동을 두 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그, 름니쿠 블체아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들에 파견되어 공산당과 관련된 임무들을 수행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들과 잦은 수감생활로 인해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에 대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反) 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여기게 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차우셰스쿠와 같은 방에 수감된 감옥 동기가 있었는데 이 동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차우셰스쿠는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독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교도관들의 폭행에도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하며 교도관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죄수들 통제하는 방법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동기도 차우셰스쿠에게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독살당할 뻔하자 해외로 망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을 위한 지하활동을 위해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으로부터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차우셰스쿠의 후원자인 블라디슬라브 타르노브스키(Vladislav Tarnovski)의 집에서 그가 거주했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가 발견되었고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지만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차우셰스쿠는 반(反) 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자기 집처럼 왕래했을 정도로 수감 생활이 화려했으며 일명 대단한 빨갱이였다. 이 때에 감옥에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고등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하면서 더욱 경도되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총애를 받아 그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 된 이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인해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면서 그는 서서히 권력을 잡아 루마니아 정계 2인자로 올라섰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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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 이슬람만의 독특한 화법, 세밀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
    좁은 캔버스에 사물을 축소해 화려하게 표현하는 이슬람 세밀화는 회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슬람 미술사의 백미로 불린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를 금기시했던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도로 상징화된 문양과 다양한 서예 기법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건물과 동식물은 물론 인물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낸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상 표현에 대한 무슬림들의 두려움은, 실제로 『꾸란』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인 아이샤가 동물이 장식된 걸개를 집에 장식하자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아이샤가 그 걸개를 방석으로 만들자 흡족해했다고 한다. 즉 생명을 묘사하더라도 그것이 숭배나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면 형상 표현의 금기는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무슬림들의 삶 전반에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형상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모스크 건축이나 코란의 필사와 같은 종교의 영역과 왕궁의 건축이나 서책과 같은 세속의 영역이 구분되었으며, 세속의 영역에서는 그 쓰임에 따라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대상의 묘사가 가능했다. 용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이슬람 미술에서 독립된 조각이나 회화가 등장하지 못하는 제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슬람 미술가들에게 형상 창조의 자유를 선사한 가림막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의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이슬람 세밀화이다. 인물을 묘사하는 행위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회화는 열렬히 숭배받기도, 때로는 훼손되거나 심지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 속에서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1335년, 일한국이 몰락하면서 이슬람 세밀화는 지방정권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특히 인주왕조(1335~1357)의 수도였던 시라즈가 대표적이었다. 시라즈에서는 타브리즈의 궁정양식과 전혀 다른 전통적인 세밀화가 발달하였다. 시라즈의 세밀화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노랑, 파랑, 빨강 등 원색을 다채롭게 배경에 사용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선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거대한 꽃으로 공간을 채우는 등 왕실 공방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후 인주 왕조가 무자파드 왕조(1335~1393)에 점령되면서 시라즈 세밀화에는 무자파드 양식이 나타난다. 수평선은 높고, 둥근 산맥 위에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었다. ‘쿨라’라고 불리는 무자파드 특유의 터번이 등장하며 인주 시기와는 다르게 작고 세밀한 초목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말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고, 사람은 반대로 머리가 크게 표현되었다. 눈과 입은 비교적 작게 그리고 수평의 뾰족한 콧수염을 더해서 무자파드 양식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잘라이르 왕조(1336~1432)가 있었던 바그다드에서는 14세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인 크와주 케르마니가 쓴 세 편의 시의 필사본에 포함된 10편의 삽화가 가장 유명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복식을 입은 우아한 주인공들은 치밀하게 구성된 자연물과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다. 세심하게 묘사된 다양한 초목은 화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필사본의 몇몇 삽화에는 화가 주나이드의 서명이 남아있는데, 이는 과거 서예가들만 주목하던 것과 달리 이슬람 미술사에서 회화와 화가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오스만의 궁정화가 레브니(Levni)가 유명한데 그는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 u)의 에디르네(Edirne)에서 태어났다. 레브니의 본명은 압두셀리 첼레비(Abdülcelil Çelebi)이며, 색의 다채로움을 의미하는 '레브니'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레브니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 레브니는 초기에 음악과 시를 공부했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작업장에 들어가 테즈힙(Tezhip)을 배우고 테즈힙 예술가로 일했다. 테즈힙은 책의 표지와 한 챕터의 다음 장을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인 모티프로 장식하는 이슬람 미술의 한 종류이다. 테즈힙은 금과 선명한 채색을 써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레브니는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집권한 1695년과 1703년 사이에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III, 재위 1703년~1730년)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궁정화가로 일하였다. 레브니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로서 디미트리 칸테미르(Dimitri Kantemir)가 집필한 오스만 역사서의 세밀화(Miniature)를 제작했으며, 무스타파 2세 이전에 통치한 군주 21명과 무스타파 2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밖에도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의 사후에 제작한 '무스타파 2세의 사후 초상'(Portrait posthume de Mustafa II, 18세기경)을 남겼다. 레브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톱카피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인 세이드 베흐비(Seyyid Vehbi)가 쓴 산문집인 '술내임-베흐비1세'(Surname-i Vehbi: 술내임은 술탄의 자녀들과 관련된 축제를 주제로 한 문학 장르를 뜻함)에 실린 세밀화가 있다. 이 세밀화들은 1720년에 있었던 아흐메드 3세의 네 아들의 할례를 기념하는 15일간의 축제를 날짜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브니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게 아주 다양한 색을 써서 인물 군상과 지물들을 표현했으며, 몇몇 세밀화에는 원근법을 적용하였다. 16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궁정 화원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에 알맞은 그림을 촘촘하게 그려내는 ‘세밀화’가 공식적이고도 전통적인 화풍으로 인정받았다. 이 그림들은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바라보듯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에 입각한 화폭 구성에 따라 대체로 평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이끌어간 것은 이슬람 세밀화의 대가 ‘비흐자드’를 중심으로 하는 ‘헤라트 파’였다. 한편 같은 시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서는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이는 회화에 있어서도 ‘원근법’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이 유럽의 화풍은 오스만 제국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심지어 술탄마저도 그에 매혹되어 유럽의 화풍을 좇았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유럽의 화가가 이스탄불의 궁중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 세밀화의 시초는 15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파티흐 술탄(1432~1481, 오스만 제국 제7대 술탄) 시기에 이르러 독특한 스타일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책 속에 술탄의 초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셀주크 투르크 시기처럼 술탄, 귀족 등의 후원자들은 궁전 근처에 화원을 만들어 세밀화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세밀화는 궁중화원(나카시하네)에서 제작되었다. 나카시하네는 궁중의 장인단(匠人團)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화가들은 수사본에 삽화를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만 맡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책 장정과 예술품에 장식을 그려 넣는 일도 했고 중전이나 종교 건축물의 천정과 돔을 장식하는 그림도 구상했다. 또한 도자기 제조인이나 직물과 양탄자를 만드는 작업장에도 장식 문양의 밑그림을 제공했다. 나카시하네의 이러한 주도적인 역할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제작된 수사본이든 이즈닉의 도자기든 부르사의 벨벳이나 비단이든 간에 오스만 예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은 유사성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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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 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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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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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후티의 근본 이념이자 예멘의 이슬람 정파 자이드파
    자이드파는 통칭 자이디야 혹은 5이맘파로도 불린다. 제5대 이맘으로 주류 시아파가 섬기는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 Baqir)가 아닌 그의 동생 자이드 알 샤히드(Zaid Al Shahid)를 추종하는 분파다. 본래 여러 반란과 이란 카스피 해 남안에 위치한 타바리스탄 지역에서의 알라비 왕조 수립 등 수니파 중앙 정부와 극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모두 진압되고 대부분 은둔하여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인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에 이드리스 왕조, 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의 예멘에 이맘 왕국인 라시드 왕조를 세워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라시드 왕조는 1962년 공화정 수립 이전까지 세력을 유지했으며 현재도 예멘의 무슬림 중 절반이 자이드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초창기 정통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를 부정하는 다른 시아파와 달리 자이드파는 그들의 이맘 직위를 인정하여 대다수 수니파들과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긴 했다. 그러나 알리 이븐 아비 탈립(Ali Iben Avi Thalib)의 정통성 우위는 여전히 주장하며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부터의 칼리프들을 단죄하고 비합법적인 칼리프와의 전쟁을 신자로써 당연한 도리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예멘의 북부 지역과 그와 접경한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 지방인 아시르(Asir)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흔히 이들을 시아 신앙의 한 분파로 다른 이름으로는 ‘5 이맘파’라고 하며 예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아파의 제4대 이맘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Alī Zayn al-‘Ābidin)이 713년에 사망하자마자 자이드파는 그의 장남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ḥammad al-Baqir)보다 오히려 작은 아들 자이드(Zaid)를 이맘으로 선택하고 다른 시아파, 즉 절대 다수인 열두 이맘파에게서 분파되어 나왔다. 그들은 우마이야 왕조에 보다 격렬하게 저항하기 위해 자이드에 집결했다. 역대 이슬람 역사에서 주류 파벌에 대해 가장 저항적으로 나왔던 자이드파는 오늘날에는 모든 시아파 중에서 가장 온건하며 수니파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다. 물론, 그들 역시 나름의 법학파(Madhhab)들을 갖고 있다. 그들의 시아 신앙은 알리(Ali)와 그의 후손의 권위와 통치를 정치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에서 나왔다. 또한 열두 이맘 시아파 가운데 발견되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찬미, 천국에 대한 지식 및 알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기능은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시아파의 특징과 유사점이 많아 예멘은 역사적으로 시아파 망명자들, 특히 이스마일파의 소수 분파 집단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후티가 통치하는 현재도 그러하다. 자이드파가 피지배계층으로 가장 많은 국가는 카스피 해 연안의 다일람(Daylamites) 인들 사이에서 864년부터 1126년까지 많은 침략을 받으며 존속했던 알라비 왕조이다. 10세기 초, 자이드파는 먼저 예멘의 사아다(Sa‘ādah)에 정착했으며 이후에는 사나(Sanā‘a)에 정착했다. 오늘날 자이드파는 예멘 아랍 공화국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종파로 예멘에서만큼은 주류 종파이다. 나머지 예멘인은 수니파의 샤피이(Shafi‘ī) 법학파라 할 수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 논리에 의하면 알리의 후손은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물론 1명 이상일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권력을 장악함으로 인헤 입증된 통치력이 이러한 주장을 강력한 배경으로 하며 이슬람 신학자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이드파의 이맘은 열두 이맘파의 이맘에게 부여된 특권, 신비적인 힘과 초자연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자이드파는 아부 바크르(Abū Bakr)와 우마르(‘Umar)의 칼리프 제위를 인정했지만 우스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그의 칼리프위의 5년 동안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열두 이맘 시아파처럼 자이드파는 무타(Mut‘ah, ‘일시결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무타질리파(Mutazilite), 이성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멘의 자이드파 왕국인 라시드 왕국은 야흐야 이븐 후세인 알 라시(Yaḥyā ibn Ḥusayn al-Rassī)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 왕조는 사나(Sanā‘a) 지역에서 많은 전쟁과 흥망성쇠들을 겪으며 간혹 중단되기도 했으나 10세기부터 1962년까지 통치했다. 그 해에 육군대령 압드 알라 알 살랄(‘Abd Allāh al-Sallāl)에 의해 이 이맘 국가체제는 전복되었다. 공화주의자와 왕정주의자 사이의 예멘 내전은 1972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이맘(Imam)은 그 이전에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사망하면서 이맘이 없는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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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4
  • "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작년 내가 코소보에 있을 때 분쟁의 현장인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지구와 세르비아계 지구를 다녀온 바 있다. 프리슈티나에서 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알바니아계 지구이다. 어차피 세르비아-코소보는 국경이 폐쇄되어 세르비아계 지구로 가지도 못한다.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자치주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내전은 나토와 서방의 개입으로 1999년에 중단됐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끝내 2006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저 완전히 붕괴하고,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에서 코소보는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자국의 자치주로 보며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도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분열되어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그 비극의 모든 것은 이곳 미트로비차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로비차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무덤들이 나오고 유고슬라비아 때부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이 도시가 세르비아 정교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다.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이곳은 당시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聖地)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계의 권리를 박탈하자 알바니아계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당국은 언론, 교육을 통제하여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수많은 자치주 내 알바니아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연방이 붕괴하고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 자치주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신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신 유고 연방의 차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계들과 세르비아계가 미트로비차에서 정면 충돌하여 1998년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을 주도했던 코소보인은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1955~1998)를 필두로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가 주축이 되어 세르비아에 항쟁했다. 특히 아뎀 야샤리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코소보를 분리하기 위해 싸웠던 코소보 알바니아 분리주의 민병대인 코소보 해방군(KL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그는 당시 미국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91년부터 야샤리는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알바니아로 가기 전,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면서 대놓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체포된 야샤리는 알바니아 군대의 구출 작전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나중에 코소보로 돌아와서 유고슬라비아 정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이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유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 7월, 야샤리는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궐석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이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르비아의 압제에 저항한 합법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이를 탄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이자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야샤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경찰은 1998년 3월 프레카즈에 있는 야샤리의 집에 그가 있음을 파악하고 제거 작전에 나섰다. 결국 총격전이 이어졌고 야샤리와 그의 아내, 형제, 아들을 포함하여 야샤리의 가족 57명이 전사했다. KLA의 아버지이자 國父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야샤리(Jashari)는 공동 지도자이자 동료인 하심 타치에 의해 추앙되었고 그는 후일 알바니아 민족에 의해 코소보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는 온건파인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와 전혀 극과 극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야샤리는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 이후에 "코소보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리슈티나 국립극장, 프리슈티나 국제공항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및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올림픽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로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로 모든 것이 갈라지게 된다. 이바르 강의 강북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했고 강남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쪽은 세르비아 정부가, 남쪽은 UN이 관할하기에 관할 기관도 다르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바르 강의 다리는 두 곳이 존재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바르 강은 정확히 민족, 인종 간의 경계선이 됐다. 종전 이후, 세르비아군이 철수하자 그간 세르비아에 박해를 받아 온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보복 공격을 자행했다. 미트로비차의 참극은 코소보 전쟁의 시작점인 곳이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두고 두고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참고로 미트로비차는 현재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지정한 "철수 권고" 지역이다.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선으로 코소보 인종 분리의 상징이 됐다. 미트로비차 문제의 본질은 양측의 공존공생 모색에 있고 이 공존공생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자치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다. 두 개의 자치도시를 만들면서 코소보 내에서 국제 관할 아래 두자는 것이 알바니아인들의 생각인 데 비해 세르비아인은 완전히 두 개의 자치도시로 분리해 북쪽은 세르비아에 귀속시키자는 입장에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요구 사항은 자치 도시 설립의 주요 목적으로 난민들의 고향 복귀와 안전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세르비아군의 철수 이후 25년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의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아온 세르비아인들의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알바니아 측은 자족적이며 지속 가능한 자치 도시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은 이바르 강을 북미트로비차의 코소보 편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할지언정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의 자체 군사력 보유와 북미트로비차 합병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 이에 집단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접촉 그룹은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과 회유로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에 있다. 필자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 거주 지역을 침공해 세르비아 국기를 걸레로 만들고 몇몇 상점들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를 했다. 이 때 총 4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화염병 투척 당한 건물은 복구조차도 안 되고 있다. 이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려 있는 도로의 세르비아 국기마다 걸레처럼 변했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의 폭격 이후, 이바르 강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 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조차 달라졌다. 지금은 물론 똑같은 유로를 내지만 미트로비차 북쪽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는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도 통용된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 쪽에서는 강북의 세르비아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침공해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두 계통 시민들 충돌의 현장, 필자는 이 비극의 현대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끊임없이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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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4
  • 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빅딜’ 협상을 통해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145% 관세를 30%로,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125% 관세를 10%로 낮추기로 서로 합의했으며, 관세 인하 시한을 또한 90일로 정한 이후 추후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을 뒤집고 일종의 깜짝쇼처럼 비출 수 있는 합의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국에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면서 마치 어느 쪽도 물러날 뜻이 없이 끝까지 간다는 발언들이 나왔던 시점에서 보면 선뜻 이번 합의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이번 회담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덧붙이고 있고, 미국은 중국이 경제가 붕괴하고 있어서 중국 관리들이 미국과 거래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진술을 보면 공통으로 상대방의 사정으로 이번 회담은 성사될 명분은 충분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보복성 관세를 계속 부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현재 서로의 문제를 교착화만 시킬 뿐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당장 상품 수출이 막히게 되니까 그대로 수출 상품이 창고에 쌓이게 되고, 이와 대로 미국은 소비재가 공급부족에 따라 물가 상승에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각각 협상 타결의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상대방의 양보를 얼마나 얻어내느냐에 있어서 말하자면 계산이 분명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은 노동절 연휴와 러시아 전승절 참석 이후가 미국과의 협상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 당국은 노동절 연휴에 내수경기를, 러시아 전승절 참석으로 수출 시장의 다변화를 일단 한번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하면서 대비 협상에 임했을 수 있다. 또 중국은 자국의 생산기지를 일부 동남아로 옮기면서 미국으로부터 각종 제재를 피하면서 실속을 챙기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 중국은 쉽게 말해 미국과 거래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따라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경기 침체와 성장률 둔화, 내수 침체에 따라 민심을 안정시키고 돈 풀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은 우선 관세 전쟁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경기 위축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대미무역 흑자국에 대해 강력한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중국은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인데, 중국이 수입하는 중국산 품목은 전자제품(컴퓨터, 휴대폰, TV), 가전제품(냉장고, 세탁기 등), 의류 및 섬유(의류, 신발 등), 가구(사무용, 가정용), 장난감(완구류 등), 배터리(전기차용, 기타), 철강 및 알루미늄(건축 및 제조업용), 반도체, 핵심 광물(희토류 등) 등이다. 중국은 그동안 이들 품목을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대량 수출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취득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액은 약 2,956억 달러로 유럽연합이나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국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 정도로 그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과 반대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상품 품목은 곡물 및 종자류(대두, 옥수수, 밀 등), 석유 및 천연 가스, 기계 부품, 의약품, 항공 및 우주 관련 장비 등이며, 약 1,5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은 대중국 무역적자 외에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지적하고, 중국의 기술 향상과 경제적 영향력으로 농수산물 분야를 제외하면 미국산이 중국에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 최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이 아직 미국에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차후에는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을 관세라고 보고, 이를 잣대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시진핑 주석은 미국의 압박을 버티면서, 오히려 미국에도 보복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처음부터 관세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다. 하여튼 미국과 중국의 이번 합의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의 득실을 따져 보면 중국은 오히려 소매 판매와 산업 생산이 모두 상승하고, 동남아와 유럽연합에 대한 수출을 늘렸다.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소비가 문제였지 생산이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물가 상승에다 국가 신용등급 강등, 재정적자라는 트레마(3중 딜레마)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 침체 가능성으로 인해 미국의 주식·채권·달러를 팔고 안전자산인 금으로 큰 손들이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여전히 관세 카드를 이용해서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의 다음 상대는 어디인가? 한국의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모 후보는 트럼프에 대한 막연한 신뢰로 직접 정상회담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 후보는 반트럼프 전선으로 세계와 연대를 통해 대응하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친중국 정책이 대미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자는 논지를 펼쳤다.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별로 신통치는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이번 미국과 중국의 관세 협상은 차후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있어 하나의 카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협상 태도는 치밀한 계산과 집요한 버티기를 통해 오히려 미국에 명분과 체면을 세워 주었다. 중국은 겉으론 손해를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보다는 실속을 챙긴 셈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성급할 필요가 없고, 철저한 준비와 대응책을 충분히 갖고 미국과 협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섣불리 미국과 협상에 임했다간 자칫 한국은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수출 위주의 한국 경제가 만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3년 동안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치중한 탓에, 한국의 입지가 좁아져서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한국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미국이 관세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주한 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입장에 맞서 한국이 이를 분리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관세율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느냐에 있다. 일본도 처음에는 미국과의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가 현재는 관망하는 태도로 선회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그대로 관세를 부과한 것을 보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아무것도 미국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손해만 보았다는 생각에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망하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에서 우리가 심사숙고할 사항은 대미협상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철저한 준비와 대안을 갖고 서둘려 협상에 나서기보다 차분히 상황을 주시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아마도 최악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되었음을 뜻한다. 아직도 성장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향에 눈을 감고 있다. 고도의 성장률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갖고 전진하는 도전의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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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 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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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아프리카 최대 석유 부국(富國), 나이지리아의 암담한 현실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니제르 강, 혹은 나이저 강(Niger River)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활 모형으로 감고 도는 국제적인 하천이다. 총 길이가 4,180km에 이르러 나일 강, 콩고 강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하천의 유역면적은 2,902,000㎢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으로, 워낙 길고 강 유역 면적이 넓다보니 니제르 강과 관련된 국가는 10개에 이르고 있다. 니제르 강의 발원지인 기니(Ginea)를 거쳐 말리(Mali)를 감아 돌고, 니제르(Niger)와 베넹(Benin)의 국경을 통과한 다음 나이지리아(Nigeria)를 거쳐 기니만(Gulf of Ginea)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길이가 길어진 만큼 발원지에서 시작해 대서양으로 흘러가기까지 다양한 기후 지대를 거친다. 열대우림지대, 사막화지대, 다우지대를 모두 포함하는데, 나이지리아 하구 지역이 나이지리아 분쟁의 중심지인 니제르 델타(Niger Delta)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석유가 풍부해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으로 나타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와 지도자들의 암살 등 지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지도층의 부정부패 및 국가의식의 쇠퇴 등으로 나이지리아가 심각한 절망을 이끌어내는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니제르 델타’인 것으로 나타난다. 니제르 델타는 그 길이가 190km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역이다. 이 삼각주 지역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나,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그 자원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내부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1일 석유 생산 능력이 3백만 배럴에 달하고 있는 나라다. 확인된 매장량만 362억 배럴이며 현재도 탐사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매장량이 계속 확보되고 있다. 니제르 델타의 석유가 나이지리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절대적이다. 나이지리아는 한 때, 하루 280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지위를 가지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정치적 통치 역량을 지닌 뚜렷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막대한 부가 부정부패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도층 간의 내분과 국민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7년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 : Movement of Emancipation of Niger Delta)’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얻어지는 석유 수입의 배분에 소외된 인민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고 억압에서 해방 한다(The distribution of oil imports from Nigeria's territory restores legitimate rights to the marginalized people and frees them from oppression).” 는 구호를 들고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와 시민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석유의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이자우(Ijaw) 족이 구성된 다양한 반군 단체들과 중앙정부 간의 분쟁은 니제르델타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니제르 델타 해방운동(MEND)은 그 동안 석유 관련 시설에 대한 빈번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인권이나 인간 해방과 같이 고매한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제로 무장 단체들은 자신들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외국인 납치와 시설 파괴 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강탈한 원유와 석유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의 규모가 매우 엄청나 그들의 정치 활동 자금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니제르 삼각 지대에서 지속되고 있는 치안의 위협은 2000년 이래 나이지리아의 국방비가 4배나 증가한 주요 원인이자 배경이 되었다. MEND의 수장인 헨리 오카(Henry Okah)가 2007년에 앙골라에서 구속되었고 다음 해 2월 나이지리아에 송환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7년 12월 말, 반군은 헨리 오카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지하드를 선언했다. 2008년 4월 1일,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Abuja)에 있는 연방 고등 법원은 MEND 리더인 헨리 오카(Henry Okah)를 무기 거래, 석유 절도(Oil‐bunkering), 그리고 국가 반역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MEND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26일 리버스(Rivers) 주에 위치한 주요 석유 수송관에 공격을 가하고 11명의 군인을 살해하였다. 이어 MEND 반군들은 6월 11일 석유 시설을 두 차례 공격했고, 최소 1명 이상을 사살 했다. 6월 20일 고속모터보트에 탑승한 MEND 반군들은 해양으로부터 120km 떨어진 해양 항구로 알려진 쉘(Shell) 사의 봉가(Bonga) 시설을 공격했고,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석유 공급량 중 10%가 일주일 동안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6월 30일 MEND의 석유 시설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서 경비원 2명이 사망했다. MEND 소속 반군 병사들은 6월 29일 두 개의 쉘사 송유관을 폭파했다. 2008년 8월에 들어 나이지리아 방위군은 같은 달, 6일 MEND에 대항하는 군 작전에서 이자우 계통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아게(Agge)와 리버스 지역 마을들의 여러 가옥들을 폭격하여 파괴했다. 8월 17일 하코트(Harcourt)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MEND와 육군 간의 전투로 인해 12명의 반군들이 사망했다. 8월 24일, MEND는 육군 병력이 베이옐사(Bayelsa) 주의 상업적으로 운송하는 보트에 총격을 가해 12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에 대해 MEND는 나이지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항과 보복 공격으로 MEND는 8월 30일, 베이옐사, 니제르 델타지역, 그리고 리버스 주에 주둔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군 기지를 공격했고, 군인 29명과 반군 6명이 사망했다. 2008년 9월 10일, 나이지리아 대통령 우마 야르 아두아(Umar Yar’ Adua)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니제르 델타 지역 직무 담당인 부서를 창설했다. 9월 13일, 나이지리아의 육군 병력은 전투기를 동원해 리버스 주 소재의 MEND 반군 은신처를 대상으로 대규모 폭격 및 공세를 가했고, 이로 인해 15명 이상의 반군들이 폭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 MEND는 석유 전쟁을 선언함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경제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군대와 반군들은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9월 15일에서 21일까지, MEND는 니제르 델타 지역의 여러 석유 시설들을 공격했고, 송유관을 폭파하였으며, 공급 정류소를 파괴했다. 이 시설들을 지키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방위군들은 9월 18일 반군 12명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며 MEND 반군들은 9월 21일 휴전을 요청해 정부군과의 협상 끝에 이에 동의했고, 11월 22일 그들이 베이옐사 동쪽 지역에 있는 군사 기지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합의를 이행했다. 이처럼 빈번한 MEND 세력의 유전 테러 공격과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군인들을 살상함으로 인해 2008년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300여 명이 납치되는 가운데 수천 명의 이주민과 이재민들이 발생하였다. 이어 2009년 초에도 양측의 교전으로 인하여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리고 납치와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 정부는 MEND 세력과 자주 교전을 벌였고 해상에서 또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는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들과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MEND의 분쟁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MEND는 국가 시설 파괴나 외국인 납치 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인근 해역에서 배상금을 노려 납치, 살인, 선박 탈취 등의 해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MEND를 저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은 여러 차례 유혈 사태와 교전을 반복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MEND의 지하드 투쟁은 이제 여러 지역에 걸쳐 범죄형 갱단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어 장기전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에 게릴라 전을 감행하는 한편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 북부의 보코하람과 연계를 시도 하고 있다. 정부군은 이러한 MEND를 경계하여 보코하람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이에 보코하람은 MEND의 반군 활동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했다는 징후가 포착됨에 따라 육해 지역 간의 반군들과 투쟁이 지속될 전망으로 있다. 나이지리아가 브릭스에 가입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MEND와 보코하람의 활동을 스스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의 뒤를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생기고 있다. 과연 이들의 배경에 미국이나 영국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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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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