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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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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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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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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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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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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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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 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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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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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문제로 인한 긴장 상태가 높아지면서 양국 군대의 치열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와종에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이 터지면서 탄핵 심의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 패통탄은 지난 6월 15일 캄보디아 상원 의장이자 전직 총리인 훈 센과 통화하면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 사령관을 ‘반대파’라고 부르며 “그는 그저 멋져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He is a politician who just wants to look cool).”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5월 28일 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는 패통탄 총리의 언사가 군을 비하하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였다며 패통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제2당인 태국 행동전진당이 이탈하고 총리 해임 요구까지 제기되며 태국 정치권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사실 패통탄의 정당이자 친나왓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쁘아타이(Phak Phuea Thai)는 태국판 중도우파 성향의 스팩트럼을 갖고 있다. 탁신의 스타일이 우익 성향의 기득권과 군부에 반대되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분배에 기반한 포퓰리즘성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을 본다면 중도좌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급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니기에 이념적 스팩트럼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 정당의 지지기반은 주로 북쪽으로 미얀마, 라오스와 연계되어 있고, 친중국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탁신 자체가 친중국 성향을 갖고 있기에 친미 성향의 태국 남부 지역, 말레이 반도의 낙후된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난 총선에서 남부 지역을 석권하던 연합태국국가당이 남부 지역의 낙후된 경제 사정을 해결하는데 실패하여 쁘아타이에게 패배했기에 지금의 남부 지역은 북부 중심의 쁘아타이보다 군부를 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태국 정치와 경제의 로얄 패밀리급의 친나왓 가문을 보자면 본래 타고난 정치적 엘리트 가문이 아니라 태국의 사업가 가문으로써 탁신 본인부터 사업가 출신이다. 게다가 광동 지역 화교 출신으로 객가인(客家人)이다. 태국 경제계에서 유달리 힘을 쓰고 있는 화교 가문이 셋이 있는데 조산화교(潮汕華僑), 광동화교(廣東華僑), 복건화교(福建華僑)로 태국 경제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친나왓은 광동화교에서 꽤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북부 치앙마이를 본 고장으로 삼고 있고, 이들은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중국과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이다. 특히 2025년은 태국과 중국의 수교 50년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중국-태국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인프라 프로젝트이자 태국 최초의 표준궤 고속철도 건설사업으로 중국 국영 건설 엔지니어링(태국) 유한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Thailand) Co)가 맡고 있다. 탁신은 중국과 결탁해 많이 비리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탄핵되고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인물이다. 그만큼 중국과의 유착 상태가 엄청난 가문이다. 친나왓의 다른 가족들 또한 역시 사업을 하던 중 정계에 입문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가족들은 가문의 사업체 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거나 본인이 개별적으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문 내에서 총리를 무려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기에 태국 정계에서는 태국을 대표하는 로얄 패밀리 가문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가문의 정치적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탁신은 총리에 당선된 이후 군부에 대항하는 반군부 세력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그는 23년 동안 총리를 했고, 가문 전체가 군부와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 군부에 맞서기 위해 가족 내에서 정치인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탁신의 여동생과 딸이 정계로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에서 태국 여성 총리를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참모총장이 200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실각시켰고 2014년에는 쁘라윳 짠오차(ประยุทธ์ จันทร์โอชา)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쁘라윳 총리는 2010년 4월에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실각에 반발하여 일어난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는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태국군의 유혈사태를 동반한 진압으로 92명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4년에 집권한 이후 2018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정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등, 군부 철권 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2019년 태국 총선거에서는 젊은층들의 투표를 제한하기 위해 SNS를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라마 9세의 장녀이자 현재 국왕의 누나인 우본라따나 공주가 탁신계 정당에 입당하면서 군부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헌법재판소를 이용헤 탁신계 정당을 해산시켜 버리는 비민주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2023년 태국 총선거에서 범여권 정당들이 참패하여 세력을 잃자, 쁘라윳도 같은 해 7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총리 직위도 내 놓았다. 따라서 여당이 된 쁘라타이의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가 된 것이다. 그동안 친나왓 가문과 군부는 서로 경쟁하듯 대립해왔고, 상호 간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통탄이 훈 센과 통화하면서 자국 군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대립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캄보디아 훈 센의 가문 또한 친나왓 가문과 가깝고, 친중국 측인데다 조산화교(潮汕華僑) 집안이다. 그의 이름 '훈 센'은 운승(雲昇)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 그러니 패통탄의 부친인 탁신과 훈 센은 서로 사적으로 통화를 자주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한 부분들을 태국의 군부 또한 좋게 볼 리 없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와는 얼마 전까지 총격을 벌였던 적국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태국에서 발생한 19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군부가 정권을 잡은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과 같은 외세의 개입도 많았다. 미국 또한 친중국 일변도의 친나왓 가문에 대해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이번에 패통탄의 직무정지 및 탄핵은 정치권에서 친나왓 가문에 대한 불신,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그리고 의회에서 탄핵 심의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20번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다수의 태국인들은 쿠데타에 대한 분노보다는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인데 이는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로 인하여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쿠데타 시위가 매번 일어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태국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방관할 가능성 또한 90%가 넘을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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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직무정지 사태와 군부 쿠데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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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 우리 대한민국 기업의 헝가리 진출은 수교하자마자 존재했지만 그 시작이 미미했었고 굵직한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적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업 13개가 들어가 키예프 일대에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삼성이 대규모 공단을 지어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튼것과는 달리 헝가리는 생각보다 미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두산중공업이 전기차용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만드는 헝가리 생산공장을 착공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산은 전지박 생산을 위해 2018년부터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 14만4천㎡ 부지에 공장 건설을 준비했으며 2020년 초에 완공할 예정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다 하반기에 완공했다고 한다. 헝가리 전지박 공장은 연간 5만t을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전기차 220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헝가리의 공장이 유럽의 유일한 전지박 공장으로 헝가리 현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과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됨은 물론 이에 따른 가격 경쟁력과 품질 안정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지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재 부분에 씌우는 얇은 구리막으로 열을 외부로 방출하고 형상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앞서 두산은 2014년 룩셈부르크의 동박 제조업체 서킷포일 인수로 전지박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지박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전지박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것이 결실을 보았고 고품질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 시장 최고의 전지박 생산 거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2020년에는 롯데알미늄이 1,100억원을 투자해 친환경 전기차에 사용하는 2차 전지용 양극박 생산 공장을 헝가리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양극박은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 수 있는 2차 전지의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양극집 전체에 사용되는 알루미늄박으로 알려져 있다. 전기화학 반응으로 생성된 전자를 모아 방전될 시 필요한 전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은 친환경 자동차 인프라가 구축된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에 6만㎡ 규모로 들어선다고 발표했다. 2020년 4월 착공해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이라 하는데 아직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롯데알미늄은 헝가리의 공장에서 매년 18,000t에 이르는 2차 전지용 양극박을 생산해 유럽 지역 수요 업체에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롯데알미늄의 헝가리 터터바녀 산업단지 내의 공장 건설이 들려오지 않는데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삼성전자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가 2주 후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유럽 내 공장은 헝가리를 비롯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있으며 특히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두 곳 모두 TV를 생산하는 곳이라 삼성전자의 유럽 내 TV 제조라인이 멈추었던 전무후부한 사건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이 헝가리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 전기차 배터리 증설을 위한 기술인력 300여명을 급파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헝가리의 국경폐쇄 조치가 감행됨에 따라 코마롬 제2공장 건설에 차질을 빚으면서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다. SK이노베이션은 헝가리 제2공장 준공, 시운전 등을 거쳐 2022년 초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아마 올해 안에는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전자, 전기차, 베터리 등의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헝가리에 이같은 산업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기 오염은 공중 보건에 있어 가장 큰 환경적 위험 요소에 속해 있다. 하지만 각 EU에 속해있는 정부는 이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유독성 공기로 매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대기 오염 한계는 WHO 지침 보다 훨씬 약하고 , 대부분의 EU 국가들은 이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EU 환경 감사 보고서에서 밝혀왔다. 따라서 이같은 원인이 석유와 석탄으로 인해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과다 배출된 것을 원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줄이고 가격도 훨씬 저렴한 천연가스를 대체 연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천연가스가 가장 풍부하고 저렴한 값으로 매입이 가능한 러시아에게 가스를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스의 의존은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점차 치중되어졌고 유럽 각국은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사들이면서 러시아의 국력 신장과 그로 인한 위협에 경계심을 갖기 시작한다. 유럽이 갖고 있는 에너지 시장의 탈러시아화는 바로 전기의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EU 국가들이 전기차 보급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헝가리가 유럽의 전기차 및 배터리 공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회사들이 헝가리에 속속 생산기지를 갖추고 있으며, 독일과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도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인구 980만 명의 동유럽 국가 헝가리가 전기차 시대의 제조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 하나 없는 헝가리가 전기차 시장의 허브가 된 이유는 헝가리 정부의 적극 지원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는 전기차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원, 초록색 번호판 제공, 무료 주차 허용, 등록세 및 기타 비용 면제, 충전소 설치 및 운영 기준 완화 등을 제시했고 EU의 환경보호 정책에 발맞춰 전기차 구매에 대해 보조금 지급 정책까지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1천만 포린트 (한화 약 3,500만원) 미만 전기차에 대해서는 최대 250만 포린트 (한화 약 880만원) 지원, 1천만 포린트 이상 1,500만 포린트 (한화 약 5,300만원) 이하 전기차에 대해서는 50만 포린트 (한화 약 176만원)을 지급하도록 정했다. 환경오염도 방지하고 러시아에 대한 자원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원의 탈러시아화를 꿈꾸는 유럽 시장에 있어 전기차 사업이나 이를 받쳐주는 차 베터리,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은 꽤나 매력적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헝가리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자력발전소의 추가 건립이다. 헝가리 원전 증설은 현재 가동 중인 퍼크스 원전을 대체할 1천200㎿급 원자로 2기를 새로 짓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은 러시아가 해주기로 했다. 헝가리는 2014년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 로자톰과 계약하면서 건설 비용 100억 유로의 80%를 러시아에서 차관하여 들여오기로 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첫 번째 원자로는 2018년에 착공해 2023년 가동을 시작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공사 중에 있다. 여기에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 변화 회의가 끝난 후, 탄소중립이 가능하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의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한다”는 5년 전 탈(脫) 원전 선언을 하셨던 대통령이라 헝가리 아데르 야노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헝가리 원전 정책은 왜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넘어간다. 러시아가 헝가리의 원전 건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서유럽을 향해 핵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두겠다는 일종의 안보 위협과 같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 자체가 탄소 중립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전기차, 전기의 증설과 더불어 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산업들을 추진하여 더 이상 지하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춤에 따라 이와 같은 정책을 되돌리기란 어렵다. 유럽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최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떻게든 환경 문제의 해결과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하려 하지만 전기, 전자화 될 때까지 당분간 러시아의 지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전자화가 지하 에너지들을 대체하는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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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전자화와 헝가리에 진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기 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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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 중앙아시아 부하라 유태인은 이란어 계열의 타지크어 중 부호리(Bukhori) 유태인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중앙아시아 유태인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이 부하라 유태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16~1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역 상인들을 대개 부하라 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투르키스탄, 내륙아시아(Inner Asia), 중앙아시아(Central Asia)와 같은 어휘가 사용되기 전이었고 트란스옥시아나, 마와르 안 나흐르(Mawar An Nahr)와 같은 지명들은 과거에 사용되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영내에 거주하던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통계상 30,00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7,000여 명은 1970년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로 이주했다. 오늘날 부하라 유태인의 인구수는 이보다는 훨씬 많은 18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 이전에는 무슬림인 척 하던 경우도 많았고 다른 유대인들과 통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부하라 유대인 상당수는 젊은 세대일수록 우즈베크어와 부호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대신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심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를 거점 삼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여 하자르 제국의 유태인들과 혼혈해 나타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발흐 지역 내 유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태인들은 고대 페니키아 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대가 되면서 사마르칸트의 유태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원래 중세 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당한 이후 혈통이 끊겼던 것 같다. 원래 중앙아시아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유태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페르시아 인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수니파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분화되었다고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 유태인들과 경쟁 상대였던 아르메니아 인 상인들을 우대해 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인로 인해 유태인들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유태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서쪽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 사파비 왕조 동쪽에서도 그와 같은 이유로 유태인들이 주로 동쪽 수니파의 칸국들과 교역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로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건축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태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치르곤 했다. 유태인들이 이주해 올 때 부하라는 무굴 제국에 군마로 사용할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유태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가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태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유태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후원금으로 인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으로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태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태인의 수는 총 85,000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5,000여 명은 구소련 영내에, 32,000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태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태인 인구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선택했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태인 후손이 100,000~120,000명 정도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Queens)를 중심으로 50,000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로 부하라 유태인들이 남아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관계로 이러한 사정상 유태인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사용하고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부하라에서는 유태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에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이민과 정착이 이루어지고 소련 시대의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 및 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나면서 아쉬케나지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들은 같은 유태인인 미즈라힘(Mizrachim), 세파르딤(Sephardim)과 예법을 공유했으며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들과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있다. 부하라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무슬림과 통혼하는 인구도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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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태인들, 부하라 유태인들의 역사와 아쉬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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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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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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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의 비극적인 근현대사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폴란드의 대립 삼각관계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폴란드를 삼국 분할을 하며 폴란드 동부를 지배했다. 폴란드가 이전에 러시아에서 악랄하게 대했던지라 러시아도 폴란드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숙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가상 적국이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주둔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언어와 혈통에서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슬라브 계통인 폴란드가 일찍이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서방권으로 편입된 반면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는 정교회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인 인구 상당수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계였던 영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사악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지주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했다. 그렇다면 내내 폴란드가 우위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역전이 되었을까? 러시아가 폴란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17세기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사크족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 정부에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세력 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를 믿던 동슬라브계 주민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카톨릭을 비롯한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을 강요 받게 되자 자신들을 보호할 수호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대대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폴란드군에게 연이어 승리하고 스웨덴과 함께 국토의 95% 이상을 점령하여 폴란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결과적으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의 개입으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국경이 드네프르 강으로 서쪽으로 변경되면서 키예프 장악 이후 폴란드 국토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러시아의 일방적 우세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20년에 걸친 전란으로 인해 폴란드의 교역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못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범국가적 혼란에 직면하는 동안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명군에 의해 유럽 진출을 시도하게 되고 서유럽과 더불어 해상을 주도하는 강국으로 탈바꿈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폴란드와 이웃한 프로이센 등도 인구가 급증하며 국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폴란드는 대북방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국력은 더욱 약해져 갔다. 그리고 사실상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179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했다. 이처럼 폴란드 동북부 영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러시아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포란든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영토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로 불리며 차르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 농노 해방 때는 모든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폴란드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지배하는 제주 계층에게 특별히 불리한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러시아 귀족들의 가장 노른자 땅이던 토질이 비옥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대한 불려서 계산한 반면, 벨라루스 및 폴란드 일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을 최소로 축소시켜 폴란드 지식 계층을 몰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자 당시의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수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도 포함되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에서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Прибислинский край)가 설치되었을 때는 1832년 11월 봉기가 발생하고 1863년 1월 봉기로 인해 폴란드의 입헌 왕국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되었던 시기로 나타난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들어와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투르거나 하면 교사들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혹한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의 실상은 이브 퀴리가 저술한 퀴리 부인의 본명인 마리 퀴리의 전기 <마담 퀴리>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마리 퀴리의 친구 오빠는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녀의 친구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한다. 그로 인한 원한으로 인해 후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해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부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소련-폴란드 전쟁도 1920년 10월 12일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벨로루시를 절반으로 분할하여 서쪽은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나머지는 러시아가 영유하는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1921년 3월에 체결되었던 리가 조약이다. 민스크를 폴란드가 러시아한테 양도하는 것은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협상에 나섰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민스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가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폴란드-러시아 간 국경선이 합의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멸망이 확정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면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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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정부, 의료용 마리화나 재배 및 소비 합법화와 그에 따른 우려
- 태국 정부는 2022년 6월 초 의료용 마리화나 재배와 소비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대마 관련 범죄로 적발될 때 장기간 징역형 또는 사형까지 선고했던 과거의 강경한 태도에서 완전히 돌변했다. 마리화나가 합법화 한 사건을 두고 몇 가지 해외 기자들의 취재 기사들을 읽은 바 있다. 특히 조나단 헤드 BBC 동남아시아 특파원은 21년 전 태국 방콕 인근 방쾅교도소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마약 사범이었던 5명의 사형수들이 총살로 처형되는 집행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당시 5명 중 4명이 마약 밀매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사형 당일 발에 채워진 쇠사슬을 끌고 사형이 집행될 건물로 걸어가는 죄수들을 취재했었다. 이들 마약 사범들의 처형은 당시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의 일부였다. 이러한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해 마약 사범 수백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탁신 총리의 마약에 관한 강경책은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당시 메스 암페타민이라 불리는 필로폰과 같은 마약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래서 태국 사회는 이들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 등 범죄자들의 인권 유린을 외면하고 이와 같은 강력한 법 집행을 환호했다. 물론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태국의 이와 같은 강력한 마약 정책을 따라 마약 사범에 대해 강한 철퇴를 휘둘었다. 지난 2016년 집권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이 마약 사범에 대한 강력한 소탕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이미 수십 년간 마약 밀매 등에 사형을 선고하는 등 엄정한 대처를 이어오고 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오랫동안 소량의 마리화나라도 소지하다 적발될 시에는 무거운 처벌을 받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졌던 태국이었다. 이에 지난해 6월 태국 정부가 대마를 합법화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태국 거리의 카페와 노점에서는 모든 종류의 마리화나 제품을 공개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그 옆에서는 강력한 향기를 내뿜는 양귀비 꽃으로 가득 찬 병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번 법 개정을 이끌었던 아누틴 차른비라쿨 태국 공중보건부 장관은 직접 나서서 대마가 가미된 카레 요리를 직접 시식하기도 했다. 차른비라쿨 장관에겐 이번에 합법화된 대마 재배로 인해 새로운 수입 창출을 꿈꾸는 농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제 대마에 관한 한 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 태국의 할머니들은 초록빛 마리화나 음료를 마셔보며 즐거워했다. 마리화나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정부가 무료로 나눠주는 양귀비 묘목 100만 그루를 받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개정된 대마 관련 법을 계기로 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마리화나에 관대한 국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비록 마케팅 및 판매와 관련해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긴 하지만, 이제 마리화나를 원하는 만큼 재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법 개정 촉진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말하길 이제 더 이상 태국에서는 대마초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다른 이유로 투옥될 수는 있다. 일반 대중에게 해를 주는 불법 행위인 공중 장소에서의 마리화나 흡연이나 식품 의약 안전청이 승인하지 않은 마리화나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 등은 여전히 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이제 태국은 대마초를 재배하거나 사용한다고 해서 처벌하지 않는 전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에서 의료용 마리화나의 효과를 경험한 이후 태국의 마리화나 합법화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한 태국의 일부 청년들은 정부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사망하는 가운데 고통을 덜기 위해 마리화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태국 정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게다가 당시 불법이었던 마리화나를 구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의학적인 부분에 한해서 마리화나 사용이 자유화되었다는 것에서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보수적인 군부가 이끄는 국가 태국에서 일어난 이 극적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정치적인 부분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차른비라쿨 장관은 지난 2019년 선거에서 마리화나 합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태국 젊은층들의 표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했다. 이 마리화나 합법화 공약은 당의 지지 기반인 태국의 빈곤층 및 북동부 농촌 지역 주민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쌀과 설탕 재배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이었기에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또 젊은 청년들은 새로운 일탈을 꿈꾸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유를 갈망했던 차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화나 합법화를 이루어 낸 차른비라쿨 장관은 6월 초 정치적 근거지인 태국 북동부 부리람 주(州)에서 새로운 마리화나 관련 법안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에게 환호하는 시민들 앞에서 약속을 지켰다고 선포한 것이다. 차른비라쿨 장관은 이번 합법화로 인해 의료적 혜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값이 비싼 서구 의약품을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태국 빈민층이 대마를 재배해 의료적 효과를 누리길 바란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이유로 경제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태국은 첫 3년간 마리화나 관련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약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이뿐만 아니라 특히 마리화나 추출물을 이용한 의료 관광산업을 통해서도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태국 경제부는 대마초를 이용한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클리닉을 방콕에 개업했다. 이미 일부 태국 내 대기업은 마리화나로 거액을 벌어들일 방법을 모색 중에 있다. 신속히 법을 고치고 완전한 자유화를 허용하면서 태국 정부는 혹시라도 이웃 국가들이 이후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더라도 이들보다 먼저 대마 시장을 선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안을 둘러싼 배경에는 3번째 요인이 있다. 이 요인은 군부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면서 그들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인데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마약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재고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허용된 이래 많은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마 과다 흡입으로 50대 한 명이 숨지고 치료를 받는 청소년까지 발생했다. 이제 태국 정부는 대마초 사용과 관련해 추가적인 규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태국 정부는 공식적으론 기호용이 아닌 의료용으로만 대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입장이지만, 어떻게 이 차이점을 구분해 법을 적용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어디서나 대마초를 만나볼 수 있다. 아이스크림에도, 태국의 전통 요리에도, 스무디에도 대마초가 있다. 심지어 마리화나를 먹여 키운 닭고기를 파는 상인도 등장했다. 그에 따라 허가된 판매상에게만 마리화나를 받아 판매해야 하며, 처방전이 있어야 판매할 수 있고, 18세 미만 청소년에겐 판매하지 않아야 한다. 이번 마리화나의 합법화는 태국 정부의 평소답지 않은 과감한 행보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태국 정부가 마리화나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통한 그 동안의 부작용을 고쳐나갈 것인지 등에 대해 동남아시아 이웃 국가들 또한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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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정부, 의료용 마리화나 재배 및 소비 합법화와 그에 따른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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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6.25 전쟁 당시 참전하게 된 계기와 이유
- 2023년 터키-시리아 지진으로 인해 우리의 구호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이어지고 있다. 터키하고 한국 은 형제 국가이면서, 혈맹이다. 그리고 터키 앙카라에 가면 한국 사람은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터키군 6.25 참전 추모탑이다. 이 추모탑은 앙카라 중앙역 근처 Kore parkı (한국 공원) 안에 있다. 6.25 혈맹인 터키의 6.25 전쟁 참전 비화 및 터키의 나토 가입 배경에 대해서 언급할까 한다. 터키의 멘데레스는 총리에 집권한 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이뇌뉘의 공화인민당은 아직도 강력했고 그를 견제했기에 그는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정치적 묘수가 필요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동조하여 파병할 것인지에 대해 첨예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뇌뉘는 터키가 아직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파병할 여건이 되지 않으며 굳이 머나먼 동방의 끝에 가서 터키의 젊은 장병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터키나 UN 창립 회원국이면서 국제 평화를 실천할 권리가 있다며 참던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터키의 민심은 참전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앙카라에서는 참전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와 멘데레스에게 미국 대사인 존 호버트가 찾아와 터키를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주겠다며 설득한다. 이 6.25 전쟁으로 인해 터키는 나토에 가입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멘데레스는 미국의 약속을 받자마자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했고 후속부대로 5천여 명을 부산에 입항시켰다. 당시 터키는 소련과 적국이었고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공산당을 축출했기 때문도 있지만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소련에게 카프카스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당시 터키 대국민 정서는 소련이 원수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UN 측의 기록에 의하면 15,000여명이 지속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우 아마 민사부분을 제외한 순수한 군사 부문의 인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3년 간의 전쟁 기간 동안 손실된 병력 보충을 포함해 총 3번 부대 임무 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같이 등장한 군대가 총 3만 정도 되었고 그 규모는 미국, 영국 다음 세 번째였다. 그 중 터키군은 최전선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이 파병되어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확인해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터키군은 6.25 한국전쟁 기간 동안 966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터키군은 적진으로 돌격해서 북괴군이나 중공군을 상대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다. 과연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의 후예다운 강한 군기와 두려움 없는 돌격은 오히려 북괴군과 중공군이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총포가 날리는데도 무조건 돌격은 어쩌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이런 돌격전은 참전국 중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들이 나온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군부와 이뇌뉘를 비롯한 케말주의자, 야당인 공화인민당 인사들은 전쟁에 귀한 병력을 파견해 쓸데없이 피를 흘리게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멘데레스는 이 한 마디로 불만을 일축했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세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전후 미국은 약속대로 터키가 6.25 전쟁에 적극 참여해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줬다. 멘데레스는 그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이 자본금으로 수십년 동안 외면 받아온 터키 농촌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으며 비로소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약화시키고 절대적인 권력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쿠르드가 우리를 도왔다드니, 병력 대부분이 쿠르드였다드니 하는 근거없는 낭설이 몇 년 사이에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가 쿠르드족을 일소시키고 난 다음에도 병력이 2만 가까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병력으로 이미 앙카라를 점령하고도 남았을 병력이다. 육박전이나 백병전에 능한 2만의 병력이 육군 중에서 어떤 수준을 자랑하는지 군대 갔다 온 우리 남자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그리고 쿠르드의 원수가 터키인데 지휘관 대부분이 터키인이다면 지휘체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겠는가? 그리고 터키 2대 총리 이스메트 이뇌니는 쿠르드계 출신으로 6.25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다. 만약에 어떤 조건이 있었다면, 수많은 쿠르드 청년들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대단한 조건이 터키 정부와 쿠르드 사이에 있었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 근거를 대야 한다. 그런데 근거도 없이 참전해봤자 일개 소수에 불과한 몇몇 참전 군인의 증언만 듣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중공이나 북한에 세뇌가 된 자들이 분명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왜곡된 주장을 싣는다는 것은 혈맹인 터키를 증오하는 좌익분자들이 작은 소소한 부분을 확대 재생산하여 선전, 선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터키군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1973년 터키 공화국 50주년 되던 해 우리 정부가 이곳 한국 공원에 참전 터키군 추모탑을 만들었고 나도 앙카라에 방문할 때 마다 헌화하고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함을 잊지 않고 있다.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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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가 6.25 전쟁 당시 참전하게 된 계기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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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악의 다이옥신 오염 사건, 타임스비치 사건
- 작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차 탈선으로 인한 유독성 화학물질의 대량 유출 사고가 발생하였다. 열흘 가까이 지난 지금, 이를 보도한 기자가 체포되어 미국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트위터의 ‘뜨거운 검색어’가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것은 '끔찍한 환경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심지어 언론인들은 '오하이오 판 체르노빌'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보도가 아예 쉬쉬되고 있는데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상세한 언급이 안 되고 있다. 분명 대형사고인데 정부가 나서서 고의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지역 공기와 물이 안전하고 “오염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피했던 지역 주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워싱턴의 안보관과 현실 간의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고 언론 탄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진 날,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간다고 통보를 하고 날아가 우크라이나에 원조 약속까지 하고 왔다. 그는 미국 대통령인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인지 이제는 햇갈릴 지경이다. 일각에서는 이 오하이오 주 열차 탈선 및 유독 가스 유출사고를 두고 과거 50여 년 전에 벌어진 최악의 다이옥신 오염 사건, 타임스비치 사건의 재현이 아닌지를 우려하고 있다. 환경오염 물질 중 다이옥신에 대해서 뉴스를 통해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이옥신이란 인간이 만든 물질 중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독극물이고 주로 석탄과 석유, 담배 등을 태우거나 농약 등의 화학물질을 만드는 공장에서 발생하는데, 청산가리보다 1만 배 이상의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체에 흡수되면 반 영구적으로 축적되어 기형아 출산과 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 다이옥신이 유출되면서 발생하는 환경 재난도 종종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 최악의 사건으로 불리는 것이 미국에서 있었던 타임스비치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임스비치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 스타타임스 신문이 메라맥 강변의 땅을 자사 신문 6개월 구독권과 함께 팔던 것에서 만들어졌다. 마을이 들어섰던 초기에는 주로 여름용 별장이 있는 휴양지 마을로 사용되었으나, 대공황에 이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여름용 별장의 수요가 줄어들게 되자, 주로 저소득층 집안의 사람들이 이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66번 국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는 일부 식품업과 주유소 사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타임스비치는 매년 여름 비포장 도로의 먼지로 인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1년부터 수년동안 도로에 기름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 마을의 마구간이나 실내 경기장, 비포장 도로 등에서 먼지가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을 뿌렸으나 물이 금방 증발해 버리는 탓에 효과가 적었다. 그래서 물 대신 기름을 뿌려 먼지를 막았으며, 이는 대단히 효과적이였다. 그래서 이후로 마을 주민들이 기름을 가져다가 뿌렸는데, 문제는 기름을 팔던 유가 업자들이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하여 옆 마을 베로나의 NEPACCO 농약 공장에서 나온 폐유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먼지를 날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이 때 폐유 속에 들어있던 다이옥신이 도로에 함께 뿌려졌다. 이러한 다이옥신은 다시 토양과 대기, 하천으로 들어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름을 뿌린 이후 하늘을 날던 수십 마리의 참새가 떨어져 죽었고, 개와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도 죽어갔다. 주민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몸에 통증을 느끼거나 폐암에 걸리고, 임산부들은 유산하고 신장암, 후두암, 간질환 환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먼지를 줄이려는 기름 살포는 도로 뿐만이 아니라 목장에서도 이루어져서 1971년 5월, 인근의 모스코바빌이라는 마을의 목장에서도 기름이 뿌려졌는데, 그 후 60마리의 말이 죽고, 목장주인의 딸들이 심한 통증을 겪는 일이 벌어졌다. 인근 제퍼슨 시의 목장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결국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타임스비치나 미주리 주의 여러 목장들에서 의문의 질병이 나타난 원인은 바로 폐유에 있었다. 이 폐유 속에 유독물질인 다이옥신이 다량으로 함유되었던 것이다. 이 폐유들은 러셀 블리스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업체를 통해 뿌려진 것으로 그는 미주리 주의 한 제약 회사와 계약하여 산업 폐기물 처분을 의뢰받고, 여기에서 나온 물질을 폐유에 섞어서 뿌린거였다. 미주리 주의 목장에서 발생한 질병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타임스비치 역시 폐유 속 다이옥신에 의해 오염이 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다이옥신의 위험성이 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다른 규제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 분해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이옥신은 자연에서 분해되지 않고 오래 잔류하며, 맹독성 역시 유지되는 물질이다. 결국 1983년에 미국 연방 환경청은 3,670만 달러를 들여 이 지역의 2만 2천여 주민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고, 마을은 통행을 금지시켰다. 다이옥신에 대해 잘 모르던 시대에 비용을 줄이려던 업자의 행태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해당 지역은 1999년까지 정화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이후 지금은 주립공원이 되었다. 공원 가운데는 피크닉 지역도 갖추고 있고 2012년에 환경보호청 EPA에서 점검하여 방문자나 공원 관리자의 건강을 위협할 요소가 없다고 밝히게 되면서 새롭게 재탄생 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미국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주 경계 지역 또한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다. 탈선 열차에는 원래 보고된 것보다도 더 많은 독성 화학 물질이 들어있다 전해지고 있을 뿐, 각 객차에 도대체 무엇이 실렸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한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가 아닌 자기 나라에 신경 쓸 때인데 뭔 생각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미국 시민들보다 세계 패권이 그리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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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악의 다이옥신 오염 사건, 타임스비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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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한국 BJ 사망, 서세원씨 사망 등, 한국 외교력과 국제 행정력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
- 캄보디아에서 한국 BJ 사망, 서세원씨 사망 등의 각종 사건사고들을 보면서 한국의 외교력과 국제 행정력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한국의 각종 범죄자들, 해외의 범죄자들이 서식하기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물가도 저렴하고 여러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흑의 통로도 많은데다 관료들이 부패하고 5억 이상의 인구에 대다수가 가난하다. 그러다보니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와 같은 범죄 카르텔들을 심고 양산하기에는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 중국 관련된 불법적인 범죄들이 많이 생성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한국, 중국과 가깝고 범죄로 인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기에 가성비도 매우 좋다. 각종 흉악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동남아시아로 도망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성비와 범죄 대상 물색하기에도 좋은데다 뇌물만 잘 주면 적당한 곳에 숨어 있기 좋고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진행하여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BJ는 중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병원을 찾았다가 사망한 뒤 시신이 유기되는 참변을 당했다.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이 현지 사법당국에 의해 결정됐지만, 유족의 반대, 현지 부검의와의 일정 조율 문제 등을 이유로 진행이 지연됐었다. 그러나 41일 만에 부검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BJ의 사인을 밝히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이는 동남아시아 특유의 열대기후, 특히 매우 습하고 더운 여름이라는 계절적 특성을 고려할 때 시신의 부패가 심각하여 사인을 밝히기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기 등에서 조직을 떼 사인과 관련한 성분 분석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역시 진행이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신원이 밝혀진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검의의 국적인 호주로 보내는 것은 비용 등의 이유로 캄보디아 사법 당국에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공정한 조사를 위해 제3국으로 보내서 조사하는 것인데 이를 캄보디아 사법부가 비용 문제라는 말도 안되는 불가하다고 막아선 것이다. 캄보디아의 사법당국은 사망한 피해자인 BJ와 용의자로 지목된 중국인 부부의 국적인 한국과 중국에는 분석을 맡길 수 없다고 결론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제가 휩싸이는 것을 경계하여 이를 귀찮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캄보디아 관련해서 한국인 관련 의문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4월 20일에도 프놈펜에 위치한 한인 병원 미래폴리클리닉에서 은퇴한 연예인 출신의 서세원씨가 정맥 주사를 맞던 중 쇼크사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서세원이 단순 병사한 게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여러 구체적인 정황들이 나왔다. 하지만 캄보디아 경찰은 부검은커녕 혈액 채취도 하지 않고 주변의 주장만 듣고 '당뇨병에 의한 심정지'라고 사인을 기재하고 사건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더불어 현장의 증거품을 모두 수거해갔음은 물론이고, CCTV는 공교롭게 전원이 꺼져있었다는 등 철저히 사건을 덮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간호사에게까지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누군가가 사건을 덮으려고 했던 것은 명확해진 셈이다. 서세원 본인 사망 이전에 이 문제의 병원에서 의문사가 3건이나 있었는데, 전부 다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서세원만큼 유명했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도도 안 된 케이스였다. 이럴 때 나서야 하는 기관이 있다. 바로 주 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이다. 한국 대사관 측에서는 캄보디아 사법당국에게 사망한 BJ에 대해 한국 측이 분석을 맡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불가능하다는 의사를 전해 받았다. 그리고 제3국가에 의뢰하는데 따르는 비용을 한국 대사관 등에서 부담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어찌됐건 자국민이 많은 의혹을 갖고 죽은 사건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사관이라면 책임감을 갖고 자국민의 사인을 밝히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제3국으로 가야 한다면 기꺼이 비용을 부담하여 책임 있는 자세로 임했어야 한다. 근데 이걸 부담할 수 없다니,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써야 하는 비용은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 보호하라고 국민들 세금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럴 때 사용해야지 언제 사용하나? 한국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국가가 193개국이라고 한다. 그것만 보고 한국인의 여권 파워가 세계 정상급이라고 국뽕을 한껏 들이키며 으쓱거리고 있다. 그런데 진정한 국가의 파워는 그 따위 여권 파워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재외 동포들을 보호할 능력의 문제와 어떠한 일이 생겼을 경우, 유기적으로 대처하며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느냐가 가른다. 해당 국가와 무비자를 체결할 수 있는 것은 해당 국가 외교부와의 협정으로 언제든지 MOU 맺듯이 맺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국가의 파워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브랜드가 세계적인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외교관들의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 그 외교관들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해당 국가의 인식을 강대국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별거 아닌 돈만 많은 국가로만 만드느냐의 차이를 만든다. 참고로 러시아를 약소국이라 했나? 같은 사건의 피해자가 러시아인이라면 캄보디아는 어떻게 했을까? 러시아인이 그런 문제가 생겼다면 캄보디아 정부는 사건을 해결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며 러시아 정부를 최대한 화나게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BJ 사건 쯤은 벌써 해결이 됐을테지. 그게 바로 국력, 국가 브랜드 네이밍의 차이다. 외교관들이 비록 겉으로라도 강한 이미지의 국가, 결코 만만치 않은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면 해외를 다니는 우리 국민들의 안전도 지켜지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애국심 또한 높아질 것이다. 뿌리 박힌 외교부 카르텔, 언제쯤 깨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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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한국 BJ 사망, 서세원씨 사망 등, 한국 외교력과 국제 행정력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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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그것만이 해법인가?
- "진료를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 의사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의사 수를 늘리자." 그럴듯한 논리이다. 이것이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는 정부 입장인 것 같다. 대표적인 예를 들고 있는 것이 응급실에 의사가 부족해서 환자가 죽어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의사는 그렇게 많은데, 왜 응급의학과나 흉부외과 의사는 적을까? 힘만 들고 돈벌이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의대 학생 수를 늘린다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의료분야에 지원하는 학생 수가 많아질까?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꼴일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높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논리이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높다고 한들 부자들만 잘살 뿐,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다. 사회 시스템이 잘만 돌아간다면, 1인당 국민 소득이 낮아도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하지 않는다. 숫자는 숫자일 따름이다. 1인당 의사 숫자가 적어도 우리나라 의료 접근성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그렇다고 의사들 수입이 적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의사들이 돈이 되는 쪽에만 치우쳐 있을 뿐이다. 지금의 문제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의료인력을 어떻게 분산시키느냐의 문제이지, 의사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 시스템의 정비가 없이 의대 증원만 실행에 옮긴다면, 미래 세대 젊은 의사들에게는 경쟁만 심화시킬 뿐이다. 현행 제도의 문제점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서 도입한 행위별 수가 제도에 있다.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의대 교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의약분업 전에 돈 잘 벌고 있었던 메이저 과 의사들은 의약분업에 관심이 없었지. 결국 마이너 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많은 수가를 책정했던 거야.” 그 부작용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 이후로부터 메이저 과에 지원하는 의사들이 점차 줄어든 것이다. 흉부외과 교수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외국에서는 흉부외과가 최고야. 그런데 한국에는 흉부외과에 지원하는 인턴들이 없어. 힘만 들고 돈이 안 된다는 거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메이저 과에 대한 행위별 수가를 높이면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존의 마이너 과에 대한 수가를 줄일 수는 없다. 한정된 돈으로 어떻게 메이저 과에 대한 수가를 인상하겠는가? 그렇다고 기존의 마이너 과의 수가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부가 꺼내 든 것이 의대 증원이라는 정책이다. 미봉책에 불과한 정책이다.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메이저 과에 대한 수가 변경이 없는 한 인턴들은 여전히 돈이 되는 마이너 과로 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젊은 의사들의 입장은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심한 경쟁에 시달려 왔는데, 미래에는 더 큰 경쟁에 시달릴 것이 불 보듯 뻔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업을 선택했을 것이다. 젊은 의사들의 파업으로 현재 대학병원의 수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고 한다. 한 시를 다투는 응급한 수술도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다. 파업에 가담한 젊은 의사들이 많을수록 나머지 의료인력의 업무는 가중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 비롯되었는가? 정부의 정책이 무조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의대 증원이라는 정책은 대다수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의대 진학을 원하는 일부 소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을 반길 것이다. 하지만 국민을 위한 의료 정책이라면,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손질해야 한다. 메이저 과 지원 육성 방안과 지방 의료 지원 방안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한 육성 방안과 맞물려 의료인력이 필요하다면 점진적으로 증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화가 없는 곳에서 충돌만 발생한다. 독재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아무리 언론이 한쪽을 매도한다고 해도 진리는 변함이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젊은 의사들의 파업은 기득권의 유지로만 몰고 살 수 없다. 잘못된 정책에 저항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성급한 대증요법은 병을 더 키울 뿐이다. 사병들 월급만 잔뜩 올려놓고 군 내부의 혼란을 가중하게 만든 이 정부의 막무가내식 정책에 나라가 병들어 가고 있다. 의대 증원도 사병 월급 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지혜로운 국민이라면 정부에 편향적인 언론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다. 강요만을 일삼는 대화는 독재로 가는 길일 뿐이다. 대화는 설득과 타협이다.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화와 타협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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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그것만이 해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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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이 세상을 주도한다는 의식과 인종차별에 대한 정당성,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에 대한 논란
-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용어를 들어본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는 영국의 작가이자 백인우월주의자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1899년에 발표한 시 <백인의 짐 - 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제목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정글북(The Jungle Book)으로 19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유명 작가였다. 1899년 2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참패하여 필리핀에서 물러나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키플링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백인의 짐-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시를 발표했다. 여기서 키플링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아이와 같은 필리핀 원주민들을 미국인이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키플링의 시는 모두 7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은 “백인의 짐을 져라(Take up the White Man's burden)”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키플링은 "야만적인 흑인과 황인종을 개화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고 고되지만, 그들에게서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후세에 원망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강대국 시민들의 희생이 있더라도 약하고 소위 열등한 인종과 민족들을 돕자는 좋은 주장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그런 내용을 생각해보면 가장 능력이 뛰어난 백인종이 못나고 무지한 유색인종을 도와야 한다는 인종차별성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월등하며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며, 이 시를 통해 키플링은 백인이자 대영제국의 국민인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편견과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배경에는 키플링 자신이 대단히 제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징병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컴플렉스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키플링은 그러한 신체적인 한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 풀었다. 원래 아들은 해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시력검사에서 떨어졌고, 이후 육군 장교에 지원했지만 역시 시력검사에서 떨어진다. 키플링은 군대의 인맥을 이용해 아들을 영국 근위 보병 제4연대에 입대시켰지만, 결국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9월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와 같이 아들이 전사하자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키플링은 높으신 분들의 욕심과 무능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이 같다는 내용의 반전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인 <백인의 짐-미국과 필리핀 제도>라는 시의 비판을 완전히 피하기 어려웠다. 인종차별과 자신의 아들을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든 뒤에 참회하고 반성하는 글을 썼다. 그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만든 것이 라고 하였다. 키플링의 경우, 일단 키플링의 아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키플링이 마구잡이로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키플링의 아들도 이를 원했다고 한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때였는데 유럽의 분위기로 볼 때 각 전장의 전황들이 급박하여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엔 엄청난 불이익이 따라오기도 했다. 즉 키플링의 욕심만이 비극의 원인이 아니라 시대적인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게다가 키플링만 이런 비극을 겪은게 아니고 당시에는 전쟁하면 참혹함보다는 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는 것을 더 먼저 떠올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참혹함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전쟁터에 갔다가 죽거나 고생을 하고 돌아온 후, 반전주의에 나서게 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백인의 의무는 당시 제국주의 사상 및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이익 자체가 크지 않았던데다 크더라도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소수의 자본가 등에게만 그 이익이 돌아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대중들과 정치인들은 그 이익으로 인한 욕심에 현혹되고 여기에 이 백인의 의무와 같은 인종차별성 이론이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면서 제국주의가 그 정당성을 얻은 것이다. 다만, 이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여론 조작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되고 더욱 노골적이거나 온건하였을 때 당대 유럽 지식인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여 진다. 그러나 그러한 논조에 동의하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심지어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에서 순수하게 선의로 봉사한 의사와 선교사들 역시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이유로 볼 때 그들의 활동은 식민지 행정이 없이는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활동을 이어간 동기에 의하면 순수하게 평등한 인류애보다는 종교관에 기인한 바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선의의 목적인 사람을 앞에 내세워 식민지배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주거나 심지어 선교사가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편 마크 트웨인은 미국과 스페인 전쟁을 처음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반대하고 미국을 지지했지만 미군이 벌인 학살을 보고 경악하고나서 필리핀 전쟁을 '미국이 저지른 죄악의 상징'이라며 비난했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에서 1923년까지도 출판이 보류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야만적인 백인들을 위한 기도, 백인들의 인종차별 행태가 드러나고 있다는 글로 미국과 키플링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로 인해 키플링은 마크 트웨인을 매우 싫어했으며 <전쟁을 위한 기도>는 지금 나타나도 상당히 급진적이다. 반전, 반(反) 제국주의 성향의 사람들이라면 감명 깊게 볼 수 있지만, 이 때가 20세기 초반이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비판인 것을 고려하면 매우 용기있는 사회적 비판서라 볼 수 있다. <전쟁을 위한 기도>는 삽화와 함께 보는 것이 좋고 심지어 유튜브 등에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책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전쟁 교본(Kriegsfibel)>도 존재하고 있다. 이는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 보다는 참혹함 대신 비평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의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도 백인의 의무라는 사상이 결국 탐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합리성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이와 같이 마크 트웨인과 갈등을 빚었던 키플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하자 상류층의 보수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는건 무고한 젊은이들이라는 반전 사상을 설파하는 시를 쓰며 여생을 보낸다. 결국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에 당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인지 키플링의 작품은 오늘날 <정글북>이 가장 유명하고 그나마 <왕이 된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가 조금 알려졌을 뿐, 무려 400여편에 이르는 그의 소설과 시집 등 서적들은 서구에서도 묻혀진 채 방치되었으며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대놓고 이와 같은 "백인의 의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하지만 메튜 휘게이(Matthew Hughey)의 <백인 구세주> 와 같이 여전히 이데올로성 이론과 더불어 않고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는 잠재적인 우월의식이 팽배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 서술한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는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함유하고 있어 많은 비판과 논란을 자아냈던 제국주의 문학의 단편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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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이 세상을 주도한다는 의식과 인종차별에 대한 정당성,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에 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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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그레이트 게임을 조망한다.
- 영국의 산업혁명은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으면 불가능했고 오늘날 서구의 발전, 제국주의도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의 교역은 러시아의 1차 산물이 영국으로 수출되고 영국의 공산품이 러시아로 수입되는 구조였다. 러시아는 체르노젬 일대에서 생산되는 밀을 영국으로 대량 수출하였는데 이는 러시아의 주요 외화 공급원이 되었음은 물론 영국에서 수입하는 식량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영국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밀이 저가에 수입되면서 밀 농장들이 양을 키우는 목양지로 바뀌고 이후 잉여 노동력이 급증하면서 이른바 산업 혁명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러시아의 원자재가 없었다면 실패했을 것이고 해가 지지않는 대영 제국 또한 없었을 것이며 서구 유럽의 급속한 발전 또한 없었을 것이다. 즉, 17세기부터 서구는 러시아의 자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현재처럼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슬라브와 앵글로색슨은 절친한 우호 관계였지만 이 우호 관계에서 경쟁자로,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반감과 라이벌 의식 등이 동반되어 오늘날까지 서로를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절친한 우호관계에서 오늘날 적대관계가 되기까지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두 나라가 원수 지간이 된 것은 서로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국가적 이해 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러시아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인물, 예카테리나 여제가 있었다. 내기 예카테리아 여제에 일대기와 러시아 영토의 확장, 군수산업의 증대, 그리고 러시아라는 나라의 위상을 세계 열강의 위치까지 끌어 올려 놓은 활약상들을 검토하면서 그 상황에서의 당시 18세기 유럽의 국제 정세도 함께 검토하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의 중심은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한 국가와 경영인들의 자본력 확대와 그로 인해 각 바다를 지배하면서 나타난 식민지의 확보였다. 당시 영국의 라이벌은 네덜란드였고 이들은 모두 해양 세력들로 아시아를 두고 세력을 경쟁했다. 이윽고 영국이 네덜란드를 서서히 제압하면서 해양 세력의 최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육상에서는 몽골 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황혼이 사라지자 서구와의 교역으로 인헤 해상 루트를 개발한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가 예카테리나 여제가 즉위하면서 해상에서 육로로 정책을 변환함에 따라 유라시아 일대 육로의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표트르 대제가 바다로의 진출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예카테리나 여제는 그를 발판으로 육로로 영형력 확대에 공을 들였던 것이다. 그 근거로 예카테리나 여제가 추진한 정복전쟁을 모두 육지에서 벌어졌다. 발트 3국을 합병하고 폴란드를 삼국 분할 한 것도 육지에서 자행된 것이고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도 육지에서 벌어졌다. 이후, 여제는 우랄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노리게 되었고 시베리아 횡단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까지 통치 하에 두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러시아 제국은 슬슬 중앙아시아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쏟을려는 찰나, 적극적인 팽창을 노리던 러시아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팽창에 적극적이던 예카테리나 여제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파벨 1세가 즉위하면서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수동정책으로 다시 바뀐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 때문에 아버지인 표트르 3세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예카테리나 여제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즉, 예카테리나 여제의 진취적인 통치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서유럽에 대한 정치, 군사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인물이었지만 파벨 1세는 서유럽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거부하고 서유럽으로 군대를 파견하면서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면서 그는 동맹국들을 배신하고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파벨 1세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귀족들이 그를 암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차르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세력이 강화되어 유럽을 지배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이전부터 많은 교역을 하던 영국과 동맹을 굳건히 하고 나폴레옹에 맞섰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Continental System)를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비밀리에 거래하다가 적발되자 이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조국 전쟁에서 끝내 영국과 함께 나폴레옹을 제압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을 노린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 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페르시아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러시아도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페르시아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까지 내려가 부동항을 확보하여 인도양으로 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양국 팽창주의는 서로 간의 정치, 외교적인 대립을 불러왔고 유라시아 육상의 패자가 되어 위협적으로 성장한 러시아와 전 세계 해상의 패자가 된 영국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신흥 라이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영국, 양국이 정치, 외교, 군사적 대립이 바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가 제프리 브룬(Geoffrey Bruun)에 의해 <19세기 유럽사(Nineteenth Century European Civilization: 1815-1914)>라는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도 했다. "19세기 내내 영국의 정치가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한 것은 러시아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이 가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레이트 게임은 작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크게는 흑해 연안에서 극동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양국의 전략적 경쟁이자 정치, 군사, 외교 모든 부분이 총동원된 거대한 냉전이었다. 동유럽에서는 크림 전쟁이 일어났고,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쇠락해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이란 숭고국,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도 인도에 자리잡은 영국과 북쪽에서 늘 남하를 노리고 있는 러시아,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지구 반대편인 동아시아와 캄차카 반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대결하는 등,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이자 라이벌로 변해갔다. 두 나라의 사이, 좁게는 러시아와 영국과 미국, 크게는 슬라브와 앵글로색슨이 현대에도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국가 팽창에 맞물린 정치적, 민족적, 역사적인 자존심 대립이 주효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레이트 게임을 총 3차까지 나누어 보고 있다. 1차는 모두들 알다시피 1813~1907년의 일이고 2차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포함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냉전으로 1945~1991년까지이다. 그리고 3차는 푸틴의 집권 시기인 2000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정확하게는 2022년 2월 24일부터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영국, 미국, 나토 및 동맹국의 체제와 러시아-중공으로 대표되는 BRICS 체제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정치, 군사, 외교까지 걸려 있는 새로운 구도의 보이지 않는 전쟁과 나토가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눈에 보이는 전쟁을 통틀어 제3차 그레이트 게임으로 체제 대립의 상징성을 들어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현재의 러-중과 제3 세계와 미, 영을 비롯한 서구 세력 및 그의 동맹국의 소리 없는 전쟁을 New Cold War 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상징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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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그레이트 게임을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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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
- 9월 2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9월 1일은 우즈베키스탄이 독립기념일이었는데 필자가 직접 운영하는 베트남의 동남아시아 ‘해양역사고고학연구소’에서 DM을 보내와 알게 되었다. 2021년 개정된 베트남 노동법에 따라 휴일이 하루였던 독립기념일(9월 2일)은 이틀 휴무로 변경되었다. 즉 9월 2일과 직전 또는 직후의 1일로 구성되는 공휴일이 되었다. 2023년은 9월 2일(토요일)과 9월 1일(금요일)이 공휴일로 확정되어 대체공휴일인 9월 4일(월요일)까지 연휴로 이어진다. 따라서 2023년 독립기념일은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19세기 이래로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상당수는 '문명의 전파'를 표방했다. 그래서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에 비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본질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며 본국에서 발령받아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은 대개 수준 이하인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전 농업사회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전개되면서 프랑스는 급격히 공업화되었고, 원자재의 물량 또한 프랑스 본토 내에서 축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사업을 본격화했으며 지구상의 영토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및 충돌은 마치 미국, 소련의 냉전 시대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그에 따라 피식민 국가들에 대한 실제 통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확보한 영토와 원자재를 독점하고 이웃 국가와의 무역, 그로 인한 지정학적 중요성 등으로 인해 현지 수탈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피식민 국가들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지며 불만을 통해 태동한 독립운동은 식민 지배자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앞세운 혹독한 진압으로 이에 대한 반감은 더욱 쌓여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서히 서구 제국주의 몰락해 가고 있는 사이에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마지노선을 두고 맞섰던 프랑스는 내부에서 곡물 가격이 급상승했다. 축적해 놓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 상태가 거듭되자 인도차이나에서 쌀을 대대적으로 수탈해 프랑스 국내로 공급했다. 그로 인해 인도차이나 내에서 수만의 아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경제력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1929년에는 뉴욕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들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 인도차이나의 무장봉기는 이와 같은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통킹만 지역과 안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도차이나 식민지인이 프랑스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인권을 무시하는 무차별한 진압에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인도차이나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아닌 베트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와 수탈, 그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곤경은 결국 중국 팔로군과 소련 볼셰비키, 프랑스의 좌파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널리 확산되었다. 이때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인도차이나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인물은 쩐푸(Trần Phú, 陳富)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쩐푸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시킨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쩐푸와 함께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쩐푸는 코민테른에 참가하긴 했지만 중국 팔로군 군정에 인정받은 중국파고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호치민은 소련파라 각기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조직의 한 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프랑스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게 되자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도리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침공해 인도차이나는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도차이나는 일본과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되고 사이공에 비시 프랑스 관저와 인도차이나에는 일본 총독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과 비시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거세지면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결탁하게 됐다. 이때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일본과 게릴라전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은 나치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명호 작전을 벌여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군을 배신하며 몰아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내세워 만주국처럼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성립했다. 일본인들은 비시 정부를 규탄해 이들이 파시즘이라 파시스트로부터 자유 베트남을 구한다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을 일본인을 절대 믿지 않으며 대일항전을 지속했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도 무너졌다.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베트남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이에 베트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하며 쩐푸를 대신해 호치민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호치민은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에는 호치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은 9월 2일은 1945년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1954년하고 다른 날이다. 따라서 현 베트남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은 1945년 베트민 건국 일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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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의 기폭제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 이전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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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는 국제 정치, 외교 뿐 아니라 이슬람 종교사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
- 아랍의 맹주이자 수니파 이슬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인 이란은 서로 앙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주도 하에 단절됐던 외교 관계를 7년 만에 회복하기로 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수니파와 시아파 진영의 종주국인 양국 관계가 개선되면서 분쟁이 잇따랐던 중동 지역에 화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둘 다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하나 된 이슬람에서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정통 칼리프의 시대 때, 함께 3개 대륙 원정까지 나섰다. 같은 무슬림으로 따지고 보면 아라비아계와 비(非)아라비아계의 정치, 종교와 융합된 내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융합되기 어려운 갈등은 사막 유목 민족의 특성으로 자신들 소속 집단이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과 지독한 폐쇄성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을 창시했을 때 이슬람 안에서는 무함마드를 따랐던 무하지룬(المهاجرون)과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쿠라이시 가문에 패배해 추방되었다. 이때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 사건 이후, 메디나에서부터 무함마드를 따르게 되었던 안사르(Ansar) 집단이 서로 대립했다. 당시 무함마드는 양자 간에 형제 관계를 맺어 충돌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후 무함마드가 죽고 후계자, 즉 칼리파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안사르는 그들의 대표자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무하지룬에서 칼리파를 세웠고 이 과정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가 안사르 집단을 포용하면서 다행히 큰 충돌로 빚어지지는 않았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3개 대륙을 함께 석권했다. 하지만 이들의 분열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4대 칼리프 무하마드 알리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이었다. 알리가 4대 칼리프가 추대되기 전, 쿠라이시 가문의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를 칼리프를 추대해야 한다고 아랍계가 주장했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직접적인 혈통인 무하마드 알리를 추대해야 한다고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주창하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 레반트, 이집트 일대의 무하마드 혈통 파가 알리를 칼리프 추대에 동조했다. 숫자가 적은 아랍계는 칼리프 선거에서 밀려 패배하면서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더구나 알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미망인인 아이샤도 알리를 지지하게 되자 이 대립은 결국 이라크 쿠파로 향하던 알리와 그의 일족들이 카와지리 파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알리의 피살 이후, 알리의 장남인 하산이븐 알리가 칼리파위를 승계하려 했다. 그러나 수완이 뛰어난 무아위야는 거액의 보수를 제시하여 하산의 하야를 권유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분쟁에 지쳐있었던 하산은 무아위야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랍 제국의 권력 쟁탈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후세인 이븐 알리는 계속 저항하며 결국 "카르발라의 비극"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아랍인들이 무하마드의 혈통을 암살했다고 믿게 되었다. 다섯 번째 칼리프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가 추대되고 우마이야 왕조가 건국되자 이들은 아랍계의 우마이야와 항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이러한 역사는 압바스 제국으로 연결되고 투르크-몽골, 타타르의 지배 등, 중동의 무슬림들은 서로 통합되지 못했다. 이슬람도 칼리파 추대 문제로 인해 아랍계의 수니파와 페르시아계의 시아파로 크게 분열되었다. 무아위야를 추종하는 아랍계 수니파의 수장국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었다. 또 알리를 추종하는 페르시아 시아파의 수장 국은 오늘날 이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칼리파를 두고 선거냐, 세습이냐를 두고 무려 1,300년 이상을 싸워왔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슬람교 교리까지 비화 되어 오늘날까지 왔다. 이슬람의 3자인 사람들은 그깟 칼리파 싸움이 뭐길래 하면서 부질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우선 아랍인들의 기본 문화는 사막 유목문화에서 기인한다. 아라비아반도 자체가 사막화된 지역이 많다 보니 오아시스에 씨족 별로 모여 살았다. 또 해안가 지역의 씨족들은 장사를 통해 먹고 살았다. 따라서 해안가 지역은 상업이 주된 경제였고 아라비아반도 내륙 지역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약간의 농업과 목축업이 주된 경제였다. 그러다 보니 해안가의 아랍인은 사업 수단이 발달했고 상업의 가치와 개방성, 포용성을 두루 갖춘 자들이었다. 다만 내륙의 아랍인은 다소 폐쇄적이며 포악해 약탈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예언자 무하마드 또한 해안가 상업 도시 메카 출신으로 상업 집단의 대상을 따라 사막을 가로질러 멀리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무역하던 집단의 자손이었다. 이처럼 무역하며 쿠라이시 가문은 상당한 양의 재력을 소유한 메카의 지배자 가문이었다. 반면 무하마드는 아라비아 통일 전쟁을 통해 막대한 자금과 부조리한 문화를 가진 내륙의 유목민을 통합했다. 유목민의 잔인성과 포악함으로 약탈을 잘하는 특성을 이용해 이들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아라비아가 통합된 이후, 외부 정복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 아랍인은 해양과 내륙인이 통합되었으나 해양인이 주류가 되어 아랍인을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개방과 포용을 갖춘 민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약점은 문화 수준이 매우 낮고 문맹률도 높았다. 정복한 지역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 또한 매우 부족했다. 당시 정복한 국가들에서 가장 문화적,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자들은 페르시아계와 시리아계, 그리고 이집트계였다. 그들 중 페르시아계의 역량을 실로 막대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 두 차례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그로 인해 문화가 매우 융성했으며 문맹률도 아랍에 비해서 낮고 제국을 통치한 경험과 정치력이 뛰어났다. 그런 페르시아인이 본 아랍인은 야만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줄곧 세습 군왕제도에 익숙한 페르시아인에게 혈통적 세습은 당연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반면 아랍인은 씨족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족장을 선택했기에 이런 정주 국가의 보편적 정치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지배층이었던 아랍인은 페르시아인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에게 전쟁에 패해 나라를 잃었지만, 문화적 소양이 낮은 아랍인들을 무식한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부분들이 1,300년 동안 종파 분쟁이 이어지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때 이란에 팔레비 왕조가 존속했을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좋았었다. 1929년에 두 나라는 공식적 수교와 1960년대부터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이란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친선 관계가 시작되었다. 1968년에는 사우디-이란 간 경계 협정을 맺으며 페르시아만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왕이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에게 세속화 정책을 조언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관계는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이 발생하면서 깨지게 된다. 신정국가가 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단자, 전제군주국가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종교성 시비로 비화 되며 두 나라 관계는 양립 불가능한 상태까지 오게 된다. 2010년대 들어 대이란 경제제재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동참했다.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 정부를,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더 나빠졌다. 2015년 10월 20일, 사우디와 이란 양국이 시리아 사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결국 201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수니파-시아파 갈등으로 빚어진 외교 문제로 인하여 이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7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국교를 회복했다. 이 사건은 국제 정치, 외교뿐 아니라 종교사에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종교적인 문제에도 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란의 순례객이 메카로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교 단절을 이유로 이란인의 메카 순례를 거부했었다. 메카와의 순례길이 재개되면 평생에 한 번이라도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계율로 삼아온 이란의 무슬림들에게 있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될 것이다. 올해 하지에는 이란 시아파들의 순례객들을 7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학부 때 터키-이슬람 문화사를 전공하고 지금까지도 복합적으로 이슬람을 연구했던 필자에게도 매우 뜻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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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는 국제 정치, 외교 뿐 아니라 이슬람 종교사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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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역사와 우리의 자유
-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저마다 자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에로의 자유’를 의미하는 적극적 자유와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를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문제는 타인을 배려하느냐 여부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이거나, 조폭들이 생각하는 자유가 문제이다. 그것은 적극적 자유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도 아니다. 방종이다. 평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는 이와는 다르다. 소극적 자유는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구속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자유이다. 이들이 외치는 자유가 서구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로부터 자유주의가 싹텄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유럽 사회 전체적인 운동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 시대의 주역은 부르주아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생긴 상공업지역을 부르그(bourg)라고 하고,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본주의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의 주된 관심사는 부의 축적이었다. 새로운 인간상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내세와 천국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여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재산과 번영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되며 개인이 누리는 재산과 번영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해방을 외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구 자유주의의 뿌리였다. 그것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며, 그러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절대군주제 타파에 앞장선 시민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기 위해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법에 입각한 평등을 외쳤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귀족과도 신분적인 차이가 없어야 했다.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러한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그들은 비인간적이며 차별적이었던 절대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하는 근대 서양의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수탈하는 신분 차별을 반대했다. 또 절대군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과 법으로 국가권력을 명확히 제한하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자유방임 경제체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근대의 자유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자본주의를 낳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앞장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 해방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앞에서 살펴본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이다. 최장집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좌우 양쪽 진영에서 부정되었다고 지적한다. 보수파들은 자유를 외치면서도 냉전 반공주의와 동일시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실천하지 않았다. 진보파는 자유주의를 친미적 부르주아 이념으로 경멸했다고 진단했다. 결국 한국에서는 진정한 자유주의가 싹트지 못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국의 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지, 자유주의의 심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유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동일화됐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주의자들은 반자유주의자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 정치인들이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평등을 무시한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귀족주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적 정치인들이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고사하고, 사법 권력의 견제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바탕으로 평등과 인권, 관용,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이 아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도 존중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도 존중하면서 기회의 평등, 선택의 자유, 공동체의 선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이강인이 탄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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