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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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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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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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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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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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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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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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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
    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 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 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8
  •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 : 바이든 일가의 조사는 아직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 내용은 "헌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비리 사건"으로 Хантер Байден, увольнение генпрокурора Украины и коррупция в Бурисма (헌터 바이든, 우크라이나 검찰총장 해임과 부리스마의 부패)라는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헌터 바이든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후광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가스회사인 부리스마(Бурисма) 홀딩스의 이사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5년간 부리스마 이사로 일하며 매달 8만 달러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헌터 바이든은 자신이 이사가 된 것이 아버지의 후광이었음을 인정했다.. 헌터 바이든은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분야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말 자체는 트럼프 측이 재기한 부분에서 아버지 덕에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주장한 것이 크게 힘을 받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비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이사가 되어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 자체가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이사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인사 비리(Personnel corruption)"이다. 게다가 헌터는 우크라이나에서 사업한 경험도 없었고, 아버지 조 바이든의 지역구인 델라웨어에서 주 정부 허가를 요구하는 업체의 로비를 하는 등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부리스마 홀딩스 자체가 미국과 절대적인 유착이 있었던 그룹이었기에 조 바이든의 아들인 헌터 바이든이 인사 비리로 인한 이사로 재직이 가능했다.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하고 있는 지역은 러시아의 가스관 "투르크스트림"과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들어가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 부분이다. 게다가 부리스마 홀딩스가 채굴해서 공급하는 가스보다 러시아가 가스관으로 보내주는 천연가스가 무려 3,5배가 더 저렴했다. 그러다보니 부리스마 홀딩스가 얻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미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흑해 위기와 돈바스 전쟁 등은 미국의 입김과 이에 반발하는 러시아 간의 간접적인 충돌로 빚어진다. 이렇게 뒤가 구린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검찰에서 이를 수사하려 했다. 그러자 조 바이든은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총장 빅토르 쇼킨을 해임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10억 달러의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고 압력을 넣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자주 독립 국가이자 민주적인 국가였다면 이와 같은 미국의 압력이 들어올리가 있었겠는가? 이 또한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명백한 내정 간섭이다. 그리고 이 불법적인 내정간섭으로 인해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인 빅토르 쇼킨은 바로 해임되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국제법으로 명백한 위헌인 내정간섭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러시아의 돈바스 진입, 소위 저들이 말하는 "침공(Invasion)"이라 떠들면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생비난을 해오고 있다. 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을 압박해 퇴진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바이든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압수 수색이나 특검 등의 수사라곤 전혀 하지 않았는데 무슨 증거가 나오겠는가? 그 외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푸틴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당시 "우크라이나 부패 척결을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이 비판은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쇼킨이 해임되고 난 후, 유리 루첸코가 새 검찰총장이 되어 부리스마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지만 하나 마나한 상황, 그 사이에 부리스마 홀딩스는 증거를 인멸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구린지 갑자기 검찰총장인 유리 루첸코마저 해임됐다. 해임된 사유는 정확히 밝혀진건 아니지만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루돌프 줄리아니와 접촉해 바이든 비리 혐의 증거 자료를 모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서 이 부리스마 홀딩스에 대해 내부고발이 터졌다. 누군가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정보 당국의 감사관은 조지프 매과이어 국가 정보국 국장 대행에게 ‘긴급’ 사안이라고 통지했지만 사태가 긴박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회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지프 매과이어가 이 사건에 대해 미적지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특검이 들어가 수사할 수 있는 기회는 또 날라갔다. 이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100% 신뢰한다고 믿었던 루슬란 랴보샤프카 검찰총장의 주도 하에, 과거 수사의 적절성에 대해 재검토한 결과, 우크라이나 검찰은 헌터 바이든이 해당 사건에 연루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하였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미 사건의 증거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인멸된 상태였다. 이런 사건들로 볼 때 미국의 입김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가들, 경제, 사법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정도까지 본다면 우크라이나를 먹으려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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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7
  • 투르크 야르칸드(카슈가르) 칸국 호자 가문의 성세(成世)와 칼미크 족
    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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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05-27
  •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의 전면적인 등장과 서기장이 되기 이전까지 그의 행적
    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키부 스토이카(Chivu 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 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올랐으며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희대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우셰스쿠에게는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루처(Andruță)는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던 가난뱅이였다. 그와 같이 가난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의 부모님은 농사 이 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집안 출신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안드루처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 후반 희대의 독재자들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던 BBC가 차우셰스쿠를 조명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스코르니체슈티를 방문해 그와 그의 부친인 안드루처를 알고 있다는 한 정교 신부를 인터뷰한 바 있었다. 신부는 차우셰스쿠의 아버지에 관해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던 인물." 이라 하였다. 차우셰스쿠가 희대의 광기 어린 독재자가 된 이유는 이와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의 환경적인 요소도 분명 자리했을 것이다. 유년기 차우셰스쿠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가 함께 살기에는 매우 공간이 협소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옥수수죽으로 알려진 머멀리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도 역시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과 같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해당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고 내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이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갔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증언하기로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고향에서 도망쳤다고 했지만 대체로 아버지인 안드루처가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보통 광기 어린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1. 집안 환경이 불우했고, 2.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3. 아버지가 주정뱅이에 가족들에 심하게 폭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한 환경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권력이 정점이 되었을 때 내제되어 있는 그 불만들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 조건들에 부합했던 것은 히틀러도 그랬고 스탈린도, 게오르기우데지나 체코의 노보트니, 북한의 김일성, 차우셰스쿠, 심지어는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집안 자체가 그러했었다. 우선 차우셰스쿠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차우셰스쿠는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신발 공장에 취직해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CR : Partidul Comunist Roman)의 열성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u)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 형태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1932년에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 불법 단체로 인정되었던 데다가 아직 10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그와 같은 잡일은 당시 루마니아 왕국으로 볼 때 매우 불법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일련의 파업들을 주도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3년 첫 번째 체포 이후 차우셰스쿠의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 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 체포되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와 같은 활동을 두 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그, 름니쿠 블체아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들에 파견되어 공산당과 관련된 임무들을 수행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들과 잦은 수감생활로 인해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에 대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反) 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여기게 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차우셰스쿠와 같은 방에 수감된 감옥 동기가 있었는데 이 동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차우셰스쿠는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독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교도관들의 폭행에도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하며 교도관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죄수들 통제하는 방법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동기도 차우셰스쿠에게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독살당할 뻔하자 해외로 망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을 위한 지하활동을 위해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으로부터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차우셰스쿠의 후원자인 블라디슬라브 타르노브스키(Vladislav Tarnovski)의 집에서 그가 거주했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가 발견되었고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지만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차우셰스쿠는 반(反) 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자기 집처럼 왕래했을 정도로 수감 생활이 화려했으며 일명 대단한 빨갱이였다. 이 때에 감옥에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고등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하면서 더욱 경도되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총애를 받아 그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 된 이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인해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면서 그는 서서히 권력을 잡아 루마니아 정계 2인자로 올라섰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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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 이슬람만의 독특한 화법, 세밀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
    좁은 캔버스에 사물을 축소해 화려하게 표현하는 이슬람 세밀화는 회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슬람 미술사의 백미로 불린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를 금기시했던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도로 상징화된 문양과 다양한 서예 기법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건물과 동식물은 물론 인물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낸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상 표현에 대한 무슬림들의 두려움은, 실제로 『꾸란』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인 아이샤가 동물이 장식된 걸개를 집에 장식하자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아이샤가 그 걸개를 방석으로 만들자 흡족해했다고 한다. 즉 생명을 묘사하더라도 그것이 숭배나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면 형상 표현의 금기는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무슬림들의 삶 전반에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형상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모스크 건축이나 코란의 필사와 같은 종교의 영역과 왕궁의 건축이나 서책과 같은 세속의 영역이 구분되었으며, 세속의 영역에서는 그 쓰임에 따라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대상의 묘사가 가능했다. 용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이슬람 미술에서 독립된 조각이나 회화가 등장하지 못하는 제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슬람 미술가들에게 형상 창조의 자유를 선사한 가림막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의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이슬람 세밀화이다. 인물을 묘사하는 행위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회화는 열렬히 숭배받기도, 때로는 훼손되거나 심지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 속에서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1335년, 일한국이 몰락하면서 이슬람 세밀화는 지방정권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특히 인주왕조(1335~1357)의 수도였던 시라즈가 대표적이었다. 시라즈에서는 타브리즈의 궁정양식과 전혀 다른 전통적인 세밀화가 발달하였다. 시라즈의 세밀화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노랑, 파랑, 빨강 등 원색을 다채롭게 배경에 사용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선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거대한 꽃으로 공간을 채우는 등 왕실 공방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후 인주 왕조가 무자파드 왕조(1335~1393)에 점령되면서 시라즈 세밀화에는 무자파드 양식이 나타난다. 수평선은 높고, 둥근 산맥 위에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었다. ‘쿨라’라고 불리는 무자파드 특유의 터번이 등장하며 인주 시기와는 다르게 작고 세밀한 초목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말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고, 사람은 반대로 머리가 크게 표현되었다. 눈과 입은 비교적 작게 그리고 수평의 뾰족한 콧수염을 더해서 무자파드 양식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잘라이르 왕조(1336~1432)가 있었던 바그다드에서는 14세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인 크와주 케르마니가 쓴 세 편의 시의 필사본에 포함된 10편의 삽화가 가장 유명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복식을 입은 우아한 주인공들은 치밀하게 구성된 자연물과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다. 세심하게 묘사된 다양한 초목은 화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필사본의 몇몇 삽화에는 화가 주나이드의 서명이 남아있는데, 이는 과거 서예가들만 주목하던 것과 달리 이슬람 미술사에서 회화와 화가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오스만의 궁정화가 레브니(Levni)가 유명한데 그는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 u)의 에디르네(Edirne)에서 태어났다. 레브니의 본명은 압두셀리 첼레비(Abdülcelil Çelebi)이며, 색의 다채로움을 의미하는 '레브니'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레브니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 레브니는 초기에 음악과 시를 공부했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작업장에 들어가 테즈힙(Tezhip)을 배우고 테즈힙 예술가로 일했다. 테즈힙은 책의 표지와 한 챕터의 다음 장을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인 모티프로 장식하는 이슬람 미술의 한 종류이다. 테즈힙은 금과 선명한 채색을 써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레브니는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집권한 1695년과 1703년 사이에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III, 재위 1703년~1730년)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궁정화가로 일하였다. 레브니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로서 디미트리 칸테미르(Dimitri Kantemir)가 집필한 오스만 역사서의 세밀화(Miniature)를 제작했으며, 무스타파 2세 이전에 통치한 군주 21명과 무스타파 2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밖에도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의 사후에 제작한 '무스타파 2세의 사후 초상'(Portrait posthume de Mustafa II, 18세기경)을 남겼다. 레브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톱카피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인 세이드 베흐비(Seyyid Vehbi)가 쓴 산문집인 '술내임-베흐비1세'(Surname-i Vehbi: 술내임은 술탄의 자녀들과 관련된 축제를 주제로 한 문학 장르를 뜻함)에 실린 세밀화가 있다. 이 세밀화들은 1720년에 있었던 아흐메드 3세의 네 아들의 할례를 기념하는 15일간의 축제를 날짜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브니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게 아주 다양한 색을 써서 인물 군상과 지물들을 표현했으며, 몇몇 세밀화에는 원근법을 적용하였다. 16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궁정 화원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에 알맞은 그림을 촘촘하게 그려내는 ‘세밀화’가 공식적이고도 전통적인 화풍으로 인정받았다. 이 그림들은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바라보듯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에 입각한 화폭 구성에 따라 대체로 평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이끌어간 것은 이슬람 세밀화의 대가 ‘비흐자드’를 중심으로 하는 ‘헤라트 파’였다. 한편 같은 시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서는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이는 회화에 있어서도 ‘원근법’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이 유럽의 화풍은 오스만 제국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심지어 술탄마저도 그에 매혹되어 유럽의 화풍을 좇았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유럽의 화가가 이스탄불의 궁중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 세밀화의 시초는 15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파티흐 술탄(1432~1481, 오스만 제국 제7대 술탄) 시기에 이르러 독특한 스타일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책 속에 술탄의 초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셀주크 투르크 시기처럼 술탄, 귀족 등의 후원자들은 궁전 근처에 화원을 만들어 세밀화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세밀화는 궁중화원(나카시하네)에서 제작되었다. 나카시하네는 궁중의 장인단(匠人團)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화가들은 수사본에 삽화를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만 맡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책 장정과 예술품에 장식을 그려 넣는 일도 했고 중전이나 종교 건축물의 천정과 돔을 장식하는 그림도 구상했다. 또한 도자기 제조인이나 직물과 양탄자를 만드는 작업장에도 장식 문양의 밑그림을 제공했다. 나카시하네의 이러한 주도적인 역할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제작된 수사본이든 이즈닉의 도자기든 부르사의 벨벳이나 비단이든 간에 오스만 예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은 유사성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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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6
  • 예멘 후티의 선조, 중세 라술 왕조
    예멘 라술 왕조는 1229~1454년 간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투르크계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다. 한 때 예멘 전역과 메카까지 장악했으나 자이드 이맘 왕국과의 전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쇠퇴한 이후 15세기 타히르 왕조로 교체되었다. 1174년부터 예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조는 13세기 들어 산악 지역에서 사나를 노리던 자이드파 이맘들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26년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Imam Ad Nasir Muhammad)는 사나를 공격했으나 아이유브 왕조 측 사나 총독인 누르 앗딘 우마르 빈 알리 빈 라술(Nur Abdin Umar Bin Ali Bin Rasul)에게 대패한 이후 부상을 당했으며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이로써 명성을 높힌 우마르는 1228년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Amir Al Masud Yusuf)가 본국인 시리아를 방문할 당시에 섭정으로 봉해졌고,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1235년 압바스 왕국의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1세(Al Mustansir I)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Al Mansur)를 칭하게 된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이드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드 왕국을 공격하여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Imam Al Hadi Yahya)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드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Imam Al Mahdi Ahmad)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Asad Ad Din)이 총독이던 사나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 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Al Mahdi)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Al Muzafar Yusuf)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자파르 유수프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드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이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자이드 왕국을 압박하였다. 따라서 자이드 왕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Sada)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Imam Al Mahdi Ibrahim)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친정에 나섰으며, 자이드 군대를 격파한 이후 포위한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Taij) 지역에 집을 주고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드 왕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다음 해인 1312년 3,000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10년 동안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Al Maayaga)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파기되었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이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Qatada)의 아들 라지흐(Rajih)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Al Kamil)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Faqr Ad Din Iben Ad Shaikh)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Amir Shihah Iben Hasim)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게 된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왕조에서 파견된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Amir Ibn Al Mujali)가 총독이 되었다. 1233~12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세 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하즈(Haj) 순례에 나서자 잠시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1236년의 기간 동안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000명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게 된다. 그 다음 달에는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이어 쉬하흐가 재차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Abu Sad Al Hasan)이 라술 왕조의 총독인 이븐 알 무사이브(Ibn Al Musaib)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예전의 적이었지만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라지흐는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Ad Nasir Yusuf)에게 그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인 후투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Jamaz Ibn Hasna)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지위에 등극한 이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후투바에서 언급하게 된다. 다음 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Abu Numai Muhammad)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Idris Ibn Katada)가 공동으로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Mubarij Ad Din Husein)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개월 이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 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게 된다. 14세기 후반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딘(Imam Ad Nasir Muhammad Salah Ad Din)의 자이드 왕국은 아시르(Asir) 지역의 티하마(Tihama)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이후 사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시르는 자신이 건축한 살라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점차 쇠퇴하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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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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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5
  • 후티의 근본 이념이자 예멘의 이슬람 정파 자이드파
    자이드파는 통칭 자이디야 혹은 5이맘파로도 불린다. 제5대 이맘으로 주류 시아파가 섬기는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 Baqir)가 아닌 그의 동생 자이드 알 샤히드(Zaid Al Shahid)를 추종하는 분파다. 본래 여러 반란과 이란 카스피 해 남안에 위치한 타바리스탄 지역에서의 알라비 왕조 수립 등 수니파 중앙 정부와 극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모두 진압되고 대부분 은둔하여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인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에 이드리스 왕조, 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의 예멘에 이맘 왕국인 라시드 왕조를 세워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라시드 왕조는 1962년 공화정 수립 이전까지 세력을 유지했으며 현재도 예멘의 무슬림 중 절반이 자이드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초창기 정통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를 부정하는 다른 시아파와 달리 자이드파는 그들의 이맘 직위를 인정하여 대다수 수니파들과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긴 했다. 그러나 알리 이븐 아비 탈립(Ali Iben Avi Thalib)의 정통성 우위는 여전히 주장하며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부터의 칼리프들을 단죄하고 비합법적인 칼리프와의 전쟁을 신자로써 당연한 도리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예멘의 북부 지역과 그와 접경한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 지방인 아시르(Asir)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흔히 이들을 시아 신앙의 한 분파로 다른 이름으로는 ‘5 이맘파’라고 하며 예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아파의 제4대 이맘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Alī Zayn al-‘Ābidin)이 713년에 사망하자마자 자이드파는 그의 장남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ḥammad al-Baqir)보다 오히려 작은 아들 자이드(Zaid)를 이맘으로 선택하고 다른 시아파, 즉 절대 다수인 열두 이맘파에게서 분파되어 나왔다. 그들은 우마이야 왕조에 보다 격렬하게 저항하기 위해 자이드에 집결했다. 역대 이슬람 역사에서 주류 파벌에 대해 가장 저항적으로 나왔던 자이드파는 오늘날에는 모든 시아파 중에서 가장 온건하며 수니파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다. 물론, 그들 역시 나름의 법학파(Madhhab)들을 갖고 있다. 그들의 시아 신앙은 알리(Ali)와 그의 후손의 권위와 통치를 정치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에서 나왔다. 또한 열두 이맘 시아파 가운데 발견되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찬미, 천국에 대한 지식 및 알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 기능은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시아파의 특징과 유사점이 많아 예멘은 역사적으로 시아파 망명자들, 특히 이스마일파의 소수 분파 집단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후티가 통치하는 현재도 그러하다. 자이드파가 피지배계층으로 가장 많은 국가는 카스피 해 연안의 다일람(Daylamites) 인들 사이에서 864년부터 1126년까지 많은 침략을 받으며 존속했던 알라비 왕조이다. 10세기 초, 자이드파는 먼저 예멘의 사아다(Sa‘ādah)에 정착했으며 이후에는 사나(Sanā‘a)에 정착했다. 오늘날 자이드파는 예멘 아랍 공화국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종파로 예멘에서만큼은 주류 종파이다. 나머지 예멘인은 수니파의 샤피이(Shafi‘ī) 법학파라 할 수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 논리에 의하면 알리의 후손은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물론 1명 이상일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권력을 장악함으로 인헤 입증된 통치력이 이러한 주장을 강력한 배경으로 하며 이슬람 신학자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이드파의 이맘은 열두 이맘파의 이맘에게 부여된 특권, 신비적인 힘과 초자연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자이드파는 아부 바크르(Abū Bakr)와 우마르(‘Umar)의 칼리프 제위를 인정했지만 우스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그의 칼리프위의 5년 동안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열두 이맘 시아파처럼 자이드파는 무타(Mut‘ah, ‘일시결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무타질리파(Mutazilite), 이성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멘의 자이드파 왕국인 라시드 왕국은 야흐야 이븐 후세인 알 라시(Yaḥyā ibn Ḥusayn al-Rassī)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 왕조는 사나(Sanā‘a) 지역에서 많은 전쟁과 흥망성쇠들을 겪으며 간혹 중단되기도 했으나 10세기부터 1962년까지 통치했다. 그 해에 육군대령 압드 알라 알 살랄(‘Abd Allāh al-Sallāl)에 의해 이 이맘 국가체제는 전복되었다. 공화주의자와 왕정주의자 사이의 예멘 내전은 1972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이맘(Imam)은 그 이전에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사망하면서 이맘이 없는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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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4
  • "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르포 : 미트로비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작년 내가 코소보에 있을 때 분쟁의 현장인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지구와 세르비아계 지구를 다녀온 바 있다. 프리슈티나에서 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알바니아계 지구이다. 어차피 세르비아-코소보는 국경이 폐쇄되어 세르비아계 지구로 가지도 못한다. 미트로비차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자치주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내전은 나토와 서방의 개입으로 1999년에 중단됐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 자치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끝내 2006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저 완전히 붕괴하고,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그리고 2008년 이곳에서 코소보는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자국의 자치주로 보며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도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분열되어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그 비극의 모든 것은 이곳 미트로비차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로비차에 도착하자마자 무슬림 무덤들이 나오고 유고슬라비아 때부터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이 도시가 세르비아 정교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임을 말해주고 있다.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이곳은 당시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聖地)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계의 권리를 박탈하자 알바니아계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당국은 언론, 교육을 통제하여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수많은 자치주 내 알바니아계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연방이 붕괴하고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수립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 자치주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신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다가, 신 유고 연방의 차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자치주 내의 알바니아계들과 세르비아계가 미트로비차에서 정면 충돌하여 1998년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을 주도했던 코소보인은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1955~1998)를 필두로 아김 하이리지(Agim Hajrizi, 1961~1999), 메헤 우카(Mehë Uka, 1962~1996)가 주축이 되어 세르비아에 항쟁했다. 특히 아뎀 야샤리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코소보를 분리하기 위해 싸웠던 코소보 알바니아 분리주의 민병대인 코소보 해방군(KLA)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그는 당시 미국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91년부터 야샤리는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알바니아로 가기 전,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면서 대놓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체포된 야샤리는 알바니아 군대의 구출 작전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나중에 코소보로 돌아와서 유고슬라비아 정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이 자살폭탄테러로 인한 유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 7월, 야샤리는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궐석 테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이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르비아의 압제에 저항한 합법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이를 탄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이자 탄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야샤리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경찰은 1998년 3월 프레카즈에 있는 야샤리의 집에 그가 있음을 파악하고 제거 작전에 나섰다. 결국 총격전이 이어졌고 야샤리와 그의 아내, 형제, 아들을 포함하여 야샤리의 가족 57명이 전사했다. KLA의 아버지이자 國父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야샤리(Jashari)는 공동 지도자이자 동료인 하심 타치에 의해 추앙되었고 그는 후일 알바니아 민족에 의해 코소보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는 온건파인 이브라힘 루고바(Ibrahim Rugova, 1944~2006)와 전혀 극과 극의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야샤리는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 이후에 "코소보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프리슈티나 국립극장, 프리슈티나 국제공항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및 아뎀 야샤리(Adem Jashari) 올림픽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로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로 모든 것이 갈라지게 된다. 이바르 강의 강북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했고 강남에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쪽은 세르비아 정부가, 남쪽은 UN이 관할하기에 관할 기관도 다르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바르 강의 다리는 두 곳이 존재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바르 강은 정확히 민족, 인종 간의 경계선이 됐다. 종전 이후, 세르비아군이 철수하자 그간 세르비아에 박해를 받아 온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보복 공격을 자행했다. 미트로비차의 참극은 코소보 전쟁의 시작점인 곳이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두고 두고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참고로 미트로비차는 현재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지정한 "철수 권고" 지역이다. 미트로비차는 이바르 강을 경계선으로 코소보 인종 분리의 상징이 됐다. 미트로비차 문제의 본질은 양측의 공존공생 모색에 있고 이 공존공생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자치 도시’를 만드는 것에 있다. 두 개의 자치도시를 만들면서 코소보 내에서 국제 관할 아래 두자는 것이 알바니아인들의 생각인 데 비해 세르비아인은 완전히 두 개의 자치도시로 분리해 북쪽은 세르비아에 귀속시키자는 입장에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요구 사항은 자치 도시 설립의 주요 목적으로 난민들의 고향 복귀와 안전 및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 세르비아군의 철수 이후 25년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의 핍박과 박해 속에서 살아온 세르비아인들의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알바니아 측은 자족적이며 지속 가능한 자치 도시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은 이바르 강을 북미트로비차의 코소보 편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할지언정 미트로비차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의 자체 군사력 보유와 북미트로비차 합병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고 한다. 이에 집단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접촉 그룹은 세르비아에 대한 압박과 회유로 해법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에 있다. 필자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 거주 지역을 침공해 세르비아 국기를 걸레로 만들고 몇몇 상점들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를 했다. 이 때 총 4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화염병 투척 당한 건물은 복구조차도 안 되고 있다. 이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려 있는 도로의 세르비아 국기마다 걸레처럼 변했다. 전쟁 전 코소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나토의 폭격 이후, 이바르 강 다리를 건너 피난해야 했다. 25만 명의 코소보 세르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세르비아의 큰 도시들로 피난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미트로비차 강북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미토로비차의 강북과 강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용하는 돈도 달라졌고 전화번호의 지역 번호조차 달라졌다. 지금은 물론 똑같은 유로를 내지만 미트로비차 북쪽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는 세르비아 디나르 화폐도 통용된다. 세르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인 미트로비차 강북에는 중무장한 코소보 평화유지군들의 장갑차나 지프들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장군인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하는 순찰 외에는 정상적인 납세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법상태와 마찬가지다. 강남의 알바니아 쪽에서는 강북의 세르비아까지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침공해 언제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두 계통 시민들 충돌의 현장, 필자는 이 비극의 현대사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끊임없이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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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4
  • 미국-중국의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빅딜’ 협상을 통해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145% 관세를 30%로,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125% 관세를 10%로 낮추기로 서로 합의했으며, 관세 인하 시한을 또한 90일로 정한 이후 추후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을 뒤집고 일종의 깜짝쇼처럼 비출 수 있는 합의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국에 보복성 관세를 부과하면서 마치 어느 쪽도 물러날 뜻이 없이 끝까지 간다는 발언들이 나왔던 시점에서 보면 선뜻 이번 합의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이번 회담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덧붙이고 있고, 미국은 중국이 경제가 붕괴하고 있어서 중국 관리들이 미국과 거래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진술을 보면 공통으로 상대방의 사정으로 이번 회담은 성사될 명분은 충분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보복성 관세를 계속 부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현재 서로의 문제를 교착화만 시킬 뿐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당장 상품 수출이 막히게 되니까 그대로 수출 상품이 창고에 쌓이게 되고, 이와 대로 미국은 소비재가 공급부족에 따라 물가 상승에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각각 협상 타결의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상대방의 양보를 얼마나 얻어내느냐에 있어서 말하자면 계산이 분명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은 노동절 연휴와 러시아 전승절 참석 이후가 미국과의 협상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 당국은 노동절 연휴에 내수경기를, 러시아 전승절 참석으로 수출 시장의 다변화를 일단 한번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대비를 하면서 대비 협상에 임했을 수 있다. 또 중국은 자국의 생산기지를 일부 동남아로 옮기면서 미국으로부터 각종 제재를 피하면서 실속을 챙기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 중국은 쉽게 말해 미국과 거래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따라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경기 침체와 성장률 둔화, 내수 침체에 따라 민심을 안정시키고 돈 풀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은 우선 관세 전쟁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경기 위축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대미무역 흑자국에 대해 강력한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중국은 미국의 최대 무역 적자국인데, 중국이 수입하는 중국산 품목은 전자제품(컴퓨터, 휴대폰, TV), 가전제품(냉장고, 세탁기 등), 의류 및 섬유(의류, 신발 등), 가구(사무용, 가정용), 장난감(완구류 등), 배터리(전기차용, 기타), 철강 및 알루미늄(건축 및 제조업용), 반도체, 핵심 광물(희토류 등) 등이다. 중국은 그동안 이들 품목을 싼 가격으로 미국으로 대량 수출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취득했고 그러다 보니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액은 약 2,956억 달러로 유럽연합이나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국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 정도로 그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과 반대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품 품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상품 품목은 곡물 및 종자류(대두, 옥수수, 밀 등), 석유 및 천연 가스, 기계 부품, 의약품, 항공 및 우주 관련 장비 등이며, 약 1,50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은 대중국 무역적자 외에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지적하고, 중국의 기술 향상과 경제적 영향력으로 농수산물 분야를 제외하면 미국산이 중국에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 최첨단 분야에서는 중국이 아직 미국에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차후에는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을 관세라고 보고, 이를 잣대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시진핑 주석은 미국의 압박을 버티면서, 오히려 미국에도 보복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처음부터 관세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다. 하여튼 미국과 중국의 이번 합의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의 득실을 따져 보면 중국은 오히려 소매 판매와 산업 생산이 모두 상승하고, 동남아와 유럽연합에 대한 수출을 늘렸다.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소비가 문제였지 생산이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물가 상승에다 국가 신용등급 강등, 재정적자라는 트레마(3중 딜레마)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 침체 가능성으로 인해 미국의 주식·채권·달러를 팔고 안전자산인 금으로 큰 손들이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여전히 관세 카드를 이용해서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의 다음 상대는 어디인가? 한국의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모 후보는 트럼프에 대한 막연한 신뢰로 직접 정상회담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 후보는 반트럼프 전선으로 세계와 연대를 통해 대응하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친중국 정책이 대미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모 후보는 실용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하자는 논지를 펼쳤다.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별로 신통치는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이번 미국과 중국의 관세 협상은 차후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있어 하나의 카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협상 태도는 치밀한 계산과 집요한 버티기를 통해 오히려 미국에 명분과 체면을 세워 주었다. 중국은 겉으론 손해를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보다는 실속을 챙긴 셈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성급할 필요가 없고, 철저한 준비와 대응책을 충분히 갖고 미국과 협상을 제대로 해야 한다. 미국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섣불리 미국과 협상에 임했다간 자칫 한국은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수출 위주의 한국 경제가 만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3년 동안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치중한 탓에, 한국의 입지가 좁아져서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한국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미국이 관세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주한 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입장에 맞서 한국이 이를 분리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관세율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느냐에 있다. 일본도 처음에는 미국과의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가 현재는 관망하는 태도로 선회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그대로 관세를 부과한 것을 보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아무것도 미국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손해만 보았다는 생각에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망하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에서 우리가 심사숙고할 사항은 대미협상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철저한 준비와 대안을 갖고 서둘려 협상에 나서기보다 차분히 상황을 주시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아마도 최악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되었음을 뜻한다. 아직도 성장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향에 눈을 감고 있다. 고도의 성장률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갖고 전진하는 도전의 자세가 요구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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