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1(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11-01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바스코 다 가마의 대항해와 포르투갈의 인도 진출 (중)
    바스코 다 가마는 캘리컷을 파괴하기 전 20여 척의 아라비아 상선들을 나포하면서 800명의 무슬림들을 포로로 잡았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이 포로들의 팔, 다리, 귀와 코를 잘라냈다. 아마도 교역소에서 죽은 53명의 포르투갈 인들에 대한 복수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불신자들에 대한 응징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혹한 일인데 바스코 다 가마는 이와 같이 잘라낸 팔, 다리, 귀, 코를 모두 선박에 싣고는 협박성의 서신을 브라만 인 사절과 함께 자모린에게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인육으로 카레를 해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인육으로 커리를 먹으라는 것은 경악할만한 모욕이었다. 이후로도 바스코 다 가마는 이틀 내내 400발의 포격을 감행했다. 대포와 소포를 가리지 않고 포격하여 캘리컷 시가지를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캘리컷을 초토화 시킨 후, 몇몇 선장들은 상륙하여 약탈하자고 해적과 유사한 제안을 한다.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는 도시 자체를 파괴해 놓고서도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고 약탈을 접어둔 후 일단 캘리컷을 6척의 함선으로 봉쇄해놓고 떠나기로 한다. 미리 호 학살과 더불어 캘리컷을 초토화 시키는 만행을 저지른 이후로 인도의 말라바르 해역 전역이 공포에 떨었다. 인근 항구의 상선들은 모두 숨었고 모든 무역행위가 동결되다시피 했다. 여기에 코친이나 칸나노르(Cananor), 콜람(Colam), 코둔갈루(Codungalu)와 같은 인도 세력들은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교역 조건을 재협상하거나 배에 향신료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포르투갈에 굴종했다. 하지만 자모린은 평화조약을 가장해 바스코 다 가마를 유인하는 등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매복공격에 이은 항구에서의 치열한 공방전 결과 바스코 다 가마가 탈출하면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바스코 다 가마는 포로로 잡은 브라만 3명을 다시 협박성으로 돛대에 높이 매달았고, 자모린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신과 시체를 뗏목에 실어 내려 보냈다. 포르투갈에 대해 원한이 대단했던 자모린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휘하 제독들에게 함대를 끌어 모으라고 지시한다. 아라비아 용병 등 끌어 모을 수 있는 함선은 모두 끌어 모은 결과 아라비아의 대형선 20여 척, 삼부크(Sambuq) 수십 척과 소형 갤리선 수백 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급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는 매복에서의 탈출 이후로 아무나 걸리는 대로 한 번 공격한다는 형식으로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함대는 캘리컷 해전에서 포르투갈 카락선 16척에 격파되고 만다. 그만큼 서유럽의 선박, 화포 기술과 더불어 인도양 국가들의 무기 간의 격차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원정의 목표였던 캘리컷과 자모린을 불평등 조약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함대는 칸나노르와 코친에 거점을 마련해둔 것과 어마어마한 향신료를 약탈해 온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4차 원정 함대는 1503년 7월에 리스본으로 복귀했다. 귀환한 함대는 후추 1,700톤, 계피와 말린 정향, 메이스, 육두구 400톤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향신료를 실어 왔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물론 이것이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상품을 정당하게 판매하고 교환해서 얻은 성과는 절대 아니며 포격과 협박, 나포, 약탈로 가져 온 결과물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후평 하기에는 우호 세력인 코친과 칸나노르에 마련해놓은 거점은 자모린의 위협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이후 자모린은 수만의 군대를 동원해 코친을 공격하며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으니 매우 정확한 지적이었다. 따라서 바스코 다 가마는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파견할 것과 강력한 함대가 주둔해서 순찰함으로 인해 영구적인 지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서 항해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포르투갈 함대와 후임 제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는 바스코 다 가마의 조언대로 코친과 칸나노르 같은 인도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해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인도 세력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약탈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르투갈 인의 교회나 상관이 생기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찰이 생기게 된다.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한 포르투갈 탐험가, 선원이나 선교사들은 현지의 풍습에 대한 이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미개한 불신자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포르투갈 인이 살해당하거나 건물이 파괴되면 이를 명분삼아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것이 포르투갈의 방식이었다. 무엇보다도 포르투갈이 자의적으로 발행한 통행증인 카르타스(Cartas) 미소지 선박에 대한 해적질이 인도인들의 큰 원한을 사게 된다. 상인들은 자모린 같은 통치자들에게 호소했고 그렇잖아도 포르투갈에 쌓인 감정이 증오 수준이었던 자모린은 주기적으로 포르투갈에 복수전을 펼쳤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인도 세력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공성전과 해전을 벌였다. 물론 포르투갈이 전투에서 대체로 크게 승리했다. 특히 자모린이 군사를 끌어 모은 결과물인 인도와 아라비아, 오스만투르크의 연합 함대 200척이 대파당한 1506년의 칸나노르 해전과 1507년의 칸나노르 공성전이 결정적이었다. 전쟁의 광기를 보여줬던 인도 원정 이후 바스코 다 가마는 20여 년 간 조용히 은둔하며 지냈다. 왕실에 잘 보이려는 시도는 대부분 무산되었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 같은 다른 제독들이 중용되면서 바스코 다 가마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519년에 바스코 다 가마는 백작 작위를 받게 된다. 브라간사 공작과 협의 하에 비디게이라(Vidigeira)라는 포르투갈 동남부의 마을을 봉지로 받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 왕실 일원이 아니고서는 백작 자리에 오른 사례가 없는데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로 얻은 공적으로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1521년이 되자 바스코 다 가마는 다시 중용 받게 된다.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떠난 목적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에 독점당한 인도, 아시아 방면에 스페인도 포르투갈과 경쟁하려 했다. 포르투갈이 점유한 동쪽 항로 대신 인도로 향하는 서쪽 항로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포르투갈은 여기에 큰 위협을 느꼈고 마젤란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이러다가 인도 지역을 모두 스페인에게 넘겨주게 생겼다고 위기론을 주장한 바 있었다. 마누엘 1세의 재위 후반기 시절에는 바스코 다 가마의 주장이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백작 작위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승하하고 주앙 3세가 즉위하면서 포르투갈이 다시 인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면서 전설적인 성과를 낸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정책 고문으로 등용되는 등 다시 중용을 받게 된 것이다. 마침 당시의 인도 총독이었던 두아르트 드 메네제스(Duart De Menezes)가 무능력하다는 지적과 더불어 부패 혐의로 인해 논란이 많았기도 했다. 결국 바스코 다 가마는 1524년 부왕 자격을 가지고 인도 총독에 부임하게 되었고 본인의 3차 인도 항해를 하게 된다. 인도 도착 후 전임 총독을 체포했고 부패를 일신하려 했으나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코친에서 사망했다. 16세기는 포르투갈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시아의 바다는 포르투갈의 것이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1500년 페드루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이후, 당시 인구 100만에 불과한 포르투갈은 전 세계 해안에 요새를 만들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향료는 포르투갈이 독점했고,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시기에 유럽 대륙은 종교 갈등으로 인해 전쟁과 내란으로 약화된 상태였고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방어해내기에 급급했다. 포르투갈은 이와 같은 소요에서 벗어나 카톨릭으로 국가 중심 철학을 형성하고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게 된다. 모험적인 제주이트(Jejuit) 선교사들이 먼저 미지의 대륙에 갔다. 그 다음 포르투갈 군이 그 땅에 진주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개척 이후 1500~1510년 사이에 동아프리카의 현지왕국들을 제압했다. 케냐, 소말리아, 모잠비크, 케냐, 마다가스카르에 포르투갈 요새가 들어섰다. 특히 에티오피아에도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그곳은 포르투갈 역대 왕이 찾던 전설의 프레스터 존(Prestor John)이 다스리는 기독교 국가로 인식되었다. 1500년 브라질을 발견한 카브랄이 인도 서해안 캘리컷(Calicut)에 도착해 현지 영주의 허락을 얻어 가공 공장을 짓고 주둔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현지인들의 공격을 받아 주둔군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포르투갈 군은 캘리컷을 포기하고 북쪽의 코치(Kochi)로 가서 현지 정부의 협조로 요새를 만들고 1503년에 성 프란시스 성당을 지었다. 이어 1505년, 국왕 마누엘 1세는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를 초대 인도 총독으로 임명하고, 코치를 본부로 삼았다. 아프리카 동해안과 인도 서해안에 요새를 구축한 뒤, 포르투갈은 아라비아 반도를 공격했다. 1506년 포르투갈 함대는 홍해 입구에 있는 소코트라(Socotra) 섬을 포격해 함락시키고, 호르무즈 해협에 있는 오만의 무스카트(Muscat)와 아덴을 차지했다. 이어 인도 남쪽 실론 섬의 콜롬보에도 요새를 건설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지 10년도 못 되어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둘러싸게 되면서 요새를 형성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에게는 인도양이 새로운 대양이고 새로운 영역이 되었지만, 본래 인도양은 오래전부터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인도의 무역선이 활발하게 왕래하면서 중국의 정화(鄭和) 함대가 다녀갔던 곳이다. 주인이 있는 곳에 새로운 세력이 들어 왔으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509년 2월, 인도 디우에서 동양과 서양의 해상 패권을 다투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두고 디우 전투(Battle Of Diu)이다. 전투의 상태는 이집트의 맘루크 정권과 인도의 구자라트 술탄 국이었다. 모두 이슬람 국가였다. 오스만투르크가 이집트와 구자라트를 지원했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이 홍해 이권을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의 적진과 동맹을 맺었다. 병력 수로는 이슬람 연합군이 우세했다. 이슬람 연합이 동원한 함대는 200척 가까이 되었고, 포르투갈 전함은 18척에 불과했다. 병력 수도 이슬람 4,000~5,000여 명, 포르투갈은 800명에 힌두교 지원병 400명이 합쳐졌다. 따라서 전투는 포르투갈의 압승으로 끝났다. 포르투갈 전함의 장거리포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이슬람 배가 접근도 하기 전에 파괴시켰다. 인구 100만 명의 포르투갈이 동양의 패자인 오스만투르크와 인도 연합군을 제패했다. 디우 전투는 동양과 서양이 인도양에서 전투를 벌인 첫 해전이다. 이후 인도양의 패권은 포르투갈에게 넘어가게 된다. 포르투갈은 디우 전투에 승리하고, 1510년에 인도 고아를 점령해 인도 교역의 본거지로 삼았다. 디우(Diu)와 고아(Goa)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도 포르투갈 영토로로 남아 있었다. 영국은 1385년 윈저조약 이후 포르투갈과 오랫동안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양을 제패한 후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로 다음 방향을 정했다. 말레이시아 반도의 말라카(Malacc)는 당시 동양의 무역중심지였다. 중국 명나라에서 오는 물산과 페르시아, 아라비아, 인도 상인이 모여 향료를 거래했다. 중국은 말라카에 주재관(官廠)을 파견해 무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상인들도 왔는데, 이들은 향료를 홍해를 통해 베네치아에 팔았다. 인도 총독 아폰소 데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는 말라카에 엄청난 향료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1511년 알부케르크는 17~18척의 전함에 1,2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말라카를 침공했다. 8월 24일 포르투갈 군은 말라카를 점령하고, 인도, 중국, 버마 상인들을 추방했으며 이슬람을 대량 학살했다. 포르투갈 병사들의 폭력적 행동에 아무도 말라카를 찾지 않게 되었고 말라카의 향료시장은 고사되었다. 알부케르크는 인도네시아 반다 열도(Banda Islands)에 향료가 생산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파견해 그곳을 찾으라고 했다. 알부케르크의 부하 중에 프란시스코 세랑(Francisco Serrao)이란 선장이 있었다. 그는 1512년 인도네시아 섬을 돌아다니다가 난파했다. 그곳에서 그는 향료가 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섬이 몰루카 열도(Moluccas Islands)였다. 세랑의 곁에는 사촌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함께 했다. 마젤란은 향료가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귀국해 포르투갈 왕에게 향료 섬을 찾아 탐험에 나서겠다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어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향료는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후추 1킨탈을 12두카트에 사서 4두카트의 비용으로 운반해 유럽에서 32두카트에 팔았다. 포르투갈 왕실은 향료 무역에서 두 배나 많은 이문을 남겼다. 정향, 육두구가 몰루카 열도 암본(Ambod)에서 생산되고 거래된다는 세량의 보고에 포르투갈은 1513년 암본에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포르투갈 함대는 향료를 찾아 암본 이외에도 인도네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뒤지고 다녔다. 그들은 태국(Siam)에 외교사절을 보내고 뉴기니, 중국 해역까지 돌아다녔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6
  • 바스코 다 가마의 대항해와 포르투갈의 인도 진출
    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시작점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라비아 선박의 비 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의 도시들은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으며 시민들의 손과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미리(Miri) 학살 사건과 커리(Curry) 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학적인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다른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그렇지 않아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통념과는 달리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직접적인 무역 방해를 하지 않았으나 통행료는 올렸는데 이는 그대로 유럽에 전가되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직접 향신료 산지로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고 있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했다.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리케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아 4척의 범선과 170여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 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코 다 가마는 여행기를 서술했는데,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라비아 인 상인 2명이었다. 이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인도까지 왔는지 의아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Jamorin)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상인들이 보기에는 탐험대의 무역 상품들이 한심해 할 정도로 저 품질이었고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것을 버리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황금을 가져오라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 내려져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에 인기가 많은 캘리코 면직물의 본 고장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이 외에도 당시의 유럽 문명은 선박과 화약 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역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로 인해 통상 교역을 하는데 실패했고 함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에 나서 1499년 9월, 마침내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은 순탄하지 못했다. 도중의 고초와 괴혈병에 시달린 나머지 선원이 많이 사망했고 바스코 다 가마의 형도 리스본으로 귀환하는 무렵에 병사했다. 함대를 몰 선원이 30여 명만 남을 정도로 부족해져서 함선 한 척을 침몰시키고 2척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중계무역을 하면서 얻은 수확으로 출자자들이 60배가 넘는 배당을 받을 정도의 수익을 올리긴 했다. 귀환한 바스코 다 가마는 국왕 마누엘 1세로부터 “DOM”의 칭호와 함께 거국적인 환영식 및 영웅 대접을 받았고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지위도 하사받았다. 이후 1500년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bares Cabral)의 2차 항해에서는 함대가 폭풍 속에서 헤매다가 전혀 다른 장소인 브라질에 기착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잘못된 장소에 도착한 것을 알았기에 결국에는 인도에 도착하긴 했다. 2차 항해에서 브라질을 발견하고 코친과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칸나노르(Cananor)와 무역로를 여는 성과는 있었으나 교역에 가장 중요한 세력 캘리컷과는 불화만 일으키고 제대로 된 무역 협정은 맺지 못했다. 캘리컷으로 항해하는 도중 13척 중 8척이 침몰하고 많은 선원이 사망하는 등 상당히 큰 손실을 보았다. 게다가 2차 항해의 과정에서 캘리컷에 교역소를 설립했는데, 그 교역소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공격당하고 포르투갈인 53명이 살해당하는 교역소 습격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사건의 시작은 아라비아 상인들과 포르투갈의 마찰이었다. 인도 상권을 주도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은 포르투갈의 함대를 견제하며 향신료 거래에 대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시장을 통제하여 향신료 물량이 포르투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식이었다. 이에 2차 함대의 제독 카브랄은 캘리컷 당국에 항의하며 포르투갈에 대한 향신료 시장에서의 우선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무시당했다. 아라비아 상인을 추방하고 포르투갈에만 그와 같은 권리를 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카브랄은 아라비아 상선을 마구 약탈하는 방식으로 보복전을 펼쳤다. 여기에 분노한 아라비아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교역소를 습격하고 선원들을 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브랄은 폭동의 배후를 캘리컷 측으로 판단했고 캘리컷 항구에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여 항구를 완전히 파괴했다. 대포를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쏘아대는 지경이었기에 항구는 초토화되었다. 자연히 캘리컷과 포르투갈은 심각한 적대관계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 폭동 사건은 4차 항해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주앙 다 노바(Juan Da Nova)의 3차 항해에 이은 바스코 다 가마의 4차 항해는 1502년에 행해졌는데 포르투갈에서는 외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없다면 무력으로 해결하라는 방식으로 20척의 함대를 만들어 원정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한 교역소 습격사건의 복수가 목적이었다. 그래서 인도에 도착한 이후 이슬람 군과 해전을 벌여 승리하고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루갈 인들은 무역이 아닌 본격적으로 약탈과 해적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무역이라는 것은 양국의 이익이 되어야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측에서는 인도인의 기호에 맞는 자원이나 고품질의 상품을 제시할 수 없었다. 향신료를 원했지만 그것과 등가 교환 할 수 있는 중국의 도자기나 비단, 일본의 은과 같이 압도적인 상품이나 자원이 없었던 것이다. 현지에서 평가하기에도 희귀하지도 않은데 저 품질이기까지 한 상품을 장거리로 운송하니 단가가 맞을 리도 없다. 그로 인해 설령 교역 허가를 얻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저품질 상품을 팔아서는 이익을 내기 어려웠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1~3차에 이르는 원정에서 탐험대는 여러 차례 들인 공과 더불어 항해 도중의 사망, 편성된 선박이 절반 이상 침몰하는 등의 큰 위험성에 비해서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팔 상품은 없었지만 상당한 성능을 자랑하는 배와 대포는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탐험대는 무역을 그만두고 해적질과 약탈, 항구를 초토화시키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학살이나 협박을 통해 강제적 평화조약으로 조공을 받아내는 일에 열중했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인도인들이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피살되는 사람들이 교역소 습격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 역시 바스코 다 가마가 알 바 아니었다. 그의 시각에서는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죄인이자 이교도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이 2년 전 교역소에서 발생한 포르투갈인 사망 사건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억울하게 희생되었기 때문에 문제의 사건을 발생시킨 자들에게는 더 잔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바스코 다 가마의 입장이었다. 인도로 4차 원정 함대 파견 이후로 인도양은 포르투갈 함선의 포격으로 인해 초토화 되었다. 포르투갈 함대는 주요 해로를 지키고 있다가 상선이 나타나면 갑자기 정지시킨 뒤 카르타스(Cartaz)라는 통행증을 주고 보호를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 잘 알지도 못한 나라의 배가 갑자기 나타나서 통행세를 갈취하는 것만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함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통행증이 없는 선박이나 통행증 강매를 거부하는 선박을 자주 습격하고 불태우는 해적질을 저질렀다. 이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해적이 보호세를 명목으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 함선의 선장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 포르투갈의 함대는 오노르(Onor) 항구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이슬람의 순례선 미리(Miri) 호 승객을 학살하는 것과 선박을 방화하여 전소시켰다. 이어 소위 기독교 입장에서 이교도들을 팔과 다리를 잘라 돛대에 매달고 사격 연습을 감행했으며 틈만 나면 포로들을 배의 돛대나 기둥에 매달아 죽이고 현지인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어 통치자들에게 시체를 보내며 협박했으며 같은 횡포를 저질렀고 함대가 가는 곳마다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더불어 포르투갈 인들과 인도인들과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포르투갈 인이 보일 때마다 사람들이 증오에 가득한 노성을 지르고 침을 뱉을 지경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악행으로 인해 수많은 살인과 약탈 중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이 미리 학살 사건이다. 보통 대항해 시대 당시의 도덕관과 현대의 도덕관은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당대에도 매우 사악하다고 지탄 받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메카를 왕복하는 순례선인 미리 호를 나포했다. 미리 호는 Jauhar Al Faquih와 같은 이슬람 세계에서 알아주는 부호들과 부유한 승객들이 탑승한 배였다. 포르투갈에게 납치된 승객들은 몸값 협상을 제시했다. 배 여러 척에 향신료를 채워 주겠다며 캘리컷 통치자 자모린과의 관계에 있어 연결시켜 주겠다와 같은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5일 동안 진행된 교섭은 결국 무산되었다. 불신자들을 살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바스코 다 가마는 모든 제의를 묵살하고 배의 화물을 모조리 약탈해 버렸다. 그리고는 승객들을 무장 해제시킨 뒤 배에 불을 지르고 도주해 버렸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와 동행했던 서기 톰 로페스(Thome Lopes)의 기록에 따르면 바스코 다 가마는 승객들이 당황하며 배 안에서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멀리서 느긋하게 감상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는 매우 사악하고 악의적인 의도였다. 그러나 승객들은 어렵게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승객들에게 또 다른 악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바스코 다 가마가 다시 배를 나포했던 것이다. 승객들, 그리고 여인들은 아이를 내밀고 품에 있던 보석들까지 모두 바치며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바스코 다 가마는 이와 같은 호소를 완전히 무시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해병대들을 승선시켜 배에 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배가 반 정도 불에 탈 때까지 해병대를 퇴선 시키지 않고 포위망을 유지하기까지 했다. 더불어 이번만큼은 실패 없이 모든 승객들이 타 죽을 때까지 불을 지르려 한 것이다. 결국 미리 호의 승객들 거의 전원이 학살당했다. 해병대들에게 맨손, 도끼를 들고 공격한 승객들은 모두 살해당했고 전투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불에 타 죽었다.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승객들에게는 더 엄청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롱보트에 선원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고는, 바다에 빠진 승객들을 창으로 확실하게 학살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이교도들에 대한 확인 사살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유아들, 부모와 헤어지게 만들고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로 재생시킬 수 있는 갓난아이들뿐이었다. 물론 아이를 내밀며 살려달라고 한 어머니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이들은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친부모를 도륙한 것이다. 학살이 끝난 뒤 총 사망자는 300여 명이었다. 배 한 척에 탄 승객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학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의 입장에 의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1500년 교역소 습격 사건의 복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인도양 초입부터 학살을 저지른 바스코 다 가마 함대는 마침내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인근의 어선들을 격파하며 소요를 일으킨 바스코 다 가마는 통치자 자모린에게 교역소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 및 정당한 보상, 이슬람 상인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모린의 입장에서 이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고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교역소 습격 사건은 포르투갈과 아라비아 상인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고 캘리컷 측은 이미 포르투갈의 2차 함대에 교역소 습격 사건의 복수를 명목으로 포격을 당해 항구가 초토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3차 함대를 이끌었던 주앙 다 노바 역시 어김없이 자모린과 불화를 일으키고 인도 함선들을 약탈한 바가 있었다. 이미 죽은 50명의 10배가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약탈당한 재산도 엄청났다. 거기에 바스코 다 가마는 자모린의 어민들을 인질로 잡아 집중적인 관심을 더 끌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요구에 굴복하면 지배자로서의 자모린의 권위는 약화 되어 버린다. 자모린은 일단 어민들부터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포르투갈의 함대는 정박해 있던 20여 척의 아라비아 함선들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는 함선마다 포로들을 돛대에 수십 명씩 매달아 죽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또 다시 캘리컷에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여 항구를 파괴했다. 캘리컷은 화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측은 여기에 고무되어 경악할 만한 행위를 저지르는데, 이것이 카레라이스 사건이다. 이는 유럽인 탐험가들이 저지른 파괴와 살육 중에서도 잔혹하기로 이름난 행적이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6
  • 제2차 베트남-몽골(元)의 전쟁 : 몽골제국이 남방에서의 두 번째 패배 - (하)
    1285년 2월 말에서 3월 초, 원나라의 장수 쉬게튀의 군대는 보찐(布正)을 공격한 뒤 응에안으로 진격했다. 쩐 냐두얏은 최선을 다해 막아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쉬게튀는 1만의 군대를 보내 타인호아(淸化)를 공격했다. 3월 9일, 이전 원나라에 항복했던 쩐 끼엔이 응우옌 군을 이끌고 베보(衛布)를 급습하면서 쩐 왕조의 장수인 응우옌 탓텅(阮悉統)과 딘싸(丁車)를 사살했다. 베트남의 총리였던 쩐 꽝하이는 분노했고 쩐 끼엔을 살해하기 위해 군을 몰아 원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추가로 2명의 장수를 더 잃는 피해를 보고 말았다. 항복한 쩐 끼엔이 원나라 군을 이끌며 강력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결국 쩐 왕조의 군대는 응에안과 타인호아를 탈환하지 못한 채 퇴각하게 되었다. 쉬게튀는 타인호아로 진격했고 쉬게튀의 아들인 바크지아노(巴賈諾)와 한족 출신의 장수들을 모두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에 합류시키고 이들을 전방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 쩐 태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쩐 인종의 삼촌이기도 했던 소국왕(昭國王) 쩐 익탁(陳益稷)이 온 일가친척들을 모은 뒤 원나라 군에 투항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그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했다. 응에안과 타인호아에서 패배함으로써 쩐 왕조의 전선은 붕괴되었고 베트남의 전방과 후방에서 원나라의 공격이 지속되자, 쩐 인종은 전선을 버리고 도주했다. 결국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데다 패배로 점철되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태상황 쩐 성종은 인종과 상의한 뒤, 원나라 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저지시키고자 자신의 남매 중 막내인 안자공주(安姿公主)를 원나라의 총사령관인 토곤에게 바쳤다. 토곤은 안자공주를 받아들이며 쩐 인종과 태상황 쩐 성종도 입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결국 변심한 황제와 태상황은 오히려 군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결국 화가 난 토곤은 다시 군대를 내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쩐 흥다오는 반 끼엡을 떠나 황제를 구원하고자 했다. 쩐 흥다오는 우선 거대한 함선을 구해 응옥산(玉山) 일대로 돌아 원나라 군의 주목을 받으면서 몰래 작은 함선을 타고 나아갔다. 두 황제를 구한 뒤, 자오하이(交海)를 통과하여 바다로 나아갔다가 북상해 치응우옌(雉完)으로 되돌아갔다. 쩐 왕조의 군주들을 놓치게 된 토곤은 화가 났으나 쉬게튀가 보낸 장수들과 만난 이후, 쉬게튀의 군대가 식량이 부족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하게 추격 군을 만들지 않는 대신 천천히 티엔즈엉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쩐 왕조의 황제들이 하이동(海東)으로 도주한 것이 확인되자 토곤은 이항, 우마르, 자오키(Zaoki) 등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1285년 4월 7일, 쉬게튀의 군대가 티엔즈엉으로 진격하는 것을 발견한 두 황제는 함선을 버린 뒤, 남쩌우 강(南兆江)에서 함선을 다시 타고 다이방(大旁)으로 돌아가면서 적의 추격을 피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아직 수군 조달에 미숙했는지 자오키와 탕우타이(唐烏泰)의 수군은 4월 15일이 되어서야 땀지(三雉)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항도 수군을 이끌고 두 명의 황제를 수색했으나 마주하지도 못했다. 이후 원나라 군은 베트남군이 남겨둔 배 몇 척을 찾아냈고 이후 쩐 인종과 쩐 성종이 이미 육지에 함대를 정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나라 군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3일 밤낮을 추격했으나 이미 두 황제는 황자들이었던 쩐 롱(陳弄), 장수 팜 끄디아(范巨地), 레 지엔(黎演), 찐 롱(鄭龍) 등 귀족과 장수들이 흩어져 있던 베트남의 군대를 조직해 오고 있던 타인호아 일대로 사라진 이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토곤과 우마르는 1,300명의 수병을 데리고 타인호아로 진격해 황제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쩐 흥다오는 일단 지도자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자 타인호아에서 철수한 이후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에서 온 토곤의 원나라 군은 맞지 않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인해 고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쉬게튀가 우마르와 함께 쩐 왕조의 황제들을 추격했지만 결국은 찾는데 실패한데다 풍토병 등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추격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직접 전투를 벌이면서 원나라 군이 풍토병 등으로 인해 고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쩐 흥다오는 4월에 북쪽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군을 모아 콰이쩌우(快州)를 지나는 홍 강 구간의 원나라 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 지역을 점령하면 베트남군은 콰이저우를 기점으로 탕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타인호아에는 쉬게튀의 군대가 있었으나 쩐 왕조의 황제들을 포로로 잡지도 못했고 군대가 매우 고생하였기 때문에 우마르와 함께 군을 이끌고 북부로 이동했다. 4월부터 북부에서는 연이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쩐 흥다오는 이미 주둔해 있던 토곤의 군대와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쉬게튀의 군대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쩐 인종은 이번에는 소문왕(昭文王) 쩐 냣두앗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쩐 흥다오와 소성왕(昭城王)을 부사령관으로 삼은 뒤 북으로 진격, 함뜨(咸子)에 주둔해 있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쩐 냣두앗의 부대는 우선 올라오고 있던 쉬게튀의 군대를 향해 돌진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두 군대는 제법 대등하게 전투를 벌였고 쩐 냣두앗은 자신의 부대에 옛 남송의 장수들이 상당수 된다는 부분을 십분 활용해 남송의 깃발을 앞세우며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이는 의외로 효과는 대단했는데 양양 전투에서 남송 군의 저항에 시달렸던 쉬게튀는 당시의 어려운 전투가 생각났는지 질색을 했고 남송 출신의 장수들은 베트남의 군대에서 원나라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족과 몽골족으로 혼합된 원나라 군대 사이의 유대를 붕괴시키기 위해 오직 탓(韃 / 타타르)놈들만 공격한다고 외치면서 한족 출신의 장수들에게는 맞아도 전혀 무해한 종이로 만든 화살을 날렸다. 남송의 깃발과 종이 화살 작전은 의외로 잘 통했기 때문에 이미 전투에 지쳐 있던 한족 출신의 장수 및 병사들은 더욱 전투에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쉬게튀는 크게 패배해 서쪽으로 도주했고 살아남은 일부 쉬게튀의 병사들은 티엔막 강 일대를 탈출했으며 한참 뒤, 겨우 토곤에게 도달해 쉬게튀가 크게 패해 서쪽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1285년 6월 24일, 쩐 흥다오는 직접 지휘를 맡아 쉬게튀와 우마르가 이끄는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쉬게튀와 우마르는 서둘러 해안가를 끼고 도주했으나 결국 포위되었고 쉬게튀는 결국 쩐 왕조의 장수 부하이(武海)에 의해 참수되었다. 기겁한 우마르는 빠르게 말을 달려 타인호아로 들어갔다. 한편, 쩐 인종은 쉬게튀의 잘린 머리를 받게 되었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라고 감탄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쉬게튀의 머리를 감싼 뒤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 쩐 냣두앗과 쩐 흥다오는 타인호아에서의 승전을 보고했다. 쩐 흥다오는 황제 쩐 인종을 알현해 전군을 이끌고 수도 탕롱을 탈환할 것을 논의했다. 이번에는 응안(乂安) 출신의 쩐 꾸앙하이(陳光啓)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팜 응우라오(范五老)와 쩐 흥다오는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쉬게튀 격파에 큰 공을 세웠던 쩐 냣두앗에게는 별도로 죽은 쉬게튀의 병사들이 그들의 사령관 토곤과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 임무가 맡겨졌다. 한편 탕롱 일대에 주둔해 있던 토곤의 군대 역시 서서히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끈질기게도 요충지인 쯔엉드엉(章陽)만에 함선을 정박시킨 채 버티고 있었다. 쩐 꾸앙하이는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했고 원나라 군이 여기저기 지어 놓은 소규모 기지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족 출신의 병사들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쉬게튀의 병사들의 합류를 막고 있던 쩐 냣두앗은 병력 일부를 분리해 쩐 꾸앙하이에게 지원군으로 보내주었다. 원나라 군을 피해 흩어져 있던 베트남군은 쩐 꾸앙하이의 진격을 보고 속속 합류함으로서 군대의 규모는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루터에 거의 버려진 채 정박되어 있던 많은 원나라의 함선을 탈취했다. 베트남군은 마침내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원나라 군을 공격했고 쩐 꾸앙하이는 팜 응우라오의 군대와 함께 쯔엉드엉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은 기습적인 공격에 패해서 도주하던 베트남군이 강력하게 돌격해오자 패배하여 도주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함들 대부분은 탈취당하거나 전소되어 침몰했다. 홍 강 일대에서 베트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수도 탕롱을 회복하고자 했다. 쩐 꾸앙하이가 정예병을 이끌었고 응우옌 카랍(阮可拉), 응우옌 쩐통(阮陳松) 등의 장수들이 민병대를 지휘하며 탕롱으로 진격했다. 이어 장수 마빈(馬榮)이 이끄는 군대가 탕롱성 외곽의 원나라 군을 공격해 격파하자 이내 모든 베트남군이 탕롱을 포위한 뒤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군의 강력한 공격을 피해 원나라 군은 탕롱을 탈출하여 홍 강 북쪽 기슭에 주둔했으나 베트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해 북쪽 기슭의 주둔지까지 공격했다. 한편, 원나라의 총사령관 토곤은 아직도 쉬게튀가 서쪽으로 도주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베트남군의 공격에서 겨우 도주해 온 쉬게튀의 병사 중 일부가 도착해 쉬게튀가 서쪽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토곤은 결국 통솔하는 군 전체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285년 6월 24일, 쩐 인종이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토곤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베트남군은 적장인 한족 장수 장헌(張憲)을 사로잡은 뒤 그를 길잡이로 삼아 서쪽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은 패배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우마르와 유규(劉揆)는 작은 함선에 탑승하여 바다로 도주했다. 원나라 군을 격파한 쩐 흥다오는 다시 2만에 가까운 군대를 모은 뒤, 선종불교의 대승이었던 뚜에중뜨엉시(慧中上士)와 함께 베트남군을 이끌고 홍 강 북쪽의 원나라 군을 공격했다. 원나라 군을 이끌던 장수 유세영(劉稅營)이 병사를 이끌고 상대했으나 대패했고 그대로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원나라 군은 뉴응우옛 강(如月河)까지 퇴각했으나 베트남군이 나타나 전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함선을 구하지 못한 원나라 군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달려 탈출해야 했는데 베트남군의 장수인 쩐 꾸옥또안(陳國瓚)이 원나라 군의 탈출을 저지하는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북쪽의 원나라 군은 삿강(冊江)으로 이동해 강을 건너려 했으나 쩐 흥다오가 추격하여 격파해 버렸다. 이항은 배후를 공격해 오는 베트남군을 향해 화살로 사격하여 이들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베트남의 부대가 대형을 이루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원나라 군대는 서로 흩어지다가 충돌했고 그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면서 무수한 병사들이 강에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삿강을 무사히 건넌 원나라 군은 도주하여 투민(思明)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항은 베트남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후위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도주하다가 빈빈 일대로 도착한 원나라 군은 쩐 황실의 일원인 천서공주(天瑞公主)와 결혼한 사령관 쩐 꾸옥니엔(陳 國巘)이 이끄는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나라 군을 지휘하던 이항은 쩐 꾸옥니엔의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베트남군이 사격하는 독화살들을 맞으면서 겨우 토곤이 있던 투민으로 퇴각했으나 결국 강한 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향년 50세에 전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나시르 앗 딘이 이끄는 운남의 위구르 군대는 원래 위치해 있던 운남을 향해 이동했고 베트남 쩐 왕조의 장수 하 닷(河達), 하 쯔엉(河長)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습을 감행했으나 원나라 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오히려 하 닷(河達)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는 원나라의 군사들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 인해 베트남과 원나라의 두 번째 전쟁 역시 베트남의 승리로 돌아갔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6
  • 일방통행이 부르는 또 다른 폭력
    며칠 전 수영장에서 배영을 하다가 물을 민다는 것이 옆 레인에 서 있는 여성의 엉덩이를 밀었다.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기에 옆 레인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내 손의 감촉이 물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엉덩이를 민 것으로 느꼈고, 그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만 알려 주었다. 수영하면서 생각해 봤다. 만약 그 여성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고소한다면 나는 성추행범이 되는가? 그렇다면 나로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만약 그 여성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몰고 간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남성이 내 엉덩이를 만졌다.” 하지만 나는 그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지 않았다. 여성의 엉덩이를 밀었을 뿐이다. 수영이 끝난 후 옆 레인의 강사에게 이야기했다. 선두에서 배영을 하는 중에 대각선 방향으로 턴을 하다가 내 왼손이 옆 레인 어떤 사람의 엉덩이에 닿았다고 했다. 혹시 그 사람이 나를 성추행범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르기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옆 레인의 강사는 여성이었다. "아버님! 잘 알겠습니다. 그 여성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이야기가 나오면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여성 강사는 그런 일이 수영장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니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도 옆 레인에서 평영을 하는 여성 발에 내 옆구리를 차인 경우도 있었고, 배영을 하는 여성의 손에 내 허벅지에 상처가 난 일도 있다. 관점의 차이일까? 나는 그런 일을 당해도 그 여성의 행위가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는 낌새를 알아차리면 내가 먼저 그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수영장 옆 레인 강사와 나눈 대화도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최근 조국혁신당이 몇 개월 전에 발생한 성추행에 관한 사건 해결에 미숙했다고 비난하는 말들이 많다. 지난 주말에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에게 가해자로 지목받은 사람이 그녀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는 입장문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남성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 아내와 딸을 제외한 세상 여자들이 모두 무섭게 여겨진다. 그 남성의 주장에 따르면 노래방도 그 여자가 먼저 가자고 해서 가게 되었고, 함께 한 7명의 사람들이 모두 노래방에서 어떤 추행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다. 하지만 내 주변의 대다수는 자신이 성추행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편에 서서 그 여성이 주장하는 가해자와 가해자의 소속 정당까지 싸잡아 비판한다.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보태는 심리가 작용해서일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요즘은 피해를 가장한 원한의 마음을 담은 강자의 논리도 작용하는 것 같다. 약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여성이 주장하는 가해자가 고의가 없다고 해도 여성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면 가해자는 그 여성의 아픔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의 주장에 대한 어떤 비판도 모두 사라지고 가해자만 부각될 뿐이다. 사실 그 뒤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무조건 손을 들 수 없다.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남성이 가해자로 몰린다면, 남성으로서는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억울한 죽음이 떠오른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모두 권력의 횡포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권력의 횡포는 일방통행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권력의 횡포로 강자의 주장만 관철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만 볼 수 없다. 예전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성이 약자일 수 있지만, 지금의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상호 보완해 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반자이다. 그러니 남녀의 관계는 상호 존중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나는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도 폭력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모든 일방통행은 모두 폭력으로 작용한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싹트는 사랑이야말로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의 대표적인 예이다. 너 속에서 나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남녀의 관계야말로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함께 힘을 합하여 험한 세상을 보다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조국혁신당의 두 남녀 주장에 어느 한쪽 주장에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아니면 배후에 어떤 마음이 작동되어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일반인으로서는 알 수 없다. 특히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했다는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상반되는 서로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그와 함께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 존중의 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5
  • 프랑스 정치, 경제 위기 :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고 있는 중
    현재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과 막대한 부채, 정치적 갈등이 위험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2025년 들어 국가 부채는 3조 3,454억유로(약 5,461조원)에 달하며다. GDP 대비 113.9%로 유로 국가들 중, 그리스(152.5%)와 이탈리아(137.9%) 다음으로 높다. 연간 재정 적자도 2024년 1,697억유로(약 268조 원)로 GDP의 5.8%에 달했다. 유로존 평균 적자율(3.1%)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EU 전체에 닥친 최악의 위기다. 그리고 끝도 없이 치솟고 있는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 및 취업율 하락은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경제 정책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과 마주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던 18세기 후반 당시 민중들의 분노는 경제적 불평등과 세금 문제, 심각한 빈부차와 식량 부족 등이 원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왕정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지만 이 또한 나폴레옹의 등장이라는 또 다른 절대권력을 불러왔다. 현재 프랑스 역시 경제적 불평등과 세금 문제, 그리고 물가 상승으로 인해 18세기 후반과 유사한 형태의 불안한 흐름이 이이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시 대혁명은 많은 희생을 동반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현재 프랑스는 급진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양새보다 계획적이고 실효성 있으며 지속 가능한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며 가장 어려운 시기의 새로운 돌파구 또한 모색해야 한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 사회적 불안은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마크롱 정부의 신뢰도가 하락한 것에서 비롯된다. 특히 물가 상승과 실업 문제는 시민들의 이반을 이끌어 놓은 핵심적인 문제다. 게다가 62년 만에 정부 불신임 안이 통과되면서 마크롱 정부는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2024년 12월 5일, 프랑스 하원은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 발의한 불신임안을 331표로 통과시키며 미셸 바르니에(Michel Barnier) 내각이 붕괴됐으며 올해는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긴축 예산안을 둘러싼 신임투표에서 패배하여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는 불과 9개월 만에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어진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갈등은 예산 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좌파들은 사회 복지를 축소하여 적자를 매우려 했고, 우파는 여전히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고 민생 문제를 비판하며 마크롱 정부를 압박했다.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이를 '정치적 실패(Échec politique)'로 규정하며, 사회 복지 및 연금 정책에 다시 한 번 손을 대려는 정부에 경고를 보냈다. 마크롱과 그의 정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신뢰도는 최근 수십 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갓 취임한 세바스티앵 르코르뉘(Sébastien Lecornu) 총리는 정치적인 화해와 국민 통합을 강조했고, 이에 따른 민생 안정 및 정치적 신뢰 회복과 경제 회생이라는 아주 중대한 과제를 맡았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는 가운데 주요 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3일 필자가 <프랑스 경제의 문제점과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인지의 여부>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올린 것과 같이 프랑스의 경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2023년에는 재정적자가 GDP의 5.5%로 EU 기준치인 3%를 초과했다. 공공 부채는 GDP의 110.6%에 달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112.4%, 2025년에는 113.8%로 증가했다. 비록 2023~2024년 프랑스의 GDP 성장률은 1.1%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수치상으로만 그럴듯 할 뿐, 생산비 상승과 기업 파산의 증가가 이어지면서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와 같은 재정 취약성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우선 복지와 연금 문제다. 프랑스의 정부 지출로 볼 때 GDP의 57.2%로 OECD 국가 중 핀란드 다음으로 높다. OECD 평균으로 볼 때 42.6%인 것에 거의 15% 이상 높은 편이다. 특히 연금과 건강 보험, 실업 수당 등은 OECD에서 분류했을 때 복지 지출 비율이 23.4%로 핀란드의 25.7%와 스웨덴의 25% 다음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실상 북유럽형 모델에 가깝다. 애초부터 프랑스가 북유럽 국가들처럼 이런 시스템을 유지한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북유럽형 모델을 도입한 것도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즉,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복지 지출을 쉽게 줄이기 어려운 것이 더욱 큰 문제다. 프랑스의 연금은 현 세대가 낸 보험료로 은퇴자의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부족한 부분은 정부 재정으로 충당한다. 연기금을 적립하여 그 수익금과 원금으로 지급하는 한국과 완전히 다르다. 재정으로 평균 소득의 절반 이상을 보장하고, 철도 및 공무원 등 특수 직업들의 연금도 유지하고 있다. 2023년에 연금 문제로 파리에서 대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정년 연장 및 연금 , 사회보장 급여 삭감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 복지나 연금이라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일례는 줬다가 뺏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상, 이는 엄청난 불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본래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나폴레옹의 개혁과 산업화가 이루어진 덕분에 가능했다. 19세기 초,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는 영국으로부터 산업혁명을 이끌어와 세계 열강 중 영국 다음, 두 번째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으며, 제3공화국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자유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제국주의를 표방하여 영국과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프랑스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자 열강 중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영국보다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는 21세기 들어 최악의 경제 위기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3년에는 약 70,000개의 기업들이 파산했다. 2024년에는 그보다 못하지만 약 59,000여 개의 기업들이 도산했으며, 창업한 기업들 상당수는 투자 부진이 이어지면서 꽃을 피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2025년에도 마찬가지로 경기 둔화가 계속되어 신규 기업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치적인 혼란은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2023년 OECD는 프랑스가 2025년부터 물가 안정과 글로벌 수요 개선에 따라 점진적으로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2025년 들어 이같은 장밋빛 전망은 오히려 핏빛 전망으로 변해 더더욱 어려운 수렁으로 끌려가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이미 구조적 개혁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갈등과 혼란 속에 빠져 있다. 마크롱 정부는 계속해서 반대파와 충돌하고 있으며, 마린 르펜을 실각시키며 더욱 거센 반발에 부딪치고 있다. 따라서 마크롱 정부의 개혁 추진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야당은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정부를 압박했으며, 정치적 불신임안도 잇달아 통과됐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은 정부의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것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의 불만과 정치적 갈등은 정부의 신뢰도를 하락시키고 있으며, 마크롱에 대한 지지도는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면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은 경제 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로존 경제가 둔화 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는 노동 시장을 개혁하고 연금 제도 개혁을 포함한 대대적인 경제 재편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공공 재정의 적자를 줄이고 투자자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프랑스는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증가는 신용 등급 강등으로 이어졌다. S&P는 작년인 2024년 5월 프랑스의 국가 신용 등급을 AA에서 AA-로 낮췄고, 2025년에도 전망을 ‘부정적’으로 돌렸다. 무디스도 지난해 Aa2에서 Aa3로 하향했다. 이 영향으로 2022년 초 1%대였던 10년 만기 프랑스 국채 금리는 3년여 만인 현재 3.5%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자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 사실상의 ‘국가 부도’인 IMF 구제금융까지 언급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마크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며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의 불안정성을 "러시아 침공설"과 같은 위기 의식을 외국으로 돌려 국내 상황을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마크롱의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결국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Block Everything"의 슬로건 아래 550건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시위대는 마크롱 대통령 사임, 탄핵 등을 외치며 학교, 역사, 도로 등을 봉쇄하고, 시가지와 상가를 불태웠다. 진압하러 온 경찰과 맞서기도 했고, 폭력 시위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결국 좌파 연합은 마크롱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80여 명의 연서를 통해 하원에 제출하였고, 현재 심의 중에 있다. 프랑스는 양원제를 채택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브라질처럼 하원에서의 소추, 상원에서의 심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통과를 시키면 상원에서도 탄핵소추가 통과되어야 하는 매우 특이한 방식이다. 의회와 상원에서 모두 통과할 경우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진 탄핵재판소(Haute Cour)가 조직되는데 이곳에서 재적의원 2/3의 찬성을 얻어야 탄핵할 수 있다. 마크롱은 프랑스 현직 대통령으로써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에 이어 공화국 건국 사상 두번째 탄핵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만약 재적의원 2/3가 탄핵을 찬성한다면 프랑스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2025년 9월 18일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함으로써 파리는 현재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 진행 중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무너져 가는 세계 7대 경제 강국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결코 남의 일은 아니다. 필자에게 9월 22일부터 소비쿠폰 1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문자가 왔다. 이런 식의 포퓰리즘 정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또한 이와 같은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이 오히려 정부가 해주는 연금 및 복지를 받는 것에만 익숙한 형태로 되어가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결국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 긴축 재정 얘기가 나올 것이고, 그리되면 현재 프랑스 상황의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좌우 이념 대립으로 정신 없는 국가에 프랑스와 유사한 형태의 이유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면 대한민국 또한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 강국의 지위와 신뢰가 흔들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4
  •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의 27년 3개월 실형 :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전후, 쿠데타 혐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이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려 한 혐의 등으로 11일 연방 대법원에서 징역 27년형 3개월을 선고받았다.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2018년 사회자유당(Partido Social Liberal , PSL)에 입당하고 대표에 취임하면서 사회자유당이 강력하게 우경화되자 이에 반발한 당원들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게 되었고 결국 탈당해서 자신만의 당을 만든 것이 바로 보우소나루의 자유당(Partido Liberal)이라 볼 수 있다. 보우소나루는 2018년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의 후보로 유력한 룰라와 대결할 경우 2위로 떨어질 것으로 보였지만, 룰라가 법원의 결정으로 출마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브라질 전국에서 1위를 달리며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었으며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당선되기 이전과 같이 이후에도 각종 막말을 쏟아냈고, 반이민 정책 등의 극렬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계속하여 실정을 저지르고 직업 군인 출신이었던 보우소니르가 대놓고 군사 정권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과거 2018년 대선 때는 러닝메이트인 노동혁신당의 아미우통 모랑(Antônio Mourão)을 뒤늦게서야 지명했을 정도로 각계의 주류 정당들이 보우소나루와의 협력을 거부했었다. 우선 2022년에는 우파 빅텐트 정당을 하나 만들어 우파 표들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브라질이 그동안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보우소나루도 코로나 사태 해결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자 민심은 대거 룰라로 이동했었고, 보우소나루 자신도 이대로 가면 룰라가 승리하고 좌파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 공언까지 하면서 지지 세력의 결집력을 더욱 높였다. 문제는 트럼프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절친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나 보우소나루 모두 우편 투표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선거론을 주장했다. 이어 보우소나루는 만약 룰라가 승리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소송을 걸 것이라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그로 인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와 같은 사건이 브라질에서도 벌어질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으며 결국 2023년 1월 발생하고 말았다. 보우소나루는 자신의 친위 세력이 존재할 정도로 지지자들의 결집력이 워낙 강한데다 지지자들의 성향 역시 극도로 과격했으며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021년 7월에 브라질의 현행 투표 방식인 전자 투표를 취소하고 투표지로 직접 기표하며 수개표하는 방식의 투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선거 결과에 불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보우소나루는 브라질 군대가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에 대선에 당선된 룰라는 쿠데타의 위협을 항상 느끼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본래 보우소나루는 브라질 육군 장교 출신의 전직 군인이다. 보우소나루는 군 생활 중에서 군의 비리를 직접적으로 폭로해 매우 용감한 군인이라는 인지도를 얻었고, 전역한 이후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는 군 장교 출신으로 강력한 리더십과 직설적인 발언을 하면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인기를 얻은 보우소나루는 반 부패와 치안, 경제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워 201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실정은 코로나 펜데믹 시기가 절정이었다. 그는 방역에 관심이 없었고, 경제 정상화와 자유를 중시하면서 코로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코로나는 단순한 감기이며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발언을 하며 희생자 유가족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스크도 쓰지 않고 거리두기 역시 지키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보우소나루는 코로나에 걸려 확진되었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은근히 푸틴의 편을 들면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보우소나루의 이같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 외교는 매우 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022년에는 교사 월급을 무려 33% 인상했는데, 이는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었다. 한 때 결선투표에 오르는 것조차 불투명할 정도로 지지율이 낮았었지만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들이 결집하면서 지지율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룰라에 밀리고 있었고 결국 아쉽게 1.3%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보우소나루는 룰라는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며 우파의 결집을 촉구했고, 이러한 보우소나루의 행위는 군대까지 동요를 일으켜 정정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 몰리게 된다.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은 브라질 전역의 군사 기지 밖에서 처음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보우소나루는 룰라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대선 패배 이후, 보우소나루를 지지하는 트럭 운전사들이 전국의 도로 점거하기도 했다. 12월 12일에는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수도 브라질리아에 있는 연방 경찰 본부에 침입을 시도했으며 보우소나루의 지지자 중 한 명이 브라질의 선거 결과에 항의하여 폭탄을 터뜨리려 시도하는 테러를 자행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급진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히 알려진 셈이 되었다. 주로 왓츠앱이나 텔레그램에서 퍼졌으며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해 경찰의 진압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었다. 2023년 1월 8일 오후 6시경 삼부광장(Praça dos Três Poderes)이라 불리는 브라질 대법원, 국가의회, 대통령궁이 모두 위치한 시내 중심광장에 결집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무력으로 여러 정부 시설을 불법으로 침입하고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룰라 대통령은 사건 당시, 브라질리아가 아닌 홍수 피해를 입었던 상파울루에 가서 재난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사태의 위협에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브라질 정부는 의회,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을 장악한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의 폭동을 모두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동 시작한지, 7시간 만에 모두 진압에 성공했다. 이같은 사태에 대해 당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도 폭동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등이 폭동 규탄 입장을 발표했다. 2022년 12월에 이미 미국 플로리다에 가 있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와 관련이 없다면서 시위대를 비난했다. 이어 보우소나루가 폭동을 지시했다는 룰라 대통령이 재기한 의혹과 비난에 대해 자신과 이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폭동 선동에 대한 수사의 움직임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향하게 되자 보우소나루는 직접 대선 불복 내용이 담긴 영상을 업로드했다가 즉시 삭제하는 등, 1월 폭동과 관련성이 높다는 의혹만 더 키운 꼴이 되었다. 이후 2023년 1월 14일 안데르송 토레스 전 법무부 장관이 대선 불복 폭동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대법원에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폭동 선동 혐의로 수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먼저 폭동을 일으킨 시위대 중 39명을 쿠데타, 무장 범죄단체 결사, 공공기물파손 등 혐의로 기소했다. 그리고 보우소나루 또한 체포되었다. 대법관 5명 중 4명은 보우소나루가 2022년 대선에서 룰라 대통령에게 패배한 이후, 선거 결과를 뒤엎기 위해 갖은 음모들을 주도했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대법관 1명은 무죄 의견을 냈다고 한다. 보우소나루가 유죄 판결을 받은 혐의는 대략 5가지다. ▲ 무장 범죄 음모, ▲ 민주적 법치주의의 폐지 시도, ▲쿠데타 시도, ▲ 공공 재산의 폭력적 파괴, ▲국가 문화유산 훼손 등이다. 그러나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모든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자신은 2023년 1월 8일 폭동 당시 미국플로리다에 있었기에 당시 폭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혐의들은 룰라가 정치적인 보복에 따른 것이며, 자신의 2026년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보우소나루는 브라질의 투표 제도가 부정에 취약하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2030년까지 공직 출마가 금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보우소나루는 이에 불복하고 2026년에 재출마를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보우소나루 측은 그와 다른 피고인들을 심리하는 대법원 재판부의 공정성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자신을 재판하고 있는 알렉상드르 지 모라이스(Alexandre de Morais) 대법관에 대해 보우소나루는 오랜 기간동안 정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를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 판사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번 재판에 참여한 다른 두 대법관 역시 룰라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이며 불공정한 재판이라 주장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법적 분쟁과 보우소나루 사건을 비교해 왔다. 따라서 보우소나루 유죄 판결에 대해 트럼프는 자신에게 하려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번 판결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번 비인도적인 행위에 맞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보우소나루는 절친인데다 가족 간에도 인연이 있는 사이이며 두 사람의 아들은 친구 사이다. 보우소나루의 아들인 에두아르두는 아버지의 재판이 중단되도록 브라질 정부를 압박해 달라고 트럼프 행정부에 로비해 왔다. 이번 판결 이후 에두아르두는 미국 측이 브라질 관료들에 추가적인 제재를 가할 것 예상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미국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4
  •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미국 현지에서의 갈등
    19세기 초반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과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볼 때, 뉴멕시코, 네바다, 애리조나 등지까지 점령하면서 당시 멕시코 영토의 절반 이상을 정복했다. 이 당시에 미국과 멕시코, 모두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어 쓸모 없는 황무지들이 많았지만 미국은 이민자들이 몰려와서 인구증가율이 높았었던 것에 반해 멕시코는 이민자들이 적어 인구증가율이 낮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처럼 새로 점령한 지역들은 멕시코에서 인구 밀도가 매우 희박한 지역들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 도중에 흡수된 멕시코인 인구는 새로 텍사스로 유입된 독일계 미국인 인구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 관리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일대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도 변방 지대로 여겨졌기 때문에 투자에 소홀했고 인구 밀도가 희박했었다. 따라서 이 서부 지역으로 알려진 곳들은 미국에 독립을 위해 봉기하지 못하고 순순히 흡수되었다. 대체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유럽의 본토의 면적보다 훨씬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역을 모두 통제 및 지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행정 인력의 부재로 늘 골머리를 앓았었다. 따라서 광산과 항구를 중심으로 점과 선 형태의 행정력만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스페인에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멕시코가 당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동부 지역에서 텍사스로 유입된 독일계 개척자들도 굳이 이들을 추방하려고 하기보다는 농장 노동자 등으로 이들을 저렴하게 착취한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백인 개척자와 멕시코 인이라는 두 이질적 그룹이 공존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에 잔존한 히스패닉계 목동들은 이른바 버커루(Buckaroo)라고 하여 카우보이의 선조가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공존하고 있었으나 미국-멕시코 전쟁 이전에 대부분 격멸되어 인구가 더 감소해 사실상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존재감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혈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선 스페인 통치 시기에 유럽에서 멕시코로의 이민은 거의 남성 위주로만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스페인인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아내로 맞이해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미국 남부 도시들 중 히스페닉계 도시 이름을 구분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영어 지명인 경우 영국계나 독일계 개척자들이 만든 도시이고 스페인어 지명인 경우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꽤 오래된 도시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본디면 플로리다의 샌 어거스틴(San Agustín)이나 미시시피의 파스카굴라(Pascagoula), 텍사스의 샌안토니오(San Antonio), 뉴멕시코의 앨버커키(Albuquerque), 네바다의 그 유명한 라스베가스,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은 스페인식 도시 이름들인데 이 도시들의 특징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건설된 스페인 식민 도시들이라는 것에 있다. 반면 영어 명칭을 쓰는 도시들은 영국, 독일계 개척자들이 만든 도시로 원래 무주지였던 곳을 이주민이 오히려 받아야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휴스턴은 샘 휴스턴 장군의 이름에서 따 온 도시다. 미국의 서남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가 사용되었다. 20세기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의 기간에 동안 대략 100만 명에 달하는 멕시코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 남서부로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멕시코에 접해 있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등에 정착했다. 멕시코 본국은 1910년 이후, 멕시코 혁명 및 그 이후의 정치적 여파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해 이주해온 것이었다. 당대 미국 입국은 어렵지 않았었기에 국경에서 뇌물 얼마 쥐어주면 그냥 통과시켜 주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에는 전쟁에 투입된 인력을 대신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는 1942년에 브라세로 계획(Bracero Program)에 합의했다. 브라세로 계획은 1964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연평균 약 209,000명이 동원되었고, 총인원 460만여 명의 멕시코 노동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원래 3년 간의 노동 계약을 맺었는데 계약 이후에도 미국에 남아 계속 일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미군에 입대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대로 불법체류자로 남아있기도 했다. 1950~1960년대까지 멕시코 이민자의 80% 이상이 미국 남서부 국경인 선 벨트에 거주했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에서 약 3.5% 정도가 히스패닉계로 나타났다. 물론 현재 미국의 히스패닉에는 멕시코 이 외 출신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950~1960년대에 미국 내 히스패닉계의 대부분은 멕시코 출신이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달라진 점은 1982년 멕시코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이래 멕시코 인들은 한 때 멕시코 땅이었던 선 벨트 서부 지역을 넘어 미국 전역으로 올라왔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뉴욕에 원래 이주해 거주하고 있던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출신들은 멕시코계 갱단에게 밀려나 최하층 이주민으로 전락했다. 원래 미국의 동북부 지역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개척한 곳이고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에는 새로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던 곳이었음에도 멕시코계 주민들이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멕시코의 민간 경제가 1980년대 이후로 붕괴되고 1990년대에도 멕시코 내에는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실질 임금 수준이 계속 하락한 것과 더불어,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1,000만여 명이던 멕시코 인구가 1억 3,000만여 명 이상으로 과도하게 폭증했다. 이어 미국으로 멕시코계 불법이민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뉴멕시코에는 겨우 50만여 명의 멕시코계들이 불법이민자들이었으며 캘리포니아에는 20만여 명의 멕시코계 불법이민자들이 살았다. 몇몇 지역의 멕시코계 인구는 당시에도 수백만여 명에 달했다. 이정도만 해도 적은 인구는 아니었지만 오늘날 멕시코계 미국인 인구 3~4,000만여 명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다. 계속되는 이민으로 인해 몇몇 지역의 엘패소(El Paso)와 샌안토니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 및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는 멕시코계들이 완전히 자리잡은 도시들이 되었고 이 외에도 몇몇 지역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테하노스(Thehanos), 칼리포르니오스(Californios) 등등이 멕시코 북부 출신이면 새로 유입된 멕시코계들은 멕시코 남부 출신들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남북으로 긴 멕시코 영토로 인해 멕시코인들은 남부 및 북부 출신들은 매우 다르다. 남부 지역은 흑인들에 대한 노예 유입이 많았던데다 원주민들의 언어까지 섞여 같은 멕시코여도 대화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멕시코는 미국-멕시코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 북부 지역으로 갈수록 메스티소 백인 인종들의 혈통이 강하고 남부로 갈수록 원주민과 흑인 혈통의 물라토라 불리는 인종이 강해지는 편이다.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미국으로 편입된 멕시코인들의 경우 비교적 백인들의 혈통인 메스티소들이 상당수 섞여 이질감이 거의 없다. 미국인들이 서부 지역으로 오기 이전부터 선 벨트 중서부 지역에서 이들 메스티소들은 꽤 오래 살아왔다. 반면 남부 멕시코인은 더 키가 작고 피부색이 짙은 편에 있는데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적도 근방에 살던 부족들의 유전자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들 물라토 인종들은 때때로 동남아시아 인종들과 유사하게 나타나 구분이 쉽지 않다. 18~19세기 무렵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유럽보다 미국의 평균적인 삶의 질이 월등히 높았었다. 당시 미국은 땅이 넓어 경작할 지역이 많은 반면 유럽은 인구 과잉이 심각한데다 토지가 부족해지고 도시에서는 저임금 중노동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백인 인구가 주류인 것은 초창기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것 이 외에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1인당 GDP나 고학력자 임금 수준은 미국이 웬만한 서유럽 선진국들을 압도하고 있지만 문제는 미국은 치안이 좋지 않고 공교육 및 공공의료 시스템이 유럽보다 훨씬 더 낙후되어 있다. 유럽 내 가난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더 이상 미국 이민을 희망하지 않고 좀 더 가까우면서 안전한 독일이나 영국, 노르웨이 등을 노동 이민 장소로 선호했다. 따라서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은 크게 감소하였고 그 자리는 멕시코계를 비롯한 히스페닉들이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점점 백인 인구 비율이 감소하였으며 메스티소 인구 비중이 증가하게 되자 주류 백인들은 멕시코인들을 경계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하면서 불법체류 및 마약 밀수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멕시코계와 현지 미국인(영, 독계) 간의 마찰이 끊이지 않으며 갖은 차별과 선입견으로 인해 계층 간의 대립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3
  • 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은 카타르의 영토, 영공을 침범한 중대한 국제법 위반
    2025년 9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이 기습적으로 카타르의 수도 도하를 단독 공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 수도 도하에 거주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도자들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그 동안 하마스 지도부들은 카타르 도하에 기반을 두고 활동해 왔는데 가자에 있는 지도부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가자의 지도부는 가자 지구를 밀고 들어오는 이스라엘 군에 맞서 항전을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정치국원들이 거주하는 도하의 한 주거용 건물을 공격했는데 그곳은 과거 이란에서 암살당하기 전,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으로 건너가기 전에 머물렀었던 건물이었다. 2012년에 카타르 국적의 인물이자 하마스의 숨은 간부 중 한 명이 이 건물을 매입했는데 그가 카타르 국적자이기 때문에 건물 매입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스라엘이 공습한 곳은 도하 북부의 도하 지하철 레드 라인 카타라 역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해당 지역은 도하 시내를 관할하는 부동산들이 가장 노른자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비싸다. 카타라 역과 그 주변은 주 카타르 폴란드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 그리스 대사관, 헝가리 대사관, 필리핀 대사관, 세르비아 대사관, 이라크 대사관 등 수십개 국가의 대사관이 자리하고 외국인 대상 국제 학교가 모여있는 카타르에서 제일 가는 부촌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레바논, 시리아 등 친 이란 세력을 공격한 전례들이 있지만, 미국, 이집트 등의 국가들과 하마스-이스라엘의 휴전 협상을 주도해 온 카타르를 타격한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근 수개월 동안 가자 지구와 레바논, 시리아, 예멘 등지에서 하마스와 연계하고 있는 세력들을 공격했다. 특히 2024년 7월 테헤란에서 하마스의 핵심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 정치국장을 암살했고, 레바논과 가자 지구 내 하마스 지도부들을 지속적으로 제거해 왔다. 그런데 하마스 휴전 협상 대표단이 모여 트럼프의 휴전 제안을 논의하고 있던 도중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몇 달전, 이란이 미국과 핵 협상을 하려고 시도하던 전날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이스라엘 군은 도하를 공습한 직후 성명에서 군과 이스라엘 보안국이 하마스 지도부만을 노리고 정밀 타격했다고 밝혔다. 네타냐후는 카타르 공습을 두고 예루살렘 총격 등에 대응한 것이라 밝혔다. 이는 전날인 8일에 예루살렘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팔레스타인에 의한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했고 이스라엘인 6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을 두고 한 발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관계자는 미국에게 사전에 통지를 했다고 언급했다. 네타냐후는 이번 공습이 이스라엘의 단독 작전이라 주장했지만 정말 그럴까? 카타르는 중동 내 몇 안 되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친미 성향의 입헌군주정이 있고, 미 공군 기지도 주둔하고 있다. 카타르의 미 공군 기지는 이라크와 이란의 상황이 벌어지면 유사시 대비하기 위한 기지다. 공습 이후에 트럼프 또한 미 공군 기지가 공습당할 뻔했지 때문에 휴전 협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분노하여 불쾌감까지 표시했다고 한다. 미국은 이번 공습을 허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 따라서 이번 공습에 대해 이스라엘에 비판을 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독립국이자 미국의 동맹인 카타르는 평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 왔으며 이와 같은 카타르를 일방적으로 폭격하는 것은 휴전 협상에 대한 미국의 목표를 진전시키지 않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미국 관리들이 하마스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작전에 '그린라이트'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카타르 주재 미국대사관 또한 도하에 미사일 공격이 발생했다는 보고에 따라 '실내 대피'를 발령했다고 했으며 자국민에게 대피 수칙을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카타르의 방공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타르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과 사드(THAAD) 대공 시스템을 포함한 미국의 첨단 방공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미사일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성공까지 시켰다. 이는 카타르가 미사일 발사 경고를 무시했거나, 패트리어트 시스템 및 사드 대공시스템을 미 국방부가 통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6월에 워싱턴이 이란의 핵 시설을 폭격한 후 테헤란이 알우데이드 공군 기지를 공격했을 때 카타르 방공망이 이란 미사일을 격추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과 미국이 짜고, 카타르의 모든 방공시스템의 작동 버튼을 꺼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후자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미국은 이번 공격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메르다드 파라만드는 라디오 프리 유럽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한편 카타르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는 국가였기에 이번 중재를 포기할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 이스라엘과 관계가 좋지 않은 아랍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같은 국가들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도 카타르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이스라엘을 공식 비난했다. 하마스의 지도부가 있었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교전국도 아닌 휴전까지 중재하려 한 제3국의 수도를 공습한 결정 때문에 카타르 내의 국민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거센 상황이다. 무엇보다 공습을 한 지역이 기존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었던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과 국제학교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이다 보니 잘못하면 이들 대사관과 국제학교도 공격에 노출된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에 들어간다. 이는 카타르의 주권을 무시하고 해당 국가의 폭격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영토와 영공 침범으로 해석될 수 있다. 휴전과 인질 석방에 긍정적 역할을 해온 카타르를 공격했기에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명백한 침해로 규정되며 네타냐후는 전범으로써 죄목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한편 휴전 대표단을 이끄는 하마스 정치국 부의장 칼릴 알 하야(Kalil Al Haya)와 또 다른 고위급 차관인 자헤르 자바린(Jaher Jabarin)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신임 하마스의 수장이었던 칼레드 마샬(Khaled Mashal) 또한 회의에 동석했다. 그러나 사망설이 돌고 있을 뿐,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마스 지도부가 타격을 받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은닉된 지도자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무장 투쟁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테러 같은 카타르 공격은 오히려 페르시아만 일대의 긴장을 불러올 수 있다.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은 이 사건으로 인해 9, 10일 이틀 동안 비행기 운항이 금지되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공항 자체를 오폭 받을 수 있다는 것에서 나타난 조치였다. 페르시아만을 오가는 선박 또한 통제되었고, 도하의 금융시장과 증권의 주가도 순식간에 폭락했다. 카타르의 금융경제권이 흔들리면 이는 중동 전체에 가장 암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중동에서 도하의 입지는 두바이, 마나마, 쿠웨이트를 중심으로 한 중동 경제의 4륜 마차라 불리는 곳이다. 당분간 중동 일대와 페르시아만은 이스라엘로 인해 또 다른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네타냐후의 무모한 행위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네타냐후 또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3
  • 네팔의 시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
    시민들 중 상당수가 마오주의자들에 넘어오면서 게릴라 수준의 전투를 벌이던 이들은 전문적 군인들이 훈련시키고 무장 수준도 신식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네팔 정부군은 매우 고전했다. 그러자 미국과 중국도 네팔군을 지원했지만 민심이 나락으로 떨어진 정부군보다도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나날이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네팔에서의 내전은 이전과 매우 다를 정도로 격화되었고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동안 지속된 내전을 통해 사망자는 19,000명에 달했고 난민은 수십만 명의 단위가 되어 인도로 넘어갔다. 게다가 잦은 부정부패로 인해 신용 등급에서부터 악화되어 네팔 경제와 외교에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혼란을 수습해야 할 갸넨드라 왕은 집권 초기부터 라나 가문을 비롯한 부패한 귀족층 내각을 앞세워 2005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왕정을 부활시켰다. 이 사건은 민심을 크게 자극했고 이 혼란을 이용하여 마오이즘 공산당들이 수도인 카트만두 부근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와 같은 혼란을 막겠다고 벌인 선거조차도 야당을 탄압하고, 왕당파들이 절대적인 압승을 거두는 부정 선거까지 자행한다. 이는 민심을 더더욱 자극시켰고, 공산당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에 의해 왕권이 붕괴될 위기까지 치닫게 된다. 결국 마오이즘 공산 반군 세력들을 비롯해 모든 야당 세력에서부터 진보, 좌익, 심지어 우익온건파, 극보수 성향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까지 모두 왕정 타파를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이와 같이 절대 왕정이 부활한지 2년도 되지 않아 왕은 모든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하면서 물러나야 했고, 2007년 12월 25일 마오이즘 공산당과 국회 원내의 여야정당들이 왕정 폐지에 합의했으며, 2008년 5월 28일 첫 총선거에서 마오이즘 공산당 정당이 압승하면서 무려 239년만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내전 또한 함께 종식되었다. 독립 국가로서 네팔의 정체성을 지켜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샤 왕조는 결국 허무하게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네팔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던 인도는 마오이즘 공산주의자 정권을 매우 혐오했다. 이에 인도 동부 차티스가르(Chatisgar) 주 및 웨스트 벵골 주 등 여러 주에도 낙살라이트(Naxalite)라고 불리는 마오이스트 공산 반군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동부와 서부 지역의 빈민가 등에 암약하면서 인도 정부에 저항하고 있었다. 2009년만 해도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민간인들과 경찰을 합쳐 906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마주하는 잠무 카슈미르에서 그 해 사망자가 민간인, 군인 합쳐서 132명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내전급이나 다름 없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인도는 네팔에 여러 혼란이 계속되는 것도 두고 보고 있었다. 마오이즘 공산당 측은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중국은 이를 환영하면서 정작 자신들에게 큰 이익이 못 되는 상황이기에 중국 또한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마오이즘 공산주의자들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던 미국이나 인도 정부 때문에, 중국은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여기에 왕정복고주의자들이 일어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 갸넨드라는 폐위된 이후, 갸넨드라 왕과 그의 일가족들은 수도 카트만두 근교 별장에서 거주했다. 이는 권력으로 밀려나 좌절했을지 모르지만, 모아두었던 돈과 인도 및 여러 상류층과의 협약, 각종 부정부패로 축척한 재산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당시만 헤도 비렌드라 국왕의 존경심이 남아있었던 네팔 국민들은 왕실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현재까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여전히 네팔 국회에서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당이 존재한다. 2008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정복고 주장을 하고 있다. 왕정 폐지로 폐위된 왕가를 구심점으로 삼아 옛 왕가를 지지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시민단체 지지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Rastriya Prajatantra) 당 등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야당이 국회에서 원내 4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폐위당했던 갸넨드라 전 국왕은 왕정이 복고될 것과 왕궁 등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몰수당한 왕가 재산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네팔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들은 주로 카스트에서 주로 브라만이거나 크샤트리아 등 상위 카스트 신분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계층 중에는 현재의 네팔 공화국 정부가 하위 카스트 출신들과 마오이즘 공산당 세력들이 일방적으로 왕정을 폐위하고 강제로 성립시킨 불법 정권이라 주장하는 자들 또한 존재한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 서방 국가들과 국제 사회가 현 네팔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취소 및 철회하고, 불법적인 왕정 폐지로 인해 사라진 옛 네팔 왕국의 재건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존재한다. 이들 중에는 네팔 국가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제정된 현 네팔 국가가 아닌 옛 왕국 시절의 네팔 국가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갸넨드라 전 국왕과 그 일가들은 갸넨드라의 제위기간 동안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 갖은 폭정, 부정부패, 각종 국가를 망신시켰던 기행 등 워낙 악명들이 대단하다 보니, 일부 군주주의 지지파 세력들을 제외하고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갸넨드라 재위 시기였던 2000년대 초, 중반 당시에 옛 네팔 왕국 정부군에게 살해당하거나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이 갸넨드라 전 국왕과 네팔 왕실 일가들에게 큰 원한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사이에서는 왕정이 다시 복원되어 갸넨드라가 다시 국왕이 되면, 혹은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이 된다면, 네팔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던지, 아니면 총을 들고 히말라야 산지로 들어가서 반정부 게릴라 전을 일으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왕정을 폐지하고 세워진 현 공화국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네팔 국내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RPP-N) 당은 갸넨드라 전 국왕이 복위하거나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 이들이 네팔 정치와 사회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고려하여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총리와 의회의 권력이 강력한 일본이나 캄보디아, 영국, 노르웨이 등 아시아 및 유럽의 여타 국가들과 같이 군주의 권력이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거나 만약 왕정복고가 안 된다면 왕실이 폐지된 이후에도 옛 왕족 인사들이 옛 왕궁과 별궁 등지에서 거주하게 하는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와 같이 폐위된 옛 왕실 일가 사람들에게 나라얀히티(Narayanhiti) 궁전 등 옛 왕궁에서 거주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 공산당과 네팔 회의 등 정치권의 주요 여야 정당들과 왕정이 폐지된 이후 정치 권력에 진입한 옛 마오이즘 공산당 출신의 네팔 정치가들의 상당수와 네팔 내전 당시 이전 네팔 왕국 정부군이 자행한 정치 폭력과 전쟁 범죄에 피해를 입었던 자국민 피해자들은 갸넨드라와 그의 아들인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군주제 시절에 자행한 악행과 전횡들을 문제 삼아 정계 진출 제안들마저도 반대하거나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갸넨드라가 재위기간에 벌인 실정으로 인한 영향으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현 집권 세력들의 위세와 시민들의 공화정 수호 의지가 매우 강력한 것과 더불어 갸넨드라의 폭정으로 인해 가족이 정부군에게 죽거나 불구자가 된 피해자, 그리고 유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왕정복고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이 군주제의 복고와 왕궁 등 옛 왕가 재산에 대한 환원 주장을 왕당파 세력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일부 국제 정세 전문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는 네팔에서 다시 왕정이 복고될 경우 권력을 잃고 밀려 나간 자국 내 공화주의 세력들의 반발에 의해 다시 내전이 발발하거나, 최악의 경우 공화국과 왕국으로 네팔이 분단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2021년 1월에는 폐지된 군주제의 복원을 요구하는 군주제 지지 시위가 수도 카트만두에서 발생하여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자국민들마저도 현 공화정권을 지지하는 계층과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계층들로 크게 분열되었고, 이들의 적대감이 매우 심각하다고 전해진다. 최근에는 2025년 5월에 왕정복귀를 요구하는 네팔 내 근왕파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분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15년 4월 25일에는 네팔 동부에서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각종 구호품과 기부금을 대량으로 횡령하는 사태까지도 벌어졌었고, 2024년부터 SNS를 통해 고위 정관계 인사들의 자녀들, 이른바 '네포 키즈(Nepo Kids)'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들이 틱톡을 비롯한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온라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그러자 네팔 정부는 9월 5일경 유튜브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렘, X 등 총 26개의 SNS를 무더기로 차단했고, 이에 청년층의 분노가 폭발해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틱톡만이 유일하게 차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부유층 자제들이 자신들의 부와 재력을 과시하려는 공간이 틱톡인데다 이것마저 차단하면 그들의 불만마저도 폭발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네팔 정부는 시위가 격화되자 SNS 차단 계획을 철회했지만 여전히 시위대는 정부의 부패와 권위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SNS 차단이 반정부 시위의 트리거 역할을 한 셈이다. 시위대는 네팔 국기를 흔들고 "소셜미디어가 아닌 부패를 척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의 SNS 금지 조치 철회를 촉구했다. 이날 오전 시작된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평화롭게 행진했으나,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일부 인원이 경찰이 친 바리케이드를 부수거나 밀어 재끼고 의회 난입을 시도해 결국 의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자가 나오게 되자 폭력 시위는 더욱 불이 붙었고, 네팔 대통령궁과 총리 공관, 국회의사당, 대법원, 검찰청, 경찰청, 카트만두 지방법원 등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9월 12일까지 전면적으로 페쇄했으며 인도는 우타르 프라데시의 경계를 강화하고 네팔로 통하는 바흐라이히 국경 지대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인도의 항공사 에어 인디아와 인디고 항공은 자국민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오늘 오전부터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임시 운항을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SNS 차단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반발이 원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네팔 국민들의 누적된 분노와 피로감, 그리고 엘리트 계층에 대한 좌절감 등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네팔은 예전부터 고위층의 비리 수사가 지연되는 사건이 많았고, 정치인 친인척이나 자녀들의 과시적 소비 등 구조적인 부패와 족벌주의로 인해 항상 국민들이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시위대의 주요 구호와 요구 역시 '반부패(Anti-Corruption)", 투명성(Transparency)", "책임정치(Responsible Politics)' 였다. 게다가 청년실업률은 약 20%대로 매우 높은 편이라 경제적 불만도 컸다. 결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고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2
  • 폴란드의 러시아 드론 출현, 나토에 대한 도발인가, 경고인가? 아니면 자작극?
    지난 9일, 러시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드론이 폴란드 영공에 나타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이후, 나토 회원국의 영토에 러시아 군사무기가 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폴란드 정부는 이를 침략 행위(Act of Aggression)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문제다. 훨씬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폴란드는 숙적이자 그 이상의 관계였다. 러시아가 모스크바 공국 시절, 폴란드는 러시아인의 씨를 말리기 위해 이반 4세 사후의 혼란기를 이용해 러시아를 침공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강점기 시대 도래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러시아의 명망있는 귀족과, 미닌, 포자르스키 같은 영웅이 나타나 모스크바를 폴란드로부터 해방시키고 폴란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후, 로마노프 가문이 모스크바 공국의 혈통과 혼혈하고, '젬스키소보루' 의회 선거를 통해 모스크바 공국을 공식 계승함으로써 로마노프 러시아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폴란드 강점기 때, 폴란드 압제자들에게 희생당한 러시아인은 거의 200만에 달했다. 학살도 학살이거니와, 노예로 팔려나간 러시아인이 수없이 많았고, 포로로 끌려가거나, 유럽 내 신, 구교 간의 종교전쟁에 총알받이 쓰이기도 했다. 그 후로 러시아인들은 폴란드, 정확히 말해 폴란드-리투아니아라면 이를 갈았다. 이후 러시아는 아주 강력히 성장했을 때 잠깐 폴란드가 러시아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당시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폴란드는 작센과 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러시아-폴란드 연합을 구성하여 스웨덴에 맞서 싸웠다. 다만 이는 러시아를 돕기 위해 싸운게 아니라 스웨덴의 군사적 패권을 두려워해 발트해 연안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스웨덴의 야망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때에 따라서 스웨덴에 붙어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려 하는데 이중플레이 역할을 충실히 소화했다. 그리고 그 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삼국 분할하여 폴란드 동부를 지배하여 거의 200년만에 복수에 성공한다. 폴란드는 러시아에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톨릭과 폴란드어,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면서 인종 자체를 멸절시키려 했다. 처음에 러시아는 폴란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려 했지만 계속 반란을 일으키고 저항하였기에 자치권을 회수하고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시켰다.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는 다시 독립했다. 폴란드는 소련을 상대로 소련-폴란드 전쟁을 일으켰고, 국내가 혼란에 빠지며 적백내전의 여파를 미처 수습하지 못한 소련은 폴란드에게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 폴란드군은 잡혀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면서 고문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한 구타와 학살로 인해 2만 명 가량의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소련이 세워지면서 공산주의가 싫어 소련을 떠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했지만 독일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대부분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는 소독 불가침 조약의 희생양이 되었다. 서쪽은 나치 독일, 동쪽은 소련군이 점령함으로써 또 다시 분할 통치를 당하게 된 것이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대조국 전쟁 때는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영국, 프랑스 측으로 들어가 나치에 저항했고, 소련 편을 들어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외에 나치에 협력한 상당수의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소련과 싸우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측으로 들어가 나치에 저항한 폴란드인들이 반이라면, 나치에 협력하여 소련과 싸운 폴란드인들은 40%, 고작 10% 정도만이 소련과 협력하여 나치에 저항했던 셈이다. 그 폴란드인의 절반도, 조국인 폴란드가 소련이 아닌, 영국이나 프랑스의 힘으로 독립되기를 원했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폴란드를 나치에서 해방시킨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다시 폴란드 지배했고, 결국 소련이 배경이 되어 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폴란드 입장에서 독일은 50~100년의 원수라면 러시아는 3~400년 넘는 원수로 여겼다. 같은 슬라브계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언어 또한 어느 정도 통한다는 부분이 있지만 가장 서로 적대시했고,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동구권 블록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의 제1 가상 적국이 되었다. 그래서 폴란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했으며 미군 또한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다. 최근에는 2010년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가 발생하면서 러시아와 마찰이 생겼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기념행사에서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 또한 맞불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역할 문제와 관련해 폴란드를 비난했다. 2020년 8월 3일에는 폴란드 정부가 가즈프롬에게 과징금 5700만 달러(약 681억 5천만 원)을 부과해 러시아의 반발을 샀다. 2021년 1월 후반에 러시아 정부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체포하자 폴란드는 러시아를 대상으로 대러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러시아가 독일, 폴란드, 스웨덴 외교관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폴란드도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난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금과 물자를 적극 지원했다. 2022년 4월 15일에 러시아는 키예프 외곽의 용병 군사시설을 타격해 폴란드 용병 30명을 사살했다. 2023년 4월 29일. 폴란드가 러시아 외교관 자녀들을 위한 고등학교 건물을 대상으로 전격 압류 집행을 했고,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폭발에 어느 정도 일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폴란드는 지속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 및 강경 조치와 적대감을 표시했으면 러시아를 꾸준히 도발했다.그리고 지난 9일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 영공을 여러 차례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F-35 전투기와 폴란드 전투기가 즉각 출격해 드론을 요격하여 떨어뜨렸으며 방공망은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공군은 텔레그램을 통해 드론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폴란드 동남부 지역 자모시치 시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폴란드 영공에 얼마나 많은 드론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드론의 수가 적거나, 아님 자작극일 가능성이다. 이를 판단하는데 있어 나토 측이 밝힌 견해는 “러시아 드론 6∼10대가 폴란드 영공에 침입했고 초기 정황상 ‘고의적 침범’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공격으로 간주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고의적 침범'으로 보인다면서 '공격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니 침범 자체가 공격인데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러시아가 과연 드론을 보냈는지, 아니면 자작극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만약 러시아가 진짜로 보냈다면 왜 보냈는지 등은 아직 알 수 없다. 폴란드는 2022년 폴란드 미사일 피격 사건을 겪은 바 있고, 2023년부터 러시아가 샤헤드-136 드론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 남부와 접하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 지역에 드론이나 미사일 추진체가 불시착하는 일이 드물게 발생했었기에 이번 일 또한 그리 심각히 볼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작극일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지만 러시아가 보냈다 해도 상관없다. 나토의 방어력을 떠 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동안 꾸준히 러시아를 도발한 폴란드에 대한 일시적 경고일수도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나토가 여기에 대응하면서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를 말하지만 난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다. 이같은 일로, 3차 대전은 가장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한편 폴란드 국내로 봊면 양대 정당인 법과 정의당(Prawao i Sprawiedliwość, PiS)과 시민연단(Platforma Obywatelska, PO)이 번갈아 가며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지율이 양당 모두 겨우 30%를 넘거나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말인즉, 지지율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폴란드는 이전부터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지율이 떨어지면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적인 수단을 많이 동원해왔다. 특히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은 지지율 높이기에는 최적인 단골메뉴나 다름 없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폴란드 대부분의 국민들은 러시아를 주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EU 국가 전체적으로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이 가장 먼저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이는 EU 각국의 여당들에 대한 지지도 대폭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끌어올릴 수 있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EU나 나토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말로만 하고 실질적인 대응에 미온적인 것은 경기 침체로 인한 정치적인 위기의 대한 책임을 오로지 러시아에 돌리고 그로 인한 EU 시민들의 결집을 위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칼럼
    • Nova Topos
    2025-09-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