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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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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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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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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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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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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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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2025년 말 세계는 전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불안정한 국면에 놓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중동과 동북아에서도 긴장이 누적되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식 거래외교로 유럽과 거리를 두며 변수가 되고, 중국은 유연한 이중전략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유럽은 분열과 재무장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은 외교 복원에 성과를 냈지만 남북관계는 정체돼 있다. 국제정치는 가치보다 이익이 우선되는 선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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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2025년의 마지막 즈음, 2026년의 국제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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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 본 글은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 사회에서의 왜곡된 이해를 짚어보고, 현대 자유주의가 직면한 이기적 개인주의와 양극화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통해 개인주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을 진단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기 진실성(본래성)의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타인과의 연대 및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상호 인정과 공정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파편화와 배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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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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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 2025년 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세 속에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영토 문제와 병력 제한 등 핵심 쟁점으로 진전은 더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나토 가입 유보안을 제시했고, 마이애미 실무 협상이 향후 전개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유럽의 무기력함 속에 동아시아는 중국-일본 간 갈등이 고조되며, 한국은 북러 밀착과 미중 갈등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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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협상, 이후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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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 러시아가 쿠릴열도 남단 이투루프·쿠나시르 섬을 대규모 군사도시로 개발하며 러일 영토 갈등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근거해 일본은 여전히 4개 북방도서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러시아는 경제특구 지정과 군사기지 조성으로 실효 지배를 강화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국내 정치 결속과 외교 전략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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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카이치 총리가 훗날 문제 삼을 가능성 높은 러시아 지배하의 쿠릴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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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
- 프랑스 대법원이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2년 집행유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을 선고하면서 2027년 대선 출마는 불가능해졌다. 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관할과 형법 적용의 적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크롱 정부의 정치적 영향이 작용했다는 ‘정치 보복’ 의혹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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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국가에 10% 이상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세계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46%, 캄보디아 49%, 태국 36% 등 동남아 주요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중국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생산기지에서 ‘라벨갈이’ 수출을 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베트남은 이에 나이키 등 미국 기업에 대한 보복관세를 검토 중이다. 이번 관세전쟁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미중 균형과 인도·태평양 전략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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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관세율 인상에 따른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시아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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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역사상 최대 미스테리 사건 헤럴드 홀트(Harold Holt, 1908~1967) 총리의 실종
- 호주에서 수많은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당시 현직 총리인 헤럴드 홀트(Harold Holt, 1908~1967) 총리의 실종 사건이 아닐까 싶다. 홀트는 1908년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주 스텐모어에서 토마스 홀트와 올리브 홀트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년으로 성장한 이후 멜버른의 퀸즈 칼리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한 홀트는 1930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29년 뉴욕발 대공황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는 것이 늦어지기도 했지만 안정된 일자리에 취직함과 더불어 1936년에는 사업 파트너의 딸인 로라 트링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생활이 점차 안정을 찾게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해럴드 홀트는 대공황의 여파로 1931년에 창당되어진 보수주의 정파 호주연합당에 입당했다. 1934년의 호주 연방 선거와 1935년 3월의 선거에 연이어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35년 8월의 포크너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공급개발부 장관, 과학산업연구부 장관, 공군 및 민간 항공부 장관, 노동행정부 장관을 역임하고, 어린이 세금 감면을 실시한 홀트는 1945년 호주연합당이 해체되자, 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치 인생을 이어갔고 1949년 포크너 선거구를 떠나 히긴스 선거구에서 다시 한 번 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노동행정부 장관을 또 한 번 역임했다. 그리고 이민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6년엔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홀트는 경제 정책을 세우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이어 경제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1966년까지 장관직을 연임했다. 또 1966년 1월 27일에 호주 연방의 제 17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홀트는 호주 총리로 일하며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철폐하는데 앞장 섰다. 이후 호주 예술 위원회를 설립하여 호주의 문화, 예술을 이민자 컨셉으로 완전히 정착시키는 성과를 세운 바 있다. 그는 10진법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호주 파운드를 현재의 호주 달러로 교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을 도와 호주군을 파병했다. 서방 국가들 대다수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가운데 국공내전 이후 대만 주권 미정론을 구실로 마비되었던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해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독보적인 친서방 행보를 보였다. 국공내전 이후 주중 호주 대사관은 중국에서 철수했고 대만에 추가로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주 호주 대만 대사관은 철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대사가 임명되지 않으면고 영사만 주재하는 모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중공과의 수교가 끊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장개석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호주가 중국국민당 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대만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6년의 연방 총선에서 국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압승했으며 1967년 초 부터 경제 무역 정책에 대하여 연정 내부에서 반대 의견이 생기면서 당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지 시작했다. 이어 시드니와 브리즈번 거리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신인 정치인의 연설을 방해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10월에는 소속당인 연합당의 상원 의장이 VIP용 비행기를 남용한 것에 대해 이에 대한 홀트 총리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결국 홀트 내각은 1967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참패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홀트의 형편없는 지도력과 건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가 시작했다. 그러던 1967년 12월 17일 일요일 아침, 홀트는 그의 이웃이자 동시에 불륜 상대인 마저리 길레스피, 그녀의 딸 바이너, 딸의 남자친구 마틴 심슨, 길레스피 가족의 친구인 앨런 스튜어트 등과 함께 빅토리아 주 포인트 네핀에 위치한 셰비엇 해안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당일 오전에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사나웠음에도 불구하고 홀트는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갔다. 홀트는 유년 시절 때 수영을 배운 바 있었고 고등학생 때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과신한 나머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의 시야에서 곧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는 호주에서 대단히 큰 일로 현직 총리가 실종된 사건이라 매우 중대하게 다루어졌다. 이후 오후 3시에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가 들어와 빅토리아 주 경찰이 해안경비대와 함께 수색을 하게 된다. 하지만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인해 수색에 난항을 겪으면서 12월 20일에는 수색을 중단하게 된다. 이어 다시 수색을 재개했으나 경비함정과 헬리콥터, 잠수부 등을 동원한 얼마 간의 해상 작전 끝에 결국 호주의 해안 경비대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1968년 1월 5일에 수색을 종료하게 된다. 그렇게 가족들은 홀트 총리가 죽었다 간주하고 12월 22일에 장례식을 멜버른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가지게 된다. 당시 이 때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었다. 호주는 대한민국의 우방 중 하나였으며 6.25 때 파병국이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한국과 호주 모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던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수영선수 출신이어서 수영 실력이 월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실종 직전까지도 어딘가에서 수영하다가 죽을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더불어 수영에서 치명적인 어깨의 부상으로 인해 모르핀을 처방받았던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홀트는 각종 지병이 겹쳐, 수영 도중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이 주류로 나타난다. 그러나 호주의 대중 매체들은 홀트가 총리로서 삶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가능성에 타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2007년에는 홀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기자가 홀트가 자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부 현지 전문가에 의하면 상어에게 잡아 먹혔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작가 앤서니 그레이는 “홀트가 중국의 스파이”라며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웠던 홀트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잠수함을 타고 중국에 다시 돌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생전 홀트의 대중국에 대한 정책을 볼 때 앤서니 그레이의 의견은 호주 국내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홀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중국 요리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련이 파견한 군사 고문단에 섞여 들어온 KGB, 내지는 소련군 첩보부대원들이 북베트남으로 끌고 갔거나 다시 거기에서 소련 본국으로 끌려가 굴락에 감금당해 그곳에서 죽었다는, 천안함이 잠수함과 충돌해서 침몰 되었다는 설과 동급인 황당한 가설도 재기 되었다. 이 외에도 홀트가 마약중독자로 약에 취해서 익사했다는 설도 등장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호주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는데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CIA가 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설도 나왔다.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 예전부터 UFO가 자주 출몰했던 지역이라 외계인이 납치한 후 생체실험하고 살해당했다.”라는 등 온갖 음모론들이 등장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아마도 서핑 중 갑작스러운 이안류 등 파도의 변화로 쓸려가 그대로 익사했거나 그런 상태로 상어의 공격받아 죽었을 것이라는 게 가장 타당한 설이라 본다. 실제로 호주 앞 바다에는 어디든 상어가 많이 출몰하고 상어는 서퍼를 물개로 착각해 자주 공격한다. 특히 당시 상어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던 것도 호주 해안가의 특징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와 같은 몸의 건강 이상으로 즉사 후 시신도 바다로 가라앉으며 유실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태평양 바다를 모두 뒤져도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을 싣고 있다. 당시 현직 총리가 갑자기 실종된 전 세계 역사로 볼 때 몇 없는 사건이고 호주에서 풀지 못한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도 그의 실종을 두고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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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역사상 최대 미스테리 사건 헤럴드 홀트(Harold Holt, 1908~1967) 총리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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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부터 제정된 한국의 시내 주행속도 제한 50km/h에 대한 비판적 견해
- 1990년대부터 도시부 제한속도 50km/h로 하향한 덴마크, 독일, 호주 등 지역에서는 사망 교통사고가 12∼24%까지 감소했다. 특히 호주 빅토리아 주는 사망·중상사고가 많게는 40%까지 감소한 지역도 있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2017년 부산시 영도구에서 시범실시를 통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24% 감소하는 성과를 보였으며, 2018년 시행한 서울시 종로 일대도 보행 부상자가 2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호주 등지에서는 교통사고 사망자 제로화를 목표로 기존 제한속도(50km/h)를 40km/h로 더 낮추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 보면 모든게 통계적인 부분을 근거로 들고 있는 숫자놀음에 불과한 것들로 책상에 앉아 인터넷 몇 개 검색하여 찾아본 어설픈 통계치인듯 싶다. 그런데 유럽의 선진국들은 애초부터 시내를 빠른 속도로 주행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럽의 도로들은 폭이 좁은 곳들이 많으며 노면 위에는 트램(전차)도 다닌다. 마지막 사진 같은 경우가 보편적인 유럽 도시들의 모습인데 애초부터 속도를 올리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제한 속도를 줄여서 사망 교통사고가 감소했다는 객관적인 참고자료 또한 없다. 이런 상세한 통계는 유럽에서 내는걸 가져 오는건지 직접 국토부에서 계산하는건지 알 수 없다. 다만 내 보편적으로 북유럽 국가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위스를 기준으로 보았는데 속도가 줄어서라기보다는 운전자들의 보행자, 상대 차량에 대한 배려 인식이 큰 것으로 그 요인이 되고 있다. 속도 좀 높아도 사고 안 날 나라는 사고 안 나고 속도 아무리 줄여도 사고 날 나라는 사고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의식이 문제다. 유럽의 선진국 뿐 아니라 왠만한 나라들은 도로 위에 차량이 아닌 사람, 즉 보행자가 먼저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설령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건너더라도 그 모습을 보고 크락션을 울리며 무섭게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서행을 한다. 보행자가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있었던 불가리아의 경우, 차가 사람을 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3천 유로 이상의 벌금이 부과된다. 사람 상태에 따라서 실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 불가리아 평민들의 한 달 수입이 4~500유로 (한화 약 5~60만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3천 유로는 대단히 큰 돈이다. 한국의 경우, 빨리빨리의 인식이 있다. 그만큼 성미가 급한 사람이 많고 다혈질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저 나만 빨리 가는게 우선이고 자신의 성미를 건드리면 보복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라이트 켜지 않고 마구 진입하는 차량들도 존재하며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차량들도 더러 있다. 우리는 과속카메라를 보면 빨리 달리다가도 감속하지만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를 빼고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운전자들의 안전불감증과 나 하나면 어때? 하는 인식이 팽배해져 있는 상태에서 속도를 줄인다고 사고가 안 날까? 그저 그 나라 인터넷이나 검색해서 통계적인 수치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탁상행정에 불과하다. 이래서 공무원들이 해외 연수 오면 절대로 호텔에서 재우거나 차량을 이용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 같은데서 재우고 현지인이나 각 나라 사람들과 대화하게 만들어야 한다. 차량은 현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만들고 직접 본인들이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해야 실용적인 정책이 만들어진다. 그런게 제대로 된 공무원 해외 연수이다. 잠자리는 싼 호스텔 이용하고 대중교통 이용하니 비용 저렴하고 세금 절약할 수 있어 좋고 얻어가는 것은 많으니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수의 공무원들은 해외 연수가서 대접이나 받을려고 하고 현지에서 현지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현지 정부 시책도 본인들이 직접 체험을 해보고 한국에 적용해도 되겠는지 아닌지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는 공무원을 한 명도 본적이 없다. 내가 해외 돌아다니는 유명한 호스텔러니까 한 명도 본적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어설프게 해외 연수 가서 대접받을거 다 받고 선진국이니까 무조건 괜찮아식으로 체험과 검토없이 도입만 하려하니 한국이 무늬만 선진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애초부터 현지 정책을 벤치마킹하러 갔다면 본인들이 체험해서 적용해도 되겠는지 판단하고 토론하면서 알아가야지 이런 식의 탁상행정은 세금 낭비에 불과할 뿐, 공무원 연수라는 거창한 간판에 비하면 아무 의미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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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부터 제정된 한국의 시내 주행속도 제한 50km/h에 대한 비판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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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특수군사작전, 호주군과 에뮤 군단의 한 판 승부
-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런 식의 특수군사작전이 역대 기록에 얼마나 있는가 봤더니 마침 호주에서 1932년에 벌어진 호주군이 에뮤(Emu)를 상대로 한 특수군사작전이 존재하고 있었다. 에뮤는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타조 같은 동물로 캥거루와 함께 호주 국장에도 들어간 동물로 알려져 있다. 생김새나 생태는 아프리카 타조나 남미 레아 같은 다른 평흉류 새들과 비슷하지만 타조나 레아에 비해 날개가 매우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발톱도 1개고 긴 목의 중간부분까지 깃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과일, 작은 동물, 곤충, 풀뿌리와 곡식을 즐겨 먹으며 다른 타조류처럼 발톱이 매우 튼튼하고 최대 60km/h의 속력으로 달릴 수 있으며 수명은 30년 정도 산다. 호주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에뮤와 호주 군대는 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 1932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은 호주에서는 배운 기술이 거의 없는 퇴역군인 다수가 정부로부터 농경지를 받아 농부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삶을 꾸리게 된다. 문제는 서부 지역의 벌판에 농경지들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토착 조류였던 에뮤의 영역을 침공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과 조류의 갈등이 생겼다. 농부들이 농작물을 섭취하는 토끼 같은 작은 야생 동물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쳤지만, 타조와 비슷한 에뮤 무리들은 그와 같은 울타리 따위는 큰 몸으로 들이받아 가볍게 부수고 들어와 농경지를 휩쓸며 농작물들을 망치기 일쑤였다. 특히 그 해 9월은 기록적인 대기근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곤경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 대기근"이 발생했던 시기였기에 어떤 기후,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겪던 환란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에뮤 무리들 또한 먹이가 부족한 상황에 시달려 농경지에 지속적으로 침입해 밀밭을 헤집어 놓았다. 실제로 당시 신문에서는 이들을 에뮤 군단(Emu Corps)이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당시 에뮤와 맞서 전쟁을 벌인 농부들과 군인들은 이 표현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에뮤들이 한두 마리였다면 밭을 초토화시키는 멧돼지 정도 수준으로 가볍게 넘기겠지만, 멧돼지와는 달리 에뮤 군단의 수가 2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이고 이들이 조직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농부들은 거대한 에뮤 군단을 목격하고는 처음에 관공서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에뮤의 수는 지방 관공서가 인도적으로 통제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이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력이 있던 농부들이 기관총으로 적을 섬멸시킨 경험이 있기에 큰 조류인 에뮤정도야 잘 처리할 것으로 생각해 정부에 군 파병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심각성을 보고 받은 호주 정부는 의회에 이를 상정해 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당시 호주 국방장관인 조지 피어스(George Pearce 1870~1952)가 대민 봉사 겸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한 사격 훈련을 목적으로 루이스 경기관총 2정과 탄약 1만여 발을 지참한 병력을 파병했다. 부대는 왕립포병분대가 10월 말 출정했으나 10월 31일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일정을 미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예정된 일정보다 늦게 도착한 군대는1932년 11월 1일부터 11월 9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호주 서부에서 에뮤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새 때문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고 동물보호단체에 어마어마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만, 당시에는 대기근으로 인해 식량난도 심각했기 때문에 신문 1면에 에뮤와의 전쟁은 대서특필할 만한 사건이었다. 지금이라면 동물학대로 인식하여 대서특필이 될 부분이다. 물론 대영제국 연방 문화의 특유로 과장하는 습성을 이용햐 에뮤 대전쟁(Great Emu War)이라는 명칭을 붙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호주의 경우는 현대에도 동물원 코끼리가 탈주한 얘기가 일간지 1면에 실릴 정도로 동물과 연관된 사건이 대서특빌 되는 것이 이상한 문화가 아니다. 처음에는 기관총이 있기 때문에 큰 새 1만 마리 정도는 쉽게 토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에뮤는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군용 트럭으로도 쫓아가기 힘들었고 거대한 체구에 지방으로 구성된 피부가 생각보다 단단하여 총에도 쉽게 죽지 않았다. 에뮤와의 대결에서 사람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오히려 고전했던 것이다. 기관총을 사람끼리 전쟁하는 것처럼 원거리에서 사격해보니 시속 60km에 달하는 속도로 달리는 에뮤를 맞추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다. 물론 에뮤도 동물이기 때문에 머리나 다리에 총을 맞으면 죽긴 하지만 사람보다 작은 에뮤의 머리와 빠르게 뛰는 다리를 멀리서 저격하는 것도 아니고 기관총으로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기관총 소리에 놀라 떼를 지어 도주하는 일이 빈번해 기관총의 장점인 연사력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다. 계속 고전하자 호주군은 방법을 바꾸어 트럭에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테크니컬을 만들어 기동사격으로 에뮤들을 섬멸하기로 했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강력한 무기였던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기갑장비를 대동한 호주군이 에뮤 군단을 상대로 처음에는 무리 없이 진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변수가 다양하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트럭은 출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용맹한 에뮤 한 마리가 화가 나서 육탄으로 돌격하는 바람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또한 일반 트럭은 군용차량과 달리 험지 주행이 쉽지 않아 길이 없는 곳으로 다니기 힘들고, 결국 길이 없는 곳으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에뮤를 포위하기에는 어려웠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에뮤 군단은 게릴라 작전까지 펼치면서 호주군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에뮤 군단이 소규모로 갈라져 곳곳의 농작물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에뮤가 지휘관 역할을 하여 호주군을 감시하여 무리에게 신호를 주어 흩어지게 했고 에뮤 한 무리가 인간에게 공격을 받으면 다른 무리가 다른 곳의 열린 밀밭을 유린하여 농작물을 뜯어 먹었다. 이와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자 호주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타 동물보다 못하다 여겼던 에뮤의 지능이 생각보다 높았던 것이다. 호주군은 지원받은 탄약 1만 발을 거의 다 사용했다. 그러나 2만 마리의 에뮤 군단에 비해 몇 백 마리 정도밖에 못 잡았고 공식집계로는 12마리 밖에 잡지 못하는 대참패를 기록했다. 게다가 당시 동물권 단체 또한 이 전쟁에 대해 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펼치며 전국 도시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11월 8일 의회가 전쟁의 지속에 대해 난색을 표하게 되었으며 다음날인 11월 9일 특수군사작전 종료일에 맞춰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이 종료되었다. 당시 군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적의 전차보다도 상대하기 훨씬 힘든 적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사실 이 군사작전은 트럭 1대에 기관총 2정만을 갖춘 1개 분대의 병사 만이 동원된 그저 가벼운 동물 소탕전에 불과했다. 그것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무기를 손질하고 에뮤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역할을 했었다. 이는 전쟁이 거의 없는 호주라는 나라 특성상 야생 동물 잡겠다고 1만 명 단위의 병력을 투입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만 보낸 것이 패착이었다. 더구나 군사작전의 목적 또한 에뮤를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에서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간과 다른 병법을 사용하는 에뮤들의 움직임은 역대 인류 역사상, 군사학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어디로 도주할지 모르는 에뮤들을 확실하게 도주경로들을 파악해야 했는데 그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엄연히 군대에 기관총까지 투입하고도 적군이 아닌 야생동물 무리를 몰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불어 워낙 에뮤들이 잘 도주하고 들이 받을 때는 전 속력으로 달려와 특럭과 기관정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이는 매우 어려운 군사작전인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호주군이 윤리나 자연과의 공존, 비용 등등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사단급 병력을 투입해 전쟁을 치렀다면 에뮤들을 몰살시켰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쟁 이후 농부들은 아예 에뮤에 대비하기 위해 울타리를 거금을 들여 설치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지만 에뮤는 그와 같은 인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뭄이 들 때마다 울타리를 넘어와 꾸준히 농작물을 초토화시켰다. 이에 호주군도 그때마다 불려나와 에뮤 무리와 전투 및 추적을 반복했는데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에뮤 전쟁 이후로 호주 정부는 농부들에게 에뮤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직접 에뮤 소탕에 필요한 탄환을 지급했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57,000마리 이상의 에뮤를 소탕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부가 현상금 제도를 도입하면서 1935년에서 1960년까지 사냥당한 에뮤 개체수는 284,000마리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이후, 현재는 야생 에뮤들이 동물 보호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인간과 잘 지내고 있는 편이다. 타조와 닮은 독특한 외형 때문에 관광 자원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있어 우선 관리와 공존에 성공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진짜 전쟁은 토끼들과의 전쟁이 최악의 작전으로 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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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특수군사작전, 호주군과 에뮤 군단의 한 판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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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인의 경계와 인종차별의 배경들
- 호주가 영국 연방 자치국가로 독립한 것은 1901년 1월 1일이지만 법적 관념으로 ‘호주인’이 등장한 것은, 즉 ‘호주 시민(Australian citizen)’을 의미하는 ‘호주인’의 범주가 법으로 명문화된 것은 1948년 12월 21일 제정된 <국적시민권법(Nationality and Citizenship Act)>이 발효되기 시작한 1949년 1월 26일 이후부터이다. 이 법 발효 이전까지 호주인들은 호주연방 독립 이후에도 법적으로는 ‘호주 시민’이 아닌 ‘영국 신민(British subjects)’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영국인들, 그리고 다른 영연방 소속 국가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적(British nationality)’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관념의 등장과 별도로 하나의 사회적 관념으로서 ‘호주인’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식민지 개척 초기 호주 정착민들이 대부분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해 온 사람들 즉, 죄수로 유형 온 사람들이거나 또는 자유 정착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영국인’으로 생각하였으며 호주 사회를 영국계 백인 단일인종으로 이루어진 단일 문화권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식민지 개척 초기 과도기를 거쳐 1820년대에 들어 서면서 뉴 사우스 웨일즈 식민지 사회는 이미 사회적으로 계층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 정착민’들과 ‘죄수 출신자’들 사이에 커다란 사회적 구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실제로 자유 정착민들은 자신들이 유배 죄수들 또는 죄수 출신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였고 스스로를 ‘순종 메리노’나 ‘특권 계급’으로 불렀다. 반면 죄수 출신자들을 ‘형기 만료자’라고 부르며 사회적으로 멸시하고 상거래와 일상생활 등에서 차별대우 하였다.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해온 자유 정착민으로 당시 호주 유력지인 모니터(Monitor)지의 편집장이 된 홀(E. S. Hall)은 죄수 출신자들을 비하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하였다. “이제 더 이상 영국인처럼 생각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격분할 수 없는 그들은 불쌍한 노예근성을 가진 종족이 되었다. 그들의 영혼은 매질과 족쇄와 지하 감옥, 그리고 호주식 이단 심문이 그들을 흑인 수준으로 떨어지게 하여 이제 더 이상 영국인이 아닌 호주인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1820년대는 자유 정착민 출신 식민지 기득권층이 자신들을 제외한 대다수 식민지인들을 비방하며 자신들을 죄수나 죄수 후손들과 엄격히 구분하려고 시도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러자 죄수 출신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실례로 호주 태생의 웬트워스(W. C. Wentworth)는 죄수 출신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며 <오스트레일리안(Australian)>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였고 신문 지면을 통해 죄수 출신자들을 사회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며 억압하는 기득권층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구체적으로 웬트워스는 1825년 <오스트레일리안>지에 “달링 총독 부임 환영사”를 발표하면서 자유 정착민들에 대한 토지 불하가 호주 태생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1826년에는 자본을 가진 자유 정착민들보다 식민지에 먼저 정착한 형기 만료자들이 식민지의 열매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식민지 사회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던 죄수 출신자들과 호주 태생인들 사이에 일고 있던 자존심을 반영한 것으로 이후 “뉴 사우스 웨일즈에서나 밴 디멘즈 랜드(Van Diemen’s Land)에서나, 모든 백인들은 출생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하며 “호주 대륙은 그곳에서 출생한 자와 그곳을 개척한 죄수들의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죄수 출신자와 자유 정착민 기득권층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그러나 자유 이주민이 늘어나고 죄수 유형이 줄어들면서 1840년대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851년 빅토리아와 사우스 오스트랄리아가, 그리고 1856년 밴 디멘즈 랜드에서 개칭한 태즈메니아와 1859년 퀸즈랜드가 뉴 사우스 웨일즈로부터 분리되어 독립 식민지가 되면서 독립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 서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지방주의’ 관념이 자라나게 되었다. ‘호주인’의 범주에서 ‘유색 인종’을 배제하고자 했던 호주인의 경계 설정방식은 이주자뿐 아니라 영국인들의 호주 이주 이전 수만 년 전부터 호주에 정착하고 살았던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에 대한 배제로 이어졌다. 특히 독립 이전 식민지 시기부터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은 애버리진을 ‘소멸할(Doomed)’, 또는 ‘바람직하지 못한(Undesired)’ 인종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억압하였다. 실례로 빅토리아 주는 1869년에 이미 <애버리진 보호법(Aboriginal Protection Act)>을 제정하여 애버리진의 일자리와 거주지뿐만 아니라 누구와 결혼할지와 같은 사적인 결혼 문제까지도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애버리진 보호위원회(the Board for the Protection of Aborigines)’에 애버리진 어린이들을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 양육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애버리진을 인종적으로 소멸시키고자 하였다. 연방 독립 이후 ‘호주인’들은 자신들을 “호주인인 동시에 영국인”으로 규정하며 호주 사회를 영국계 백인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진 단일 문화권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Policy)’로 불리는 강력한 이민 억제 정책을 채택하여 ‘유색 인종(Coloured races)’, 특히 중국인과 태평양 도서 출신자들의 호주 이민을 억제하였다. 실례로 1901년 제정된 호주연방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 1901)>은 ‘유색 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명시적 규정은 없었으나 구술시험이나 제조업 취업금지 조항 등을 통해 특정 인종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제한하였다. 특히 이 법안은 호주로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항 시 유럽에서 통용되는 언어 가운데 하나로 50자 받아쓰기 시험을 실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입국하고자 하던 중국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호주 정부는 1901년 12월 17일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 법(Pacific Island Labourers Act)>을 제정하여 1904년 3월 31일 이후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들의 호주 입국을 금지하였으며, 이미 호주에 입국한 자들도 1906년 12월 31일 이후에는 호주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인식되었던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그런 배경으로 아 쉐웅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아 쉐웅은 1881년부터 1901년까지 두 번의 짧은 중국 방문 기간을 제외하고 빅토리아에 계속 거주한 중국계 이민자로 빅토리아에서 귀화(Naturalization)한 후 1901년 중국에 가서 약 5년 간 지내다 1906년 빅토리아로 돌아올 당시 1901년 제정된 연방정부의 <이민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에서 ‘이민자’에게 요구하는 받아쓰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입국을 거절당하고 감금당했다. 이에 아 쉐웅은 자신은 ‘이민자’가 아니라 ‘호주 국적(Australian nationality)’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민제한법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빅토리아 최고법원(The Supreme Court of Victoria)에 인신보호(Habeas corpus)를 신청하였고 커센(Cussen)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아 쉐웅에 대한 석방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 사건은 호주연방 고등법원에 상고되었고, 호주연방 고등법원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 국적과 별개로 존재하는 호주 국적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쉐웅에게 <이민제한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판결, 당국에 사건 취하(Abandon)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중국인이 처음 호주로 유입된 시기는 호주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던 1851년으로 이후 20여 년 동안 약 5만 명의 중국인들이 호주로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점차 숫자가 늘어났다. 빅토리아 지역 금광으로 들어온 중국인 숫자는 1854년 약 4천 명 수준에서 1857년 23,623명 수준으로 그리고 1859년에는 42,000명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이들 중국인들은 백인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고 이 와중에 중국인은 비도덕적이고 이교도이며 아편을 피울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금을 중국으로 가져간다는 편견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호주 식민지 정부들은 18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이주를 제한하려는 조치들을 취했다. 실례로 빅토리아 입법부(Victorian Legislative Council)는 1855년 중국인 이주를 제한하기 위해 중국인을 싣고 오는 선주들에게 한 사람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으며 1881년에는 이에 더해 중국에서 입항하는 배에 대해 100톤 당 1명씩 중국인 이민을 허용하는 내용의 <중국인법(Chinese Act)>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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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인의 경계와 인종차별의 배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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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투탕카멘의 향이 서려 있는 도시, 룩소르
- 수 많은 전설과 고대 역사의 보고라 불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1,000여 km 떨어진 고대 도시 국가의 수도인 테베는 현재 룩소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나일강을 끼고 있으며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고 따라서 고대 이집트의 향, 향료에 대한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룩소르의 서쪽 사막 계곡에는 아크로폴리스라 불리는 왕가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는 무려 3,000년이라는 긴 역사적 시간에 묵혀져 있다가 1922년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라는 고고학자에 의해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던 왕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황금 마스크의 주인공이면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18세에 사망하였던 고대 상이집트의 18대 파라오인 투탕카멘(Tutankhamen)의 능묘인 것이다. 파라오의 어원은 고대 이집트어 'prâ'에서 나타난 단어로, 모음을 붙여 'Perâa(페르아)'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고대 이집트의 문자 체계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일부 언어학자들의 추측에 불과하다. 이집트어를 계승한 콥트어로는 '퍼로(pərro)'로 읽는다. 뜻은 '큰(â)집(pr)', '궁정'이나 '왕궁'을 의미하고 있다. 투탕카멘의 능묘에서는 백합유를 이용한 사그디, 쿠아무이, 몰약, 카네라와 벤오일을 원료로 한 베토피움, 헤나의 꽃 향유를 이용한 녹색의 향료 시푸리늄을 섞어 만든 연고 상태의 향료인 향고를 만들어 담은 아름다운 설화 석고인 앨러배스터(Alabaster)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물론 3,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향은 파라오가 가졌던 귀한 향내를 찬란하게 전하고 있으며, 인류의 가장 오래된 향의 실존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까지 연결해주고 있다. 기록상에서 나타난 최초의 향료는 B.C 2,500년 경에 이집트 제5대 파라오 사훔(Sahum)이 훈트 지방을 여행하면서 80,000포대의 물량을 사왔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제1대 파라오 시대에 만들어진 석관에 “가축을 도살하고 산양을 잡아 제물을 마련하고 불에 향료를 던져” 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는 것과 제18대 파라오 투탕카멘의 능묘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면 고대 이집트 인들은 주로 종교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웠고, 시신을 보존하여 미이라로 남기기 위해 방부제로 향료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수지를 이용하여 향료를 제조하는 것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향료를 애용했을 뿐 아니라 향료를 만들고 담그는 지식을 미이라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이집트 역사 연구로 유명한 아메리카 대학의 살리마 이크람(Salima Ikram) 교수는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의 서적에서 여러 가지 향료에 관한 기록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서적에는 몰약, 육계, 갈바눔, 수지 등을 사용한 많은 향료 물질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었고, 구취 제거에 사용하는 향정 처방도 있었다. 이에 이집트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집회가 열리곤 했는데, 그곳에서는 신체에 향을 뿌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향료가 들어 있는 사탕과자나 음료수, 셔벗 등이 제공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자들은 향료가 들어있는 물로 목욕을 하고, 남자들은 향료가 들어있는 연고를 발랐으며 좀 더 여유있는 가정에서는 향기가 새어 나와 향수 냄세로 뒤덮이게 했다. 물론 축제가 열리면 거리에서 향을 피웠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향기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능묘에서 발견된 향고는 매우 끈적한 물질로서, 손에 묻히면 체온으로 약간 녹는다고 전해진다. 3,0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향기가 남아 있었는데, 이 향기는 매우 느끼한 냄새로 여겨졌으며 마타릿과 식물의 냄새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감송향(甘松香)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투탕카멘의 향고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강한 방부성을 가진 유향이나 보류성이 좋은 방향성 수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키위(kyphi)라 불리는 조합 향유가 널리 사용되었다. 16가지 성분이 함유되었던 이 향유는 아스파라거스와 카르다몸, 시프로, 덕(Duck), 벌꿀,노간주나무 종류로 알려진 주니퍼(Juniper), 머르, 건포도, 사프란 등으로 만들어졌다. 이 향유들은 정신을 맑게 하고, 기분을 도취시켜 즐겁게 해주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밤의 향료로 애용되었고 심지어는 음식에 이용되어 먹을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제스프리 연구소에서는 한층 더 오래된 비법을 찾아냈다. 육계와 박하, 창포, 향모(香茅), 주안(晝顔), 셰난타스, 렌티스크스, 라우르스, 카시아(Cassia : 육계의 일종) 등을 가각 동량씩 채취하여 건조시키고 분말로 만들어 잘 섞어 놓았다. 그리고 같은 양의 페니키아 두송, 카시아, 헤나, 시프르, 론그스를 일주일 동안 포도주에 담가 놓는다. 그런 다음에 건포도를 5일 동안 포도주에 담가서 테르핀(Terpin) 수지와 봉밀을 섞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을 혼합하여 몰약을 섞은 후 전체를 잘 혼합하여 제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매우 복잡한 비법으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키위 향을 애용하였던 클레오파트라는 몸 전체에 시돈에서만 출품되는 감송유를 발랐으며, 양손에 바른 향료는 한번에 400데나리온이었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에서 1데나리온을 기준으로 볼 때 성인 1명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육계와 감송향을 주성분으로 하는 향료를 애용했다. 또한 이집트의 항구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거대한 향료 공장이 있어 다양한 향료 제조가 이루어졌으며, 다른 나라와의 교역도 매우 활발했다. 특히 산뜻한 장미향과 시프르 향, 백합향은 남성용으로 많이 애용되었고, 향의 지속성이 강한 몰약과 메가레이온, 감화, 박하향, 감송향 등은 여인들을 위한 향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알코올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기제로서 불휘발성 기름이나 포도주를 이용했다. 게다가 좋은 포도주를 사용하면 한층 부드럽고 좋은 향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 고대 이집트 향료의 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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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투탕카멘의 향이 서려 있는 도시, 룩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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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이 모여 형성된 나라 호주?
- 대항해시대라고 말하는 160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한 선박이 호주 북쪽의 케이프 요크 반도(Cape York)에 상륙하였고 호주 전체 내륙을 탐험하지는 못하고 북쪽과 서쪽 일부만 탐험한 후, 뉴 홀란드 (New Holland) 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뒤 떠나게 되었다. 그 이후 네덜란드는 이곳에 정착하여 식민지의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본국과 너무 먼데다 갖고 있는 순다 열도의 섬들을 관리하는 것에도 힘겨워 케이프 요크까지는 거의 손도 대지 못해 방치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선박들은 가끔씩 이곳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곤 했지만 감히 정착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1660년경 네덜란드 인들은 이 대륙의 북쪽, 서쪽, 태즈메이니아 지역을 묶어서 뉴홀란드를 확대, 개편하면서 식민지화 계획을 세우고 정착하려 했지만 애버리진(Aborigine)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 원주민들은 이들은 5만여 년 전에 호주에 도착했으며,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지만 발달된 기술 없이도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물이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기후가 적합한 동남부 지역에서는 야생 기장을 수확하고 화전을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을 통한 원시적인 농업이 행해졌으며 어장과 수로를 통한 물고기의 양식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 에버리진들은 동남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살았다. 에버리진들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구전되는 신화나 설화, 아니면 고고학적인 유적을 보며 추측할 수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북부 지역의 경우에는 당시로서 발달된 지역인 인도네시아 일대의 국가들과 교류를 했던 사실이 있고 인도네시아의 기록에서도 호주 북부 지역에 살았던 부족들에 대한 기록을 일부 찾아볼 수 있으며, 해삼을 주로 거래한 무역이 주를 이루었다. 이 때 멀리서 청나라와 화교 상인들이 해삼 채집을 위해서 호주까지 방문해 교역했다는 설이 있고 동남아시아 화교들의 해삼 교역이 성행했는데 실제로 명, 청 교체기 당시 동남아시아로 망명한 화교들이 말라카 등을 근거지 삼아 비교적 호주 북부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발전되었다던 북부 지역도 부족국가 이상의 단계까지 오지 못했으며 문자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호주 북부 지역은 그나마 남은 기록으로 어떻게 사회가 돌아갔는지 정도의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남부 지역은 구전으로 남은 신화나 설화 등으로 역사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른바 기록문화 국가의 기준으로 볼 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 1688년 영국의 탐험가인 윌리엄 댐피어가 또 다시 뉴 홀란드에 상륙하지만 영국 또한 이 당시에는 호주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이후 제임스 쿡 선장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이어서 동쪽 해안을 탐험하여 영국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지만 미국의 독립 이전까지는 그다지 중요한 땅은 아니었기에 이 지역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그에 따라서 사회적인 기류의 이상 현상이 감지가 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 범죄 현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범죄들에 영국 정부는 엄격한 법을 시행하여 가벼운 절도죄에도 교수형에 처했고 지속되는 범죄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범죄는 끊임없이 증가했다. 게다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에 기인한 강력한 정치는 오히려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왕정이 복고된 이후에는 가벼운 경범죄에 대해 사형을 면제하고 중범죄 이상에만 사형을 시키는 법 안을 통과시키면서 영국 내 교도소들은 경범죄 수감자들이 넘쳐나게 된다. 결국 영국 정부는 이러한 범죄자들 처리 문제를 두고 고심을 한 끝에 아메리카 식민지로 유배를 보내 그곳을 개간하게 하고 거기에서 개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 영국으로 귀환시킨다는 묘안을 탄생시키게 된다. 결국 아메리카 대륙 또한, 이러한 경범죄자들이 유입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개척을 일구게 되었지만 여기에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과 독립전쟁에 나서면서 결국 범죄수용자들을 수용할 땅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고심 끝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생각했지만 너무 멀었기 때문에 가벼운 경범죄자들 가족들의 반발이 심해 이 또한 무려 10여 년을 더 고심하게 된다. 결국 호주에 경범죄자들을 이주시키는 법안이 상원을 통과하면서 마침내 호주에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1788년 1월 26일 죄수 736명과 하급 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호주에 건너오게 되면서 이들은 아메리카를 개척한 청교도들과 같이 호주의 서쪽으로 개척해 나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이렇게 처음 영국의 함선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시드니 하버라 불리우는 곳으로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 위치해 있는 곳이다. 또한, 영국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척을 시작한 이날을 호주의 날(Australia Day) 로 명명하며 지금까지도 중요한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다. 이와 같이 유럽인들이 이주하여 호주를 개척하고 있을 때 에버리진들과의 충돌이 많았다. 특히 태즈메이니아 지역에는 에버리진들과의 전쟁 및 전염병으로 인해 대다수의 에버리진들이 전멸했다. 호주 원주민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는 수준에서 1920년대 초반에 수만명 선까지 줄어들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그나마 인구가 늘어 60만 명 선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호주 총 인구의 2~3%정도의 수준으로 적은 것이 현실이다. 지금도 애버리진들의 숫자가 적은 빅토리아,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등에서는 애버리진들보다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흑인들이 더 많이 보일 정도이니 이 때 당시의 타격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호주의 초기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의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호주라는 대륙 자체에서 풍화와 침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다보니 금광이 지하 깊숙히 묻혀 있지 않고 지표에 노출된 경우가 많았는데 유럽인들 입장에서는 노천 광산 하나만 발견하면 그냥 길가다 쉽게 돈을 벌었다. 그래서 범죄자들이 아닌 일반 사업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게다가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등에서의 따뜻한 기후는 와인 생산이나 농장운영에 적합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범죄자들은 들어오지 않고 타 유럽 국가들에서의 이민자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에 최초의 아시아 이민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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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이 모여 형성된 나라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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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협약과 영연방 국가의 성립 배경
- 영국의 식민지화 초기 호주와 뉴질랜드는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라는 하나의 식민지하에 있었고 한 명의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1841년 뉴질랜드가 뉴 사우스 웨일스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식민지가 되었고, 1851년에는 빅토리아(Victoria)와 사우스 오스트랄리아(South Australia)가, 그리고 1856년에는 타스마니아(Tasmania)가 기존의 밴 디멘즈 랜드(Van Diemen’s Land)에서 이름을 바꿔 뉴 사우스 웨일즈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1859년 퀸즐랜드(Queen’s Land)가, 그리고 1890년에는 웨스턴 오스트랄리아(Western Australia)가 독립 식민지가 되었다. 웨스턴 오스트랄리아에서는 1900년 7월 31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이후 호주 연방 헌법은 1900년 7월 5일 영국 의회의 승인을 얻고 1900년 7월 9일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의 동의를 얻어 1900년 9월 17일 공식 선포되었다. 이에 호주는 1901년 1월 1일 6개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영국 연방 자치국가(The Commonwealth of Australia)로 독립할 수 있었다. 호주는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영연방 소속 국가로 영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러한 관계는 현재까지도 일부 유지되고 있다. 실례로 호주는 1901년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대영 제국 소속 자치국(Dominion of the British Empire)”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1942년 웨스트민스터 협약(Westminster Statute) 채택으로 영국 의회와 정부로부터 실질적인 법적 독립성을 확보한 이후에도 현재 찰스 영국 국왕을 자국 국왕이자 상징적 국가수반으로 인정해 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협약(Westminster Statute)은 1926년 10월 19일부터 11월 22일 사이 런던에서 개최된 제6차 대영제국 자치국(Dominions of the British Empire) 수상들 간 제국회담(The Imperial Conference)에서 합의된 발포어 선언(The Balfour Declaration)을 기초로 만들어진 협약으로 대영제국 자치국, 즉 캐나다(Canada), 아일랜드(The Irish Free State), 남아프리카(South Africa), 호주(Australia), 뉴질랜드(New Zealand), 뉴파운드랜드(New foundland) 등이 영국(The United Kingdom)과 법적으로 평등한 지위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즉 대내외적 문제에 있어 영국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 지위에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은 1931년 12월 11일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이와 동시에 캐나다, 아일랜드, 남아프리카에 먼저 적용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경우는 호주 의회가 1942년에, 그리고 뉴질랜드 의회가 1947년에 이 협약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비준함으로써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뉴펀들랜드는 이 협약을 채택하지 않은 채 영국의 직접 통치 하에 다시 놓였다가 1947년 캐나다로 귀속되었다. 이 협약 발효에 따라 영국 의회(The British Parliament)와 정부(The British Government)는 더 이상 자치국에 대해 입법권과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자치국 의회와 정부가 자국 문제에 있어 법적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약은 영국의 왕을 협약 채택 국가들의 상징적 국가수반으로 규정하고 있다. 1995년 당시 노동당의 폴 키팅(Paul Keating) 호주 총리는 호주가 아태지역의 일원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호주의 정체를 입헌군주제(Monarchy)에서 공화제(Federal Republic of Australia)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998년 2월 2~13일 기간 동안 공화제 도입 논의를 위한 헌법회의가 정부 임명 대표 76명과 국민이 선출한 대표 76명 등 총 152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상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여 국가 원수로 삼는 공화제 개헌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 개정안이 1999년 11월 6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44.8%의 찬성만을 얻어 부결됨으로써 공화국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과 함께 15개 국가는 다른 ‘영 연방 국가(The Commonwealth of Nations)’와 별도로 ‘영 연방 군주국(The Commonwealth Realms)’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영국과 호주 양국 의회가 1986년 <호주법(Australia Act)>으로 불리는 법안을 통과시킨 이후 영국 의회와 정부가 호주의 입법, 행정, 사법에 간섭할 수 있는 법적 여지는 사라졌다. 현재 호주의 국정 운영과 관련한 실질적 권한은 연방 총리가 이끄는 연방 정부와 각 주 주지사가 이끄는 주정부가 가지고 있다. 영국 연방 총독은 호주 연방 정부 내각의 제청에 의해 영국 여왕이 임명하며 대외적으로 호주를 대표한다. 일반적으로 연방 총독은 여왕을 대행하여 호주를 통치하는 상징적 권한을 행사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 첫째, 연방 총독은 선거 결과 다수당이 없어 내각을 구성할 수 없는 경우, 즉 소위 ‘헝 의회(hung parliament)’ 상황에서 총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둘째, 총리가 의회의 신임을 잃었을 경우 총리를 해임(Dismiss)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셋째, 총리와 장관이 불법적(Unlawful) 행위를 했을 경우 이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넷째, 총리가 하원(The House of Representative)의 해산을 요구한 경우에도 하원 해산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연방 총독의 임기는 특별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5년을 임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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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협약과 영연방 국가의 성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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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눈으로 보는 "비우호국가"의 정의
- 러시아의 문화는 형제로 시작해서 의리를 지키고 그 의리는 죽을 때까지 유효한다. 무엇이든 러시아 문화의 감성적인 부분인데 정치나 비즈니스, 국제관계 등에서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러시아인들은 딱 하나, 이성을 감성으로 덮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 이는 형제(Брат)라는 단어다. 그리고 여기에 가족(Семья)의 의미도 갖고 있다. 이 감성적인 부분이 이성적인 부분을 압도하는 이유는 과거 잦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친구를 자주 잃어버렸던 슬라브족의 아픈 감성의 역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족의 형제, 같은 고향이나 국가에서 함께 자란 친구는 피를 나눈 가족과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러시아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비우호국가" 제정이라는게 얼마나 두려운 일이라면 앞서 본 러시아의 문화적 코드에 볼 때 사람이든, 집단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우호국가는 곧 자신들의 형제이자 가족을 의미한다. 가족이나 형제라는 것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는 러시아 문화에 있어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가족임을 말하고 있다. Hедружный (비우호적인) 이라는 러시아어 단어는 가족에서 파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말로 필요에 따라 적국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그 동안 러시아와 잘 지내왔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러시아는 우호국이었다. 그런데 "비우호국가" 제정이라면 이전관계로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게 러시아의 문화적 코드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곧있음 3차 오일쇼크가 예상되는 가운데 대러제재 후폭풍을 맞이할 준비가 됐는가 싶다. 아마 안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대러제재를 통한 에너지 수입의 차단은 곧 물가 폭등이라는 재앙을 불러온다. 이른바 "비우호국가"로 제정되는 순간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봉인해제 되어버린 것이다. 대러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러시아 경제의 5분의 1을 차지하며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구매 거부는 러시아에 매우 강한 제재가 될 것이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이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하는 다른 서방 국가들은 유가와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함으로써 경제의 기조 체계가 흔들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럽 물가는 지옥의 상승률을 보이며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기세인데 러시아는 곧있음 가스와 석유를 잠그기라도 한다면 경제 뿐 아니라 사회 체계 자체가 붕괴될 것이다. EU는 원유의 26%, 천연가스의 38%를 러시아에서 사 온다. 천연가스 공급이 잠시라도 끊긴다면 에너지 가격이 상승할 것은 뻔한 일이고 안 그래도 비싼 물가, 더 비싸지게 되니 폭동, 사회적 정정 불안에 전체적인 EU 자산까지 동결은 피할 수 없게 되고 이러면 EU 체계 자체가 붕괴된다. 러시아에 투자도 많이하고 교류가 많은 우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비우호국가로 지정된 한국은 마침내 무비자 60일 + 30일, 비자발급, 연장 등에 있어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나는 이같은 사태로 인해 러시아 입국 및 비자 문제에 있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을 이미 예상한 바 있다. 러시아 외무부가 28일 비우호국가 입국 제한 대상을 일반 국민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다수 외국의 비우호적 행동에 대한 보복성 비자 조치 관련 대통령령 초안을 준비 중이라 말했다. 그리고 국내 입국 관련 무수한 제한 조치를 도입할 것이라니 이제 2010년도 이전과 같이 비자 받느라 고생할 확률이 높아진 셈이다. 다행히 아직은 세부 내용에 대해 보복성 비자 조치 관련 대통령령 초안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기업들과 교민, 유학생들 다수 피해를 입을 전망이다. 삼성, 현대, LG, 경동나비엔, 팔도 등 대기업들도 잇다른 보복 조치를 피해가질 못할 것이다. 결국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중립을 선택하지 못한 비우호국가가 된 현실이 이런 것이다. 결국 중립을 선포한 인도와 중국만 수혜를 입고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매입하며 풍부한 에너지로 잔치를 벌일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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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눈으로 보는 "비우호국가"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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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생각하는가?
- 미국의 영향력 있는 유튜버 마크 앤슨이 한국인들을 진단한 이야기가 도하 일간지 모두에 실리면서 화제다. 좋은 이야기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왜 한국인들의 불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런 이야기에 언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인의 불행에 한국의 언론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인가? 마크 앤슨은 한국인들이 20세기 들어 급속하게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한 특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대단한 성과에 자부심을 갖기 보다는 유교와 자본주의의 나쁜 점만 받아들여 자학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고령화율도 급속히 높아지는 데다가, 사회적 경쟁이 극심한 편이다.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서슴없이 HELL 조선이라고 부르고 있고,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은 서슴없이 '이생망'이라고 하면서 미래에 대해 불행하게 전망하하고 있다. 이런 사정만 감안한다면 한국은 멀지 않은 미래에 국가가 소멸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왜 한국인들은 이렇게 자신들에 대한 이미지를 낮게 갖고 있을까? 실제로 외국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이른바 한류 문화를 위시해 대단히 진취적이고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왜 이렇게 안팎의 인식의 차이가 클까?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마크 앤슨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겪는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가의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학부모들의 치열한 교육열과 한국인들의 경쟁 교육 시스템이 단기간에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제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최종학위를 마칠 때까지 오로지 경쟁 일변도의 교육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부의 즐거움 보다는 생존 경쟁의 벼랑끝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서 학교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교육이 단기간의 성과를 올릴 지는 몰라도 창의적인 교육과는 멀다는 점이다. 입시 제도의 문제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한국의 대학들은 최종 학위에 대한 자신을 잃고 여전히 많은 학생들을 유학으로 내몰고, 창의적인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타율적인 강제 혹은 경쟁이 창의적 학문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수능 시험으로 서열화된 기존의 한국 대학의 폐쇄적 구조를 이제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대학을 들어가는 문을 극도로 좁게 만들다 보니 그로 인해 어린 시절 부터 사교육 시장에서 생존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인생의 한때 받은 점수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때문에 이제는 들어가는 문을 독일 대학의 경우처럼 완전 개방을 해놓을 필요가 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누구든지 원하면 가능하게 하고, 대신 학사관리를 철저히 해서 졸업을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입시 교육의 경쟁은 없애는 한편 대학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훨씬 강도 높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대학의 실질적 교육을 위해 대학의 내실화를 강화할 수 있다. 대학이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을 뽑아서 평준화시키는 현재의 시스템은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 즉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유독 자신이 없어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유독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타인들에 비칠 이미지를 만드는데 과도할 정도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한국의 여성들이 외모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덕분에 한국의 성형 수술은 이웃 국가들의 여성까지 유혹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평가되는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니 항시 시선은 자신 보다 타인을 향해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비롯된 것일까? 나는 그것을 한국인들의 오랜 사대 식민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마크 앤슨은 유교의 장점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상으로 유교가 가져다 준 부정적인 측면도 많다.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에 깊게 뿌리를 내린 중화사대주의와 한자 숭배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는 데 유독 약하다. 항상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오늘날에는 미국이라는 대타자가 한국인들의 삶의 정체성을 확인해주고, 이 대타자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 집착은 전광용의 ‘꺼삐탄 리’라는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많은 것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다 보니 늘 자신의 삶을 긍정하거나 행복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의 기준은 자기 밖에 있으면 결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들은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이미지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려는 노력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런 노력은 유치원생들로부터 대학의 교수들, 이른바 인텔리겐차들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학자들도 늘 바깥에서 새로운 이론이나 사상을 수입하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자신들의 동료를 인정하고 동료들과의 경쟁과 소통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더이상 타인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긍정이 뿌리를 내린다면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3.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데는 한국인들의 가치기준이 다양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서열화된 면이 크다. 만약 대안가치의 다양성이 있다면 굳이 어떤 가치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나에게 부족하다고 해서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가치의 다양성이 인정된 사회는 그만큼 인간들 사회가 획일적인 경쟁에 빠질 이유도 없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유독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신분을 최고의 가치로 판단하고, 그것의 쟁취를 위해 평생을 받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가치들이 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충분 조건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유독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신분에 집착을 한다. 이런 기준이 강하다 보니 어릴 때 보다 아파트 평수와 사는 동네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익숙해 있다. 세상에는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신분 외에도 추구할 가치들은 수도 없이 많다. 자연의 색깔이 수도 없이 많은 것처럼 그것을 흑과 백으로만 구분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한국인들의 가치 판단이 획일화되다 보니 성공의 기준도 획일적이고, 그것을 달성하려는 목표도 획일화되어 있다. 부와 권력을 쌓고 사회적 신분이 높으면 인간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일반적 생각이고, 그것을 쟁취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한국인들이 가치 판단의 기준은 늘 타인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고 자신들의 삶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하는 말이 공념불처럼 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들의 가치가 다양하지 못할까? 여기서는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이 크게 작용을 하고, 획일적 사고를 지닌 부모들의 욕망이 단순한 이유가 크다. 한국인들은 어렸을 적부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공부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은 생존경쟁에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고, 이러한 생존 경쟁의 최종 목표는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신분이다. 당연히 서열화된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불행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만일 가치가 다양하다고 하면 각기 다르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 속에서 얼마든지 만족하고 행복해 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삶을 긍정할 수가 있다. 이런 환경이 부족하다 보니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서도 불행한 것이다. 나는 이런 가치의 다양성이 부족한 원인을 한국인들의 낮은 독서율에서 찾고 싶다. 한국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인들이 알고 있을 정도이고, 한국에서는 출판 산업이 대표적인 사양 산업으로 꼽혀 있을 정도다.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열심히 책을 읽지만 일단 중학교 부터 입시 전선에 편입되는 순간 독서도 오로지 성적과 입시를 위해서만 한다. 그런 상태로 대학에 들어가서도 다양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을 위한 독서는 완전히 제쳐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한 달에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다. 술과 게임에 쩔어 살면서도 독서를 위해서는 단 한 시간도 투자를 못한다. 이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오히려 책을 보는 행위 자체가 어색한 것이 한국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책을 보고 생각을 할 때 비로소 교양이 가능해지고, 교양이 뒷받침 될 때 음악과 예술 등 다른 문화적 가치도 추구할 수가 있다. 원초적으로 책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원초적 행위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추구할 수 있겠는가? 한국인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많은 것을 성취하면서도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행하고 불쌍한 한국인들의 모습이다. 이제는 이런 불행한 자화상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과 인식을 근본적이면서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삶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인생의 궁극 목표이다.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들은 행복을 위한 필요 조건이지 결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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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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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英雄)이라는 말은 ‘빼어나고 뛰어나다’라는 뜻이고, 여기에 호걸(豪傑)을 붙이면 ‘빼어나고 뛰어난 탁월한 귀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빼어나고 뛰어나다는 뜻인가? 재능과 지혜 그리고 용기이다. 영웅호걸은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더 용기가 있으며, 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영웅 중에는 효웅(梟雄)과 간웅(姦雄)도 있다고 한다. 효웅에서 ‘梟’란 ‘올빼미’라는 뜻인데, 효웅이라고 하면 사납고 용맹한 영웅을 말한다. 간웅은 간사한 영웅인데, 권모술수에 능숙한 영웅을 가리킨다. 효웅은 대체로 역사에서 이름을 남겼던 장군에 해당한다. 간웅은 대체로 정치가가 해당한다. 그런데 좀 생각해 보면 진정한 영웅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진정한 영웅이란 효웅만으로 간웅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이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좀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러한 구분은 난세(亂世)의 군웅할거(群雄割據)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난세가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구분은 불필요했으리라. 중국사에서 보면, 난세에는 영웅들이 누구든 어디에서든 출현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때로는 변방에 떠돌다가 황제의 눈에 들어와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반대로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하거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은둔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보면 시대가 영웅을 만들 때는 태평성대(太平聖代)한 시대가 아니라, 암울하고 궁핍한 시대였다. 그렇다! 태평한 시대에는 영웅이 필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때는 훌륭한 황제 혹은 재능 있는 인재만 있어도 별문제가 없다. 더 나아가 굳이 영웅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해도 된다. 영웅도 그저 그런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을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우리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의 역사적 평가에 다른 것이지, 당대에 과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행적을 과대평가하거나 미화해서 마치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거기에는 마치 한 개인이 시대를 만들 수 있다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 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더라도 시대가 부르지 않으면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영웅이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시대의 상황에 달려 있다. 시대와 무관한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명을 돕기 위한 이미지이다.(사진=픽사베이) 그런데 역사에는 이름을 남긴 영웅들도 있지만, 이름을 남기지 못한 영웅들도 많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한 어렵고 중요한 일을 했지만, 스스로 영웅이기를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행위와 종적을 감추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영웅으로서 개인의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다. 우리는 자칫 영웅주의에 빠져서만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알려지지 않은 영웅도 있음을 간과하기 쉽다. 그 때문에 누가 영웅이고 아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과연 어떤 시대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흔히 시대가 그랬으니 자신도 생존하기 위해서 적국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변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좀 달리 보면 그것도 역시 난세가 낳은 불순물일 뿐이다. 불순물이 제거되지 못하면 이후에 전체가 오염될 수 있다. 시대가 난세라는 것은 시대가 전성기를 지나 과도기에 내외적인 위기가 복합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다. 어느 시기든 이것은 분명히 있어 왔다. 문제는 언제 발생하는가를 우리가 미리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우리는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분명히 어떤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징후란 대표적으로 인재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기량을 펼치지 못해 사장되어 버리는 때에 두드러진다. 어떤 경우이든 영웅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인재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영웅은 자연스럽게 다른 영웅을 알아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영웅은 커녕 인재조차 없다는 말이니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시대가 영웅이 필요하다 해도 영웅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이때는 영웅이 출현했을 때는 이미 영웅이 필요한 시기가 사라져 버린 다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난세에 생존을 위해 누구든 세상에 나오면 의외로 난세를 대비해 필요한 준비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와 과감한 결단력, 지혜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채 기다린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대표적인 난세였다. 이 시기에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펼쳤으며, 역사의 무대를 멋지게 장식했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겨루는 대결의 장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필자는 대결의 장에서 서로 겨루었던 인재들을 모두 영웅이라고 불러도 별문제가 없다고 본다. 다만 그 결과에 따라 승패가 있을 뿐이다. 이것도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의 기록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위인(偉人)이라고 하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위인전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의 느낌은 위인전이 마치 전기나 영웅담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전부 업적 위주로 이러 저러한 일을 했고 관직을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걸로 채워져 있어서 별다른 감응이 없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하면 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과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주입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위인의 업적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그랬었더라면 당장 역사서를 찾아보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난세에 영웅은 어찌 보면, 시대를 거슬리는 것이기도 하다. 암울한 시대에 요구된 영웅이란 사실 그 시대를 반역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과연 한 개인으로서의 영웅이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이때 영웅이 될만한 사람을 지지해주고 지원해줄 세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시대에 세력이 형성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 없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단순히 역사적 조건에만 맞으면 그러면 영웅이 모두 되는가? 이것은 꼭 그렇지 않다. 역사적 조건이 항상 일정하지 않고 어떤 것인지는 매번 다르고 역사적 조건이 명확하게 규정되기는 어렵다. 다만 역사적 경험으로 지금 어떤 시대정신이 필요한지 요구되고 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 영웅이 시대를 만들지 않는다. 영웅이 시대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영웅이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시대의 산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영웅이 아니라 신화에서의 영웅일 것이다. 그와 같은 신화에서의 영웅은 지상에서의 영웅과 유사하게 신화에서 다루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서로 다르다.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고 하면 특정한 개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우선 특정한 개인으로서 영웅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웅의 이름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다. 그런데 이 방식은 지배자 중심의 영웅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특정한 인물들만의 역사가 될 수 있는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은 영웅이 누구냐보다는 관점보다 역사적 조건이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 시대는 영웅이 필요한데, 이때 영웅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서 역사적 현장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시대에 부응해서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이후로 누군가는 영웅이 될 뿐이다. 그 당시에 영웅적 행위를 했다고 해서 영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대로 역사에 묻혀 버리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우리는 영웅의 시대가 중요하기보다 시대의 영웅이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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