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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러시아의 바흐무트 함락과 젤렌스키의 일본 방문
    젤렌스키는 지난 21일 프랑스의 정부 전용기 편으로 일본에 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해당 시기는 나도 일본 도쿄에 가족 여행 중이었기에 현지 NHK 방송을 보게 되는데 NHK에서는 하루 종일 젤렌스키의 방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젤렌스키는 G7 지도자들과 만나 그토록 원하던 F-16 전투기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받는 것과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군사 지원 패키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다르게 에이브람스 전차처럼 미국에서 언제 F-16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에이브람스처럼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같은 동의안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이 문제로 인해 NHK에서 젤렌스키가 무슨 큰 성과를 낸거마냥 21~22일 이틀 동안 계속 뉴스 메인에 나오며 떠들어 댔는데 동의(Agree)하는 것과 확정(Decide)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 젤렌스키는 친러 성향의 인도, 브라질 정상을 만나 자신의 평화적 구상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인도와 브라질의 정상들이 자신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표면상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으며 어차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들이 지지하건 말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에 어설프게 답변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격전지 바흐무트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주장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유야 어쨌든 계획한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젤렌스키가 서방의 전폭적인 지지에 빠르게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서방 측이 기대하는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있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450일을 넘기면서 서방의 각 국가에서 높아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각 국가의 시민들에게 쏠려 있는 피로도를 해소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분도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이 2024년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의 예산을 확정 짓는 9월까지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4개월여가 남아 있지만 여건상 결코 젤렌스키에게 있어 넉넉한 날짜가 아니다. 뭔가를 보여줘야만 군사적을 더 받을 수 있기에 사실상 어쩌고 보면 젤렌스키는 심하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다. 남은 4개월이란, 누군가에게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젤렌스키의 입장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그 이유는 바흐무트 전선 때문인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일 마침내 바흐무트 완전 함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부는 바흐무트 함락 자체를 부인하면서도 "바흐무트의 상황이 위급하다"며 도시 철군을 승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밤에는 우크라이나군의 일부 철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의 바흐무트 함락 부인에 바그너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리고진은 이에 반박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인 한 명도 도시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바흐무트의 시 경계선을 따라 1cm도 남겨두지 않고 장악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5월 20일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 주(州) 마리우폴이 러시아 군에 함락됐다. 아조프스탈을 거점으로 결사항전하던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는 이 날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바흐무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흐무트의 함락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 일간지 빌트마저도 지난 18일 "바흐무트의 99%가 점령됐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의 가장 서쪽 거리의 한쪽만 통제한다"며 "몇 개의 건물을 지나면 서쪽으로 이바노프스코예 마을까지 거의 2km가 뚫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게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고 했다. 말랴르 차관도 "러시아 군이 바흐무트를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며 "방어할 수 없도록 건물 토대만 남기는 초토화 작전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시 경계선을 지나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Хромово)'로 진격해 도시를 북동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흐로모보(Хромово)'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방어선인 잘루즈니 라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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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베트남의 숨은 역사, 이 뜨 띠엔(李嗣先), 딘 끼엔(丁建)의 대당항쟁(對唐抗爭) 봉기
    당나라 전기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관청기록, 안남도호부 기록, 향안 등이 존재하고 있는데 향안의 경우, 한족 귀족들의 신분 확인 증거서류로서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한족 귀족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나라 고종의 시대에는 일부 천민의 부농화와 더불어 몰락 귀족들의 전호 및 임노동자화가 나타나면서 안남도호부 관할 귀족의 권위들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에 지방 사족들은 여러 종례들을 실시하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족적 결합을 강화하였으며 문중을 중심으로 각 학당과 향묘를 설립하는 등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중앙의 관권이 강화되고 향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 재지 사족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는 국가 권력이 향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당나라 태종 말기에 나타난 안남 지역의 부농층은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납속과 향직 매매를 허용하여 도움을 주었다. 부농층은 정부의 부세 운영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 직위 진출에 실패해도 수령 및 향촌 세력과의 타협으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이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은, 대를 이어 착취한 귀족층에 대한 대대적인 반기로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안남 도호부사를 죽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도호부사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에 참족과 크메르 제국이 운남 지방과 북베트남 지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군부 형태로 참족과 크메르 제국을 저지하려는 것에도 목적을 두었다. 딘 끼엔의 반란은 상인들의 항의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리 뜨 띠엔과 달리 딘 끼엔은 대제국인 당나라에 반항하는 번이(蕃夷) 증 하나로 그들은 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리 뜨 띠엔은 농민 집단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란이지만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남도호부 측은 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모두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초반에는 실패했다. 다만 군사의 수에 비해 그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남도호부의 토벌군은 타이응우옌에서 리 뜨 띠엔을 공격해 격파했고 호아빈에 웅거하고 있던 딘 끼엔이 훙 강을 건너 북상하자 당나라는 그들에게 합류한 참족 및 요족과 연합하여 딘 끼엔과 동맹관계에 있는 크메르 제국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어, 687년에는 크메르 군을 모두 격멸시키고 라오스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남진(南津)등에 5개의 현(縣)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고립된 딘 끼엔에 대해 당나라군은 참족과 함께 딘 끼엔의 군대에 공격을 진행시켜 통 빈(Tống Bình)을 함락시키고 딘 끼엔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당나라는 훙 강 서쪽 지역에 홍서현(洪西縣)을 두고, 이후 무려 9개의 현을 추가 설치했으며 측천무후 때는 주(州)로 승격시키면서 기미지배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6개 현(縣)의 명칭 중, 북평(北平), 교주(交州), 광북(廣北), 해평(海平)이라는 호칭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나라 안남도호부의 주변을 안정시키게 되었으며 이는 황소의 난 직전까지 연결되었고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의 통치 시기까지 연결되었다. 보통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베트남 통치의 균형이 당나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봉기가 당나라의 각 도호부들 통치를 통틀어 당나라 정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안남도호부에서의 피해는 당대 중국 대륙을 휘어잡은 당나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대한 타격이었다. 리 뜨 띠엔과 딘 끼엔의 봉기가 막을 내린 지 1년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골든트라이앵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이 봉기에서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측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봉기가 개시된 후부터 따진다면 공식적으로 15만의 전사자, 실종자를 포함해 베트남의 3배가 넘는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만으로 추정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8개월 동안 있었던 봉기의 결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이 승자인 당나라의 피해가 엄청났던 이유는 인명을 경시하는 당나라 조정에 집권한 계층의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작전 능력의 차이로 인해 계속 패전을 거듭했던 당나라는 안남도호부가 존재한 하노이를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인과 한족, 귀족 계층의 선비족까지 소모품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략적으로 베트남 봉기군을 붙잡아 놓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희생이 매우 컸다. 또한 물적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측천무후 이전 당나라의 붕괴 후 조금씩 드러난 기록들에 따르면 약 200개 군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비가 이 하노이에서의 혈전에 소모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혈전의 무대였던 하노이는 지도에서 사라진 것 같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피해 규모로만 놓고 본다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매우 고통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자료들에는 이를 전투(Battle)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하노이 전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전쟁(War)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현재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하노이 혈전처럼 비참한 살육의 현장들 중에서도 686~687년에 있었던 하노이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다. 군사 전략상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면 과연 이 전투에 승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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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4
  •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레르몬토프(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1814~1841)의 죽음과 푸쉬킨의 죽음이 비슷한 이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시대의 문학가이자 시인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Михаил Юрьевич Лермонтов, 1814~1841)는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선참이자 러시아 문학 황금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푸쉬킨처럼 결투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을 저술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선장으로 정착한 스코틀랜드 리어몬트 가문의 후손으로 1814년 퇴역 대위인 아버지와 부유한 명문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레르몬토프는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혼혈인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세살 때 어머니는 패결핵으로 목숨을 잃고 그 이후 외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미하일의 양육권을 두고 자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어린 미하일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를 걱정해서 외할머니는 세 번이나 그를 카프카스의 온천으로 데려갔는데, 카프카스의 험한 산세와 자연은 소년의 감성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828년 레로믄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학생들이 잡지를 필사할 때 레르몬토프도 참여하여 여러 창작시들을 발표했다. 당시 레르몬토프는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바이런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다. 수업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는 듣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이 많았던 그는 한 교수와 싸움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기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 들어갔다. 주로 신랄한 성격이었던 그는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복무했던 도중 푸시킨의 죽음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신이 어렸을 적 요양했던 곳이자 전방 지대인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수도에서 느긋한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던 그는 카프카스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도시 문화에 때가 묻지 않은 체르케스인들, 고대 기독교 문명을 보존한 조지아에서의 생활에 영감을 받아 장편 시 악마, "견습 수도사",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등을 집필했다. 오히려 카프카스에서의 유형 생활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며 상상했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레르몬토프는 반년 만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1840년 그가 카프카스에서 구상했던 작품 우리 시대의 영웅이 출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비평가들에게 일제히 "푸쉬킨의 적자"라는 극찬을 들으며, 벌써 젊은 나이에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공사의 아들과 결투를 벌인 스캔들로 레르몬토프는 다시 카프카스로 좌천되었다. 문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지 1년 후 1841년 6월 15일 카프카스에서 사관학교 시절 동료와 결투를 벌이다 전 동료 니콜라이 솔로모비치 마르티노프(Николай Соломонович Мартынов)가 앙심을 품고 레르몬토프를 사격하면서 허망하게 사망했다.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결투에서 먼저 총을 쏘게 된 레르몬토프는 친구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그 다음 차례에 레르몬토프를 정면으로 쐈다고 한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푸쉬킨의 죽음과 결말이 같았는데 유럽인들은 사람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투 자체에 “나는 네게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결투를 거부한 측이 명예가 실추된다 여겨졌던 시대였다. 상대방의 인신공격이나, 모함, 악행 등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기에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당당히 맞선다는 개념이 결투였기 때문에 모욕을 듣고 참거나 응대하지 않으면 바보 병신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유럽에서의 결투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결투를 한 사람들은 귀족, 상류층, 문인, 저널리스트 등 소위 엘리트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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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우즈베키스탄의 지역 공동체 마할라와 집단 사회
    마할라는 중앙아시아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지역 공동체다. 마할라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세기 문헌에도 나타나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마할라를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할라는 종교 · 민족 · 신분을 중심으로 모인 단일 목적의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할라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마할라는 법적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자신들만의 구역 구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역사적으로 자신만의 구역을 가진 마할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슈켄트 시내의 도로변에서 ‘OOO 마할라’라는 팻말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둘째,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정조직과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마할라에는 ‘오크소콜(Oqsoqol, 하얀 수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최고책임자가 있는데, 이는 마할라 구성원 가운데 연령과 경험, 지식 등을 고려해 주민들이 선출한다. 공동체의 중요 정책은 우리의 반상회와 같은 ‘켕가시(Kengash)’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사람들이 구성한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는 마할라는 구소련 해체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고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정하기 시작했고, 국가 건설과 정권 안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마할라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기본 행정단위가 되었다. 모든 주민은 하나의 마할라에 소속된다. 도시와 농촌 등 전 지역에 10,000여 개가 넘는 마할라가 형성되어 있고, 보통 마할라 1개당 2,000명 가량의 주민이 속한다. 마할라는 단지 정부 주도로 사회를 통제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범죄 예방, 국민의 체육활동 증진, 청년세대 교육 기능 등을 담당하며 포괄적인 사회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마할라와 한국의 새마을운동 간 유사성이 있다며 양국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마할리 내 여성들로 볼 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아이 양육은 인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인류사에서 늘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다. 출생의례와 관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종교적, 주술적 행위가 관찰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으로 공동체의 단합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생을 거치면서 각 중요한 시기마다 경험하게 되는 일생 의례에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첫 과정인 출생의례는 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축소해 놓은 의례로 해석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분석은 한 민족이 삶을 바라보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즈베크인은 예로부터 자신들을 ‘아이를 사랑하는 민족(Bolajon xalq)’이라 부르며,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 민족은 지역적, 혈연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마할라(Mahalla)’ 공동체에 속하여 삶을 영위해 왔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례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무상 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우즈베크만의 문화 의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우즈베크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이루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할라 공동체에서는 네 일과 내 일의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출생의례 또한 우즈베크인들은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 공동의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우즈베크인들은 출산을 ‘알라의 위대한 은총’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즈베크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로 보았으며, 인공 유산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우즈베크 사회에서 아들은 가계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즈베크 인에게는 여아보다 남아의 출생을 간절히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딸은 누군가의 적이다(Qiz bola birovning xasmi)’, ‘딸을 키울 바에야 소금을 보관해라(Qiz saqlagandan ko’ra, tuz saqla)’, ‘좋은 부인은 아들을 낳는다(Yaxshi xotin o’g’il tug’adi)’ 등 다수의 성차별적 속담을 통해서도 관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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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3
  • BRICS의 다극화 시대에 대한 향후 전망과 회원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에 대한 대응
    BRICS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5개 국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서방의 G7에 대응하고,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큰 5개 국이 상호 경제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BRICS라는 단어는 2001년 당시 골드만삭스 운용 회장이던 짐 오닐(Jim O'Neill)이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4개 신흥국이 2050년 세계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하여 만들었다. 골드만삭스가 나서니 2001년에 창설된 이후, 10년 동안 세계 투자금이 이들 4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2010년이 정점에 있었지만 이후, 경제 위기와 아랍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및 러시아의 크림합병 등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가 이어졌고 그로 인해 원자재 값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와 브라질 경제는 큰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조차도 성장이 둔화될 것을 우려하는 등,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BRICS가 활력을 되찾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였다. 팬데믹으로 인해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원자재를 갖고 있던 5개국이 크게 부상하면서 BRICS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러시아가 점차 유리해지자 BRICS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를 필두로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을 중심으로 G7에 대항해 다시 부상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그나마 미국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초강대국이다. 인도는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최소 이탈리아마저 뛰어 넘은 신흥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순수 국력으로 선진국인 대한민국, 전통적인 강대국의 최소인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순수 국력과 남미 지역의 패권국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UN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최상위권 지역 강국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서구 선진국처럼 경제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브릭스 내 자국에서도 국민들 대부분은 물론 주류 정치 및 경제계에서까지 단기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가능성 또한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편으로 중국은 2050년에도 선진국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하위권 소득국가로써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BRICS 국가들의 가능성이 반드시 어두운 것은 아니다. BRICS 국가들 모두가 투자 가능성과 수익률에 있어서 평가가 매우 높다. 더불어 BRICS 국가들간의 정치, 경제 교류와 협력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 또한 크게 나타나며 세부적인 지표로 볼 때는 BRICS가 G7을 뛰어넘는 품목이 반 이상 된다. 더불어 중국이 제3 세계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대에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고 있고, 실제로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제국주의로 인해 수탈을 거듭한 서방 선진국들을 뛰어 넘은 상태이다. BRICS 국가들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으며 G7은 저물어 가는 해와 같다면 BRICS는 이제 서서히 뜨고 있는 해와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진입 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긍정적인 견해 또한 없지 않으며, 브라질이 2011년에 20년 내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골드만삭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래에 희망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BRICS이지만, 이 국가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인구, 풍부한 자원, 상당한 기반이 갖춰진 사회 간접 자본 등에 따른 경제 자생력이 다른 개발 도상국들보다 훨씬 우월하며 정치적으로도 인근 국가들은 물론 제1 세계 국가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큰 편이다. 최근 트럼프는 BRICS 회원국에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BRICS 회원국들은 트럼프를 “황제”로 세계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지난 7일 제17 BRICS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관한 안건도 의제로 등장했다. 올해 BRICS 의장국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의 대통령이 SNS를 통해 세계를 겁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BRICS는 세계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권국에 군림하려는 트럼프에 맹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트럼프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스스로 인식해야 하며 우리 BRICS는 어느 패권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 국가라고 언급했다. BRICS 정상회의 참석 당시 브라질을 방문한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도 같은 날, BRICS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한 경제 연합체가 움직일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참여 국가들을 벌 주려는 듯한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힘이 곧 옳음과 정의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정상의 이와 같은 발언은 전날 BRICS에 대해 10% 관세 위협을 가한 트럼프를 겨냥해 직접 발언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전에 트럼프가 브라질을 겨냥해 50%의 관세를 부과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세 조치로 인해 현재 미국과 브라질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BRICS의 반미 정책에 동조하는 모든 국가에게 추가로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에 BRICS가 미국 이익을 훼손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BRICS 정상들은 공동 성명에서 무역 및 금융과 관련한 일방적 조치, 특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세워 무역의 의미를 왜곡하고 WTO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강한 힘으로 억누르려는 처사로 보이며 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날 BRICS 연사들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BRICS 회원국은 이번 정상 회의에서 탈 달러화 등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에 맞설 방안을 논의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맞서는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일단 BRICS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와 협상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예측된 일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G7을 뒤엎을 정도로 BRICS가 성장하면서 BRICS의 예봉을 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실제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실제로 그렇게 시행한다기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대의 기선제압에 가깝다. 분위기를 자신에게 몰고 오면서 좀 더 유리한 상태로 협상하여 이를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협상을 하는 국가들은 제각기 일정 부분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 세계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만의 이익을 강조하며 이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초강대국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만의 이익을 점하려는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스스로가 단극이 아닌 다극화로 끌고 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BRICS에 대한 관세 부과는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관세 부과로 통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BRICS 국가들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운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운운할 경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에 대한 엄청난 관세 폭탄으로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경제 제재에 대해 애초부터 개의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를 대놓고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일 수 있다. 이들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가 언급된다면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격으로 끌고 나가는 BRICS로 볼 때, 미국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을 따라,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국 BRICS에 대한 트럼프의 도박,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인도와 남아공, 브라질이 러시아,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언제 마음이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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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가 가진 영향력 : 21세기 현재,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다. 대조국 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 지대를 장악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독일군에게 카프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유전에 대한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다. 석유 화학 기술자들 상당수가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러시아로 돌아가버리고 러시아계 유태인들 상당수는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했다. 그리고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의 후손들인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하면서 확실히 러시아와 갈라섰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 간자(Gəncə)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자베트폴(Элизабетпол),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Кировабат)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된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다게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겨냥한 영토 분쟁 및 역사 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국 국경과 관련해서는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들어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은 구암(GUAM, Organization for Democracy and Economic Development)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 10일 조지아(G), 우크라이나(U), 아제르바이잔(A), 몰도바(M) 4개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설된 국가명의 앞 글자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구암의 본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구암은 조지아와 몰도바가 제 역할을 못해줌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만이 상호 교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EU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쉽지 않다. 이는 일함 알리예프의 독재와 무슬림 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EU 가입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의 적국인 아르메니아가 강력한 친러 행보를 보임에 따라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으로부터 이어온 친러는 옛 말이 되었다. 일함 알리예프는 이에 오히려 반러시아적인 방향으로 외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직후에는 조지아에 터키와의 철도 연결 등으로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2015년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직후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나토, EU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가발라(Gabala) 지역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주둔 기한 연장을 거부했다. 특히 2012년 말, 러시아군 미사일 조기 경보용 레이더 기지 운용을 정지하며 러시아를 배제하고 이스라엘과 군사적인 교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과도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이와 같은 행위에 반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에게 더 많은 혜택을 배풀어 주는게 러시아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아르메니아를 옹호하고 있다며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이웃 혈맹이나 다름없는 형제 국가 터키와 합동 군사 훈련도 하면서 러시아가 섣불리 남오세티야 전쟁이나 돈바스 전쟁과 같이 침공해오기 어렵게 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측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는 2018년 친러 정책을 자행하던 정권이 퇴진하면서 친서방 외교 성향을 가진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러시아는 당시 아르메니아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이는 뒤에 터키가 존재하고 있기에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상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 함선의 통과를 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러시아 입장에서 큰 부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대처로 인해 아르메니아가 패배했고, 결국 아르메니아는 친러에서 반러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이 친러 정책을 강화하지 않고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우호관계로 가게 되면서 러시아와는 좋거나, 좋지 않은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는 그동안 옹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한 아르메니아 본토는 아예 공격조차 받지도 않았고 앞서 언급한 터키라는 변수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러시아군 헬리콥터 1대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되면서 잠시 개입하는 듯 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측을 중재해 전쟁을 종결시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아라즈 아지모프(Araz Azimov) 아제르바이잔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중립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UN 안보리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나왔을 때, 러시아에 대한 전쟁 규탄 당시 터키와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이 전쟁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기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은 대러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극단적인 친서방 국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비롯한 걸프 국가들과 모로코 등 친미 국가들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측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와의 교류가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는 4월 7일 러시아의 UN 인권이사회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 투표에서 터키는 이번에도 찬성표를 던진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전과 달리 기권했다. 2023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관계가 다시 틀어지면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 파시냔 총리가 러시아와 멀어지고 친서방 노선을 보이면서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도 하고 EU 가입까지 추진했다. 그러면서 지난 전쟁 당시 아르차흐를 지키지 못한 것은 러시아 때문이라며 러시아 탓으로 돌리게 되자 러시아는 이에 분노하여 2023년 아르차흐 분쟁 당시, 아르메니아를 또 다시 도와주지 않는 등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아제르바이잔 역시 아르차흐 지배에 대해 서방으로부터 규탄받게 되자 그 여파로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전보다 더 개선되는 모양세를 보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19일, 푸틴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주러 아제르바이잔 대사는 두 국가기 매우 높은 수준의 동맹적 상호 작용 상태에 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 날 회담에서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럽 수출용 가스관에 러시아 가스를 포함시키는 것을 논의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 BRIC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는 의사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5일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여객기를 격추하게 되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2월 29일,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이번 사고에 대해 러시아에 크게 비판하면서 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25년 6월 29일, 러시아에서 체포된 2명의 아제르바이잔 남성이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측, 1명은 심부전이 사인이었고 다른 1명은 조사 중이라 알렸지만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시신의 구타 흔적을 근거로하여 살인 사건이라 간주했다. 그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일간지의 러시아 기자를 간첩 혐의로 구금한 뒤, 서로의 대사를 초치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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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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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의 앞잡이로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폴란드의 영웅 콘스탄틴 로코소브스끼(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 1896~1968) 이야기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는 폴란드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아버지 크사베리 보이치에흐 로코소프스키(Ksawery Wojciech Rokossowski)와 러시아인 어머니 안토니나 옵샨니코바(Антонина Овсянникова)의 사이에 1896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인 크사베리는 러일전쟁 때 장교로 복무하면서 발틱함대를 탑승했다가 현해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침몰하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가문은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로 취업해 프스코프 주(州)의 벨리키예루키(Великие Луки)로 이주했다. 부친인 크사베리는 철도 노동자로써 삶이 순탄치 않았고 190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옵샨니코바 역시 1911년에 세상을 떠나 로코소브스키는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함께 폴란드 방산 공장에서 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후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여 힘들게 일하던 로코소브스키는 16세에 이르어 폴란드 반(反) 정부 노동자 시위에 휘말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투옥 생활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기병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용맹성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용맹성을 인정받아 그는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여기까지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한 게오르기 주코프(Георгий Жуков)의 경력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소브스키는 소련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소련군에 입대시켰으며,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백군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제압하는데 대활약을 한 로코소브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승진이 어려운데다 몰락한 로마노프 제국 시절 귀족집안, 부르주아로 찍혀 장교들 사이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1919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 연대장인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동족인 폴란드 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로코소브스키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그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7년에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을 감행했고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숙청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폴란드계 소련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무와 처사에 매번 간섭하는 정치 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장교들이 부족하여 소련군의 패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있던 로코소브스키는 자신이 왜 숙청되었는지를 포함해 일체의 해명없이 곧바로 석방되었다. 로코소브스끼는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스탈린과의 면담한 뒤, 제9기계화 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떨쳤고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궤멸시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다음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되었는데, 로코소브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 의회 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소브스키는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볼셰비키의 지령을 받는 폴란드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제대로 정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로코소브스키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돌아와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면서 현재 폴란드군의 기반을 만들었다. 로코소브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무척 어눌했으며 기본적인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소브스키가 한 기행과 악행으로 인해 로코소브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에서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 한다며 나름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로코소브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것에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는 로코소브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대숙청 당시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더불어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동족인 폴란드 군중들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로 인해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소브스키의 이와 같은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소브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같은 년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자 로코소브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로코소브스키는 흐루시초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로코소브스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의 지도자였던 고무우카와 협상을 개시했다. 흐루시초프는 고무우카와의 협상에서 로코소브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의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래기도 했다. 학자들은 로코소브스키가 대조국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명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로코소브스키는 소련군 내에서도 대조국 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 사령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소브스키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의 수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소브스키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대는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까지 그의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소브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소브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부역한 인물로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는 로코소브스키의 개입 기간을 폴란드 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는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던 로코소브스키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주둔시킨 스탈린의 잘못된 인사행정으로 빚어진 일이다. 민주화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50년대 후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 때부터 이미 이 기간은 최악의 역사로 여겨졌다. 소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공산주의 통치자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로 로코소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행동과 정책은 최악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훌륭했었던 인물이지만 행정은 최악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코소브스키는 러시아계 폴란드인들에게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좋은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도 토착 폴란드인들이 워낙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로코소브스키를 영웅으로 찬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벨라루스의 경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으로 대표되는 친러 진영에서는 소련 계승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루스 민족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반러 진영에서는 그냥 외국인 러시아의 위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반러 진영은 로코소브스키가 나치 독일을 격퇴한 명장이라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한 그의 업적을 그저 소련 군인으로서의 업적으로만 여기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4
  •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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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4
  •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학계에서 많은 의견들과 각종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이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 슬라브 계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쿠만 종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고대 다키아 지배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2012년에는 루마니아 문화부에서 바사라브 왕가의 인종적 기원을 찾기 위해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Curtea de Argeș)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블라디슬라브 1세(Vladislav I) 왕의 시신에서 DNA를 추출하여 검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 중 많은 수의 왕은 생을 마감한 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의 수도원이나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시조는 지금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 문테니아(Muntania)와 남서부 지역 올테니아(Oltenia)를 다스렸다. 바사라브 1세(재위 : 1310~1352)는 발라히아(Balahia, 영어로는 왈라키아) 또는 짜라 로므네아스커라고 불리는 공국을 건설한 후, 당시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점차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바사라브 1세는 1330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사다(Posada) 지역에서 헝가리의 왕 카를로 로베르트 1세의 침략군을 대파하고, 발라히아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바사라브 1세의 지략이 크게 각광받았던 포사다 전투 이후에 루마니아 남부의 발라히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동북쪽의 형제 공국인 몰도바도 헝가리의 간섭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바사라브 1세의 뒤를 이어 1600년대까지 발라히아 공국의 수많은 왕들을 배출했다. 몰도바 공국의 무샤트(Mushat) 왕가와는 잦은 정략 결혼을 통해 혈연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를 통해 두 공국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서로 협력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는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데르 왕과 결혼하여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외척 혈통이 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Nicolae Alexandru)의 장녀 엘리자베타(Elizabeta) 공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오폴레(Opole)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왕과 결혼하였고, 작은 딸 안카(Anka)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쉬 5세 왕과 결혼하였다. 이후에도 발라히아의 바사라브 왕가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현재 유럽 주요 왕실의 혈통에는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국가 평의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 방식이었다. 왕이 낳은 모든 아들들은 적자이든 서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왕실 혈통으로 받아들여졌고,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실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 계승은 상황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어떤 때에는 군사력으로 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외국 강대국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재가를 얻어 왕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1500년대 이후에 등극한 바사라브 왕가의 발라히아 왕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만투르크 황제의 허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대다수 왕들은 왕권 투쟁 과정에서 왕위 등극과 하야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추방되었던 왕이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등극하는 일도 있었고, 잠시 왕좌를 아들이나 형제에게 맡겨 놓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찾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은 가계 도상에서 재위 순서로 나열하면 비슷한 왕의 이름이 적게는 두세 차례, 많게는 여섯 차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바사라브 왕가는 1400년대 중반 이후에 도네쉬티(Doneshiti) 왕가와 드라쿨레쉬티(Draculeshiti) 왕가로 분류되어 져서 서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두 왕가는 서로 상대방을 암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헝가리, 오스만투르크, 폴란드, 러시아 등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을 치르거나 화친을 하면서 중세 유럽 변방의 작은 공국인 발라히아를 수성해냈고, 지금의 루마니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르체아 첼 버트른(Mircea cel Bătrân),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미하이 비테아줄(Mihai Viteazul) 등이 바사라브 왕가의 가장 대표적인 왕들이다. 바사라브 왕가의 마지막 왕은 미흐네아 3세(Mihnea III, 재위 : 1658~1659)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바사라브 왕가는 발라히아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유럽 여러 왕실과 혈통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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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4
  • 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역사와 관련하여 조선 및 일본, 혹은 흑인노예 관련 기록을 발췌
    일본의 남만무역(南蛮貿易)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행해졌던, 일본(日本) 상인과 남만인 혹은 난반진(南蛮人),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 이외에 명나라(明朝) 중국인,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간의 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무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주 무역 품목들은 노예와 소총 화약 등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함대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의 선박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아시아 무역으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일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 권역 내 중계 무역을 시행하였다. 남만무역은 명(明)나라의 마카오(澳門, Macao)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중요한 물품에는 일본 은(銀)과 중국의 생사(生絲)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한반도에서 회취법(灰吹法)이 전래되면서 은의 산출량이 증가하였고, 왜은(倭銀)이라 불리며 명나라나 포르투갈에서 이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세제 개혁으로 인해 은의 수요가 늘자 해금(海禁)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 이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은으로 명나라의 생사를 구입하여 중일 중계무역을 하였다. 마카오 이외에 거점이 된 곳은 나가사키(長崎), 포르투갈 령의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말라카(Malacca), 스페인 령 필리핀(the Philippines) 마닐라(Manila)였다. 이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막부와 교역을 했다. 그러나 막부는 나가사키부교와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하여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는 제5차 쇄국령(鎖国令)을 발포하였고 포르투갈 인들을 추방하게 된다. 마카오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채를 변제하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채를 변제하는 은을 지닌 무역 재개의 탄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막부의 단교 이유는 부채가 아닌 금교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하급선원을 제외한 61명이 처형되어 돌려보내졌고, 무역은 재개되지 못하게 된다. 마카오 시에서는 무역 단절의 구제를 포르투갈령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카오는 포르투갈령 인도 관할 외에서 자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구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만무역은 종료되었다. 남만무역의 여명기에 사무 역에 종사하는 해상은 다수였다. 왜구에 참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로한오니(黒蕃鬼)로 불리는 흑인 용병이나 노예도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인에게는 유대인 추방령으로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insula)를 떠난 세파라딤 유대인도 다수였으며, 개종하여 예수회 수사가 된 유대인도 있었다. 고아에서 이단 심문소(Inquisitio)가 개설되자, 인도에서 마카오나 마닐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급증하여, 마카오 인구가 800명에서 5,000명 이상이 되었다. 예수회 수사는 남만무역 전반에 크게 관여하였으며, 일본에서의 발전에는 사비에르의 활동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남만무역 개시에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파견되는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의 장관이 되었다. 마카오 정주자가 늘어나자 현지 중국인이나 나가사키 일본인, 풍살합전(豊薩合戦)이나 규슈평정(九州平定)으로 노예가 된 일본인,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노예가 된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주민도 늘어났다. 혼혈 주민은 포르투갈 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 인은 카자두(casado, 포르투갈어로 “결혼한”)라고 칭해졌으며, 카자두 상인에 의한 자치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만다린(Mandarin)이라고 불린 중국 관리, 두 번째는 포르투갈 인 항해를 지원한 해상 안내인이나 수부인 해민(海民), 그리고 세 번째, 해적 선원이다. 만다린에는 아이타오(Aytao, 海道副使), 샤엔(Chaen, 察院), 투탕(Tutão, 都堂), 숨빈(Chumbin, 巡撫使), 로우티아(Lotia, 下級役人)가 있었다. 남만선이 내항하는 나가사키에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 들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하카타(博多) 상인들이었다. 하카타 출신 상인 중에는 다이칸(代官)도 역임하면서 주인선무역(朱印船貿易)도 수행한 스에츠구 헤이조(末次平蔵)가 가장 번영한 사람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해운으로 일하는 자 외에도 후나야도(船宿)를 경영하는 초닌(町人)이 다수 있었다. 당초에는 포르투갈 인이나 토진(唐人)에게는 거류지가 없었고 나이초(内町)라는 지구의 후네야도에 숙박하여 후나야도의 주인의 보호를 받았다. 더구나 후나야도의 주인은 중개업자이기도 하여, 사시야도제(差宿制)에 따라 내항한 상인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장사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초닌에는 기리시탄이 많았으나, 에도막부 시대가 되면서 포르투갈 인에 대한 숙박업이나 중개업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포르투갈은 무역품을 크게 다섯 종류로 분류하여 운반하였다. ① 중국에서 일본 ② 일본에서 중국 ③ 중국에서 인도 ④ 인도에서 중국 ⑤ 동남아 각지 상품 ① 중국에서 일본 : 생사, 견직물, 금, 도자기, 초석, 생약, 설탕. 생사는 백사(白絲)와 연사(撚絲)가 있었다. 생약에는 대황(大黃), 감초(甘草), 산귀래(山歸來)가 있었다. ② 일본에서 중국 : 은(銀)이 주력상품. 이외에 유황, 일본도(日本刀), 남만칠기(南蛮漆器), 나전세공(螺鈿細工), 참치 등 해산물, 풍살합전이나 규슈평정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인, 임진왜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노예가 있었다. ③ 중국에서 인도 : 생사, 견직물, 도자기, 금, 진유(真鍮), 사향(麝香), 생사 중 백사. 인도에서 소비되는 것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운반되는 것 ④ 인도에서 중국 : 은, 포도주, 올리브유. 인도은은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은이 다시 인도로 가져간 것이다. ⑤ 동남아시아 각지 산물 : 침향(沈香), 소목(蘇木), 주석, 납, 후추, 용뇌(龍腦), 정자(丁子, 클로브), 울금(鬱金), 녹비, 교피(鮫皮) 등 향신료가 많다. 이 외에도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밀가루,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군계(軍鷄) 등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출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소, 돼지, 닭, 밀가루 등이 내항자 식용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고자 출항 전 소금 절임 등으로 선적되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 전부 포르투갈 왕실 사업이었으나 단독으로 인원과 배를 계속하는 것은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한 일례로 1505년 인도양에 보낸 22척 선단에는 왕실 연 수익의 75% 이상 비용이 들었기에 이탈리아계나 독일계 상인 집단이 반액 이상을 투자하였다. 또한 배를 보내는 권리는 귀족이나 상인에게 유료로 양도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제노바 공화국(Genova Republic)의 산 조르조 은행(Banco de San Giorgio)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또한 고객과 상업용 물품 리스크 관리를 위하여 복수의 사람들이 공동출자하는 콤파니아(Companha)나 고리의 해상대부(海上貸付, Emprestimo a risco)인 레스폰덴시아(Respondencia)가 행해졌다.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로서 교회법에서는 우수라(Usura)에 의하여 고리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카톨릭교도 사이에서는 해상 대부는 해상 보험 명목으로 취급되었다. 마카오에 부임한 벨쇼르 카르네이로(Belchior Carneiro) 사교는 자선원(慈善院, misericordia)를 설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 자선원에는 부자의 자금을 투자하거나 빈자의 희사로 운영하는 은행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리오(Rio)와 고아를 두고 원격으로 신용 태환 거래도 행해졌다. 마카오 자선원에서는 남만무역 항해 자금도 대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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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3
  • 도카라 대지진 설은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남쪽 도카라 열도에서 최근 일주일간 소규모 지진이 총 525회나 발생했다. 이에 현지 온라인에서는 이와 같은 군발지진(群發地震·특정 지역에서 짧은 기간에 작은 지진이 계속 일어나는 현상)이 대지진의 징조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진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리적인 특성과 지진의 규모 등을 근거로 하여 이와 같은 대지진에 대한 소문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했다. 29일, 도카라 열도에서는 6월 21일부터 28일 오후 6시까지 진도 1이 넘는 지진이 총 525회가 관측되었다. 물론 진도는 모두 리히터 규모 4.0 이하였다. 구체적으로 4.0이 6회, 진도 3.0이 27회나 발생했다. 나머지는 진도 1.0~2.0 정도였다. 그러나 지진 강도에 대한 등급인 진도는 절대 강도의 등급을 의미하는 규모로 흔히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해당 지역에 있는 사람의 느낌이나 주변 물체 흔들림 정도 등을 수치를 가지고 진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도를 보는 개념이 다르다. 즉, 일본에서는 진도 1.0이 흔들림이 가장 약하고 7.0이 가장 강하다. 29일에도 40회가 넘는 지진이 일어났다. 최대 규모는 4.7이었고, 이 지진으로 일부 지역에서 진도 4의 흔들림이 감지됐다. 진도 4는 대부분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수준이고, 컵이나 접시가 흔들리는 정도의 진동이다. 건물 등 구조물에는 큰 피해가 없지만, 일상의 움직임과 교통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이기는 하다. 이에 일본 현지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른바 ‘도카라의 법칙(トカラの法則)’이라는 속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법칙은 도카라 열도 근해에서 지진이 연이어 발생하면 이후 다른 장소에서도 대지진이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소문은 특히 일본의 인기 만화가 다쓰키 료(竜樹 諒)가 오는 7월 5일 일본 서남부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동일시 되어 급속도로 퍼졌다. 다쓰키는 1999년 직접 꾼 예지몽을 바탕으로 출간한 만화 ‘내가 본 미래(私が見た未來)’에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예견하여 맞춘 바 있다. 대지진설은 이 만화에 “2025년 7월 5일 대지진이 발생해 동일본 대지진(2011년 3월) 때보다 3배 높은 쓰나미가 일본 서남권을 덮친다”는 내용으로 담겼다고 한다. 다쓰키는 새로운 저서에서 구체적인 날짜로 지목한 ‘7월 5일’에 대한 입장은 수정했지만, 7월 대재앙설 자체를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과 전문가들은 ‘도카라의 법칙’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해당 지역 지질의 특성상 평소에도 도카라 열도의 군발 지진은 자주 관측되고 있기에 대지진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카라 열도에서는 2021년 12월과 2023년 9월에도 각각 300회가 넘는 소규모 지진이 연이어 발생한 바 있다. 도카라 열도 주변은 필리핀 판이 유라시아 판 아래로 들어가는 류큐 해구와 가깝기 때문에 지각의 움직임에 따라 지진이 잦으며 또헌 화산섬과 해저 화산도 많아 다른 지역보다 지각 움직임이 심하다고 했다. 특히 이와 같은 지진들은 모두 소규모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 정도 지진은 거대 지진을 유발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 대체로 보고 있다. 일본은 지진이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군발 지진이 있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드물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도카라 지진과 거대 지진이 연계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일본 열도 남부 난카이 해곡에서 30년 이내에 발생할 확률이 80% 정도로 알려진 규모 8.0∼9.0의 대지진과 관련해서도 해당 지역과 해역이 달라 관계가 없다고 일본 정부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7월 대재앙설 등의 영향으로 일본 관랸 여행 업계는 실질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6월 말~7월 초 일본행 항공권 예약 건수는 무려 83% 급감했다고 한다. 홍콩 항공사 2곳은 최근 일본 남부 지역으로 향하는 항공편을 줄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7월 대재앙 설로 인해 도쿄로 필자의 모임에 응답한 사람은 겨우 두 명 뿐이었다. 결국 필자는 이 두 명을 모시고 내일 일본 도쿄에 간다. 이번에는 많은 가이드비를 받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두 분이라는 손님을 20명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일본 정부도 직접 소문 진화에 나섰다. 일본 관광청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여행을 결정할 때는 공식 기관이 발표하는 과학적 정보를 참고하기를 추천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기상청은 SNS 등을 통해 전문가들이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지진 발생 시기나 장소, 규모를 예측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관련 추측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 기상청 장관이 나서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그 대상에 대해 단정적인 말을 해주는 것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거 없는 정보를 유포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도카라 대지진 따위는 없다. 물론 자연 현상에 대해 인간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냐마는 전문가라는 집단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운명에 맞길 뿐이지 한낱 만화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에 운명을 맞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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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3
  • 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루마니아 중부와 북부, 헝가리 서부 지역의 척박한 산지로 나타나지만 비옥한 우크라이나 쩨르노젬 지대와 헝가리의 푸스타 초원을 연결하는 천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자카르파티야 지역 주민들이 트라키아인과 켈트인의 영향을 받았고 스키타이계 유목민족들의 유골들이 출토되었으며, 빠르면 B.C 2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트족, 훈족, 아바르 제국 등의 세력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로마 제국을 침공하면서 아시아계 기마유목민족들의 유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다. 9세기 말엽에는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푸스타 초원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헝가리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푸스타 초원의 원주민들이 헝가리인과 서로 급속히 동화되었던 것과 달리 척박한 변방 지대였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슬라브계와 라틴계 토착민, 그리고 이주해온 헝가리인 사이의 동화가 매우 늦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이후로는 쿠만족까지 정착하면서 자카르파티야는 다민족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지배 하에서 헝가리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이 서로 뒤섞여 거주하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을 1,000여 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실질적인 지배력이 점차 약해져 15세기에는 슬라브계 토착 귀족들이 주로 통치했다. 중세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꽤 거대한 편이었고 몽골 제국의 침공 이후, 헝가리 자체가 쇠락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로부터 독립된 지역이 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이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실질적으로 멸망했으며 헝가리인의 자치공화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1699년에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이후에 헝가리인보다는 루신인과 현지 러시아인을 위시한 슬라브계 인종이 훨씬 더 많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대타협이 성사된 이후, 운그바르(Ungvár)를 중심으로 하는 운그 주(Ung vármegye), 베레그사스(Beregszász)를 중심으로 하는 베레그 주(Bereg vármegye), 나지쇨뢰시(Nagyszőlős)를 중심으로 하는 우고차 주(Ugocsa vármegye), 마라마로시시게트(Máramarossziget)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마로시 주(Máramaros vármegye)로 분리되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은 공중 분해 당했다. 헝가리는 당시 패전으로 인해 72%의 영토를 잃어 전쟁 전 325,441km2에 달하던 헝가리의 영토는 93,073km2가 되었다. 헝가리는 64%의 인구를 잃어 2,090만 명에서 76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의 변화로 인해 1,070만 명의 헝가리인 중 31%인 330만 명이 헝가리 국경 외부에서 살게 되었는데, 헝가리 고유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민족 구성을 핑계로 루마니아 왕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왕국 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와 협력하여 자치주를 구성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산하 자치주는 낙후되었던 자카르파티야에 급수 시설과 철도를 확충하였다. 지주들에게 몰려있던 토지를 소(小)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카르파티야에는 724개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수 민족의 자치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고, 그 중에서 540개는 우크라이나어(루신어), 130개는 헝가리어, 32개는 슬로바키아어로 교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소수의 루마니아어 및 독일어 학교와 1개의 유태인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한적인 민족어 교육에 비해 크게 진일보한 정책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헝가리 왕국은 대타협으로 주권 대부분을 회복한 이후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시행하여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등의 소수민족들을 억압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헝가리 왕국의 마자르화 정책에 크게 위협을 받은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여 헝가리 왕국과의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결성하여 헝가리인의 탄압으로부터 탈출하려 했을 정도였다. 이후 루신인의 자치구, 그리고 1일 동안의 존속한 독립 국가를 거쳐 1938년에 헝가리 왕국이 재점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자카르파티야 지역을 재점령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 지역에 러시아어로 카르파티아 산맥 건너편이라는 쟈까르빠티예(Закарпатье)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이 시기로 나타난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장과 유사 시에 판노니아 평원으로 진격을 쉽게 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이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 및 장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야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면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게 된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우크라이나인이 주류로 나타나고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헝가리 영토였던 만큼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이 거주 중에 있다. 약 15만 명 정도 되고 있다. 그 외에는 루신인, 슬로바키아인,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집시, 루마니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나타나지만,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헝가리어, 루신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등의 언어도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높으나 베레호베(Берегово)와 같은 도시는 헝가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기에 헝가리어가 통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베레호베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과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이라 대부분의 도시들이 헝가리어, 독일어, 슬로바키아어 지명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와 우크라니아의 외교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또는 헝가리인들의 거주 지역인만큼 대부분 주민들이 헝가리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있는데 2017년 우크라이나에서 시행된 ‘우크라이나 국어교육 강화법’으로 인해 중등교육기관에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강화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이 조치가 취소될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겠다며 매우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입장이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트란스 카르파티아가 헝가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최후방이 되어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가장 안전한 주가 되었다. 전쟁 피해도 거의 없고 공습경보조차 울리지 않았을 정도로 러시아의 공습이 전무한 지역이다. 그러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낙후된 농촌 지역이기 때문에 타격할 만한 곳이 거의 없고 우주호로드(Ужгород) 공항 정도에 불과한데, 이 공항의 활주로 끝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에 면해 있기 때문에 폭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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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2
  • 중국의 제2 도련선 돌파의 의미 :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흐르는 위기감
    이미 배타적 경제수역 (EEZ, Exclusive Economic Zone) 같은건 무의미하게 됐다. 중공이 대만 포위 훈련 할때부터 일본의 베타적 경제수역은 허물어진거나 다름없다. 1951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창한 전략 구상 도련선(島鏈, Island chain) 또한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중국 헤군사령관 류화칭(劉華淸)이 1980년대에 이를 ‘근해 적극방위전략’의 핵심 지역들을 자국의 해군 전략에 편입하여 미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을 방어 경계선으로 공식화했다. 중국 근해인 제1 도련선과 좀 더 멀리있는 제2 도련선이 현재 미국이 설정한 대중국 방어선이다. 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이은 가상의 선이라 해서 도련선(島鏈線)인데 실질적으로는 중국 해군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래 중국은 제1 도련선 돌파에 이어 2020년까지 제2 도련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2040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독점 지배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제1 도련선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제2 도련선 또한 올해 6월,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중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함대를 보내 이미 제2 도련선을 돌파해버렸다. 이 자체가 경악할만한 일인데 모두가 당시 중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그대로 묻혀져 버렸다. 중국이 미국에게 통보하고 미국과 함께 설정한 도련선은 미국이 발표한 2개지만 중국이 발표한 것은 3개다. 제1 도련선의 경우,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류큐열도,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본토 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1 도련선은 대체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시킬 경우 제1 도련선이 완전히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대만을 포위하는 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었고 이에 대한 견제도 전무했기에 사실상 제1 도련선이 완성되고 해당 해안 일대가 중국에 넘어간거와 다름 없게 되었다. 제2 도련선의 경우, 외곽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시작으로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 이르며 이는 서태평양 연안 지대 전체를 이르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을 중국의 영향 아래 예속시킬 경우 제2 도련선이 완성된다는 입장인데 이번 달에 그 경계가 뚫렸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지정한 제3 도련선은 알류샨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일대를 활처럼 휘어 있는 선 형태를 말한다. 이는 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장악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 선의 목적으로 본다면 최종적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것은 제2 도련선까지로 여겨지는 데, 제3 도련선으로 넘어가면 미국을 극도로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발표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도련선 만으로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은 확고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도련선들은 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독립전쟁 이후, 태평양의 미국이 설정한 먼로 독트린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설정한 절대 방위선과 많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중국의 영역과 중국식의 국제 질서 지역의 영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 동안 중국의 앞바다를 통제하여 압박하려던 것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도련선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이 전부 중국과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국가들이 많아 이와 같은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항공모함 전단이 지난 6월 7~8일 처음으로 일본 동쪽 끝 서태평양 내부의 일명 '제2 도련선(The second island chain)' 지역을 넘어서 훈련을 벌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중국 항공모함인 랴오닝함과 산둥함 전단이 일본 동쪽 끝 미나미토리시마 주변의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이 항의했지만 중국에서는 연례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정기훈련으로 국제법 및 국제 관행을 준수하고 특정 국가나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도련선 확장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제1도련선 내 국가들에 전략 자산 배치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를 지난 4월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등 각종 전략무기를 제1 도련선에 배치하려 한다고 검토했다. 미국은 유럽과 나토의 지원을 축소해서라도 중국의 해상능력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번도 돌파당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일대에 대한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특히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미국 측이 아닌 일본 해상자위대가 파악하고 알렸다는 것은 미국의 대 태평양 지역 감시 정보가 많이 약화되었음 시사한다. 보통의 태평양 전력이 강했을 시기의 미국이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보고 되어 함대를 출동시켜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중동에 신경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미군이 이 지역에서 상시 주둔 대신, 필요시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해군력(7함대)과 연합훈련,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모두 무력화 된 셈이다. 미군의 영향력은 상시 주둔 숫자가 아니라, 위기 시 신속 투입 능력,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첨단 정보 · 감시 · 정찰 자산, 해군력 운용 등 복합적 전략에 기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제2 도련선 돌파하며 중국의 항공모함들이 해상 훈련을 실시 할 때, 앞서 언급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한 내용들은 완전 무위로 돌아갔다. 동맹국과의 연합작전 따위도 없었고,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복합적 전략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관여하는 다른 지역들을 신경 쓰고 있을 때, 다른 관여 지역은 쉽게 뚫릴 수도 있다는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전략적 실험(Strategic Experiment)"일 수도 있다. 미국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출몰했을 경우, 미국의 대응 능력을 살펴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해상 훈련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2 도련선까지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들이 구축한 제2 도련선까지의 인도-태평양 연합 QUAD와 AUKUS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실험이다. 일단 제2 도련선까지 가보고 이를 해상 훈련이라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된다. 해상 훈련을 하면서 이들의 반응을 떠보고 해당 지역들의 정보도 취득하면서 여러 가지 모의 실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돌아가서 여태까지 실험한 내용과 취득한 정보들을 모아 또 다른 전략을 세우거나 이미 세워져 있는 전략들을 대폭 수정할 것이다. 이를 구체화 한다면 이제 친중 국가들을 이용해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목을 환기 시킨 다음,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나라는 대만이고 그 다음이 한국과 일본, 혹은 필리핀 및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제2 도련선을 기준으로 해상 훈련을 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싸우면 가장 유리해지고, 이득을 볼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차적으로 아, 태 지역의 긴장이 풀어져 이번처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을 것이고, 2차적으로 이란에게 물자를 지원하며 벌이도 쏠쏠해질 것이며, 3차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예속화 과정의 심화와 더불어 일대일로의 확장은 더욱 가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서 우리는 베트남과 일본, 러시아와 공조를 강화하고 많은 정보를 확보해 미국과 호주, 인도에까지 넘겨줘야 한다. 특히 다극화 시대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불편한 공생(Uncomfortable Coexistence)"을 하고 있는 격이지만 그 때 되면 서로를 견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정치-외교적 관계 등을 보면 단순히 경제적 관계 만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서로 협조적이지만 이 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국가들이다. 둘이 상호 견제 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와 친해지면 여러 모로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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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2
  • 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미국의 개입으로 불안정한 중동 정세
    이란과 이스라엘의 12일 전쟁은 미국이 이란을 직접 폭격했지만,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대응으로 가기 직전에 – 이란 의회를 의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종 승인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 트럼프 대통령의 휴전 선언으로 끝났다. 미국은 B2 스텔스 폭격기로 이란의 핵 시설과 농축 우라늄 시설이 있는 나탄즈, 포르도 및 이스파한을 정밀 타격했고, 이란은 이에 맞서 중동의 미군 기지 두 곳(카타르와 이라크)을 미사일로 공격했다. 이때 이란은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미국에 이를 통보했고 미군은 미리 대피했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란의 이 두 가지는 사실상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사용하면서 미국의 공격에 대해 결사 항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자랑했지만, 이란은 지상의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을 뿐이다. 특히 미국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시설 및 핵 시설이 있는 포르도와 나탄즈에 스텔스 폭격기를 동원해서 벙커버스터인 GBU-57를 12발을 투하했다. 이스파한은 미군 잠수함에서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24발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공습 이전에 이란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농축 우라늄을 빼돌렸거나 다른 기존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 시설로 옮겼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실제로 이란의 핵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면, 방사능은 분명히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은 과연 트럼프의 말대로 이번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이란의 핵 시설 및 농축 우라늄 시설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란이 핵 개발을 한층 촉진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고, 테러 지원국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서방으로부터 각종 경제적 제재를 받고 있어서 이 기회에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라는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최근 이란은 이번 미국의 공격을 방관한 국제 원자력 기구를 압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습에서 트럼프는 미군이 더 이상 국제적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스스로 어겼으며, 미국 의회의 승인조차 거치지 않았다. 트럼프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이란의 공습에 대해 찬반으로 갈리면서 내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철저한 기만전술과 비밀작전으로 이스라엘의 요청을 받아들면서도 동시에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휴전으로 만들어야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보여주려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자신의 휴전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또다시 이란을 폭격하려고 하자, 곧바로 이스라엘 총리와 설전을 벌인 직후 이스라엘의 조종사들이 되돌아가는 상황도 있었다. 이것은 트럼프 자신의 결정에 반기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불과 12일간의 전쟁이었지만, 이란과 이스라엘도 각각 피해가 컸지만, 다행스럽게도 본격적인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피해에 차이가 있다면 이란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보다는 각종 인프라와 건물 및 군 기지 등에서 피해가 컸다. 민간인들은 방공호로 대피해서 인명피해가 비교적 적었지만, 이란에 의한 대량의 드론과 탄도 미사일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뚫으면서 좁은 지역에 밀집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주로 핵 시설과 군 지휘부를 겨냥해서 이루어졌고, 방공호가 별로 없는 이란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초기에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미국 대 이란의 전쟁으로 진화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국이 서로 승리를 자화자찬하면서 공식적으로 휴전이 성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는 정치적 승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지율 상승으로 가자 전쟁에 집중하는 조건을 만들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부의 문제를 무마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휴전을 이끌어 내는 해결사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는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반미를 통해 이란 내부의 지지를 공고히 하면서 자신의 후계 구도를 만드는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승리들은 전쟁의 부수적 결과로 얻어진 것일 뿐, 중동의 평화를 실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서서히 드러나는 사실은 미국의 이번 이란 공격이 사실 트럼프의 말과 반대로 이란의 핵 사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이란의 핵 과학자들과 군 수뇌부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제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폭격으로 이란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는 명분만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따라 취약한 방공망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방공망을 구축할 것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드론과 탄도 미사일을 대량으로 섞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란의 취약한 공군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충돌과정에서 상당히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중국의 전투기에 이란은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란이 이번 기회에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밀착하면서 중국의 신실크로드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면, 이른바 반미동맹으로 대표되는 듯이 보였던 CRINK에서 중국-이란이 가까워지고 러시아-북한이 밀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미국의 이란 공격이 향후 중동 문제를 실타래처럼 얽혀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요청으로 인한 미국의 이란에 대한 공격이 이란의 핵 무기화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트럼프는 시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면서 이란도 미국의 요구대로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으면 또다시 폭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이란이 현재로서 미국과의 협상에 나올 가능성은 없다. 쉽게 말해 이란이 굳이 그래야 할 명분도 이익도 현재로서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위권을 어느 정도 갖추기 전에는 이란이 미국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대리전 역할을 그동안 수행했던 시아파 벨트가 이스라엘의 공격에 상당히 주춤하고 시리아가 내전으로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탓에, 이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축소될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후티가 버티고 있어서 이란으로서는 그래도 중동에서 영향력은 유지될 것이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당분간 자력갱생으로 버틸 것인데, 문제는 시리아가 과연 안정된 평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다. 현재로서는 장담하기 매우 어렵고 서서히 악명 높은 IS도 출현하고 있어서 매우 불투명하다. 이번 미국과 이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중동 전체에 복잡한 현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란의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으로 – 비록 약속 대련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 중동 국가들은 방공망 구축을 위해 미국과 서방에 손을 내밀 것이다. 중동에서 이란이 고립되고,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이 서로 이익에 의해 가까워진다고 해서 중동의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쩌면 민심과 한참 거리가 먼 정치적 야합으로 이스라엘에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이것이 중동의 화약고를 스스로 건드리는 꼴이 될 수 있음을 중동의 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동의 불안정한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치열한 샅바 싸움과 아직 끝나지 않은 가자전쟁 그리고 시리아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이것은 중동의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제대로 된 첫 단추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5-07-02
  • 아랍의 선조이자 아랍인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스마일(Ismail)은 어떤 인물로 나타나는가?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 <공동번역 성서-창세기> 16:8-11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창세기>와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알려져 있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꾸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자손이라 여기며 아라비아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브람과 사래라 이름 불리던 시절에 사래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아브람은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일을 가지게 된다. 당시 야곱의 아내, 즉 아브라함의 손자며느리인 레아와 라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으면 몸종을 대리모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가지는 경우가 흔히 존재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그 몸종이 집안의 규율을 어길 경우 추방하는 게 가능했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을 임신하자 주인을 업신여겨 사래를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사래가 아브람에게 항의하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했고 이에 사래가 하갈을 구박하자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주하게 된다. “주님의 천사가 광야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는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구약성경-창세기>15:5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들은 들 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 <구약성경-창세기>16:11-12 하나님을 목격한 하갈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여 그 우물을 라하이 로이(Rahai Roi)라 하였는데, 그곳은 카데스(Kades)와 베렛(Beret) 사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하갈은 우물에서 돌아와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스마일이라 하였다. 이 때 아브람은 이미 86세였다고 한다. 후에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아브라함이라 불리고 사래는 사라라 불리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다. “너에게서 임금도 나올 것이고 영원한 계약을 세워 가나안 땅을 후손들의 소유로 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90세가 된 사라가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계약의 자손은 이삭의 후손이 되리라 말했다. 이삭이 태어난 이후, 아브라함은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던 당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라는 당시 이스마일이 이삭을 놀리는 걸 보고서 그를 추방하라고 성을 낸다.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스마일도 자기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이삭에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구약성경-창세기> 21:9-13 아브라함은 이 말에 당황하여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도 너의 자식이니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일과 함께 자신의 집안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하갈 모자는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고,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의 앞에서 나타나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하갈의 눈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해 우물을 보게 된 하갈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일에게 주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광야에서 자란 이스마일은 성인이 되자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어 파란 광야에서 살았는데, 하갈은 이집트 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 이는 이스마일의 자손인 아라비아인의 혈통이 이집트인과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일은 같이 아브라함을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를 받아준 인물도 큰 아버지 이스마일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16장과 21장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중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문헌 가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본문 자체의 문학적 관점을 존중해서 21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22장의 이삭 번제물 이야기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스마일을 추방하는 이야기와 이삭과 관련된 시험 이야기가 첫 번째 단락이라면 아들을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단락, 아브라함의 이행이 세 번째 단락이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공유하며, 따라서 본문 상으로는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 없이 죽을 예정이던 아브라함이 많은 나이에 아들을 2명이나 얻은 상태에서, 소중한 장남과 기적으로 얻은 차남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느바욧(Nvayot), 케탈(Ketal), 아드브엘(Adboel), 밉삼(Mibsam), 미스마(Misma), 두마(Duma), 마싸(Massa), 하닷(Hadat), 데마(Dema), 여툴(Yeotul), 나비스(Navis), 케드마(Kedma)가 이스마일의 아들들로 마을과 고을에 따라 그들의 이름이자 12개 부족의 족장들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137세를 살아 선조들 곁으로 갔다. 이스마일의 자손들은 하윌라(Hawila)에서 수르(Sur)에 이르는 지방에 살았는데 수르는 이집트 맞은편과 아시리아로 가는 곳에 있으며 자신의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떨어져 살았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사라 사후에 결혼한 크투라(Ktura)에게 얻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주어 동방의 땅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동생인 이삭의 아들 에서(에사오)는 이삭이 가나안으로 야곱이 바탄아람(Batanaram)으로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에서는 40세 무렵 가나안 토착 여자인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Beri)의 딸 여후딧(Yeohudit)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Elon)의 딸 바스맛(Basmat)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에사오는 그 광경을 본 뒤 이스마일을 찾아가 이스마일의 딸이자 맏아들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Mahalat)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이스마일은 자신의 조카 에서를 사위로 맞아들인 셈이다. 에사오의 입장에서는 친사촌 형제와 혼인했으며, 동생 야곱은 외사촌 형제와 혼인했다. 이후 에사오는 큰 세력을 이끄는 족장으로 성장해 에돔(Edom)을 세우게 된다. 야살(Yasal)의 책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사라가 낙타에서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보내는데,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의 첫째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일은 없었다. 이 여자는 아브라함을 보고도 영접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이 여행으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자식들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자에게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좋지 않으니 뽑아버리고 다른 못을 박으라고 전해 달라 했다. 이에 이스마일은 집에 오고 나서 그 말을 듣고 여자가 아버지를 천대하였다고 파악하고 첫째부인을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이스마일은 둘째부인과 재혼했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스마일이 보고 싶다며 찾아간다. 하갈과 이스마일이 없는 상황에서 둘째부인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일이 오거든 천막의 못이 훌륭하니 단단히 박으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보았다. 실제로 <성경>의 묘사를 보면 요르단 강 동쪽 아라비아 반도 땅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이스마일의 후손들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나라끼리 교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 같은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주로 이스마일의 후예들이라 나오는데, 이 재료들이 주로 아라비아 남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옛날 히브리 세계관에서도 동방의 아라비아인이 이스마일 인이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서는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메카를 세웠다고 나와 있다. B.C 시대부터 여러 역사가와 저술가가 아라비아인들을 이스마일과 연관 지었으며, A.D 1세기에도 이스마일은 아라비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나바테아(Navatea)에 거주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아라비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에도 이어졌다. 7세기에 이슬람의 팽창을 직접 목격한 정교회의 수도자이자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아라비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자손이기에 하갈인 또는 이스마일 인이라고 불립니다. 또한 이들은 사라센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라에게 박탈당한(Σάρρας κενούς)’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갈이 천사에게 ‘사라가 저를 빈손으로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이슬람 비평> <꾸란>에서 나오는 이스마일은 이브라힘의 아내 하자르(هَاجَر / Hājar)가 낳은 첫째 아들로 나온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는 이스하크(Iskhak)가 아니라 장남인 이스마일이라 주장하고, 알라가 이브라힘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하크가 아니라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일을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갈과 이스마일을 현재의 메카에 해당하는 사막에 버리고 떠났는데 물을 구하던 그들에게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를 잠잠 샘물이라고 하며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콜라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돌아온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이 위치에 세운 제단이 현재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사우디 메카의 카바 신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카아바)의 주춧돌을 쌓아올리며 오,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이 노력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실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 <꾸란> 2:127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번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이 이브라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브라힘이 말하니 “오,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희생시키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니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인내하는 한 종임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스마일의 머리를 숙이려 했을 때, 우리(하나님)가 그를 부르니 오, 이브라힘! 너는 그 꿈을 확신하였으며 이미 그것을 이행한 것이니라. 실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베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느니라.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큰 희생(양)으로 그(이스마일)를 대신하였느니라. - <꾸란> 37:102-107 이에 본래 유목민들은 가족인 형제 및 동서를 구분하지 않고 장남에게는 일부를 넘겨주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독립하였으며 차남에게 아버지의 토착 지역을 물려주는 경향이 있다. 평범하게 생각해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이스마일은 아버지에게 독립해 아버지에게서 먼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의 세력을 세웠고 번성했으며 차남인 이삭은 아버지의 지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인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은 동방의 땅으로 보냈고 이스마일이 가장 먼 곳에서 살아간 것처럼 나오는 것도 본래 장자가 충돌을 피해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후에 야곱이 에사오에게 장자권을 찬탈하고 사기까지 쳤기 때문에 에사오는 아버지에게 떨어져 에돔을 세우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땅을 물려받았다고 나온다. 그것도 유목민의 관습으로 보면 형이 독립하고 동생이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의 첫째는 르우벤(Luven)이고 나머지 자녀들도 야곱에게서 멀리 떠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신빙성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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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30
  • 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에 악화된 분위기, 양국의 스파이 전쟁
    헝가리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이 지난 달 11일에 헝가리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전직 군인 2명을 체포하자, 헝가리가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외교관 2명을 간첩 혐의로 추방했고, 우크라이나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안드레이 사비가(Андрій Савіга)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키예프 당국이 헝가리 대사를 외무부로 초치해 헝가리 외교관 2명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Київська влада викликала посла Угорщини до Міністерства закордонних справ і зажадала, щоб два угорські дипломати покинули Україну протягом 48 годин)."고 게시했다. 시비가 장관은 "헝가리가 우크라이나 외교관을 추방한 조치에 맞서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고 우리의 국익을 고려한 대응(Застосування принципу взаємності та врахування наших національних інтересів у відповідь на висилку Угорщиною українських дипломатів)."이라고 적시했다. 이와 같이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인믈을 체포하고 이를 발표함과 동시에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을 추방하고 우크라이나가 이에 맞대응하는 시간은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나토-EU 가입 등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해 왔던 양국 관계로 볼 때 결국 사태 악화는 필연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사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매우 불편한 이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간첩을 적발하여 체포했다는 지역운 자카르파티야 지역으로 이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헝가리의 영토였다. 따라서 자카르파티야에는 헝가리계 주민 약 15만 명이 소수민족으로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남성들이 총동원령을 피해 헝가리로 탈출하는 주요 루트 중 하나로 갈라시아-볼리나 지역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우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헝가리로 탈출한 자국민에 대해 추방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헝가리는 이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어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가 결정적으로 헝가리를 자극한 시기는 2017년에 도입된 우크라이나어 사용 정책이었다. 헝가리는 이를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라 주장하며 크게 반발했다. EU도 헝가리 편을 들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조건으로 이 정책을 폐기 혹은 수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국 간에 극도로 민감한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SBU가 헝가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40대 2명을 체포한 것이 사태 악화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SBU는 두 사람이 헝가리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고 우크라이나 방공시스템 위치 등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카르파티야 주민들의 정치적 노선을 조사하였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헝가리 군이 이 지역에 진입할 경우, 주민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헝가리인의 간첩 혐의를 적용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카르파티야 지역에서 암약하는 헝가리 군 정보국 스파이 네트워크를 적발했다고 강조했다. 이 때 체포된 헝가리인 두 명 중 한 명은 병이 깊은 아버지의 치료를 핑계로 헝가리를 왕래하며 수집한 정보를 헝가리 정보 기관 측에 보고하고, 자금과 새로운 임무를 받아왔다는 것이 SBU의 결론이다. 그러자 헝가리는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chiart) 헝가리 외무장관은 SBU의 발표를 두고 헝가리에 대한 비방과 프로파간다라고 반발했으며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던 우크라이나인 2명을 간첩 혐의를 적용하여 맞대응으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시야르토 장관은 이는 헝가리가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에 일어난 의도적인 사건이며 우크라이나 측이 헝가리를 친러시아 세력으로 여기고 있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헝가리 보안군이 수도 부다페스트 중심가에서 전직 우크라이나 외교관이 탄 승용차를 세우고, 탑승자를 강제로 체포하여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헝가리 보안군 측은 그를 외교 공관에서 근무하는 간첩 요원이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암약하는 블랙 요원이라 주장했다. 본래 EU와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줄곧 러시아 편을 들어 서방의 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반대해 왔던 국가이다. 따라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젤렌스키 사이에도 간혹 심각한 의견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르반 총리가 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자의 입장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자, 젤렌스키는 이에 대한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다. 최근에도 젤렌스키는 부다페스트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방해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헝가리-우크라이나 간의 이와 같은 갈등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스파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와 같은 사태 악화의 중심에는 전쟁을 이유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SBU가 존재하고 있다. SBU는 이미 현지에서 구성원들의 심각한 권력 남용과 부패 및 도덕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고 헝가리와 스파이 전쟁으로 부딪치기 얼마 전에 대규모 부패 사건이 발생해 분위기가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같은 날, SBU의 한 고위 관리가 부패와 도덕성 문제로 해임되었다. 대통령실 산하의 국가 안보 국방위원회(Комісія національної безпеки та оборони)에서 제재 부과 분과를 총괄하는 SBU 경제안보 담당 부서장인 아나톨리 로이프(Анатолій Лойів)가 우크라이나 국가 내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인의 호화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상당한 금액의 향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곧바로 해임되었다. 그는 안보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파리마치(Pari Match) 그룹의 사장 생일 파티에 전현직 SBU 고위 간부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따라서 함께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마피아 출신의 '법률 도둑 움까'(вор в законе)로 알려진 세르게이 올레이닉(Сергій Олійник)도 섞여 있었다. 그는 그날 전격적으로 SBU에 의해 체포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또 로이프의 부패 의혹은 그의 어머니가 고급 부동산을 취득함으로 인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자카르파티야에 거주하는 그의 어머니는 수도 키예프와 교외에 총 1,600만 흐리브랴 이상의 고급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어학 교수인 그녀의 수입으로 도저히 취득이 불가능한 부동산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는 우크라이나 기업인들이 '안보 위원회'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뇌물을 제공한다는 소문과 함께 맞물리면서 로이프의 부패 의혹으로 증폭되어 우크라이나 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SBU는 또한 키예프에서 제재를 받은 한 기업의 건물을 두고 우크라이나 군 정보총국(GUR)의 특수부대와 총격전 직전까지 간 것으로도 알려져 키예프 시민들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GUR은 지난 4월 조직의 필요에 따라 키예프에 있는 친러시아 기업의 건물을 압수 수색했다. 그러자 이 회사는 억울하다며 SBU 측에 호소했으며 이 같은 호소를 받아들인 SBU가 GUR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SBU가 진상 파악을 위해 키릴 부다노프 GUR 국장을 조사하려고 나서자, 그의 부하들이 장갑차로 길을 막으면서 저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들의 주변에 몰려들고, SBU가 마침내 물러서면서 양 정보기관 간의 최악 충돌은 피했다고 전해진다. GUR과 SBU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벨라루스 민스크에 열린 러시아-우크라이나의 1차 평화 협상에 참여한 금융인인 데니스 키례요프(Денис Кіреєв)는 협상에 참여한 이후, 2022년 3월에 간첩 혐의로 SBU에 연행됐는데, 이후 사망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그의 죽음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강경 세력의 소행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23년 GUR의 부다노프 국장은 SBU 장교들이 키례요프를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키례요프는 전쟁 초기에 키예프의 방어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특급 정보를 제공했는데, SBU가 키례요프를 러시아와 내통한 간첩 혐의를 씌워 살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키례요프는 젤렌스키로부터 사후 훈장을 받고 키예프의 '바이코보 영웅들의 묘지(Могила Героїв Байкова)'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간첩 누명은 일단 벗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전쟁 초기 SBU와 GUR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바실리 말류크(Василь Малюк) SBU 수장이 급히 부다노프 국장을 만나 두 기관 간의 상호 이해 및 협력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부다노프 국장에 대한 SBU의 도발은 최근 우크라이나 내 여론조사 결과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는 전 우크라이나 군 총참모장이자 현 주 영국 대사인 잘루즈니 및 젤렌스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상위 정치인 3인에 속하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젤렌스키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기 때문에 차후 우크라이나 대선이 시작된다면 대선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헝가리-우크라이나 사이의 스파이 전쟁은 부패로 얼룩진 SBU의 비리를 덮기 위해 헝가리와의 영토 분쟁을 이용해 일부러 헝가리를 자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뭔가 정보부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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