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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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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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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9
  • 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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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7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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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27
  • 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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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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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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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6
  • 필자가 이틀 간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 느낀 소회
    필자는 이번 중국 허커우를 다녀온게, 개인적으로 단행되어진 입국금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실험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7년 만에 중국 운남성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이제 예전의 기술적으로 결함이 많고 낙후된 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녀온 허커우는 운남성에서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해있는 이제 갓 10만 명을 넘은 소도시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운남성(云南省)이다. 그러나 운남성은 최근 중국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운남성과 신장위구르 지역을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거점 성(省)으로 확정했다. 운남성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발판으로 점찍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운남성은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며 면적이 394,000km²로 일본(377,974km²), 베트남(331,690km²)보다 크며, 한국의 3배 면적으로 가히 한 국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다. 게다가 주석, 구리, 아연 등 다양한 금속 광물과 더불어 인광석, 인회석 등의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고 쌀 생산량이 높아 식량 자원 또한 풍부한 곳이다. 이와 같은 운남성에 대한 중국의 투자는 실로 엄청났다. 전통 산업인 담배, 농업, 광업, 관광업과 더불어 하이테크기술 제조업은 날로 성장해 가고 있고, 컴퓨터, 통신 및 기타 전자설비 제조업 또한 집중 육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사업은 정보데이터 산업이다. 우선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위치한 청궁 정보산업단지(呈贡信息产业园区)에서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인터넷, 소프트웨어와 정보기술 서비스 등 관련 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있다. 변경무역과 동남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5G 인프라, 철도와 교통, 신 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산업 네트워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필자의 이틀 간 경험으로 운남성에서 작은 현에 불과한 허커우에서도 꽤 빠른 인터넷 속도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고 감탄을 쏟아낸 바 있다. 중국과 라오스는 2021년 59억 달러(약 8조1,000억 원)를 투자해 운남성 중국 국경에서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400㎞ 길이의 철도를 완공했고 여기에 중국발 고속열차가 다닌다. 특히 태국 방콕-농카이 고속철도가 운남성에서 출발하는 라오스의 선로와 연결되면 중국은 태국의 시암만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은 2016년부터 미얀마에 일대일로의 사업을 구상했고 교부장관 왕이(Wang Yi)가 2017년 11월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人”형 중국-미얀마 경제회랑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중국이 주창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레임의 새로운 개념에 포함된다. 중국 정부가 운남 지역을 개발하면서 미얀마와의 기초인프라 건설 중점으로 한 지역적인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고, 양국의 전면적인 전략 협력관계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다. 더불어 운남성은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의 발원지로 메콩 강의 수원을 장악해 동남아시아 전체의 경제력에 목줄을 쥐려 하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 북부의 젖줄인 홍 강도 운남성에서 발원한다. 한 마디로 운남성은 동남아시아 대륙 국가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중국과의 일대일로를 군부가 절대적으로 밀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이 차우퓨 항이다. 이곳을 제2의 시아누크빌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다. 시진핑은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하여 차우퓨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7개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로써 중동산 원유를 실은 중국 유조선은 차우퓨 항에서 육상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중국 운남성 쿤밍까지 보낸다. 차우퓨 항이 일대일로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내가 잠시 다녀갔던 허커우 현 또한 베트남과의 무역 및 일대일로 산업을 연결시키는 거점으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물품은 "우정의 다리"를 건너 베트남의 국경도시인 라오까이로 유통된다. 게다가 운남성 쿤밍과 라오까이는 철도로도 연결되어 있고, 중월홍강공로대교(中越红河公路大桥)라는 다리를 사이로 킴탄(金城) 통상구와 라오까이 통상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 건설한 카이허고속도로는 수도 하노이를 잇는 노이바이 라오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이는 쿤밍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둥싱-베트남 랑선성의 몽까이 국경보다 허커우-라오까이 국경을 더 키우겠다는 중국 정부의 복선이 깔려 있다. 우선 허커우를 보면 중국이 작심하고 키우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는 일반 중국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여기가 중국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외관은 매우 깔끔하다. 중국의 겨우 10만이 넘는 운남성 작은 현(縣)이 낙후하고 더러울 것 같다는 필자의 편견을 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 라오까이에 비해 대형 호텔과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매우 화려하다. 굳이 현금 인출하지 않아도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같은 QR 코드 결제시스템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거리 곳곳에는 전기차가 돌아다니며 소음도 거의 없고, 전기자전거는 보편화 되어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빈도를 줄였다. 물론 전기자전거 폐 베터리로 환경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안들도 킥보드를 타고 거리 곳곳을 순찰 다닐 정도다. 홍 강 건너 베트남 라오까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인구는 라오까이가 18만 명 정도로 허커우보다 많지만 발전상으로 볼 때, 허커우가 라오까이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느 정도냐면 라오스 같은 촌동네에 있다가 갑자기 세련된 태국 방콕으로 넘어온 느낌과 유사하다. 다만, 중국의 고질적인 민도는 그대로다. 웃통 벗고 다니며 아무데나 담배 물고 다니고, 침 쫙쫙 뱉고, 밤에 고성방가 지르는 것보면 시스템은 화려하고 좋아졌어도 일반 시민의 민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거리가 깨끗하다는게 인상적이긴 하다. 필자가 이번 허커우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없이 낙후할 줄 알았던 운남성이 아주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남아시아 일대일로의 거점답게 각종 산업시스템이 선진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와 같은 자본의 힘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한다는 점에 있다. 민도가 바닥인 것은 그대로지만 운남성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중국의 이러한 현실을 한국 또한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중국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고, 멀리할 필요도 없이 적절히 견제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이미 생활용품, 전자기기 부품, 식재료 등등, 많은 것을 중국의 원자재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의 희토류가 끊기는 순간 재앙이다. 미국만 중국의 희토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게 아니다. 우리 한국 또한 중국의 희토류에 대한 공급망이 붕괴되면 전기차 · 반도체 · 배터리 등 첨단 산업의 부품 생산이 중단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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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트럼프와 일본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의 희토류 관련 협의에 대한 회의감
    트럼프가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양국 간 핵심 광물 협력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첨단 기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 및 핵심 광물의 채굴, 분리, 가공 전반에 걸쳐 협력을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과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희토류의 양이 아니라 정제는 어찌할꺼냐가 관건이다. 미국은 세계 생산량 2위이며 기술력도 자본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정제 시설과 독성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부족하다. 정제 시설과 처리 시설이 없는데 양이 많고 기술이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그 조차도 다 중국으로 가서 정제해 올건데 쓸데없는 협의다. 희토류 산업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국가. 그리고 전기와 물,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환경 오염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이 적고 추진력이 강한 정권의 국가에서만 추진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막대한 희토류 매장량을 바탕으로 198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집중적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정제 및 가공 기술을 빠르게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제력과 장기적인 정책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환경 규제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을 공권력으로 찍어 누르기 쉬운 체제 구조 덕분에 오염을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다. 원석을 강제로 추출하려다 보니 유독한 화학 약품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추출 과정에서 대량의 독성 폐수가 발생한다. 또 희토류 원소들이 방사성 원소와 함께 몰려 있는 특성이 있어 희토류를 찾을 때도 방사능을 측정해서 찾는다.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방사능 오염수도 다량 발생하고 방사능 폐수는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채굴과 추출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선진국 기준으로 재처리 및 정화를 하려면 정말 많은 비용이 든다. 미국이나 유럽은 돈도 많이 들고 각종 환경 규제 같은 것들을 따라야하니 그런 귀찮은 일처리를 하기 싫어 중국에게 맡기고 사올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이 자국 환경 오염과 주민들과 일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자국에서 정제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강행했다가는 트럼프가 탄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울며겨자먹기로 중국에 맡기거나 사올 수 밖에 없는거다. 중국이 환경 오염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인권을 개차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희토류 채굴과 정제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환경, 인권과 희토류 판매로 인한 부를 바꿔버린 나라다. 그렇다고 중국 땅의 환경오염과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까지 고려하면서 희토류를 안 쓸 수 없는거고 중국 인민과 환경의 희생으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컴퓨터, 스마트폰, TV, 냉장고 등 전자 제품의 헤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 시급한 것은 희토류를 대체할 수 있는 광물이나 제품을 찾아보던지, 희토류 없이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시급하다. 모두가 희토류 때문에 중국에 목줄이 잡혀 놀아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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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러시아 제국의 프랑스 문화 사대주의와 한국의 서구 사대주의 의 차이점
    러시아 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후진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제국을 강한 국가,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으면서도 계몽주의 사상이 넘치는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를 자신이 지향할 목표의 국가 모델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문화를 육성하고 모든 정치 체계와 행정조직을 개편했는데 이 모든 것이 프랑스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문제점은 돈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가 재정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부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과 교회는 국가 토지의 약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성직자와 교회의 재산 상당 부분을 국유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관철했다. 이로 인해 국고는 매우 풍족해졌고 그 동안 하나의 권력 집단으로써 러시아의 상류층에 머물며 정국을 주도하던 성직자와 교회는 그 세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던 자유주의 사상과 계몽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볼테르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가들을 러시아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들과의 지적인 왕래를 통하여 예카테리나 여제는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러시아에 이른바 ‘문학평론(Литературная критика)’이라는 문화 장르를 뿌리 내리게 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좋아했지만 이를 러시아 통치 체제에 접목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러시아 통치 체제를 뿌리채 뒤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만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공로는 러시아의 문화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에 있는데 러시아 문화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에 그녀가 미친 영향을 대단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으로 참석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목격했고, 모스크바 외곽에 차리치노 궁전 건축을 직접 구상했다. 그녀가 이러한 문화 수입과 러시아로의 이식이 가능성했전 것은 자신의 고향이 독일이었고, 프랑스 문화를 쉽게 접했었던 이유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니콜라이 노비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иков, 1744~1818)와 알렉산드르 라지스체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адищев, 1749~1802)는 러시아에 프랑스 문화를 입히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설 출판업자이면서, 출판업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작가인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풍자 잡지인「수펄(Трутень)」과「화가(Художник)」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들을 고발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1780년대는 노비코프의 10년이라고까지 불리웠을 정도다. 그는 반차르적인 자유석공회(Freemason) 회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프리메이슨은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한 비밀결사로 그들 사이에서 암호를 사용했다. 한편, 관리 출신인 라지스체프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루소의 저작들을 비롯한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그는 1790년에「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в Москву)」을 출판했는데, 이 책을 통해 농노제의 해악과 농노들의 비참함을 고발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출판 활동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늘어났으며 잡지들이 많이 발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주의 장점을 본 청년 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크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파리에 입성했을 때, 프랑스 문화의 화려함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 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후진적인 상태와 스스로 비교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 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 문제로 깊은 고뇌와 토론이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당시 용감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입헌 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으로 알려진 운동이 생겨난다. 러시아의 청년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Никита Муравьёв),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Сергей Трубецкой)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 결사 구제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서 있는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후진적인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파벨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 동맹은 복지 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국의 첩자들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 군관구가 있는 남부 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 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 결사로 갈라지면서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이들은 러시아 전국에 걸쳐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까지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무려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 불린 이 운동에는 상류계층 귀족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정부는 혁명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왕정주의자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그 중에는 러시아 왕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저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인 아르망 엠마누엘 드 리슐리외(Armand-Emmanuel du Richelieu)는 오데사의 시장으로 봉직했을 정도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 프랑스 귀족들은 부유한 러시아 가정의 가정 교사가 되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춤이나 펜싱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훨씬 이전의 사회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적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자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선진적인 프랑스 문화만을 추종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 심화됨을 걱정하면서도 이를 비판했고 그에 대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차용하면 문화가 더욱 풍요롭게 되고 러시아어도 더욱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차용이 모국어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순수 러시아어 옹호론자였던 알렉산드르 시시코프(Александр Шишков) 당시 로마노프 제국의 교육부 장관은 귀족들 때문에 모국어인 러시아어가 완전히 쇠락할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Александр Грибоедов, 1795~1829)는 1825년에 지은 자신의 희극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와 니즈니 노브고로드 말을 섞어놓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Русское дворянство говорит на языке, представляющем собой смесь французского и нижегородского)”고 개탄했다. 이들은 분명하고 제대로 된 의사 표현도 못하면서 프랑스적이라면 무엇이든 숭배하는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틀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는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법에 맞는 정중한 언어로 자리 잡는다.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고 칭송되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조차도 생전에 여자들에게 쓴 편지의 90%를 프랑스어로 썼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세기 프랑스가 계속된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사라지자 프랑스에 대한 열풍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러시아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귀족들은 프랑스어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국 문화를 돌아다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귀족들 신변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1812년 전쟁 영웅이자 시인이기도 한 데니스 다비도프(Денис Давыдов)는 프랑스어는 아예 모르고 문맹자도 많았던 농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러시아어를 하는 귀족 장교들을 적으로 여겨 도끼나 총을 들고 그들을 맞이하는 등, 신변의 위협이 꽤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열광하던 시기가 막을 내리자 18세기 러시아어에 침투했던 프랑스어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개 단어는 살아 남았다. 러시아인들은 '아피샤(Афиша, 벽보)', '프레사(Пресса, 언론)', '샤름(Шарм, 매혹)', '카발레르(Kавалер, 남자 파트너)' 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식 외래어이다. 이러한 차용어의 역사에 관해 러시아 작가 표트르 바일(Пётр Вайль)은 러시아에 필요한 일부 단어는 살아남았고, 필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단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러시아어 안에 영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지만 사대로 여겼던 프랑스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계속 시위와 폭동을 목격하게 되자,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대를 스스로 접었다. 러시아는 자국 문화의 잠재력을 스스로 돌아다보고, 이를 키워 러시아를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자 문학, 예술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문화를 서양문화와 덧씌운 것을 K-컨텐츠, 한류라 말하고 있다. 굳이 미국 POP을 보지 않아도 미국 POP에서 있을만한 섹시한 컨텐츠를 우리 K-MUSIC에서도 얼마든지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살린 것인지, 이것을 비판하면 꼰대라 그러고, 국수주의자, 국뽕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국 고유문화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문화적으로 서구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화에 종속되지 않게 스스로 깨달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깨달음과 거리가 멀다. 미국 아니면 안 된다며 종속을 외치고 이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들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나라를 들어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하자는 자들도 있다. 심각한 국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좋은 점과 우리 문화의 자주성 정도는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급격히 모든 면에서 우경화 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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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차크리 왕조 및 왕가, 라마 6세와 라마 7세 통치 시대에 이은 태국의 왕가 현대사
    오늘날 아시아에서 군주제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말레이시아, 부탄, 브루나이, 요르단, 일본, 카타르, 캄보디아, 쿠웨이트, 태국이며, 이들 가운데 태국처럼 동남아시아에 속하며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브루나이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州)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하는 왕이자 술탄이고, 캄보디아 국왕은 태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국왕이었지만 1970년 쿠데타 이후 왕권이 약화된 형편이다. 반면에, 태국의 왕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굳건한 권위를 지켜오고 있다. 태국의 국왕은 입헌군주로서는 드물게 정치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존재이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나라로서, 법적으로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력의 상징인 군(軍)도 정치 개입의 명분을 위해서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 관계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의 군부를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의 재임 중에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군부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는데, 국왕은 그 때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심판해 왔다. 1973년 민주화 시위 때는 군사 정부의 사퇴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에서는 민주 세력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 인해 탁신 친나왓(Thaksin Chinnawat)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잉락 친나왓(Yinglak Chinnawat)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 될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산림의 나라인 태국은 전체 인구 2020년을 기준으로 7,400만 명 중 대다수가 불교를 숭상하는 타이 족(Thai)이다. 전통적으로 태국의 국왕은 모든 태국 시민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그리고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그리고 법왕(法王)과 신왕(神王)의 성격을 지닌 정종일치(政宗一治)적인 존재이다. 국왕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을 만드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왕실은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Sukhothai dynasty, 1238~1438년)에서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dynasty, 1350∼1767년)와 톤부리 왕조(Thonburi dynasty, 1767∼1782년)를 거쳐 1782년 라마 1세가 창시한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로 이어진다. 오랜 불교 국가인 태국 국민들에게 불교적 가치는 만사의 최고 기준이며 국가 정체성의 상징일 뿐 아니라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면, 태국 국왕은 헌법이 명시한 것이 있는데 불교도이며 종교의 수호자(Buddhist and protector of religion)로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불자로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교단인 승가의 후원자 역할을 다하는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 속에서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왕권의 전통은 13세기 수코타이 왕조 때 불교 법왕의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래 지속되어 왔다. 법왕의 통치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듯이(As a father rules his children)’ 나라의 통치자가 시민들을 돌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수코타이 시대 국왕의 칭호인 퍼쿤(Phoekhun)의 ‘퍼’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칭호에서부터 법왕을 자처한 당시의 온정적인 통치 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국왕의 칭호인 라마(Rama)라는 단어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되었다. 라마야나의 ‘라마’는 왕, ‘야나’는 길을 뜻하고 있다. 태국에 수용되어 라마키엔(Ramakien)으로 변형되면서 라마가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대서사시의 주인공인 비슈누 신을 태국 형식에서는 ‘프라람(Praram)’이라 불렀고, 국왕은 신의 자녀라는 신왕의 개념에 따라 차크리 왕조에 들어서면서 왕을 ‘라마티버디(Ramatiberdy)’ 혹은 ‘람(Ram)’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를 외국인들이 ‘Rama’라고 영어 형식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국민들은 왕을 칭할 때 이와 같은 외국식 표기를 서술하지 않으며 국왕의 존함과 함께 ‘ㅇㅇ 대왕’이라 하거나 ‘국왕’ 또는 ‘몇 대 왕’이라 부른다. 차크리 왕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차크리 왕조 시대(1782~1851)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통을 답습했던 라마 1세~라마 3세의 치세이고, 중기 차크리 왕조 시대(1851~1925년)는 서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시작을 겪은 근대화 시대로 라마 4세~라마 6세의 치세이며, 마지막 시기가 1932년 입헌 혁명을 통해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정치 체제가 변환된 후부터 오늘날까지로, 라마 7세부터 라마 10세까지의 치세이다. 차크리 왕조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미얀마와의 크고 작은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세수입 부분을 확고히 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태국과 무역을 하는 외국 상인으로부터도 세금을 걷어 국고를 강화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차크리 왕조 중기는 태국의 근대화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라마 4세(재위 : 1851~1868)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국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들이 왕실에서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왕과 나(The King and I)>인데 정작 태국에서는 왕과 왕실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라마 4세는 자발적으로 나라를 개방하여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구의 과학 기술과 통치 방법을 습득해 나갔고 영국과의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와의 조약 체결은 서구가 태국을 문명 국가로 인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태국이 국제적으로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885년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태국은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영사관 설치로 인해 치외 법권을 인정하게 되어 사실상 반주권국(半主權國)의 처지가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881년 1월 1일, 라마 5세의 이복누이이자 왕비인 사오바바 봉스리(Saovabha Phongsri)와 라마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8년, 와치라웃은 크롬 쿤(Krom Khun, Prince of Ayudhia) 작위를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웠다. 와치라웃은 주로 왕궁에서 태국어와 영어를 배웠는데 1895년, 이복형제 바지룬히스(Vajirunhis)가 죽었고, 와치라웃은 새로운 시암 왕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 유학하게 되면서 1898년 샌드허스트 소재 영국왕립군사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하였고, 더햄 경보병대(Durham Light Infantry)에 잠시 임관하였다. 20대가 되는 1899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불링든 클럽(Bullingdon Club) 회원이 되었지만 맹장염으로 인해 1901년 졸업이 무산되었다. 이후 요양하면서 유럽 각국을 방문하게 된다. \ 1902년, 5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5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알폰소 8세(Alfonso XIII) 즉위식에 참석하였다. 8월 9일에는 부왕 출라롱꼰을 대신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대관식에 참관하였으며 10월에는 덴마크를 방문했다. 라마 6세는 영국에 머무르다가 미국과 일본을 경유하여 1903년 1월 시암에 귀환하였다. 1904년, 시암 풍습에 따라 그는 잠시 승려가 되었다. 1906년 부왕 라마 5세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면서 와치라웃을 시암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그는 라마 5세의 승마 동상 주조를 감독하였다. 1910년 10월 23일, 라마 5세가 사망하면서 와치라웃은 시암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그의 통치기 중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7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였다. 실제로 시암 육군을 유럽 전선으로 보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기도 하였다. 참전 결과 승전국이 된 태국은 이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기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폐지를 주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태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에 따라 조약을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무대에서 시암이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마 7세는 1893년 11월 8일 방콕에서 라마 5세와 사오바바 봉스리 왕비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라마 6세의 친동생이다. 그의 이름은 프라차티폭(Frachatipok)으로 9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다. 라마 5세는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왕에게는 전체 7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프라차티폭은 76번째 아이였으며 왕자는 33번째 아들이자, 라마 5세의 아들 중 가장 어린 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자였고 라마 7세는 군대로의 경력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같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06년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 입학을 했으며, 1913년 앨더속(Elthersok) 기지에 있는 영국군 왕실 기마 포병대의 장교 임관을 받고 울위치(Ulwichi)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라마 5세가 사망하자, 라마 6세가 되는 장자 바지라부디 황태자(Bajirabudi)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국 왕실 법에 의하면 황태자가 자식이 없으면 황태자의 직계 동생 중에서 차기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황태제를 임명하게 되어 있다.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 당시 영국과 시암 왕실 군대에 동시에 임관된 상태였는데 국왕이자 형인 라마 6세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황태제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암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라마 6세는 동생인 프라차티폭에게 영국군을 퇴임하고 태국 군으로의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귀향을 한 황태제 프라차티폭은 시암 군의 고위 장교로 들어왔으며 1917년 시암 남자의 의무이자 왕이나 황태제의 의무이면서 절차인 승려로서의 생활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1918년 프라차티폭 왕자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던 조카이며 라마 4세 몽꿋 왕의 자손인 맘 차오 람비하이 바르니(Mam Chao Ramvihai Varni)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왕의 축복 아래 방빠인(Bangpain) 왕궁에서 거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년 뒤, 1919년 시암으로 귀환하여 시암의 군대에서 재복무를 했고, 이후 끄롬 루앙 수코타이(Krom Luang Sukothai)라는 계급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수코타이 궁에서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 두 부부는 라마 6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다. 라마 6세가 1925년에 사망하자, 프라차티폭 황태제는 태국의 32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왕으로써 프라차티폭은 프라밧 솜뎃 프라 뽁끌라오 차오 유후아(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ก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 Phrabat Somdet Phra Pokklao Chao Yuhua)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공식 문서에는 조금 더 길게 표현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민들은 그를 일곱 번째 군주라는 의미인 랏차칸 티 쳇 왕(Ratchakan Thi Chet)이라 부르고, 통상적으로 라마 7세라고 부른다. 비록 프라차티폭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지만, 매우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였다. 그러나 태국의 여러 심각한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마 7세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좌파인 인민당을 부정함으로 인해 좌파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좌파 인민당의 카나 랏 사돈(Khana Rat Sadon)의 당수 프라야 파홀 폰파유하세나(Praya Pahol Phonpayuhasena)에 의해 수상인 프라야 마노뽀콘 티띠따다(Praya Manopokhon Thititada)를 축출했을 때 갈등은 극에 치닫게 된다. 1933년 10월, 한 때 인기 있는 국방부 대신이었던 급진파의 보와라데즈(Bowaradez) 왕자가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임을 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와라데즈 반란군은 지방의 성을 일부 점령하고 방콕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왕실을 무시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태국 왕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남쪽의 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돈므앙 근처에서 격렬한 교전 끝에 보급이 취약한 보와라데즈 왕자의 군대는 패배를 하였고,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라마 7세가 왕자를 지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그 폭동은 왕의 존엄을 손상시켰다. 반란이 시작되자 왕은 정부군에게 즉시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1935년 아난타 마히돈(Anananda Mahidon)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라마 7세는 람파이파니 왕비와 함께 영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태국의 왕실이 약해지다 보니 태국의 왕실인 차크리 왕가와 현재까지의 근대 왕가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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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태국의 근대화, "차크리 개혁"과 동남아시아 중립외교의 근간을 구축한 "대나무 외교"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지칭되어지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 1868~1910)은 서구 지향적 개혁의 수행자로 태국 근대화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그는 소위 ‘차크리 개혁’이라 부르는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의 도입,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노예제도를 비롯한 신분제도의 폐지, 공식 교육기관의 창설, 서구식 의술과 의복의 도입과 같은 대변화를 노리며 전통적인 태국 국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비록 절대 군주 체제 하의 왕이었으나 라마 5세는 왕의 의무, 국가 통치가 왕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갖춘 왕으로써 태국이 정치적으로도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라마 7세부터 현 국왕인 라마 10세(1952~ 현재) 시기에 가장 주목할 변화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있다. 이는 라마 7세가 재위하던 1932년 태국의 소수 지식 계층들이 일으킨 무혈혁명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지 150년 만에 일어난 대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을 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들은 카나라싸던(Khana Ratsadon)으로 불리는 인민당을 창설하여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노리려던 차, 1932년 6월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의 별궁에 간 사이에 궁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자, 라마 7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인민당의 쿠데타는 국가 통치제의 전환을 가져온 무혈 쿠데타로 태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32년에 발생한 혁명은 서구처럼 시민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군부와 민간 관료로 이루어진 소수 지식인 계층에 의한 혁명이다. 특히 1938년 이후 태국의 정치권력은 무력을 앞세운 군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의 도입으로 태국의 왕권은 잠시 약화되는 듯하였으나, 이후의 왕인 라마 9세의 헌신적이면서도 정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행보를 통해 오늘날 차크리 왕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왕조로 부활하게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온 차크리 왕가의 노력으로 인해 태국은 내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으로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태국 국민들 또한 전통적으로 탐마라차라는 불교 법왕의 자질을 갖춘 국왕들을 신뢰해 왔으며 그 통치력에 복종해 왔다. 태국 국왕의 정치력과 통치 능력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여느 나라의 왕들과 분명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국왕의 통치력은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조의 세속화 및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변화에 따라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이라는 국가 이념의 유용성과 입헌 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통치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차크리 왕가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국왕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우선 라마 4세인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 1804~1868년, 재위 : 1851~1868년)을 들 수 있다. 라마 4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7세기부터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에서 시작된 서구의 식민 지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대륙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시기였다. 결국 태국에도 서구 세력이 미치게 되자 라마 4세는 자구책으로 왕 주도에 의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185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홍콩 총독 존 바우링(John Bowring)을 방콕에 보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던 시대에 라마 4세는 버마와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바 있었고 따라서 무력으로는 영국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1855년 4월 18일 영국과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태국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전략적 외교를 감행하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러한 태국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바람에 따라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처럼 정세에 따라 더 강한 세력에게 기우는 외교 정책을 유연하게 취함으로 인해 약소국의 실리를 추구해 내는 외교책이다. 결국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대륙 지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해양 지역의 모든 국가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라마 4세의 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대나무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태국 외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져 온다. 몽꿋 국왕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로는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왕족에게 엎드려 배례를 하는 부복제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 노역의 축소, 최초의 영어 교육 실시, 군대 조직의 개편을 통한 육해공군 등 군대의 현대화, 경제 안정을 위한 화폐 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진흥에 노력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략하던 시기에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 기구의 개편과 지방 행정 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적으로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1897년 러시아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10개국을 1차적으로 순방하였고, 1907년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순방하여 견문을 축적하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여야 했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지만, 라마 5세는 서구 열강 틈에서 외교를 비롯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처럼, 라마 4세와 5세로 이어진 태국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교육을 받은 왕족과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이 국가의 변화를 주도하였는데, 이후 일어났던 1932년 입헌 혁명도 그와 같은 일례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 이어진 개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태국의 사회 및 정치, 경제 분야의 변화는 각계의 상류 계층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9월 5일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실각되고, 태국 하원 투표에서 새 총리로 선출된 아누틴 찬위라꾼 품짜이타이당 대표는 보수파 성향이다.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얻어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그 또한 자수성가 재벌 출신이지만 탁신 가와 다른 면이 있다면 탁신 가는 왕실과 거리를 두는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진보파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왕실의 절대적 보위대인 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아누틴 찬위라꾼은 전형적인 방콕 출신이다. 게다가 조산화교의 탁신 가와 다른 광동화교 출신이다. 광동화교는 태국에 자리 잡을 때부터 왕실을 수호하고, 군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전형적인 태국 보수의 상징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누틴은 집권 4개월 이내 의회 해산, 개헌 추진 등 인민당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총리직에 올랐다. 실제로는 조기 총선을 위해 임시적으로 맡은 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누틴이 조건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을 그가 4개월 이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겉으로는 캄보디아에 밀려 태국 정국이 조용해 보일 수 있지만 현재 태국 정국은 안갯 속이나 마찬가지다. 이럴 때,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대나무 외교"의 기조도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태국은 라마 4세와 라마 5세의 현명함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수호할 수 있을까? 지금 태국 내부는 입헌 혁명 이후 가장 위기 순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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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훈 센의 1인 사유화 된 국가, 캄보디아
    훈 센은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캄퐁참 성에서 조산(潮汕) 화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훈 센은 운승(雲昇)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훈 센'은 운승의 조주(潮州) 방언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조산(潮汕)은 중국 광둥성 남동부의 저우산(潮州), 산터우(汕頭) 지역을 지칭하는 곳으로 대부분 태국과 캄보디아에 걸쳐 형성된 남방 중국계로 해당 지역 출신들은 대개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시기 때, 만주족의 압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훈 센의 가문과 그 때 이주해서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보고 있다. 이웃인 태국에 탁신 친나왓의 원적도 조산(潮汕) 산터우(汕頭)로 종족으로는 객가족(客家族)이지만 출신이 조산 지역이기에 대개 같은 조산화교로 들어간다. 그러한 인연으로 훈 센 가문과 탁신 가문은 절친한 고향 친구였던 셈이다. 물론 탁신의 출신지는 치앙마이지만 그래도 원적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화교들의 특성상 두 사람과 두 가문은 애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훈 센은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론 놀 정부군과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으로 인해 점차 크메르 루주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크메르 루주에서 2인자인 키우 삼판(Khieu Samphan)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 지대의 자국민들을 제거하고 국경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훈 센이 프놈펜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위협으로 보았던 키우 삼판이 내친 것이었지만 훈 센은 베트남을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키우 삼판은 베트남을 아주 혐오했다. 키우 삼판이 폴 포트에게 훈센을 인민재판에 세우자 주장하면서 여기에 이엥 사리가 당시 훈센의 뒷조사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위기를 느낀 훈 센이 아예 베트남으로 들어가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그는 1977년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으며 북경의 인민전당대회에도 여러차례 북경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났다.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훈 센은 중국에서 돌아와 여러 요직을 거쳐 1982년 헹 삼린(Heng Samrin)에게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다. 이 때 훈 센은 베트남보다 등소평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등소평은 훈 센을 대놓고 밀어주었고,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를 추진해 대대적으로 개방 정책을 내세우자 훈 센은 1985년 32세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에 밀려 제2당에 그쳤다.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로 캄보디아의 둘째 왕자이다.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인해 캄보디아 왕정이 폐지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했고, 1983년 아버지가 방콕에 있을 때 대리인으로서 푼신펙을 이끌면서 정계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훈 센은 군을 장악했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라나리드는 훈 센 제1의 정적으로써 오랫동안 훈 센과 대립했는데 라나리드의 배경에는 미국이 존재했고 훈 센의 배경에는 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7년 7월 5일, 라나리드가 해외 순방 중일 때 훈 센이 프놈펜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훈 센은 시아누크 궁전을 포위하고 시아누크 왕을 겁박하여 라나리드를 해임하고 훈 센을 단독 총리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라나리드-훈 센 공동 내각은 4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후, 훈 센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과 푼신펙 소속의 당원들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 온 라나이드 푼신펙에 속한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포된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푼신펙 당원들은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 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눌러 손바닥 근육을 파열시키고 손등 뼈를 부수는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이 라나리드 측 당원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 전기 고문은 기본이고 빨갛게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 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 크메르 루주와 비슷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훈 센은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탄압했고, 각종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탄압했다.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 동안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장남인 훈 마넷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에 집회 장소에 간이 텐트를 치고 임시 거처로 삼아 장기 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캄보디아의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어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설이 열악한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로 수감되었다. 따라서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자유 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설치한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용 차량을 동원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2013년 7월에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다. 그러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를 조작하는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정선거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야당은 이에 선거 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물론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연임이 확정된 이후 훈 센은 앞으로도 시위를 벌이는 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이와 같은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조치에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 비난해야 하고 훈 센의 독재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 TV(Bayon TV)와 신문사 캄푸치아 트메이 데일리(Kampuchea Thmey Daily)는 그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가 소유하고 있다. 압사라 TV(APPSARA-TV)는 캄보디아 여당 인민당 소속인 사이 삼 알(Say Sam Al)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 TV(My 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 캄보디아인 사업가이자 로열 그룹(Royal Group)의 회장인 끗 멩(Kith Meng)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옥냐(Okhna)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끗 멩과 바로 양대 산맥 기업이 프린스 홀딩스의 천즈(Chen Zhi)다. 모두 중국계인데다, 중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다. 토지양허는 정부가 특정 목적과 기간을 정해 국가 소유의 토지 사용권을 민간 또는 외국의 기관에 부여하는 계약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은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놓은 정책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26일 역시 예상대로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내려온 중국인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피해 피난갔던 인구보다 많은 현지 캄보디아인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토지와 각종 회사들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잠식해버렸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다는 역사적 공로가 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중국인들이 농지들을 잠식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침탈당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동안 연간 7%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 이룩해 놓은 고속 성장과는 달리 국내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 대형 의류 기업들이 모여 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적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 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 노동자들에게 무장 경찰들과 공수여단들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훈 센의 직계 가족들이 보유한 국내 민간 기업들은 114개에 달하고 있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이며 30개 기업은 ‘1인 소유 회사’로 훈 센 총리의 가족 중 누군가가 100% 가지고 있다. 훈 센의 큰딸 훈 마나는 바이욘 TV(BTV) 주식을 100% 가지고 있다. 훈 마나는 라디오와 신문, 방송 등 언론사 6개를 소유한 언론 재벌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훈 센 가문의 숨겨진 자산까지 포함하면 5억~1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2017년 국가 예산 50억 달러의 10~20%에 해당되는 규모라 볼 수 있다. 캄보디아가 집권 여당이 일당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훈 센 1인이 다스리며 독재하는 체제다. 훈 센 가문은 국방과 경제, 정치, 사법 등 국가의 공공 영역들을 남김없이 사유화 했으며 국왕인 노르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는 명맥만 국왕이지 사실상 훈 센이 캄보디아의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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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5-11-01
  • 미국이 러시아에게 잡혀 있는 치명적인 약점, 농축우라늄(Enriched Uranium)
    트럼프가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한다. 그런데 그런 제재는 이미 바이든 때도 했던 제재라는 것이다. 그런 제재를 해봤자 미국은 제 발등만 찍을 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보다 더한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농축우라늄 수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농축우라늄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지난해 5월에 제정했음에도 미국의 원자로 연료 최대 공급국은 러시아다. 2024년 러시아가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사용된 농축우라늄의 20%를 공급했다. 다만 미국의 에너지 정보국은 대체 공급원이 없거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2028년까지 예외를 허용했다. 현재까지 예외 승인을 받은 기업으로는 컨스털레이션 에너지와 센트러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원자력 발전 확대를 예고한 이후에 러시아 에너지 부분 제재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미국은 원전 연료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우라늄 공급이 상당히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미국에서 10년 동안 부족할 우라늄 물량이 1억 8,400만 파운드(약 83,460톤)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미국의 3년치 우라늄 소비량에 해당된다. 미국은 지난해 4월 약 30여년만에 신규 가동된 보글(Vogtle) 원자로 1, 2, 3, 4기를 포함해 현재 총 9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통해 전체 전력의 약 18%를 충당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캐나다산 우라늄이 전체의 2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호주산 우라늄이 각각 21%씩으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은 전체 구매량의 5%에 불과했다. 우라늄에 대한 탈러 현상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우라늄에 한 해 탈러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농축우라늄을 러시아에 의존했던 이유는 과거 러시아의 무기 등급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발전소에 공급하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으로 원자력 발전 원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의 농축 우라늄 생산국 중 하나이며, 미국의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이 핵확산 금지 조약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아왔다. 1993년부터 미국과 러시아는 'HEU-LEU'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핵무기 해체 과정에서 나온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전환하여 미국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했다. 러시아는 미국 전력의 약 10%를 꾸준히 공급해준 셈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우라늄 농축 기술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자체 생산 능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농축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과거에 농축 우라늄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이를 생산하는 자국 업체가 없다. 러시아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낮춰 민수용으로 전환한 이후, 채산성이 떨어진 미국 업체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에서 우라늄을 채굴한다 해도, 러시아로 보내 농축시킨 다음 가져와야 한다. 미국은 우라늄을 농축시킬 수 있는 설비, 기술, 장소 등이 거의 없거나 시설이 노후화 되어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제재해도 그동안 여유있게 그러거나 말거나 했던 이유는 미국이 자국의 원자로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 러시아로부터 계속 우라늄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제재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라늄을 수입한다해도 어차피 러시아로 보내져 농축시켜 올 것인데 광물 금속들을 쌓아 놓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러시아가 그나마 미국에게 우라늄 수출 중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다. 러시아의 농축 우라늄이 제대로 원자로에 공급되지 않으면 전력 생산은 물론이고, 냉각수의 온도가 급상승해 핵분열 및 폭발로 인한 방사능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에너지 부분에서 제재한다 하지만 농축우라늄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기에 바이든 이상으로 제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이 직격탄을 맞는다 하던데, 중국은 미국에 희토류 약점을 잡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원유 수급의 활로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란에서부터 원유 수입을 늘린지 오래다. 즉, 러시아로부터 수급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디는 트럼프와 등을 돌린지 오래고, 중국과 화의를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회랑을 통해 원유와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미국 은행에 대한 의존을 벗어난지 오래다. 거래는 위안화로 하고 있고, 러시아로부터는 루블로 거래하고 있는데 미국의 제재를 받는다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에 흔들렸다면 트럼프가 인도에 관세 50% 부과했을 때, 진작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는 여전히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축적할 것이고, 트럼프의 경고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무시할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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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미, 중 간에 합의 볼 숨겨진 또 다른 산업, 철강 산업
    경주 APEC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이에 맞춰 시진핑도 한국에 왔다. 이로써 미국과 중국의 만남이라는 이른바 오랜만에 "빅딜"이 한국에서 성사된 셈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미 관세 협상 문제, 한중외교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과연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날 것인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서 할 얘기는 크게 대두 문제와 희토류 문제, 그리고 관세 협상 등등이겠지만 이 부분들은 예전에 칼럼에 쓰기도 했고 포스팅도 했기에 넘어가고 다른 얘기들에 대해 쓰기로 한다. 내가 중점 지어 언급할 부분은 바로 철강업이다. 철강산업은 해당 국가의 제조업을 살펴보는 지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기본이다. 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은 고대 철기 시대에 철제 무기와 철제 도구가 전쟁 무기 및 생산량의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부터다. 당시 국가의 부를 판별하는 것은 철과 소금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철은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 하고, 막강한 무기로 국방을 담당했기에 예로부터 국가의 근간 사업이었고,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부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척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의 수출과 유출은 국법으로 엄히 금지되기도 했다. 철은 근현대 시대에도 산업혁명의 주요 광물 중에 하나였다. 철을 이용해 중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구 열강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이 대영제국이 된 것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내 절대 강국이 된 것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는 AI 산업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철강산업은 AI를 구축하는데 기본이 된다. AI를 구성하는 컴퓨터의 기본 칩들이 철과 금속으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철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광물이고, 가장 많은 철광석을 보유하고 이를 제련하여 수출하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강대국이다. 철강 생산량은 중국, 인도, 일본, 미국, 러시아 순이고, 철강 수출국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인도 순이다. 모두가 알 만한 강대국들이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점점 철강 생산과 수출에서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제조업의 근간은 철강이고, 철강이 곧 국력의 상징이다. 미국이 점점 이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첫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버지니아 주에 첫 철강공장이 개설되었고, 1643년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첫 철강회사가 설립되었다. 1644년에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양질의 석탄과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초창기 미국 제조업의 중심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01년에 US 스틸이 설립된다. 당시 US 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에 하나였으며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회사였다. US 스틸의 설립으로 인해 20세기 초의 미국의 철강 산업은 유럽의 철강 산업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US 스틸 설립의 배경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카네기 철강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카네기 철강은 철강 제조 능력의 발전과 시장 점유율 확장에 크게 몰두하고 있었으며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 이상 인하하기 시작하였다. 가격은 성공할 수 있는 척도이자 핵심 요소였다. 철강 생산 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으며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 없이 가동되면 될수록 철강 생산 비용은 더욱 저렴해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만들고, 시장의 수요가 적게 나타날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에 몰린 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 정도로 책정하게 했다. 이와 같은 비용의 저렴화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으로 공급 능력이 생기게 되었고, 낮은 가격으로 인하여 유럽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추고 각 투자자들의 시설 투자로도 이어지게 된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이 만나게 되었고 이는 다수 회사들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게 되었고 이러한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 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해 거대 철강 기업인 US 스틸을 탄생시켰다. US 스틸은 세계적인 대기업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8,000명의 고용자들을 확보하면서 900만 톤애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했다. US 스틸은 60%의 이상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불어나 1971년에는 두 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이상의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 오일이 분할될 당시보다 7배 이상 컸다. 그동안 유럽 열강들과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 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유럽 열강을 한참 뛰어넘어 결국 세계 철강 시장의 근본이자 상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US 스틸의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경영자였으며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이득을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 등의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낮추어 큰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다르게 개리는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 그 가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큰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 우위를 준 셈이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많은 경쟁으로 인한 성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이와 같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게 된다. 1902년에 당시, 공정 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했지만 재정 위원회에 의해 거절당하게 되었고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이 도입해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US철강은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게 되고 결국 경쟁에서 밀린 US 스틸은 1926년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라이센스 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된다. 이 공법은 US 스틸에 제출되었으나, 재정 이사회는 이 공법을 또 거부했고, 결국 US 스틸은 몇년 후, 다른 경쟁 기업이 성공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자 비슷한 시기에 생산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 압연이 발명되었다. 철판 연속 압연은 1902년 US 스틸에서 이미 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임으로써 라이센스 금액을 지급했다. 사내의 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이 빠져나간 빈 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다른 국가들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 3배 이상 성장했지만 전통의 철강 강국인 영국과 독일이 붕괴된 나머지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안주하는 상태가 된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 철강을 사들여 전후복구를 했기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고, 미국은 떼돈을 벌었다. 전후 막대한 양의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최신 설비를 이용하여 설비를 확장했다. 당시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 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 열 교환기로 녹였다. 1954년 90%이상의 미국 철 생산은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를 혼합하여 생산했다. 하지만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게 되면서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재등장시킨다. 베세머 변환기는 공기를 액체 선철의 아래에 불어 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 위로 불어 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인 질소취성, 제한적 광석 이용 등을 없애고 장점인 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 낮은 설치 비용 등을 더 부각시켰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자 US 스틸은 이번에도 신기술 도입에 주저했다.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았고 가격 또한 비쌌기에 포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US 스틸은 결국 1964년이 되서야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해 생산하면서 US 스틸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개별적인 잉곳 대신, 연속적으로 철 슬라브를 생산해야 하기에 압연을 제거해야 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 문제가 연달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지만 새롭게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에 성공한 서독과 일본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참고로 1975년에 미국은 9% 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앞서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새로운 방식의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 요소 비용은 미국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1955~1970년 사이의 미국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 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 당시에 이는 매우 가파른 상승세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일본이나 서독 등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최강대국인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결국 1968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인해 서독과 일본의 철강 생산 기업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초기 US 스틸의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다. 이처럼 떨어진 이유는 새로운 혁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고, 회사 경영 마인드 또한 구식이었다.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 된 철강 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하게 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 막대, 플레이트, 빔, 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1960년대 후반, 미니밀(Miny Mill)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가 없어지면서 미니밀은 거대 철강 생산 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규모 또한 슬림해졌다. 게다가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에 양 또한 충분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었지만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US 스틸은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 기업들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크고 비쌌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수익성에서도 열세에 놓였다. 결국 US 스틸은 10,000명이 넘는 고용자들을 구조 조정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이르러 2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US 스틸은 철광업과 운송업, 다리 건설업 등을 잇달아 포기하게 되었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퇴진했다. 그리고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했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 시설에서 생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 시설들은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설로 매우 노후화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 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였으머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하게 된다. 이처럼 철강 생산을 감축한 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지만 US 스틸은 여전히 미니밀과 경쟁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키게 되자 이는 US 스틸 뿐 아니라 다른 철강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이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을 의미한다. US 스틸 또한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 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수입 철강재 점유율이 15%를 넘으며 미국 철강업계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었다. 질 좋은 철광석이 미국 본토에서는 서서히 바닥을 들어냈고,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막대한 양을 수입했다. 거기에는 일본과 우리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새로이 철강 산업의 강국으로 진입했고, 막대한 양의 질 좋은 철광석이 중국에서 채굴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철강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은 세계 1위 철강 수출과, 철강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워한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철강 수입만큼은 제한적으로 하려 했다. 결국 혁신에도 뒤지고, 수입 철강에만 의존해야 했던 기업들은 잇달아 통폐합에 나섰다. 그런 와중에 작년 2024년에는 미국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US 스틸이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면서 사실상 매각에 가까운 합병이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일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 트럼프 현 정부는 2025년 3월 12일부터 기존 대체 협정(쿼터, 면제 등)을 폐지하고, 25% 추가 관세를 모든 주요 철강 수출국에 전면 재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관세는 캐나다, 멕시코, EU, 한국, 일본, 브라질 등 미국과 협정을 맺었던 국가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2025년 6월 4일부터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했다. 따라서 한국산 철강 제품은 50%의 관세가 부과되며, 철강이 포함된 파생 제품에도 이 관세가 적용되며 이는 중국도 포함된다. 미, 중 간의 회담에서 분명히 이 문제도 언급될 것이다. 미국산 대두를 중국이 팔아주면서, 희토류와 철강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대한 관세를 낮추는 것을 협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양질의 철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미국의 제조업은 철강의 혁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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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 유보 이후 기약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가 핵 추진 순항 미사일인 ‘부레베스트니크’를 시험 발사했다. 러시아 측 발표에 따르면 이 핵 추진 순항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사실상 무제한이고, 핵탄두를 탑재하고, 세계 어디든 타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시험 발사에서 보면 이 순항 미사일은 약 15시간을 장기간 비행하면서 최소 14,000킬로미터를 비행했다. 이것은 순항 미사일이 핵 추진체를 동력으로 삼고 있으므로 공중에서 장시간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현존하는 서방의 방어 시스템을 대부분 회피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순항 미사일은 우선 미사일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비행기처럼 비행항로를 바꿀 수 있고 요격기로 공격할 경우 회피 기동도 할 수 있다. 둘째, 순항 미사일은 저고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지상 레이더로 탐지하기가 어렵고, 대공 미사일로 요격하기가 어렵다. 셋째, 순항 미사일은 정밀도가 높아서, 적의 전력 시설, 탄도 미사일 발대, 공군 비행장 등을 타격할 수 있다. 그런데 순항 미사일이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도 있다. 순항 미사일의 단점은 첫째, 순항 미사일이 표적까지 비행하기 위해서는 GPS 위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순항 미사일은 속도가 빠르지 않아 무용지물로 될 수 있다. 둘째, 순항 미사일은 초음속 순항 미사일을 제외하고 마하 1 정도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비행기처럼 날다가 자폭하는 방식으로 타격하는 미사일이기 때문에 화력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순항 미사일인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200킬로미터∼2,700킬로미터이며 재래식으로도 사용하고,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으며, 전천후 장거리 타격용 아음속 순항 미사일이다. 특히 토마호크 미사일은 걸프전, 코소보 전쟁, 아프가니스탄 등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바가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지원받으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젤렌스키의 생각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라 하겠다. 키예프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직선거리로 약 770킬로미터인데, 토마호크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된다면, 러시아로서는 토마호크 미사일의 사정거리에 모스크바가 들어오게 되므로 실로 위협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토마호크 미사일이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인 S-300, 혹은 S-400(이후 S-500로 강화될 것임)로 요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방공망이 가동되더라도 피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문제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토마호크 미사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실전 배치하고 당장 사용이 가능할까? 없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구축함에서 발사하는 함대지 미사일,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크루즈 미사일이 있으며, 지상 공격 미사일이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수직발사시스템형(수상함용), 어뢰관형(일반 잠수함), 캡슐 발사 시스템형(핵 잠수함용)의 종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는 이에 합당한 해군 함정이 없다. 그렇다면 지상 공격 발사일은 가능할까? 이것도 미군이 지상 발사대와 이른바 타이폰 시스템으로 일부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실제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도 불투명하다. 러시아가 우려하는 부분은 토마호크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도 문제이지만, 예를 들어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었을 때 핵탄두 탑재 여부가 탐지되지 못할 경우 – 실제로 탑재되었다면 – 방사능 낙진에 따른 피해도 우려할 수밖에 없다. 토마호크의 우크라이나 배치는 푸틴으로서는 그러면 서방과 러시아가 핵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반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정상 회담이 연기되고,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회담에서 이미 충분히 피 흘렸다는 말로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에 신중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토마호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하는 문제는 일단 유보되었다. 푸틴은 이번 트럼프와의 정상 회담이 불발되자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형 핵 추진 미사일 실전 배치를 시사함으로써 다시 한번 유럽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유럽 국가들은 토마호크의 유럽 배치를 기대하고 있지만, 문제는 현재 토마호크 미사일의 재고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토마호크 미사일에 관해 일본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10척의 구축함에 40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도입해 실전 배치하려고 한다. 이것은 실로 중국과 북한에 위협이 되기도 하는데 향후 동북아에도 이를 둘러싸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될 수 있겠다. 필자는 오래전에 이미 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중국을 겨냥해서 실전 배치하는 것에 관해 상당히 우려해 왔다. 당시에 필자는 서서히 중국이 부상하면서 향후 국제 정세가 미국과 중국으로 바뀌게 되면 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인해 동북아에서 때아닌 군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제 바로 그것이 현실이 되고 보니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토마호크 미사일 배치 문제가 나오자마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보도가 되긴 했지만, 결국 트럼프의 배치 유보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토마호크 없이 전쟁이 끝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면 속내는 알 수 없지만, 해프닝인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가 워낙 변통이 심해 언제 태도를 바꿀지는 알 수 없다. 젤렌스키가 장거리 미사일을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았어도 결정적으로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어서 이를 배치하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서방에 기대면서 그 비싼 토마호크 미사일을 운운하다니, 도대체 젤렌스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할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현재 수준에서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도 종전도 합의가 실질적으로 되지 못함으로써 소모전만 지속되고 있다. 푸틴은 승기를 잡았는데, 굳이 여기에서 물러날 명분이 없다. 반대로 젤렌스키는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를 되찾으려는 생각밖에 없다. 트럼프는 전후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서로 각자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을 뿐이어서 협상이 쉽지 않아 상당한 난관이 예상된다. 관건은 젤렌스키가 이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고, 이 전쟁을 끝낼 수도 없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더 이상 젤렌스키에게 희망을 주지 않고 그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안타깝지만 상황이 그렇다! 젤렌스키에게는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가 근본적인 물음이 따라다닌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젤레스키가 러시아를 상대로 무모한 전쟁을 하고 있는지는 정치적인 것 이외에 달리 없다. 굳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도 이를 거절하고 협상보다 전쟁을 선택한 까닭도 달리 설명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전쟁 중에도 여러 차례 러시아 쪽에서 전쟁을 이 정도에서 멈추자고 했지만 이를 거절한 것도 젤렌스키였다. 서방의 자원으로 잠시 승리에 도취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다. 정치 지도자라면 때론 과감하게 냉정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기꺼이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젤렌스키는 지도자로서 부적합하다. 기껏해야 토마호크 미사일이라도 배치해서 뭔가 ‘게임 체인저’를 노린다는 것도 앞에서 기술된 것처럼 매우 부적절하다. 이것은 오히려 지금까지 그래도 일부나마 논의된 모든 협상의 성과들을 모조리 폐기해 버리는 것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계속 돕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뭘 실질적으로 돕겠다는 것도 매우 불투명하다. 과거같이 유럽의 목소리가 그래도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니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유럽은 오랫동안 평화를 그래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핵심은 러시아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 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룰 유럽의 지도자는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첩경을 벗어나 멀고 험난한 길로만 가고 있고, 유럽의 안보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으니 언제 종전이 될지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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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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