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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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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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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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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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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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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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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키르기스스탄은 아탐바예프, 젠베코프, 자파로프의 권력투쟁 속에서 반복된 혼란을 겪어 왔다. 올리가르히 출신 아탐바예프는 대통령 재임기 동안 개혁과 연정을 추진했지만 남·북부 갈등, 부패 의혹, 전자개표기 도입 논란 등으로 정치적 균열을 키웠다. 이후 젠베코프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체포되었고, 2020년 총선 부정 의혹으로 발생한 제3차 튤립 폭동 속에서 석방과 재구금이 이어졌다. 결국 자파로프가 집권하며 정국이 재편되었고, 이 과정은 키르기스스탄 정치사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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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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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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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 파리 바타클랑 테러 10주년을 계기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근절 방향을 재검토한 글이다. 외부의 군사적 토벌은 오히려 테러 단체에게 순교 명분을 주고 내부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가 유지되는 구조와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향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무슬림 내부의 개혁과 내부 세력이 극단주의를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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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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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타클랑 소극장 테러 10주년,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단체들을 근절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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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 터키 최대 도시인 인구 1,600만의 이스탄불의 시장은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였으며 2024년의 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무라트 쿠룸(Murat Kurum) 전 환경장관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스탄불 시장의 임기가 5년이니 최고 2029년까지는 시장으로써 재임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이스탄불의 시장이 된다는 것은 장래 대통령 후보로 직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터키의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터키는 대통령은 행정상의 수반이지만 실권은 없었고 총리가 모든 갖고 있었던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총리가 되었고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총리 시절 포함, 그가 권좌에 22년 동안 앉아 있는 셈이다. 202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 때,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이스탄불을 확보해야 했던 아주 중요한 선거였다. 무라트 쿠룸이 당선이 되어야 터키 최대 도시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선거에 이어 2024년에도 이스탄불을 잃는다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된 상태에서 정치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마모울루의 입장에서는 2024년 선거에서도 연승을 하게 된다면 차기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즉, 1,600만 이스탄불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8년 앙카라 대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2024년 선거에 사활을 거는 이유 중에 지방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헌법 개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중요했다. 터키의 입법부는 지방 의회 대표자 성격이 강하다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각지를 정의개발당이 장악하고 특히, 1,6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 개헌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에르도안의 종신 집권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판단된다. 종례 터키 헌법에는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될 때는 5년 추가 재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재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을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의 과반은 무조건 필요했다. 이스탄불에서 승리한다면 거의 50%의 확률을 종신집권으로 간 것이나 다름없다. 에르도안의 나이는 1954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2024년 이스탄불 선거가 에르도안이 80세까지 집권하느냐 마느냐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이게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개헌을 하게 되면 에르도안의 종신 안이 화두가 될 것이다. 에르도안이 종신 집권을 하느냐, 아니면 현 이스탄불 시장 이마모을루가 2028년 에르도안의 강력한 정적이 되느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달렸다. 결국 51.14%의 득표율로 39%의 특표율을 획득한 무라트 쿠룸(Murat Kurum)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결국 에르도안은 종신 집권을 위한 개헌이 무산되었고, 이마모을루는 2028년 차기 대권 주자로 직행하게 되었으며 에르도안의 최대 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마모을루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기에 이같은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화인민당의 거물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는 지난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에게 참패했다.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도 클르츠다르을루의 당내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례로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툰젤리 출신 주민의 장례식에 외즈귀르 외젤(Özgür Özel) 당 대표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공화인민당 이스탄불 지부의 외즈귀르 첼릭(Özgür Çelik) 대표가 직접 조문을 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동향 출신 측근이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예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행위는 분명 아니다. 그만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영향력에 대한 예우와는 별개로 외젤 대표와 이마모을루 시장을 위시한 계파가 당권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당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점차 감지되고 있다. 이마모을루는 "당내에 변화가 필요하다(Parti içinde değişime ihtiyaç var)"고 주장하며 '변화(Değişim)' 라는 신흥 계파를 결성하고 외즈귀르 외젤 대표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도 여기에 합류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지지해온 대의원 출신 예비 후보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13년간 당권을 유지한 클르츠다로을루는 당 대표를 내놓고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마모을루와 외젤, 야바시의 신(新) 체제가 구(舊) 체제를 마침내 밀어내 버린 것이다. 이후 2024년 하반기에 2028년 대통령 선거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마침내 이마모을루는 에르도안과 오차범위 밖 우세를 기록하게 된다. 에르도안은 아마 여기에서 위기를 느꼈던듯 싶다. 물론 이같은 상황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이마모을루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2028년 대선에 에르도안이 다시 당선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외즈귀르 외젤과 앙카라 시장인 만수르 야바시, 이즈미르 시장인 체밀 투가이(Cemil Tugay) 등이 이마모을루에게 세를 결집시켜 준다면 터키 대선에서 대통령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게다가 현재 터키의 5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부르사, 안탈리아)에서는 에르도안이 ISIS인 HTS를 움직여 시리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5대 도시 내에서 에르도안에 대하 지지율 급락이다. 이처럼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면 터키 의회에서 조기 대선이 요구될 수 있다. 특히 현재 터키의 의회는 여소야대의 형태이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이 야당인 공화인민당에 수적으로 열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인민당이 조기 대선을 주장한다면 에르도안 입장에서는 큰 정치적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흔히 나타나는 것은 "정적 제거"다. 정적을 제거하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권 시기를 더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제거를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은 "부패 혐의"를 내세워 숙청하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부패 혐의" 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으로 그런 식으로 털어내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전, 에르도안이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가장 보편적인 제거 방식을 선택했고 지난 19일,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 조사를 명분으로 체포 및 구금했다. 이마모을루 시장 외에도 100여 명의 기자도 함께 구금되었는데 이는 이같은 사건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 이를 일게 된 이마모을루의 지지자들이 몰려와 체포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요인을 일찌감치 제거하기 위해 기자들도 함께 체포해버린 것이다. 체포 및 구금, 교도소로의 이송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결국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순식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마모을루의 이스탄불 대학 경제학 학사 학위도 함께 취소되었다. 터키에서는 학부 학위가 있어야 대선에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적 제거라는 비판이 잇다르고 여기에 에르도안은 성명을 통해 밝히기를 "주요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그들의 언론은 부패 등의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대신 국민들을 속이고 지지층들을 동원해 정치적인 구호를 만드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Ana muhalefetteki Cumhuriyet Halk Partisi ve onun medyası, yolsuzluk gibi sorunlara yanıt vermekten acizdir. Bunun yerine kolay yolu seçiyorlar: Kendi taraftar kitlelerini harekete geçirip, halkı kandırmak için siyasi sloganlar üretiyorlar.)" 며 정적 제거 논란을 일축했다. 정말로 부패가 있었는지에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러한 행위는 "정적 제거"라는 논란과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터키 검찰이 11월 11일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 이스탄불 검찰청은 이날 이스탄불 시청 비리 사건과 관련해 이마모을루 전 시장을 비롯한 402명을 총 142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테러 조직을 만들어 뇌물 수수, 사기, 입찰 조작, 범죄수익 세탁, 개인정보 누설 등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1,600억 리라(약 5조 5,300억 원)의 공공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간첩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마모을루 전 시장이 속한 공화인민당이 불법 자금으로 운영됐다며 정당 해산 검토도 법원에 요청했다. 이에 공화인민당의 외즈귀르 외젤 대표는 이번 기소가 정치적인 야당 탄압의 목적이라며 공화인민당을 저지하고 당 대선 후보를 모함과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 검찰이 이마모을루에게 징역 2,430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에르도안이 이마모을루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에르도안의 종신독재는 이제 막을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던가. "나쁜 놈이 가장 정치를 잘한다" 사진 : 에크렘 이마모을루(Ekrem Imamoğlu) 전 이스탄불 시장, 징역 2,430년 구형, 출처 : TNT, 줌후리예트 터키, 튀르키예,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에르도안, 에르도안 종신독재,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 외즈귀르 외젤, 에르도안의 야당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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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검찰,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에게 징역 2,430년, 사실상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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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 키르기스스탄의 총선은 앞으로 보름 (15일) 정도 남았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법률과 내각 법령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법령에 따라 오후 10시까지 축하 행사와 오락 행사, 카페, 레스토랑, 식당, 나이트클럽의 영업을 마쳐야 한다고 밝히며 이 조치에 따르지 않으면 전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독재국가도 하지 않을 조치를 발표해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는 카페, 레스토랑, 바, 클럽, 연회장 및 기타 시설을 포함한 음식 서비스 시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의 관리자는 의식,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금지한다고 밝혔으며 전기를 소모하는 모든 기기, 에너지 집약적인 기기(전기 스토브, 히터, 오븐 등)는 오후 10시 이후에는 전원을 꺼야 하며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시끄러운 음악, 조명 등 시민의 공공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행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였다. 주거용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전기 발전기를 사용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했다. 비슈케크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역에서 법을 준수하기 위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업소를 급습하는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후 10시 이후 전력 절약 결정에 따라 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출처 : 한인일보) 이런 공지는 키르기스스탄이 전력이 부족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사오는 문제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은 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민성을 갖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일의 색깔혁명이 일어난 곳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재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사드르 자파로프(Садыр Жапаров)가 제3차 색깔혁명으로 인해 2021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서서히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자파로프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에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첫번째 색깔혁명인 튤립폭동 때였다. 이 색깔혁명으로 인해 아스카르 아카예프(Аскар Акаев) 대통령의 반대편에 선 자파로프는 그 해 총선에서 이식쿨 주(州)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에 진출헤 쿠르만베그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를 지지했다. 그러나 제2대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한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를 해산했고 2007년 총선에서는 강제로 야당을 원외정당으로 밀어내 버리는 최악의 헌정유린을 저지른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동생인 자니시베그 바키예프(Жанисибек Бакиев)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헌법을 위반한 족벌 정치였다. 바키예프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그의 족벌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껴 비서실장 직위를 던져 버리고 야권으로 전향한 메데트 사디르쿨로프(Медет Садыркулов)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 또한 야권 의원의 암살을 사주한, 불법행위이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Максим Бакиев)는 2009년 10월에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 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이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일의 미군 기지인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렀는데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대한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바키예프는 미군 기지에 이와 같은 러시아의 압박을 이유로 매우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미군에게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했다. 여기에 나온 차액의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는데 이같은 부패행위는 러시아와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 러시아로써는 중앙아시아의 미군 기지 폐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고, 미국은 자국 군대가 주둔하는 수수료의 너무 비싸 분노했다. 이후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 또한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음 해 4월에는 수도와 전기 요금을 인상함으로써 비슈케크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싱 위가 발생했다. 바키예프는 군경으로 하여금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 발포를 허가했고, 이로 인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다. 이에 야당 아타주르트(Ата-Журт)의 대표 로자 오툰바예바(Роза Отунбаева)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바키예프의 탄핵을 통과시켰는데 바키예프의 충견이었던 자파로프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오툰바예바에 의해 축출되고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파로프는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잘랄아바트 출신인 캄츠베크 타시예프(Камцбек Ташиев)와 함께 남부지방인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오쉬와 잘랄아바트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친(親) 바키예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바키예프의 주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오쉬와 잘랄아바트에서는 바키예프와 현 대통령인 자파로프의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편 비슈케크에서는 로자 오툰바예바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중앙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오툰바예바는 보수적인 전통 유목민 체계의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하게 된 것은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출신이지만 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그녀를 외무부 장관으로 세웠다. 그녀는 거의 숙청당해 별로 없던 개국 대통령인 아카예프파의 남은 정치인 중 하나였고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아카예프파의 고위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바키예프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이유 또한 그녀의 뒷배경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아카예프는 오툰바예바를 미국 대사로 보낸 바 있었고, 그녀는 미국 정가와 자주 만남을 갖고 친교를 쌓다가 영국으로 가서 주영대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조지아 주재 UN 특사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국의 관료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아카예프 산하에 있던 각료둘은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축출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막심 바키예프가 마나스의 미군 기지에 부당한 수수료를 챙긴 것을 폭로하여 비난한 인물이기도 했고, 2차 튤립폭동 당시 바키예프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도운 것도 미국이었다. 이 정도면 이 2차 튤립폭동이라 불리는 색깔혁명의 뒷배경은 미국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제4대 대통령인 로자 오툰바예바는 미국이 중앙아시아에 꽂아 놓은 "트로이 목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슈케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툰바예바 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특히 2010년 5월 13일에는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오시와 잘랄아바트 지역 정부청사와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도 일어났는데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있었다. 바키예프가 축출되었을 때, 러시아와 친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몸을 의탁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루카셴코는 바키예프 세력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민스크의 대통령 궁에 쿠르만베그 바키예프 대통령을 식사에 초대하고 그를 친구처럼 아꼈다. 둘의 나이가 겨우 두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현재까지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이처럼 미국 및 서방세력의 지역 패권 장악 의도는 시민 혁명의 선거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혹은 선거활동을 하는 NGO 단체들을 재정적, 도덕적, 이념적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한다. 제2차 튤립폭동은 그러한 차원의 미국이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일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시위, 2005년 키르기스스탄 제1차 튤립폭동, 2008년 조지아 장미 시위, 2010년 키르기스스탄 제2차 튤립폭동 등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난 색깔혁명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색깔혁명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직접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색깔혁명을 통해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본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강화되어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과거 러시아의 앞마당인 구소련 국가들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될 경우,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 및 서방 세력과 러시아 간의 갈등은 지속된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남부와 비슈케크의 지역 갈등은 이러한 패권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남부는 친러시아 세력이 기득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남부 지방의 혼란은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민족 분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우즈벡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이 면해 있기 때문인데 바키예프 지지세가 강한 키르기스인과 오툰바예바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우즈베크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오툰바예바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내의 비판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툰바예바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제3차 튤립폭동의 도화선이 된다. 2010년 10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이 창당한 아타주르트가 오툰바예바의 사회민주당을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가 된다. 오툰바예바는 아타주르트 및 사업가 출신 오무르벡 바바노프(Омурбек Бабанов)가 이끄는 레스푸블리카당(Республика партия)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였고, 바바노프가 새 총리가 되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오툰바예바는 2011년 같은 사민당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에게 대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키르기스스탄은 역대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 시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대한민국의 광학 판독 개표 장비 및 선거관리 시스템, 즉 전자개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 행위는 여전히 횡행했다. 여기에서 터진 가장 큰 문제는 쿰퇴르(Кумтөр) 광산 문제다. 이식쿨 주 남쪽 천산 산맥에 있는 쿰퇴르 금광은 캐나다 기업이 소유한 금광으로 키르기스스탄 GDP의 12%를 창출하고 있었다. 시르다리야 강의 수원지에 해당하는 빙하 밑에 위치한 쿰퇴르 광산은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이전부터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파로프는 노동자들과 함께 비슈케크에 집결하면서 금광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자파로프가 이끈 시위대는 2012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궁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그는 무력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혐의를 받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카라콜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가 주지사 납치를 시도하자 그는 키르기스스탄 당국에 의해 수배 명단에 걸리게 되었고, 자파로프는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키프로스로 망명했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납치 혐의로 징역 1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 긴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2016년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가 총리가 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같은 당의 젠베코프를 지원했고, 젠베코프가 54.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후 아탐바예프와 젠베코프와 사이가 틀어진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차후로 설명하고자 한다. 2020년 키르기스스탄 총선거 이후 다시 부정 선거 시비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였고, 결국 젠베코프 대통령 역시 사임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들은 자파로프를 비롯해 여러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했다. 이와 같은 모진 키르기스스탄 현대사의 풍파를 겪은 자파로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짙은 상태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2부) -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Алмазбек Атамбаев)와 소론바이 젠베코프(Сооронбай Жээнбеков), 사디르 자파로프 3자 간의 권력투쟁기 - 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3부) -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회 안정화 & 언론 및 사회 탄압의 양면성 사진 : 키르기스스탄 제3차 튤립폭동, 출처 : KATEHON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튤립폭동, 중앙아시아 색깔혁명, 키르기스스탄 현대사, 사디르 자파로프, 오툰바예바, 미국, 러시아, 아카예프, 바키예프, 벨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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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키르기스스탄의 예민한 정국 : '법률 위반에 관한 법(О правонарушениях)'의 강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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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일한 소수민족 문제, 아이누족과 훗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열도까지 포함된 역사 문제
-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사할린·쿠릴열도에 살던 원주민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전통 문화·언어·영토를 상실하고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 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아이누를 ‘구토인’으로 규정하고 관습과 생활을 금지하며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현재 아이누족은 약 3만 명으로 파악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과 낮은 교육률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최근에는 언어 교육, 전통 의례 복원, 문화 보존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며 정체성 회복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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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최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이 나부(NABU)의 대규모 수사로 드러나며 정치적 위기가 커지고 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와 가까운 인물로, 에너지 인프라 발주 과정에서 거액을 챙기고 해외로 도피했다. 러시아 공습으로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황도 악화되는 가운데, 서방의 젤렌스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용도 폐기’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미국·EU의 의중과 맞물린 이번 사건은 젤렌스키 권력의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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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부패스캔들, 불법적인 그의 권력에 고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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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뉘 총리의 불신임안 부결, 가시밭의 프랑스 정국
- 프랑스의 르코르뉘 총리가 취임 27일 만에 전격 사임했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르코르뉘를 다시 총리에 임명했다. 마크롱은 달리 대안이 없는 까닭에 르코르뉘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국가의 의무를 강조했다. 르코르뉘가 사표를 냈던 것은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지지를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자신이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을 현실적으로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 출신인 르코르뉘는 처음에 임명될 때에는 내년도 예산안을 일부 조정하면서 그 정도면 충분히 야당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르코르뉘는 야당과 정치적 타협에 실패했고, 각 정당들이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비판하면서 전격적으로 사임했으며, 마크롱도 이를 수락했다. 문제는 현재 마크롱의 지지율이 형편없고 집권당의 지지율도 낮으며,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선뜻 총리로 나설 인사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마크롱의 선택은 자신의 충복인 르코르뉘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남은 대통령 임기를 채우려고 했다. 당연히 야당은 이에 반발했으며, 총리 불신임안을 좌파 연합 정당인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와 극우 정당인 ‘국민 연합’이 각각 의회에 제출했다. 이 두 불신임안 중 하나라도 과반수(289표)로 통과가 되었더라면, 르코르뉘는 무조건 사임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 불신임안은 좌파 진영에서 제출한 첫 번째 불신임안은 271표가 나왔으며, 극우 정당에서 제출한 두 번째 불신임안은 144표가 나와서 모두 부결되었다. 이에 르코르뉘는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그러면 이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르코르뉘 총리가 연금개혁안을 2027년 대통령 선거까지 보류하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로 사회당을 설득했고, 이에 좌파 연합에서 사회당의 상당수가 표결에 불참하면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던 것이다. 좌파 진영 전체에서 보면 사회당이 그나마 타협의 여지가 있었는데, 사회당이 이번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명분도 사실 있었다. 극좌와 극우의 득세를 막기 위해 비교적 온건파인 사회당 지도부로서는 마크롱이 연금 개혁을 현 정부에서 더 이상 추진만 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당으로서는 두 개의 카드를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가 연금 개혁 보류였고 다른 하나가 부유세 도입이었다. 둘 중 연금개혁안 보류가 르코르뉘와 정치적 타협을 해도 정치적으로 손해가 볼 것이 없고, 부유세 도입의 경우에 다른 야당 세력들과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고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얼마든지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르코르뉘는 마크롱의 최측근이고, 그런 점에서 현재 마크롱을 그나마 보좌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다. 르코르뉘는 지금의 상황에서 마크롱이 다소 양보만 하면 현재 프랑스 정국을 그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이번 총리 불신임안의 부결에서 최대 승리자는 사회당과 르코르뉘라고 하겠다. 사회당은 이후에도 내년도 예산안에서 부유세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나름대로 존재감을 키울 것이다. 르코르뉘는 젊고 활기차면서도 여여소야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적 수완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르코르뉘가 내년도 예산안을 야당과 제대로 협상다운 협상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르코르뉘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더 나아가 르코르뉘가 한갓 관리자로서 역할만을 할지 아니면 차기 정치적 지도자로서 면모를 과시할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프랑스의 지금과 같은 위기는 마크롱의 섣부른 정책 탓이다.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에게 ‘프랑스의 희망’을 주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이젠 ‘프랑스의 절망’을 가져다 주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으로 갈라져서 서로 정권 교체도 있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두 진영 모두를 경험하다 보니, 좌든 우파든 상관 없이 모두 정치적 불신과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마크롱의 중도층 공략은 정치적으로 승리를 주었지만, 마크롱의 실정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를 초래했다. 아직 1년 이상 마크롱의 대통령 임기가 남아 있어서 야당과 시민 그리고 언론은 모두 마크롱의 사임을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크롱은 정치적으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는데, 전 리비아 국가 지도자였던 무하마드 가다피로부터 수백만 유로의 불법 자금 조달을 공모한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 받은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을 엘리제궁에서 만났다는 점이다. 파리 법원은 사르코지가 가다피의 불법 정치 자금을 직접 수수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공모 혐의만으로도 유죄판결은 정당하다. 프랑스 법원이 정치인의 불법 정치 자금에 대해서 최근 상당히 엄격하게 판결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반발도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사르코지의 범죄 혐의는 매우 중대하다. 마크롱은 물론 인간적으로 전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왜 지금 시점에서 굳이 유죄판결을 받은 전임 대통령을 그것도 엘리제궁으로 초청해서 면담 형식으로 만났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마크롱은 사법부의 독립적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점이 묘하다는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르코지의 변호인단이 사르코지가 교도소 밖에서 항소심을 받을 수 있도록 석방 요구서를 법원에 제출한 그날 바로 마크롱이 사르코지를 면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크롱이 대통령의 권한인 사면권 – 프랑스의 경우 사면권 남용에 대한 견제 장치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어렵다 – 을 통해 사르코지를 교도소 밖에서 전자팔찌를 차고 가택연금 상태로 항소심을 받을 수 있게 사전 면담을 한 것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현재 프랑스의 정국을 보면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더 나아가 어느 정당도 과반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처럼 대통령 권한이 상당히 큰 경우 정국이 안정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마크롱의 사임 압력이 거센 것도 결국 마크롱이 예산안을 상정하면서 의회를 건너뛰고 비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는 데에 대한 야당의 반발 때문이다. 물론 현재 프랑스의 상황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각종 위기가 만연하고 있어 이에 합당한 예산안을 추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총선이라는 민심에 역행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마크롱처럼 하기 위해서는 집권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않으면 사실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독일처럼 의원내각제도 아니니까 정당들 사이에 연정 구성도 어렵다. 프랑스가 그래도 나름대로 총선 결과에 따라 좌우 동거 정부도 있었고 좌파와 우파가 번갈아 가면서 정권 교체도 있었지만, 이때는 집권당이 어떤 식으로든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 국정 운영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현재는 의회의 협조 없이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한데, 마크롱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다 보니 어떤 안이든 의회가 찬성하지 않으면 내각은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냉정히 말해 이번에 르코르뉘 총리의 불신임안이 부결된 것도 마크롱 정부가 의회에 굴복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권력의 축이 정부보다는 의회로 서서히 이동하는 것인데, 문제는 프랑스 정치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상당히 예외적이어서 과연 정당 간의 정파 간의 정치적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프랑스 정치판에서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인사가 현재로서는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르코르뉘가 그 시험대에 오른 것인데, 관건은 마크롱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 어느 정도까지 수습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르코르뉘의 불신임안이 부결되었지만,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은 한 단계 더 떨어지면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면 아직 한참 멀어 보인다. 현재로서는 프랑스의 정국도 경제적 위기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이 만연하고 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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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뉘 총리의 불신임안 부결, 가시밭의 프랑스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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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캄보디아, 트럼프가 주선해서 화해시킨다고 양국의 앙금이 풀어질까?
- 캄보디아의 주 민족인 크메르족은 본래 남방 인들이 아니라 북방 티베트인들이 어떠한 현상으로 인하여 남하하였고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의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과 혼혈함으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를 보고 파악한 결과인데 남방의 완전한 검정 피부보다는 북방 인종의 하얀 피부와 혼혈된 피부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크메르 인의 이동은 북쪽에서 동남아시아의 주요 지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물론 이들의 이동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선사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인류학자들은 원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 살고 있었던 많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타이족보다 훨씬 빠른 시기인 3000년 전, B.C 2000년경에 내왕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 티베트계 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테국학계의 학자들은 중국 티베트 지역이 북쪽의 중앙아시아, 사카계 민족들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밀려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 영토 내부에서 오스트로아시아어에 발견되는 어휘나 주요한 강을 따라 이주한 경로를 보면 농경 목적 등으로 침입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크메르인은 운남이나 티베트 서부 지역의 묘족과 관련이 깊은 민족으로 추정된다. 태국의 주 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보통 타이족은 운남성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운남성 지역은 사천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와 상고시대에는 이 지역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촉문명(古蜀文明)이다. 이러한 고촉문명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문화가 삼성퇴 문화이다. 삼성퇴 문화는 5000년~3000년 전의 고촉문화 유적으로 그 원주민이 어느 민족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점차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문명으로 합의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타이족도 아마 강족과 저족의 사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운남성 지역에는 지금도 여러 종족이 있는데 타이족은 베트남 서북 지역의 홍 강에서 다(Đà) 강, 마(Mã) 강을 지나서 람(Lam) 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선조들은 아주 일찍부터 베트남, 특히 북서부 지역에 정착해서 거주해왔다. 백(白) 타이족이 가장 먼저 이주해 왔고, 그 다음에 흑(黑) 타이족이 현재의 거주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이들이 타이족 주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현재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중국 남부에도 거주하고 있다. 타이족은 고대 중국 남방의 백월(百越) 집단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서에 기록된 전월(滇越)은 타이족 선조의 초기 명칭이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탄(撣), 당송(唐宋) 시대의 금치(金齒), 은치(銀齒), 수면(綉面), 망만(茫蠻), 그리고 원, 명, 청 및 민국 시기의 백의(白衣), 북이(僰夷), 파이(擺彛) 및 파이(擺夷) 등은 타이족 형성과 관계가 깊다. 이들 타이족이 내려와 말레이계 민족들이 자리한 오늘날의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타이족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고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하(南下)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여러 추정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밝혀나가고 있다. 태국에는 반 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캄보디아와 태국은 서로 민족 자체가 다르다. 두 민족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치고 나간 민족은 캄보디아인들의 직접적인 선조인 크메르 제국이었다. 790년을 전후해서 세력을 규합한 자야바르만은 주변 영토들을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했으며 수진랍과 육진랍을 통합했다. 이후 분열되어 있던 진랍의 각 세력들을 통합하였으며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게 되는데, 현재의 프놈펜 롤루오스(Loluos) 지역인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로 천도하면서 제국의 기초를 쌓게 된다. 자이바르만은 바탐방 일대에서 발생한 진랍 후예들을 제압하고 802년 바탐방을 함락시킴으로써 진랍 왕조의 통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고 말았다. 같은 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 참파 북쪽 지역인 임읍국(林邑國)의 통일을 완수한 자야바르만 이비스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지역인 마헨드라파르바타(Mahendraparpata)로 이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황제로 선언한다. 이것이 크메르 제국, 다른 말로 앙코르 제국의 시작이다. 크메르 제국은 9세기~15세기까지 존속했고, 그 세력이 강성할 때는 현재의 태국 동북부, 라오스 및 베트남의 일부까지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다. 흔히 캄보디아에 알려진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바로 이 크메르 제국 시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크메르 제국이 한창 강성했을 때는 태국은 당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태국에는 서서히 쇠락하는 크메르 제국의 틈새에서 몬 왕국의 지배 하의 타이계 유통(Uthong) 왕국의 왕자인 라마 티보디(Rama Thibodi)가 전염병을 피해 차오프라야 강 하류 롭부리 지역에 정착해 1350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것이 아유타야 왕국이다. 라마티보디는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골 지역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 하류에 출발한 국가로 수도인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 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섬인 하중도(河中島)에 만들어졌다. 이 일대는 농업 생산력이 높고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기도 쉬웠으며, 당대의 강국 크메르 제국과 보다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400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면서 태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동안 산재 하고 있던 타이족의 소왕국들을 하나의 권력 아래 집중시켜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한 왕조가 되었다. 이 때부터 동남아시아에 타이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자존심은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양국은 숙명과 같은 대립을 꾸준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는 다시 동남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 양쪽으로부터 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 지역의 명칭 유래가 "'시암(태국)이 평정했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근현대 시기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태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캄보디아는 사실상 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태국과 맺을 조약을 필두로 무책임하고 캄보디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영토 분할을 했으며 1907년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영토의 측정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태국 왕실이 이러한 프랑스의 결정적인 오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었고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당시 태국 차크리 왕실은 서쪽 미얀마와 남쪽 말레이 연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동쪽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프랑스 사이에서 자국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태국 또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태국 왕실은 1908년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국 측이 땅에 대한 측량 인식에 대한 부재, 그리고 측량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태국 왕실의 근대적 지식과 사고의 무지, 영토 측정에 대한 관심의 전무가 불러온 재앙덩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프랑스 측의 측량을 승인한 지 무려 26년 만인 1934년에 대해서야 이와 같은 프랑스 측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국 왕실은 발견은 했지만 여전히 측량에 대해 무지했기에 프랑스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왕실은 프랑스가 영원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프랑스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면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크메르족과 타이족이라는 민족성 문제까지 부각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다. 그러한 와중에 지난 27일 트럼프는 태국과 캄보디아 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 본 협정에는 협정에는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국은 초기 휴전이 성립된 이후 포로로 잡은 캄보디아인 18명을 석방할 예정이며 두 국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수개월 전부터 추진해온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분쟁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국경 분쟁의 중심이었던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영유권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본래 분쟁의 해결은 분쟁의 쟁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쟁점은 논의되지 않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와 같은 본질을 비껴간 내용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우선 ①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볼 때, 태국이면 모를까, 과거 호치민 루트 시절에 깔아 놓은 지뢰조차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캄보디아가 분쟁 지역 지뢰 제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② 국경 지역 중화기 철수를 보자면 우선 국경 지역에서는 뺄 수 있겠지만 차후 다시 벌어질 분쟁에서 재등장할 확률이 높다. 앞서 언급한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의 소유권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초국경 범죄 대응 협력 강화, ④ 국경 인근 민간인 이동 및 치안 관리 등 또한 범죄단지와 결탁하고 있는 훈 센 가문이 과연 적극적으로 협력할 지도 의문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문제는 상호간의 역사적 앙금과,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 그리고 영유권 다툼으로 인한 국경 분쟁 등,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태 트럼프는 세계 곳곳의 분쟁을 종식시키겠다며 여기 저기 발을 걸치고 있는데 제대로 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다, 이를 해결할 방안도, 묘책도 없고, 무엇보다 분쟁 자체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쟁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중재에 나선다면 당장은 중재국의 힘이 두려워 화의를 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한계는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작 분쟁의 근원과 원인은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의 힘과 트럼프의 관세가 두려워 표면적으로 악수를 할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관심이 끊기는 순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휴전을 어기고 폭격을 재개한 것처럼 이들 간의 분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겉장식으로 덮으려다 생긴 최악의 인명 손실은 전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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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캄보디아, 트럼프가 주선해서 화해시킨다고 양국의 앙금이 풀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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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르타고의 영웅이자 포에니 전쟁의 상징, 한니발의 연승과 로마의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
- 지중해의 여왕, 지중해 최대의 부자 도시로 불렸던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던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지중해 일대를 탐험한 끝에 이베리아 반도를 발견하여 차지하게 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엄청난 부, 특히 스페인 은광으로부터의 상당한 양의 부를 얻어 서유럽 팽창 정책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한니발이 탄생하고 유년 시기의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가 살아 있을 당시 어린 아들인 한니발을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절대로 로마인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하였으며 한니발은 때가 되면 불과 쇠로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정지하게 할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한니발의 삼촌인 하스드루발은 이후 로마와 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스페인의 북쪽에 있는 에브로 강을 경계로 하고 서로 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도시인 사군툼을 보호령으로 삼자 장성한 한니발은 협정 위반을 구실로 삼아 사군툼을 공격하였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로마는 이에 즉각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단지 로마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B.C 218년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당시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퇴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으며 카르타고 군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하고 예측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비슷한, 카르타고의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강점인 해군력을 앞세우고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에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높고 험한 알프스 산맥 측에는 거의 로마의 수비병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한니발은 보병 5만과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기 시작하였다. 비록 예상을 깨고 기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기로 하였지만 4,000m에 이르는 산이 상당히 높고 험준한 알프스는 고대 시대의 군대에게 있어 쉬운 곳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와 더불어 좁은 도로 옆의 낙석지대, 그리고 외부 인들을 경계하는 갈리아 인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보병 중 1만 2천 명을 잃었고, 기병 역시 4천 명이나 죽은 상태였다. 코끼리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여 거의 다 죽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의 군대라 볼 수 없는 거지와 같은 형태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이 때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는 히스파니아 원주민인 이베리아 인들을 포함하여 갈리아 남부에서 전리품을 약속하고 융합한 갈리아 전사들, 누미디아 출신 기병, 지중해의 바레아레스(Islas Baleares) 군도 출신의 투석병과 카르타고 본토 출신의 소위 아프리카 보병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병진을 닮은 군대로 이루어졌고 이들을 각종혼합 형태의 군대, 혹은 여러 군대가 섞인 잡군(雜軍)이었다. 그러한 군대는 수효만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한니발이 이끌던 군대처럼 여러 족속들이 혼합된 혼성군은 서로 간의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군 자체가 와해 될 수 있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본래 군대에 간 군인들이 같은 병영 안에서 같은 부대 명을 사용하고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같은 목적과 그에 대한 동기부여 및 명분이라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혼성군의 경우는 이러한 연대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군 통솔자가 군 집단에 투여하는 연대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강한 규율로써의 통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동료들과 자신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있다는 의식과 명분은 병사들이 동료를 서로 도와 전투를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당시의 로마군이 그러한 형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땅을 가지면서 로마라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위기에는 로마를 위하여 참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군이었다. 이는 같은 집단, 공동체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과 동질 의식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수호의 이유도 이와 같았던 것이었고 그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열세를 극복하여 승리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러한 부대원 간의 화합만을 놓고 보자면 한니발 군은 로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나라와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조된 잡군들은 대개 전리품을 약속받고 전쟁에 동원되는데, 한니발은 단순히 전리품으로 용병들을 유혹하거나 카르타고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보다는 한니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하였다. 보장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군대의 결속과 자발성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한니발의 군 통솔력은 이후 강력한 로마 육군을 연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한니발을 상대로 육전에서 맞서는 로마 군의 지휘관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로 그는 앞서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니발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건넌 것을 첩보로 듣고 로마는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Masilia)로 나누어 보냈으며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갈 때 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해안가를 상륙하여 올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한니발이 나타나지 않자 다급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가 알프스를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예상을 벗어나 알프스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자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고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 포로들을 통해 스키피오가 이탈리아로 회군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B.C 218년 11월 로마군의 척후병이 우연히 티키누스(Tikinus) 강 근처에서 한니발을 발견했고 마침내 양군은 진지를 편성했다. 다음 날 양군은 전투를 벌였고 이에 먼저 양군의 기병대가 전선의 중앙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자신의 누미디아 기병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전투 후반기에 가담시켜 로마의 경보병을 공략하게 했다. 양 측면에서 누미디아 기병의 가담으로 로마군보병의 전열이 붕괴되었고 자신의 진지로 후퇴했다. 지휘관인 스키피오도 중상을 입고 도주했다. 비록 양쪽 군대 모두 정예 주 전력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이 전투의 승리로 갈리아의 많은 부족을 카르타고의 편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키피오는 동료 집정관인 셈프로니우스(Sempronius)에게 합류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 때 로마군은 한니발의 기병이 막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탈리아 본토에서 처음 벌어진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음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경험했다. 스키피오는 퇴각하여 트레비아 강까지 밀리게 되었고 공동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는 군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의 캠프에 합류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를 추격하다가 군대의 보급을 위해 후방에 남았고 이제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인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보다는 상대하기 편하다 생각하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스키피오는 아직 티키누스 전투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회복하여 다시 지휘권을 가지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기 위해 성급히 군대를 움직였다. 특히 다음 해의 집정관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싶었던 셈프로니우스는 평범한 전투로 생각하고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듣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한니발은 지형을 정찰하고 동생 마고 바르카에게 기병 1,000명과 경 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의 숲속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모든 카르타고 군에게 충분한 식량과 휴식을 주었다. 다음 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을 급습했고 셈프로니우스는 휘하 기병에게 격퇴를 명령했는데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보자마자 성급하게도 모든 보병에게도 추격을 명하였다. 트레비아 강을 건너 카르타고 군을 추격하던 로마군은 중앙에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적진을 돌파하기 위한 진형을 설치했다. 카르타고 군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갈리아 경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 측면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거의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는 것 같았으나 강을 건너 몸이 젖은데다 추위와 허기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고 기병은 강력한 카르타고 기병에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숲속에 매복해있던 마고의 기병과 보병이 나타나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의 선전으로 한니발 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었지만 거의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 속에서 살육 당했다. 살아서 포위를 풀고 도주한 로마 병사는 1만 5천명 정도였다. 한니발의 탁월한 전술의 승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승리로 인하여 그때까지 한니발과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던 많은 갈리아 부족이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계속 한니발 군에 밀리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가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하고 난 후 B.C 217년의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Plaminius)와 세르빌리우스(Serbilius)가 선출되었고 이들은 각각 셈프로니우스와 스키피오의 군단을 승계 받았다. 평민 출신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원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각각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한니발의 예상 공격 경로를 찾아 저지하려고 했다. 한니발 역시 로마군이 예상하지 못한 행군로를 빠르게 행군하여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반기를 들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한니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를 유린하는 것을 보면서 한니발을 추격하였고 세르빌리우스에게 남하하여 합류하자고 요청하였다. 양쪽 집정관은 페루시아에서 한니발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두 군대가 만나게 되면 전력상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만나게 하지 않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Trasimene) 호수에 도착하자 이곳이 매복하기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군대를 매복시키면서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하고 군사를 배치했다. 호반을 남쪽으로 하고 북쪽의 숲속에서 로마군이 진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군은 호수 인근에 도착하여 야영을 한 이후 다음날 아침 안개 속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물론 카르타고 군이 숲속에 매복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안개와 좁은 호수 길을 따라 진군하였다. 이어 한니발 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양쪽의 로마군 행군로를 봉쇄하고 무차별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종의 살육에 가까웠던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호수로 밀렸고 카르타고 군의 칼에 죽거나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6천 명의 전위 부대는 포위를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기병대에게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약 2만 5천 명의 로마 병력 중 살아서 로마로 돌아간 것은 2천 명에 불과했다. 집정관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결국 로마의 완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을 내주었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 집정관에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할 때까지 지연 전술인 파비우스 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히스페니아에 군을 보내 사군툼을 공격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큰 전투인 사군툼 전투에서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나마 사군툼의 중앙부를 맡았던 중군(中軍)만이 근처의 발렌시아 요새로 대피하여 증원 군을 기다렸다. 패전의 소식에 히스페니아 시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아직 15개 이상 군단 10만 병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스 왕국의 의회와 군부는 침착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Favius Maximus)는 이탈리아에서는 전투를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치면서 히스파니아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후일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지연 전술을 그의 이름을 차용해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로마 의회는 새 집정관인 파비우스에게 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주면서 히스파니아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 파비우스는 사군툼에서 승전한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4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히스파니아 북쪽 일대인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방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파비우스의 명을 받아 히스파니아 원정군을 지휘하는 클라우디우스의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병력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과 정면 대결보다는 매복전을 통한 기습을 준비하였다. 아라곤 지방에 있는 사라고사를 지나던 클라우디우스의 군은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군이 근처까지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사라고사의 숲에서 카르타고 군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하스드루발은 급한 마음에 군을 이끌고 아침 안개가 자욱한 숲의 길을 따라 클라우디우스를 추격했다. 마침 소규모의 로마 1개 군단이 하스드루발에 나타났고 카르타고 군의 선봉이 후퇴하는 소규모 로마 군단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하스드루발의 군은 선봉과 중군, 그리고 후미가 나뉘게 되었다. 이 때 클라우디우스는 호수 위의 언덕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병력들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전투 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행군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카르타고 군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4만의 병력 중 반 이상이 로마군에 의해 몰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바르카스 왕국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북부 지역은 로마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고 로마군은 지금의 이베리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로마 해군이 다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 해군을 카르타헤나에서 격퇴하고 지중해로 전달되는 한니발의 보급로를 차단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는 여전히 한니발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 때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최남단 지방으로 진군하여 최근에 로마에 복속된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간간히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파비우스의 방침에 따라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적과 전투를 벌여 이기는 것이 전통인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렵게 전투를 벌여 복속시킨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넘어가는 것은 더욱 인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로마에서 인기가 하락한 파비우스는 집정관 연임에 실패하였고 B.C 216년에 로마 상원은 파비우스 대신 타렌티우스 바로(Tarentius Varro)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한다. 당시 한니발 군의 수는 약 4만에서 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승을 만들어냈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집정관 바로는 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에 부근에서 당일 최고 지휘관이 된 바로와 한니발이 격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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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르타고의 영웅이자 포에니 전쟁의 상징, 한니발의 연승과 로마의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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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특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인다. 동호의 왕은 처음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특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특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는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특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특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여 인산산맥에 자리 잡음으로써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묵특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내가 흉노선우 묵특을 언급한 것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에 관한 독도 문제에 글이 다시 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다. "냉철하게 우산도와 석도의 실체를 살펴야 합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해야 합니다. 그리고선 길게 침묵해야 합니다. 그사이 일본과의 분쟁은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최종 해결은 먼 훗날의 세대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한국은 선진사회로 진보해 갈 것입니다." <반일종족주의>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당시 동호가 구탈의 황무지를 요구해오니 한 신하가 묵특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흉노의 묵특선우의 말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말은 독도가 바위 섬일지라도, 돌 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 해도 독도는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엄연한 우리 국토다. 독도가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엄연히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우리 영토가 맞고 일본이 독도를 노리니 반일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원만한 해결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토인데 무슨 원만한 해결을 바란단 말인가?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에도 침묵하라는 것이 판단력과 자제력에서 선진사회로 진보하는 길인가? 전 세계 어느 선진국이 영토 도발에 침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이런 것이 궤변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다른 보수주의 세력에게 자국 영토 분쟁에 침묵하라는 소리를 하면 그들은 뭐라할까? 보수의 기본은 엄연히 국가(Nation)에 있고 그 기본 이념은 국가주의(Statism) 혹은 Nationalism 에 있다. 이념에 치우쳐 기본을 망각하고 국가(Nation)와 국가주의(Statism)가 안된 보수는 매국 이념에 함몰된 사익 이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좌파가 싫고 친일을 주장해도 국가와 국가 간의 부분에 있어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면 더욱 엄한 잣대가 들어가야 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북한이든 우리의 땅은 묵특선우가 말한 것처럼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라 풀 한 포기도 줄 수 없다고 맞서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우파다. 그것이 아니면 단지 좌파와 맞서기 위해 대척점을 이루는 수준 밖에 안 되는 집단이 된다. 몽골과 카자흐스탄, 터키는 흉노의 묵특선우를 위대한 조상이자 위인으로 가르치는 국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박물관에는 흉노 귀족의 상이 있고 터키의 각 지역마다 묵특선우의 흉상이 있다. 제 아무리 쓸모없는 초원의 황무지라도 절대로 다른 나라에 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해 흉노는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고 전 세계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훈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영웅 아틸라를 탄생하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뭐 느끼는 것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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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독도의 날", 독도는 "반일종족주의"의 상징인가?, 흉노 묵특선우의 국토에 대한 단호한 정의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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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본다면 주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3국을 예로 들고 있고, 광의적으로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로 6국이 포함된다. 예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지리적으로 공유한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핀란드 공국이었고, 언어와 종족도 인도유럽어족인 노르웨이, 스웨덴과 달리 우랄어족으로 나타난다. 11세기 초 스웨덴의 정복 군주인 크누트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 잉글랜드까지 ‘북해제국’으로 묶어 통치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3국 귀족들이 연대하여 칼마르 동맹이라는 연합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동맹은 약 150년 동안 존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국 화폐(Krona)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삼국의 통합을 추구하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은 항상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사들은 늘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다. 약체 노르웨이의 시련이 컸다.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덴마크 국왕의 통치를 받았었으며,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덴마크였기에 1814년 킬(Kiel) 조약으로 인해 노르웨이를 상실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두 독립 왕국이 한 국왕의 통치를 받는 형태를 제국주의 및 식민지와 구분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이라 부른다. 노르웨이는 독자적 헌법과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외교 및 군사권은 스웨덴 국왕에게 양도했던 사실상 준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발생했고 19세기 내내 이는 양국의 앙금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02년 노르웨이 의회는 해외 영사 업무를 양도받기 위해 스웨덴 측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독자적인 법률도 제정했지만 번번히 스웨덴 국왕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연합’ 해산을 결의했고, 덴마크 국왕은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따라서 1905년 8월 13일 투표에서 남성 유권자 중 압도적 다수(368,208표)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의 해체를 원했고, 투표권이 없던 여성들도 서명으로 동조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 양국은 9월 협상을 타결짓게 되었으며 스웨덴 국왕은 10월 26일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왕좌에서 내려오면서 노르웨이는 공식적으로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따라서 올해 10월 26일은 노르웨이 입장에서 볼 때, 독립 120주년이다. 독립 120주년을 맞이한 현재 노르웨이의 상황은 어떨까? 노르웨이는 현재 죽을 맛이다. 한 때 최고의 복지국가였고, 많은 국가들의 복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저출산, 1980년에 1,000명에 불과했던 노르웨이 무슬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해 지금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발칸반도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이어 이라크 난민 등을 수용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깊어져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동쪽과 서쪽으로 분류된다. 서쪽은 잘 살고 안전한 노르웨이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오슬로의 동쪽은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다. 이는 이민자, 대부분 무슬림들과 발칸에서 이민 온 자들이 살고 았다. 2011년 7월 22일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라는 자가 오슬로 시 정부청사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이 테러로 정부청사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어 석유부 건물에도 화재가 발생했으며 7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범인은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당시 노르웨이의 집권여당이었던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난사를 자행했다. 범인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극우 단체 인사였다. 그와 같은 충격에도 노르웨이 어찌 저찌 갈등을 봉합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오슬로의 지하철 동쪽 끝 푸루세트 역에는 1970~80년대에 온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출신 현지인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는 이슬람 모스크도 자리잡고 있다. 학교의 학생 40명 가운데 2명이 노르웨이 출신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어를 몰라 학습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다. 현재 노르웨이는 전체 인구 490만 명 가운데 약 11%인 55만 명이 이민자로 구성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출산 수준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관대한 복지 정책 덕분이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15년이 넘도록 전반적인 출산 수준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명확한 경제 전망의 부재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높은 실업률 때문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는 노르웨이의 저출산을 더욱 심화되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는 1990년대 위기 이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출산 관련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주민들과 혼혈을 권장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이민자들은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여 취직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 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실업률과 취업률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오슬로는 인구의 약 28%가 외국인이다. 절반은 폴란드와 스웨덴 등에서 온 유럽계 백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 인구가 절대다수로 나타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약 3%가 파키스탄과 이라크, 소말리아 등에서 온 무슬림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는 시장 개혁을 통해 석유와 가스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익화하기 시작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터진 이후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천연자원 의존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석유 수출 세계 9위, 천연가스 수출은 세계 3위로 나타나며 이는 1인당 GDP는 90,000불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쓸어담은 자금으로 창안한 국부펀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적립시킨 모델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가 적극 의존하고 있던 북해 유전의 석유와 가스는 가장 고갈 가능성이 높은 자원으로 보고 되고 있다. 영국과 노르웨이 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해 석유 매장량의 절반이 이미 채굴되었고 액체 석유와 천연 가스로 구성된 탄화수소의 혼합물인 브랜드유(Brent oil)는 고갈 직전의 위기에 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60만 배럴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내로 40만 배럴로 생산률이 내려갈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북해 유전의 고갈로 인한 대책은 아직까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약간의 생산률이 줄어들었을지 몰라고 앞으로 미래가 문제다. 노르웨이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9월에 3.6%로 상승했으며, 예상치 및 8월의 3.5%와 비교하여 2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주된 상승 압력은 식품 및 비알코올 음료의 빠른 가격 상승(6.3% 대 5.4%) 및 교통(2.9% 대 2.7%)에서 나왔다. 한편 주택 및 공공요금(6.2% 대 6.3%), 레크리에이션 및 문화(2.5% 대 2.9%), 그리고 음식점 및 호텔(3.2% 대 3.8%)의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었는데 이는 다소 일시적이다. 문제는 앞으로에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될수록 복지로 가는 비용은 절감된다. 2015년 이후 노르웨이의 R&D 투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벤처 창업과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가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득 40% 정도의 높은 세율로 인한 금액이 복지에 투입되는데 이 또한 줄어들면서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마찰로 인해 북극항로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과연 노르웨이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복지모델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을 맞아, 현 노르웨이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해 보았다. 노르웨이의 문제점을 보며 우리의 복지 상태도 어느 정도 점검이 필요하고, 노르웨이와 비슷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것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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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르웨이 독립 120주년, 세계적인 복지 모델 현(現) 노르웨이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점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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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르헨티나 총선 :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 오늘 10월 26일에는 아르헨티나의 총선이 벌어진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2023년 12월에 취임하여 약 2년 동안 강도 높은 구조 조정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대선 기간 동안 각종 폐해를 잘라 버리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유세장에 등장하여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밀레이는 기성 정치권인 "페론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포했다. 이후 밀레이는 취임한 다음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각종 보조금들을 삭감했다. 그리고 공공 일자리들을 축소하는 등 고강도 긴축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밀레이의 경제 개혁은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최대의 문제점으로 나타났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2023년 그가 취임했을 시기보다 훨씬 줄었다. 2024년 4월 289.4%까지 올랐던 물가 상승률은 같은 해 12월 117.8%까지 감소했고, 이는 2025년 8월 기준 34%까지 내려갔다. 2023년 11월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8,200억 원)에 달했던 무역적자도 취임 1년 만인 지난해 2024년 12월에는 흑자로 전환되었을 정도로 호조를 보였다. 이처럼 겉으로 나타난 성과들은 훌륭했지만 속 안에 쌓여있는 내부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빈부격차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겉으로 나타난 경제 수술을 감행한 셈이 되었다.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지 못한 사실상 모래 위에 구축한 성이 되어버린 셈이 된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밀레이의 "전기톱 개혁"이 겉고름만 겨우 짜낸 "전기톱 대학살"이 됐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인플레이션은 어찌저찌 겨우 잡았지만 심각한 경기 침체와 실업률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에 여론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2023년 4분기 밀레이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5.7%였던 실업률은 2025년 2분기를 기준하여 7.6%로 올랐고, 여전히 30%대인 물가 상승률 또한 가계에 부담이 크게 나타났다. 이에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에 따르면 보조금 축소 등의 여파로 인해 대중교통이나 에너지 수급 관련 요금은 300% 이상 급등하면서 오히려 서민들의 불편을 야기했다. 여기에 안정적인 물가에만 집중한 나머지 환율 방어에 외환을 엄청나게 투입하면서 재정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페소화를 절하하는 과정에서 애초부터 부족했던 외환 보유고는 거의 텅 비다시피했다. 게다가 페소화의 약세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줄어들면서 노동집약적 제조업 또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것에만 집착한 밀레이는 경제 성장을 저해시키고 수입을 빨아 들이는 구조로 변모시켰으며 엄청난 외채를 상환하는 것에 필요한 달러 재고 구축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는 2025년 4월 IMF에서 200억 달러를 추가 구제 금융을 받아내는 등 ,여전히 빚에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환율 불안을 막기 위해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여지지 않는다. 경제난으로 인해 전국에서 밀레이 정부에 대한 반발 조짐이 거세지고 있는 상태다. 이는 지난 9월초,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지방 선거에서 밀레이는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는 바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항의성 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좌파 포퓰리즘 성향의 야당 연합에게 패배한 것은 시장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26일에 벌어질 총선에도 밀레이가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 정책 기조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게 되니 2주 만에 페소화 가치가 10% 더 폭락했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은행은 지난 9월 18~20일의 약 3일 간 11억 달러를 투입해 환율을 방어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례적으로 아르헨티나에 전폭적인 지원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밀레이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의 핵심이 초강력 재정 긴축과 엄격한 통화 관리에 있던 만큼 정부가 외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지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밀레이 정부 첫 6개월 동안 이르헨티나 경제부에서 일하다 밀레이 대통령과의 견해차로 인해 사임한 호아킨 코타니(Joaquín Cottani)는 미국이 환율의 변동과 외환보유고 확보 계획 실행, 금리 통제 등을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원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미국의 지원은 정부가 일관된 환율 및 통화 정책을 함께 시행할 경우에만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코타니는 밀레이가 유권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미국과 투자자들에게 희망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한편 스콧 베센트 미국 국무장관은 워싱턴 D.C를 방문한 루이스 카푸토(Luis Caputo) 아르헨티나 경제장관과 4일 동안 회담을 가졌다. 베센트는 SNS에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경제 리더십은 공정한 무역과 미국 투자를 환영하는 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의 순간에 직면해 있고, 이를 신속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총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최종 확정했고, 아르헨티나 페소를 직접 매입했다고 했다. 미국이 상대국의 외환 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IMF 등과 공조하지 않고 페소화를 직접 매입과 같은 일방적인 지원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조치가 발표되자 아르헨티나 국채 가격은 급등했으며 페소화도 0.6% 상승하며 1주일 만에 가장 강한 수준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가 아르헨티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마가(MAGA) 진영과 가까운 밀레이의 우파 정부가 경제 위기로 인해 붕괴될 위험, 가장 가깝게 지방 선거의 패배에 이은 총선에서 패배할 것 같은 불안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베센트는 자신들의 정치 동맹인 밀레이가 10·26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돕고, 밀레이의 패배가 예상된다는 불안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돌리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유례 없는 이번 조치를 두고 세금을 외국 정부 지원에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평소 트럼프와 마가 진영에서 내세우는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기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밀레이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밀레이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유세 지원에 나섰다가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을 뻔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지역에서 밀레이가 유세 차량을 타고 여당의 총선 출마자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던 중 시위대가 던진 돌이 밀레이의 머리 쪽으로 날아 들어온 사건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밀레이와 수행단은 곧바로 다른 차량에 옮겨 탑승한 뒤 현장을 빠져 나갔다. 이와 같은 유세 현장에서 군중들 사이에는 몸싸움도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밀레이 대통령의 여동생이자 비서실장인 카리나 밀레이(Karina Milei)는 2025년 8월 의약품 조달과 관련하여 뇌물수수 의혹에 휩싸이며 국민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다. 밀레이의 친구인 디에고 스파뇰로(Diego Spagnolo) 국립 장애인 청장이 현지 제약회사인 스위소 아르헨티나(Suizo Argentina SA)에 정부와 장애인 공공 의료품 구매 계약을 맺을 경우 계약금의 8%를 뇌물로 요구하는 녹취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중 3%가 카리나의 몫으로 떼어달라는 내용이 있어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밀레이의 여당인 자유당(Libertarian Party)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결국 밀레이는 이번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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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르헨티나 총선 :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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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남미의 마약 카르텔 거점으로 부상한 에콰도르
-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에콰도르는 그 역사적 부침이 매우 심한 국가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은 16세기부터 300여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19세기 이후 유럽의 인구 증가와 농토 부족, 저임금 중노동에 지친 스페인 본토의 빈농, 빈민들이 남미 각지의 식민지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지 귀족이었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빈농들이 자신보다 더 공식 계급이 높다는 점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스페인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남미 식민지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자 누에바 그라나다를 포함한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은 독립을 준비하게 된다.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1783~1830)는 식민지 개척자 및 정복자의 후손인 크리올(Criollo)의 지지를 받아 스페인 군을 축출하고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를 세우고 대통령이 된다.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의 영토를 합친 국가다. 시몬 볼리바르의 사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와 함께 1830년에 분리 독립하였으며 독립 직후에는 플로레스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전과 주변국들인 콜롬비아, 페루와의 전쟁으로 인해 상당수 영토를 잃어버리면서 영토가 현재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플로레스 정부는 키토의 과두지배층을 중심으로한 기득권 집단을 지지계층으로 두고 있었지만 매우 독선적이었고 1845년 쿠데타가 일어나 플로레스 정권은 전복되었다. 이후 정부의 혼란은 약 130년 동안 지속되었고 1972년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기예르모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군부는 토지개혁을 약속하면서 석유개발도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정작 석유로 인한 수입은 늘어나면서도 토지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1979년 민주 정권으로 정권이이양되면서 군부 독재는 막을 내렸다. 민주화 이후의 첫 째 민선 대통령인 하이메 롤도스가 1981년에 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1982년 중남미 외채위기에 에콰도르는 디폴트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엘니뇨까지 겹치며 에콰도르는 다시금 어려움에 봉착했다. 결국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으며 1986년부터 진행된 저유가와 1987년의 대지진, 연간 수십%가량에 달하는 엄청난 고인플레이션과 임금수준의 실질적인 침체 밎 삭감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1988년에 민주좌파당의 로드리고 보르하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정책은 달라지지 않았고 1990년대 초중반와서는 지속적인 경제위기에 어느 정도 면역성이 생기면서 에콰도르의 경제가 지표상으로는 그럭저럭 안정세를 찾아갔지만 대신 빈부격차는 매우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심화되었고 치안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2000년부터는 자국 화폐인 수크레화를 포기하고 그냥 미국 달러를 가져다 쓰게 되면서 이전에 세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도 한자릿수대로 떨어졌고 이후로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대를 넘본적이 한번도 없을정도로 물가가 안정되었다. 이 때부터 에콰도르는 중남미에서 치안은 상대적으로 좋아졌으며 소득수준도 아주 낮지 않기 때문에 은퇴 이민자들이 머물러 살기 좋은 나라 순위권에 자주 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석유값 하락으로 인한 세수감소와 달러화 강세에 따른 수출부진, 2016년 지진의 여파로 인한 재정지출의 급속한 증가로 경기침체로 이어지면서 다시 치안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갱단이 점점 강성해지고 총격전과 살인이 빈발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대선을 불과 10여 일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이자 무소속인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Fernando Villavicencio)가 당일 수도 키토에서 선거 유세 중 총에 맞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피토’라는 별명을 가진 아돌포 마시아스가 이끄는 에콰도르 마약 밀매 카르텔인 ‘로스 초네로스’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BBC는 에콰도르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석유 무역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지난 5년 동안 갱단들의 폭력에 시달렸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일간 '클라린'은 국가의 강력범죄가 마약 밀매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서로 다른 마약 집단 간의 무력 충돌로 사망률과 범죄율이 치솟았다라고 한다. 이 총격 사건을 두고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조만간 대통령 선거를 치를 예정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당일 멕시코 외무부는 소셜 플랫폼에서 "에콰도르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적 행위"를 규탄했고, 페루 외무부 역시 에콰도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폭력 및 위협 행위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표명하고 평화회복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반 두케 전 콜롬비아 대통령은 에콰도르 국민의 편에 굳건히 서겠다고 밝히고 에콰도르 당국에 조속히 사건을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남미 어느 국가든, 이 사건 및 유사사건조차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미 각국의 정상들과 정치권들은 마약 밀매 카르텔과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하 경제 활성화로 인해 서로 공생관계가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마약 카르텔과 뒤를 봐주는 자들은 미국 네오콘들이고 이들 또한 공생관계에 있다. 그러니 제대로된 수사가 될리 있겠는가? 게다가 FBI가 암살 사건 수사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수상한 부분이다. 미국 연방수사국이 자국 범죄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텐데 여긴 미국과 다른 나라다. 후안 사파타 에콰도르 내무부 장관은 FBI 요원들이 이날 자국 경찰 간부들과 회동했고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들과도 곧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6명의 피의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피의자들 모두 콜롬비아 국적이라 하니 이권에 위협을 받을만한 거대 조직의 사주가 있었을 것은 충분히 의심해 볼 만 하다. 현지 경찰은 이들이 범죄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더 거대 세력과 연결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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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남미의 마약 카르텔 거점으로 부상한 에콰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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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이민의 결과로 인해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고, 이들은 현지 아랍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식민 정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 정부와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태인들의 정치 집단 중, 조직화와 이념적 무장이 가장 철저했던 집단은 중부 유럽의 유태인 분트(Bund)이자 각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유태인 조직 등,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들이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시오니즘 또한 본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 나흐만 쉬르킨(Nachman Shurkin), 베르 보로호프(Ber Borohov) 등 시온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같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더불어 베를 카츠넬슨(Berl Katznelson),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골다 메이어(Golda Meir) 등의 많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도자들 또한 평생동안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살았었다.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좌파 시오니스트들의 경우,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아랍과 유태인들의 민족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술한 책과 글들을 보면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가 만들졌던 것처럼 현지 아랍인들과 대립과 반목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 받는 같은 피착취 계급 처지로서 평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믿음 또한 이들이 결코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민족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1871~1914)주의의 낙관적 계몽주의(Optimistic Enlightenment)에 기반해 시오니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마주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취급했다. 특히 20세기 초, 수정 시오니스트들은 사민 정책을 통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각성도 없는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어 이들을 착취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을 학살 및 추방한다 해도 이는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노동 시오니즘은 아랍인 중에 팔레스타인 인들을 유태인의 지류로 정의했고 그들을 공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다른 아랍인은 공생 대상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는 시오니즘 사상의 한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탈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은 현재까지도 다른 아랍인과 더불어 타민족의 이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적인 민족주의 단체들이 마구 등장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이는 대놓고 공존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미개한 민족으로 보는 우파시오니즘 지지자들이 속속 정착하게 되자 이에 대해 아랍인들이 유태인들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반면 아하드 하암(Ahad Ha'am)과 같은 일부 문화 시오니스트들은 유태인과 아랍인의 절대적인 공존을 천명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극도로 존중하여 아랍인들의 인정을 받아야 유태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너 그와 같은 공존론자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주장은 파급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좌파 민족주의적이고 친노동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 우경화되었고 신(新) 보수주의가 세계화 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인 색채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우파-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정착된다. 이는 다른 주류 이데올로기와 비교해도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어진 셈이다. 이와 같은 시오니즘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미국은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6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이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미국에서 시작된 신(新) 보수주의가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쳐 수정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정계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려 하는데 문제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살아 오고 있었다는 것에 있다. 유태인들의 이민 초기에는 유혈 충돌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엘리트들은 영국을 매우 미워하여 영국과 함께 싸워줄 수 있는 유태인들을 환영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오니즘의 근간인 선민의식이 폐해가 어떤건지, 당시 아랍인들은 알지 못했고, 유태인들을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하고 유럽에 팽배해진 반유태주의로 인해 빠르게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랍인을 존중할 필요 없는 미개인 취급하는 수정 시오니스트들의 관점과 맞물려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의 이민은 더욱 가속화 되었는데 유태인들의 수효가 급증하고 팔레스타인 땅 곳곳에 건설되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아랍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토착 아랍인들에게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강요하게 되자 유럽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와 같은 시오니즘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태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과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 Husseini)가 주도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이와 같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수정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영국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식민 당국인 영국의 개입 정도로 소요가 진정되기에는 민족적 감정의 골이 깊어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더더욱 시오니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1948년 UN의 분리독립안에 따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측을 중재한 트럼프는 10일전, 세 번째 평화협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는 양측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휴전 성사 이후에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군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해 병사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스라엘이 보복 공습을 감행해 가자지구 전역에서 최소 45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 공보국은 휴전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을 80회 위반했으며, 팔레스타인인 최소 9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지난 17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휴전 협정 이후 군 철수 경계선(Yellow Line)을 넘은 차량을 폭격해 일가족 11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격 이후, 휴전을 재개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또한 트럼프를 우습게 여기는 모양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정 시오니스트들이 쏘아올린 아랍인과의 반목과 불신, 그리고 아랍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처절한 저항,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으며 이를 이용해 아랍인들을 미개한 2등 시민으로 취급하려는 이스라엘, 이들간의 관계에 있어 명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아무리 평화 협상을 주도한다 해도 상호 반목으로 인한 전쟁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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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토착 아랍인들의 분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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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 서아프리카의 대국 코트디부아르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다. 한 때 1970~80년대는 경제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카카오 생산국이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먼저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 147.3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72년 309.3달러였다가 1979년 1,225.4달러로 7년 만에 4배나 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1,025.9달러로 처음으로 1,000달러를 넘겼을 정도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치고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국가였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장을 짓고 코트디부아르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수출하는 등, 프랑스의 제조업이 코트디부아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석유, 천연가스, 금, 망간, 다이아몬드, 구리, 철광석이 풍부하고 해상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하다. 물론 해저유전이나 가스전은 거의 프랑스가 위탁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러시아가 프랑스에 가스 수출을 중지했어도 프랑스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최근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 대해 영향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를 마지노선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로도 친프랑스 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왔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에 여러 부분에서 개입하고 간섭함으로 인해 프랑스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립했어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00년대 들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국가다. 장기적인 정치 위기의 늪에 빠져 있었던데다 2002년의 민중 봉기에 이어 국토가 분할된 상태로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5년과 2000년의 대통령 선거는 모두 정상적인 조건에서 치러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1999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민중 정권이 완전히 전복되었다. 특히 독립 후, 30여 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는 안정적인 독재에서 다원주의 정치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이 깨지게 된 것은 1987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서부터다.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의 핵심부문을 프랑스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경기 향방에 따라 휘둘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978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석유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세수가 급감하는 바람에 경기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농산물 가격이 높게 유지될 것이라 낙관하면서 농산물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화를 진행하겠다고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외화를 빌리면서까지 투자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이 부채로 되돌아오고 왔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되어가던 도중에 1973년 당시 OPEC의 전략을 차용하여 카카오의 가격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가격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초콜릿 회사들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나가자 외국 기업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단체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 유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각종 지표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으며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으며 농촌에 지급되었던 보조금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보건소에 다녀오려면 돈을 내야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리니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의료 복지를 도입하다 실패하게 되었다. 국영기업 역시 대다수가 민영화 되어 대규모 구조 조정이 실시되었고 결국 외국 회사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한 때 아프리카에서 상위권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독보적으로 기록한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최빈국 수준으로 내려 앉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이 코트디부아르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자 거의 헐값으로 일하다시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 외국인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폭동으로 번졌다. 이 때 많은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자들이기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망자 및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웃 국가인 말리나, 차드, 니제르 등 여러 이웃 국가들에서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일하러 갔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긴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부모를 당시에 잃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코트디부아르의 추락은 건국 이후, 무려 33년 동안 독재를 행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1993)도 해결하지 못했다. 구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앙리 코낭 베디에(Henri Konan Bédié, 1934~2023)가 대통령이 된다. 당시 재무장관이 현 대통령인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였지만 베디에 대통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베디에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친프랑스계파였다. 게다가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코트디부아르 경제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이끌었다. 그러나 베디에의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의존형 정책이었다. 프랑스의 복지를 코트디부아르에 정착시키려 했으며 상당수의 기업들과 공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를 파탄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와타라가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와타라는 프랑스 의존형 경제에서 탈피해, 다변화 하는 경제 체제 및 미국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 경제 침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와타라는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친미파로 분류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에 IMF 근무라면, 네오콘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와타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 와타라는 총리 겸 재무장관이었지만 1995년 12월 9일 알라산 와타라는 총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만큼 장기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통치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기에 북부 지역 무슬림과 이주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외국인을 배격했던 당시의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의 뜻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유지했지만 경제 정책은 여전히 프랑스 의존형을 유지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1999년 12월 24일 투오 포지에(Tuo Fozié)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되었고 로베르 게이(Robert Guéï, 1941~2002)가 대통령이 되었다. 권좌에서 추방된 베디에는 2000년 토고를 통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면서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코트디부아르 헌법재판소에 의해 출마가 금지되었고 결국 대선을 보이콧하게 된다. 그런데 로베르 게이와 로랑 그바그보(Laurent Gbagbo)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이틀 후, 지역별 득표 현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로베르 게이를 추종하는 군인들이 선거 현황 발표를 중단시키고 로베르 게이가 당선자라고 발표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거대한 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이에 3일 동안 민중 봉기가 발생하여 로베르 게이 장군이 추방되고 그바그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추방된 로베르 게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사하라 지대로 들어가 거점으로 삼고 그바그보의 정부군과 게릴라 전을 벌였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장기간 계속되고 결국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영광은 바닥에 쳐박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코트디부아르를 바로 잡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이가 전임 총리였던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다. 그러나 그바그보에 의해 개정된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와타라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에 당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었던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는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2007년에 대통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다. 본래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은 내전으로 인해 2010년까지 미뤄지게 되었고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제3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촉발될 위기에 놓였지만 더 이상의 내전을 바라지 않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와타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행히 와타라가 대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이 때만 해도 코트디부아르는 예전 6~70년대의 영광을 되찾는듯 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을 앞세워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번 해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코트디부아르 집권당(RHDP)에서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고,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 찰스 블레 구데, 기욤 소로 전 총리 등 다른 야당 후보 3명이 출마를 포기했고 야당 지도자 티잔 티엄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대표가 이중 국적 문제로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와타라의 4선 당선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여 진다. 결국 와타라는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부흥을 성공시켰지만 2020년 3선 당시, 헌법의 자의적 억지해석으로 출마해 독재의 기반을 쌓았더니, 이번에도 4선을 통해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으로 여겨 진다. 현재 그의 나이는 83세로 고령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88세까지 권좌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면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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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에 대선을 치르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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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 지난 14일, 세계경제질서와 APEC 발전방안을 주제로, 현대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서론에서부터 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와 APEC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라 했다. 그 이유는 '단극 체제(Unipolarity)'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ity)'로 전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점에 있어 동의한다. APEC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세계의 다극으로 손꼽히는 4극 중, 3극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3극은 미국이 그동안 끌고 갔던 단극처럼 융화되기 힘들다. APEC은 QUAD와 AUKUS, OPEC, EU와 나토, BRICS7, G7, G20이 아니다. QUAD와 AUKUS, 나토는 미국이라는 단극이 주도해 나가지만 APEC은 아시아-테평양에 면해 있는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 끌고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APEC은 중국과 러시아가 침체기 때 미국이 단극으로 끌고 갔지만 이제는 3극이 서로 끌고 가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온전히 APEC이 단극의 편을 들고 가기 어렵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영향권에 있고, 제1, 2, 3 도련선 내애는 중국의 편을 들지, 미국의 편을 들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이, 다극의 세계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APEC 소속 국가들의 입장 또한 국익과 필요에 따라서 다극에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곧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리멸렬 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다극화 시대에 과거 냉전처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제한된 질서(Bounded Order)가 생겨난다고 했다. 보통 강대국들이 언제나 그렇듯 질서와 거기에 편성된 룰을 만들어 나간다. 미어샤이머 교수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룰에 속해 있어야 한다. 결국 한국은 선택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어샤이머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다. 미국, 중국, 러시아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전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어샤이머 교수 또한 최소 이 점은 동의하고 있다. 다만 미어샤이머와 교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선택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고, 나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선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중요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다. 중국, 북한, 러시아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에는 매우 멀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국과 절대적으로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을 이용해 이 세 나라를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중국, 북한, 러시아가 초긴장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핵이 들어온다면 이 국가들이 가장 예민한 상태가 되어 상호간의 즉각 공조를 통해 압박할 것이 뻔하다. 미국은 이러한 긴장상태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미군과 미국의 자산들을 최대한 보호 및 축적할 수 있고, 최후방 기지로 일본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한국을 소모시켜가면서 미국의 동북아시아 내 영향력의 최전선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양을 발판으로 최대한 최전선을 구축할 수 있기에 한국은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을 발판으로 일본에 미군을 위협하거나 동북아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해에서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남한을 쥐고 있으면 북한을 고립시켜 속국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면 북한, 러시아, 미국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대만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는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그 세가 함께 약화된다. 그래서 내가 중국이 동남아시아를 중국화시켜서 장악에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이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시키거나 영유화 시키고, 영향권 하에 놓게 된다면 미국은 속절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이 독립국가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북극항로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 한국은 미국을 일본에 묶어 둘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다. 게다가 동해를 내해화 할 수 있게 되니 일본은 동해가 아닌 태평양으로 진출로를 자연히 바꿀 수 밖에 없게 되고, 북한 또한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전력이 일본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늘 말했듯, 이는 미국이라는 거대 강국 때문이다. 다극 세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면 러-중 관계는 경쟁관계로 변화된다. 역대 역사적으로, 인류의 특성과 국가라는 집단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필연적이다. 이 때 서로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다극 강대국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시키면 북극항로의 항행이 매우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권은 세계 3극의 헤게모니의 장이 될 우리 국토의 지정학적인 강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한 현실적인 부분으로 볼 때는 미야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맞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냉혹한 강대국" 3개국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 비전도 명확히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빈 니블릿 소장의 얘기는 그냥 미국과 밀착 동맹하여 모든 기간 산업들을 그냥 미국에 바치라는 그런 얘기들이라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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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릿 소장의 토론에서 필자가 내놓은 제3의 제언
